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면 확대)

 

 

 

한군현의 변천은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요서와 요동의 각 3개현을 요동속국으로 하고 요서의 일부를 창려군으로 하였으며

요동의 4개현이 玄兎郡에 속하게 하고 낙랑의 남부를 대방군으로 하였다.

 

어떤 분은 玄兎郡이 고구려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이치(移置)된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玄兎郡이 A지역에서 B지역으로 이치(移置)되었다면

요동군과 요서군도 함께 이치(移置) 되어야 한다.

 

요동과 요서 및 玄兎郡은 고리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언컨데 처음 설치된 그 자리에서 면적의 늘어남은 있었을지언정

요서와 요동 및 玄兎郡은 결코 이치(移置)된 적이 없다.

 

BC108년에 조선에 설치한 한 군현은 후한과 曺魏, 晉을 거치면서

郡의 크기는 변천이 있었으나 移置된 적은 없고

마치 쇠사슬로 엮어놓은 듯이 요서,요동, 현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후한 광무제 때 설치 한 요동속국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한군현이 처음 설치될 적의 요동군의 치소는 양평이다.

 

양평은 결코 지금의 요양이 아니고 계현이다.

(燕長城의 동쪽 끝 襄平은 지금의 遙陽인가? 참)

 

그러므로 한군현의 위치는 하북지역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낙랑목간과 한서지리지에 나타난  인구수를 보면

BC 45년에는 280,000명, AD 2년에는 400,000명으로 증가 하였으나

AD 140년에는 250,000명으로 절반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漢과 흉노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수가 전장에서 죽어 간 것이다 

 

 

 

낙랑군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보정시 인근에 있었다.

 

 

<위만조선의 왕검성 및 낙랑군 조선현>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은 漢과 고구려의 접경지로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과정을 되풀이하다

曺魏때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되어 낙랑군 남부를 대방군으로 나누어

대방국을 세우게 된다.

 

이후 공손연이 燕왕을 칭하였으나 238년 사마의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된다.

 

晉때 모용외가 단부를 공격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게 된다.

 

 

 

 

 

- <사기> 조선열전 해석

 

『사기』 ‘조선열전’을 연재하며......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기회 있을 때마다 “요동은 중국 땅이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고구려를 침략하여 멸망시켰다.

 

오늘날 중국은 『중국역사지도집』에 만리장성을

고무줄처럼 늘여 한반도 평양까지 그려놓고,

자국민들을 교육시킴과 동시에 전 세계에 홍보를 강화하고 있다.

 

그들의 동북공정에 어찌 숨은 야욕이 없다고 하겠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 주류사학계의 통설이라는 것이,

일제 식민사학을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북공정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사기』 ‘조선열전’은 중국 역사상 가장 권위 있는 역사학자인 사마천이,

고조선과 한나라간의 전쟁을 직접 체험하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 ‘조선열전’을 통하여

한사군의 위치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명확히 알 수 있으며,

한민족의 상고사를 올바로 정립할 수 있다.

 

『사기』 ‘조선열전’이야말로 왜곡된 일제 식민사학과

허황된 중국의 동북공정을 뿌리 채 뽑아버릴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이제 『사기』 ‘조선열전’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설과 본인의 해설을 비교하여 싣는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통설이라는 것이

한민족의 상고사를 얼마나 왜곡축소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사기』 ‘조선열전’을 모르고 한민족의 상고사를 논할 수 없다.

 

 

사기』 ‘조선열전’ 원문 및 번역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조선(1)<만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2)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3) 일찍이 진번과 조선(4)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5)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6)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7),

다시 요동의 옛 요새(8)를 수리하고

패수(9)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연왕 노관(10)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인 상하장(11)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蠻夷 및

옛 연ㆍ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12)에 도읍을 정하였다.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이때는 마침 효혜ㆍ고후(13)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만滿>외신(14)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蠻夷의 군장(15)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16)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17)가 되었다

 

 

[해설]

 

 

 

<조선은 천축국이었다>

 

1. 조선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의 여러 견해가 있어 왔다.

 

『사기집해』에 인용된 3세기경 위나라의 <장안張晏>은

‘조선에는 습수‧열수‧산수 3개의 강이 있는데 이들이 합쳐 열수가 되었으며

낙랑과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 강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 같다.’고 하였다.

 

또『산해경』의 주석자인 4세기 초의 <곽박郭璞>은

‘조선은 요동에 있던 낙랑과 동의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 끝에 있어 해가 뜨는 지역이므로 조선이라 불렀다.’고 하였으며,

 

『동사강목』에서는 ‘선비의 동쪽에 있으므로 조선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신채호와 정인보는

조선을 같은 음을 지닌 만주어의 주신(珠申)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였다.

(신채호,『조선상고문화사』pp.351∼369; 정인보,『조선사연구』pp.51~52)

 

만주원류고』에는 원래 만주어로 ‘소속(所屬)’을 주신(珠申)이라고 하였는데

숙신(肅愼)은 주신(珠申)이 전음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소속’을 ‘관경’과 뜻이 통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주신(珠申)은 국호의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인식하였고,

옛 문헌에 보이는 조선과 숙신은 동일한 뜻을 지닌 다른 호칭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의 명칭은 주신(珠申)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양주동은 고대 조선족은 태양숭배 신앙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도처에 ‘밝’이나 ‘새’라는 지명을 남겼을 것으로 보고,

조(朝)를 ‘밝’으로 선(鮮)을 ‘새’로 해석하여 조선을 ‘밝새’로 보았다.

(『고가연구』pp.380~391)

 

이병도는『삼국유사』고조선조에 나오는 ‘조선’은 국가 이름이고

‘아사달’은 그 수도라는 대목에 주목하여 이 단어들이 동의어일 것으로 보아,

조선은 곧 고대조선의 단어 ‘아사달’의 중국식 모사라 하였다.

(「단군설화의 해석과 아사달문제」 pp.27~43)

 

한편 리지린은 기본적으로 <장안張晏>의 설을 받아들였으나

약간의 이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습수, 열수, 산수 등의 명칭으로부터

숙신(肅愼)․ 식신(息愼)․ 직신(稷愼) 등의 숙신족 제 명칭이 배태되었다고 보면서,

조선은 결국 위의 수명(水名)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직접 온 것이 아니고,

숙신이라는 종족 명칭을 통하여 온 것이라고 하였다.

(『고조선연구』pp. 11∼20)

 

(2) 필자의 주석

 

우리 역사를 반만년 역사라 한다.

 

한민족의 역사를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한 단군조선으로부터 보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가장 명확히 밝히고 있는 역사서가 『부도지』이다.

 

『부도지』는 신라시대의 충신 박제상이 엮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부도(符都)에 관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부도는 ‘하늘의 뜻에 맞는 도읍지’라는 의미로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을 말한다.

 

『부도지』는 고조선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책인데,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조선의 위치 및

조선이 그곳에 위치하게 된 필연성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부도지』는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매년 10월에 조제(朝祭)를 지내니,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지방 토산물을 가져와 바쳤다.

 

산악 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족들은 생선과 조개를 바치며 빌었다.

 

“조제에 나아가 생선과 양을 희생으로 바치오니,

오미의 피를 맑게 하여 창생의 허물을 그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조선제(朝鮮祭)였다.

 

每歲十月行朝祭 四海諸族皆以方物供進 山岳諸族供之以鹿羊 海洋諸族供之以魚蚧

乃頌曰 朝祭供進魚羊犧牲 五味血鮮休咎蒼生 此謂之朝鮮祭 『부도지』 제15장

 

조선이라는 명칭은 조제(朝祭)로부터 비롯되었다.

 

단군임검 당시에는 10월이 상달로 정월이었다.

 

조제는 매년 새해에 대륙의 모든 족속들이 모여들어 희생물을 바치고

하늘과 조상님께 차례를 드리는 거룩한 행사였다.

 

조(朝)는 ‘처음’ ‘시작의 때’라는 의미가 있으며,

『상서대전』에서는 정월 초하루를 한해의 조(朝)(正月一日歲之朝)라고 하였다.

 

10월 상달에 지내는 제사를 조제(朝祭)라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선(鮮)이라는 의미는 ‘고기魚’와 ‘양羊’을 합한 것으로

조제를 지낼 때 올리는 대표적인 희생물이었다.

 

그 희생물을 통하여 인류의 허물을 속죄하고

하늘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결국 조선의 명칭은

‘매해 10월 상달에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모여서 생선과 양을 희생물로 바치며,

하늘과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고

하늘사람으로 거듭나려는 의식을 행하는 축제’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10월 3일을 개천절로 기념하는 것도 조선제의 유습이다.

 

위 『부도지』의 증언을 통하여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계 종교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에는 제정일치 사회였으므로

조선이 세상의 종교‧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였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에

이러한 조선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 있다.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산해경』‘해내경海內經’

 

위 구절은 조선에 대한 중국 최초의 기록으로 조선의 개략적 위치 및

조선의 정체성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발해만 북쪽)의 모퉁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산해경』 윗 구절과 관련하여 진나라 곽박(郭璞, 276~324)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고 하였다.

 

“천독(天毒)은 천축국이다.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글자가 있으며, 금은과 돈이 있다.

부도가 이 나라에서 나왔다.

진나라 대흥4년(大興, 318~321) 천축국의 오랑캐 왕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天毒即天竺國 貴道德 有文書 金銀 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고 하였다.

 

‘조선이 천축국이다.’는 곽박의 해설은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위 구절과 관련하여 16세기 명나라의 <왕숭경>은 말하기를

“천독은 다른 뜻이 있는 듯하다. 곽박이 천축국이라 하였으나 천축은 서역에 있다.

한 명제 때 사신을 파견하여 부처의 유골을 받아온 땅이다.

이는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

(王崇慶云 天毒疑別有意義 郭以為即天竺國 天竺在西域 漢 明帝遣使迎佛骨之地

此未知是非也)” 하였다.

 

또 20세기 중국의 <원가>는 말하기를

“천축은 지금의 인도로 우리나라의 서남에 있는데,

여기 천독은 우리나라의 동북에 있으니 방위가 다르다.

그래서 왕숭경이 이를 의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중간에 문자가 빠졌거나 잘못 전해졌다고 하는데, 알 수가 없다.

(珂案 天竺即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迥異 故王氏乃有此疑

或者中有脫文訛字 未可知)”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산해경』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대부분 왕숭경이나 원가처럼 ‘조선이 천축국이다.’는 곽박의 해설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천독은 천축국이다.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글자가 있으며,

금은과 돈이 있다. 부도가 이 나라에서 나왔다.”는 곽박의 해설은

참으로 조선에 대한 정곡을 찌른 말이다.

 

조선은 진실로 천축국이었으며, 부도(符都)의 나라였으며, 신시(神市)의 나라였다.

 

조선이라는 명칭에는 인류가 도달하려는

이상향의 국가라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2. 옛날 연나라 사람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 없음

 

(2) 필자의 주석

 

사마천이 <만滿>을 그냥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옛날 연나라 사람(故燕人)’이라고 쓴 이유가 무엇일까?

 

이어지는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옛날 연나라’는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켰던 전성기 시절의 연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만滿>을 ‘옛날 연나라 사람(故燕人)’으로 표현한 것은

<만滿>이 연나라에 복속되었던 진번․조선의 토착민이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만滿>이 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오랑캐 복장을 착용한 점,

연왕 <노관>은 흉노로 망명하는데 그 부장인 <만滿>은 조선으로 망명하는 점,

조선의 왕이 <만滿>을 신임하고 박사 벼슬을 하사한 점,

만<滿>이 단기간에 조선, 진번, 임둔 등 동이제족을 통합한 점,

그리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한 점 등은

<만滿>이 진번․조선의 토착민이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3. 전연시(全燕時)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전연시全燕時’는 연국燕國의 전성기로 해석되는데,

여기의 연국은 전국시대의 연국을 말하며

그 전성기는 소왕(기원전 311∼기원전 279) 때였다.

 

당시의 연국은 진국․ 초국․ 조국․ 위국․ 한국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제국을 치고 70여개의 성과 도읍인 임치까지 점령할 정도의 세력이었다.

 

(2) 필자의 주석

 

‘전연시全燕時’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전성기로 해석되며,

그 시기는 소왕(기원전 311∼기원전 279) 때였다.

 

당시의 연나라는 진나라 ․초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제나라를 치고 70여개의 성과 도읍인 임치까지 점령할 정도의 세력이었다.

 

이 시기에 특기할 사항은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진번‧조선)를 천 여리 물리치고,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등의 연5군을 설치하게 된다.

 

연나라가 이때 비로소 현 북경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우리는 흔히 연나라 하면 북경지역을 떠올리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북경유역은 우리 상고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고조선의 범위가 하북성 난하까지만 가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800여 년 동안 연나라가 북경유역을 점유한 기간은

60년 미만에 불과하다.

 

즉 기원전 281년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연나라가 진시황에게 멸망당하는 기원전 222년경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주어도 60년을 넘지 못하는 짧은 세월이다.

 

그 나머지 수많은 세월 동안 북경유역은 변함없이 고조선의 중심 강역이었다.

 

앞으로 전개되는『사기』‘조선열전’에서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연나라는 유사 이래로 중화족의 동․북단에 위치하여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면서 흥망을 거듭하였는데

먼저 연나라 강역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연나라는 기원전 1,112년경 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소공 석奭을 북연(北燕)에 봉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때의 연나라 위치는 하남성 낙양 동남쪽의 탑하시(漯河市) 언성(郾城) 지역이다

(아래의 『중국역사지도집』‘주초봉건도’ 참조).

 

『춘추좌전』과『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770년경

견융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도읍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자,

연나라는 낙양부근에서 차츰 황하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이로부터 연나라는 계속 고조선 세력과 충돌하면서 흥망성쇠를 반복하게 된다.

 

기원전 675년경에는 하북성 순덕부{한단邯鄲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고조선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북상하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 기원전 663년 제 환공이 연나라와 더불어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까지 이르렀다는 『사기』 ‘제세가’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나라가 일시적으로는 하북성 중부 호타하 부근{하간河間 부근}까지도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530년 연나라는 내부반란을 계기로

하북성에서 산서성 중부의 당唐 {태원 남부}으로 이동하였고,

삼진(三晋)과 그 뒤를 이은 조(趙)나라의 강력한 북진정책에 밀려

연나라는 차츰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변천도>

 

 

 

<중국역사지도집 주초봉건도>

 

기원전 414년 태행산맥의 서쪽 산서성 중․북부를 지배하던 백적 선우부(鮮虞部)가

연나라 등에 의하여 태행산맥 동쪽의 하북성으로 밀려난 후

중산국(中山國){今 석가장 인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기』 ‘조세가’는 “BC 414년 중산국 무공(武公)이 초립(初立)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연나라가 산서성 중부의 장성을 넘어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414년경이다.

