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대제14년{AD427}정묘,

 

2월, <평양>의 새 궁으로 이거하였다.

 

궁전과 관사의 규모의 웅장하기가 나라가 있어 온 이래로 처음 있는 것이었다.

 

상이 돌아 본 후에 좌우들에게 이르길;

 

“옛날 우리의 <동명>께서는 띠 풀 지붕에 사시면서도 대업을 능히 이루셨소.

짐은 이렇게 금으로 지은 궁전에 머물기가 마음이 개운하지 않소.

장차 <동명>께 어떻게 보답한단 말이오.

그대 백료들 모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주와 성심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어서

<동명>의 나라를 빛내야 할 것이오.”

 

라 하였더니, 군신들이 엎드려 절하였다.

 

 

장수대제가 천도한 평양성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 일대이다.

 

 

장수대제가 천도한 평양성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임을 사서를 통하여 알아본다.

 

 

<장수대제가 천도한 평양(영평부)>

 

대청광여도의 영평부가 지금의 노룡이며 장수대제가 천도한 평양이다.

 

 

<사료1>

 

東夷高句驪國,今治漢之遼東

<宋書 고구려>

 

동이 고구려국은 현재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을 지배하고 있다

 

 

 

송서는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로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에 대하여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한나라 시대는 지금의 조백하가 요동군과 요서군의 경계였다.

 

 

<사료2>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宋書 백제>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송서 백제 기록은 고구려는 요동 동쪽 1천여 리 밖의 동천왕 평양성(요양)에서

요동군에 있는 장수왕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백제는 지금의 요동반도 남단에서 요서로 진출한 한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료3>

 

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 ...중략...

 

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 寔爲朝鮮

<연남산묘지명>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중략)

넓고도 신령스러운 바다여! 수많은 강물이 모이는 곳.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

 

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

<연남생묘지명>

 

공의 성은 천이며 휘는 남생이고 자는 원덕으로서, 요동군 평양성사람이다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출생지가 요동군 평양성으로 나온다.

 

위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연남산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조선을 계승하였으며,

평양을 조선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 연남생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료4>

 

高麗之地本孤竹國也周代以之封于箕子

<隨書 배구전>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다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 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治三郡

<삼국유사 고조선>

 

당서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한나라가 3군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十八年初 焬帝之幸 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隠與之見帝 黄門侍郎裴矩

說帝曰髙勾麗本 箕子所封之地 漢晉皆爲郡縣 今乃不臣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但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8년(607) 처음에 수양제가 <계민>의 장막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여 그와 더불어 황제를 만나 보았다.

 

황문시랑 <배구>가 황제를 설득하며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 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사료5>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 대청광여도, 청국지지 연혁도 등에

고죽국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표기되어 있다.

 

 

<당토명승회에 나타난 고죽국과 고조선성 1805년作>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인 宋書는

장수왕의 평양성에 대하여 한나라의 요동군 지역이며,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었던 동천왕의 평양성에서 서쪽으로 천리 이상 이동하여

한나라 요동군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내용을 잘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 수서,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 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 대청광여도, 청국지지 연혁도 등에

고죽국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수왕의 평양성은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였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동천왕의 평양성{요양}과 장수왕의 평양성{노룡}은

거리가 동서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후한서 군국지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고,

위에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당서 배구전은

장수왕의 평양성을 기자를 봉한 땅이자,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한족들의 사서는 고구려의 평양성들을 모두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

 

 

연남산묘지명에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조선을 계승한다는 뚜렷한 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여러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마다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누르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곳 평양성이 고조선의 왕검성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족의 역사서들은 이 4곳의 평양성마다

한나라 낙랑군 지역이라는 기록을 남겨 고구려 역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사서들에 나오는 한나라 낙랑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알아야 고구려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24.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있다.

http://elfqkr.tistory.com/403 참조>

 

 

 

<사료 6>

 

안동대도호부

 

순임금이 청주를 분할하여 營州를 만들었고 牧을 배치하였으니

마땅히 요수의 동쪽이 이곳이다.

 

춘추시대 및 전국시대에는 아울러 연나라에 소속되었고

秦나라와 전한.후한시대에는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晉나라 시기에는 그대로 따랐으며 겸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後魏시대에 고구려가 그 지역에 도읍하였다.

 

大唐 總章(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668년)에 <이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176개 성을 얻어 그 지역을 都督府 9, 州 42, 縣 100개를 분할했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고

그 지역 토박이 지도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通典」권180 州郡 古靑州 安東府>

 

 

- 「通典」의 저자 <杜佑>

 

「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편찬한 책이다.

