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여 오길, 제의 휘는 <구부丘夫> 또는 <소해小觧>이다.

 

초기에는 <주유朱留>대왕으로 불렸는데,

모친 <해觧>태후가 꿈에 대무제(大武帝)를 보고나서 낳았기 때문이었다.

 

체격은 장대하였고, 웅대한 계략이 있었으며, 정사의 개요를 능히 꿰뚫었다.

 

아울러 궁마와 병법에도 능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어질고 화목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소수림대제 원년{AD371}신미,

 

11월, <해극觧克>을 중외대부・집정으로 삼았으며,

3보들에게 명하여 <해극觧克>을 보좌하게 하였다. 

 

<마발馬發>을 좌보로, <고성高成>을 우보로 삼았다. 

 

태후는 천원공(天原公) <연림淵琳>과 함께 산궁(山宮)으로 들어갔다. 

 

천원공(天原公)의 딸 <천강天罡>을 황후로 삼았다.

 

이때 <解>태후 49세, 소수림제 <구부> 33세, <천강>후 17세, <이련> 30세,

<淵琳> 43세, <平陽> 13세, <붕련> 21세, <서구> 3세, <천을> 1세, <春> 11세

<내물> 22세, <실성> 13세이다.


 

 

 

 

 


소수림대제 2년{AD372}임신,

 

정월, 봉산(烽山)이 무너졌다. 

 

 

2월, 대행을 고국원에 장사하였다.

 

3월, 용산에서 사슴제를 지내고, 고기{제사음식}는 종척 및 공경들에게 나누어 보냈다.

 

4월, <절익折益>을 대복대사(大福大師)로,

<환지桓芝>를 대수대사(大壽大師)로 삼았다.

 

6월, 진(秦)왕 <부견苻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와서,

상이 교외에서 맞이하였으며 객사를 만들어 그를 대접하였다.

 

<순도順道>가 아뢰길

 

“진(秦)은 불도로 인하여 흥하였으며, 연{前燕}은 선도로 인하여 망하였습니다.

폐하 역시 불법을 받들어 믿고 계신즉 천하의 왕을 할 만 하십니다.”라 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신선은 조종들께서 받드셨던 바이며, 불력 또한 넓고 크니 섬길 만 한 것이오.”

라 하고는 <순도順道>를 왕사로 삼았으며,

종실의 자녀들에게는 불경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 시절, <부견苻堅>이 연{前燕}>을 멸하고

<모용준>의 아들 <청하淸河>와 <충이冲二>를 취하여 마냥 아꼈더니만

<진津>의 딸 <초草>씨가 딸을 낳았다.

 

<부견>은 호색하는지라, 우리나라엔 미녀가 많다는 소릴 듣고,

불상과 불경을 보내고는 청혼하였다.

 

상은 이에 <해명觧明>을 빈부(賓部)의 대형으로 삼아

<조배祖背> 및 <환지桓芝>와 함께 진(秦)에 가서 사례하게 하였다.

 

9월, <순도順道>가 상에게 말씀 올리길

 

“신이 폐하의 나라를 돌아보았더니, 무를 숭상하고 귀신 섬기길 좋아하였으며,

지체 낮은 백성들은 우매하였고, 대부들은 황음하였습니다.

대학을 세우시어 문자와 예의를 가르치시길 청합니다.”라 하였다.

 

상이 태후와 이를 상의하였는데, 종척들 대다수는 이를 불편하게 여겼다. 

 

상은 <부견>이 보내온 것을 잠시 시험적으로 따라보게 하였다.

백제의 <근초고>가 동진(東晋)과 통교하였다. 

 

서남 땅에 지진이 있었다.

 

 

 


소수림대제 3년{AD373}계유,

 

5월, 주원공(周原公) <무武>가 나이 60에 죽었다.

 

용기는 있었으나 지모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사람을 썼더니 누차 큰 공을 세우게 되었고

병사와 병졸들의 마음도 얻었었다. 

 

 

6월, 낙랑공(楽浪公) <송松>이 죽어, <인仁>이 대신하게 하였으며,

<마발馬發>을 태보로, <방단方丹>을 좌보로, <용백龍白>을 우보로 삼았다.

 

10월, 새로운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앞서서는 국법이 크게 엄하였기에 죄지은 이들의 다수가 죽음에 처하여졌다.

 

<미천>시절부터는 새로운 법령을 섞어서 시행하여 왔었고,

선제께서는 <창번>의 율령을 채택하셨으나 아직도 죽임을 면할 수는 없었다.

 

상께서는 지극히 어질어서 살리길 좋아하셨기에,

<해명觧明>을 시켜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으로 가서

그들의 형정이 어떠한 지를 보고 와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거나

곤장을 치거나 노비로 삼는 죄 300여 가지의 율령을 다듬게 하였으며,

평인(評人) <사司>를 시켜서는 그 율령을 가르치게 하였고,

또한 함부로 노비를 삼거나 어미를 탐하거나 남의 처를 탐하지 못하게 하였다.

