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業 四年 春正月乙巳

诏发河北诸军五百馀万众穿永济渠引沁水南达于河北通涿郡

 

대업 4(608) 봄 정월 을사일(1)

 

조서를 내려서 하북(河北)에 있는 여러 군사 5백여만 명을 징발하여

영제거(永济渠)를 뚫었는데,

심수(沁水)의 물을 끌어서 남쪽으로 황하에 도달하게 하고,

북쪽으로 탁군(涿郡)으로 통하게 하였다.

 

 

60811일 수 양제 <양광 楊廣(569-618)>은 영제거를 뚫는다.

 

영제거(永济渠)는 지금의 하남성 무척현(武捗縣)에서 심수(沁水)를 끌어다가

지금의 하북성 탁군(涿郡) 심택현(深澤縣)까지 통하게 한 것이다.

 

饒陽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有魯口城博陵城三良神饒陽城

安平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治安平城有樓女貴人神

深澤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二漢晉曰南深澤後改有女蝸神祠

<북위서>

 

요양(饒陽)은 전한 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 때 안평(安平)에 속하고...

안평(安平)은 전한 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 때 안평(安平)에 속하고...

심택(深澤)은 전한 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 때 안평(安平)에 속하고....

 

 

요양(饒陽), 안평(安平), 심택(深澤)이 탁군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요양(饒陽), 안평(安平), 심택(深澤)은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 있다.

 

보정시와 형수시 사이로 호타하의 남변에 위치하고 있다.

 

탁군은 지금 정주(定州) 인근으로 또한 당 태종의 정벌군 군사의 집결지이다.

 

 

裴矩闻西突厥处罗可汗思其母请遣使招怀之

 

<배구裴矩>는 서돌궐의 처라(處羅) 가한이 그의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불러서 회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처라 가한은 서돌궐의 1대 대가한인 <아사나달만>을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향부인(向夫人)으로 漢人이다.

6081월에 서돌궐의 <아사나달만>을 회유하여 수나라에 편에 끌어들이고자 한다.

 

 

三月壬戌倭王多利思比孤遣使入贡遗帝书曰

日出处天子致书日没处天子无恙

 

3월 임술일(19) 왜왕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가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황제에게 편지를 남겨서 말하였다.

 

해가 뜨는 곳에 사는 천자가 해가 지는 곳에 사는 천자에게 편지를 보내노니

별탈이 없으신가?”

 

 

608319

왜왕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 훗날 백제의 의자왕 義慈王(593-660)>

수 양제 <양광>에게 사신을 보낸다.

 

 

八月辛酉上亲祠恒岳赦天下

 

8월 신유일(21)에 황상이 친히 항악(恒岳)에서 제사를 지내고 천하를 사면하였다.

 

608821일에 항악(恒岳, 하북성 唐縣 大茂山)에서 천제(天祭)를 지낸다.

 

 

乃录齐王暕携皇甫诩从驾及前幸涿郡祠恒岳时

父老谒见者衣冠多不整谴衡以宪司不能举正出为榆林太守

 

마침내 제왕(齐王) <양간><황보후皇甫诩>를 이끌고 거가를 좇아서

앞서 탁군(涿郡, 정주定州)에 행차하여

항악(恒岳, 하북성 보정시 곡양현 북쪽)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부로들 가운데 알현한 사람들의 의관이 대부분 정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끄집어내어

<장형>을 견책하여 헌사(憲司)로서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내쳐서

유림(榆林) 태수로 삼았다.

 

 

6103월 수 양제는 또 다시 항악에 천제를 지내려 순유한다.

 

탁군은 지금의 하북성 형수시 심택 인근이고

항악은 북악으로 하북성 보정시 곡양현의 서북에 있는 대무산으로

산서의 경계에 있는 산이.

 

탁군이 지금의 북경이라면 북경은 항악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제왕 <양간>이 거가가 항악에 제사를 지내려 가는 길에

앞서 나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탁군은 호타하 남변에 위치한 중하류 지역이므로 항악에 갈려면

석가장의 정형관(낭자관)을 지나야 항악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탁군이 수.당의 동북방 최전초기지이므로

수 양제와 당 태종은 이 탁군에서 고구려 정벌군을 출발시켰다.

 

항산은 피휘하여 상산으로도 불리었고 별칭으로 신선산으로도 불리었으며,

중원의 황제들이 봉선한 오악 중 북악이며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대무산이다.

 

명나라가 북경을 수도로 삼자 북악인 항산(대무산)이 수도의 남쪽에 위치하여

북악을 현 산서성 대동시 혼원현에 위치한 현무산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

 

명나라 홍치 6(1493)에서 청나라 순치 17(1660)까지

168년간의 치열한 논쟁을 거쳐서

항산이 현 하북성 보정시 곡양현에 있는 대무산에서

산서성 대동시 혼원현에 있는 현무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대무산과 백석산의 줄기인 낭아산이 황하의 하류에 위치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으로 여기까지 장성을 쌓아

.시대에는 조선과 .시대에는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黄门侍郎裴矩说帝曰

高丽本箕子所封之地晋皆为郡县

令乃不臣别为异域

先帝欲征之久矣但杨谅不肖师出无功

当陛下之时安可不取使冠带之境遂为蛮貊之乡乎

今其使者亲见启民举国从化可因其恐惧胁使入朝

帝从之敕牛弘宣旨曰

朕以启民诚心奉国故亲至其帐

明年当往涿郡尔还日语高丽王

宜早来朝勿自疑惧存育之礼当如启民

苟或不朝将帅启民往巡彼土

 

황문시랑 <배구>가 황제에게 유세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책봉 받은 땅으로

()과 진()이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은 마침내 신하 노릇을 아니하고 별도의 이역(異域)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황제께서 이를 정벌하려고 한 지도 오래 지났으나

다만 <양량楊諒>이 불초하여 군사들이 출정하였다가 공로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찌 빼앗지 못하여

관대(冠带)의 경계를 드디어 만맥(蠻貊)의 고향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들의 사자가 친히 <계민> 가한이 거국적으로 교화를 좇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고 위협하여 들어와서 조현하게 하소서.”