 

모두 2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우>는 唐 玄宗 開元 23년(735년)에 태어나 唐 憲宗 元和 7년(812년)에 서거했다.

 

<두우>는 풍부한 정치적 경험과 고결한 문화적 수양을 갖추었다.

 

따라서 그는 역사가의 안목으로 현실의 정치. 경제 문제를 처리했고

정치가의 식견으로 역사서를 저술했다.

 

「통전」은 <두우>가 唐나라 代宗 大歷 원년(766년) 무렵에 편찬을 시작하여

德宗 貞元 17년(801년)까지 35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소요하여 편찬 한 책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것은 668년인데

두우가 통전의 편찬을 시작한 것은 766년이다.

 

그러니까 고구려가 멸망한 지 100년 뒤에 「통전」을 편찬 한 것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일이고

위안부문제는 이때를 전후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몸으로 겪은 사람들과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증언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두우>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67년 뒤인 735년에 태어나서

766년 고구려가 멸망한 지 100년후에 「통전」의 저술에 착수했다.

 

<두우>도 고구려 문제를 직접 체험한 사람과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소상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평양이 대동강 유역의 평양인지

潮河 유역 平州 평양인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지 67년 뒤에 태어나

현장을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을 통해 증언을 들었을 <두우>는

당나라에서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 있었는지

아니면 평주에 있었는지 환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두우>는 안동도호부가 평주,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지역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과연 역사의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할 자료가 있겠는가.

 

 

 

平州는 지금 주청사 소재지는 노룡현에 있다.

 

은나라 때는 고죽국이었고 춘추시대에는 山戎. 肥子 두 나라 땅이었다.

 

오늘날의 노룡현에는 엣 고죽성이 있는데 백이. 숙제의 나라였다.

 

전국시대에는 연나라에 속하였고 진나라 때는 우북평 요서군 지역이었다.

 

전한.후한시대에는 秦나라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따랐다.

 

晉나라 때는 요서군에 소속되었고 後魏 시대에도 역시 요서군이라 하였다.

 

수나라 초기에 평주를 설치하였고 양제 초기에 평주를 폐지하고

다시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당나라 때는 수나라 행정구역을 그대로 따랐다.

 

관할한 현은 3개인데 盧龍縣, 石城縣, 馬城縣이다.

<「통전」북평군 평주>

 

 

<사료 7>

 

晉나라 때 平州를 설치했던 지역에 後魏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고

唐나라때에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

<通監地理通釋>

 

南宋 말년의 학자 <왕응린王應麟(1223-1296)>의 「通鑑」의 지리에 관한 주석에서

<두우杜佑>의 주장을 그대로 계승하여 말하고 있다.

 

 

<사료 8>

 

箕子後封遙之樂浪 今平州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德以遙爲箕州 八年 而高麗亦其地 

<路史 27券 朝鮮> 

 

기자는 뒤에 요의 낙랑에 봉하였다.

오늘날의 평주 노룡현 지역으로 여기에 조선성이 있다.

그러므로 무덕 연간에는 요(遙)를 기주로 삼았다.

무덕 8년임.

그런데 고구려도 또한 그 지역에 있었다.

 

이 자료는 「路史」의 저자 <羅泌>이 「路史」를 저술하던 송나라 당시의

平州 노룡현, 즉 오늘날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기자조선과 한사군의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울러서 고구려도 역시 그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사료 9>

 

唐征高麗 拔平壤 置安東都護府 其國東徙 在鴨綠水東南千餘里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수 동남쪽 1,000여리에 있게 되었다.

<鄭開陽雜著 5券 朝鮮考>

 

朝鮮考의 저자 <鄭開陽>은 <王守仁>의 제자로 明나라 때 유명한 학자이다.

 

「日本圖纂」, 「朝鮮圖說」, 「琉球圖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동아시아의 정세에 아주 밝았던 학자로 그의 고구려에 대한 이와 같은 주장은

반드시 어떤 명확한 근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때 당나라에 의해 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요서의 평주를 상실하고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사료 10>

 

藏以永淳初死, 藏頡利墓左, 由是高氏絶王矣 至垂拱中 以臟孫寶元 爲朝鮮君王

唐末中原多事, 遂自立爲君長, 而其名號史失不紀也

< 咸賓錄>

 

 

보장왕이 죽고 무측천 垂拱 연간(685~688)에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寶藏王)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역사에서는 그가 복국운동을 하니까 제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망했다는 말이 없다.

