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晋書)는 당 태종 <이세민>의 명에 의하여 <방현령> 등이
고구려 멸망 전인 646년-648년에 편찬한 24史중 하나이다.
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1. 평주(平州) < 1國 4郡 26縣>
생각컨대 우공(禹貢)에서 기록하기를 평주는 기주(冀州)의 영역인데,
주(周)에서 유주(幽州)의 경계로 했으며,
한(漢)때에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한(後漢)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漢나라의 우북평군(今 보정시 순평현 인근)이 평주(平州)인데
평주(平州)는 <공손도>에 의하여 얻어진 지명이라는 것이다.
이에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이 요동을 병합하고
그곳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공손연>이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공손도>에게 내어준 요동을 병합하였다는 것이다.
위(魏)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고,
(이를) 나누어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
5개의 군을 평주(平州)로 하였고 후에 유주(幽州)와 합하였다.
마침내 공손연(文懿)을 멸한 후에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가 양평(襄平)에 거하였다.
함녕(咸寧) 2년(276년) 10월에 나누어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5으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縣은 26이고 가구수는 18,100이다.
북경 동남 지역의 26개 縣, 고작 18.100가구를 가진 평주(平州)를
고무줄 늘이듯이 늘여 한반도 북부까지 그려놓아도
우리의 식민 강단사학자들은 아직도 철통같이 믿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사서를 보면 꿀먹은 벙어리가 될 뿐이다.
昌黎郡, 漢屬遼東屬國都尉, 魏置郡. 統縣二, 戶九百. 昌黎. 賔徒.
1.1. 창려군(昌黎郡)
한(漢)때에는 요동속국(遼東屬國) 도위(都尉)에 속했고,
위(魏, 曹魏)에서는 군을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900이다.
1) 창려현(昌黎縣)
2) 빈도현(賔徒縣)
창려현(昌黎縣)은 金 세종 29년(1189년)에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동부산촌 인근에서
진황도시 창려현으로 이치 되었다.
遼東國, 秦立為郡. 漢光武以遼東等屬青州, 後還幽州. 統縣八, 戶五千四百.
襄平, 東夷校尉所居.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1.2. 요동국(遼東國)
진(秦)에서 군(郡)으로 세웠다.
한(漢) 광무(光武)는 요동(遼東) 등을 청주(青州)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되돌려 유주(幽州)로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8개이고 가구수는 5,400이다.
1) 양평현(襄平縣) 동이교위(東夷校尉)가 있는 곳이다.
2) 문현(汶縣)
3) 거취현(居就縣)
4) 낙취현(樂就縣)
5) 안시현(安市縣)
6) 서안평현(西安平縣)
7) 신창현(新昌縣)
8) 역성현(力城縣)
요동국은 BC 281년 연나라 <진개>의 동정(東征) 후 번조선에 설치한 요동군으로
그 치소는 양평현(襄平縣)(今 보정시 수성진)이다.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1.3. 낙랑군(樂浪郡)
한(漢)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朝鮮縣)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한 땅이다.
2) 둔유현(屯有縣)
3) 혼미현(渾彌縣)
4) 수성현(遂城縣)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5) 누방현(鏤方縣)
6) 사망현(駟望縣)
낙랑군은 BC 108년 朝漢전쟁 후 위만이 탈취한 번조선에 漢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그 치소는 조선현(朝鮮縣)으로 지금의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이다.
玄菟郡, 漢置. 統縣三, 戶三千二百. 髙句麗. 望平. 髙顯.
1.4. 현도군(玄菟郡)
한(漢)에서 설치하였다. 현은 3개이다. 가구수는 3200이다.
1) 고구려현(髙句麗縣)
2) 망평현(望平縣)
3) 고현현(髙顯縣)
현도군은 BC 108년 朝漢전쟁 후 위만이 탈취한 번조선에 漢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그 치소는 고구려현(髙句麗縣)으로 지금의 보정시 정흥현 상락부촌 인근이다
帯方郡, 公孫度置, 統縣七, 戶四千九百. 帯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㝠.
