무령대왕 치세에 일어난 일들 중에 많은 부분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왜의 제26대 왕인 계체천황 대에 집중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무령대왕은 계체천황의 즉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계체천황과 무령왕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당시 백제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안일 수밖에 없다.

   

무령대왕 즉위 당시인 501년에

왜는 499년에 즉위한 제25대 武烈천황이 학정을 일삼고 있었다.

 

그는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라 그 태를 보고,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서 산마를 캐게 하였으며,

머리털을 뽑고 그 사람을 나무 위에 올라가게 한 뒤에

나무 밑둥치를 베어 나무 위의 사람이 떨어져 죽도록 하기도 했다.

 

수문에 사람을 집어넣고 수문을 열어 물살에 흘러나오는 사람을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고,

나무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활을 쏘아죽이고, 여자를 발가벗겨 판자 위에 앉히고,

말을 끌고 앞으로 가서 교접을 시키고,

여자의 음부를 보고 정액을 흘린 자는 죽이고, 흘리지 않는 자는 관노로 삼는 등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매일같이 창기들을 불러놓고 음란한 짓거리를 하거나

나체 춤을 추게 하는 등 변태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주색에 빠져 지내기까지 했다.

   

501년 11월에는 백제 출신 왕족 <의다>랑이 죽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학정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무령대왕은 <의다>랑이 죽은 뒤에 한동안 왜와 통교를 끊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는 <의다>랑의 죽음이 무열천황에 의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무령왕이 다시 사신을 보낸 것은 504년 10월이었다.

 

이 때 사신으로 간 사람은 <마나麻那>인데,

그를 군(君)이라고 칭한 것으로 봐서 부여씨 성을 쓰는 왕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마나麻那>는 백제 국왕의 골족이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즉, <마나麻那>는 왕족이긴 하나 무령왕의 직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무령왕과 계체천황의 관계는 <마나>를 파견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계체천황은 생시에 <남대적男大迹(470-531)>천황으로 불리었는데,

<남대적>은 계체천황의 속명이었다.

 

즉, 무령왕이 생시에 속명을 딴 <사마>왕으로 불리었듯이

계체천황도 <남대적>천황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무열천황의 극악한 행위가 지속되고 있을 때,

왜국 내부에서는 반정의 움직임이 있었고, <남대적>이 바로 그 핵심 인물이었다.

 

504년 10월에 무령대왕이 <마나>군을 사신으로 왜에 보낸 것은

<남대적>과 연계하여 무열천황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무열대왕이 <남대적>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전(隅田)신사에서 발굴된 인물 화상경의 명문에 잘 나타나 있다.

 

둥근 모양의 이 동경 가운데엔 9인의 인물 화상이 주조되어 있고,

그 둘레로 48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癸未年 八月日十 大王年 南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麻念長壽 遣開中費直檅人今州利

二人等 取白上同二百杆 作此竟

 

계미년(503년, 무령왕 3년) 8월 10일 대왕년,

남제왕이 의자사가궁에 머물 때,

<사마>가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開中) <비직費直>, 예인(檅人)<금주리今州利> 등

2인을 보내 좋은 백동 2백 간을 모아 이 거울을 만들었다.

 

이 명문에서 남제왕은 <남대적>을 일컫는다.

 

503년은 무령대왕이 왜에 <마나>군을 보내기 전이었고,

<남대적>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무령대왕은 이미 <남대적>을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무령왕이 <남대적>을 왕이라고 호칭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이미 <남대적>을 왜의 왕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고,

둘째는 비록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남대적>은 작호로서 왕을 칭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상황으로 봐서 두 번째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

   

<남대적>은 응신천황의 5세손인 언주인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아버지의 봉작을 그대로 계승하여 왕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백제도 동성대왕 시절에 신하들에게 도한왕, 아착왕 등의 왕칭을 내린 선례가 있고,

일본서기에서도 천황이 아닌 사람에게

왜언왕, 향반왕, 인웅왕 등의 호칭을 사용한 예들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령대왕이 스스로를 일컬어 대왕이라고 칭한 것을 보면,

<남대적>에 대한 왕칭은 봉작이 분명하다.

 

무령대왕은 <남대적> 같은 봉작왕에게는 당연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야 옳다.