 

다만, "당말(唐末), 중원이 다사다난할 때 한반도에서 자립하여 군왕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고구려라는 이름이 역사적 사실에서 지워지고 기록되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 

 

 

 

<사료 11>

 

後唐 淸泰 연간(934-936) 말에 고구려가 다시 일어났으니

<왕건>이 신라의 변두리 읍을 쳐서 점령하고 송악에 도읍을 세웠다.

 

元史에"압록강 동쪽 천여 리에 있는 곳은 옛 평양이 아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신라{고려}는 겨우 海城의 동쪽과 조선의 여러 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당나라 때의 지역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五代 이후 요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이어서 끊어지지 않았다.

 

계림에 관해서 보면, 곧 길림으로서 鷄(ji)와 吉(ji)의 발음이 서로 부합하고

여러 지리를 조사해 보아도 또한 모두 부합한다. 

<滿州源流考>

 

 

元史 고려전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료 12>

 

고구려 적은 무리(少醜소추)가 마음이 어지럽고 사리에 어두워 불손함이 극에 달해

윗 나라를 받들어 모실 줄은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발해(勃海)갈석(碣石)의 사이에 가득 차게 모여

요(遼)예(濊)의 땅을 거듭 침식하여

한나라와 위나라 때 여러 번 그 소굴을 뒤집어 그 나라 백성들을 분산시키곤 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어 그 족속들이 여전히

전에 살던 곳을 회복하고 번식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화양(화북)을 돌아다보니

 

모두 고구려가 잘라먹고 세월이 흘러 쌓여진 폐단이 그 땅에 이미 그득하다

하늘은 음흉하고 사악한 자들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 고금의 변하지 않는 이치일진대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선량한 백성들과 공손한 이웃나라들의 평상의 생활을 어지럽히고

도덕과 의리를 그르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

이를 스스로 반성하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숨기고

간사한 마음을 품으려 한다

 

살던 땅을 떠나본 고통과 험한 것을 일찍이 겪어보지 않아

천자를 배알하는 예를 몸소 하려하지 않으며 계속 우리의 착한 망명자를 꾀어드리고

나라 경계에 첩자가 들끓어 우리의 감시병을 몹시 괴롭히고 있다

그리하여 국경문의 빗장을 열고 닫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되지 않아

천하가 시끄럽게 되고 백성들은 곤하여 생업에 열중하지 못하게 되었다

 

선왕의 정벌이 있을 때에 잠시 그물을 벗어났으나

그 때 사로잡은 자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 이를 미루고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랬는데 일찍이 그 은혜를 깨닫지 않고 도리어 마음속에 악함만을 길러

거란의 족속과 합세해 해변의 경계(境界)를 약탈하며

바다를 지키는 우리의 병사를 죽이고 말갈의 무리와 협력해 요서를 침노하였다

 

또한 청구(한반도의 신라와 백제를 말함)의 외방(外方)이 다 조공을 받으려 하고

벽해(碧海)의 바닷가 백성들이 오로지 중국의 은혜를 받들려 하는데

고구려가 이를 중간에서 막고 재물을 도적질하며 여러 나라의 통로를 끊었다

그 무례함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며

드디어는 그 잔학함이 별로 죄가 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다만 성실한 사람만이 손해를 거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사명을 받든 수레가 해동(海東)에 가려고 고구려를 지나가면

중간에서 길을 막고 못 가게 했다

 

군왕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를 갖출 수 있겠는가?

 

이래도 참을 수가 있다면 어떤 것인들 수용하지 못하랴?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마저 무거우며

권력을 잡은 신하와 호족들이 다 국권을 마음대로 하여

서로 편을 가르고 자기편만을 아끼는 것을 풍속으로 아니

뇌물은 시장과 같고 억울한 사람이 있어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거기에다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모두 굶주리고 전쟁은 쉴 틈이 없다

나라 일에 동원되는 일은 기한이 없고 장정들의 힘은 전부 군량운반에 동원되어

몸뚱어리는 진 구렁텅이에 굴러 고통을 받고 있으니

나 말고 누가 가서 이들을 구하겠는가?

 

나라의 다급함이 이미 경각에 달했는데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지경이다

 

백성들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기에만 여념이 없고

어린아이까지 그 혹독함을 탄식할 형편이다

 

내가 마침 지방을 살피기 위해 나라의 북쪽인 유주(幽州)삭주(朔州)까지 온 이상

이왕 왔던 길에 진구렁에 나뒹구는 백성을 위로하고 그 수괴(首魁)를 처벌할 것이다

 

이에 내가 친히 6사(師)를 통솔하며 9가지 벌을 실행해

저들의 위급함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못된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을 섬멸하는 동시에

선왕께서 도모하고자 했던 정책을 아름다운 일로 계승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 부대는 정해진 규율에 따라 부대를 나누어