 

이때로부터 진시황에 의하여 연나라가 멸망하는 기원전 222년까지

대략 200년 간 연나라와 고조선은

산서성 북부지역과 하북성 지역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그리고 BC 281년에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북경을 중심으로 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춘추전국시대 연나라가 북경지역을 점유했던 시기는

대략 기원전 280년에서 기원전 222년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주어도 60년을 넘지 못한다.

 

그 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연나라는 위만조선에 의하여 다시 산서성 지역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앞으로 전개되는『사기』‘조선열전’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과 진번은 모두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

 

4. 진번․조선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이 기록은

『삼국지』에 인용된『위략』의 燕國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방 2천여 리를 공략하였다는 내용에 대응하는 것이다.

 

진번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과 나란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서로 인접된 지역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과『위략』의 조선을 각각 지명과 국명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나, (윤내현,「고조선의 서변경계고」)

『사기』와『위략』의 기사는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대응되는 기사라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 기사는 燕의 동방진출과 관련하여

고조선의 영역 및 그 중심지에 관한 논쟁점이 되고 있다.

 

아울러 뒤의 한사군 가운데 보이는 진번군과의 관련에서도 중시되는 사항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될 사실은 진번이란 표현이

고조선시대의 구체적인 명칭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본문에 계속하여 나타나는

‘其傍小邑 眞番․臨屯眞番旁衆國’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당시의 구체적인 정치체명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종래 진번 등의 명칭이 한사군 설치와 관련하여

처음 나타난 것처럼 이해되는 경향은 불식되어야 하며,

상당한 정치체로 성장해 있는 진번 및 임둔 등

중국衆國의 존재가 중시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 나오는 진번의 원 위치는

후일의 진번군과는 달리 요동지역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보다 높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와 함께 진번․ 조선의 조선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체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진번처럼 일부 지역에 한정된 의미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2) 필자의 주석

 

진번에 관하여 『사기색은』은 <응소>의 말을 인용하여

“현토는 본래 진번국이다(玄菟本眞番國)”고 하였다.

 

뒤에 나오는 위만조선의 강역이 ‘사방 수천 리(方數千里)’라는 구절에 대하여

『사기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조선‧ 고려‧ 맥‧ 동옥저 등 다섯 나라다(朝鮮·高驪·貊·東沃沮五國之地)”

라고 하였다.

 

응소와 괄지지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진번은 진번국으로 고구려의 전신이며

한나라 현토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중심지였던 왕검성이 위치한 곳으로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그러므로 연나라가 전성기에 복속하였다는 진번과 조선의 위치는

훗날 한사군의 중심이었던 현토군과 낙랑군의 위치와 같으며

한민족 상고사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번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상곡(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진황도시에 이르는 장성과

양하(洋河)‧ 영정하(永定河) 및 발해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그리고 조선의 위치는 동서로는 백석산(갈석산)을 포함하는 태행산맥과 발해만,

그리고 남북으로는 영정하(永定河)와 호타하(滹沱河)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 때 연나라의 위치는 『전국책』에 나오는 소진의 말을 참조하면,

동쪽으로는 조선 및 요동(진번과 동일)과 경계를 접하고,

남쪽으로는 안문과 갈석산(백석산)에 이르는 장성이 경계이며,

북쪽은 훗날 조 무령왕이 쌓은 조장성 부근이 경계이며, 서쪽은 황하가 경계였다.

(아래의 『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 강역 지도』 참조)

 

 

<진개의 침략전 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의 강역도>

 

이제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하여

한민족의 상고사를 왜곡하고 있는 두 개의 험난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사기』 ‘조선열전’이 전하는 한민족의 상고사가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첫 번째 관문은 연나라 장수 진개의 조선 침략에 관한 것이다.

 

진개의 침략이 1번 있었는가? 아니면 두 번 있었는가?

 

그리고 진개가 빼앗은 땅이 천 여리인가? 또는 2천 여리인가?

 

아니면 3천 여리인가?

 

여러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진개의 침략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한민족의 상고사가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관문은 갈석산의 위치를 올바로 파악하는 일이다.

 

『사기색은』에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위치를 알면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고,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조선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갈석산의 지명이동이 있었으며,

갈석산 관련 기록들 또한 미로처럼 얽혀있다.

 

이로 인하여 한민족의 상고사가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먼저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자.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의 일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이 단 세 구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세 구절이 우리 상고사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고조선의 강역이 한반도로 축소되기도 하고

중국 북경근처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관련 기록들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사기』 ‘흉노열전’과 ‘조선열전’

그리고『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통해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①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이다.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사기』‘흉노열전’

 

② 조선왕 <만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ㆍ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사기』‘조선열전’

 

③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의 기록들을 요약하면

 

①은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천여 리 격파하고 장성을 쌓았다는 것’이고,

②는 ‘(진개가)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장성을 쌓았다는 것’이며,

③은 ‘연나라 장수 진개가 조선을 침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①의 『사기』 ‘흉노열전’과 ②의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사건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보는 관점에 따라 대략 3가지 견해로 나누어지며,

한민족의 상고사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첫째,

①과 ②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은 1번 있었으며,

진개가 공격한 동호는 곧 진번과 조선이 된다.

 

그리고 진개가 조선을 공격하여 빼앗은 땅은

상곡으로부터 동쪽으로 천 여리가 된다.

 

상곡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이다.

 

상곡으로부터 동쪽으로 천 여리는

대략 난하 또는 현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다.

 

그러므로 연장성의 동단 및 진번과 조선은 모두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게 된다.

 

필자는 이 설을 주창한다.

 

둘째,

①과 ②는 별개의 사건이며,

①과 ②의 사건을 종합한 기록이 ③이라는 견해이다.

 

이 경우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은 2차례에 걸쳐 있었다.

 

진개가 1차로 동호를 천 여리 물리치고,

2차로 진번과 조선을 천 여리 물리쳐서

결과적으로 ③의 기록처럼 진개가 2천 여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장성의 동단은 현 요령성 요양까지 이어지며,

진번과 조선은 난하 또는 칠로도산七老圖山으로부터 천산산맥 사이에 있게 된다.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셋째,

①과 ②는 별개의 사건이며, ②와 ③이 서로 대응되는 사건이라는 견해이다.

 

이 경우 연나라 장수 진개가 1차로 동호를 천 여리 물리치고,

2차로 진번과 조선을 2천 여리 물리쳐서

결과적으로 진개가 3천 여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장성의 동단은 한반도의 청천강까지 이어지며,

진번과 조선은 난하 또는 칠로도산七老圖山으로부터

한반도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에 있게 된다.

 

위에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주석에서 보는바와 같이

현 강단사학계가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이 설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연장성을 한반도 청천강까지 그리고 있다.

 

과연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①의 『사기』 ‘흉노열전’ 기록과

②의 『사기』 ‘조선열전’ 기록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만약 ①과 ②가 별개의 사건이라면 진개의 동호 공격이 있기 전에는

연나라와 조선 사이에 천 여리의 동호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전국책』이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진개의 동호 공격이 있기 전부터 연나라와 조선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즉 연나라와 조선 사이에 천 여리의 동호가 따로 존재할 틈이 없다.

 

『전국책』에 의하면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BC361-BC333)에게 연나라 강역을 언급하면서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소진이 이 말을 한 시기는 진개의 동호 공격(진개의 동호 공격은 BC 281년)

이전으로 연나라와 조선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또 위의 ③번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에서

연나라와 조선후가 각각 왕호를 칭한 때는

『전국책』에 의하면 기원전 323년의 일로 역시 진개가 동호를 공격하기 이전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미 연나라와 조선은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①의 『사기』 ‘흉노열전’ 기록과 ②의 『사기』 ‘조선열전’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진개가 물리친 동호는 바로 진번과 조선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사기』 ‘흉노열전’ 에서는

진개가 공격한 대상을 동호라고 기록하고,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진번과 조선이라고 했을까?

 

『사기』 ‘흉노열전’에서 동호는

흉노의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동호에는 오환, 선비, 진번, 조선, 부여, 예맥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공격한 대상을 포괄적으로 동호라 칭하였고,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진번과 조선으로 특정하여 기술한 것으로 본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①의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동호(진번과 조선)를 천 여리 물리쳤다고 하였는데,

③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서는

진개가 조선의 땅 2천 여리를 빼앗았다고 하였다.

 

만약 위의 ①, ②, ③이 모두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면

진개가 빼앗은 땅의 크기가 다르게 기술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진번과 조선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나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지금까지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관련 기록들을 검토하면서

위의 ①, ②, ③의 기록들이 모두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임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연나라가 동호(진번과 조선)를 천 여리 물리치고

그곳에 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진번과 조선은 연5군과 같은 지역으로 모두 상곡군(현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

으로부터 동쪽으로 천 여리 이내의 거리에 있어야 한다.

 

즉 진번과 조선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에 위치해야 한다.

 

이제 진번과 조선의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자.

 

진번과 조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의 위치를 알 필요가 있다.

 

『전국책』에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BC361-BC333)에게 연나라 강역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 여리 이다...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전국책』‘연책燕策’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의 일이므로

윗 구절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의 연나라 강역을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위 소진의 말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연나라의 남쪽에 있었다는 갈석산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다.

 

『사기색은』에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위치를 알면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고,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조선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이제 한민족의 상고사를 왜곡하고 있는 험난한 두 번째 관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소진이 언급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었다는 갈석산을

지금의 하북성 난하 하류에 있는 갈석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과연 그럴까?

 

소진이 언급한 당시의 연나라는

아직 진개가 동호(진번과 조선)를 공격하기 전이므로

상곡군을 비롯하여 어양군 등 연5군 지역이 아직 연나라 땅이 되기 전이다.

 

그러므로 이 당시 연나라는 동쪽으로 현 북경지역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난하 하류에 있는 갈석산이 연나라 남쪽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소진이 말한 연나라 남쪽의 갈석산은

현 북경보다 남쪽에서 찾아야만 한다.

 

이 갈석산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지도가

아래의 중국 남송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로

중국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고지도로 손꼽힌다.

 

『기주협우갈석도』는 한민족 상고사의 최대 쟁점인

갈석산의 위치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갈석산을 배경으로 연5군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어

한민족의 상고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참으로 보물섬지도와 같은 존재이다.

 

『기주협우갈석도』에는 지도뿐만 아니라 갈석산을 자세히 설명한 글도 나온다.

 

갈석산의 위치가 역수(易水, 현 거마하)에서 바다로 들어온 후

황하를 타고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다고 하였다.

 

즉 갈석산이 역수(易水, 현 거마하) 하류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 분명하다.

 

백석산(또는 낭아산)이 갈석산이라면 『태강지리지』에서 기록한 것처럼

그 주변에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가?

 

그렇다.

 

백석산의 동쪽 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 해발 1,105M) 바로 동쪽에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버젓이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에서 편찬된 『무경총요武經總要』와『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등에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석산(또는 낭아산)은『사기색은』에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고 한 기록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이렇듯 진장성의 동단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지도집』‘진(秦)시기 지도’는

진나라 만리장성을 한반도 평양까지 그리고 있다.

 

엄청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하루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이제 위에서 소진이 말한 연나라 남쪽에 위치한 갈석산이

현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임을 알았다.

 

백석산(갈석산)이 연나라에도 속하고 조선에도 속하므로

백석산(갈석산)이 연나라 장수 진개가 조선을 침략하기 전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은 동서로는 백석산(갈석산)과 발해를 경계로 하는 지역이다.

 

또 조선의 남북 경계는 『사기집해』에서 3세기경 위(魏)나라 <장안>이

“조선에는 습수‧열수‧산수가 있다. 세 물이 합하여 열수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 강들의 이름에서 따온 듯하다

(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고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습수는 아래의 남송(1136년 작) 시대 제작된 우적도(禹迹圖)에 잘 나타나 있는데,

현재의 영정하(永定河)이다.

 

또 열수는 『산해경』 ‘해내북경’에서

“조선은 열양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하였다.

 

<곽박>이 해설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땅이다.

열(列)은 또한 물 이름이다. 지금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

(郭璞云 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고 하였다.

 

열양(列陽)은 열수의 북쪽을 의미한다.

 

연나라가 열양에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으므로 열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다.

 

<소진>의 말에서 보듯이 연나라의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흐르고 있는데,

녹타가 지금의 호타하(滹沱河)이며 바로 열수이다.

 

<장안>이 말한 조선에 흐르는 세 강물인 습수‧열수‧산수 중에서

습수는 현재의 영정하(永定河)이고, 열수는 현재의 호타하(滹沱河)임을 알았다.

 

산수는 자료를 찾지 못했으나 영정하와 호타하 사이에 흐르는

거마하(拒馬河), 역수(易水), 당하(唐河), 대사하(大沙河) 중의 하나로 비정된다.

 

그러므로 조선의 남북 경계는 적어도 영정하와 호타하가 된다.

 

이제 조선의 위치를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의 동서남북 경계는 적게 잡아도 동서로는

백석산(갈석산)이 포함된 태행산맥과 발해,

남북으로는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 밖에도 조선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은 많이 있다.

 

조선의 위치가 확정되면 진번의 위치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연장성을 축조하였으므로

연장성의 남쪽에 진번과 조선이 위치한다.

 

그러므로 연장성의 남쪽에서 조선지역을 제외한 곳이 진번지역이 된다.

 

이제 진번의 개략적인 위치도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진번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상곡(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진황도시에 이르는 장성과 양하(洋河)‧영정하(永定河) 및 발해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참고로 연장성의 동단은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까지다.

 

뒤에 ‘장새’ 항목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로

연장성이 진황도시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계현(薊縣)에서 진황도시에 이르는 장성 아래 부분도 진번지역에

포함시킨 것은 이곳 역시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에 포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연나라 장성은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만 축조되어서

요동군 전체를 둘러싸지는 못하였으므로

연장성이 둘러싸지 못한 요동군의 나머지 부분을 진번지역에 추가하였다.

 

드디어 조선과 진번의 위치를 모두 확정하였다.

 

그러면 앞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관련 기록 중

『사기』‘흉노열전’은 <진개>가 격파한 땅이 천 여리라 하였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은

<진개>가 조선의 영토 2천 여리를 빼앗았다고 한 이유를 살펴보자

(앞의『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 강역 지도』 참조).

