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초(吳楚) 7국의 난

 

 

경제3년(BC154년) 정월 을사일(乙巳日),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유성(流星)이 서쪽 지역에 나타났다.

 

번갯불이 낙양(洛陽) 동궁(東宮)의 대전(大殿)과 성루를 불태웠다.

 

오왕(吳王) <유비劉濞>, 초왕(楚王) <유무劉戊>, 조왕(趙王) <유수劉遂>,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가 모반을 일으켜,

병사를 출동시켜 서쪽으로 향하게 했다.

 

천자는 그 때문에 <조착晁錯>을 주살하고, <원앙袁盎>을 파견해 통보했지만,

반란군은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양(梁)을 포위했다.

 

이에 황제는 대장군 <두영竇嬰>과 태위 <주아부周亞夫>를 파견해

병사를 인솔해 그들을 주살하게 했다.

 

 

6월 을해일(乙亥日)에 도망친 반란군의 병사와 초 원왕(楚元王)의 아들 <유예劉蓺>

모반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사면했다.

 

그리고 그 뒤 대장군 <두영>을 위후(魏侯)에 봉하고,

초 원왕의 아들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를 초왕으로 삼았다.

 

황자(皇子) <유단劉端>을 세워서 교서왕이라고 했고,

황자(皇子) <유승劉勝>을 중산왕(中山王)이라고 했으며,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를 치천왕으로 옮겨 가게했고,

회양왕(淮陽王) <유여劉餘>를 노왕(魯王)으로 삼았으며,

여남왕(汝南王) <유비劉非>를 강도왕(江都王)으로 삼았다.

 

제왕(齊王) <유장려劉將廬>와 연왕(燕王) <유가劉嘉>는 모두 서거했다.

 

 

 

<오초칠국과 위만조선 및 창해군>

 

 

기원전 154년 경제(景帝)는 과격한 정치가 <조조晁錯>의 적극책을 채용하여

제후왕의 죄를 폭로한 다음에 조(趙), 교서(膠西), 초(楚) 등의 영지를 깎아

제후왕의 축소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해갔다.

 

이에 화가 자신의 몸에 미칠까 두려워한 오왕(吳王) <유비劉濞>는

초, 교서, 조, 교동(膠東), 치천(菑川), 제남(濟南)의 제후왕과 공모하여

황제 측근의 간신인 <조조>를 칠 것을 구실로 선수를 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을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之亂)이라고 한다.

 

이 제후왕의 반란은 <주아부周亞夫>가 거느린 정부군의 교묘한 전략에 의해

吳왕은 살해당하고, 吳와 공모한 제후왕도 모두 살해당하여

전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이 싸움에서 漢의 조정이 승리를 거둔 것은

제후왕에 대한 조정의 우위(優位)를 결정지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초(漢初)의 정치사상

오초칠국의 난의 평정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국내의 제후왕 문제는 오초칠국의 난을 계기로 하여 크게 진전되었으나,

한편 진말(秦末), 한초(漢初)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중국에 침입해 들어온 흉노(匈奴)에 대한 대책은

국내사정으로 인해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내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그 국력을 발휘하여 흉노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중국의 국위(國威)를 신장하는 것이

다음 위정자에게 남겨진 커다란 정치과제였다.

 

 

 

 

- 창해군 설치

 

원삭元朔 원년(BC128) 가을, 흉노가 요서를 침입해 태수를 죽였다.

 

어양(漁陽), 안문(雁門)을 침입해 도위를 패배시키고 3천여 명을 살략했다.

 

장군 <위청衛靑>을 보내 안문을 나가게 하고,

장군 <이식李息>은 대(代)를 나가게 하여 수천 급을 참획했다.

 

동이(東夷) 예군(薉君) 남려(南閭) 등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한서 흉노전>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는 몸소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남려성에서

위만 도적떼를 격파하고 그 곳에 관리를 주둔시켰다.

<북부여기>

 

부여국은 본래 예(濊)의 땅이었다.

