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도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 등장한 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 클럽인 '붉은악마응원단'은

전쟁의 神으로 여기고 있는 치우천왕의 모습을 심볼로 하였다.

 

황선홍 선수가 머리에 흐르는 피를 붕대로 감고 투혼을 불사르는 모습에

외국 선수들은 마치 붉은 악마의 환상을  보는 듯 하였으리라.

 

세계 최초의 전쟁인 탁록(涿鹿)전쟁은  BC2690년경에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 간에

무려 10여년 간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치우천황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어 전쟁의 神으로 받들어졌다.

 

우리의 古記는 위서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자

 

관자(管子)는 ‘치우가 노산(盧山)에서 금을 얻어 5가지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고 하였다.  - 사마천의 《사기史記》

 

구려(九黎)국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九黎之君號曰蚩尤 - 《書經》

 

치우는 고대의 천자이다. 蚩尤古天子 - 《書經》

 

孔子三朝記曰蚩尤庶人之貧者諸候相侵伐蚩尤最爲暴則蚩尤非爲天子也 -『書傳』

 

공자는 삼조기(三朝記)에 가로되 치우는 서인(庶人)이며 빈곤하였는지라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침벌함에 치우가 가장 사나웠으니 천자(天子)가 아니다.

 

제나라 관자 가로되

치우는 廬山의 金이라 (위대하다는 뜻) 五兵을 일으켰으니 분명 庶人은 아니다.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소란해지고 황제는 드디어 치우의 형상을 만들어

통치에 앞세우니 천하가 두려워하고 치우가 죽지 않았다 하여

팔방 만방이 복종하였다.

공안국이 가로되 九黎 즉 천하가 인군이라 하였다. -『三朝記大載記』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인문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은

“치우가 제후(諸侯)인 헌원을 벌(伐)했다.”고 명쾌하게 써놓았다.

 

그리고 『주서(周書)』, 『열자(列子)』, 『시자(尸子)』, 『신서(新書)』,

『태일산어람(太一産御覽)』,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귀장(歸藏)』,

『제왕세기(帝王世紀)』, 『춘추석례(春秋釋例)』, 『고금주(古今注)』 등에 나타난

선진시대(先秦時代)의 기록들도 모두

“황제(黃帝), 염제(炎帝), 치우(蚩尤)가 탁록(涿鹿)에서 서로 전쟁을 한 후

이곳에서 동맹(同盟)을 맺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치우천황이 중화족을 대표한 헌원의 항복을 받고

그에게 배달한국의 황제(黃帝) 벼슬을 내려주어 회유한 것을

중국측에서는 동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이 기록들이 아마도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홀로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위에 열거한 모든 책들과는 확연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사마천은 어떤 근거로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겨놓은 것일까?

 

만약 사마천이 역사를 꾸미지 않았다면

분명히 저본(底本)으로 사용한 또 다른 역사서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야기한 주범은 누구였을까?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며 참고한 것은 공자(孔子)의 『상서(尙書)』였다.

 

동이족(東夷族) 은(殷)나라 출신인 공자(孔子)는 『상서(尙書)』에서 돌연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역으로 쓰며 중국인들에게 아첨하였고,

이를 후세의 사마천이 공자의 곡필을 기쁘게 받아 적었던 것이다.

 

조선인들이 그토록 존경하였던 공자는 한발 더 나아가

큰활(大弓)을 뜻하는 ‘이(夷)’자의 본뜻을 왜곡시켜

본래의 글자와는 아무 연관도 없이 제멋대로

‘오랑캐나 도적’을 뜻하는 글로 풀이하여 놓았다.

 

그러면 공자 자신도 분명히 동이족 출신이었으면서 무슨 이유로 동이족을 폄하하고,

또 치우천황의 위대한 전승기록(戰勝記錄)을 뒤집어 놓았을까?