 

『사기』 ‘흉노열전’은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 등

장성을 기준으로 영토의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개의 공격으로 동호(진번과 조선)가 물러난 동서간의 거리,

즉 상곡(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난하 또는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의 거리인 천 여리를 기록하였다.

 

반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서는

영정하에서 남쪽으로 호타하에 이르는 조선지역 천 여리와

상곡(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난하 또는 칠로도산七老圖山에 이르는

진번지역 천 여리를 합하여 2천 여리의 땅을 빼앗았다고 기술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기』 ‘흉노열전’과 ‘조선열전’

그리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진개의 고조선 침략관련 기록들이

모두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며,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이

현 중국 북경 서남쪽 200여 킬로미터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임을 알았다.

 

이 두 가지만 이해하면 앞으로 『사기』 ‘조선열전’이 전하는

한민족의 상고사가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은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

 

5. 장새(鄣塞)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전국시 연 소왕대(B.C.311~279)의 장군인

<진개>의 조선공략과 관련되어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는 요새이다.

 

<안사고>는『한서』「영행열전(佞幸列傳)」 ‘등통전(鄧通傳)’에서

‘요(徼)’에 대해 주석하기를 “요(徼)는 새(塞)와 같은 것이다.

동북에 있는 것을 새(塞)라 이름하고 서남의 것을 요(徼)라 한다.

새(塞)라는 것은 장새鄣塞에서 이름한 것이고

요(徼)라는 것은 요차(徼遮)의 뜻을 취한 것이다.” 라 하였다.

 

한편『사기』‘경포열전’을 주석한『사기색은』에서는

요(徼)를 변경의 정(亭)과 장(鄣) 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장(鄣)·새(塞)·장새(鄣塞)·요(徼) 등은

변방 요새를 지칭하는 동일한 의미로서 지역적 구분이 행해짐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의하면 연이 진번ㆍ조선 영역에 장새를 설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후 진ㆍ한의 대조선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다만 연의 동방 진출과 관련하여 그 진출기지를

이와 같이 모호한 표현으로 기술한 점으로 보아

사실상 燕대에는 아직 조선영토였던 요동 지역에 대한

군현지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 41)

 

(2) 필자의 주석

 

전국시 연 소왕대(B.C.311~279)의 장군인

<진개>의 조선공략과 관련되어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는 장새이다.

 

이 장새는 앞에서 ‘진번‧조선’ 항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기』 ‘흉노열전’에 나오는 다음의 연장성 기록과 대응된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다.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 『사기』 ‘흉노열전’

 

위 구절은 연나라가 쌓은 장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친 후 장성을 쌓고,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연나라 장성 이남의 땅이 본래 동호의 땅이며,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이 진번ㆍ조선이다.

 

연장성은 조양에서 양평까지 이어졌다.

 

연장성의 서단인 조양은 『사기집해』에서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인 <위소(? ~ 273)>의 말을 인용하여

“(조양은) 지명으로 상곡에 있었다(地名,在上谷)” 하였다.

 

『사기정의』에서는 “상곡군은 지금의 규주이다(上谷郡今嬀州)” 하였다.

 

또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은 『사기색은』에서

<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양평은) 지금 요동군의 치소이다(今遼東所理也)” 하였다.

 

연장성의 서단인 조양의 위치는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로 이론이 없다.

 

그런데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의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연장성의 동단은 한민족 상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동군의 치소였기 때문에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양평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

우선 위의 『사기』 ‘흉노열전’ 기록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치고

그 자리에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상곡군과 요동군이 천 여리 이내의 거리에 있어야 한다.

 

상곡군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이므로

이곳에서 천 여리는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다.

 

그러므로 연나라 요동군은 반드시 하북성에 위치해야 한다.

 

또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낙양에서 상곡군 치소까지의 거리가 3,200리 이고,

요동군 치소까지의 거리는 3,600리로 나온다.

 

그러므로 상곡군 치소인 저양현(沮陽縣)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는 400여 리의 거리이다.

 

저양현(沮陽縣)의 위치가 현 북경 서북쪽 거용관 부근이므로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400여 리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

 

필자는 연장성의 동단인 요동군 치소 양평을 현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로 비정한다.

 

중국 남송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를 참고하여

연장성 및 연5군의 위치를 위의 지도에 표시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강단사학계는

양평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요양(遼陽)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곳은 상곡군(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으로부터 2천 여리나 떨어진 곳이다.

 

『사기』 ‘흉노열전’이나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 기록과 전혀 맞지 않다.

 

강단사학계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요동의 위치를 현 요동반도로 고정시켜 놓고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요동은 한(漢)족과 韓민족의 부침에 따라 여러 번 그 위치의 변동이 있었다.

 

연(燕)‧진(秦) 시대의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며,

前漢 초에는 요동이 산서성으로 이동하였다가

後漢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에 다시 하북성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요나라 시대(AD 916~1125)에 이르러 요동은 요령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서를 읽을 때 저자가 어느 시대의 요동을 말하는지 모르면

전혀 엉뚱한 역사해석이 되고 만다.

 

요동지역의 변화에 대한 관련 기록은

다음에 ‘요동고새’ 항목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6. 요동외요(遼東外徼)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1) 요동

 

진ㆍ한대의 위치 해명은 고조선의 영역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요동의 위치비정을 둘러싼 논의가 다양하게 개진되어 왔다.

 

종래 고조선의 영역을 압록강 이남지역에서 찾은 견해에 의하면

진ㆍ한대 요동은 현재 요하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해하며,

또 고조선 영역을 청천강 이남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

요동의 위치는 요하 이동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 같은 견해에 의하면 진ㆍ한대 요동군의 영역은 난하 이동지역이 되며

요동과 요서의 경계가 현재의 요하로서 파악케 된다.

 

한편, 이지린은『전국책』「연책」의 ‘蘇秦 …… 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이란 내용에서 조선의 요동이 존재했음을 강조하고,

이 지역에 점차 의 세력이 침투하였고

漢초에 ‘연분위요동燕分爲遼東’(『사기』「진초지제월표」의제 원년)

사실 등에 근거할 때 진ㆍ한초에는 요동국과 요동군이 존재했다고 이해하였다.

 

즉, 연왕 <한광>이 요동왕이 되어 무종(無終)에 도읍하고

연의 장수 <장자>가 연왕이 되어 계(薊)에 도읍한 사실 (『사기』「항우열전」)에서

요동국과 요동군이 구별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각 도읍지를 고려하여 연과 구별되는 요동을 난하이동에서 찾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진 이세(秦二世)가 갈석산에 다녀온 사실을

요동에 갔다 온 것으로 이해하여, (『사기』「진시황본기」)

현재의 산해관에 존재한 갈석산의 위치에 의하여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현재의 난하를 당시에는 요수로 칭했음을 논증하면서 이를 보강하여

진ㆍ한초의 요동은 현재의 난하 이동임을 강조하였다.

(「진ㆍ한 요동군의 위치」pp.55~64)

 

이 같은 견해는 최근 윤내현에 의해 부연되고 있다.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15~80)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사료해석에 논리적 비약이 심하여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에 제기된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견해에 의하면,

燕대의 요동군은 요하 중류의 군사기지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秦대에는 그 범위가 압록강까지 확대되었으나

군현지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漢대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燕將 진개 침입 이전의 고조선 영역은

요동을 중심으로 대릉하 유역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이와 같이 진ㆍ한대 요동의 위치에 관한 현재의 논의는

그 서변이 현재의 요하라는 견해와 난하라는 견해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인가 또는 현재의 요동지역인가라는 문제 및

고조선 강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중요한 쟁점이다.

 

그린데 최근의 요동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문헌고증에 의거할 때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현재의 요동지역으로 이해되어지며,

특히 대릉하 이동 지역에서 고조선의 독자적 문화와 정치무대를 보게 되므로

이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2) 외요(外徼)

 

秦은 15년간 존속한 나라로서

사마천은 이 시기 고조선과 秦 사이에 있었던 국경선 변동을 본문과 같이

‘진멸연(秦滅燕) 속요동외요(屬遼東外徼)’란 내용으로 간략히 기술하였다.

 

허승종은 이를 ‘요동새외지요(遼東塞外之徼)'

즉, 요동새 바깥의 ‘요(徼)’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재개하였다.

(「중국『사기』에 보이는 ‘료동고새’에 대하여」 pp.18∼26)

 

그런데 ‘요(徼)’는 전국이래 한대에 이르기까지

국경지역에 설치된 변경초소선으로서

『사기』「사마상여전」을 주석한『색은』에서 ‘요(徼)’는 새(塞)이다.

목책과 강으로 만이와 경계가 되는 것이다’라고 한 내용 등을 볼 때

그 성격이 보다 구체화된다.

 

한편『연감류함』의 편자들은

‘외요는 진대에 속하고 고새는 한대에 수리한 것이다(外徼屬於秦時 故塞修於漢代)’

라 하여 외요를 요(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외요(外徼)를 요외(徼外)로 이해하여 지역적 성격을 부여할 것이 아니라,

새(塞)와 같은 국경초소선으로 보아야 하며

‘요동새(遼東塞)’의 바깥 ‘요(徼)’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 요동외요의 위치는 난하 이동으로 보는 견해와,

이후 중국의 요동 식민의 거점이 된 곳임이 분명한 데에서

후대의 요동군치인 양평 일대가 아닌가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2) 필자의 주석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연나라 장성을 요동의 바깥 요새로 삼았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요동은 그 위치가 크게 세 번 바뀌었다.

 

연‧진 시대의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며,

전한 초에는 요동이 산서성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가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에 다시 하북성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요나라 시대(AD 916~1125)에 이르러 요동은 요령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요동지역의 변화에 대한 관련 기록은

다음에 나오는 ‘요동고새’ 항목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사마천 당시에는 장안에서 먼 지역의 황하중류요수(遼水)였으며,

요동은 황하중류의 동쪽이었다.

 

그러므로 요동고새와 요동외요는 모두 황하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

 

황하 동쪽인 현 중국 산서성 지역에는 장성이 두 겹으로 존재하였는데

중국의 수도인 장안에서 보았을 때 바깥의 장성이 요동외요이고

안쪽의 장성은 요동고새이다.

 

안쪽의 장성을 요동고새라 한 것은 요동외요보다 먼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전국시대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가 쌓은 장성과,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기존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든 만리장성과

요동외요가 잘 기록되어 있다.

 

『사기』 ‘흉노열전’에서 관련기록들을 살펴보자.

 

<필자가 고증한 만리장성과 요동외요>

 

<각종 장성들 중국역사지도집 전국시대>

 

① “진 소왕(B.C 306-251) 때, 의거융왕이 선태후와 사통해 아들 둘을 낳았다.

선태후가 의거융왕을 속여 감천궁에서 죽이고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쳐서 멸했다.

이에 진나라가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다

(秦昭王時,義渠戎王與宣太后亂,有二子.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

遂起兵伐殘義渠.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築長城以拒胡)”

 

② “그리고 조 무령왕(B.C 325-299) 또한 풍속을 바꾸고 호의 복장을 입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북쪽으로 임호(林胡), 누번(樓煩)을 격파했다.

장성을 쌓아 대(代)에서부터 음산 기슭을 따라 고궐에 이르기까지 새를 만들고

운중(雲中), 안문(鴈門), 대군(代郡)을 설치했다

(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習騎射,北破林胡﹑樓煩.築長城,自代並陰山下,

至高闕爲塞.而置雲中﹑鴈門﹑代郡)”

 

③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

 

④ “뒤에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하였고,

진시황(B.C 246-210)이 몽념 장군을 보내 10만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호를 공격하게 하여 하남(지금의 오르도스) 땅을 모두 거두었다.

하수를 따라 새를 만들고

하수 변에 44개 현성(縣城)을 쌓아 죄수들을 옮겨 이를 채웠다.

그리고 직도(直道)를 뚫어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에까지 이르렀고,

(장성을 쌓아) 변경 산의 험준함을 활용하며 계곡을 참호로 하고

수선할 수 있는 곳은 수선해서 쓰며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여 리에 이르렀다.

또한 하수를 건너 양산(陽山), 북가(北假) 땅을 차지했다

(後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擊胡,悉收河南地.因河爲塞,築四十四縣城臨河,徙適戍以充之.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壍谿谷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又度河據陽山北假中)”

 

위의 ①, ②, ③은 각각 진장성과 조장성 및 연장성을 기술한 것이다.

 

위의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중국역사지도집』은

연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청천강까지 연결하였다.

 

그러나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은 현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이고,

연5군은 그 연장성 아래 위치하였다.(앞의 ‘장새’ 항목 참조)

 

위의 ④는 진시황이 쌓은 요동외요와 만리장성을 나타낸다.

 

본문 중 “하수를 따라 새를 만들고(因河爲塞)” 한 것이 요동외요를 가리킨다.

 

이 새에 관하여 『사기색은』은 해설하기를

“『태강지리지』에 ‘진나라의 새가 오원 북쪽 9백리 되는 곳에서 비롯되는데

이곳을 조양이라 한다.

동쪽으로 이어져 이분산 남쪽, 한양(漢陽) 서쪽에서 끝난다.’ 했다.

한(漢)은 어(漁)로도 적혀 있다

(太康地記 ‘塞自五原北九百里, 謂之造陽. 東行終利賁山南,漢陽西也’ 漢, 一作漁)”

하였다.

 

진나라 요동외요는 조장성과 연장성을 연결한 것이며,

그 동단은 어양(漁陽)(한양)으로, 대략 오늘날의 조백신하(潮白新河)를 넘지 못하였다.

(위의 지도 ‘필자가 고증한 만리장성과 요동외요’ 참조)

 

이러한 사실은 진나라가 연나라의 요동군 지역은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연나라 요동군은 진번의 중심지역이다.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번은 고구려의 전신이므로 연나라가 망할 무렵인 기원전 222년에는

고구려가 이미 태동하였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900년 설의 근거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또 “(장성을 쌓아) 변경 산의 험준함을 활용하며 계곡을 참호로 하고,

수선할 수 있는 곳은 수선해서 쓰며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여 리에 이르렀다.

(因邊山險壍谿谷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 고 한 내용은

진나라 만리장성을 가리킨다.

 

위 지도에서 임조에서 갈석까지 이어진 장성으로

진장성과 요동고새를 연결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 ‘흉노열전’에서 진장성을 고새(故塞)로 자주 표현하였다.

