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의 시조 단군 해모수의 재위 기간은 45년이다. 임술년(BC 239)이 원년이다.

 

단제께서는 한울님의 자태와 영웅의 용맹스러움을 지녔으며, 

신령스런 광채가 번득이는 눈빛을 가지셨으니, 

가히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한 용모를 지니셨다.

그의 나이 23살이 되던 해 하늘의 뜻을 따라 강림하였다.

 

이때가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57년(BC 239)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 참고 천왕랑(天王郞)

 

배달국의 제세핵랑(濟世核郞)→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先人),백제의 무절(武節),신라의 화랑(花郞)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 또는 국선(國仙), 선랑(仙郞)→조선의 선비→

구한말 항일독립운동 정신, 3.1운동 정신으로 이어지는 의사(義士) 

 

신교의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통하여 태일(太一)을 이루고자 수행하여

민족의 위기 때마다 우리의 민족혼을 유감없이 표출한 집단이다.

 

 

 

 

해모수는 웅심산(雄心山)에 의거하며 병사를 동원하여

난강(蘭江)가에 궁궐을 짓고, 까마귀 깃털을 꽂은 갓을 쓰고,

용의 문양이 새겨진 번쩍이는 칼을 차고,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났다. 

 

그를 따르는 500인의 군사들과 함께 아침에 나랏일을 살피시고,

저녁에 신축한 궁궐(단궐丹闕)에 입궁하였다.

 

드디어 해모수가 북부여 초대 단군으로 즉위한 것이다.

 

북부여라고 이름한 것은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고

부여고지의 북쪽에서 건국하였기 때문이다.  

 

계해 2년(BC 238)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에 해모수는 하늘에 제를 올리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조세를 결정하는 연호법(煙戶法)을 제정하였고,

오가(五加)의 병사를 나누어 변방에 배치하였으며, 

둔전제를 실시하여 자급자족하도록 하는 등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불우한 사태에 철저히 대비토록 하였다.

<북부여기>

 

 

고열가 단제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에

해모수가 웅심산으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槀離國) 사람이다.

 

고열가 단제 58년,

임금께서 어질고 인자하시나 우유부단하여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여러장수가 자신의 용맹을 믿고 화란을 자주 일으켰다.

 

나라 살림은 쪼들리고 백성의 기운도 더욱 쇠약해졌다.

 

3월 제천을 행한 저녁에 임금께서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여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서 처음으로 법도를 민들고

국통(國統)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펴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 왔느리라.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맇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도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헤어져 흩어지고 있느리라.

나의 오가(五加)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하셨다.

 

이튿날 임금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선인(仙人)이 되셨다.

 

이에 오가(五加)가 6년 동안 국사를 공동으로 집행하였다.

 

이에 앞서 종실인 대해모수께서 은밀히 수유국과 약속을 하고, 

옛 도읍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거한 뒤에 스스로 천왕랑이라 칭하셨다.

 

사방에서 모두 사람들이 해모수의 명을 따랐다.

 

이때에 해모수께서 모든 장수들을 봉하면서

수유후 기비(箕丕)를 올려 세워 번조선왕으로 삼아 상하운장을 지키게 하셨다.

 

대개 북부여가 발흥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해모수께서 태어난 고향이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불렀다.

<단군세기>

 

 

 

일찍이 기비(箕丕)가 종실 사람 해모수와 함께 몰래 옥새를 바꿔치려는 약속을 하고

힘을 다해 천왕이 되는 것을 도와 주었다.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잡을 수 있게 한 사람은 오직 기비(箕丕) 그 사람이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는데 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이다.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해모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에서 사셨다.

 

부여의 옛 도읍{백악산 아사달}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워 왕이 되셨다.

 

이분이 부여의 시조이시다.

 

머리에 오우관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을 차고

오룡거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자가 백 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政事)를 돌보고 저물면 하늘에 오르셨다.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나라안이 저절로 잘 다스려지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들에는 벼와 곡식이 가득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없고 백성도 태평세월을 누렸다.

 

해모수 단군께서 처음 내려온 때는 임술년 4월 8일로 秦나라 왕 영정(瀛政) 8년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단재 <신채호>가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여사는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부여는 BC 5세기 부터 AD 5세기까지 흥망의 성쇠는 있어도

천여 년을 지탱해 온 나라이다.

