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222년에 강(羌)족의 진(秦)이 황하(黃河)족들을 멸하고 중원 통일을 이루어 낸다.

 

진(秦)나라 북쪽에 옛날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의 유목민과 오르도스 지역의

토착민 세력을 통합한 흉노(匈奴)선우(單于) <묵특冒頓>이 남진하고 있었으며

그 동쪽에는 동호(東胡)가 서진하고 있어 이들의 충돌은 피할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기 흉노전(凶奴傳>에

 

“<묵특冒頓>이 강대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모두 복종시켰다.

좌방(左方)의 왕(王)과 대장(大將)들은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상곡(上谷)과 맞닿아 있고 그 동쪽으로 예맥ㆍ조선과 접해 있었다.”라고 했듯이

 

흉노(匈奴)의 <묵특冒頓>은 기원전 209년에 동호(東胡)를 공격하여

대(代) 지역 북쪽에서 지금의 내몽고자치주 용문(龍門) 동쪽까지

동호(東胡)를 밀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흉노(匈奴) <묵특冒頓>에게 밀린 동호(東胡) 세력은 열하(今 승덕) 부근에서

일부는 멀리 대흥안령 동쪽 지역까지 넓게 퍼져 살게 되었고,

토착 세력인 예(穢)족과 조선(朝鮮)에 흡수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고구려인들이 단일 민족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고대의 고구려는 토착세력인 예(穢)족과 맥(貊)족 외에

말갈족과 胡(흉노족)와 漢 등 다양한 민족이 융합된 공동체로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의 고대사 중 고구려의 실체를 알기 위하여는 漢과 흉노(胡)의 관계는 물론

호(胡)의 한 갈래인 선비족의 동태도 반드시 알아야한다.

 

흉노는 처음에 훈육(葷粥), 험윤(獫狁), 산융(山戎), 북융(北戎), 무종(無終) 등으로

불리다가 秦漢시대에 胡와 예맥으로 갈려 胡는 선비족으로 이어지고

예맥은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근 100년간에 걸친 漢匈전쟁은 漢의 인구가 4천만에서 2천만으로

절반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은 삼국시대를 거쳐 <사마염>이 晉을 건국하게 되고

흉노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남은 漢에 융화되고

북은 멀리 유럽 쪽으로 밀려가고 그 자리를 선비가 대신하게 된다.

 

 

우리는 진시황의 중원 통일을 지금의 전 중국 영토를 통일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日帝시대와 현 중국인들이 그려 놓은 지도 秦의 영토를 늘여 놓았다.

그러나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여 군현제를 실시한 지방조직은 36郡이었다.

기원 전후의 漢이 13州 103郡인 것에 비하면 1/3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현 중국 대륙의 태행산맥 이동은 秦의 영토가 아닌 부여와의 격전지였다.

 

 

 

- 진(秦) 36군(郡) 설치 연혁

 

 

 

 

1. 상군(上郡) : BC328년 위(魏) 惠王이 상군(上郡) 15현(縣)을 진나라에 바침

                     진나라가 처음으로 설치한 군으로 치소는 부시(膚施)이다.

                     부시(膚施)는 현재의 섬서성 유림(榆林) 남쪽이다.

 

 

2. 촉군(蜀郡) : BC314년 진(秦) 혜문왕이 <사마착>을 보내 병합함

                     치소는 현재의 사천성 성도(成都)이다.

 

 

3. 파군(巴郡) : BC314년 진(秦) 혜문왕이 <사마착>을 보내 병합함

                     치소는 강주(江州)이다.

                     강주(江州)는 현재의 사천성 중경(重慶)이다.

 

 

4. 한중군(漢中郡) : BC312년 초나라를 공격해 병합함

                           치소는 남정(南鄭)이다.

                           남정(南鄭)은 현재의 섬서성 한중(漢中)이다.

 

 

5. 농서군(隴西郡) : 진 소양왕 28년(BC279)에 설치함.

                           치소는 적도(狄道)이다

                           적도(狄道)는 현재의 감숙성 란주(蘭州)이다.

 

 

6. 남군(南郡) : BC278년 <백기>가 초나라의 서울 영(郢)을 점령하고 설치함.

                     치소는 강릉(江陵)이다.

                     강릉(江陵)은 현재의 호북성 형주(荊州)이다.

 

 

7. 남양군(南陽郡) : BC291년 <백기>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완(宛)을 점령하고

                           BC272년에 남양군을 설치함.

                           치소는 완(宛)이다.

                           완(宛)은 현재의 하남성 남양(南陽)이다.

 

 

8. 북지군(北地郡) : BC271년에 선 태후가 의거의 왕을 감천궁으로 유인하여 죽이고

                           의거를 병함 함.

                           치소는 의거(義渠)이다.

                           의거(義渠)는 현재의 감숙성 천수(天水)이다.

 

 

9. 상당군(上黨郡) : BC262년 한(韓)나라가 조(趙)나라에게 뺏김.

                           BC260년 장평전투에서 조나라가 진나라에 뺏김.

                           치소는 장자(長子)이다.

                           장자(長子)는 현재의 산서성 장치(長治)이다.

 

 

10. 삼천군(三川郡) : BC250년 동주(東周)를 멸망시키고 설치

                             치소는 현재의 하남성 낙양(洛陽)이다.

 

 

11. 태원군(太原郡) : BC247년 <몽오>가 조(趙)나라를 쳐서 병합함.

                             치소는 진양(晉陽)이다.

                             진양(晉陽)은 현재의 산서성 태원(太原)이다.

 

 

12. 동군(東郡) : BC244년 <몽오>가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설치함.

                       치소는 현재의 하남성 복양(濮陽)이다.

 

                 

13. 영천군(潁川郡) : BC230년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

                             치소는 양책(翟)이다.

                             양책(翟)은 현재의 하남성 허창(許昌)이다.

 

 

14. 한단군(邯鄲郡) : BC228년 조(趙)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현재의 하북성 한단(邯鄲)이다.

 

 

15. 거록군(鉅鹿郡) : BC228년 조(趙)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거록(鉅鹿)이다.

                             거록(鉅鹿)은 현재의 하북성 형태(邢台)이다.

 

 

16. 항산군(恒山郡) : 상산군(常山郡)이라고도 한다.

                             조나라가 BC296년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병합함

                             BC228년 조(趙)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동원(垣)이다.

                             동원(垣)은 현재의 하북성 석가장(石家庄)이다.

 

17. 안문군(雁門郡) : BC228년 조(趙)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선무(善無)이다.

                             선무(善無)는  현재의 산서성 산음(阴)이다.

 

18. 설군(薛郡) : BC224년 옛 노나라 땅에 설치함

                       치소는 노현(魯縣)이다.

                       노현(魯縣)은 현재의 산동성 곡부(曲阜)이다.

 

 

19. 형산군(衡山郡) : BC224년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주현(邾縣)이다.

                             주현(邾縣)은 현재의 호북성 황강(黃岡)이다.

 

 

20. 구강군(九江郡) : BC224년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곡양(曲陽)이다.

                             곡양(曲陽)은 현재의 강소성 목양(沐陽)이다.

 

 

21. 탕군(碭郡) : BC224년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수양(睢陽)이다.

                       수양(睢陽)은 현재의 하남성 상구(商丘)이다. 

 

 

22. 진군(陳郡) : 회양군(淮陽郡)이라고도 함.

                       BC224년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진현(陣縣)이다.

                       진현(陣縣)은 현재의 하남성 주구(周口)이다.

 

 

23. 사수군(泗水郡) : 패군(沛郡), 사천군(泗川郡)이라고도 함.

                             옛 송()나라 땅으로 제나라가 송나라를 멸하고 취했으나

                             초나라에 넘어 갔다가 BC224년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상현(相縣)이다.

                             상현(相縣)은 현재의 안휘성 회북(淮北)이다.

 

 

24. 회계군(會稽郡) :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의 땅이었다.

                             오나라는 월나라에 병합되고 월나라는 초나라에 병합되었다가

                              BC224년에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오현(吳縣)이다.

                             오현(吳縣)은 현재의 강소성 소주(蘇州)이다.

 

 

25. 장사군(長沙郡) : BC224년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임상(臨湘)이다.

                             임상(臨湘)은 현재의 호남성 장사(長沙)이다.

 

 

26. 상곡군(上曲郡) : BC223년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저양(沮陽)이다.