나쁜 무리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의의 노정에 올라

우레와 같이 발해를 뒤엎고 부여를 거쳐 번개같이 그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모두 창과 방패를 갖추고 갑옷을 입힌 병마를 앞세워 힘차게 행군할 것이며

여러 번 거듭 필승을 다짐한 후에 각자 정성을 다해 싸우도록 하라

 

좌측 12군은 루방*장금*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로 가고

 

우측 12군은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둔*숙신*갈석*동이*대방*양평 등의 길로 가되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집하라>
<수 양제의 조서>

 

 

612년 1월 3일 수양제는 탁군(涿郡)의 임유각(臨楡閣)에 올라

모든 장수와 군사들에게 고구려를 치고자 하는 장문(長文)의 조서(詔書)를 발하였다

 

여기에서 <수양제>가 제 입으로 말한 이야기를 들어

그즈음 고구려와 경계는 물론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를 살펴보자

 

 

먼저 그는 <발해와 갈석 사이에 가득 차게 모여......>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이는 발해와 장성 밑 <장가구> 부근의 가운데쯤에 <북경>이 있고

또 <천진> 아래쪽에 자리한 <낙랑군> 안에 <발해군>이 있다는 말이다

 

그 무렵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 사이의 지역인 북경부근까지 점령하고 있음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다음의 <요와 예의 땅을......> 이라는 글에서도 보듯

요수{조백신하}와 예수{역수}의 땅을 역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발해를 덮고 부여를 거쳐.......>라고 한 것은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북경부근을 동서남북에서 협공한다는 말이며

부여는 장성 서북쪽에 있던 북부여 땅을 말하고 있다.

 

 

<나라의 북쪽인 유주(幽州)와 삭주(朔州)...>라고 한것은

유주(幽州)와 삭주(朔州)가 산서성에 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옥저와 낙랑 대방등의 길로 전진해서 평양으로 총집하라>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내린 명이라 더욱 그런 것이다

 

원문을 그대로 살펴보면

분명히 <출 루방 出 鏤方>이라 하여 출발지가 <루방>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열된 땅이름은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면서

필히 거쳐야 하는 지명(地名)이 틀림 없다

 

그리고 그 지명들은 어김없이 평양성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 고장들이므로

따라서 <루방>은 조백신하 남쪽의 어느 고을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한서지리지 후한서 군국지>의 <루방은 낙랑군의 현이다>

<진서 지형지>의 <루방은 평주에 속한다>

 

위 두 사서에 나오는 낙랑군 루방은 분명히 고구려의 서쪽에 있는 지역인 것이다.  



다음은 고구려 정벌군의 진군상황을 검토해 보자

 

 

癸未(1월3일) 第一軍發終四十日 引師乃盡 旌旗千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중략..癸巳 上御師 甲午(3월15일) 臨戎于遼水橋

戊戌(3월19일) 大軍賊所拒 不果濟 右屯衛大將軍 左光祿大夫麥鐵杖

武賁將錢士雄,孟金叉等 皆死之

甲午(5월16일) 車駕渡遼 大戰于東岸 擊賊破之 進圍遼東

乙未(5월17일) 大頓 見二大鳥 高丈餘 身朱足 遊泳自若 上異之 命工圖寫 立銘頌

六月 己未(6월11일) 幸遼東 責怒諸將 止城西數裡 御六合城

七月 壬寅(7월24일) 宇文述等敗績於薩水 右屯衛將軍辛世雄死之

九軍陷 將帥奔還亡者二千餘騎

癸卯(7월 25일) 班師

九月庚辰(9월 13일) 上至東都」

<수서 제기 양제 하 8년조>

 

계미일 제1군이 발진하여 끝날 때까지 40일이 걸렸다.

 

군대가 출발하고부터 끝날 때까지 깃발이 천리를 뻗쳤다.

근고 이래 없었던 출사의 성대함이었다...중략..

 

3월 14일 수양제가 군사를 통솔하여 3월 15일에 요수에 이르렀다. 

 

3월 19일 대군이 적의 항거로 건너지 못하였다.

 

우둔위대장군 좌광록대부맥철장 무분랑장 전사웅 맹금차 등이 모두 죽었다.

 

5월 16일 거가가 요수를 건넜다.

 

요수의 동안에서 크게 싸워 적을 깨트리고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5월 17일 숙소에서 2마리의 큰 새를 보았다.

 

키가 1장이 넘고 흰털에 붉은 발을 하고 유유자약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수양제는 이상하게 여겨 공인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아울러 새를 칭송하는 글을 바위에 세겨 세우게 하였다.