 

아마도 그 자신이 중국인의 조정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한평생 노력했던 사실로 보아 본래의 출신성분을 감추고

중국인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문제의 『상서』는 과연 어떤 책이었을까?

 

『상서(尙書)』는 약 4000년 전

하(夏)나라, 은(殷)나라의 왕실(王室) 비사(秘史)를 모은 책이다.

 

고대부터 내려오던 이 중요한 왕실 기록들의 일부를

공자가 100편으로 추려서 묶었는데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대부분의 경서가 불타 없어졌다가

한(漢)나라 때 이르러 유학자 복생(伏生)이 다시 29편으로 재편집하여 놓았다.

 

문제는 공자와 복생이라는 두 유학자에 의하여

유교적인 입맛에 맞도록 상당 부분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본래 『서(書)』라고만 불렸는데

‘고대의 기록’이라는 뜻이 더하여 『상서』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후 유교인(儒敎人)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서경』이라고도 불렀다.

 

그동안 세상은 공자와 복생의 의도대로 책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 왔다.

 

그러나 1899년에 이르러 무려 350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던 갑골문이 발견되었고

또 1천여자의 난해한 금문이 해득됨으로써 비로소 베일 속에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은(殷)나라의 실존 모습이 드러났다.

 

고대의 중국 땅이 바로 동이족의 놀이터였음이 밝혀지게 되면서

공자와 복생의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그동안 사마천의 『사기(史記)』만을 중국의 정사(正史)로 인정한

수많은 중국의 학자들이 치우천황의 역사적 사실을 모조리 전설로 돌리고

황제의 최종 승리만을 역사적인 사실인 양 정리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남겨진 중국측 사서들은

존화사상에 찌들은 한국의 유학자들에게 정론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기존의 강단 사학자들로 하여금

『사기(史記)』 기록과 정반대의 역사를 기록한 우리 역사서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을 모조리 위서(僞書)로 몰아붙이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범죄란 없다.

 

제 아무리 『상서(尙書)』가 진실을 왜곡시켜 놓았다 해도

옛 기록들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기록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에 서로 모순되는 기록을 예로 들어보자.

 

『사기』의 「봉선서(封禪書)」에,

“진(秦)나라 때 동방 8신께 제사를 지냈는데 그중 ‘병(兵)’의 신(神)은 치우였다.”

라고 하였다.

 

또 「고조본기(高祖本紀)」에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系)은 패정(沛庭)의 관아에서

치우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후

산 제물을 희생시키고 그 제물을 잡아 피를 북(鼓)과 군기(軍旗)에 바른 후

전군이 붉은 기를 들고 출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치우는 병(兵)의 신(神)으로 추앙되었고,

중국인들에게 한족(漢族)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탄생시킨 유방은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해달라고 치우천황에게 빌었다는 것이다.

 

결국 패장(敗將)이 ‘병의 신(軍神)’이 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상식과

천하통일의 꿈을 안고 출정하는 장군이 승자였다는 황제를 배제하고

패장이었다는 치우에게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는 간단한 내용만으로도

치우가 결코 패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금문(金文) 중에는 황제(黃帝)를 왕으로 표현한 상형문자(象形文字)가 없다.

 

황제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그가 사실상 배달국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믿겨지지 않는 이 사실을 우회적으로 기록하여 놓은 문헌이 있다.

 

『용어하도(龍魚河圖)』에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졌다.

이에 황제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보내어 천하의 위엄을 떨치니

팔방만방이 모두 복종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은 죽은 치우가 산 황제보다 더 두렵다는 것이니

아무리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이라도 이런 황당한 기록을 사실로 믿을 수는 없다.

 

이상의 기록을 좀더 합리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성립된다.

 

① 치우가 없는 상태에서 황제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중이다.

 

② 중국의 각 부족들이 중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원의 연합군에 능동적으로 합류하였으나

헌원은 약속한 승리 대신 치우에게 항복하고

치우의 제후로 황제의 벼슬을 받았으니 실질적으로 치우의 식민지 총독인 셈이었다.