                             저양(沮陽)은 현재의 하북성 부평(阜平)이다.

 

 

27, 광양군(廣陽郡) : BC223년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계현(薊縣)이다.

                             계현(薊縣)은 현재의 하북성 탁주(涿州)이다.

 

 

28. 제북군(濟北郡) : BC222년 제(齊)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박양(博陽)이다.

                             박양(博陽)은 현재의 산동성 태안(泰安)이다.

 

 

29. 임치군(臨淄郡) : BC222년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임치(臨淄)이다.

                             임치(臨淄)는 현재의 산동성 치박(淄博)이다

 

 

30. 낭야군(琅耶郡) : BC222년 제(齊)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낭야(琅耶)이다.

                             낭야(琅耶)는 현재의 산동성 교남(膠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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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담군(郯郡) : BC222년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담현(郯縣)이다.

                       담현(郯縣)은 현재의 산동성 임기(臨沂)이다.

 

 

32. 성양군(城陽郡) : BC222년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설치함.

                             치소는 현재의 산동성 거현(縣)이다.

 

 

33. 하동군(河東郡) : BC221년에 진(秦)의 영토에 설치함.

                             치소는 안읍(安邑)이다.

                             안읍(安邑)은 현재의 산서성 운성(運城)이다.

 

 

34. 대군(代郡) : 대(代)나라를 정복한 조(趙)나라에서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BC221년에 대(代)로 도주한 조(趙)왕 <가嘉>를 죽이고 설치함

                       치소는 대현(縣)이다.

                       대현(縣)은 현재의 하북성 울현(蔚縣)이다.

 

 

35. 구원군(九原郡) : BC220년 <몽염>이 흉노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설치함.

                             치소는 구원(九原)이다.

                             구원(九原)은 현재의 내몽고자치구 포두(包頭)이다.

 

 

36. 운중군(雲中郡) : BC220년 <몽염>이 흉노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설치함.

                             치소는 운중(雲中)이다.

                             운중(雲中)은 현재의 내몽고자치구 호화호특이다.

 

                

 

 

 

- 진시황 본기 <代,燕,趙,齊 관련기사 발췌>

 

 

진시황(秦始皇)은 진(秦)나라 장양왕(庄襄王)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인질로 趙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을 보고 반하여 취했다.

이어서 시황을 낳았다.

 

진소왕(秦昭王) 48년 (BC 259) 정월에 한단(邯鄲)에서 태어나서

이름을 정(政)이고 성은 조(趙)라고 했다.

 

기원전 246년, 시황이 13살 때 장양왕이 죽고 정(政)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秦나라는 이미 파(巴), 촉(蜀), 한중(漢中)의 땅을 병합한 상태였고

완(宛)을 넘어가 영(郢)을 점령하여 남군(南郡)을 설치하고 있는 상태했다.

 

북쪽으로는 상군(上郡), 동쪽으로는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党)등을 점령하여

군현(郡縣)을 두었으며 형양(滎陽)에 이르러 이주(二周)를 멸하고

삼천군(三川郡)을 두었다.

 

<여불위呂不韋>를 상국으로 삼고 십만(十萬) 호(戶)의 문신후(文信侯)에 봉했다.

 

시황은 세상의 빈객(賓客)과 유세가(游說家)들을 불러서

그들을 이용하여 천하를 병합하려고 했다.

 

그들 중에서 <이사李斯>를 발탁하여 사인(舍人)으로 삼고

<몽오蒙驁>, <왕의王齮>, <포공麃公> 등은 장군으로 삼았다.

 

시황이 즉위할 때는 나이가 어려 모든 국사를 대신들에게 위임하였다.

 

 

완(宛)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에 있었던 고을로

춘추 때 초나라에 속했다가 전국 초에 韓나라 땅이 되었다.

韓 리왕(釐王) 5년, 秦 소양왕 16년(BC 291)에 秦나라가 빼앗아

BC272년 이곳에 남양군(南陽郡)을 설치했다.

 

 

남군(南郡)

지금의 호북성 강릉시(江陵市)에 있었던 초나라의 도성인 영(郢)을 秦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기원전 278년 점령하고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치소는 영(郢)이다.

 

 

 

상군(上郡)

전국시대 중기 때 魏 문후(文侯)가 명장 오기(吳起)를 시켜 하수(河水) 서쪽의 땅을

점령하고 그 땅의 남쪽에는 서하군(西河郡)과 북쪽에는 상군(上郡)을 설치했다.

秦 혜문왕(惠文王) 10년(BC 328)에 秦나라의 위협을 받은 魏나라가

그 상군(上郡)에 포함된 15개 현을 모두 바치고 이어서 BC 312년에는

상군의 남은 군현도 모두 진나라에 할양했다.

진나라는 BC 304년에 상군을 설치하고 치소를 부시(腑施)에 두었다.

부시(腑施)는 지금의 섬서성 북쪽, 유림(楡林)의 남쪽에 있었다.

 

 

하동(河東)

전국 때 위나라가 설치한 군(郡) 이름이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산서성 심수(沁水) 이서와 산서와 하남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황하의 북쪽 및 산서와 섬서의 경계인 황하의 이동지방과 곽산(霍山) 이남지방이다.

秦 소양왕(昭襄王) 17년 (BC290)에 秦나라의 위협을 받은 魏나라가

하동의 땅 400리를 들어 바쳤다.

진나라는 이곳에 하동군(河東郡)을 설치하고 치소를 임분(臨汾)에 두었다.

임분은 지금의 산서성 곡옥(曲沃) 북쪽이다.

 

 

태원(太原)

전국 때 趙나라 땅이었으나 BC 259년에 秦 소양왕이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趙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차지했다.

다음 해에 趙나라가 반격하여 다시 수복했으나

秦 효문왕 3년 (BC 247)에 다시 공격하여 빼앗은 다음

2년 후인 BC 245년에 태원군을 설치했다. 치소는 진양(晉陽)이다.

 

 

상당(上党)

원래 춘추 때 당진에 속한 땅이었으나 한위조(韓魏趙) 삼가가 당진을 삼분할 때

상당의 땅은 韓과 趙 두 나라가 나누어 가졌다.

韓의 상당군은 秦나라가 韓나라 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인 야왕성(野王城)을 점령하여

본국과 통하는 길을 막자 상당군의 관리들은 상당군을 들어 趙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BC 259년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진나라가 조나라의 대군을 궤멸시키고

상당군을 진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BC 236년에는 趙나라의 상당군마저 빼앗아 그 자리에 상당군을 설치했다.

치소는 장자(長子)다.

 

 

삼천군(三川郡)

황하(黃河), 락수(洛水), 이수(伊水) 등 세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 해서

삼천(三川)이라 이름지었다.

지금의 황하 이남, 하남성 영보(靈寶) 이동, 중모(中牟) 이서를 관할했다.

韓 선왕(宣王 : 재위 BC 332-312) 때 설치했다가

BC 249년 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韓나라가 삼천군을 바치자

秦나라는 이곳에 삼천군을 다시 설치했다.

 

 

 

 

 

시황(始皇) 원년 (BC 246),

진양(晉陽)이 반하자 장군 몽오(蒙驁)를 보내 평정했다.

 

 

진양(晉陽)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太原市) 청서현(淸徐縣)에 있었던 고을로

원래 趙나라가 일어설 때 도성이었으나

장양왕(莊襄王) 4년(BC 247)에 장군 왕흘(王齕)을 시켜 상당군을 점령한 다음

태원군을 설치할 때 진양(晉陽)도 진나라 땅이 되었었다.

 

 

 

시황 4년 (243)

창(暢)과 유궤(有詭)를 함락시켰다. 3월에 군사를 철수시켰다.

 

秦나라의 인질이 趙나라에서 돌아오고

인질로 와 있던 조(趙)나라의 태자가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10월 경인(庚寅) 날에 메뚜기 떼들이 동쪽으로부터 날아와 하늘을 가렸다.

천하에 전염병이 돌았다.

 

양식(糧食) 천 섬을 바친 백성들에게는 한 등급의 작호를 내렸다.

 

 

 

시황 6년 (BC241)

한(韓), 위(魏), 조(趙), 위(衛), 초(楚)가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고

수릉(壽陵)을 점령했다.

 

秦나라가 군사를 출병시키자 다섯 나라의 군사들이 물러갔다.

