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양대제8년{AD391}신묘,

 

5월, 상이 후와 함께 온탕에 가서 술을 마시다 죽었다.

 

이때 동궁은 서쪽에서 군병을 조련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도착하였으나,

상은 이미 말로 명령할 수 없었고, 후가 옥새를 전하자 죽었다.

 

동궁은 울부짖으며 온궁(溫宮)의 빈전에서 즉위하였다.

 

보산(寶算) 18세였다.

 

 

슬프다, 상은 어질고 사리에 밝았으며, 덕행 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고,

세간의 인심에 정통하였었으나,

어릴 적부터 호색하고 술에 젖어 세상사에 뜻이 없었으니,

정사에 있어서 큰일은 <해극觧克>에게 맡기고, 작은 일은 <연도淵鞱>에게 맡겼으며,

동궁을 시켜서 이들을 감독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술 마시다가 백성을 버렸으니 애석하였다 할 것이다.

 

춘추 49세였고, 고국양(故國壤)에 장사하였다.

 

 

 

전하여오길 제의 휘는 <담덕談德 374-414>이다.

 

모친은 태후 <연淵>씨로서 호는 <천강天罡 355-446> 이라하고,

천원공天原公 <연림淵琳 (329-397)>의 딸이다.

 

꿈속에서 신록과 교호하여 제를 낳았다.

 

모습은 그윽하면서도 크고 듬직하였으며, 큰 무인의 기풍을 가졌었다.

 

<수림獣林>이 나라를 물려준다고 명하였기에,

장자이었던 <강岡>은 양보하고 선종(仙宗)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군대의 일을 좋아하여 병서를 읽었으며,

정사에 간예하였더니 <연도淵鞱>가 범접하지 못하였다.

 

 

 

원년 (391년) 신묘

 

6월 고국양(故國壤)에서 장례식을 크게 거행하였다.

 

순장과 진귀한 보물을 금지하였고 단지 연호(烟戶)만을 두었고,

비에 공덕을 새기게 하였다.

 

<천강天罡>을 황태후(皇太后)로 삼았고, <토산吐山>을 황후(皇后)로,

<적積> 태자를 태보로, <연억淵億>을 좌보로, <붕연朋連>을 우보로,

<면형免衡>을 중외대사로 삼았는데 면형은 <연림淵琳>의 서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면가免柯>의 딸로서, <면형免衡>을 <면가免柯>의 손자로 삼았다.

 

상이 동궁에 있을 때 여러 번 義로서 직간(直諫)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발탁이 되어 <연도淵鞱>를 대신하게 되었다.

 

7월, <내밀奈宻{내물}>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며 부의하고는

두 딸을 바치면서 시첩으로 삼아주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상이 군신들에게 이르길;

 

“지금 사해의 여러 나라들은 연호를 세우지 않는 곳이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는 지가 오래되었소.

3대 시절{<추모>·<유리>·<대무>}에 건원하던 예를 살펴서

응당 새 연호를 세워야 할 것이오.”

라 명하였더니,

 

<춘春 360-433>태자가 호를 지어 올리길,

영락(永楽)을 연호로, 평안(平安)을 휘호로 하자고 하였다.

상이 그리 하자고 하였다.

 

상이 태후에게 아뢰길;

 

“백제{伯帝;황상이셨던 백부}의 딸 <평양平陽 (359-414)>은

짐을 섬김에 깔끔하고 정숙하였었으며, 지금 다시 딸을 낳았고,

여러 번 자신의 동생 <강岡>에게 일러서 짐에게 사위를 양보하게 하였습니다.

그 공이 적지 않으니, 역시 후로 삼으려합니다. 어떠신지요?”라 하니,

 

<천강天罡>이 아뢰길;

 

“천하의 일은 오로지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것인데, 어찌 노첩이 알겠습니까?”

라 하였다.

 

상은 이에 <면형免衡>에게 명하여, <평양平陽>을 새 궁전으로 맞아들이도록 하여,

황후로 책봉하고 <토산吐山(373-448)>의 경우와 하나같게 하였다.

 

<평양平陽>은 <수림獣林>帝의 원비인 <연燕>씨의 소생인데,

젊어서는 선과 약물의 일을 즐겨하였고,

요조(窈窕)의 덕이 있었으며, 행실은 맑았고 정조를 지켜서,

나이가 二紀{24살?}가 넘도록 다른 이를 곁눈질 하지 않아 왔다.

 

상이 잠저시절에 <평양平陽>을 궁인으로 삼아서 무척이나 아꼈더니

딸{<가련>공주}을 낳았었고, 이제 다시 딸을 낳고는 황후로 높아진 것이었다.

 

나이는 서른 셋 이었다.

 

후는 성덕이 있어서, 상은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꼭 의논하고 행하였다.

 

9월, 상이 태후와 두 후와 함께 졸본의 시조 사당을 찾아 사위하였음을 고하고,

종척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죄인들을 풀어주고,

사궁{四窮}들을 구휼하고 백성들에겐 재화를 나누어주었으며,

효행한 이들을 포상하였다.

 

10월에 서도(西都)로 돌아와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12월, <수림獣林>帝의 원비인 <연燕>씨를 <연燕>태후로 하고,

연공 및 궁실·거마·노비를 내려주어 태상후 <해觧>씨와 하나같게 하였다.

 

<평양平陽>의 동생 <강岡>을 선왕(仙王)으로 삼고, 도장(道場)을 3일간 열어주었다.

 

<연도淵鞱>에게는 책성(柵城)을 지키라 명하였다.

<고국양대제기>

 

 

 

 

<평양平陽 (359-414)>은 태평국(太平國)의 공주 <서산西山>의 딸 <백산白山>이다.

 

소수림제의 명으로 <연燕>황후의 養女가 되었다.

<341. 解發이 장새진을 함락하고 解克이 수곡성을 빼앗다.

  httP://elfqkr.tistory.com/723 참조>

 

 

十一月 天罡后生談德太子 容皃奇偉

上大喜欲名福

時 阿道自晉來奏曰天子談德而不談利 談德則福自降

上嘉其言乃名談德 凢十二月而生 

<소수림대제기> 

 

                          

(AD374)

(소수림제 4년) 11월,

 

<천강天罡>后가 <담덕談德> 태자를 낳았는데, 용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상이 매우 기뻐 이름을 <복福>이라 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아도阿道>가 진(秦)에서 들어와 아뢰기를

 

“천자는 덕을 말하지 이익을 말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덕을 말하면, 곧 복은 저절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상은 그 말에 기뻐하며 <담덕談德>이라 이름 지었다.

 

대략 열두 달 만에 태어났다. 

  

 

 

天罡后生伊連子談德

王子之 賜酺百官

娠十二月而生 容皃奇偉 王欣喜欲名福

阿道曰 天子談德而不談利 何言福乎 

乃立談德宮置奴婢  

<소수림왕기> 

 

                                

 

<천강天罡> 后가 <이련伊連>의 아들 <담덕談德>을 낳아

왕이 그를 양자로 삼고 백관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임신한지 12개월 만에 태어났다.

 

용모가 매우 훌륭하였기에 왕이 매우 기뻐하며 이름을 <복福>이라 하려하였다.

 

<아도阿道>가 말하기를

 

“천자는 덕을 말하지 이익을 말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어찌 복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이에 담덕궁을 세우고 노비를 배치하였다.

 

 

三月 以天明妻太弟伊連

天明天罡胞妹¹

天罡爲太子妃伊連悲泣

天罡母解氏閔之 指天明曰 此兒長則可以獻之

伊連曰 何待兒長 叔母皃似天罡 願與我偕

解氏不得已與伊連相通

至是 又以天明皃似天罡而娶之

<소수림왕기>

 

 

(소수림제 5년)

 

3월, <천명天明>을 태제(太弟) <이련伊連>의 처로 삼았다.

 

<천명天明>은 <천강天罡>의 포매(胞妹)이다.

 

이전에 <천강>이 태자비가 되자 <이련>이 슬피 울었다.

 

<천강>의 어머니 해씨가 이를 가엽게 여겨 <천명>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자라면 데려가시오.”

 

<이련>이 말하기를

 

“어찌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란 말입니까?

