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3년{AD333}계사,

 

봄, 대방(帶方) 남부의 성 여섯을 쳐서 평정하였다.

 

정월, <모용외>가 죽고, 그 아들 <황皝(297-348)>이 섰는데,

 

나이는 37살이었다.

 

동생 <인仁>과는 불목하였다.

 

 

 

모용황(慕容皝)

 

<모용황慕容皝 297-348)>은 자(字)가 원진(元眞)이고 <慕容廆>의 셋째 아들이다.

 

눈썹 뼈가 솟고 앞니가 크고 가지런했으며 신장은 7척 8촌이었다.

 

웅의(雄毅,뛰어나고 굳셈)하며 권략(權略,권변과 지략)이 많고,

경학(經學)을 숭상하고 천문(天文)을 좋아했다.

 

(모용)외가 요동공(遼東公)이 되자 321년 12월 그를 세자(世子)로 세웠다.

 

(동진 원제) 건무(建武: 317-318) 초에

관군장군(冠軍將軍), 좌현왕(左賢王)으로 임명하고

망평후(望平侯){현도군 망평현의 縣侯,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요동군 망평현}에

봉하였고, 무리를 이끌고 정토(征討)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명제) 태녕(太寧: 323-325) 말에는 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임명되고

조선공(朝鮮公){낙랑군 조선현의 縣公}으로 올려 봉해졌다.

 

333년 5월에 모용외가 죽자 그 지위{요동공}를 이었고 평북장군(平北將軍)

행(行,대행의 의미) 평주자사(平州刺史)가 되어 부(部) 내부를 독섭(督攝)했다.

 

얼마 뒤에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가 그의 별부(別部) <일두귀逸豆歸>에 의해

축출되어 달아나다 바깥에서 죽었다.

 

(모용)황이 기병을 이끌고 그를 치자 <(우문)일두귀逸豆歸>가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니 이에 유음(楡陰), 안진(安晉)의 두 성(城)을 쌓은 뒤에 돌아왔다.

 

같은 사건을 기술한「자치통감」권95 함화 8년(333년) 조

 

<우문걸득귀宇文乞得歸>가 그의 동부대인 <일두귀逸豆歸>에게 내쫓겨 달아나다

바깥에서 죽었다.

 

<모용황>이 군대를 이끌고 이를 쳐서 광안(廣安)에서 싸웠다.

{(호삼성 왈) 광안(廣安)은 극성(棘城)의 북쪽에 있었다.}

 

<일두귀>가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니

<모용황>이 유음(楡陰), 안진(安晉)의 두 성을 쌓은 뒤에 돌아왔다.

{유음성(楡陰城)은 대유하(大楡河)의 남쪽(陰)에 있었고

안진성(安晉城)은 위덕성(威德城)의 동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당초 <모용황慕容皝>의 서형(庶兄)인 건위(建威)(장군) <모용한慕容翰>이

효무(驍武,날래고 용맹함)하며 웅재(雄才)가 있었으므로

평소 <모용황>에게 질시를 받았고 모제(母弟)인 정로(征虜)(장군) <모용인慕容仁>과 광무(廣武)(장군) <모용소慕容昭>가 아울러 <모용외>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모용황>이 그들에게 또한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모용외>가 죽자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이때에 이르러 <모용한慕容翰>이 <단요段遼>)에게로 달아나고

<모용인>은 <모용소>에게 권하여 거병해 <모용황>을 폐위시키라 하였다.

 

<모용황>이 <모용소>를 죽이고는 사자를 보내

<모용인>의 허실(虛實)을 살피게 하였는데

그 사자가 험독(險瀆)에서 <모용인>을 우연히 만났다.

 

<모용인>은 일이 발각되었음을 알아채고

<모용황>의 사자를 죽이고는 평곽(平郭)으로 돌아갔다.

 

<모용황>은 그의 동생인 건무(建武)(장군) <모용유慕容幼>와

사마(司馬,관직명) <동수佟壽> 등을 보내 이를 쳤다.

 

<모용인>이 온 군사로써 항거하니 <모용유> 등이 대패하였고

모두 <모용인>에게 붙잡혔다.

 

양평령(襄平令) <왕빙王冰>, 장군 <손기孫機>가 요동에서 (모용)황에게 반기를 드니 동이교위 <봉추封抽>, 호군(護軍) <을일乙逸>, 요동상(遼東相) <한교韓矯>,

현도태수(玄菟太守) <고후高詡> 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 (모용황에게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모용)인(慕容仁)이 요좌(遼左=요동)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되고,

거기장군, 평주자사, 요동공(遼東公)을 자칭했다.

 

<우문귀宇文歸>, <단요段遼> 및 선비(鮮卑)의 여러 부(部)가 아울러

그의 외원(外援,외부의 원조세력)이 되었다.

 

 

※ 참고

 

평곽(平郭)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평곽현(平郭縣)은 요동군에 속하고

                  진나라 때에는 폐지되었다.

                  진나라 때의 동이교위(東夷校尉)는 양평(襄平)을 다스렸는데

                  최비(崔毖)가 패하니 <모용외>는 <모용인>으로 하여금

                  요동을 진수하며 평곽을 다스리게 하였다.

 

<동수佟壽> : (진서의) 각 본에서는 <동도佟燾>로 적었고

                   다만 송본(宋本)에서만 <동수佟壽>로 적었다.

                  「자치통감」권95에서 또한 <동수佟壽>로 적었으니

                   이제 송본(宋本)에 따른다.

                   이때 <모용인>에게 붙잡힌 <동수>는 투항하여

                   <모용인>의 수하가 된 것으로 보이며

                   336년에 <모용인>이 <모용황>에게 져서 패망할 때는

                   다시 고구려로 달아난다.

                   고구려의 안악3호분 묵서명에 나오는 <佟壽>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함화(咸和) 9년(334년), <모용황>이 그의 사마(司馬,관직명)인 <봉혁封弈>을 보내

백랑(白狼)에서 선비(鮮卑)족 목제(木堤)를 공격하고 양위(揚威)(장군) <숙우淑虞>는

평강(平堈)에서 오환(烏丸)족 실라후(悉羅侯)를 공격하게 하여 그들을 모두 베었다.

 

재관(材官) <유패劉佩>는 을련(乙連)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단요段遼>가 <모용황>의 영지인 도하(徒河)를 침범하니

<모용황>의 장수 <장맹張萌>이 이를 역격(逆擊)하여 격파했다.

 

<단요>의 동생 <단란(段蘭>이 (앞서 단선비에게로 달아났던 모용황의 서형인)

<모용한慕容翰>과 함께 유성(柳城)을 침범하자

도위(都尉) <석종石琮>이 이를 공격해 격파했다.

                    

열흘 남짓 뒤에 <단란段蘭>, <모용한慕容翰>이 다시 유성(柳城)을 포위하자

<모용황>이 영원(寧遠)(장군) <모용한慕容汗>과 <봉혁封弈>등을 보내 이를 구원했다.

 

<모용황>이 <모용한慕容汗>에게 경계하며 말했다,

 

“적의 숫자가 많고 기세가 날카로워 쟁봉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만전을 기하여 신중히 처신해야 하며 경솔히 진격하지 말라.

필히 군대가 집결하고 진(陣)이 정비될 때를 기다린 연후에 공격하도록 하라.”

 

<모용한慕容汗>은 성정이 효예(驍銳,사납고 날카로움)하니

천여 기(騎)를 보내 전봉(前鋒,선봉)으로 삼아 진격하게 하였다.

 

<봉혁封弈>이 이를 말렸으나 <모용한慕容汗>은 따르지 않았고

<단란段蘭>에게 패하여 태반이 죽었다.

 

<단란段蘭>이 다시 유성(柳城)을 공격하며

비제(飛梯,운제.구름사다리)를 만들고 땅굴을 파고 20일을 포위하였다.

 

<석종石琮>이 몸소 장졸들을 이끌고 출격하여 격파하고 1,500급을 참수하니

이에 <단란>이 달아나서 돌아갔다.

 

 

※  참고

 

을련(乙連) 段 선비의 세력권 또는 우호적인 종족이나 그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인다.

                  

유성(柳城) : 유성현(柳城縣)은 한나라 때에는 요서군에 속하고

                 진나라 때는 폐지되었고 당나라는 영주(營州)의 치소로 삼았다.

 

 

 

段部와 모용부의 유성전투 개요

 

<단요>가 군대를 보내 도하를 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

<단요>가 그의 동생인 <단란>과 <모용한慕容翰>을 보내 유성(柳城) 공격 →

유성도위 <석종>, 성주(城主) <모여니慕輿埿>가 지켜내자 <단란> 등은 퇴각 →

<단요>가 분노하며 반드시 함락하라고 질책 →

20일 뒤 군사를 늘려서 다시 출병하여 방패, 구름사다리 등 공성무기를 쓰며

유성을 포위한 채 맹렬히 공격,  <석종>, <모여니>가 굳게 지켜 함락하지 못함 →

<모용황>이 <모용한慕容汗>과 사마 <봉혁>을 구원군으로 보냄 →

"적의 기세가 날카로우니 쟁봉하지 말라”고

<모용황>이 <모용한慕容汗>에게 경고했으나

사납고 과단성있는 성격의 <모용한慕容汗>은 이를 무시하고

<봉혁>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서 천여 기를 전봉으로 세워 곧바로 진격 →

우미곡(牛尾谷)에서 <단란>군과 조우, <모용한慕容汗>이 대패하여

사망자가 태반에 이르렀으나 <봉혁>이 진력하여 전멸은 면함 →

<단란>이 승세를 타고 끝까지 추격하고자 하니

자신의 나라가 끝내 멸망할까 우려한 <모용한慕容翰>이 진격을 말림  →

<단란>이 그의 의중을 간파하고 들어주지 않자,

<모용한>이 자기부대를 이끌고 홀로 철군해버리려 하니

<단란>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름.

 

 

 

이 해(334년), 東晉의 成帝가 알자(謁者) <서맹徐孟>, <여구행閭丘幸> 등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가게 하여 <모용황>을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

대선우(大單于), 요동공(遼東公)으로 임명하고, 지절(持節), 도독(都督)으로서

(임의로) 승제(承制)하여 (관작을) 봉배(封拜)하는 것은

하나같이 <모용외>의 고사(故事,전례)와 같게 하였다.

 

<모용황>이 스스로 요동을 쳐서 양평(襄平,요동국 양평현)을 함락했다.

 

<모용인>이 임명한 거취령(居就令,요동군 거취현의 현령) <유정劉程>이 城을 들어

항복하고 신창(新昌,요동군 신창현) 사람인 <장형張衡>은 현령을 붙잡고 항복하였다. 

 

이에 <모용인>이 둔 태수와 현령들을 베고 遼東의 호족들을 극성(棘城)으로 옮겼고,

화양(和陽), 무차(武次), 서락(西樂)의 세 현을 둔 뒤에 돌아왔다.

