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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28 동천대제기

 

 


제는 초호(初號)가 동천대왕(東川大王),

휘는 <위궁位宮> 또는 <하위거夏位居>, 아명은 <교체郊彘>이며,

산상대제의 맏아들이다.

 

모친은 향부(香部)소후(小后)인 주통촌(酒桶村)主 연옹(椽翁)의 딸이었다.

 

외모와 얼굴이 우아하고 출중했으며, 백성과 하급 관리를 아꼈다.

 

또한, 용력도 있고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무술을 좋아하여 병사들도 새로이 조련하였고,

<동명>의 큰 뜻도 있었으며, 즐겁거나 노여워도 표시내지 아니 하였다.

 

시녀가 잘 못하여 고깃국을 어의에 엎질렀을 때에는 다만

‘네 손을 다치지 않았느냐.’를 물을 뿐이었다.

 

<우于>후가, 그 도량을 가늠해보려고, 제가 밖으로 나간 틈에,

애마의 갈기를 잘라버렸었던 즉,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보더니 손으로 말의 목덜미를 어루만져주면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심히 가련하구나.”라고 하였었다.

 

아랫사람이나 윗사람이나 제의 인자함과 관대함의 크기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이사냥을 즐겼고, 궁실을 지어 여색에도 빠졌었다.

 

 

국내외 정벌도 많이 하였었는데, 이러하더니만 뜸하여졌었다.


 

동천대제 원년{AD227}정미,

 

 

여름 5월 7일 밤, 산상대제가 종창으로 몸이 문드러져 금천궁에서 죽으니,

<우于>황후가 급히 태자를 불러 빈소에서 상제(喪祭)를 올리고,

태보<목등>・좌보<우목>・우보<상제>・국상<고우루>・중외대부<명림식부>를 불러서

내전으로 들어가 태자 즉위예식을 치렀다.

 

보령 열아홉이었다.

 

 

우림(羽林)의 백료들이 섶을 불 놓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동쪽 하늘이 밝아왔다.  

 

 

 

여름 6월, <명림식부>의 딸 <전>씨를 황후로 올려 황림궁(皇林宮)이라 하였고,

<우>후를 금천(金川)태후로 하였다.

 

 

향부(香部) 소후(小后)는 주통(酒桶)태후로 하고 <연椽>씨라는 성{姓}을 내렸다.  

 

 

 

가을 7월, 대행을 산상릉에 장사하고 간령(艮嶺)에 사당을 세웠다.  

 

 

<우목>을 태보로, <상제>를 좌보로,<명림식부>를 우보 겸 섭정대왕으로,

<고우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9월, 이전의 태보 청산공(靑山公)<목등穆登(153-227)>이 나이 75세에 죽었다.

<목도루>의 손자이었다.

 

군신들이 대각궁(大角宮) 짓는 일을 계속하자고 청하기에, 허락하였다.

 

 

애초에 산상대제가 <전>후를 위하여 무늬 옥을 캐어 이 궁궐을 짓다가,

 

환후를 얻어 위독하여져 중지하였었다.

 

이제 와서 계속하는 것이었다. 상이 황후와 함께 친히 독려하였다.

 

보옥과 향내 나는 나무로 치장하고 꽃으로 에워쌌고,

새들이 달리고 헤엄쳤으니, 그 사치함이 극에 달하였다.

 

 

이때 于태후 <우설> 72세?, 주통태후 <괴화> 39세,

동천대제 <교체>19세, <명림전>후 23세, <목잠>후 18?세,<주남>후 24세,

태자 <연불> 4세, 산상대제 <연우>와 <명림전>의 아들 <예물> 2세,

<우술于術> 43세?, <명림식부> 59세이다.

 

 

 

 


동천대제 2년{AD228}무신,

 

봄 2월, 상황후{于태후}・주통후・<우술于術>妃{황후모}가 졸본으로 가서

<동명>사당을 찾아 즉위하였음을 고하였다.

 

3월에 대각궁으로 돌아롸서, 조당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온 나라에 대사령을 내렸다.

 

3월, <금천>후를 황태후・섭정왕으로 삼고, <명림식부>를 국공으로 하였다.

 

<우술>은 국태비(國太妃)로 삼고 노비와 장원을 늘려주었다. 

 

<명림식부>와 <우술>은 황후 <명림전>의 부모다.

 

 

가을 8월에 뇌우가 있었다.

 

상이 주통궁으로 가서 황자 <사구奢勾>를 물로 씻어주었다.

 

17삭{17달}만에 낳았기에 <사{넘쳤다}>라 하고,

그날 달의 모양이 갈고리를 닮아서 <구勾>라 이름 하였다.

 

상은 <사구>를 지극히 아꼈으며, 많은 진보를 <사구>에게 주었다.

 

요동의 <공손공>은 그 형의 아들 <공손연>에 의해 갇혔다.

 

<공손연>은 태수를 자칭하고, 대신하여 그 무리를 다스렸다.