 

황제가 이를 좇았다.

 

<우홍>에게 칙서를 내려서 황제의 뜻을 선포하였다.

짐은 <계민> 가한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들었으니

그러므로 친히 그 장막에 이르렀다.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에 갈 것인데,

너는 돌아가는 날로 고구려왕에게 말하여라.

 

스스로 의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지 말고

길러 주는데 대한 예의를 가지고서 마땅히 <계민> 가한처럼 할 것이다.’

 

진실로 혹 조현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 가한을 인솔하고 그 땅에 가서 순시할 것이다.”

 

관대(冠带)는 중원 지방에 사는 사람의 옷차림으로

관대의 경계는 중원의 경계를 말한다.

 

 

高丽王元惧籓礼颇阙帝将讨之课天下富人买武马匹至十万钱

简阅器仗务令精新或有滥恶则使者立斩   

 

고구려 왕 <고원高元>은 두려워하였으나 번례(籓禮)가 자못 빠졌다.

 

황제는 장차 그를 토벌하려고 하여

천하의 부자들에게 부과하여 군마를 사들이게 하니  한 필당 10만 전에 이르렀다.

 

병장기를 뽑아서 검열하고 날카롭고 새롭게 하는데 힘쓰게 하였으며,

혹시라도 함부로 조악하게 만들면 사용자는 즉시 목이 베어졌다

 

 

61012월 수양제 양광이 동돌궐의 계민 가한의 장막에 이른다.

 

번례(籓禮)는 종주국에 대하여 울타리 역할을 하는 주변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를 말한다.

 

수 양제 <양광>이 실성을 하여 고구려가 주변국으로서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고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겠는가?

 

수 문제 <양견>이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하북성 북부는 여전히 고구려의 영토이고

백제의 제후들이 다스리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일부가

백제 동성왕이 시해된 후 백제의 제후들이 고구려에 귀복함으로서

고구려가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에 역사상 세계 최대의 전쟁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일 후 군벌 호족세력이 된 관농집단의 세력을 약하게 하는 것이

고구려 정벌의 제 1차적 목적이었다.

 

<최치원>고구려와 백제가 전성 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와 월()의 나라를 침략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과 제(), ()를 휘어잡아

중원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민족적으로 수. 당의 왕족은 트루크(돌궐)계이고, 고구려의 왕족은 몽골계이므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일종의 트루크계와 몽골계의 민족 전쟁인 것이다.

 

 

 

壬午下诏讨高丽

 

임오일(26)에 고구려를 토벌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611226일 수 양제는 고구려 정벌 조서를 내린다.

 

 

敕幽州总管元弘嗣往东莱海口造船三百艘官吏督役

昼夜立水中略不敢息自腰以下皆生蛆死者什三四

 

유주(幽州) 총관 <원홍사元弘嗣>에게 칙서를 내려서

동래(東萊)에 있는 바다 입구로 가서

300척을 건조하게 하고 관리들은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밤낮으로 물속에 서 있었지만 대략 감히 휴식하지 못하였으므로

허리 아래로는 모두 구더기가 생겨나서 죽은 사람이 열에 서너 명이었다.

 

 

四月庚午车驾至涿郡之临朔宫

文武从官九品以上并令给宅安置

 

여름 4월 경오일(15)에 거가가 탁군에 있는 임삭궁(臨朔宫)에 도착하였는데,

따라온 9품 이상의 문무관(文武官)에게 집을 공급하여 안치하였다.

 

 

先是诏总征天下之兵无问远近俱会于涿

 

이에 앞서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들을 모두 징소하여

멀거나 가까움에 관계없이 모두 (涿)에 집합하게 하였다.

 

 

수 양제가 실성을 하여 지금의 요양에 있는 요동성을 공격하는데

2000리 이상이나 떨어진 탁군에 군사들을 집합하게 하였겠는가?

 

탁군은 지금의 하북성 정주 인근이고,

고구려의 요동성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의 수성(遂城)이고

고구려의 평양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진(固城鎭)인 것이다.

 

 

又发江淮以南水手一万人弩手三万人岭南排镩手三万人

于是四远奔赴如流

 

또 강{장강}과 회{회수}이남에 있는 수수(水手) 1만 명, 노수(弩手) 3만 명,

영남{남령 이남}의 배찬수(排镩手) 3만 명을 징발하니,

이에 사방 먼 곳에서 분주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았다.

 

 

五月敕河南淮南江南造戎车五万乘送高阳供载衣甲幔幕

令兵士自挽之发河南北民夫以供军须

 

5월에 하남(河南), 회남(淮南), 강남(江南)에 칙서를 내려

융거(戎車) 5만 승()을 건조하여

고양(高陽,하북성 보정시 고양현)으로 보내도록 하여

갑옷, 휘장과 장막을 수례에 싣는데 제공하게 하였는데,

병사들에게 스스로 그것을 끌고 오게 하여 하남과 하북의 민부(民夫)들을 징발하고

군대에서 필요한 곳에 제공하게 하였다.

 

 

융거(戎車)는 치중(輜重, 무거운 짐)을 운송하는 수레를 말한다.

 

수 양제는 융거 5만 승을 건조하여 고양(高陽)으로 보내게 하였는데

고양현(高陽縣)은 하북성 보정시 남동쪽으로 탁군의 동쪽에 있는 현이다.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있다.

 

수 양제는 군사는 보정시 당현에 집결시키고

융거는 호타하 북변의 고양에 집결시켰다.

 

 

七月发江淮以南民夫及船运黎阳及洛口诸仓米至涿郡

舳舻相次千馀里载兵甲及攻取之具往还在道常数十万人

填咽于道昼夜不绝死者相枕臭秽盈路天下骚动   

 

가을 7월에는 강과 회 이남의 민부와 배를 징발하여

배로 여양(黎阳)과 낙구(洛口)에 있는

모든 창고의 미곡을 운송하여 탁군(涿郡)에 도착하게 하였는데,

축로(舳艣)가 서로 이어진 것이 1천여 리가 되었고,

병기와 갑옷, 공격하여 빼앗는 도구를 싣고

길에서 가고 돌아오는 사람이 항상 수십만 명이어서

길은 꽉 막히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도 서로 베개를 베니 악취가 도로에 가득차서 천하가 시끄럽게 움직였다.

