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1766년 하(夏)의 걸(桀)왕을 몰아내고 탕이 상을 건국하였다.

BC1402년 국호를 은(殷)으로 바꾸었다.

 

殷나라는 「詩經」의 "玄鳥生商"

즉 "검은 새가 商나라를 탄생시켰디"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고대 九夷의 하나인 鳥夷의 후예가 분명하다.

 

중국의 고대사회에서 우리나라의 고구려, 부여는

동북방의 東夷인 東北夷로 인정되었고,

고구려의 삼족오와 백제의 금동향로에 새겨진 봉황새는

우리 민족이 또한 새를 토템으로 한 鳥夷민족이었음을 말해준다.

 

우리 밝달민족은 殷과는 맥을 같이하는 鳥夷의 후예인 것이다.

 

이 鳥夷가 중원 황하문명의 모태인 동북방 홍산문화를 창조한 다음

그 한갈래는 남쪽으로 내려가 중원에서 商(殷)을 세웠다.

 

 

商之興也 自東北來 商之亡也 向東北去

商爲中國信史之第一章 亦卽爲東北史之第一葉

<東北史綱>

 

商나라의 일어남은 동북으로부터 왔고

商나라는 멸망하자 동북을 향해 떠나갔다.

商나라는 중국역사의 제 1장이 되고 또한 곧 동북역사의 첫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부사년傅斯年>은 東北史綱에서

동북에서 출발한 商나라를 역사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동북방에서 출발하여 박(亳)에 도읍한 商나라는

민족을 따져보면 맥족, 즉 밝달족으로 우리와는 동족간이다.

 

밝달족이 발해의 모퉁이 동북방 요서에 세운 첫 국가가 고조선이고

이들이 나중에 중원에 진출하여 건립한 나라가 商나라이다.

 

 

- 중원을 통일한 상나라는 발해문명의 후예

 

은나라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제곡>{황제의 증손자라 함}의 둘째부인이다.

<간적> 자매가 목욕을 하러 가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했다. 그가 <설>이다.

<사기 은본기>

 

사기에 나오는 은(殷)은 본래 상(商)나라이다.

최근 중국학계와 정부는 ‘夏商周 단대(斷代) 공정’에 따라 상나라의 연대를 확정했다.

즉 BC 1600년에 성탕(成湯)이라는 영웅이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BC 1300년에 은으로 천도한 뒤

BC 1046년 주(紂)임금 때 주(周) 무왕에 의해 멸망했다.

 

 

 

<자천을子天乙> 湯왕이 夏의 桀왕 <사리계姒履癸>를 쫓아내고

商을 건국한 해는 BC 1766년이고  

<자반경子盤庚>이 殷邑으로 천도하여 殷으로 국호를 바꾼것은 BC 1402년이고

殷이 멸망한 것은 紂왕 <자신子辛>34년 BC 1122년이다.

중국인은 고조선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夏商周의 정확한 건국년도를 모르는 것이다.

 

 

-  상나라는 폭군의 나라인가?

 

상(은)나라는 왠지 ‘폭군의 나라’ 혹은 ‘망국의 한(恨)’을 연상시키기 십상이다.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난행이 너무도 생생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桀)과 함께 ‘걸주’라는 이름으로 폭군의 상징이 됐다.

 

요망한 애첩 <달기>의 비위를 맞추려 술로 연못을 만들고,

숲에 고기를 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를 뛰어놀게 한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

기름을 바른 구리기둥을 숯불 위에 걸어놓고 죄인을 걷게 하고는

떨어져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깔깔댔다는 포락지형(烙之刑).

 

신하이자 서형(庶兄)인 <비간比干>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자

“성인의 심장엔 구멍이 일곱 개가 뚫렸다는데 한번 보자” 면서

심장을 해부한 만행의 줄거리는 지금도 뭇사람들을 진저리치게 한다.

 

제후들을 죽여 포(脯)를 떠서 소금에 절인 뒤

다른 제후에게 보내 맛을 보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그것으로 충성도를 시험했다니….

 

충신인 기자(箕子)가 망국 후에 황폐해진 도읍지(인쉬·殷墟)를 지나다가 지었다는

맥수지가(麥秀之歌)는 지금도 망국의 슬픔을 상징한다.

 

“(파괴된 궁실 자리에 곡식 자란 모습을 보며) 보리는 잘 자랐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파릇하구나.

개구쟁이 어린애(주왕)야! 나하고는 사이좋게 지냈더라면….”

 

맥수지가는 여전히 유학계나 한문학계에서 최고의 산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 천하 쟁탈전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

 

왕조교체 후 전대의 마지막 왕을 망나니로 만들어 버리는 예는

하나라 걸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상나라의 폄훼는 더 심한 편이다.

 

주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후대의 사가들이

지어낸 과장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상나라의 실체를 알면 더욱 확실해진다.

 

하·상·주의 왕조교체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다.

 

지금의 개념대로라면 동이족이 한족(漢族)과 처절한 중원쟁탈전을 벌인 끝에

하나라를 무찌르고 650년 가까이 천하를 통일했다.

 

그것이 바로 상나라이다.

 

그런 상나라를 다시 중원의 종족(한족·漢族)이 몰아내고 주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줄곧 한족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상나라는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갑골문자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으며,

동양의 예제를 확립했잖아요.” (이형구 선문대 교수)

 

우리는 한때 천하를 풍미했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남겼지만,

망국의 한을 품으며 홀연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이 상나라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를 쏙 빼닮은….

 

우선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대로 상나라의 역사를 일별해보자.

 

 

- 천하를 통일한 동이

 

상나라 시조인 <설契>은 요순시절에 <우禹>의 치수를 도운 덕에

상(商)이라는 곳에 봉지를 받았다.

 

그래서 상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겼다.

 

<상토相土>{설로부터 3대}는 마차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해외’에까지 넓혔다.

 

그리고 <왕해王亥>{7대}는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부락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다.

 

훗날 <왕해>는 유역(有易)이라는 마을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는다.

 

<왕해>의 아우 <왕항王恒>은 유역족을 대패시키고 그 족속의 재물을 빼앗았다.

 

세력을 넓혀간 상은 훗날 성탕이라는 영웅을 만난다.

 

<탕>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요리사 출신인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등용,

국세를 떨친다.

 

이 무렵 하왕조는 걸 임금의 학정 때문에 멸망 기에 접어든다.

 

천하의 인심을 얻은 성탕은 도읍을 박(毫)으로 옮긴 뒤 드디어 11차례의 접전 끝에

하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때가 BC 1766년이다.

 

그 뒤에도 역마살이 끼였는지 하왕조 멸망 뒤에도 다섯 차례나 도읍을 옮겼는데,

<반경盤庚>이 BC 1402년 은으로 천도한 뒤에야 완전히 정착했다.

 

商은 殷 천도 이후에도

12명의 왕이 280년 동안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우다가 멸망한다.

 

마지막 왕인 주왕은 나중엔 폭군이 되고 여성의 치맛 폭에 싸여 천하를 그르쳤지만

“처음엔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기 은본기>

 

이 대목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이 떠오르게 한다.

 

“656년, (의자)왕은 궁녀와 함께 주색에 빠지고 즐기기만 했다.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간언하자 화가 난 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인지,

아니면 ‘승자의 전리품’이라는 역사의 기록이 되풀이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 발해문명의 후계자

 

BC 6000년부터 잉태한 발해문명의 후계자였던 상나라의 문명은 대단했다.

 

중국학계는 상나라가 중원 하나라(BC 2205~BC 1767년)의 일개 소국이었고,

차츰 세력을 넓힌 뒤 성탕 때(BC 1766년)에 하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랬을까.

 

우선 도성의 규모를 보자.

 

도성은 국가의 중심이자 왕조의 위세를 나타내주는 상징이다.

 

그런데 상나라는 멸망 때까지 10차례가 넘는 천도가 있었으나,

흩어져 있는 도성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다.

 

모든 상나라 도성이 판축기법으로 쌓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으로 보면

기원 후 1세기 때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풍납토성과 매우 비슷하다”

고 말했다.

 

먼저 성탕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 허난성(河南省) 옌스(언사·偃師) 상성의 궁전 터는

그 규모가 19㎢에 달했다.

 

성탕은 夏를 멸한 뒤 다시 허난성 정저우(정주·鄭州)에 도읍했는데

(중정·仲丁 시기에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25㎢였다.

 

정저우 상성의 경우 궁전 내부에서는

100기 정도의 인골이 묻힌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순장제도 혹은 사람을 제사에 바친 증거로 보인다.

 

외성에서는 중·소형 무덤이 100여기 확인됐다.

 

이 무덤에서는 력(격·솥의 일종), 작(爵·술잔), 분(盆·물과 술 담는 동이),

규(제사에 쓰이는 세발달린 가마솥), 언(시루), 존(尊·술그릇) 등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노예들이 거주하면서

수공업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이는 상나라 시기에 노예제가 확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또한 인쉬(은허·殷墟)유적의 발견은

뭇사람들의 시상을 자극할만한 한편의 대서사시 같다.

 

1899년 가을. 심한 학질에 걸린 <왕이룽王毅榮>{국자감 좨주}은 의사에 처방에 따라

‘용골(龍骨)’이란 약재를 구입했다.

 

그런데 그는 약재에 뭔가 전서(箋書)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금석학자인 그는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이것은 훗날 갑골문으로 확인되었다.

 

이 갑골이 허난성 안양센(安陽縣)의 샤오둔춘(小屯村)에서

집중 출토된 것을 파악한 중국학계는 1928년부터 본격 발굴에 들어갔다.

 

15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2만4794점의 갑골이 발굴되었다.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인 한자의 원형, 즉 갑골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인쉬는 BC 1402년부터 BC 1122년 주왕이 분신 자살할 때까지

상나라의 도읍지였으며, 280년간 이른바 은나라 시대를 이끈 곳이다.

 

망국의 한이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녹아있는 바로 그 인쉬….

 

이곳에서는 갑골문자뿐 아니라 궁전 터와 종묘유적,

그리고 왕과 귀족의 무덤 떼가 고스란히 확인되었다.

 

이른바 인쉬에서는 100㎏이 넘는 청동기를 주조하던 주형(鑄型)이 확인되는 등

크고 정교한 청동기와 옥기가 대량으로 쏟아졌다.

 

발굴성과가 중국역사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전설상의 나라로 여겨진 상나라의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갑골문이 해독되면서 상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가

‘소설’이 아니라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 수수께끼의 열쇠

 

“이로써 상나라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지.

상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나서거나 큰일을 치를 때는 그 길흉을 점쳤다는 것과,

신과 인간을 소통시키는 신권과 왕권의 복합왕국이었다는 것까지….” (이형구 교수)

 

특히 ‘발해산’ 청동기로 무장한 상 왕조는

청동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하나라를 압도했다.

 

짐승문양, 도철(괴수)문양 등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청동예기는 물론,

다양한 형태와 쓰임새가 자랑인 다양한 생활용기도 상왕조의 문화를 살찌웠다.

 

그렇다면 상나라 문화와 동이족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상나라는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BC 5000년)-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

샤자뎬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고조선의 문화로 여겨짐)의

찬란한 발해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BC 1766년 무렵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하여 중원 하나라를 쓸어버린 뒤

천하를 통일한 나라가 상나라였다.

 

그러면 중국학계는 이 상나라와 상나라 문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 상(商)을 건국했다면 발해연안엔 어떤 나라가 존재했을까.

 

그리고 상나라가 망한 뒤 발해연안에 건국되었다는 기자조선의 실체는 무엇일까.

 

또한 상나라 문화를 쏙 빼닮은 부여국의 존재는 무엇이며,

중국인들은 동이의 역사 가운데 왜 유독 부여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서술할까.

 

이것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 보따리다.

 

〈 선양·뉴허량 |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

 

※ 商의 건국년도 등 일부 수정하였음

 

 

 

 

 

 

- 殷本紀

 

은(殷)의 (시조인)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유융씨(有娀氏) 부족의 딸이며 제곡의 둘째 부인이었다.

간적 등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삼켜 임신해 설을 낳았다.

설은 장성해 우의 치수사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순이 설에게 “백관이 화친하지 않고 오품이 화목하지 못하니,

그대가 사도를 맡아서 오교를 정중히 전파하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감화시켜주시오”라고 명했다.

순은 설에게 상(商)을 봉지로 내리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하사했다.

설은 요, 순, 우 시기에 일어나 백성들을 위해 공적을 드러냄으로써

백성들이 평안해졌다.

 

설이 죽자 그의 아들 소명(昭明)이 즉위했다.

소명이 죽자 아들 상토(相土)가 즉위했다. 상토가 죽자 아들 창약(昌若)이 즉위했고,

창약이 죽자 아들 조어(曹圉)가 즉위했으며, 조어가 죽자 아들 명(冥)이 즉위했다.

명이 죽자 아들 진(振)이 즉위했고, 진이 죽자 아들 미(微)가 즉위했다.

미가 죽자 아들 보정(報丁)이 즉위했다. 보정이 죽자 아들 보을(報乙)이 즉위했고,

보을이 죽자 아들 보병(報丙)이 즉위했다. 보병이 죽자 아들 주임(主壬)이 즉위했다.

주임이 죽자 아들 주계(主癸)가 즉위했고, 주계가 죽자 아들 천을(天乙)이 즉위했는데,

이가 성탕(成湯)이다.

 

성탕 때, 설에서 성탕에 이르기까지 여덟 번 천도했다.

탕은 처음에 박(亳)에 거처했는데, 선왕을 따라서 그 옛 땅에 거주한 것이다.

「제고(帝誥)」를 지었다.

 

탕이 제후들을 정벌했는데,

갈(葛)의 수령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지 않아 그를 가장 먼저 정벌했다.

탕은 “내가 전에 말했듯이, 맑은 물을 바라보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백성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소”라 했다.

이윤(伊尹)이

“현명하십니다! 남의 훌륭한 말을 귀담아 듣고 따른다면 도덕이 발전할 것입니다.

군주가 백성을 자식처럼 여긴다면 훌륭한 인물들이 모두 왕궁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힘쓰십시오, 힘쓰십시오”라 했다.

탕이 갈백(葛伯)에게

“그대가 천명을 공손히 받들어 제사 지내지 않는다면 큰 벌을 내릴 것이며,

사면은 없을 것이오”라 했다.

「탕정(湯政)」을 지었다.

 

 

<이윤>은 이름을 아형(阿衡)이라 했다.

아형이 <탕>을 만나고자 했으나 통로가 없자

유신씨(有莘氏)의 혼수품인 잉신(媵臣)이 되어 솥과 도마를 메고 <탕>에게 가서

음식의 맛으로 유세해 왕도를 실행하게 했다.

 

혹자는 “<이윤>은 처사였는데, <탕>이 사람을 시켜서 그를 맞아들이고자 했으나,

다섯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탕>에게 가서 그의 신하가 되어

소왕(素王, 무관의 제왕)과 구주(九主, 아홉가지 유형의 군주)에 대해 이야기했다”

라고 말한다.

 

<탕>은 <이윤>을 등용해 국정을 맡겼다.

 

이윤은 탕을 떠나서 하나라로 들어가서 하나라가 이미 부패했음을 목격하고

다시 박(亳)으로 돌아왔다.

 

북문으로 입성하다가 여구(女鳩)와 여방(女房)을 만나고는

「여구」와 「여방」을 지었다.

 

<이윤>은 흘달(屹達)단제(BC1782-BC1722 재위)를 보좌한 <유위자>의 제자로

商을 건국한 湯을 보좌하였다.

 

<탕>이 교외로 나갔다가 사방에 그물을 치고

“천하의 모든 것이 모두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라고 축원하는 사람을 만났다.

 

탕은 “허! 한꺼번에 다 잡으려고 하다니”라고 하며,

세 면의 그물을 거두게 하고는 “왼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왼쪽으로 가게 하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만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라고 축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탕의 덕이 지극하시구나! 그 덕이 금수에까지 이르렀으니”라 했다.

 

당시 하걸이 포악한 정치를 일삼으며 음탕한 일에 빠져 지내자

제후국인 곤오씨(昆吾氏)가 반란을 일으켰다.

 

탕이 곧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인솔하니 <이윤>도 함께 따라 나섰다.

탕은 큰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하고 내친 김에 걸까지 정벌하고자 했다.

 

탕은 이렇게 선포했다.