 

6월 11일 요동성에 행차하여  성내어 제장들을 꾸짓고,

성 서쪽 수리에 있는 육합성에 머물었다.

 

7월 24일 우문술 등이 살수에서 패하였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죽었다. 

 

9군이 모두 함몰되어 장수는 달아나고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이 2천여기였다.

 

7월 25일 군을 돌렸다.

 

9월 13일 동도에 돌아왔다.

 

 

 

 

612. 1.3              탁군에 집결

 

612. 1.3~2.10     좌우 12군이 1일 1군씩 40리 간격으로 요수를 향하여 출발
                         1군은 보기병 1만2천명 치중병 8천명이다.

                         

612. 2.11~2.12   어영6군 출발
                         어영6군은 보기병 7만2천 치중병 4만8천이다

                         40일만에 출발완료

 

612. 3.15           수 양제 요수 도착

                         1일 30리(약 16km) 행군하여 탁군에서 31일만에 요수에 도착

                         16km x 31 = 496km (탁군에서 요수까지의 거리이다)

                         수 나라때 1리는 0.531km이다.

                         

612. 5.16           요수에서 2달간 치열한 전쟁을 벌리다 요수를 건넘

 

612. 6.11           수양제 요동의 육함성에 머뭄

 

612. 7.24           우문술이 살수대첩에서 패배함

 

612. 7.25           요동에서 회군함 

 

612. 9.13           동도에 도착함

                         회군하여 50일만에 동도(낙양)에 도착함

                         16km x 50 = 800km (요동에서 낙양까지의 거리)

 

 

 

국제정치학 교수인 <박성웅> 교수는 보기병과 치중병, 보급병이 함께

1일 진군할 수 있는 거리는 10~15km라고 한다.

 

춘추전국시 1()軍行三十里라 하였다.

하루의 군대 이동 거리가 30 리, 약12km-16km라는 것이다.

 

 

 

수 양제가 정벌군을 집결시킨 탁군은 어디인가?

 

 

及秦灭燕,以为渔阳、上谷、右北平、辽西、辽东五郡。汉高祖分上谷置涿郡

<진서>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어양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5군을 두었는데

한나라 고조가 상곡을 나누어 탁군으로 삼았다.

 

 

烏桓寇代郡、上穀、涿郡。

<후한서>

 

오환이 대군과 상곡 탁군을 침공했다.

 

涿郡高帝置。雒陽東北千八百里。

代郡秦置。雒陽東北二千五百里

上谷郡秦置。雒陽東北三千二百里

<후한서>

 

탁군은 고제가 설치하고 낙양 동북1800리

대군은 진나라가 설치하고 낙양 동북2500리

상곡군은 진나라가 설치하고 낙양 동북3200리

 

 

饒陽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有魯口城、博陵城、三良神、饒陽城。

安平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治安平城。有樓、女貴人神。

深澤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二漢、晉曰南深澤,後改。有女蝸神祠。

<북위서>

 

요양(饒陽)은 전한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때 안평에 속하고...

안평(安平)은 전한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때 안평에 속하고...

심택(深澤)은 전한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때 안평에 속하고....

 

 

<대청광여도에 표시된 탁군(심택 요양 안평)>

 

요양, 안평, 심택이 탁군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탁군은 지금의 보정과 석가장 사이의 정주(定州)인근에 있었던 것이다.

 

정주(定州)는 또한 당 태종의 정벌군 집결지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하북성 정주(定州)가 수.당의 최동북방 경계인 것이다.

 

수 양제는 전쟁에 필요한 미곡은 산서성 태원(太原)시 양곡현(陽曲縣)에,

융거는 하북성 고양(高陽)그리고 병사는 하북성 정주(定州)에 집합시켰다.

 

그러므로 하북성 정주(定州)고양(高陽),  산서성 태원(太原)이  

수나라의 전초기지라는 것이다.

 

 

 

탁군에서 요수까지의 거리는

고구려군의 아무런 저항없이 1일 30리를 진군하였다고 하여도 496km이다.

 

평양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고 요수가 지금의 요하라면

하북의 정주에서 요하까지의 거리가 496km인가?

 

정주에서 요하까지는 직선거리로도1,000km 넘을 것이다.

 

 

요동에서 낙양까지 빠른속도(1일 30리)로 회군하였다 하더라도 
50일만에 도착하였으니 800km이다.

 

요하에서 낙양까지의 거리가 800km인가?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450km이니

낙양에서 북경까지가 900km 북경에서 요하까지의 거리가 900km로 볼때

낙양에서 요하까지는 1800km 정도 될것이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결코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고

요수는 지금의 요하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수는 정주에서 496km 정도 떨어어져 있는 지금의 조백신하이다.