숙모의 모습이 <천강>을 닮았으니 원컨대 나와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해씨가 부득이 <이련>과 상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천명>의 모습이 <천강>을 닮았다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영락대제의 이름인 <담덕>을 전진(前秦)에서 온 승려 <아도>가 지었다. 

 

 

<천강>后 연씨(淵氏)는 소수림대제의 황후이다.

 

 

그러나 <담덕>은 소수림제의 아들이 아니라 고국양제 <이련伊連>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도 <담덕>은 고국양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강>后는 원래 <이련>{고국양제}이 사랑하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당시 태자인 소수림대제의 태자비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四十年 庚午 正月燕使乙育至請師

上以新敗於雉壤謝之

宴育于靑木宮 使妃天罡行酌

育大驚下拜曰 臣久不見天罡 今在此 乃陛下之宝也

大喜曰 朕無所可宝 唯有三宝

一則吾妻觧后也 二曰五娣觧妃 三則吾婦天妃 

<고국원제기>

 

             

 

40년(AD 370)경오 정월, 燕이 <을육乙育>을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상은 치양(雉壤)에서 패배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를 거절하였다.

 

청수궁(靑木宮)에서 <을육>에게 잔치를 베풀고

<천강>妃를 시켜 술을 따르게 하였더니,

<을육>이 매우 놀라 무릎 꿇고 절을 하며 말하기를

 

“신이 오랫동안 북극성(천강)을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곳에 계시니 이는 폐하의 보배이십니다.”

 

상이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짐이 보배랄 것은 없지만, 오직 세 가지 보배가 있는데,

첫째는 나의 처 해후(觧后)이고, 둘째는 내 여동생 해비(觧妃)이며,

셋째는 내 며느리 천비(天妃)이니라.”

  

 

 

燕使先望氣者 見后而歡曰 天罡星久不見 今在此不覺 下拜

故國原王曰 寡人之國 無宝唯有三宝 一則吾妻解氏 二則吾娣解氏 三則吾婦天氏也

乃立后宮曰 天罡

禱之曰在天則天罡 在國則國罡在人則人罡

<천강태후기> 

  

              

燕이 제일가는 망기자(望氣者)를 보내왔는데,

 

后를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천강성(북극성)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고 무릎 꿇고 절을 하였다.

 

고국원왕이 말하기를

 

“과인의 나라에는 오직 삼보밖에 없는데,

그 하나는 내 처인 해씨이고

그 둘은 내 누이동생인 해씨이고

그 셋째는 내 며느리 천씨이니라.”

 

이에 후궁으로 세워 이름 하기를 <천강天罡>이라 하고,

 

그녀를 위해 기도하며 말하기를

 

“하늘에는 천강(天罡), 나라에는 국강(國罡), 사람에게는 인강(人罡)이 있다.”

라고 하였다.

 

 

※ 참고

 

망기자(望氣者) : 천체의 움직임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

 

 

 

 

永樂二十年庚戌正月 王尊太后爲天罡太王 自爲國罡太王 以榻太子爲人罡小王

<국강호태왕기> 

             

영락 20년 경술 정월,

왕이 태후를 존하여 천강태왕으로, 스스로는 국강태왕,

탑 태자는 인강소왕으로 하였다.

 

 

 

於是 命春太子上號

乃以永樂爲年號平安爲徽號上可之

<영락대제기>  

 

이때에 <춘> 태자에게 호(號)를 올리라 명하였고,

이에 영락(永樂)을 연호로 평안(平安)을 휘호로 하니,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垂死子寶立 以句驪王安爲平州牧 封遼東 帶方二國王 

<梁書> 卷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모용수>가 죽자 <모용보>가 제위에 올랐으며

구려왕 <안安>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과 대방 2국왕으로 봉하였다.

 

 

 

蕭馬倉明等尊太后爲妙太王玄元夫人 王爲好太王明元道士 榻太子爲小明王玄明道士

築壇致齋七日

王與太后太子受黃籙 是日晦冥不辨天地

蕭馬以爲天地會合陰陽升降 大吉之兆 王善之 

<국강호태왕기> 

 

 

(영락 22년, 서기412년 3월)

 

<소마蕭馬>와 <창명倉明> 등이 태후를 묘태왕현원부인(妙太王玄元夫人)으로

왕을 호태왕명원도사(好太王明元道士)

탑 태자를 소명왕현명도사(小明王玄明道士)로 존하였다.

 

단(壇)을 세워 7일간 치재(致齋)하였다. 

 

왕과 태후, 태자가 황록(黃籙)을 받았으며

이날은 어두컴컴하여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였다.

 

<소마蕭馬>가 천지가 만나고 음양이 오르내리니 큰 경사의 조짐이라 하니,

왕이 옳다고 여겼다. 

 

 

※ 참고

 

致齋(치재) : 제관이 제사지내기 전에 부정 타지 않게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3일간 하는 것이나, 위의 기록은 7일간 하였다고 하니,

                 고구려가 천자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黃籙(황록) : 불경에 대비되는 선경(仙經)

 

 

 

十月 魏拔中山 取燕王宝女 去珍宝圖書 皆皈魏

王 常問於順道曰秦崇佛而亡 魏崇仙而興 佛力恐不及于仙

順道曰 苟有可亡之狀仙佛何有力哉

至是愈傾于仙 命高氏與蕭馬奉豪等 增修三十六院 

<국강호태왕기> 

 

 

영락 7년 정유(397), ......

 

10월, 위(魏)가 중산(中山)을 공략하여 연왕 <모용보>의 딸을 취하고

진보와 도서를 거둬들이니 모든 것이 魏에게 돌아갔다.

 

왕이 항상 <순도順道>에게 물어 말하기를

 

“秦은 佛을 숭상하였기에 망하였고, 魏는 仙을 숭상하였기에 興하였으니,

佛力이 아마 仙에 미치지 못하나보오.”

 

<순도順道>가 말하기를

 

“진실로 망하는 상황이라면 선이나 불이 무슨 힘을 미치겠습니까?”

 

이때에 이르러 선쪽으로 기울어 고씨에게 명하여

<소마蕭馬>와 <봉호奉豪> 등과 함께 36개의 원(院)을 증수하라하였다.

 

 

 

 

집안(中國 吉林省集安市)에서 발견된 능비(陵碑)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적혀있다.

 

서기 370년, 前燕은 前秦의 <부견>에게 망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래서 고구려 출신인 <을육>을 고구려로 보내 군사적 도움을 요청한다.

 

<을육>은 고국원제의 며느리가 술을 따라주자 감격하여 아부를 하는데

 

그녀를 하늘의 북극성, 즉 천강(天罡)에 비유한다. 

 

 

고국원제는 기분이 좋아져 그녀를 <천강天罡>이라 이름하고,

자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의 으뜸가는 임금이라는 의미로

국강(國罡)이라 하였다.

 

고국원왕을 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자신을 국강(國罡)이라 칭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북방 유목세력은 하늘을 중시하는 천존(天尊)사상,

남방 농업세력은 땅을 중시하는 지존(地尊)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동방의 해상세력인 동이족은 이 천존사상과 지존사상에 

사람을 중시하는 인존(人尊)사상을 더하였다.

 

그리하여 홍익인간을 제세치화로 삼았다.

 

이것이 고조선의 천부경에서 말하는 三神사상이며

오늘날까지 대종교로 이어져오고 있다.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의 ‘국강상’은

나라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영락대제, 담덕도 자신을 국강태왕이라 칭하였기에

그에게 국강상의 시호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평안(平安)은 광개토호태왕의 휘호(徽號)이다.

  

영락대제의 휘는 담덕(談德) 이었으나,

춘 태자가 연호와 함께 평안(平安)이라는 휘호도 다시 지어 올렸다.

 

중국사서인 양서(梁書)에서 광개토호태왕을 안(安)이라고 기록한 것은

이 평안(平安)이라는 휘호를 말한 것이다.

 

장수대제의 휘인 <거련>을 <련璉>이라 기록한 것처럼 평안의 <安>만 기록한 것이다.

  

호태왕(好太王)은 영락 22년에 방사(도사)들이 영락대제를 존하여 올린 명칭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불교를 믿던 전진(前秦)이 망하고

선교를 믿는 북위(北魏)가 그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을 때였다.

