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때 계림(雞林)으로 일컬어졌던 곳은

당연히 오늘날의 길림(吉林)으로 생각되는데 말이 그릇되어서 이렇게 된 것이요,

따라서 신라 · 백제 등 여러 나라들도 역시 모두 그 부근 지역에 있었다.

<滿洲源流考>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뜬금없이 만주에 있는 길림(吉林)이라는 지명은

계림(鷄林)에서 기원한 것이며 따라서 신라나 백제가 바로 그 부근에 있었다는

매우 충격적인 기록이 실려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를 격파하여

지금의 양주 · 충주 · 전주 등 곧 지금의 경기 · 충청 · 전라도 안의 요지를 얻고

곧 고구려를 쳐서 동북으로 지금의 함경도 등지와

지금의 만주 길림 동북쪽을 차지하니

이에 신라 국토의 면적이 건국 이래 제일이었다고 하였다.

<신채호, 朝鮮上古史, 일신서적, 224>

 

 

그 근거로 삼각산 봉우리에 있는 순수비는 백제를 쳐서 성공한 유적지이고,

함흥 초방원에 순수비가 있으니 이는 고구려를 친 유적지라고 하였다.

 

또 선생께서는 滿洲源流考吉林遺跡志라는 책에 나오는 기록 등을

근거해서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길림 동북까지 진출하였고 하였다.

 

신채호 선생은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계림주(鷄林州)

길림 관내에 설치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신라의 영토가 길림 · 오랄 지경에 이르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료가 있으니

청나라 때 <임수도林壽圖>가 쓴 계동록(啓東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데

작자가 중국의 각종 사서를 통해서

고구려 · 백제 · 신라 3국의 강역을 나름대로 고찰한 기록으로

그 가운데 서북쪽으로 길림, 오랄 지방까지 신라의 강역이 미쳤다고 하였다.

 

신라(新羅)의 고지를 상고해 보면 원래 백제 ·고구려와 이웃해 있다고 하였다.

 

통고(通考)에 이르기를,

'백제의 동남쪽에 있는데, 그 서북계는 고구려 · 백제 사이에 툭 튀어 나와 있다.'

라고 하였다.

 

唐書, 唐會要에서 말하기를 백제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新唐書 高麗傳을 근거로 이를 고찰해 본바,

 

"고구려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와 격해 있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백제와 격해 있으며,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접하고 북으로 말갈(靺鞨)과 접하고 있다.

 

요수(遼水)는 지금의 조하(漕河)이고 영주(營州)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 동부산촌(東ㅂ釜山村)이다.

 

 

그러한즉 지금의 봉천(奉天) , 요양(遼洋)으로부터 남으로 봉황성(鳳凰城)에 이르고,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함경도 · 평안도 등이 고구려이다.

 

지금의 개원(開原)·, 광녕(廣寧), 금의(錦義), 영원(寧遠)으로부터

남쪽으로 개평(蓋平), 복주(復州), 영해(寧海)에 이르고,

또 동남으로 바다를 건너 조선의 전라 · 황해 · 충청도 끝까지가 백제이다.

 

그리고 신라의 지경으로 말하면,

동남으로 지금의 조선 경상 · 강원 2도를 겸유하고,

서북으로 지금의 길림(吉林), 오랄(烏剌)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개원(開原), 철령(鐵嶺)에 가까웠으니

고구려 · 백제 사이에 툭 튀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동북 동남은 모두 서로 가까이 접근해 있었고,

고구려가 그 중간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임수도,啓東錄,길림문사출판사,

이수전 주편 장백총서에 송막기문(松漠紀聞)등과 합철되었음, 179쪽 참조)

 

 

 

청나라 때 <임수도>가 쓴 계동록(啓東錄)에 의하면 신라의 서북계가

길림 · 오랄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허항종봉사행정록에는

길림 부근에서 신라산(新羅山)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 500리를 침공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진흥대제의 북벌로 인하여 지금의 길림까지 신라가 진출한 것을 말한다.

 

 

신라의 길림 진출은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정벌의 기초가 된 것이다.

 

 

 

아무리 나당연합군이라 하더라도 신라가 길림으로 진출하지 않고서는

평양(노룡)을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관할하는 기관으로

부여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다가 나중에 건안(建安) 고성으로 옮겼다.

 

고구려에도 마찬가지로 평양(노룡)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두었다가

당 의봉 원년(676)에 요동(遼東) 고성으로 옮겼다.

 

백제의 웅진도독부를 건안성(하북 당산시)으로 옮겼다는 것은

백제인들이 지금의 요동반도와 발해만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590년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강역>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