 

“자, 여러분! 와서 모두 내 말을 들으시오.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감히 난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하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오. 여러분이 나를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소.

하씨가 죄를 지었으니 나는 상제의 뜻이 두려워서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지금 하가 죄를 많이 저질러 하늘이 그를 벌하라고 명하신 것이오!

 

지금 여러분 가운데는

‘우리 군주가 우리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 농사를 그만두고 전쟁에 참여하게 했다’

라고 말하거나,

 

혹 ‘(하왕이) 죄를 지었다는데 무슨 죄를 지었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하왕은 많은 사람의 힘을 다 빼앗고,

나라의 재물을 약탈해 백성들이 나태해지고 서로 화목하지 않게 만들었소.

 

‘저 태양은 언제나 지려는고? 나 차라리 너와 함께 사라지리라’라 말하게 되었소.

하의 덕이 이와 같으니, 지금 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오.

 

내가 하늘의 징벌을 대신하게 도와준다면, 여러분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오.

여러분은 내 말을 믿으시오. 짐은 석언하지 않소.

만일 여러분이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가족을 데려다가 죽이거나 노비로 삼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탕이 이 말을 영사(令師)에게 알려서 「탕서(湯誓)」를 짓게 했다.

 

이때 탕이 “나는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라고 했기에, 그를 무왕(武王)이라고 불렀다.

 

 

걸왕이 유융(有娀)의 허(虛)에서 패해 명조로 달아나자 하의 군대는 지리멸렬해졌다.

 

탕이 삼종을 정벌해 많은 보물들을 획득하자

탕의 신하인 의백(義伯)과 중백(仲伯)이 「보전(寶典)」 편을 지었다.

 

탕이 하를 정벌한 다음 하의 사당을 옮기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하사(夏社)」 편을 지었다.

 

<이윤>이 바른 정치를 공포하자 제후들이 모두 복종했고,

<탕>이 마침내 천자의 지위에 올라 전국을 평정했다.

 

 

탕왕이 박으로 돌아가는 길에 태권도(太卷陶)에 이르자 중뢰가 고명(誥命)을 지었다.

탕은 하의 정령을 없애고 박으로 돌아와서 아래의 「탕고(湯誥)」를 지었다.

 

3월에 왕이 동쪽 교외에 나가서 여러 제후들에게

 ‘백성을 위해 공로를 세우지 못하거나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내 그대들을 징벌할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라고 경고했다.

 

왕이 ‘옛날 하우와 고요는 오랫동안 밖에서 일하며

백성에게 많은 공을 세워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이들은 동쪽 장강, 북쪽 제수, 서쪽 황하, 남쪽 회수 등

네 강물이 잘 흐르도록 다스리어 만민이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후직이 씨를 뿌리는 방법을 전해주어 농민들이 백곡을 경작하게 되었다.

이들 삼공은 모두 백성을 위한 일에 공로를 세웠기에

그들의 후대가 모두 나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 치우와 그의 대부들이 난을 일으켰으나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았던 선례가 있소.

선왕들의 말씀을 따르는 데 힘써야만 하오’라 했다.

왕이 또 ‘바른 길을 행하지 않으면 그대들의 나라가 존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그때 가서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이윤이 「함유일덕(咸有一德)」을 지었고, 고단(咎單)은 「명거(明居)」를 지었다.

 

탕이 달력을 바꾸고, 복장의 색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했으며 조회를 낮에 열었다.

 

탕이 세상을 떴으나 태자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죽어서

태정의 동생인 외병(外丙)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외병 임금이다.

 

외병 임금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외병제의 동생 중임(中壬)이 즉위해 중임 임금이 되었으며,

중임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세상을 뜨자 이윤은 태정의 아들 태갑(太甲)을 즉위시켰다.

태갑은 성탕(成湯)의 직계 장손으로 태갑 임금이 되었다.

 

태갑 임금 원년에 이윤은 「이훈(伊訓)」, 「사명(肆命)」, 「조후(徂后)」를 지었다.

 

태갑제가 즉위한 지 3년,

정치를 못하고 포악해져 탕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쫓았다.

3년 동안 이윤이 섭정하면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갑이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하게 돌아서자

이윤은 태갑을 맞아들여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태갑이 덕을 수양하니 제후들이 모두 은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

 

이에 이윤이 태갑 임금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태갑훈(太甲訓)」 3편을 지었고,

태갑 임금을 기리어 태종(太宗)이라고 불렀다.

 

태종이 세상을 뜨자 아들 옥정(沃丁)이 즉위했다.

 

옥정 임금 때 이윤이 세상을 떠나니, 그를 박에다 장사 지냈고,

고단(咎單)은 이윤의 행적을 통해서 후세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옥정(沃丁)」을 지었다.

 

 

옥정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 태경(太庚)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경 임금이다.

 

태경이 세상을 뜨고 아들 소갑(小甲)이 즉위했다.

 

소갑이 세상을 뜨자 동생 옹기(雍己)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옹기 임금이다.

 

은의 도가 쇠해지자 조회에 오지 않는 제후가 생겼다.

 

옹기 임금이 세상을 뜨고 동생 태무(太戊)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무 임금이다.

태무 임금은 즉위해 이척(伊陟)을 재상으로 삼았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 아름 넘게 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

 

태무 임금이 두려워 이척에게 물었다.

 

이척은 “신이 듣자니 요사스러움도 덕행을 이기지는 못한다고 하옵니다.

임금의 정치에 모자란 점은 없었는지요? 임금께서는 덕행의 수양에 힘쓰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태무가 이에 따르자 불길한 징조인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이척은 무함(巫咸)에게 모든 공을 돌려서 그를 칭찬했다.

 

무함은 왕가의 사무를 잘 처리했으며 「함애(咸艾)」와 「태무(太戊)」를 지었다.

 

태무가 태묘에서 이척을 칭송하면서 그를 신하 이상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이척이 사양하고 「원명(原命)」을 지었다.

 

은이 다시 흥해 제후들이 은에 귀의했기에 태무 임금을 중종(中宗)이라 불렀다.

 

 

중종이 세상을 뜨고 아들 중정(中丁)이 즉위했다.

중정 임금은 오(隞)로 도읍을 옮겼다.

 

하단갑 때 상(相)으로 천도했고, 조을(祖乙)은 형(邢)으로 천도했다.

 

중정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외임(外壬)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외임 임금이다.

 

「중정(仲丁)」은 글에 빠진 부분이 있어 완전치 못하다.

 

외임 임금이 세상을 뜨고 동생 하단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하단갑 임금이다.

 

하단갑 때 은이 다시 쇠퇴했다.

 

하단갑이 세상을 뜨고 아들 조을(祖乙)이 즉위했다.

조을 임금이 즉위해 은은 다시 부흥했다. 무현(巫賢)이 정무를 담당했다.

 

조을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신(祖辛)이 즉위했다.

 

조신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 옥갑(沃甲)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옥갑 임금이다.

 

옥갑 임금이 세상을 뜨고 옥갑의 형 조신의 아들인 조정(祖丁)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조정 임금이다.

 

조정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옥갑제의 아들인 사촌동생 남경(南庚)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남경 임금이다.

 

남경 임금이 세상을 뜨고 조정 임금의 아들인 양갑(陽甲)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양갑 임금이다. 양갑 임금 때 은이 다시 쇠퇴했다.

 

 

중정 이래로 적자 계승이 폐지되고

형제와 형제 아들로 바뀌어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니 9세 동안 혼란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제후들이 조회에 오지 않았다.

 

양갑 임금이 죽고 동생 반경(盤庚)이 즉위하니, 이가 반경 임금이다.

 

반경 임금 때 은은 이미 하북에 도읍했는데,

반경제는 다시 하남으로 옮겨 성탕의 옛 도읍에 거주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미 다섯 차례나 천도하면서 정해진 거처가 없었기에

은의 인민들은 걱정과 원망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반경은 제후와 대신들에게

“예전 고후(高后)이셨던 성탕과 그대들의 선조들께서 함께 힘을 모아

천하를 평정하셨고 그 법은 따를 수 있는 것이었소.

그것을 버리고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정을 이룰 수 있겠소?”라 했다.

이에 마침내 하남으로 옮겨 박을 정돈하고

탕의 정치를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은의 도는 다시 일어섰다.

제후들이 입조한 것은 성탕의 덕정을 준수했기 때문이다.

 

반경제가 세상을 뜨고 동생 소신(小辛)이 즉위하니, 이가 소신 임금이다.

소신 임금이 즉위한 후 은이 다시 쇠퇴해지자

(반경을 생각하며) 「반경(盤庚)」 3편을 지었다.

 

소신 임금이 세상을 뜨고 동생 소을(小乙)이 즉위하니, 이가 소을 임금이다.

 

소을 임금이 세상을 뜨고 아들 무정(武丁)이 즉위했다.

무정 임금이 즉위해 은을 부흥시키려 했으나 도울 사람을 얻지 못했다.

3년을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가 결재하게 하면서 나라의 기풍을 살폈다.

 

무정이 꿈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이름을 열(說)이라 했다.

꿈에서 본 성인을 신하들과 백관들 중에서 찾았으나 모두 아니었다.

이에 백관들에게 재야에서 찾아보게 해 부험(傅險)이란 곳에서 열(說)을 찾아냈다.

 

이때 열은 죄를 짓고 노역에 끌려 나가서 부험에서 길을 닦고 있던 중이었다.

무정에게 보이니 무정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 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이에 그를 등용해 재상으로 삼으니 은이 크게 다스려졌다.

이에 따라 부험으로 성을 삼게 하고 부열(傅說)이라 불렀다.

 

무정 임금이 성탕에게 제사를 올린 다음날

꿩이 날아와서 정(鼎)의 손잡이에 앉아 울었다.

무정이 두려워하자 조기(祖己)가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정사를 바르게 처리하십시오”라 했다.

조기는 다시 왕에게

“무릇 하늘이 인간을 감찰하는 데는 도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늘이 내려준 수명에 길고 짧음은 있으나,

하늘이 인민을 요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동 때문에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도덕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대문에

하늘이 재앙을 내려서 그 행동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를 어찌하나’며 한탄합니다.

아! 왕께서 백성을 위해서 힘껏 일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며,

제사는 예나 도에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충고했다.

무정이 정사를 바로잡고 은덕을 베푸니 천하가 모두 즐거워하고, 은의 도가 부흥했다.

 

무정 임금이 세상을 뜨고 아들 조경제(祖庚帝)가 즉위했다.

 

조기는 무정 때 꿩이 정의 손잡이에 날아들어 울었던 일을 계기로 삼아

덕정을 베푼 일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고종(高宗)이라 하는 한편,

「고종융일(高宗肜日)」과 「고종지훈(高宗之訓)」을 지었다.

 

조경 임금이 세상을 뜨고 동생 조갑(祖甲)이 즉위하니, 이가 갑 임금이다.

갑 임금은 음란해 은이 다시 쇠퇴해졌다.

 

갑 임금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 늠신(廩辛)이 즉위했다.

 

늠신 임금이 세상을 뜨자 동생 경정(庚丁)이 즉위하니, 이가 경정 임금이다.

 

경정 임금이 세상을 뜨고 무을(武乙)이 즉위했는데,

은은 다시 박을 떠나서 하북으로 천도했다.

 

무을 임금은 무도해 우상을 만들고 이를 ‘천신(天神)’이라고 불렀다.

 

천신과 내기를 하면서 옆 사람에게 심판을 보게 하고는 천신이 지면 천신을 모욕했다.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면서

‘사천(射天)’이라 부르게 했다.

 

무을은 황하와 위수 사이로 사냥을 갔다가 갑자기 치는 천둥 소리에 놀라 죽었다.

 

아들 태정(太丁)이 즉위했고, 태정 임금이 세상을 뜨자 아들 을(乙)이 즉위했다.

을 임금이 즉위하면서 은은 더욱 쇠해졌다.

 

을 임금의 큰아들은 미자계(微子啓)였으나,

계의 어머니가 천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작은아들 신(辛)은 그 어머니가 정비였기 때문에 신이 후계자가 되었다.

을 임금이 세상을 뜨자 아들 신이 즉위했다.

이 이가 신 임금인데, 천하는 그를 ‘주(紂)’라 불렀다.

 

주(紂) 임금은 자질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정도였다.

지혜는 신하의 간언을 물리칠 정도였고,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해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했으며,

모두가 자기 밑이라 여겼다.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여자를 좋아했다.

달기(妲己)를 총애해 달기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사연(師涓)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하게 하고,

북리(北里)에서 추는 것 같은 저속한 춤과

음탕하고 퇴폐적인 가락을 새로 만들도록 했다.

세금을 무겁게 매겨 녹대(鹿臺)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鉅橋)를 곡식으로 채웠다.

여기저기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물을 수집해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沙丘)의 원대(苑臺)를 크게 확장해

야수와 새들을 잔뜩 잡아다가 이곳에 풀어놓았다.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사구에 악공들과 광대들을 잔뜩 불러들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숲처럼 고기를 매달아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사이를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 새도록 마시며 놀았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배신하는 제후들이 생기자

주는 형벌을 무겁게 해 포락(炮烙)이라는 형벌까지 만들어냈다.

 

서백창(西伯昌), 구후(九侯), 악후(鄂侯)를 삼공으로 삼았다.

구후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주(紂)에게 바쳤다.

구후의 딸이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주(紂)는 노하여 그녀를 죽이고,

구후는 죽여서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악후가 이를 만류하며 격렬한 어조로 따지자 악후도 포를 떠서 죽였다.

 

서백창이 이를 듣고는 가만히 탄식했는데,

숭후호(崇侯虎)가 이 사실을 알고는 주에게 고자질하자

주는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두어버렸다.

 

서백의 신하인 굉요(閎夭) 등이 미녀와 진기한 보물, 준마 등을 구해 주에게 바치자

주는 곧 서백을 사면해주었다.

서백은 출옥하자 낙수 서쪽의 땅을 바치며 포락형을 없애주기를 청원했다.

주가 이를 허락하고는 활과 화살 그리고 큰도끼를 하사해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게 하고 서백으로 삼았다.

 

비중(費中)을 등용해 국정을 담당하게 했는데,

비중은 아첨을 잘하고 사리사욕만 채웠기 때문에 은 사람들이 그를 멀리했다.

 

주는 또 오래(惡來)를 등용했는데,

오래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좋아했기에

제후들은 이 때문에 은과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

 

서백이 돌아와 은밀히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니

많은 제후들이 주를 등지고 서백을 따랐다.

 

서백이 점점 커지자 주는 점점 권력을 잃어갔다.

왕자 비간(比干)이 간언을 했지만, 주는 듣지 않았다.

상용(商容)은 현자로서 백성이 그를 아꼈으나 주는 그를 버렸다.

 

서백이 기국(饑國)을 정벌해 멸망시키자,

주의 신하인 조이(祖伊)가 이 소식을 듣고 주(周)를 원망하는 한편

두려워 주(紂)에게 달려가

“하늘이 이미 우리 은의 명을 단절시켰기 때문에

지혜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 미래를 내다보고 거북점을 쳐봐도

앞날이 길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선왕들께서 우리 후손을 돕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왕의 포악과 음란으로 스스로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신 것이고,

때문에 하늘이 우리를 버리신 것입니다.

편히 먹지도 못하고, 하늘의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법도를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 가운데 왕이 망하길 원치 않는 사람이 없으니,

모두들 ‘하늘은 어찌해 재앙을 내리지 않으며,

큰 천명은 어이해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이제 왕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라고 고했다.

 

주는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천명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라 했다.

조이가 돌아와서는 “주는 충고할 수 없다”고 했다.

 

서백이 세상을 떠나고 주(周) 무왕(武王)이 동쪽 지방을 정벌해 맹진(盟津)에 이르자,

은을 배반하고 주로 모여든 제후가 800이나 되었다.

 

제후들이 모두 “주를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나,

무왕은 “그대들은 천명을 모르고 있소”라고 말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주왕은 갈수록 음란해졌다.

미자(微子)가 몇 번이나 충고했지만 주왕이 들으려 하지 않자,

그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하고는 마침내 은을 떠났다.

 

비간은 “신하는 죽음으로 충고하지 않을 수 없다”며 계속 주왕에게 간언했다.

주가 성이 나서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면서

비간을 해부해 그 심장을 꺼내보았다.