 

영락대제는  서기 397년부터 다시 선교를 우대하는 정책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호태왕 명원도사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는

당시의 후손들이 정성껏 지어올린 귀중한 시호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는

영락대제가 도교를 중시한 나라중의 나라, 왕중의 왕으로

나라의 국경을 넓힌 위대한 왕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다.

 

 

 

-  광개토왕 비문 해석

 

 

1. 영락(永樂) 원년

 

七月 王傳位於太子自稱太上王

以隆福八年 爲永樂元年大赦天下

<국양천왕기>

 

칠월, 왕이 태자에게 전위하고 스스로 태상왕이라 칭하였다.

융복 8년(391)을 영락 원년으로 삼고 천하 대사면을 하였다.

  

 

以永樂二年 爲元年賜百官爵一級

<국강호태왕기>

  

영락 2년을 원년(392년)으로 삼고 백관에게 작(爵) 일급을 하사하였다.

 

 

 

영락원년은 영락대제가 즉위한 해를 말하는데,

삼국사기에 따라 서기 392년 임진년(壬辰)으로 알고 있다가,

광개토경 호태왕비가 발견된 후에는 비문에 따라

영락 원년을 서기391년 신묘년(辛卯)으로 지금은 통용되고 있다.

  

서기391년 7월, 고국양대제는 담덕에게 제위를 물려주었기에,

이 해를 광개토호태왕의 연호를 사용하여 영락 원년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선제가 살아계시면 연호를 바꾸지 않았던 선례가 있었기에,

이듬해 고국양대제가 붕어하시자 다시 392년을 영락 원년으로 삼았던 것이다.

 

하지만 혼란이 가중되자,

영락 4년부터는 제자리로 돌려놓아, 영락 4년은 서기394년 갑오년이다.

 

즉, 영락 3년을 없애고 영락 3년을 영락 4년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동안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이 같은 혼란이 야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강호태왕기>에 따르면 서기 392년이 영락 원년이나,

보다 후대의 기록으로 보이는 <영락대제기>에서는 혼란을 방지하기위해

국강호태왕기를 영락대제기에 맞추어 서기 391년을 영락 원년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이 부분에서 착오를 일으켜 영락원년을 392년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락원년은 영락대제기에서 말하는 391년이 맞는 것이다.

 

알기 쉽게 표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간지         삼국사기                      영락대제기       국강호태왕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기 391년     신묘       고국양왕 8년                    영락 원년           -

서기 392년     임진    고국양왕9년 / 광개토왕 원년  영락 2년          영락 원년     

서기 393년     계사       광개토왕 2년                    영락 3년          영락 2년

서기 394년     갑오       광개토왕 3년                    영락 4년          영락 4년

서기 395년     을미       광개토왕 4년                    영락 5년          영락 5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박창화 필사본은 광개토호태왕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또<삼국사기>의 기록이 왜 착오를 일으켰는지 그 이유까지 적어놓고 있다.

 

 

 

2. 신묘년 기사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중> 

 

 

광개토경호태왕비는 상당한 규모의 역사기록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 일차적 사료인 비문은 그 신뢰도가 보장되므로,

역사학계에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자 사료이다. 

 

광개토경호태왕비문이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소위 신묘년 기사라고 일컫는 다음의 구절 때문이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통상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 해석은 왜가 고구려를 제외한 한반도를 통째로 점령하였다는

결과를 낳게 함으로서 우리학자들의 반발을 사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함께 탁본의 조작설까지 제기되기도 한 상황이다. 

 

하지만 탁본의 진위나 해석방법의 차이는

비문을 적은 조상들의 원뜻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즉, 현실적으로 탁본의 진위도 가려내기 힘들고,

해석의 다양성은 한자의 특성상 어느 것도 정답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상황을 먼저 정확히 파악하여야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는 그 비문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따라갈 수 있다. 

 

당시 중원은 비수대전에 패하여 전진(前秦)이 그 힘을 다하고 있었고,

동진(東晉)도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는 북쪽의 고구려에게 기회를 주게 되었고,

남쪽에는 왜가 그 세력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백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혼인을 청하는 등

다소 고구려에 치우쳐있는 그러한 상황이

바로 호태왕비에 기록되어있는 신묘년, 서기391년의 상황이었다. 

 

다음은 박창화 필사본에 기록된 신묘년의 기록이다.

 

八年 辛卯 四月 觧猩引鞨兵二千 拔濟赤峴沙道二城

時 倭侵加羅至濟南

辰斯與佳利 奢其宮室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

卒聞此報逃入國西大島己而

倭退 還入橫岳 恐人之笑假托射鹿 其不振甚矣 

<고국양대제기> 

  

              

8년(AD 391) 신묘

 

4월, <해성觧猩>이 鞨兵 2천을 이끌고 백제의 적현, 사도 두 성을 쳐서 빼앗았다.

 

이때, 왜가 가라(加羅)를 습격하고 백제의 남쪽에 이르렀다.

 

진사는 <가리佳利>와 함께 궁실을 사치스럽게 하였는데,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진기한 풀을 길렀다.

 

갑작스럽게 이 소식을 듣고도 나라 서쪽 큰 섬으로 도망갈 뿐이었다.

 

왜가 물러나자 다시 횡악(橫岳)에 들어왔는데,

사람들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사슴을 사냥하였던 것처럼 거짓을 꾸몄으나,

심하게 위축되었다.

 

 

 

위의 기록은 백제가 북으로는 고구려의 공격을,

남으로는 왜가 출병하여 가야를 침공하고 있음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비문에 적힌 대로 왜가 백제와 가라를 침공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호태왕비문의 신묘년 기록 중 알 수 없는 두 글자는 ‘가라(加羅)’가 되어야한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加羅

  

당시 왜는 백제와 가라만을 공격하였지 신라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다음의 신라부터 시작하는 구절은 끊어 읽어야 마땅하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加羅新羅以爲臣民 (X)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加羅 / 新羅以爲臣民 ... (O)

  

“왜가 신묘년에 큰물을 건너와 백잔, 가라,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가 아니라

 

“왜가 신묘년에 큰물을 건너와 백잔과 가라를 깨뜨렸다.”로 끊고

 

“신라는~”부터 다음 문장으로 해석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以六年丙申’의 ‘以’의 쓰임새와도 관련이 있다.

 

신라를 뒤 문장으로이어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서기391년에서 396년 사이에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지를 살펴보아야한다.

 

이는 뒤 기사가 396년의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新羅王子馬兒入貢命設館留之

送夫余神像于新羅

<국양천왕기> 

  

9년(392) 3월,.........

 

신라왕자 <마아>가 입공하였다. 집을 지어주고 머무르라 명하였다.

 

부여신상(夫余神像)을 신라에 보냈다.

 

 

 

二年 壬辰 正月 遣胥狗迎奈密女 雲帽霞帽 爲左右小妃

以寶金爲妃宮大夫寶金奈密之猶子也 

<영락대제기>

 

              

2년(392) 임진 정월,

 

<서구胥狗>를 보내 <내밀奈密>의 딸 <운모雲帽>와 <하모霞帽>를 맞이하게 하여

좌, 우 소비로 삼았으며, <보금寶金>{실성왕}을 비궁대부(妃宮大夫)로 삼았는데,

<보금寶金>은 <내밀奈密>의 조카이다.

  

 

국양천왕기에 기록된 <마아>는 영락대제기의 <보금>을 가리키며,

이는 바로 나중에 신라의 실성왕이 되는 인물이다.

 

실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고구려에 볼모로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이는 곧 호태왕비의 기록대로 신라가 고구려의 신민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상황들을 생각하며 전체를 해석해본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百殘加羅

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

 

왜가 신묘년에 큰물을 건너와 백잔과 가라를 깨뜨렸다.

신라는 신민이 되었기에, 6년 병신년에 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쳐서 이겼다.

  

 

신묘년에 왜가 출병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마아를 볼모로 바치고 신민이 되어

백제와 가야, 왜의 연합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했다.

 

 

그리고 396년,

 

마침내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방을 정리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무서운 힘을 깨달은 왜는 고구려에 화친을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六年 丙申三月 躬率水軍 討帶方及濟 下十餘城 質其弟而皈

五月 倭使來献土物 及美女五人 以求仙籙  

<영락대제기> 

 

영락 6년(AD396) 병신 3월,

 

상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대방, 백제를 토벌하여 10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동생을 인질로 잡아 돌아왔다.  