 

함강(咸康: 335-342년) 초,

<봉혁封弈>을 보내 우문(宇文)(선비)의 별부(別部) <섭혁우涉奕于>를 습격하게 하니

(전리품이나 포로를) 크게 노획하여 돌아오는데,

<섭혁우涉奕于>가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자 혼수(渾水)에서 싸워 또한 격파하였다. 

 

<모용황>이 장차 바다를 건너 <모용인>을 치려 하자 뭇 신하들이 모두 간언하며

 

‘바닷길은 위태롭고 험하니 의당 뭍길(陸路)로 쳐야 한다.’고 하였다.

 

<모용황>이 말했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얼지 않았는데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세 번이나 얼어붙었다.

옛날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얼어붙은 호타수(滹沱水)를 건너 대업을 이루었으니,

어쩌면 하늘이 내가 이를 건너 승리하도록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계획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 계획을 막는 자가 있으면 벨 것이다!”

 

그리고는 삼군(三軍)을 이끌고 창려(昌黎)로부터 얼음을 밟으며 진격했다.

 

<모용인>은 <모용황>이 올 것을 헤아리지 못하였고

<모용황>의 군이 평곽(平郭)에서 7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에야

<모용인>의 후기(候騎,척후기병)가 (적군이 쳐들어왔다고) 고하니

<모용인>이 낭패(狼狽)스러워하며 출전하였다가 <모용황>에게 사로잡혔고,

<모용황>은 <모용인>을 죽인 뒤에 돌아왔다.

 

 

같은 사건을 기술한「자치통감」권95의 함강 2년(336년) 조 

 

(함강2년=336년 정월)

 

<모용황慕容皝>이 장차 <모용인慕容仁>을 치려 하니

 

사마(司馬) <고후高詡>가 말했다, 

 

“<모용인>이 반란하여 임금과 육친을 저버려 신령과 백성들이 분노하니,

예전에 이 바다가 일찍이 언 적이 없으나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는

해마다 그리하여 세 번을 얼었습니다.

게다가 <모용인>이 오로지 뭍길(陸道)만을 방비하고 있으니

어쩌면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그를 습격하도록 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용황>이 이를 따랐다.

 

뭇 신료들이 모두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므로

뭍길로 가느니만 못하다고 하니

 

<모용황>이 말했다,

 

“내 계획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감히 이를 막는 자는 벨 것이다!”

 

임오일(19일),

 

<모용황>이 그의 동생인 군사장군(軍師將軍) <모용평慕容評> 등을 거느리고

몸소 창려(昌黎)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얼음을 밟으며 진격했다.

 

총 3백여 리를 가서 역림구(歷林口)에 이르러 치중(輜重)을 버리고

경병(輕兵)으로 평곽(平郭)으로 나아갔다.

 

평곽성으로부터 7 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모용인>의 후기(候騎)가 <모용인>에게 고했다.

 

<모용인>이 낭패스러워하며 출전했다.

 

<장영張英>이 두 나라의 사자(二使)를 사로잡았을 때에

그를 끝까지 추격하지 못한 것을 <모용인>이 한스러워하였으니,

<모용황>이 당도하자 <모용인>은

<모용황>이 다시 주력군이 아닌 소부대를 보내

가벼운 차림으로 출병시켜 약탈하는 것인 줄 알고

<모용황>이 직접 왔다는 것을 모른 채 좌우(左右)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 

 

을미일(2월 3일),

 

<모용인>이 전군으로 성 서북쪽에 진(陳)쳤다.

 

<모용군慕容軍>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모용황>에게 항복하여

<모용인>의 무리가 기가 꺾이고 동요하니

<모용황>이 이를 틈타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모용인>을 대파했다.

 

<모용인>은 달아났으나 그의 휘하가 모두 배반하니 마침내 붙잡혔다.

 

<모용황>은 배반한 <모용인>의 부하들을 먼저 베어죽이고

그 연후에 <모용인>을 사사(賜死)했다.

 

<정형丁衡>, <유의游毅>, <손기孫機> 등은

모두 <모용인>에게 신임되고 중용되었으니

<모용황>이 그들을 붙잡아서 베어 죽였고 <왕빙王冰>은 자살했다.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동수佟壽>, <곽충郭充>,

<적해翟楷>, <방감龐鑒>은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모용유>는 도중에 돌아왔고,

<모용황>의 군사가 추급하여 <적해>, <방감>은 베어죽이고,

<동수>, <곽충>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모용인>에 의해 그르쳐진 나머지 관리와 백성들은 <모용황>이 모두 사면해주었다.

 

<고후高詡>를 여양후(汝陽侯)로 봉했다.

 

 

 

<단요段遼>가 그의 장수 <이영李詠>을 보내

무흥(武興){영지(令支)의 동쪽}을 야습하게 하였는데

비를 만나 군을 이끌고 돌아가자

도위(都尉) <장맹張萌>이 뒤쫓아 공격하여 <이영>을 사로잡았다.

 

<단란段蘭>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곡수정(曲水亭)에 주둔하며

장차 유성(柳城)을 공격하려 하였고,

<우문(일두)귀>는 안진(安晉)으로 들어와 노략질하며 <단란>을 위해 성원(聲援)했다.

 

<모용황>이 보기(步騎) 5만으로 이를 공격하여 군대가 유성(柳城)에 주둔하자

<단란>, <우문귀>가 모두 달아났다.

 

<봉혁封弈>을 보내 경기(輕騎,경기병)를 이끌고 뒤쫓으며 공격하게 하니

이들을 격파하고 그 군실(軍實)을 거두고는,

그들의 관사에서 그들의 군량을 먹으며 20일을 지낸 뒤에 돌아왔다.

 

<모용황>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두 로(虜){단씨와 우문씨}가 수치스럽게도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분명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다.

의당 유성(柳城) 좌우에 복병을 두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봉혁封弈>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마두산(馬兜山)의 여러 길에 잠복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에 <단요>의 기병이 과연 도착하였고,

<봉혁>이 이를 협격(夾擊)하여 대파하고 그의 장수 <영보榮保>를 베었다.

 

겸장사(兼長史) <유빈劉斌>, 낭중령(郞中令) <양경陽景>을 보내

(동진의 사자로 와 있던) <서맹徐孟> 등을 호송하며

경사(京師, 동진의 수도 즉 건업)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의 세자(世子)인 <모용준慕容儁>에게 <단요段遼>의 여러 성을 치게 하고

<봉혁封弈>은 우문(宇文)의 별부(別部)를 치게 하니,

이들이 모두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납간지목(納諫之木)를 세우고 당언(讜言,곧은 말)의 언로를 열었다.

 

뒤에 창려군(昌黎郡)으로 옮기고, 을련(乙連)의 동쪽에 호성(好城)을 쌓아

장군 <난발蘭勃>로 하여금 둔수하며 을련(乙連)을 핍박하게 하고

또한 곡수(曲水)에 성을 쌓아 <난발>을 성원했다.

 

을련(乙連)에 매우 심한 기근이 들어 <단요>가 을련으로 곡식을 보내자

<난발蘭勃>이 이를 요격해서 빼앗았다.

 

<단요>가 장수 <굴운屈雲>을 보내 흥국(興國)을 공격하니

<모용황>의 장수 <모용준慕容遵>과 더불어 오관수(五官水) 가에서 크게 싸워

<굴운>이 패하였고, <모용준>이 <굴운>을 베고 그 무리들을 모두 붙잡았다.

 

「자치통감」권95에 의하면,

 

<모용황>이 을련성(乙連城){을련성은 단국段國의 동쪽 경계이며 곡수曲水의 서쪽}

동쪽에 好城을 쌓고 절충장군(折衝將軍) <난발>에게 지키게 한 것은

337년(함강 3년) 3월

 

<단요>가 수레 수 천 대로 을련성에 곡식을 실어 나르자 <난발>이 탈취한 것은

같은 해 4월

 

<단요>가 종제(從弟)인 양위장군(揚威將軍) <굴운>을 보내 흥국성에 있던

<모용황>의 아들 <모용준慕容遵>을 야습하게 하자 <모용준>이 이를 격파한 것은

같은 해 6월의 일.

 

 

 

<봉혁封弈> 등은 <모용황>의 임무가 무거운데도 지위가 가벼우니

의당 연왕(燕王)을 칭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모용황>이 함강 3년(337년)에

참람되이 왕위(王位)에 오르고는 그 경내(의 죄인들)을 사면했다.

 

<봉혁封弈>을 국상(國相), <한수韓壽>를 사마(司馬)로 삼고,

<배개裴開>, <양무陽騖>, <왕우王寓>, <이홍李洪>, <두군杜羣>, <송해宋該>,

<유첨劉瞻>, <석종石琮>, <황보진皇甫眞>, <양협陽協>, <송황宋晃>, <평희平熙>,

<장홍張泓> 등을 아울러 열경(列卿)이나 장수(將帥)로 임명했다. 

 

문창전(文昌殿)을 세우고 금근거(金根車)를 타고 다니며 말 여섯 마리가 끌게 하고

출입할 때에 경필(警蹕,행차할 때 경계하며 함부로 나다니는 것을 금함)을 칭하였다.

 

그의 처 단씨(段氏)를 王后로 삼고 세자 <모용준慕容儁>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모두 위무(魏武){위무제 조조}, 진문(晉文){진문제 사마소司馬昭}이

보정(輔政)하던 때의 고사(故事,전례)대로 하였다.

 

 

<모용황>은 <단요段遼>가 여러 차례 변경에 우환을 끼치므로

장군 <송회宋回>를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石虎}에게 보내

칭번(稱藩,칭신)하고 <단요>를 칠 군대를 청했다.

 

이에 <석계룡>이 군대를 총괄하여 진격하고, <모용황>은 제군(諸軍)을 이끌고

<단요>의 (도읍인) 영지(令支) 이북의 여러 성을 공격했다.

 

<단요>가 그의 장수 <단란段蘭>을 보내 항거하니 크게 싸워 <단란>을 격파하고

수천 급을 베고 5천여 호(戶)를 약탈하고는 돌아왔다.

 

<석계룡>이 서무(徐無){북평군 서무현}에 이르자

<단요>는 밀운산(密雲山)으로 달아났다.

 

<석계룡>이 진격하여 영지(令支)로 들어와서는

<모용황>이 약속을 어기고 군대를 합류시키지 않았음에 분노하여

진군하여 그를 치려고 극성(棘城)에 이르렀다.

 

융졸(戎卒) 수십만으로 사면(四面)에서 진공하니 군현(郡縣)이나 여러 부(部) 중에서

<모용황>을 배반하고 <석계룡>에 호응한 자가 36개 성(城)에 이르렀다.

 

서로 대치한 지 열흘 남짓 지나자 좌우(左右)의 수하들이

<모용황>에게 항복하도록 권했다.