1.5. 대방군(帯方郡)
공손도(公孫度)가 설치하였다. 현은 7이며 가구수는 190이다.
1) 대방현(帯方縣)
2) 열구현(列口縣)
3) 남신현(南新縣)
4) 장잠현(長岑縣)
5) 제해현(提奚縣)
6) 함자현(含資縣)
7) 해명현(海㝠縣)
대방군은 <공손도>가 처음 설치한 군으로 <공손도>의 발흥지로
지금의 당하(唐河)하류 인근이다.
7개의 縣에 190戶이니 東漢 이후 새로 생긴 황하 하류의 삼각주임을 알 수 있다.
平州初置, 以慕容廆為刺史, 遂屬永嘉之亂, 廆為衆所推.
及其孫儁移都於薊. 其後慕容垂子寳又遷于和龍, 自幽州至於廬溥鎮以南地入於魏.
慕容熙以幽州刺史鎮令支, 青州刺史鎮新城, 并州刺史鎭凡城, 營州刺史鎮宿軍,
冀州刺史鎮肥如.
髙雲以幽 冀 二州牧鎮肥如, 并州刺史鎮白狼.
後為馮䟦所簒, 䟦僭號於和龍, 是為後燕, 卒滅於魏.
평주(平州)는 처음 설치하여 <모용외慕容廆(269-333)>를 자사(刺史)로 하였다.
영가(永嘉)의 난에 <모용외>는 무리에 의하여 추앙되었다.
마침내 그 손자 <모용준慕容儁>에 이르러 계(薊)로 도읍을 옮겼다.
<모용외>는 평주 자사가 되었는데 그 치소는 창려(今 보정시 서수구 동부산촌 인근)이다.
계(薊)는 유주(幽州)의 치소로 하북성 보정시 당현 인근이다.
그 후에 <모용수慕容垂>의 아들 <모용보慕容寳>는
또한 화룡(和龍)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유주(幽州)로부터 여부진(廬溥鎮) 남쪽의 땅이 위(魏)로 편입됐다.
<모용희慕容熙(385-407)>는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鎮)을 영지(令支)에,
청주자사진(青州刺史鎮)을 신성(新城)에,
병주자사진(并州刺史鎭)을 범성(凡城)에,
영주자사진(營州刺史鎮)을 숙군(宿軍)에,
기주자사진(冀州刺史鎮)을 비여(肥如)로 하였다.
<모용수慕容垂(326-396)>가 384년에 하북성 정주(定州)에서 後燕을 세운다.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慕容寶(355-398)>는 화룡(和龍)(今 覇州)으로 천도하고
<모용보>의 서제인 <모용희慕容熙(385-407)>가 주변을 정벌하여
유주(幽州), 청주(青州), 병주(并州), 영주(營州), 기주(冀州)의 5개주를 설치하였는데
405년경 後燕은 하북성 북부(유주), 산서성 중부(병주), 산동성 북부(청주),
하북성 중부(영주, 기주)까지 최대의 강역을 차지하였으나
407년 광개토태왕의 공격으로 후연은 멸망하고
<고운高雲>이 형수(衡水)市에 北燕을 세워 명맥을 유지하다
436년에 북위에게 멸망당한다.
이때 고구려는 하북성 북부를 차지하여 <발기>의 난으로 <공손도>에게 내어 주었던
요동과 요서를 200년 만에 되찾게 된다.
<고운髙雲>은 유주목진(幽州牧鎮)과 기주목진(冀州牧鎮)을 비여(肥如)에,
병주자사진(并州刺史鎮)을 백랑(白狼)으로 하였고
후에 <풍발馮䟦>이 빼앗고 <풍발>은 화룡(和龍)에서 참람되이 불렸는데
이것이 후연(後燕)이며 위(魏)에 멸망당하였다.