 

 

十二月己未处罗来朝于临朔宫帝大悦接以殊礼

 

12월 기미일(8)<처라> 가한이 와서 임삭궁에서 조현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특별한 예의로 접대하였다.

 

임삭궁은 탁군(보정시 당현)에 있는 궁궐이다.

 

 

帝自去岁谋讨高丽诏山东置府令养马以供军役

 

황제가 스스로 지난해부터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모의하고서

산동에 조서를 내려서 관부를 설치하고 군마를 길러 군역에 공급하게 하였다.

 

 

又发民夫运米积于泸河怀远二镇

 

또한 민부를 징발하여 미곡을 운송하여

노하(瀘河)회원(懷遠) 두 진()에 축적하게 하였다.

 

 

營州上都督府 隋柳城郡 武德元年 改爲營州總管府 領遼燕二州 領柳城一縣

遼州 隋太原郡之遼山縣 武德三年 分並州之樂平, 和順, 平城, 石艾四縣置遼州

燕州 隋遼西郡 寄治于營州 武德元年 改爲燕州總管府 領遼西,

瀘河,懷遠三縣 其年廢瀘河縣

<구당서>

 

영주(營州)상도독부는 수나라 유성군(柳城郡)인데

무덕원년(618)에 영주총관부로 바꾸고

요주(遼州)와 연주(燕州) 두 주와 유성현(柳城縣)을 다스리게 하였다.

 

요주(遼州)는 수나라 태원군의 요산현(遼山縣)인데

무덕3(620)에 병주(並州)의 낙평, 화순, 평성. 석애 4현을 요주에 두었다.

 

연주(燕州)는 수나라 요서군인데 영주(營州)에서 다스린다.

 

무덕원년(618)에 연주총관부를 두어 요서, 노하, 회원 3현을 다스리게 하고

그 해에 노하현을 폐지하였다.

 

영주(營州), 유성(柳城), 요주(遼州), 연주(燕州), 병주(並州), 요서(遼西),

노하(瀘河), 회원(懷遠) 유주(幽州)

산서성 흔주시 대현과 하북성 보정시 인근이라는 것이다.

 

 

태원시 양곡현에 석령관, 천문관, 적당관의 삼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천문관과 적당관은 사라지고 석령관만 그 자취가 남아있다.

 

태원시 북쪽 양곡현에 노하진, 회원진이 있었으며

이곳이 자형관과 도마관을 지나 유주(幽州)와 연주(燕州)에 이른다고 한 곳이며

한나라의 연국(燕國)이 있던 곳이다.

 

중국역사지도집은 일개 주()에 불과한 유주(幽州)

하북성에서 한반도 중부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지역을 차지한다고 그려놓았는데,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러한 역사지도를

우리의 강단 식민사학자는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北中國의 일부(上谷漁陽右北平遼西)

南滿, 北韓(玄菟, 遼東樂浪 )地方을 관할함

<삼국사기() 이병도 역주 을유문화사 p289>

 

중국인에게 빌미를 제공한 이병도의 유주(幽州)에 대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유주(幽州)의 원래 위치는 어디일까?

 

帝堯畫天下為九州

舜以冀,青地大 分幽,,營 為州十有二

<요사 권37>

 

기주(冀州)와 청주(青州)의 땅이 너무 크기에

이들을 나누어 유주(幽州), 병주(並州), 영주(營州)를 새로이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기주(冀州)는 현재의 산서와 하북의 일부를 청주(青州)는 산동의 일부를 가리킨다.

 

이 땅을 나누어 기주에 유주와 병주를, 청주에 영주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舊制 益州部置 蠻夷騎都尉 幽州部置 領烏桓校尉 涼州部置 護羌校尉

皆持節領護 治其怨結 歲時巡行 問所疾苦

<자치통감>

 

영오환교위가 있는 자리가 유주이고,

그 오환은 산서성 흔주 일대에 존재하던 종족이었다.

 

, 유주는 원래 산서성 북부, 태원의 북쪽을 가리키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魏正始中入寇遼西安平 三國魏志卷三東夷傳

隋書卷八一高麗傳 遼西安平 作西安平

按後漢書郡國志二 安平國屬冀州

志五 西安平屬幽州 遼東郡

遼西郡沒有安平 或西安平縣

這裏 遼字衍 或遼下 脫東字

<위서 권100>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을 경계로 그 서쪽은 유주 요동군에 속하고

그 동쪽은 기주라고 하는 것이다.

 

유주(幽州)는 갇힌 땅이자, 멀리 떨어진 땅이고, 유배를 보내던 땅이었다.

 

이 땅은 산서성 태원의 북쪽으로 온통 산으로 갇힌 땅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지도는 기주를 산서에 유주를 하북으로 그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요동군은 유주에 속한다고 한다.

 

하북성 보정시 래수현 일대의 요동은 본래 고구려의 요동이었다.

 

이 땅을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공손도에게 넘겨주고

삼국시기에는 조조가 오환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서진 시기에는 선비족 모용씨가 차지하게 되는데

광개토태왕 때 다시 수복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된 것으로

고구려 멸망 후에 유주의 요동군이 된 곳이다.

 

고구려의 요동이 중국에 넘어가자 그들의 역사 왜곡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한 최초의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요나라가 들어섰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지배층은 거란족이지만

관료집단에는 한인들을 대거 채용하였다.

 

한인들을 이주시킬 때 한인들의 유화책으로 그들이 살던 지명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하여 많은 지명들이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으로 옮겨 오게 된 것이다.

 

수 양제는 전쟁에 필요한 미곡은 산서성 태원(太原)시 양곡현에,

융거는 하북성 고양(高陽)

그리고 병사는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에 집합시켰다.

 

그러므로 하북성 정주(定州)고양(高陽), 산서성 태원(太原)

수나라의 전초기지라는 것이다.

