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개토태왕 비의 건립과 이동

 

 

영락대제 永樂 24(414)

 

6, 국양릉(國壤陵)을 찾아뵙고 비류(沸流)의 온탕궁에서 머물다가

병이 들자 두 후와 동궁 및 두 동궁 비를 불러서 전위하였다.

 

동궁은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어 북도(北都)의 주유궁(朱留宮)에서 즉위하였다.

 

7, 상이 주유궁(朱留宮)에서 춘추 39세에 죽자,

<평양平陽(359-414)>후도 따라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비류(沸流)는 북부여의 제후국 <송양>이 다스리던 비류국으로 열하(熱河)로 불리었던

지금의 승덕시 인근으로, 광명대제가 천도한 고구려의 북도인 국내성이 있던 곳이고

황산(黃山)은 지금의 보정(保定)시 역현(易縣)에 있는 낭아산(갈석산) 줄기의 산이다.

 

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今 遼陽)이지만

광개토태왕은 북도(北都)인 국내성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永樂縣

後魏置故城在今河北省满城县西北鱼条山下

 

광개토태왕은 하북의 요서와 요동을 수복하고

지금의 보정시 만성현(滿城縣)의 어조산(鱼条山) 아래에 영락현(永樂縣)을 설치한다.

 

 

 

장수대제 建興 원년(414)

 

9, 대행(大行)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360-433)>태자가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영락대제기>

 

 

영락대제기에서 광개토태왕은 4147월 주유궁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광개토태왕은 영락 22년 임자(壬子)(412) 10월 단왕궁(丹王宮)에서 붕어하셨다.

 

사태자(嗣太子) <(396-414)>이 제위에 올랐으나 광개토태왕의 어머니

<천강天罡(355-446)>의 동생인 <천익天益>이 정변을 일으켜 <>을 제거하고

413년 정월에 익원왕(益原王)으로 제위에 오른다.

 

4139월에 장수대제 거련이 <천익>을 제거한다.

 

그리고 1년 후인 4149월에

장수대제는 영락현의 황산에 광개토태왕의 릉을 만들고

<>태자로 하여금 비문을 새기고 비석을 세우도록 한다.

 

이 비석은 높이 6.34m37톤의 무게로

중원과 고구려의 경계인 갈석산(낭아산)의 줄기에 우뚝 세워져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의 상징으로

지금의 길림성 집안현으로 옮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 광개토태왕 비문 해석

 

 

고구려의 건국역사

 

[1]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聿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1]

 

, 옛날 시조 추모 왕께서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도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신이시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나면서부터 거룩한 을 갖추셨도다.

 

△△△△△△(), 수레를 타고 순행(巡幸)하며 남쪽으로 내려가시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게 되었다.

 

왕께서 (대수)에 이르셔서 곧

나는 하늘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을 띄워라고 말씀하시었다.

 

그 말씀에 따라 바로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들이 떠오르자, 건너셨도다.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도다.

 

세속의 지위를 즐겨하지 않으시자, 하늘이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하셨도다.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가시며,

세자 유류왕(儒留王)에게 도로써 잘 다스리라고 유언하셨도다.

 

 

광개토태왕의 생애

 

大朱留王紹承基業, 還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号爲永樂.

太王 恩澤于皇天, 威武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대주류왕(大朱留王)께서 (나라의) 기틀을 이어 받으신 뒤,

십칠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도다.

 

열 여덟 살(391)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했다.

 

태왕(太王)의 은택은 하늘에 두루 미쳤으며, 위무(威武)는 온 세상에 떨쳤도다.

 

(태왕이) △△을 쓸어 없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케 하시니

나라가 부강하고 민호(民戶)가 불어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러나)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서른아홉 살(412)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그 뒤) 갑인년(414) 929일 을유(乙酉)산릉(山陵)으로 옮기었도다.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새겨 후세에 알리고자 하니,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현재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학계에서 광개토태왕의 릉으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 태왕릉은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닌 것이.

 

 

 

업적1- 영락 5(395) 패려(稗麗)정벌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稗麗不△△△, 躬率往討.

過富山負, 至鹽水丘, 破其三部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力城北豊. 五 備海, 遊觀上境, 田獵而還.

 

영락 5(395), 을미년에 왕께서 패려(稗麗)△△△하지 않기 때문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을 지나 염수(鹽水) 언덕에 이르러

세 부6,7백 영()을 처부수고 소양떼 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뒤 어가(御駕)를 돌렸다.

 

이에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쪽으로 와

역성(力城)북풍(北豊)으로 왔다.