 

 

 


동천대제 3년{AD229}을유,

 

춘정월, 황태후의 언니 호천궁(虎川宮)비가 나이 70에 죽었다.

 

<호천虎川(160-229>은 처음엔 <발기發岐(158-197)>의 처였다가

후에는 <을파소(139-203)>의 처가 되었다.

 

남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고 말 탄 채 활쏘기도 잘하였다.

 

<발기>가 난을 일으키자,

큰 뜻으로 지아비와 갈라서서 부두(扶杜){사직을 떠받침}의 공을 세웠기에,

비로 봉함을 받았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삼보들을 시켜서 의견을 견주어 모으게 하였다.  

 

<주朱>비가 아들 <주원朱元>을 낳았다.  

 

 

2월, <전>황후가 대각궁에서 <승勝>공주를 낳았다.  

 

 

3월, 친히 궁성 안의 언덕에서 군사를 조련하였다.

 

황태후와 함께 <산상릉>을 참배하였다.  

 

<우목于目>이 죽어, <상제尙齊>를 태보로, <미하米何>를 좌보로 삼았다.

오(吳)의 <손권>이 칭제하고 건업으로 천도하였다.


 

 

동천대제 4년{AD230}경술,

 

춘정월, 중천원에서 친히 병마 훈련을 하였다.  

 

 

2월, 후궁들과 8부(八部)를 6의(六儀)로 바꿨다.

 

향부(香部)・약부(藥部)를 내의(內儀)로, 단부(丹部)・욕부(浴部)를 단의(丹儀)로,

선부(饍部)를 주의(廚儀)로, 명부(茗部)・온부(醞部)를 다의(茶儀)로.

도부(道部)는 숙의(淑儀)로 하였다.

 

또한 옥구슬・노리개・보물을 갈무리하는 后를 두었는데,

곧 옛 장부(藏部)이어서, 보의(宝儀)라 하였다.

 

后의 모친 <우술于術>은 내의소후(內儀小后)라 하였고 향후(香后)라고도 하였다.  

 

추7월, 국상 <고우루>가 병으로 죽었다.

 

좌부 우태(于台) <명림어수>가 대신토록 하였는데,

황후<명림전>의 오빠이며, 향후(香后) <우술>}의 아들이고,

재주 있고 후덕하였으며, 정사를 봄에 있어서는 대신의 기풍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재산을 탐하고 색을 밝혀서 꽤나 인망이 없었다.

 

태보 <우목>은 <명림어수>를 감당하기 어려워하다가 물러났다.

 

이에, <상제>가 태보로, <명림식부>가 좌보로, <회고湏古>태자가 우보로,

<을대비乙大非>가 중외대부로 되었다.

 

이때,<우>태후는, <주통>후와 함께, <호천>의 행궁으로 나가 살게 되었고,

<을대비乙大非>의 아들 <소개素介>는 행궁선인이 되었다.


 

 


동천대제 5년{AD231}신해,

 

춘정월, <금림錦林(152-231)>공주가 죽었다.

 

<신대제>의 딸이고 <명림식부>의 모친이었으며, 나이 80이었다.

 

현명하고 덕이 있어, 상・하의 사람들이 그녀를 칭송하였다.

 

질산(質山)에 장사했다.

 

여름 4월, <전鱣>황후가 <휴鵂>공주를 낳았다.

위(魏)는 <공손연>이 요동태수・거기장군이 되어서 우리의 현도성을 기습하였다.

 

우위장군 <주희朱希>에게 명하여 이를 쳐서 깨뜨렸다.

 


동천대제 6년{AD232}임자,

 

춘정월, 5부(五部)의 위사(衛士)들을 내성(內城)의 벌판에서 대대적으로 사열하였다.  

 

 

2월,< 우>태후가 <소태蘇太>를 천거하여 내의(內儀)로 삼았더니,

<소태蘇太>가 참소하기를

 

“<예물預物>은 상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은 <전鱣>황후와 소원하여지더니만 정궁(淨宮)에 나가 살게 명하였다.

 

80일이 지나자, 后위를 복원하여 주었다.

 

后는 80곡을 만들어서 이를 서글퍼하였다.

 

3월, <손권>이 <주하周賀>를 보내 바다를 건너 <공손연>과 밀통하였다.

 

<공손연>은 <숙서宿舒>와 <손종孫宗>을 오(吳)에 들여보내서 칭송하며

초피와 새끼 양 및 말을 바쳤다.

태보 <상제尙齊>가 딸의 일로 하여 면직되고, <을대곤乙大昆>이 대신하였다.

 

10월, 호천(虎川)에서 사냥하여, 이로써 <주통>후를 위안하였다.

 


동천대제 7년{AD233}계축,

 

춘3월, <전>황후가 <린獜>공주를 대각궁에서 낳았다.

 

상은 명을 내려 황후궁의 선인을 파면하여 딸 낳은 황후를 박대하였다.