 

기자(箕子)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해 남의 노비가 되고자 했지만

주가 그를 잡아 가두었다.

 

은의 태사와 소사는 제기와 악기를 가지고 주(周)로 달아났다.

 

마침내 주 무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紂)를 정벌했다.

주(紂)도 군대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대항했으나, 갑자일에 그의 군대가 패했다.

 

주는 도망쳐 들어와 녹대로 올라가서

보물과 옥 따위로 장식한 옷을 뒤집어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무왕은 주의 목을 베어 크고 힌 깃발에 매달았고, 달기도 처형했다.

 

기자를 풀어주고, 비간의 무덤에 봉분을 씌워주고, 상용이 살던 마을에 상을 내렸다.

 

주의 아들 녹보(祿父) 무경(武庚)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어 은의 제사를 잇도록 하고,

반경의 정령을 집행하게 하자 은의 인민들이 크게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주 무왕이 천자가 되었다.

 

그 후세들은 임금을 제(帝)라고 부르지 않고 왕(王)으로 낮추어 불렀으며,

은의 후예를 제후로 삼아 주에 속하게 했다.

 

주 무왕이 세상을 뜨자 무경(武庚), 관숙(管叔),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켰다.

 

성왕(成王)은 주공(周公)으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하고

미자를 송(宋)에 봉해 은의 후대를 잇도록 했다.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송(頌)」에 의거해 설의 사적을 순서대로 정리했고,

성탕 이후의 일은 『서(書)』와 『시(詩)』에서 취했다.

설의 성은 자씨였으나,

그 후손이 봉토를 받았으므로 나라를 성으로 삼게 되어

은씨(殷氏), 내씨(來氏), 송씨(宋氏), 공동씨(空桐氏), 치씨(稚氏), 북은씨(北殷氏),

목이씨(目夷氏)가 있게 되었다.

공자(孔子)는 ‘은의 노(路)라는 수레가 좋다’라고 말했다. 색은 흰색을 숭상했다.”

 

 

 

 

- 西周 本紀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며 이름을 기(棄)다.

 

그의 모친은 유태씨(有邰氏) 부족의 딸로써 이름을 강원(姜嫄)이라고 했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정비가 되었다.

 

강원이 성밖의 야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기운이 느껴지더니 마치 애를 밴 상태가 되었다.

 

실제로 애를 밴지 10 달이 되자 아들을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에다 버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이나 소 등이 아기의 주위를 돌며 몸을 피하며 밟지 않고 지나갔다.

 

그래서 다시 그 아이를 깊은 숲 속으로 데려가 버리도록 하였더니

이번에는 인적이 드물던 숲 속에 사람의 왕래가 갑자기 많아졌다.

 

그래서 다시 그 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그 아기를 얼어붙은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그 날개로 아기의 밑을 깔아 주기도 하고 위를 덮어 주기도 하였다.

 

강원이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아이를 데려와 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아기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이름을 기(棄)라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

 

기(棄)는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마음속에 높은 뜻과 원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놀 때는 항상 삼나무나 콩 종류의 작물을 즐겨 심었으며

그가 심은 삼나무와 콩은 크게 자라서 무성하게 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자 농사짓는 일을 좋아하였으며

농사에 적합한 땅을 살펴 좋은 종자를 파종하여 많은 량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백성들이 <기棄>에게 와서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요임금이 <기棄>를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인 농사(農師)에 임명하였다.

 

천하가 <기棄>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워 많은 이득를 얻게 되어

<기棄>는 큰공을 세우게 되었다.

 

순(舜) 임금이 말했다.

 

" <기棄>는 백성들이 굶기 시작하자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을 맡아

백곡(百谷)을 골라 파종하 여 백성들의 허기를 면하게 했다."

 

순임금이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관직을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후직(后稷)이라 하고 희(姬)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를 거치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후직이 죽고 그의 아들인 불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불줄 말년에 하후씨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어 농사(農師)의 관직을 폐하여

다시는 농업을 돌보지 않았다.

 

농사(農師)의 직을 잃게 된 불줄은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갔다.

 

불줄이 죽고 아들 자국(子鞠)이 뒤를 잇고

다시 자국이 죽고 그의 아들 공유(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유(公劉)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업을 돌보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공유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절(慶節)이 뒤를 잇고 빈(豳) 땅에 도읍 하여 나라를 세웠다.

 

경절(慶節)에 이어 황복(皇僕), 차불(差弗), 훼유(毁隃), 공비(公非), 고어(高圉),

아어(亞圉), 공숙조류(公叔祖類)가 각각 부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차례로 뒤를 이었다.

 

공숙조류가 죽고 그의 아들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섰다.

 

후직(后稷)과 공유(公劉)의 업을 되살려 덕을 쌓고 의로운 일을 행한 고공단보를

백성들은 모두 받들어 존경했다.

 

융적(戎狄) 가운데에 훈육(薰育)이라는 부족이 침입하여

주나라의 재물을 약탈해 가려고 했다.

 

고공단보가 재물을 모아 그들에게 주어 물러가게 하였다.

 

다시 훈육이 쳐들어와 그때는 주족과 그 영토를 빼앗아 가려고 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분노하여 훈육을 공격하려고 했다.

 

고공단보가 백성들을 향해 말했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옹립하는 목적은

그에게서 백성 모두들의 이익을 이루어 주도록 생각해서이다.

 

현재 융적이 침범해 온 목적은 우리들의 땅과 백성들을 빼앗고자 해서인데,

백성들이 나를 따르던, 융적을 따르던 그들에게 있어서는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백성들이 나로 인하여 싸움을 하게 된다면

이는 내가 백성들의 부자(父子)나 형제(兄弟)들을 희생(犧牲)시켜서

그들의 군주 노릇을 하게 되는 일일 뿐이다. 그 일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

 

그런 다음 고공단보는 백성들을 이끌고 빈(豳) 땅을 떠나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다시 양산(梁山)을 넘어

기산(岐山) 밑에 당도하여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빈읍(豳邑)에 살던 모든 백성들이 노약자들은 부축하고,

어린아이들은 가슴에 안고 고공단보의 뒤를 따라 기산으로 옮겼다.

 

이웃나라에 살던 다른 백성들도 고공(古公)이

어질고 백성들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달려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래서 고공은 백성들로부터 융적의 풍속을 없애버릴 수가 있었으며

성곽(城郭)을 축조하고 궁궐을 짓고 각기 나누어 살도록 했다.

 

나라의 일을 오관(五官)을 두어 돌보게 했으며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며 고공단보의 덕을 칭송했다.

 

고공의 장자는 태백(太伯)이고 차자는 우중(虞仲)이다.

 

태강(太姜)이 막내아들 계력(季歷)을 낳고 계력은 태임(太任)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태임도 태강과 마찬가지로 덕이 높은 부인이었다.

 

태임이 창(昌)을 낳았을 때 성스러운 조짐이 있었다.

 

고공단보가 말했다.

 

"우리 종족을 융성하게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창(昌)이리라!"

 

장자 태백(太伯)과 차자 우중(虞仲)은 고공(姑公)이 계력(季歷)을 세워

그 후계를 창에게 전해주려는 마음을 알고,

두 사람은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그 습속을 따라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짧게 깎아 그 부족들과 함께 생활함으로 해서 계력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양보했다.

 

이윽고 고공이 죽자 계력이 섰다.

 

이가 공계(公季)다.

 

공계는 고공의 도를 이어받아 더욱 힘써 의로운 일을 행하여

주위의 제후들을 복종시켰다.

 

공계가 죽고 그 아들 창(昌)이 뒤를 이었다.

 

이가 서백(西伯)이다.

 

서백은 또한 문왕(文王)이라고 부른다.

 

창이 후직과 공유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받들고

고공과 공계의 법도를 따라 어진 일에 매진하고 노인을 공경하며,

어린아이들에게는 자애롭게 대하였다.

 

밑에 사람들을 예로써 대하며 현자를 좋아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식사를 할 틈도 없이 어진 선비를 접대하였다.

 

사방의 수많은 선비들이 달려와 창에게 귀의하였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사람이었는데

서백이 노인을 공경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나라에 와서 창을 받들었다.

 

태전(太顓),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죽자(鬻子), 갑신대부(甲辛大夫) 같은 사람도

모두 달려와서 창을 도왔다.

 

숭후(崇侯) 호(虎)가 서백을 은(殷)의 주왕(紂王)에게 참소하며 말했다.

 

"서백이 선행을 베풀어 덕을 쌓고 있어 천하 제후들의 인심이

모두 서백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장차 임금께 해를 끼칠 것입니다."

 

주왕(紂王)이 즉시 서백을 잡아다가 유리(羑里)에 유폐시켰다.

 

굉요(閎夭) 등의 신하들이 걱정하여 유신씨(有莘氏)의 미녀 및

여융(驪戎) 山의 문마(文馬)와 유웅씨(有熊氏)의 사마(駟馬) 9조,

그리고 세상의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 은나라의 총신 <비중費仲>을 매수하여

주왕(紂王)에게 가져다 바쳤다.

 

주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들이 가져다 바친 한 가지만으로도 서백을 석방하기에 족한데 하물며 이렇게

진기한 물품들을 많이 가져다 바치니 내가 그를 풀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겠다."

 

주왕은 즉시 서백을 사면하여 그에게 활과 화살 및 부월을 하사하여

서백으로 하여금 인근의 제후들을 정벌할 수 있도록 명하며 말했다.

 

"서백을 참소한 자는 숭후 호(虎)다."

 

이에 서백은 락읍(洛邑)의 서쪽 땅을 주왕에게 바쳐

포락(炮烙)의 형벌을 중지해 주기를 청하자 주왕이 허락했다.

 

유리에서 석방되어 주나라로 돌아온 서백이 아무도 몰래 일을 잘 판결하자,

제후들이 자주 와서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당시 우(虞)예(芮)나라 사이에 영토 다툼이 일어나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에 대한 판결을 서백에게 의뢰하려고 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송사의 판결을 서백에게 부탁하기 위해 주나라 경계에 들어와 보니

농부들은 모두 자기 밭의 경계를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나이 먹은 어른들을 공경하고 있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서백을 만나보기도 전에 부끄럽게 생각하여 서로 말했다.

 

"우리가 국경 문제로 다투는 행위는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서백을 찾아가 봤자 스스로가 욕됨을 얻게 될 뿐이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다투고 있던 땅을 서로 양보하였다.

 

제후들이 이에 대한 일을 듣고서 모두 말했다.

 

"서백이 장차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천자가 되겠구나!"

 

다음 해에 서백이 견융(犬戎)을 정벌하였다.

 

그 다음 해에 밀수(密須)를 정벌하고 또 그 다음 해에 기국(耆國)이 침범했으나

주나라가 그들의 군사들을 패퇴시켰다.

 

은나라의 조이(祖伊)가 서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그 일을 주왕(紂王)에게 고했다.

 

주왕이 듣고 말했다.

 

"천명이 없는데 그가 무엇인들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해에는 우(邘)를 정벌했다.

 

이어서 숭후 호(虎)를 토벌하고 그 곳에 풍읍(豊邑)을 축조한 후에

기산(岐山) 밑에 있었던 주나라의 도성을 옮겼다.

 

다음 해에 서백이 죽고 태자 발(發)이 뒤를 이었다.

 

이가 주무왕(周武王)이다.

 

서백(西伯)은 모두 50년 간 재위에 있었다.

 

그가 유리에 갇혀서 지낼 때 주역(周易)의 8괘(卦)를 늘려 64괘로 만들었다.

 

이에 시인(詩人)들이 서백을 칭송했다.

 

주나라가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칭왕(稱王)을 한 것은

우(虞)와 예(芮)나라 사이에 있었던 송사(訟事)가 해결된 뒤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10년 후에 서백(西伯) 창(昌)이 죽었다.

 

시호를 문왕이라 하고 은(殷)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역법(曆法)을 제정하였다.

 

고공단보(古公亶父)를 태왕(太王)으로 공계(公季)를 왕계(王季)로 추존했다.

 

고공단보부터 추존한 이유는 대체적으로 주나라가 제왕이 될 상서로운 조짐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왕이 즉위하여 태공망(太公望)을 태사(太師)로 삼고

주공 단(旦)을 보상(輔相)으로 삼았다.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은 좌우에 두고 자기를 보좌하게 하였다.

 

무왕은 문왕의 전례를 본받고 그의 위업을 계승하려고 했다.

 

무왕 9년에 필(畢)에서 문왕을 위해 하늘에 제사지냈다.

 

군사를 열병하고 동쪽으로 나가 맹진(盟津)에 당도했다.

 

무왕이 문왕의 목주(木主)를 수레에 싣고 중군에 두었다.

 

무왕은 자기를 태자(太子) 발(發)이라고 칭하고 은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문왕의 명에 의해서이지 감히 자기가 독단으로 행한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어서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등에게

왕명을 받들어 부절(符節)을 잡게 하고 뭇 관원들에게 고했다.

 

"엄숙하고 성실한 자세로 들을지어다.

 

나는 본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오로지 선조들이 베푸신 덕행에 힘입어

그 공업을 이어 받게 되었다.

 

지금 이미 각종 상벌제도를 만들었으니

너희들은 힘을 다하여 선조들의 공업을 완성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

 

말을 마친 무왕 발은 군사들에게 진군명령을 내렸다.

 

태공망(太公望) 사상보(師尙父)가 전군을 향하여 명령을 발했다.

 

"너희들은 노를 빨리 저어 모두 시간에 맞추어 집결지에 도착하라!

시간에 맞추어 오지 못하는 자는 모두 참하리라!"

 

무왕이 강을 건너기 위해 배에 올라 강 가운데에 이르자

한 마리의 하얀 물고기가 무왕이 탄 배 위로 뛰어 올랐다.

 

무왕이 몸을 굽혀 그 고기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사용했다.

 

무왕의 일행이 강을 모두 건너자

일단의 불길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왕이 있던 막사 위로 떨어졌다.

 

그 불길은 멈추지 않고 막사 주위를 맴돌다가

갑자기 머리가 적홍색(赤紅色)인 한 마리의 검은 갈가마귀로 변했다.

 

그 갈가마귀는 ‘까악. 까악’ 새 소리를 내어 울며 막사 주위를 돌았다.

 

그때 제후들은 비록 미리 약속한 바는 없었으나

출동하여 맹진에 집합하고 있었는데 모두 합하여 8백이 넘었다.

 

제후들이 한 목소리로 무왕에게 말했다.

 

"지금 주왕(紂王)을 토벌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무왕이 듣고 제후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아직 하늘의 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지금은 아직 은주(殷紂)를 토벌할 때가 아니다."

 

이어서 무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회군하여 주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무왕은 주왕(紂王)이 더욱 포학하여 그 도가 지나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나라의 태사(太師)가 병이 들자 그 밑의 소사(少師)가 은나라의 악기들을 가지고

주나라로 도망쳐왔다.

 

그래서 무왕은 천하의 제후들을 향하여 선포하며 말했다.

 

"은주의 포학함이 매우 엄중하니 토벌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무왕은 문왕의 유지를 따라 병거 300승(乘), 호분(虎賁) 3,000명,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 45,000명을 이끌고

은주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였다.

 

무왕 재위 11년 12월 무오(戊午) 일에

주나라의 군사들은 모두 맹진(盟津)에서 하수를 건넜다.

 

천하의 제후들도 무왕을 돕기 위해 달려왔다.

 

무왕이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분발하고 노력하여 절대 해이한 마음을 갖지 말라!"

 

무왕이 『태서(太誓)』를 지어 주나라의 군사들에게 선포하게 하였다.

 

"오늘 은주는 부인의 말을 듣고 스스로 하늘의 도를 끊었으며

천지인(天地人)의 정도(正道)를 훼손하고 그의 친족과 형제들을 멀리 했다.

 

또한 그의 조상들이 물려준 악기와 음악을 포기하고 음탕한 소리를 지어 부르게 하여 정아(正雅)한 음악을 어지럽혀서 여인의 환심을 사려고했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 나 희발(姬發)은 하늘이 내린 징벌을 집행하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은 나의 뜻을 헤아려 있는 힘을 다해 주기 바란다.

 

이런 일은 두 번 혹은 세 번 다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해 2월 갑자(甲子) 일 여명(黎明)에 무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나라 도성 밖 교외인

목야(牧野)에 나가 출병하기 전에 군사들을 모이게 하여 맹세하였다.