 

<모용황>이 말했다,

 

“고(孤)가 바야흐로 천하를 차지하려는데 어찌 남에게 항복하겠느냐!”

 

아들인 <모용각慕容恪> 등을 보내 기병 2천을 이끌게 하니

새벽에 출전해 <석계룡>군을 공격했다.

 

<석계룡>의 제군(諸軍)이 놀라고 어지러워져 갑옷을 버리고 달아났다.

 

<모용각>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3만여 급을 참획(斬獲)하였고,

범성(凡城)을 쌓고 수비병을 두어 이를 둔수하게 하고는 돌아왔다.

 

<단요段遼>가 사자를 보내 <석계룡>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군대를 내어 지원해 줄 것을 청했다.

 

<석계룡>이 그의 장수 <마추麻秋>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단요>를 맞이하게 하니,

<모용각>이 정예기병 7천을 밀운산(密雲山)에 복병으로 두어 이를 대파하고

그의 사마(司馬) <양유陽裕>, 장군 <선우량鮮于亮>을 붙잡고

<단요段遼>와 그의 부하들을 붙잡아서 돌아왔다.

 

 

「진서」권7 성제기

 

(함강) 4년(338년)

봄 2월, <석계룡石季龍>이 군사 7만을 거느리고

요서에서 <단요段遼>를 공격하니 <단요>가 평강(平崗)으로 달아났다.

 

여름 4월, <이수李壽>가 <이기李期>를 시해하고 참람되이 거짓 지위에 오르고는

국호를 한(漢)이라 했다.{저족이 촉 지방에 세운 성한成漢을 말함}

 

<석계룡>이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했다.

 

계축일(3일), <모용황>에게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을 더했다.

 

 

 

황제가 또 사자를 보내 <모용황>을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 유주목(幽州牧),

영(領,겸직의 의미)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올리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더하고 식읍을 1만 호 늘려주었으며,

지절(持節), 도독(都督), 선우(單于), 공(公){요동공}은 예전과 같았다.

 

<모용황>의 전군사(前軍帥) <모용평慕容評>이

<석계룡>의 장수 <석성石成> 등을 요서(遼西)에서 격파하고

그의 장수 <호연황呼延晃>, <장지張支>를 베고 천여 호(戶)를 약취한 뒤에 돌아왔다.

 

<단요段遼>가 모반하자 <모용황>이 그를 주살했다.

 

<석계룡>이 또한 <석성石成>을 시켜 범성(凡城)을 공격하게 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진격하여 광성(廣城)을 함락했다.

 

<모용황>이 비록 연왕(燕王)을 칭했으나 (이를 허락하는) 조명(朝命)이 없으니

이에 장사(長史) <유상劉祥>을 보내 경사(京師)에 전리품을 바치며

권가(權假,임시로 직무를 대행함)한 뜻을 말하고

아울러 군사를 크게 일으켜 중원(中原)을 토평(討平)하기를 청하였다.

 

또한 <유량庾亮>이 죽고 동생인 <유빙庾冰>, <유익庾翼>이 뒤를 이어

장상(將相)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臣)이 전대의 어둡거나 밝은 임금에 관해 궁구하며 살펴보니,

만약 현명한 이를 친임하여 함께 세우면 공을 이루며 천하가 승평(升平,태평)하고,

후족(后族,황후의 친족)을 친임하면 반드시 나라가 기울어지고

모욕을 당하는 화(禍)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의 신백(申伯)은 현구(賢舅)라 칭해졌으나

스스로 바깥에서 번신이 되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습니다.

 

진(秦)나라 소왕(昭王) 때로 내려와서는

그는 족히 영주(令主,훌륭한 군주)라 할 만했으나

두 명의 구(舅){황제의 외삼촌 등 왕실의 외척}를 신임하고 대임을 맡겼다가

거의 나라를 어지럽힐 뻔 했습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전분田蚡>을 추중(推重,추앙하여 존중함)하여

만기지요(萬機之要,집정자의 중요한 정무) 중에 그가 결정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전분>이 죽은 뒤에 이를 갈며 한스러워하였습니다.

 

성제(成帝)는 암약(闇弱)하여 자립하지 못하니 안으로는 아름다운 처에게 미혹되고

밖으로는 다섯 구(舅)가 방종하게 하여

끝내 왕망(王莽)이 편안히 앉아 제위(帝位)를 탈취하도록 하였습니다.

매번 이 일을 읽을 때마다 그 어느 누가 통완(痛惋,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구씨(舅氏,외삼촌)가 현명하여 양후(穰侯), <왕봉王鳳>과 같다 하더라도,

두 명의 신하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두 명의 임금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그{구씨(舅氏)}가 재능을 갖춘 이가 아니라면

<두헌竇憲>, <양기梁冀> 때와 같은 화(禍)가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성패(成敗)는 또한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이니

만약 이를 고치고 본보기로 삼는다면 뒤집히고 무너지는 화가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세상에 드문 하늘이 내린 빼어난 분으로

진(晉)나라의 도(道)를 융성케 해야 마땅하나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 때를 만나

걱정거리는 많고 그에 대한 방비책은 미미하여

지난 일을 추술(追述)하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 까닭을 고찰해보면

실로 고(故) 사공(司空) <유량庾亮>이 원구(元舅)의 존엄한 지위에 거하여

무거운 세업(勢業,권세와 대업)을 맡아 집정(執政), 재하(裁下)하면서

변경의 장수들을 업신여긴 데서 비롯되었으니,

이 때문에 <소준蘇峻>, <조약祖約>이 그 분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나라를 망치게 하였고

태후께서 발분하여 하루아침에 승하(升遐)하게 만드는데 이르렀습니다.

 

만약 사직이 보우하지 않고 사람과 신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과 같은 (흉악한) 마음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예전의 일을 잊지 않고 뒷일의 귀감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중서감(中書監), 좌장군(左將軍) <유빙庾冰> 등이

안으로는 추기(樞機,중추가 되는 주요한 사무나 지위)를 장악하고

밖으로는 상장(上將)의 지위를 꿰차니

<유빙>의 형제들이 모두 늘어서서 신하 중에 그에 견줄만한 자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위양(渭陽=舅父.외삼촌)을 매우 돈독히 대우하더라도

<유빙> 등이 스스로 목을 빼고 (물러나야) 마땅합니다.

 

신이 늘 말하길,

 

‘세주(世主,당대의 임금)가 만약 구씨(舅氏)를 숭현(崇顯)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를) 번국(藩國)에 봉하여 그 녹사(祿賜,봉록과 사여)를 풍성하게 하면서

그의 세리(勢利,세력과 권리)를 제한하여 이로써 위로는 편애를 없게 하고

아래로는 사론(私論)이 없게 하지 않으시는가?’ 하였습니다.

 

그리 한다면 영욕(榮辱)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분분한 뒷얘기들이 어찌 일어나겠습니까!

 

지난날에는 다만 <유량> 한 사람 뿐이었고

(그에게는) 오랜 명망이 있었음에도 세변(世變)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하물며 지금 지위에 오른 자{유빙 등}는 평소 아무런 명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인정(人情)은 쉽게 미혹되기 마련이며

집집마다 일일이 상세한 사정을 고하기도 어려우니,

설령 폐하께서 저들에게 아무런 사사로운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천하인들 중 그 누가 사사로운 마음이 없다고 여기겠습니까!

 

신은 <유빙>등과 그 명위(名位)가 매우 다르고 출처(出處)가 멀리 떨어져 있으며

또한 <유빙> 등은 나라의 친척이니

이치상 제가 응당 승복하고 따르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홀로 중론을 거스리며 이런 말을 올리는 것은

위로는 폐하를 위함이고 물러나서는 <유빙>을 위한 계책으로,

비위나 맞추는 신하들이 조정의 득실을 좌시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위태로워져 넘어지는데도 직간하며 부축하지 않으니

저런 재상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옛날 한나라 때 <서복徐福>은 곽씨(霍氏)를 경계할 것을 진술하였으나

선제(宣帝)가 따르지 않고 충신들이 다시 역족(逆族)이 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살핌에 있어 자세하지 않고 방비함에 있어

미리미리 점차적으로 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이 지금 진술하는 바는 가히 점차적으로 방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신의 충심을 오해하고 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일이 지난 뒤에 다시곤경에 지경에 이를까 두려울 뿐입니다.

 

옛날 한나라 때의 왕장(王章), <유향劉向>은 매번 봉사(封事)를 올리며

외척인 왕씨(王氏)를 배척하라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두 명 중 한 명은 죽임을 당하고 한 명은 형(刑)을 받았습니다.

 

<곡영谷永>, <장우張禹>는 주저하며 직언을 고하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몸이 용납되고 화는 면했으나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신은 피발(被髮)하고 풍속이 중국과 서로 다른 이민족 출신으로

상장(上將)의 지위를 얻어 밤낮으로 오로지 보답할 길이 없음을 근심합니다.

 

다만 밖으로는 구수(寇讐,원수)를 진멸하고

안으로는 충규(忠規,충성스러운 규간)를 다하며

진력수성(陳力輸誠)하여 국은(國恩)에 보답할 뿐입니다.

만약 신이 이를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가 하겠습니까!”

 

또한 <유빙>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그대(君)는 초방지친(椒房之親,왕후 친정의 친척)이자 구씨(舅氏)의 친척으로

추기(樞機)를 총괄하고 왕명(王命)을 출납하며

열장(列將), 주사(州司,주州의 관리)의 지위를 겸하고 형제가 망라하여

기전(畿甸,경기지역이나 그 주변)에 현달되어 퍼져 있습니다.

 

진(秦), 한(漢) 이래로 융혁(隆赫,현귀함)이 극에 달한 것이

어찌 이와 같은 때가 있었습니까!

 

내가 보건대 만약 공을 이루고 큰일을 행한다면

필시 (주나라 때의) 신백(申伯)과 같은 명성을 누릴 것이나 혹 그렇지 못한다면

(후한 때의) 양(梁){양기梁冀}, 두(竇){두헌竇憲}의 선례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매번 사(史), 전(傳)을 볼 때마다 일찍이 모족(母族)을 총자(寵恣,총애하여 방임함)하여

그들이 집권해 조정을 어지럽히게 만들지 않은 적이 없고,

앞서서 남다른 영예를 받았다가

뒤이어 부승(負乘)의 누(累)를 끼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른바 ‘총애가 지나쳐 족히 해를 끼친다’ 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늘 역대의 임금들이 재앙이 싹트기 전에 방비하여

총애를 적당한 선에서 끝내는 방책을 다하지 못했던 것에 분한 마음이 들었으니,

어찌하여 한 곳의 땅에 봉하여 번국(藩國)으로서 서로 잇게 하여

주(周)나라 때의 제(齊)나라, 진(陳)나라처럼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 했다면 모족들은 길이 번왕으로서 남면(南面)하는 존귀함을 보존했을 것이며

또한 어찌 내쫓기거나 모욕당하는 우환을 겪었겠습니까!