 

황후는 파직당한 선인을 위해 먹기를 그만두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황후를 위해 노래하기를 “딸을 낳아 어려워졌다.”라고 하였다.

 

추9월, <손권>이, <진단秦旦>과 <황강黃彊>을 보내서 입조하여,

 

“바치려 했던 금보진대를 <공손연>에게 빼앗겼으니, 죽을죄를 면할 길이 없다.”

고 하였다.

 

이에 상은, 멀리에서 왔음을 보아서 흡족해 하며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고,

조의 <상월尙越> 등을 시켜서 오나라로 호송하여 주게 하였으며,

< 손권>에게는 초피와 갈계피 등을 내려주며

 

“<공손연>은 사람됨이 뒤집기를 잘 하여 믿을 바 못 된다.”고 일렀다.

 

추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공손연>은 <손권>의 사신 <장미張彌>와 <허안許晏>등을 죽여서

그 목을 魏로 보냈다.

 

魏는, <공손연>을 대사마・낙랑공으로 봉하고,

력사(力士)는 사신을 삼아 보내면서 <공손연>을 격살하라고 일렀다.

 

<공손연>은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병사를 성대히 늘어세워 위엄을 보이면서

책명 받는 곳을 둘러싸게 하였다.

 

魏는 이렇게 되자 아무런 음모가 없었던 듯이 하였다.

좌보 <미하米何>가 죽어, <명림식부>가 이를 대신하였고, <목능>이 우보가 되었다.

 


동천대제 8년{AD234}경인,

 

춘정월, 吳의 사신에게 대각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 주통>후를 호천(狐川)으로 찾아뵈었다.

 

이때, <주통>후는 딸 <방을方乙>을 낳았었다.  

 

여름 4월, <조예曹叡>{魏 曹操의 손자}>가 사신을 보내서,

병서・보검・옥상(玉床) 등을 바치며,

함께 <공손연公孫淵>을 멸하고 吳를 토벌하자고 청하였다.  

 

태보 <을대곤乙大昆(165-234)>이 나이 70에 죽었다.

 

<을대곤乙大昆>은, <을파소(139-203)>의 장자이며, 입조한 지 50년이었는데,

대신의 기풍이 있었고 공과 사를 혼동하지 않았다.

 

큰 정사를 처결하고 큰 옥사를 다스림에 힘쓴 것이 많았으나,

<을파소>가 죽자 <호천虎川>을 이어서 취하여 아들을 낳아서,

 취록지치(聚鹿之恥)를 면하지 못했으니 한탄 할 일이었다.  

 

<상제尙齊>가 재상의 자리에 복귀하였다.

 

추9월에 <우于>태후가 죽자,

산상릉 곁에 묻어주고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 그 앞을 가려주었다.

 

겨울10월, 상이 호천(虎川)에 있던 <주통>태후를 궁내로 맞아들여 기거하게 하였더니,

<우于>태후가 죽자, <주통>태루가 모든 정사를 틀어쥐게 되었고,

이리하여 <연椽>씨 형제는 갑자기 대신의 자리에 올라

<우于>씨와 <주朱>씨를 대신하게 되었었다.

 

나라사람들은 외척들의 사록지우(沙麓之患)를 어찌할 수 없음에 한탄하였다.

 

이때, <주통>후는 나이가 46살이었는데도,

태반이 젊은 여자와 같이 튼튼하여 계속하여 사생아(私生兒)를 낳아댔다.

 

상은 이를 금하지 못하고 모두를 왕과 공주로 봉하였다.  

 

<주朱>비가 아들 <주국朱國>을 낳았다.

 


동천대제 9년{AD235}을유,

 

춘정월, 조서를 내려서 이르길

 

“효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큰 근본인데,

짐은 백성들의 부모 된 자인데도 스스로 모범을 보이지 못하였으니,

어찌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으리오. 개탄할 일이었소.

 

내 모후께서는, 짐을 낳으신 이래, 몸소 여러 간난신고를 겪으시면서 오늘에 이르셨소.

 

그 정을 생각하면, 어찌 가련하셨다고 아니 할 수 있겠소.

 

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 분을 돌볼 수 있다면,

유감스러움을 남기고 싶지 않소.

 

나의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은 이 큰 뜻을 헤아려주시오.

 

장생불로하는 신선들의 약이거나, 기운을 보하여 젊음을 되찾아주는 재주이거나,

모친의 생명을 늘여주는 그 무엇을 태후께 바치는 자에겐 작위를 더하여 주고

그 공에 맞는 상을 내릴 것이오.”라 하였다.

 

관리에게 명하여 모친에게 효도하는 백성 37인을 가려내어

태후 궁에서 잔치를 열어 주었다.

 

여름 4월, <전>황후가 대각궁에서 <각桷>공주를{또 딸을} 낳았더니,

상이 노하여 后의 位와 식읍으로 주었던 용암(龍岩)과 환나(桓那) 땅을 삭탈하고

정궁(淨宮)으로 나가 살게 하고는, 내의(內儀)小后 <통桶>공주를 황후로 삼았다.