 

무왕이 왼손에는 황월(黃鉞)을 오른 손에는 백모(白旄) 기를 들고 휘두르며

군사들을 향하여 외쳤다.

 

"저 멀리 서방의 땅에서 온 군사들이여 노고가 많았도다!"

 

무왕이 계속해서 외쳤다.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여,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들이여 그리고 용(庸), 촉(蜀),

강(羌), 모(髳), 미(微), 로(纑), 팽(彭), 복(濮)에서 온 군사들이여!

과(戈)를 높이 들고 방패를 정열 하라. 그리고 창을 세우고 내 앞에서 맹세하라!"

 

무왕이 계속 외쳤다.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않으며 만일에 암탉이 울어서 새벽이 왔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 집안은 망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오늘 은주는 오로지 부인들의 말만을 듣고 제사를 끊었으며

선조들의 일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큰 과업인 정사를 팽개쳐 돌보지 않았으며

친족과 형제들을 멀리하여 임용하지 않고 오히려 천하의 죄와 악행을 저지르고

도망친 자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장점을 높이 사서 믿고 높여서 중용하니,

그들의 횡포함으로 상나라에 난리가 일어나게 하여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오늘 나 발(發)은 여러분들과 같이 하늘을 대신하여 그 벌을 내리고자 한다.

 

오늘 우리들의 작전은 6보나 7보를 전진하고 멈추어 다시 대오를 새롭게 정돈한 후에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여러 장사들은 따르도록 힘써 노력하라!

 

또한 은나라의 군사들과 교전이 할 때는 단지 4, 5차나 6, 7차를 공격한 후에

멈추어 대오를 다시 새롭게 정비하여 싸움을 계속하려고 하니

여러 장사들은 힘써 싸움에 임해 주기 바라노라!

 

원컨대 여러 장사들은 위풍당당하게 그리고 용기백배하여

마치 맹호나 대웅(大熊)처럼, 시랑(豺狼)이나 이무기와 같이 싸움에 임하기 바라노라!

 

은나라의 군사들이 우리들에게 투항하러 오는 자는 막지 말고,

우리는 먼 서방에서 온 군사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있는 힘을 다해 싸우라!

 

만일 그렇지 않고 싸움에 온 힘을 쏟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은나라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지어다!"

 

무왕이 맹세의 의식을 끝내자 제후들이 끌고 온 군사들이 모두 모이게 되어

그 수가 병거 4,000승에 달하게 되어 목야(牧野)의 벌판에 전개하여 진을 쳤다.

 

무왕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은주도 역시 군사 70만 명을 동원하여

목야로 나가 무왕을 막고자 했다.

 

무왕이 사상보(師尙父)와 백명의 용사를 시켜 싸움을 걸게 하였다.

 

그 뒤를 따라 무왕이 대졸(大卒)의 군사로써 제주(帝紂)의 군사들 진영으로 돌격했다.

 

주왕(紂王)의 군사들은 수가 비록 많았으나 모두가 싸우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무왕이 빨리 진격해 오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이었다.

 

주왕의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거꾸로 잡고

오히려 무왕을 위해 길을 열어주었다.

 

무왕이 앞으로 돌격을 감행하자

은나라 군사들은 주왕의 곁을 떠나 모조리 흩어져 버렸다.

 

주왕(紂王)이 도망가서 녹대(鹿臺)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제주(帝紂)는 보옥(寶玉)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불기둥 속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왕이 손으로 대백기(大白旗)를 흔들며 제후들을 지휘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무왕을 향해 배례(拜禮)를 드리자

무왕도 역시 두 손을 높이들이 읍을 하여 예를 취했다.

 

모든 제후들은 무왕의 곁으로 다가와 모였다.

 

무왕이 주왕의 궁궐이 있는 은나라 도성인 조가(朝歌)에 입성하기 위해 행군을

계속하자 조가성(朝歌城)의 백성들은 모두 성밖으로 나와 무왕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무왕은 군신들로 하여금 상나라 백성들을 향해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다.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서 그대 백성들에게 큰복을 내리셨도다!"

 

상나라의 국인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무왕에게 절을 올렸다.

 

무왕도 국인들을 향해 절을 하여 답례를 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무왕 곁으로 모였다.

 

무왕과 제후들이 상나라의 국인들의 뒤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

주왕이 죽은 녹대에 이르렀다.

 

무왕이 스스로 활에 화살을 메겨

주왕의 시체를 향해 세 발을 쏘고 나서 수레에 내렸다.

 

다시 경려검(經呂劍)으로 주왕의 시체를 찌른 후에 황월(黃鉞)로 참한 주왕의 머리를

대백기(大白旗)의 깃대 위에 걸어 백성들에게 보였다.

 

그런 다음 주왕이 총애하던 두 후궁(後宮)이 살던 궁궐로 들어 갔다.

 

두 후궁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무왕이 다시 화살을 세 발을 쏘고 칼로 시체를 내리친 후에

흑월(黑鉞)로 참한 폐첩(嬖妾)의 머리를 소백기(小白旗)의 깃대 위에 걸어

국인(國人)들에게 효시(梟示)했다.

 

무왕은 성밖으로 나와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자 무왕은 사람들에게 길을 청소하고

주왕이 살던 궁궐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을 수리하도록 시켰다.

 

이윽고 준비가 다 되자 백 명의 장사들에게 한기(罕旗)를 들게 하여 앞장서게 하였다.

 

무왕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은 태상기(太常旗)가 꽂힌 의장차(儀仗車)를 몰고,

주공(周公) 단(旦)은 손에 대부(大斧)를, 필공(畢公)은 소부(小斧)를 들고,

무왕 곁에서 시위하였다.

 

산의생(散宜生), 태전(太顓), 굉요(閎夭)는 모두 칼을 들고 무왕을 호위하였다.

 

무왕이 성안으로 들어가 제단의 남쪽에 대졸(大卒)들을 열병하고 그 왼쪽에 서자

군신들은 모두 무왕의 뒤편에 도열했다.

 

모숙정(毛叔鄭)이 밝은 달밤에 이슬을 받아 만든 정한수를 두 손으로 받들어 제단에

바쳤으며 위강숙(衛康叔)은 풀로 엮어 만든 돗자리를 길 위에 깔고

소공(召公) 석(奭)은 채색비단을 무왕에게 바쳤다.

 

사상보(師尙父)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희생으로 쓸 짐승을 끌고 왔다.

 

이윽고 이일책(伊佚策)을 시켜 축문을 읽게 만들었다.

 

"은의 마지막 후손인 계주(季紂)는 선왕들의 밝은 덕을 모조리 훼손하여 없앴으며

하늘을 모멸하여 제사를 중지하고 상나라의 백성들에게 포악하여

그 행위가 하늘의 상제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무왕은 이어서 머리를 숙여 두 번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대명을 받자와 은나라의 악정을 혁파하고

밝은 하늘이 내린 성스러운 유지를 받들겠나이다!"

 

무왕이 다시 머리를 땅에 대고 재배한 후에 제단 앞에서 물러나왔다.

 

이어서 무왕은 은주의 아들 녹보(綠父)를 은나라 유민이 살던 곳에 봉했다.

 

그러나 무왕은 은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의 동생 관숙선(管叔鮮)과 채숙탁(蔡叔度)을 녹보의 상(相)으로 명하고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는 일을 감시하게 하였다.

 

다시 소공(召公)에게 명하여 감옥에 갇힌 기자(箕子)를 풀어주게 하고,

필공(畢公)에게는 죄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은나라 백성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그 결과 상나라의 촌락 구석에 살던 백성들조차도 무왕의 덕을 칭송하게 되었다.

 

남궁괄(南宮括)에게 명하여 녹대의 창고에 있던 금은보화와 전재(錢財) 등을

모두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으며

다시 거교(鉅橋)에 있던 양식 창고를 털어 노약자나 노예들에게도 나누어주도록 했다.

 

계속해서 남궁괄과 사일(史佚)에게 명하여

구정(九鼎)과 보옥을 전시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구경시켰다.

 

굉요에게는 비간(比干)의 무덤을 찾아 봉분을 조성하고 제단을 세우게 하였다.

 

다시 제사를 주관하는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싸움 중에 죽은 장수들과 군졸들의 망령을 군중에서 제사 지내게 하였다.

 

그런 다음 곧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서방의 주나라 도성으로 되돌아갔다.

 

회군 중에 무왕은 중도의 여러 제후국들을 순시하였다.

 

정사를 기록하여 『무성(武成)』이라는 책을 지어

은나라를 멸하여 무공(武功)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렸다.

 

다시 천하를 나누어 제후들을 봉하고

가져온 은나라 종묘(宗廟)의 제기들을 고루 나누어주고

『분은지기물(分殷之器物)』이라는 책을 만들어

무왕의 명령과 각 제후들이 받은 하사물(下賜物)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무왕이 고대의 성왕(聖王)들의 덕을 기리어 신농씨(神農氏)의 후손들은 초(焦)에,

황제(黃帝)의 후손들은 축(祝)에, 요(堯) 임금의 후손은 계(薊)

순(舜) 임금의 후손은 진(陳)에, 하우(夏禹)의 후손은 기(杞)에 각각 봉했다.

 

이어서 공신들과 모사(謀士)들을 분봉하여 제후로 삼았다.

 

그 중에 사상보(師尙父)의 공이 제일 크다고 하여

가장 먼저 상보의 출신지인 영구(營口)에 봉하고 나라 이름을 제(齊)라고 했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 단(旦)은 곡부(曲阜)에 봉하고 나라 이름을 노(魯)라고 했다.

 

또한 소공(召公) 석(奭)은 연(燕)에 봉했다.

 

동생 숙선(叔鮮)은 관(管)에, 다른 동생 숙탁(叔度)은 채(蔡)에 봉했다.

 

기타 다른 사람들도 각기 순서에 따라 분봉을 하여 제후에 임명했다.

 

이어서 무왕은 구주(九州)의 장관들을 불러 같이 빈(豳) 땅의 언덕에 올라

상나라 쪽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다시 도성인 호경(鎬京)으로 돌아왔으나

그 날 이후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공 단이 왕의 침소에 와서 위로의 말을 전했다.

 

"무슨 일로 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

 

무왕이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말해주겠다.

 

우리가 은나라의 제기(祭器)를 사용해서 지내는 제사를

하늘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60이 되었지만

지금도 도성 밖 교외(郊外)에 미록(麋鹿)과 같은 괴수가 나타나고

해충이 발생하여 온 들판을 덮고 있다.

 

하늘이 은나라를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우리들로 하여금 은나라를 망하게 하고 주나라를 세우게 하였다.

 

하늘이 일찍이 은나라를 세우게 할 때

현인 360명을 등용하여 천하를 다스리게 하였다.

 

비록 그들의 업적이 뛰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은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은나라를 지금까지 멸하지 않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아직 우리 주나라의 국운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한가롭게 잠을 이룰 수 있겠느냐?"

 

무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주나라의 국운이 개변하지 않고 안정되면 상제가 사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서

악인들을 색출하여 내가 은주에게 내린 징벌을 가하겠다.

 

나는 앞으로 밤과 낮 구분함이 없이 계속해서 노력하여 우리 서방의 땅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여러 가지 사정들을 잘 처리하여 공덕을 쌓아 사방으로 뻗어나게 하겠다.

 

락수만(洛水灣)에서 이수만(伊水灣)에 이르는 땅은

지세가 평탄하여 험준한 지형지물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옛날 하(夏)나라가 이곳에 나라를 세워 도읍을 세웠다.

 

내가 남쪽으로 삼도(三涂)를, 북쪽으로는 산악지방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황하를 살펴보고 자세히 지세를 관찰한 결과

락수(洛水)에서 이수(伊水)에 이르는 지방은 천제(天帝)가 계신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가히 도읍을 정해도 좋은 지방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락읍(洛邑)의 땅에 새로이 도읍을 축조하기 위해 땅을 측량하고

구획정리를 한 후에 그곳에서 떠났다.

 

다시 화산(華山)의 남쪽 방면에는 말을,

도림(桃林)의 땅에 소를 방목하여 키우도록 했다.

 

다시 군인들에게 무기를 거꾸로 잡게 하고 정돈한 후에 해산시켜

각기 자기의 고향으로 보내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무왕은 천하에 다시는 군사들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공포하였다.

 

무왕이 은주(殷紂)를 정벌하여 싸움에서 승리를 취한 후 2년이 되는 해에,

기자(箕子)를 불러 은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음속으로 은나라가 망한 것에 대해 슬픔을 참지 못하던 기자가 무왕을 향하여

일반적인 나라의 존망에 대한 도리만을 강술하였다.

 

무왕 역시 기자의 슬픈 마음을 알고

고의로 말을 바꾸어 기자에게 천지자연의 운행 법칙에 대해서 물었다.

 

무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때 천하는 아직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나라의 대신들은 그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몸을 정결히 한 후에 거북점을 쳤다.

 

주공이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어 무왕의 몸에서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사악한 기운을

제거하여 그것들을 자기 몸에다 모두 옮겨 자기가 무왕 대신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무왕의 병은 점점 호전되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무왕은 죽었다.

 

태자 송(誦)이 무왕의 뒤를 이어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주성왕(周成王)이다.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은 성왕은 나이가 어리고 또한 주나라가 선지 얼마 되지 않아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후들이 주나라를 배반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에 주공은 성왕의 섭정으로 즉위하여

정무를 주관하여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렸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등의 형제들은

주공이 성왕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은허(殷墟)에 봉해진 은주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綠父)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이 성왕의 명을 받들어 반란을 진압한 후에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쫓아내어 유랑하게 만들었다.

 

주공은 다시 은주의 서형 미자개(微子開)로 하여금 무경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송(宋) 땅으로 가게 하여 그곳에 도읍을 세우게 하였다.

 

다시 무왕의 막내 동생인 강숙(康叔)을 은나라의 고토에 봉하고

나머지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성왕의 동생 진당숙(晉唐叔)이

한 줄기에 두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얻어 성왕에게 바쳤다.

 

성왕이 다시 그것을 멀리 원정 나가있던 주공의 군영에 보냈다.

 

동방에 있던 주공이 벼이삭을 받고

성왕이 하늘로부터 성스러운 명을 받았다고 칭송했다.

 

주나라 왕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관숙과 채숙을 토벌하기 위하여

주공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3 년 동안 철저하게 평정하였다.

 

그래서 먼저 『대고(大誥)』라는 글을 지어

천하의 제후들을 향하여 반역의 무리들을 토벌하는 큰 도리를 천명하고

계속해서 『미자지명(微子之命)』이라는 글을 써서

미자(微子)로 하여금 은나라 조상들의 뒤를 이으라고 명하였다.

 

다시『귀화(歸禾)』와 『가화(嘉禾)』라는 글을 써서

천자가 가화(嘉禾)를 내려 준 덕을 기술하고 찬양하였다.

 

다시『강고(康誥)』,『주고(酒誥)』, 『재재(梓材)』 등의 글을 써서

강숙(康叔)을 은에 봉하면서 술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는 훈계를 하고

동시에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를 가르쳤다.

 

주공이 성왕을 대신하여 주나라를 7년 간 다스리다가

성왕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자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자기는 옥좌(玉座)에서 내려가 신하의 반열에 서서 성왕의 정무를 도왔다.

 

성왕이 풍읍(豊邑)에 살면서 소공(召公)을 락읍(洛邑)에 다시 보내어

그곳의 토지를 측량하도록 하여 무왕의 유지를 받들려고 하였다.

 

주공이 다시 점을 쳐보고 여러 번 반복해서 지형을 관찰한 후에

공사를 시작하여 결국은 락읍에 성곽을 축조하는데 성공했다.

 

주공은 은나라의 도성에서 가져온 구정(九鼎)을 락읍에 옮기면서 말했다.

 

"이곳은 천하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사방의 제후들이 공물을 가지고 쉽게 내조할 수 있는 곳이다!"

 

락읍의 지형을 측량하고 성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조고(詔誥)』와 『락고(洛誥)』라는 글을 썼다.

 

성왕이 은나라의 유민들 일부를 락읍으로 옮겨 살게 하자

주공은 그들에게 성왕의 명이라고 하면서 은나라 유민들을 훈계하는

『다사(多士)』,『무일(無佚)』이라는 글을 써서 공포하였다.

