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300년 신유년은 燕 昭王 13년, 大夫餘 보을단제 42년이다

 

燕의 중흥 군주 소왕은 齊나라를 공격하기 전 후방의 안전을 위하여

<진개>로 하여금 동호를 먼저 공격하여 천리 밖으로 몰아내고 長城을 쌓았다.

 

소왕 29년(BC284)에는 제서지전(濟西之戰)을 통해 齊의 70여 성을 함락시켜

즉묵(卽墨)거(莒), 요(聊)만을 제외한 齊의 전역을 燕나라의 수하에 두게 되어

마침내 설욕하게 된다.

 

 

燕 亦 築 長城 自 造陽 至 襄平 - 史記

 

연(燕)나라 역시 장성을 쌓으니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造陽 則在 上谷之北 今宣化府 邊外地 - 前漢書 卷二十四

 

조양은 곧 상곡(今 懷來)의 북쪽에 있으며 오늘날 선화부(宣化府)의 변두리 땅이다.

 

 

燕 昭王때 쌓은 長城의 동쪽 끝 襄平이 중국인들은 지금의 요양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면 지금의 요하 동쪽 요동반도가 요동이 되고,

이후 설치되는 한군현인 玄兎는 한반도 북부

낙랑은 한반도 서북지방 지금의 평안도 지방이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려놓은 지도는

지금의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 일대를 유주(幽州)에 포함시켜 놓고 있다

 

 

<중국지도 전국시대 燕 강역도>

 

 

<중국지도 幽州>

 

 

<燕 강역(중국 사회과학원)>

 

 

과연 그럴까?

 

“ 襄平, 縣,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

- 後漢書 卷74 下「袁紹劉表列傳」襄平에 대한 李賢(唐시대 사람)의注

 

(양평은 현인데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그 옛 성이 지금의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

 

우리 고대사를 언급할 때 많이 나오는 노룡현은 옛날부터 있었던 지명이 아니다.

 

遼史卷14 志 第10에 따르면

노룡현(盧龍縣)은 수나라 개황 18년(598년)에 처음으로 이름을 얻었다.

 

한편 요동군의 치소였던 양평(襄平)이라는 지명은 수나라 때인 581년 없어졌다.

 

그런데 <이현李賢>은 당 고종의 여섯 째 아들로 652년 태어나 684년 사망하였다.

 

그는 양평의 소멸과 노룡현이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주석이 신빙성을 갖는 이유이다.

 

한편 유일하게 옛 양평이 지금의 요양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新唐書는

500년 가까이 흐른 1060년에야 편찬된 사서이다.

 

이미 상당히 왜곡된 기사가 기록될 수 있는 시기에 만들어진 문헌인 것이다.

 

이 시기는 요나라(916-1125)가 건국하여

동압록을 요하로 변경하고 많은 지명이동이 일어났던 때이다.

 

東晉과 北魏 시대를 살았던 범엽(398-445)이 편찬한 후한서「군국지」를 보면

한나라 수도였던 낙양에서 각 군까지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북위시대의 1리는 약 0.5km이다.

 

낙양 -> 상곡군: 동북쪽 3200리

낙양 -> 요서군: 동북쪽 3300리

낙양 -> 요동군: 동북쪽 3600리

낙양 -> 현토군: 동북쪽 4000리

낙양 -> 낙랑군: 동북쪽 5000리

 

 

북경 부근인 거용관(居庸關), 탁록(涿鹿)을 관할하는 상곡군이

낙양에서 3,200리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상곡군에서 요동군까지 400리(약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이다.

 

상곡에서 지금의 요양까지는 9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따라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이 지금의 요양일 수는 없다.

 

상곡에서 400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은 지금의 천진시 계현 부근이다.

 

양평은 지금의 천진시 계현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하겠다.

 

상곡(上谷)은 전국시대에는 거용관 인근에 있었으나 진개의 동정 후

산서성과 하북성의 남쪽 경계에 상곡군을 설치하여 漢나라 때도 계속 유지 되었다.

 

낙양에서 낙랑까지 5000리는 427년 장수대제가 평양(今 노룡)으로 천도하기 전의

평양(今 요양)을 말하며 평양은 옛부터 낙랑이라고 불리었다.

 

 

 

<낙양에서 상곡, 요서, 요동, 현토, 낙랑까지의 거리>

 

 

<중국지도  幽州에 표시한 상곡, 요서, 요동, 현토, 낙랑까지의 거리>

 

 

이렇게 고무줄처럼 길게 늘여 놓은 중국지도의 유주(幽州)를 보고

우리의 강단사학자들과 중국인들은 4세기 초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 군국지의

낙양에서 각 군까지의 거리를 어떻게 설명할 지 궁금 할 뿐이다.

