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리영(崎離營) 전투

 

 

동천대제14{AD240}경신,

 

 

3월 대방 사람 <궁준弓遵>의 태수를 자칭하며,

변방을 침략하고, 신라 및 왜와 소통하여, 근심거리가 많아졌다.

 

 

대방(今 滄州市)이 신라와 왜까지 무역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당시 대방과 낙랑(今 保定市)이 국제 무역 성시(城市)였음을 알 수 있다.

 

 

<어관於灌>에게 명을 내려,

의 신지(臣智) 등을 이끌고 나가서 이를 쳐 죽이게 하였다.

 

<고구려사초>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仮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三國志 魏志 韓傳>

 

 

경초중(AD 237-239)

명제(明帝)는 비밀리에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한국(韓國)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 인수를 주고 그 아래에는 읍장 인수를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매우 좋아해서

하호까지 가짜 인수, 의책을 가지고 있었고, 1,000여 인이 으로 찾아와 조알하였다.

 

 

부종사 <오림吳林>이 한국(韓國)은 본래 낙랑군이 통치하였으므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해서 낙랑군으로 한다고 하니 통역이 잘못되어

의 신지들이 격분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다가 <궁준弓遵>이 전사하였다.

 

 

2은 마침내 을 멸망시켰다.

 

 

2373월에 는 비밀리에 <유흔>을 대방태수로, <선어사>를 낙랑태수로,

<오림>을 부종사로 임명하여 대방군과 낙랑군의 중국의 유민에게

중국과의 교역을 인정하는 인수를 주어

<공손연>을 견제토록 하였으나 공손연은 이들과 안팕으로 회동하여

더욱 교만해져 연왕을 칭하게 되고,

이듬해에 15만 대군으로 중원을 공격하려고 하니 이에 魏燕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魏燕전쟁의 결과 <공손연>燕國은 멸망하고 ()가 낙랑과 대방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중원이 삼국(,,)으로 패권을 다투던 시기로

<사마의><공손연>의 중원 침입을 막기 위하여 <공손연>을 멸하였으나

낙랑과 대방은 인과 맥인(고구려인), 선비 등 여러 민족이 혼거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2403월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

대방군과 낙랑군에 있는 신지의 인수를 거두고

직접 8국과 와의 무역을 하고자 하였다.

 

의 신지(읍군장)와 고구려 장수 <어관>240년에 대방태수 <궁준>을 죽이니

246<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안평(安平)대전과 비수(沸水)대전

 

 

동천대제16{AD242}임술,

 

 

춘정월, 좌보 <목능穆能>이 병으로 면직되었다.

 

 

5, 상이 친히 5도의 장군인 <방축方丑><회고湏古><주희朱希><>

<목장穆萇> 등을 거느리고 십만 병을 이끌어 서안평을 쳐서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安平大戰)이다.

 

 

서안평(西安平)과 남소(南蘇)는 고구려의 최 서부 전선이다.

 

 

애초에 <사마의>가 요동을 빼앗고

이곳으로 자신의 주력을 옮겨 동쪽을 도모하려 하였었다.

 

이제 그 시설을 파괴해버렸더니, 백성들과 진보가 모두 우리 것이 되었다.

 

 

238년 공손연의 이 멸망하자 고구려 동천대제 <교체>

십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발기>의 난으로 잃었던 요서와 요동을 수복한다.

 

 

이때 좌보 <목능穆能>은 성의 남쪽에서 병을 요양하고 있다가,

대평 <득래得来>와 함께 병을 무릅쓰고 들어와서 간언하기를

 

병력이 다하면{병력을 다 써버리면} 화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힘을 키우면서 때를 기다림만 같지 않습니다!”라 하였고,

 

 

상은 그가 물러나지 않음에 고심하더니만

 

국로께서는 요양이나 하시면서, 손자나 쓰다듬으시지,

어찌 이처럼 정벌에 간여하십니까!”라 말하고,

 

고깃국을 올리게 하여 마시게 하였었다.

 

<목능>은 고깃국은 입에 대지도 않고는

 

소신 역시 황가의 후손으로,

어찌 가만히 앉아서 폐하가 위험에 빠지시는데도 간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출병하실 것 같으면, 청컨대 신을 죽여주시오!”라 하였다.

 

 

이에 상은 화가 나서 <>에게

 

당신 할아버지가 나를 괴롭히고 있단 말이요!”라 하였고,

 

 

<>는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목능>을 억지로 나가게 하였다.

 

이에 <목능>이 병이 극심하여져 죽었으나,

집안사람들은 감히 장사를 지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상이 안평에서 돌아와 군신들에게 큰 잔치를 벌여주고 이르기를

 

이와 같이 좋은 일에, <>씨 노인께서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소.”

라 하였다.

 

 

상은 <>와 함께 친히 <목능>을 국공 태보의 예를 갖추어 장사하고는,

 

당신의 할아비는, 비록 섬길 줄은 몰랐어도, 충성은 충성이었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는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아 황자를 낳게 되니,

<명림明臨>씨와 <>씨의 얼굴에는 꽤나 질투의 빛이 있게 되었다.