 

 

 

邹平民王薄拥众据长白山剽掠齐济之郊自称知世郎

言事可知矣

又作无向辽东浪死歌》,以相感劝避征役者多往归之   

 

추평(鄒平)에 사는 백성 <왕박王薄>이 무리를 모아서 장백산(長白山)을 점거하고

(), ()의 교외에서 약탈하여 스스로 지세랑(知世郎)이라고 칭하였는데,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를 지어 서로 느낌을 권고하니,

정역(征役)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에게 가서 귀부하였다.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는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 말라는 노래이다.

 

 

四方兵皆集涿郡帝征合水令庚质问曰

高丽之众不能当我一郡今朕以此众伐之卿以为克不

对曰伐之可克然臣窃有愚见不愿陛下亲行

帝作色曰朕今总兵至此岂可未见贼而先自退邪

对曰战而未克惧损威灵

若车驾留此命猛将劲卒指授方略倍道兼行出其不意

克之必矣事机在速缓则无功

帝不悦汝既惮行自可留此

右尚方署监事耿询上书切谏帝大怒命左右斩之何稠苦救得免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涿郡)에 집합하니,

황제가 합수(合水, 감숙성 경양현)현령 <유질庾質>을 징소하여 물었다.

고구려의 무리들은 우리의 한 군()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지금 짐이 이 무리들을 가지고서 그들을 정벌하려고 하니,

경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그들을 정벌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가만히 어리석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폐하께서는 친히 가시지 않기를 원합니다.“

 

황제가 안색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짐은 지금 군사를 총괄하여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어찌 아직 적을 보지도 않고 먼저 스스로 물러나라는 것이오?”

 

대답하였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위엄을 가진 명망에 손상을 입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거가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맹렬한 장수들과 굳센 사졸들에게

명령하고 방략을 지시하여 주셔서 두 배나 빠른 속도로 밤낮으로 전진하여

그들이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출동한다면

승리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일의 기회는 신속함에 달려있으니 늦으면 골로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기뻐하지 않고 말하였다.

너는 이미 가는 것을 꺼리고 있으니 스스로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좋다.”

 

우상방서감사(右尙方署監事) <경순耿詢>이 편지를 올려서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황제는 크게 화를 내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여 그의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하조何稠>가 어렵게 구명하여 면할 수 있었다.

 

612년 정월 드디어 수양제 <양견>은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壬午诏左十二军出镂方

长岑溟海盖马建安南苏辽东玄菟扶馀朝鲜沃沮

乐浪等道

右十二军出黏蝉含资浑弥临屯候城提奚蹋顿肃慎

碣石东施带方襄平等道骆驿引途总集平壤

凡一百一十三万三千八百人号二百万其馈运者倍之

宜社于南桑干水上类上帝于临朔宫南祭马祖于蓟城北

帝亲授节度每军大将亚将各一人

骑兵四十队队百人十队为团步卒八十队

分为四团团各有偏将一人

其铠胄缨拂旗幡每团异色

受降使者一人承诏慰扶不受大将节制

其辎重散兵等亦为四团使步卒挟之而行进止立营皆有次叙仪法

   

 

임오일(2)에 조서를 내렸는데,

좌익 12군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夫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등으로

가는 길로 출발하고,

우익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蹋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시(東施),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으로 가는 길로 출동하게 하며,

서로 끊임없이 길을 이어 평양(平壤)에 모두 집합하게 하였는데,

무릇 1133800명이었고, 2백만 명이라고 불렀으며,

군량미를 수송하는 사람은 그에 두 배가 되었다.

남상간수(南桑干水)에서 토지신에게 의제(宜祭)를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게 유제(類祭)를 지냈으며,

계성(薊城)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를 지냈다. 

 

황제가 친히 지휘를 하였는데,

 매 군()마다 대장(大將)과 아장(亞將)이 각각 1명이었고

기병은 40()로 하였으며,

()100명으로 하여 10()를 단()으로 하였으며,

보병 80개의 부대는 4개의 단()으로 나누었으며,

단에는 각기 편장(偏長) 1명씩을 두었으며,

그 개주(鎧胄, 갑옷), 영불(纓拂, 갓끈), 기번(旗旛, 깃발)

매 단()마다 색깔을 달리하였다.

 

수항사자(受降使者) 1명은 조서를 받들어 위무하게 하고,

대장의 통제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들의 치중(輜重)과 산병(散兵) 또한 네 개의 단()으로 하였으며,

보병으로 하여금 그들을 끼고 행군하게 하였으며,

전진하고 머무르며 군영을 세우는 일은 모두 순서와 규정이 있었다.

 

 

癸未第一军发日遣一军相去四十里连营渐进

终四十日发乃尽首尾相继鼓角相闻旌旗亘九百六十里

御营内合十一卫三台五省九寺

分隶内右六军次后发又亘八十里

近古出师之盛未之有也  

 

계미일(3)에 제1군이 출발하였는데,

매일 1군씩을 보내는데 서로간의 거리는 40리였으며,

군영을 연결하며 조금씩 전진하였고,

40일을 끝내자 출발하는 것이 마침내 다하였으며,

선두와 후미가 서로 이어져서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서로 들렸으며

정기(旌旗)가 뻗은 것이 960리였다.

 

어영(御營)안에는 12() 3(三臺) 5(五省) 9(九寺)를 합쳤으며,

내외전후좌우 6()으로 나누어 예속시켰으며,

차례로 출발하니, 또한 80리에 걸쳐 있었다.

근고 이래로 군사를 출동하는 방대한 규모로는 아직 있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61213일 제1군이 보정시 당현에서 출발하고 차례로 줄을 이어 출병하여

211(40일 후)에 모든 출병이 끝난다.

 

 

甲辰内史令元寿薨   

 

갑진일(24)에 내사령 <원수元壽>가 죽었다.

 

 

二月壬戌观德王雄薨   

2월 임술일(12)에 관덕왕(觀德王) <양웅楊雄>이 죽었다.