 

 

 

隨書에는 양평의 소멸과 노룡현의 설치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수나라 시기 准營州 5개군 11현이 1개군(昌黎), 2개현(永樂, 新昌)으로 줄어들면서

准營州 5개군 중 요동군에 속했던 양평도 신창현으로 합병되었다가

수 개황원년(581년) 이전 요동군과 함께 없어졌다.

 

다시말해 581년에 요동군 양평현이 북평군 신창현이 된 것이다.

 

또한 隨書에는 “요동군이 없어지면서 요동내 2개현인 양평신창현은

신창현으로 통합되었으며, 새로 생긴 北平郡에 속하게 됐다”로 돼 있다.

 

이 북평군은 처음에 신창조선 2개현을 두었으나

조선현이 신창현에 흡수돼 없어졌으며,

근처의 海陽肥如縣도 신창현에 통합됐다.

 

북평군의 유일한 현인 신창현은 개황 18년(598년) 노룡현으로 이름이 바꿔지면서

노룡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즉, 정리하면 양평현은 신창현과 통합됐으며

신창현이 조선, 해양, 비여현을 흡수한 다음 노룡현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여기에서 비여현은 현 하북성 노룡현 북쪽에있으며,

해양현은 하북성 灤縣 서남에 있다고「中國古代地名大詞典」에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신창현은 난하 동쪽에 위치하였으며,

노룡현도 난하동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옛 양평은 노룡현 안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양평은 옛 고죽국 자리에 있었다.

 

신창(新昌),노룡(盧龍),북평(北平),양평(襄平),조선(朝鮮),비여(肥如),

양(海陽)은 서로 인접하여 모두 하북성에 있었다.

 

“ 其後, 燕有賢將秦開,爲質于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却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 史記 卷110 「匈奴列傳」

 

그후 燕은 賢將 秦開를 胡에 인질로 삼았는데 胡는 그를 깊이 신임하였다.

秦開가 돌아와서 돌연 東胡를 격파하여 東胡는 천여리 퇴각하였다. .....

燕도 장성을 쌓았는 데 造陽에서 襄平에 이르며

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을 두고 胡를 막았다.

 

그러나 昭王에 의해 이룩된 부국강병의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79년 昭王이 죽자 惠王이 즉위하게 되는데,

惠王 시기에는 燕軍이 즉묵(卽墨)에서 齊將 <전단田單>에게 격퇴 당해

거의 全軍이 궤멸된 상황에 처하게 되어 齊나라는 燕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고,

燕나라는 다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惠王은 즉위 7년 만에 成安君에 의해 시해 당하였고,

成安君에 의해 옹립된 武成王의 초기에도 惠王 시해 사건을 명목으로

韓, 魏, 楚가 이를 듣고 난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燕나라를 벌하였으며,

武成王 즉위 7년에는 齊의 공격을 받는 등 혼란한 시기가 이어졌다.

 

강단사학에서는 燕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청천강 유역까지 국경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위에서 보듯이 北伐은 東胡의 공략에 대한 것이었고 史記의「燕召公世家」등

燕나라의 역사 기록에는 朝鮮의 공략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만약 秦開의 東胡 공략시 朝鮮을 함께 공략했다고 하더라도,

昭王의 사후 燕나라의 혼란상황을 보면 침공한 지역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燕나라의 동북쪽 국경은 昭王 이전대의 국경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다.

 

 

“ 東胡在大澤東 夷人在東胡東 貊國在漢水東北 地近于燕 滅之 ”

- 산해경 해내시경

 

동호는 큰 호수의 동쪽에 있으며, 이인(夷人)은 동호의 동쪽에 거주한다.

맥국(貊國)은 한수(漢水)라는 강의 북동쪽에 있으며

연나라와 접하고 있는데, 연나라에 멸망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맥국이란 고조선의 거수국들로서 맥족의 나라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맥국은 한수(지금의 난하) 동북방에 위치하며,

이 중 큰 나라 중의 하나가 고이(구려)라고도 불리었다.

 

이 기사에서 연나라에 멸망했다는 것은, 진개의 동침 시 맥족의 나라들이 타격을 입고

동쪽으로 이주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 史記「朝鮮列傳」

 

燕國이 전성기 때부터 眞番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통치를 위하여 官吏를 두고 鄣塞를 축조하였다.

 

大夫曰, 往者四夷具强, 並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

- 鹽鐵論 卷7「備胡」

 

大夫가 말하기를,

지나간 지 오래된 옛날의 전국시대에는 四夷들이 모두 다 강성하였다.

