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317년, 연왕 <쾌噲>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권을 넘겨주자

연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는데,

이때를 틈타 제나라와 중산국(東夷族, 殷의 후손이 세운 나라)이 손을 잡고

연나라를 쳤다.

 

이때 중산국에 땅 500리와 성 10곳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

나라는 거의 망국에 이른다.

 

이 때 등장한 이가 바로 연나라의 중흥군주 소왕(昭王·재위 BC312~BC279)이다.

 

소왕은 현자인 <곽외郭隗>의 도움을 받아 인재를 널리 구하는 데 힘썼다.

 

군사전략가인 <악의樂毅>가 위(魏)에서,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趨衍>이 제(齊)나라에서,

힘이 장사인 <극신劇辛>이 조(趙)나라에서 일제히 달려왔다.

 

그리하여 BC285년에 부국강병을 이룩하였다.

 

 

 

-  昭王이 세운 황금대(黃金臺)

 

燕昭王曰 安得賢士以報齊讐?

郭隗曰 王能築臺于碣石山前,尊隗為師,天下賢士必自至也

王如其言,作臺以金玉崇之,號 黃金臺

<春秋後語>동진(東晉) 공연(孔衍 258-320) 편찬

 

연소왕이 물었다. 현사(賢士)를 얻음으로써 제나라에 원수를 갚을 수 있겠느냐?

<곽외>가 답하였다. 왕께서 능히 갈석산 앞에 누대를 세우시고 

저(곽외)를 높여 스승으로 삼으시면 필시 천하에 현사들이 스스로 찾아올 것 입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누대를 짓고 금옥 같이 귀하다 하여 황금대(黃金臺)라 불렀다.

 

黃金臺 : 燕昭王招賢所筑,在今河北易縣東南的北易水南。

今北京市、徐水、滿城、定興均有黃金臺,乃后人依托

<중국고금지명대조표>

 

황금대 : 연 소왕이 현사를 초대하기 위해 세움.

현 하북 역현 동남의 북역수 남쪽에 있다.

현 북경시, 서수, 만성, 정흥에도 두루 황금대가 있는데 후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위 <춘추후어>에서 '尊隗為師'는 '저(隗)를 높여 스승으로 삼으시면'이라는 뜻이다.

 

연 소왕이 현사를 구하기 위해 은거하고 있던 <곽외>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현사를 얻을 수 있는지 묻자,

 

<곽외>가 천리마 뼈다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옛날 어떤 왕이 천리마를 구하기 위하여

신하에게 황금 천냥을 주고 천리마를 구해오라고 하였다.

고생끝에 신하는 천리마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애석하게도 천리마는 이미 죽은 뒤였다.

신하는 그 천리마의 뼈다귀를 황금 오백냥에 사가지고 왕에게로 가니

왕이 천리마 뼈다귀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화를 냈다.

신하가 말하기를

'왕이 천리마 뼈다귀도 황금 오백냥에 사는 데

살아있는 천리마는 오죽 귀하게 여기겠는가' 하는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질것이고

사람들이 천리마를 가지고 스스로 찾아올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얼마 후에 왕은 천리마 3필을 얻을 수 있었다"

 

<곽외>는 이 이야기를 한 후에 왕께서 저를 귀하게 여겨 스승으로 삼으시면

천하의 현사들이 생각하기를

왕이 곽외같은 변변찮은 인물도 저렇게 후대를 하는데

나도 귀하게 대접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구름처럼 모여들 것이라 하였다.

 

과연 연 소왕은 그대로 하여 수많은 현사들을 얻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쳐서 복수 할 수 있었다. 

 

 

<갈석산과 황금대 및 역수>

 

갈석산 앞에 황금대를 세웠는데 현 하북 역현 동남의 북역수 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낭아산이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  昭王이 <추연趨衍>에게 지어 준 갈석궁(碣石宮)

 

사마천의 《사기(史記)·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맹자는 노나라 추읍(騶邑) 사람으로서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문인한테서

학문을 배워 학문의 도에 통달한 다음에 여러 곳으로 유랑하다가

제(齊)나라 선왕(宣王)을 섬기려 했으나,

선왕이 그의 능력을 알지 못하여 등용하지 않자, 맹자는 양(梁)나라로 갔다.

 

양(梁)나라 혜왕(惠王)은 맹자의 주장을 믿지 않고,

그의 주장이 현실의 실정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진(秦)나라는 <상군商君>을 등용하여 부국 강병에 힘쓰고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전쟁에서 이기고 적국을 약화시켰으며,

제나라의 위왕(威王)·선왕(宣王)은

<손자孫子>와 <전기田忌>를 기용하여 병력이 강했다.

 

그 때문에 제후들은 동쪽을 향하여 제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등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연횡에 힘써, 서로 공격하고 빼앗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던 시대였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맹자는 오로지 요임금· 순임금· 하은주 삼대(三代)의 덕을

주장했으므로 어디에 가든 그 주장이 시대의 요구에 멀다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은퇴해서 제자인 <만장萬章> 등과 함께 《시경(詩經)》·《서경(書經)》을

정리하고 중니의 뜻한 바를 펴서 《맹자(孟子)》 7편을 저술하였다.

 

그 후 일당이 나왔는데 제나라에 삼추자(三騶子)가 있었다.

 

최초의 <추기騶忌>는 가야금을 잘 탔다고 한다.