군사를 내어 위(衛)나라의 도성을 함락시키고

동군(東郡)으로 도망친 위군(衛君)의 뒤를 추격했다.

 

위군은 그의 종족들을 이끌고 야왕(野王)으로 달아나

그곳의 험한 산세에 의지하여 위(魏)나라의 하내(河內)땅을 차지하였다.

 

 

야왕(野王)

원래 韓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산서성 심양현(沁陽縣)으로

위(衛)나라 군주가 난을 피해 달아난 곳이다.

衛나라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秦나라 이세 황제 때까지 존속해 있었다.

 

 

 

시황 7년 (BC 240)

혜성이 동쪽에서 나타나더니 다시 북쪽에서 보였으며

5월에는 다시 서쪽에서 나타났다. 장군 몽오(蒙驁)가 죽었다.

용(龍), 고(孤), 경도(慶都)를 공격하던 군사를 이동시켜 급(汲)을 치게 하였다.

혜성이 다시 서쪽에 나타나 16일 동안 보였다. 하태후(夏太后)가 죽었다.

 

용(龍)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曲陽縣) 서남으로 전국 때 趙나라 성읍이다.

 

고(孤)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 북에 있었던 전국 때 趙나라의 성읍이다.

 

경도(慶都)

전국 때 趙나라 읍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 동북에 있었다.

 

급(汲)

현 하남성 급현(汲縣)으로 전국 때 위(魏)나라 땅이다.

 

 

 

시황 8년 (BC 239)

趙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한 시황(始皇)의 동생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보낸 토벌군에 의해 장안군은 둔류(屯留)에서 싸움 중에 죽고

그를 따르던 군리(軍吏)들을 모두 참수당했으며

그곳의 백성들은 모두 임조(臨洮)로 옮겨 살게 하였다.

 

<성교成蟜>의 토벌군 대장인 <벽壁>이 죽자

둔류(屯留)의 병졸이었던 <포학蒲鶴>이 다시 난을 일으켰으나 싸움 중에 죽었다.

 

시황은 명을 내려 <포학>의 시체를 찾아 육시(戮屍)의 형을 가했다.

 

하수(河水)가 넘쳐 많은 물고기들이 육지로 올라오자

사람들이 수레를 끌고 와서 잡아서 싣고 갔다.

 

<노애嫪毐>를 장신후(長信侯)로 봉하고

산양(山陽)의 땅을 봉지로 주고 그곳에 머물며 살게 했다.

 

궁실(宮室), 거마(車馬), 의복(衣服), 원유(苑囿), 사냥터 등

모두 <노애>가 제 멋대로 행했다.

 

나라의 모든 대소사는 <노애>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다시 하서(河西)의 태원군(太原郡)을 폐하고 <노애>의 봉지로 주었다.

 

 

둔류(屯留)

전국 초기 때 한(韓)나라 영토로 지금의 산서성 둔류현(屯留縣)이다.

 

임조(臨洮)

지금의 감숙성(甘肅城) 민현(岷縣) 경내로 만리장성의 서쪽 시발점으로 유명하다.

 

 

 

시황 10년 (BC 237)

상국(相國) <여불위呂不韋>가 <노애嫪毐>의 반란과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환의桓齮>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제(齊)와 조(趙) 두 나라가 술을 싣고 와서 바쳤다.

 

齊나라 사람 <모초茅焦>가 와서 진왕(秦王)에게 간했다.

 

「진나라가 바야흐로 천하를 도모하려는 순간에 있는데

대왕께서 모태후(母太后)를 옹성(雍城)의 별궁으로 보내어 살게 하셨으니

천하의 제후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모두 진나라에 등을 돌릴까 걱정이 됩니다.」

 

진왕이 곧 태후(太后)를 옹성(雍城)에서 함양(咸陽)으로 데려와

그 남쪽의 감천궁(甘泉宮)에 살게 하였다.

 

진왕이 타국 출신의 빈객(賓客)들을 모두 색출하여 쫓아내려고 하자

<이사李斯>가 서표(書表)를 올려 상소하였다.

 

진왕이 축객령(逐客令)을 취소하였다.

 

<이사>가 진왕에게 말하기를 먼저 한(韓)나라를 공격하여 취하면

그 밖의 다른 나라들이 두려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진왕이 이사에게 군사를 주어 한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한왕이 두려워하여 <한비자韓非子>와 함께

진나라의 공세를 늦추기 위한 계획을 의논하였다.

 

대량(大梁) 사람 <울료尉繚>가 와서 진왕에게 말했다.

 

「진나라의 국세가 강하게 되어 그 밖의 제후국들의 왕은

마치 진나라 군현(郡縣)의 군주와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은 제후들이 합종(合縱)하여 힘을 서로 합한 다음

불시에 진나라를 공격하게 될 것을 근심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곧 지백(智伯), 부차(夫差) 및 민왕(湣王)이 망한 원인이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제후국들의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의 지모를 어지럽게 하는 데는 불과 30만 금의 황금이면 족하여

그들을 모두 멸할 수 있습니다.」

 

진왕이 <울료>의 계책을 따르고 그를 접견할 때는 대등한 예절로 대하고

<울료>의 의복과 음식도 자기의 것과 같게 하였다.

 

<울료>가 측근에게 말했다.

 

「진왕이란 위인은 그 상이 우뚝 선 콧날, 가로 길게 찢어진 눈, 맹금(猛禽) 같은 가슴,

시랑(豺狼) 같이 쉰 목소리,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고 호랑이와 이리 같은 흉악한

마음을 가슴에 감추고 있으면서 자기가 곤궁할 때는 밑의 사람일지라도 몸을 굽히나

일단 자기의 뜻을 얻게 되면 쉽게 그 사람을 잡아먹는다.

지금은 나와 같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나를 대할 때는 항상 나에게 몸을 낮추고 있으나

진왕이 장차 일단 천하를 얻게 되면 천하는 모두 진왕의 노획물이 되어

그와는 결코 오랫동안 같이 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울료>는 즉시 秦나라에서 도망치려고 하였다.

 

秦왕이 듣고 한사코 간청하여 머물게 하고

진나라의 국위(國尉)로 삼아 결국은 <울료>의 계책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계책의 시행은 <이사>가 주관하게 했다.

 

 

지백(智伯)

당진(唐晉)의 강력한 권문세가인 지씨(智氏)의 수장으로

자기의 세력을 믿고 한(韓)과 위(魏) 두 나라와 함께

진양성(晉陽城)에서 농성중인 조(趙)씨들을 공격하다가

조씨들의 회유에 넘어간 한씨와 위씨들의 배신으로 오히려 싸움에서 패하고

<지백>은 살해되고 그 종족들은 멸족을 당했다.

한위조(韓魏趙) 삼가는 지씨들의 영토를 나누어 갖고

후에 당진(唐晉)을 삼분하여 전국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민왕(湣王)

齊 민왕(湣王)을 가리킨다. 재위 BC 300-BC284년.

제나라의 국력을 과신한 나머지 수시로 주변 제후국들을 침략했다.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회수 북쪽의 땅을 점령했고,

서쪽으로는 삼진(三晋)의 국경을 침범했다.

주나라를 엿보며 스스로 천자가 되려고 시도했다.

다시 대군을 발하여 송나라를 멸하자 격노한 秦 소야왕이

연(燕), 초(楚), 삼진(三晋) 등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5국은 각기 정예병들을 출동시켜 명장 <악의>를 대장으로 삼아

齊軍의 주력군을 임치성 밑에서 대파했다.

그는 도망쳐 거성(莒城)으로 들어갔으나 楚將 <요치淖齒>에 의해 살해되었다.

 

 

 

시황 13년 (BC 234)

<환의>가 趙나라의 평양을 공격하여 趙나라의 장수 <호첩扈輒>을 잡아서 죽이고

그 군사 10만의 목을 베었다.

 

秦왕이 하남(河南)으로 행차하였다.

 

그해 정월에 혜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났다.

 

시월에 <환의>가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시황 14년 (BC 233)

평양(平陽)에서 조군(趙軍)을 공격하여 의안(宜安)에서 파하고 그 장수를 잡아 죽였다.

 

<한비자韓非子>가 秦나라에 사자로 왔다.

 

秦왕이 <이사>의 계책을 써서 <한비자>를 억류시켰다.

 

<한비자>가 운양(云陽)에서 죽었다.

 

韓왕이 신하되기를 청했다.

