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누군가 나에게 한민족의 상고사를 묻는다면,

그리고 웅혼했던 고구려의 역사에 목말라 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갈석산에게 물어보라!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의 블랙박스 같은 존재이다.

 

갈석산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보았으며,

또한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모두 지켜 본 유일한 산증인이다.

 

그러므로 갈석산을 모르고 고구려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등불 없이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처럼 위태롭다.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

 

한나라 낙랑군은 한민족 상고사의 심장부인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또 갈석산은 秦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요동 땅은 고구려의 요람이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일어나 웅지를 펼쳤고, 요동을 상실하고 한숨지었으며,

요동을 다시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고,

다시 찾은 그 요동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요동의 시작점인 갈석산을 모르고 어찌 고구려의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세 종류의 갈석산이 있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학자들의 착오에 의해 생겨난 좌갈석과 우갈석,

그리고 역사왜곡을 위하여 동쪽으로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이 있다.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들은

한민족 상고사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한없이 왜곡 축소시켜왔다.

 

바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과 한반도 평양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전에 벌어졌던

고대판 동북공정의 완결판이며,

한반도 평양의 갈석산은 현재진행형인 현대판 동북공정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일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고대판 동북공정도 현대판 동북공정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찬란했던 한민족의 상고사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고구려는 요령성의 요하나 하북성의 난하에 가로막힌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저 멀리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을 넘어 대륙을 호령하던 대제국이었다.

 

오로지 갈석산이 이를 웅변해줄 것이다.

 

 

 

2. 갈석산의 특징

 

 

<각종 갈석산과 만리장성>

 

 

 

오늘날 갈석산에 대한 논의는 매우 복잡다단하다.

 

그러나 본래의 갈석산을 알고 나면 그 모든 논의는 아침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만다.

 

갈석산의 특징은 아래의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다.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상서』 ‘우공편’

 

역사에 등장하는 갈석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발해만 북부지역에 살던 동이족의 한 갈래인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인 중국 하나라 우임금 시절에

도이島夷가 배를 타고 발해만 연안을 돌아,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에 우뚝 솟은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갈석산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 구절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첫째 특징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는사실이다.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다.

 

역사적으로 황하 하류는 그 흐름이 여러 번 바뀐다.

 

이로 인하여 착오에 의한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나면서 혼란이 발생하였다.

 

오늘날 현대 과학은 시대별 황하 하류의 흐름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라 우임금 시절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의 위치를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

  

이 갈석산이 오늘날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백석산 동쪽의 한 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이다.

 

 

※ 참고 <황하의 흐름과 해안선의 변천>

 

 

 

 

 

황하 상류의 흐름은 시대에 따라 약간 다른 길을 따랐다.

 

특히 여러 경로로 갈라지는 지금의 녕하(寧夏)와

북서쪽 모퉁이의 U자 모양으로 굽은 곳이 그랬다.

 

하지만 흐름은 기본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화산 이동과 삼문협의 하류는 역사적 시점에 따라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기원전 2,000년대에는 하류의 흐름이 지금의 산서성의 산맥 바로 아래에서

거의 정북방향으로 이어졌었다.

 

그후 1289년까지의 2,000년간 마치 시계바늘과 같이 조금씩 방향을 바꾸었다.

 

1289년 부터 1324년 까지는 동남쪽으로 흘러,

양자강 하류에 물을 쏟던 회하의 중류에 이어졌다.

 

1324년 이래로는 불규칙한 형태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다,

지금은 다시 산동반도 이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급속한 변화의 주요한 원인은

황하에 실려 운반되는 특이하게 과중한 양의 흙모래에 있었다.

 

하구에 이르러 유속이 느릿해지면서 흙모래의 대부분이 재퇴적되어

강둑이 만들어지고 조만간 물은 다른 곳으로 흐를 수 밖에 없게 된다. 

 

지금의 다(多)출구 장치는 일시적으로 막히는 통로의 정기적인 준설을 통하여

이러한 어려움의 예방을 추구한다.

<Caroline Blunden and Mark Elvin, "Cultural Atlas of China", Checkmark Books,

1998, p.16>

 

 

 

 

 

북지나(北支那)의 대평야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온통 바다였는데

현재의 산동성은 황해의 한쪽 끝에 떠있던 하나의 섬이었으며

산서성 동부의 산기슭이 당시의 해안선에 접해 있었다.

 

현재 황하가 흐르며 옮기는 진흙과 모래의 양은

연간 수억 입방미터로 추정할 수 있지만,

이 위대한 자연의 영력(營力)은 몇천년간 멈추지 않고

수원(水源)에서 하구에 이르는 수천 킬로미터를 흐르는 동안

지천(支川)들이 가져온 황토를 하구에 퇴적하며 해안선을 전진케 하였던 것이다.

 

경한철교(京漢鐡橋) 이동의 중원은 황토 퇴적량이 7,000 입방킬로미터에 이르지만

현재와 동일한 수사(輸砂)량이라 가정하면,

렇게 쌓이는데 칠천 수백년이 걸렸을 것이다.

 

사적(史跡)에 자취를 남긴 요(堯)임금이 80년간 세상을 다스린 이후

청나라 문종의 함풍 5년까지의 4133년동안 강줄기들이 여섯번의 큰 변화를 격고,

물길이 약해지며 이동함에 따라 바르게 측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하북, 산동, 하남, 강소 평야 일대에

한때 황하의 물길이 지나가지 않았던 곳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아래에 황하 물길의 여섯 차례 변천에 대해서 간단히 말한다.

 

(1) 우공에「황하는 적석에서 용문에 이르며, 남으로 화산 북녘에 이르며,

동으로 저주에 이르며, 또 동으로 맹진에 이르며, 동으로 낙양을 지나 대비에 이른다.

북으로 강수를 지나 대륙에 이르며, 또 북으로 아홉 강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를 헤아려 보면 우 시대에 아홉 강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그 지역은 천진 부근에서 지금의 황하 사이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 우(禹), 釃의 두 도랑은 려양, 숙서구에서 물을 끌어들여,

하나는 북으로 흘러 대하가 되고 다른 하나는 동으로 흘러 탑천이 된다.

 

그 물길은 우공 도하도로 보면 대비보다 남쪽으로 향했다 하나,

동쪽으로 하북 남부를 횡단하고 산동성의 조성, 고당, 고원 등을 거쳐서

발해에 흘러들어가는데, 생각하니 우의 치수는 서력 기원전 2278년에 완공하고,

그 후 무려 1677년동안 물길의 변천이 없었다.

 

(2) 황하의 첫번째 변천,

주의 종왕 5년(서기전 602년) 황하는 려양(현재의 준현)에서 트여져,

숙서구를 거쳐서 동으로  탑천에 흘러들어 장수진에 이른다.

 

처음엔 탑천에서 갈라지고 대명에 이르며 위하과 평행하고 있었는데 창현에 이르며, 

장하를 합치고 천진에서 발해에 물을 부었다.

 

이것을 황하의 첫째 변천이라 일컬으며

그 후 613년동안은 이 물길이 유지되고 있었다.

<内務省土木局 内務技師 富永正義, 黄河の治水及利水,

5. 河道の変遷, 昭和13年(1938年)9月췌>

 

 

<Archaeology of the Anthropocene in the Yellow River region, China, 8000-2000 cal. BP, The Holocene 2014, Vol. 24(11) 1602 –1623. 삼각주이 보정시이다>

 

 

 

(2) 갈석산은 태행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한다.

 

태행산맥 동쪽 끝의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동쪽 부목榑木 땅에 이른다.

(太行石間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東至日出之東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時則訓’

 

한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BC179~BC122)이 편찬한

『회남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갈석산이 태행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갈석산을 넘으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나온다고 하였다.

 

이때는 위만조선시대(B.C195~108)에 해당한다.

 

태행산맥은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를 이루는 험준한 산맥이다.

 

갈석산과 조선의 연관성을 알려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3)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다.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사기색은』

 

위의 (1)에서『상서』‘우공편’에 나오는 구절은 『사기』‘하본기’에도 나온다.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위치한 이 갈석산을 『사기색은』에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이 갈석산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또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라고 하였다.

 

이는 위의 『회남자』에서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라는 구절과도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하며 또한 ‘태행산맥’에 위치한

이 갈석산(백석산) 너머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의 지명을 찾을 수 있는가?

 

그렇다.

갈석산(백석산) 바로 동편에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버젓이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에서 편찬된

『무경총요武經總要』와『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등에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갈석산의 중요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황하 하류에 위치했던 갈석산 너머로

우리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많은 독자들이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한반도 평양이라고 달달 외었다.

 

그런데 그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한반도 평양에서도 수천 리 서쪽의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아마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갈석산이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다’는 『상서』‘우공편’의 내용과

그 갈석산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는

『사기색은』의 구절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두루 나오는 내용이다.

 

중국의 모든 역사서를 부인하지 못하는 한 갈석산이 황하 하류 해변 가에 위치하며,

그곳이 한나라 낙랑군이 위치했던 곳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갈석산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형을 따라 험난한 곳을 이용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만여 리에 이르렀다

(築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사기』 ‘몽념열전’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장군에게 명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 起自臨洮,至于碣石).『수경주』‘하수河水 3’

 

위의 두 구절에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임조에서 요동까지’

또는 ‘임조에서 갈석까지’이며,

‘갈석산이 곧 요동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위 『태강지리지』의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는 내용과도 일맥 상통한다.

 

그러므로 갈석산을 넘어서면 고구려의 요람이었던 요동 땅이 시작된다.

 

 

(5) 갈석산의 특징을 다시 요약해보자.

 

 ①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다.

 ② 갈석산은 태행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한다.

 ③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다.

 ④ 갈석산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구비한 갈석산은

오늘날 중국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백석산 동쪽의 한 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이다.

  

본래 갈석산은 오직 백석산(또는 낭아산) 하나 뿐 이었다.

 

기원전의 모든 역사서에 언급된 갈석산은 이 백석산(또는 낭아산)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대를 따라 황하 하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학자들은 그 바뀐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갈석산을 찾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왜곡을 위해 갈석산의 지명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남으로써 한민족의 상고사가 안개 속을 헤매게 되었다.

 

이제 새롭게 생겨난 갈석산들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3. 착오로 생겨난 갈석산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한다.

 

이것은 갈석산의 절대적인 명제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BC 602년 이전까지 황하 하류는 하북성 보정시 방면으로 흘렀다.

 

이때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은 백석산(또는 낭아산)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원전 BC 602년부터 AD 11년까지 황하 하류가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으로부터 500여리 떨어진

하북성 천진 방면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천진방면에 새로운 갈석산이 생겨났다.

 

이것이 『통전』에 등장하는 좌갈석이다.

 

그리고 AD 11년부터 893년까지

황하 하류의 흐름이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 방면으로 흐르게 되면서

이곳에 또 새로운 갈석산이 생겨났다.

 

이것이 『통전』에 등장하는 우갈석이다.

 

이들 착오에 의해 생겨난 갈석산들을 사서를 통해 살펴보자.

 

 

(1) 『사기색은』에 나타난 북평군의 갈석산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려성현 서남에 있다.’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

 

또 『수경』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 있다.’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인 듯하다.

 

‘오른쪽으로 갈석을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다(아니다).

 

(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是(非)北平之碣石) 『사기색은』

 

『사기색은』은 갈석산을 두 개로 보고 있다.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황하 하류의 흐름과 해안선의 위치가 변하면서 새로 생겨난

북평군 려성현 서남쪽이며 요서 임유현 남쪽에 있는 갈석산이다.

 

『통전』에서는 이 갈석산을 좌갈석이라 하였다.

 

위 『사기색은』의 구절은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판본에 따라 마지막 구절을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다(當是北平之碣石)’ 로쓴 것이 있는 반면

이와는 정반대인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 아니다(當非北平之碣石)’로 쓴 판본도 있다.

  

『사기색은』의 저자 사마정은 당나라 시대 사람이다.

 

그 당시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상곡군에 속하였고,

황하하류로부터 서쪽으로 50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러므로 착오에 의하여 새로 생겨난 좌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다.

 

 

(2) 『통전』에 나타난 좌갈석과 우갈석

 

갈석은 해변의 산이름이다. 지금의 북평군 노룡현에 있다

(碣石海邊山名 在今北平郡盧龍縣也). 『통전』‘고기주古冀州’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 태강지지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와 옛 경계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이 아니다.

(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 晉太康地志云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통전』‘고기주古冀州’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에 있다.

 

지금 북평군 남쪽 이십 여리에 있는 즉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통전』‘변방邊防1’

 

<두우杜佑(735~812)>는 당나라 때 사람이다.

그는 통전에서 좌갈석이 고구려 관내에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통전』은 갈석산을 3개로 보고 있다.

 

즉 『태강지리지』의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며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옛 경계(高麗舊界)에 있는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과,

 

북평군 노룡현에 위치하며 고구려 안에 있는(高麗中) 좌갈석과

 

두우 당시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우갈석이다.

 

『통전』에 나오는 이 세 가지 갈석산만 제대로 이해하면

갈석산에 대한 모든 혼란이 사라진다.

 

더불어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가 어디인지,

당시의 요수遼水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위 『통전』의 3번째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에서 일어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요수遼水는

어느 강물을 말하는 것일까?

 

『회남자』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온다.

요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으로 흘러 똑바로 요동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遼水出碣石山 自塞北東流直遼東至西南入海)

『회남자』‘권4 추형훈墜形訓 고유高誘의 주석’

 

갈석산(백석산)에서 나오는 물은 오늘날의 거마하拒馬河, 역수易水 당하唐河 등이다.

 

이 물들이 중류에서 만나 대청하大淸河를 이루어 천진부근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제 아래의 『연장성(?) 지도』및 『중국지도집』(1972년판)을 보자.

 

갈석산(백석산)에서 나와서 요새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요수(遼水, 지도에서 푸른색으로 표시함)는

오늘날의 역수易水와 그 하류인 대청하大淸河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통전』의 저자인 두우가 직접 답사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은

『연장성(?) 지도』에서 무수武遂라고 표시된 지역이며,

『중국지도집』(1972년판)에서 수성遂城으로 표시된 지역이다.

 

두우는 이곳에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대청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을 본 것이다.

  

참고로 위 『회남자』를 주석한 고유高誘는 후한시대 학자이다.

 

그 당시는 바다가 『연장성(?) 지도』의 웅현雄縣 부근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러므로 웅현의 대청하 북쪽이 후한 시대 요동의 서남쪽에 해당한다.

 

이곳이 전한의 탁군 신창현 지역이며, 후한의 요동군 신창현 지역이며,

북위의 북평군 신창현 지역이며, 훗날 수나라 북평군 노룡현 지역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한다.

 

 

<연장성(?)지도 및 중국지도집(1972년판)>

 

위에서 『통전』이나『회남자』에서 나오는 요수遼水를

오늘날의 요령성 요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수遼水는 역사 강역의 변동에 따라 여러 번 그 위치가 바뀐다.

요수遼水를 무조건 오늘날의 요하遼河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두우가 『통전』에서 말한 세 개의 갈석산 중에서

고구려 안(高麗中)에 있는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이 갈석산을 현재의 하북성 난하 하류 창려부근에 있는 갈석산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은 황하 하류가 직접 천진부근으로 흐를 때

(BC 602~ AD 11) 생겨난 것이므로 천진방면에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이 하북성 난하 방면의 갈석산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주류사학계에는 엄청난 충격이다.

 

두우는 이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이 고구려 중에 있다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난하보다 더 서쪽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이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이 천진부근임에랴!

 

앞으로 고구려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북평군 노룡현에 위치한

이 좌갈석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므로 사서를 통해 그 위치를 알아보자.

 

 

『구당서』‘평주’조를 보자.

 

“평주는 수나라 북평군이다.

무덕(武徳, 618~626) 2년에 평주로 고쳤고 임유현과 비여현을 다스렸다.

 

이 해에 치소를 임유현에서 비여현으로 옮겼고,

노룡현으로 이름을 고쳤고 다시 무녕현으로 고쳐 설치하였다.

 

7년에 임유현과 무녕현을 없앴고 북평군으로 고쳤다.

 

건원(乾元,758~760) 원년에 다시 평주라고 하였다

(平州. 隋為北平郡. 武徳二年, 改為平州, 領 臨渝 肥如 二縣.

其年, 自臨渝 移治 肥如,改為盧龍縣, 更置撫寧縣.

七年, 省 臨渝 撫寧 二縣. 天寶元年, 改為北平郡. 乾元元年, 復為平州).

 

즉 당나라 북평군은 수나라 북평군이었다.

 

그러면 『수서지리지』‘북평군’조를 보자.

 

북평군은 옛날 평주에 설치했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2269이다. 노룡현은 옛날 북평군에 두었다.

 

신창현과 조선현 등 2개의 현을 다스렸다. 북제에서 조선현을 신창현에 편입시켰다.

 

또 요서군의 해양현을 없애고 비여현으로 편입시켰다.

 

개황(581~ 600년) 6년에 또한 비여현을 신창현에 편입시켰다가

18년에 노룡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업(605~618년) 초에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長城이 있다. 관관(闗官)이 있다. 임유궁이 있다. 복주산이 있다. 갈석이 있다.

 

현수, 노수, 열수, 윤수, 용선수, 신량수가 있다. 바다가 있다

 

(北平郡.舊置平州. 統縣一, 戸二千二百六十九. 盧龍. 舊置北平郡, 領 新昌 朝鮮 二縣.

後齊省朝鮮入新昌, 又省遼西郡并所領海陽縣入肥如.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

十八年改名盧龍. 大業初置北平郡. 有長城. 有闗官. 有臨渝宮. 有覆舟山. 有碣石.

有 玄水 盧水 湼水 閏水 龍鮮水 臣梁水. 有海)

 

즉 수나라 북평군은 북위의 평주 북평군이었다.

 

『위서지형지』‘북평군’조를 보자.

 

“북평군은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430이며, 인구수는 1836명이다.

 

조선현은 전‧후한과 진晉에서는 낙랑에 속했으며 후에 파하였다.

 

연화(432~435년) 원년에 조선 사람을 비여로 옮겨 다시 설치하여 속하게 하였다.

 

신창현은 전한에서는 탁군에 속하였고,

후한과 진晉에서는 요동군에 속하였다가 후에 (북평군에) 속하였다. 노룡산이 있다

 

(北平郡, 秦置. 領縣二, 户四百三十, 口一千八百三十六.

朝鮮, 二漢晉屬樂浪後罷延和元年

徙朝鮮民於肥如復置屬焉. 新昌,前漢屬涿後漢晉屬遼東後屬 有盧龍山)

 

여기서 북위의 북평군 신창현의 위치를 알아보자.

 

전한의 탁군 신창현은 <보주補注>에 따르면

‘오늘의 신성현 동쪽 30리(今新城縣東三十里)’에 있다.

 

또 신성新城은 『청사지리지』‘직예 보정부’조에 의하면 ‘보정부 동쪽 150리’에 있다.

 

그러므로 신창현은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부 동쪽 180여리에 있었다.

  

위의 『수서지리지』에 의하면

신창현이 요서군 비여현 등 다른 현들을 흡수하여 노룡현으로 바뀌었고,

그곳에 갈석산이 있었다.

 

결국『위서지형지』『수서지리지』『구당서』등을 참조하면

『통전』의 저자인 두우 당시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은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동쪽180여리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질 수는 없다.

이 갈석산이 난하까지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이 갈석산을 특정할 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갈석산이 당시 천진방면으로 흐르던

황하 하류 해변가를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고지도인『대청광여도』『당토명승도회』등을 참조하면

오늘날의 대청하大淸河와 자아하子牙河가 합류하는 지점의 남산南山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위가 설치한 평주이자 수나라와 당나라의 북평군이 오늘날의 난하 방면이 아니라

하북성 보정시와 천진시 사이에 위치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통전』에서 언급한 우갈석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우갈석은 고구려 역사해석에 크게 중요하지 않으므로 간단하게 언급한다.

 

이 우갈석은 황하가 AD 11년에서 893년까지

산동성 빈주시 방면으로 흐르면서 생겨났다.

 

산동성 빈주시가 2005년에

무체현의 대산大山이 갈석산임을 고증하여 갈석산으로 개명하였다.

 

청나라 시기 지도인 『당토명승도회』에

진시황, 한무제가 갈석산에 올랐다는 시황대와 한무대가

이 갈석산 부근에 표기되어 있다.

 

현재 중국은 하북성 난하 부근의 갈석산과 산동성 빈주시의 갈석산을

공식적인 갈석산으로 지정해 놓고 서로 진짜 갈석산이라고 우기고 있는 실정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하여.....

 

진짜 갈석산(백석산)이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4.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갈석산은

모두 역사왜곡을 위하여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들이다.

 

2개의 가짜 갈석산이 있는데

현재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난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과

한반도 평양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이제 이들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과

그로 인하여 한민족의 상고사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알아보자.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의 핵심인 한나라 낙랑군에 위치하였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한 곳이다.

 

또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며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지명 이동은 한민족 상고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1) 난하 하류의 갈석산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위치한 난하 부근의 갈석산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역사왜곡을 위하여 동쪽으로 1,000여 리 지명 이동한 것이다.

  

갈석산의 지명이 이동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인 요나라(916년 ~ 1125년) 시대이다.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됨으로써

고구려 역사의 요람인 요동이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에서 요령성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갈석산의 지명 이동과 더불어 한민족 상고사 및 고구려 역사와 관련된 지명들이

대거 하북성에서 요령성으로 1,000여 리 동쪽으로 지명 이동되었다.

 

고대판 동북공정이 벌어진 현장이다.

  

이로 인하여 한민족의 상고사는 짙은 안개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한민족 상고사와 고구려의 역사를 복원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가짜 갈석산인 이유와 지명 이동된 시기 등을 살펴보자.

 

 

① 난하 부근의 갈석산이 가짜 갈석산인 이유

  

 

첫째, 갈석산은 반드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나 난하 하류 갈석산 방면으로 황하가 흐른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진짜 갈석산으로 둔갑시키기 위하여

‘황하 하류가 난하방면으로 흘렀다’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었다.

 

그 대표적인 설이 ‘구하 윤해설淪海設’이다.

 

즉 옛날 발해만이 육지였고, 황하가 난하 방면으로 흘렀는데

황하 하류 500여리의 육지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로 인하여 지금처럼 황하 하류와 갈석산이 500여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들은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허황된 설에 불과하다.

 

오늘날 현대과학은 황하의 시대별 흐름을 모두 알고 있다.

 

황하 하류는 결코 하북성 천진 방면을 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가짜 갈석산이다.