 

 

 

<사료 13>

 

 

- 려당 1차전쟁 략사

 

 

644. 2        연개소문 영주(營州) 공격

                 당나라 장수 장검((張儉)이 고구려군 격퇴

                 당에서 장검(張儉)을 영주도독으로 임명

                  <신당서(新唐書) 장검열전(張儉列傳)>

 

                 영주도독이 된 장검(張儉)은 먼저 고구려를 공격

                 장검(張儉)은 요수에 이르러 물이 불어났다는 핑계로

                 요수를 건너 고구려를 침범하지 못함.

 

644. 7        당나라는 장검(張儉)으로 하여금 요동의 형세를 관망하도록 하는 동시에

                 장작도감(將作道監) 염입덕(閻立德)을 시켜

                 군량을 보급할 군선 400척을 만들게 하고,

                 태상경(太常卿) 위정(韋挺)을 궤운사(饋運使)로 임명해

                 군량을 보급하는 임무를 맡긴다.

 

644. 9        연개소문의 화해를 당 태종이 거절함

                 영주와 고대인성에 군량미를 저장함

 

644. 10      당 태종이 수도 장안의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함

 

 

 

644. 11      영주도독 장검(張儉) 낙양 소환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보기병 4만3천, 전함 5백척)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

                 사다리와 충차를 마들게 함

                 당 태종 낙양에 도착함

 

644. 12       이도종 요하에서 정찰업무 수행중 고구려 군사들을 만나 고생함

                  장검(張儉)이 요하를 건너지 못한 것을 강물이 불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못 갔다고 지적함.

                  <신당서(新唐書) 강하왕군도종전(江夏王君道宗傳)>

                 

                  결국 644년 하반기에 고구려군이 요하 서족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장검이 요하를 건너지 못했던 것이고,

                  이도종(李道宗) 또한 매우 위험한 정탐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군은 이도종을 잡기 위해 영주까지 추격해갔을 가능성이 크다.

                  644년 말에 장검(張儉)은 재신임을 받아 다시 영주로 오게 되는데,

                  이때는 1만 이상의 병력을 거느리는 행군총관이 되어 온다.

 

645. 1         장검(張儉)의 군대와 고구려군이 신성과 건안성에서 전투를 벌림.

 

 

645. 1. 28   군량 수송 실태를 점검한 결과 그 실적이 부진하자

                  감독 태만을 이유로 위정을 해임하여 백의종군케 함 

                  장작소감 이도유로 하여금 대신 임무를 맡게 함.

 

 

 

                  위정이 이렇게 지지부진했던 것은 겨울철에 군량 수송이 쉽지 않고,

                  요서 지역에 당나라 백성이 적어 별다른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고구려의 기습공격으로 군량창고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임

 

645. 2. 초   선봉부대인 요동도행군 유주 출발


 

 

645. 2. 12   당 태종 낙양 출발

                 

645. 2. 24   당 태종  업(한단) 도착

 

645. 3. 9     당 태종 정주 도착

 

三月丁丑 車駕至定州

丁亥,上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中國報子弟之仇 高麗雪君父之恥耳   

<자치통감, 645년> 

 

당 태종이 정주에서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이라며 요동정벌을 선포한다.

 

 

初 帝自定州命每數十里置一烽 屬於遼城 與太子約 克遼東 當?烽

是日 帝命?烽 傳入塞      

<구당서 권199 상>

 

당태종이 정주에 도착하여 수십리마다 봉화대를 설치하였으니

정주는 식량과 후방지원을 담당할 베이스캠프를 차린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45. 3. 15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3월 중순 산동반도 래주를 출발         

 

 

645. 3. 24   선봉부대인 요동도행군 영주 출발

                  당 태종 정주 출발

 

645. 4. 1     선봉부대인 요동도행군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넘

                  이세적 현도성 함락 

 

645. 4. 초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 비사성 공격

                 

645. 4. 5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은 6만의 병력을 이끌고

                  인근의 신성(新城)을 포위함

                  신성 함락을 포기하고 개모성으로 진격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선봉장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을 공격

 

645. 4. 10   당 태종 유주 출발

 

645. 4. 15   이세적과 이도종 개모성 공격  

 

645. 4. 20   당 태종 북평 도착               

                 

645. 4. 26   개모성 함락

                  2만여명이 포로가 되고, 10만석의 곡식이 당군에게 넘어감. 