 

 

 

시황 15년 (BC 232)

군사를 크게 일으켜 일군은 업성으로 일군은 태원(太原)으로 출병시키고

랑맹(狼孟)을 점령하였다.

 

이해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시황 18년 (BC 229)

군사를 크게 일으켜 趙나라를 공격했다.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형(井陘)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양단화楊端和>는 하내(河內)와 <강외羌瘣>의 휘하에 있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趙나라로 나아가 한단을 포위했다.

 

 

 

시황 19년 (BC 228)

<왕전王翦>과 <강외羌瘣>가 조나라의 마지막 남은 땅 동양(東陽)을 점령하고

趙왕을 사로잡았다.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연(燕)나라로 진격하기 위해

중산(中山)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秦왕이 한단(邯鄲)을 방문했다.

 

옛날에 秦왕이 趙나라에서 태어날 때

그의 외가와 원수진 사람들을 찾아서 모조리 산채로 땅에 파묻어 죽였다.

 

秦왕이 상군(上郡)과 태원(太原)을 거쳐 함양(咸陽)으로 돌아왔다.

 

秦왕의 생모가 죽었다.

 

趙나라의 공자 <가嘉>가 그 종족 수백 명을 대리고 대(代)로 가서

스스로 대왕(代王)이라고 칭하고

동쪽의 연(燕)과 군사들을 합하여 상곡(上谷)에 주둔했다.

 

큰 기근이 들었다.

 

 

 

시황 20년 (BC 227)

燕나라 태자 <단丹>이 秦나라가 군사를 보내 燕나라를 침공할 것을 걱정하여

<형가荊軻>를 자객으로 보내 秦왕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秦왕이 알고 <형가>를 잡아 사지를 찢어 죽이고 백성들에게 보였다.

 

또한 <왕전>과 <신승辛勝>을 장군으로 삼아 燕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燕과 代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秦나라 군사를 맞이해서 대항했으나

진나라 군사들은 燕과 代의 연합군을 역수(易水)의 서쪽에서 무찔렀다.

 

 

역수(易水)

지금의 하북성 역현(易縣)과 보정시(保定市) 사이 에 흐르던 황하의 지류

 

 

 

시황 21년 (BC 226)

<왕분王賁>이 燕나라의 도성 계성(薊城)을 공격하였다.

 

秦왕이 <왕전>으로 하여금 증원군을 이끌고 가서 왕분을 돕게 했다.

 

<왕전>은 燕나라 태자 <단>이 이끌던 연군(燕軍)을 격파하고 계성을 점령하였으며

태자 <단>의 목을 얻었다.

 

연왕은 요동(遼東)으로 도망가서 그곳의 왕이 되었다.

 

<왕전>이 나이가 들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관직에서 물러나

자기의 향리로 은퇴했다.

 

신정(新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창평군(昌平君)을 영성(郢城)으로 옮겨가 살게 하였다.

 

큰 눈이 내려 그 깊이가 두 자 다섯 치나 되었다.

 

 

 

시황 25년 (BC 222)

군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왕분>을 장수로 삼아 요동의 燕왕을 공격하게 했다.

 

<왕분>이 싸움 끝에 연왕 <희喜>를 사로잡았다.

 

회군하던 길에 대(代)를 공격하여 대왕 <가嘉>를 잡아 포로로 하였다.

 

<왕전>이 계속해서 초나라의 강수(江水) 이남 지역을 평정하고

월나라의 항복을 받아내어 그곳에 회계군(檜稽郡)을 설치하였다.

 

그해 5월에 천하에 잔치를 벌리게 하여 모든 백성들이 배불리 먹도록 했다.

 

 

 

시황 26년 (BC 221)

제왕(齊王) <건建>이 그의 상국 <후승后勝>을 시켜

齊나라의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여 秦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다.

 

秦나라가 요동으로 진군하여 燕왕을 사로잡아 회군하던 장군 <왕분>에게 명하여

행군로를 바꿔 제나라의 도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왕분>이 齊나라의 도성 임치성을 함락시키고 齊왕 <건建>을 사로잡았다.

 

진나라가 처음으로 천하를 하나로 합쳤다.

 

승상과 어사(御使)에게 령을 내리며 말했다.

 

「옛날에 한왕(韓王)이 그 땅과 옥새(玉璽)를 바치며 신하되기를 청하고는

후일에 가서 그 맹세를 배반하고 조(趙)와 위(魏)가 연합하여 우리 秦나라를 공격했다.

 

그래서 군사를 일으켜 韓나라를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내가 그것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전쟁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조왕(趙王)이 그의 상국(相國)인 <이목李牧>을 보내어 맹약을 맺었다.

 

그래서 인질로 와 있던 그의 아들을 돌려보내 주었다.

 

그러나 趙왕이 맹약을 위반하고 태원에서 반기를 들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趙나라를 토벌하고 趙왕을 사로잡았다.

 

趙나라 공자 <가嘉>가 도망쳐 대(代)에서 스스로 대왕이라고 칭했음으로

다시 군사를 내어 토벌하여 대를 멸망시켰다.

 

위왕(魏王)이 처음에는 秦나라에 입조 하여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오히려 한조(韓趙) 두 나라와 모의하여 우리를 습격하려고 했음으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여 그들을 파했다.

 

형왕(荊王) <헌獻>이 청양(靑陽) 이서의 땅을 바친다고 했다가

다시 그 약속을 어기고는 남군(南郡)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의 군사들을 습격하였다.

 

그래서 내가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형왕은 사로잡아 형(荊) 땅을 평정하였다.

 

연왕(燕王)이 혼미(昏迷)하여 그의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시켜

나를 암살하려고 하여 내가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그 나라를 멸했다.

 

제왕이 그의 상국인 <후승后勝>의 계책을 써서 우리 秦나라에 사절의 왕래를 끊고

반기를 들려고 하여 내가 군사를 보내어 제왕을 사로잡고 그 땅을 평정했다.

 

과인이 보잘것없는 몸으로써 군사를 일으켜 천하의 난을 평정할 수 있었음은

종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여섯 나라의 왕들이 모두 그들의 죄과에 대한 처벌을 받자 천하가 크게 안정이 되었다.

 

오늘 내가 명호를 바꾸지 않는다면 내가 이룩한 공업을 후세에 전할 길이 없다.

 

경들은 제호(帝號)를 논의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승상 <왕관王綰>, 어사대부(御使大夫) <풍겁馮劫>,

정위(廷尉) <이사李斯> 등이 의논하여 시황에게 고했다.

 

「옛날에 오제(五帝) 시대에는 그 땅의 크기가 천리를 넘지 않아

국경 밖에는 후복(侯服)과 이복(夷服)등으로 구분하여 제후들을 두었으나

그들 중에서 어떤 자들은 래조하고 어떤 자들은 입조하지 않았지만

임금은 그들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오늘 폐하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시어 잔적들을 소탕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해내(海內)의 땅을 모두 군현으로 만드셨으며 또한 법령을 하나로 통일하신 것은

상고(上古) 이래로 그 전례가 없었던 일이며

오제들도 미치지 못한 큰 공업을 이룩하셨습니다.

 

신(臣) 등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여러 박사들과 논의한 결과

 

‘옛날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및 태황(太皇)이 있었고

그 중에서 태황이 가장 귀한 이름이다.’ 라는 전고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존호(尊號)를 상주하여 올리오니

왕을 태황(太皇)으로 하고 그 명령을 제(制)라 하고 령(令)을 조(詔)라고 하시기 바라며

폐하께서 스스로를 칭할 때는 짐(朕)이라 칭하십시오.」

 

시황이 듣고 대답했다.

 

「태황(太皇)에서 태(太) 자를 빼고 그냥 황(皇)이라 칭하고

다시 옛날의 호칭인 제(帝) 자를 취하여 나를 부를 때는 ‘황제(皇帝)’라 하라!

다른 것들은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이어서 장양왕(庄襄王)을 태상황(太上皇)이라고 추존(追尊)하도록 했다.

 

시황이 다시 말했다.

 

「나는 옛날 상고 때 제왕이 시호(諡號)를 사용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중고(中古)에 이르러 호가 생기고 제왕이 죽으면 시호를 의논하여 정했다.