 

왕은 사냥을 준비하도록 하고 국경을 시찰한 뒤 사냥(田獵)을 하고 돌아오셨다.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裨麗不□□□ 躬率往討 叵富山 負山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羊 不可稱數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중>

 

五年 乙未

二月太后生子談聰于溫湯

上以卑離漸違王化 親征叵山冨山負山

至鹽水 破其部落七百余所獲牛馬羊豕万數

二后亦騎馬而從上

上以吐后有身 止之而不聽 皈生女 名以三山

<영락대제기>

 

5(AD 395)을미

 

2, 태후가 온탕에서 아들 담총을 낳았다.

 

상이 비리(卑離)가 점차 왕화(王化)를 어기어,

직접 파산(叵山), 부산(冨山), 부산(負山)을 정벌하고,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부락 7백여 소를 깨뜨리고

많은 수의 소와 말, 양과 돼지를 노획하였다.

 

두 명의 후도 또한 말을 타고 상을 따랐다.

 

상이 토후(吐后)가 임신하였기에 이를 막았으나 듣지 않았으며,

돌아와 딸을 낳자 <삼산三山>으로 이름 지었다.

 

 

탁본에 따라 叵富山는 학자에 따라 라고 주장하지만,

영락대제기를 따르면 가 맞으니, 탁본 중에서 [사코우 본]이 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를 동사로 해석하면 안 되고,

지명인 파산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영락대제는 파산(叵山), 부산(冨山), 부산(負山), 이 세 산을 정벌한 것이며,

그래서 이때 낳은 토후의 딸도 <삼산(三山)>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영락대제기와 비문을 비교하면,

이때 토벌한 패려(裨麗)가 비리(卑離)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비문에 등장하는 패려(裨麗)는 비리(卑離)와 동일한 말이다.

 

로 읽혀야하며 고구려고구리가 맞는 발음이고,

비려비리가 맞는 발음이다.

 

부여가 부여고지{今 滄州市 인근}에서 세력에 밀려 북으로 옮겨갈 때,

바로 이 비리국 땅으로 옮겨가 임시 나라를 세운 것이며,

북부여의 도성(都城)이 있던 곳으로 북부여 멸망 후 서부여로 불리던 곳이다.

 

서기 346년 모용황이 멸망시킨 부여가 바로 이 서부여 비리(卑離)이다.

 

파산(叵山), 부산(冨山), 부산(負山)을 정벌하고 내몽고자치주 오란찰포 북쪽

찰합이우익후기 까지 정벌하였다는 것이다.

 

찰합이우익후기에는 지금도 염호(鹽湖)라고 부르고 있는 매우 큰 호수가 있다.

 

비문의 비리 정복기사는

고구려의 속국인 비리(卑離)가 말을 잘 안 들어 혼을 내주는 이야기인데,

이 시기는 前秦이라는 강자도 사라지고

옆 동네 탁발씨도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인지라,

비리(卑離)도 독립을 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리(卑離)의 치소는 지금의 승덕시 풍년만주족자치현 인근이다.

 

그리고 풍년만주족 자치현의 음식은 우리의 음식과 닮았고

시장에서는 한국어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다고 하 

아이를 어깨에 올려 나비춤을 추는 호접무와 농악이 아직도 유행하고 있다.

      

 

 

업적2-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기사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未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 破百殘△△, 羅以爲臣民.

 

백잔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아직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그리고 왜()는 신묘년(391)부터 건너와

(왕께서) 백잔. 가라를 격파하고 신라는 신민으로 삼았다.

 

 

신묘(辛卯)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오니 광개토태왕이 백제와 가라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업적3- 영락 6년의 백제 정벌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氐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摸耶羅城 莫△△而耶羅城 瑑城 △△△△城 豆奴城 沸△△

  

[2]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영락) 6(396) 병신(丙申)

 

왕께서 친히 군을 거느리고 잔국을 토벌하시었는데 군△△

먼저 일팔성구모로성각모로성간저리성․△△각미성모로성미사성,고사조성

아단성고리성․△리성잡진성오리성구모성고모야라성․△△성 등을

쳐서 빼앗으셨다.

 

그리고 이어서 야라성전성․△△․△△두노성△△

 

[2] 리성미추성야리성대산한성소가성돈발성․△△△루매성산나성

나단성세성모루성우루성소회성연루성석지리성암문임성․△△․△△

리성취추성목발성고모루성윤노성관노성삼양성․△△․△△노성구천성․△△△△ 등을 치셨다.

 

그 나라 성.

 

 

 

업적3

 

殘不服義敢出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便城 而殘主困逼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疋跪王 自誓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백잔이 의()에 굴복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므로 왕께서 크게 성내시어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특공대를 보내어 성을 다그치니,

---------  백제 임금은 괴롭고 지쳐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가는베 천 필을 바치며 왕께 무릎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는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왕이 지난날의 어리석은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 뒤의 순종하는 정성을 받아 들이셨다.