 

 

7, 책신(柵新)의 우두머리 <오릉烏凌>이 맥미 8천석을 가져왔기에,

안평(安平) 미녀 둘을 하사하고 작은 조의촌의 평자{評者} 작위를 주었다.

 

선비, 자몽, 색두 등이 사신을 보내, 미녀와 좋은 말을 바치며, 칭신하고 청혼하였다.

 

상이 이들 모두를 예의로써 위무하고

보빙(報聘 신하의 나라를 답방하고 사신 등을 불러들이는) 길을 열어주었다.

 

 

 

동천대제18{AD244}갑자

 

 

7월에 <관구검>현도(玄兎)에 쳐들어와 노략질 하였다.

 

상이 보기 2만 병을 이끌고 나아가서 비류수의 위쪽에서

이를 받아쳐서 크게 이기고 3천여 급을 베었다.

 

이를 비수대전(沸水大戦)이라 한다.

 

242년 동천대제가 요동과 요서를 수복하자

유주자사 관구검이 현도를 공격하고 비류수까지 진격해오니

동천대제는 관구검의 공격을 저지한다.

 

현도는 옛 개마국이 있었던 지금의 역현 북쪽 야삼피 풍경구 일대이다.

 

비류수는 지금의 승덕시를 지나는 강으로

승덕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그 열하이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 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 遇之如民

 

<삼국지 동이전 예전>

 

 

정시 6(AD.244) 낙랑(樂浪)태수 <유무劉茂>와 대방(帶方)태수 <궁준弓遵>

동예(東濊)를 다스렸기에, 고구려(句麗)에 속하게 되자, 군대를 일으켜 를 쳤다.

 

불내후(不耐侯)등이 읍을 들고 항복하였다.

 

정시 8(AD.246) 궁궐(조정)에 이르러 조공을 하였다.

 

조서()는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배하였다.

 

거처(居處)는 잡스럽게 민간(民間)에 있었다.

 

사시(四時)로 군()에 이르러 조알(朝謁)하였다.

 

二郡軍征이 생기면 調(세금)을 징수하였고, 役使(역사)를 공급하였다.

 

그들을 처럼 대우하였다.

 

 

삼국지 위지 韓傳濊傳의 기사를 검토해 보면

 

경초 237년에는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와 대방태수 <유흔劉昕>이였지만

정시 6244년에는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으로 바뀌었다.

 

대방태수 <궁준>의 신지와 고구려 장수 <어관>과 싸워 240년에 이미 전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2468<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다.

 

 

 

 

-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幽州刺史毌丘儉 以高句驪王位宮數為侵叛 督諸軍討之 位宮敗走 儉遂屠丸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之臣得來 數諫位宮 位宮不從 得來歎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자치통감>

 

 

고구려왕 <위궁位宮>이 수차 우리에 반하여 침범을 하자

유주자사 <관구검>이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위궁>이 패하여 도망하였고 <관구검>이 마침내 환도를 도륙하였다.

 

참하고 사로잡은 수가 천여 명에 달하였다.

 

구려의 신하 <득래得來>는 여러 번 <위궁>에게 간하였으나 <위궁>이 따르지 않자

<득래>가 한탄하여 말하길

 

여기 서서 바라보니 장차 이 땅에는 쑥갓만 자라는 땅이 되겠구나.” 라고 했다.

 

마침내 밥을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여러 군사들에게 명하여 그 묘를 훼손하지 말고 그 나무도 베지 말고

그 처자들을 잡으면 모두 놓아 보내라 하였다.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 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삼국사 고구려본기>

 

 

 

처음에 <득래>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왕이 중국에 반하여 침범하려고 할 때

수차례 간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한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갓이 자라는 것을 보겠구나."

하고는 끝내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여러 군사들에게 명하여 그 묘를 훼손하지 말고 그 나무도 베지 말고

그 처자들을 잡으면 모두 놓아 보내라 하였다.

 

 

 

上苦其不退曰 國老只可養疾 撫孫可也 何預征伐如是耶 命進肉羹而飮之

 

<고구려사초>

 

 

상이 그(목능)가 물러나지 않음을 싫어하여 말하길

 

국로께서는 오직 병을 잘 돌보아서 손자를 토닥거리시어야 합니다.

 

어찌 정벌에 대해 이리 참견하시는지요?"라 하였다.

 

 

명하여 고깃국을 내어오게 하고 드시라하였다.

 

 

 

서기 242년 요동을 장악한 사마의(司馬懿)가 고구려와 대치하자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한다.

 

동천대제가 군사 10만으로 요서의 서안평을 점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름하여 안평대전이다.

 

244년에는 <관구검>이 현도를 침공하자 보기 2만명으로 3천여급의 목을 베었다.

 

이름하여 비수대전이다.

 

마침내 서기 2468월 관구검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범해 온다.

 

 

산상대제가 즉위할 때 발기가 고구려의 서쪽 땅을 <공손도>에게 바치지만 않았어도

고구려가 를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고구려 서부지역은 동호와 숙신 등이 고구려를 배반하고

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백제도 공손씨와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창끝을 겨누고 있었으며, 비리가 부여(서부여)를 칭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고구려의 신하가 있었다.

