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왕 7년(A.D.331) 금토(金兎=辛卯)

 

4월 왜의 사신이 학포(鶴浦)에 이르러

원상태공(元上太公){우로(于老)}과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며

입조(入朝)하는 것을 수긍하지 않았다.

 

앞전에 <우로于老>가 희롱하여, 왜의 사신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조만간 너희 왕을 사로잡아 찬노비(爨奴婢, 밥을 짓는 노비)로 삼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원상(元上){우로(于老)}이

니금(尼今, 미추)과 아후(阿后, 아이혜)를 멸시한 것으로,

왕후(王后, 미추와 아이혜)를 노비와 같다고 본 것이니 경모(輕侮)하는 마음이 있었다.

 

뜻밖에 왜의 사신에게 전달되었고, 왜의 사신이 돌아가 그 왕에게 가서 보고하니,

왜왕이 노하여 명으로 그 사신을 베고,

다른 사신으로 바꾸어 포구에서 와서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관리(吏)가 흉계가 있음을 알고 만나지 말기를 고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나는 일국의 태공(太公)이다. 어찌 작은 오랑캐 따위를 두려워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결국엔 단기(單騎)로 가서, 왜(倭)가 그 모욕(侮辱)함을 꾸짖으니,

우로가 “농담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왜의 사신이 믿지 아니하여 불을 지르고 가버렸다.

 

주사(舟師){함장}에게 추격하도록 하였으나 도달하지 못하였다.

 

<우로>를 후하게 장례를 지내도록 명하고,

<우로>의 어린 아들 <흘해訖解(329-392)>에게 작위를 내렸다.

 

혹은 <우로>는 용감하고 장병(將兵)을 다룸에 뛰어난 연유로

걸핏하면 자긍(自矜, 스스로를 자랑함)함을 더욱 높았다.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한 연유로 마음이 몹시 불쾌하여 반란하려는 뜻이 있었다.

 

니금의 신하와 왜의 사신이 서로 통하여 은밀히 제어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고,

내홍(內訌, 내부에서 저희들끼리 하는 분쟁)을 염려하여 외세로 친 것이라 말한다.

 

니금이 태공의 상(喪)을 친히 조문하고 <명원命元(307-374)>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태공의 아들은 마땅히 나의 아들이고, 태공의 처는 마땅히 나의 처이다.”

라고 하였다.

 

<명원>이 울면서 말하기를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나라 안팎에서 기도하고 있으니,

첩과 태공이 또한 산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꿈에 큰 불이 나서 이를 의심하였습니다.

어찌 이와 같이 흉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모두 짐의 덕이 없음으로 부른 일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이게 하여

친히 정형(政刑)의 득실(得失)을 물어 말하기를

 

“정형(政刑)의 잘못이 있으면 비를 기도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지금 태공이 변란을 맞아 하늘에서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니,

과인(寡人)과 너희 백관(百官)들은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니금이 드디어 스스로 매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阿后가 그 소리를 듣고, 친히 임하여 매질을 그치도록 하였다.

 

<말구末仇>, <강억康檍>, <일골日骨>, <걸숙乞淑>, <연음連音>에게

5道를 암찰(暗察)하게 하여,

리방(理方, 관청명)의 잘잘못과,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당시 阿后와 <걸숙>의 폐신(嬖臣, 사랑을 받는 신하) <호산好山>이 음란함에 빠졌고,

<연음>의 처 <난석蘭石>과 후(后)의 사랑을 받는 <군백裙白>이 좋아하고 사랑하여

부부처럼 지냈다.

 

<양부良夫>가 말하기를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음란하기를 좋아하면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니금이 자책(自責)하고자 한 것은 후(后)로 하여금 반성(反省)하게 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걸숙>과 <연음>에게 밖으로 나가도록 명하여

자기 편안대로 음란함을 즐겼다.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탄식하였다.

 

 

 

조분왕 시절 <우로>는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정복하여 군(郡)으로 만들고,

왜(倭)를 사도(沙道) 해전(海戰)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물리쳐

적을 수장(水葬)시켜 서불한(舒弗邯)이 되어 국정을 장악한다.

 

그러나 고구려와 전투에서는 고전(苦戰)을 치렀다.

 

첨해왕 4년(313년) 왜사신(倭使臣) 갈나고(葛那古) 앞에서 왜왕을 욕한다.

 

325년 <아이혜>가 첨해를 시해하고 <미추>가 즉위한다.

 

<미추>의 즉위를 반대한 <우로>는 군권을 <양부>에게 넘겨준다.

 

미추왕 7년(331년) <우로>는 단기(單騎)로 학포(鶴浦)에 나간다.

 

왜인들은 그를 불에 태워 죽인다.

 

그 후 왜의 대신(大臣)이 왔을 때 그 처(妻){명원命元(307-374)}가

사신 접대 임무를 맡아서 원수를 갚는다.

 

이 일로 왜가 금성(金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370년에 그의 아들 <흘해 訖解(329-392)>가 즉위하여 그의 공적이 인정을 받게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