 

이는 자식이 그 부친의 호를 의논하고 신하들이 그 군주를 의논한 일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짐은 그것을 취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 이후로부터는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고 짐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고

후세는 그 수를 헤아려

이세, 삼세에서 수만 세에 이르도록 영원히 이어가도록 하겠다.」

 

시황제는 오덕(五德)이 순환하여 전해지는 것을 추론하여

周가 화덕(火德)으로 천하를 얻고 다시 秦나라가 周나라를 대신할 수 있었음은

周나라의 화덕이 이길 수 없는 수덕(水德)을

秦나라가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때를 수덕(水德)이 시작되는 해로 하고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다시 일년의 시작되는 날을 바꾸었다.

 

군신들이 조현하여 하례를 올리는 날도 10월 1일에 거행했다.

 

의복, 깃발, 부절 등은 모두 검은 색을 최상으로 삼았다.

 

또 숫자는 6을 기본으로 삼고 부절과 법관(法冠)등의 넓이도 여섯 치로 하고

수레의 폭을 6자로 다시 6자를 한 보로 하였다.

 

수레를 끄는 말도 6마리로 하였고 다시 하수의 이름을 덕수(德水)로 개명하였다.

 

이것은 모두 수덕(水德)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시황은 강인하고 엄혹하게 모든 것들을 법에 의지하여 해결하고

일체의 인은(仁恩)과 화의(和意)를 배제하고

각박하고 가혹한 자세로 일관하는 것만이 오덕의 명수에 부합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법만을 앞세워 한번 죄를 지으면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다.

 

승상 <왕관> 등이 건의하였다.

 

「제후들을 모두 멸하여 그 땅에 처음으로 군현(郡縣)을 설치하였으나

연(燕), 제(齊), 형(荊) 땅은 모두 이곳에서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에 왕을 두어 다스리지 않으면 안정 시킬 수 없습니다.

청컨대, 황자들을 그 곳의 왕으로 세우시기를 청하오니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시황이 <왕관> 등이 건의한 내용을 군신들끼리 의논하도록 했다.

 

군신들은 모두 찬성하였으나 정위 <이사> 한 사람만이 반대하며 말했다.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멸하고 주(周)를 세웠을 때

그의 수많은 자제와 동성의 친족들을 분봉하여 각 나라의 제후로 봉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왕실과는 소원해 지고 서로간에 싸움이 일어나 원수지간이 되고

심지어는 서로 간에 전쟁을 일으켜 정벌하고 죽이고 했습니다만

周천자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천하는 폐하의 조상들 신령에 힘입어 하나로 통일되어

모두가 군현으로 되었습니다.

 

폐하의 자제들과 공신들에게 이곳에서 얻어지는 부세로 중상(重賞)을 내리신다면

그들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가 다른 뜻을 품지 않게 하는 것이 곧 천하를 안정시키는 방법입니다.

 

제후들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시황이 말했다.

 

「천하의 제후들이 쉬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게 된 이유는

모두 제후들이 할거했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신령에 힘입어 천하를 처음으로 안정시켰는데

다시 제후들을 세운다면 그것은 곧 다시 전쟁의 씨앗을 심는 일과 같다.

 

그렇게 한다면 평화와 안녕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정위가 한 말이 옳다. 」

 

시황은 천하를 36군으로 나누고 각 군(郡)에는 수(守), 위(尉), 감(監)을 두었다.

 

백성들을 검수(黔首)라고 바꾸어 부르게 하고 천하에 큰 잔치를 벌이게 하였다.

 

다시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咸陽)에 모아놓고 녹여서 종과 악기를 만들고

다시 12개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각각 1000 석(石){30톤}으로

모두 궁전의 뜰 안에 세워 두었다.

 

법률과 무게와 길이를 재는 단위를 통일하고, 수레와 그 폭을 표준화 시켰다.

 

또한 문자의 서체는 한 가지만 쓰도록 했다.

 

진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조선(朝鮮)에 닿고

서쪽으로는 임조(臨洮)와 강중(羌中)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嚮戶),

북쪽으로는 황하를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음산(陰山)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천하의 부호들을 모두 함양에 옮겨 살게 하여 그 호수가 무려 12만 호에 달했다.

 

조상신을 모시던 종묘와 황제가 거했던 장대궁(章臺宮)

그리고 상림원(上林苑) 등은 모두 위수(渭水)의 남쪽 언덕에 자리 잡았다.

 

진나라가 제후들을 파할 때마다 그들의 궁실을 본떠

함양의 북쪽 언덕에 궁궐을 축조하여

함양의 남쪽 위수 강안으로 나있는 옹문(雍門)의 동쪽으로 나가

경수(涇水)와 합류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구름다리로 연결된

전각(殿閣)과 주각(周閣){망루}을 연이어 세우고 제후들을 멸할 때마다

그들로부터 얻은 미녀들과 종고(鐘鼓)로 그 건물들의 안을 채웠다.

 

 

요동(遼東)

이 때의 요수는 황화 중류로서 산서성 요동을 말한다.

 

 

 

 

시황 28년 (BC 219)

시황이 동쪽의 군현을 순무하기 위해 출행 길에 추역산(鄒嶧山)에 올랐다.

산 위에 비석을 세우고 노(魯) 땅의 유생(儒生)들과 의논하여

비석에 秦나라의 큰 덕을 찬양하는 글을 새겨 넣도록 했다.

다시 유생들에게 봉선(封禪)과 산천에 지내는 망제(望祭)의 의식에 대해 물었다.

이어서 태산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

태산에서 내려올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큰 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다.

그래서 시황은 그 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내렸다.

양보산(梁父山)에 다시 선(禪)을 행하고 다시 그곳에 비석에 비문을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세상의 법도를 밝게 하시고

신하들은 마음을 닦고 근신하였다.

 

황제 재위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하나로 만드시어

세상의 모든 제후들이 와서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게 되었다.

 

몸소 먼 변방까지 순수하시어 그곳의 백성들을 진무하시고

이어서 태산에 오르시어 동쪽의 끝을 바라보시니 따르던 신하들이

황제의 행적과 사업의 본업을 생각하여 황제가 이룩한 공덕을 찬양하였다.

 

치세의 도가 행해졌도다.

 

모든 산업은 그 마땅함을 찾고 일체의 법칙은 크게 진작되어

대의는 맑고, 밝으며, 아름답고 선하게 되어

후대 자손들에게 전하여 영원히 승계 되어 변하지 않게 될 지어다.

 

성스러운 황제께서는 영명(英明) 통달하시어 이미 천하를 평정하시고

추호도 국정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도다.

 

매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시고 저녁에는 잠자리에 늦게 드시면서

천하를 이롭게 할 원대한 계획을 도모하시고

백성들을 깨우치고 나라를 흥성 시킬 일에 골몰하셨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널리 깨우치고 멀거나 가까운 곳을 물론하고 치세를 이루어

황제의 성스러운 뜻을 사람이면 사람마다 높이어 받들었다.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셨고

남녀가 각기 예에 따라 유별하게 하였고 개개인의 직분에 충실하게 하셨다.

 

안과 밖이 분명히 구분되게 빛을 비추고

황제가 임하는 곳은 모두가 청정하고 편안하게 되었도다.

 

후세 사람들은 황제의 은혜로운 정치를 영원히 이어 받을 지어다.

 

그 교화는 끝이 없을 것이며

반드시 이 유조(遺詔)를 영원히 받들 것을 힘써 경계(儆戒)하노라!」

 

시황이 양보산에서 내려와 발해만을 끼고 돌아 동쪽으로 가서

황현(黃縣)추현(腄縣)을 지나 성산(成山)에 올랐다.

 

다시 서쪽의 추현(腄縣)으로 나가 지부산(之罘山)에 올라 그 곳에 비석을 세우고

진나라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새기도록 했다.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낭야산(琅邪山)에 오르자 매우 기뻐하며

그 곳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

 

다시 그 곳의 백성들 3만 호를 낭야대(琅邪臺) 밑으로 옮겨 살게 하고

나이가 12세 미만인 사람들에게는 그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었다.

 

낭야대를 다시 증축하고 석비를 세우고

진나라의 공덕을 노래한 시를 새기고는 자기의 득의한 심정을 노래했다.

 

「 황제께서 재위에 계신지 28년만에 새로운 시대를 여시었다.

 

법도가 바르게 정비되고, 만물의 질서가 바로 잡히니 인사를 분명히 하시고

부자지간은 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 성스러운 지혜와 인의로써 천하의 도리를 밝히셨다.

 

또한 동쪽으로 나가시어 그 땅을 순무하셨다.

