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 2세 단군 <모수리>의 재위 기간은 25년이다.
정미년(BC 194년)이 원년이다.
번조선왕 <기준箕準>은 수유국(須臾國)을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일찍부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기(嘗多樹恩)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넉넉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후에 떠돌이 도적떼(<위만衛滿>을 중심으로 燕, 齊, 趙에서 망명해 온 망명족)
들에게 패망하였다.
<기준>은 도망쳐 바다로 들어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제가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卓>을 받들고,
대거 이주 길에 올라 곧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月支)는 <탁卓>의 고향이다.
이것을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이 때부터 변한과 진한 역시 각각의 무리를 이끌고 백여 리의 땅을 봉 받아
도읍을 정하고 각자 국호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변한과 진한 모두 오랜 기간 동안 마한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마한의 지시를 따랐다.
<북부여기>
<위만 망명로>
<위만>은 燕에 살았지만 조선인이다.
기자조선을 내쫒고 위만조선을 건국한 <위만>이라는 인물이
건국하기 바로 전 살았던 곳이 진고공지 상하장(秦故空地 上下鄣)이라는 곳이다.
秦故空地란 진나라가 차지하였다가 더 이상 관리되지 않는 땅을 말한다.
그러한 땅은 보통 여러 세력의 사이에서 항상 전쟁터가 되며
누구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땅을 말하는 것이다.
한(漢)은 진을 멸망시킨 후
위만이 살던 요동고새가 너무 멀어 통제를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연왕 <노관>이 흉노로 귀순하자 <위만>은 기자조선에 귀순하여
망명자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워 기자조선왕 <준>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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