 

<신용하>에 의하면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코카서스)로 이주하였고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 유역과 북 캅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였다.

 

서양사에 7세기부터 볼가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볼가족이 곧 부여족이다.

 

635년 볼가족은 족장 쿠브라트의 지도력 아래 대 불가리아를 건국한다.

 

발칸반도는 발칸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발칸산은 밝산을 말하며 대릉하 유역의 홍산이 바로 밝산이다.

 

불가리아인은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얼굴 모습이 슬라브족의 생김새를 많이 닮았지만

서양에서 유일하게 갓난 아기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

 

불가리아인의 원 조상은 바로 부여족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현대 역사학자 <하광악何光岳>은 「東夷源流史」에서

부여의 기원과 변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여는 바로 九夷의 하나인 부유(鳧臾)의 후예이다.

원래는 산동성 임기(臨沂) 일대에서 있었는데

뒤에 한 갈래는 서쪽으로 하남성 내향(內鄕)으로 옮겨갔고

다른 한 갈래는 동북으로 옮겨가 부여국을 건립했다.

 

 

 

「山東通志」 24권 疆域志 제3 山川 추현(鄒縣) 조항을 살펴보면

부산(鳧山)은 縣의 서남쪽 50리에 있어 어대현(魚臺縣)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魯頌」에 말한 부산(鳧山)이라고 하였다.

 

「元和志」에는 '부산(鳧山)이 추현(鄒縣) 동남쪽 28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추현(鄒縣)의 부산(鳧山)이 부유인(鳧臾人)의 발원지일 가능성이 높다.

 

周 武王이 東夷를 정벌 할 때 많은 東夷族들이 압박을 받아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부유(鳧臾)도 이때 당시의 추현(鄒縣),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平原縣) 서남쪽에 있다가 당시의 유관(渝關),

오늘날의 산해관 일대 동북지역으로 이동해 왔다.

 

부유인(鳧臾人)들은 춘추시대에 지금의 요서지방으로 옮겨 왔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다시 지금의 길림성 부여 지역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본다.

<何光岳 東夷源流史 江西敎育出版社 1990, p.398~401>

 

 

 

부산(鳧山)이 있는 산동성 추현(鄒縣)은

오늘날의 산동성 남쪽 끝자락 미산호(微山湖) 부근 지역으로

여기애 어대현(魚臺縣)이 있고 어대현 서남쪽에 부산(鳧山)이 있다.

부산(鳧山)을 산동성 서북부에 위치한 德州市 平元縣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

 

 

나라의 원로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라고 맗한다.....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인장의 문안에는 濊王의 印이라고 적혀 있다.

 

나라에 옛 성이 있는데 濊城이라고 호칭 한다.

 

 

아마도 본래는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하게된 것으로서

그들이 스스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유인(鳧臾人)은 산해관 일대의 동북지역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濊河 유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산동성 부산(鳧山)이 부유인(鳧臾人)의 첫 출발지점이라면

하북성 濊河 유역은 부여의 발상지가 되는 것이다. 

 

 

생각컨데 예하(濊河)는 일면 포오거(蒲吾渠)라고 한다.

「後漢書」 注에 「古今注」를 인용하여

'永平 10년{67년}에 상산(常山)의 호타하와 포오거를 내왕하는 조운선을 만들었다'

고 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大淸一通志>

 

 

「대청일통지」에 나오는 이 기록은

우리에게 濊河와 관련해서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첫째는 濊河가 후한시대 明帝 永平 연간에는 포오거로 불려진 사실이다.

 

둘째는 濊河와 호타하는 서로 가까이 있어 연결된 강이었음을 알게 한다.

 

셋째는 후한시기에 濊河는 호타하와 함께

상산군(常山郡)에 편입되어 있었던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濊河는 濊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포오거라 하기도 하고 석구하(石口河)라고도 하였다.

과거에는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호타하에 유입 되었으나

지금은 상류는 자수(滋水)에 의해서 어지렵혀지고 하류도 역시 막혀 있다.

<중화학술원 중문대사전>

 

 

금나라는 1125년 동북방 지역을 통일한 다음 거기에 포여로(蒲餘路)를 설치하고

흑룡강성과 오소리강 유역의 고대 부여국이 차지하고 있던 광대한 지역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금나라의 포여로가 부여로에 대한 다른 표기 였던 것 처럼

후한시기의 포오거도 부여하에 대한 다른 표기였다.

