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왕2년(AD.326)

 

8월, <보황宝凰(217-326)>대모(大母)가 110세로 죽어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처음에 <벌휴伐休(189-256)>의 후(后) <자황紫凰(190?-266)>이

꿈속에서 커다란 흰 새를 보고 안았는데,

<아달라阿達羅(186-263)>帝가 (자황을) 불러 행차하여 대모(大母)를 낳았다.

 

(대모는) 풍만하고 키가 크며,

총명(聰明)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책읽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아달라)帝가 여러 박사(博士)들을 부르도록 하여

내훈(內訓)에 관한 많은 일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았다.

 

<성공猩公>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나왔다.”라고 하였다.

 

<반화盤花>대모가 그 학문을 모두 전수한 까닭으로 많은 고사(古事)를 알았다.

 

사람들이 지모(知母)라고 칭송하였다.

 

18살에 <아달라>帝의 권처(權妻)가 되어, 총애는 후궁으로 기울어졌으나

항상 스스로 물러나 다른 여러 비(妃)들과 총애를 다투지 아니하였다.

 

<자황>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분지(粉脂)를 바르고 아첨을 하는데

너는 어찌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애교를 떨지 않느냐?”

라고 하였다.

 

대모(大母)가 말하기를

 

“부득이 천침(薦枕, 잠자리 시중을 듦)할 뿐이고 어찌 아첨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또한 얼굴색을 드러내지 않은 연유로 왕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항상 자식을 임신하기를 빌도록 하였다.

 

대모(大母)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부녀가 상합(相合)하면 난자(難子, 장애아)를 낳는다고 합니다.

자식을 비는 것이 어찌 유익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벌휴와 아들을 낳는 것은 가능한 일이냐?”

라고 하였다.

 

대모가 이에 종용(從容)히 부녀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왕이 자못 깨달아서, 드디어 이날 저녁에 (화를) 풀었다.

 

한 달여를 왕이 근심에 빠져 즐거워하지 않았다.

 

대모(大母)를 불러 무릎을 베고, 몹시 괴로워서 끙끙 앓았다고 한다.

 

<자황>이 이에 다시 왕의 행차를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기쁨에 이르자 임신하여 총애가 전보다 배가 되었다.

 

장차 후(后)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대모(大母)가 있는 힘을 다하여 사양하고 끝까지 받지 아니하였다.

 

아달라 재위기간에는 품질(品秩, 품계)을 사절하였다.

 

<아달라>가 죽음에 임하여 <벌휴>에게 유명(遺命)을 남기며 말하기를

 

“<보황>을 나의 후(后)로 삼지 못하였으나, 너의 후로 삼음은 가당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모(大母)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깨끗이 하고 따라 죽으려 하였다.

 

<자황>은 그것을 알고 왕명을 핑계되어

<벌휴伐休>의 침전에 끌고 가 강제로 혼인하게 하였다.

 

드디어 <벌휴>帝의 권처가 되었는데,

 

항상 스스로의 허물을 말하기를

 

“나는 이미 선금(先今, 아달라)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는데,

신금(新今, 벌휴)에게 아첨하는 것은 불가하다.”

라고 하였다.

 

<벌휴>帝 또한 의로움이 있어,

빈첩(嬪妾)으로 대우하지 않고 <내례內禮(186-263)>와 같이 존중하고,

후를 위하여 서궁(西宮)을 세웠다.

 

<내례>는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사신(私臣)이 많았고,

대모(大母)의 거처는 쓸쓸하고 외부의 남자와는 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대모(大母)는 명망이 있었으며, 왕의 총애가 점점 융성해졌다.

 

<내례>后가 이에 시새움하는 마음이 생겨 왕을 핍박하여 (서궁을) 폐하도록 하였다.

 

밖으로 <아달라>의 능문(陵門)에 나가 살면서도 또한 자수(自守)하기가 한결같았다.

 

<내례>가 그 소문을 듣고 <알반謁盤>을 위두(衛頭)로 삼아,

강제로 정을 통하도록 명하였다.

 

<알반>이 대모(大母)를 보고 망풍(望風)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아래에 이르렀으나 욕보이지는 못하였다.

 

<내례>가 크게 화를 내며 장차 <알반>을 유배를 보내어 벌주려 하였다.

 

<알반>이 이에 울면서 대모(大母)에게 고(告)하여 말하기를

 

“신이 귀양길 거친 땅에서 비록 죽게 되더라도 영광스러우나,

다만 악인(惡人)이 다시 (문)주에게 와서 지키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대모(大母)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여러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정절을 지킬 수 있으며,

네가 비록 (나를) 범(犯)하지 않고 멀리 간다 하더라도

반드시 범인(犯人)이 있을 것이므로

너와 상합(相合)하여 일찍 화근(禍根)을 끊는 만 못하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알반>과 상통(相通)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례>는 <벌휴>에게 헐뜯어 말하기를

 

“너는 보황이 일부(一夫)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지만, <알반>과 종음(縱淫)하였다.”