 

소공(召公)은 태보(太保)의 직을, 태공(太公)은 태사(太師)를 담임하여

회이(淮夷)를 정벌하기 위해 동정하여 엄국(奄國)을 멸하고

그 군주를 박고(薄姑)의 땅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성왕이 원정군을 따라갔다가 돌아와 종주(宗周)에 머물면서

『다방(多方)』이라는 글을 써서 천하의 제후들을 경계(儆戒)하였다.

 

성왕이 은왕조의 잔존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회이(淮夷)를 습격하여 토벌한 후에

풍읍(豊邑)으로 돌아와서『주관(周官)』이라는 글을 써서

주나라의 관직의 직분과 그 관직에 임용하는 규범을 설명하고

새로이 예의(禮儀)를 규정하고 노래를 악보로 만들고

법령, 제도들을 모두 당시의 세상물정에 맞게 고쳤다.

 

이어서 백성들은 서로 화목하게 되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천하의 사방에서 주왕조를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성왕이 동이를 정벌하고 풍읍으로 돌아가자

식후(息侯) 신(愼)이 내조하여 경하의 말을 올렸다.

 

성왕이 영백(榮伯)에게 명하여

『회식신지명(賄息愼之命)』이라는 글을 써서 주게 하였다.

 

성왕이 임종시에 태자 쇠(釗)가 국사를 게을리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에게 명하여 제후들을 통솔하게 하고

태자를 보위에 올리도록 하고 그를 도와 정사를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성왕이 죽자 소공과 필공이 제후들을 이끌고

태자 쇠(釗)를 부축하여 선왕들을 모신 종묘에 배알시킨 후에

다시 문왕과 무왕이 주나라를 열 때 어려웠던 일을

반복해서 태자에게 경계(儆戒)의 말로 전하고

그로 하여금 온 힘을 다하여 근검절약하고 탐욕 하는 마음을 버리며

있는 힘을 다하여 국정을 돌봐야 한다고 간했다.

 

『고명(顧命)』이라는 글을 써서

대신들로 하여금 태자 쇠를 보좌하고 밝은 길로 이끌도록 했다.

 

태자 쇠가 주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강왕(康王)이다.

 

강왕이 즉위하자 천하의 제후들에게 문왕, 무왕이 이룬 업적을 선포하고 반복하여 『강조(康詔-康王之誥)』라는 글을 써서 설명하였다.

 

이로써 성왕과 강왕의 치세에 이르러 천하는 안정되고 일체의 형벌은 필요 없게 되어

40년 동안이나 사용하지 않아 사문화 되다시피 하였다.

 

강왕이 필공에게 명하여 책서(策書)를 쓰도록 하여

백성들을 구분하여 촌락을 정하여 살게 하고

주나라 도성의 교외를 경계로 삼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방어하게 하였다.

 

필공이 강왕의 명을 받아 이것을 적은 글을 『필명(畢命)』이라고 이름지었다.

 

강왕이 죽고 그 아들 소왕(昭王) 하(瑕)가 뒤를 이었다.

 

소왕이 재위에 있을 때 천자의 위엄이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소왕이 천하를 순시하기 위해 남방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은 남방의 토인들이 소왕을 미워하여

그의 일행에게 아교를 붙여 땜질한 배를 주어

결국은 배가 강심으로 갔을 때 물이 새어 배와 같이 가라앉아 익사했기 때문이었다.

 

소왕이 죽었을 때 제후들에게 강왕의 상을 통고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일을 제후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왕의 뒤를 그의 아들 만(滿)이 이었다.

 

이가 목왕(穆王)이다.

 

목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의 나이는 이미 50세였다.

 

주나라의 왕도가 쇠미해진 이유는 문왕의 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애통해 한 목왕은

즉시 백경(伯冏)에게 명하여 『경명(冏命)』이라는 글을 써서

국정을 맡고 있던 태복(太僕)에게 주어 경계하도록 했다.

 

그러자 천하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

 

목왕이 견융(犬戎)을 정벌하려고 하자 제공(祭公)이 말리면서 간했다.

 

"불가합니다.

 

선왕께서 덕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평시에 군사들의 역량을 축적해 놓았다가 필요한 시기에 맞추어 출동시켜야 하며

일단 출동하게 되면 군사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무력만을 과시하고 아무런 위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아무도 우리의 군사들을 겁내지 않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주문왕(周文王)을 찬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노래불렀습니다.


載戢干戈 載櫜弓矢    간과를 거두어라, 궁시를 활집에 넣어라

我求懿德 肆于時夏    내가 아름다운 덕을 구하여, 중국에 전하도다

允王保之                 왕이시어 부디 보중하소서


선왕(先王)들께서 백성들에게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덕을 쌓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후(順厚)한 성품을 갖도록 노력하셨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하셨으며

백성들이 사용하는 농사짓는 기구를 개량하셨으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소재를 알게 하셨습니다.

 

예법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키셨으며

또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이로운 일에만 전력을 다하게 하고

세상에 해로운 일은 하지 않게 하였고

마음은 항상 덕정을 베풀려는 생각뿐

형벌을 사용하여 위엄을 세우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봐 걱정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선왕께서는 선조들의 유업을 보전하여 후세에 물려주어

대가 더할수록 선왕의 업적이 크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들의 선조들께서는

농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농사(農師)의 직에 계시면서

우(虞)나라의 순(舜) 임금과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을 위해 일했습니다.

 

하왕조의 왕도가 쇠락하게 되었을 때

우리 선조들이 대를 이어 맡고 있던 농사(農師)의 직을 폐하고

농업에 관한 일을 돌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님 중 불줄(不窋) 님은 관직을 잃게 되어 천하를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농업에 대한 일을 감히 게을리 할 수 없어

시시때때로 선조님들이 일으킨 덕행을 융적들에게 선양하며

<기棄>님이 일으킨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융적의 사람들에게 법도를 가르쳐 교화시키고

아침저녁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근면 노력하고

돈후하고 독실한 태도를 견지하고 충성스럽고 성실한 태도로 살았습니다.

 

불줄님이 돌아가시고 그 후손들이 그의 미덕을 계승하여

선조님들의 위업에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문왕과 무왕의 대에 이르러

선조들의 밝은 덕을 빛내고 더하여 자비롭고 화평한 덕을 더 하였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신을 받들고 백성들을 보살펴

세상에는 모두 기뻐해야 할 일만 있게 되었습니다.

 

상왕(商王) 제신(帝辛)이 포악하여 백성들에게 큰 죄악을 저지르자

참지 못한 백성들이 무왕을 기쁜 마음으로 추대하자

융(戎)의 땅에서 일어난 우리 주나라는 목야의 들판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선왕께서는 무력에 의존하시지 않으시고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보살펴

그것을 없애려고 자나깨나 정사를 열심히 보살폈습니다.

 

무릇 선왕께서 천하의 땅을 다음의 규정에 따라 구분하셨습니다.

 

국도 근교 사방 500리 안의 지역인 방내(邦內)는 전복(甸服),

사방 500리 밖의 지역인 방외(邦外)는 후복(侯服),

후복(侯服)에서 위복(衛服)에 이르는 사방 2천5백리 지역은 총칭하여 빈복(賓服),

사방 2천5백리 밖의 만이(蠻夷)가 사는 땅은 요복(要服),

북쪽의 융적(戎狄)이 사는 땅은 황복(荒服)이라 하셨습니다.

 

전복에 사는 제후들은

천자가 그의 조부와 부친에게 제사를 드릴 때 소용되는 제품(祭品)을,

후복의 땅에 사는 제후들은

천자가 그의 증조와 고조에게 제사를 올릴 때 소요되는 제품을,

빈복에 사는 제후들은

천자가 그의 고조부 이상 되는 먼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소용되는 제품을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요복의 땅에 사는 만이들은 단지 매년마다 공물을 바치도록 했는데

이것은 곧 천자가 일 년에 한 번씩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소요되는 제품을

바치도록 한 것이었으며

황복에 사는 융적들에게는 내조하여 천자를 조현만 올리도록 했습니다.

 

조부와 부친에 대한 제사는 매일 한 번씩, 고조와 증조에게는 매월 한 번씩,

고조 외의 먼 선조들께는 계절마다 한 번씩,

하늘과 땅의 신들에게 지내는 제사는 일 년에 한 번씩

그리고 융적의 군주가 천자를 접견하는 것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 한번만 하면 되도록 했습니다.

 

선왕께서 그와 같은 유훈을 남기신 이유는

조부와 부친에게 매일 제사를 올리면서 자기의 생각을 새롭게 하라는 뜻이며,

고조와 증조에게 매 달 사(祀)를 올리라고 한 이유는

자기가 내린 호령 중에 잘못된 바가 없는지를 살펴보라는 뜻이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먼 조상들에게 형(亨)을 지내라 한 목적은

자기가 정한 법과 제도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살펴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세공(歲貢)을 가져와 바치라고 한 이유는

상하(上下)와 존비(尊卑)의 구분을 분명히 하라는 뜻이며

또한 이족(夷族)의 군주에게 일생 동안 한번만이라도 내조하여

천자를 조현 하라는 명은 인의예악(仁義禮樂) 등을 그들에게 가르쳐

왕화의 덕을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상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그 의무를 행하라고 했음에도

옛날과 같이 그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서 제품이나 공물을 바치지 않고

또한 이족(夷族)의 수장들은 내조하여 조현을 행하지 않을 경우는

그 위반한 제후들이나 군주들에게 죄를 주거나 정벌했습니다.

 

매일 지내는 제(祭)에 제품을 보내지 않는 제후들은 잡아와 형벌을 내리고,

매 달 지내는 사(祀)에 제품을 보내지 않은 제후들은

군사를 보내어 공벌(攻伐)을 행하고

계절마다 지내는 형(亨)에 제품을 보내지 않은 제후들은 정토(征討)하고,

매 년 공물을 보내지 않는 만이의 군주들은 사자를 보내어 그 잘못을 꾸짖었으며,

내조하여 조현의 예를 행하지 않은 융적(戎狄)의 군주들은 사자를 보내어

잘못을 밝혀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래서 형벌에 관한 법률이 생겼고

공벌(攻伐)을 하기 위한 군사에 관한 법을 만들었으며

정토(征討)를 하기 위한 무기와 장비를 마련하였으며

위엄을 갖추어 왕명을 위반한 제후들을 꾸짖었으며

조현을 행하지 않은 이족의 군주들에게는 문서를 만들어 그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명령을 선포하고 공문을 써서 회유를 함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제품을 바치지도 않고 또한 조현을 하러 오지 않는다면

더욱 덕을 새롭게 쌓아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백성들을 소집하여 멀리 원정길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는 제후들은 명을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한 멀리 있다고 해서 복종하지 않는 제후들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하는 크게 안정이 되었고

견융의 군주들인 대필(大畢)과 백사(伯士)가 죽자

황복의 견융이 내조하여 천자를 조현하자 천자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매년 조공을 올리지 않는다면

네가 보고 있는 저 천자의 군사들로 정벌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자께서는 선왕께서 군사의 위력을 과시하여 이족(夷族)들을 다스리지 말라는

유훈을 버리셨으니 장차 이 일로 해서 많은 고초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견융의 백성들이 이미 돈후한 풍습을 갖추고 우리 조상들이 전래시킨 미덕을 지켜

시종여일하게 군주가 바뀔 때마다 한번 씩 입조 하여 조현의 의무를 이행해 왔습니다.

 

내조하러 왔던 그들을 보니 우리들에게 대항할 역량이 있어 보였습니다."

 

목왕이 제공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은 서융을 정벌하기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으나

결과는 단지 백랑(白狼)과 사슴 네 마리만을 잡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일로 해서 그 후로는 황복의 땅에 살던 견융은 결코 내조의 예를 행하지 않았다.

 

천하의 제후들이 서로 간에 불화하기 시작했다.

 

보후(甫侯)가 목왕에게 상주하기를 형법(刑法)을 제정해 달라고 하였다.

 

목왕이 대답했다.

 

"나라를 가지고 있는 천하의 제후들이여!

채읍(采邑)을 가지고 있는 대신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훌륭하고 완벽한 형법을 이르겠노라!

 

지금 그대들이 백성들을 안무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땅히 어질고 덕이 높은 인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백성들을 엄하게 대하여 복종시키는데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바로 형법이 아니겠는가?

 

여러 가지 송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죄에 해당하는 법을 적용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원고와 피고가 모두 대령하면 옥관(獄官)들은

다섯 가지 방면을 말하는 오사(五辭)의 방법으로 양쪽을 살펴봐야 한다.

 

오사의 결과 확실하게 믿을 만하면

죄형에 따라 오형(五刑)중에서 해당하는 합당한 형을 판결해야 하며

그러나 만일 오형 중에 마땅한 조항을 적용시키기가 어려울 때는

속죄금을 내는 오벌(五罰) 중에 한 가지로 판결하고,

오벌을 적용하기가 마땅치 않으면 오과(五過)를 적용하라.

 

오과의 어려운 점은 관옥(官獄)과 내옥(內獄)일 것이다.

 

이런 경우는 관리와 죄수의 죄를 고관 귀족으로 하여금

그 죄상을 분명하게 조사하게 하여 범죄자와 동일하게 벌을 주어야 한다.

 

오형을 내리기에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죄를 감하여 오벌로 하고

오벌을 내리기에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면

그 죄를 면밀히 살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게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조사하는 방법이 합당해야 백성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고,

심문할 때는 오로지 근거에 입각해야 하며,

증거가 적당하지 않아 의심나는 점이 없다면

모두가 하늘의 도리를 받들어 함부로 형벌을 사용하면 안 된다.

 

경형(黥刑)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그 사안이 미심쩍으면 감하고

백율(百率)을 적용하여 황철(黃鐵) 600량을 바치도록 하면서

그 죄를 적어 세상에 널리 알리라.

 

의형(劓刑)의 죄를 지었으나 그 죄에 미심쩍은 바가 있다면 죄를 감하여

이백율(二百率)을 적용하여 황철 1200량을 바치도록 하고

그 죄목을 나열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라.

 

빈형(臏刑)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그 증거가 확실하지 않을 때는

그 죄를 감하여 삼백율(三百率)을 적용하여 황철(黃鐵) 1800량을 바치도록 하고

그 죄를 적어 공포하도록 하라.

 

궁형(宮刑)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의심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죄를 감형하여

오백율(五百率)을 적용하여 황철 3000량을 바치도록 한 후에

그 이유를 적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라.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그 혐의가 확실치 않으면 그 죄를 사하여

천율(千率)을 적용하여 황철 6000량을 바치게 하여 그 죄를 열거하도록 하라.

 

묵형(墨刑)과 의형(劓刑)에 해당하는 죄는 각각 1000 가지,

빈형에 해당하는 죄는 500가지, 궁형에 해당하는 죄는 300가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200가지로

다섯 가지 죄에 해당하는 죄는 모두 합하여 3000가지이다."

 

목왕(穆王)이 법을 공포하고 이를 보형(甫刑)이라고 명했다.

 

목왕이 재위 55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왕(共王) 예호(繄扈)가 즉위하였다.

 

공왕이 경수(涇水)에 나가 물놀이를 할 때

밀국(密國)의 강공(康公)이 따라가 수행하였다.

 

그 때 미모의 세 여인이 강공을 찾아와 몸을 의탁하였다.

 

강공의 모친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너는 그 여인을 반드시 왕에게 바치거라!

 

무릇 짐승도 세 마리가 모이게 되면 무리를 지을 수 있고

미녀 셋이 모이면 세상을 아름답게 빛내는 찬(粲)이라고 한다.

 

제후가 왕과 같이 사냥을 할 때는 왕보다는 짐승을 많이 잡아서는 안 되고,

또한 왕과 같이 출행을 나갈 때는

백성들로 하여금 수레에서 내리게 해서 자기에게 인사를 시켜서도 안 되며,

군왕도 비빈(妃嬪)을 취할 때

한 집안에서 같은 자매 셋을 동시에 취하는 일을 삼가하고 있다.

 

지금 너에게 몸을 의탁하러 온 여인 셋은 모두 아름답기가 그지없는데

너는 무슨 덕이 있다고 그 여인들은 모두 취하려고 하느냐?

 

군왕도 아직까지 그러한 일을 감당하지 못했거늘

너 같은 소인이 무슨 덕으로 이 세 미녀를 감당하려고 하느냐?