 

그러므로 濊河는 포오거이며 부여하(夫餘河)인 것이다.

 

예하가 포오거이고 포오거가 곧 부여하라고 할 때 예하의 정확한 소재지가 밝혀지면

부여의 발상지는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예하는 오늘날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명일통지」 권3 眞定府 조항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濊河는 平山縣 서북쪽 60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물이 흘러서 平山縣 동남쪽을 경유하여 호타하로 유입된다.

 

濊河가 위치해 있던 진정부(眞定府)는 춘추시대에는 선우국(鮮虞國),

秦나라 때는 거록군(鉅鹿郡), 漢나라 초기에는 항산군(恒山郡)이 있던 곳으로,

송나라 대에 이르러 眞定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하북성 保定市가 바로 그곳이다.

 

평산현(平山縣)은 지금의 하북성 서부, 태행산 동쪽 기슭,

호타하 상류에 위치한 縣의 이름이다.

 

이 지역은 일찍이 鮮虞가 세운 중산국(中山國)이 있던 곳이며

선우(鮮虞)는 백적족(白狄族)의 한 갈래로 알려져 있는데 선우는 선비족처럼

그 명칭에서 고조선과 모종의 관련성이 있어 보이는 민족이다.

 

청나라 <고조우>가 쓴 「독사방여기요」直隸 眞定府 平山縣 야하(冶河) 조항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하(濊河)는 平山縣의 북쪽에 있다.

방산(房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행당현(行唐縣) 경계로 유입된다.

 

濊河의 발원지 房山은 殷나라시기에 연산(燕山)으로 일컬어지던 곳이다. 

 

西周시대 燕國의 國名이 여기서 유래했으며 지금은 大房山으로 그명칭이 바뀌었다.

 

濊河가 유입되었던 行唐縣은 하북성 서남쪽 호타하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石家庄市에 예속되어 있다.

 

남쪽으로 석가장시까지는 45km, 북쪽으로 북경까지는 240km이다.

 

바로 이곳이 부여의 발상지인 곳이다.

 

호태왕 비문에

"고구려가 시조 추모왕에 의해 창업되었는데 북부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라고 하고 있다.

 

그 북부여는 바로 호타하 부근의 濊河 유역에 있던 부여를 가리킨다.

 

뒤에 그 북부여 세력이 요동지방으로 이동해 가서 세운 나라가 동부여 였으며

다시 한반도지방으로 이동해가서 세운 것이 남부여였다. 

 

그런데 북부여가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있다.

 

「徐水新志」의 徐水古迹 조항에는 解王城이 서수현(徐水縣)에 있었다고 말한다.

 

해왕성(解王城)은 북부여 解씨의 왕성인 것이다.

 

지난날 우리 예맥족이 남긴 찬란한 발자취는

오늘도 여전히 대륙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다만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 눈이 가리고 귀가 막히어

그것을 보고 들을 눈과 귀가 없을 뿐이다.

 

 

 

 

 

 

*  해모수의 가계도

 

 

해모수(BC262-BC195)<북부여>

재위 BC239-BC195

     |

모수리                                                                                    

재위 BC194-BC170

     |                                                                                                               

고해사                                                                                                  

재위 BC169-BC121                                                                         

     |                                                                                                             

고우루(덕황)(BC140-BC111) - 해부루(BC138-BC62) 

재위 BC120-BC112                <동부여(가섭원)>                                 

    |                                       재위 BC94-BC63

                                                      |                                                            

고두막(모수제)                         금와(BC90-BC7)                        

(BC118-BC59)                         재위 BC62-BC7                    

재위 BC76-BC59                                                                                

    |                     

고존 - 추모             

 

 

 

 

 

<부여 변천사>

 

 

 

 

-  북부여 略史

 

 

<해모수가 공화정을 끝내고 북부여 단제로 등극하다>

 

단군세기 47대 고열가 단군 조()에 의하면

고열가 단군은 국세가 기울고 백성들이 흩어지자

단군의 자리를 내놓고 입산수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열가가 입산하기 전에 오가(五加)들에게 명하기를

이후 탁월한 자가 나타나면 그를 단군으로 추대하라고 하였다.

 

이에 오가들은 논의를 거친 후

탁월한 자가 나타날 때까지 공화정을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6년간 공화정을 실시하였다.