그래서 모두가 쳐들어와서는 잔인하고 참혹하게 약탈하곤 하였다.

朝鮮은(西漢 초기에) 요(徼)(秦의 요동外徼)를 유린하고,

燕나라의 동쪽 땅을 强取하였다.

 

BC 220년경에는 북부여와 胡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燕이 지금의 북경지역에 진출한 것은 6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 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

- 三國志《魏略》

 

옛날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주나라가 쇠퇴한 것을 보고 燕나라가 스스로 자기를 높여 왕이라 하고

[燕 易王은 文侯에 이어 B.C.332년에 燕侯가 되었다가 B.C.323년에 稱王하였다.}

동쪽의 땅을 침략하고자 하므로, 朝鮮侯 또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周王室을 받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그 나라 대부 禮가 간해서 중지되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禮를 서쪽의 연나라로 보내어 설득하니

燕도 그것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 燕襲走東胡 却地千里 度遼東而攻朝鮮. ”

- 鹽鐵論 卷6「伐功」

 

燕이 東胡를 습격하여 쫓아내고 땅을 1,000리를 넓혔으며,

遼東을 건너 朝鮮을 공격하였다.

 

“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

- 三國志《魏略》

 

燕國이 장수 秦開를 파견하여 그 (고조선) 서방을 공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얻고

滿番汗까지로 경계를 삼으니 朝鮮은 마침내 약화되었다.

 

 

여기에서 만번한(滿番汗)은 만성(滿城)과 번한성(番汗城)을 말한다.

 

만성(滿城)은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말하며

지금의 북경 서남쪽 보정시(保定市) 수성현에 있었고,

번한성(番汗城)은 번조선의 서도(西都)로 지금의 북경 인근에 있었다.

 

2천여리의 땅이란 동쪽으로 2천여리가 아니라 사방 2천여리를 말한다.

 

 

<진개 동정 후 설치한 燕 5郡>

 

 

 

<강단사학자가 주장하는 연5군>

 

 

<진개 동진전 의 강역>

 

 

<진개 동진후 의 강역>

 

 

 

참고 <한서지리지로 보는 유주(幽州)의 변천사

 

후한의 <반고>가 80년경 편찬한 한서지리지에는

유주 10개군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국시대 연(燕) <소왕昭王 재위 BC312-BC279> 이전의 연(燕)의 강역은

대군(代郡) 1개 지역임.

 

 

연 소왕 281년경  <진개>가 동호와 고조선을 물리치고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의 5개군을 신설함.

 

 

한 고조 <유방>이 BC205년경 탁군과 발해군 2군을 신설하고

한 무제 <유철>이 고조선을 침략하여

BC108년에 낙랑군, BC 107년에 현도군 2군을 설치함.

 

 

그러므로 대군을 제외한 9개군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탁군, 발해군, 낙랑군, 현도군의 지역은

BC281년 이전에는 고조선의 강역이었고

이후 유주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중원과의 격전지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참고 <중국 역대 도량형 환산표>

 

 

1. 길이

 

 

. 前漢

2.77 cm

27.7 cm

2.77 m

498.6 m

. 後漢

2.30 cm

23.0 cm

2.30 m

414.0 m

.

2.41 cm

24.1 cm

2.41 m

433.8 m

北魏

2.79 cm

27.9 cm

2.79 m

502.2 m

2.95 cm

29.5 cm

2.95 m

531.0 m

. 五代

3.11 cm

31.1 cm

3.11 m

559.8 m

3.07 cm

30.7 cm

3.07 m

552.6 m

3.07 cm

30.7 cm

3.07 m

552.6 m

3.11 cm

31.1 cm

3.11 m

559.8 m

3.20 cm

32.0 cm

3.20 m

576.0 m

現代

3.03 cm

30.3 cm

3.03 m

3,927 m

 

 

2. 면적

 

 

. 前漢

1.918225

460.374

46037.4

. 後漢

1.322500

317.400

31740.0

.

1.452025

348.486

34848.6

北魏

1.946025

467,046

46704.6

2.175625

522.159

52215.9

. 五代

2.418025

580.326

58032.6

2.356225

565.494

56549.4

2.356225

565.494

56549.4

2.418025

580.326

58032.6

2.560000

614.400

61440.0

現代

3.300000

99.0000

 

 

 

3. 중량

 

 

. 前漢

257.6 g

. 後漢

222.4 g

668.8 g

. 五代

596.8 g

--

596.8 g

現代

600.0 g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