 

 

北平襄侯段文振为兵部尚书上表以为帝

宠待突厥太厚处之塞内资以兵食戎狄之性无亲而贪异日必为国患

宜以时谕遣令出塞外然后明设烽候缘边镇防务令严重此万岁之长策也

兵曹郎斛斯政椿之孙也以器干明司为帝所宠任使专掌兵事

文振知政险薄不可委以机要屡言于帝帝不从

及征高丽以文振为左候卫大将军出南苏道

文振于道中疾笃上表曰

窃见辽东小丑未服严刑远降六师亲劳万乘

但夷狄多诈深须防拟口陈降款毋宜遽受

水潦方降不可淹迟

唯愿严勒诸军星驰速发水陆俱前出其不意则平壤孤城势可拔也

若倾其本根馀城自克如不时定脱遇秋霖深为艰阻兵粮既竭

强敌在前靺鞨出后迟疑不决非上策也

 

북평양후(北平襄侯) <단문진段文振>이 병부상서가 되어 표문을 올려서

황제에 관하여 생각하였다.

돌궐을 총애하고 대우하는 것이 대단히 두터워서 그들을 요새 안에 거처하게 하여

무기와 양식을 공급해 주는데, 융적의 성격은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탐욕스러워서

먼 훗날에 반드시 나라의 걱정이 될 것이니,

때때로 유시(諭示)하여 보내어 요새 밖으로 나가게 해야 하며,

그런 연후에 봉화대를 설치하여 살피면서 변경을 따라 진압하고 방어하며

엄중하게 경계하는데 힘써야 하니, 이것이 만 년이 나갈 좋은 계책입니다.”

 

병조랑(兵曹郞) <곡사정斛斯政>은 <곡사춘斛斯椿>의 손자인데,

그릇이 단단하고 총명하여 황제에게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므로

군사에 관한 일을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다.

 

<단문진><곡사정>이 험악하고 경박함을 알고 기밀에 관한 중요한 일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황제에게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황제는 좇지 않았다.

 

고구려를 정벌하게 되자 <단문진>을 좌후위대장군으로 삼아

남소(南蘇)로 가는 길로 출동하게 하였다.

 

<단문진>은 도중에 병세가 위독하자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요동의 소추(小醜, 고구려)가 아직 엄한 형벌로도 굴복하지 않아

먼 곳까지 육사(六師)가 내려왔으며 친히 만승(萬乘)을 수고롭게 하였습니다.

 

다만 이적들은 속이는 일이 많으니 깊이 조심하여 막아야 하며,

입으로 항복하겠다는 정성을 진술하여도 급히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장맛비가 바야흐로 내리게 돌 것이니, 머물러 지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여러 군영을 엄중히 챙겨가지고 별같이 달리고

신속히 출발하여 수륙(水陸)으로 함께 전진하여 그들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나오면

평양은 고성(孤城)이 되어 기세로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근본이 기울어지면 나머지 성들은 자연히 이기게 되니,

만약 때에 맞추어 평정해지지 않고 가를 서리를 만나고 깊이 들어가서

어려운 장애를 만나게 되면 무기와 양식이 이미 고갈되고

강한 적군은 앞에 있게 되며 말갈이 배후에서 출동할 것이어서

지연하고 의심하여 결정하지 아니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三月辛卯文振卒帝甚惜之   

 

3월 신묘일(12)<단문진>이 죽자 황제는 심히 그를 애석해 하였다.

 

癸巳上始御师进至辽水

众军总会临水为大陈高丽兵阻水拒守隋兵不得济

左屯卫大将军麦铁杖谓人曰

丈夫性命自有所在岂能然艾灸頞瓜蒂歕鼻治黄不差

而卧死儿女手中乎

乃自请为前锋谓其三子曰

吾荷国恩今为死日我得良杀汝当富贵

帝命工部尚书宇文恺造浮桥三道于辽水西岸

既成引桥趣东岸桥短不及岸丈馀

高丽兵大至隋兵骁勇者争赴水接战高丽兵乘高击之

隋兵不得登岸死者甚众

麦铁杖跃登岸与虎贲郎将钱士雄孟叉等皆战死

乃敛兵引桥复就西岸

诏赠铁杖宿公使其子孟才袭爵次子仲才季才并拜正议大夫

更命少府监何稠接桥二日而成诸军相次继进大战于东岸

高丽兵大败死者万计

诸军乘胜进围辽东城即汉之襄平城也

车驾渡辽引曷萨那可汗及高昌王伯雅观战处以慑惮之

因下诏赦天下

命刑部尚书卫文昇尚书右丞刘士龙抚辽左之民

给复十年建置郡县以相统摄   

 

계사일(12)에 황상은 비로소 군사들이 있는 곳에 가서 전진하여

요수(遼水)에 도착하였다.

 

많은 군대들이 총집합하여 물가에 가서 크게 벌려 놓았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강에서 저지하고 방어하며 지키니 수의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좌둔위대장군 <맥철장麥鐵杖>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장부의 목숨은 스스로 있을 곳이 있는데,

어찌 쑥으로 콧대에 뜸을 뜨고 참외 꼭지를 코에 뿜으며

열병을 치료하여도 차도가 없다하여

아이새끼들의 손아귀에서 누워 죽을 수가 있겠는가?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겠다고 요청하고 그의 세 아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나라의 은전을 입었는데 지금이 죽는 날이다.

내가 아름답게 죽을 수 있다면 너희들은 부귀를 누리게 될 것이다.“

 

황제는 공부상서인 <우문개于文愷>에게 명령하여

요수(遼水)의 서쪽기슭 세 길에 부교를 설치하게 하였는데,

이미 완공되자 부교를 끌고서 동쪽기슭으로 가게 하였으나

다리가 짧아서 1여 장() 정도가 미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대규모로 도착하자 수의 군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사람들은

다투어 강물에 뛰어들어 맞붙어 싸웠으며,

고구려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 그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수의 군사들은 언덕을 오를 수 없었고 죽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맥철장>이 기슭으로 올라가서 호분낭장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등과

더불어 모두 싸우다 죽었다.