 

③ 불만이 쌓인 부족들이 각처에서 헌원에게 도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④ 반란의 기세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황제는 치우천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천황이 반란군들을 직접 징벌하겠다는 칙령(치우의 화상)을 내리자

황제가 이 뜻을 만방에 보내어 천하를 복종시켰다.

 

이상과 같은 상황은 치우가 죽고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므로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는 기록이 거짓임이 거듭 증명된다.

 

왕권을 빼앗긴 신농(神農)계는 무려 7년의 준비 끝에

‘가우리의 난(九黎의 亂)’을 일으키며 대반격을 전개하여

제2대 소호금천(少昊金天, 재위 7년간)의 왕권을 다시 빼앗아

신농의 손자인 전욱고양(顓頊高陽)으로

제3대 왕위(재위 47년간, BC 2467~2421년)를 잇게 한다.

 

전욱고양(顓頊 高陽)의 아버지는

신농과 임사씨(姙巳氏)의 아들 희화(羲和 : 복희, 대화, 주, 직)이고,

어머니는 고모 뉘조와 황제 사이의 딸 상아(펡娥)이다.

 

패권싸움에 지친 신농은 정치일선에서 은퇴하여

호남지방으로 내려가 옛날처럼 약초를 연구하며 조용한 노년생활을 보낸다.

 

이때 황제 역시 권력싸움의 무상을 느끼고 정비 뉘조를 데리고

지금의 호남성에 있는 남악 형산(衡山)으로 신농을 찾아온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 신농의 모습을 본 뉘조는 몸져누운 후 숨을 거두어

형산 남록인 산비탈에 묻혔는데 그곳을 뇌조봉(雷祖峰,嫘祖峰)이라 한다.

 

당시 황제가 쉬어 갔던 바위를 황제암이라 한다.

 

이 내용은 『상형계고(湘衡稽古)』에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치우에서 夏殷으로 이어지는 치적도 사기에서 끊어 버리고

堯傳을 시작으로 요순 우탕 문무 주공에 이르는 중국의 정통사를 기록하니

태고사를 알 수 없다.

 

공자가 堯傳 이상의 역사를 끊는 것에 대하여 당시 사가들의 비난이 있어

상고 기록이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끊어 버린 것은 부당하다는 항의에 대하여

공자는 ‘역사를 뺀 것은 그 기록을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간단히 회피하였다.

 

치우에 관한 기록은 이러한 단편적 기록뿐

치우에서 단군으로 이어지는 태고 역사는 영원히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치우는 탁록에 접근하여 기마정병 3천을 선봉 삼아

비호같이 헌원의 방위 벽을 분쇄하고

닥치는 대로 섬멸하니 헌원은 일진을 패하고 중군을 수습하여 치우와 대전할 새

미처 진용을 차릴 여가도 없이 치우군이 좌충우돌하며 맹공격을 가하니

헌원의 전군이 지리멸렬하여 반격할 능력을 잃고

헌원은 수하 수백 기를 이끌고 멀리 달아났다.

치우는 일지군을 이끌고 적군을 추격하여도 간 곳을 찾을 수가 없어 돌아왔다.

 

치우천왕은 양도를 염려하여 오래 머무르지 아니하고

전군에 회군 명령을 내려 청구로 반사하니 각 군이 모두 합류하여 동반하였다.

한편 헌원은 치우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탁녹으로 돌아와 패전의 뒷수습을 한 후

각지 추장들로 하여금 집결할 수 있도록 전쟁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대비하니 그 위세를 회복하였다.

치우천왕은 헌원이 탁녹에 돌아와서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는 간자의 첩보를 받고

다시 출사 준비를 하였다.

