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대제5년{AD304}갑자,

 

2월, <분서>가 낙랑의 서도를 습격하여 파하고는 그 땅을 郡으로 만들었다.

 

그 땅은 본래 <분서>의 모친인 <보과宝果> 나라의 도읍이었다.

 

<분서>가 모친을 위하여 탈취한 것이다.

 

낙랑왕 <자술子述>이 <장막사(長莫思)>에게 사신을 보내 힘을 합치자고 청하였다.

 

상(미천)은 <장막사>에게 <분서>와 상통하고 모의하여 낙랑을 쪼개라고 명하였더니,

<자술>은 이에 화가 치밀어 화의를 거두고,

<분서>가 서도를 습취한 것에 분을 참지 못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이해 10월,

 

계림 사람으로 잘생기고 담력과 용기가 있는 <자술>의 신하 <황창랑>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꾸며 <분서>를 찾아가니,

<분서>가 그 아름다움에 빠져 수레 안에서 거두는 중에,

<황창량>이 <분서>를 칼로 죽였다.

 

<보과>가 감싸고 돌던 <비류比流>를 왕으로 세웠다.

 

<비류>는 <고이>의 서자였는데,

<고이>시절에 민간으로 피하여 숨어들어가 민심을 숙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힘도 있고 활도 잘 쏘았다.

 

상이 <장막사>에게 <비류>를 회유하여 <술(述)>과 반목하게 만들라고 명하고,

<5部>·<9鎭>·<37國>에 명하여 보병과 기병의 훈련을 감독케 하여

그 공적을 살폈으며 <을유乙兪>·<면기免箕>·<고희高喜> 등에게는

재주 있는 장정들을 가려 뽑아서 좌·우위{군}에 배속시킨 다음에

군병을 이끌고 용병하는 기술을 가르쳐 숙련시키게 하였다.

<고구려사초>

 

 

분서7년(304년) 봄 2월,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끼며, 또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떨쳤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비록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으로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그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구려사초에서 <비류>가 <고이>의 서자라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비류比流(260-344)는 仇首(230-264)와 餘音(?-?)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298년 <책계>가  대방군에서 漢人과 貊人의 자객에게 피살당하자

<분서>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낙랑군의 서현을 공격한 것이다.

 

<보과(267-?)>는 <구지(155-226)>와 <보고(201-257)>사이에서

태어난 <소沼 (223-283)>의 딸로서

<책계(264-318)>와 혼인하여 <분서(283-304)>를 낳았다.

 

이때 대방군의 왕은 소(沼)의 아들인 건(虔)이었다.

 

<분서>가 <황창량>에게 피살되자 <보과>는 장자 <契(300-358)>가 어렸으므로(5살)

<구수>의 아들인 그녀의 情夫 <比流(260-344)>를 왕으로 추대한다.

 

<비류>가 344년에 죽자 고이의 증손이며 보과와 분서의 아들인 <契(300-358)>와

<보과>와 <비류>의 아들인 근초고왕 <여구(295-375)>와의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고이계의 마지막 왕인 <契>가 대방계와 연합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2년 후 근초고왕이 지방귀족세력과 힘을 합쳐 고이계인 대방세력을 제거하고

346년에 제위에 오르니 고이계는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고이계는 고이왕 때는 신라女 <田씨>를,

책계왕 때는 대방女 <보과>를 황후로 맞아 들였으니

외세에 의존한 외척과 결탁한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수계는 백제 지방호족의 여인을 황후로 맞아들이게 되고

근초고왕부터는 지방호족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정벌전쟁을 펼치게 된다.

 

 

時 述之龍陽臣黃倡郞者 鷄林人也 美而有膽勇

自願爲述 往刺汾西 述憐而不許

獨自逃至西都 飾爲美女 而見於汾西巡幸之途

姣言爲有訢 汾西愛之 納于車中欲淫之 黃遂刺汾西于街中殺之 

<을불대왕전>

 

이때에 <자술子述>의 용양신(龍陽臣)으로 황창랑(黃倡郞)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계림사람이었다.