 

 

둘째, 갈석산은 태행산맥 동쪽 끝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나 난하 하류 갈석산은 태행산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셋째,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해야 한다.

  

난하 하류 갈석산 부근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이덕일교수의 견해를 살펴보자.

 

수나라 정사인 『수서지리지』 ‘상곡군’ 조는

수성현遂城縣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했다는 뜻이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天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는 갈석산이 버티고 있어

평양이 아니라 이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었음을 몸으로 증거한다.

<2006.11.8 조선일보 이덕일칼럼>

 

이덕일교수는 『수서지리지』‘상곡군’조에서

낙랑군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 하였고,

난하 하류 갈석산 지역의 현재 지명이 창려이기 때문에

이곳이 낙랑군 수성현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 사서를 통해 살펴보자.

 

수성현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했다.

북위가 영주에 준하여 남영주를 설치했다. 5군 11현이다.

(용성현‧광흥현‧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석성현‧양무현‧광도현은 건덕군에 속한다.

양평현‧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한다. 영락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부평현‧대방현‧영안현은 영구군에 속한다.)

북제北齊는 오직 창려군 한 개만 남겨놓고 영락현과 신창현 등 2개현을 다스렸으며,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개황원년(581년)에 주州를 옮겼으며, 3년에는 군을 폐하였고,

18년에는 수성현으로 고쳤다. 용산이 있다

 

(遂城.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 五郡十一縣.

龍城 廣興 定荒 屬 昌黎郡, 石城 陽武 廣都 屬建德郡, 襄平 新昌 屬遼東郡,

永樂屬樂浪郡, 富平 帶方 永安 屬營丘郡.

後齊唯留黎一郡, 領 永樂 新昌 二縣, 餘並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改為遂城. 有龍山.) 『수서지리지』‘상곡군 수성현’

 

위 『수서지리지』‘상곡군 수성현’조에서 북위의 남영주이자 북제의 창려군이며,

수나라의 수성현이었던 곳은 정확히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있던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아래의『중국역사지도집』 ‘남북조시대 북제’편 참조)

 

<중국역사지도집 남북조시대 북제편의 남영주 및 창려>

 

 

그러면 난하 하류의 창려라는 지명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독사방여기요』를 보자.

 

창려현은 영평부 동쪽 80리에 있다.

 

전한의 요서군 교려현이며, 후한이 창려로 고쳤다.

 

그 땅은 지금의 폐영주 경에 있다.

 

오대五代시대인 양나라 말에 거란이 정주定州의 포로들로

옛날 유성현 경에 광녕현을 설치하고, 아울러 영주인해군을 설치하였다.

 

후에 광녕현의 치소를 이곳(난하방면)으로 옮겨 평주에 속했다.

 

금나라 대정 29년(1189년)에 창려현으로 고치고

원나라 지원 7년(1271년)에 없앴다가 12년에 다시 설치하여 난주 영평로에 속했다....

후략

(昌黎(永平)府東八十里 漢治交黎縣屬遼西郡後漢改曰昌黎 其地在今廢營州境

五代梁末契丹以定州浮戶置廣寧縣於故柳城縣境兼置營州隣海軍 後徒縣治此屬平州

金大定二十九年改爲昌黎縣 元至元七年省十二年復置屬灤州尋屬永平路....後略)”

『독사방여기요』 ‘직예8 영평부’

 

위의 구절을 살펴보면 난하 방면의 창려현 지명은

1189년(금나라 대정 29년)에 생겨난 것으로

북제의 창려군이나 수나라의 수성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 주변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었다는 주장은 틀렸다.

 

오히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방면의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되면서 창려라는 지명도 같이 이동한 것이다.

 

 

② 난하 부근으로 갈석산의 지명이 이동된 시기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한 시기는 언제일까?

 

이는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역사 왜곡된 시점을 알 수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의 역사서와 이후의 역사서는

요동에 대한 해석을 달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통전』에 나타난 3개의 갈석산을 살펴본 바 있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하북성 보정시에서 천진시 사이인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과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우갈석 등이다. 

 

『통전』은 당나라 사람 두우(杜佑 : 735~812)가 801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때까지도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보이지 않는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우적도』(남송시대 1136년 작)이다.

 

이 『우적도』에서 난하(유수)부근에

갈석산과 더불어 노룡현과 평주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어서 『구주산천실증총도』(남송시대 1177년 작)와

『거란지리지도』(남송시대 작) 등에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나온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난하 하류의 창려라는 지명도

1189년(금나라 대정 29년)에 지명 이동 되었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생겨난 시기는

『통전』의 편찬 이후인 801년에서 『우적도』가 그려진 1136년 이전으로

대략 요나라(916 ~1125년) 시기로 추정된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여 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

 

이로 말미암아 대대적인 지명의 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요사』이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을 의미하며,

『요사』이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오늘날의 요령성을 의미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역사서를 연구해야만

한민족의 상고사 및 고구려 역사를 올바로 볼 수 있다.

 

 

(2) 한반도 평양의 갈석산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산이다.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여러가지 학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지난 천여 년 동안 진짜 갈석산 행세를 해오면서

한민족 상고사를 왜곡하였다.

 

그런데 한반도 평양의 가짜 갈석산을 주장하는 자들은

갈석산의 기본요건조차 망각하고 있다.

 

오로지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만들려다 보니

갈석산을 한반도 평양으로 가져와야하고, 진나라 만리장성을 끌고 와야 했다.

 

그러나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흔적은 조작할 수 있으나

황하 하류를 어떻게 한반도로 끌고 올 수 있겠는가?

 

갈석산이 한반도 평양에 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식민사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이다.

 

그는 일제시대 『사학잡지(史學雜誌)』에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 및 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고에서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며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라는 이나바 이와기치의 설은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뒤를 이었다.

 

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수성현’조를 보자

 

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산천조勝覽山川條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소축後代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東西行城의 석성石城(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를 패강장성浿江長城의 유지遺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 설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한국고대사연구』박영사 1976. 148쪽>

 

이병도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成縣을 황해도 북단의 수안遂安에 비정한 것은

수성현의 ‘수遂’ 자와 수안의 ‘수遂’ 자가 같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황해도 수안에 갈석산과 장성이 없자,

『진서지리지』‘수성현’조의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秦築長城之所起)

구절을 터무니없는 맹랑한 설로 부정하고 있다.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이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은

『진서지리지』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서 두루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다.

 

황해도 수안에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없으면

황해도 수안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다는 설이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병도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라는 자신의 설을 고수하기 위하여

중국과 한국의 수많은 역사서를 부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황해도 수안의 요동산이

갈석산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황해도 수안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다라고 믿고 싶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참으로 어설픈 희망사항은

해방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단사학을 장악한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하여

확고한 주류학계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본래의 진나라 만리장성은

중국 감숙성 임조에서 태행산맥의 갈석산(백석산)까지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전인 요나라(916 ~ 1125년) 시대에

태행산맥의 갈석산(백석산)이 하북성 난하 하류 부근으로 지명 이동되면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오늘날의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까지 왜곡 연장되었다.

 

그로부터 또 1000여년이 지난 일제시대에

갈석산의 지명이 한반도 평양으로 지명 이동되면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한반도 평양까지 왜곡 연장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중국역사지도집』에

진나라 만리장성을 한반도 평양까지 당당하게 그려놓고 자국민들을 교육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홍보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날,

모든 동북공정은 부질없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이제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 속으로 배를 띄운다.

 

누군가 갈석산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이가 있다면,

마침내 가슴 뭉클한 한민족의 상고사로 향하는 보물섬 지도를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수천 년 전 과거로의 머나먼 여정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특히 고구려로 향하는 역사항로에는

현기증이 나는 5호16국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해 가야한다.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갈석산이 우리들의 긴 여정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

 

 

 

5. 요동 이동설

 

요나라 때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갈석산은 요동의 시작점이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은 필연적으로 요동의 이동을 수반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요나라(916년 ~ 1125년)시대에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동쪽으로 1,000여리 떨어진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그러므로 요나라 이전의 역사서와 요나라 이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요나라 이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이며,

요나라 이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오늘날의 요령성 지역이다.

 

요동의 지명이동은 한민족의 상고사와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요나라 시대에 지명 이동된 요령성 요동을

고구려 시대의 요동으로 오해하였다.

 

그리하여 한민족의 상고사가 심하게 왜곡축소 되었다.

 

두 개의 요동을 대표하는 지도가 있다.

 

아래의 『기주협우갈석도』와『대청광여도』이다.

 

『기주협우갈석도』는 남송(1127년 ~ 1279년)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고지도이다.

 

한민족 상고사의 핵심인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중심으로

하북성 요동의 연나라 5군(상곡군,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한민족 상고사로 향하는 현존하는 유일한 보물섬 지도이다.

 

고구려 역사 속으로 항해하는 내내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대청광여도』는 청나라(1616 ~ 1912) 사람인 채방병蔡方炳이 각刻한 원도에

일본 지도 작성의 선구자인 나가쿠보 세키스이가 1785년 교정을 한 중국전도이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하북성 요동을

난하 하류의 갈석산과 요령성 요동으로 완벽하게 옮겨놓은 최초의 지도이다.

 

반면교사로 활용할 예정이다.

 

 

① 『기주협우갈석도』의 하북성 요동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나타낸 지도>

 

      <기주협우갈석도>

 

『기주협우갈석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 『기주협우갈석도』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

     기주冀州지역에 위치했던 갈석산과 그 주변을 그린 지도이다.

 

    『상서』 ‘우공편’의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는 구절의 래우갈석夾右碣石으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옮긴 것이 위의 지도이다.

 

    『기주협우갈석도』는 본래의 지도를 왼쪽으로 90도 회전한 것이다.

 

 

다. 『기주협우갈석도』의 발해 가운데

    아래와 같이 갈석산을 자세히 설명한 구절이 있다.

 

   갈석산의 위치가 역수易水에서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다고 하였다.

 

   즉 갈석산이 역수易水 하류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오늘날의 백석산(또는 낭아산)이 분명하다.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역수․탁수․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大河 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

   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曰夾右碣石)

 

 

라. 『기주협우갈석도』에서 아래와 같이

    어양군 옹노현雍奴縣에서 시작하는 늪지대를 설명한 구절이 있다.

 

   구십구 물웅덩이(九十九澱)로 표현한 것은 물웅덩이가 수없이 많다는 뜻이다.

 

   이 늪지대가 고당전쟁에 나오는 저 유명한 요택遼澤이다.

 

   이 일대는 황하에 의해 떠내려 온 황토들이 수 백리 늪지대를 이루어

   오늘날까지도 문안와文安窪의 너른 늪지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기주 북쪽의 모든 물은 요택에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기주협우갈석도』의 호타하滹沱河는 오늘날의 대청하大淸河를 나타낸다.

 

   기주 북쪽의 모든 물은 이곳에 모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이 범람하지 않을 때는 물웅덩이들이 나누어진다.

 

   물이 불어 범람하면 하나가 되므로 물이 이곳에 이르면 어느 강물인지 알 수 없다.

 

   통합하여 구십구 물웅덩이라 한다.

   (冀北諸水聚此入海 水若不漲時每澱猶有分域 至水盛時成漲爲一故水經至此不能分別

   其爲何水총曰九十九澱)

 

 

마. 『기주협우갈석도』에서 갈석산의 지명을 나타내는 부분이

    묘하게도 중간의 자른선 부분에 위치하여 글씨를 판독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러나 앞의 ‘다’ 항에서 살펴보았듯이

   갈석산이 역수易水 하류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역하逆河 옆에 그려진 산이 갈석산이 분명하다.

 

 

바. 『기주협우갈석도』에서 요동군의 지명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 요동군 지역은 중국의 영역이 아니므로 표시를 생략한 듯하다.

 

    필자는 요동군의 군치인 양평을 오늘날의 하북성 계현薊縣으로 비정하므로

    현대지도에는 임의로 그려 넣었다.

 

    아울러 연장성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계현薊縣까지로 비정하여 그려 넣었다.

 

 

사. 『기주협우갈석도』의 대요수大遼水가 난하일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고지도(청조일통지도 등)에 현재의 강물 흐름과 달리

   난하의 하류가 조백신하와 연결되는 것도 보인다.

 

   이 경우 소요수는 조백신하이고, 대요수는 난하가 된다.

 

 

② 『대청광여도』의 요령성 요동

 

<대청광여도(청나라 1785년작)>

 

 

『대청광여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 갈석산이 난하 하류로 지명이동 되어 있다.

 

 

나. 갈석산은 반드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한다.

 

   『대청광여도』는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공 역하구하가 지금 바다가 되었다(禹公逆河九河今爲海)는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에 의하면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은 근거가 없다.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을 진짜 갈석산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허황된 설에 불과하다.

 

 

다. 요동군의 치소를 오늘날의 요령성 요양遼陽으로 표시하였다.

 

 

라. 발해 안에 아래와 같이 요동을 설명한 글이 있는데,

    동서가 천여 리, 남북이 일천 육백리로 오늘날의 요령성에 해당한다.

 

   하북성 진황도시의 산해관에서 요동 땅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주협우갈석도』의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완벽하게 지명 이동된 모습이다.

 

   요동은 옛날 청주‧기주지역이다.

   순임금이 기주 북쪽을 나누어 유주로 삼았는데, 즉 오늘날의 광령廣寧 서쪽 땅이다.

   청주 동북쪽은 영주로 삼았는데, 즉 광령 동쪽 땅이다.

   동서가 천여 리 이고 남북이 일천 육백 리 이다.

   삼면은 물가에 사는 오랑캐와 접하고, 일면은 험한 바다이다.

   산해관에 의지하여 좁은 길로 안으로 통한다.

   옛날에 군현이 있었는데, 당태종이 요동을 정벌한 후

   오대양초五代梁初로부터 송나라까지 400여년을 전하였다.

   후에 요․금․원나라에 빼앗겼다.

   명나라가 하늘의 명을 받아 다시 설치했다.

   위衛를 2곳에 설치했는데 오늘날의 성경盛京은 대청나라의 용흥땅이다

 

   (遼東古靑冀域,舜分冀北,爲幽州,卽今廣寧以西地,靑東北爲營州,卽廣寧以東地,

   東西千餘里,南北一千六百里,三面瀕夷,一面阻海,持山海關,線路可以內通,古有郡縣,

   唐太宗征遼,自五代梁初, 歷宋四百餘年,後沒于遼金元,明朝受命,盡改置,衛設二處,

   今爲盛京,卽大靑龍興之地)

 

 

③ 하북성 요동과 요령성 요동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요나라(916년 ~ 1125년) 시기에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되면서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더불어 한민족 상고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여러 지명들도 동시에 지명이동 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명들을 아래 지도에 표시하였다.

 

앞으로 글을 연재하면서 이에 대한 고증도 병행하려고 한다.

 

참고로 요나라 이전의 하북성 요동의 각종 역사 지명들은 필자가 고증한 것이며,

 

요나라 이후의 요령성 요동의 각종 역사 지명들은

현 주류사학계의 학설대로 표시하였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역사 속으로 본격 항해를 시작하기 전

꼭 필요한 준비물을 점검하였다.

 

 

- 요동 변천사

 

燕은 BC 281년 진개가 기자조선과 진번을 침략하여

기자조선을 난하 이동으로 밀어 내었지만 BC239년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여 

BC 220년 경에는 胡와 북부여가 연합하여 잃었던 땅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북부여가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자 燕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야만 했다.

 

BC 220년부터 AD105년까지의 요수는 황하(黃河)를 말한다.

이때의 요동은 산서성 요동이다.

그러므로 위만조선 시대와 고구려 초기 신명선제 까지의 요동은

산서성의 요동을 의미한다.

 

105년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요수는 조백하(潮白河)이다.

고구려 태조대왕 이후 삼국시대의 요동은 하북성 요동이다.

 

지금의 요하는 요나라(916-1125)때 생긴지명이다.

그러므로 고려 이후부터의 요동은 요령성 요동이다.

 

드디어 출항준비가 완료되었다.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들>

 

 

 

<슬프다. 발기의 난이여!>

 

  

고구려의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권력승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특기할 만한 ‘형제의 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구려 초기 추모왕(鄒牟王, 재위 BC37~BC19년) 시절

유리태자와 비류‧온조 간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이복형제들 간의 다툼이다.

 

둘째는 고구려 중반기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179~197년) 사후

형 발기와 동생 연우 사이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발기의 난’이다.

 

셋째는 고구려 마지막 제28대 보장왕(寶臧王, 재위 642~668년) 시절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형 남생과 동생 남건‧남산이 막리지 자리를 놓고 벌인 난이다.

 

이들 ‘형제의 난’은 고구려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첫 번째 ‘형제의 난’은 고구려와 백제의 분열로 이어지고,

그 여파는 고구려 역사 전반에 길고 긴 파장을 미쳤다.

  

두 번째 ‘발기의 난’은 고구려가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이었던

하북성 요동을 상실한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하북성 요동을 상실함으로써 고구려는 대륙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울러 고구려라는 균형추를 상실한 대륙은

그 후 5호 16국 시대의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세 번째 ‘형제의 난’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운을 건 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당나라 군사의 길잡이 역할을 함으로써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필자는 고구려 역사기행의 첫 항로를 ‘발기의 난’으로 잡는다.

 

첫 항로를 개국 초가 아닌 중반기로 잡은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지금 지독한 고구려 역사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이자 고구려 역사의 요람인 하북성 요동을 망각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발기의 난’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큰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그 충격의 현장을 답사함으로써 잃어버린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듯,

‘발기의 난’을 답사함으로써 고질적인 고구려 역사 기억상실증을 치유하고자 함이다.

 

‘발기의 난’은 김부식의『삼국사기』와 중국의 정사인『삼국지』에서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대하는 두 사서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삼국사기』는 ‘발기의 난’이 별다른 파장없이 마무리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반면,

『삼국지』는 ‘발기의 난’으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분열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먼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발기의 난’을 요약해 보자.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을 참고한다.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179~197년) 때의 일이다.

 

고국천왕이 후손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왕에게는 우씨라는 아름다운 황후와 발기, 연우, 계수라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왕후 우씨는 초상난 것을 비밀로 하고,

밤에 왕의 첫째 동생인 발기發歧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왕이 후손이 없으니 그대가 마땅히 이어야합니다.” 하였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기를

 

“하늘이 정하는 운수는 돌아가는 곳이 있으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부인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어찌 예禮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핀잔을 주었다.

  

왕후는 부끄러워하며 곧 둘째 동생인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문에서 맞이하여 들여앉히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어른이 되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아재叔를 보러 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연우가 더욱 예의를 차리며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주고,

돌아가려 할 때 연우에게 말하기를

 

“밤이 깊어서 예기치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 되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바래다주시오.” 하였다.

 

연우가 그 말에 따랐다.

 

왕후가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가서, 다음날 새벽에 선왕의 왕명이라 속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왕으로 삼았다.

 

발기가 이를 듣고 크게 화가 나서 병력을 동원해서 왕궁을 포위하고 소리치기를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이다.

네가 차례를 뛰어 넘어 임금 자리를 빼앗는 것은 큰 죄이다. 마땅히 빨리 나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처자식까지 목베어 죽일 것이다.” 하였다.

  

연우가 3일간 문을 닫고 있으니, 나라 사람들도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가서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보고 알리기를

 

“나는 고구려 왕 남무男武의 친동생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자 나의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모의하고 즉위하여

천륜의 의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에 투항하러 왔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병사 3만을 빌려 주어, 그들을 쳐서 난을 평정할 수 있게 해주소서.”

하였다.

 

공손도가 그에 따랐다.

  

연우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병력을 이끌고 막게 하였는데,

한의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배자를 추격하니,

발기가 계수에게 말하기를

 

“네가 차마 지금 늙은 형을 해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계수가 형제간의 정으로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하기를

 

“연우가 나라를 넘겨주지 않은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한 것이지만

당신이 한 때의 분함을 가지고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보겠습니까?” 하였다.

  

발기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가 소리 내어 슬피 울며 그 시체를 거두어 풀로 덮어 매장하고 돌아왔다.

 

왕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계수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술자리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접하고 또 말하기를

 

“발기가 다른 나라 병력을 청하여 자기 나라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막대하다.

지금 그대가 그를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자살하자 매우 슬피 우는 것은 도리어 과인이 도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냐?”

하였다.

 

계수가 안색이 바뀌며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신이 지금 한 마디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수가 대답하기를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리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은 대왕의 미덕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시신을 거두어 안치해 둔 것입니다.

어찌 이것으로 대왕의 노여움을 당하게 될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일 어진 마음으로 악을 잊으시고,

형의 상례喪禮로써 장사지내면 누가 대왕을 의롭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을 하였으니 비록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관부에 나아가 죽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자리에 앉아 따뜻한 얼굴로 위로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불초하여 의혹이 없지 않았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과오를 알겠다.

그대는 자신을 책망하지 말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왕자가 절하니 왕도 역시 절하였으며 기쁨이 극치에 달하여 그만 두었다.

  

가을 9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발기의 시체를 받들어 모셔오게 하여,

왕의 예로써 배령裴嶺에 장사지냈다.

 

왕이 본래 우씨로 인하여 왕위를 얻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아니하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삼국사기』‘산상왕’ 편>

 

『삼국사기』의 위 기록을 보면,

왕후 우씨가 거짓 왕명을 내세워 고국천왕의 첫 번째 왕위 계승자인 발기를 따돌리고

둘째인 연우를 왕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거짓 왕명을 빙자한 왕후 우씨와 연우의 반역행위로 발기가 분개했음은 당연하다.

 

그 당시 당대의 효웅이었던 공손도가 요동 땅의 일각을 장악하고

천하를 향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발기는 공손도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찾으려 하였으나 전쟁에 패하여 자살함으로써

‘발기의 난’은 뒤탈 없이 아름답게 마무리된 것으로 되어있다.

 

 

과연 그럴까?

 

중국 정사인 『삼국지』의 기록을 보자.

 

역시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을 참고한다.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196~219년)년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가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호족胡族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연우}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197년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는 요동을 공손강에게 내어주고

산상대제{연우}13년(209년)에 졸본의 서도(西都)에서 환도성(今 朝陽)으로 천도한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고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박위거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므로

현토군과 요동군이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

 

 

위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서 ‘발기의 난’이 일어난 시기는 산상왕 원년인 197년이다.

 

반면 『삼국지』는 공손강(재위 204~221년) 시기로 보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발기가 산상왕 원년에 전쟁에 패하여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산상왕 원년인 197년부터 수년간 발기의 세력과 산상왕 세력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느 기록이 맞을까?