병주(并州)는 산서성 항산 인근인데 그 치소를 백랑(白狼)에 두었다고 하였으며
백랑산(白狼山)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의 굴륭산이다.
幽州. 按, 禹貢冀州之域, 舜置十二牧, 則其一也.
周禮..‘東北曰幽州.’ 春秋元命包云..‘箕星散為幽州, 分為燕國.’ 言北方太隂,
故以幽㝠為號.
武王定殷, 封召公於燕, 其後與六國俱稱王.
及秦滅燕, 以為 漁陽 上谷 右北平 遼西 遼東 五郡.
漢 髙帝 分 上谷 置 涿郡.
武帝置十三州, 幽州依舊名不改.
其後開東邉, 置 玄莵 樂浪 等郡, 亦皆屬焉.
元鳯元年, 改燕曰廣陽郡. 幽州所部凡九郡, 至晉不改.
幽州統郡國七, 縣三十四, 戶五萬九千二百.
2. 유주(幽州) <2國 5郡 34縣>
생각컨대 우공(禹貢)에서 기록하기를 기주(冀州)의 영역이었고
순(舜)은 12목(牧)을 설치하였는데 즉 그 중 하나라고 하였다.
주례(周禮)에서 기록하기를 동북쪽은 유주(幽州)라고 하였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에서 기록하기를 ‘箕星散為幽州, 分為燕國.
(기성의 자리가 흐트러져 유주가 되었는데 나누어 연국으로 하였다)’이라 하였다.
북쪽을 태음(太隂)이라고 하는바 (유주를) 유명(幽㝠)이라고 부른다.
무왕(武王)이 은국(殷)을 평정하고 소공(召公)을 연국(燕)에 봉하였는데
그 후에 여섯 나라는 모두 왕이라 칭하였다.
마침내 진(秦)은 연(燕)을 멸망시키고
어양군 상곡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등의 5개 군으로 하였다.
한(漢)의 고제(髙帝)는 상곡을 나누어 탁군을 설치하였다.
무제(武帝)는 13주를 설치하였는데 유주(幽州)는 옛 이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후에 동쪽 변방을 열어 현도군과 낙랑군을 설치하고 역시 모두 속하였다.
현도군과 낙랑군은 유주(幽州)의 동쪽에 있다는 것이다.
원봉(元鳯) 원년(BC 80)에 연국(燕國)을 고쳐 광양군(廣陽郡)으로 하였다.
유주가 거느리는 것은 대개 9개의 군인데 진(晉)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아니하였다.
평주(平州)의 현토군과 낙랑군을 포함하여 9개의 郡이라는 것이다.
유주(幽州)는 다스리는 군국(郡國)이 7이며 현은 34개이고 가구수는 59,200이다.
范陽國, 漢置涿郡. 魏文更名范陽郡. 武帝置國, 封宣帝弟子綏為王. 統縣八, 戶一萬一千.
涿.良鄉. 方城. 長鄉. 遒. 故安. 范陽. 容城, 侯相.
2.1. 범양국(范陽國)
한(漢)에서 탁군(涿郡)을 설치하였다.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 AD220 ~ AD226)는 범양군(范陽郡)으로 고쳤다.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AD265 ~ AD290)는 속국(屬國)을 설치하고,
선제(宣帝)의 조카 수(綏)를 왕으로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8개이고 가구수는 11,000이다.
1) 탁현(涿縣)
2) 양향현(良鄉縣)
3) 방성현(方城縣)
4) 장향현(長鄉縣)
5) 주현(遒縣)
6) 고안현(故安縣)
7) 범양현(范陽縣)
8) 용성현(容城縣) 후상(侯相)이다.