 

645. 5. 2     비사성 함락

 

645. 5. 3     당 태종 요택 도착

 

645. 5. 5     당 태종 요택을 건넘

                  마수산에 진을 치고 요동성 공격 독려

 

645. 5. 10   당 태종 요하를 건너 이세적의 전위군과 합류

 

 

 

645. 5. 17   요동성 함락

                  고구려 군사 1만명과 민간인 4만명을 포로로 삼았으며

                  쌀 50만석을 확보하는 전과를 올림.

 

                  당군은 요동성을 군량보급을 담당하는 거점기지로 삼음.

 

 

645. 6. 1     백암성 함락

 

                  민간인 1만과 군사 1400명을 포로로 삼고 양식 2만 8천석을 확보.

 

 

 

645. 6. 11   당군 요동성 출발

 

645. 6, 20   당군 안시성 도착

 

645. 6. 21   주필산 전투 개시

                  당군은 주필산 전투 이후 무려 50일간이나 주필산 일대를 벗어나지 못함

 

645. 7. 13   주필산 전투에서 죽은 전사자의 시체에 표식을 하도록 함

                  이것은 당군이 주필산에 머물 때

                  전투가 많이 생겨 전사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645. 7. 15   안시성에 토산을 쌓기 시작함 

 

645. 7. 22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 건안성 공격하여 대패함

 

645. 8. 8     당 태종의 주필산(駐弼山)에서 군사전략회의

 

 

"내가 듣건대 안시성(安市城)은 성이 허하고 군사가 정예하여

성주가 재능과 용맹이 있다고 한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만일 불시에 나아가 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이세적(李世勣), 그대가 먼저 건안성을 치는 것이 좋겠다.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뱃속에 있는 것과 같다.

이는 병법에서 말하는 성에는 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세민의 말에 이세적은 이렇게 대답했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아군의 양식은 모두 요동성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성을 치다가,

고구려군이 우리 보급로를 끊으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해 이를 함락시킨 후, 건안성을 취해야 합니다."

 

건안성은 신성과 함께 고구려를 승전국(勝戰國)으로 만들어준 중요한 성이다.

 

645. 8.10   당이 안시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김

 

645. 9.15   안시성에 토산이 완성됨

 

645. 9.18   당 태종 눈에 화살을 맞고 퇴각함

 

 

 

당 태종이 요하를 건너 요동에 이르는 이동로를 검토해 보자

 

615. 2. 12  낙양 출발

615. 2. 25  업(한단) 도착

615. 3. 9    정주 도착 

615. 3. 24  정주 출발

615. 4. 초   유주 도착

615. 4. 10  유주 출발

615. 4. 20  북평 도착

615. 5. 3    요택 도착

615. 5. 5    요택 건넘

615. 5. 10  요하 건넘

 

 

낙양에서 업(한단)까지의 직선거리는 250km이다.

250km/14일 = 18km/일

 

업(한단)에서 정주까지의 직선거리는 250km이다.

250km/14일 = 18km/일

 

낙양에서 정주까지 1일 20km 정도의 강행군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주에서 유주까지 10일 정도 걸린 것으로 보인다.

유주는 정주에서 150km 내외의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주는 산서성 대(代) 인근이다.

 

 

유주에서 북평가지 10일 걸렸다.

북평은 유주에서 150km 내외의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북평은 하북성 역현 인근이다.

 

북평에서 요택까지 13일 걸렸다.

요택은 북평에서 200km 내외이다.

그러므로 요택은 천진시 인근이고 요수는 조백하인 것이다.

 

요하가 지금의 요령성의 요하라면 정주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여

후방지원을 할 수 없을뿐더러 요하까지 봉수대를 설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정주에서 요양까지는 1600km나 되는 거리이다.

 

당 태종의 진군루트를 볼 때 45일만에 도저히 갈 수가 없는 거리인 것이다.

 

 

려수전쟁과 려당전쟁을 통하여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북한의 평양이 아니고

지금의 노룡 인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 태종 진격루트>

 

유주, 정주, 래주가 당의 최전방이며 평주(영주)는 당과 고구려의 격전지이다.

 

 

<사료 14>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復有國內城 漢城 其都會之所

其國中呼爲三京         

<수서 권81>

 

고구려는 평양성(平壤城), 국내성(國內城), 한성(漢城)을 3경(三京)으로 불렀다.

 

수서는 고구려의 수도가 한곳이 아니라 3곳으로 평양성{금 노룡 인근},

국내성{금 송덕 인근}, 한성{금 북한 평양}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장수대제8년{AD421}신유,

十月 上與春太子 座鸞宮南堂 論國事 

 <박창화 필사본 장수대제기>

 

10월, 상과 <춘>태자가 <란궁>의 남당에 앉아 국사를 의논하였다.