 

요동외요 보다 오래된 장새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요동고새도 요동외요 보다 오래된 장새이므로

요동고새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7. 기원난수(其遠難守)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염철론』과『위략』에 의하면

한초에 고조선의 준왕은 진ㆍ한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진의 요동외요를 공격하여 요동지역의 고토 일부를 수복하는 한편

위만에게 100리의 땅을 봉해 주어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지키게 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워’에서

그곳은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면 그대로 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을 의미하며,

또한『사기』의 찬자(撰者)가 기록한 것처럼 거리가 멀어 후퇴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의해 요동외요가 함락되었던 것을 감추기 위한

중국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한이 일어나서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이 구절에서

그곳은 연장성을 말한다.

 

연나라가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하고 연장성을 설치하였다.

 

그 후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자 연장성은 진나라 요동외요에 속하였으며,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일어나자

요동외요에 속하였던 연장성 지역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워 후퇴했다는 내용이다.

 

이 시기 고조선이 진번과 조선을 다시 회복하였으므로,

연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이 연장성 설치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고 한 것이다.

 

‘요동의 옛 요새(요동고새)’는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기 이전의 국경에 설치한 장새이다.

 

『사기』를 통하여 진ㆍ한교체기의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한나라가 연장성 지역이 지키기 어려워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한고조 유방이 해하(垓下) 싸움에서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해가 기원전 202년 12월이다.

 

『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한나라가 처음 중국을 평정하고 이듬해인 기원전 201년 9월,

한왕(韓王) <신信>이 대(代)로 옮겨 안문군(雁門郡) 마읍(馬邑)에 도읍했다.

 

흉노가 대거 공격해 마읍을 포위하자 <신信>이 흉노에 항복하였고,

흉노는 <한신>을 얻고서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구주를 넘어 태원(太原)을 공격하여 진양(晉陽)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유방이 직접 흉노를 공격하다가

산서성의 안문군(雁門郡)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당하여 참패를 당한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공주(公主)를 바치고,

매년 일정한 양의 솜과 비단 등을 바치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친을 맺게 된다.

 

이 뒤로도 한왕(韓王) <신信>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조리>, <왕황> 등과 함께 수차례 화친의 약속을 어기고

대(代), 운중(雲中)을 침범했다.

 

또 기원전 197년 거록태수 <진희>가 배반하여 <한신>과 함께 대(代)를 공격했다.

 

한나라가 <번쾌>를 시켜 공격하여 다시 대(代), 안문(鴈門), 운중(雲中)의 군현들을

다시 함락했으나 새(塞)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사기』 ‘한고조본기’ 등에 따르면

한왕 6년(BC. 201) 10월 연나라 왕 <장도>가 모반하여

대(代)를 공격하여 <장도>를 사로잡고 태위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봉했다.

 

이후 연왕 <노관>은 기원전 197년 거록태수 <진희>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한고조가 불렀는데 병이라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195년 4월 25일 한고조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흉노로 도망하였다.

 

위와 같이 『사기』 ‘흉노열전’과 ‘한고조본기’ 등을 살펴보면

한나라 초기 연왕(燕王)을 세우면 모두 한나라를 배반하고,

산서성 대(代)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며,

당시 한나라의 국경이

대략 산서성 중부의 대(代) 지역을 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태의 한나라가 연나라의 전성기 시절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설치한

연장성 지역을 지키지 못하고 국경선을 대폭 후퇴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요동고새(遼東故塞)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 나타난 ‘요동고새’는『사기』의 표현상 앞서 기원전 3세기에

燕이 진번ㆍ조선지역까지 침입하여 설치한 ‘장새’로 이해되어진다.

 

그런데 이를 진이 연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요동외요’에 속하게 한 것과는 별도로,

한이 흥기하면서 그 지역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운 까닭에’

다시 수리하여 이용한 ‘요동의 고새’로 이해하여

그 위치를 ‘장새’나 ‘요동외요’와는 다른 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요동고새라는 것은 한 이전부터 설치된 요새라는 것 즉,

한 이전 연ㆍ진대시기 부터 존재한 것으로 진의 만리장성 동쪽 끝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 연구』pp.44~47)

 

그러나 ‘한흥(漢興) 위기원난수(爲其遠難守) 복수요동고새(復修遼東故塞)’에서

‘한흥(漢興)’이란 한의 건국 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한나라 건국 초의 옛 요새란 한이 건설한 요새가 아님이 분명하다.

『사기』「조선열전」에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진의 외요와 연의 장새 뿐인데,

요와 새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고새(故塞)에 해당되는 것은『사기』에 의하는 한 燕의 장새 밖에 없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 41)

 

(2) 필자의 주석

 

본문에 나타난 ‘요동고새’는 기원전 3세기에

연이 진번ㆍ조선지역까지 침입하여 설치한 ‘장새’와는 다르다.

 

본문에 의하면 연나라 장성인 ‘장새’가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했다’ 하였으므로

‘요동고새’는 연나라의 ‘장새’ 보다는 훨씬 후퇴한 지역이다.

 

이 시기는 고조선이 진번과 조선을 모두 회복하였으므로,

연나라와 고조선은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이전의 국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요동고새’는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기 이전의 국경에 설치했던 장새이다.

 

요동고새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의 요동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요동은 그 위치가 여러 번 바뀌었다.

요동의 위치 변동은 한민족의 상고사 전반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① 연‧진 시기의 요동

 

이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BC361-BC333)에게 연나라 강역을 언급하면서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이때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진번‧조선)를 물리치고

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기 이전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연나라 강역은

상곡군(현 하북성 장가구시 부근) 보다 서쪽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때 연나라의 동쪽에 있었다는 요동은 현 하북성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진개의 침략 전 ‘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 강역’ 지도』 참조).

 

또 앞의 ‘장새’ 항목에서 연‧진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에 있었음을 충분히 입증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소진은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 하였고,

『사기』 ‘조선열전’은

연나라가 동쪽으로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했다’고 하였다.

 

즉 소진이 말한 요동과 『사기』 ‘조선열전’의 진번은 서로 대응관계에 있다.

 

당시 요동지역에 진번이라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이 요동의 진번이 고구려의 전신임을 언급하였다.

 

 

② 전한 초 ~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 시기의 요동

 

이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이다.

 

연나라가 전성기 시 진번과 조선을 복속하여 연장성을 설치하고,

연5군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한나라가 일어나면서 고조선이 진번과 조선을 모두 회복하였으므로

진번과 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연5군은

현 중국 산서성 지역으로 이치 될 수밖에 없다.

 

이 시기 요동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도요장군度遼將軍’ 이란 직책이 있었다.

 

『한서』 ‘권7 소제기’에 의하면

“(기원전 78년) 겨울 요동의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랑장 <범명우>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아

북변 7군의 2천 기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게 했다

(冬, 遼東烏桓反, 以中郎將范明友爲度遼將軍, 將北邊七郡郡二千騎擊之)”

는 기록이 있다.

 

<응소>가 주석하기를 “요수(遼水)를 건너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도요(度遼)를 관호로 삼았다(當度遼水往擊之, 故以度遼爲官號)” 하였다.

 

이 도요장군의 관호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후한서』 ‘남흉노열전’에 의하면 후한 명제 영평 8년(65년) 남흉노와 북흉노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요장군(度遼將軍) 영(營)을 다시 설치하게 된다.

 

이때 도요장군 영을 설치한 곳이 오원군(五原郡) 만백현(曼柏縣)으로 황하 서쪽이다.

 

당시 남흉노와 북흉노는 황하를 경계로 하였다.

 

<응소>의 주석을 참고하면

도요장군은 요수(遼水)를 건너서 적을 공격하므로 도요(度遼)를 관호로 삼았는데,

이때의 도요장군은 황하를 건너서 북흉노를 공격하게 되므로

결국 황하가 요수(遼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요동은 황하의 동쪽인 산서성 지역이다.

 

이 기간 중에 해당하는 한무제 원봉3년(BC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진번과 조선 지역을 다시 차지하였으나,

한나라 초기에 산서성으로 이치되었던 요동군 등을

하북성 지역으로 도로 복치하지는 못하였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결과를 보면 승리했다는 한나라의 장수들과 사신들은

모두 한무제에게 참형을 당하였고,

항복한(?) 조선의 대신들은 모두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결코 한나라의 승리가 아니었으며,

내부 분열로 위만 조선이 나뉘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사군의 명칭을 보더라도 진번군, 임둔군 등

위만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정치체의 이름이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결과는

위만조선의 연방체제가 무너지고

여러 개의 독립된 소국으로 분열된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한나라가 위만조선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산서성 지역으로 이치되었던 요동군 등이

다시 하북성 지역으로 복치 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사마천이『사기』 ‘조선열전’을 기록하던 당시에도

요동은 여전히 산서성 지역이었으며,

산서성 지역에 위치한 장새들을 요동외요와 요동고새 등으로 기록하였다.

 

아래의 『만리장성과 요동외요 지도』에서 파란색 장성이 요동고새이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하북성의 요서 ‧ 요동 지역 등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개의 침략 전 ‘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 강역’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북성의 요서‧요동 지역은 진번지역이다.

 

진번지역은 위만조선에 속하였다가 한무제의 침략으로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분열되면서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이 된다.

 

그러나 진번군은 원주민의 반발로 설치된 지 27년인

한 소제 시원5년(BC 82) 폐지되었다.

 

그리고 7년 후인 한 소제 원봉6년(BC 75년)에는

漢의 將帥 <범명우范明友>가 현도(玄菟)를 침입하였으나 

선비족인 오환(烏桓)과 비리(卑離)자몽(紫蒙)이 연합하여 한의 군대를 대파하고

상곡(上谷)까지 처 들어간다.

 

이 현토군은 선비족의 <섭신>이 다스려 왔는데

광명대제33년(AD 14년)에 고구려에게 복속하게된다.

 

대무신제 때에는 낙랑 지역을 두고

한나라와 서로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벌였으며,

대무신제는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 등 산서성 중부지역까지 공략하였다.

 

그리고 대무신제 28년(AD 55년)에는 요서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구려가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 하북성 북부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래의 『삼국지』 ‘오환‧ 선비‧ 동이전’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도 한나라에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요동태수가 등장하고 있다.

 

역시 한나라의 요동지역이 현 중국 산서성 지역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평(永平: 후한 명제 58-75) 중,

제융이 요동태수가 되자 선비를 선물로 유인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환 흠지분 등을 참수하게 했는데,

선비족들은 돈황, 주천 동쪽의 읍락 대인들까지

모두 요동으로 와서 하사품을 받았다.

청주와 서주 두 주가 돈을 지급했는데 매년 2억 7천만 전을 항상 주었다.

(永平中, 祭肜爲遼東太守, 誘賂鮮卑, 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 於是鮮卑自燉煌、

酒泉以東邑落大人, 皆詣遼東受賞賜, 靑、徐二州給錢, 歲二億七千萬以爲常)”

삼국지』 ‘오환‧ 선비‧ 동이전’

 

 

③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 ~ 요나라(916~1125) 이전 시기의 요동

 

이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후한서』 ‘군국지’의 요동군 기록에 의하면

“본기 화제 영원 16년(AD 105년)에 (요동)군을 다시 복치했다.

(本紀和帝永元十六年, 郡復置)” 하였다.

 

이때의 한나라는 국력이 매우 강성하였다.

 

이름난 장수 <반초(班超)>가 서역도호가 되어

서아시아의 차사, 선선 등을 멸망시키고 지중해까지 이르렀으며,

거기장군 <두헌(竇憲)>은 5천여 리에 이르는 원정군을 일으켜

지금의 외몽고 등지로 북흉노를 대파하였다.

 

이에 따라 하북성 요동의 서북쪽에 있으면서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오환‧선비 등이 한나라에 내속함으로써

한나라가 하북성 지역에 연5군을 다시 복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고구려와 한나라는 하북성 요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이때 고구려의 수도는 승덕(열하)에 있는 국내성이다.

 

太祖皇帝, 次大帝, 新大帝, 故國川帝까지는

하북성 요동지역을 반분하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고국천제(재위:서기179~197년) 시절인 AD 189년

요동에 공손씨 정권이 들어서고,

고국천제 18년(196년)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가 분열되면서

하북성 요동지역은 모두 공손씨 정권에게로 넘어가고 고구려는 요동을 상실한다. 

 

산상대제 13년(209년)에는 국내성에서 환도성{今 朝陽}으로 천도하고

동천대제 11년(237년)에 위나라와 연합하여 공손씨 정권을 멸하였고,

AD 242년에는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것이 안평대전이다. 

 

그러나 동천대제 20년(246년)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이듬해 하북성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여 리 떨어진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요양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중천대제와 서천대제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국력을 회복한 고구려는

미천대제(재위:서기 300~332년) 시절 서진(西晉) 말의 혼란기를 틈타서

요동과 낙랑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고국원제 12년(342년)에는 다시 환도성으로 천도한다. 

 

그러나 하북성 요동지역에 모용 선비족이 흥기하여 연나라를 건설하면서

고구려는 또 다시 하북성 요동과 낙랑지역을 상실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100여년 후 광개토태왕이 등장하여

하북성 요동과 낙랑지역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고,

뒤이어 장수왕 시절 수도를 다시 하북성 요동지역(今 노룡)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대륙 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전』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동서 6,000리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대략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 현 중국 섬서성 유림관 부근까지 이르렀다.

 

또 『삼국사기』 ‘최치원전’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쪽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공략하고,

북으로는 유주,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 지역을 요동시켰다”고 한 것처럼

중국 동해안 지역을 모두 석권하였다.

 

 

④ 요나라(916~1125) 이후 시기의 요동

 

이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이다.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 이동된 시기는

갈석산의 지명이동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사기』 ‘몽념열전’에 의하면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요동까지’라 하였고,

『수경주』‘하수(河水) 3’에서는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갈석까지’라 하였다.

 

두 사료를 통하여 갈석산이 요동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다.

 

또 『사기색은』은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고 하였다.

 

그러므로 갈석산은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조선의 위치와 요동의 위치 및 진장성의 동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산이다.

 

그런데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동쪽으로 천 여리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은 조선의 위치와 요동의 위치 및 진장성의 동단 등

한민족 상고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이 일어난 시기를 살펴보자.

『통전』에는 모두 3개의 갈석산이 나타나는데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하북성 보정시에서 천진시 사이인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과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우갈석 등이다.

 

『통전』은 당나라 사람 두우(杜佑 : 735~812)가 801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때까지도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보이지 않는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우적도』(남송시대 1136년 작)이다.