 

이에 58성과 마을 700(얻어)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열 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돌려 도성으로 돌아오셨다.

 

 

 

업적4- 영락 8년 토곡 정벌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帛愼土谷

因便抄得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服1

 

(영락) 8(398) 무술

 

교지를 내려 군대 일부를 파견하여 백신의 토곡(土谷)을 순시케 하였는데

그 편에 바로 막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00여명을 잡아오니,

이 때 부터 조공을 바치고 섬겼다.

 

동만주 숙신의 토곡을 순시하고 정벌하였다는 것이다.

 

 

 

업적5- 영락 9,10년 신라를 침입한 왜구(倭寇) 정벌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遣使還 告以△△

 

(영락) 9(399) 기해(己亥)

 

백잔이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함으로 왕이 하평양으로 순행하였다.

 

신라가 사신 백왕을 파견하여 말하기를

"인이 우리 국경 내에 가득 차서 성을 무너뜨리고, 못을 부수며,

백성들을 노객으로 삼으려 하고 있사오니 삼가 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

 

태왕은 그 충성을 가엾이 여겨 자비로운 마음으로 은헤를 베풀어 사신을 보내

△△를 알려주고 돌아갔다.

 

 

영락 9년과 10년 조에 성안에 인이 가득 찼다는 말은

아신왕이 군사를 징발하자 전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신라로 피난하여 온 피난민들이

성안에 가득 찼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399년 기해년 기사에서 왕이 하평양으로 순행하였다 하였다.

 

고구려는 발기의 난으로 요동을 공손도에게 내어주고

산상대제 13(209)에 조양으로 천도한다.

 

246년 관구검의 침입으로 도성이 불타자 동천대제 21(247)

지금의 요양으로 천도 한다.

 

발기의 난으로 요동(지금의 조백하 이동)을 공손도에게 내어주고

마침내 관구검의 침입으로 요동을 상실하고 요동회복을 위하여 절치부심한다.

 

고국원제 12(342)에 서진코자 조양으로 천도하여 고연전쟁이 발발한다.

 

고구려는 모용황에게 패하여 조양의 환도성이 불타자

343년에 다시 요양으로 천도한다.

 

영락대제 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343년에 천도한 요양이기 때문에

비문의 399년 기사는 지금 북한에 있는 평양을 하평양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410년 영락대제가 하북의 북부를 평정하니

잃었던 요서와 요동을 200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요하는 물론 지금의 조백신하이다.

 

 

 

 

영락 10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倭寇大潰 城△△△△△△△△△△△△△△△△△△△△△

安羅人戍兵 △△△△△△△△△△△△△

 

  [3]

△△△△△△△△△△△△△△△△△△△△△△△△△△△△△△△△△△△△△△△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新羅寐錦△△僕勾△△△△朝貢

 

 

(영락) 10(400) 경자(庚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니 왜가 그 안에 있었는데

관군이 곧 이르자 왜적이 물러났다.

 

△△△△△△△△ 뒤에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쳐 빼앗아 탈환하였다.

 

안라인(신라인) 수병(戍兵)이 신라성과 성에서 왜국을 궤멸시켰다. .......

 

[3] ... 옛날에는 신라 임금이 스스로 와서 △△한 적은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게 △△신라 임금이 .... 조공하였다.

 

 

 

업적6- 영락 14년 대방침입 왜구 격멸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영락)14, ()가 법도를 지키지 않아 대방경계를 침입하였다.  

△△△△석성을하였다.

연선(連船)하고, △△△△△을 이끌고 평양을 하고 △△△() 서로 만나니

대왕의 군대가 (왜구를) 깨끗이 쓸어 괴멸 시키니 참살된 왜구가 수없이 많았다.

      

 

 

업적7- 영락 17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合戰 斬殺蕩盡

所穫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

 

 

(영락)17년 정미에 교지를 내리시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 △()△△전투가 붙어 참살소탕하니

적으로부터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에 이르고,

군수품과 장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누성․△△․△△△△△△△△성을 쳐 부셨다.

 

      

 

업적8- 영락 20년 동부여 정벌

 

卄年庚戌 東夫餘舊是雛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國駭 △△△△△△△1王思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영락)2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왕께서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셨다.

 

군대가 ()여성에 이르자 온 나라가 놀라 △△△△△△△△△,

태왕의 은혜가 널리 퍼졌다.

 

돌아올 때 (태왕)의 덕을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사람(집단 · 부락)이 있는데

미구누압노비사마압노서사누압노숙사사압노․ △△△압노이다.

 

(태왕께서) 공격하여 함락시킨 성이 64, 마을이 1400군데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