 

 

장수대제9년{AD422}임술,

二月, 上與<天竜>后親耤, 而宴國中老農五十人, 巡視四學. 

改築<平壤城>修宮室.  補后<天龍>生<梁太>.

<박창화 필사본 장수대제기>

 

2월, 상이 <천룡>후와 친히 땅을 일구고는

나라{도성} 안의 나이 든 농부 50인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4학{敎學, 軍學, 禮學, 政學}도 순시하였다. 

<평양성>을 고쳐쌓고 궁실도 수리하였다. 

보후 <천룡>이 <양태>를 낳았다.

 

 

 

난궁(鸞宮)은 서도(西都){북경 인근}에 있는 궁(宮)이다.

장수대제는 이 서도(西都)에 거주하다가

422년부터 평양성을 고쳐쌓고 궁실을 수리하여 

427년에 평양에 화려한 신궁이 완공되자 서도(西都)에서 평양으로 옮긴 것이다.

 

 

<사료 15>

 

광개토왕비문 399년 기해년 기사에 王巡下平壤이라 하였다.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자

수도인 평양 요양에서 하평양인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순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북한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수도변천사와 백제의 요서 진평군(晋平郡)과 관미성 및 탁군>

 

 

 

※ 참고 <고구려 왕의 릉원>

 

   시호(휘)

     생몰

 등극처

 재위시 거처

  붕어처

  릉원

 1.추모대제(추모)

  (BC58-BC19)

 졸분 西城

 우양/모둔/東都/西都

 西都

 龍山

 2.광명대제(유리)

  (BC40-18)

 西都

 西都/北都/東都/豆谷

 豆谷離宮

 豆谷東原

 3.대무신제(무휼)

  (4-64)

 豆谷 離宮

 西都/北都

 西都

 大獸林原

 4.민중제(해읍주)

  (7-68)

 西都 鸞臺

 西都

 東都

 민중원석굴

 5.모본제(해우)

  (40-73)

 東都 神宮

 淌水新宮/東都모본궁

 東都

 모본원

 6.신명선제(재사)

  (48-121)

 東都 神宮

 西都/海山

 西都

 茅山原

 7.태조황제(궁)

  (68-165)

 西都 鸞臺

 西都/右山城/東都골천궁

 골천

 골천궁

 8.차대제(수성)

  (71-165)

 西都 鸞宮

 西都

 

 

 9.신대제(백고)

  (121-179)

 淌水宮

 西都

 鸞宮

 고국곡

 10.고국천제(남무)

  (155-197)

 西都皇檀

 西都

 금천궁

 고국천원

 11.산상대제(연우)

  (173-227)

 금천궁

 西都/牛山城(丸都)

 금천궁

 산상릉

 12.동천대제(교체)

  (209-248)

 금천

 환도대각궁/죽령/평양

 酒桶陵

 동천烏壤

 13.중천대제(연불)

  (224-270)

 평양

 평양/환도/평양

 두눌원

 중천원

 14.서천대제(약우)

  (240-292)

 평양

 평양/서천궁

 서천궁

 서천릉

 15.봉상제(치갈)

  (259-301)

 평양

 평양/서천궁

 봉산행궁

 봉산원

 16.미천대제(을불)

  (278-331)

 봉산행궁

 평양

 

 미천석굴

 17.고국원제(사유)

  (311-371)

 

 평양/환도/평양/동황성

 高相嶺

 고국원

 18.소수림제(구부)

  (339-384)

 天龍宮

 동황성

 수림온탕

 소수림원

 19.고국양제(이연)

  (342-391)

 

 동황성

 온탕

 고국양

 20.영락대제(담덕)

  (374-414)

 수림온궁

 西都

 北都

주류궁

 黃山

 21.장수대제(거연)

  (394-492)

 주류궁

 西都/평양대궁

 황산행궁

 黃山

 22.명치대제(라운)

  (462-519)

 황산행궁

 평양

 황극전

 黃山

 23.안장대제(흥안)

  (477-531)

 평양

白熊宮

 평양

 황산행궁

 牛山葬玉原

 24.안원대제(보연)

  (479-545) 

 황산행궁

 평양

 평양

牛頭殿

 

 25.양원대제(평성)

  (518-559)

 평양

牛頭殿

 평양

 

 

 26.평원대제(양성)

  (544-590)

 

 평양/장안성

 

 

 27.영양대제(원)

  (? - 618)

 

 평양

 

 

 28.영류대제(건무)

  (?- 642)

 

 평양

 

 

 29.보장대제(장)

  (?-668)

 

 평양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