 

『삼국사기』도 ‘고국천왕’편에 위『삼국지』와 같은 기록을 싣고 있다.

 

『고국천왕을 혹은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예전에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추대하여 왕을 삼았다.

 

한 헌제 건안 초기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삼국사기』‘고국천왕’편>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지』에서 ‘발기의 난’이 일어난 시기로 말하는

공손강 재위(204~221년) 때인 209년,

고구려는 별안간 환도성으로 천도를 감행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지』의 기록에 더 신뢰가 간다.

  

결국 ‘발기의 난’은 발기가 형이면서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고구려 서부지역인 연노부涓奴部와 함께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이자 고구려의 요람이었던

하북성 요동 땅을 공손강에게 들어 바친 가슴 아픈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머나먼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했으며,

대륙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이후 광개토태왕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잃어버린 하북성 요동을 되찾을 때까지 2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요동 땅에서 대륙백제와 공손씨가 흥기하고,

모용선비가 일어나 대륙을 호령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고구려의 강역 사방 2,000리는 어디에 있는가?>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발기의 난’ 이후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하고

요동의 동쪽 천리로 천도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서진(西晉)의 진수(陳壽:233~297)가 280~289년에 편찬한

사서로 고구려가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불타고 난 후 동천대제 21년(247년)에

평양{今 遙陽}으로 천도한 후임으로 이때의 고구려 수도는 지금의 요양이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의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편>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가 되며, 호수는 8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편>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호수는 5천호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동옥저’편>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는 2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예’편>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

<『삼국지』‘위지동이전 읍루’편>

 

 

<삼국지로 본 실제 고구려 강역>

 

<중국역사지도집 魏 유주편의 고구려 강역>

 

 

위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고구려 강역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사방이 2천리이고, 동쪽은 옥저, 서쪽은 요동,

남쪽은 조선·예맥,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고구려의 동‧서쪽 경계를 살펴보자.

 

동쪽은 개마대산을 경계로 동옥저와 접하고 있으므로

대략 개마고원 부근으로 볼수 있다.

 

그러면 서쪽 경계는 개마고원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산해관이 있는 칠로도산까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서쪽경계는 난하 또는 칠로도산이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남‧북쪽 경계를 살펴보자.

 

남쪽은 조선과 접하고 있는데, 조선은 마조선의 수도 평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북쪽 경계는 한반도 평양 또는 요동반도의 끝인 대련으로부터

북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서요하 일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 강역은 동서로 개마고원에서 난하 또는 칠로도산까지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요동반도 대련에서 서요하 일대까지

2천여 리에 약간 못 미치는 지역이 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으므로

하북성 요동의 끝인 칠로도산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요령성 요양 부근이 된다.

  

또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서 사방 2천리의 강역이므로

대흥안령산맥과 소흥안령으로 둘러싸인 만주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지도상에 표시하면 위의 지도에서 <『삼국지』로 본 실제 고구려 강역>과 같다.

 

그런데 현재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발기의 난’ 이후 고구려 강역은 어떤가?

 

위의 지도에서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역사지도집』‘위魏유주’편의 고구려 강역>의 고구려 강역과 동일하다.

 

『삼국지』에서는 분명히 이 시기의 고구려의 강역이 사방 2천리라 하였는데,

고구려강역이 겨우 사방 1천여 리에 불과하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이 오늘날의 요동반도라면

고구려 강역 2천리의 절반은 동해바다 속에서 찾아야 한다.

 

고구려의 동쪽에 위치한 옥저도 마찬가지로 동해바다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는 요동의 동쪽 천리인 동해 바닷가에서 찾아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구려 시대의 하북성 요동이 갈석산의 이동과 더불어

요나라 이후 요령성 요동으로 1천여 리 동쪽으로 지명이동된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삼국지』에 나오는 고구려 강역 사방 2천여 리는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의 국력이 가장 쇠약했을 때의 기록이다.

 

고구려가 가장 쇠약했을 때에도 고구려 서쪽은 난하 또는 칠로도산을 경계로 하였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한민족 상고사의 요람인 하북성 요동을 상실하고

슬픔에 잠겨 절치부심하던 때였다.

 

그런데 오늘날 그 후손들은 최소한으로 줄어든 그 고구려 강역마저도

반의 반 토막으로 만들고 있으니 지하에 잠든 선조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하루빨리 올바른 고구려 역사를 찾아야 한다.

 

오늘날의 요동반도를 고구려 시대의 요동으로 굳게 믿고 있는 주류사학계에

다시 한 번 묻는다.

 

‘발기의 난’ 으로 요동을 상실한 후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역사의 푸른 물결을 헤치며 뱃머리를 공손씨의 멸망시기로 향한다.

 

요동, 현토, 낙랑, 대방 등의 위치가 한결 뚜렷해질 것이다.

 

바야흐로 대륙에는 조조‧유비‧손권‧공손연 등의 효웅들이

대륙의 일각을 차지하고 자웅을 겨루고 있었고,

고구려를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고구려 강역에 대한 고찰>

 

고구려 역사기행의 항로를 공손씨 정권 멸망시기로 향하기 전,

중국정사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 전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고구려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일이며,

이를 통하여 고구려와의 주요 접경 지역이었던

낙랑‧대방‧요동‧현토의 위치도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중국의 각종 역사서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을 살펴보자.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에는 고구려 강역이 사방 2천리,

『북위서』‧『주서』‧『북사』‧『수서』에는 동서 2천리와 남북 1천리,

『구당서』에는 동서 3,100리와 남북 2천리,

『통전』에는 고구려 강역이 동서 6천리로 나온다.

 

고구려 강역은 신라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남북은 1천여 리에서 2천여 리까지 변하지만,

동서의 길이는 2천여 리 보다 좁아진 적은 없었다.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

 

 

(1) 『후한서』‧『삼국지』‧『북위서』등의 고구려 강역 동서 2천여 리

 

고구려 강역 동서 2천여 리는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한 후의 고구려 강역이다.

 

고구려가 가장 쇠약했을 때의 기록이다.

 

당시 고구려의 동쪽에는 옥저가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 2천여 리가 되려면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하북성의 칠로도산 부근이 될 수밖에 없다. 

 

나라 사이의 국경선은 보통 가로막힌 큰 강이나 산맥으로 형성되므로

고구려의 서쪽 2천여 리에서 국경선이 될 만한 곳은 난하와 칠로도산 밖에 없다.

 

이때의 고구려 강역은

대략 위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 지도의 사각형 부분에 해당한다.

 

그리고 고구려 서쪽의 1,000여 리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으로 고구려 시대의 요동 땅이다.

 

이곳 하북성 요동땅은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1천여 리 침략하여

연5군(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을 설치한 지역이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이며,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또한 훗날 고구려가 태동한 지역이며,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한 후에는

공손씨 정권과 선비족인 모용씨의 연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그리고 북위의 평주와 영주가 설치된 지역이기도 하다. 

 

하북성 요동 땅 1천여 리는 5호 16국 시대에 격랑의 중심지였다.

 

앞으로 고구려 역사기행을 계속하면서

이 모든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 동서 3,100리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구당서』‘동이열전 고구려’

 

{구당서는 945년에 당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위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과 고구려 평양성까지의 거리가 5천 1백리이고,

고구려 강역의 동서 거리가 3천 1백리이다.

 

『구당서』는 거리를 100리 단위까지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동서 거리가 3천 1백리이면 위의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구려 서쪽 국경이 태행산맥의 갈석산 부근이 된다.

 

『통전』에서 진 태강지지에서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와의 옛 경계에 있다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고 하였다.

 

『구당서』와 『통전』의 고구려와 당나라 경계선 기록이 일치한다.

  

이때는 고구려가 광개토태왕 이후

하북성 요동 땅 1천여 리를 수복했을 때의 기록이다.

 

또 당시 고구려 서북쪽에 영주營州가 있었으므로

영주의 위치가 오늘날의 중국 북경부근이 될 수밖에 없으며,

통설에서 영주를 오늘날의 요령성 조양시 부근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구당서』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는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을 잇는 선이다.

 

한민족 상고사에 있어서 대흥안령산맥은

북방 유목세력과의 주요 경계선 역할을 하였으며,

태행산맥은 농경세력인 한漢족과의 오랜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이다...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전국책』‘연책燕策’

 

연나라는 갈석산에 의해 막히고, 사곡에 의해 끊겼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싸였다.

...중략...

(이것으로) 나라를 굳게 지킬 수 있으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

 

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中略...邦國之固 而山川社稷之寶也

『염철론』‘험고險固’

 

위 『전국책』과 『염철론』의 기록은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BC 300년경)이 있기 전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가 태행산맥의 갈석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연나라는 갈석산에 의하여 막혀있으며 그 동쪽에 요동의 조선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또 『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북방 유목세력인 흉노가 가장 강성하였던

묵돌 선우(冒頓 單于, 재위: BC209년 ~ BC 174년)시대에도

흉노는 대흥안령산맥의 끝자락인 상곡을 넘지 못하였고,

상곡지역을 경계로 예맥, 조선과 접하였다.

 

좌방의 여러 왕과 장수들은 동방에 거주하며 상곡上谷 바깥을 마주보고,

동쪽으로 예맥, 조선에 접한다.

우방의 왕과 장수들은 서방에 거주하며 상군上郡 서쪽을 마주보고

월지, 저, 강에 접한다.

선우의 정庭은 대, 운중을 마주본다

 

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以往者,東接穢貉﹑朝鮮;右方王將居西方,直上郡以西,

接月氏﹑氐﹑羌;而單于之庭直代﹑雲中

『사기』‘흉노열전’

 

 

(3) 『통전』의 고구려 강역 동서 6천리

 

『통전』은 고구려의 강역에 대하여

중국의 모든 역사서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통전은 당나라의 재상 두우(杜佑 735∼812)가 800년경에 편찬한 사서이다}

 

그 땅은 후한 시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

(基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 至隋漸大東西六千里).

 

동서로 6천리는 고구려가 북쪽의 부여지역까지 차지했을 때의 기록이다.

 

위의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구당서의 기록인 동서 3천 1백리에서 동쪽으로 2천여 리가 늘어나고,

서쪽으로 1천여 리가 늘어나서 동서 6천여 리가 되었다.

 

이때의 서쪽 국경선은 대략 지금의 중국 섬서성 유림관까지이다.

 

『삼국사기』‘온달열전’과 『태백일사』‘고구려본기’에

고구려가 산서성 너머로 진출한 기록이 보인다.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요동을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서 싸웠다.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질풍같이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삼국사기』‘온달열전’

 

대덕 18년(576년) 병신에

임금이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과 배찰산을 토벌하러 가서,

유림관까지 추격하여 북주를 대파하였다.

유림진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유림은 지금 산서의 경계이다.

 

大德十八年丙申 帝率大將溫達 往討碣石山 拜察山

追至楡林關 大破北周 楡林鎭以東悉平 楡林今山西境

『태백일사』‘고구려본기’

 

위 『태백일사』의 갈석산은 태행산맥에 위치한 백석산이며,

배찰산은 하북성 장가구시 북쪽지역이다.

 

고구려 제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559~590년) 시절,

북주가 태행산맥의 갈석산(백석산)과 대흥안령산맥의 끝자락인

상곡 부근으로 공격해오자 고구려가 이들을 추격하여 대파한 기록이다.

 

여기서 산서 경계에 있는 유림진이 하북성과 산서성의 경계인 유림진인지

아니면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인 유림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구려가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을 넘어

산서성으로 북주를 공격한 것은 확실하다.

 

참고로 배찰산拜察山 부근을 흐르는 강으로 보이는 배찰하拜察河가 두 곳에 보인다.

 

중국 고지도인 『대청일통여지전도』(청나라, 1864년 작)에

하북성 장가구시 북쪽에서 흐르는 양하洋河의 지류와

요령성 적봉시 부근을 흐르는 노합하老哈河의 지류를 배찰하拜察河로 표기하고 있다.

  

요나라 시기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1천여 리 동쪽으로 지명이동 되면서,

태행산맥의 갈석산과 그 정북쪽의 배찰하도 세트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과

그 정북쪽의 배찰하로 1천여 리 동쪽으로 지명이동 된 흔적이다.

 

 

결론

 

중국 정사의 기록은 고구려의 최소 강역이 동서 2,000여 리이다.

 

이때의 고구려 서쪽 경계도

요령성 요하를 훨씬 넘어선 칠로도산 부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나라 때의 고구려 강역은 동서 3,100리로 태행산맥 부근이 경계선이며,

수나라 시대에는 동서 6,000여 리로 고구려강역이 산서성을 훨씬 넘어선다.

 

중국의 역사서가 적대국인 고구려의 강역을 줄였으면 줄였지 과장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강단사학계는 고구려의 최대 강역을

겨우 요령성 요하 부근으로 보고 있다.

 

이런 역사관으로 어떻게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요나라(916년 ~ 1125년) 시대에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동쪽으로 1,000여리 떨어진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이동 되면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알아야

올바른 고구려 역사를 알수 있다.

 

 

 

<요동 공손씨 정권의 흥망>

 

 

중원에 풍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풍운은 교룡들의 용틀임을 부른다.

 

푸른 하늘 이미 죽었으니(蒼天已死)

마땅히 누런 하늘이 서리라(黃天當立)

 

‘황건 농민혁명’의 구호이다.

 

역사는 아직도 이를 ‘황건적의 난’으로 부른다.

 

후한 말 외척과 환관들의 전횡으로 정치는 썩고,

호족과 지주들에 의한 토지겸병과 수탈로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민중들은 후한의 왕조를 부정하고 새 세상을 꿈꾸었다.

 

서기 184년 일어난 ‘황건 농민혁명’은

204년까지 장장 2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졌고,

그 여파로 후한은 결국 220년 몰락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이 꿈꾸었던 태평성대는 오지 않았다.

 

후한의 왕조를 대신하여 위‧오‧촉 삼국과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 일어나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을 뿐이다.

 

대륙의 동북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도

피비린내 나는 전운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고국천제 6년(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坐原)에서 싸워서 이겨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한 해를

『후한서』‘원소유표열전’은 서기 184년이라 하였고,

『삼국지』‘공손도전’은 동탁이 집권한 서기 189년으로 적고 있다.

 

따라서 서기 184년에 고구려를 침략한 요동태수가 공손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공손도가 ‘황건 농민혁명’의 풍운을 타고 요동 땅 일각을 장악한 것은 분명하다.

 

『삼국지』‘공손도전’에 의하면 공손도는 요동태수로 부임한 후,

동쪽으로 고구려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을 공격하여 위엄을 해외에 떨쳤다.

 

또 요동군을 갈라 요서중료군遼西中遼郡을 설치하고 태수를 두었으며,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현들을 거두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두었다.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에 올랐다.

 

그 후 고구려에서 발생한 ‘발기의 난’으로 요동 땅을 모두 차지한 공손씨 정권은

공손도(재위 189~204), 공손강(재위 204~220), 공손공(재위 220~228),

공손연(재위 228~238)으로 이어지며 50여 년 동안 하북성 요동 땅을 지배하게 된다.

 

중국 정사인 『삼국지』에 기록된 ‘발기의 난’을 다시 살펴보자.

 

고구려의 중심이 오늘날의 하북성에서 요령성으로 이동하는 비운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발기의 난’을 이해하지 못하면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초기 역사 불신론이 나오는 배경이 된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발기의 난’이 일어날 당시 고구려의 인구는 3만호였다.

 

그런데 발기와 고구려 서부인 연노부가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그 규모로 보아 고구려 서부 전체가 투항하였으며,

고구려의 발상지였던 비류수 지역도 이때 공손강에게 넘어갔다.

 

그로 인하여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다(伊夷模更作新國)”고 하였다.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는 발상지였던 하북성 요동 땅을 모두 상실하고,

요동의 동쪽 1천여 리로 천도하여 새로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한편 ‘발기의 난’으로 하북성 요동을 모두 차지한 공손강은 대방군을 신설하고,

왜倭{산동반도 섬에 거주하던 萊夷}와 한韓{대륙 삼한(三韓)}을 복속시키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삼국지』에 의하면 이 때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고 하였다.

 

사방 4천리 강역을 한반도 내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대륙에도 한韓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의 하북성 중부 호타하滹沱河 남쪽 지역이다.

 

대방은 호타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韓’

 

(후한의) 환제·영제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후한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건안 연간(A.D 196~220)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예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韓’

 

 

『삼국지』‘무제기’와 ‘공손도 전’에 따르면

 

건안 12년(207년) 위나라의 조조가 3군 오환을 정벌하고

유성(柳城, 현재의 북경 부근임.통설은 요령성 조양으로 보고 있다)을 도륙했다.

 

원소의 아들인 원상 등이 요동으로 달아나니

공손강이 원상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냈다.

 

조조가 공손강을 양평후에 봉하고 좌장군으로 임명했다.

 

공손강이 죽자 아들인 공손황과 공손연 등이 모두 어렸으므로

그 무리들이 공손공을 요동태수로 삼았다.

 

황초 원년(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제위에 올라

공손공을 거기장군, 가절로 임명하고 평곽후平郭侯로 삼았다.

  

당초 공손공은 병으로 음경이 소실되어 고자가 되었고,

유약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태화 2년(228년), 공손연이 공손공을 위협하여 그 지위를 빼앗았다.

 

태화 7년(233년) 공손연은 오나라 사자 장미, 허안 등을 참수하여 위나라로 보내고

대사마에 임명되고 낙랑공에 봉해졌다.

 

 

요동에 공손연이 등장할 무렵 중원의 형세를 살펴보자.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220년 낙양을 중심으로 위나라를 건국하였고,

뒤를 이어 유비가 221년 파촉 땅의 성도를 중심으로 촉한을 건국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손권이 229년 건업을 중심으로 오나라를 건국하여

중원은 삼국정립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편 고구려는 제11대 동천대제(재위 서기 227~248년)가 제위에 올라

잃어버린 요동 회복의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땅에는 그 임자가 있는 법이다.

 

하북성 요동 땅은 지정학적으로 발해만을 배경으로 한 해양세력의 중심지이며,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북방의 유목세력과 접하고,

태행산맥을 넘어 중원의 농경세력과 접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므로 3대 세력인 해양세력과 유목세력 및 농경세력들 간의 이해관계를

적절하게 조절할 역량을 지닌 자만이 임자가 될 수 있는 땅이었다.

 

불행히도 공손연은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였다.

 

지나치게 재물을 밝히고 의리를 가벼이 여기며,

표리부동함으로써 주변국들과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었다.

 

 

공손연이 사자를 보내 남쪽으로 손권과 서로 통하고 왕래하며 선물을 주고받았다.

 

손권은 장미張彌, 허안許晏 등을 시켜 금옥진보金玉珍寶를 보내고

공손연을 연왕燕王으로 삼았다.

 

공손연은 손권이 멀리 있어 의지할 수 없다는 점을 두려워했으나

또한 화물貨物이 탐이 났으므로,

그 사자들을 유인하여 장미, 허안 등을 모두 참수해 (위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이에 명제明帝는 공손연을 대사마에 임명하고 낙랑공, 지절에 봉하고

예전처럼 군을 다스리게 했다

<『삼국지』‘공손도 전’>

 

 

당시 오나라 손권은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요동의 공손연과 그 동쪽의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공손연은 북방 유목민들의 명마를 오나라에 중계하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오나라와 동맹을 원하는 한편

인접한 위나라의 세력이 두려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공손연을 도모하고 요동을 회복하려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멀리 있는 오나라보다는 위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했다.

 

결국 고구려는 오나라 사신을 목 베어 위나라에 보냄으로써

위나라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234년) 손권이 사굉과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어

고구려 왕 고궁高宮{동천대제} 선우單于로 책봉하게 하고자,

진순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하였다

『삼국지』‘오서’

 

10년(236년) 봄 2월, 오나라 왕 손권이 사신 호위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 7월에 그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전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한편 위나라는 적국인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명마를 공급하고 있는 공손연이 눈엣가시였다.

 

서기 234년 제갈공명 사후 촉한의 세력이 약화되자,

위나라는 236년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공손연을 토벌하기로 했다.

 

경초 원년(237년)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였으나,

관구검 등이 싸움에 불리하여 돌아왔다.

 

 

동천대제11년(237년)

 

<류흔>・<선우사>・<오림> 등이, 대방낙랑 등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고,

<공손연>과는 표리와 같이 되었더니,

<공손연>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교만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에 상은 위(魏)에 사신을 보내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계획을 상의하였다.

 

(魏)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삼아서, 선비오환과 함께,

요대에 진을 치고 <공손연>을 응징하게 하였더니,

<공손연>이 {먼저} 나와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관구검>은 다시금 싸우고 싶었으나,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서 요수가 넘실대니,

군사를 잃을까 겂나서 우북평으로 철수하였다.

 

우리 군대가 이 허를 틈타 현도 서쪽의 땅 백 여리를 취하였다. 

<박창화 필사본 고구사초>

 

 

 

이듬해 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을 보내 공손연을 쳤다.

 

이때 고구려도 주부 대가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왔다.

 

사마선왕은 고죽국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를 건넜다.

 

공손연은 요동 양평성에서 항거하다가 참수되었고,

이로서 낙랑‧ 대방‧ 요동‧ 현토 등이 모두 평정되었다.

 

 

동천대제12년(238년)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 함께 연(燕)을 멸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주희>에게 명하여 주부대가가 되어서 5천병을 이끌고

남소로 출병하고 관망하여 성원하라 하였다. 

 

8월에 <공손연>을 멸하였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 방자하여졌다.

 

상이 노하여 <사마의>와 교통을 끊었다.

<박창화 필사본 고구려사초>

 

 

이때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조양이다.

 

 

이제 사서를 통하여 공손씨 정권이 점거하고 있던

낙랑‧대방‧요동‧현토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지명은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사마선왕이 공손연을 정벌하는 과정을

『삼국지』 ‘공손도 전’과 『진서』‘선제기’ 등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필자가 비정한 낙랑‧대방‧요동‧현토등의 지명이 올바른지 알아본다.

 

그리고 통설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의 위치>

 

 

2천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랜 시간을 항해해 왔다.

 

이제 저 멀리 어렴풋이 낙랑 땅이 보인다.

 

낙랑·대방·요동·현토 등등....... 정겨운 지명들이다. 가슴이 뛴다.

 

거친 세파를 방랑하던 나그네가 그리운 고향산천을 목전에 둔 것 마냥......

절로 시흥이 일어난다.

 

 

대륙의 동북단 자방磁方의 땅이여!