 

후한 때의 <두무竇武>, <하진何進>은 선(善)을 좋아하며 자신을 비우고

현사(賢士)들이 그들에게 마음으로 귀부하였고

비록 환관에게 해를 입었으나 천하 인들이 애통해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도리어 지위에 올라 교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일을 도모하여 살신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사해(四海)에 큰 위태로움이 있어

중하(中夏)는 참역(僭逆)한 도적에게 넘어가고

백성들의 집안에는 유혈의 원망이 있고

사람들에게는 복수하고자 하는 원한이 있는데,

어찌 편안히 잠자며 소요(逍遙)하고 고아한 담론이나 하며 세월을 보낸단 말입니까!

 

제가 비록 덕이 부족하나

선제(先帝)로부터 열장(列將)에 임명되는 과분한 은혜를 입고

여러 군(郡)의 백성들을 맡아 여전히 강로(强虜)를 병탄하고자 하니,

이 때문에 근자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칼날을 맞부딪치며 싸움하여

한 계절에는 농사에 힘쓰고 세 계절에는 용병하였으나

도리어 사졸들은 피곤해하지 않고 창고에는 넉넉한 곡식이 있으며

적인(敵人)은 날로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의 지경은 날로 광대해지고 있는데,

하물며 왕자(王者)의 위엄과 당당한 기세를 어찌 이와 함께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고

 

전분(田蚡) : 한무제의 모친인 왕태후의 동복동생.

부승(負乘) : 자격없는 이가 과분한 직위를 맡는 것

 

 

「자치통감」권96 함강 5년(=339년) 조에서는 이 무렵의 사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

 

함강 5년 (339년) 4월

연(燕)나라의 전군사 <모용평慕容評>, 광위장군 <모용군慕容軍>,

절충장군 <모여근慕輿根>, 탕구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조(趙)나라의 요서(遼西)를 습격하여 천여 가(家)를 사로잡은 뒤 돌아갔다.

 

조(趙)나라 진원장군 <석성石成>, 적노장군 <호연황呼延晃>,

건위장군 <장지張支> 등이 이를 뒤쫓으니

<모용평> 등이 더불어 싸워 <호연황>, <장지>를 참수했다.

 

<단요段遼>가 연나라에 모반하자 연나라 사람들이 <단요>와

그의 당여(黨與,일당) 수십 명을 죽이고는 <단요>의 수급을 조나라로 보냈다

…(중략)…

겨울, 장사 <유상劉翔>{위의 <유상劉祥>인 듯},

참군 <국운鞠運>을 보내 전리품을 바치고

논공하며 권가(權假)한{연왕을 자칭한} 뜻을 말하고

아울러 기일을 정해 군사를 크게 일으켜 함께 중원을 평정할 것을 청했다.

<자치통감 권96 진기18>

 

함강 6년(340년) 2월,

<모용황>과 <석계룡>의 장수 <석성石成>이 요서에서 싸워

<모용황>이 이를 격파하고 전리품을 경사(京師)로 보내 바쳤다.

<「진서」권7 성제기>

 

 

 

- 趙燕전쟁과 모용황 연왕 즉위 개요

 

338년(함강 4년)

<석호>와 <모용황>의 <단요> 협공 및 <석호>의 <모용황> 공격, 극성 포위 →

 

339년(함강 5년) 여름,

<모용황>군과 <석호>군의 요서전투, <석호>군을 격파 →

 

그해 겨울, 연왕 책봉을 받기 위해 <유상> 등을 사자로 하여

전리품을 들려 건업으로 보냄 (자치통감) →

 

340년(함강 6년) 2월, 건업에 도착,

국구 <유량>이 그해 1월에 죽었음을 알게 되고,

이를 전해들은 <모용황>이 다시 표문을 올림 →

 

341년(함강 7년), <모용황>의 사자가 표문과 서신을 지니고 다시 건업에 도착해

대장군, 연왕의 장새를 요구하자 2월 기묘일(16일)에 허락 →

7월, <유상>과 진나라의 사자인 <곽희郭悕>가 <모용황> 측에 도착해 정식임명

 

(장황한 얘기를 복잡하게 늘어놓은 것은

이 사안이 모용황이 고구려를 처음 공격한 시점을 가늠하는데 관련되기 때문이다.)

 

 

<유빙>이 표문과 서신을 읽어보고 매우 우려하였고

그{모용황}가 멀리 떨어져 있어 제어할 수 없으므로

마침내 <하충何充> 등과 함께 주청하여 <모용황>이 연왕(燕王)을 칭하도록 하였다.

 

그 해,  <모용황>이 고구려(高句麗)를 치니

고구려 왕 <쇠釗>가 맹약을 청하므로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쇠釗>가 그의 세자(世子)를 <모용황>에게 보내 조현하게 하였다.

 

여기서 그 해(其年)를 <유빙> 등이 <모용황>의 연왕 임명을 주청한 해나

<모용황>의 표문이 건업에 도착한 해로 보면 앞서 보았듯 341년이 되고,

<모용황>이 표문을 적은 해로 보면 340년이다.

 

한편,「자치통감」과「삼국사기」에서는 339년(고국원왕 9년, 동진 함강 5년)에

<모용황>이 고구려를 쳐서 신성(新城)에 당도하자

고구려왕 <쇠>가 맹약을 청하므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또한「삼국사기」에서는 그 이듬해인 340년에

고구려 왕이 세자를 보내 조현했다고 기술)

 

「자치통감」에서 339년의 일로 적은 것이 어떤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자체 고증에 의한 정리인지는 모르겠다.

 

「삼국사기」의 경우는 중국 측 사료를 인용할 때 대개 그렇듯

「자치통감」의 기년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초 338년에 <단요段遼>가 패할 때에 건위(장군) <모용한慕容翰>은

우문귀(宇文歸)에게로 달아났는데,

평소 자신이 위명(威名)을 떨쳤으므로 끝내 몸을 보전하지 못하리라 여기니

이에 겉으로 미친 척 하며 폭음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크게 노래를 불러댔다.

 

<우문귀>가 이를 믿고 금(禁)하지 않았으므로 마음대로 주유(周遊) 할 수 있게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산천(山川)의 형편(形便)과 공전(攻戰,싸움)의 요로(要路)에 관해

익히지 않는 바가 없었다.

 

<모용황>이 상인(商人) <왕차王車>를 보내 <모용한>을 은밀히 살펴보게 하니

<모용한>은 <왕차>를 보고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가슴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왕차>가 돌아와 이를 고하자 <모용황>이 말했다,

 

“<모용한>이 돌아오고 싶어하는구나.”

 

그리고는 <왕차>를 보내 <모용한>에게 활과 화살을 주니

이에 <모용한>이 <우문귀>의 준마(駿馬)를 훔치고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는 <모용황>에게로 돌아왔다.

 

<모용황>이 <석계룡>을 도모하고자 하여 종용(從容)히 제장들에게 말했다,

 

“<석계룡石季龍>은 스스로 낙안(樂安)의 여러 성들의 수비가 엄중하다 여겨

성(城)의 남쪽과 북쪽은 필시 방비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만약 사잇길을 통해 출기불의(出其不意)한다면

기주(冀州)의 북쪽 땅을 모두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기병 2만을 이끌고 열옹새(蠮螉塞)를 나와 멀리 달려가서

계성(薊城)에 도착하고 진격하여 무수진(武遂津)을 건너 고양(高陽)으로 들어가며

지나는 곳마다 쌓아놓은 것을 불태우고 유주, 기주의 3만여 호(戶)를 약탈하여

자신의 영지로 옮겼다.

 

고양(高陽)은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기주 고양국 고양현,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기주 하간국 고양현이다.

 

<양유陽裕>, <당주唐柱> 등을 시켜 용성(龍城)을 쌓고 궁묘(宮廟)를 세우게 하고

유성(柳城)을 고쳐 용성현(龍城縣)이라 하였다.

 

그러자 성제(成帝)가 겸(兼) 대홍려(大鴻臚) <곽희郭希>에게 부절을 지니고 가게 하여

<모용황>을 시중(侍中), 대도독하북제군사(大都督河北諸軍事), 대장군(大將軍),

연왕(燕王)으로 임명하며 그 나머지 관직은 예전대로 하였다.

 

여러 공신(功臣)들 백여 명을 봉했다.

 

咸康七年(341), 皝遷都龍城. 率勁卒四萬, 入自南陝, 以伐宇文·高句麗,

又使翰及子垂爲前鋒, 遣長史王㝢等勒衆萬五千, 從北置而進.

高句麗王釗謂皝軍之從北路也, 乃遣其弟武統精銳五萬距北置, 躬率弱卒以防南陝.

翰與釗戰于木底, 大敗之, 乘勝遂入丸都, 釗單馬而遁. 皝掘釗父利墓,

載其尸幷其母妻珍寶, 掠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毁丸都而歸.

明年, 釗遣使稱臣於皝, 貢其方物, 乃歸其父尸.

 

함강 7년(341년), (모용)황(慕容)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했다.

 

경졸(勁卒,굳센 병졸.강병) 4만을 이끌고 남섬(南陝)으로부터 들어가며

우문(宇文)과 고구려(高句麗)를 치고

또한 <모용한慕容翰>과 <모용황>의 아들인 <모용수慕容垂>를 선봉으로 삼고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보내 1만5천 무리를 이끌게 하니

북치(北置)로부터 진격하였다.

 

고구려왕 <쇠釗>는 <모용황>의 군대가 북쪽 길로 올 것이라 여기니

이에 그의 동생 <무武>를 보내 정예(精銳) 5만을 통수하게 하여

북치(北置)에서 항거하고, 자신은 약졸(弱卒)들을 이끌고

남섬(南陝){남협南陜?}을 방어했다.

 

<모용한>이 <쇠釗>와 더불어 목저(木底)에서 싸워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마침내 고구려의 도읍인 환도(丸都)로 들어가니

<쇠釗>는 단기필마로 달아났다. 

 

<모용황>은 <쇠釗>의 부친인 <리利>{을불리乙弗利}의 묘(墓)를 파헤쳐

그 시신과 사로잡은 그의 모친과 처, 진보(珍寶)들을 수레에 싣고

남녀 5만여 구(口)를 약득하고 그의 궁실(宮室)을 불태우고

환도(丸都)를 허문 뒤에 돌아왔다.

 

그 이듬해, <쇠釗>가 사자를 보내 <모용황>에게 칭신하고

그들의 방물(方物,토산품)을 바치니 이에 그의 부친 시신을 돌려주었다.