漢나라에서 탁군으로 개명하고 曺魏시에 범양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범양군을 원말명초의 학자 <왕위王褘(1322-1373)>는
涿州, 雄州, 易州, 覇州 4州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燕國, 漢置, 孝昭改為廣陽郡. 統縣十, 戶二萬九千.
薊. 安次, 侯相. 昌平. 軍都, 有關. 廣陽. 潞. 安國, 國相, 蜀主劉禪封此縣公.
泉州, 侯相. 雍奴. 狐奴.
2.2. 연국(燕國)
한(漢)에서 설치하였다.
효소(孝昭 재위 BC86-BC75)가 광양군(廣陽郡)으로 고쳤다.
10개의 현을 다스리고 가구수는 29,000이다.
1) 계현(薊縣)
2) 안차현(安次縣) 후상(侯相)이다.
3) 창평현(昌平縣)
4) 군도현(軍都縣) 관(關)이 있다.
5) 광양현(廣陽縣)
6) 노현(潞縣)
7) 안국(安國) 국상(國相)이 있다. 촉주(蜀主) <유선劉禪>이 이곳에 공(公)을 봉하였다.
8) 천주현(泉州縣) 후상(侯相)이다.
9) 옹노현(雍奴縣)
10) 호노현(狐奴縣)
한 고조 유방이 설치한 연국(燕國)이 광양군(廣陽郡)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燕國을 <왕위>는 涿州, 薊州 2州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北平郡, 秦置. 統縣四戶五千. 徐無. 土垠. 俊靡. 無終.
2.3. 북평군(北平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4개이고 가구수는 5,000이다.
1) 서무현(徐無縣)
2) 토은현(土垠縣)
3) 준미현(俊靡縣)
4) 무종현(無終縣)
북평군을 <왕위>는 經州, 薊州, 檀州, 營州 4州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上谷郡, 秦置. 郡在谷之上頭, 故因名焉. 統縣二, 戶四千七十. 沮陽. 居庸.
2.4. 상곡군(上谷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군(郡)이 곡(谷)의 상두(上頭)에 있기에 상곡이라 이름한 것이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며 가구수는 1070이다.
1) 저양현(沮陽縣)
2) 거용현(居庸縣)
상곡군을 <왕위>는 규주(媯州)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廣寗郡, 故屬上谷, 太康中置郡, 都尉居. 統縣三, 戶三千九百三十. 下洛. 潘. 涿鹿
2.5. 광녕군(廣寗郡)
옛날에 상곡에 속했다.
태강(太康, 280년-289년) 연간에 군을 설치하였으며 도위(都尉)가 거한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3930이다.
1) 하락현(下洛縣)
2) 반현(潘縣)
3) 탁록현(涿鹿縣)
광녕군을 <왕위>는 규주(媯州)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代郡, 秦置統縣三戶三千四百. 代. 廣昌. 平舒. 富城.
2.6. 대군(代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3400이다.
1) 대현(代縣)
2) 광창현(廣昌縣)
3) 평서현(平舒縣)
4) 부성현(富城縣)
대군을 <왕위>는 雲中路의 奉聖州, 蔚州, 儒州 3州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遼西郡, 秦置統縣三戶二千八百. 陽樂. 肥如. 海陽.
2.7. 요서군(遼西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2800이다.
1) 양락현(陽樂縣)
2) 비여현(肥如縣)
3) 해양현(海陽縣)
요서군을 <왕위>는 平州, 景州 2州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惠帝之後, 幽州沒於石勒. 及穆帝 永和五年, 慕容儁僭號於薊, 是為前燕.
七年,儁移都於鄴. 儁死, 子暐為苻堅所滅. 堅敗, 地復入慕容垂, 是為後燕.
垂死, 寳遷於和龍.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 290년-306년) 이후에
유주(幽州)는 <석륵石勒>에게 함몰되었다.
이내 목제(穆帝) 영화(永和, 345년-356년) 5년에
<모용준慕容儁>은 계(薊)에서 참람되게 칭하였는데 이것이 전연(前燕)이다.