 


동천대제 10년{AD236}병진,

 

춘2월,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가 찾아와 배알하며 화친을 청하였다.

 

그 언사가 심히 방자하고 예물 또한 야박하였더니,

 

상이 화가 나서 <호위胡衛>에게 이르길

 

“너희 왕은 <공손연>은 끔찍이도 섬기면서,

짐을 섬기는 것은 어찌 이리도 야박한가?”라 하자,

 

<호위胡衛>는

 

“예물은 여러 번의 풍파로 인하여 물에 빠뜨렸음이고,

말씀은 <공손연>에게 함과 하나같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상이 이르길

 

“지난해에 <진단秦旦>과 <황강黃彊>이 나를 속이더니, 너도 다시 그러는 것이냐?”

라 하고는, 옥에 가두어 다스리라 명하였다.

 

태보 <명림식부>가 병든 몸으로 들어와서 간언하였더니,

<호위胡衛>를 현도(玄菟)에 안치하고 지키라 하였다.

 

<호위胡衛>는 도주하다가 <공손연>에게 잡혀서 죽었다.

 

함께 왔던 <주선周仙>은 나이가 어린데도 우리말에 능통하여

<주통>이 가신으로 삼았더니, 태보 <목신穆臣>이 역시 간언하기에 풀어주었다.  

 

 

여름 5월, 상이 서쪽 교외로 나가서 농사를 살피고, 친히 보리종자도 거두었다.

 

<통桶>황후가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였고,

상은 다시금 <전鱣>후를 입궁하라고 불렀다.

 

이에 <전鱣>후는 글을 올려 애걸하기를

 

“소첩의 몸은 수기(水氣)가 많아서 또 딸을 낳을까 두렵습니다.

감히 성상을 다시 모실 수 없습니다.”라 하자,

 

상이 이르길

 

“짐이 꿈에 선제를 뵈었더니, 짐을 책망하며 이르시길 딸이 아들보다 낫다.

제위를 다툴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하시었소.

이제 짐이 그것을 깨달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들어오시오.”라 하였다.

 

색두(索頭)의 <섭진涉真>이 죽어 <응록應鹿>이 섰다.

<주朱>비가 <수洙>공주를 낳았다.

 

신라의 죽령(竹嶺)이남 땅을 빼앗아 성을 쌓고 물구덩이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조분>은 자신의 세력이 미흡함을 알고

할 수 없이 북쪽에 항거하기를 그만두었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때 신라는 아달라왕 24년이다.  

 


 

 


동천대제 11년{AD237}정사,

 

춘3월, <전鱣>황후가 <장獐>공주를 낳고 눈물 흘리며 먹기를 피하니,

상도 또한 눈물을 흘렸다.

<유흔劉昕>・<선우사鮮于嗣>・<오림吳林> 등이,

대방・낙랑 등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고, <공손연>과는 표리와 같이 되었더니,

<공손연>은 스스로 燕왕을 칭하고 교만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에 상은 魏에 사신을 보내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계획을 상의하였다.

 

魏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삼아서, 선비・오환과 함께,

요대(遼隊)에 진을 치고 <공손연>을 응징하게 하였더니,

<공손연>이 먼저 나와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관구검>은 다시금 싸우고 싶었으나,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서 요수(遼水)가 넘실대니,

군사를 잃을까 겂나서 우북평(右北平)으로 철수하였다.

 

우리 군대가 이 허를 틈타 현도 서쪽의 땅 백 여리를 취하였다.  

 

태보 <목신穆臣>이 죽었다.  

 

 

7월, 태보<상제尙齊(161-237)>가 77살에 죽으니,

<명림식부>가 이를 대신하고, <목능穆能>이 좌보가 되었다.

 

 


동천대제 12년{AD238}무오,

 

춘정월, 닷새 동안 많은 눈이 내렸다.

 

태보 <명림식부>의 처 <옥양玉陽>공주가 죽었다.

 

이틀 후에 <명림식부(169-238)>도 나이 70에 죽었다.

 

<명림식부>는 도량이 큰 아비의 기풍이 있었고,

근검하여 자신을 지키고 자녀를 가르쳤으며, 직간을 잘 하였다.

 

늘 태후에게 정사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더니, 사람들이 현명한 재상이라고 했다.

 

상은, <전鳣>황후를 데리고 친히 임석하여 조문하였으며, 대왕의 예로 장사하였다.  

 

<목장穆萇>의 딸 <잠蚕>을 내의소후로 삼았다.

 

<목장穆萇>은 <목능穆能>의 아들이다.

< 사마의司馬懿>가 사신을 보내 함께 燕을 멸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주희朱希>에게 명하여 주부대가(注簿大加)가 되어서

5천병을 이끌고 남소(南蘇)로 출병하고 관망하여 성원하라 하였다.  

 

 

8월에 <공손연>을 멸하였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 방자하여졌다.

 

상이 노하여 <사마의>와 교통을 끊었다.

