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제는 휘가 <이련伊連> 또는 <어지지於只支>이고

수림(獣林)의 동복아우이다.

 

<해觧>태후가 꿈에 용산에 올라

<추모>가 용을 타고 상천하는 모습을 보고파 하였더니,

홀연 큰 나비가 나타나서 육족오(六足烏)로 변하였었고,

적{모용황}이 <해>태후의 승은을 입고나서 생겼다고 하여

점보는 이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주周>태후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 아이는 <추모>가 현신한 것이라 하였다.

 

<모용황>의 난리 중에, 제는 <해>후를 따라 연(燕)으로 끌려갔었다.

 

<모용황>은 후의 궁으로 올 때마다, 제는 높이 여겼으나 후는 경시하면서 말하길

 

“당신은 이 아이로 인하여 귀하게 될 것이오.”라 하였으며,

 

연(燕)의 사람들이 <모용황>에게 제{이련}를 해치우라고 하였을 때,

 

“천명은 억지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어찌하려 하면

도리어 재앙이 오는 법이오.”라 하더니만, 오래 있지 않아서 돌려보냈다.

 

어려서는 신선을 즐겨 찾고 산천을 유람하였으며,

부모님과 형님이신 제{소수림제}를 효성으로 섬겼다.

 

장성하여서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물었으며, 새로운 율령을 정하였고,

종척의 자녀를 교육함에 부지런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앞을 미리 내다보고 그 요체를 처결하였더니,

 

<수림>은 그를 아끼며 이르길,

 

“이 사람은 내 분신이다.”라 하였으며,

 

정사를 맡기고는 묻지 않는 적이 많았으니, 나라사람들은 버금황제라 불렀다.

 

<수림>이 죽음을 앞두고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며,

 

이르길

 

“중원의 나라들은 소란하나, 오직 동방만은 점점 고요해지는구나.

조상님들의 음덕이 있음인 것이야.

자네도 잘 지켜서 <담덕>에게 물려주게나.”라 하였더니,

 

상은 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받았다.

<소수림>이 죽자, <해>태후의 명으로, 서도 란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때 춘추 마흔 셋이었다.

 

 

 

 


고국양대제 원년{AD384}갑신,

 

12월, 대행을 수림(獣林)에 장사하였다.

 

<천강天罡>을 황후로 삼았는데, 이는 유명을 따름이었다. 

 

<해극觧克>을 태보로, <연흥椽興>을 좌보로, <붕련朋連>을 우보․주병대가로 삼았다.

 

후의 부친 천원공(天原公) <연림淵琳>은 태상황으로 높이고,

후의 오빠 <연도淵鞱>를 중외대부 도통내외채공사로 하였으며,

<주덕周德>은 대주부와 우림장군을 겸하게 하였다.

이때 <觧>태후 62세, 천원공 <연림> 56세, 고국양대제 <이련> 43세, <천강>후 30세,

<천을> 14세, <담덕> 11세, <천성>{두양} 18세?, <평양> 26세,

<붕련> 34세, <서구> 16세, <春> 25세, <실성> 26세, <진사>33세이다.

 

 

 

 


고국양대제 2년{AD385}을유,

 

6월, <부견苻堅>이 나이 48살에 <요장姚萇>에게 피살되었다고 들었다.

 

종척들 중 많은 이들이 불법은 믿을 바가 못 되니,

절을 폐하고 중을 내치자고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선제께서는 승려들을 써서 청정․고행하는 것을 법으로 삼으셨소.

짐 역시 호색하지만 그들이 보이는 청정함의 정도가

선도들의 음란․추악함과 같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두 절과 고승들의 존폐를 의론하지 마시오.”라 하였다. 

 

황상의 아우 <붕련朋連>에게 명하여, <용궐龍厥>․<해언觧彦> 등을 데리고

4만병을 끌고나가 토성(菟城)과 장무(章武) 등을 쳐서 빼앗게 하였더니,

그곳의 장수 <학경郝景> 등 열 사람의 목을 베었으며,

용성(龍城)을 노략하여 남녀 1만여 명을 잡아서 돌아왔다.

 

노획한 진보와 값진 노리개들도 무수하였다.