 

이 『우적도』에서 난하(유수) 부근에 갈석산과 더불어

노룡현과 평주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어서 『구주산천실증총도』(남송시대 1177년 작)와

『거란지리지도』(남송시대 작) 등에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생겨난 시기는

『통전』의 편찬 이후인 801년에서 『우적도』가 그려진 1,136년 이전으로

대략 요나라(916 ~ 1125년) 시기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된 시기는

요나라(916 ~ 1125년) 시대로 본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 여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 ‘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요나라 시기에 갈석산의 지명이동과 더불어

하북성 지역의 지명들이 요령성 지역으로 대대적인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패수는 중국 하북성의 당하唐河였다.>

 

9. 패수(浿水)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패수는 한과 조선의 국경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위만의 망명과 한 무제의 조선침공 및 한사군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패수의 위치에 관해서는

종래 대동강설, 청천강설, 압록강설, 요동방면설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대동강설은 역도원의『수경주』이래『수서』·『신당서』·『통전』 등

중국사서에 유지되어 패수를 대동강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패수에 관한 설이

압록강설, 대동강설, 요동니하설, 저탄수설 등으로 나뉘어져

한국전통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압록강설을 견지하여 패수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여유당전서』「강역고」 패수변)

 

청천강설은 이병도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열수를 대동강으로 확정하고

평양 지역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패수고」)

 

한편 신채호는 헌우락설(蓒芉濼說)을, (『조선사연구초』pp.45∼65)

정인보는 어니하(대릉하)설을(『조선사연구』) 제기하여

패수의 요동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요동방면설은 이지린 등에 의해 대릉하설로 연결된다.

 

즉, 패수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수경』패수조의

‘패수출낙랑루방현(浿水出樂浪鏤方縣) 동남과임패현(東南過臨浿縣)

동입우해(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요동, 요서지역에서 동남으로 흐르다가

하류에 가서 다시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대릉하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고명이 백랑수(『열하지』대릉하)였음을 밝혀

그 음상이(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한대 루방현이 대릉하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고조선연구』pp.72∼83)

 

한편,『한서』「지리지」 요동군 번한현조의 주(註)내용을 인용하여

패수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패수를 난하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윤내현,「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 국경인 패수와 고조선의 중심인 열수가

모두 난하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사기』의 표현에 따르면 패수의 위치는 요동고새의 위치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열수의 위치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요동고새를 진장성의 동단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열수를 요하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패수는 대릉하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고조선의 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열수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열수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패수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청천강(이병도)ㆍ압록강(정약용ㆍ천관우) 등이다.

 

그러나『사기』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패수는 요동고새(연의 장새)와 진고공지(秦故空地)사이의 강이다.

 

연의 동방진출 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만번한(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패수는 이와 병행하는 강이 된다.

 

만번한이 천산산맥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없이

패수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패수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패수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대동강으로

『사기』의 패수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2) 필자의 주석

 

일반적으로 패수를 한과 조선의 국경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조선열전’의 관련 구절을 살펴보자.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이라는 문장에서

요동고새가 국경인가? 아니면 패수가 국경인가? 하는 점이다.

 

사마천은 앞 문장에서부터 일관되게

장성을 기준으로 국경의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

 

위 문장도 “패수에 이르는 곳까지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하여 경계를 삼고

연에 복속시켰다”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한 듯하다.

 

패수가 국경이 아니라 요동고새가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이었다.

 

 

<패수의 위치(당하가 패수이다)>

 

패수는 위만의 망명과 한 무제의 조선침공 및 한사군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이다.

 

패수의 위치는 학자에 따라 한반도의 대동강에서

중국 하남성 황하부근에 이르기까지 거리 편차가 수 천리에 이르고

학설이 다양하여 우리의 상고사를 미로에 빠뜨리고 있다.

 

한나라 초기 국력은 ‘7. 기원난수(其遠難守)’ 항에서 살펴 보았듯이

산서성 중부인 대(代) 부근도 지키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한나라가 난하를 넘어 심지어 한반도까지 지배하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사마천의 『사기』를 잘 이해하면

패수의 위치를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위의 ‘장새(鄣塞)’ 항목에서 설명하였듯이

진개가 동호(진번ㆍ조선)를 천 여리 물리친 후 장성을 쌓고,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연나라 장성 이남의 땅이 본래 동호의 땅이며, 이곳이 바로 진번ㆍ조선이다.

 

그런데 고조선이 진번ㆍ조선의 땅을 모두 회복하였으므로

연나라와 고조선의 경계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패수의 위치는 영정하(永定河)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또 『수경』에서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흘러 임패현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참조하면

패수의 위치는 거의 확정할 수 있다.

 

영정하 이남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강은

역수(易水), 당하(唐河), 대사하(大沙河) 뿐이다.

 

그리고 『사기색은』에서 <신찬>의 말을 인용하여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고 하였다.

 

중국 고지도 대부분 당하 동편에

위만의 도성으로 보이는 만성(滿城)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패수는 자연스럽게 당하(唐河)로 비정할 수 있다.

 

위 『패수의 위치』지도에서 만성(滿城)이 왕검성이며,

수성(遂城)은 낙랑군 수성현이며, 낭아산(狼牙山)은 갈석산이며,

요동고새는 다시 수리하여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으로 삼은 장새이다.

 

 

10. 노관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노관은 풍인(豊人)으로 한 고조(유방)와 동향인으로서

한 건국에 적극 참여하여 이성제후(異姓諸侯) 7인 중 1인으로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한 고조의 이성제후 제거정책이 진행되자,

흉노로 망명하였고 흉노는 그를 동호로왕(東胡盧王)으로 봉했다.

 

그는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2) 필자의 주석

 

노관은 강소성 서주시 풍현(豊縣) 사람으로 한고조 유방과 동향인이다.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항상 유방을 보필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본문의 ‘연왕 <노관>의 배반과 <만滿>의 망명’을 이해하려면

당시 산서성과 하북성 및 연나라의 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연왕 <노관>의 행적을 통하여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한고조 당시 산서성과 하북성 및 연나라는 한나라와 끊임없이 갈등관계에 있었다.

 

특히 산서성 중부의 대(代) 지역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많은 전쟁을 벌였다.

 

『사기』의 ‘고조본기’ ‘흉노열전’ ‘한신노관열전’ ‘번쾌열전’ 등을 참조하여

당시의 상황을 살펴본다.

 

한왕(漢王) 2년인 기원전 205년,

한신(회음후 한신과는 동명이인)이 산서성의 한(韓)나라 땅(태원 이남)을 공략하여

10여 개의 성을 평정했다.

 

유방은 약속대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봉했다.

 

기원전 202년 12월 한고조가 마침내 해하에서 항우을 격파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다.

 

기원전 202년 10월

연왕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키고 남하하여 대(代) 땅을 공략하였다.

 

고조가 친정하여 연왕 <장도>를 사로잡고, 태위 <노관>을 연왕으로 임명했다.

 

이어서 승상 <번쾌>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나가 대(代) 땅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200년, 한왕 <신>의 봉국을 태원 이북으로 옮겨 치소를 진양(晉陽)으로 삼아

호(胡)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한왕 신이 변경의 방어기지와 가까운 마읍馬邑으로 치소를 옮겨달라고

황제에게 청하여 치소를 마읍으로 옮겼다.

 

그해 가을 흉노의 선우 모돈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마읍의 한왕 <신>을 포위했다.

 

한왕 <신>은 마읍성을 흉노왕을 접견하는데 예물로 삼아 헌상하고

흉노에 투항한 다음 군사를 태원으로 진격시켰다.

 

기원전 199년 겨울, 한고조가 친히 원정길에 올랐으나

흉노의 유인작전에 말려 산서성 안문군에 있는 백등산에서

7일 동안 포위당하여 곤욕을 당하였다.

 

이로부터 한나라는 흉노에게 공주를 연지(흉노의 왕비)로 보내고

매년 일정한 양의 솜과 비단 및 술과 음식을 바치기로 하는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한고조는 회군하면서 <진희(陳豨)>를 열후에 봉하고

조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조와 대 변경의 군사를 그에게 지휘하도록 했다.

 

그래서 조와 대 변경의 군사들은 모두 <진희>에게 속하게 되었다.

 

기원전 197년 7월,

한고조의 부친 태상황이 붕어했음으로 사자를 보내 <진희>를 불렀으나

<진희>는 중병에 걸렸다고 하면서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한신>이 <왕황> 등을 <진희>에게 보내 모반하도록 선동했다.

 

그해 가을, <진희>가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한단(邯鄲)으로 친히 출전하여 <진희>의 군사를 격파했다.

 

연왕 <노관> 역시 <진희>의 군사를 동북쪽에서 공격했다.

 

그해 겨울, 조나라와 태원 및 대 땅을 평정하고 회군하면서

한고조는 그의 아들 <유항>을 대왕(代王)에 봉한 후

중도(中都)(산서성 태원부근)에 치소를 두고 대와 안문 등의 땅을 속하게 했다.

 

기원전 195년 봄,

한왕 <신>이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삼합현(參合縣)으로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한나라에 항거하자, 한나라 조정이 <시장군(柴將軍)>을 보내 물리치도록 했다.

 

얼마 후에 양군이 교전에 들어갔다.

 

<시장군>은 삼합에 주둔하고 있던 흉노병을 모두 죽이고

한왕 <신>은 붙잡아 참수했다.

 

그 해에 한고조가 동쪽의 경포를 토벌할 때,

<진희>는 여전히 군사를 이끌고 대(代) 땅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한나라가 <번쾌>에게 <진희>를 공격하여 죽이도록 하였다.

 

<진희>의 비장이 항복하여 연왕 <노관>이 <진희>와 음모를 꾸민 것을 폭로했다.

 

고조가 사자를 보내 <노관>을 소환했으나 <노관>은 칭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연왕 <노관>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어버렸다.

 

한고조는 <번쾌>로 하여금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연왕 <노관>이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들을 이끌고

장성 아래 머물면서, 후(무양후 번쾌)를 방문하고,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하여 사죄하려고 하였다.

 

그해 4월 고조가 죽자 <노관>은 무리들을 이끌고 흉노로 도망쳤다.

 

흉노는 <노관>을 동호노왕(東胡盧王)에 임명했다.

 

<노관>은 만이의 침탈을 받으므로 항상 한나라로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관>은 1년여 후에 호 땅에서 죽었다.

 

 

 

11. 상하장上下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의 동계요새(東界要塞)는 당시의 패수 서안에 존재했으며 그 동쪽은 조선영토였다.

 

『삼국지』에 인용된『위략』에 의해 이 당시 秦의 故地를

위만이 준왕에게 거주허가를 요청한 사실에서 조선 영토였음이 확실하다.

 

‘진고공지(秦故空地)’를 문자 그대로 빈 땅으로 보아

진과 고조선과의 완충지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진고공지’에 장새가 설치된 데에서

이는 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으로 보는 것이 옳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42)

 

특히 이 지역에 중국 유민과 만이(조선인)가 존재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즉, 이 지역을 근거로 위만은 구체적 영역(백리)내의 계속적인 인구 증가 등을

기반으로 준왕을 축출할 수 있는 정복 국가적 성격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한편 ‘상하장’이란 표현은 순서적 표현일 수도 있고 원근적 표현일 수도 있는 바

두개의 요새가 존재했음은 확실하다.

또 이를 ‘오르내리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백마고길白鳥庫吉,「조선고대지명고」 p.29)

 

 

(2) 필자의 주석

 

<만滿>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는데,

<만滿>이 도망하기 전에 있었던 곳은 어디일까?

 

그곳을 알면 패수의 위치 및 상하장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기』 ‘한신노관열전’에서 이 의문을 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위의 ‘노관’ 항목에서도 소개한 구절이다.

 

‘진희가 산서성 대(代)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한나라가 <번쾌>에게 <진희>를 공격하여 죽이도록 하였다.

 

<진희>의 비장이 항복하여 연왕 <노관>이 <진희>와 음모를 꾸민 것을 폭로했다.

 

고조가 사자를 보내 <노관>을 소환했으나 <노관>은 칭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연왕 <노관>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어버렸다.

 

한고조는 <번쾌>로 하여금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연왕 <노관>이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들을 이끌고

장성 아래 머물면서, 후{무양후 번쾌}를 방문하고,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하여 사죄하려 하였다.

 

그해 4월 고조가 죽자 <노관>은 무리들을 이끌고 흉노로 도망쳤다.’는 내용이다.

 

연왕 <노관>은 “주변 인물들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어버리고”

또 “<노관>이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들을 이끌고

장성 아래 머물면서, 후{무양후 번쾌}를 방문하고,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하여 사죄하려고 하였다.

(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侯伺,幸上病癒,自入謝。)”

한 것으로 보아 <노관>은 연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고,

궁인들과 가솔들을 이끌고 망명을 준비한 것을 알 수 있다.

 

노관이 머문 ‘장성아래(長城下)’의 장성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한나라의 <번쾌>와 대왕(代王) <진희> 및 연왕 <노관>이 대치한 곳은

산서성 중부의 대(代) 땅 주변이므로,

<노관>이 머문 ‘장성’은 산서성 중부의 황하에서 태백산에 이르는 장성이다.

 

 

<한사군전쟁 개요도>

 

당시 한나라는 한고조 <유방>이 병들어 누워 있었고,

여후{후일 여태후}와 유방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 간에

태자의 자리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사기』 ‘번쾌열전’ 등에 의하면

“연왕 <노관>이 모반하자 한고조가 <번쾌>를 상국(相國)으로 삼아

연왕을 정벌하도록 했다.

 

<번쾌>는 여후{후일 여태후}의 여동생인 <여수呂嬃>의 남편이다.

 

어떤 사람이 ‘<번쾌>가 여씨들과 작당하여 고조 사후에 군사를 동원하여

<척戚>부인과 그 소생인 조왕 <여의如意> 및 가속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

고 모함했다.

 

고조가 듣고 크게 노하여 <진평>에게

‘<번쾌>의 군영으로 가서 즉시 <번쾌>의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진평>이 여후{여태후}의 보복이 두려워

<번쾌>를 직접 죽이지 못하고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장안에 당도했을 때는 고조가 이미 죽고 난 후였다.

 

여후가 <번쾌>를 석방하고 그 작위와 식읍을 회복시켰다.고 하였다.

 

만약 한고조가 그때 병으로 죽지 않았더라면

연왕 <노관>과 대왕 <진희>를 토벌하러 간 <번쾌>가 오히려 주살되고,

<노관>은 한나라로 복귀할 수도 있었다.

 

<노관>이 연나라 도성을 버리고 궁인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산서성 중부의 대(代) 지역에 있는 장성 아래로 나와 머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위만 망명로>

 

<노관>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한고조가 죽자 여태후가 실권을 장악하고

<번쾌>가 복귀하여 대(代)를 공격하자,

<노관>은 흉노로 도망하고, <위만>은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노관>과 <위만>이 장성아래의 대(代)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볼 때,

<노관>은 북쪽의 안문관(雁門關)을 통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위만>은 동쪽으로 달아나 평형관(平荊關)을 나가서

당하{패수로 비정}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서성의 평형관(平荊關)을 나가면

바로 항산과 오대산 사이를 흐르는 당하{패수로 비정}가 있고

당하를 건너면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만성(滿城)이 나온다.