한무제 원삭 원년(BC128) 그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가 수년 뒤 곧 폐지하엿다

<책부원구>

 

<고해사> 단제가 위만의 군대를 물리치고

예군(薉君)을 두어 남려성을 지키게 하였으나

예군(薉君)이 漢나라의 사주를 받고 漢에 복속하자

漢은 이곳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漢의 태수가 창해군을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위만조선과 북부여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인 요충지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하였다.

 

예군(薉君)은 예왕(穢王)이다.

 

이후 BC109년 한(漢)나라 대신 <공손홍公孫弘>이

창해군(蒼海郡)을 혁파 할 것을 주청하자

한무제(漢武帝)는 막대한 자금지원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우거右渠>의 공격으로부터

완충지대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자 창해군(蒼海郡)을 혁파한다.

 

서남이(西南夷) 정벌을 마무리 하고, 흉노(匈奴)족과의 관계도 돈독한 데다가

자금사정도 넉넉해지자 그동안 눈에 가시였던 <우거右渠>를 공략하게 된다.

 

2년에 걸친 한(漢)나라의 공격으로 결국 위만조선은 멸망하게 되고

창해군이 있던 곳에 漢의 군대를 주둔시키게 된다.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토착세력 중에 일부는 부여(夫餘)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맥(貊)족의 별종인 구려(句麗)족에 흡수된다.

 

또한 일부는 동쪽지역에 정착 하고 있었던 예(穢)족들에게 흡수 되는 등

위만조선의 멸망은 범 조선(朝鮮)계 통합의 전주곡이 되었다.

 

 

 

 

 

 

 

* 참고  항우(項羽)의 18제후 분봉

 

 

BC 206년 秦을 멸망시키고 패권을 장악한 楚의 <항우項雨>는

휘하의 장수들을 전국에 왕과 후로 봉하였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史記 項雨본기>

 

 

 

 성   명 

 원래지휘  제후왕                       도성
 한광(韓廣)  燕왕  요동왕  무종(無終, 지금의 하북성 계현)
 장도(臧荼)  燕나라 장수  燕왕  계현(薊縣, 지금의 북경 서남 탁주)
 전불(田不)  齊나라 장수  교동왕  즉묵(卽墨, 지금의 산동성 平度 동남)
 전도(田都)  齊왕  齊왕  임치(臨淄, 지금의 산동성 임치 동)
 전안(田安)  항우부대 부장  齊北왕  박양(博陽, 지금의 산동성 泰安 동남)
 조헐(趙歇)  趙왕  代왕  대현(代縣, 지금의 하북성 울현 동북)
 장이(張耳)  趙나라 장수  상산왕  양국(襄國, 지금의 하북성 형태 서남)
 위표(魏豹)  魏왕  西魏왕  평양(平陽, 지금의 산서성 임분 서)
 사마앙(司馬仰)  趙나라 장수  殷왕  조가(朝歌, 지금의 하남성 淇縣)

 

 

 

燕왕 <한광韓廣>을 요동왕으로 봉하였는데 그 도성이 지금의 하북성 계현이고,

燕나라 장수 <장도臧荼>를 燕왕으로 봉하였는데

도성인 계현(薊縣)은 지금의 북경 서남 탁주에 있었다.

 

요동이 지금의 하북성 계현이니 요수는 지금의 조백하인 것이다.

 

계현(薊縣)은 지금의 북경 서남 탁주에서 북경 동쪽으로 이치되었으며

이 당시 燕의 강역은 북부여와 동호에 밀려 북경의 서남쪽이었다. 

 

<장도>가 연나라로 돌아와 <한광>을 요동으로 몰아내려 하자,

<한광>은 이에 저항하였고 무종에서 <장도>에게 공격을 받아 죽었다.

 

이 당시 요동은 산서성 요동으로 <한광>은 이름뿐인 요동왕으로

실제로 무종을 다스린 적이 없고 무종은 지금의 천진시 계현 인근의 옥전이다.

무종은 이미 북부여의 땅이 된지 오래된 곳이다 

 

교동, 齊. 齊北은 산동성 남부 지역이었으며 산동성의 북부지역과 산서성 북부 및 

하북성 중부 이북과 이동이 북부여와 漢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