 

<부견>이 업(鄴)을 깨뜨린 이후로 요동 땅은 前秦과 마주하여 지키기만 하고

군병을 써 본 적이 오래되었더니, 거란이 그 땅을 넓게 깔고 앉게 만들었기에,

지금에 이르러서 조정이 이 두 성을 되찾기로 하여 군대를 보내서 되찾은 것이었다. 


8월에 <모용수>는 용성(龍城)이 떨어진 것을 듣고

열옹(蠮翁)에 있는 자기 동생 <모용농>을 불러들였더니,

범성(凢城)을 거쳐서 용성(龍城)으로 들어갔는데,

그의 행적이 지극히 신속하였기에 우리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였었다.

 

3만 정병을 몰래 훈련시키면서,

겉보기엔 분묘를 손보는 것처럼 하여 싸울 뜻이 없는 체 하다가는,

11월에 돌연 장무(章武)를 공격해오니 우리의 장수 <뉴비紐庳>가 패하여 죽었고,

군대를 돌려서 도성(菟城)으로 쳐들어오자 <용궐龍厥>이 맞싸워서 깨뜨렸다.

 

이에 <모용농>은, <방연龐淵>을 장무령(章武令)으로 삼아놓고,

자신은 요동 태수를 칭하고,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투항해 온 백성들을 불러 꼬드겼으나,

많은 이가 황상의 백성이 되기로 하고, 그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천원공(天原公)의 정비 <해觧>씨를 태상후(太上后)로 삼고 관료를 딸려주었으며,

그녀의 외가 오빠인 <연억淵億>을 대부로 삼아주었다.

이해 2월에 <침류>가 한산(漢山)에 절 짓기를 시작하여 10월에 완성하고,

열 사람을 중이 될 수 있게 허락하고는 죽었다.

 

그의 아우 <진사>가 뒤를 이었는데,

강하고 용맹하였으며, 총기도 있고 지혜로웠으며, 지략도 있었다.

 

<침류>의 처는 <진사>를 매우 좋아하여 새 남편으로 삼더니 정사를 독차지하였고,

자신의 아들 <신莘>을 후사로 정하였다. 

<천룡天龍>을 <서구胥狗>의 비로 삼았다.

 

 


고국양대제 3년{AD386}병술,

 

정월, <담덕>태자를 정윤으로 삼고, 동궁 관료를 딸려주었으며,

<비鞴>를 동궁대부로 삼았다.

 

<담덕>은 나이가 13살이었는데,

힘은 능히 가마솥을 들어 올렸고, 활도 잘 쏘고 무리를 능히 이끌었다.

 

선황의 장자 <강岡> 또한 현명하였는데,

선황의 유지를 받들어, 끝내 <담덕>을 태자로 세웠다. 

 

<탁발규>가 代의 왕이 되고, <모용수>가 제(帝)를 칭하였다. 

 

 

8월, <용궐龍厥> 등이 백제의 관미성(関彌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0월,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소가 발이 여덟에 꼬리가 둘인 말을 낳았다.

 

상은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서 즐겁게 해주었다. 

 

<진사辰斯>가 15살 이상의 장정을 뽑아서 관방(関防)을 설치하였다.

 

청목령(靑木岺)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이르게 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해(海)에 다다르게 하여, 우리 쪽에 대비하게 하였더니,

서리가 내리고 사람들은 굶주렸다.

 

 


고국양대제 4년{AD387}정해,

 

9월, 좌장군 <해성觧猩>에게 명하여 갈(鞨)군을 이끌고

관미성(関彌城)을 공격하게 하였더니,

백제의 달솔 <진가모真嘉謨>와 은솔 <두지豆知>가 와서 고개에서 막아섰다가

패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았다.

 

이에 그 성을 포위였었으나 빼앗지는 못하였다. 

 

<천을天乙>을 <춘春>태자비로 삼았다. 

 

代의 <탁발규>가 나라이름을 위(魏)라 하였다.


 

 

고국양대제 5년{AD388}무자,

 

4월, 가뭄이 심했다.

 

상이 후와 태자를 데리고 초문사(肖門寺)에서 기우제를 올렸더니

7일 만에 비가 조금 내렸다. 

 

 

5월, 온탕에 갔다.