 

마침내 군사들을 거두어 다리를 끌어다가 다시 서쪽기슭으로 갔다.

 

조서를 내려 <맥철장>을 숙공(宿公)으로 추증하고,

그의 아들 <맥중재麥仲才><맥계재麥季才>도 나란히 정의(正議)대부로 제수하였다.

 

다시 소부감(小府監) <하주何椆>에게 명령하여 부교를 잇도록 하여

이틀이 되어 완성되자

각 부대는 서로 순차적으로 계속 전진하게 하여 동쪽기슭에서 크게 싸우니

고구려의 군사들이 대패하여 죽은 사람들이 1만을 헤아렸다.

 

각 부대에서는 이긴 기세를 타고 전진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는데,

바로 한()양평성(襄平城)이다.

 

거가가 요수를 건너 <갈살나曷薩那, 아사나달만> 가한과

고창왕 <백아伯雅>를 접견하고

싸우는 것을 관망하는 곳으로 이끌어다가 그들을 두렵고 떨게 하고,

이어서 조서를 내려서 천하를 사면하게 하였다.

 

형부상서 <위문승衛文昇>과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에게 명령하여

요좌(遼左, 요수 동쪽)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의 부세를 면제하고 군현을 설치하고서 관할하게 하였다.

 

 

五月壬午纳言杨达薨   

 

여름 5월 임오일(4) 납언(納言) <양달楊達>이 죽었다.

 

 

 

诸将之东下也帝亲戒之曰

今者吊民伐罪非为功名诸将或不识朕意欲轻兵掩袭

孤军独斗立一身之名以邀勋赏非大军行法

公等进军当分为三道有所攻击必三道相知毋得轻军独进以致失亡

凡军事进止皆须奏闻待报毋得专擅

辽东数出战不利乃婴城固守帝命诸军攻之

又敕诸将高丽若降即宜抚纳不得纵兵

辽东城将陷城中人辄言请降诸将奉旨不敢赴机

先令驰奏比报至城中守御亦备随出拒战

如此再三帝终不悟既而城久不下

 

제장들이 동쪽으로 내려가는데, 황제가 친히 그들을 경계하여 말하였다.

지금 백성들을 조문하고 죄지은 자를 토벌하려는 것이지

공명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제장들이 혹 짐의 뜻을 알지 못하여 경무장하여 갑자기 엄습하거나

고군(孤軍)으로 홀로 싸워서 일신의 명예를 세우고 훈상을 기다리는 것은

대군이 가는 법이 아니다.

 

공 등은 진군하되 당연히 세 길로 나누며

공격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세 길에서 서로 알게 하고

경무장한 군사로 독단적으로 진격하여 실패하여 죽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 무릇 군대가 전진하고 머무르게 되면

반드시 보고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회보를 기다려야하지

오로지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요동성에서는 자주 나와서 전투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마침내 농성하며 굳게 지켰고,

황제는 여러 군영에 명령하여 그곳을 공격하게 하였다.

 

또 제장들에게 칙령을 내려서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즉시 의당 위무하여 받아들일 것이며,

마음대로 군사를 풀어 놓을 수 없다고 하였다.

 

요동성이 곧 함락되려 하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제장들은 성지(聖旨)를 받들어서 감히 기회에 따라서 부응하지 않고

먼저 달려와서 아뢰고 보고가 도착하도록 하니,

회보가 도착할 때쯤에는 성안에서 지키고 방어하는 것 또한 갖추어졌고

수시로 나와서 막으며 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세 번 하였는데도 황제는 끝내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미 그렇게 하고 나니 성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六月己未帝幸辽东城南观其城池形势因召诸将诘责之曰

公等自以官高又恃家世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公等皆不愿我来恐见病败耳

我今来此正欲观公等所为斩公辈耳

公今畏死莫肯尽力谓我不能杀公邪诸将咸战惧失色

帝因留止城西数里御六合城

高丽诸城各坚守不下

右翊卫大将军来护儿帅江淮水军舳舻数百里浮海先进

入自浿水去平壤六十里与高丽相遇进击大破之

护儿欲乘胜趣其城副总管周法尚止之请俟诸军至俱进

护儿不听简精甲四万直造城下

高丽伏兵于罗郭内空寺中出兵与护儿战而伪败

护儿逐之入城纵兵俘掠无复部伍

伏兵发护儿大败仅而获免士卒还者不过数千人

高丽追至船所周法尚整陈待之高丽乃退

护儿引兵还屯海浦不敢复留应接诸军

 

6월 기미일(11)에 요동성 남쪽에 행차하여 그 성지(城池)의 형세를 관망하고서

이어서 제장들을 소집하여 그들을 힐책하여 말하였다.

공 등은 스스로 관직이 높고 또한 가세(家勢)를 믿고서

어둡고 나약함을 가지고 나를 기다리려고 하였소?

 

도성에 있을 때 공 등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병폐와 실패함을 보일까 두려워하였을 뿐이었소.

 

내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공 등이 하는 것을 보고 공들의 목을 베려고 할 뿐이오.

 

공들은 지금 죽는 것이 두려워서 힘을 다하지 않으면서,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제장들이 모두 두려워서 떨면서 안색이 변하였다.

 

황제는 이어서 성의 서쪽 몇 리 지점에 머무르면서 육합성(六合城)으로 나아갔다.

 

고구려의 여러 성에서 각기 견고하게 지켜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는 강(長江)과 회(淮水)의 수군을 인솔하였는데,

축로(舳艫)가 수백 리였으며 바다에 떠서 먼저 전진하여 패수(浿水)에 들어가니

평양까지60리였는데, 고구려와 서로 만나서 나아가서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내호아>는 이긴 기세를 타고 그 성으로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그것을 중지시키고

여러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진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내호아>는 듣지 않고 정예의 갑병 4만을 선발하여 곧장 성 아래까지 도달하였다.

 

고구려는 나곽(羅郭) 안에 있는 빈 사찰 속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군사를 내보내어

<내호아>와 더불어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배하니,

<내호아>가 그들을 추격하여 성으로 들어가서

군사들에게 마음대로 약탈하게 하자 다시는 대오가 없게 되었다.