 

5월, 왜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미녀 5명을 바치면서

선록(仙籙)을 구하고자 하였다.   

 

 

※  참고

 

선록(仙籙) : 선교의 책 혹은 경전

 

 

 

왜는 백제와 가라를 침공하여 깨뜨릴 이유가 없다.

 

이 당시 왜와 백제, 가라 및 야마토정권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군을 편성하고 있었고

고구려는 신라가 배반하지 못하도록 실성을 인질로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가 고구려에 화친을 요구할 때

그들의 출병 목적이 가라를 침공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를 믿고 왜가 가라를 습격하고 백제의 남쪽에 이르렀다고

고국양대제기에 기록하고 비문에도 왜가 백제와 가라를 깨뜨렸다고 새겼거나

일제 때 비문을 조작하여 每年 란 글자로 고쳐본을 만들었을 것이다.

 

 

 

 

3. 후연 공격사건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 □□□□□□□□ □師□□合戰 斬殺蕩盡 所獲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城 □城 □□□□□□城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중> 

 

 

광개토경호태왕비의 3면에 기록된 영락17년 정미 년의 기사인데,

삼국사기나 중국사서에도

이때 고구려가 누구와 전쟁을 치르고 거둔 대승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호태왕비가 발견된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나름의 연구에 연구를 더하였지만,

전쟁의 대상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통째로 해독할 수없는 상황에서

그 어떠한 결론도 쉽게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삼국사기나 중국사서에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통상의 경험에 의하면 중국과 관련된 나라가 대패하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박창화 필사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十七年 丁未二月增修宮室

命朋連解猩 引兵五萬 伐慕容熙

戰于章武之西 斬殺蕩盡 獲鎧甲萬領 軍資器械 不可勝數

拔沙溝等六城

<영락대제기>

  

          

17년(AD 407)정미 2월, 궁실을 증수하였다.

 

<붕련>과 <해성>에게 명하여 병사 5만 명을 이끌고 <모용희>를 치라하였다.

 

장무(章武)의 서쪽에서 싸워 모조리 목을 베었다.

 

빼앗은 갑옷이 만 벌이고, 군수물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사구(沙溝) 등 여섯 성을 빼앗았다.  

  

 

영락 17년 정미년인 서기 407년, 고구려는 후연(後燕)의 <모용희>를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전과를 올리며 <모용희>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후연은 <모용황>이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의 업에 세운  전연을 이어

<모용수>가 지금의 하북성 정주에 세운 나라이다.

  

 

 

 

4. 17世孫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

還至十七世孫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号爲永樂太王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중> 

 

 

고명세자 유류왕은 도로서 다스렸고, 대주류왕이 대업을 계승하였으며,

다시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등극하니, 

이름 하여 영락태왕이라 한다.

 

 

호태왕비 1면 3행에서 4행에서 5행에 기록된 것이다.

 

1.고우루(BC140-BC111)→ 2.고두막(BC118-BC59)→3.추모(BC58-BC19)

4.유리(BC40-18)→5.무휼(4-64)→6.재사(48-121)→7.궁(68-165)→

8.백고(121-179)→9.연우(173-227)→10.교체(209-248)→11.연불(224-270)→

12.약우(240-292)→13.돌고(260?-293)→14.을불(278-331)→

15.사유(311-371)→16.구부(339-384)→17.담덕(374-414)

 

<담덕>은 북부여 <고우루>의 17세손이다.

 

<고우루>가 BC 111년에 선인 <애종>의 반정으로 화를 당한 북부여 덕황이다.

 

<고우루>의 아들 <고두막>은 아버지 <고우루>가 <애종>의 화를 당할 때

8세로 나이가 어려 북부여 황제로 즉위하지 못하고 숙부 법황의 자로 있었 

BC 108년 한 무제 <유철>이 위만정권의<우거>를 멸하고

4군(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쳐들어오니

11세의 나이로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북부여 덕황 <고우루>의 아들이 <고두막>이고 일명 두막루라고 하였으며

그의 시호가 모수제인 것이다.

 

 

 

5. 비려 토벌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裨麗不□□□ 躬率往討 叵富山 負山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羊 不可稱數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중> 

  

 

五年 乙未 二月太后生子談聰于溫湯

上以卑離漸違王化 親征叵山冨山負山

至鹽水 破其部落七百余所獲牛馬羊豕万數

二后亦騎馬而從上

上以吐后有身 止之而不聽 皈生女 名以三山

<영락대제기> 

           

 

5년(AD 395)을미

 

2월, 태후가 온탕에서 아들 담총을 낳았다.

 

상이 비리(卑離)가 점차 왕화(王化)를 어기어,

직접 파산(叵山), 부산(冨山), 부산(負山)을 정벌하고,

염수에 이르러 그 부락 7백여 소를 깨뜨리고

많은 수의 소와 말, 양과 돼지를 노획하였다.

 

두 명의 후도 또한 말을 타고 상을 따랐다.

 

상이 토후(吐后)가 임신하였기에 이를 막았으나 듣지 않았으며,

돌아와 딸을 낳자 <삼산三山>으로 이름 지었다. 

 

  

 

탁본에 따라 ‘叵富山’의 叵는 학자에 따라 ‘過’라고 주장하지만,

영락대제기를 따르면 ‘叵’가 맞으니, 탁본 중에서 [사코우 본]이 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叵’를 동사로 해석하면 안 되고,

지명인 ‘파산’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영락대제는 파산(叵山),부산(冨山), 부산(負山), 이 세 산을 정벌한 것이며,

그래서 이때 낳은 토후의 딸도 <삼산(三山)>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영락대제기와 비문을 비교하면,

이때 토벌한 비려(裨麗)가 비리(卑離)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비문에 등장하는 비려(裨麗)는 비리(卑離)와 동일한 말이다.

 

‘려’는 ‘리’로 읽혀야하며 ‘고구려’도 ‘고구리’가 맞는 발음이고,

‘비려’도 ‘비리’가 맞는 발음이다. 

 

부여가 부여고지{今 滄州市 인근}에서 세력에 밀려 북으로 옮겨갈 때,

바로 이 비리국땅으로 옮겨가 임시 나라를 세운 것이며,

북부여의 서도(西都)가 있던 곳으로 북부여 멸망 후 서부여로 불리던 곳이다.

 

서기 346년 모용황이 멸망시킨 부여가 바로 이 서부여 비리이다. 

 

비문의 비리 정복기사는

고구려의 속국인 비리가 말을 잘 안 들어 혼을 내주는 이야기인데,

이 시기는 前秦이라는 강자도 사라지고 옆 동네 탁발씨도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인지라, 비리도 독립을 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6. 영락 9년의 倭人萬其國境과 영락 10년의 倭滿其中

 

 

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 白王云,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以奴客為民,歸王請命。太王恩後稱其忠誠,時遣使還,告以□訴。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중> 

 

 

 

9년 기해 백잔이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함으로 왕이 하평양으로 순행하였다.

 

신라가 사신 백왕을 파견하여 말하기를 

 

"왜인이 우리 국경 내에 가득 차서 성을 무너뜨리고, 못을 부수며,

백성들을 노객으로 삼으려 하고 있사오니 삼가 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

 

태왕은 그 충성을 가엾이 여겨 자비로운 마음으로 은헤를 베풀어 사신을 보내

 □計를 알려주고 돌아갔다.

 

 

十年庚子,教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兵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 □新羅城, [鹽]城, 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 安羅人戌兵. 滿□□□□其□□□□□□□言□□□□□□□□□□□□□□□□□□□□□□□□□□辭□□□□□□□□□□□□□殘倭潰逃 拔□城 安羅人戌兵. 昔新羅,安錦未有身來朝貢□。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新羅]寐錦僕句□□□□朝貢。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중> 

 

 

 

10년 경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까지 왜인이 그 안에 가득하였다

 

관군이 사방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배후에서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 병사를 배치(安)하여 지키게(戌) 하였다.