라고 하였다.

 

<벌휴>는 마음속으로 그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스를 수 없었다.

 

<내례>가 이에 권처의 품계를 빼앗았다.

 

<벌휴>가 죽자 거듭하여 <알휴謁休>에게 시집보내어

일부(一夫)하려는 뜻을 상하게 하였다.

 

<내해奈解(230-291)>가 마음속으로 대모(大母)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감히 모후(母后)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내례>가 죽음(보황 47세)에 이르자 <알휴>댁에 이르러 사죄하고

다시 1품 권처로 삼고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를 내렸다.

 

희롱하며 말하기를

 

“짐(朕)은 호색(好色)하지 아니하다.

다만 대모(大母)의 진기(眞氣)를 얻고자 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대모(大母)가 말하기를

 

“첩(妾)은 이미 늙었으며 또 천골(賤骨)의 처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천자(天子)를 잠자리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며, 고사(固辭)하여 응하지 아니하였다.

 

<내해>帝가 이에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알휴>가 책망하며 말하기를

 

“신(臣)의 부인에게 색(色)이 있으니 받들어 모심이 의로움입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거부함이 심한가?”

라고 하였다.

 

대모(大母)가 말하기를

 

“나의 타고난 성품이 호색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너 역시 범(犯)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대모(大母)의 키는 8척이고, 손이 무릎까지 늘어졌고 절인지력(絶人之力)이 있었다.

 

<알휴>가 결국 아내로 삼지 못했다.

 

<내해>帝가 더욱 그리워하여 댁으로 누차로 행차하였고,

혹은 밤늦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병이 들어 위태하였다.

 

대모(大母)가 부득이 거동을 받아들이며 말하기를

 

“궁중에는 미인(美人)이 많은데 어찌하여 노추(老醜)를 사랑함이 이와 같은가?”

라고 하였다.

 

<내해>가 말하기를

 

“숙모(叔母)의 아름다움은 천궁(天宮)의 미녀와 같으니,

어찌 (궁중의 미인들이 숙모의 미모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대모(大母)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사녀(私女)를 둠이 없으니,

첩이 어찌 감히 스스로 정절을 지킬 수 있으리오?”

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누차로 왕의 총애를 입어,

왕의 자녀(子女)를 낳고 항상 태후(太后)의 예로 모시도록 하였다.

 

대모(大母)가 말하기를

 

“빈첩의 예로 대우하여도 구속됨이 없는데,

첩에게 이런 대우를 함이 가당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겸공(謙恭)하여 스스로를 끝까지 지켰다.

 

왕의 재위기간에는 총애가 쇠하지 않았다.

 

<조분助賁254-329)>선금이 즉위하자 대모의 나이 이미 76세였다.

 

항상 검은 머리에 붉은 색 얼굴에 치아가 구슬을 엮어 놓은 것 같았고,

본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옥모玉帽(238-311)>태후의 용사(用事)다.

 

대모(大母)에게 떠맡겨서 <내례>의 여러 딸들을 당해내었다.

 

그런 까닭에 <옥모> 역시 대모(大母)를 선자(仙姊)로 삼았고,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며 존중하였다.

 

계도(鷄徒)가 신(神)으로 모시고, 조정(朝廷)에서 중하게 생각하였다.

 

대모(大母)는 일찍이 사사로이 섬기는 일을 막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다 같이 국호선(國護仙)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아달라>帝가 일찍이 보향(宝香, 향수)을 주었는데,

다른 비(妃)가 보향을 갖고 싶어 베 100포와 바꾸자고 청하였다. 대모가 허락하였다.

 

왕이 꾸짖어 말하기를

 

“베(布)는 얻기 쉽지만 향수는 구하기 어렵다. 어찌하여 바꾸었느냐?”

라고 하였다.

 

대모(大母)가 말하기를

 

“한민(寒民)은 옷이 없지만 베를 얻기 어찌 쉽겠습니까?

향수가 비록 다른 비(妃)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왕(上)께 아첨할 것이며,

베가 만약 나에게 있다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아름답게 여기어 베 100포를 더하여 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아첨하는 것은 도(道)이지 향기가 아니다.

이와 같이 이른바 보향(宝香, 향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향기와 같지 않다.”

라고 하였다.

 

평생을 베풀며 산 바가 있고 계산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런 연유로 사녀(士女)들이 죽은 어머니의 장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였다.

 

각자 사당을 세워 성천사(聖天祠)라 불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