 

복병이 일어나자 <내호아>는 대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사졸들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 군사들이 추격하여 선박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주법상>이 진영을 정돈하고 그들을 기다리자 고구려는 마침내 퇴각하였다.

 

<내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서 해포(海浦)에 주둔하니

감히 다시는 남아서 여러 부대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左翊卫大将军宇文述出扶馀道

右翊卫大将军于仲文出乐浪道

左骁卫大将军荆元恒出辽东道

右翊卫将军薛世雄出沃沮道

左屯卫将军辛世雄出玄菟道

右御卫将军张瑾出襄平道

右武候将军赵孝才出碣石道

涿郡太守检校左武卫将军崔弘昇出遂城道

检校右御卫虎贲郎将卫文昇出增地道皆会于鸭绿水西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로 출발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출발하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荆元恒>은 요동도로 출발하고

우익위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로 출발하고

좌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로 출발하고

우어위장군 <장근張瑾>은 양평도로 출발하고

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로 출발하고

탁군 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로 출발하고

검교우어위 호분랑장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로 출발하였는데

모두 압록강 서쪽에 모이게 하였다.

 

 

 

 

述等兵自泸河怀远二镇人马皆给百日粮

又给排甲枪槊并衣资戎具火幕人别三石已上重莫能胜致

 

<우문술> 등의 군사들은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에서부터

사람과 군마에게 모두 1백일 분의 양식을 지급하였고,

또한 배갑(排甲)과 창삭(槍槊)을 지급하고 아울러 옷감과 전투도구,

그리고 불과 장막을 지급하였는데,

사람마다 3() 이상이 되니 무게를 이기지 못하였다.

 

 

下令军中

遗弃米粟者斩

士卒皆于幕下掘坑埋之才行及中路粮已将尽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렸다.

사졸들 가운데 미속(米粟)을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목을 벨 것이다.” 

 

군사들이 모두 장막 아래에 땅을 파고 그것을 묻고 겨우 떠났더니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는 양식이 이미 곧 다 떨어지려고 하였다

 

 

高丽遣大臣乙支文德诣其营诈降实欲观虚实

 

고구려는 대신인 <을지문덕>을 파견하여 그 군영에 가게 하여서는 거짓 항복하였는데,

실제로는 허실을 관망하려고 하였다.

 

 

于仲文先奉密旨若遇高元及文德来者必擒之

 

<우중문>이 밀지를 받들었다.

만약 <고원><을지문덕>이 오는 것을 만나면 그들을 생포하라.”

 

 

仲文将执之尚书右丞刘士龙为慰抚使固止之

 

<우중문>이 곧 그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였는데 그것을 굳게 중지시켰다.

 

 

仲文遂听文德还既而悔之遣人绐文德曰更欲有言可复来

 

<우중문>이 마침내 <을지문덕>이 돌아가겠다는 들어주고 나서

그것을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을 속여서 말하였다.

다시 하고자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시오.”

 

 

文德不顾济鸭绿水而去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서 가버렸다.

 

 

仲文与述等既失文德内不自安述以粮尽欲还

 

<우중문><우문술>은 이미 <을지문덕>을 놓치고 나자 안으로 스스로 불안해하였고

<우문술>은 양식이 다 떨어지자 돌아오려고 하였다.

 

 

仲文议以精锐追文德可以有功述固止之仲文怒曰

将军仗十万之众不能破小贼何颜以见帝

且仲文此行固知无功何则

古之良将能成功者军中之事决在一人

今人各有心何以胜敌

 

<우중문>이 정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공로를 세우고자 논의하였으나

<우문술>은 굳게 저지하니 <우중문>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장군께서 십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작은 적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무슨 얼굴로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겠소.

 

또한 나 <우중문>이 이번의 출행에서

진실로 아무런 공로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왜 그러하오?

 

옛날에 훌륭한 장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중(軍中)의 일이 한 사람에게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사람들이 각기 제 마음을 갖고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时帝以仲文有计划令诸军咨禀节度故有此言

 

당시에 황제는 <우중문>이 가지고 있는 계획을 가지고

여러 부대로 하여금 통제를 받도록 하였던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由是述等不得已而从之与诸将渡水追文德

 

이 일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은 마지못해 하며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文德见述军士有饥色故欲疲之每战辄走

 

<을지문덕><우문술>의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곤케 하려고 매번 싸우면서 도주하였다.

 

 

述一日之中七战皆捷既恃骤胜

又逼群议于是遂进东济萨水去平壤城三十里因山为营

 

<우문술>은 하루 중에 일곱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므로

이미 신속히 승리할 것을 믿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이 제출하는 의견에 압박을 받아서 이에 드디어 전진하여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서 평양성 30리 떨어진 지점까지 가서

산을 이용하여 진지를 만들었다.

 

 

文德复遣使诈降请于述曰若旋师者当奉高元朝行在所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하고

<우문술>에게 요청하며 말하였다.

만약 군사를 되돌려 가신다면

마땅히 <고원>을 받들고 행재소에 가서 조현하게 하겠습니다.”

 

 

述见士卒疲弊不可复战又平壤城险固度难猝拔遂因其诈而还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곤하고 지치어서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았고,

또한 평양성은 험준하고 견고하여 창졸간에 뽑아버리기가 어렵다고 헤아리고서

드디어 거짓말로 인하여 돌아왔다.

 

 

述等为方陈而行高丽四面钞击述等且战且行

 

<우문술> 등이 방진(方陣)을 이루며 행군하는데

고구려 군사가 사면에서 노략질하며 공격하니,

<우문술> 등은 싸우다가 가다가 하였다.

 

 

七月壬寅至萨水军半济

高丽自后击其后军左屯卫将军辛世雄战死

 

가을 7월 임인일(24)에 살수에 도착하여 군사들이 절반 정도 건널 즈음에

고구려 군사들이 뒤에서 그 후군(後軍)을 공격하여

좌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于是诸军俱溃不可禁止

 

이에 여러 군영이 함께 궤멸되어 제지할 수 없었다.