 

신라성 감성을 하였다.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10분의 9의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기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 병사를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내용 훼손으로 알 수 없음) 나머지 백잔과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성을 장악하여 신라인 병사를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옛날 신라 매금(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아신왕 8년(399)

 

8월, 왕이 고구려를 치고자 하여 군사와 말들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은 전역(戰役)에 시달려 신라로 많이 도망하여 호구가 크게 줄었다

<삼국사기>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므로 배후로부터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5만의 고구려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무혈 입성하여 신라의 왕도인 서라벌을 회복한다.

 

연합군은 순순히 물러갔으나 마침내 임나가라의 종발성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하늘과 땅을 두고 한판의 승부를 펼치는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벌인다.

 

 

 

이 비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임나가라의 종발성은 연합군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임나가라의 위치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인 금관가야의 옛 도읍임이 분명하다.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군의 침공에도 신라가 아직 멸망하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신라왕 내물이 담덕이 보낸

'비밀스러운 계책'을 받아들여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만약 신라가 항복하여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군이 신라 영토 내에 있는 성을

거의 장악하고 가득차 있었다면, 어째서 고구려군을 목격하자마자 

一戰을 치룰 생각도 하지 않고 임나가라까지 곧바로 퇴각하였을까?

 

신라를 먼저 정복할 수 있다면 전선은 오직 고구려와 연합군의 이강체제로

양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학자들로부터 광개토왕비문이 훈적비라는 성격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고구려에 유리하게 과시된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하지만,

그러한 추론은 왜군이 고구려의 영토를 침공하였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고구려가 제3국인 신라를 위하여 왜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한 경우에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국의 군사가 목숨을 잃어가면서 신라에게 은혜를 베푼 내용을

왜가 일방적으로 도주한 전쟁으로 기록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고구려군의 활약을 왜소화(矮小化)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왜의 일방적인 도주로 기록하는 대신 신라가 처한 위급존망의 상황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이를 구원한 태왕(太王)의 은혜·공적이

더욱 부각될 것임은 삼척동자라도 생각해낼 있는데,

영락10년조에는 그런 뉘앙스가 전혀 없다. 

 

영락 9년과 10년조에 성안에 왜인이 가득찼다는 말은

아신왕이 군사를 징발하자 전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신라로 피난하여 온 피난민들이

성안에 가득 찼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399년 기해년 기사에서 왕이 하평양으로 순행하였다 하였다.

 

고구려는 발기의 난으로 요동을 공손도에게 내어주고

산상대제 13년(209년)에 조양으로 천도한다.

 

246년 관구검의 침입으로 도성이 불타자 동천대제 21년(247년)에

지금의 요양으로 천도 한다.

 

발기의 난으로 요동(지금의 조백하 이동)을 공손도에게 내어주고

마침내  관구검의 침입으로 요동을 상실하고  요동회복을 위하여 절치부심한다.

 

고국원제 12년(342년)에 서진코자 조양으로 천도하여 고연전쟁이 발발한다.

 

고구려는 모용황에게 패하여 조양의 환도성이 불타자

343년에 다시 요양으로 천도한다.

 

영락대제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343년에 천도한  요양이기 때문에

비문의 399년 기사는 지금 북한에 있는 평양을 하평양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410년 영락대제가 하북의 북부를 평정하니

잃었던 요동을 200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장수대제 14년(427년)에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에 금으로 장식한 웅장한 궁궐을 짓고

천도하니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수도가 된다.

 

 

 

 

7. 동부여 반란 진압

 

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 討軍到餘城 而餘擧國駭服 □□□□□□ □□王

恩普處於是旋還

又其慕化 隨官來者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立婁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村一千四百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중> 

 

         

(영락) 20년 경술, 동부여는 예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으나,

중간에 반란을 일으켜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직접 나서서 토벌군이 동부여의 성에 이르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복종하고, ......

두루 은혜를 베풀고 돌아왔다.

 

또 그 덕에 감화되어 임금을 쫒아온 자는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립루압로 등이며, 공파된 성이 64성 1400촌이다.

 

 

 

二十年 庚戌正月議伐馮跋

東扶餘反報至因伐餘城 虜其王

恩普處而還六十四城 千四百餘村 皆置新主

以是停攻拔之事 

<영락대제기>

 

          

영락 20년(410)경술

 

정월, <풍발> 정벌을 의논하였다.

 

동부여가 반하였다는 소식이 도착하여 동부여의 성들을 정벌하고

그 왕을 포로로 하였다.

 

두루 은혜를 베풀어 64성 1,400 여 촌을 돌려주고 모두 새로운 주인을 세웠다.

 

이로서 공발하는 것을 멈추었다.

 

  

 

二月 命沛夏伐扶餘虜其君 分其地爲郡村

初 扶餘君有寵妃秦氏美王命納之而不聽故 襲之

秦氏與其君 出奔至霜浦追兵將至 從者皆散

秦氏乃赤身 負君渡河爲氷角所觸 而不能行

 

隱于野積中 追騎獲之獻於王

王壯之 問其所欲

秦氏曰 願無戕昏君 王許之

納爲後宮 每以夏月命負王渡水故 人稱負宮 

<국강호태왕기> 

 

               

영락 20년(410년)

 

2월, <패하沛夏>에게 명하여 부여(扶餘)를 정벌하고 그 임금을 사로잡았다.

 

그 땅을 나누어 군과 촌으로 만들었다.

 

애초에 부여 임금의 총비 진씨가 아름다워,

왕이 명하여 그녀를 상납하라 하였으나 듣지 않았기에 그들을 쳐들어간 것이었다.

 

진씨가 그 임금과 도망 나가서 상포(霜浦)에 이르렀는데,

추격하는 병사들이 막 이르자 종자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다.

 

진씨는 이에 옷을 벗고 임금을 들쳐 업어 강을 건너려하였으나

얼음이 몸에 닿아 나아갈 수없었다. 

 

야적한 속에 숨었다가 뒤쫓아 온 기병에게 잡혀 왕에게 헌납되었다.

 

왕이 그녀를 장하게 여겨 원하는 바가 있느냐 물으니,

 

진씨가 말하기를

원하건대 어리석은 임금을 죽이지 말아 달라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후궁으로 들여졌으며,

매 여름마다 명하여 임금을 업고 강을 건너게 하니 사람들이 부궁(負宮)이라 불렀다.

 

 

 

당시 부여의 풍속은 강한 자에게 비록 자신의 처라도 바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리하는 것은 강한 자에게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부여 왕과 그 왕비는 너무도 사랑하였기에,

막강한 고구려 영락대제의 명을 어기다가 왕위를 내어놓게 된 것이고,

그러한 부군을 역시 사랑한 그 왕비도 최선을 다하여 남편을 살린,

참으로 애틋한 이야기이다.

 

영락대제도 그 사랑에 크게 감동받았기에

매 여름 임금을 업고 강을 건너게 한 것이리라.

 

 

 

 

- 영락대제 사후 2년

 

 

1. 사망 시기

 

 

永樂二十二年 壬子...............

十月王崩於丹王宮 太后號哭 不忍發喪

命道士等修齋祈禱 諸王子多不知之

至長春元年九月始藏陵立廟 

<국강호태왕기> 

 

영락 22년 임자년(412) ...............

 

10월, 왕이 단왕궁(丹王宮)에서 붕어하셨다.

 

태후가 목 놓아 울부짖으며 발상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도사 등에게 명하여 수재(修齋)하고 기도하라 하였다.

 

왕자들은 상당수가 이를 알지 못하였다.

 

장춘 원년(414) 9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릉에 모시고 사당을 세웠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2년 동 10월, 왕이 훙하였다.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영락대제의 사망 시기는 재위 22년이고,

삼국사기 연표에 따르면 서기413년 계축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박창화 필사본들은 이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첫 번째, 왕훙(王薨)이라 기록하였다.

 

고구려는 연호를 사용하고 천자의 나라를 표방한 나라이다.

 

붕(崩)을 쓰지 훙(薨)을 쓰지 않는다. 

 

 

두 번째,광개토왕이 아니라 광개토호태왕이다.

 

비문에도 새겨져있는 태왕 혹은 호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는 자신들의 조상을 비하시키는 만행을 저질러 놓은 책이다. 