 

이번에는 기필코 헌원을 멸할 각오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삼군을 호령하여 탁녹으로 진격할 새

치우천왕은 짐승의 가죽으로 전포를 만들어 입고

동으로 단조한 갑옷과 투구를 쓰고 대궁을 메고 오구 장도를 휘두르니

연도 관문의 수비군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도주하니

이르는 곳마다 적군의 방어진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탁녹을 우회하여 멀리 요로에 매복하여 헌원의 퇴로를 차단하고

강갈과 대요에게도 각기 일지군을 보내여 공격을 가하고

탁녹을 총공격할 계책을 짜고 있는데

치우천왕의 아우 한 장수가 일지군을 이끌고 공격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전공을 세우고자 돌진하였다가 헌원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전사하였다.

 

이 사건을 가지고 후세 한나라 사가 중에서 누군가가

헌원이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산해경에 추기하였다.

 

그리고 동화를 꾸며 치우가 풍우를 불러일으켜 공격함으로

헌원이 비를 그치게 하는 여신을 불러 풍우를 그치게 하고 잡아 죽였다 하였다.

 

치우천왕은 항상 전쟁 선두에서 용맹하게 싸워 공을 세우는 동생을 잃고

진중에 눈물을 참고 총공격에 들어갔다.

 

양군이 고각을 울리며 백병전이 벌어져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치우는 선두에서 대노를 휘둘러 닥치는 곳에는 적의 머리가 추풍낙엽같이 떨어지니

적이 두려워 쳐다보지 못하고 흩어지니 질풍같이 헌원의 본진으로 돌진하니

만군 지중에 탁월한 무예와 용맹을 당할 자 없는지라

헌원은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전세가 기우니 본거지를 버리고

패잔군을 재촉하여 대요에게 의지코자 찾아갔으나

대요 또한 패하여 치우에게 항복하였고 다시 창힐에게로 가니

그도 이미 항복하였는지라 소호는 포위되어 있고 하여

또 다시 멀리 달아나려고 가다가 복병이 난데없이 돌출하여 잡히고 말았다.

 

이리하여 탁록이 함몰하니 탁록명임에는

시체가 산과 같이 쌓이고 피 흘려 강이 되었다.

 

후세 사가 관중은 이 광경을 '所課天下之君項敗一怒伏屍編野是也'라 비유하였다.

 

한나라시대 사마천이 말하기를

 

'역대의 제후들이 치우가 능히 헌원을 정벌하는 천하 영웅을 흠모하였다.

 

또 말하기를 치우의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던 옛날에 천자로 불렀다.'고 하였다. 

 

 

치우천왕은 평생소원이 중원에 만백성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군악을 진정하고

고대 신시와 같은 이상 사회를 이루고자 헌신하였다.

 

그는 일찍이 천리를 깨닫고 천기를 살피고 環宇의 신비를 규명한 신인이라 하여

후세에 다만 천제의 아들이 이 세상에 났다 하였다.

 

후세에 남긴 병법으로는

치우이편, 탱리병법 일편, 천일병법 삼십오편, 천일음도 이십사편권이 있다.

 

이것은 후일에 중원의 춘추 전국 시절 강태공의 통치 군사지침서가 되고

오나라 부차왕을 도와 강한 월나라를 정복한 손자병법의 기초 자료가 되고

후한의 유비를 도와 천하를 삼분한

제갈량의 팔진법이 모두 여기서 전수된 것이라 한다.

 

 

치우천왕은 고대 조선 중원에서 무위와 지용과 인덕이 세상을 덮어

중원 풍패 지방에는 치우천왕의 사당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산동성 편현 서안에 있는 구성의 서북 물가에 있다고 하였다.

 

시인 소동파가 이곳을 지나다가 쓴 기행문에

고대의 퇴락한 사당을 보고 감개무량하여 읊은 시에

 

'오랜 세월 퇴락한 환웅 사당은 새들이 만나고 머무르는 집일새'

라 하였고

 

춘추좌전에 이 사당의 신주는 동해 사람으로 나랏말이 같지 아니한데

그러나 같이 살았다고 하였다.