 

곤장 30대를 넘는 죄는 관부가 이를 다스리기 시작하여

함부로 매를 치는 폐단을 없게 하였더니, 백성들은 진정으로 흡족해 하였다. 

 

이해에 백제는 동진(東晋)과 통교하더니 청목령(靑木岺)에 성을 쌓았다.

 

 

 


소수림대제 4년{AD374}갑술,

 

정월, <용백龍白>을 좌보로, <해극>을 우보로 삼았다. 

 

 

2월, 태제(太弟)인 <이련伊連>에게 명하여 나라 안을 순행하여

새로운 법령이 편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점검하게 하였다. 

 

 

6월, 낙랑공(楽浪公) <인仁>이 죽어, <마발馬發>이 대신하게 하고,

<감柑>을 태보로, <민玟>을 좌보로 삼았다. 

 

 

11월, <천강天罡>후가 <담덕談德>태자를 낳았는데, 용모가 특이하게도 듬직하였다.

 

상은 기뻐하며 이름을 <복福>이라 하고 싶었었는데,

 

때마침 <아도阿道>가 진(晉)에서 들어와 아뢰길

 

“천자는 덕을 입에 담고 사익은 입에 담지 않습니다.

덕을 입에 담으면 복은 저절로 내려집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그 말을 반기며 <담덕談德>이라 이름 지었다.

 

대략 열두 달을 채워서 태어났다. 

 

이해 7월에 <부견苻堅>은, 신하인 <왕맹王猛>이 죽었고, 도참을 금하였다.

 

12월, <부견苻堅>이, <모용수>와 함께, <단段>씨에게 독을 쓰고,

같은 수레....이하 해독불능...

 

 

 


소수림대제 5년{AD375}을해,

 

2월, 시부(施部)를 두어 빈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을 치료하여 구휼하는 일을 맡게 하였으며,

적원(籍院)을 두어 선(仙)・군(軍)・향(鄕)의 3적(籍)을 관장하게 하였다.

 

남녀 모두 15세가 되면 적(籍)을 받게 되었다.

 

이전에는 우태(于台)가 관장하였었다.

 

요즈음 들어 상은, 많은 서민들이 호족들 때문에 구휼의 공정성에 차질이 생겼기에,

<이련>을 시켜서 널리 돌아보고 살피게 하고는, 이러한 부와 원을 둔 것이었다.

상원(象院)을 초문사(肖門寺)로 하여 <순도>가 설법하고,

침태(葴胎)는 이불란사(伊弗蘭寺)로 하여 <아도>가 설법하였다.

 

상은 왕사인 <봉태封太>와 <절익折益> 등이 후궁을 음란하게 함에 염증을 느끼어

밖에서 들어온 불법으로 이들 큰 학원들을 주관하게 한 것이고,

청정함을 법으로 삼을 수 있음을 내보여서 선인들을 크게 깨우치려 함이었다.

 

4월, <해현觧玄>이 나이 일흔셋에 죽어, 조황(祖皇)의 예로 장사해주었다.

 

<해현觧玄>은, 미모로 인하여 총애를 받았고, 딸을 바쳐서 후가 되었더니,

지위는 지극히 높아서 새로 더 만들어 댈 수도 없었으나,

일생을 음란하고 추하게 살았다.

 

<해현觧玄>은 <해觧>태후의 아버지다.

 

 

7월,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쳤다.

백제는 태사 <고흥高興>을 사서편찬담당 은솔로 삼아서

<서기書記> 50권과 <장경将鏡> 12권을 편찬하였다.

 

9월, 봉산공(烽山公) <희羲>가 나이 53살에 죽었다.

 

<미천>의 아들이며, 사람됨은 마음이 맑고 욕심이 적었으며,

해인(海人)들이 묘왕(廟王)의 자리에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아직 □함에 게으르지 않았었다. 이하 해독불능...

 

 

 


소수림대제 6년{AD376}병자,

 

11월, 백제의 북변을 쳤다. 

 

12월, 代主 <탁발십익건>이 자신의 서자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부견>이  그 서자를 잡아서 찢어죽이고, 代의 땅을 동・서로 나누었다.

 

서쪽은 흉노 <위진衛辰>에게 속하게 하고, 동쪽은 <고인庫仁>에게 속하게 하였다.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어미인 <하賀>씨와 함께 달아나서

<하눌賀訥>에 의탁하자, <고인庫仁>이 이들을 찾아 모셨으니,

폐하지 않고, 더불어 다스려보려 했었음이었다. 

 

<평양平陽>이 <가련加連>공주를 낳았다.

 

 


소수림대제 7년{AD377}정축,

 

10월, 눈이 내리고 뇌성이 일었으며, 돌림병이 일었다. 

 

백제가 3만병으로 평양(平壤)에 쳐들어왔다.

 

 

11월, 백제를 정벌하였다. 

 

<부견>에게 사자를 보냈다. 