 

예쁘게 생겼지만 대담하고 용감하였다.

 

스스로 <자술>을 위하여 <분서汾西>를 찔러 죽이러 가고자 하였으나

<자술>이 그를 사랑하였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홀로 서도(西都)로 숨어들어 미녀로 분장하고는 순행 길에서 <분서>를 만났다.

 

음란한 말로 흥미롭게 하자 <분서>가 그를 좋아하였다.

 

<분서>가 <황창랑>을 수레 안으로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자 하였는데,

<황창랑>이 거리에서 <분서>를 칼로 찔러 죽였다.

 

 

<황창랑>이 <자술>의 용양신(龍陽臣)이라는 이야기는

그가 <자술>에게 동성애의 대상이 되는 신하란 이야기이고

낙랑왕 <자술>이 남자를 좋아하는 임금이었다는 이야기이다. 

 

 

304년 2월 낙랑국왕 <자술>의 사위 <보육>은 백제군의 기습으로 아내를 잃었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려고 신라 조분왕을 만났지만 협상에 실패한다.

 

그러나 신라 서라벌의 한 마을에서, 신라왕 앞에서 검무를 추는 <황창랑>을 알게 된다.

 

그는 신라 장수의 아들인데 역모에 몰려 멸족되었고 그때 유모가 안고 도망쳐 살렸다.

 

<보육>은 그 소년과 소년을 키운 유모에게 외숙이라 속여 낙랑으로 데려온 후,

검위라는 벼슬을 내리고 큰 집을 주어 유모와 사는데 아무 불편이 없게 해주었다.

 

<보육>은 <황창랑>에게 자기 아내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한다.

 

그해 10월 <황창랑>은 분서왕의 순행길에 분서왕을 시해하고 도망한다.

 

그러나 약속된 장소에 <보육>은 나타나지 않아 그는 백제 공주에 의해 살해당했다.

 

<보육>은 아내의 원수를 갚았다고 기뻐하며 장인과 함께 크게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소문을 들은 신라 사람들은 <황창랑>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며 낙랑을 욕했다.

 

 

 

분서왕도 책계왕과 마찬가지로 대륙에 머물면서 영토 확장에 힘썼으며,

 

재위 7년(304년) 2월에는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당시 흉노 귀족 유연은 평양(산서성 임분)에 도읍하여 한(漢)을 세웠는데,

 

낙랑은 유연에게 의지하여 백제에 대항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서왕이 낙랑 서현을 장악한 것은

 

낙랑 태수가 유연과 교통할 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분서왕은 그해 10월에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 일에 대한 백제의 후속 조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분서왕의 죽음이

 

대륙에서의 영토 확장을 가속화하던 백제에 치명타를 안긴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분서왕의 자식들은 너무 어렸던 탓에 왕위를 이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분서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는 비류왕 대에 낙랑과 싸운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봐서

 

분서왕 죽음 이후에 백제의 대륙 정책은 급격히 약화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이왕 대에 시작된 대륙백제 개척은

 

그의 손자 분서왕에 이르러 가장 강력하게 실시되다가,

 

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침체일로에 놓인 것이다.

   

 

 

대륙의 영토 확장에 대한 분서왕의 의지가 대단했다는 것은

 

그의 묘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묘호 분서(汾西)를 풀어보면 서쪽을 나눴다는 뜻인데

 

이는 그가 서쪽 백제인 대륙백제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이왕 대 이후 백제는 대륙 정책을 가속화하여

 

산동 지역의 대방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고이왕의 대륙 정책은 그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로 이어져

 

대륙에서의 백제의 힘은 한층 강화되었다.

 

 

 

고이왕이 대륙 진출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은 무엇보다도 왕위를 찬탈한 부도덕한

 

행위를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를 통해 상쇄시키려는 의도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계왕이 대륙에서 전사하고, 분서왕마저 낙랑의 자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고이왕 대에 시작된 대륙 정책은 힘을 잃고 만다.

