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대제12년{AD311}신미,

 

3월, <고노자高奴子 (?-312)>가 아들 <경卿>을 들여보내

요동이 정벌할 필요가 있는 상황임을 주청하였더니,

<방부方夫>와 <선옥仙玉>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5만을 이끌고,

신성(新城)태수와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였다.

 

현도 사람 <삼성參星>과 안평 사람 <가회賈回>를 선봉으로 세우고,

<봉우封雨><온숙溫叔> 등에게 그들의 선무지중(仙巫之衆)을 이끌고 나오게 하였다.

 

8월, <방부方夫> 등이 진공하여 서안평을 빼앗고

그 곳의 남녀 2천명을 붙잡아 평양(平壤)으로 데려오니,

왕이 이를 받아들이고는, 상으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선옥仙玉>을 안평태수로, <선술仙述>을 좌위장군으로 <면강免江>을 우위장군으로,

<곽槨>을 좌기장군으로, <석棤>을 우기장군으로 삼았다.

 

10월, 상이 <주周>황후와 순행하여 안평에 이르러서 사졸들을 위로하였다.

 

<고경高卿>을 안평 소수로 삼아 서안평을 다스리게 하였다.

 

 

 

미천12년(AD311) 3월 <고노자高奴子>는

미천대제에게 요동을 정벌할 수 있는 상황임을 보고한다.

 

당시 중원은 서진(西晉) 회제(懷帝)시절이였는데

전조(前趙)에 의해 낙양이 점령당했다.

 

이른바 영가의 난 (永嘉之亂)이다.

 

영가(永嘉)의 난(亂)이란 산서성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유연劉淵(251-310)>이

304년에 국호를 한(漢, 후에 조趙)이라하며 독립한 후

아들 <유총劉聰>이 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킨 일을 말한다.

 

이 사건이후 西晉은 317년에 강남의 건업으로 튀어 東晉을 세우는 것이다.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미천대제인 <을불>은 군사적 정변을 통해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정변에 동원된 군사력을 <을불>은 다시 외부공격으로 돌린다.

 

<을불>은 과거의 고구려 땅인 서부지역의 요동과 현도를 되찾고자한다.

 

그리하여 현도를 공격하기 전에 요동을 먼저 공격한다.

 

이는 요동을 통해 모용씨가 현도를 지원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륙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하고

중원세력의 변화에 따라 고구려의 세력도 부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바로 요동과 현도가 고구려의 서부지역으로 중원과의 경계지임을 말한다.

 

미천대제의 명을 받아 <방부方夫>와 <선옥仙玉>이

보기(步騎) 5만을 거느리고 신성태수와 함께 세 길로 나누어 공격한다.

 

2달 뒤 마침내 <방부方夫>는 서안평(西安平)을 장악하고

남녀포로 2천여 명을 평양으로 압송하여 온다.

 

<관구검>의 침입 후 오랫동안 남의 손에 맡겨진 옛 땅을 되찾아 온 것이다.

 

중원의 혼란(영가의 난)은 고구려에게 요동을 정벌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원은 5호16국의 혼란 속으로 접어들게 된다.

 

<신성(新城)과 서안평(西安平)>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