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의 휘는 <흥안興安>, 자는 <숭현崇賢>이며, <명치대제明治大帝>의 큰 아들이다.
모친은 <연淵>태후로 <황晃>태자의 딸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
모친이 엄하게 교육한지라 예의를 익혔으며 근검하였다.
그런 까닭에 <욱호勗好>태후가
여러 번 자신의 아들로 동궁자리를 바꾸려 하였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즉위하였더니, 춘추 43세이었다.
년호를 <안장安藏>으로 바꾸었다.
기해{AD519}<안장>원년,
춘정월, 임오일 초하루에 상의 몸이 편치 않아 내외의 축하 인사를 폐하게 하였다.
황태자 <흥안興安>이 용산(龍山)에서
친히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하여 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했다.
임진일 큰 변혁이 생겼다.
황태자에게 전위한다는 명이 있었다.
계사일, 신성(晨星){새벽별}이 밝게 빛났으며,
태자가 <평양平壤>의 <백웅궁白熊宮> 신단루(神檀樓)에서 즉위하였다.
<연淵>황후가 무릎을 꿇고 새보를 바치며, 이르길;
“조상의 대업을 이어서 나라를 편안케 하며,
백성들이 오래도록 황극{皇極}과 정목(政目)을 거스르지 않게 하시오.”라 하니,
상은 엎드려 받으면서 하늘에 맹서하여,
아뢰길;
“삼가 마땅히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라 하였다.
부황을 태상황으로 모후 <연淵>씨를 태상황후로 높였다.
동생 <보연宝延>을 황태자로 삼고, <덕양德陽>공주를 황태자비로 삼아주었다.
2월, 신해일 초하루, 상황이 <황극전皇極殿> 서쪽 침소에서 춘추 58세에 죽었다.
상은 맨 살을 드러내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애통히 호곡하였으며,
물 한 모금 장국 한 술도 입에 넣지 않았더니,
시중 <하전賀田>이 곁을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다.
<진관晋冠>을 산릉대사자로 삼고 3품의 작위를 내렸다.
魏의 사신 <유영劉永>이 와서 예를 올리고 부의를 바쳤다.
이 때, 魏主 <후詡>의 나이는 10살이었고,
그의 어미 <호胡>태후는 음란하다 실정하니,
우림(羽林)들이 난리를 일으키고 벼슬 높은 관리인 <장이張彛> 부자를 죽여서
그 머리를 길거리에 버렸더니, 다른 이들은 그것을 말릴 수도 없었다.
월자선인(月子仙人)<고환高歡>이 그를 보고 한탄하길;
“정사가 이 꼴로 돌아가는데 다른 일도 알만하다.”라 하고는,
그의 무리인 <사마자여司馬子如> 및 <손등孫騰>과 <후경候景> 등이
부상관(扶桑館)에서 만나 거사하기를 공모하고는,
재물을 나누어 결의하여 사귀고 각자의 향리는 협객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3월, 신사일 초하루, 후궁의 28인은 선제를 곁에서 지키라 내보내고,
효등 이하의 여인들은 종척과 공경들에게 처로 내주었다.
상이 <하양河陽>宮에게로 갔다.
<하양河陽>宮과 상이 1년이 되도록 함께 있었다.
상이 그리워 한 지는 오래였었으나, 이제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계미일, 대행을 황산(黃山) 장릉(長陵)의 옆에 장사하였다.
<연淵>태후가 음식을 끊고 뒤따라 죽으려 하자,
상이 말렸더니, 태후가 화를 내며 이르길;
“그대는 어미의 악함을 온 세상에 퍼뜨리려 하려는 것이오?”라 하였고,
이에 상이 아뢰길;
“따라 죽는 것을 금한 것은 조상님들이 만든 법도입니다.
모후께서 어기고 따라 죽으시면 필시 그런 풍조가 생길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태후가 이르길;
“아내가 지아비를 따라 죽는 것은 미풍이거늘 어찌하여 못하게 하시오?
<동명>께서 따라죽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아마도 <광명>을 위한 진정책이었을 것이오. 어찌 묵묵히 따라야만 하겠소?
魏의 <馮>과 <胡>는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삿될 뿐이오.
后와 妃가 된 자들은 오로지 입고 먹는 것을 아끼고 자신의 직분에 부지런해야 하며
욕망을 내뿜어 나라를 어지럽혀서는 아니 되는 것이오.
어린 아들이 제위에 올라 도적놈들이 그 자리를 빼앗게 만들지 말았어야 옳았소.”
라 하였다.
병신일, <연淵>태후가 죽어, 대행의 구덩이에 장사하였다. 춘추 70세였다.
성품은 관후하였고, 문장에 능숙하였으며, 궁중의 옛일에 밝았다.
큰 일이 있게 되면 언제나 여러 왕들이 받들어 행하였다.