 

<남대적>이 의자사가궁에 머물 때라는 단서도

당시 <남대적>이 천황궁에 거하던 신분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동경(銅鏡)의 대왕년(大王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본 측 학자들은 이 대왕은 무열천황을 지칭한다고 보고,

한국 측 학자들은 무령대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장 흐름상 무령대왕을 지칭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무령대왕은 왜 <남대적>에게 동경을 보냈을까?

 

동경은 예로부터 천황의 상징이요, 신물이었다.

 

때문에 무령왕이 <남대적>에게 왕의 상징인 동경을 만들어 보냈다는 것은

학정을 일삼는 무열천황을 제거하고 천황의 자리에 오르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504년에 <마나>를 왜에 보낸 것은 무령대왕이 무열천황을 제거하고

<남대적>을 천황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의중을 행동으로 옮긴 조치였다.

   

<마나>가 왜에 사신으로 갔을 때,

무열천황은 백제가 몇 년 동안 통교를 끊은 일을 놓고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령대왕은 505년 4월에

자신의 아들 <사아斯我>를 다시 왜에 파견했다.

 

무령대왕은 아들을 파견할 정도로 왜의 정치적 상황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왜의 정국은 한치 앞을 대다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런 상황이었는데도,

무령대왕이 아들을 파견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안전 장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때는 <남대적>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조정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기에

무열천황도 감히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남대적>의 세력 확대엔

왜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제 도래인들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무령대왕이 <마나>를 파견하여 <남대적<을 지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백제 출신 신하들은 <남대적>을 지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무령대왕의 아들 <사아>군까지 가세하자,

<남대적>의 힘은 한층 더 강해졌을 것이다.

   

무열천황은 이듬해 12월에 죽는데, 아마도 <남대적>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사아>군의 가세가 <남대적>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말하자면 <남대적>은 백제 세력을 기반으로 무열천황을 제거했던 것이다.

   

무열천황이 죽자, 왜 조정의 장관 격인 대반대련 <금촌>은 조정 중신들과 의논하여

중애천황의 후손 왜언왕(倭彦王)을 천황에 앉히려 했지만,

왜언왕은 살해될까 염려스러워 은신해버렸다.

 

아마도 <남대적>을 의식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일본서기는 무령대왕의 아들 <사아>군은 왜로 건너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법사>군이고 이가 곧 왜군(倭君)의 시조라고 했으며,

응신천황 대에 17현을 이끌고 건너간 <아지阿知>는

왜한직(倭漢直)의 선조라고 쓰고 있다.

 

이들의 작호에 근거해볼 때 작호에 왜(倭)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사람들은

백제에서 도래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금촌>과 대신들이 천황에 앉히려 한 왜언왕은 백제 계통의 인물일 것이다.

   

왜언왕이 숨어버리자, <금촌> 등은 결국 <남대적>을 천황으로 받들어 앉히게 된다.

 

천황에 오른 <남대적>은 <수백향手白香> 황녀를 황후로 삼는데,

이는 정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수백향>이 황후가 되기 전에 이미 <남대적>에겐 몇 명의 아들이 있었다.

 

즉, 본부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인을 황후로 책봉하지 못하고 <수백향>을 맞아들여 황후로 삼고,

오히려 원래의 부인과 후실들을 후궁으로 삼아 <수백향>의 명령을 받도록 했다.

 

이는 <수백향>이 <남대적>을 천황에 앉히는 데 큰 역할을 한 세력 출신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남대적>을 천황에 앉히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세력은 누구인가?

 

그것은 당연히 백제 세력이었다.

 

그런데 <수백향>은 황후에 책봉되기 진에 황녀의 신분이었다.

 

당시 백제인 중에 황녀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무령대왕의 딸뿐이다.

  

일본서기는 중요한 황후들에 대해서,

특히 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천황의 황후나 천황의 모후에 대해서는

그 혈통을 대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수백향>의 혈통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더구나 <수백향>은 제29대 흠명(欽明)천황의 모후다.

 

따라서 <수백향>의 혈통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 편자들이

고의로 누락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왜 일본서기 편자들은 <수백향>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도 수록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수백향>이 무령대왕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대적>은 무령왕의 사촌동생이며 사위였던 것이다.

 

이 <남대적>이 507년에 천황으로 즉위하니 그가 계체천황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