(지도 참조,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년작/다음카페 향고도/중국고지도)

 

위만의 망명로는 위의 ‘한사군 전쟁 개요도’에서

‘① 패수상군쪽 진격로’와 일치한다.

 

위만이 패수(당하)를 건너 상하장(上下鄣)에 웅거하였으므로

진고공지(秦故空地) 상하장(上下鄣)은

현 산서성 영구(靈邱) 지역으로 비정된다.

 

이 지역은 북쪽에는 요동외요가, 남쪽에는 요동고새가 상하에 존재하는 곳이다.

 

秦나라가 이 지역을 공지로 남겨둔 까닭이 무엇일까?

 

영구(靈邱) 지역은 항산과 태백산 및 백석산(갈석산) 등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천제를 지내던 명산으로 둘러싸인 신성한 지역이다.

 

진시황은 특히 신선사상을 흠모하였으므로 이 지역을 공지로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였다.>

 

 

12. 왕험王險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王險)(『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왕검王儉’으로 표기)의 위치에 대하여

『사기집해』에서는 昌黎有險瀆縣也라는 <서광>의 말을 인용하고,

『사기색은』에서는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는 <응소>의 주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한서』「지리지」 요동군조 험독의 주에는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日險瀆’이라는 <응소>의 견해와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라는 <신찬>의 해석이 부기되어 있다.

 

왕험성의 위치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비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인데,

이러한 주석 자료의 차이에 의해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왕험성의 위치는 현 평양으로,

또 고조선이나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 북부로 이해되어 왔다.

(정약용,『여유당전서』「강역고」 조선고)

 

이에 대해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인 검독(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왕험성(王險城)에 비정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하여 요동에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는데,

<리지린>은 이러한 견해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실제 현 개평 지방으로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고조선연구』pp.83~96)

 

그러나 왕험성은 패수 이동 진고공지(秦故空地) 이남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이는『한서』「지리지」의 낙랑군 조선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현이 왕검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사기색은』에서 왕험성의 주석에 <응소>의 주를 인용한 것과

『사기집해』에서 <서광>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을 요동의 험독(險瀆)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조선의 이동설에 의하면

험독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으로서,

고조선의 도읍은 요동의 험독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요동의 험독이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대체로 요하 이동 천산 이서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사기』의 왕험성은 진고공지(秦故空地) 이남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고조선이 요동의 험독에서 그 중심을 옮긴 이후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2) 필자의 주석

 

왕험(王險)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왕검(王儉)으로 표기한 바와 같이

단군왕검(임검)의 도읍지이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였고,

한나라 낙랑군의 치소였다.

 

그러므로 왕검성의 위치는 한민족 상고사를 파악하는 핵심이다.

 

필자는 앞의 ‘패수’ 항목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검성을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로 비정한다.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자.

 

『사기집해』는 <서광>의 말을 인용하여

“창려에 험독이 있다(昌黎有險瀆縣也)”하였다.

 

『사기색은』은 <응소>의 주석을 인용하여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地理志, 遼東 險瀆縣, 朝鮮王舊都)”하였고,

 

또 <신찬>의 말을 인용하여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하였다.

 

조선왕의 옛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에 대하여

<응소>와 <신찬>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응소>는 요동 험독현을 지목하였고,

<신찬>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을 지목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서지리지』‘요동군 험독현’ 주석에

더 자세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응소>가 말하기를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이다.

물이 험한 곳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다’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험독은 그냥 험독이다’

하였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 패의 음은 배다’ 하였다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한서지리지』‘요동군 험독현’

 

『한서』에 대한 주석은 후한시대부터 시작되어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응소>‧<신찬>‧<복건>‧<여순> 등 20여명의 주석가를 거쳐

당나라 때 <안사고(顔師古,581~645)>의 주석으로 집대성 되었다.

 

이러한 <안사고>의 위치를 감안할 때,

왕험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안사고>가 ‘<신찬>의 말이 옳다’고

<신찬>의 손을 들어 준 것은 상당한 무게를 지니게 된다.

 

필자도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과 <안사고>의 주장에 동의한다.

 

이제 <신찬>의 주장을 토대로 왕검성의 위치를 찾아보자.

 

<신찬>은 서진(西晉, 265~316) 시대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찬>이 말한 낙랑군은 서진의 평주에 소속된 낙랑군을 가리킨다.

 

『진서지리지』를 통하여 서진의 평주(平州) 위치와 낙랑군의 위치를 살펴보자.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연>이 모두 제멋대로 요동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 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을 멸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했다.

함녕 2년(AD 276년)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현 18,100호이다

(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

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지리지』 ‘평주平州’

 

“낙랑군은 한나라에서 설치했다. 6개현을 다스리며 3,700호이다.

조선현(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누방현, 사망현이 있다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진서지리지』 ‘평주平州 낙랑군樂浪郡’

 

위 『진서지리지』 ‘평주平州’ 조는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하였다.

 

그러면 ‘우공의 기주지역’은 어디를 말하는지 살펴보자.

 

『사기』‘권2 하본기’에 나오는 ‘기주冀州’에 대하여

사기정의』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 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

(按理水及貢賦 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東河之西, 西河之東, 南河之北, 皆冀州也)”

『사기』‘권2 하본기’ ‘기주冀州’ 주석

 

즉 ‘우공의 기주지역’은 황하로 둘러싸인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이다.

 

마찬가지로 ‘주나라의 유주’나 ‘한나라의 우북평군’도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서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는 대략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그런데도 통설에서는 평주의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고,

대방군을 황해도에 비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까마득한 하나라, 주나라 시절부터 한반도가 중국 땅이었다는 말이 된다.

 

한나라 우북평군이 한반도에 위치하면,

도대체 그 동쪽의 요서나 요동 땅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통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낙랑군의 위치를 살펴보자.

 

먼저 낙랑군 수성현을 보면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秦築長城之所起)’ 하였다.

 

이는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는 기록과 일맥상통한다.

 

서진(西晉)을 연 진무제 사마염(재위 265~290)은 연호를 태시(泰始, 265~274),

함녕(咸寧, 275~279), 태강(太康, 280~290), 태희(太熙, 290) 등으로 사용하였다.

 

위 『진서지리지』 ‘평주(平州)’ 조에서

평주의 설치 시기가 함녕 2년(AD 276년) 10월이다.

 

그리고 『태강지리지』는 진(晉)나라가 평주를 설치한 직후인

태강(太康, 280~290) 년간에 편찬된 사서이다.

 

그러므로 『진서지리지』와 『태강지리지』가 말하는 낙랑군 수성현은

동일한 곳이며, 그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갈석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며,

그곳에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송나라에서 편찬된 사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와『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광신군(廣信軍)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현(武遂縣)의 땅이다.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군(安肅軍)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

(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무경총요武經總要』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현(武遂縣)이다.

 

『사기』에 趙나라 도양왕 1년{BC 244} <이목>장군이

燕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나라 남쪽 탁군의 북쪽에 신성이 있다.’고 했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고 했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치소는 부산촌(釜山村)이다.

 

秦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25리에 있다.

 

(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 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위 『무경총요武經總要』와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를 참조하면,

수성현의 치소가 부산촌이며, 부산촌의 동쪽에 안숙군(安肅軍)이 있고,

그 서쪽에 용산(龍山)이 있으며 용산이 곧 수성산(갈석산)이다.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에 관련 지명들이 잘 나타나 있다.

 

 

<당토명승도회에 나타난 만성 용산 부산 안숙등의 위치>

 

이제 『진서지리지』와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신찬>이 말한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위치한 왕검성도

이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마침 위 『당토명승도회』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수성현(遂城縣) 부근에 만성(滿城)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이다.

 

필자는 이 만성현(滿城縣) 일대를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였던 왕검성으로 비정한다.

 

중국백과사전』‘영락현’조에 아래와 같이 만성현의 연혁이 나온다.

 

『영락현 : 동위 흥화2년(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고 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제 때 영락현을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나라 개황3년(583년)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예속시켰다.

대업3년(607년)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여 영락현을 관할하였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소속시켰다.

천보원년(742년)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

(永乐县 :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

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

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公元607年)

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

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

『중국백과사전』‘영락현’

 

동위 흥화2년(540년)에 영락현을 설치하고 낙랑군의 치소로 삼았으며,

북제 때는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영락현이 이 부근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보원년(742년)에 영락현을 만성현(滿城縣)으로 개명한 것도

이곳이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13. 효혜고후(孝惠高后)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 고조(재위 BC 206∼BC195) 사후

그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한 적자인 <영盈>이 즉위하였는바,

<영>이 곧 혜제(재위 BC 194~BC 188)이다.

 

혜제는 태자시 ‘인약(仁弱)’하다 하여 폐위의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며,

즉위 시 16세여서 모후인 여후가 섭정하였다.

 

고후는 혜제 즉위 후 여태후로 존칭된 여후의 시호이니,

이는 ‘부인종부시(婦人從夫諡)’란 예에 따라 추존된 것이다.

 

고후는 혜제의 유자(幼子)인 소제 <공恭(재위 BC 187~BC 184)>과

소제 <홍弘(재위 BC 183~BC 180)> 代에도 섭정하였다.

 

따라서 ‘효혜ㆍ고후시’를 BC 195~BC 180년까지의 기간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기』에서 ‘효혜ㆍ고후시’라는 용법이

단지 혜제의 재위기간의 기록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

혜제 즉위(BC.194)~혜제 사망(BC.188)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14. 외신外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대의 외신은 한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외번(外藩)의 나라를 지칭한다.

 

이러한 나라 또는 군주를 외신이라 지칭한 것은

중국적 천하관이 분식(粉飾)된 용어로서 황제의 덕화가 미치어

신속(臣屬)되었다는 관념적 표현이며,

실제적으로는 인수(印綬) 정도만 받았을 뿐 한의 주권이나 법치의 대상은 아니었다.

 

<위만>은 한과의 이러한 의제적 상하관계를 통하여

병위와 재물을 취하는 실리를 얻어 국세를 신장시켰던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15. 군장君長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중국의 사서에는 우리나라 여러 사회의 통치자가

군장ㆍ장수(長帥)ㆍ주수(主帥)ㆍ거수(渠帥)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호칭상의 차이는

각 사회의 발전단계가 상이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비슷한 단계의 통치자를 명칭만 달리하여 명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천자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위치의 군장은

분명 정치적 지배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기존의 연구 결과 군장사회(Chiefdom)는 분명히 계급이 있는 사회이고,

관료적 체제도 있으며, 경제·사회·종교적 활동을 상호협의 하에 진행한다는 점에서

부족사회와는 다른 점이 밝혀졌다.

(김정배,「군장사회의 발전과정시론」pp. 46∼68)

 

따라서 이 단계의 사회는

고고학적으로는 최소한 청동기문화의 단계를 딛고 서는 사회이며,

철기문화가 이미 깊숙히 들어온 사회로서

국가(State)형성의 전단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임둔군은 현 중국 하북성 창주시(滄州市) 일대였다>

 

16. 진번‧임둔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이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의 공략을 받아 복속된 정치체명으로서

후에 한사군의 명칭으로 다시 나타난다.

 

다만, 여기의 진번은 전문에 나오는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과는

그 위치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연이 조선의 중심지인 평양지역을 정복하였다는 것이 되어

모순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44~45)

 

이로써 볼 때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과 별도로 존재한 군장사회(Chiefdom level) 단계 이상의 정치체로 추측되며,

그 위치는 한사군 위치비정과 관련되어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2) 필자의 주석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의 공략을 받아 복속된 정치체명으로서

후에 한사군의 명칭으로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나오는 진번과 전문에 나오는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은 동일하다.

 

위에서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처럼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과

위만조선이 공략하여 회복한 진번을 다른 곳으로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다.

 

진번의 위치는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살펴보았듯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상곡(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진황도시에 이르는 장성과

양하(洋河)‧ 영정하(永定河) 및 발해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아래의 『위만조선의 강역』 지도에서

현도2(진번)의 영역을 상곡(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진황도시에 이르는 장성 북쪽의 산악지역을 포함시켰는데

이곳은 오환족이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한 후 근거지로 삼은 곳으로

현도군에 포함된 곳이다.

 

임둔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남쪽의 창주시(滄州市) 일대이다.

 

『동사강목』 ‘임둔고(臨芚考)’에서 『고려사』 ‘지리지’를 인용하여

“명주(溟州)는 본시 예국(濊國)인데, 한 무제 때 임둔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여지승람』을 인용하여 “명주는 지금의 강릉부인데

딴이름으로는 임둔‧ 예국‧ 창해군‧ 동이현이다” 하였다.

 

즉 임둔은 예국(濊國)이며, 창해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창해군의 위치는 위만조선의 강역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창해군의 설치과정과 위치를 살펴보자.

 

『한서』 ‘무제기’에 의하면 “(한 무제 원삭원년, BC 128년)

동이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으로 삼았다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하였다.

 

또 『한서』 ‘식화지’에 “팽오가 예맥조선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시끄러웠다

(彭吳穿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하였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발해(渤澥)’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발해渤澥는) 즉 발해(渤海)이다. 『사마상여부』는 부발해라 하였고,

『초학기』는 ‘동해에 따로 발해(渤澥)가 있다.

 

옛날에는 동해를 발해(渤海)로 같이 불렀다. 또 창해(滄海)라고도 한다

(卽渤海,《司馬相如賦》浮渤澥,

《初學記》東海之別有渤澥,故東海共稱渤海,又曰滄海。)”

 

즉 창해(滄海)는 발해(渤海)의 별칭이다.

 

한나라 군현의 하나였던 발해군의 위치를 찾아보면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창주시(滄州市)일대였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남쪽의 창주시(滄州市)일대가 한나라 발해군이며,

한무제가 일시적으로 설치했던 창해군(滄海郡) 지역이었다.

 

현 창주시(滄州市( 지명에서도 창해군(滄海郡)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한서』 ‘식화지’에서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시끄러웠다’고 하였는데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현 하북성 창주시(滄州市)일대가

정확하게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다.

 

 

<위만조선의 강역>

 

 

17. 방수천리方數千里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사기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조선‧ 고려‧ 맥‧ 동옥저 등 다섯 나라의 땅이다.

(위만조선은) 동서가 1,300리이고 남북 2,000리이다

(朝鮮·高驪·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하였다.