 

후세에 이곳에 살던 동족은 난리를 피하여 요동으로 피하였거나

그 나라 사람으로 동화하였으니 누가 보존하고 제사하랴!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단지 황제와 치우가 탁녹에서 싸웠다'라고 했을 뿐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아니하였다.

 

 

 

우리의 古記인 태백일사를 살펴보자.

 

또 몇 세를 지나 자오지(慈烏支) 환웅에 이르렀다.

 

이 분은 신령한 용맹이 더없이 뛰어나시고,

머리와 이마를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보호 하셨다.

 

능히 짇은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채광 기계}를 만들어 채광하시고

철을 녹여 무기를 만드시고 또 비석박격기를 만드셨다.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이분을 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蚩尤)라 하였다. 

 

대저 치우라는 말은 속언으로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말이다.

 

치우천황께서 신농(神農)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시고 드디어 웅도를 품고

서방에서 자주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수(淮水)와 태산(太山)사이를 점령하셨다.

 

헌원이 등극하자 곧바로 탁록의 광야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후에 오(吳)장군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 땅을 쳐서 전공을 세우게 하셨다.

<태백일사 神市本紀>

 

 

치우천황께서 서쪽으로 탁예(涿芮){산서성의 탁록(涿鹿)예성(芮城)}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垈){회수(淮水)와 태산(太山)를 평정하여

산을 헤치고 길을 내시니 그 영토가 만리였다.

<태백일사 三韓管境本紀>

 

 

아래 대청광여도의 解州에 芮城과 安邑이 보인다.

 

 

 

 

<탁록과 치우성은 산서성 해주에 있다.>

 

치우가 황제 헌원(軒轅)과 전투를 한 곳은

현 하북성 북부의 탁록(涿鹿)이라고 우리는 알고있다.

 

현재지명을 고대의 그것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이지만,
하북성이 아니라 산서성 운성현(運城縣) 해진(解鎭)이라는 주장이 있다.

산서성 남단인 해주(解州)의 염지(鹽池)를 중심으로 한 일대가

치우와 헌원이 전투를 벌린 지역임을 주장하는 아래의 근거 자료는

지나 웹에서 발췌한 것이다.


해진(解鎭)은 고대에 해량(解梁)이라고 불리웠었는데 해현지(解縣:解州誌)에는 

"原解梁亦稱涿鹿" 이라는 기록이 있고,

안읍현지(安邑縣誌)에는 "他是安邑"蚩尤村"(今改爲從善村)人" 이라는 기록이 있다.

안읍(安邑)에 치우촌이 있었는데 개명된 이름은 종선촌(從善村)이라 한다.
 
당나라  시인 왕한(王翰)이 지은 解州<鹽池曉望>의 시(詩) 중에는
"涿鹿城頭分曙色,素池如練迥無塵"
이라는 귀절이 있어 탁록(涿鹿)이 해주에 있고 탁록성도 있음을 말한다.

 

<河東鹽法備覽、鹽池門勝跡>이라는 소금과 염지관련 고서에는
"軒轅氏誅蚩尤于涿鹿之野,血入池化鹵,今池南有蚩尤城,相傳是其喪處"
라는 기록이 있어 해주,안읍 지역에 위치한 염지가 전투지이고

염지의 남쪽에 치우성(蚩尤城)이 있음도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 羅必이 지은 <路史>에는
"黃帝與蚩尤轉戰到中冀,才活捉了蚩尤,並立即就地處死,故殺蚩尤處稱做"解"
라 기술하고 있다.

산서성 남부는 고대의 기주(冀州)지역인데 기주의 중심인 "解" 즉,

해주(解州)에서 치우가 죽었음을 뜻한다.

 

<路史>에는 일설, 헌원의 성(姓)이 "公孫"이라는 기록도 있다.

 

송나라 문인 宋沈括의 <夢溪筆談>에는
"解州鹽池的滷水呈紅色,俗話稱위"蚩尤血"
라 하여  해주의 염지는 붉어서 간수가 들어간 듯 한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치우의 피"라 한다고 적고 있다.