사방팔방 산하의 정기가 모여들어

새로운 세상을 열 터전이 되었구나.

 

자애로운 대흥안령산맥 남으로 향하고

험산준령 태행산맥은 북으로 달려가니

천고신악 갈석산이 홀로 우뚝 하여라.

 

히말라야 설원을 녹아내린 생명의 물은

대륙을 가로질러 굽이굽이 흘러가니

황하수 만리여정 갈석산에서 마감한다.

 

호탕한 대양의 기운은 해류로 북상하여

발해 중을 가로질러 황하수를 맞이하니

모든 바닷길은 왕검성으로 통하였구나.

 

반만년 전 단군임검 아사달에 도읍하사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큰 뜻을 펴시더니

고구려의 다물이요. 신라의 복본이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오행의 화’로 신음하니

사람이 노예 되고 돈이 주인 행세를 한다.

아득히 아사달을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여라.

 

 

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 등은 후한과 진晉나라의 평주지역이다.

 

『진서지리지』는 평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평주平州 :

 

생각컨대 우공禹貢의 기주冀州 지역으로, 주周나라가 유주의 경계로 삼았으며,

한漢나라 때에는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으로 불렀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문의(文懿, 공손연)에 이르러

모두 멋대로 요동에 웅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魏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 등 5개 군으로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가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이 망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하였다.

 

(진나라) 함녕 2년(276년)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의 5군국으로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다.

 

26개 현을 다스렸으며, 가구 수는 18,100호이다

 

平州 :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 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지리지』‘평주’

 

 

『진서지리지』에 따르면

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가 설치된 평주지역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周나라의 유주지역이며, 한漢나라의 우북평군이라 하였다.

 

이 내용만으로는 평주지역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 기록에 의하면

공손씨가 요동을 점거하고 있을 당시,

공손씨 요동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 2천리였다.

 

또 고구려의 동쪽에는 옥저가 있었고, 옥저의 동쪽에 동해바다가 있었다.

 

동해바다의 위치는 확정적이다.

 

그러므로 동해바다 서쪽으로 순차적으로 옥저, 고구려, 공손씨 요동이 있었다.

 

옥저의 서쪽에 있던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 2천리이므로,

적어도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 하북성의 난하 또는 칠로도산까지 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 서쪽의 공손씨가 점거한 요동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이다.

 

 

 

<삼국지로 본 실제 고구려 강역>

 

<필자가 비정한 낙랑 대방 창려 요동 현토>

 

강단사학계나 중국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공손씨가 점거한 요동을 오늘날의 요령성 요동으로 비정하면,

그 동쪽에 있는 고구려 강역은 동서1천여 리도 되기 어렵다.

 

고구려 강역 동서 2천여 리는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정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므로

강단사학계나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은 중국 정사들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손씨가 점거한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하북성 요동지역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지도가 바로 『기주협우갈석도』이다.

 

이 지도는 하북성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연나라 5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지도이다.

 

또 갈석산이 위치한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한민족 상고사에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지도이다

 

 

이제『기주협우갈석도』를 토대로

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 등의 위치를 살펴보자.

 

(1) 낙랑‧대방의 위치

 

1) 낙랑군

 

낙랑군의 위치는 현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일대이며,

핵심지역은 조선현朝鮮縣과 수성현遂城縣이다.

 

조선현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의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며,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이 있는 곳으로

지금도 수성현의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다. 

 

필자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까지『산해경』‧『사기』‧『부도지』등

각 종 역사서를 통하여 철저히 교차 검증하였다.

 

 

①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사기색은』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갈석산은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다.

 

『기주협우갈석도』에 표시된 갈석산이다.

 

그러므로 갈석산이 위치한 낙랑군은 하북성 보정시 일대이다.

 

 

② 조선은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있다.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

 

東海之內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산해경』‘해내경’

 

 

위 구절은 조선에 대한 중국 최초의 기록으로

조선의 개략적 위치 및 조선의 정체성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산해경』위 구절과 관련하여 진나라 곽박(郭璞, 276~324)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고 하였다.

  

조선이자 한나라 낙랑군이 위치하였던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는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나타낸다.

 

 

③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가 흐른다.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가 있는데 세 물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張晏曰 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사기집해』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서 조선에 대한 『사기집해』의 주석이다.

 

장안張晏은 3세기 위魏나라 사람이며,

조선은 조朝ㆍ한漢 전쟁이 일어났던 위만조선(BC 195 ~ BC 108) 시대를 말한다.

 

위만조선의 영토내에 물길이 서로 합류하는

습수, 열수, 산수의 세 강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습수, 열수, 산수를 찾으면 위만조선의 핵심강역을 알 수 있다.

  

『우적도禹迹圖』와 『수경주』에 의하면

 

습수는 오늘날의 하북성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이다.

 

또『산해경』‘해내북경’의 기록에 의하면

열수는 오늘날의 하북성을 흐르는 호타하滹沱河이다.

 

따라서 영정하와 호타하가 흐르는 낙랑군은 하북성 보정시 일대이다.

 

 

④ 아사달은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곳이다.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符都 건설할 땅을 고르니,

바로 동북쪽의 자석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중략....

이에 태백산 밝은 땅의 정상에 천부단天符壇을 쌓고, 사방에는 보단堡壇을 세웠다.

보단과 보단 사이에는 각각 세 겹의 물길을 통하니 그 사이가 천리요.....하략

 

壬儉氏歸而擇符都建設之地 卽東北之磁方也....中略....乃築天符壇於太白明地之頭

設堡壇於四方 堡壇之間 各通三條道溝 其間千里也....下略

『부도지』‘제13장’

 

 

위 『부도지』의 구절을 해석하면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오늘날 중국 하북성과 산서성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와 호타하滹沱河로 둘러싸인 곳이다.

 

아울러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백석산(갈석산)이 한민족의 영산 태백산이며

그 곳에 왕검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북성 보정시 일대가 한나라 낙랑군이다.

 

위의 ①②③④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는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일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사기색은』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서에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고 하였다.

 

그리고 북송의 국방서인『무경총요』는

현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에 대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그 유래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

 

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二十里西至長城

『무경총요武經總要』

 

현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며,

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나라 낙랑군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난하 하류나 한반도 평양 등으로 찾아 방황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다음으로 낙랑군 조선현으로 비정하는 현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의 연혁을

『중국백과사전』에서 찾아보자.

 

만성현의 옛 이름은 영락현永樂縣이었다.

 

영락현 : 동위 흥화2년(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고 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제 때 영락현을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나라 개황3년(583년)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예속시켰다.

 

대업3년(607년)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여 영락현을 관할하였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소속시켰다.

 

천보원년(742년)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

 

永乐县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

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

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

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

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

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

『중국백과사전』‘영락현’

 

 

 

만성현은 본래 영락현永樂縣으로 동위와 북제시절 낙랑군과 창려군의 치소였다.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의 연호로,

현의 이름에 왕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왕검성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만성현滿城縣이라는 이름 역시 조선왕 만滿의 도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현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를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으로 비정한다.

  

여기서 영락현이 낙랑군과 창려군의 치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락현은 그 지명이 가지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지명이동 된 곳을

본래의 낙랑군이나 창려군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위의 『중국백과사전』에서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태백일사』‘고구려본기’의 “대덕18년(576년) 병신에

임금이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과 배찰산을 토벌하러 가서,

유림관까지 추격하여 북주를 대파하였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갈석산이 현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백석산)이다.

 

북주가 갈석산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대패함으로써

갈석산 부근의 영락현 지명을 산서성 남단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산서성 남단의 북평 고성 부근을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으로 오해하는 재야사학자들이 많이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영락현은 요나라가 설치했으며, 금주의 치소이다.

 

원나라가 (현을) 없애고 주에 편입했다.

 

즉 오늘날 요령성 금현의 치소이다

(永乐县 : 辽置,为锦州治,元省入州,即今辽宁省锦县治。)라는 내용이 나온다.

 

요나라(916년 ~ 1125년) 때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의 옛 지명인 영락현이

요령성 금주시로 지명이동된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오늘날 주류학계의 통설은

요령성 금주시 일대를 창려의 치소였던 극성으로 보고 있다.

 

이 부분은 뒤에 요동군 평곽의 위치를 비정할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2) 대방군

 

대방군은 낙랑군의 남쪽지역을 분할하여 만든 군이므로 낙랑군의 남쪽에 위치한다.

 

오늘날의 하북성 석가장시를 중심으로 한 호타하滹沱河 유역이다.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 『산해경』‘해내북경’에

대방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산해경』‘해내북경’

 

위 구절에 대하여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땅이다.

 

열列은 또한 물 이름이다. 지금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

(郭璞云 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고 하였다.

 

열양列陽은 열수의 북쪽을 의미한다.

 

연나라가 열양에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으므로

열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다.

 

 

그러면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강은 어떤 강일까?

 

『전국책戰國策』에 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文公, 재위BC362-BC333)에게 한 말이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

...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天府)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전국책』‘연책’

 

연나라의 남쪽에 녹타菉沱와 역수가 흐르며,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 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했다.

 

안문과 갈석은 모두 호타하의 북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열수는 호타하이다.

 

위에서 곽박이 ‘열수가 대방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대방은 오늘날의 호타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2) 창려‧요동‧현토의 위치

 

창려의 중심은 용성‧극성 등이다.

 

용성은 하북성 북경北京 북쪽이며, 극성은 북경 동남쪽의 랑방시廊坊市 부근이다.

 

요동의 중심은 양평‧평곽 등으로 양평은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부근이고,

평곽은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이다.

 

그리고 현토의 중심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부근이다.

 

이제 창려와 요동 등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기 위하여 위의『기주협우갈석도』를 보자.

 

창려군은 진晋나라가 우북평군을 폐지하고 설치한 군이므로

그 위치가 대략 고수(沽水, 오늘날의 영정하) 하류지역에 해당한다.

 

또 요수는 오늘날의 조백신하潮白新河이다.

 

그리고 요동군과 현토군은 고구려와 접경지역이며, 현토군은 요동군의 북쪽이다.

 

고구려와 공손씨 정권의 경계선은 하북성 칠로도산 부근이므로

현토군은 칠로도산 서쪽 장성의 북쪽지역이며,

요동군은 그 남쪽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1) 요동군 평곽의 위치

 

요동군 평곽현은 오늘날의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이다.

 

평곽현은 공손씨 정권의 3대 공손공(재위 220~228)이

위나라로부터 평곽후에 봉해질 정도로 요동군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당서』『신당서』『한원翰苑』등에 의하면

평곽은 고구려의 건안성이 위치한 곳이다.

 

고구려기에 이르기를 평곽성은 지금의 건안성이다.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본래 한나라 평곽현이다

高麗記曰 平郭城 今建安城 在國西 本漢平郭縣也

『한원翰苑』‘고구려’

 

또 『대청일통지』등에 의하면 당나라 의봉儀鳳 1년(676)에

웅진도독부가 이곳 평곽현에 설치된다.

 

웅진도독부는 당나라가 신라의 서진을 막기 위하여 백제유민을

이주시켜 설치한 곳이다.

 

그러므로 평곽현의 위치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현재 통설에서는 한나라 평곽현이자 고구려의 건안성이 위치했던 곳을

현 요령성 개주蓋州로 비정하고 있다.

 

개주의 옛 이름은 개평開平이다.

 

그러나 개평의 위치는 본래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이다.

지금도 하북성 당산시에 개평의 지명이 남아있다.

 

『태백일사』는『삼한비기』라는 고대 문헌을 인용하여

고구려 건안성이 당산唐山 경내에 있었음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갈석산 밑에 백암성이 있으며, 이를 당나라에서는 암주라고 하였다.

건안성은 당산唐山의 경내에 있으며,

그 서남을 개평開平이라 하는데 일명개평蓋平이며

당나라 때에는 개주蓋州라 하였다

 

碣石山而其下則白岩城 亦唐時所謂岩州卽此也

建安城在唐山境內 其西南爲開平 一云蓋平 唐時亦稱蓋州是也

『태백일사』

 

이제 공손씨 정권의 요동군 평곽이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인지,

요령성 개주蓋州 부근인지 사서를 통해 검증해보자.

 

요동군 평곽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록이 있다.

 

뒤에 다시 거론하겠지만 AD 333년 모용선비의 수장인 모용외 사후

그의 형제들 간에 내란이 일어났다.

 

그 때 형인 모용황은 창려의 극성에 주둔하였고,

동생 모용인은 요동의 평곽에 주둔하고 있었다.

 

『진서』와 『자치통감』을 통하여 창려 극성에 있던 모용황이

요동 평곽의 모용인을 치러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모용황이 장차 바다를 건너 모용인을 치려 하자 뭇 신하들이 모두 간하기를

 

"바닷길은 위태롭고 험하니 의당 육로로 쳐야 한다."고 하였다.

 

황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바닷물이 얼지 않았는데 모용인이 모반한 이래로 세 번이나 얼어붙었다.

 

옛날 한 광무제가 얼어붙은 호타수滹沱水를 건너 대업을 이루었으니,

어쩌면 하늘이 내가 이를 건너 승리하도록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계획은 결정되었으니 막는 자가 있으면 벨것이다!"

 

皝將乘海討仁, 羣下咸諫, 以海道危阻, 宜從陸路. 皝曰:「舊海水無凌, 自仁反已來,

凍合者三矣. 昔漢光武因滹沱之冰以濟大業,天其或者欲吾乘此而克之乎! 吾計決矣,

有沮謀者斬!

『진서』‘모용황재기’

 

임오일에 모용황이 동생인 군사장군 모용평 등을 거느리고,

창려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얼음을 밟으며 진격했다.

 

총 3백여 리를 가서 역림구(歷林口, 바다의 포구이다)에 이르러

치중을 버리고 가벼운 병사들로 평곽으로 달려갔다

 

壬午, 皝帥其弟軍師將軍評等自昌黎東, 踐冰而進,凡三百餘里. 至歷林口,

[歷林口, 海浦之口.] 捨輜重, 輕兵趣平郭.

『자치통감』‘권95 함강2년’

 

 

위 『진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통하여,

창려 극성과 요동 평곽의 상대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창려 극성의 동쪽에 요동 평곽이 있으며,

그 사이에 300여리의 바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요동 평곽의 서쪽에 300여리의 바다가 펼쳐져 있어야 한다.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다.

 

대륙의 동북방향에서 이러한 지형을 가진 곳은

요령성의 요동만 부근 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요동군 평곽현이 통설에서 말하는

오늘날의 요령성 개주蓋州 부근이 맞는 것일까?

 

필자가 요동군 평곽현으로 비정하는 현 하북성 당산시 부근은

현재의 지도로 보아서는 서쪽으로 300여리의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해석은 항상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해석해야 한다.

 

창려 극성의 모용황이 요동 평곽의 모용인을 치러가던 때는 서기 336년이다.

 

그 당시는 해수면이 지금 보다 약 6M정도 더 높았다(『해수면 변동 그래프』 참조).

  

이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해보면 『해수면 +6M 지도』처럼 된다.

 

이 지도를 보면 평곽으로 비정되는 당산시唐山市의 서쪽에

정확하게 300여리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또 창려군은 진晋나라가 우북평군을 폐지하고 설치한 군이다.

 

위의 『기주협우갈석도』를 보면 그 위치가

대략 고수(沽水,오늘날의 영정하) 하류지역이므로,

 

당산시唐山市의 서쪽 바다 건너편이 창려군 지역에 해당한다.

 

 

 <해수면 변동 그래프>

 

 

<해수면 +6M지도>

 

 

 

 

<졸본성,요동성, 국내성, 현토성, 안시성, 건안성, 영주(유성), 극성, 창려,노룡>

(지도 클릭하면 확대)

 

 

 

그러므로 요동 평곽을 현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으로 보면

위 『자치통감』에서

 

창려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얼음을 밟으며 진격했다.

 

총 3백여리를 가서 역림구에 이르러 치중을 버리고

가벼운 병사들로 평곽으로 달려갔다는 구절과 정확히 부합된다.

 

반면 통설에서는 창려 극성을 현 요령성 금주시錦州市

평곽은 현 요령성 개주蓋州로 비정하고 있다.

 

금주시에서 개주 사이에 3백여 리의 바다가 있는 것은 일치한다.

 

그러나 금주시에서 개주는 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이므로

위『자치통감』의 구절과 방향이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의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지도 참조).

 

또 위의 낙랑군 항목에서 보았듯이 요령성 금주시에

창려군의 치소와 관련이 있는 영락현永樂縣이 설치된 시기도 요나라 시기였다.

 

그러므로 요령성 금주시를 요나라 보다 훨씬 이전인

고구려 시대 창려로 비정하는 것도 맞지 않다.

 

요동군 평곽을 현 요령성 개주蓋州로 비정하는 통설이

틀렸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또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동군 평곽현은 고구려의 건안성이다.

 

고구려 제28대 보장왕 5년(A‧D 645)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의 일이다.

 

『자치통감』『구당서』등에 따르면 영주 총관 장검이 행군총관이 되어

당태종과 함께 진군하였는데, 그 진군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2월 11일 당태종과 장검 낙양 출발.

2월 24일 당태종과 장검 업鄴 도착.

3월 9일 당태종과 장검 정주定州 도착.

3월 24일 당태종과 장검 정주定州 출발.

3월 ?일 당태종 장검에게 신성로(新城路)로 막리지 요격 명령.

4월 ?일 장검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향함.

4월 5일 장검 건안성 공격.

4월 10일 당태종 유주 출발.

 

전략.... 당태종이 매우 기뻐하며 (장검을) 행군총관으로 삼고,

겸하여 모든 번기졸蕃騎卒을 거느리게 하고 육군전봉으로 삼았다.

 

이때 고구려 척후병을 사로잡았는데 막리지라 칭하는 장수가 요동에 이르렀다 하므로,

장검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신성로로부터 요격토록 했다.

 

막리지는 끝내 감히 나타나지 않았다. 장검이 병사를 진군시켜 요수를 건넜다.

 

건안성으로 달려가니 적도들이 크게 무너졌다. 수천 명을 목베었다

 

前略....太宗甚悅仍拜行軍總管 兼領諸蕃騎卒 為六軍前鋒 時有獲高麗候者 稱莫離支將 至遼東 詔儉率兵 自新城路 邀擊之 莫離支竟不敢出儉因進兵渡遼 趨建安城 賊徒大潰

斬首數千級『구당서』‘장검열전’

 

 

당태종과 장검의 진군일정과 『구당서』‘장검열전’을 종합해보면

장검이 3월 24일 하북성 정주를 출발하여 4월 5일 건안성을 공격하기까지

소요된 기간은 13일이다.

 

군대의 진군속도는 하루에 보통 40~60리 정도이다.

이를 감안하면 13일 동안 진군거리는 대략 520리~780리 정도로

건안성이 하북성 정주에서 대략 800여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북성 정주로부터 2천여 리나 떨어진

요령성 개주시가 건안성이 될 수는 없다.

 

또 당 태종과 장검의 진군일정으로 보아 위 『구당서』‘장검열전’에 나오는 신성로는

현 하북성 보정시 동북 150여리에 있는 신성新城이다.

 

신성로로부터 요동에 나타난 막리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요동이 하북성 보정시의 신성으로부터 요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필자가 비정한 것처럼 요수를 조백신하로 보고

건안성(평곽)을 하북성 당산시로 볼 경우 합리적인 역사해석이 가능하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사유로 현 하북성 당산시 부근이 공손씨의 요동군 평곽현이다.

 

① 『삼국지』를 비롯한 수많은 중국의 정사 기록에

공손씨의 요동군 동쪽에 동서 2천리의 고구려가 있다고 하였다.

 

공손씨의 요동군이 현 하북성에 있어야만 가능하다.

 

② 『기주협우갈석도』를 해석하면 우북평군 지역인 창려는 영정하 하류부근이며,

조백신하가 요수이며 그 동쪽이 요동군이다.

 

③ 『당서』『신당서』『한원翰苑』등에 요동군 평곽현은

고구려의 건안성이 위치한 곳이라 하였으며,

『태백일사』는 건안성이 당산唐山 경내에 있다고 하였다.

 

④ 통설에서 요동군 평곽이라 주장하는 현 요령성 개주는 옛 이름이 개평開平이며,

현 하북성 당산시에도 똑같은 개평開平이라는 이름이 존재한다.

개평이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⑤ 『진서』‘모용황재기’ 와 『자치통감』에서

서기 336년 창려 극성의 모용황이 요동 평곽의 모용인을 치러가는 기록에 의하면,

요동 평곽은 창려 극성의 동쪽에 있으며

평곽과 극성 사이에 300여리의 바다가 있었다.

 

당시의 해수면을 참고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현 하북성 당산시 부근을 평곽으로 볼 경우 사서의 기록과 부합된다.

 

⑥『구당서』‘장검열전’과 『자치통감』에서

AD 645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의 기록에 의하면,

하북성 정주시와 요동 평곽(건안성)까지는 13일 이내의 진군거리였다.

 

현 하북성 당산시를 평곽으로 볼 경우 합리적인 역사 해석이 가능해진다.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들>

 

 <필자가 비정한 하북성 주요지명>

 

2) 요동군 양평의 위치

 

요동군 양평현의 위치는 오늘날의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부근이다.

 

양평은 요동성이 위치한곳이다.

 

AD 645년 고‧당 전쟁 시 당태종의 진군로를 보면

요하를 건너서 제일 먼저 요동성을 만나고,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안시성을 만난다.

 

안시성을 치기 전 당태종과 이세적의 대화를 통하여

안시성의 남쪽에 건안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 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을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삼국사기』‘고구려 본기’

 

 

건안성이 평곽에 위치하였고,

평곽은 오늘날의 하북성 당산시 부근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요동성은 대략 하북성 당산시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또 『기주협우갈석도』를 통하여 요수가 오늘날의 조백신하임도 앞에서 살펴보았다.

 

조백신하를 건너서 하북성 당산시의 서북쪽으로 요동군의 치소가 될 만한 요충지는

오늘날의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뿐이다.

 

또 『한서지리지』등에 따르면

요동군 양평현에는 양수梁水라는 서남류하는 강물이 있었는데,

천진시 계현薊縣 방면으로 려하黎河, 사하沙河 등 서남류 하는 강들이 있다.

 

 

3) 창려군 용성‧극성의 위치

 

창려군 용성은 하북성 북경北京 북쪽이며,

극성은 북경 동남쪽의 랑방시廊坊市 부근이다.

 

앞에서 『진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통하여

창려 극성의 동쪽에 요동 평곽이 있으며,

그 사이에 300여리의 바다가 놓여 있음을 보았다.