 

방수천리方數千里에 대한 『괄지지』의 주석은 문제점이 있다.

 

위만조선이 다섯 나라의 땅이라고 하면서도

조선‧ 고려‧ 맥‧ 동옥저 등 네 나라의 이름만 나와 있다. 한 나라가 누락되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도 맥이나 동옥저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기』 ‘조선열전’의 본문을 토대로 위만조선의 강역을 살펴보자.

(위의 『위만조선의 강역』 지도 참조)

 

1. 조선

 

조선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조선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그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2. 진번

 

진번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진번군은 한 소제 시원5년(BC 82)에 폐지되었고,

7년 후인 한 소제 원봉6년(BC 75년)에 진번은 현토군에 소속되었다.

 

『한서지리지』 ‘현토군’조에서 <응소>가 주석하기를

“(현토군은) 옛 진번조선 오랑캐의 나라이다(故真番朝鮮胡國)” 하였다.

 

또 “(고구려는) 옛 구려 오랑캐이다(故句驪胡)” 하였다.

 

진번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위 <응소>의 주석에서 보는바와 같이 진번지역은 고구려의 발상지이다.

 

필자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의 위치를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으로 입증한 바 있다.

 

3. 임둔

 

임둔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임둔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앞의 ‘진번‧임둔’ 항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남쪽의 창주시(滄州市) 일대로,

한 무제 원삭 원년(BC 128년) 동이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으로 삼았던 지역이다.

 

 

4. 옥저

 

옥저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따르면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을 현토군으로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현토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앞의 진번지역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의 서북쪽은 곧 진번의 서북쪽이다.

 

옥저는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에 있었는데,

단단대령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으로 비정된다.

 

 

5. 대륙 삼한

 

대륙 삼한지역은 훗날 조선에서 항복한 장상들이 대부분 분봉을 받은 지역으로

현 하북성 남부지역 및 산동성 동‧북부지역이다.

 

『사기』 ‘조선열전’ 본문에 조선에서 항복한 장상들 중에

<니계상尼谿相> <삼參>이 나온다.

 

<니계尼谿>는 산동성 제(齊)지역에 있던 지명으로

산동성 지역도 위만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패수는 황하 하류의 평주지역을 흐르는 강이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1)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2),

천자에게 입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3)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원봉 2년(B.C.109)에 한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내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한나라] 천자의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4)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에게 ‘조선의 장사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가 그 공을 기려 꾸짖지 않고 <섭하>에게 요동동부도위(5)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 공격해 <하>를 죽이니,

천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을 치게 하였다.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 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朝鮮裨王長, 卽渡, 馳入塞,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卽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게 하고(6)

군사 5만으로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의 졸정인 <다多>(7)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참형을 당하였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에 이르렀는데,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성을 나와 누선군을 치니 누선군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서군(8)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其秋, 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천자는 양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양 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 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미를 내주었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리라고 명하시오.” 라고 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자는 <산>을 주살하였다(9).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

「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1. 우거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종래에는 <우거>를 단순히 <위만>의 손자의 인명으로 보아 왔으나,

최근의 언어학적 연구에서 ‘우거’를 어원적으로 분석하여

고조선 시대에 우거는

‘씨족의 생활 공동체 혹은 생활 공동체의 연합체의 우두머리 직 또는 사람’

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 형태는 ‘우ㅅマ)(/UTK∧/)’라는

세 개의 구성형태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조승복,「Reflection upon the Ko Tsosen Word/UK∧/」)

 

위만이 기원전 3∼4세기 이래 초기국가(Pristine State)로서 존재해오던

‘예맥조선’(종래의 기자조선)을 공멸하고,

강력한 정복국가인 ‘위만조선’을 수립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이었다.

 

그런데 이 위만조선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대에 와서

발달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강고한 군사역량을 구사하여,

주위의 제 변방정치집단들의 대한(漢)교역을 매개함으로써

그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고자,

그들의 대한무역로를 차단할 것을 기도하였다.

 

아울러 <우거>가 이로 인한 한(漢)제국의 정치 ·군사적 압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흉노와 혹종(或種)의 군사적 제휴관계를 모색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

 

한 무제가 ‘東伐朝鮮 起玄菟樂浪 㠯斷匈奴之左臂’

(『한서』「위현열전」)라고 한 발언은

당시 한(漢)ㆍ흉노ㆍ위만조선 간에 전개된 정치적 관계를 충분히 시사해주고 있다.

 

이러한 우거치하 위만조선의 한(漢)제국과의 제반이해관계의 상충이

한 무제로 하여금 조선정벌을 단행케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2. 소유한망인자다(所誘漢亡人滋多)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 없음

 

(2) 필자의 주석

 

한나라는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효혜ㆍ고후시기를 거치면서 변방국들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변방국들에게 공주와 매년 일정량의 재물을 주고

한나라를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위만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한나라와 평화협정을 맺고

군사와 재물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무제(재위 BC 141 ~ BC 87)가 등극하면서

한나라는 평화협정을 깨고 공세적으로 주변국들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북쪽으로 흉노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양월을 정복하는 등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전쟁에 지친 병사들과 피폐해진 한나라 백성들이

위만조선으로 망명하였다.

 

 

3. 중국衆國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 사료에서는 진번과 인접한 국가들은

‘중衆’(무리)과 ‘국國’(나라)의 두 글자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사기』에서의 ‘중국衆國’이란 표현은 다른 사료들,

특히『한서』와『자치통감』에 비추어 보아,

한반도 남부의 부족연맹체를 지칭하는 ‘진국辰國’을 의미한다는

진국설도 개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병도,「개국蓋國과 진국辰國」 pp. 238∼241)

 

그러나 진국(辰國)이라는 나라 하나만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은

해석상 난점이 없지 않다.

 

설사 진국(辰國)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하여도

그것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하나인 진국이지,

옛 삼한 땅에 진국만이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견해는 자구의 시비에 관심을 두고서

‘중衆’자와 ‘진辰’자의 구별에 이해의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존재하였던 정치집단의 성격규명에 있는 것이다.

 

즉, 진번 등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조선과 ‘중국衆國’ 혹은 ‘진국辰國’ 뿐만 아니라

‘진번眞番’도 문제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衆國’ 가운데 하나인 ‘진국辰國’으로 해석한다 할 때,

그것은 ‘진번眞番’과 대비되는 정치발전상의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국설(辰國說)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본 사료를 ‘진번(眞番)’의 위치비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로 활용하고 있고,

또한 진번을 예로 들어 당시의 정치발전단계를 고려함이 없이

국명으로서 진국(辰國)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衆國인가 진국辰國인가 하는 문제는

중국衆國 가운데 하나인 진국辰國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조선과 진국辰國 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시기에 존재했던 정치집단으로서

양자만을 인식하는 자세는 재고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사료를 ‘진번방중국眞番旁衆國’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진번방진국眞番旁辰國’으로 새기는 진국설辰國說의 그것보다,

당대의 실상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닐까 한다.

 

 

(2) 필자의 주석

 

위만조선 당시 진번과 인접한 나라들은

진번의 남쪽으로 예족(濊族)의 임둔이 있었고,

진번의 동쪽으로는 옥저의 여러 부족들이 있었으며,

진번의 서쪽과 북쪽으로는 오환의 여러 부족들이 있었다.

 

진번방중국(眞番旁衆國)’은 이들 나라들을 가리킨다.

 

 

4. 치입새 (馳入塞)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섭하>는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 요새에 대하여 『사기정의』는 주석하기를

“평주 유림관으로 들어갔다(入平州 楡林關也)” 하였다.

 

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지역을 흘렀던 패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당시의 평주가 어디인지

『사기정의』의 『사기』‘권2 하본기’ 주석을 통해 살펴보자.

 

『사기정의』는 ‘하본기’의 ‘기주(冀州)’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 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

(按理水及貢賦 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東河之西, 西河之東, 南河之北, 皆冀州也)”

라 하였다.

 

즉 기주지역은 황하로 둘러싸인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였다.

 

황하가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므로,

황하 하류의 갈석산이 있는 곳이 『사기정의』의 저자

<장수절張守節>(당나라 측천무후 시대 사람) 당시의 평주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섭하>가 패수를 건너서 달려 들어간 평주 유림관은

갈석산(백석산)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당하)를 건너 바로 달려 들어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관문은

평형관(平荊關)과 도마관(倒馬關)이 있다.

(아래의 위만 망명로』지도 참조)

 

중화민국 군참모본부에서 1916~1918년에 제작한 『중국여도(中國輿圖)』에는

도마관(倒馬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림(楡林)

(아래의 위만 망명로』지도의 부평(阜平)과 도마관 사이)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또 위만조선의 도성인 만성(滿城)에서 한나라 수도인 장안으로 가는

가장 지름길이 도마관(倒馬關)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도마관(倒馬關)을 섭하가 패수(당하)를 건너 달려 들어간

평주 유림관으로 비정한다.

 

섭하가 패수를 건너 달려 들어간 요새가

평주 유림관이라는 『사기정의』의 주석을 통하여

패수는 황하 하류 갈석산 부근의 평주지역을 흐르던 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대도 통설에서는 패수를 요령성 요동지역에서 찾고

심지어는 한반도 평양지역에서 찾고 있으니 어떻게 올바른 역사해석이 되겠는가?

 

 

5.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제국의 지방제도는 제후국(諸侯國)과 열후국(列侯國)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진제(秦制)를 계승하여 군현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군현제도의 기구와 조직을 살펴보면 군에는 군수ㆍ승ㆍ도위가 있었는바,

그들은 모두 중앙정부에 의하여 임명ㆍ파견되었다.

 

한편 한제국의 지방군은 각 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각 군에서 병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절(秩) 2천석의 도위였다.

 

도위는 각 군의 군사적 요지에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도위가 그 군의 병력을 직접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위는 군의 최고책임자인 태수의 규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병력을 동원할 때는 중앙에서 일종의 할부(割符)였던

동호부(銅虎符)를 가진 사자가 태수한테 파견되고,

태수가 가지고 있던 좌반부(左半部)와 합치되면

태수는 도위에게 명령을 내려 병력을 동원하였다.

 

(2) 필자의 주석

 

위와 동일하다.

 

첨부하면 연나라 시대의 요동과 한나라 초기의 요동은 그 위치가 다르다.

 

연나라 시대의 요동은 연나라가 진번ㆍ조선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상곡군ㆍ어양군ㆍ우북평군ㆍ요서군ㆍ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 연나라 요동이다.

 

반면 한나라 초기의 요동은

한나라가 위의 5군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대폭 후퇴하였다.

 

위만조선이 진번ㆍ조선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한나라와 고조선은 태행산맥을 경계로 하였다.

 

따라서 한나라 초기의 요동은 산서성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당시에 산서성 북부에는 대代와 연나라가 있었고,

산서성 남부에는 상당군과 하동군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한나라 초기의 요동군은 산서성 중부의 태원(太原) 이동지역이며,

요동 동부도위는 오늘날의 하북성 석가장시 일대로 비정된다.

 

 

6. 종제부발해(從齊浮渤海)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발해는 기원전 3∼2세기 이전부터 발해로 불리어왔다.

 

즉, 기원전 5∼3세기의 기록으로 이해되는『산해경』「해내동경」에

‘潦水出衛皋山 東南注渤海 入潦陽’

(東南至潦陽注渤海로 읽어야 될 듯하다)로 나타나고 있고,

『사기』「하거서(河渠書)」의 황하가 발해로 들어간다는 내용 등을 불 때

기원전 3∼2세기 이래로 발해는 변함없이 발해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발해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발해의 이 같은 위치 확정에서 전국시대의 제(齊)지역인

산동반도에서 출발하여 향한 지역이 한반도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올 경우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요동반도 외곽으로 내륙을 끼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견해는 다시한번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 진다.

 

(2) 필자의 주석

 

발해에 대한 설명은 위와 동일하다.

 

누선군이 “제나라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우고 나아갔다.”는 구절은

당시 위만조선의 세력판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전한 당시 황하는 천진방향으로 흘렀다.

 

그러므로 누선군이 위만조선의 도성인 만성을 공격하려면

황하를 타고 내려가면 훨씬 수월하다.

 

그런데 굳이 제나라가 있는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고 나아간 것은

황하하류 일대가 위만조선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하하류 일대의 동해안 지역은 예군 남려의 땅으로 임둔지역이다.

 

『사기』와『한서』에서 원삭 원년(BC 128)

동이의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을 하여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

고 하였으며,

후한서』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하니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라고 한 지역이다.

 

그러나 창해군은 원삭 3년(BC 126) 봄 폐지되었고,

도로 위만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7. 졸정(卒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당시 한 제국에 있어서의 제군(諸郡)의 군사편제는 일반 전투병과인 보졸과

재관(材官)(노수弩手)ㆍ기사(기병) 및 누선사(樓船士)(수군) 등의

특수병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졸정은 일반 전투병인 보졸로 편성된 일정규모의 단위전투부대의

지휘관에 해당하는 관직명이며,

<다多>는 그러한 지휘관의 인명으로 추측되어진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8. 패수서군(浿水西軍)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조선군의 편제가 본문 상에 ‘패수서군’과 ‘패수상군’으로 나타나고 있음에서

위만조선의 군사편제가 한 제국의 대규모원정군과 맞서

대등한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조직적인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2) 필자의 주석

 

산서성과 하북성은 험준한 태행산맥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태행산맥을 넘는 길은 많지 않다.

 

산서성에서 태행산맥을 넘어 위만조선의 도성인 만성을 공격하는 길은

대략 세 갈래이다.

 

첫 번째가 산서성 대(代)에서 평형관(平荊關)을 지나 태백산 북쪽으로 당하(패수)

상류를 건너서 만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곳을 방어하는 군사가 패수상군이다.

 

두 번째는 산서성 대(代)에서 용천관(龍泉關)을 나가서 대사하를 건너

태백산 남쪽으로 나가서 만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곳을 방어하는 군사가 패수서군이다.

 

세 번째는 산서성 태원에서 정형관(井陘關)을 나가 호타하와 대사하를 건너

만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졸정(卒正) <다多>가 거느린 요동군의 진격로로 추정된다.

 

누선군은 당시 해안선이 만성부근까지 이어졌으므로

발해만에서 당하를 타고 북상하면 바로 만성에 도달한다.

(아래의 ‘한사군 전쟁 개요도’ 참조)

 

 

9. 천자주산(天子誅山)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위산>이 주살된 이유가 무엇일까?

 

천자가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兵威)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라”고 하였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당시의 전황을 살펴보면 좌장군의 졸정인 <다多>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다가 싸움에 패하여 <다多>는 참형을 당하였다.