 

(함강 8년,고국원왕 12년,서기 342년) 겨울 10월,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하고

 

{<모용황>의 부친인 <모용외慕容廆>가 처음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에 거주하다

뒤에 극성(棘城)으로 옮겼었는데 이때에 극성으로부터 용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두우杜佑>통전 주군전(州郡典)에서

‘영주(營州) 유성군(柳城郡)은 옛날의 고죽국(孤竹國)이며

춘추시대에는 산융(山戎), 비자(肥子) 두 나라의 땅이었다.

한나라 때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은

유성군으로부터 동쪽으로 19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극성(棘城)은 즉 전욱(顓頊)의 옛터로

유성군으로부터 동남쪽으로 17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모용황>은 유성(柳城)의 북쪽, 용산(龍山)의 남쪽을 복덕지지(福德之地)로 여겨

마침내 용성(龍城)으로 천도하고 새로 지은 궁을 화룡궁(和龍宮)이라 불렀다.

유성현에는 백랑산(白狼山)과 백랑수(白狼水)가 있으며

또한 한나라 부리현(扶犁縣)의 옛 성이 그 동남쪽에 있다.

그곳의 용산(龍山)이 즉 모용황이 용에게 제사지낸 곳이다.

요락수(饒樂水)와 한나라 도하현(徒河縣)의 성(城)이 있다.’고 하였다.}

 

경내의 (죄인들을) 사면했다.

 

건위장군 <모용한慕容翰>이 <모용황>에게 말했다,

 

“우문(宇文)이 강성한 날이 오래되어 늘 나라의 우환이었습니다.

 

이제 <일두귀逸豆歸>가 찬역하여 나라를 훔쳐 차지해

{<일두귀逸豆歸>가 <걸득귀乞得歸>를 내쫓았다.

 제95권 함화 8년(333년) 조에 보인다.}

뭇사람들의 인심이 귀부하지 않는데다가

그 천성이 우매하고 장수로서의 재능이 없어

나라에는 방위(防衛)가 없고 군(軍)에는 부오(部伍)가 없습니다.

 

신이 그 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러 그 지형(地形)을 잘 알고 있으며,

비록 우문씨가 멀리 강갈(强羯)에 붙었으나

{강갈(强羯)은 <석호>의 趙나라를 말한다.}

서로 성세(聲勢)가 접해있지 않아 구원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제 만약 우문씨를 공격한다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는 우리나라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고

늘 몰래 엿봄이 있으니 고구려는 우문(宇文)이 패망한 뒤에는

장차 화(禍)가 자신들에게 미칠 것임을 알고

필시 우리가 우문씨를 공격하는 빈틈을 타

깊이 침입해 방비하지 못할 때에 엄습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문씨를 공격할 때

본국에 군사를 적게 남겨두면 지키기에 충분하지 않고

많이 남기면 우문씨를 공격하는데 부족할 것입니다.

 

이는 심복(心腹)의 근심거리이니 의당 먼저 제거해야 하며,

고구려의 세력(勢力)을 볼 때 한번 싸움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문(宇文)은 스스로를 지키려고만 하는 오랑캐이므로

필시 우리가 고구려를 치는 것을 틈타 멀리 쳐들어와 이익을 다투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구려를 취한 뒤에 다시 우문을 취하는 것은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쉽습니다.

 

두 나라가 평정되면 우리가 얻을 이로움이 동해(東海)에까지 다다르고

나라는 부유하고 군대는 강성해지며 배후를 뒤돌아봐야 하는 근심이 없어질 것이니

그 연후에 중원(中原)을 도모해볼만 합니다.” 

 

<모용황>이 말했다, 

 

“훌륭하도다”

 

장차 고구려를 공격하려 하는데,

고구려로 진군하는데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어 그 중 북쪽 길은 평평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비좁으니 북쪽 길은 북치(北置)로부터 진격하고

남쪽 길은 남협(南陜)으로부터 목저성으로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북쪽 길을 통해 진격하고자 하였다.

 

<모용한慕容翰>이 말했다,

 

“로(虜){고구려}가 상정(常情)으로 헤아려 필시 대군(大軍)이

북쪽 길로 오리라 여길 터이므로 응당 북쪽을 중시하고 남쪽을 경시할 것입니다.

 

왕(王)께서 정예병을 통수해 남쪽 길로부터 공격하여 출기불의(出其不意)한다면

환도(丸都)는 족히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따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어 설령 그 소부대에 차질(蹉跌)이 생긴다 하더라도

환도가 함락되어 그 복심(腹心)이 이미 무너졌다면

사지(四支)는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모용황>이 이를 따랐다.

 

11월, <모용황>이 몸소 정예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나오며

<모용한慕容翰>, <모용패·慕容霸>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 <왕우王寓> 등을 보내 병(兵)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쇠釗>는 과연 동생 <무武>를 보내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린 채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약졸을 통수하며 남쪽 길을 방비했다.

 

<모용한慕容翰> 등이 먼저 도착하여 <쇠釗>와 합전하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었다.

 

좌상시 <선우량鮮于亮>이 말했다,

 

“신은 포로가 된 몸으로 왕에게 국사(國士)로 대우받는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이 바로 신이 죽는 날입니다.”

{<선우량>은 원래 <석호>의 장수였다가 338년 밀운산 전투에서 패할 때 사로잡혔음.}

 

단독으로 몇 기(騎)와 더불어 선두로 나가 고구려의 진(陳)을 범하여

향하는 곳마다 적을 꺾고 무너뜨리니 고구려의 진(陳)이 동요하였다.

 

그러자 <모용황>의 대군이 이를 틈타 고구려 병을 대파했다.

 

좌장사 <한수韓壽>가 고구려의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베었고

제군들은 승세를 타고 고구려 병을 추격하여 마침내 환도(丸都)로 들어갔다.

 

<쇠釗>가 단기필마로 달아나니 경거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이를 뒤쫓아

고국원왕 <쇠釗>의 모친 주씨(周氏)와 처를 붙잡아 돌아왔다.

 

때마침 <왕우王寓>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 모두 패몰하니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추격하지는 않고

사자를 보내 <쇠釗>를 불렀으나 <쇠釗>가 나오지 않았다.

 

장차 돌아가려 하니 <한수韓壽>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수비병을 두고 지킬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임금이 패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우리의 대군(大軍)이 떠난 뒤에는 분명 다시 모여들어

그 나머지 유민을 거두어 여전히 우리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청컨대 그의 부친 시신을 파내어 수레에 싣고

그의 살아있는 모친을 가둔 채 돌아가십시오.

 

그가 몸을 묶고 스스로 귀부해오는 때를 기다려

그 뒤에 시신과 모친을 되돌려주며 은혜와 신의로 안무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이를 따랐다.

 

<쇠釗>의 부친 <을불리乙弗利>의 묘를 파서 그 시신을 싣고

그의 부고(府庫)에 있던 누세(累世)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구(口)를 포로로 잡고 그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丸都城)을 헐어버린 뒤에 돌아갔다.

 

 

 

<342년 전연(前燕)과 고구려의 전쟁>

 

…(중략)…

 

(건원 원년,고국원왕 13년,343년) 봄 2월,

고구려왕 <쇠釗>가 연나라에 그의 동생을 보내 칭신(稱臣), 입조(入朝)하며

진기한 물건 수천 점을 바쳤다.

 

이에 연왕(燕王) <모용황>이 그의 부친 시신은 돌려주었으나

여전히 그의 모친은 남겨두어 인질(質)로 삼았다.

 

<우문귀宇文歸>가 그의 국상(國相) <막천혼莫淺渾>을 보내 <모용황慕容皝>을 치니

제장들이 맞서 싸울 것을 청했으나 <모용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막천혼>은 <모용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겨

술을 마음껏 마시고 사냥하고 다니며 다시 방비하지 않았다.

 

<모용황>이 말했다,

 

“<막천혼>이 이미 매우 자만하고 나태해졌으니 이제는 일전을 치러볼 만하다.”

 

<모용한慕容翰>을 보내 기병을 보내 그를 치게 하니 <막천혼莫淺渾>이 대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가 화를 면하였고, <모용한>이 그들의 무리를 모두 붙잡았다.

 

<모용황慕容皝>이 몸소 군현(郡縣)들을 순행하며

농사와 양잠을 독려하고 용성(龍城)에 궁궐을 세웠다.

 

뒤이어 또한 기병 2만을 이끌고 친히 <우문귀宇文歸>를 치며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수慕容垂>를 선봉으로 삼았다.

<우문귀>가 그의 기장(騎將) <섭혁우涉奕于>를 보내

모든 군사로써 <모용한慕容翰>에게 항거했다.

 

<모용황>이 급히 사자를 보내 <모용한>에게 말했다,

 

“<섭혁우>가 씩씩하고 사나우니 잠시 그를 피하다가

노(虜)의 기세가 교만해질 때를 기다린 연후에 공격해야 한다.”

 

<모용한>이 말했다,

 

“<우문귀>의 정예병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지금 만약 이를 이긴다면

군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우문귀>를 멸할 수 있습니다.

<섭혁우>에게는 다만 허명(虛名)이 있을 뿐 실제로는 상대하기 쉬운 약한 자이니,

적(敵)이 우리 군대의 사기를 꺾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 싸워 <섭혁우>를 베고 그 무리들을 모두 붙잡으니

<우문귀>는 멀리 막북(漠北)으로 달아났다.

 

<모용황>이 우문씨 땅을 빼앗아 천여 리 땅을 개척하고

<우문귀>의 부(部) 사람 5만여 락(落)을 창려(昌黎)로 옮기고,

섭혁우성(涉奕于城)을 위덕성(威德城)으로 이름을 고쳤다.

 

종묘에 고하는 개선의식을 행하고, 각기 차이를 두어 논공행상(論功行賞)하였다.

 

<모용한> 편에 나오는 기사 및「자치통감」권97에 의하면,

<모용황>의 우문선비 공격과 우문선비의 멸망은 344년(동진 건원 2년)의 일이다.

 

목우(牧牛)를 가난한 집에 대어주고 원(苑)에서 농사짓게 하고는

관에서 그 수확량의 8할을 거두고 나머지 2할은 개인이 가지게 하였다.

 

개인 소유의 소가 있으나 농지가 없어 또한 원(苑)에서 농사짓는 자의 경우는

공적으로 그 7할을 거두고 3할은 개인이 가지게 하였다.

 

<모용황>의 기실참군(記室參軍) <봉유封裕>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신(臣)이 듣기로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부(賦,부세)를 가볍게 하여

재부를 백성들에게 간직해 두고 3등급의 농지로 나누어

수확물의 10분의 1을 세(稅)로 거두니 추운 자는 옷 입고 굶주린 자는 먹으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였다 합니다.

 

그리하여 비록 수한(水旱)이 들어도 재앙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니

어째서 이겠습니까? 

 

농관(農官)을 고선(高選)하여 농사를 권면하는 직무에 힘쓰니

사람들이 저마다 100무(畝)를 다스리면서도 소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으며

농사일에 힘쓰는 자는 표창을 받고 농사일에 게으른 자는

관리로 임용하지 않는 벌을 받았습니다. 