 

대평(大評)의 직위에 있는 <득래得來>가 아니고

일품(一品) ()의 지위인 좌보 <목능>이다.

 

그가 나이가 들어 그해 정월 면직되었다.

 

하지만 동천대제가 서안평을 공격하려하는 것을 알고

대평 <득래>와 함께 입조하여 아직 국력이 충분치 않아 때가 아님을 간하는 것이다.

 

동천대제가 말을 듣지 않자 <목능>은 자신도 황손임을 내세우며

황제가 내어준 고깃국도 물리치고 재삼 출병하지 말라 간언해보지만

동천대제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목능>의 손녀인 <>가 두려움에 떨며

할아버지를 억지로 모시고 나왔으나 <목능>은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만다.

 

그가 바로 주태후(산상대제의 어머니)에게 대들었던 <목등>의 아들이다.

 

그의 가족들은 동천대제의 노여움으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안평대전에서 크게 승전을 하자 동천대제도 노여움을 거두고

그를 충신이라 칭찬하며 국공 태보의 예로 장사지내주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중국의 사서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고구려가 중국에 반하여 침범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정벌한 것을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중국에 반하여 침범했다고 하니 김부식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한심할 뿐이다.

 

 

 

동천대제가 주후(朱后), 엽비(葉妃), 맥비(麥妃) 등을 데리고

서천(西川)으로 가서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둘러보고,

두눌원(杜訥原, 옛 황룔국의 도읍지, 西都인근 북경지역)에서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관적(毌賊, 관구검)이 우회하여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근于根>이 일단 막았지만 수에서 밀릴 뿐만이 아니라 적이 매우 강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을지라도 고구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동천대제는 급히 철기 5천을 이끌고 양구(梁口)의 서쪽에서 적을 대파한다.

 

하지만 <관구검>의 대군이 다시 공격해오자 <우근>은 전사하게 되고,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사용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이어 남쪽 방어선마저 뚫리게 되자

()와 비()들을 데리고 움직이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경기병 천여 명만 이끌고 동천대제는 압록원(鴨淥原)으로 후퇴하지만

<주전朱全>의 군대마저 무너지자 동쪽으로 다시 물러나 옹구(壅口)로 피신하게 된다.

 

압록원은 지금의 난하 유역이다.

 

 

마침내 난이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고구려의 도성 환도성(丸都城)이 함락 당한다.

 

환도성은 지금의 조양(朝陽)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이다.

 

 

그제서야 동천대제는 <목능>의 말을 듣지 않고

성급히 위()의 서안평을 공격하였던 것을 후회하지만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공손씨의 연()이나 손권의 오()를 이용하여

충분히 세력균형을 이룰 수 있던 기회를 다 놓쳐버렸던 것이다.

 

할 수없이 맥비의 친정인 죽령(竹嶺)으로 피신하였다.

 

죽령(竹嶺)은 지금의 경북 영주시 소백산 공원입구이다.

 

 

그를 지켜야할 군사들은 거의 다 전사하였다. 비참한 패전이었다.

 

 

동부우태 <밀우密友>가 남은 군사를 모아 싸웠고

동천대제 또한 산골짜기로 몰래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싸우니

모두들 죽음을 각오하고 힘을 합쳤다.

 

하지만 병사라 해봐야 농민이고 산에서 사냥이나 약초를 캐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위() <왕기王頎>의 정예군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급한 상황에 <유유紐由>가 거짓항복으로 적장 <왕기>를 죽이고

가까스로 전세를 뒤집었으며 <관구검>의 난은 진정되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동천대제는 그가 무시하였던 <목능>의 충언을 생각하고

<목능>을 태보(太輔) 안국공(安國公)으로 추증하였으며,

 

<자치통감><삼국사기>에 굶어 죽었다고 기록된 <득래得來>는 대주부(大主簿),

<목능>의 아들 <목장>은 중외대부(中畏大夫)가 되었다.

 

<관구검>의 침공은 동천대제에게 큰 충격으로 남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도를 요동에서 천리나 떨어진 평양(요양)으로 천도하게 되고

이후 동천대제는 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정사(政事)에 염증을 내고 사냥과 여색에 빠지게 되었고,

끝내 독살의 의심을 받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고구려는 호전적 국가였다. 그러나 그 패기가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동천대제와 함께 죽령으로 피신한 고구려인들은

그대로 죽령에 남아 신라에 귀속된다.

 

 

 

二十一年丁卯, 春二月, 移都<平壤>

 

 

동천대제21{AD247}정묘,

 

 

2,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관구검의 침략으로 환도성이 불타자 동천대제는 평양(今 遙陽)으로 遷都한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고국원제 12(342)에 다시 조양으로 천도하여

요동과 요서를 수복코자 하였으나

高燕전쟁에서 패전하여 미천대제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고국원제는 다시 요양으로 천도하여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갑자가 지나 광개토태왕 때 요동과 요서를 수복하고

장수대제는 427년에 지금의 하북성 노룡에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궁궐을 짓고 천도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