 

대사를 끝내시니 곧 바닷가에 당도하셨다.

 

황제의 공덕으로 모두가 본업에 열심히 살고있다.

 

농업은 장려하시고 말업(末業){상업과 수공업}은 억제하니

백성들의 생활은 풍부하게 되고 온 천하는 한 마음 한뜻이 되었다.

 

기계와 기구의 규격은 한가지로 통일 하셨고 문자는 한가지로만 쓰게 만드시었다.

 

해와 달이 비추는 곳에 배와 수레가 다닐 수 있게 만드셨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 수명대로 천수를 누리고 살게 되어

그 뜻한 바를 얻지 못한 자가 없게 되었다.

 

사시의 때에 맞추어 일을 행하시니 과연 대진(大秦)의 황제 님이로다.

 

열악한 습속을 정비하시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 길을 가시어

백성들을 밤낮으로 돌보시느라 쉴 틈이 없으셨다.

 

의심을 없애고 법률을 정하시니

백성들 중 아무도 법과 기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들이 나누어 일을 맡으니

각 급의 관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알게 되어

모든 조치는 타당하게 되고 바르게 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황제의 지혜로움이 사방을 밝히기 때문이다.

 

존비와 귀천은 모두 자기의 분수를 넘지 않으며

간사한 자는 용납하지 않으며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만을 구하셨다.

 

일이 크거나 작거나 있는 힘을 다하여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다.

 

먼 지방의 궁벽한 곳의 관리도 오로지 엄숙하고 장엄한 태도로 임하여

정직과 충성을 다해 정치가 상궤를 벗어나지 않게 하셨다.

 

세상을 어지럽힌 자는 죽이고 세상에 해를 끼친 자는 제거하시어

이를 일으키시어 복을 가져다 주셨다.

 

때에 맞추어 일을 조절하니 모든 성읍은 번창하게 되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 군사와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육친(六親)들이 서로 보살피며 의지하니 세상에 도적이 없게 되었다.

 

백성들이 교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세상의 법령과 제도를 빠짐없이 알게 되었다.

 

육합(六合){천,지,동,서,남,북}안의 모든 것은 황제의 것이 아닌 것이 없도다.

 

서쪽으로는 유사(流沙){감숙성(甘肅省)과 신강성(新疆省)의 경계지역}를 건넜고

남쪽으로는 북호(北戶), 동쪽으로는 동해(東海),

북쪽으로는 대하(大夏)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넓히셨다.

 

세상의 어디에 살던 사람이고 황제의 신하가 아닌 사람은 없게 되었다.

 

이룩하신 공덕은 오제(五帝)를 뛰어넘으시고 그 은혜는 말과 소에게도 미쳤다.

 

황제의 은덕을 입지 않은 것은 없어 각기 자기 자리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천하를 하나로 합치고 호칭을 황제로 한 시황은 동쪽의 땅으로 순행을 행하여

백성들을 위무하고 랑야(琅邪)에 이르렀다.

 

시황을 수종한 열후(列侯) 무성후(武城侯) <왕리王離>,

열후(列侯) 통무후(通武侯) <왕분王賁>, 윤후(倫侯) 건성후(建成侯) <조해趙亥>,

윤후(倫侯) 창무후(昌武侯) <성成>, 윤후 무신후(武信侯) <풍무택馮毋擇>,

승상(丞相) <외림隗林>, 승상(丞相) <왕관王綰>, 경(卿) <이사李斯>,

경(卿) <왕무王戊>, 오대부(五大夫) <양규楊樛> 등이 해상(海上)에서 의논하였다.

 

「옛날의 임금이란 다스렸던 땅은 불과 1000리를 넘지 못했고

제후들은 각기 그들이 봉해진 땅에 의지하여 어떤 제후들은 래조하여 조현을 하고

어떤 제후들은 조현을 드리지 않으면서 서로 간에 강역들을 침략하고

천하를 어지럽혀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업적을 돌이나 청동에 새겨 스스로 기념했다.

 

옛날의 삼황오제는 그 가르침이 같지 않은 관계로

세상의 법도가 분명하지 않게 되자 귀신들의 힘을 빌려 원방(遠方)을 속였다.

 

그러나 실제와 명분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그들의 몸이 죽기도 전에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법도가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오늘 황제가 해내(海內)를 통일하여 모두 군현으로 만드셨으니

세상은 평화롭게 되었다.

 

종묘의 덕을 밝히시고 도를 체득하여 덕을 행하셨으니 황제란 존호를 크게 이루셨다.

 

이에 군신들이 의논하여 황제가 이룩한 공덕을 칭송하고

비문에 새겨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

 

해상에서 의논이 끝나자 제인(齊人) <서불徐市> 등이 서장(書狀)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이름하여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嬴洲山)이라고 하는데

신선(神仙)이 산다고 했다.

 

몸을 정결히 간수한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명을 청하여

삼신산의 신선을 찾겠다고 했다.

 

그래서 <서불徐市>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을 주어

바다로 나가게 하여 신선을 모셔오라고 했다.

 

시황이 도성으로 돌아오던 중 팽성을 지날 때 목욕재계하고 사당에 올라 기도하기를

사수(泗水)에 빠진 주정(周鼎)을 건지기 위해

천여 명의 인부들을 물속으로 들여보내 찾아보게 하였으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

 

이어서 시황이 행렬을 서남쪽으로 바꾸어

회수(淮水)를 건너 형산(衡山)과 남군(南郡)을 각각 방문했다.

 

다시 시황 일행의 행렬이 부강(浮江)을 건너 상산사(湘山祠)에 이르렀다.

 

길을 가던 중에 큰바람을 만나 오랜 시간 동안 상강(湘江)을 건널 수 없었다.

 

시황이 주위의 박사(博士)들에게 물었다.

 

상군(湘君)은 어떤 신(神)인가?」

 

박사들이 대답했다.

 

「듣자오니 요임금의 딸이며 순임금의 부인입니다.

상군이 죽어 장사 지낸 곳이라고 합니다.」

 

진시황이 듣고 화를 내며 3천 명의 죄수들을 풀어

상산(湘山)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게 하여 붉은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렸다.

 

남군(南郡)으로 나와 무관(武關)을 통과하여 함양으로 돌아왔다.

 

 

추역산(鄒嶧山)

고대의 산이름으로 주역산(邾嶧山), 추산(鄒山), 혹은 역산(嶧山)으로도 불린다.

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 동남쪽에 있다.

 

봉선(封禪)

태산(泰山)에 올라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봉(封)이라 하고

양보산(梁父山)에 올라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옛날 선인들이 태산(泰山)에 지내는 제사를 봉(封)이라 하고

태산의 낮은 봉우리인 양보산(梁父山)에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 한다.

 

태산에 봉하는 방법은 흙으로 제단을 쌓아

그 위에 금분으로 겉을 칠한 궤(几)속에 폭이 좁은 옥편(玉片)에

제문을 적어서 넣은 후에 올려놓고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다.

 

하늘은 높으니 높은 형상의 땅을 정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양보(梁父)에 선(禪)한다는 것은 형상이 낮은 곳을 택하여

바닥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갯버들로 수레를 만들고 수초와 볏짚으로 멍석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 다음

그것들을 모두 땅에 묻어 땅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한다.

 

하상주(夏商周) 삼대가 천명을 받아 일어나 흥하게 된 것이며

하늘과 땅의 도움에 힘입어서라고 생각하여

아름다운 보은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이렇듯 전해진 것이다.」

 

 

망제(望祭)

명산대천을 찾아서 멀리 쳐다보며 올리는 제사

 

황현(黃縣)

秦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용구시(龍口市) 황성집(黃城集)에

그 치소가 있었다.

 

추현(腄縣)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복산현(福山縣)에 그 치소가 있었다.

 

성산(成山)

일명 성산각(成山角)으로 지금의 산동성 영성현(榮成縣) 동 30리에 있는

고대의 산이름으로 산동반도의 최동단에 있었다.

 

지부산(之罘山)

지금의 산동성 연태시(烟台市) 북쪽 해안에 지부도(之罘島)라고 있는데

그 섬 안에 있는 산이름을 말한다.

 

상산사(湘山祠)

상산(湘山)은 군산(君山) 혹은 동정산(洞庭山)이라고도 한다.