 

<孔子三朝記>에는
"黃帝殺之(蚩尤)于中冀,蚩尤股體身首異處,而其血化爲鹵,則解之鹽池也"
라 하여 절단되어 죽은 치우의 피가 간수처럼 변하여

해주의 염지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雲笈七簽、軒轅本紀>의 
 "黃帝殺蚩尤于"黎山之丘",其實"黎山"正是中條山的別名,距解鎭十五里,它是黃帝殺蚩尤于"解"的又一證據"
라는 기록은, 치우가 죽은 곳을  "여산(黎山)언덕"이라 하는데 

여산은 중조산(中條山)의 다른 이름으로
해진(解鎭)에서 십오리에 있어, 치우가 해주에서 죽은 하나의 증거가 된다.

 

중조산은 백이숙제의 묘(墓)가 있는 수양산(首陽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그 고봉은 "탕산(湯山)"이다.

 
이상 대략으로 산서성 해주(解州:今運城縣) 일대를 치우가 헌원과 전투를 벌리다

죽음을 당한  지역임을 주장하는 근거 자료를 살펴보았다.


 

탁록전투가 하북성 북부에서 일어 난 것과

산서성 남단에서 일어 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북성 북부에서의 사건이라면 현재의 북경을 중심으로한 하북성 북부일대,

홍산지역 까지 모두 헌원의 강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산서성 남단에서의 사건이라면 태행산맥 이동지역은

모두 치우의 강역이었다는 재야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역판도는 치우 이전이나 이후시대의 우리역사를 풀어 가는데도

수월한 길잡이가 될 수가 있다.

 

현재 우리 사학의 입장에서 치우시대를 논하고 연구 한다는 것이

힘겨운 일이긴 하지만, "동이족수령" 이라고 치우를 말하면서도

헌원과 함께 중화민족의 위대한 선조로 만들어 가고 있는

저들의 행태를 봐야 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아래 이미지는 대명일통지(1461)의 산서성 평양부(平陽府) 편과  

산서통지(1682) 해주(解州) 안읍현(安邑縣)의 고적편,

산서시집요의 안읍현편에서 발견한 치우성(蚩尤城) 기록들로

위에 소개한 근거들과 상통한다.

 

 

  <대명일통지(1461)의 치우성(蚩尤城)>

 

 

 <산서통지1682)의  치우성(蚩尤城)>

 

 

 <산서지집요(1780) 안읍현편의  치우성(蚩尤城)> 

 

 

 <대청광여도(1785)> 

 

 

 

  <우리가 알고 있는 하북성의 탁록>

 

 

 

 

비록 기록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지만 치우(蚩尤)가 桓國의 天子였다는 것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치우와 헌원의 탁록전쟁>

 

 

<요순우 건국도>

 

 

 

- 三皇五帝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일반적으로 복희(伏羲),신농(),황제() 삼황

소호(전욱(제곡((()을 오제라고 한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한국의 학계에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를

모두 전설시대의 이야기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이유로는 중국의 정사(正史)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삼황시대를 전설시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3년, 호남성 마왕퇴(馬王堆)의 제3호분에서

『황제사경』이 출토되면서 그동안의 황제 기록이

전설이 아닌 엄연한 역사 시대의 기록임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이다.

 

만약 황제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면

황제가 싸웠던 우리의 치우천황 역시 사실이 아닐 수 없고

동시대에 같은 역학관계에 있던 염제 신농 역시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히 기술해놓았던 우리의 『한단고기』 등의 기록 역시

당연히 진실임이 입증된 것이며 한민족사 발전에 장애가 되어 왔던

『한단고기』의 위서(僞書) 시비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황제사경』을 검토했던 중국학자들은

무려 7000~8000년 전의 인류 문명수준에 비교하여

겨우 5000년 전의 사건들을 전설로 취급해왔던

그동안의 학술적인 연구태도를 스스로 반성하고

『국어』, 『좌전』의 기록들이 틀렸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마왕퇴의 1호묘에서 출토된 ‘T’자형 백화도는 3장의 견직물을 합쳐서 만들었는데

가운데 몸통 부분은 이음새 없이 짜여 있다.