 

 

삼국사기와 필사본들에 기록된 영락대제의 사망 시기를 비교하면,

 

 

               삼국사기      영락대제기       국강호태왕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재위           22년          24년               22년

서기          413년         414년             412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국강호태왕기>의 기록이 정확하다.

 

 

  

영락대제는 재위22년, 그러니까 영락22년 서기412년에 붕어하셨다.

 

그리고 장수대제의 등극은 서기414년이다. 

 

영락대제기에서는 <천익天益>이 정변으로 스스로 익원왕(益原王)을 칭하였던,

그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감춘 것이며, 무언가 감추어진 그 2년이 지난 후,

영락대제의 시신은 릉에 안장되고 사당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역사서는 상황에 따라 후대에 고쳐질 수 있다.

 

기록 중 어느 한부분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전체를 위서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2. 사태자(嗣太子)(榻)

 

 

四月 以榻太子爲嗣太子巨連爲亞太子

巨連辭以母微

王曰汝年最長而孝友 可以托大事 汝弟雖弱 汝能輔之 則朕何憂乎 

<국강호태왕기>  

                       

4월, <탑榻> 태자를 사태자(嗣太子)로 삼고 <거련巨連>을 아태자(亞太子)로 삼았다.

 

<거련>은 어머니가 미천한 출신이라 하여 사양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나이가 가장 많고 효성과 우애가 깊으니 대사를 능이 맡을 수 있다.

네 동생이 비록 약하여도 네가 능히 보좌할 수 있으니 짐이 무슨 걱정이겠느냐?”

 

 

三月 榻太子崩於溫湯

王與太后如之移柩於大神院

榻太子與諸后及妃嬪荒色無虛日 氣盡而崩 

 

或云 榻太子忌小王 累使白山后 獻鴆于小王

白山不忍之 反以其鴆置於榻太子食中

或云 白山泣告于斗陽 斗陽奪其鴆 而中榻太子

九重之事有不測 但聞溫流肥膩

後人名其湯爲太子井 祀太子及白山斗陽三神  

<국강호태왕기> 

 

3월, <탑> 태자가 온탕에서 붕어하셨다.

 

왕은 태후와 함께 가서 널을 대신원(大神院)으로 옮겼다.

 

<탑> 태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여러 후 및 비빈들과 색에 빠졌다가

기가 다하여 붕어하셨다. 

 

혹은 <탑> 태자가 소왕(거련)을 싫어하여 여러 차례 <백산>后를 시켜

짐새 독을 소왕에게 올리라 하였으나, <백산白山>이 이를 차마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짐새 독을 <탑> 태자의 음식 중에 넣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백산白山>이 <두양斗陽>에게 울면서 이를 고하자,

<두양斗陽>이 그 독(짐새)을 빼앗아 <탑> 태자를 해쳤다고도 한다. 

 

구중의 일은 예측하기 힘들지만 단지 들리는 바, 기름진 온천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그 탕을 태자정(太子井)이라 하고, 

태자, <백산,> <두양> 3신을 제사지냈다.

 

 

 

時 榻太子在溫湯荒淫

后與小王如之 勸無傷

榻太子不聼 又奪小王妃斗陽公主

斗陽不悅 與白山后共謀 而鴆之 

<천강태후기> 

 

                  

이때 <탑> 태자가 온탕에서 황음에 빠져있었다.

 

后가 小王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몸을 상하지 말라 권하였다.

 

<탑> 태자는 듣지 않고 또 소왕의 비 <두양斗陽> 공주를 빼앗았다.

 

<두양斗陽>이 불쾌해하여 <백산白山>后와 공모하여 짐새독으로 죽였다.

 

 

 

 

后與小王 移其柩於神院而小王卽位於明堂

以榻太子子瓊 爲嗣太子

后哀榻太子不肯視朝 願留於神院 而福之 

<천강태후기> 

 

                  

后가 小王과 함께 그널을 신원(神院)으로 옮겼다.

 

그리고 소왕이 명당(明堂)에서 즉위하였다.

 

<탑> 태자의 아들 <경瓊>을 사태자로 삼았다.

 

后가 <탑> 태자를 애도하여 조례를 보지 않고 신원(神院)에 머물며 그의 복을 빌었다.

 

 

 

 

 

영락대제에게는 탑(榻)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서기396년에 태어나 414년에 붕어하신,

불과 열아홉의 어린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황태자였다. 

 

삼국사기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장수대제를 대신하여

고구려 제20대 임금으로서 영락대제와 함께 존경받는 임금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 비운의 황태자는 영락19년, 서기409년,

열네 살이 되던 해에 황태자를 의미하는 사태자(嗣太子)가 된다.

 

사태자란 다음 제위를 물려받는 태자,

즉 고구려 초기에 사용된 정윤이나 같은 의미이고,

아태자란 사태자에게 변고가 발생할 때 이를 대신하는 다음 승계자를 말한다.

 

이 아태자를 천강태후기에서는 아사(亞嗣)라고 표현하였다.

 

즉, 탑 태자가 1순위, 나중에 장수대제가 되는 거련이 2순위였다.

  

<거련>은 궁인(宮人)인 <백산白山>에게서 낳은 아들이기에,

<탑> 태자보다 두 살이 많음에도 제위를 이어받는 사태자가 되지 못하였고,

또 스스로가 미천한 출신임을 들어 아태자의 자리마저 사양하는 것이다. 

 

기록에는 탑 태자가 몸이 약했으며, 천강태후가 그를 썩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락대제는 그를 소왕(小王)으로 봉하고,

영락21년, 서기411년에 마침내 그에게 조회(朝會)를 받으라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탑태자가 영락대제를 이어

고구려의 천자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인 듯하였다.

 

사건은 이듬해 터졌다. 

 

영락 22년, 서기412년 9월,

 

영락대제는 황산원으로 사냥을 갔다 온 후로 몸이 좋지 않았는데, 

이때 <천강>태후가 그 동생인 <천익>으로 하여금

<탑> 태자와 함께 감국(監國)을 명하게 된다. 

 

문제는 이 <천익天益>이 권좌를 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익>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천익>은 군권을 장악하였고,

한 달 후 영락대제가 붕어하자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탑> 태자를 폐하였다. 

 

영락23년(413) 9월,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던 <천익>이 항복하고

고구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자,

<거련>{장수대제}은 다시 <탑> 태자를 받들어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천강>태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탑> 태자를 옹호하던 영락대제도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평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천강>태후는

마침내 <거련>을 택하여 소왕(小王)으로 세우게 된다. 

 

그리고 영락24년(414) 3월, 마침내 <탑> 태자가 온탕에서 붕어하자,

소왕으로 있던 <거련>이 즉위하여 장수대제가 되는 것이다.

 

국강호태왕기에서는 탑 태자의 죽음을 애매하게 표현하였으나,

천강태후기에서는 <두양>과 <백산>이 <탑> 태자를 독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탑태자의 한(恨)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가 멀쩡히 계승받을 수 있었던 고구려의 황위를

<천강>태후와 그 동생인 <천익>으로 인하여,

황음무도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취급되며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한이

그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이라고 본다. 

 

그가 그토록 자격이 없었다면,

영락대제가 <천강>태후의 반대를 물리치고 황태자로 삼았을 리 없지 않은가? 

 

그 사태자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멀쩡한 사태자가 살아있는 한 장수대제가 즉위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황음하여 기가 다하여 죽었든,

아니면 <두양>과 <백산>에 의해 독살되었든지 간에,

그가 죽어야 장수대제가 즉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탑> 태자의 아들 <경瓊>이 다시 사태자(嗣太子)가 되었고, 

장수대제를 이어 다음 제위를 보장받았으나,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3. 익원왕(益原王) <천익天益>

 

 

九月 王畋于黃山原 得猿鹿 命放 遂罷獵 而皈不豫

太后憂之命天益與榻太子監國

天益乃使其子天槥天雄 分掌內尉軍

命罷六衛屬之 

<국강호태왕기> 

 

 

(412년) 9월,

 

왕이 황산원에서 사냥을 하여 원숭이와 사슴을 잡았으나,

놓아주라 명하고 사냥을 그만두어 돌아왔으나 몸이 편치 않았다.

 

태후가 걱정하여 <천익>에게 <탑> 태자와 함께 감국하라 명하였다.

