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대제32년{AD331}신묘,

 

정월, <석륵石勒>이 우리나라의 사신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황금과 비단을 <주周>후에게 보내오니,

 

상이 기뻐하여 이르길

 

"놈은 집안에서 범을 기르고 있으니 그는 머지않아서 망할 것이다.

{그러니} 감히 남의 집들을 엿 보고 있음이다.”

라 하였다.  

 

2월, 상은 병이 위독하여지니 태자를 불러서 가까이 다다르게 하더니

신검(神劒) 광명(光明){所傳其釼.或云 最彘宝釼)을 주고는,

 

“<봉상>이 무도하여, 차자(次子)인 내가 보위에 올랐다.

 

네가 비록 나의 뒤를 잇게 되었으나,

무도하면 나라를 잃을 뿐만 아니라 네 몸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척들의 기대도 저버리지 말고, 군대와 백성들의 노여움도 키우지 마라.

 

네 어미와 함께 정치할 것인데,

여인네들은 사사로움에 치우침이 많아 실수하기 쉬우니,

너는 필히 중심을 잡아 바르게 되도록 하라.

 

<모용>집안과는 서로 간에 이익을 다투지 말고, 성을 든든히 하고 경계를 지켜라.

 

토목 노역으로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말고,

부렴(賦歛){세금}을 적게 하고, 백성을 근검과 충효로써 가르치고,

노인을 봉양하고 현자를 공경하고, 재주 있는 이를 임용하여 일을 감당하게 해라.

 

설사 호색할지라도 조신하여 지나치지는 말 것이다.

 

네 아비가 일찍 죽게 된 것을 거울로 삼아도 될 것이다.

 

장사(葬事)는 검소하고 실속 있게 치를 것이며,

옥으로 만든 관과 금으로 치장한 곽을 쓰지 말 것이다.

 

귀한 물건을 함께 묻으면 도둑들이 파헤치게 된다.

 

네 어미 고향 동네의 산수가 아주 좋으니, 의당 나를 미천(美川)의 석굴에 장사하고,

네 어미가 나를 따라 오게 되거든, 함께 묻어다오.”

라고 하고,

 

타이르기를 마치고는 숨을 거두었다. 춘추 54세였다.

 

<周>황후가 동궁을 안아 일으켜 시신 앞에서 즉위시켜

삼보(三輔)들의 조례를 받게 하고,

빈궁(殯宮)의 뜰에서 백관들의 새 임금 만세를 받게 하였다.

 

동궁이 슬피 울부짖어 목이 쉬니, <周>황후가 그만 하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周>후가 태보인 <청견靑見>에게 간하게 하였더니,

 

<청견靑見>이 상주하길;

 

“천자의 상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폐하께는 지금 만민의 부모가 되셨으니

사사로이 용체를 훼손하여 천하를 저버리시면 아니 됩니다.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몸을 야위게 하는 것은 작은 예절이며,

사임(士人){선비, 무사}들의 행실인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당연히 술과 고기도 드시고, 성색도 취하시어서, 호기를 함양하시고,

그런 연후에 큰 정사에 임하시고 어려운 일을 처결하셔야 할 것입니다.”

 

라 하니 상은 평소에 <청견靑見)>을 중히 여긴지라,

슬픔을 억누르고 술도 마시면서, 그의 청을 좇으려 애를 썼다.

 

<周>황후가 악기들을 들이라 하여,

스스로 록안(綠眼){碧眼, 西域 여인}의 무희들과 함께

라무(裸舞)를 추어 즐겁게 하여보려고 하였고,

여러 비빈들이 이를 이어서 그와 같이 하였더니,

상이 그리하지 못하게 물리고는, 방성통곡하다가 구토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이에 <周>황후가 기겁하여 상을 자기의 방안으로 들였는데, 밤새도록 기척이 없었다.

 

<전>妃 역시도 그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모용외>와 <석륵>이 대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가 사신을 보내와서 조문하고 부의도 후하게 보내왔다.

 

상이 이 사신들을 친히 맞이하여 삼가하며 빈례를 다하였더니,

 

사신들은 돌아가 자기의 주인에게

 

“새로 선 임금이 먼저 번의 임금을 능가합니다.”

라 하였다.

 

이에 <석륵>은

 

“<을불>은 사직을 오래도록 할 아들이 있소.

나도 아무 일이 없어 보이지만, 어찌 할꼬?”

라 한탄하였다.

 

개략 그의 아들 <홍弘>은 나약하여 안심할 수 없었음이었다.

 

상은 이 소식을 듣더니 좌우들에게

 

“놈들은 곁가지에 삐져나온 주제에 감히 큰 가지 출신인양 스스로를 높이면서,

몸을 팔던 시절을 잊어버리고 그 비천한 것들이

감히 우리 동명성국(東明聖國)에 견주려 하고 있소. 죽여서 없애지 않아도 되겠소?

 

우리나라는 대위(大位)를 한 번 세우면, 다시는 두 말 한 적이 없는데,

갈(羯)과 호(胡)는, 서로를 죽이며 멸하고, 인간의 도리를 돌이키지 못하고 있소.