 

<근구수>의 장인 <진고도>가 내신좌평이 되어 정사를 함부로 주무르고 황음하였다. 

 

<천강>후가 아들 <용덕>을 낳았다.

 

 

 

소수림대제 8년{AD378}무인,

 

5월, 가뭄이 심하여 이삭이 여물지 않았다. 

 

 

9월, 거란이 양맥곡의 여덟 부락을 노략하였다. 

 

백성들이 굶주리며 서로를 잡아먹었다. 

 

<부견>이 대완마(大完馬) 두 필을 보내왔기에,

용산(龍山)에서 기르고 씨를 받게 하였다.

 

 


소수림대제 10년{AD380}경진,

 

2월에 백제에 돌림병이 크게 돌더니 죽는 이들이 줄을 이었고,

5월엔 땅이 다섯 길이나 갈라지더니 3일이 지나자 붙었다. 

 

신라가 위두(衛頭)를 시켜 전진(前秦)으로 들어가 딸을 바쳤다. 

 

<담덕>이 새벽에 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어떤 새냐고 물으니,

 

후가 답하길

 

“이 새는 곡종을 널리 펴게 하는 새인데, 일찍 일어나서 우는구나.”라 하였고,

 

<담덕>은

 

“천하에서 가장 좋은 새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상이 이 소릴 듣고는 남다르다고 여겼다.

 

 

 

해동역사와 자치통감에는 380년의 기사에 휴인국에 관한 기록이 있다.

 

休忍國在新羅東 亦三韓之屬

東晉時 服屬於燕 秦滅燕 遂屬秦

洛以龍城叛 徵兵於鮮卑烏桓高句驪百濟新羅休忍諸國

其後於百濟

大淸一統志 

<해동역사 제16권 세기(世紀) 16>

 

휴인국(休忍國)은 신라의 동쪽에 있는데 역시 삼한에 속하였다.

동진 때 연(燕)에 복속하였는데 진(秦)의 부견이 연(燕)을 멸하니 진(秦)에 속하였다.

<부락洛>이 용성(龍城)에서 반란하여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의 여러나라에 징병을 요청하였다.

 

 

分遣使者 徵兵於鮮卑烏桓高句麗百濟新羅休忍諸國

遣兵三萬 助北海公重戍

諸國皆曰 吾天子守不能從行唐公 

<자치통감>

 

전진의 <부견>이 중원을 정리한 후 공을 세운 행당공을 변방으로 보내려 하니

이에 반발한 <부락>이 스스로 진(秦)왕을 칭하고 계(薊)를 지키고자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국에 3만의 병력을 파견토록 요청하였다.



宜聲言受詔 盡幽州之兵 南出常山

陽平公必郊迎 因而執之 進據冀州 總關東之眾以圖西土 天下可指麾而定也

洛從之

夏 四月 洛帥眾七萬發和龍

<자치통감>

 

<부락>이 상산(常山){ 석가장}에서 반란을 도모하여

주변의 나라에 군사를 보내라고 요청하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어떻게 석가장에 있는 <부락>이 군사를 보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용성과 계 그리고 상산이 하북에 있었으며

고구려, 백제와 신라, 그리고 휴인국도 하북과 산동에 있었다. 

 

 

 


소수림대제 13년{AD383}계미,

 

9월, 살별{혜성}이 서북으로 흘렀다. 

 

11월, <사현謝玄>이 비수(肥水)에서 <부견苻堅>을 대파하였다.

 

 


소수림대제 14년{AD384}갑신,

 

4월, <근구수>가 죽자, 그의 아들 <침류>가 섰다.

 

그의 어미 <아이阿爾>가 동진(東晋)에 있던 호승(胡僧)을 맞이하였다.

 

<마라난타{滅難陀}>가 9월에 백제로 왔다. 불법을 불러들인 것이다. 

 

 

11월, 수림(獣林)에서 사냥하다가 갑자기 몸이 심하게 아파서,

온탕에 들어갔다가 붕어하였다. 춘추 46세였다.

 

유조(遺詔)를 따라 소수림에 장사하였다.

 

이 시절에 낙(酪)・주(酒)・전(饘)・병(餠)・육(肉)・채(菜)・과(果)・차(茗) 여덟 집안이

서로 다투어 진(晉)에 자식을 보내서 음식을 삶고 지지는 것을 배워 와서

도장에서 가르쳤다.

 

큰 집안의 요리사들은 심히 거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가 <주朱>씨와 <부芙>씨의 후예들이어서, 공경들과 서로 혼인하였다.

 

이때부터 각자는 자신의 생업을 성으로 하였다.

 

중외선인(中畏仙人)에 예속되어 있어 속으로는 불평하는 마음이 있었고,

대행의 몸이 갑자기 심하게 아프게 된 잘못을 서로가 미루고 책임지지 않았더니,

조의(皂衣)들이 대신하여 죄를 받았고, 멀리 유배된 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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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