호남성 악양시(岳陽市) 서쪽 동정호(洞庭湖) 안의 섬 가운데에 있는

순임금의 두 아내 아황(蛾黃)과 여영(女英)을 모신 사당이다.

 

상군(湘君)

요임금이 그의 두 딸 아황(蛾黃)과 여영(女英)을 순(舜)에게 주어

임금의 자질이 있는지를 시험했다.

순임금이 두 여인을 잘 다루어 화평하게 지내게 하자

요임금이 제위(帝位)를 순임금에게 전했다.

후에 순임금이 남쪽으로 나아가 순무하던 중 창오(蒼梧-지금의 호남성 영원현(寧遠縣)

구의산(九疑山))에서 죽자 두 비(妃)가 달려가 슬퍼하다가 상수(湘水)에 빠져 죽으니

사람들이 두 사람을 군산(君山)에 장사 지냈다.

그러자 두 여인의 무덤에서 반죽(班竹)이 자라났다.

사람들이 대나무의 반점은 두 여인들의 눈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대나무를 상비죽(湘妃竹)이라고 이름지었다.

 

 

 

 

시황 29년 (BC 218)

황제가 동쪽으로 놀이를 나갔다.

 

황제의 행렬이 양무(陽武)의 박랑사(博狼沙)에 이르렀을 때

도적의 습격을 받아 매우 놀랬다.

 

습격을 한 도적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 천하에 령을 내려 대대적으로 수색을 하게 하여 10일 동안을 찾았으나

결국은 잡지 못했다.

 

다시 산동으로 순행을 나가 지부산(之罘山)에 다시 올라가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글을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 재위 29년 봄철 햇볕이 바야흐로 뜨거워지려 할 적에

황제께서 동쪽으로 납시어 지부산에 오르셨다.

 

황제께서 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시자 수행한 신하들이 경치를 찬양하며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생각하고 창업의 공적을 노래했다.

 

위대한 성군께서는 치세를 이루시고 법도를 세우시고 나라의 기강을 밝히셨다.

 

밖으로는 제후들을 교화시키셨으며

널리 예악(禮樂)과 은덕(恩德)을 베풀고 의로써 세상을 바르게 하셨다.

 

사악한 육국(六國)이 한없이 탐욕을 부리며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황제께서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육국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무덕을 크게 떨치셨다.

 

의를 지켜 제후들을 주살하고 신의를 세상에 행하여

먼 지방에 이르기까지 위엄이 밫나니 달려와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천하의 강포한 자를 죽이고 백성들을 진무하여 천하가 안정이 되었으며

덕을 베푸시고 법을 밝히시어 천하를 운영하니 후세에 영원한 모범을 보이셨다.

 

아, 위대하도다! 천하는 성군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도다!

 

군신들이 모두 그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그 뜻을 세기니

영원히 변하지 않는 모범으로 전해질지어다.」

 

다시 지부산의 동쪽 관람했던 곳에 다음과 같이 글을 새겼다.

 

「황제 재위 29년에 황제께서 봄철에 먼 지방으로 시찰을 나가셨다.

 

바닷가에 당도하자 지부산에 다시 오르시어 아침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시었다.

 

따르던 신하들이 망망하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 감격하고

원래의 치도(治道)가 지극히 밝았음을 생각하였다.

 

성군께서 처음으로 법제를 시행하시어 강역 안의 일을 깨끗하게 정리하셨으며

강역 밖의 강포한 자들은 토벌하여 주살하여 무위를 변방까지 떨치시자

천하 사방이 진동하고 육국의 왕들을 사로잡았다.

 

천하를 하나로 병합하시고 재해를 멈추게 하셨으며

융적(戎狄)들을 울타리 안에다 가두시었다.

 

황제께서 덕을 밝게 하시고 천하를 경영하시며 백성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말을 듣는데 태만히 하지 않으셨도다.

 

대의를 세우시고 각종 기물을 분명히 정비하셨으며,

모두 그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적당한 색깔과 표지를 정하셨다.

 

이에 신하들은 직분을 준수하며 각자의 의무를 알게 되어

모든 일에 의혹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의 풍습을 개량하고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모두 법도를 같게 하니 나이가 들도록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

 

일상적인 직무를 정해주니 후세 자손들이 그것을 계승한다면

이 성스러운 치세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군신들이 성상의 공덕을 찬양하여 성스러운 업적을 노래하며

이에 지부산에 비석을 세워 새겼다. 」

 

그후 시황제는 다시 랑야(琅邪)로 돌아와

상당(上党)으로 통하는 길을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시황 32년 (BC 216)

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연인(燕人) <노생盧生>을 시켜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게 했다.

 

갈석산(碣石山)에 비석을 세우고 그 비문을 다음과 같이 새겼다.

 

「황제께서 군사를 일으키시어 무도한 제후들을 주륙 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평정하셨다.

 

무력을 사용하여 포악한 자들을 멸하셨고

법령의 조문을 정하시어 죄 없는 백성들을 보호하시니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승복했다.

 

공로를 헤아리시니 소와 말에게까지 상을 주셨으며

내리신 은혜는 땅까지 기름지게 하였다.

 

황제께서 위엄을 떨치시고 덕으로써 제후들을 병합하시니

세상에 처음으로 천하를 태평하게 만드셨다.

 

성곽을 허무시고 하천의 제방을 파서 서로 통하게 했으며

험지의 요해지를 무너뜨려 평평하게 만드셨다.

 

천하의 땅이 모두 평평하게 되고 백성들에게는 요역(徭役)이 없어졌으며

천하는 진무되었다.

 

남자들은 밭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며 여자들은 가사를 돌보니

모든 일에는 질서가 있게 되었다.

 

황제의 은혜가 모든 백성들이 종사하는 업에 미치고 오래도록 같이 밭을 경작하니

평안한 생활을 누리지 않은 백성들은 없게 되었다.

 

군신들이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이를 비석에 새겨

영원한 규범으로 삼기를 청했다.」

 

이에 <한종韓終>, <후공侯公>, <석생石生>에게 시켜

불사약(不死葯)을 구해오도록 시켰다.

 

시황이 북쪽의 변경 지방을 순무하고 상군(上郡)을 거쳐 도성으로 돌아왔다.

 

연인(燕人) <노생盧生>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鬼神)에 관한 일이라고 하면서 녹도서(錄圖書)를 지어 바치며 말했다.

 

「秦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라!」

 

호가 북쪽의 호인(胡人)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 시황은 즉시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군사 30만을 이끌고 북쪽의 국경을 넘어 호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몽염>은 호인들을 물리치고 하투(河套) 남쪽의 땅 하남(河南)을 점령하였다.

 

녹도서(錄圖書)

후세의 참위서(讖緯書)를 말하며 진한(秦漢) 시대에 점을 쳐서 미래의 일을 예언한 책.

 

 

 

이세 황제 3년 (BC 207)

장한 등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거록을 포위하자

초의 상장군 항우(項羽)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거록을 구하려고 하였다.

 

그해 9월 <조고>가 승상이 되고 결국은 <이사>의 죄를 논하여 살해했다.

 

여름 <장한>이 여러 차례 싸움에서 지자 이세가 사자를 보내어 질책했다.

 

<장한>이 두려워하여 장사 <사마흔>을 보내 자기가 싸움에 진 사연을 설명하게 했다.

 

<조고>가 조현도 시켜주지도 않고 아무런 지시도 내려주지 않았다.

 

<사마흔>이 두려워하여 도망쳤다.

 

<조고>가 군사를 풀어 잡아들이게 했으나 뒤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사마흔>이 <장한>을 보고 말했다.

 

「<조고>가 모든 일을 중간에서 전단하고 있어 장군께서 싸워 공을 세운다고 해도

죽게 되고 공을 세우지 못하면 못한 대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항우>가 진나라 군사들을 세차게 공격하여 <왕리王離>를 사로잡고

<장한>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제후들에게 항복해 왔다.

 

그해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난을 일으켜 이세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군신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하여 먼저 군신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사슴 한 마리를 이세 황제에게 바치며 말했다.

 

「이것은 말이옵니다.」

 

이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승상이 잘못 알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사슴을 말이라고 하십니까?」

 

이세가 좌우에 대고 물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침묵하고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면서

<조고>에 아첨하며 따랐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사슴이라고 했다.

 

<조고>가 마음속으로 사슴이라고 말한 자를 기억하고 있다가

죄를 뒤집어 씌워 모함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모든 군신들은 <조고>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조고>가 예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말했다.