 

무릇 소인이 귀중한 보물을 취하게 되면

결국은 그것으로 인하여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밀강공(密康公)은 세 여인을 공왕에게 바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일 년 후에 공왕은 밀국을 멸했다.

 

공왕이 죽고 그의 아들 의왕(懿王) 간(艱)이 뒤를 이었다.

 

주왕실은 더욱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시인들이 이때부터 시를 지어 주왕실의 일을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

 

의왕이 죽자 공왕의 동생인 벽방(辟方)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효왕(孝王)이다.

 

제후들이 효왕을 쫓아내고 의왕의 태자였던 자섭(子燮)을 옹립하였다.

 

이가 이왕(夷王)이다.

 

이왕이 죽고 그 아들 려왕(厲王) 호(胡)가 즉위하였다.

 

려왕이 30년 동안 재위하면서 이(利)를 탐하여 영이공(榮夷公)을 가까이 하였다.

 

대부 예량부(芮良夫)가 려왕에게 간했다.

 

"왕실이 장차 쇠약해지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이공이 눈앞의 이만 탐하고 있는 행위는

장차 나라에 큰 재난을 몰고 올 화근이라는 사실을 어찌하여 모르십니까?

 

무릇 이(利)란 온갖 일에서 발생하며, 또한 천지만물의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홀로 독점하니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악이 발생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천지간의 만물은 모든 사람이 취하여 같이 사용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유독 한 사람에게만 독점하게 하십니까?

 

장차 백성들이 이로 인하여 분노를 하게 되면 그때는 아무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영이공이 재물과 이로써 대왕의 마음을 혹하게 하니

대왕께서는 어찌 오랫동안 왕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왕 된 자는 마땅히 각종 재물을 개발하여 나온 이익을

상하 군신들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며,

신(神)과 사람 및 만물로 하여금 각기 그들의 몫을 얻게 하시고

또한 매일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을까 조심하시고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송(訟)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思文后稷 克配彼天   문덕에 빛나는 후직은, 능히 저 하늘과 짝하셨고

立我烝民 莫匪爾極   우리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셨으니

                            어찌 지극한 덕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또 대아(大雅)에 노래하기를


陳錫載周    두루 복을 내리사 주 천하가 되었도다


이것은 이익을 두루 나누어주면서도

오히려 환난이 일어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조심했기 때문에 우리 주나라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천자께서 이익을 독점하는 방법을 배우려하시고 계시니

이것이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필부가 이익을 독점하려 하면 사람들은 그를 도적과 같은 사람이라고 욕을 하는데

하물며 왕이 이러한 일을 행하려 하니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만약 천자께서 영공(榮公)을 계속 쓰신다면 주나라는 조만 간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려왕은 제공의 말을 듣지 않고

마치내 영공을 경사(卿士)에 임명하여 주나라의 국정을 맡겼다.

 

려왕이 포학무도(暴虐無道)하고 방종교오(放縱驕傲)하니

국인들이 모두 왕을 비방하였다.

 

소공이 간하여 말했다.

 

"백성들이 천자의 명을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이 노하여 위(衛)나라에서 무당을 불러와 천자를 비방하는 국인들을 감시하게 했다.

 

위무(衛巫)에게 고변 당하는 국인들은 모두 잡아다가 죽였다.

 

그러자 왕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없어지고 제후들은 입조하여 조현을 들이지 않았다.

 

려왕 34년 백성들을 더욱 엄하게 다스리니

국인들이 길을 가다가 만나도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 눈짓만을 하며 지나쳤다.

 

려왕이 기뻐하며 소공에게 말했다.

 

"내가 능히 국인들의 비방하는 말을 막았다.

이제는 아무도 함부로 나를 비방하지 못하고 있다."

 

소공이 말했다.

 

"이것은 장(障)이라 국인들의 입을 막아서 억지로 말을 못하게 막는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의 입을 막는 행위는 마치 물길을 막는 것과 같아 막힌 물이 일단 터지면

둑이 무너져 몸을 상하는 사람이 많게 됩니다. 백성들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수를 하는 자들은 물길을 열어서 물을 흐르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는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연유로 왕이 정사를 돌볼 때 공경들로부터 사(士)에 이르는 일반 관리들에게는

정치의 득실을 논한 시(詩)를 지어 바치게 하고 악사(樂師)들에게는 악곡을,

사관(史官)에게는 역서(曆書)를,

악관(樂官)들의 장인 태사(太師)에게는 잠언(箴言)을 짓게 해서 바치게 했습니다.

 

또한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공경과 사대부들이 지어서 바친 시를 읊게 하고,

실명한 장님에게는 태사가 지은 잠언을 낭독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백관들에게는 왕에게 간하도록 하고

서인들에게는 자기들의 뜻을 전하여 왕에게 알리도록 했으며

좌우의 근신들에게는 백관들이 바르게 간하도록 살펴보도록 했습니다.

 

또한 왕의 종친들이나 친족들에게는 왕이 잘못한 점을 보완하게 하고

태사(太師)와 태사(太史)는 잠언(箴言)과 사서(史書)로써 왕을 교도(敎導)하도록 하고

백관들 중 나이가 많이 든 사(師)나 부(傅)의 직에 있는 기애(耆艾)들은

항상 왕에게 훈계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 왕은 이 모든 것들을 참작하여 일을 행하여

낭패를 당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입이 있음은

마치 세상에 소용되는 재물들이 생성되어 나오는 땅의 산과 내가 있는 것과 같고,

또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나오는 고원(高原), 저습지(低濕地), 평원(平原),

관개수(灌漑水) 가 흐르는 옥야(沃野) 등의 땅과 같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모두 나타나게 되어

좋은 일은 행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땅에서 얻어지는 재물들을

모두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에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릇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걱정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어 하는 말은

여러 번 생각한 끝에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일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가겠습니까?"

 

려왕이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 안에서는

아무도 감히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그런 상태로 3년이 되던 해에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 려왕을 습격하였다.

 

려왕은 백성들을 피해 체(彘)로 달아났다.

 

이해가 공화(共和) 원년으로써 기원전 841년의 일이었다.

 

려왕의 태자 정(靜)이 소공의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국인들이 몰려와

소공의 집을 에워싸고 태자를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다.

 

소공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내가 여러 번 도망친 왕에게 간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난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오늘 만일 왕태자를 잡아서 죽인다면

나는 군왕의 원수가 되어 나를 원망하지 않겠는가?

 

무릇 군주를 모시는 자는 자기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 군주를 원망하지 않는 법이고 군주가 자기를 책망하더라도 노하면 안 되는 법인데

하물며 천자를 모시는 사람으로써 어찌 내가 그의 원수가 될 수 있겠는가?"

 

소공이 말을 마치고 즉시 그의 아들을 대신 백성들에게 내주어 죽게 하고

태자 정을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소공과 주공이 상국이 되어 왕 대신 주나라를 다스렸다.

 

이 기간 동안을 공화(共和)라고 한다.

 

공화 14년 즉 기원전 828년에 려왕이 체(彘)에서 죽었다.

 

그때 태자 정(靜)은 소공의 집에서 숨어살면서 장성하게 되었다.

 

두 상국이 뜻을 같이하여 태자 정을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이가 선왕(宣王)이다.

 

선왕이 즉위하자 두 상국이 보좌하여 주나라의 정치가 크게 쇄신되어 문무(文武)와

성강(成康) 때의 유풍을 본받게 되자 천하의 제후들이 다시 주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선왕 12년 즉 기원전 816년에 노무공(魯武公)이 입조하여 천자를 조현했다.

 

선왕이 천무(千畝)에 가서 적전(籍田)을 경작하지 않자

괵공(虢公)이 간하여 불가함을 말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선왕 39년 즉 기원전 789년에 천무에서 강융(羌戎)과 싸웠으나

싸움에서 패하여 군사를 크게 잃었다.

 

선왕이 남방의 강회지간(江淮之間)에서 동원한 군사를

천무의 싸움에서 모두 잃어버리자

그 충원을 위해 태원(太原)의 백성들을 징집하기 위해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중산보(仲山甫)가 불가함을 간했으나 선왕이 듣지 않고 결국은 백성들을 징집하였다.

 

선왕 46년 즉 기원전 782년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 궁생(宮湦)이 뒤를 이었다.

 

이가 유왕(幽王)이다.

 

유왕 2년 즉 기원전 780년 서주의 삼천(三川)에 지진이 났다.

 

태사(太史) 백양보(伯陽甫)가 말했다.

 

"주나라가 장차 망하려는 징조입니다.

 

무릇 천지의 기란 그 순서가 흐트러지면 안 되는 일이며 만약 그 순서가 무너졌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양기가 안에 머물러 밖으로 나올 수 없고 음기가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내 몰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번에 삼천에 일어난 지진도 양기가 없어지고 음기가 쌓여서 그리 된 것입니다.

 

양기가 없어지고 음기만 만연하게 되었으니 땅에 흐르던 기운이 막히게 되어

수원(水源)이 막히게 되고 수원이 막히게 되면 나라는 필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물과 땅은 기름져야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여 재화를 생산할 수 있으며,

토지가 있다 하나 물이 흐르지 않아 기름지지 못하다면

백성들을 재화가 부족하게 되어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이수(伊水)락수(洛水)의 물이 마르자 하나라가 망하였으며,

하수(河水)가 마르자 또한 상(商) 나라가 망했습니다.

 

오늘 주나라의 덕이 마치 하은(夏殷) 두 대의 말년과 같아

우리나라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삼천(三川)이 막혔 으니

이는 곧 삼천의 물이 마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릇 나라의 정권은 산천에 의지하게 되어 있어

산이 붕궤되고 하천이 마르는 천재는 망국의 징조입니다.

 

또한 하천의 물이 마르면 필시 산이 붕궤되고,

나라는 10년이 넘지 않아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10년은 숫자가 시작되고 끝나는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나라를 망하게 할 때는 10년을 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해에 삼천의 물이 마르고 다시 기산(岐山)이 붕궤되었다.

 

유왕 3년 즉 기원전 779년 유왕은 포사(褒姒)를 얻어 매우 사랑하였다.

 

포사가 백복(伯服)이라는 아들을 낳자

유왕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대신 세우려고 했다.

 

태자의 모친은 신후(申侯)의 딸로써 정궁(正宮)이었다.

 

후에 유왕이 포사를 얻어 사랑하게 되자 신후(申后)를 폐했다.

 

그와 동시에 태자도 폐하고 포사를 정궁으로 하고 백복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태사 백양보가 큰 소리로 역서(歷書)를 읽으면서 외쳐 한탄하였다.

 

"주나라는 이제 망하게 되었다."

 

옛날 하후씨(夏后氏) 말년에

두 마리의 신룡(神龍)이 하나라 임금의 궁정(宮庭)에 날아와 말했다.

 

"우리들은 포성(褒城)의 옛날 군주들이다."

 

하나라 임금이 점을 치니 죽이거나, 쫓거나 궁 안에 머무르게 하거나

모두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치게 하니 용의 타액을 받아 보관하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래서 제단을 만들어 폐백을 제물로 올리고 간책(簡冊)에 글을 써서

두 마리의 용에게 고하자 용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용의 침만 남아있었다.

 

하나라 임금이 명하여 용의 타액을 목갑에 넣어 부고(府庫)에 깊숙이 보관하도록 했다.

 

하나라가 멸망하고 그 목갑은 은나라에 전해지고

다시 은나라가 망하고 주조에 전해졌다.

 

삼대가 지나도록 아무도 감히 그 목갑을 열어보지 못했으나

주나라 려왕(厲王) 말년에 목갑을 열어 살펴보게 되었다.

 

목갑을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던 용의 침이

궁정의 뜰 위로 흘러 청소하려 했으나 없애지 못했다.

 

려왕이 명하여 여자들로 하여금 옷을 벗게 하여

벌거벗은 몸으로 큰 소리로 떠들어 주문을 외우게 했다.

 

그러자 용의 타액이 갑자기 검은 색의 큰 자라로 변하더니

왕비가 사는 후궁으로 기어 들어갔다.

 

후궁에서 왕비를 모시던 육 칠 세 가량의 어린 궁녀가 자라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가 성년이 되어 아이를 배어 남자와 접촉하지 않고 아이를 낳게 되자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밖에다 내다 버렸다.

 

선왕(宣王) 때 어린 계집아이들이 동요를 불렀다.

 

"염호기복(檿弧箕箙)으로 주나라가 망하리라!"

 

선왕이 듣고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을 만들어 팔고 있던 부부를

잡아서 죽이도록 명하자 그 부부는 먼저 알고 도망치다가

대로에서 그 후궁의 동녀(童女)가 낳아서 버린 갓난아기를 발견했다.

 

한밤중에 아기가 큰 소리로 울어대자

그 부부가 불쌍히 여겨 거두어 안고 포성(褒城)으로 달아났다.

 

포성의 군주가 유왕에게 죄를 짓자 후궁의 어린 궁녀가 낳아 버린 아기가 성장한

미인을 구해서 왕에게 바치며 속죄를 청했다.

 

버려진 아기가 자란 곳이 포성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포사라 했다.

 

유왕 3년 즉 기원전 779년에 유왕은 포사를 얻어 사랑하여 후궁으로 삼아

그 사이에서 백복(伯服)을 낳았다.

 

그래서 신후(申后)와 태자를 폐하고 포사를 정비로 삼고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태사 백양보가 한탄하며 말했다.

 

"화가 이미 닥쳤으나 이를 어찌할 수가 없구나!"

 

포사는 평소에 웃지 않았다.

 

유왕이 포사를 웃게 만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녀는 결코 웃지 않았다.

 

유왕이 봉화를 올리고 북소리를 크게 울려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황급히 달려왔으나

외적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해 하자 포사가 크게 웃었다.

 

포사가 웃는 모습을 본 유왕이 기뻐하여 계속해서 봉화를 올리게 하였으나

그 후로는 제후들이 믿지 않고 달려오지 않았다.

 

유왕이 괵석보(虢石父)를 경사(卿士)로 삼아 국정을 맡기자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석보라는 위인은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아첨에 능하고 재물을 탐하는 자였으나

유왕이 총애하여 국정을 맡겼다.

 

다시 신후(申后)를 폐하고 태자는 신국(申國)으로 쫓아 버리고

포사를 정비로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신후(申侯)가 노하여 증국(繒國)과 서이(西夷)의 견융(犬戎)과 힘을 합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유왕을 공격하였다.

 

유왕이 봉화를 올려 구원병을 불렀으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온 제후들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은 유왕은 여산(驪山) 밑에서 죽고 포사는 사로잡혔다.

 

신후는 주나라의 부고에 있던 모든 재물들을 견융과 증국에 주어

그들의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런 다음 신후가 제후들과 상의하여 유왕의 태자였던 의구를 불러

주나라의 왕위를 잇게 하고 주나라 사직에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가 평왕이다.

 

 

 

- 東周 本紀

 

평왕이 즉위했으나 주나라 도읍 종주(宗周)는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모두 폐허가

되고 또한 견융이 부단히 침략해 왔음으로 이를 피하여 도읍을 락읍(駱邑)으로 옮겼다.

 

주나라는 평왕 때에 이르러 더욱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세력이 센 제후들은 세력이 약한 주위의 제후들을 공격하여 병합하기 시작하여

제(齊), 초(楚), 진(晉), 진(秦)등이 방백이 되어 주왕실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평왕 49년, 기원전 722년,

노은공(魯隱公)이 즉위했다.

 

 

평왕 51년, 기원전 720년,

평왕이 죽었으나 태자 설(洩)이 일찍 죽어 그 뒤를 잇지 못하고

평왕의 손자인 림(林)이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환왕(桓王)이다.

 

 

환왕 3년, 기원전 717년,

정장공(鄭庄公)이 래조했으나 환왕이 예를 갖추어 대하지 않았다.

 

 

환왕 5년, 기원전 715년,

정백(鄭伯)이 원한을 품고 태산에 제사 지내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어서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주왕실이 정나라에 하사했던 노나라 근처의 팽전(祊田)과

주공에게 제사 지내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라고 하사했던

정나라 인근의 노나라 소유인 허전(許田)을 바꾸었다.

 

 

환왕 8년, 기원전 712년,

노은공(魯隱公)이 시해되고 노환공이 섰다.

 

 

환왕 13년, 기원전 707년,

환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정벌하였으나

오히려 환왕 자신이 정나라 장수가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하자 회군하였다.