 

옷의 상단 부분은 천상의 풍경으로 해(日)와 달(月), 촉용(燭龍)

그리고 천상의 문신(門神)이다.

 

하단 부분은 제후(諸侯)의 도장(印)인 교룡(交龍)과 제사(祭祀)를 모시는 문양이 있다.

 

이 옷의 제작년도가 이미 2500년을 넘었고,

또 실크의 제작기술이 무려 5000년 전으로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치우천황의 시대를 원시시대로만 보려는 시각은 바뀌어야 한다.

 

사마천은 상고금문과 갑골문을 해독할 수 없었으니

삼황오제시대를 전설의 시대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치우와 황제헌원, 염제 신농은 동 시대의 인물이며

전설이 아닌 BC 2600년대에 실존한 엄연한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 중국의 묘족은 치우의 후손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삼위산은 삼묘족(三苗族)의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회남자(淮南子)』에는

“묘족은 머리채를 삼끈으로 묶는 상투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 상투를 트는 민족은 우리와 삼묘족 뿐이므로

삼묘족의 터전은 치우천황 당시 우리 한민족의 영역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는 묘족 인구는 약 600만 명으로

그중 약 500만이 중국 내에 살고 있다.

 

중국 사천민족출판사의 『묘족사(苗族史)』에

“묘족의 원조(遠祖)는 치우”라고 하면서

선조의 노래 ‘상보상랑가(相菩相娘歌)’의 내용을

전설, 풍속, 관습 등으로 나누어 연구한 결과

이들의 선조가 치우 가우리[蚩尤九黎]족이 틀림없다고 썼다.

 

묘족(苗族)의 묘(苗)는 우리말의 ‘움’으로, 곧 ‘움족’이 된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치우천황을 그들의 원시조로 모시고 있다.

 

『산해경』 「대황북경(山海經大荒北經)」에

“흑수(흑룡강)의 북쪽에 묘민족이 있다(黑水之北有人苗民也)……

초기 묘민들의 지역은 겨울이 혹독하게 추워서 반지하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라고 기록하여 읽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 이유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묘민(苗民)들이 주로 살고 있는 지역은

모두 중국 양자강의 상하지역인데,

이곳의 날씨는 결코 ‘겨울이 혹독하게 추운’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묘민들은 흑수변(黑水邊)에 살다가 치우천황의 소개작전(疏開作戰)에 의하여

남쪽으로 내려 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묘족간사(苗族簡史)』에는

“약 5000년 전 장강(長江) 중하류와 황하(黃河) 하류에 묘족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묘족은 치우의 후손이다.

 

이들은 삼묘(三苗)족의 일부로서 후일 요(堯), 순(舜), 우(禹)를 거치면서

거듭 침략을 당하고 그중 일부는 형만(荊蠻)으로 발전하여 초(楚)나라를 세웠으며

나머지는 산간으로 들어가 묘족(苗族), 요족(猺族), 여족(黎族)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모두 훈족, 몽골족, 선비족으로 융화되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 STB 특집 치우천황 그는 살아있다

 

 

 

 

 

- 치우 현도씨

 

 

 

죽서기년과 일주서를 통해 치우천황의 씨족명을 밝히고 있음.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제요도당씨,

제순유우씨처럼,우리에게 붉은 악마로 잘 알려진 치우천황께서도 씨족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도씨라는 것.

 

치우현도씨

 

왜 씨족명을 현도라고 했을까?

 

현묘지도의 현玄은 한민족의 핵심사상 선仙의 요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의 지도자를 선백이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 고대사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