 

이어서 누선군도 참패를 당하였으며,

좌장군 <순체> 또한 패수서군과 싸워 이기지 못하였다.

 

한나라 군사가 연전연패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의 위엄’ 운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앞에서 한나라가 위만에게 병위재물(兵威財物)을 주고

외신으로 삼는 약속을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자가 <위산>에게 ‘병위’보다는 ‘재물’로 우거를 설득하도록 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사기』 ‘색은’은 찬술하여 이르기를

“ ..... 두 장수를 의심한 <위산>과 <공손수>는 법에 따라 주살되었다.

장계를 어지럽게 보고한 것이다.”고 하였다.

 

“장계를 어지럽게 보고했다.”는 것은

위에서 <우거>가 항복하려고 했다는 내용들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당시 위만조선이 전쟁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할 이유도 없거니와

항복하러 가는데 무장한 병력을 만여 명이나 동원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위산>은 많은 재물만 낭비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자,

그 허물을 좌장군에게 돌리려고 위와 같은 거짓 장계를 올렸다가 주살되었다

 

 

 

<조‧한 전쟁은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니었다>

 

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군도 또한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본시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다가

연과 대지방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는데,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1),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곤욕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라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장군은 부끄럽게 여겨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辱亡卒, 卒皆恐, 將心慙, 其圍右渠, 常持和節.)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 대신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누선장군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말만 오고 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여러 차례 <누선>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은 [조선과의] 약속을 급히 이루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양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누선>은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데다가

지금은 조선과 사사로이 잘 지내고 있으며,

[조선]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반계(叛計)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 하였으나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였다.

(左將軍急擊之, 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尙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求閒郤降下朝鮮,

朝鮮, 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 疑其有反計, 未敢發.)

 

천자는, “장수들이 [일을] 이룰 수 없으므로 전에 위산으로 하여금

<우거>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여 우거가 태자까지 보냈는데도

<산>이 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서로 계교가 틀려 마침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양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도

역시 [의견이] 어긋나고 달라서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못하고 있다.” 고 말하고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하도록 하였다.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剸決,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之, 有便宜得以從事.)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했다.

 

“조선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 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누선>이 여러 차례 싸우러 나오지 않은 것과

평소의 뜻하는 바를 <공손수>에게, 낱낱이 고하였다.

 

이어 “지금 이와 같으니 [누선장군을] 체포하지 않으면 크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 혼자만이 아니고 조선과 함께 우리 군사를 멸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공손]수>도 이를 옳게 여기고 부절(符節)로 일을 의논하자고 <누선>을 불러

좌장군 진영에 오게 하고는,

좌장군 휘하에 명하여 곧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공손]수>를 죽였다(2).

(遂至, 左將軍曰「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遂亦以爲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 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幷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상 <로인路人>과 상 <한음韓陰>과 니계상 <삼參>과

장군 <왕겹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장졸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한음韓陰>ㆍ<왕겹王唊>ㆍ<로인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로인路人>은 도중에서 죽었다.

(左將軍已幷兩軍, 卽急擊朝鮮. 朝鮮相路人ㆍ相韓陰ㆍ尼谿相參ㆍ將軍王唊 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幷將, 戰益急, 恐不能與戰, 王又不肯降.」

陰ㆍ唊ㆍ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원봉 3년(B.C.108) 여름,

니계상 <삼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이成巳>가 또 [한에] 반하여 다시 군리(軍吏)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상 <로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成巳>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4군(3)을 설치하였다.

 

<삼參>을 봉하여 홰청후(4)로, <음陰>은 적저후(5), <겹唊>은 평주후(6),

<장長>은 기후幾候(7)로 삼았으며,

<최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溫陽候)(8)로 삼았다.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參爲澅淸侯, 陰爲荻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좌장군을 불러 들여 [그가] 오자,

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기시(棄市)하였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洌口(9)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 乖計, 弃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태사공은 말한다.

 

우거는 험고(險固)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을 당하고 죄에 걸렸으며,

[앞서] 번우(番禹)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결국 양군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된 사람이 없었다(10).

(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失番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1. 고이다패망(固已多敗亡)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들을 잃었다.”고 하였다.

 

누선군이 여러 번 싸움에 패하여 군사들을 잃은 후

왕검성에 도착했을 때 병사가 7천명이었다.

 

그러면 누선장군이 처음 출병할 때 수군의 수는 얼마였을까?

 

앞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주석한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其秋, 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는 내용을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우니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누선장군이 처음 출병할 때 수군이 5만이었는데

여러 번의 해전에서 패하여 수많은 군사들을 잃고

겨우 7천명이 왕검성에 도착했다가

그마저도 우거에게 격파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천자주수(天子誅遂)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제남태수 <공손수>가 주살된 이유는 태사공(사마천)이 이르기를

“<순체荀彘>는 <공손수>와 더불어 공을 다투다가 함께 주살되었다.”고 하였다.

 

또 『사기색은』은 “ ..... 두 장수를 의심한 <위산>과 <공손수>는

법에 따라 주살되었다. 장계를 어지럽게 보고한 것이다.”고 하였다.

 

공손수는 좌장군 <순체>와 공을 다투고, 거짓 보고를 한 이유로 주살되었다.

 

 

3. 4군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서는 무제가 원봉 3년(B.C.108)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군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한서』「무제본기」에서는 4군의 명칭이

낙랑ㆍ임둔ㆍ현토ㆍ진번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한서』「지리지」에는 낙랑ㆍ현토의 2군만 기록하고 있고,

「오행지」에서는 원봉 6년(B.C.105)조에

‘先是兩將軍征朝鮮 開三郡’이라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한사군을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고조선 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 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하였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군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위치문제도 앞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위치문제는 진번의 위치 문제로서

앞서 한사군 명칭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진번위치와 연결되어

다기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재북설과 재남설로 크게 나뉘어져 전통사학자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

 

『삼국유사』의 찬자는「기이」 이부조(二府條)에

私曰 朝鮮傳則 眞番ㆍ玄菟ㆍ臨屯ㆍ樂浪等四

今有平那無眞番 蓋一地二名也 라 하여

평나(平那)를 진번으로 보았고, 이 견해는『동국통감』등에 계승되었다.

 

한백겸은『동국지리지』에서 이를 예맥구지(貊國舊地)

즉, 강원도 춘천부로 이해하였고,

이익은『성호사설』「유선」에서 진번을 ‘遼河以西最近中土者也’로 규정하였다.

 

한편 홍만종은『순오지』에서 진번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정약용은『아방강역고』에서 眞番之地 雖不可詳

要在今興京之南 佟家江之左右 興京之南 鴨水以北 今靉河以東 波猪江之左右

沿江黑之地 即非遼東 又非朝鮮 必古之眞番也 라 하여 재북설(在北說)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유득공의『사군지』에 계승되었고,

한진서의『해동역사』「지리고」에서도 이 같은 견해가 유지되었다.

 

한편 일인학자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압록강 이북지역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稻葉岩吉>은 충청도지역에서,

<금서룡>은 충청ㆍ전북 등지에서 진번의 위치를 찾았다.

또 <이병도>는 대방군 영토에서 이를 찾아 재남설을 강조하였다.

(「한사군문제의 연구」 pp. 97∼209)

 

이와 함께 <도유호>는 진번이 현재 함경도 이동 쪽에 위치해 있다가

예군 남려의 반란 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창해군 영토의 임둔군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p. 3)

 

이같이 진번군의 위치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한사군 설치 이전에 연의 침입을 받았던 진번, 조선과

위만조선에 복속되였던 소읍으로서의 진번ㆍ임둔 및

한(漢)과 직접 교역코자 하였던 ‘진번방중국(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번의 위치가 확정됨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는 다양하게 변화되는데,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현재의 평양인가

요동지역인가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전반적인 연구 성과에 의거할 때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한사군의 위치보다는 그 성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4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의 경우

종래에는 낙랑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여

낙랑군이 421년 동안 계속하여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낙랑은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군현적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간은 전한시대를 제외하면 비교적 짧으며,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국계 유이민 집단의

자치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 25)

 

따라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성격 검토를 통하여 재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4군의 위치는 앞의 ‘진번ㆍ조선’과 ‘진번ㆍ임둔’ 항목에서 언급하였다.

 

낙랑군은 조선지역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왕검성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백석산(갈석산)과 발해,

남북으로는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진번군은 요동지역으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의 요동성이 중심이며,

하북성 북부(영정하 이북)지역이다.

 

임둔군은 현 중국 하북성 창주시(蒼州市) 일대이다.

 

현토군은 요동성의 북쪽으로 지금의 승덕인근이다.

 

기원전 82년 진번군은 폐지되고 현토군으로 남게 되었다.

 

 

4. 홰청후(澅淸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에는 지금의 산동성인 제(齊)에 속한다고 하였고

『사기색은』에는 회청은 제에 속한 현명(縣名)이라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산동성 제(齊) 지역이다.

<이유립> 선생은 산동성 임치현 서북쪽인데 춘추때의 획음.

본시 니계 땅이라 하였다. 

 

회청이 본시 니계 땅이라는 <이유립> 선생의 고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회청후로 봉해진 <삼參>은 위만조선에서 니계상(尼谿相)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산동성의 니계 땅이 본래 위만조선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5. 적저후(荻苴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건원이래후자연표」에는 ‘적저(荻苴)’로 기록되어 있고,

『한서』「서남이양월조선전」에는 ‘추저후(秋苴侯)’로 기록되어 있다.

 

『사기집해』와『사기색은』에는 발해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2) 필자의 주석

 

발해(渤海)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하간현, 창현으로 나오며,

<이유립> 선생은 천진부 경운현 동쪽지방이라 하였다.

 

 

6. 평주후(平州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와『사기색은』은

<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양부(梁父)에 속한다고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양부(梁父)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산동성 태안현 남쪽 60리로

사수현과 접경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유립> 선생은 산동성 태안부 모현 서쪽지방이라 하였다.

 

 

7. 기후(幾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와『사기색은』은

<위소> 말을 인용하여 하동(河東)에 속해있던 현명이라고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하동(河東)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황하 동쪽이라 하였고,

<이유립> 선생은 하동 상(湘)과 로(潞)의 사이로 현재의 산서성 로주라 하였다.

 

 

8. 온양후(溫陽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건원이래후자봉표」와『한서』「지리지」남양군(南陽郡)의 속현에는

날양(涅陽)으로 되어 있다.

 

 

(2) 필자의 주석

 

제(齊)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온양현은 현 수도의 양유(壤柔)현에 속한다고 하였고,

<이유립> 선생은 열수의 북쪽이니 오늘의 하남성 진평현(옛 제 땅)이라 하였다.

 

 

9. 열구洌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 나타난 내용에 의하면 한군(漢軍)이 집결키로 한 열구가

열수(洌水)의 하구지명(河口地名)임을 알려 준다.

 

그런데 앞서의 내용에서 제(산동반도) 지역에서

발해(현재의 발해)로 한의 수군이 항해하였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열구가 현재의 요동지역 발해연안에 존재하였다고 보아

요동지역에서 발해로 유입하는 강으로 파악함으로써

열수(洌水)와 연결되는 왕검성도 이곳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리지린,『고조선연구』)

 

이러한 사실은 4세기초 진(晋)의 <곽박>이 주석한

『방언(方言)』의 ‘조선열수지간(朝鮮洌水之間)’이란 내용에 대해

‘列水名在遼東’이라 한 기록과,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의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란 내용 등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열수(洌水)는 요하(遼河)이며

열구(洌口)는 발해로 요하가 유입하는 지역으로 이해된다.

 

한편『수경주』이래로 유지된 열수=대동강설은

평양을 왕검성 및 낙랑군지역으로 이해하고 대동강 하구에 존재한 지명의 유사성과

특히 ‘낙랑유적’과 ‘점제현신사비’의 존재로 확증된다고 보았다.

(금서룡,「열수고」 p. 56; 이병도,「위씨조선흥망고」 p. 72)

 

그리하여『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의 주석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 한 내용이

위의 사실과 부합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앞서 논급된 발해의 위치문제와

평양부근의 ‘낙랑유적’이 고조선의 유물이란 사실 등을 들어

반박하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또한 고조선의 이동설을 주장하는 견해에 의하면

열수가 고조선계 지명인 까닭에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에 있었던 때의 열수와

대동강 유역로 이동한 이후의 열수가 다르다고 한다.

즉,『사기』와『한서』의 열수는

고조선의 중심이 이동한 이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이 열구는 대동강 하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40∼49)

 

 

(2) 필자의 주석

 

본문의 내용에 의하면 누선군이 집결키로 한 열구는 열수(洌水)의 하구이다.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 『산해경』의 ‘해내북경’에

열수(洌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위 구절에 대하여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땅이다. 열(列)은 또한 물 이름이다.

지금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

(郭璞云 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고 하였다.

 

열양(列陽)은 열수의 북쪽을 의미한다.

 

연나라가 열양에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으므로

열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다.

 

그러면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강은 어떤 강일까?

 

『전국책戰國策』에 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文公, 재위 BC362-BC333)에게 한 말이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天府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연나라의 남쪽에 녹타(菉沱)와 역수가 흐르며,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 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했다.

 

안문과 갈석은 모두 호타하의 북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열수는 호타하임을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곽박이 ‘열수가 대방에 있고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열구는 호타하 하류에 해당하며, 대략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부근이다.

 

 

10. 양군구욕(兩軍俱辱) 장솔막후의(將率莫侯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없음

 

(2) 필자의 주석

 

조‧한 전쟁은 사마천(BC 145~BC 86년) 당시에 일어났다.

 

사마천이 이 전쟁을 전체적으로 평가한 내용이

“결국 (한나라 수륙) 양군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漢)나라의 육군대장인 좌장군 <순체>는 참수되어

머리가 거리에 효수되는 기시형에 처해지고,

수군대장인 누선장군 <양복>은 참수를 면하는 대신 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요동군을 거느렸던 좌장군의 졸정인 <다多>는 싸움에 패하여 참수되었으며,

<우거>를 회유하러 갔던 <위산>과 제남태수 <공손수> 등은

모두 한무제에게 주살되었다.

 

이처럼 조‧한 전쟁에 참여했던 한나라 장수들이 모두 참수되거나 서인이 된 반면

항복(?)한 조선의 장상들은 모두 제후의 반열 올랐다. 

 

조‧한 전쟁은 결코 한나라의 승리가 아니었으며,

위만조선의 내분에 의하여 연방제가 해체되고,

4군과 여러 열후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나라가 설치하였다는 한사군은

그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