 

「관동의 도적들이 무슨 일인들 이룰 수 있겠는가?」

 

<항우>가 진장 <왕리>를 거록에서 사로잡고 계속 진격하자

<장한> 등이 퇴각하며 구원군을 보내달라는 상서를 올렸다.

 

연(燕), 조(趙), 제(齊), 초(楚), 한(韓), 위(魏)나라에는 모두 왕이 서고 자립하였다.

 

함곡관(函谷關) 이동 땅의 모든 백성들은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제후들에게 호응하였다.

 

제후들이 호응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패공도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무관(武關)을 통과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조고>에게 보내어 통하고자 했다.

 

이세가 노하여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한 <조고>가 병을 칭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세가 밤에 잠을 자다가

자기의 좌참마(左驂馬)를 물어뜯는 백호를 죽이는 꿈을 꾸고나서

마음이 매우 불쾌하여 점을 쳐서 해몽을 하게 하였다.

 

점괘가 다음과 같이 나왔다.

 

「경수(涇水)의 귀신이 재앙을 일으킬 것이다.」

 

이세가 곧 망이궁(望夷宮)에서 목욕재계하고

경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백마 4마리를 물에 던져 죽였다.

 

사자를 <조고>에게 보내어 관동의 도적을 아직도 진압하지 못한 일을 책망하였다.

 

<조고>가 두려워하여 아무도 몰래 그의 사위 함양령(咸陽令) <염락閻樂>과

그의 동생 <조성趙成>과 모의하며 말했다.

 

「황제가 나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않다가

일이 급하게 되자 모든 화를 우리 집안에 뒤집어씌우려고 하고 있다.

내가 황제를 바꾸어 <자영子嬰>으로 세우려고 한다.

<자영>은 인자하고 부지런하여 백성들이 모두 즐겨 따를 것이다.」

 

<조고>는 랑중령(郞中令)으로 하여금 안에서 호응하도록 하고

거짓으로 수많은 도적이 쳐들어 왔다고 하면서

<염락>으로 하여금 관리들과 군사들을 출동시키게 하는 한편,

<염락>의 모친을 자기의 집에 머물게 하여 인질로 삼았다.

 

관리들과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끈 <염락>이 망이궁(望夷宮)의 궁문으로 쳐들어가서

위령(衛令)과 복야(僕射)를 포박한 후에는 말했다.

 

「도적이 쳐들어 왔다는데 어찌하여 막지 않는가?」

 

위령(衛令)이 말했다.

 

「궁궐을 경비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 경비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데

어찌 감히 도적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단 말이오?」

 

<염락>이 즉시 위령의 목을 베고 군사들을 궁궐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군사들이 활을 쏘며 쳐들어가자 랑관들과 환관들이 크게 놀라 어떤 자는 달아나고

어떤 자들은 맨몸으로 대항하였다.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염락>이 거느린 군사들에게 목숨을 잃어

죽은 자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

 

랑중과 <염락>이 일제히 황제가 기거하는 방으로 들어가

악좌(幄坐)와 휘장에 활을 쏘았다.

 

이세가 노하여 좌우를 불렀으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두려워하여 대항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곁에는 환관 한 사람만이 곁에서 모시면서 감히 달아나지 못했다.

 

이세가 안으로 들어가 곁에 남아있던 환관을 향해서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진즉 나에게 고하지 않고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는가?」

 

환관이 대답했다.

 

「신이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한 이유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 일에 대해 말씀 드렸다면 저는 이미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인데

어찌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염락>이 이세의 면전에 서서 그의 죄를 나열하며 말했다.

 

「그대는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멋대로 정사를 처리했으며

무도하게 수많은 사람을 죽여 천하가 모두 그대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대는 이제 스스로 알아서 목숨을 끊기를 바란다.」

 

이세가 말했다.

 

「승상을 한번 만나 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내가 원컨대 이 나라의 한 군(郡)을 얻어 군왕으로 물러 앉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염락>이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이세가 말했다.

 

「그렇다면 만호후(萬戶侯)는 어떠한가?」

 

<염락>이 다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처자를 데리고 여러 공자들처럼 일반 백성으로 살고 싶다.」

 

<염락>이 듣고 말했다.

 

「나는 승상으로부터 천하를 위해 그대를 죽이라는 명을 받았을 뿐이다.

그대가 비록 많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나는 감히 승상에게 돌아가 그대의 죽음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다.」

 

<염락>이 손을 휘저어 군사들을 안으로 들어와 이세를 죽이라고 하지

이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염락>이 돌아와 이세의 죽음을 <조고>에게 고했다.

 

<조고>가 즉시 여러 대신들과 공자들을 불러

이세의 죄를 물어 주살 했다고 하면서 말했다.

 

「우리 진나라는 원래 일개 제후국에 불과하다가

시황께서 천하의 군주가 되어 제라고 칭했소.

오늘 나머지 6국이 모두 일어나 자립했으니 진나라의 땅은 갈수록 좁아져

이제는 제라는 칭호는 허명에 불과하게 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소.

마땅히 옛날로 돌아가 왕이라 칭해야 되겠소.」

 

<조고>가 이세 황제 형의 아들 <자영>을 세워 진왕이라고 했다.

 

백성들의 방식으로 이세의 상을 치르고 두남(杜南)의 의춘원(宜春苑)에 장사지냈다.

 

<조고>는 <자영>에게 재계하고 종묘에 고한 후에 옥새를 받으라고 말했다.

 

종묘에서 5일 간을 재계한 <자영>이 두 아들을 불러 모의하였다.

 

「승상 <조고>가 망이궁에서 이세를 살해하고

군신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나를 세웠다.

 

내가 들으니 조고가 초나라 반군과 밀약을 하여 진나라를 멸하고

자기가 대신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오늘 나로 하여금 재계하고 태묘를 배알하게 한 처사는

나를 종묘 안에서 죽이기 위해서다.

 

내가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으면

<조고> 승상이 틀림없이 나를 찾아올 것이니 그때 그를 죽이도록 하자.」

 

<조고>가 여러 번 <자영>을 불렀으나 <자영>이 가지 않자

<조고>가 과연 친히 <자영>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종묘의 일이 중한데 어찌하여 왕께서는 행차를 하시지 않으십니까?」

 

<자영>이 갑자기 칼을 빼어들고 <조고>를 재궁에서 찔러 죽였다.

 

이어서 <조고>의 삼족을 멸족시키고 함양성 안에다 묻었다.

 

<자영>이 진왕이 된지 46일 만에

패공이 초군(楚軍)을 이끌고 무관을 파하고 관중으로 들어와

패상에 영채를 세워 주둔한 후에 사자를 보내어 <자영>에게 항복을 권해왔다.

 

목에는 사대(絲帶)를 두르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에 타고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손에 받들고 지도(軹道)에 나와 항복하였다.

 

패공이 <자영>의 항복을 받아드리고 함양성에 입성하고

궁실의 부고를 봉하고 다시 패상(覇上)으로 철군하였다.

 

패상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자 제후들의 군사들이 당도하였다.

 

제후들의 맹주인 <항우>가 <자영>과 진나라의 공자 및 모든 종족들을 죽였다.

 

함양의 백성들을 도살하고 궁실을 불태우고 자녀들을 노략질했다.

 

부고의 금은보화들을 모두 거두어 제후들과 같이 나누어 가졌다.

 

진나라를 멸한 <항우>는 그 땅을 옹(雍), 새(塞), 적(翟)으로 삼분하여

그곳에 각각 왕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를 삼진(三秦)이라고 통칭하였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하고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고 부르고

천하의 왕들과 제후들 위에 군림하였다.

 

秦나라는 드디어 멸망했다.

 

그 후 5년이 지나서 천하는 모두 한(漢)나라를 일으킨 패공에게 귀속되었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秦의 선조는 백예(伯翳)다.

 

일찍이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때 공을 세워 봉토와 사성을 받았다.

 

하와 은 왕조를 거치면서 백예의 후손들은 쇠락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주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秦나라가 일어나 처음에 서수(西垂)에 도읍을 정했다.

 

목공(繆公) 이래로 서서히 제후들을 잠식하기 시작하여

결국은 시황에 이르러 천하를 모두 병합하였다.

 

시황이 스스로 자기의 공이 오제를 능가하고 영토는 삼황 때보다 넓다고 생각하여

그들과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