영화 7년(351년)에 <모용준>은 업성(鄴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업성(鄴城)은 지금의 한단(邯鄲)이다.
<모용준>이 죽자 아들 <모용위>는 부견(苻堅)에게 멸망당하였다.
부견이 동진(東晉)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땅은 다시 <모용수慕容垂>에게 들어갔고
이것이 후연(後燕)이다.
<모용수>가 죽자 <모용보>는 화룡(和龍)으로 옮겼다.
서천대제5년{AD274}갑오,
추8월, <{서}晉>이 유주(幽州)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엔 <범양>・<상곡>・<북평>과 <요서>를 말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도>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晉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설(虗設)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
<고구려사초>
고구려사초는 평주(平州)는 晋의 강역이 아니라고 한다.
범양, 상곡, 북평. 요서 및 창려, 요동, 대방, 낙랑, 현도는
고구려와 동호(오환), 선비, 晉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 중국인이 기록한 중국의 정사(正史)인 진서(晉書)에서는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 5군은 평주(平州)라고 하였는데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이라 하여 평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낙랑은 역사서의 기록과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그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평주의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은 고구려의 서부지역이다.
평주는 하북지역으로 고구려와 晉의 경계지이고
범양, 상곡, 북평은 동호(오환), 선비와 晉의 경계지였다.
고구려는 언제나 동호(오환)과 선비를 고구려의 번국(藩國)으로 여기고 있었다.
甲午 晉 世祖 武皇帝 泰始 10년(274년)
吳歸命侯 鳳凰 3년(274년)
幽州를 분할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幽州는 7개의 郡과 國을 관할했다.
范陽郡 지금의 涿州, 雄州, 易州, 覇州 4州의 땅이다.
燕國 지금의 涿州, 薊州 2州의 땅이다.
北平郡 지금의 經州, 薊州, 檀州, 營州 4州의 땅이다.
上谷郡 지금의 媯州의 땅이다.
廣寧郡 지금의 媯州의 땅이다.
代郡 지금의 雲中路의 奉聖州, 蔚州, 儒州 3州의 땅이다.
遼西郡 지금의 平州, 景州 2州의 땅이다.
平州는 5개의 郡과 國을 관할했다.
遼東國. 昌黎郡. 樂浪郡. 玄兎郡. 帶方郡이다.
宋나라 때는 營州에 소속되었는데 安東都護府의 땅이다.
<四庫全書 史部 編年類 大事記續編 券24>
大事記續編은 元末 明初의 학자 <왕위王褘(1322-1373)>가 편찬했으며 총 77권이다.
漢武帝 征和 4년(BC89년)으로부터 시작해서
宋 德祐 2년(1276년)까지 1,365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解題를 통해 역사 사실에 대한 異同을 고증하여 자못 학술적 가치가 높은 저서이다.
박창화 필사본의 내용과 사고전서 大事記續編의 내용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도 남당유고를 위작이라 할 수 있을까?
幽州를 분할하여 설치한 平州의 遼東國. 昌黎郡. 樂浪郡. 玄兎郡. 帶方郡이
宋나라 때의 營州 安東都護府에 소속한 땅이라고 밝히고 있다.
宋나라 때의 안동도호부는 어디 인가?
송나라 때 <락사樂史>가 지은 태평환우기에
營州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營州는 殷나라 때 고죽국이었고,
燕나라 때는 요서. 우북평군 지역이었으며
秦. 漢시대는 요서군 지역이었고,
16국 시대는 선비 모용황의 도읍지였으며,
隋.唐시대에는 營州에서 柳城郡으로 다시 柳城郡에서 營州로 변천되었다."
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영주(營州)는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동부산촌에 있었다.
이 일대가 隋.唐.宋 시대에는 營州로, 秦.漢 시대에는 요서군으로
殷시대에는 고죽국으로 불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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