   

 

 

책계왕과 분서왕은 왕성인 한성을 비워두고 아예 대륙 지역에 머물며

 

영토 확장에 주력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고이왕계의 퇴조로 이어졌다.

 

 

 

책계왕이 대륙에서 전쟁을 치르다 전사한 뒤로

 

백제 내부에서는 대륙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고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서왕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대륙으로 건너가

 

낙랑의 서현을 빼앗는 등 더욱 강력한 대륙 정책을 감행하였고,

 

그것은 결국 내분을 유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분서왕의 묘호 분서(汾西)는 서쪽을 나눴다는 뜻으로,

 

분서왕의 대륙 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들어 있다.

 

 

말하자면 분서왕이 대륙을 향한 서진 정책에 지나치게 매달린 탓에

 

서쪽이 따로 떨어져 나간 꼴이 되었다는 비아냥거림이 묘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는 분서왕 시절에 이미 한반도의 한성에서는

 

대륙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분서왕에 대한 반발은 고이왕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된

 

대륙에서의 영토 확장 정책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것은 고이왕의 즉위와 그 후예의 왕위 계승 자체를

 

부정하는 사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비류(比流)왕의 등장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비류왕은 분서왕이 대륙 정책에만 의욕을 쏟고 있는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고,

 

분서왕이 낙랑이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자, 왕위에 올랐다.

   

 

분서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기록도 의심스런 대목이다.

 

 

자객에 의해 분서왕이 피살 되었을 때, 가장 큰 이익을 본 쪽은 비류왕이다.

 

 

그렇다면 분서왕을 죽인 쪽은 낙랑 태수가 아니라 비류왕 쪽이 아닐까?

 

 

 

낙랑이 보낸 자객에 의해 왕이 죽었다면,

 

필시 백제에서는 낙랑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비류왕은 즉위 이후에 낙랑에 대해 단 한 차례도 공격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비류왕 재위 중에는 낙랑은 물론이고,

 

대륙백제에서 일어난 일은 단 한 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연이어 대륙에서 전쟁 중에 죽었는데,

 

그들을 이어 왕위에 오른 비류왕 대엔 대륙백제와 관련된 기사가 단 한 건도 없다.

 

 

분서왕 시대까지 결혼 관계를 맺고 있던 대방에 대한 기사도 전혀 없다.

 

 

이 사실은 비류왕과 대륙백제는 무관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비류왕은 분서왕이 대륙 경영에 매달려 있는 동안 반란을 일으켜 한성을 장악했고,

 

낙랑과 공모하여 분서왕 살해에 성공하자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다.

 

 

 

고이왕이나 책계왕의 대륙 경영은 분조(分朝),

 

즉 조정을 둘로 갈라 왕이 한쪽을 다스리고,

 

다른 한쪽을 태자가 다스리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왕이 대륙에 머물고 있는 동안은 태자가 한성을 다스리고,

 

왕이 한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은 태자가 대륙을 경영하는 형태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분서왕의 경우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는 태자가 너무 어린 탓에 분조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대륙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래서 늘 대륙에 머물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반역의 빌미가 되어 비류왕 세력이 등장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분서왕의 묘호인 분서 즉, 서쪽을 나누다는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비류(比流)의 뜻인 나란히 흐른다 또는 견줘 흐른다는 묘호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다.

   

 

 

비류왕은 구수왕의 방계 혈통으로 보이며,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낄 줄 알았다고 전한다.

 

 

그는 평민처럼 숨어 살다가 분서왕 재위 시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분서왕이 죽자 무력을 앞세워 한성을 장악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왕이 된 뒤에도 대궐 서쪽에 누대를 쌓아 놓고

 

활쏘기를 연습할 정도로 무예에 관심이 많았다.

   

 

무력을 앞세워 왕위를 찬탈한 까닭에 그는 즉위 직후부터 민심 안정에 매달렸다.