 

요동 평곽이 현 하북성 당산시 부근이므로

창려 극성은그 서쪽으로 300여리 떨어진 현 하북성 랑방시廊坊市 부근이다.

 

또 두우의 『통전』에 의하면 창려 극성의 서북쪽 170여리에 유성이 있었으므로

유성은 현 하북성 북경부근이다.

 

유성은 진秦나라와 전‧후한 및 진晉나라 때 요서군에 속하였다.

 

『기주협우갈석도』를 보면 요서군이 북경부근임을 알 수있다.

 

그리고 유성의 북쪽이자 용산의 남쪽에 용성이 있었다.

 

고지도인『당토명승도회』를 보면 북경 북쪽의 군도산이 용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려군 용성은 오늘날의 북경 북쪽지역에 해당하며,

후위와 수나라 및 당나라의 영주營州이다.

 

영주는 지금 유성현을 다스린다. 은나라 고죽국 땅이다.

 

한나라의 청산 도하현은 군성의 동쪽 190리에있다.

 

극성은 ‘전욱의 터’로 군성의 동남 170리에 있다.

 

춘추시대 산융에 속했고, 전국시대 연나라에 속했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아우르자 요서군에 속했다. 전‧후한과 진晉나라도 그러했다.

 

모용황은 유성의 북쪽, 용산의 남쪽이 복과 덕이 있는 땅이라 하여

궁묘를 짓고 유성을 용성으로 고쳤다.

 

마침내 용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궁을 화룡궁으로 불렀다.

 

황은 이때 흑룡과 백룡 각 1마리가 용산에서 싸우므로,

신하들을 거느리고 구경하며 태뢰太牢를 지냈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머리를 꼬며 희롱하다가 뿔을 풀고 가버렸다.

 

황이 크게 기뻐하며 화룡궁이라 불렀다.

 

후연의 모용보와 북연의 풍발이 서로 이어서 수도로 삼았다.

 

모용운이 풍발에 멸하고, 풍홍에 이르러 후위에 멸망했다.

  

후위가 영주를 설치했다. 후주의 무제가 북제를 평정하자, 그 땅은 고보령이 차지했다.

 

수나라 문제가 고보령을 평정하고, 다시 그 땅을 영주로 삼았다.

 

수나라 양제 초에 주를 폐하고 요서군을 두었다. 대당나라가 다시 영주로 삼았다.

 

혹은 유성군이라 했다. 1개현을 다스린다

 

營州今理柳城縣. 殷時爲孤竹國地. 漢徒河縣之靑山, 在郡城東百九十里.

棘城卽顓頊之墟, 在郡城東南一百七十里. 春秋時, 地屬山戎.戰國時屬燕. 秦幷天下,

屬遼西郡. 二漢及晉皆因之. 慕容皝以柳城之北, 龍山之南, 所謂福德之地也,

乃營制宮廟, 改柳城爲龍城, 遂遷都龍城,號新宮曰和龍宮. 皝時有黑龍白龍各一,

鬥於龍山, 皝率屬僚觀之, 祭以太牢, 二龍交首嬉戱, 解角而去. 皝大悅, 號曰和龍宮.

後燕慕容寶 北燕馮跋,相繼都之. 至慕容雲, 爲馮跋所滅;至馮弘,

爲後魏所滅也. 後魏置營卅. 後周武帝平齊, 其地猶爲高寶寧所據. 隋文帝時討平寶寧,

復以其地爲營州;煬帝初州廢, 置遼西郡. 大唐復爲營州, 或爲柳城郡. 領縣一

『통전』‘주군전’

 

 

 

4)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부근이다.

 

현토군은 요동군의 북쪽지역에 해당한다.

 

통설에서는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를 요령성 심양부근으로 보고 있다.

 

심양은 옛 이름이 승덕承德이다.

 

『대청광여도』에 심양이 승덕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북성 지역에도 마찬가지로 승덕承德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공손씨 요동의 북쪽지역으로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현토군의 중심으로 본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에 따르면

현토의 북쪽 천여 리에 부여성이 있다고 하였다.

 

『거란지리지도』를 보면 요나라의 상경 오른쪽에 황룡부가 있는데,

『요사지리지』를 참조하면 이곳이 발해의 부여부로 부여성이 있던 곳이다.

 

요나라 상경은 요령성 파림좌기巴林左旗 부근이며,

부여성은 파림좌기 동쪽의 천산天山 부근이다.

 

이곳은 현토의 중심지로 비정되는 하북성 승덕시에서 북쪽으로 천여 리에 해당한다.

 

 

<거란지리지도(남송시대작)>

 

<부여성과 요나라 5경 위치>

 

 

 

<위나라 사마중달의 공손연 정벌>

 

 

하북성 요동 땅을 점거한 공손연은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동맹관계를 번복하고 있었다.

 

위나라는 적국인 오나라에 명마를 공급하고 있는 공손연이 눈엣가시였으나,

촉한의 중원 진출을 막느라 공손연을 도모할 여력이 없었다.

 

227년부터 시작된 촉한의 4회에 걸친 중원진출 시도는

234년 제갈공명이 전쟁 중에 병사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제갈공명 사후 촉한의 세력이 약화되자,

위나라는 236년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공손연을 토벌하기로 했다.

 

경초 원년(237년)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였으나,

관구검 등이 싸움에 불리하여 돌아왔다.

 

『삼국지』에 의하면 경초 연간에 위나라는 먼저 공손연 세력의 허리를 자르기 위해서

수군을 동원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기습하여 평정하였다.

 

 

경초 연간(A.D 237~239년)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대방의)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韓족의)풍속은 의책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낙랑이나 대방) 군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와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하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韓’

 

 

 

낙랑군과 대방군을 먼저 평정한 후,

위나라 명제는 요동의 공손연을 본격 토벌하기 위해

장안에 있던 사마의를 낙양으로 소환했다.

 

사마의는 제갈공명과의 싸움으로 유명한 사마중달 그 사람이다.

 

 

『진서晉書』‘선제기’와 『삼국지』‘공손도전’을 통하여

사마선왕(사마중달)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때 고구려도 주부 대가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왔다.

 

경초 2년(238)

선제(사마중달)는 우금, 호준 등과 보기 4만을 이끌고 낙양을 출발했다.

 

진군하면서 황하를 건너 고향인 온현에서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

(遂進師, 經孤竹, 越碣石, 次于遼水.).

 

공손연은 보기 수만 명을 보내 요수(遼隧)에 방어막을 치고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선제(사마중달)와 맞섰다.

 

선제가 많은 기치를 펼치며 대군을 가장하여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의 정예병이 다하여 나아왔다.

 

이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했다.

 

적의 진영과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후

요수遼水가에 길게 포위하고는 적을 내버려 두고 양평으로 향했다.

 

모든 군사들이 전진하여 수산首山에 도착하니

공손연이 다시 비연 등을 보내 군사를 맞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다시 이를 공격해 대파하고는 진군하여 양평성 아래에 이르러 성 주위에 참호를 팠다.

 

때마침 장마 비가 30여 일 동안 내려 요수遼水가 크게 불어나

물자를 운반하는 배가 요구遼口에서 곧바로 성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비가 그치자 토산을 쌓고 망루를 세우고 투석기, 연노連弩를 만들어 성 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매우 급박해졌고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항복했다.

 

 

8월 병인일(7일) 밤,

 

길이 수십 장에 이르는 큰 유성이

수산首山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23일), 공손연의 무리가 무너지니

아들인 공손수와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대군으로 급히 들이쳐 양수梁水 가의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베었다.

 

성을 함락하여 상국相國 이하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고

공손연의 수급을 낙양으로 보냈다.

 

요동, 대방, 낙랑, 현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위나라 공손연 정벌 상황도>

 

 

이제 『진서晉書』와 『삼국지』를 통해 살펴본

위나라의 공손연 정벌과정과 『위나라 공손연 정벌 상황도』를 검토해보자.

 

 

① 서기 236년 위나라와 고구려 동맹.

 

② 서기 237년 유주자사 관구검 공손연 정벌 실패.

 

③ 경초 연간(A.D 237~239년) 위나라 수군으로 낙랑군과 대방군 평정.

 

이것이 위 지도의 1차 공격이다.

 

당시 낙랑군 지역은 앞에서『해수면 +6M 지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낙랑군 지역은 서쪽으로는 험준한 갈석산(백석산)이 가로 막고 있어서

수군이 아니면 공략하기 어려운 천연의 요새였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 수군의 왕검성 공격,

서기 44년 후한 광무제의 바다를 통한 낙랑 점령 등이

모두 저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위나라의 수군을 통한 낙랑군과 대방군 평정은 공손씨 세력의 허리를 끊은 것과 같다.

 

이로 인하여 위나라는 공손연의 세력을 절반으로 줄이는 동시에

낙랑군에 위치한 갈석산(백석산)의 자형관紫荊關을 통하여

대규모의 보병이 진군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할 수 있었다.

 

④ 서기 238년 사마중달은 낙양에서 황하를 건너 고향인 온현을 지나고,

진군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

(遂進師, 經孤竹,越碣石, 次于遼水.).

이때 고구려도 주부 대가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왔다.

사마중달의 위나라 군대가 통과한 고죽국은 곧 낙랑군 지역이다.

갈석산은 낙랑군 지역에 있는 오늘날의 백석산(해발 2,096M)으로

자형관紫荊關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지날 수 있는 험산 준령이다.

요수는 오늘날의 조백신하이다.

 

⑤ 사마중달과 공손연의 군대가 요수현遼隧縣에서 대치함.

사마중달의 위나라 군은 남쪽으로 요수를 건널 것처럼 적을 속이고,

몰래 북쪽으로 진군하여 배를 띄워 요수를 건너 양평성을 포위하였다.

포위 기간이 길어지자 양평성 안에서는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을 정도로 혼란하게 되었다.

 

⑥ 238년 8월 23일,

공손연이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양수梁水 가에서 참수되었다. 이로서 요동, 대방, 낙랑, 현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손씨의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현토군 등을

필자가 비정한 하북성 지역으로 볼 경우,

위나라의 공손연 정벌과정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반면 통설의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현토군 등을 놓고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① 공손씨 요동의 동쪽에 동서 2천여 리의 고구려 강역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삼국지』를 비롯한 수많은 중국의 정사 기록과 위배되는 것으로

통설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②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가 『산해경』『사기색은』『무경총요』등

수많은 사서의 기록과 맞지 않다.

 

③ 요동군 평곽의 위치가 『진서』『자치통감』『구당서』등의 기록과 맞지 않다.

 

④ 발해만은 가운데로 북상하는 강력한 해류가 존재한다.

이 해류로 인하여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가는 뱃길은 대단히 위험하다.

당시의 선박기술로 대규모 수군을 산동반도에서 한반도 평양으로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통설에 의하면 요동군 서안평현이 오늘날의 요령시 단동 일대인데,

공손연 집권 시 서안평현은 고구려 강역이었다.

즉 고구려에 의하여 공손씨 세력은 이미 두 토막으로 나있는 상태였으므로,

위나라가 큰 위험을 무릅쓰고 발해만을 건너 낙랑‧대방을 평정할 필요가 없었다.

 

⑤ 또 사마중달의 위나라 진군로를 보면

고죽국을 지나고 갈석산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

통설대로 한반도 평양이 낙랑군이라면 평양에 갈석산이 있어야 한다.

위나라 보병이 한반도 평양으로 날아갈 갈 수도 없거니와

평양에서 진군하면 요수보다 양평성이 먼저 나온다.

 

『진서晉書』와『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의 공손연 정벌과정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결론

 

 

공손씨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는 동서 2천리 강역의 고구려가 존재하였다.

 

이것은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정사들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요령성 요동은 요나라 이후 하북성 요동이 지명이동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시대의 요동을 요령성 요동에서 찾는 것은,

등이 가려운데 허벅지를 긁는 것과 같다. 긁어도 긁어도 시원치 않다.

 

한민족의 상고사가 미로에 빠진 이유이다.

 

하북성 요동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짙은 안개가 사라지고,

찬란했던 한민족의 상고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 태행산맥에 위치한 갈석산(백석산)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

 

아사달의 중심에 위치했던 갈석산(백석산)은 우리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하북성 요동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였던가?

 

그들의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던가?

 

공손씨 정권의 몰락을 뒤로하고

거친 파도가 몰아쳤던 5호16국시대로 뱃머리를 돌린다.

 

사랑과 욕망이 수놓는 거대한 역사의 숨결 속으로.....

 

 

 

 

<졸본성의 위치>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고구려 역사의 첫 단추를 끼우는 중차대한 작업이다.

 

각종 문헌에 나타난 졸본성의 위치를 살펴보고, 통설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로 본 졸본성의 위치

 

 

 

 

<천상열차분야지도 고착본(숙종석각본)>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만 원 권 화폐의 뒷면 배경에는

고구려 초기부터 석각본, 목각본, 필사본, 인본印本등으로

제작· 보급된 전천천문도全天天文圖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그려져 있다.

 

이 전천천문도에는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졸본성의 위치를

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강력한 단서가 들어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태조 석각본은 현재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외에 세종 석각본은 전해지지 않고, 숙종 석각본은 보물837호로 지정되었다.

 

이 천문도에는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1,467개의 별들이

293개의 별자리를 이루어 밝기에 따라 다른 크기로 새겨져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하늘의 뜻으로 세워진 새 왕조의 왕이라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천문도를 갖기를 염원 하였다.

 

고대에서 독자적인 천문도를 가진다는 것은 곧 천자국을 의미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각석 하단부에는 이 전천천문도를 만든 배경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예전에 평양에는 천문도를 그린 각석이 있었는데,

전란으로 강에 빠져버렸으며, 그 탁본마저 매우 희귀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천문도의 인본印本을 바쳤다.

 

태조가 그것을 매우 귀중히 여겨 돌에 다시 새기도록 하였고,

서운관書雲觀에서 그 연대가 오래되어 별자리들의 위치가 조금 바뀌어 생긴 오차를

바로 잡아 새 천문도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새로 『중성기中星記』를 편찬하여 그에 근거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졸본성의 위치>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연구한 결과

중앙부인 북극부분은 조선시대 초기의 하늘을 나타낸 것이고,

그 바깥에 있는 별들은 기원전‧후에 해당하는 고구려시대 초기로 밝혀냈다.

 

관측자의 위치도 중앙부는 한양의 위도인 38도이고,

바깥부분은 39도~40도로 밝혀냈다.

 

박창범 교수의 연구 결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에서 천문도가 지니는 상징성으로 보아

천문을 관측한 지점은고구려 초기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별들을 관측한 시기가 기원전‧후 무렵이고 관측자의 위치가 위도 39도~40도이므로,

고구려의 졸본성(BC 37~AD 3) 또는 국내성(AD 3~209)은

위도 39도~40도에서 찾아야 한다.

 

필자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 시기나 상징성으로 보아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에서 제작된 것에 무게를 둔다.

 

통설에서 주장하는 졸본성이나 국내성은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환인과 집안지역으로 위도가 41도를 넘어선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관측지점과 많이 어긋난다.

 

(2). 『삼국사기』에 나타난 졸본성의 위치

 

1) 바닷가에 위치한다.

 

① 주몽이 비류수 가에 도읍한 후

상류에서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비류국을 찾아갔을 때,

그 나라 임금 송양이

“과인은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하였다.

비류수 상류가 바닷가이면 하류의 졸본도 바닷가이다.

 

 ② 유리왕 28년(AD 9)에 부여 사신이 왔을 때 왕이 부여왕에게 회답하기를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 하였다.

이때는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이다. 국내성도 바닷가였다.

 

2) 졸본성은 요동군에 있다

 

(장수왕 23년) 왕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

 

장수왕, 문자명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등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관작 명에

요동군 개국공이 나온다.

 

고구려가 요동군에서 나라를 열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졸본성은 요동군에 있다.

 

3) 주몽사당이 요동성에 있다.

 

(요동)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城有朱蒙祠 祠有鎖甲矛 妄言前燕世天所降)

 

당나라 태종이 서기 645년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할 때 나오는 내용이다.

 

고구려 역대 왕들은 주몽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졸본으로 갔다.

 

요동성 안에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 하늘이 내려준 갑옷과 창이 모셔진 것으로 볼 때 요동성은 졸본에 위치하였다.

 

위 『삼국사기』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고구려의 졸본성과 국내성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개국한 졸본은 요동군에 있으며, 졸본성이 곧 요동성이다.

 

4). 광개토태왕비문에 졸본성은 성산城山 위에 있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의하면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城山 위에 도읍을 세웠다

(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하였다.

 

중국 고지도인『당토명승도회』‘순천부총도’에 성산城山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의 중국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로 반산盤山 부근이다.

 

 

<당토명승도회에 표시된 성산>

 

5). 연남산 묘지명으로 보는 졸본성의 위치는 바닷가이다

 

군의 휘는 남산으로 요동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이 기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하여 수도를 열었다

(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 ......중략......

넓고도 신령스러운 바다여, 수많은 강물이 흘러드는 곳.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

호胡와 맥貊을 위엄으로 다스리고, 서주와 통하고 연나라를 막았도다

(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寔爲朝鮮威胡制貊通徐拒燕) ......하략”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이었던 연남산의 묘지명에 의하면

주몽이 도읍한 곳은 ‘수많은 강물이 흘러드는 바닷가’ 이다.

위에서 살펴본『삼국사기』내용과 일치한다.

 

 

결론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고구려 초기 졸본성은 위도 39도와 40도 사이에 위치하며,

바닷가에 위치하며, 고구려 시대의 요동군 요동성에 위치하며,

졸본의 서쪽 성산城山 위에 위치하였다.

 

필자는 고구려의 요동성이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부근임을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위의 사료들에 나오는 졸본성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곳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

 

계현 일대는 위도 40도에 해당하며, 바닷가에 위치하고,

고구려 요동성이 위치하였으며, 성산城山이 존재하였다.

 

오늘날 통설에서 고구려 초기 졸본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요령성 환인지역은

위 사료들의 내용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한다.

 

도대체 통설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요령성 환인지역을 졸본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일까?

 

졸본의 위치가 통설처럼 굳어진 배경은 고 이병도 박사가 『삼국사기』를 주해하면서

‘졸본천’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 까닭이다.

 

“호태왕(광개토왕)비에는 비류곡 홀본 서성산沸流谷忽本西城山이라 하고,

졸본의 주에는 위서를 이끌어[지흘승골성]이라 했으니,

졸본은 바로 졸홀· 승흘골의 이칭으로 볼 것이며,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 환인에 비정한다.

그러면 졸본천은 환인을 흐르는 혼강을 별칭한 것이라고 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1 주(15)’

 

통설에서 졸본성을 환인으로 비정한 사유가 고 이병도 박사의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의 환인에 비정한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납득할 만한 어떠한 고고학적, 문헌학적 사료도 없다.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

해방 이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통설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고구려 초기 졸본성의 위치를 바로 잡아야 할 때이다.

 

졸본성의 위치는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일대이다.

 

졸본성의 위치를 알고 나면

신비에 쌓였던 고구려의 초기 역사가 명명백백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국내성으로의 천도,

그리고 고구려 초기 대무신제와 후한 광무제 사이에 벌어졌던 낙랑대전,

대무신제의 북평․어양․상곡․태원 기습사건,

대무신제의 요서10성 축성 등 의문의 사건들이 모두 시원스럽게 풀어진다.

 

앞으로 고구려 기행을 계속하면서 위의 사건들,

특히 낙랑대전은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 흐름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1. 머릿글

 

고구려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존재한다.

 

『한서지리지』의 현도군 속현 중에 이미 ‘고구려현’이 존재하였으며,

『신당서』에서는 『고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90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건국시기는

『삼국사기』등의 공식 기록인 기원전 37년보다 훨씬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심도있게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등의 공식 기록인 기원전 37년 건국하여

기원 후 668년 멸망하기까지 약700여 년 동안 일어났던

고구려의 수도 변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는 졸본성(BC37년 ~ AD3년)에서 건국하여,

국내성(AD3년 ~209년), 환도성(AD209년 ~ 247년), 평양성(AD247 ~ 342년),

환도성(AD342년 ~ 343년), 평양 동황성(AD343년 ~ 427년),

평양성(AD427년 ~ 586년), 장안성(AD586년 ~ 668년) 등으로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수도 변천과정은 고구려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천도시기와 도읍의 위치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2. 본 글

 

고구려의 수도 변천과정의 큰 흐름을 보면

고구려는 추모왕이 요동에서 개국하였으며,

산상왕 시절 발기의 난과 뒤이어 동천왕 시절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을

겪으면서 요동의 동쪽 천리 밖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장수왕 시절 서천하여 다시 요동으로 되돌아 왔으며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는 요동에서 시작하여 요동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추모왕이 나라를 연 졸본성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며,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遼陽市 일대이며,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 일대이다.

 

이제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고구려의 수도 위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러 수도들 중 특히 위에서 언급한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및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는 고구려 수도 변천사의 핵심이며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명확히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세 곳의 위치를 파악함으로써

기록이 부족한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도 유추할 수 있다.

 

참고로 관련사서들의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타베이스를 인용한다.

 

 

<필자가 고증한 고구려 수도의 이동도>

 

 

(1) 추모왕 졸본성

 

1) 도읍시기 : BC 37년 ~ AD 3년까지 40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

 

졸본성은 고구려 시대의 전천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의하면

위도 39도에서 40도 사이에 위치하였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시대의 요동군 요동성에 위치하며,

바닷가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졸본의 서쪽 성산城山 위에 위치하였다.

 

이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만족하는 곳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

 

 

(2) 동천왕 평양성

 

1) 도읍시기 : AD 247 ~ 427년까지 180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遼陽市 일대

 

 

<사료 1>『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밖에 있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일대이다.

 

그러므로 하북성 요동의 동쪽 끝인 칠로도산七老圖山으로부터 동쪽 천리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부근이 된다

(아래의 지도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과 주변 형세도’ 참조).

 

<사료 2>『후한서』 ‘군국지’에 유주 각 군의 위치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곡군 : 낙양 동북쪽 3,200리

요서군 : 낙양 동북쪽 3,300리

요동군 : 낙양 동북쪽 3,600리

현도군 : 낙양 동북쪽 4,000리

낙랑군 : 낙양 동북쪽 5,000리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은 상곡군으로부터 요서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의

상대적 위치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상곡군은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이다.

 

상곡군의 위치는 연나라 5군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므로

재야사학이든 통설이든 그 위치는 일치한다.

 

한나라 시절 상곡군의 치소는 저양현沮陽縣으로

대략 현 북경 서북쪽의 거용관 부근으로 비정된다.