 

이 공화정을 해모수가 철폐시키고 그가 단군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북막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의 약탈>

 

임신 11(BC 229) 북막의 추장 산지객융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살해하고 대량의 약탈을 저지르고 돌아갔다.

 

 

<기준(箕準)의 등극>

 

경진 19(BC 221) ()가 죽었다.

그 아들 준()이 아버지의 직위를 세습하여 번조선의 왕이 되었다.

관리를 파견하여 병사를 감독하도록 하고, 燕나라의 침입에 철저히 대비토록 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의 진개가 우리나라 서쪽지방을 침입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그 경계를 이룬 적이 있었다.

 

만번한(滿番汗)은 만성(滿城){今 보정시}과 번한성(番汗城){今 북경 동쪽}을 말한다.

 

 

<여홍성(黎洪星)과 장량(張良)의 진시황 암살 실패>

 

계미 22(BC 218)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과 한()나라 사람 장량(張良)이

秦王{진시황}의 어가박랑사(博浪沙) 한복판에서 저격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오중(誤中)하여 부차(副車)만 박살내었다.

 

<참고> 이후 창해역사 여홍성은 창해군의 거수(제후)가 되었는데,

창해군은 북부여의 거수국으로 현 중국의 천진지역에 있었다.

추정하건대, 박랑사는 천진지역의 해변가 모래사장으로 추정된다.

 

창해군에 대하여 중국 사서인 후한서에서는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지면서

창해역사를 창해군의 제후로 봉하고,

얼마 되지 않아 창해군을 폐하여 요동군과 병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중국의 입장에서 기술된 서술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북부여의 기록으로는

맹위를 떨쳤던 연나라 진개를 해모수가 몰아내었고,

회복한 고토기준(箕準)을 번조선왕으로 봉하여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으며,

진나라의 확장을 저지하였던 여홍성을 창해군의 거수로 봉하여

진나라의 확장을 막았던 것이다.

 

 

<진승(陳勝)의 반란과 秦 유민을 상하운장에 분치하다>

 

임진 31(BC 209) 진승(陳勝){하남성 등봉 사람}이 병사를 일으키자

秦나라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에 燕, , 趙의 백성들이 도망쳐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그 수가 만여 호에 달했다.

번조선은 그들을 상하운장(上下雲障)에 분치하였다.

그리고 장군을 파견하여 그들을 감독하였다.

 

<참고> 진승(陳勝)

 

진승(陳勝) 은 중국 진() 말기의 농민반란의 지도자로서 자()는 섭(涉)이고,

양성(陽城, 지금의 河南省 登封) 사람이다.

 

진승은 BC 210

진시황제(秦始皇帝, BC 259~BC 210)가 죽고

막내아들 호해(胡亥, BC 221 ~BC 207)2세황제(二世皇帝)로 즉위하였으나,

환관 조고(趙高)의 전횡(專橫)으로 백성들은 더욱 도탄(塗炭)에 빠졌다.

 

기원전 2097,

2세황제는 장성(長城) 건설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위해 과역(課役)이 면제되었던

빈민(貧民)까지 징발(徵發)하였고,

진승(陳勝)도 징발되어 둔장(屯長)으로서 900명의 일행과 함께

어양(漁陽)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일행이 기현() 대택향(大澤鄕)에 이르렀을 때

큰 비를 만나 정해진 기한 안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은 법으로 기한을 어기는 사람들을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정해 놓고 있어서,

진승(陳勝)은 오광(吳廣)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진승(陳勝)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진승(陳勝)대초(大楚)’의 장군(將軍)임을 자처하며

당시 농민반란군을 이끌었던 당대 영웅이었다.

 

진승(陳勝)은 장한(章邯)이 거느린 토벌군에게 쫓겨 달아나다

어자 장가에게 살해됐다.

장가는 진승(陳勝)의 목을 가지고 장한(章邯)에게 투항했으며,

대초의 장군 여신이 장가를 죽여 복수했다.

 

이로써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은 6개월 만에 진압되고

진승(陳勝)은 현재 하남성 상주시 융청에 묘가 있다.

 

()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유방은 진승에게 은왕(隱)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

 

 

<노관(盧綰)이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다>

 

己亥 三十八年 燕盧綰 復修遼東故塞 限浿水 浿水 今潮河也

기해 38(BC 202)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였다.