 

<천익>이 이에 아들인 <천혜>와 <천웅>을 시켜 내위군을 나누어 장악하라하였고,

육위(六衛)를 파하여 그들에게 속하게 하였다.

 

 

 

榻太子荒淫大亂 天益自爲安國君 摂行王事

以犬河公榷爲左輔 流于厔解橡于外

<국강호태왕기>

  

                

<탑> 태자가 색에 빠져 크게 어지러워지자,

<천익>이 스스로 안국군(安國君)이 되어 왕의 업무를 대신해서 행하였다.

 

견하공(犬河公) <각榷>을 좌보로 삼고

<우질于厔>과 <해상解橡>을 바깥으로 유배시켰다.

 

 

 

后弟亥益肅國 皆據大庄園車騎出入

擬如王城 無敢規其僭者

后亦日易三服月用錦帛以百數

使人採藥鍊丹力保妙容 

<천강태후기> 

 

                       

후의 동생 <해亥>, <익益>,<숙肅>, <국國> 모두 대장원(大庄園)에 살면서

거기(車騎)(말이 끄는 수레)로 출입하였고,

왕성(王城)에 비견되었으나 아무도 감히 그 참람함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后 역시 매일 세 번 옷을 갈아입고, 매월 금백(비단)을 사용하는 것이 수백이었다.

 

사람을 시켜 약을 캐고 만들게 하여 젊음을 유지하려 힘썼다.

 

 

 

永樂二十三年 正月天益自爲益原王

以其妻槥門陽平于棠榷氏 爲后

改槥門陵 爲高陵 置官屬 大營之

太后及榻太子不能禁之 

 

二月 天益廢榻太子 爲枘博都尉

以其子天槥 爲太子 逼太后 爲天后

太后曰 汝治天下足矣何用老物

吾可與榻兒老於+達院 天益不許之 

<국강태왕기> 

 

                

영락 23년(413)정월, <천익>이 스스로 익원왕(益原王)이 되었다.

그 처 <혜문槥門>, <양평陽平>, <우당于棠>, <각榷>씨 등을 후로 삼았다.

 

혜문릉(槥門陵)을 고쳐 고릉(高陵)이라하고 관속을 배치하여 크게 지었다.

 

태후와 <탑> 태자는 이를 막지 못하였다. 

 

2월, <천익>이 <탑> 태자를 폐하여 예박도위(枘博都尉)로 삼았다.

 

자신의 아들 <천혜天槥>를 태자로 삼았으며, 태후를 위협하여 천후로 삼았다.

 

태후가 말하기를

 

“네가 천하를 다스리면 족할 터인데 어찌 늙은 몸을 이용하는가?

 

나는 <탑>과 함께 달원(達院) 에서 생을 마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천익>이 허락하지 않았다.

 

 

 

巨連馳入太后宮 奉太后使平太子諭天益降之

天益乃誅其奸臣茶夫等而膝行請罪

太后泣謂巨連曰天益雖有罪 非其本心 不忍加誅

巨連乃從太后旨廢益爲庶人 因于太白山 悉捕其黨 誅夷之 

<국강호태왕기> 

 

                     

<거련>이 태후궁으로 달려 들어와 태후를 받들고,

<평> 태자를 시켜 <천익>을 타일러 항복하게 하였다.

 

<천익>이 마침내 간신 <다부茶夫> 등을 죽이고 무릎으로 걸어 죄를 청하니,

 

태후가 울며 <거련>에게 말하기를

 

“<천익>이 비록 죄가 있으나 그 본심이 아니니

차마 주살되는 것을 보지는 못하겠구나.”

 

<거련>이 이에 태후의 뜻을 따라 <천익>을 서인으로 폐하고 태백산에 가두었으며,

그 무리는 모조리 잡아 죽였다.

 

 

 

山靖難 縳陽于堂下 而数罪曰 天下欲其食汝肉

至是 山反爲其子謝前日之過言

陽曰 是何言也 伊時 方知吾婿之忠也

吾以汝爲子 勝於太輔

 

小滿馬回聞陽復用皆退避后

以陽女小棠 妻馬回子貴而和之

后乃安心專政又以少女光陽 妻解竹子鵬

命竹總西北軍事天肅總東南軍事

王恐后有異志 不敢離側

且睂后意以勒爲內裏大兄 許行龍郞事 

<천강태후기> 

 

                   

이전에 <다다산>이 난을 평정하고 <우양縳陽>을 당하에 묶어 놓고는,

 

여러 죄를 들어 말하기를

 

“천하가 네 고기를 씹어 먹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이제 와서 <다다산>이 도리어 그 아들이 되니, 이전에 말이 지나쳤음을 사죄하였다.

 

<우양>이 말하기를

 

“이 무슨 말인가. 그때 일은 내 사위의 충정이라는 것을 아느니,

내가 그대를 자식을 삼았기에 태보로 올랐음이다.” 

 

<소만小滿>과 <마회馬回>는 <우양>이 다시 기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물러나 后를 피했다.

 

<우양>의 딸 <소小棠당>으로 <마회>의 아들 <귀貴>의 처로 삼아 화해하였다.

 

이에 后가 안심하고 정사에 전념하였고

또 막내딸 <광양光陽>을 <해죽解竹>의 아들 <붕鵬>의 처로 하였다.

 

<해죽>에게 명하여 서북군의 일을 총괄하게하고,

<천숙>에게 동남군의 일을 총괄하라 하였다.

 

왕은 后가 다른 마음을 가질까 두려워 감히 곁을 떠나지 못하였고,

또한 后의 뜻에 맞추어 <위륵>을 내리대형(內裏大兄)으로 삼고

용랑(龍郞)의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영락대제와 장수대제의 사이에 익원왕이 존재하였다.

 

스스로 왕을 칭한 반역으로 역사에서는 기록하고 있기에,

고구려의 임금으로 기록되지는 못하였지만,

누나인 천강태후의 묵인 하에 왕이 되었었다는 점에서,

다소 애매한 점이 있다.

  

권력공백을 틈타 <천익>이 군권을 장악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영락대제가 붕어하시자,

<천익>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좌에 오르게 된다.

 

영락대제가 붕어하시자 <천강>태후는 이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것이다.

 

그 의중이 무엇인지 역사에는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판단을 함부로 할 수는 없겠지만,

이전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그녀가 <탑> 태자의 등극을 원치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 동생인 <천익>과 함께 역성혁명을 기도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들의 아버지인 천원공 <을림>은

이미 고국원제 시절부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고,

그리고 그 딸인 <천강>은 4대째 임금을 섬기며 그 권력을 공고히 한 여인이었다.

 

<천강>의 동생들은 <천익>을 포함하여

모두 부와 권력을 향유하며 왕처럼 행세하였다.

 

이러한 배경아래 영락대제가 붕어하시자,

<천익>이 <탑> 태자를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것이고,

<천강>이나 <천익>이 자신들의 천하를 만들고자 한 의도는 충분히 있었다고 보인다. 

 

<천익>과 <천강>은 그 아버지가 공식적으로는 천원공 <을림>이다.

 

공식적이라는 말은 천강이 연씨(淵氏)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다소 의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원공 <을림(329-397)>의 아버지는 <을불(278-331)>, 즉 미천대제이다.

 

이들에게도 황족의 피가 흘렀으니,

어쩌면 고구려 20대 임금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를 익원왕은,

그 일처리의 선후가 깔끔하지 않았던 탓으로,

고구려의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4. 내란의 시작과 끝

 

 

 

익원왕 천익이 스스로 왕이 된지 9개월 만인 영락 23년 서기413년 9월,

마침내 <거련巨連>이 주도한 친 태후파에게 굴복을 한다.

  

<천익>은 영락대제가 병으로 쓰러지자말자 누나인 <천강>태후를 등에 업고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한 자이다.

 

그리고 그가 왕 노릇을 하는 한참동안 <천강>태후는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골육상쟁을 이유로 동원하지 않았다.

 

이는 이들이 딴 마음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천강>태후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갑자기 군사를 동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추측컨대 <천익>이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며,

이로 인하여 고구려가 내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국강호태왕기는 <거련>과 <천강>태후를 옹호하는 편이고,

천강태후기는 이들에 대한 기술이 보다 객관적이다. 