 

위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상곡군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는 400리 이다.

 

그러므로 요동군 양평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일대 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1,000여리 물리치고

연5군인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상곡군에서 요동군이 1,000여리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또 중국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는

갈석산을 중심으로 연5군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고구려 시대의 요동군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통설에서 요동군 양평으로 비정하고 있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은

상곡군에서 2,000여리나 떨어져 있다.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위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요동군 치소인 양평에서 낙랑군치소까지의 거리는 1,400리이다.

 

요동군 치소인 양평에서 요동군의 끝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 거리가

400여리 이므로 결국 낙랑군의 치소는 요동의 동쪽 천리밖에 있었다.

 

<사료 1>의 『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는 기록과

『후한서』 군국지의 낙랑군의 거리 기록이 일치한다.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과 주변 형세도>

 

<사료 3>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에 동경요양부는 원래 조선 땅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다.

그래서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

(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 周武王 釋 箕子囚,去之朝鮮, 因以封之.)

 

요나라 동경요양부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이다.

 

『요사지리지』는 요령성 요양시 일대를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다음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천왕 평양성 기록과 일맥 상통한다.

 

동천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료 4>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21년(247) 봄2월에 왕은 환도성이 전란으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왕험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사료 종합>

  

『삼국지』『후한서』『양서』 등에 의하면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었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칠로도산七老圖山이 하북성 요동의 동쪽 경계이다.

 

그러므로 동천왕의 평양성은 칠로도산으로부터 천리 밖에 있는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가 된다.

 

또 『후한서』 군국지의 낙양으로부터 유주 각 군의 거리 기록에 따르면,

상곡군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의 거리가 400리이다.

 

그러므로 후한 시대의 요동군 양평이

대략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일대가 된다.

 

또 요동군 양평에서 낙랑군 치소까지 거리가 1,400리인데

요동군 양평에서 요동군의 끝인 칠로도산까지 거리가 400여리이므로

결국 낙랑군 치소는 칠로도산에서 천여 리 동쪽에 위치하게 된다

(위의 지도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과 주변 형세도’ 참조).

 

이는 『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서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동천왕의 평양성은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로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되었다.

 

마찬가지로『후한서』 군국지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인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즉 『후한서』는 ‘동이열전 고구려’에서는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하였고,

동시에 ‘군국지’에서는 낙랑군이 요동의 동쪽 천리밖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즉 『후한서』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동천왕의 평양성시절,

한나라 낙랑군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평주에 속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수도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영토가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장수왕의 평양성에서도 나타난다.

 

즉 한족의 사서들은 고구려의 평양성들을

한결같이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를 파악한 뒤에 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3) 장수왕 평양성

 

1) 도읍시기 : AD 427 ~ 668년까지 242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 일대

 

 

<사료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15년(427)에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十五年 移都平壤)』하였다.

  

<사료 2> 『송서』는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로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이 고구려국은 현재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을 지배하고 있다

(東夷高句驪國,今治漢之遼東郡)』 『송서』 ‘고구려’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 이라 한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송서』 ‘백제’

 

위 『송서』 ‘고구려’ 기록에서 장수왕 시절의 수도 평양성이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서』 ‘백제’ 기록은 고구려가 요동 동쪽 1천여 리 밖의 동천왕 평양성에서

요동군에 있는 장수왕 평양성으로 천도한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료 3>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출생지가 요동군 평양성으로 나온다.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 ...중략...

넓고도 신령스러운 바다여! 수많은 강물이 모이는 곳.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 寔爲朝鮮)』

『연남산묘지명』

 

『공의 성은 천이며 휘는 남생이고 자는 원덕으로서, 요동군 평양성사람이다

(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 『연남생묘지명』

 

위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연남산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조선을 계승하였으며,

평양을 조선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 『연남생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료 4> 『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의하면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 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다

(高麗之地本孤竹國也周代以之封于箕子)』 『수서』 ‘배구전’

 

『『당서』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지금의 해주).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한나라가 3군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治三郡)』

『삼국유사』‘고조선’

 

『18년(607) 처음에 수양제가 계민啓民의 장막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啓民의 처소에 있었다.

계민啓民이 감히 숨기지 못하여 그와 더불어 황제를 만나 보았다.

 

황문시랑 배구裴矩가 황제를 설득하며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 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十八年初 焬帝之幸 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隠與之見帝 黄門侍郎裴矩

說帝曰髙勾麗本 箕子所封之地 漢晉皆爲郡縣 今乃不臣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但』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사료 5>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대청광여도』『청국지지』연혁도 등에

고죽국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표기되어 있다

(아래의 지도 ‘『당토명승도회』에 나타난 고죽국과 고조선성’ 참조)

 

 

<사료 종합>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인『송서』는

장수왕의 평양성에 대하여 한나라의 요동군 지역이며,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었던 동천왕의 평양성에서 서쪽으로 천리 이상 이동하여

한나라 요동군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내용을 잘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의하면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 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고지도인『당토명승도회』『대청광여도』『청국지지』연혁도 등에

고죽국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수왕의 평양성은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였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동천왕의 평양성과 장수왕의 평양성은

거리가 동서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후한서』 군국지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고,

위에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당서』 ‘배구전’은

장수왕의 평양성을 기자를 봉한 땅이자,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한족들의 사서는 고구려의 평양성들을 모두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

 

 

<당토명승도해에 나타난 고죽국과 고조선성>

 

(4) 고구려 시대 4곳의 평양성

 

고구려 시대에 4곳의 평양성이 있었다.

 

첫째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일대의 고조선 평양성,

둘째로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의 동천왕 평양성,

셋째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의 장수왕 평양성,

넷째로 현 한반도 북한지역의 평양성이다.

 

앞에서 『연남산묘지명』에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東明之裔 寔爲朝鮮)”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조선을 계승한다는 뚜렷한 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여러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마다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누르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곳 평양성이 고조선의 왕검성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족의 역사서들은 이 4곳의 평양성마다

한나라 낙랑군 지역이라는 기록을 남겨 고구려 역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사서들에 나오는 한나라 낙랑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알아야 고구려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고구려시대 4곳의 평양위치도>

 

① 고조선 평양성

 

고조선 평양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이다.

이곳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었으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지였으며,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다.

 

고구려가 이곳을 평양성으로 삼았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정시 만성현의 연혁을『중국백과사전』에서 살펴보면

만성현滿城縣의 옛 이름이 영락현永樂縣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락현 : 동위 흥화2년(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고 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제 때 영락현을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나라 개황3년(583년)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예속시켰다.

대업3년(607년)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여 영락현을 관할하였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소속시켰다.

천보원년(742년)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

 

永乐县: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

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

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

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

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

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

『중국백과사전』‘영락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위 흥화2년(540년)에 영락현을 설치하고

낙랑군의 치소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현의 이름을 영락현으로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의 시호이다.

 

현의 이름에 광개토태왕의 시호를 사용한 것은

광개토태왕이 요동과 낙랑 등을 모두 회복하고

이곳을 평양성으로 삼아 거주한 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간접적인증거라 하겠다.

 

마찬가지로 천보원년(742년)에 영락현을 만성현滿城縣으로 개명한 것도

이곳이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② 동천왕 평양성

 

동천왕 평양성은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이다.

 

산상왕과 동천왕 시절은 고구려에게 큰 시련의 시기였다.

 

고구려는 산상왕 시대에 ‘발기의 난’으로 나라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고구려의 서부지역이었던 하북성 요동이 모두 공손씨에게 넘어가고

고구려는 멀리 동쪽으로 천도하여 새로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뒤를 이은 동천왕 시절에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을 당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동천왕은 분열된 고구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과

평양성 천도를 합리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의 『삼국사기』 기록과 같이 동천왕의 평양성이

본래 고조선의 왕검성이었다는 설을 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1년(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그곳으로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그가 왕이 되어 왕검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했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險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조선의 왕검성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지이고,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스스로 동천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이라고 하였으므로,

한족의 역사가들은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이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고구려 역사의 대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본래 한나라 낙랑군이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로 동쪽으로 2천여 리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③ 장수왕 평양성

 

장수왕 평양성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이다.

 

장수왕은 선대의 광개토태왕이

산상왕 시절 ‘발기의 난’으로 잃어버렸던 요동을 다시 회복하였으므로,

고구려의 본래 고향인 요동군으로 되돌아가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다.

 

또한 요동군은 해양세력의 중심지로 대륙을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천도를 하기위해서는

180년 동안 동천왕 평양성에서 세력을 형성하였을 기득권층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하여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야 말로

진정한 고조선의 왕검성지역이라는 설을 유포할 필요가 있었다.

 

위 『연남산묘지명』의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

(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

는 기록처럼 당시의 고구려인들은 장수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조선성(왕검성)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위의『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서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 땅’으로 기록한 것도

장수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동천왕의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역사가들은

장수왕의 평양성도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본래 한나라 낙랑군이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④ 한반도 평양성

  

현 북한 평양지역은 상고시대 마한 또는 마조선의 수도였다.

 

그리고 대무신제 27년(54년)에 고구려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최씨 낙랑국의 수도였다.

 

『주서』『북사』『수서』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삼경三京을 두었는데,

평양성과 국내성과 한성漢城을 말한다.

 

현 북한 평양에는 ‘한성漢城’이라 새겨진 성벽각자가 발견되어,

평양지역은 고구려의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인 한성漢城으로 비정된다.

 

현 북한 평양지역이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주류세력들이 한반도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교가 성행하면서 기자로부터 정통성을 찾는 과정에서

북한 평양지역이 자연스럽게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북한 평양지역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자

한나라 낙랑군으로 굳어진 배경에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일제는 한반도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반도는 옛날부터 한사군의 땅으로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유적‧유물들을 조작하여 식민지 역사관을 만들었고,

오늘날 주류사학계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주류사학계 스스로가 중국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5) 기타 고구려 수도

 

추모왕의 졸본성, 동천왕의 평양성, 장수왕의 평양성은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나머지 고구려 수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① 유리명왕 제1국내성

 

유리명왕의 제1국내성은 207년간(AD3년 ~ 209년) 도읍하였으며,

도읍위치는 난하 중류의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 일대로 비정한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가. 졸본성에서 제사지낼 돼지가 달아나서 국내 위나암에서 찾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내성은 졸본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는 점.

 

나. 국내 위나암은 산수가 깊고 험준하며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험한 산과 큰 강물이 흐르는 지형이라는 점.

 

다. 유리명왕 28년(AD9)에 부여 사신이 왔을 때 왕이 부여왕에게 회답하기를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 하였다.

국내성은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라.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세 아들인 남생, 남건, 남산이 대립하였을 때,

남생이 웅거한 성이 국내성이었다.

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당나라 황제가 남생에게

特進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남생을 현도군공으로 봉한 것은 남생이 웅거한 국내성이 현도군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 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사료들을 종합하면

국내성은 현 중국 하북성의 난하 중류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마침 그곳에 해발 1,977M의 도산都山이라는 산이 있다.

도읍이 있었던 산이라는 의미이다.

이 도산都山 일대를 고구려의 제1국내성(제1환도성)으로 비정한다.

 

② 산상왕 환도성(제2국내성)

 

산상왕의 환도성(제2국내성)은 38년간(AD209년 ~ 247년)도읍하였으며,

도읍위치는 현 중국 요령성 조양시 일대로 비정한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괄지지』를 인용하여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인데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하였고,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지』 ‘위지동이전 동옥저’ 기록에

불내성不耐城은 단단대령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단단대령은 유리명왕의 제1국내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사이에 존재해야 하므로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을 나누는 칠로도산七老圖山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내성不耐城인 국내성과 인접한 환도성은 칠로도산七老圖山 동쪽으로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조양시 일대로 비정된다.

 

③ 평원왕 장안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평양성이 곧 장안성이라고 하였다.

 

장수왕의 평양성과 평원왕의 장안성은 거의 비슷한 위치로 파악되므로

별도의 고증은 생략한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 리이다.

국도는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 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 일컫는다

 

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南臨浿水.

復有國內城·漢城, 並其都會之所, 其國中呼爲 「三京」

『수서』 ‘고구려’

 

 

3. 마무리 글

 

지금까지 고구려의 수도변천 과정을 살펴보았다.

 

앞에서도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 수도 변천사의 핵심은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및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를 올바로 파악하는 일이다.

 

이들 지역은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명확하게 그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추모왕의 졸본성은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위치하였다.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사이의 거리가

동서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장수왕의 평양성도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동천왕의 평양성으로부터 서쪽으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천도는 동서로 1천여 리 이상의 거리를 이동하였다.

 

그런데 통설의 고구려 수도 변천과정은 어떤가?

 

졸본성(요령성 환인지역)에서 국내성(요령성 집안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후

산상왕의 환도성과 동천왕의 평양성은 계속 국내성 지역을 맴돌고 있다.

 

여러 사서에서는 분명히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천왕의 평양성이

계속 국내성(요령성 집안지역) 부근을 맴돌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통설에서 고구려 시대의 요동의 위치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삼국지』등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상실했을 때의 강역이 분명 사방 2천리라 하였다.

 

그런데 통설은 요동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으로 비정함으로써

요동 동쪽의 고구려 강역이 사방 1천리도 될 수 없게 되었다.

 

고구려의 강역이 1/4 이하로 축소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동천왕의 평양성이 국내성지역에서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동할 공간이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송서』와 『연남생묘지명』을 참조하면,

장수왕의 평양성은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있었던 동천왕의 평양성에서

서쪽으로 1천여 리 이상 이동하여 요동군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통설은 어떤가?

 

장수왕의 평양성이 뜬금없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고 한다.

 

한반도 평양은 통설을 따르더라도 한나라 낙랑군지역이다.

 

『연남생묘지명』에는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성 위치와 관련하여

『연남생묘지명』보다 더 확실한 유적은 없다.

 

그러므로 통설에서 장수왕 평양성을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한 것은 잘못이다.

 

아울러 통설에서 주장하는 모든 고구려 수도들은

사서와 유적들을 토대로 그 위치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고구려는 애초부터 통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요령성 환인지역 같은 첩첩산중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다.

 

발해만을 배경으로 하는 해양세력의 중심지인 하북성 요동에서 건국하여

일찌감치 해양세력인 동이족의 대표주자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북방 유목세력의 대표주자인 흉노족과

남방 농경세력의 대표주자인 한漢족과 더불어 대륙의 패권을 다툰 아시아의 강자였다.

 

이제 북방 유목세력과 남방 농경세력과 동방 해양세력 등

아시아 대륙의 3대 세력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역사 속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낙랑은 해양세력의 중심지였다>

 

1. 아시아 대륙의 3대 세력권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북방의 유목세력과 남방의 농경세력 그리고 동방의 해양세력 등

3대 세력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펼치는 장엄한 드라마였다.

 

이들 3대 세력들은 서로 이질적인 환경에 적응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문화적 충돌이 일어났으며,

그 문화적 충돌은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므로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3대 세력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바탕위에서 해양세력의 중심이었던 고구려의 역사도 비로소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방 유목세력의 대표주자는 흉노족이다.

 

만리장성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경계로 삼고,

서쪽으로는 멀리 유럽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지대를 주 무대로 활동했다.

 

오늘날의 몽고와 내몽골자치주, 청해성, 신장지구,

티벳 자치구에 이르는 광할한 지역이다.

 

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고,

물과 풀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수렵과 목축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로 인하여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들의 삶은 기후와 자연환경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하늘을 중시하는 천존사상天尊思想이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들은 때로는 구름처럼 모이고,

때로는 새떼처럼 흩어지며 드넓은 초원지대를 지배하였다.

 

 

남방 농경세력의 대표주자는 한漢족이다.

 

만리장성 이남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지역이 주 활동무대였다.

 

오늘날의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 호북성, 사천성 등의 지역이다.

 

이들은 정착생활을 함으로써 안정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들의 삶은 땅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었으므로

땅을 중시하는 지존사상地尊思想이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며,

주변은 오랑캐라는 배타적인 중화제일주의 문화를 잉태하였다.

 

 

동방 해양세력의 대표주자는 한민족이다.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지역 및 일본열도 등을 주 무대로 한 동이족의 영역이다.

 

이들은 정착생활을 함과 동시에 드넓은 바다를 무대로 어로와 무역활동을 영위하였다.

 

그리하여 유목세력과 농경세력의 중간적인,

안정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주 무대로 광범위한 무역활동을 영위함으로써

사람을 중시하는 인존사상人尊思想이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홍익인간‧이화세계의 대 이상을 구현하였다.

 

 

<상고시대 아시아 대륙의 3대 세력권 지도>

 

 

2. 아시아 3대 세력의 중심지 고찰

 

이제 이들 3대 세력의 중심지를 살펴보자.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는 이들 3대 세력의 중심지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북방 유목세력인 흉노족과 남방 농경세력인 한漢족의 중심지는

중국의 각종 역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남방 농경세력의 대표주자인 한漢족의 중심지는 낙양과 장안이다.

 

낙양과 장안은 험준한 진령산맥이 배후를 보호하고

황하와 위하渭河 등이 앞을 보호하며,

수로를 통하여 각지의 물산들이 드나들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한漢족의 중심지인 낙양과 장안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므로

더 이상 언급을 요하지 않는다.

 

 

북방 유목세력은 물과 풀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생활하였으므로

특별히 도시를 건설하지는 않았다.

 

흉노족은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하였는데 천자와 같은 뜻이다.

 

선우가 거주하는 곳을 선우정單于庭이라 하였으며, 이곳이 흉노의 중심지이다.

 

내몽골자치주의 음산산맥 부근이 흉노의 선우정이 있던 곳이다.

 

흉노는 한漢족들과 전쟁에서 밀리면 고비사막을 넘어

현재 몽고의 수도인 울란바트 부근으로 선우정을 옮겼다.

 

그러므로 흉노의 대표적인 중심지는

내몽골자치주에 위치한 음산산맥과 현 몽고의 수도인 울란바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방 해양세력의 중심지인 낙랑은 그 위치가 오리무중이다.

 

낙랑의 위치가 어디이며

왜 그곳이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해양세력의 중심지인 낙랑의 위치는 한민족의 상고사 뿐 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

 

 

(1) 해양세력의 중심지 낙랑

 

동방 해양세력인 동이족의 중심지는 낙랑이었다.

 

낙랑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다.

 

만성현滿城縣은 이름 그대로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를 가리키며,

이곳이 고조선의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여기서는 이곳이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발해만은 특수한 해류의 흐름이 존재한다(아래의 『발해만의 해류 지도』 참조).

 

태평양 한가운데서 발생한 쿠로시오 해류의 한 갈래가

황해와 발해의 가운데를 타고 북상하면서 낙랑지역으로 흐른 후

발해만의 양쪽 해변을 따라 남하하는 특수한 흐름을 갖는다.

 

그러므로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 어느 곳이든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서면

북상하는 해류를 타고 자동적으로 낙랑지역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낙랑지역에 도달한배는 양쪽 해변을 따라 남하하는 해류를 타고

자동적으로 원하는 지역으로 갈 수 있다.

 

이처럼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가 낙랑지역과 한반도 및

일본과 중국 동해안 곳곳을 연결하는 바다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발해만의 해류 지도』에서 붉은색 화살표가 북상하는 해류를 나타내며,

푸른색 화살표는 남하하는 해류를 나타낸다.

 

발해만 중심을 북상하는 강력한 해류가 낙랑지역으로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에서의 항해가 해류와 바람에 의존하였던 고대에서

이러한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는

낙랑지역이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상고시대 아시아대륙의 모든 바닷길은 낙랑으로 통하였다.

 

 

<발해만의 해류지도> 

 

 

둘째,

낙랑지역은 백석산(갈석산)과 발해 그리고 세 겹의 강물이 보호하는 천연의 요새였다.

 

낙랑지역의 서쪽에는 태행산맥의 끝자락인 험준한 백석산(갈석산)이

낙랑지역을 보호하고 있으며, 동쪽에는 드넓은 발해가 펼쳐져 있고,

남북으로는 세 겹의 강물이 낙랑지역을 보호하고 있었다.

 

낙랑의 바깥지역을 영정하와 호타하가 감싸고,

그 안쪽으로 거마하와 사하, 마지막으로 역수와 당하가

낙랑의 중심지인 왕검성(만성현 일대)을 감싸고 흐르는 철옹성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낙랑지역은 발해를 건너

수군으로만 공략이 가능한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전한 한무제의 수군을 이용한 왕검성 공격(BC 108년),

고구려의 낙랑회복(AD 47년), 후한 광무제의 바다를 통한 낙랑점령(AD 54년),

삼국시절 위 명제의 바다를 통한 낙랑점령(AD 237년),

고구려 미천왕의 낙랑회복(AD 313년) 등이

모두 발해를 통한 수군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셋째

낙랑지역은 북방 유목세력의 중심지인 음산산맥과도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북방 유목세력과 동방 해양세력의 경계에는 대흥안령산맥의 끝자락인

험준한 대마군산大馬群山이 가로막고 있으며,

중국 북경 서북쪽에 위치한 거용관이라는 유명한 관문을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상곡에 위치한 거용관을 통하여

유목세력과 해양세력 간 교역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이를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북방 유목세력인 흉노와 남방 농경세력인 한漢족 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상곡에서 거용관을 거쳐 어양(오늘날의 북경지역)에 이르는 지역은

흉노족이 식량과 군수물자 등을 확보할 수 있는 생명선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마찬가지로 한漢족들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흉노의 생명선과 같은 이 지역을 차단하기 위하여

이중으로 장성을 쌓는 등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낙랑(보정시 부근)에서 어양(북경시 부근), 양평(천진시 계현부근) 등에

이르는 지역은 아시아 상고사의 최대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넷째,

역사적으로 황하하류는 그 흐름이 여러 번 바뀌는데,

상고시대에는 황하가 낙랑 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갔다.

 

황하는 농경세력의 중심지인 낙양과 장안으로

각종 물자를 배로 실어 나르는 생명선과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낙랑에서 황하의 뱃길을 통제하여

낙양과 장안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래 지도는 『중국역사지도집』 ‘전국시대 북연’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고대에는 황하가 낙랑(현 보정시, 붉은색 동그라미 표시)쪽으로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붉은색 동그라미 속의 무수武遂라 표시된 곳이

낙랑군 수성현으로 갈석산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까지도 수성현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북송시대의 국방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이곳 수성현이 진秦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라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역사지도집 전국시대 북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낙랑지역은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 및 방어에 유리한 천연의 요새라는 점,

그리고 북방유목세력 및 남방 농경세력의 중심지와

원활하게 교통할 수 있는 지리적인 위치 등으로 인하여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2) 해양세력의 기타 중심지

 

해양세력의 중심지도 시대를 따라 변천하였다.