 

이것들은 정말로 금수들이오.”

라 일렀다.

 

찬자가 살피길

 

『<미천>은 어린 나이로 피해나가 매섭게 고생하다,

8년 만에 돌아와서 임금 자리 오르더니,

밖에서 쌓은 배움을 안에서 어질게 베풀었고,덕이 크게 행하여져 관민이 즐겼더라.

 

창고는 가득하고 양 돼지도 풍성하며, 군병을 조련하여 땅을 넓혔더니,

옛 것은 되찾았고 새로이 넓혔도다.

 

연(燕)과 조(趙)는 두려워서 굴복하고, 백제와 신라는 자식들이 찾아왔으며,

진(晉)과 월(越)은 찾아와 조공하고, 색두(索頭)가 정성을 다하였으니,

태평하고 무사하여, 앉아서 부귀를 누렸더라.

 

누런 금덩어리 온 누리에 가득하고, 미녀들이 방방에 넘쳐나니,

집집마다 춤추고 노래하며, 사람마다 고량진미 즐겼더라.

 

누에치고 비단 짜기 권장하여 만금 비단 쌓여있어,

황후의 너른 옷이 천만금의 값이 되도,직녀들이 비단을 다투어 바쳐오니,

비단 옷엔 돈 한 푼도 들어갈 일 없었다네.

 

소와 말도 온 산에 가득하며 절로 낳고 길렀으니,

아무리 먹고 써도 다함없이 많았으며,

속・맥・두・량 살진 고기 먹기에 충분하고, 어・별・장・압 또한 끊이지 않았다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사방에서 귀부하고,

벌판에다 마을 이뤄 즐거이 살아가며 이 낙원을 사랑하니,

임금께 충성하는 마음 구름처럼 피어났네.

 

임금은 좋은 사람 잘도 부려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아내어 잘도 살펴주고,

병든 이는 고쳐주고 우매한 이는 가르쳐 주었다.

 

짐 실은 배와 짐마차가 만 리를 서로 잇고,

천리에서 모인 손님 한데모여 술잔을 돌리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간에 바꾸었더니 불편함도 없었으며,

공물은 조금씩을 거두어도 큰 관청 차고도 넘쳐났다.

 

임금은 비록 소백(小白)이 꾸짖을 일은 있었어도 민간 부녀 빼앗지 않았었고,

후비들도 많지 않아 후궁은 맨 날 비었었지만,

사랑함이 지나쳐서 섭생을 잃었었고,

남색을 즐겼으니 우금(牛金)과 도아(道兒)의 폐단이 없지는 않았었다.

 

옥중의 티끌이고 성덕의 허물이었다.

 

개략, 스승의 가르침이 온전치 않거나, 시속에 물들거나,

행락지성과 호협지기가 있거나 하여 왕왕 제왕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또한 애석한 일 아니겠는가?

 

<미천>이 성인 도리를 깨닫게 하고, 학문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가>도 유학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여 천하게 살았더라면,

무리지어 말 타고 활쏘기나 일삼았을 것이고,

오로지 식과 색을 삶의 모두로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자라나서, 능히 <미천>과 같았었다면,

그 역시 현군이란 일컬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공적과 과오를,

과연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帝, 諱<斯由>, 一作<劉>, 又<釗>, 亦云<朱留克>. <美川王>苐三子. 母, 太后<周>氏,

太輔<仙方>之女. 其先<吳>人也, <東川>朝來朝, 尙公主居<馬山>, 世守仙人之職.

<方>, 以<美川>朝功臣, 納女于後宮而生王. 王, 身長體偉, 美風采, 好學問. 性寬厚,

愛民孝友敦睦. 亦能善騎射好用兵. 以紹述先王之志為己任. 南征西伐,

以身先人必立陣前, 竟中流矢而崩. 國人哀之, 以為<國罡上王>, 亦云<小乙弗>.

 

제의 휘는 <사유斯由>, 또는 <유劉>, 또는 <쇠釗>, 또는 <주류극朱留克>이다.

 

미천왕의 셋째 아들이다.

 

모친은 태후 <周>씨인데, 태보 <선방仙方>의 딸이다.

 

<선방仙方>의 선대는 吳의 사람으로, 東川朝에 來朝하였으며,

공주와 혼인하여 마산(馬山)에서 여러 대를 선인(仙人)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였다.

 

<선방仙方>은 美川朝의 공신으로, 딸을 후궁에 바치니 왕을 낳았던 것이다.

 

왕은 키가 크고 몸도 우람하였으며, 풍채는 수려하였고, 학문하기를 좋아하였다.

 

성품이 관후하여 백성을 아끼고 효와 우애로 돈목하였으며,

또한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였고 용병하기를 좋아하였다.

 

선왕의 뜻을 받아 알리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겼으며,

남정서벌에 임하여서는 반드시 다른 이들보다 먼저 군진의 앞에 섰다가

끝내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죽었으니,

나라사람들이 이를 애통히 여기고 國罡上王 또는 小乙弗이라 불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