 

 

 


동천대제 13년{AD239}기미,

 

춘정월, 태후 궁에서 종실과 공경들의 노모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상은 친히 재인들을 거느리고 악기도 타고 노래하고 춤도 추며 익살도 부려서

태후를 위무하였다.  

 

친히 서천(西川)에서 군사를 조련하였다.

신라의 사신이 와서 옥돌을 바치며 죽령 땅을 얻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魏에서는 <조예>가 죽고, <사마의司馬懿>가 정사를 거머쥐었다.

 

 


동천대제 14년{AD240}경신,

 

춘정월, 눈이 많이 내려 잡힌 돼지와 노루가 엄청 많았다.

 

내성(內城)의 북쪽 교외에서 선농제(先農祭)를 지냈다.  

 

 

2월, <전鳣>황후가 <구龜>공주를 낳으니, 상이 눈물을 흘렸다.

 

 

3월 태후가 <굴屈>태자를 낳았다.

 

상이 기뻐하자, 태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폐하는 기쁘거나 노여워도 표내지 않으신다.’고 하던데,

근래엔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십니다.

딸 낳으니 눈물 흘리고, 남동생 낳으니 웃으셨는데, 무슨 까닭이오?”라 하니,

 

상이 말하길

 

“<우于>태후가 살아 있을 땐 생각이 느슨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좀 방심하였습니다.

 신의 잘못입니다. 응당 고치겠습니다.”라 하였다.

대방(帶方) 사람 <궁준弓遵>이 魏의 태수를 자칭하며, 변방을 침략하고,

신라 및 왜와 소통하여, 근심거리가 많아졌다.  

 

<어관於灌>에게 명을 내려,

韓의 신지(臣智) 등을 이끌고 나가서 이를 쳐 죽이게 하였다.

 

겨울 12월, 연불궁(然弗宮) 봉례(奉禮) <연엽椽葉>이 아들 <약우若友>를 낳았다.

 

상은 꿈에 백룡이 <연불然弗>태자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늘 이상하게 여겨왔는데,

지금에 이르러 과연 백룡이 온탕에 나타났고, <약우若友>가 태어났다.

 

<연엽椽葉>은 <연황椽况>의 딸이며, 모친은 상의 동복 여동생 <존尊>공주이었고,

이때 나이는 열 넷이었다.

 

상이 이를 크게 기뻐하며, 친히 온탕으로 행차하여 옷을 하사하였으며

부마 <연황椽况>을 중외대부로 삼아주어 태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연황椽况>은 <상尙>태후의 딸인 태후{주통}의 조카이었다.

 

<우于>태후 시절엔 모든 가족이 옹구(壅口)로 피하여 살다가,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지가 크게 바뀐 것이었다.

 

 


동천대제 15년{AD241}신유,

 

춘정월, 태후가 위독하여 조정을 폐하고, 죄수를 다시 살피고,

친히 신명에게 빌고, 천단과 지신 및 명산대천에 제사지내라고 명하였다.

 

 

3월에 태후가 쾌차하여졌다.

 

<연椽>씨와 <명림明臨>씨의 족당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

 

여름 5월, 상은 태후・황후・<연불>태자와 더불어 졸본으로 가서

사당과 무덤을 배알하고 왕손이 생겼음을 고하고는,

보리밭을 둘러보고 보리종자를 물어다 준 비둘기에게 제사하였다.

 

 

추8월, <연엽>을 <연불>태자비로 봉하고,

금과 은으로 꾸민 바퀴달린 가마와 채단을 셀 수 없을 만큼 하사하였다.

 

<존尊>공주를 내의소후로 높여주고, 전택과 노비를 더하여 주었다.  

 

<주朱>비가 <락洛>공주를 낳았다.

 

 


동천대제 16년{AD242}임술,

 

춘정월, 좌보 <목능穆能>이 병으로 면직되었다.

 

여름 5월, 상이 친히 5도(道)의 장군인

<방축方丑>・<회고湏古>・<주희朱希>・<현絃>・<목장穆萇> 등을 거느리고

십만 병을 이끌어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安平大戦)이다.

 

애초에 <사마의>가 요동을 빼앗고

이곳으로 자신의 주력을 옮겨 동쪽을 도모하려 하였었다.

 

이제 그 시설을 파괴해버렸더니, 백성들과 진보가 모두 우리 것이 되었다.

 

이때 좌보 <목능穆能>은 성의 남쪽에서 병을 요양하고 있다가,

대평 <득래得来>와 함께 병을 무릅쓰고 들어와서 간언하기를

 

“병력을 다 써버리면 화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힘을 키우면서 때를 기다림만 같지 않습니다!”라 하였고,

 

상은 그가 물러나지 않음에 고심하더니만

 

“국로(國老)께서는 요양이나 하시면서 손자나 쓰다듬으시지,

어찌 이처럼 정벌에 간예하십니까!”라 말하고,

고깃국을 올리게 하여 마시게 하였었다.