 

그 다음에 <추연騶衍>인데 음양의 소장(消長)·변화(變化)를 깊이 관찰하고,

괴우지변(怪迂之變)과 종시대성(終始大聖) 등 10여 만 자의 책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왕후·귀인들은 처음에는 그의 설을 듣자 놀라서 마음이 끌렸다가도

나중에는 실행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추연騶衍>은 제나라에서 중용되었고,

양나라에 가자,

혜왕(惠王)은 국도의 교외에까지 마중나와 빈객의 예를 갖추어 대우했으며,

조(趙)나라에 가자,

평원군(平原君)은 지극히 경건한 태도로 그를 대접하여

그의 옆을 종종걸음으로 따라 걸었고,

앉을 때에는 옷소매로 자리의 먼지를 털어 줄 정도였다.

 

연(燕)나라에 갔을 때 소왕(昭王)은 비를 들고 길을 깨끗이 하고 앞장서서 인도했다.

 

그리고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청했다.

 

그리고는 갈석궁(碣石宮)을 지은 다음 몸소 나아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곳에서 <추연>은 《주운편(主運篇)》을 저술했다.(이하생략)"라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괄지지(括地志)》에는 위 갈석궁에 대한 주석을 근거로

갈석궁의 위치를 유주 계현(蓟縣) 서쪽 10리에 있는 영대(寧臺) 동쪽으로 비정하였다.

 

 

 

- 갈석산이 하북성 보정시의 낭아산임을 알게하는 <유인劉因>의 시

 

유인(劉因, 1249~1293)은 하북성 보정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토박이 시인으로

이 지역의 역사지리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원나라 때의 시인이다.

 

<등무양登武陽>은 유인의 시집인 『정수집靜修集』4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무양고대武陽故臺>는 『정수집靜修集』15권에 수록되어 있다.

 

 

 

登武陽


朝游樊子館 晚上武陽城    아침에 번자관을 노닐다가, 저녁에 무양성을 오른다.

潮接滄溟近 山從碣石生    밀물은 큰 바닷가에 닿고, 산들은 갈석산으로 모여드네.

斷虹雲淡白 返照雨疏明    한 조각 무지개는 담백한데, 햇살은 빗줄기에 흩날린다.

且莫悲吟發 樵歌已愴情    어찌 슬픈 시 읊지 않으랴! 나뭇꾼 노래는 슬픔을 다하네.

 

 

易水歌


風蕭蕭兮    易水寒    바람은 쓸쓸하게 불고 역수는 차갑구나.

壯士一去兮 不復還    장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探虎穴兮    入蛟宮    호랑이 굴을 찾아 이무기 궁으로 들어간다.

仰天噓氣兮 成白虹    하늘을 우러러 외치니 흰 무지개를 이루네.

 

 

등무양(登武陽)에서는 <유인>이 연나라 도성이었던 무양성에 올라서

갈석산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청명한 하늘에 난데없이 빗줄기가 흩날리고 한조각 무지개가 걸린 모습을 보고

슬픈 감정을 노래한 시로 생각된다.

 

이 때 유인은 형가의 역수가(易水歌)를 떠올린 것이 아닐까?

나뭇꾼의 노래도 <역수가易水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수가(易水歌)는 연나라의 자객 <형가>가 진시황을 죽이고

연나라를 구하기 위해 무양성을 나와서 역수를 건너면서 읊은 시이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대장부의 비장미 넘치는 시인데,

그 날도 하늘에는 흰 무지개가 걸렸다.

 

역수가(易水歌)는 나뭇꾼 등 민중들이 즐겨 읊었던 노래이다. 

 

 

 

武陽故臺


仁義徒令此舌存    어질고 옳은 이들은 혀가 있음을 경계하노니

轍環初不捄紛紛    수레바퀴 자국도 처음부터 흐트러지지는 않네.


天公欲為秦漢計    하늘은 진나라와 한나라의 꾀함에도 공평하였고

野色更無燕趙分    들판의 색이 바뀌듯 연‧조의 경계도 사라졌구나.


滿眼兵塵餘故壘    가득하던 초병은 티끌 되고 옛 보루만 남았는데

一聲樵唱入秋雲    나뭇꾼 노래 소리는 가을 구름 속으로 젖어든다.


擬乘碣石觀滄海    갈석산에 올라가서 창해를 굽어볼까 하노라!

易水東流去不聞    역수는 동쪽으로 흘러가고 다시 돌아오질 않네.



觀滄海


東臨碣石 以觀滄海    동쪽으로 갈석산에 임하여 창해를 바라보니

水何淡淡 山島竦峙    물은 넉넉하고 섬은 우뚝 솟아 있도다.

樹木叢生 百草豐茂    수목은 울창하고 백초가 무성한데

秋風蕭瑟 洪波涌起    가을바람 소슬하니 큰 파도 일어난다.

日月之行 若出其中    해와 달의 운행이 그 속에서 나오는 듯

星漢燦爛 若出其裏    은하수 찬란함도 그 속에서 나오는 듯

幸甚至哉 歌以詠志    기쁨을 가눌 길 없어 그 뜻을 노래하노라!

 

 

무양고대(武陽故臺)도 <유인>이 연나라 도성이었던 무양성에 올라서

역수와 갈석산을 바라보며, 세월무상을 노래한 시인 듯하다.

 

갈석산은 중국의 여러 황제들이 올라 창해를 바라보며

천하제패의 의지를 불태웠던 곳이기도 하다.

 

<유인>은 조조의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연상한 것이 아닐까?

  

관창해(觀滄海는 <조조>가 건안 12년(207) 9월에 북쪽의 오환을 정벌하고

<원소>의 잔류부대를 소탕한 후 회군하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읊은 시로 전해진다.

 

 

<갈석산과 무양성 및 역수>

 

<유인>의 시 등고양과 무양고대에서

갈석산이 무양성과 역수에 가까운 산임을 알 수 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