그 요새패수까지 이르렀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조하(潮河){浿水}는 풍녕(豊寧){자몽}에서 발원하여

일부는 백하(白河){薩水}와 합류하여 발해만으로 흐르는 강,

일명 조백신하(潮白新河), 조선하(朝鮮河), 한고(韓沽)이다. 

()는 물줄기라는 뜻이다.

 

<범장>의 북부여기는 '패수는 지금의 조하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조백신하(潮白新河)가 요수(遙水)인 것이다.

 

 

<노관(盧綰)이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衛滿)이 망명하다>

 

병오 45(BC 195)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들어갔다.

그 무리 중 위만은 우리나라(북부여)에게 망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단제께서는 불허하였다.

얼마 후 단제께서는 병이 나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의 망명을 수용하고,

그에게 박사라는 직위를 내렸다.

 

그리고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나누어 주고, 위만을 그 지역의 거수(제후)로 봉하였다.

 

그 해 겨울 단제께서 붕어하였다. 웅심산의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태자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2세 모수리(慕漱離) 단제의 등극>

 

2세 단군 모수리의 재위 기간은 25년이다. 정미년(BC 194)이 원년이다.

 

번조선왕 기준(箕準)수유국(須臾國)오랫동안 통치하면서

일찍부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기(嘗多樹恩)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넉넉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후에 떠돌이 도적떼 {위만(衛滿)을 중심으로 燕, , 에서 망명해 온 망명족}

에게 패망하였다.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북부여의 서쪽 영토인 번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기준은 도망쳐 바다로 들어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제가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을 받들고,

대거 이주 길에 올라 곧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月支)는 탁()의 고향이다.

이것을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이때부터 변한과 진한 역시 각각의 무리를 이끌고

백여리의 땅을 봉 받아 도읍을 정하고 각자 국호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변한과 진한 모두 오랜 기간 동안 마한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마한의 지시를 따랐다.

 

중마한(中馬韓)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삼한체제가 무너진 후

유민들이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로 삼한 연맹의 나라이다.

 

중마한은 삼한 연맹의 중심이 마한이란 뜻이다.

 

진한은 길림등지에서 경주로 내려와 후에 신라가 되고

번한은 번.진한의 유민들이 합류하여 김해방면으로 내려와 가야가 된다.

 

대진국이 멸망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한반도 중심의 역사 시대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한민족사의 위축이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민족과 인류의 뿌리를 찾는 후천개벽 기운을 열기 위한 전환이며

세계문명 개벽을 실현하기 위한 진입이다. 

 

한반도는 지구의 핵이며 새 시대를 여는 역사의 눈이며, 심장부이자 초점이다.

 

세계 문화를 원시반본(原始反本)시키는 동방 한민족과 세계문명을 추수하는 곳이다.

 

 

<평양에 성책을 쌓고 위만의 침략을 방비하다>

 

무신 2(BC 193) 단제께서는 상장군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城柵)을 쌓아 도적 위만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위만 역시 평양 공격의 불가함을 깨닫고 더 이상 침략하여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고진(高辰)에게 해성(海城)을 수비토록하고

경향분수지법(京鄕分守之法)을 제정하다>

 

己酉 三年 以海城 屬平壤道 使皇弟 高辰守之 中夫餘 一域 悉從 糧餉

 

기유 3(BC 192)해성(海城){산해관 인근}평양도에 포함시키고,

황제의 동생 고진 (高辰)에게 그 지역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며 따랐으므로 곡식을 내어 구제 하였다.

 

冬十月 立京鄕分守之法 京則天王 親總衛戍 鄕則四出分鎭 恰如 柶戱觀戰 龍圖知變也

 

그 해 겨울 10월에 경향분수지법(京鄕分守之法)을 제정하였다.

중앙()은 천왕이 친히 총체적으로 수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윷놀이 판의 말판과 같았다.

 

 

<고해사(高奚斯) 단제의 등극>

 

신미 25(BC 170)에 단제께서 붕어하셨다. 그리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였다.

3세 단군 고해사의 재위기간은 49년이다.

임신원년(BC 169) 정월에 낙랑왕 최숭(崔崇)이 곡식 삼백석을 해성(海城)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崔崇) 낙랑산(樂浪山)으로부터 보물(珍寶)을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한반도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BC 195) 겨울이다.