 

 

환왕 23년, 기원전 697년,

환왕이 죽고 태자 타(佗)가 즉위하였다. 이가 장왕(庄王)이다.

 

 

장왕 4년, 기원전 693년,

주공 흑견(黑肩)이 장왕을 죽이고 왕자 극(克)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신백(辛伯)이 그 사실을 장왕에게 고하여 주공 흑견은 잡혀서 죽고

왕자 극(克)은 연(燕)나라로 도망쳤다.

 

 

장왕 15년, 기원전 682년,

장왕이 죽었다. 그 아들 호제(胡齊)가 뒤를 이었다. 이가 리왕(釐王)이다.

 

 

리왕 3년, 기원전 679년, 제환공(齊桓公) 패자(覇者)를 칭하기 시작했다.

 

 

리왕(釐王) 5년, 기원전 677년,

리왕이 죽었다. 그 아들 랑(閬)이 뒤를 이었다. 이가 혜왕(惠王)이다.

 

장왕이 살아 있을 때 장왕은 비첩(婢妾) 요희(姚姬)를 사랑하여

그 사이에서 왕자 퇴(頹)를 낳았다. 장왕이 왕자 퇴를 총애하였다.

 

혜왕이 즉위하여 2년, 째 되던 해에 변백(邊伯)등 오대부(五大夫)의 장원을 빼앗아

왕실 전용의 동물원으로 만들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변백 등의 오대부들은 란을 일으켜

연(燕)과 위(衛)의 군사들을 불러들여 혜왕을 공격했다.

 

혜왕이 온(溫) 땅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정(鄭)나라 땅인 력읍(櫟邑)으로 몸을 피했다.

 

오대부가 왕자 퇴를 주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자퇴와 오대부들이 매일 온갖 음악과 춤으로 즐기면서 세월을 보내자

정백과 괵공이 노했다.

 

 

혜왕 4년, 기원전 673년,

정백과 괵공이 군사를 동원하여 왕자 퇴와 오대부를 공격하여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혜왕 10년, 기원전 667년,

제환공(齊桓公)에게 방백의 직위를 내렸다.

 

 

 

혜왕 25년, 기원전 652년,

혜왕이 죽고 태자 정(鄭)이 즉위하였다. 이가 양왕(襄王)이다.

 

양왕의 모친은 일찍이 죽고 계비를 다시 세웠다.

 

이가 혜후(惠后)다.

 

혜후가 아들 숙대(叔帶)를 낳았다.

 

혜왕이 숙대를 매우 사랑하자

태자의 신분으로 있었던 양왕은 이를 매우 두려워했었다.

 

 

 

양왕 3년, 기원전 649년,

 

숙대가 융(戎), 적(翟) 등과 모의하여 양왕을 공격하였다.

 

양왕이 숙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숙대는 몸을 피해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환공이 관중(管仲)은 주나라에,

습붕(隰朋)은 진(晉)나라에 각각 보내어 융(戎)을 평정하게 하였다.

 

혜왕이 관중(管仲)을 상경(上卿)에게 행하는 예를 따라 대하였다.

 

관중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미천한 관료이고 지금 우리 제나라에는 왕실에서 직접 명하여 나라를 지키고

있는 고(高)씨와 국(國)씨 집안의 대대로 내려온 왕의 신하인 상경(上卿)이 있습니다.

 

만약에 매년, 봄과 가을에 왕명을 받들기 위해 입조하고 있는 두 상경이 왕도에 오면

그때는 그 분들을 무슨 예를 행하여 대하시려고 하십니까?

 

두 분의 상경으로 인하여 제가 감히 상경의 예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구씨(舅氏)의 나라에서 온 사신이라 그대의 큰 공적을 기리고자하니

그대는 짐의 명을 거역하지 말라!"

 

관중이 결국은 하경(下卿)의 예를 받고 돌아왔다.

 

 

 

양왕 9년, 기원전 643년,

제환공(齊桓公)이 죽었다.

 

 

 

양왕12년, 기원전 640년,

제나라로 도망친 왕자 숙대(叔帶)의 죄를 용서하여 귀국을 허락하였다.

 

 

 

양왕 13년, 기원전 639년,

 

정나라가 활국(滑國)을 공격하자 왕이 유손(游孫)과 백복(伯服)을 보내 활국을 위해

정나라에 강화를 청하였으나, 정나라는 오히려 두 사람을 옥에 가두어버렸다.

 

당시 정백(鄭伯) 문공(文公)은 원래 문공의 부군(父君)인 정려공(鄭厲公)이

괵공(虢公)과 함께 왕자 극(克)을 토벌하여 혜왕(惠王)을 복위시켜

주왕실에 큰공을 세웠으나 혜왕이 괵공에게만 주기(酒器)와 옥작(玉爵)를 하사하고

려공에게는 단지 동경(銅鏡)만을 하사한 일에 대해 원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양왕(周襄王)이 위(衛)나라와 활국(滑國)만을 비호했음으로

분노한 정백이 유손과 백복 두 사람의 왕사(王使)를 옥에 가둔 것이다.

 

양왕이 노하여 적(翟)을 시켜 정(鄭)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부신(富辰)이 간하며 말렸다.

 

"옛날 우리 주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때

진(晉)과 정(鄭)나라의 힘에 의존한 바가 컸습니다.

 

왕자 퇴(頹)의 난(亂) 때도 정나라가 도와주어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사소한 원한 때문에 정나라를 버리시는 일은 불가합니다."

 

양왕이 부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양왕 15년, 기원전 637년,

 

왕이 적(翟)의 군사들을 시켜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왕이 적(翟)의 도움에 감격하여 적주(翟主)의 딸을 비로 삼으려고 했다.

 

부신이 다시 간했다.

 

"평왕(平王), 환왕(桓王), 장왕(庄王), 혜왕(惠王) 네 분의 왕들께서

모두 정나라의 도움을 입었습니다.

 

왕께서 왕실과 동성인 정나라를 버리고

오랑캐 나라인 적주와 친하게 지내심은 불가합니다."

 

양왕이 역시 부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양왕 16년, 기원전 636년,

 

왕이 적후(翟后)를 쫓아내 별궁에 유폐시켰다.

 

적인(翟人)이 쳐들어와 적후를 유폐시킨 양왕의 행위를 견책하고

담백(譚伯)을 죽였다.

 

부신이 말했다.

 

"제가 누차에 걸쳐 정(鄭)나라를 버리고

적국(翟國)과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고 간했던 이유는

이와 같은 결과가 일어나 대왕의 원망을 듣게 지나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부신이 말을 마치고 성안의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군(翟軍)과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당초에 혜후(惠后)가 왕자 대(帶)를 주왕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여

자기의 심복들을 시켜 길을 열어 적인(翟人)들을 주나라로 불러들였다.

 

양왕은 어쩔 수 없이 정나라로 도망치자 정나라는 양왕을 범읍(氾邑)에 안치시켰다.

 

왕자 대(帶)가 스스로 주왕의 자리에 올라 양왕이 쫓아내고

유폐시킨 적후(翟后)를 취하여 비로 삼은 다음 온(溫) 땅으로 가서 머물렀다.

 

 

 

양왕 17년, 기원전 635년,

 

진문공(晉文公)이 왕자 대(帶)를 잡아서 죽이고 양왕을 주왕에 복위시켰다.

 

양왕이 이어서 진문공에게 규(珪)와 창(鬯) 및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동궁적시(彤弓赤矢)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진문공(晉文公)을 방백으로 명하고

다시 하내(河內)의 다섯 고을의 땅을 진(晉)나라에 주었다.

 

 

 

양왕 20년, 기원전 632년,

 

진문공(晉文公)이 양왕(襄王)을 하양(河陽)의 천토(踐土)로 불렀다.

 

제후들이 달려와 양왕에게 조현(朝見)을 드렸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기술할 때 이일을 꺼려하여

‘천자가 사냥을 하기 위해 하양(河陽)으로 나갔다.’라고 썼다.

 

 

 

양왕 24년, 기원전 628년,

진문공(晉文公)이 죽었다.

 

 

양왕 31년, 기원전 621년,

진목공(秦穆公)이 죽었다.

 

 

양왕이 재위 32년만인 기원전 620년에 죽고 태자 임신(任臣)이 뒤를 이었다.

 

이가 경왕(頃王)이다.

 

경왕이 재위 6년만인 기원전 613년에 죽고 그의 아들 반(班)이 섰다.

 

이가 광왕(匡王)이다.

 

광왕이 재위 6년만인 기원전 607년에 죽고 그의 동생 유(瑜)가 뒤를 이었다.

 

이가 정왕(定王)이다.

 

 

 

정왕 원년, 기원전 606년,

 

초장왕(楚庄王)이 육혼(陸渾) 땅의 융(戎)을 정벌하고 락읍에 사자를 보내어

주나라의 구정(九鼎)에 관하여 물었다.

 

정왕이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구정은 천명에 의해 전해질 뿐이라고 대답하게 하자

초장왕이 군사를 물리쳐 회군하였다.

 

 

 

정왕 10년, 기원전 597년,

 

초장왕이 군사를 끌고 와서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백(鄭伯)이 성에서 나와 항복하였으나 곧바로 나라를 회복하였다.

 

 

 

정왕 16년, 기원전 591년,

초장왕이 죽었다.

 

 

정왕이 재위 21년만인 기원전 586년에 죽고 그의 아들 이(夷)가 즉위하였다.

 

이가 간왕(簡王)이다.

 

 

 

간왕 13년, 기원전 573년,

 

진(晉)나라 신하들이 그 군주인 려공(厲公)을 시해하고

공자 주(周)를 주나라에서 불러와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이가 진도공(晉悼公)이다.

 

간왕이 재위 14년만인 기원전 572년에 죽고 그의 아들 설심(泄心)이 즉위하였다.

 

이가 영왕(靈王)이다.

 

 

 

영왕 24년, 기원전 548년,

제나라의 최저(崔杼)등이 그들의 군주인 제장공(齊庄公)을 시해하였다.

 

 

 

영왕 27년, 기원전 545년,

왕이 죽고 그 아들 귀(貴)가 즉위하였다.

 

이가 경왕(景王)이다.

 

 

 

경왕 18년, 기원전 527년,

왕비가 낳은 태자가 매우 영명(英明)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경왕 20년, 기원전 525년,

 

경왕이 왕자 조(朝)를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미처 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왕자 개(丐)의 무리와 왕자 조의 일당들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조신(朝臣)들이 경왕의 장자인 왕자 맹(猛)을 옹립하여 왕위에 즉위시켰으나

왕자 조(朝)가 맹을 공격하여 죽였다.

 

왕자 맹(猛)의 시호는 도왕(悼王)이다.

 

진후(晉侯)가 왕자 조를 공격하여 왕자 개(丐)를 주왕으로 세웠다.

 

이가 경왕(敬王)이다.

 

 

 

경왕 원년, 기원전 519년,

 

진(晉)나라가 경왕을 입국시켜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왕자 조가 본국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음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택(澤)에 머물렀다.

 

 

 

경왕 4년, 기원전 516년,

 

진후가 제후들을 거느리고 경왕을 호송하여 왕도로 들어갔다.

 

왕자 조(朝)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반열에 서서 경왕을 받들었다.

 

제후들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주성(周城)의 성곽을 수리했다.

 

 

 

경왕 16년, 기원전 504년,

왕자 조(朝)의 일당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경왕은 진(晉)나라로 도망쳤다.

 

 

경왕 17년, 기원전 503년,

진정공(晉定公)이 경왕을 호송하여 주나라에 환국 시켰다.

 

 

 

경왕 39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군주인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경왕 41년, 기원전 479년,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했다. 공자(孔子)가 향년,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경왕이 재위 42년만인 기원전 478년에 죽고 그 아들 인(仁)이 즉위하였다.

 

이가 원왕(元王)이다.

 

원왕이 재위 8년만인 기원전 469년에 죽고 그의 아들 개(介)가 즉위하였다.

 

이가 정왕(定王)이다.

 

 

 

정왕 16년, 기원전 453년,

 

삼진(三晋)인 한(韓), 위(魏), 조(趙) 삼가(三家)가 힘을 합하여 지백(智伯)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정왕이 재위 28년만인 기원전 442년에 죽고 정왕의 장자인 거질(去疾)이 섰다.

 

이가 애왕(哀王)이다.

 

애왕이 즉위한지 3개 월 만에

그의 동생 숙(叔)이 애왕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사왕(思王)이다.

 

사왕이 스스로 왕이 된지 5개 월만에

그의 막내 동생인 외(嵬)가 사왕을 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가 고왕(考王)이다.

 

이 세 왕은 모두 정왕의 아들들이었다.

 

고왕이 재위 15년만인 기원전 426년에 붕(崩)하고 그의 아들 오(午)가 뒤를 이었다.

 

이가 위열왕(威烈王)이다.

 

고왕이 그의 동생을 하남(河南)에 봉했다.

 

이가 환공(桓公)이다.

 

흑견(黑肩)이 죽은 후로 계속해서 비어있던 주공(周公)의 자리를

환공으로 하여금 잇게 했다.

 

환공이 죽고 그 아들 위공(威公)이 뒤를 이었다.

 

위공이 죽고 다시 그의 아들 혜공(惠公)이 뒤를 잇고는

자기의 막내 아들을 공(鞏)에 봉하고 천자를 받들도록 했다.

 

이가 동주의 혜공(惠公)이다.

 

 

 

위열왕(威烈王) 23년, 기원전 403년,

 

구정(九鼎)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 해에 이르러 왕은 한(韓), 위(魏), 조(趙)

삼가(三家)의 수장(首長)들을 제후로 봉했다.

 

위열왕이 재위 24년만인 기원전 402년에 죽고 그 아들 교(驕)가 즉위하였다.

 

이가 안왕(安王)이다.

 

이 해에 도적들이 초성왕(楚聲王)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안왕이 즉위 26년 만인 기원전 376년에 죽고 그 아들 희(喜)가 뒤를 이었다.

 

이가 열왕(烈王)이다.

 

 

 

열왕 2년, 기원전 374년,

 

주나라 태사 담(儋)이 진헌공(秦獻公)을 보고 말했다.

 

"원래 주와 진(秦)은 한나라였다가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그 후로 500년후에 다시 합쳤다가 다시 17년후에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

 

 

열왕 재위 7년, 기원 369년에 죽고 동생 편(扁)이 즉위하였다.

 

이가 현왕(顯王)이다.

 

 

 

현왕(顯王) 5년, 기원전 364년,

진헌공(秦獻公)을 치하하고 방백의 직위를 내렸다.

 

 

 

현왕 9년, 기원전 360년,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 지낸 고기를 진효공(秦孝公)에게 보냈다.

 

 

현왕 25년, 기원전 344년,

진나라가 제후들을 주나라에 모이게 하여 회맹을 가졌다.

 

 

현왕 26년, 기원전 343년,

주왕실이 진효공에게 방백의 칭호를 내렸다.

 

 

현왕 33년, 기원전 336년,

왕이 진혜왕(秦惠王)을 치하하였다.

 

 

현왕 35년, 기원전 334년,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진혜왕에게 보냈다.

 

 

현왕 44년, 기원전 325년,

 

진혜왕(秦惠王)이 왕호를 칭했다.

 

그 후에 모든 제후들이 같이 따라 왕호를 사용하였다.

 

현왕이 재외 48년만인 기원전 321년에 죽고 그 아들 정(定)이 즉위하였다.

 

이가 신정왕(愼靚王)이다.

 

신정왕이 재위 6년만인 기원전 31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연(延)이 즉위하였다.

 

이가 난왕(赧王)이다.

 

난왕이 재위에 있을 때에 주나라는 동서로 나뉘어 다스려 지게 되었다.

 

난왕은 도읍을 서주(西周)로 옮겼다.

 

서주 무공(武公)의 공태자(共太子)가 일찍 죽었다.

 

무공에게는 5명의 서자가 있었을 뿐 옹립할 적자가 없었다.

 

사마전(司馬翦)이 초왕(楚王)에게 말했다.

 

"땅을 주어 공자 구(咎)를 태자로 옹립하는 편이 차라리 좋을 것입니다."

 

좌성(左成)이 반대하며 말했다.

 

"불가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땅을 주어 공자 구(咎)를 돕는 일을 주나라가 오히려 반대한다면

주공의 처지만 어렵게 되어 주나라와의 관계는 멀어 지게 됩니다.