 

또한 일을 헤아려 관(官)을 두고 관(官)을 헤아려 사람을 두어서

관이 필히 그 필요한 바에 부합하게 하고 헛된 지위에 있는 관리가 없게 하며

세입(歲入)의 많고 적음에 따라 녹(祿)을 주었습니다.

 

백관들에게 녹으로 주는 것 이외의 곡식은 태창(太倉)에 간직하니

3년을 농사지으면 1년의 곡식이 여유분으로 남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며 곡식을 쌓으니 공용(公用)에 어찌 부족함이 있고

수한(水旱)이 어찌 백성에게 미쳤겠습니까! 

 

비록 농사에 힘쓰라는 영을 여러 차례 발하더라도

2천석(二千石,군수)과 영장(令長,현령과 현장)들이 공무에 근실한 뜻이 없으면

지리(地利)를 모두 소모할 뿐입니다.

 

옛날의 한조(漢祖,한고조 유방)는 이런 이치를 잘 알았으므로

농지개간이 부실(不實)하다 하여 2천석(二千石) 수 십명을 불러들여 죽였으며,

이와 같이 하여 후한의 명제, 장제 때는 태평에 버금간다고 일컬어졌습니다.

 

영가(永嘉: 진 회제 307-312)의 상란(喪亂) 이래로 백성들이 유망(流亡)하니

중원(中原)이 쓸쓸해져 천 리 사이에 민가의 연기가 없어지고

기한(飢寒)이 내려 백성들이 잇달아 궁벽한 산골짜기로 흘러들었습니다.

 

선왕(先王){모용외}께서 신무성략(神武聖略)으로 일방(一方)을 보전하고

위엄으로써 간악한 자를 죽이고 덕(德)으로써 멀리까지 품어

이 때문에 구주(九州,중국) 사람들이 새외는 구주와는 서로 다른 부류임에도

포대기로 업은 채 만 리 길을 달려왔으니

마치 갓난아이가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귀부하는 것과 같았는데,

유인(流人)들이 원래 거주하던 이들보다 열배 남짓 많아서 사람은 많으나

땅은 비좁으니 이 때문에 농지가 없는 이가 열 중의 넷에 이르렀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영성(英聖)한 자질로써 선대의 업을 넓혀

남쪽으로는 강한 조(趙)나라를 꺾고 동쪽으로는 구려(句麗)를 멸하여

3천리 땅을 개척하고 호(戶,가구)는 10만을 늘렸으니,

무(武)를 계승하여 크게 넓힌 공에 있어 서백(西伯){주무왕}보다 높은 점이 있습니다.

 

의당 여러 원(苑)들을 살펴서 유인(流人)들에게 주어 이를 업(業)으로 삼도록 하며

귀부해 와서 자산(資産)이 없는 사람에게는 목우(牧牛)를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이미 전하(殿下)의 사람이니

이들에게 준다고 해서 어찌 소를 잃는 것이겠습니까!

 

재물을 잘 간직하는 자는 백성들에게 간직해 둔다 함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로써 가까이로는 낙토(樂土)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매우 잘 부응하며,

중국인들은 모두 항아리에 담은 음식을 지니고

<석계룡>을 저버리고 우리를 봉영(奉迎)할 것이니

<석계룡石季龍>이 누구와 더불어 함께하겠습니까!

 

게다가 위(魏), 진(晉)이 비록 도가 무너진 때였으나

도리어 백성으로부터 빼앗은 바가 수확물의 7, 8할에 이르지는 않아,

관우(官牛,관에서 준 소)로 농사지을 때는

관(官)에서는 6할을, 백성들은 4할을 차지하였으며,

사우(私牛,개인이 소유한 소)로 관전(官田)에서 농사지을 때는

관(官)과 더불어 서로 반반씩 나누었으니

백성들이 편안해하고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신은 이조차 명왕(明王)의 도(道)가 아니라 여기는데

하물며 이보다 더 늘린단 말입니까!

 

게다가 수한(水旱)의 재앙은 요임금, 탕임금도 면하지 못한 바이니,

왕자(王者)는 의당 도랑을 깊게 파고

옛사람인 정백(鄭白){정국鄭國과 백공白公}, 서문(西門){서문표 西門豹},

<사기史起>가 개관(漑灌)한 법을 좇아,

날이 가물면 도랑을 열어 비가 오는 것으로 삼고

비가 많이 내리면 도랑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여,

위로는 시경 운한(雲漢) 편에서 말한 날이 가문 우환이 없고

아래로는 물난리의 우환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구려(句麗), 백제(百濟) 및 우문(宇文), 단부(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하여 옮겨졌으므로 

중국(中國)의 의(義)를 사모하여 귀부한 것과 같지 않아,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제 구려, 백제, 우문, 단부로부터 옮겨진 호(戶)가 거의 10만에 달하며

이들이 도성(都城)에 밀집해 있어 장차 국가에 깊은 해를 끼칠까 우려되니,

의당 그 형제, 종속(宗屬)들을 나누어서 서쪽 변경의 여러 성으로 옮기고

은혜로 안무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하며,

원래의 거주민들 틈에 흩어져 살게 하여 우리나라의 허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중원(中原)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축적된 재산이 마땅히 커야 하나,

관사(官司)가 지나치게 많고 놀고먹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사내 하나가 농사짓지 않으면 그는 매년 굶주려야 하니

필히 농사짓는 자로부터 취해서 먹을 것이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노력을 잡아먹는 격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수만 명에 달해 그 손해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 집집마다 충분히 자급할 수 있고

우리의 정치가 승평(升平)에 이르렀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친히 고금의 일을 두루 보아 잘 아실 테지만

정치의 큰 재앙 중에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빼어난 경략(經略)을 갖추고 시세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재가 있으면

합당한 바에 따라 여러 자리에 배치하십시오.

 

이전에는 이와 같지 않았으니,

농사짓는 이가 먹고 누에치는 이가 옷 입는 것이 또한 하늘의 도(道)입니다.

 

전하께서는 성스러운 성품으로 관대하고 현명하여 신하의 진언을 그리워함을

목마른 자가 물 찾듯 하시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비루한 견해라도 다 올리고

임금을 범하는 말이라도 거리낌 없이 올리며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예전에 참군(參軍) <왕헌王憲>, 대부(大夫) <유명劉明>이

아울러 충심을 다하고 정성을 바쳐 지극히 옳은 말을 올리니

비록 용린(龍鱗)을 거스리는 점이 자못 있었으나 질책 받을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왕헌>, <유명>의 옥송을 주관하여 판정한 자가 상주하여

그들이 요언(妖言)으로 임금을 거슬렀으므로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으나

전하께서 인자하고 너그럽게 감싸고 용납하여 그들이 사형 당하는 것을 용서하셨으나

도리어 관작을 깎거나 내쫓고, 금고(禁錮)하고 조정에 불치(不齒)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전하는 의당 이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들의 말이 그르다면 그들의 미치고 성급함을 양해해주어야 합니다.

 

간언하는 신하에게 죄주면서 직언(直言)을 구하는 것은

또한 북쪽으로 가면서 남쪽의 월(越) 땅으로 가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우장사(右長史) <송해宋該> 등은 아첨하며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

간언하는 선비들을 가벼이 탄핵하며 이미 강직함이 없는 자들인데다

남을 질시하는 마음도 있어 임금의 귀와 눈을 가리니 그 불충(不忠)함이 심합니다.

 

 

사농공상은 나라가 의지하는 바탕이고 교육과 학문은 임금의 큰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싸움을 익히고 농사에 힘쓰는 것이 특히 나라의 근본이며

장인과 상인은 도리어 말(末)입니다.

 

의당 군대를 통수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꼭 필요한 바에 따라 정해진 인원수를 두고,

그 이외의 자들은 농토로 돌려보내고 전법(戰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학자(學者)가 3년이 지나도 성취가 없으면 또한 농토로 돌려보내야 하며,

헛되이 고위직에 이들을 채워 넣어

총명하고 빼어난 인재가 출사할 길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신(臣)이 말하는 바가 옳다면 원컨대 때에 맞춰 속히 시행하시고

만약 옳지 않다면 제게 주벌을 가하시어,

천하인들로 하여금 조정(朝廷)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지체 없이 선을 따르게 하고 죄악을 오래 남겨두지 않음을 알게 하십시오.

 

<왕헌王憲>과 <유명劉明>은 충신이니 원컨대 용린을 거스른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 충언의 효험을 거두십시오.”

 

이에 <모용황>이 영을 내렸다,

 

“기실(記室)참군 <봉유封裕>의 간언을 읽어보니 나는 실로 두렵도다.

 

임금은 백성을 나라로 삼고 백성은 곡식을 생명으로 삼는다.

 

그러하므로 농사가 바로 나라의 근본인데,

군수와 현령들이 맹춘(孟春,음력 정월)에 내린 영을 따르지 않아

농정을 게을리 하여 권면하지 않으니

의당 특히 농지를 정비하거나 개간하지 않는 자는

형법(刑法)으로 조치하여 성읍을 엄숙히 하고 정돈해야 할 것이다.

 

주관하는 자는 분명하고 자세하게 조사하고 그 정황을 잘 갖추어서 보고하라.

 

원유(苑囿)는 모두 파하고 이를 농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라.

 

자산(資産)이 전혀 없는 가난한 자는 자활할 수 없으니

각기 목우(牧牛) 한 마리씩을 주도록 하라.

 

만약 개인적으로 여력이 있으나

관우(官牛)를 얻어 관전(官田)을 개간하고자 하는 자는

위(魏), 진(晉) 때의 구법(舊法)에 따라 처리하라.

 

봇도랑을 파고 관개하는 것은 관(官)이나 사(私)에 모두 유익하니

주관하는 자는 재량껏 짓고 물과 뭍의 형세를 모두 얻는데 힘쓰라.

 

중원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병난(兵難)이 그치지 않고

성심을 다하여 훈적을 세운 자가 많으니 관료(官僚)를 줄일 수는 없다.

 

흉추(凶醜)를 이길 때를 기다려 천천히 의논해야 할 것이다.

 

백공(百工)과 상고(商賈)의 숫자는 사좌(四佐)가 열장(列將)들과 더불어서

그 인원수를 속히 정하고 나머지 자들은 농토로 돌려보내라.

 

학생 중에 훈교(訓敎)하는 임무를 맡지 않는 자는 또한 원록(員錄)에서 지우라.

 

무릇 신하가 임금에게 관언(關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법이니,

그가 아뢰는 바가 요망(妖妄)하고 불경(不經)한 일을 아뢰어도

모두 너그럽게 불문에 부치고 그 중에서 선한 말을 택하여 따라야 한다.