 

가뭄이 계속되어 백제 정벌을 그만두게 하였다.

 

동궁이 새벽에 포곡(布穀)이 처량하게 우는 소리를 듣더니만

 

“새들도 비가 오길 바라기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8월, 황충이 일었다.


 

 

 

고국양대제 6년{AD389}기축,

 

2월, 후가 <담윤談允>태자를 낳았다.

 

역시 뛰어나게 용감하였고 특출하게 몸집이 듬직한 것이 동궁에게 손색이 없었기에

<담윤談允>이라고 이름 하였다.

 

동궁에게 일러서 굶는 백성을 진휼하게 하였다.

 

이해엔 신라 역시 병이 크게 돌고 흙이 비처럼 내렸고 곡식도 영글지 않았다.

 

백제 또한 곡식이 여물지 않았는데,

우리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소릴 듣고 <진가모>를 시켜 쳐들어왔다가

<용능龍能>에게 패하여 돌아갔다. 

 

 

9월, 아단성(阿旦城)에서 <두지豆知>를 크게 깨뜨렸다. 

 

<주덕周德>을 우보․주병대가로 삼았다.


 

 

고국양대제 7년{AD390}경인,

 

9월, <진가모>가 도압성(都押城)을 습격하여 2백 인을 잡아갔더니,

<진사>가 크게 기뻐하며 <진가모>를 병관좌평으로 삼고는

<진가모>를 위해 구원(狗原)에서 7일간이나 사냥하였다.

 

<진가모眞嘉謨>는 <진사辰斯> 처의 오빠이다.

 

애초에 <진고도眞高道>가 마산(馬山)녀를 처로 삼더니

<진가모>와 <침류>의 첩 <가리佳利>를 낳았다.

 

<침류>가 죽으매 <가리佳利>는 계속하여 <진사>의 처가 되어 정사를 전횡하였다.

 

<진가모>는 용감하였으나 무모한 설욕을 위하여 군사를 부렸더니,

사람들이 그를 무모하다고 하였었다.

 

정말로 <진가모>는 <진사>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천룡天龍>이 아들 <화덕華德>을 낳았더니, 두눌(杜訥)의 리택과 장원을 내려주었다.

 

 

 

고국양대제 8년{AD391}신묘,

 

4월, <해성觧猩>이 갈(鞨)병 2천을 이끌고

백제의 적현(赤峴)과 사도(沙道) 두 성을 빼앗았다.

 

이때, 왜가 가야와 신라에 침입하고 백제의 남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진사辰斯>는 <가리佳利>와 함께 궁실에서 사치하며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특이한 새를 기르고 있었다.

 

<이세異世>가 죽자, 이 소식을 듣고,

나라의 서쪽에 있는 큰 섬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왜가 물러나자 돌아왔다가 또 다시 횡악(橫岳)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비웃을까 걱정하여, 사슴을 잡는다는 핑계를 대었으니,

그의 기세 허약함이 이토록 심했다. 

 

<토산吐山>을 동궁비로 삼았다. 

 

 

5월, 상이 후와 함께 온탕에 가서 술을 마시다 죽었다.

 

이때 동궁은 서쪽에서 군병을 조련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도착하였으나,

상은 이미 말을 할 수 없었기에, 후에게  옥새를 전하게 하고 죽었다.

 

동궁은 울부짖으며 온궁(溫宮)의 빈전(殯殿)에서 즉위하였다.

 

보산(寶算) 18세였다.

 

슬프다, 상은 어질고 사리에 밝았으며, 덕행 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고,

세간의 인심에 정통하였었으나,

어릴 적부터 호색하고 술에 젖어 세상사에 뜻이 없었으니,

정사에 있어서 큰일은 <해극觧克>에게 맡기고, 작은 일은 <연도淵鞱>에게 맡겼으며,

동궁을 시켜서 이들을 감독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술 마시다가 백성을 버렸으니 애석하였다 할 것이다.

 

춘추 49세였고, 고국양(故國壤)에 장사하였다

'남당유고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수대제기  (0) 2016.10.08
영락대제기  (0) 2016.09.10
소수림대제기  (0) 2016.09.09
고국원제기  (0) 2016.09.05
미천대제기  (0) 2016.09.01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