 

특히 황하 하류 흐름의 변화, 유목세력과 농경세력 및 해양세력 간의 역학관계,

시대를 따라 변하는 해수면의 높이,

발해만 지역의 지진 등 잦은 천재지변 등이 그 원인을 제공하였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인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은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이 북쪽과 서쪽을 막아주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발해만을 굽어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역이다.

 

대도시가 건설될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특히 해양세력의 중심지를 결정짓는 강력한 요소는 해류의 흐름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는

하북성 전 지역이 해양세력의중심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양세력의 중심지는 시대를 따라 낙랑(현 하북성 보정시),

요동성(현 하북성 계현), 평양성(현 하북성 창려현) 등으로 변천하였다.

 

 

3. 아시아대륙 3대 세력의 대립구조

 

아시아대륙의 상고사를 수놓은 결정적인 요인은

북방 유목세력과 남방 농경세력의 끊임없는 갈등구조였다.

 

그 갈등의 최전선이 만리장성이다.

 

북방유목세력을 대표하는 흉노와 남방 농경세력을 대표하는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는

만리장성을 경계선으로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아시아대륙의 상고사를 피로 물들였다.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흉노족과 한漢족의 전쟁은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막강한 기동력을 갖춘 흉노의 공격,

성곽 및 풍부한 물자를 동원한 한漢족의 수비가 핵심이다.

 

때로는 한漢족들이 흉노를 선제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이 최선의 수비이다’는 관점의 공격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흉노는 왜 끊임없이 한漢족을 공격하였을까?

 

그리고 그에 맞선 한漢족의 최선의 방어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푸는 열쇠이다.

 

그 해답은 만리장성이 가지고 있다.

 

만리장성은 농경세력인 한漢족의 팽창주의 정책의 산물이다.

 

만리장성 이남의 섬서성과 산서성 지역은 본래 흉노의 땅이었다.

 

기원전 300년 경 한漢족의 팽창으로 흉노는

만리장성 남쪽의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를 상실하고 만리장성 북쪽으로 밀려났다.

 

그리하여 사막과 초원과 추위 등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열악한 환경은 흉노족을 강인하게 단련시켰다.

 

그리하여 강력해진 흉노는 끊임없이 만리장성을 넘어 한漢족을 공격하였다.

 

흉노에게 있어 만리장성이란 한漢족들이 자신들의 땅에 들어와서

‘이곳은 내 땅이다’고 인위적인 담장을 두른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을 지키려는 한漢족과

만리장성을 무력화 시키려는 흉노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흉노족과 한漢족은 서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동방 해양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했다.

 

막상막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흉노와 한漢족의 대결에서

해양세력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었다.

 

그리하여 만리장성을 경계로 유목세력인 흉노와 농경세력인 한漢족과

해양세력인 한민족의 생사를 건 장엄한 드라마가 펼쳐지게 된다.

 

 

 

<요동지역의 변천에 대한 고찰>

 

 

1. 머릿글

 

이 글의 목적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살피는데 있다.

 

요동은 한민족의 상고사에 자주 등장하는 친근한 명칭이다.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산해경』을 주석한 4세기 초의 곽박郭璞은

“조선은 요동에 있던 낙랑과 동의어”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요동에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편에서 고구려는 바로 졸본부여이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장수왕, 문자명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등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관작명에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이 나온다.

 

고구려가 요동군에서 나라를 열었다는 뜻이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의 묘지명에 남생이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라고 나온다.

 

고구려 최후의 수도인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위의 기록들을 통하여 요동지역은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 위치하였으며,

고구려의 흥망이 아로 새겨진 역사의 땅임을 알 수 있다.

 

요동 땅은 한민족 상고사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알아야 한민족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요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명나라 정통正統8년(1443년)에 편찬된 『요동지遼東志』에 의하면

 

“요遼는 멀다는 뜻이다. 그것이 멀리 구주의 동쪽에 있으므로 요동이라 이름하는데,

또한 요서를 아울러서 말한다(遼遠也 以其遠在九州之東, 故名遼東, 又兼遼西而言)”

하였다.

 

위 『요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요동은 중국(九州)의 먼 동쪽지방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국경은 많은 변동이 있었고,

이에 따라 중국의 먼 동쪽인 요동의 위치도 변동이 있었을 수밖에 없다.

 

 

2. 본 글

 

필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요동지역은 세 번의 커다란 변천과정이 있었다.

 

하북성 요동과 산서성 요동 그리고 요령성 요동이 그것이다.

 

전국시대인 연ㆍ진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그리고 전한 초(BC 202년경)에 요동지역은 현 중국 산서성 지역으로 이동하며,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에 이르러

요동지역은 다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 후 요나라 시대(AD 916~1125년)에 요동지역은 현 중국 요령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알고 역사서를 읽어야만

비로소 한민족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북성 요동 산서성 요동 요령성 요동>

 

(1) 하북성 요동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 요동으로 불리던 시기는

전국시대인 연ㆍ진 시기와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에서

요나라 시대(AD 916~1125년) 이전까지이다.

 

하북성 요동지역은 본래의 요동지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민족의 상고사와 관련이 있는 요동은 대부분 이 하북성 요동지역을 가리킨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도 이 하북성 요동지역에 위치하였으며,

고구려의 건국과 멸망도 모두 이 하북성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자.

 

1) 『전국책』ㆍ『사기』ㆍ『후한서』에 기록된 하북성 요동

 

『전국책』에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BC361~BC333)에게 연나라 강역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 여리 이다...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전국책』‘연책燕策’

 

소진의 말에 의하면 연나라 문공(재위 BC361~ BC333) 시기의 연나라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소진이 이 말을 한 때로부터 30여년 후인 연나라 소왕(재위 BC311 ~ BC279) 시기에

연나라장수 진개가 동쪽을 침략하고 연5군을 설치하게 된다.

 

『사기』 ‘흉노열전’에 관련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이 진개秦開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이다.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胡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사기』‘흉노열전’

 

위의 『전국책』 ‘연책’과 『사기』‘흉노열전’ 기록을 종합하면

전국시대 요동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전국책』 ‘연책’에서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고,

『사기』‘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동쪽으로 동호를 천여 리 물리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연장성을 쌓고 연5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진개의 침략 전에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었으므로

결국 진개가 동쪽으로 침략한 동호 지역은 조선과 요동지역이다.

 

진개가 조선과 요동지역 천여 리를 공략하고

그곳에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등 연5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전국시대 요동의 위치는 상곡군에서 동쪽으로 천여 리 이내에 위치한다.

 

상곡군은 연5군이 시작되는 기준점으로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임은 이론이 없다.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에서 동쪽으로 천여 리는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다.

 

이 안에 요동군 등 연5군이 설치되었으므로

이 시기의 요동과 요동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또 위의 『사기』‘흉노열전’ 기록에 의하면 연장성은 조양에서 양평까지 이어졌다.

 

연장성의 서단인 조양은 『사기집해』에서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인 위소(? ~ 273년)의 말을 인용하여

“(조양은) 지명으로 상곡에 있었다(地名,在上谷)” 하였다.

 

『사기정의』에서는 “상곡군은 지금의 규주이다(上谷郡今嬀州)” 하였다.

 

또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은『사기색은』에서 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양평은) 지금 요동군의 치소이다(今遼東所理也)” 하였다.

 

연장성의 서단인 조양의 위치는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로 이론이 없다.

 

그런데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의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연장성의 동단은 한민족 상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동군의 치소였기 때문에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의 위치에 관하여 오나라 사람인 위소(? ~ 273년)가

“(양평은) 지금 요동군의 치소이다(今遼東所理也)”라고 한 대목이 중요하다.

 

삼국시대 요동군의 위치는 후한 말의 요동군 위치와 같다.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낙양에서 상곡군 치소까지의 거리가 3200리 이고,

요동군 치소까지의 거리는 3600리로 나온다.

 

그러므로 상곡군 치소인 저양현沮陽縣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는

400여 리의 거리이다.

 

저양현沮陽縣의 위치가 현 북경 서북쪽 거용관 부근이므로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400여 리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

 

그러므로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동 및 요동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다.

 

통설에서는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요양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곳은 상곡군에서 동쪽으로 2,000여리나 떨어진 곳이다.

 

『사기』‘흉노열전’이나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 기록과 전혀 맞지 않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책』ㆍ『사기』ㆍ『후한서』등의 기록을 참조하면

전국시대 및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까지

요동 및 요동군의 위치는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중국 남송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고지도 『기주협우갈석도』에

하북성 요동 및 한민족 상고사의 핵심인 갈석산의 위치와

연5군의 위치 및 요수와 요택 등이 잘 나타나 있다.

 

2) 『삼국지』에 기록된 하북성 요동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 시절

‘발기의 난’으로 공손씨 정권에게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하고,

하북성 요동의 동쪽 천리 밖으로 천도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편>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가 되며, 호수는8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편>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호수는 5천호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동옥저’편>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는 2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예’편>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

  <『삼국지』‘위지동이전 읍루’편>

 

위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공손씨 정권이 차지한 하북성 요동지역 및

고구려 강역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사방이 2천리이고, 동쪽은 옥저, 서쪽은 요동,

남쪽은 조선·예맥,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먼저 고구려의 동‧서쪽 경계를 살펴보자.

동쪽은 개마대산을 경계로 동옥저와 접하고 있으므로

대략 개마고원 부근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서쪽 경계는 개마고원 부근에서서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산해관이 있는 칠로도산까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난하 또는 칠로도산이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남‧북쪽경계를 살펴보자.

 

남쪽은 조선과 접하고 있는데, 조선은 마조선의 수도 평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북쪽 경계는 한반도 평양 또는 요동반도의 끝인 대련으로부터

북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서요하 일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 강역은 동서로 개마고원에서 난하 또는 칠로도산까지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요동반도 대련에서 서요하 일대까지 2천여 리에 약간 못 미치는 지역이 된다

 

그리고 이때의 고구려 수도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으므로

하북성 요동의 동쪽 끝인 칠로도산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요령성 요양 부근이 된다.

 

위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하여

공손씨 정권이 차지한 요동지역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강역이

난하 또는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므로

이 시기의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통설대로 이 시기의 요동을 현 요동반도로 비정하면,

요동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 강역은 『삼국지』에서 기록된 사방 이천 여 리는 고사하고

그 절반인 사방 천 여 리도 나오기 어렵다.

 

또 이 시기에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는 고구려의 수도는

한반도 동해안에서 찾아야 한다.

 

통설의 요동 위치비정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진서晉書』‘지리지’에 기록된 하북성 요동

 

삼국을 통일한 서진시대에는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였던 요동지역에 평주를 설치하였고,

이 평주지역에 창려군‧요동군‧현토군‧대방군‧낙랑군 등이 설치되었다.

 

진서晉書』‘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를 살펴보자.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연이 모두 제멋대로 요동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을 멸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했다.

함녕 2년(AD276년)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현 18,100호이다

(平州.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晉書』‘지리지’<평주平州>

 

위 『진서晉書』‘지리지’는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우공의 기주지역’은 어디를 말하는지 살펴보자.

 

『사기』‘권2 하본기’에 나오는 ‘기주冀州’에 대하여

『사기정의』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 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

(按理水及貢賦 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東河之西, 西河之東, 南河之北, 皆冀州也)”

『사기』‘권2 하본기’ ‘기주冀州’ 주석

 

즉 ‘우공의 기주지역’은 황하로 둘러싸인 현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이다.

 

중국 고지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기주지역이 잘 표시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주나라의 유주’나 ‘한나라의 우북평군’도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서』 ‘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그런데도 통설에서는 서진의 평주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고,

대방군을 황해도에 비정하고 있다.

 

서진의 평주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는 것은

한반도 평양지역이 까마득한 하나라ㆍ주나라 시절부터 중국 땅이었으며,

한나라 우북평군이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말과 같다.

 

통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진서晉書』 ‘지리지’의 기록을 통하여 서진시대에 평주가 설치된 요동지역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평주지역이 공손씨 정권의 요동지역이었음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위『진서晉書』‘지리지’의 기록이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시대 사람인 신찬이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하였고,

이 시대의 지리서인『태강지리지』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검성도 갈석산도 만리장성의 동단도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4) 『위서魏書』‘지형지’에 기록된 하북성 요동

 

서진시대에 하북성 요동에 설치되었던 평주는

북위시대에 북쪽의 영주와 남쪽의 평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북위시대에는 광개토왕 이후 하북성 요동지역은 모두 고구려가 회복하였다.

 

장수왕,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등이 중국의 남조로부터 받은 관작명에

영ㆍ평 2주제군사가 나온다.

 

하북성 요동에 설치된 영주와 평주 지역이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북위도 하북성 요동지역에 영주와 평주를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인구도 거의 없는 명목적인 행정구역에 불과하였다.

 

『위서魏書』‘지형지’에 나타난 영주의 위치를 살펴보자.

 

“영주는 화룡성에서 다스린다.

태연 2년(AD 436)에 진鎮이 되었고, 진군5년(AD 444)에 고쳐서 설치하였다.

영안(AD528 ~ 530) 말에 함락되어 천평(AD534 ~ 537) 초에 다시 회복했다.

6개군 14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1021, 인구는 4664명이다

(營州, 治和龍城. 太延二年為鎮, 真君五年改置. 永安末陷, 天平初復.

領郡六, 縣十四. 户一千二十一, 口四千六百六十四.)” 『위서魏書』‘지형지’ <영주營州>

 

북위의 영주에는 창려군ㆍ건덕군ㆍ요동군ㆍ낙랑군ㆍ기양군ㆍ영구군 등

6개군이 설치되었으나,

이 6개군의 총 인구가 4,664명으로 정상적인 1개 현의 인구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다.

 

북위의 영주가 명목상의 행정구역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 이 때 영주의 치소인 화룡성의 위치는 어디였는지 살펴보자.

 

화룡성은 전연과 북연의 수도였으며, 서진의 창려군 용성현에 위치하였다.

 

『위서魏書』‘지형지’ 에 의하면 ‘창려군은 서진에서 요동을 나누어 설치했다

(昌黎郡, 晉分遼東置)’ 하였으며, 『진서晉書』‘지리지’에 의하면

‘창려군은 한나라 때 요동속국 도위에 속했다(昌黎郡,漢屬遼東屬國都尉)’ 하였다.

 

또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요동속국 도위는

창료(창려)ㆍ빈도ㆍ도하ㆍ무려ㆍ험독ㆍ방 등의 6개성을 다스리는데,

치소인 창려(창료)는 낙양 동북쪽 3,260리에 있다’고 하였다.

 

결국 『후한서』ㆍ『진서晉書』ㆍ『위서魏書』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영주의 치소인 화룡성은 창려군에 있었고, 낙양 동북쪽 3260리 부근임을 알 수 있다.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상곡군이 낙양 동북쪽 3200리이고,

요서군이 3300리, 요동군이 3600리이다.

 

『후한서』‘군국지’의 거리 기록을 참조하면,

영주의 치소인 화룡성은 상곡군의 치소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다.

 

그러므로 북위가 설치한 영주의 위치는 현 중국 북경부근을 벗어 날 수 없다.

 

역시 북위 시절의 요동지역에 설치된 영주와 평주도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통설에서는 이 영주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조양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5) 하북성 요동에 대한 종합

 

『전국책』ㆍ『사기』ㆍ『후한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시대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인 연나라 상곡군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연나라 장성의 동단이자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은

연나라 상곡군으로부터 400여리의 거리에 있었으며,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가 된다.

 

이를 통하여 연ㆍ진 시대의 요동과 요동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의 강역이 사방 이천 리이므로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며,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했던 공손씨 정권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위치할 수밖에 없음을 보았다.

 

특히 『진서晉書』‘지리지’는 당시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으로 기록하였다.

 

한나라 우북평군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진서晉書』‘지리지’의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 시대의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서진의 평주 소속인 낙랑군ㆍ대방군ㆍ창려군ㆍ요동군ㆍ현토군등이

모두 현 중국 하북성에 위치하였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서魏書』‘지형지’의 기록을 통하여

북위 당시 고구려와 국경지역이었던영주營州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후한서』ㆍ『진서晉書』ㆍ『위서魏書』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영주의 치소인 화룡성은 서진시대의 창려군에 있었고,

낙양 동북쪽 3260리 부근에 있었다.

 

당시 『후한서』‘군국지’의 거리 기록에 의하면 상곡군이 낙양 동북쪽 3200리이고,

요서군이 3300리, 요동군이 3600리 이므로,

북위의 영주營州 위치는 현 중국 북경 부근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영주의 위치는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까지이어지므로,

고구려 멸망 시까지 요동지역은 여전히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다.

 

따라서 한민족에 상고사에 등장하는 요동은 대부분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가리킨다.

 

 

(2) 산서성 요동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이 요동으로 불리던 시기는 전한초((BC 202년 경)에서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까지이다.

 

『사기』‘흉노열전’과 ‘조선열전’에 의하면

연나라가 전성기 시 장수 진개가 동호(진번ㆍ조선)를 천여 리 물리치고,

연장성을 설치하고 그곳에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등 연5군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한나라가 일어나면서 고조선이 진번과 조선지역을 모두 회복하였으므로,

진번과 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등 연5군은

현 중국 산서성 지역으로 이치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요동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도요장군度遼將軍’ 이란 직책이 있었다.

 

『한서』 ‘권7 소제기’에 의하면

“(기원전 78년) 겨울 요동의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랑장 범명우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아

북변 7군의 2천 기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게 했다

(冬, 遼東烏桓反, 以中郎將范明友爲度遼將軍, 將北邊七郡郡二千騎擊之)”

기록이 있다.

 

응소가 주석하기를

“요수遼水를 건너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도요度遼를 관호로 삼았다

(當度遼水往擊之, 故以度遼爲官號)” 하였다.

 

이 도요장군의 관호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후한서』 ‘남흉노열전’에 의하면

후한 명제 영평 8년(65년) 남흉노와 북흉노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요장군度遼將軍 영營을 다시 설치하게 된다.

 

이때 도요장군 영을 설치한 곳이

현 중국 섬서성에 위치한 오원五原군 만백曼柏현으로 황하 서쪽이다.

 

당시 남흉노와 북흉노는 황하를 경계로 하였다.

 

응소의 주석을 참고하면 도요장군은 요수遼水를 건너서 적을 공격하므로

도요度遼를 관호로 삼았는데,

이때의 도요장군은 황하를 건너서 북흉노를 공격하게 되므로

결국 황하가 요수遼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요동은 황하의 동쪽인 산서성 지역이다.

 

이 시기에는 산서성 요동과 하북성 요동이 혼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태조대왕 3년(AD 55년),

요서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조대왕 3년은 대무신제28년이다.

 

고구려가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 하북성의 요동군과 요서군 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도 한나라에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요동태수가 등장하고 있다.

 

“영평(永平: 후한 명제 58-75) 중, 제융이 요동태수가 되자 선비를 선물로 유인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환 흠지분 등을 참수하게 했는데,

선비족들은 돈황, 주천 동쪽의 읍락 대인들까지 모두 요동으로 와서 하사품을 받았다.

청주와 서주 두 주가 돈을 지급했는데 매년 2억 7천만 전을 항상 주었다.

(永平中, 祭肜爲遼東太守, 誘賂鮮卑,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 於是鮮卑自燉煌、

酒泉以東邑落大人, 皆詣遼東受賞賜, 靑、徐二州給錢, 歲二億七千萬以爲常)”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대무신제 28년(AD 55년)에 고구려가 하북성의 요동군과 요서군을 모두 차지했는데,

영평(永平: 후한 명제 58-75) 중에

제융이 한나라 요동태수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때 한나라 요동태수는 산서성으로 이치된 요동군의 태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산서성 요동과 하북성 요동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한 화제 영원 16년(AD 105년)에 이르러

한나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요동군을 다시 복치하게 된다.

 

『후한서』 ‘군국지’의 요동군 기록에 의하면

“본기 화제 영원 16년(AD105년)에 (요동)군을 다시 복치했다

(本紀和帝永元十六年, 郡復置)” 하였다.

 

이때의 한나라는 국력이 매우 강성하였다.

이름난 장수 반초班超가 서역도호가 되어 서아시아의 차사, 선선 등을 멸망시키고

지중해까지 이르렀으며, 거기장군 두헌竇憲은 5천여 리에 이르는 원정군을 일으켜

지금의 외몽고 등지로 북흉노를 대파하였다.

 

이에 따라 하북성 요동의 서북쪽에 있으면서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오환‧선비등이 한나라에 내속함으로써

한나라가 하북성 지역에 요동군을 다시 복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고구려와 한나라는 하북성 요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3) 요령성 요동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이 요동으로 불리게 된 것은 요나라(916~1125) 이후이며,

이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 이동된 시기는

갈석산의 지명이동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사기』 ‘몽념열전’에 의하면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요동까지’라 하였고,

『수경주』‘하수河水3’에서는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갈석까지’라 하였다.

 

두 사료를 통하여 갈석산이 요동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다.

 

또 『사기색은』은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고 하였다.

 

그러므로 갈석산은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조선의 위치와 요동의 위치 및

진장성의 동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산이다.

 

그런데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동쪽으로 천 여리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은 조선의 위치와 요동의 위치 및 진장성의 동단 등

한민족 상고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이 일어난 시기를 살펴보자.

 

『통전』에는 모두 3개의 갈석산이 나타나는데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하북성 보정시에서 천진시 사이인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과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우갈석 등이다.

 

『통전』은 당나라 사람 두우(杜佑 : 735~812)가 801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때까지도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보이지 않는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우적도』(남송시대 1136년 작)이다.

 

이 『우적도』에서 난하(유수) 부근에 갈석산과 더불어

노룡현과 평주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어서 『구주산천실증총도』(남송시대 1177년 작)와

『거란지리지도』(남송시대 작) 등에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생겨난 시기는

『통전』의 편찬 이후인 801년에서 『우적도』가 그려진 1,136년 이전으로

대략 요나라(916 ~1125년) 시기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 이동된 시기는

요나라(916 ~ 1125년) 시대로 본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 여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 ‘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요나라 시기에 갈석산의 지명이동과 더불어

하북성 지역의 지명들이 요령성 지역으로 대대적인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요령성 요동은 요나라(916~1125) 이후에 지명 이동된 것이므로

고조선이나 삼국시대의 기록에 나오는 요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3. 맺는 글

 

지금까지 중국의 정사들을 통하여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요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요동은 중국의 먼 동쪽지방을 뜻하였다.