 

<목능穆能>은 고깃국은 입에 대지도 않고는

 

“소신 역시 황가의 후손으로,

어찌 가만히 앉아서 폐하가 위험에 빠지시는데도 간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출병하실 것 같으면, 청컨대 신을 죽여주시오!”라 하였다.

 

이에 상은 화가 나서 <잠蚕>후에게

 

“당신 할아버지가 나를 괴롭히고 있단 말이요!”라 하였고,

 

<잠蚕>후는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목능穆能>을 억지로 나가게 하였다.

 

이에 <목능穆能>이 병이 극심하여져 죽었으나,

집안사람들은 감히 장사를 지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상이 안평에서 돌아와 군신들에게 큰 잔치를 벌여주고 이르기를

 

“이와 같이 좋은  일에, <목>씨 노인께서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소.”

라 하였다.

 

상은 <잠蚕>후와 함께 친히 <목능>을 국공 태보의 예를 갖추어 장사하고는,

 

“당신의 할아비는 비록  섬길 줄은 몰랐어도, 충성은 충성이었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잠蚕>후는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아 황자를 낳게 되니,

<명림明臨>씨와 <연椽>씨의 얼굴에는 꽤나 질투의 빛이 있게 되었다.

 

가을 7월, 책신(柵新)의 우두머리 <오릉烏凌>이 맥미 8천석을 가져왔기에,

안평 미녀 둘을 하사하고 작은 조의촌의 평자{評者} 작위를 주었다.  

 

선비・자몽・색두 등이, 사신을 보내, 미녀와 좋은 말을 바치며, 칭신하고 청혼하였다.

 

상이 이들 모두를 예의로써 위무하고 보빙(報聘) 길을 열어주었다.

 

 


동천대제 17년{AD243}계해,

 

춘정월, <연불>태자를 정윤으로 세웠다.

 

<엽>씨를 정윤 비로 하고, <존>공주는 정윤 숙의로 하였다.

 

<명림전>황후는 천궁대황후로 삼고,

용암(龍岩)・단나(柦那)・호천(柦那)의 땅을 돌려주어 탕목으로 삼게 했다.

 

이때, <전>후가 <동棟>태자를 낳으니,

상은 후를 유별나게도 지극히 아껴 주었고, 총애가 옛날과 같아졌다.  

 

<승勝>공주를 <사구奢句>의 처로 삼았다.  

 

<통桶>공주가 <우수于漱>의 딸 <오두五斗>를 서천의 이궁에서 낳았다.

 

이 <오두五斗>가 훗날에 <서천제>의 애후인 <오두성五斗星>후가 된다.

 

애초에 서천 리택(鯉宅)의 딸이 꿈에 큰 능구렁이를 붙잡았기에,

불길하다고 여기고는 무당을 찾아가서 푸닥거리를 하고 싶어 하였다.

 

<통桶>이 이를 듣고 도토리 알갱이 닷 되를 주고 그 꿈을 샀더니 태기가 있었다 하여

<오두五斗>라 하였다.

<고이古爾>가 정월에 제단을 쌓고 천지산천에 제사하였는데,

 

상이 말하길

 

“<고이古爾>는 사람들을 속이고 아이{사반}를 저버렸는데,

하늘이 잘도 받아 마시겠다.”라 하였더니,

 

<전>후가 말하길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할 것입니다.

어찌 앞서 한 일이 부끄럽다 하여 뒤의 일까지 내버려두겠습니까?”라 하였고,

 

상은

 

“그렇겠다.”라 하였다.  

 

왜가 미녀와 비단을 바치고,

신라를 공격할 길을 허락하여 달라고 청하니, 들어주지 않았다.

 

<고이古爾(235-286)>는 264년에 제위에 오른다.

이때는 초고왕 18년이다.



 

 

 

동천대제 18년{AD244}갑자,

 

춘3월, 미행하여 주통촌에 이르러서 땔나무를 하는 <연淵>씨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후궁으로 맞아들여서 보의(宝儀) 봉례(奉禮)로 삼았다.

 

신하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상은, 신하와 백성들의 은밀한 것들을 알고 싶어,

왕왕 공경이나 서리들의 집을 방문하고 처와 딸들을 둘러보았다.

 

백성들의 집 또한 찾아보는 것 역시 그리하였더니,

많은 이들이 자기들도 피어나길 바랐다.  

 

 

7월에 <관구검>이 현도에 쳐들어와 노략질 하였다.

 

상이 보기 2만 병을 이끌고 나아가서 비류수의 위쪽에서 이를 받아쳐서 크게 이기고

3천여 급을 베었다.

 

이를 비수대전(沸水大戦)이라 한다.

 

신라는 우리가 죽령(竹嶺) 이남의 땅을 빼앗은 것을 흉으로 여겼다.

 

이 땅은 본래 낙랑과 졸본의 땅이었었으니, 모두가 우리의 땅이었다.

 

그런데도 신라와 백제가 이 땅을 갉아먹어 차지하였었다.