 

<왕헌王憲>과 <유명劉明>의 죄는 비록 금출(禁黜)에 처해야 마땅하나

그리한다면 또한 도리어 나의 도량이 넓지 못한 처사가 될 것이다.

 

그들을 모두 본래 관직으로 복귀시켜 그대로 간사(諫司)에 처하게 하라.

 

<봉생封生>은 충직하여 왕의 신하의 올바른 지체를 깊게 지녔도다.

 

「시경」에서 ‘말에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에게 5만 전(錢)을 하사한다.

 

안팎에 분명히 알리니, 나의 과오에 관해 진술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귀천(貴賤)에 구애받지 말고 꺼리는 바가 없도록 하라.”

 

당시 흑룡(黑龍)과 백룡(白龍) 각 하나씩이 용산(龍山)에서 보이니,

<모용황>이 친히 군료(群僚)들을 이끌고 가서 구경하고

용과 2백여 보 떨어진 곳에서 태뢰(太牢)의 제사를 지냈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머리를 교차하며 빙빙 돌아서 날아다니며 놀다가

서로 엉켰던 뿔을 풀고는 떠났다.

 

<모용황>이 크게 기뻐하며 궁으로 돌아온 뒤 그 경내(境內)의 죄인들을 사면하고,

새로 지은 궁(宮)을 화룡(和龍)이라 명명하고 산 위에 용상불사(龍翔佛寺)를 세웠다.

 

대신(大臣)의 자제(子弟)들 중 관학생(官學生)이 된 자에게

고문생(高門生)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옛 궁(舊宮)에 동상(東庠,학교)을 세워

향사지례(鄕射之禮,활을 쏘고 술 마시던 의식)를 행하고

매월 임관(臨觀)하여 우열을 고시(考試,시험)하였다.

 

<모용황>이 본래 문적(文籍)을 좋아하고 강수(講授,강학)하는데 부지런하여

학도(學徒,학생)가 매우 많아 천여 명에 달했다.

 

친히「태상장太上章」을 지어

「급취急就」{한나라의 <사유史游>가 지은 자서字書}를 대신하고

또「전계典誡」15편을 저술하여 귀족자제들에게 가르쳤다.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의 남소(南蘇)성을 함락하고 수비병을 둔 뒤에 돌아왔다.

 

<모용황> 13년(346년) 그의 세자 <모용준慕容儁>을 보내니

<모용각>과 함께 기병 1만 7천을 이끌고 동쪽으로 부여(夫餘)를 습격하여 이기고는

그 왕(王){부여왕}과 부중(部衆) 5만여 구(口)를 노획하여 돌아왔다.

 

<모용황>이 동상(東庠)에 친림하여 학생들을 고시(考試,시험)하고

그 중에서 빼어나고 남다르게 경전에 통달한 자를 뽑아

근시(近侍,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로 충원했다.

 

날이 오래도록 가물자 백성들의 전조(田租)를 면제해주었다.

 

성주(成周), 기양(冀陽), 영구(營丘) 등의 군(郡)을 파했다.

 

발해(勃海) 사람들로 흥집현(興集縣)을 세우고,

하간(河間) 사람들로 영집현(寧集縣)을 세우고,

광평(廣平)과 위군(魏郡) 사람들로 흥평현(興平縣)을 세우고

동래(東萊)와 북해(北海) 사람들로 육려현(育黎縣)을 세우고,

오(吳) 사람들로 오현(吳縣)을 세우고는 이 현들을 모두 연국(燕國)에 속하게 하였다.

 

<모용황>이 일찍이 서쪽변경에서 사냥한 일이 있었다.

 

이때 하수를 건너려 하다 부로(父老) 한명을 보았는데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모용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사냥터가 아니니 왕은 돌아가시오.”

 

이 일을 숨긴 채 말하지 않고 마침내 하수를 건너서는 연일 사냥감을 많이 잡았다.

 

뒤에 흰 토끼를 보고 말달려서 활을 쏘려다 말이 쓰러져 <모용황>이 부상을 당하니

이에 예전에 부로(父老)를 보았던 일을 얘기하였다.

 

연(輦)을 타고 궁으로 돌아와 <모용준慕容儁>을 불러 뒷일을 맡겼다.

 

영화(永和) 4년(348년)에 죽었다.

 

15년간 재위하고 죽을 때의 당시 나이는 52세였다.

 

<모용준>이 제호를 참칭한 뒤에 <모용황>을 문명황제(文明皇帝)로 추시(追諡)하였다.

 

 

- 모용준(慕容儁)


모용준(慕容儁, 319년~360년, 재위: 348년~360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연(前燕)의 제2대 황제이다.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경소제(景昭帝)이다.


모용준은 319년, 모용황(慕容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37년에 모용황이 전연을 건국하고 연왕(燕王)에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48년, 모용황이 죽자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하였다.


349년, 동진(東晉)은 모용준을 사지절·시중·대도독·독하북제군사·유평이주목·대장군·

대선우·연왕에 책봉하여 정식으로 연왕이 되었다.

 

같은 해, 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준은 후조를 정벌하기 위해 준비하여 350년에 출정하였다.

 

계(薊)를 점령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고 기주(冀州 하북성 중남부)를 공격하였다.

 

당시 후조와 염위(冉魏)가 전쟁 중이었는데,

모용준은 이 전쟁에 개입하여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351년에 후조가 멸망하고 352년에 염위도 쇠약해지자

모용준은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염위의 황제 염민(冉閔)을 격파·포획하고 뒤이어 염위를 멸망시켰다.


화북의 동부 일대를 차지한 모용준은 352년에 황제에 즉위하고

동진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산동성, 산서성, 하남성 지역을 점령하고

전진(前秦), 동진과 대립하였다.

 

357년에는 업(鄴)으로 천도하였다.

 

360년 정월에 병사하였다.

 

 

- 모용위(慕容暐)


모용위(慕容暐, 350년~384년, 재위: 360년~370년)는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연(前燕)의 제3대(마지막) 황제이다. 시호는 유제(幽帝)이다.


모용위는 모용준(慕容儁)의 셋째 아들로 350년에 태어났다.

 

형인 모용엽(慕容曄)이 죽었기 때문에 35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360년에 모용준이 죽자 황제에 즉위하였다.

 

모용위가 어렸기 때문에 국정은 모용준의 동생인 모용각(慕容恪)이 이끌었는데,

모용각은 선정을 베풀어 전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362년에 동진(東晉)의 낙양(洛陽)을 공격하여

365년에 함락하였으며 하남 지역을 점령하였다.

 

366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慕容評)이 다시 국정을 맡았다.

모용평은 부패하여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여 전연의 국력은 쇠약해졌다.


369년에 동진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근방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모용평은 전진(前秦)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모용수(慕容垂)를 보내 북벌군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북벌군을 격파한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한 모용평은

태후 가족혼씨(可足渾氏)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하려 모의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한편 전진의 부견(苻堅)은

구원군을 파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하였다.

 

370년에 왕맹(王猛)이 이끄는 전진군은 업(鄴)을 함락하여 전연을 멸망시켰으며,

모용위는 장안으로 끌려와 신흥후(新興侯)에 임명되었다.


383년에 비수대전(淝水大戰) 때 모용위는 모용수를 따라 운성(鄖城)에 주둔하였는데,

부견이 패배하자 도망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384년에 부견의 암살을 모의하였다고 하여 살해당했고

400년에 모용덕(慕容德)이 모용위에게 시호를 올려 유제(幽帝)라고 하였다.

 

 

-  모용한(慕容翰)

 

<모용한慕容翰>은 자(字)가 원옹(元邕)이고 <모용외慕容廆>의 서장자(庶長子)이다.

 

성정이 용맹스럽고 모략이 많았으며

원숭이처럼 팔이 길어 활을 잘 쏘고 용력이 남보다 세었다.

 

<모용외>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절충(折衝,적을 꺾음)의 임무를 맡겼다.

 

출병하여 정벌하자 이르는 곳마다 공을 세우고 위엄과 명성을 크게 떨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요동(遼東)에 진(鎭)을 세우자 고구려(高句麗)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안무하며 교우를 잘하고 유학(儒學)을 사랑하니

사대부로부터 졸오(卒伍)에 이르기까지 즐거이 그를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단요段遼>에게로 달아나게 되자 <단요>로부터 매우 경애(敬愛)받았다.

 

유성(柳城)이 패하자 단란(段蘭){<단요>의 동생}이 승세를 타 깊이 들어가려 하니,

<모용한慕容翰>은 본국(本國)에 해를 끼칠까 우려하여

<단란>을 속여서 말하여 <단란>이 결국 진격하지 않았다.

 

뒤에 <석계룡石季龍>{<석호石虎>}이 <단요>를 정벌할 때에

<모용황>은 친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영지(令支) 이북 땅을 경략하였다.

 

<단요>가 그 방책을 의논하여 그를 뒤쫓으려 하였는데,

<모용한>은 <모용황>이 몸소 통수하면 반드시 싸움에 이기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에 <단요>에게 말했다,

 

“지금 석씨(石氏){석계룡}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어

바야흐로 대적(大敵)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다시 소소한 껀으로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연왕(燕王)이 직접 왔으니 병마가 정예합니다.

 

병(兵)은 흉기(凶器)이고 전(戰)에는 위태로움과 근심이 있는 법이니

만약 <모용황>과의 싸움에서 실리한다면

남쪽의 적{석계룡군}을 어찌 막아내겠습니까!”

 

<단란>이 노하여 말했다,

 

“내가 전에 경의 속임수 쓰는 말을 들었다가 지금의 우환이 생기기에 이르렀으니

또 경의 계책에 빠져들 수는 없소.”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모용황>을 뒤쫓았으나 과연 <단란>이 대패하였다.

 

<모용한>이 비록 몸은 구국(仇國,적국)에 처해있었으나

그때그때의 사정에 의거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니 모두 이와 같았다.

 

<단란段蘭>이 승세를 타고 끝까지 추격하려 하자,

<모용한慕容翰>은 마침내 자신의 나라를 멸하게 될까 우려하여 그를 말리며 말했다,

 

“무릇 장수가 되어서는 응당 신중함에 힘쓰고 자신을 살피고 적을 헤아려야 하며

만전의 계책이 아니면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지금 비록 적의 소부대를 꺾었으나

아직 적의 대세(大勢)를 굴복시킨 것은 아닙니다.

 

<모용황>은 권모와 속임수가 많고 매복하기를 좋아하는데

만약 나라 안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 스스로 거느리고 우리에게 항거한다면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니

이는 위험한 방책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단요>에게 명을 받는 날에 딱 이 승리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명을 어기고 공을 탐내어 진격하다가 만에 하나 패하기라도 하여

공명(功名)을 함께 잃는다면 어찌 돌아갈 면목이 있겠습니까!”

 

<단란>이 말했다,

 

“이제 이 사람을 이미 사로잡은 거나 마찬가지니

신중히 살펴야 할 다른 나머지 이치는 없소.