 

그러므로 요동은 불변의 지역이 아니라

중화족의 강역이 변함에 따라 요동의 위치도 바뀌었다.

 

본문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연ㆍ진시대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으며,

한나라 초에는 요동이 현 중국 산서성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에 이르러

요동은 다시 하북성으로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그 후 요나라 시대(AD 916~1125년)에 요동지역은 현 중국 요령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다.

 

고조선으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상고사에 등장하는 요동은

90% 이상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가리키며,

나머지 10% 정도는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은

한민족의 상고사에 등장하는 요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고대사학계의 요동에 대한 학설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의학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모두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을 고대의 요동으로 비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상고사가 크게 왜곡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 문제점을 간단히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

노태돈ㆍ송호정 등으로 대표되는 강단사학계의 통설로

요동이 전국시대인 연ㆍ진 시대로부터 변함없이 지금의 요동반도였다는 시각이다.

 

현재의 요하를 고대의 요수로 보고 그 동쪽을 요동으로 비정하고 있다.

 

통설에서 고대의 요동을 현재의 요동반도로 보는 주요 근거는

중국학계에서 주장하는 요령성지역의 연장성 유지이다.

 

중국학계에 따르면 요하 서쪽의 요령성 지역에

동서로 길게 뻗은 두 줄기의 장성 유지가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연ㆍ진ㆍ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장성 유지를 연장성 유지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연장성 유지라면

연나라와 그 이전 시대의 유물만 발굴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곳에서 연ㆍ진ㆍ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면

오히려 한나라 이후의 장성 유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연장성유지로 보는 것은 그 근거가 빈약하며,

이를 토대로 현 요동반도를 고대의 요동으로 비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대 요동의 위치를 알려면 최우선적으로 당시의 중국 정사들을 검토해 보아야한다.

 

필자가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의 중국 정사들은

한결같이 고대의 요동을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진서晉書』‘지리지’는 당시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으로 기록하였다.

 

한나라 우북평군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

윤내현ㆍ이덕일로 대표되는 재야사학계의 학설로

전국시대인 연ㆍ진 시대의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시각이다.

 

난하를 고대의 요수로 보고 있다.

 

윤내현 등이 난하 이동을 고대의 요동으로 보는 주요 근거는

갈석산이 난하 하류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그곳에서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다고 하였으며,

또『사기』‘몽염열전’에 따르면 진장성이 요동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으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 지역이 고대 요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서에 나타나는 갈석산은 여러 개가 있다.

 

그러므로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갈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라는 검증이 필요한데이러한 과정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고대의 갈석산은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지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아니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요나라(916 ~ 1125년)시대에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되면서 같이 지명이동된 것이다.

 

고대의 갈석산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본문의 『기주협우갈석도』이다.

 

한민족의 상고사에 있어서 갈석산과 요동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으므로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며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요동지역은 갈석산이 있고,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하였으며,

고구려의 흥망성쇠가 아로 새겨진 역사의 땅이다.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갈석산의 위치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 지도가

『기주협우갈석도』이며,

고구려시대의 요동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진서』‘지리지’ <평주>조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올바로 알고자 한다면,

『기주협우갈석도』를 가슴에 품고 『진서』‘지리지’ <평주>조를 숙독하기를 권한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 고찰> 

 

 

1. 머릿글

 

이 글의 목적은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의 위치를 밝히는데 있다.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의 위치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강역은 물론이고,

위만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

그리고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을 중심으로 성장한

고구려의 초기 강역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고대사학계는 왕검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할 뿐 확고한 정설이 없다.

 

그 원인으로는 사료의 부족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과연 사료가 부족하여 왕검성의 위치를 올바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기』‘조선열전’에는

왕검성의 위치를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사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식민사학에 찌든 고정관념이 우리들의 판단을 흐리고 있을 뿐이다.

 

『사기』‘조선열전’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배경으로 1년 여 동안 벌어졌던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을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사마천은 한나라의 사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므로

朝漢전쟁의 전모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사기』‘조선열전’은

왕검성의 위치를 밝히는데 있어서 최고의 사료임이 분명하다.

 

『사기』‘조선열전’에는 왕검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사마천의 원문에 더하여

여러 학자들의 주옥같은 주석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기존 학설들의 문제점도 짚어본다.

 

 

2. 본 글

 

 

『사기』‘조선열전’에는 왕검성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구절이 여러 곳에 보인다.

 

그 중에서 다음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는 신찬의 설과

 

 “조선에는 습수ㆍ열수ㆍ산수가 있다(朝鮮有濕水洌水汕水)” 는 장안의 설을 통하여

왕검성의 위치를 살펴보자.

 

 

(1)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사기』 ‘조선열전’의 왕험성에는 서광, 응소, 신찬 등의 주석이 실려 있다.

 

『사기집해』는 서광의 말을 인용하여 “창려에 험독이 있다(昌黎有險瀆縣也)”하였다.

 

『사기색은』은 응소의 주석을 인용하여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地理志, 遼東 險瀆縣, 朝鮮王舊都)”하였고,

 

또 신찬의 말을 인용하여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라 하였다.

 

조선왕의 옛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에 대하여 응소와 신찬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을 지목하였고, 신찬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을 지목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서지리지』‘요동군 험독현’ 주석에 더 자세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응소가 말하기를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이다.

물이 험한 곳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다’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험독은 그냥 험독이다’ 하였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 패의 음은 배다’ 하였다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浿音普大反.)” 『한서지리지』‘요동군 험독현’

 

『한서』에 대한 주석은 후한시대부터 시작되어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응소‧신찬‧복건‧여순등 20여명의 주석가를 거쳐

당나라 때 안사고(顔師古,581~645)의 주석으로 집대성 되었다.

 

이러한 안사고의 위치를 감안할 때,

왕험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안사고가 ‘신찬의 말이 옳다’고 신찬의 손을 들어 준 것은

상당한 무게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강단과 재야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신찬의 설을 지지하고 있다.

 

필자도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과 안사고의 주장에 동의한다.

 

이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설을 토대로

왕검성의 위치를 찾아보자.

 

신찬이 말한 낙랑군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서는 신찬이 살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신찬은 서진(西晉, 265~316) 시대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찬이 말한 낙랑군은 서진의 평주에 소속된 낙랑군을 가리킨다.

 

『진서晉書』‘지리지’를 통하여 서진의 평주(平州) 위치와 낙랑군의 위치를 살펴보자.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연이 모두 제멋대로 요동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ㆍ창려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을 멸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했다.

함녕 2년(AD 276년) 10월,

창려ㆍ요동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현 18,100호이다

(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晉書』‘지리지’<평주平州>

 

“낙랑군은 한나라에서 설치했다. 6개현을 다스리며 3,700호이다.

조선현(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누방현, 사망현이 있다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진서晉書』 ‘지리지’ <평주平州 낙랑군樂浪郡>

 

위 『진서』‘지리지’ <평주平州>조는 낙랑군이 소속된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 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하였다.

 

그러면 ‘우공의 기주지역’은 어디를 말하는지 살펴보자.

 

『사기』‘권2 하본기’에나오는 ‘기주冀州’에 대하여

『사기정의』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 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

(按理水及貢賦 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東河之西, 西河之東,南河之北, 皆冀州也)”

『사기』‘권2 하본기’ ‘기주冀州’ 주석

 

즉 ‘우공의 기주지역’은 황하로 둘러싸인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이다.

 

중국 남송시대인 1209년에 제작된 고지도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기주지역이 잘 표시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주나라의 유주’나 ‘한나라의 우북평군’도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서』‘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그런데도 통설에서는 서진의 평주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고,

대방군을 황해도에 비정하고 있다.

 

서진의 평주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는 것은

한반도 평양지역이 까마득한 하나라ㆍ주나라 시절부터 중국 땅이었으며,

한나라 우북평군이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말과 같다.

 

통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진서』‘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므로,

평주에 속한 낙랑군도 당연히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위의 『진서』‘지리지’ <평주平州 낙랑군樂浪郡>을 보면

낙랑군에는 조선현,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 누방현, 사망현 등 6개현이 있었다.

 

이들 현들의 명칭을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보면,

다행히도 수성현遂城縣의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이다.

 

그러면 현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이

『진서』‘지리지’의 평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 맞는지 살펴보자.

 

『진서』‘지리지’의 수성현에는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秦築長城之所起)’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다.

 

그리고 『진서』‘지리지’와 동시대의 사서인 『태강지리지』도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하였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이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과 같은 곳인지 알려면

이곳에 갈석산이 있었는지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 지역에 갈석산이 있었는지 살펴보면,

중국 고지도인 위의『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禹貢所載隨山濬川之圖』와

아래의『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 등을 통하여

이 지역에 갈석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송나라에서 편찬된 사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와『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

(廣信軍治遂城縣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무경총요武經總要』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 1년 이목장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나라 남쪽 탁군의 북쪽에 신성이 있다.’고 했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고했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치소는 부산釜山촌이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25리에있다.

(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 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갈석산과 수성현 및 만성현의 위치> 

 

이와 같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은 갈석산이 존재하며,

송나라 사서인『무경총요武經總要』와『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를 통하여

이곳이 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과

『진서』‘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은 동일한 곳이다.

 

이제 왕검성을 찾는 과정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신찬이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하였고,

신찬이 말한 낙랑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임을 알았다.

 

그리고 『수경』에서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흘러 임패현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고 하였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강은

역수易水, 당하唐河, 대사하大沙河 뿐이다.

 

그리고 당하唐河 동편에

위만의 도성으로 보이는 만성滿城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이다.

 

『중국백과사전』‘영락현’조에 아래와 같이 만성현滿城縣의 연혁이 나온다.

 

『영락현 : 동위 흥화2년(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고 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제 때 영락현을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나라 개황3년(583년)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예속시켰다.

대업3년(607년)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여 영락현을 관할하였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소속시켰다.

천보원년(742년)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

 

(永乐县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

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

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

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

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

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

『중국백과사전』‘영락현’

 

동위 흥화2년(540년)에 영락현을 설치하고 낙랑군의 치소로 삼았으며,

북제 때는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영락현이 이 부근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보원년(742년)에 영락현을 만성현滿城縣으로 개명한 것도

이곳이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를

신찬이 말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으로 비정한다.

 

 

(2) 조선에는 습수ㆍ열수ㆍ산수가 있다.

 

『사기』 ‘조선열전’에서 조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이 있다.

 

“장안張晏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ㆍ열수ㆍ산수가 있는데

세 물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따온 이름인듯하다.

(張晏曰 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사기집해』

 

장안張晏은 3세기 위魏나라 사람이며,

조선은 朝漢전쟁이 일어났던 위만조선(BC195 ~ BC108) 시대를 말한다.

 

위만조선의 영토 내에 물길이 서로 합류하는

습수ㆍ열수ㆍ산수의 세 강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습수ㆍ열수ㆍ산수를 찾으면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을 알 수 있다.

 

세 강물의 이름을 현재는 찾을 수 없으나 과거 기록들을 통하여 고증이 가능하다.

 

 

먼저 습수濕水를 찾아보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남송(1136년 작) 시대 작성된 『우적도禹迹圖』에 습수가 잘 나타나 있다.

 

참고로 아래 『우적도』에서 낭산狼山으로 표시된 산이

현대지도의 낭아산狼牙山이며 이 산이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낭아산)의 동편에 수성현遂城縣이 있으며,

남쪽에 왕검성으로 비정되는 만성현滿城縣이 있다.

 

지도에서 『우적도』와 현대지도를 비교해 보면, 습수는 현재의 상간하와 영정하이다.

 

이는 『수경주』 등의 지리서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수경주』에서는 습수濕水를 습여수濕餘水로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의 영정하를 가리킨다.

 

“습여수는 상곡 거용관 동쪽에서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군도현 남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계현 북쪽을 흐르며,

또 북쪽으로 굽이치다가 동남으로 호노현 서쪽에 이르러 고하로 들어간다

 

(濕餘水出上谷居庸闗東東流過軍都縣南又東流過薊縣北

又北屈東南至狐奴縣西入于沽河)”

『수경주』‘권14’

 

 

<우적도 및 우적도를 현대지도에 나타낸 지도(습수,열수의 위치)>

 

 

다음에는 열수洌水를 찾아보자.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 『산해경』에

열수洌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 列陽屬燕)” 『산해경』 ‘해내북경’

 

위 구절에 대하여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땅이다. 열列은 또한 물 이름이다.

지금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

(郭璞云 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고 하였다.

 

곽박(276~324)은 진晉나라의 학자이다.

 

“조선에는 습수ㆍ열수ㆍ산수가 있다”고 한 장안張晏도 3세기 위魏나라 사람이므로

장안과 곽박은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그러므로 장안과 곽박이 말하는 열수도 같은 물임을 알 수 있다.

 

위 곽박의 해설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열양列陽은 열수의 북쪽을 의미한다.

 

열양이 연나라에 속하므로 열수는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다.

 

또‘열수가 지금의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고 하였다.

 

『진서』‘지리지’ 를 보면 평주 대방군에 열구현列口縣이 있다.

 

그러므로 곽박이 말하는 대방은 서진의 평주 대방군이고,

그 평주 대방군에 열수가 흐르고 있었다. 

 

대방군은 낙랑군의 남쪽지역에 해당하므로

결국 열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남쪽을 동시에 흐르는 강이었다.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이 있었으므로 열수는 연나라 남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조선의 남쪽을 지나 대방군 열구현에 이르러 발해로 들어가는 강물이었다.

 

그러면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강은 어떤 강인지 살펴보자.

 

『전국책戰國策』에 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文公, 재위 BC362-BC333)에게 한 말이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

...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天府)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연나라의 남쪽에는 녹타菉沱와 역수가 흐르며,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 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했다.

 

안문과 갈석은 모두 호타하의 북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열수는 호타하이다.

 

지금까지 조선을 흐르던 세 강물인 습수ㆍ열수ㆍ산수 중 습수와 열수를 살펴보았다.

 

습수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흐르는 영정하이며,

열수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흐르는 호타하였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흐르는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또 위의 『산해경』에서

‘조선은 열양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하였고,

곽박이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땅이다’ 하였다.

 

여기서 조선을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현이라고 주석한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낙랑현은 곧 조선현으로 왕검성이 위치한 곳이다.

 

『산해경』의 윗 구절을 통하여 왕검성의 위치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왕검성이 위치하였던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기주협우갈석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기주협우갈석도』는 중국남송(1127년 ~ 1279년)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고지도로

한민족 상고사의 핵심인 갈석산과 주변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기주협우갈석도』에는 아래와 같이 갈석산을 자세히 설명한 구절이 있다.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ㆍ역수ㆍ탁수ㆍ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갈석산의 위치가 역수易水 등에서 바다로 들어온 후

황하 하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산이오른쪽에 있다고 하였다.

 

갈석산이 황하 하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해석한 지도 참조.

참고로 『기주협우갈석도』는 왼쪽으로 90도 회전하여

북쪽이 위로 가도록 하여 현대지도와 방향이 같게 하였다).

 

고대의 황하 하류는 바다와 구분이 되지 않아서

강(河)으로도 불리고 바다(海)로도 불렸다.

 

그러므로 『산해경』에서 왕검성이 위치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은

황하 하류와 갈석산(낭아산)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萬城縣 일대가 정확하게

바다(황하 하류)의 북쪽, 갈석산(낭아산)의 남쪽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만성현萬城縣 일대를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지역으로 비정한다.

 

 

3. 맺는 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말을 통하여

필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으로 왕검성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신찬은 서진(西晉, 265~316) 시대 사람이다.

 

서진시대의 정사서인 『진서晉書』‘지리지’는 낙랑군이 소속된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하였다.

 

상고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진서晉書』‘지리지’가 말하는 평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찬이 말한 낙랑군은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다행히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수성현遂城縣의 지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있었음을 사료들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遂城縣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신찬이 말한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는 왕검성도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또 “조선에는 습수ㆍ열수ㆍ산수가 있다(朝鮮有濕水洌水汕水)”는 장안의 말을 통하여

왕검성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습수濕水는 『수경주』와 중국 고지도인 『우적도禹迹圖』를 참고하면

현 중국 하북성 북경지역을 흐르는 영정하였다.

 

또 『산해경』‘해내북경’과 곽박의 주석을 참고하면

열수洌水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흐르는 호타하였다.

 

조선지역을 흐르는 세 강물 중 산수는 기록이 없어서 찾지 못하였으나,

습수와 열수 두 강물만으로도

조선의 중심지역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임을 알 수 있다.

 

신찬이 말한 낙랑군과 장안이 말한 조선의 위치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로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기존 학설들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

노태돈과 송호정 등으로 대표되는 강단사학계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통설에서도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설을 인정하고 있다.

 

신찬의 설을 인정한다면

신찬의 입장에서 낙랑군과 왕검성을 찾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통설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없다.

 

필자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찬이 말하는 낙랑군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도 통설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신찬이 말하는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으로 인식하고,

왕검성을 비롯한 낙랑군의 각 현들을 한반도 평양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통설의 원조격인 이병도의 낙랑군 수성현遂成縣 주석을 통해 살펴보자.

 

“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산천조勝覽山川條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소축後代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東西行城의 석성石城(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를 패강장성浿江長城의 유지遺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 설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한국고대사연구』박영사 1976. 148쪽>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 한반도 평양에 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식민사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이다.

 

그는 일제시대 『사학잡지史學雜誌』에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 및 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고에서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며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나바 이와기치의 설을 이병도가 뒤를 이어 위와 같이 주장한 것이다.

 

이병도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成縣을 황해도 북단의 수안遂安에 비정한 것은

수성현의 ‘수遂’ 자와 수안의 ‘수遂’ 자가 같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신찬이 말하는 낙랑군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인데,

한반도 평양에서 낙랑군 수성현을 찾고 있으니 답이 나올 리 없다.

 

요행히 수성현遂成縣의 ‘수遂’자와 같은 황해도 수안遂安을 찾아서

그곳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진서』‘지리지’나 『태강지리지』 등에 의하면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있어야 한다.

 

황해도 수안에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있을 턱이 없다.

 

마침내 이병도는 『진서』‘지리지’의 “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는 기록을

터무니없는 맹랑한 설로 부정하고 만다.

 

물론 사서의 기록이 틀릴 수도 있다.

 

이병도가 중국의 정사인 『진서』‘지리지’의 기록을 부정하려면

그 보다 더 비중있는 사료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병도가 제시한 근거는

고작 수성현의 ‘수遂’ 자와 수안의 ‘수遂’ 자가 같다는 것밖에 없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낙랑군 수성현을 찾으면서

그곳에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없다고

중국의정사인 『진서』‘지리지’의 기록을 부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것이 통설의 실체이다.

 

‘황해도 수안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다’고 믿고 싶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참으로 어설픈 희망사항은 해방 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단사학을 장악한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하여 주류학계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필자는 학창시절에 영문도 모르고 한나라 낙랑군은 한반도 평양이라고 달달 외웠다.

 

지금 생각하면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교육현장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의 혈세로

중국 동북공정의 동조자를 양산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기』‘조선열전’은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최고의 사료이다.

 

그리고『사기』‘조선열전’에 달린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주석은 강단사학자든 재야사학자든 모두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학설이다.

 

필자가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찬이 말한 낙랑군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수성현遂成縣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곳에 갈석산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있었음을 사료를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한나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잘못된 통설을

하루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둘째,

윤내현과 이덕일 등으로 대표되는 재야사학계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재야사학계에서도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설을 인정하고 있다.

 

윤내현 등은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는 기록을 중시하여,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해석하고 있다.

 

갈석산은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한나라 낙랑군에 위치하였고,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며 고대의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려는 방향은 옳다고 본다.

 

문제는 역사서에 나타나는 갈석산은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이다.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려면,

모든 갈석산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이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윤내현 등은 이러한 과정 없이

현재 존재하는 중국 하북성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을

『태강지리지』에서 나오는 갈석산으로 판단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면 난하 하류 갈석산 부근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이덕일 교수의 견해를 살펴보자.

 

“수나라 정사인 『수서지리지』 ‘상곡군’ 조는

수성현遂城縣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했다는 뜻이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天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는 갈석산이 버티고 있어

평양이 아니라 이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었음을 몸으로 증거한다.”

<2006.11.8 조선일보 이덕일칼럼>

 

이덕일교수는 『수서지리지』‘상곡군’조에서

낙랑군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 하였고,

난하 하류 갈석산 지역의 현재 지명이 창려이기 때문에

이곳이 낙랑군 수성현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 『수서지리지』를 통해 살펴보자.

 

“수성현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했다.

북위가 영주에 준하여 남영주를 설치했다. 5군11현이다.

용성현‧광흥현‧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석성현‧양무현‧광도현은건덕군에 속한다.

양평현‧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한다. 영락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부평현‧대방현‧영안현은 영구군에 속한다.

북제北齊는 오직 창려군 한 개만 남겨놓고 영락현과 신창현 등 2개현을 다스렸으며,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개황원년(581년)에 주州를 옮겼으며, 3년에는 군을 폐하였고,

18년에는 수성현으로 고쳤다. 용산이 있다

(遂城.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 五郡十一縣. 龍城 廣興 定荒 屬 昌黎郡,

石城 陽武 廣都 屬建德郡, 襄平 新昌 屬遼東郡,

永樂屬樂浪郡, 富平 帶方 永安 屬營丘郡.

後齊唯留黎一郡, 領 永樂 新昌 二縣, 餘並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改為遂城. 有龍山.)”

『수서지리지』‘상곡군 수성현’

 

위 『수서지리지』‘상곡군 수성현’조에서 북위의 남영주이자 북제의 창려군이며,

수나라의 수성현이었던 곳은 정확히 본래의 갈석산(낭아산)이 있던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아래의『중국역사지도집』 ‘남북조시대 북제’편 참조)

 

이와 같이 윤내현 등으로 대표되는 재야사학계에서는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려는 방향은 올바로 잡았으나,

갈석산 전반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윤내현 등 재야사학계가 1980년대 중반부터 망국적인 통설을 깨기 위하여

30여년을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가짜로서 가짜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민족 상고사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기』‘조선열전’과 갈석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망국적인 통설을 깨뜨리고

한민족 상고사를 올바로 정립하는 첩경이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 『사기』‘조선열전’에 실린 신찬과 장안의 설을 토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또 기존 학설들의 문제점도 살펴보았다.

 

『사기』‘조선열전’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이곳이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한나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식민사관에 찌든 망국적인 통설은

하루빨리 해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주사관에 입각한 한민족 상고사의 재정립이 시급한 시점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