 

 

특히 재위 9년(312년) 2월에는 각 지방에 사신을 파견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지방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다.

 

 

이 과정에서 홀아비,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들 중에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을 골라 일인당 곡식 세석씩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또 천지신명께 제사 지낼 때는 자신이 직접 제물로 쓰일 고기를 베는 등

 

여러 방면에서 백성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는 외교 관계에서도 강경책을 지양하고 평화 구축과 우호 증진에 매달렸다.

 

 

신라와는 사신을 주고받으며 화친을 맺고 있었고,

 

낙랑ㆍ고구려ㆍ말갈 등과도 전혀 전쟁을 하지 않았으며,

 

재위기간 내내 다른 나라와 일체 싸움을 벌이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비류왕의 이런 안정책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늘 불안한 상황이었다.

 

 

불안의 첫 번째 요소는 반란이었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줄곧 대륙에는 또 하나의 백제가 있는 상태였고,

 

그들 대륙 세력은 늘 왕위 회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내부에서도 함께 반정을 도모했던 세력의 도전이 도사리고 있었다.

   

 

재위 24년(327년)에 일어난 우복의 난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우복>은 비류왕의 이복동생으로 18년(321년) 정월에 내신좌평에 임명된 사람이다.

 

 

내신좌평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직위로

 

좌평 중에 가장 요직에 속하며, 왕의 최측근이 맡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비류왕은 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기에 그 공신들이 요직을 차지했을 것이고,

 

<우복> 또한 반정 공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반정 공신이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왕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게 마련이고,

 

한편에선 언제든지 왕권을 탈취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이었다.

 

 

<우복> 또한 그런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복>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비류왕과 대립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이러한 대립은 비류왕이 반정세력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즉, 비류왕은 왕권이 안정되면서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반정세력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을 것이고,

 

공신의 우두머리격인 <우복>은 그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우복>은 321년에 내신좌평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던 327년까지

 

그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우복>의 기반이 매우 탄탄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사실은 비류왕을 매우 불안케 했을 것이고,

 

결국 <우복>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복>은 쉽사리 밀려나지 않았다.

   

 

<우복>은 327년 9월에 북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거점이 한강 건너편인 북한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사건은 정변이 아니라 군사 쿠데타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정변이었다면 한성 내부에서 벌어졌을 터인데,

 

산성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병력을 일으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복>은 거사에 성공하지 못했다.

 

비류왕이 출동시킨 토벌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우복>의 반란 이외에 비류왕 연간에 또 다른 반란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반란 사건의 흔적은 있다.

 

 

재위 23년 기사에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는 내용이 있고,

 

또 4월 기사에 서울에 우물이 넘치고,

 

그 속에서 흑룡이 나타났다는 은유적인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민심이 대륙백제에 머물고 있는 왕에게 쏠렸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흑룡은 아마도 왕을 자칭하는 또 하나의 인물을 의미하는 듯하다.

 

 

또 서울에 우물이 넘쳤나는 것은 서울의 민심이 요동쳤다는 것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봐선

 

전쟁이나 정변은 없었던 모양이다.

   

 

비류왕을 괴롭힌 것은 비단 정치적 불안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천재였다.

   

 

재위 18년 7월에는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곡식을 해치는 바람에 흉년이 들었고,

 

재위 28년엔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풀과 나무가 말라 죽고 강물까지 말라버렸다.

 

 

그런 가뭄은 무려 반 년 동안 계속되어 가을에 이르러서야 겨우 비가 내렸다.

 

 

하지만 가뭄으로 심한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재위 30년 5월에는 대궐에 심한 화재가 나고,

 

그 불길이 번져 많은 민가가 불에 타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비류왕은 반란과 천재, 인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굳건히 왕위를 지키며

 

40년을 재위하다가 344년 10월에 죽었다.

 

 

그의 능에 관한 기사는 남아 있지 않고, 가족에 관한 기사는 자세하지 않다.

 

 

근초고왕이 그의 차남인 점을 감안할 때 자식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