 

경은 경의 나라를 멸하게 될까 우려하는 것일 뿐이오!

 

지금 <모용千年>이 동쪽에 있으니 만약 우리가 진격하여 뜻을 이룬다면

내가 장차 그를 영접하여 나라의 후사로 삼을 것이오.

 

끝내 경을 저버려 종묘에 제사가 끊기게 하지는 않겠소.”

 

<천년千年>은 <모용인>의 어릴 때 이름(小字)이다.

 

<모용한>이 말했다,

 

“제가 귀국에 투신(投身)하여 의지하니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도리가 없는데

그 나라의 존망(存亡)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다만 대국(大國)을 위하고자 하는 계책이며,

또한 우리의 공명(功名)이 아까울 뿐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부대에 명하여 단독으로 돌아가려 하니

<단란>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史에서 <모용한>이 비록 그 몸은 바깥에 있었으나

종국(宗國,본국)을 그리워했다고 말하였다.}

<자치통감>

 

그러다 <단요>가 달아나게 되자

 

<모용한> 또한 북쪽으로 가서 <우문귀宇文歸>에게 투탁했다.

 

그 얼마 뒤에 달아나니 <우문귀>가 굳센 기병 백여 기를 보내 그를 뒤쫓았다.

 

<모용한>이 멀찍이서 자신을 뒤쫓는 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본국을 그리워하여 돌아가니 이치상 되돌아 갈 까닭이 없다.

 

내 활과 화살에 관해 너희들이 잘 알 것이니

가까이 다가와서 스스로 죽음을 취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

 

내가 너희 나라에 오래 살았으니 한스럽게도 너희들을 쉽게 죽일 수가 없구나.

 

너희들이 백 보(步) 떨어진 곳에 도(刀)를 세우면 내가 화살을 쏠 것이다.

 

만약 맞춘다면 너희들은 곧장 되돌아가야 하고,

만약 맞추지 못한다면 앞으로 와도 좋다.”

 

<우문귀>의 기병이 도(刀)를 풀어 세우자 <모용한>이 한 발을 쏘아서

곧장 칼코등이를 맞추니 이에 뒤쫓던 기병들이 흩어졌다.

 

도착하자 <모용황>이 심히 은례(恩禮)를 더해주었다.

 

건원(建元) 2년(344년)에 <모용황>을 따라 <우문귀宇文歸>를 쳤는데,

싸움에 임하다 흐르는 화살에 맞아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 지냈다.

 

뒤에 병이 점점 낫게 되자 그의 집안에서 말을 타고 스스로의 몸 상태를 시험하였는데

 

어떤 이가

 

‘<모용한>이 몰래 말 타기를 익히니 비상한 일을 꾸미는 것으로 의심된다.’

<모용황>에게 고하였다.

 

<모용황>이 평소 그를 꺼렸으므로 마침내 사사(賜死)하였다.

 

<모용한>이 죽음에 임해 사자(使者)에게 말했다,

 

“나 <모용한>은 의심을 품고 바깥으로 달아났으니

그 죄가 죽음으로도 갚지 못할 만큼 크나

나의 해골(骸骨)을 적(賊)의 마당에 맡길 수는 없으므로 돌아와 관리에게 자수하였소.

 

하늘이 자애롭게도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사사(賜死)된 뒤에

내 시신을 저자와 조정에 늘어놓게 하지는 않았으니

오늘의 죽음은 나 <모용한>이 죄를 씻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오.

 

다만 반역한 胡{석호}가 신주(神州,중국)를 점거하여 차지하고

중원(中原)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으니

나 <모용한>은 항상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 맹세하길

더러운 오랑캐를 삼켜버려 위로는 선왕(先王)의 유지(遺旨)를 이루고

아래로는 산해(山海)의 질책에 사죄할 뜻을 품었소.

 

이 뜻을 꾀하여 이루지 못하고 죽어 여한이 있지만 운명이니 어찌하겠소!”

 

고개를 들어 약을 먹고 죽었다.

 

 

-  양유(陽裕)

 

<양유陽裕>는 자(字)가 사륜(士倫)이고 우북평(右北平) 무종(無終)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고 형제는 모두 일찍 죽어 외로이 홀로 살았으므로

비록 종족들 중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숙부 <양탐陽耽>만이 <양유>가 어릴 때부터 그를 기특하게 여기며 말했다,

 

“이 아이는 비단 우리 가문의 빼어난 인재일 뿐 아니라

임금을 보좌할 양기(良器)로다.”

 

유주자사(刺史) <화연和演>이 벽소하여 주부(主簿)로 삼았다.

 

<왕준王浚>이 유주를 다스리게 되자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전임되었으나

<왕준>이 그를 꺼리어 중하게 임용하지 않았다.

 

<석륵石勒>이 계성(薊城)을 함락하고 <조숭棗嵩>에게 물었다,

 

“유주(幽州)의 선비 중에서 누가 가장 낫소?”

 

<조숭>이 말했다,

 

“연국(燕國) 사람인 <유한劉翰>이 평소 덕이 높고

북평(北平) 사람인 <양유陽裕>는 일을 맡아 처리함의 재주가 있습니다.”

 

<석륵>이 말했다,

 

“만약 그대 말대로라면 왕공(王公){왕준}은 왜 그들을 임용하지 않았소?”

 

<조숭>이 말했다,

 

“왕공(王公)이 그들을 임용하지 않았으므로

명공(明公){석륵}께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석륵>이 바야흐로 임용하려 하니 <양유>가 미복(微服)으로 달아나서 숨어버렸다.

 

당시 선비선우(鮮卑單于) <단권段眷>이

진(晉)나라의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요서공(遼西公)이었는데,

본래 인물(人物)을 좋아하여 마음을 비우고 겸허한 태도로 <양유>를 초빙하였다.

 

<양유>가 벗인 <성반成泮>에게 말했다,

 

“중니(仲尼){공자}는 필힐(佛肸)의 초빙에 기뻐하며 스스로를 박과 오이로 비유하였고

<이윤伊尹> 또한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소.

 

성현(聖賢)들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나 같은 무리겠소!

 

<단권>이 이제 나를 초빙하니 어찌 헛되이 그러는 것이겠소!”

 

<성반>이 말했다,

 

“이제 화하(華夏,중국)가 나뉘어 무너지고 구주(九州)가 갈갈이 찢겨졌으니

궤적(軌迹)이 미칠 만한 곳은 역수(易水) 근처 뿐이오.

 

초야에 숨어 덕을 이루고 도를 즐겨 대도(大道)를 기다리려 하는 것은

하수(河水){황하}가 맑아지길 기다리는 것과 같소.

 

사람의 수명이 얼마나 되겠소?

 

옛사람이 인생무상을 말하며 백구(白駒)의 탄식을 하였고

<소유少游>는 하급관리도 족히 후대에 음덕을 끼칠 수 있으니

하물며 국상(國相)이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소.

 

경이 <이윤>과 <공자>의 행적을 뒤쫓으려 하니

기미를 미리 알아차리는 것이 신과 같소이다.”

 

그리하여 <양유>가 초빙에 응하니 낭중령(郞中令), 중군장군(中軍將軍)에 임명되고

상경(上卿)의 지위에 처해졌다.

 

단씨(段氏)의 다섯 임금을 두루 섬기며 매우 존중(尊重)받았다.

 

 

※ 참고 

 

필힐(佛肸) : <필힐>의 초빙에 공자가 응하려 하자 제자인 <자로>가 반대하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갈아도 닳지 않는 것을 견고하다고 이르지 않더냐?

                   물들여도 검게 변하지 않는 것을 희다고 이르지 않더냐?

                   내가 어찌 박과 오이처럼 가만히 매달려서 먹지도 못하겠느냐?”

                   <논어 양화편>

 

 

<단요段遼>가 <모용황>과 서로 공격하니 <양유>가 간언하였다,

 

“신이 듣기로 어진 이와 가까이하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냄이 나라의 보배라 하였습니다.

 

모용(慕容)씨는 우리나라와 더불어 대를 이어 혼인하였으며

또한 <모용황>은 아름다운 덕을 갖춘 임금이니

그와 교전하여 원한을 맺고 백성들을 쇠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은 재앙이 흥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양측이 전날의 과실을 고쳐 처음과 같이 서로 왕래하며 우호함으로서

국가는 태산(太山)과 같이 안정되게 하고

백성들을 편히 쉬게하는 은혜를 입도록 하십시오.”

 

<단요>가 따르지 않았다.

 

외직으로 나가 연군태수(燕郡太守)가 되었다.

 

<석계룡石季龍>이 영지(令支)를 함락하자 군(郡)을 들어 항복하고

북평태수(北平太守)로 임명되었다가 수도로 불려와 상서좌승(尙書左丞)이 되었다.

 

<단요段遼>가 거짓 항복하며 <석계룡>에게 영접해줄 것을 청할 때에

<양유>가 상서좌승(左丞)으로서 정동(장군) <마추麻秋>의 사마(司馬)를 겸하여

종군하였다가 <마추>가 패하고 <양유>는 군인들에게 붙잡히니

장차 <모용황>을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모용황>이 평소 <양유>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즉시 감금을 풀어주도록 명하고는

낭중령(郞中令)으로 삼고 대장군(大將軍) 좌사마(左司馬)로 올렸다.

 

동쪽으로 고구려(高句麗)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우문귀宇文歸>를 멸하는데 있어

그 계책에 모두 참여하였으니 <모용황>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중용하였다.

 

그러다 화룡(遷都)으로 천도할 때에는, <양유>가 평소 교묘한 구상이 있었으므로

<모용황>이 지은 성지(城池)와 궁합(宮閤)이 모두 <양유>의 구상이었다.

 

<양유>가 비록 <모용황>에게 임관한 뒤로 날이 갈수록 <모용황>과 가까워지고

그에 대한 총애와 관질이 오래된 옛 신하들보다 위였으나

그의 성정이 겸허하고 청렴하여 자애롭고 독실하니

우두머리의 지위에 쭉 있었음에도 마치 포의(布衣)의 선비와 같았다.

 

사대부(士大夫)가 유망(流亡)하다가 객사하면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고

고아를 보살펴 주지 않는 법이 없고,

현명하거나 불초한 선비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몸을 기울여 후대하니,

이런 까닭에 이르는 곳마다 추앙(推仰)받았다.

 

당초 범양(范陽) 사람인 <노심盧諶>이 늘 그를 칭찬하며 말했다,

 

“내가 진나라가 청평(淸平)한 때에 조정선비들을 두루 많이 보았으나

충청간의(忠淸簡毅)하고 독신의열(篤信義烈)하기로

양사륜(陽士倫){양유}만한 자를 실로 몇 명 보지 못했도다.”

 

그러다 죽으니 <모용황>이 매우 애도하였다.

 

죽을 때 당시 나이가 62세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