 

 

将士奔还一日一夜至鸭绿水行四百五十里

 

장수들과 사졸들이 도망하여 돌아올 때에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압록강에 도착하였는데 간 것이 450 리였다.

 

 

将军天水王仁恭为殿击高丽却之

 

장군인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이 후방을 맡아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来护儿闻述等败亦引还

 

<내호아><우문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唯卫文升一军独全

 

오직 <위문승>의 한 군영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九军渡辽凡三十万五千及还至辽东城唯二千七百人

资储器械巨万计失亡荡尽

 

애초에 아홉 개의 부대가 요하를 건널 때에는 무릇 305천 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요동성까지 도착한 사람은 오직 27백 명뿐이었으며,

군용물자와 무기가 거만(巨萬)으로 헤아렸는데 잃어버리고 없애서 다 없어졌다.

 

 

帝大怒锁系述等

 

황제가 크게 화가 나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었다.

 

 

癸卯引还   

 

계묘일(25)에 이끌고 돌아왔다.

 

 

百济王璋遣使请讨高丽帝使之觇高丽动静璋内与高丽潜通

隋军将出璋使其臣国智牟来请师期

帝大悦厚加赏赐遣尚书起部郎席律诣百济告以期会

及隋军度辽百济亦严兵境上声言助隋实持两端知鑫淅是行也

唯于辽水西拔高丽武历逻置辽东郡及通定镇而已

 

애초에 백제왕 <, 무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토벌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황제가 그로 하여금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더니,

<부여장>이 안으로 고구려와 몰래 내통하고 있었다.

 

수의 군사가 장차 출동하려고 하자

<부여장>은 그의 신하 <국지모國智牟>로 하여금 와서

군사를 출동할 시기를 알려달라고 요청하였고,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더하여 내리게 하고,

상서기부랑 <석율席律>을 파견하여 백제에 가도록 하고,

날짜를 기약하고 만나자고 하였다.

 

수의 군사가 요하를 건너게 되자 백제도 경계에서 또한 군사를 엄하게 단속하며

겉으로 수를 원조한다고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이번 원정에서는 오직 요수 서쪽에서 고구려의 무려나(武廬邏)를 뽑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 뿐이다.

 

 

八月敕运黎阳洛阳太原等仓谷向望海顿

使民部尚书樊子盖留守涿郡

 

8월에 칙령을 내려서 여양(黎陽, 하남성 준현 경계), 낙양(洛陽). 태원(太原)

창고의 양곡을 운반하게 하여 망해돈(望海頓)을 향하게 하였고

민부상서 <번자개樊子蓋>로 하여금 탁군(涿郡)에 남아서 지키게 하였다.

 

 

九月庚寅车驾至东都   

 

9월 경인일(13)에 거가가 동도(東都, 낙양)에 도착하였다.

 

725일 후퇴하여 913일에 낙양에 도착한다.

요수에서 낙양까지 후퇴하는데 50일이 걸렸다.

50x 12-15km= 600-750km이다.

 

 

 

十月甲寅工部尚书宇文恺卒  

 

겨울 10월 갑인일(8)에 공부상서 <우문개>가 죽었다.

 

 

十一月己卯以宗女为华容公主嫁高昌  

 

11월 기묘일(3)에 종실의 딸을 화용(華容)공주라 하고

고창(高昌, 신간성 트루판시 동쪽)에 시집을 보냈다.

 

 

宇文述素有宠于帝且其子士及尚帝女南阳公主故帝不忍诛

 

<우문술>은 평소에 황제에게 총애를 입으며,

또한 그의 아들 <우문사급>은 황제의 딸 남양(南陽)공주를 모시고 살았으므로

황제는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甲申与于仲文等皆除名为民斩刘士龙以谢天下

萨水之败高丽追围薛世雄于白石山世雄奋击破之

由是独得免官

以卫文昇金为紫光禄大夫

诸将皆委罪于于仲文帝既释诸将独系仲文

仲文忧恚发病困笃乃出之卒于家   

 

갑신일(8)<우중문> 등과 더불어 모두 제명시켜서 백성으로 만들고,

<유사룡>의 목을 베어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하였다.

 

살수(薩水)에서 패배하자 고구려는 추격하여

<설세웅薛世雄>을 백석산(白石山)에서 포위하니

<설세웅>은 분발하여 공격하여 그들을 깨뜨렸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홀로 관직만 면제될 수 있었다.

 

백석산은 지금의 보정시 래원현의 백석산이다.

 

<위문승>을 금자광록대부로 삼았다.

 

제장들이 모두 <우중문>에게 죄를 씌우니,

황제는 이미 제장들을 석방하였지만 홀로 <우중문>만 가두었다.

 

<우중문>이 근심하며 화를 내다가 병이 발생하고 어려운 것이 심해지자

마침내 그를 내보내었는데 집에서 죽었다.

 

 

 

是岁大旱山东尤甚   

 

이 해에 크게 가물어 역병이 돌았는데 산동(山東)이 더욱 심하였다.

 

张衡既放废帝每令亲人觇衡所为

帝还自辽东衡妾告衡怨望谤讪朝政诏赐尽于家

衡临死大言曰我为人作何等事而望久活

监刑者塞耳促令杀之

 

<장형張衡>이 이미 추방되고 나자 황제는 매번 친한 사람으로 하여금

<장형>이 하는 짓거리를 엿보게 하였다.

 

황제가 요동에서 돌아오자

<장형>의 첩이 <장형>이 원망하여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였다고 고발하니,

조서를 내려서 집에서 자진(自盡)하도록 하였다.

 

<장형>이 죽음에 임하여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였다고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형벌을 감독하는 사람이 귀를 막고 그를 죽이도록 재촉하였다.

 

<장형>은 수 문제 <양견>을 눌러 죽였는데

수 양제 <양광><장형>을 죽여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며,

이 일은 수 문제 인수 4(604) 7월의 일이므로 8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형벌을 감독하는 사람이 8년 전 사건을 듣는다면

수 양제는 다시 그 입을 막으려고 죽일 것이므로 귀를 막은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