 

대체로 우리나라가 서진하다가 생긴 일이었으니, 진실로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죽령(竹嶺)은 낙랑과 함께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경계에 있는 요충지이다.

 

대륙에 있던 낙랑국이 멸망하자 그 유민이 한반도로 건너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계지인 죽령군에서 신라에 부용하는 호족이 되었다.

 




 

동천대제 19년{AD245}을축,

 

봄, 동해를 순시하여 달명연(達明淵)에서 고기 잡는 것을 돌아보다가,

구극촌(九極村)에 미행하여 촌장의 딸 <맥麥>씨를 거두었다.

 

얼굴이 기막히게 예쁘고, 모습이 단아하고 고요하며 아름다웠다.

 

상은 그녀를 크게 좋게 여겨 다의(茶儀)상례(尙禮)로 삼았으며

땅과 집과 노비를 내렸다.

 

형제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주朱>비가 <주옥朱玉>태자를 낳았다.

 

겨울 10월, <목장穆萇>과 <주전朱全>에게 명하여

신라의 장령(長岺)과 와현(蛙峴)을 쳐서 빼앗았다.

 

<우로于老>는 마두책(馬頭柵)으로 쫓겨 가서,

싸리나무를 불 놓아 부상한 졸병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주전朱全>이 이들을 추격하고자 하였더니,

 

<목장穆萇>이 말하길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게 되며, 궁한 개는 쫓는 게 아니오.”라 하였다.

 

<우로于老>의 불 피우던 병졸의 우두머리가 끝장을 보고 싶어 반격하자고 하였으나, 그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옳았다고 할 것이다.

 

 

 

 

조분왕 16년(AD 245)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자,

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수비하였다.

그 날 밤 날씨가 몹시 추워지자,

우로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직접 장작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하여 주었다.

사졸들이 진심으로 감격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동천왕 19년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조분왕 16년(AD.307)

 

10월 고구려가 비열(比烈), 장령(長岺)을 침범하였다.

 

우로(于老) 태자가 2로(二路)장군을 이끌고 출격(出擊)하였다.

 

아군이 불리해지자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밤이 깊어지자 추워져 병사들이 벌벌 떨었다.

 

<우로>가 몸소 울타리의 나무와 낙엽을 나누어 태워 따뜻하게 해주고,

갓옷을 벗어 다친 병사들을 덮어주었다.

 

군중의 심리가 감격(感激)하여, 모두 싸워 죽기를 원하였다.

 

적을 뒤쫓아 추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아군들이 승리를 타고, 먼 곳까지 쫓아가고자 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저들은 우리의 수가 적으나 지켜낼 줄 알고 있으니,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적이 그 말을 듣고 이에 물러났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우로于老(277-331)>는 奈解(230-291)의 아들이다.

남당유고 동천대제 기사는

후대의 누군가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사를 각색하여 끼워 넣은 것이다. 

 

 

 

 


동천대제 20년{AD246}병인,

 

춘정월, 조서를 내려 알리길

 

“병사는 국가에서 으뜸가는 기운이오.

나라의 서남쪽에 일이 있어, 으뜸가는 기운을 함양하려 하니,

용감하고 의로운 사나이들 중에서 기(技)와 예(藝)에 하나라도 능통한 이들이라면,

모두들 주부(注簿)를 뽑는 시험에 응하시오.

재능이 있고 흠결은 없는 한 사람을 찾고 있소.”라 하였다.  

 

 

2월,< 전>황후가 <덕德>공주를 낳았다.  

 

 

추 8월에 상이 <주酒>후・<엽葉>비・<맥麥>비 등을 데리고

서천으로 가서 병사를 사열하고, 두눌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돌연히 <관毌>적이 우회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근于根>등을 채근하여 맞아 싸웠으나, 우리는 수가 적고 저쪽은 수가 많은데다가,

그들의 예봉을 마주하더니, 자못 어려워하였다.

 

이에 상이 철기 5천을 추려서

그들의 진영을 양구(梁口) 서쪽에서 들이받아 크게 이겼고,

노획한 병장과 마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상이 <주酒>후와 함께 포로를 접수하였다.

 

<관구검>의 대군이 또다시 밀려오니,<우근于根>이 싸우다 죽었다.

 

<관구검>이 방진을 펼쳐 그 전봉의 위세가 파죽인데,

남쪽의 통로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후비들까지 데리고 있는데다가 상황이 녹녹하지 않아서,

날랜 기병 천여 기와 함께 압록원(鴨淥原){今 란하}으로 물러났다.

 

<주전朱全>의 군대 역시 패하여, 죽은 이가 만 명이나 되었다.

 

상은 옹구(壅口)로 동천(東遷)하였다.

 

10월, <관구검>이 도성(都城) 에 들어가 백성을 약탈하고 보물들을 챙겼고,

이 소식을 듣은 상은 통곡하면서 <목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맥>비가 자기의 고향으로 피하기를 청하였다.