차라리 사마전(司馬翦)을 보내

주나라 왕이 누구를 태자로 세우고 싶은지 잘 살펴보라고 명한 후에

그로 하여금 초왕에게 왕자 구(咎)를 위해 땅을 청해보겠다고

넌지시 암시하게 하십시오."

 

결국 서주는 공자 구(咎)를 태자로 삼았다.

 

 

 

난왕(赧王) 8년, 기원전 307년,

 

진(秦)나라가 의양(宜陽)을 공격하였다.

 

초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구했다.

 

그러나 초나라는 주나라가 오히려 진(秦)나라를 도왔다고 의심하여

거꾸로 주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소대(蘇代)가 초왕에게 주나라를 위해 유세하였다.

 

"어찌 감히 주나라가 진나라를 불러들이는 화를 스스로 자초했겠습니까?

 

주나라가 초나라보다 진나라를 더 가까이 대한다고 견책하심은

결과적으로 주나라를 진나라로 보내는 일과 같으며

그리되면 소위 진나라는 ‘주진(周秦)’이 될 것입니다.

 

주나라가 자기들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필시 그들은 매 번 진나라에 부탁하게 되고

이는 진나라가 주나라를 취하는 아주 교묘한 책략이리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을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말씀드린다면

주나라가 진나라와 가까이 지낸다 할지라도 왕께서는 다만 좋다고만 말하시고

또한 주나라가 진나라와 멀어 지더라도 다만 좋게만 대하시어

주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멀어지게 하십시오.

 

그리되면 주나라는 진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초나라로 돌아올 것입니다."

 

진(秦)이 동서(東西)의 두 주나라의 길을 빌려 한(韓)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주나라는 길을 빌려주자니 한나라의 후환이 두려웠고

빌려주지 않자니 진(秦)나라의 위세가 두려웠다.

 

사염(史厭)이 주왕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한(韓)나라의 공숙(公叔)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의 실정을 전하지 않으십니까?

 

한공숙(韓公叔)에게

 ‘진나라가 감히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은 동주(東周)를 믿기 때문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동주에게 얼마간의 땅을 떼어주고

초나라에는 인질을 보내지 않는가?’ 라고 전하게 하여

한나라가 우리의 말대로 한다면 진나라는 초나라가 구원병을 보낼까 두려워하고

또한 한나라로부터 땅을 할양받은 동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한나라를 정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진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강한 한나라가 주나라에게 땅을 떼어 준 것은

장차 주(周)가 진(秦)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의심했기 때문이며

주나라로서는 감히 그 땅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말하게 하면 진나라는 필시 주나라로 하여금

한나라의 땅을 받지 말라고 말할 명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나라가 한나라로부터는 땅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진나라로 하여금 우리의 말을 듣도록 할 수 있을 방책입니다."

 

진나라가 서주(西周)의 왕을 불렀으나 서주왕이 가기를 꺼려하였다.

 

그래서 서주왕이 사람을 한나라 왕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진나라가 주왕을 부른 목적은 장차 한나라 땅인 남양(南陽)을 공격하기 위해서입니다.

 

한왕께서는 어찌하여 군사를 남양으로 보내지 않으십니까?

 

서주왕은 이로써 진나라의 부름에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아도 되고

또한 서주왕이 진나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감히 하수를 건너 남양(南陽)을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주와 서주가 싸움을 하자 한나라가 서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동주를 위하여 한왕(韓王)에게 말했다.

 

"서주는 천자의 나라라 옛날부터 전해오는 명기(名器)와 보물이 무수히 많습니다.

 

대왕께서는 잠시 군사의 출정을 보류하시면 동주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서주는 부고에 있는 명기와 보물들을 가지고 와서 대왕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고, 결국은 서주의 명기와 보물들은 모두 대왕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난왕(赧王)이 성군(成君)이라고 불리었다.

 

초나라가 한나라 땅인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한나라가 동주에게 갑옷과 양식을 구했다.

 

동주의 임금이 두려워하여 소대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소대가 말했다.

 

"군주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능히 한나라로 하여금 그들의 청을 거두어들 이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군주를 위하여 고도(高都)의 땅까지 얻어서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주나라 임금이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 된다면 앞으로는 그대의 말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겠소."

 

소대가 한나라의 상국을 만나서 말했다.

 

"초나라가 옹지의 땅을 석 달을 기한으로 정하여 포위했는데

지금 다섯 달이 넘도록 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나라가 이미 지쳐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상국께서 우리 주나라에 갑옷과 식량을 구하라고 하신 명령은

지쳐있는 초나라에 한나라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고한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나라 상국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그래서 한나라 상국이 사자를 주나라에 보내

갑옷과 식량을 구하라는 명령을 취소한다고 전하게 했다.

 

소대가 다시 한나라 상국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주나라에게 고도(高都)를 주지 않습니까?"

 

한나라 상국이 대노하며 소대를 꾸짖었다.

 

"내가 이미 갑옷과 식량을 구하라는 명을 거두어들여

주나라 역시 많은 것을 이미 취했는데 무슨 연고로 고도를 주나라에 주라고 하는가?"

 

소대가 말했다.

 

"만일 한나라가 고도를 주나라에 준다면 주나라는 그 뜻을 꺾어 한나라와 친해지고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진나라는 대노하여 주나라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周)와 진(秦)은 사자의 왕래가 끊어지게 되고

이는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고도(高都)로써 주나라를 얻게 되는 일입니다.

 

어찌하여 주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한나라 상국(相國)이 말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소!"

 

과연 한나라는 고도의 땅을 주나라에 주었다.

 

 

 

난왕 34년, 기원전 281년,

 

소려(蘇厲)가 주왕(周王)에게 말했다.

 

"진나라가 한위 두 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장수 사무(師武)를 크게 패퇴시키고

다시 북쪽의 조나라 땅 인(藺)이석(離石)의 두 고을을 취할 수 있었음은

모두가 백기(白起) 장군의 용병술 덕분입니다.

 

진나라는 용병에 능한 장수를 많이 거느리고 또한 하늘의 명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장수들과 군사들을 일으켜 새(塞)를 나와 위나라의 대량(大梁)을 공격하니

만일 대량이 떨어진다면 우리 주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왕께서는 사람을 보내 백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하게 하여 설득하시기 바랍니다.

 

"초나라에 양유기(養由基)라는 활의 명인이 있었다.

 

백 보 앞에서 버드나무 잎을 쏘아서 백발백중으로 맞추자

좌우에 있던 수천 사람이 보고 모두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의 장부가 곁에 있다가 말했다.

 

 ‘활을 매우 잘 쏘니 내가 가르칠 만하다.’

 

양요기가 듣고 노하여 활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칼을 허리에서 뽑아 손에 들고

그 장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대가 어떻게 나를 가르친단 말인가?’

 

그 장부가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왼손으로는 손을 쭉 뻗어 활을 지탱하고 오른 손으로는 활시위를

잡아당겨 활을 구부리는 방법으로 활 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말이 아니오.

 

무릇 버들잎을 백보 밖에서 활로 쏘아 백발백중 맞힌다 해도

 쉴 때를 모른다면 오래가지 않아 기가 떨어지고 힘이 딸려 활이 흔들려

화살을 과녁에 맞출 수가 없게 된 상태에서 마지막 한발이 빗나간다면

백발이 다 쓸모없게 될 것이오.

 

오늘 장군께서 한(韓)과 위(魏)의 군사를 파하고

또한 위나라 장수 사무(師武)를 크게 무찔렀고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조나라의 인(藺)과 이석(離石) 두 읍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니

공의 공적(功績)은 이미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다시 군사를 이끌고 새(塞)를 통과하여 이주(二周)를 지나 한(韓)나라를 등지고

위(魏)나라의 대량(大梁)을 공격하다가 만일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앞서 세운 공들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공은 차라리 병을 핑계하여 출전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난왕 42년, 기원전 273년,

 

진나라가 화양(華陽)에서 위나라와의 약속을 깨뜨렸다.

 

주나라의 대신 마범(馬犯)이 주왕에게 말했다.

 

"청컨대 저로 하여금 위(魏)나라의 양왕(襄王)에게 사절로 보내어

우리 주나라의 성을 쌓으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마범이 위(魏)나라에 가서 양왕에게 말했다.

 

"주왕이 병들어 만일 죽게 된다면 이 마범도 틀림없이 죽게 될 것입니다.

 

제가 청하옵건대 구정(九鼎)을 대왕에게 바치게 하겠으니

대왕께서는 이 마범의 뒤를 돌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양왕이 대답했다.

 

"구정만 가져온다면 그대의 장래는 내가 돌보아 주리라!"

 

양왕은 즉시 군사를 마범에게 주고 주나라를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게 했다.

 

마범이 다시 진왕(秦王)에게 가서 말했다.

 

"위나라가 군사를 보낸 목적은 주나라를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주(周)나라를 공격하여 병합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왕께서는 시험삼아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나가

위나라 군사들의 동태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범의 말을 들은 진왕이 과연 군사를 출병시켰다.

 

마범이 다시 양왕에게 달려가 말했다.

 

"주왕이 병이 호전되었음으로

제가 구정을 가져오려고 해도 성공하기가 쉽지가 않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주왕의 병이 다시 깊어지면

그 때 다시 도모하여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대왕께서 군사를 주나라를 보내어 지키고 있다고는 하나

천하의 제후들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있어 후에 구정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주나라에 군사를 보낸다면 그때는 제후들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보내신 군사들에게 명하여 주나라 성을 쌓게 하신다면

우리가 구정을 탐내서 군사를 보낸 사실을 숨길 수 있습니다."

 

양왕이 허락하여 위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주나라 성을 쌓으라고 명했다.

 

 

 

난왕 45년, 기원전 270년,

 

진나라에서 온 주왕의 빈객(賓客)이 주나라 공자인 주최(周最)에게 말했다.

 

"공께서 만약에 진왕의 효도에 대해 칭송하고

그로 인하여 태후의 식읍으로 응(應) 땅을 바친다면 진왕은 필시 기뻐하게 되어

이는 공이 진나라와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진나라와의 교류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면

주왕은 필시 공(公)이 공(功)을 세웠다고 상을 내리겠지만

진나라와의 사이가 원만하게 되지 않는다면

주왕에게 진(秦)나라와 교류를 맺으라고 전한 사람은 필시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공격하자 주최가 진왕을 찾아가 말했다.

 

"왕을 위해 계책을 드린다면 주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주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실리(實利)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진나라의 위세는 천하를 두렵게 할뿐입니다.

 

진나라의 위세를 천하가 두렵게 여긴다면

필시 제후들은 동쪽의 제나라와 힘을 합치게 됩니다.

 

진나라의 병사들이 주나라를 공격하다가 지치게 되면

천하는 모두 제나라를 중심으로 힘을 합하게 되고

그리 되면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게 됩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지치게 만들려고 왕께 권하여

주나라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진과 그 밖의 나라들이 모두 지치게 된다면

천하에 령이 서지 않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난왕 58년, 기원전 257년,

 

삼진(三晋)이 힘을 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주왕(周王)이 상국에게 명하여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으나

진나라가 주나라의 상국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에 중도에서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주나라의 상국에게 말했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중하게 여기는지 가볍게 여기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진나라는 삼진(三晋)의 정세를 알고 싶어하니

상국께서는 급히 진나라에 납시어 진왕을 뵙고

'청컨대 왕을 위하여 동방의 정세를 고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면

공은 필시 진왕으로부터 중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나라가 공을 중히 여기게 되면 그것은 주나라를 중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써 주나라는 진나라의 신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제나라가 주나라를 중하게 여기게 된 연유는

주최(周最)가 옛날부터 제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주나라는 항상 강국들과 교분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주나라의 말을 믿고 군사를 동원하여 삼진(三晋)을 정벌하였다.

 

 

 

난왕(赧王) 59년, 기원전 256년,

 

진(秦)이 한(韓)나라의 양성(陽城)부서(負黍)를 공격하여 취했다.

 

서주가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등을 돌리고 제후들의 합종(合縱)에 참여했다.

 

서주왕은 장차 천하의 정예 군사들을 이궐(伊闕)에 모이게 한 후에

진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여 이후로 진나라가 양성(陽城)을 통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진소왕(秦昭王)이 노하여 장군 규(摎)를 보내 서주를 공격하였다.

 

서주의 임금이 진나라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죄의 용서를 빌며

주나라의 36개 읍(邑)과 그 백성들 3만 명을 바쳤다.

 

진나라가 모두 받아들이고 주나라의 임금을 돌려보냈다.

 

난왕이 죽자 주나라 백성들이 동쪽으로 달아났다.

 

진나라가 주나라의 구정(九鼎)과 보기(寶器)들을 차지하고

주나라 왕을 탄호(憚狐)로 옮겨 살게 하였다.

 

그리고 7년, 후인 기원전 249년에 진(秦)의 장양왕(庄襄王)이 동주(東周)를 멸했다.

 

동주와 서주 모두 진나라에 병합되어 주나라 종묘에 대한 제사가 끊어 졌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했다.

 

"학자들은 모두 주(周)가 은의 주왕(紂王)을 멸하고 락읍(洛邑)에 거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왕이 락읍에 도성을 축조하고 성왕(成王)이 소공을 시켜 머물기에 어떠한지를

점을 치게 하고 구정(九鼎)을 옮겼으나 주나라는 풍호(豊鎬)에 도읍을 정했다.

 

견융(犬戎)이 침입하여 유왕(幽王)이 살해되자

주나라를 곧 동쪽의 락읍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소위 ‘주공을 필(畢)에 장사를 지냈다’라는 말에 나오는 필(畢)은

호경(鎬京)의 동남쪽에 있던 두중(杜中)이다.

 

진(秦)이 주(周)나라를 멸하고 나서 한(漢)나라가 90여 년만에 다시 일어났다.

 

한나라의 천자가 태산(泰山)에 제사지내기 위해 동쪽으로 순수(巡狩)하며

하남에 당도하여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 가(嘉)의 30리의 땅에 봉했다.

 

천자는 그 후손을 주자(周子) 남군(南君)이라고 부르고

열후(列侯)의 지위를 주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 참고 <지도로보는 동주열국지>

 

 

<최초의 소패왕 정(鄭) 장공莊公(BC743-BC701)시 주변국 형세도>

 

정(鄭)과 제(齊)는 동맹관계.

위(衛),노(魯),송(宋),진(陳),채(蔡) 연합이 정(鄭)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한다.

BC713년 정(鄭), 제(齊),노(魯) 연합은 송(宋),위(衛),채(蔡) 연합을 대파 한다.

BC707년 송(宋)연합을 공격한 정(鄭)에게 분노한 주(周) 桓王이

위(衛),진(陳),채(蔡)와 연합해 정(鄭)을 공격하여 실패한다.

 

 

 

<북융의 제 침공>

 

BC706년 북융(北戎)이 1만의 병력으로 연(燕),형(邢)을 뚫고 제(齊)를 침공하였으나

정(鄭)과 제(齊)가 연합하여 이를 막아낸다. 

 

 

 

<초(楚)의 북진>

 

정장공(莊公,B.C 743~701)사망으로 중원권이 일순간 힘의 공백상태에 빠졌을때,

반대로 초(楚)는 힘을 키우며 급격히 북상을 시작한다.

초(楚)는 최초 칭왕인 초(楚)무왕(B.C740~690)과

그의 아들 초문왕(B.C 689~677)을 거치고,

비운의 도화살 여인 식(息)부인의 아들인 초성왕때인 B.C 675년

결국 신(申)을 부용화 하며 중원 중심지역인 정(鄭)과 국경을 맞대게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잘생긴 제양공(齊襄公)이 비명횡사로 사망하며 내분을 겪을 당시,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각각 이복왕자인 규와 소백을 따라

왕자들 어머니 나라인 노(魯)와 거(莒)에 망명해 있었다.

포숙(鮑叔)의 기지로 소백이 먼저 도착해 왕권을 쟁취하며

제환공(齊桓公)으로 즉위한다(BC 685).

이로서 정장공 사망후 15~6년간 지속된 혼란한 중원에 힘의 공백기간이 끝나고

제환공(齊桓公)이 춘추시대의 패왕으로 등장한다.

 

 

 

<춘추오패도>

 

 

 

 

<전국칠웅도> (클릭하면 확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