태후는 애초엔 <발跋>태자비가 되어
<발원跋元>公·<발인跋仁>主·<발흥跋興>公을 낳았으며,
대행의 보비가 되어서는 성상을 낳고는 后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대행을 46년간 섬겼는데 극진하게 충성하였고,
옷매무새에서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아들을 14명을 낳았는데, 모두 현명하였다.
상이 친히 비문을 지어 그 덕을 기렸으며 귀감을 삼도록 하였다.
4월, 상이 황극전(皇極殿) 동쪽의 누각으로 납시어서 405인을 시험하고는
학문과 행실이 두루 아름다운 이 18명을 뽑아 전중사인(殿中舍人)으로 삼았다.
상을 동궁 시절에 모시던 이를 처로 삼고 전택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보군宝君>태자가 魏로 가서 조문하여 주었음에 답례하였다.
장수황제를 고조효무황제(高祖孝武皇帝)로,
명치황제를 태종효문황제(太宗孝文皇帝)로,
<조다助多>태자를 인종효숙황제(仁宗孝肅皇帝>로,
<경鯨>태자를 선종효양황제(仙宗孝讓皇帝)로 추존하고,
모두에게 대제를 올렸다.
<루사덕婁師德>을 예부상서를 삼았다.
5월, 대역죄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하였다.
변방 장수의 품계를 한 급 올려주어서 수자리 방비를 엄히 하도록 하였다.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우림(羽林)들에게는 차등을 두어서 상을 내렸다.
수경원(修鏡院)에 태학사를 두어서 대경(代鏡)과 유기(留記)를 찬수케 하고,
이로써 선덕(先德)과 성훈(聖勳)을 널리 드러내게 하였다.
상이 친히 <추모경>을 그렸더니 훌륭하였다.
妃였던 <초운椘雲>공주를 황후로 삼았고, 황자 <각恪>을 漢王으로 삼았다.
<은銀>공주를 妃로 삼았으며, 상이 친히 치마에 수를 그려주었다.
<은銀>공주는 <욱호勗好>태후 소생 <보연宝延>의 딸이었다.
좌보 <호용好勇>이 주궁상서<사옥謝玉>과 함께
“3后 5妃의 예를 갖추시어,
조종 조상님들의 광사지계{자손을 널리 퍼뜨리는 계획}에 보답하십시오.”
라 청하였더니,
상은
“짐은 타고난 체질이 좀 취약하고 질병이 많아 여색이 반갑지 않소.
비록 后와 妃가 있게 되면, 어찌 능히 감당하란 말이오. 삿된 일이오.
잠시 수년을 기다렸다가 건강하여지거든 갖추어도 늦지 않다고 보오.”
라 답하였다.
동궁대부 <계춘랑桂春娘>을 우시중으로 삼았다.
<춘랑春娘>은 문자 해독이 서툴고 능히 시문을 하지 못하였으나,
두건{또는, 수건}과 잠자리를 챙겨 주기는 잘하여,
사람들은 그를 색시중(色侍中)이라 하였다.
7월, <소연蕭衍>{梁 太祖}이 사신을 보내 부의를 바쳐왔고,
의약과 복서 및 악기도 바쳐왔더니,
상이 이르길;
“복서와 악기는 내가 알아야 할 바 아니며,
의약만은 약원으로 내려 보내서 그 효험 여부를 가리시오.”라 하였다.
8월, <륭隆>태자와 <오문烏門>을 梁에 보내서,
부의하여 주었음에 답례하고, 명의를 구해오게 하였다.
<장언수張彦秀>와 <소형기蕭衡器> 등이 왔는데, <소연簫衍>이 보냈음이었다.
<강법성江法盛>이 魏의 수군에게 붙잡혀서 낙양으로 보내졌다.
이에 상은 <후詡>{北魏 肅宗}에게 풀어주어 보내라고 명하며,
이르길;
“애사(哀事)와 경사(慶事)는 서로 찾아주는 것이 예의인데,
어찌 의심하여 붙잡아 가둔단 말인가!”
라 하였다.
<주금령朱金鈴>을 내사인(內舍人)으로 삼았으며,
그의 지아비 <부성芙星>은 어록감(御鹿監)을 삼았다.
<하양河陽>宮으로 납시었다가, 종일토록 비가 내려서, 다음 날 환궁하였다.
보국장군 <곡춘谷瑃>의 처 <호운瑚雲>공주가 나이 68살에 죽었다.
선제의 총첩이었던 까닭에 귀빈의 예로 장사하였으며,
<곡춘谷瑃>에게는 선제의 후궁이었던 <옥정원玉蜻院>비 <선宣>씨를 하사하였다.
나이 19살이었다.
12월, <하양河陽>宮이 상의 딸 <강음江陰>공주를 낳았다.
후에 <양의덕楊義德>에게 출가했다.
<안장대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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