 

국강호태왕기에서는 <거련>이 주도적으로 <천익>을 제거하는데 앞장서고,

<천강>태후 또한 이에 적극 협조하는 것으로 기술되어있지만,

천강태후기에서는 <거련>이 익원왕의 편에 서 있다가,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천강>태후가 황급히 <거련>을 불러

이를 수습하는 것으로 기술되어있다. 

 

이 중 <천강>태후기의 기록을 선택한다.

 

이는 익원왕이 등극한 배경과,

영락대제의 발상을 미룬 점 등으로 판단할 때

<천강>태후와 <천익>이 정변을 주도했으며,

<거련>은 이에 항거할 힘을 갖지 못하고 이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천익>을 제거하자고 설득하는 것은 <갈윤葛倫>이었다.

 

<갈윤>은 요동에서 재산을 모아 <천강>태후에게 바치고는

그녀의 총애를 얻은 자인데 <천익>이 왕이 되자 이에 반발하였고,

전방의 군사를 동원하기를 망설이는 <천강>을 설득하던 중,

그녀의 부(符)를 훔쳐 <해죽>과 <마회>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당시 <해죽>은 요동태수이고, <마회>는 신성태수였다.

 

즉, 이들이 고구려의 국경을 지키는 핵심 군사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때 <거련>이 <천익>의 편에 서서 <해죽>을 막아서는데,

국강호태왕기에서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천강>태후가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거련>을

영락대제의 후사로 삼고자 하고 있던 중,

영락대제가 서거하자 미처 <거련>을 등극시킬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탑> 태자를 후사로 삼지 않고

자신의 동생인 <천익>으로 하여금 정권을 맡게 한 것이며, 

<천익>이 정권을 독점하고 스스로 왕이 되자 당황하였고,

이를 제거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갈윤>이 임의로 군사를 동원한 것이고, 

<천강>태후의 모호한 태도로 <거련>은 천익의 명령을 따라

<갈윤>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으며,

세가 <천익>에게 불리함을 깨달은 <천강>이 급히 <거련>을 불러

<천익>에 대항하라 하였고, 마침내 <천익>이 항복하고 내란이 정리된 것이다. 

 

<거련>이 역적인 <천익>의 편에 있었으므로 죄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천강>태후가 <거련>을 후사로 생각한 까닭에 그를 설득하여 <천익>을 치라하였고,

국강호태왕기에서는 이 사실을 감춘 것으로 보인다. 

 

<천강>태후는 <천익>을 대신하여 <다부茶夫>를 간신으로 몰아 처형하고,

<천익>을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중신들의 압박으로 그를 태백산에 유배시키지만,

414년 2월, 다시 익원공으로 복위시켜 풀어준다. 

 

<천강>태후가 영락대제의 사후에 일어난 정변의 핵심이었다는 판단은,

정변의 주도자였던 <천익>을 슬그머니 복권시키고,

그를 따르던 역적 <우양>을 태보로 다시 기용하였다는 것은,

그녀가 결코 당시 정변의 피해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  <담덕談德> 一代記

 

 

374년  고국양제 伊連(342-391)과 淵琳(329-397)의 딸 淵天罡(355-446)사이에서

           태어남

 

384년  소수림제 죽음. <모용수>가 후연(治所 중산)을 세움

 

386년  태자가 됨

 

389년  2월 대가야와 야마토국이 혼인동맹을 맺음

          9월 고구려가 아단성을 침공함

 

390년  2월 신라의 <보해>가 태어남

          9월  진가모가 고구려 도압성을 습격함

 

391년 4월  백제의 적현성과 사도성을 빼앗음

                왜가 가라를 침공하고 백제의 남쪽에 이름

          5월  고국양제가 죽고 제위에 오름

          7월  내물이 두 딸을 고구려에 보냄

                백제 <전지>가 태어남

 

392년  1월  <실성>이 고구려에 옴

          5월 고국양제 죽음

          7월 백제의 석현성등 12개성을 점령함

          9월 거란을 공격함

         10월 관미성을 정벌함

         11월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이 즉위함

 

393년  3월  신라 <미해>가 태어남

           7월 거란을 공격 천서(川西)를 빼앗음

                 평양에 9寺를 창건함

           8월 진무가 석현성과 관미성을 공격함

                 왜가 신라의 금성을 공격함

                 독산에서 협공하여 격파함(독산참왜)

                 탐라주 <월손>이 토산물을 바침

 

394년  2월  <평양>이 <거련>을 낳음

           7월  진무를 수곡성에서 대파함

           8월  남쪽 성 7개를 보수함

 

395년   2월 비리의 파산(叵山), 부산(冨山), 부산(負山)을 정벌함

           8월 <진무>를 패수에서 대파함

                 말갈이 신라의 실직을 공격함

          11월 아신이 청목령에서 한성으로 되돌아감

 

396년   3월 대방과 백제를 침공하여 10여성을 함락시키고                 

                 아신왕의 동생을 인질로 잡아옴

           4월 <모용수>가 죽고 <모용보>가 즉위함

           5월 왜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미녀 5인을 보냄

                 <탑> 태자가 태어남

 

397년   1월 <인덕>천황이 즉위함

                 <아신>이 <전지>를 야마토 <인덕>천황의 즉위식에 보냄 

                

 

398년   3월  아신이 쌍현성을 쌓음

                  북맥의 막사국과 가태국을 정벌함

           9월  <춘>태자가 유기 70권을 개정함

                  <모용성>이 즉위함

 

399년   5월 왜가 신라의 변방을 침공함.

                 고구려가 기병 5천을 내어줌

           7월 <아신>이 병마를 징발하자 많은 백제인 신라로 귀부함

 

400년   2월 <모용성>이 신성을 침범함

                 왜가 신라를 침공하자 5만병을 끌고 가 물리치고

                 임나 안라 가라가 입조함 (남방이 평정됨)

 

401년   3월 <실성>이 돌아옴

            8월 <모용성>이 피살되고 <모용희>가 즉위함

 

402년    2월 <실성>이 즉위함

            4월  거란을 공격하여 구려성과 대극성을 빼앗음(요동이 평정됨)

            9월  동명대제를 지냄(<왜>·<신라>·<진{秦}>·<연>·<진{晉}>·<맥>·<백제>·

                   <가야>)의 여덟 나라 여인들이 춤사위를 올리고 곡을 불어 바침.

 

403년    3월  야마토의 <인덕>천황이 후궁을 바침

            7월  <아신>이 신라를 침공함

 

404년    5월  용성(龍城)이 반란하여 <붕련>이 토벌함

                   왜가 대방에 쳐들어오자 <붕련>이 토벌함

           11월  다시 용성(龍城)을 공격하여 빼앗음

 

405년    1월  <모용희>가 장무성으로 쳐들어왔다가 대패함

             2월  위 <탁발규>가 사신을 보냄

             9월  <아신>이 죽고 <전지>가 즉위함

                    <인덕>의 딸 <팔수>를 <전지>의 처로 <전지>와 함께 보냄

 

406년   12월  <모용희>가 거란을 친히 치려 형북에 이르렀다가,

                    군병을 몰래 움직여서 돌아 들어와 목저성을 쳤으나 패함

 

407년    2월  燕을 정벌하여 6성을 빼앗음

 

            4월  <모용희>의 처 <부>씨가 죽음

            7월  <모용운>이 <모용희>를 죽임

 

408년    3월  <모용운>이 공물을 바침

                   왜가 신라의 대마도를 침범함

 

409년    7월  나라의 동쪽에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을 옮김

           10월 <탁발규>의 아들 <嗣>가 아비인 <珪>를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오름

 

410년    1월  동부여의 반란을 진압함

                   <보해>가 고구려에 래조하여 <마련>을 처로 삼음 

             9월  <미해>가 야마토로 감

 

411년    1월  <풍발>이 사신을 보내옴

             5월  <보해>가 돌아옴

 

412년    3월  <풍발>이 딸을 후궁에 바치면서 장무와 숙거 땅을 떼어주길 청함

            7월  <보해>가 고구려로 감

           10월  <담덕>의 죽음

                    <천익>이 반란을 꾀함

 

413년    9월  <천익>이 항복함

 

414년    3월  <탑> 태자가 시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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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