 

죽령(竹領)에 이르렀더니 군사들 거의 모두를 잃었었다.

동부(東部)우태(于台)인 <밀우密友>가 무사들을 모아서 힘써 싸웠고,

상은 산곡으로 숨어들어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를 지켰더니,

백성들은 평소에 상의 성덕을 흠모하였던지라 모두들 죽기로 싸우길 원하였다.

 

<왕기王頎>의 추격군이

들판에서 농사를 짓거나 산속에서 사는 사람들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적은 수가 많고 우리 쪽은 수가 적을뿐더러

짧은 쇠토막도 없어서 그 형세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廚使 <뉴유紐由>가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음식으로 <왕기王頎>를 대접하면서,

숨겼던 칼로 그를 베어 죽이고 여러 막사의 장수들의 목을 베었더니,

적들은 어지러워졌다.

 

이에 상이 백성과 병사를 독려하며 <왕기王頎>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이때, <관구검> 군대는 이미 물러나 있었고,

<목장穆萇>이 와서 상을 맞이하니,

 

상은

 

“짐이 자네 부친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되었다.”하였다.

 

<목능>을 태보・안국공으로 추증하였으며,

<득래>를 대주부로, <목장>을 중외대부로 삼았다.

 

<목장>은 애초엔 <산상대제>의 딸 <옥천>공주에게 장가를 들었었고,

지금에 와서는 또 <우술>이 낳은 상의 딸 <술術>공주를 처로 삼게 되었다.

 

<뉴유紐由>에게는 동부 대사자를 추증하고,

<뉴유紐由>의 아들 <다우多優>가 그 자리를 잇게 하였다.

 

<밀우密友>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의 땅을 하사하고,

<옥구屋句>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의 땅을 하사하였다.  

 

<주朱>비를 자식을 많이 낳았으며 근신하여 자신을 지키었다 하여, 황후로 봉하였다.

 



동천대제 21년{AD247}정묘,

 

춘2월, 평양(平壤){今 요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7월, 태자비<엽>씨가 아들 <일우逸友>를 낳았다.

 

보의(宝儀) 봉례인 <연淵>씨가 <연淵>태자를 낳았다.

 

관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今 조양}이 불타자 평양{今 요양}으로 천도한다.


 

 


동천왕 22년{AD248}무진,

 

춘2월, 신라와 경계를 정하고 화친하였다.  

 

<엽葉>씨를 내의(內儀)소후로 삼고, <맥麥>씨는 단의(丹儀)소후로,

<연淵>씨는 다의(茶儀)소후로, <관나貫那>씨는 보의(宝儀) 소후로,

<잠蚕>씨는] 지궁(地宮)대황후로 삼았다.

 

상은 변을 당한 이후로 정사에 권태를 느끼고

오로지 유람하며 사냥하기와 여색에 빠져서 세월을 보내면서,

태자에게 명하여 정사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요要>공주에게는 태자비가 되라고 명하였다.

 

<요要>공주는 <주酒>후의 소생이고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추7월에 <주통(182-248)>후가 더위를 먹어 심한 설사병으로, 춘추 67세에 죽었다.

 

<주통>후는 주통촌장 <연백>의 딸이다.

 

모친 <어於>씨가 꿈속에서

괴왕(槐王)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나서 후를 낳았다.

 

미색이 넘치고 덕스러워 <산상대제>가 미행하여 상통하고 성상을 낳았다.

 

나중에 태후가 되었는데, 정사를 많이 어지럽혔고,

음란하고 몸을 함부로 놀려서 이전에 받았던 인망을 자못 상실하였다.

 

주통촌에 장사하였다가, 뒷날 동천릉에 합장하였다.

 

이는 <주통>후가 남긴 뜻에 따른 것이었다.  

 

<주朱>후가 아들 <주성朱城>태자를 낳았다.  

 

 

9월에 상이, 호천에서 사냥하고 주통릉을 찾아보고 는 감응하여 병이 들더니,

말도 못하게 되어서 죽었다.

 

동천의 오양(烏壤) 산줄기에 장사하였다.

 

애초에 상이 <주酒>후와 함께 이곳을 점지하였었고,

지금 한 구덩이에서 서로 다른 방을 가지게 되었다.

 

<연淵>후가 쫓아와서 몸을 불살라 죽었고,

<전>황후・<잠>후・<맥>씨・<엽>씨 등도 모두 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울부짖었다.

 

<벽용擗踊>태자가 <통桶>공주・<요要>공주와 함께

여러 후들을 붙잡아서 목숨을 건지게 하였다.

 

이러하였으니, 조정 사람들과 후궁들 그리고 민간의 여자들이

무덤 앞에서 순사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싸리 섶으로 덮은 것이 끝이 없었더니,

 

사람들은 그곳을 시원(柴原)이라 불렀고, 백성들은 노래하기를

 

“다정했던 천자가 용이 되니, 무덤 앞 싸리 섶 모두는 하늘 꽃으로 만발하였다.”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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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