 

 

※ 참고 <최숭(崔崇), 패수(浿水), 낙랑군(樂浪郡), 낙랑국(樂浪國)>

 

해모수 병오년은 BC 195년이다.

BC 195년은 위만(衛滿)이 번조선에 망명을 요청한 시기이다.

 

북부여의 단제 해모수는 위만의 망명을 불허하였으나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을 받아들였다.

 

결국 위만은 燕, , 로부터 망명한 망명족을 규합하여

번조선(기자조선)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소위 말하는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당시 번조선 지역은 하북성 보정시 갈석산과 요하(今 조백신하)사이의 지역이다.

 

한편 중국 기록에 의하면 번조선왕 기준(箕準)을 몰아낸 위만(衛滿)

()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한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계속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당시 낙랑(樂浪)은 북부여의 거수국(渠帥國, 제후국)이었고,

최숭은 낙랑국의 거수(渠帥, 제후)였다.

 

우공갈석을 기점으로 중국과 경계를 이루며 중국의 확장을 막아주던 번조선이

위만 세력에게 망하자,

번조선과 인접해 있던 낙랑국왕 최숭은 위만의 세력을 막을 수 없어

그의 일족과 함께 많은 재물을 싣고 망명길에 올라

마한의 도읍지인 왕검성(북한의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낙랑군과 낙랑국을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낙랑국은 번조선 지역에 있던 고조선과 북부여의 거수국이었다.

 

그러나 후에 낙랑국은 위만과 한나라에게 점령되었다.

이곳을 점령한 한()나라는 이 지역을 요동군과 낙랑군으로 쪼개 놓았다.

 

즉 낙랑군은 번조선지역에 한나라가 설치한 행정구역상의 낙랑군이다.

 

따라서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은 우공갈석과 요수(今 조백신하)사이에 있었고,

한사군은 한반도에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라 하북성에 설치된 것이다.

 

 

<남려성에서 위만을 정벌하다>

 

癸丑 四十二年 帝 躬率 步騎一萬 破滿賊 於南閭城 置吏

 

계축 42(BC 128) 단제께서는 몸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녀성에서 위만 도적떼를 격파하고 그곳에 관리를 주둔시켰다.

 

참고 <남여성(南閭城)은 창해군(蒼海郡)>

 

중국 기록에 의하면 남여(南閭)는 창해군(蒼海郡)의 제후다.

남여(南閭)를 우리 역사서에서는 창해역사(蒼海力士)라 칭한다.

창해군은 현재 중국의 천진 지역이다.

 

남여(南閭)는 위만이 번조선을 권모술수로 멸망시키자

요동인 28만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한나라는 그들을 천진 지역에 살도록 하였다.

 

중국은 이 천진 지역을 창해군이라 칭하고, 남여를 창해군의 제후로 봉하였다.

이 창해군을 <북부여기>에서는 남여성(南閭城)이라 칭한 것이다.

 

그 후 한나라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창해군에서 군대를 징발한 일이 있다.

하지만 창해군의 군대는 한나라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흉노는 진조선의 별종으로 번조선과는 같은 조선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나라는 1년 후 창해군을 폐하고 요동군에 편입시켰다.

 

북부여의 3세 단군인 고해사(高奚斯)위만을 격파한 지역은 천진 지역이다.

 

 

<일군국(一群國)의 사신이 방물을 바치다>

 

경신 49(BC 121) 일군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방물, 특산물)을 바쳤다.

이해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우루가 즉위하였다.

 

 

<고우루(高于屢) 단제{德皇(BC140-BC111)}의 등극>

 

4세 단군 고우루(일명 해우루)의 재위 기간은 9년이다.

 

신유 원년(BC 120)에 장군을 파견하여 우거(右渠){위만의 손자}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今 )을 지키도록 하였다.

 

고진(高辰)은 병력을 증강하고,

많은 성책을 쌓아 우거의 침략을 막는데 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를 고구려의 제후로 승격시켰다.

 

 

<위만이 해성(海城)을 점령하다>

 

계해 3(BC 118)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여 노략질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대패하여 해성(海城)

그 북쪽 50여리 땅을 모두 빼앗겼다.

 

 

<해성(海城)을 탈환하다>

 

갑자 4(BC 117) 단제께서 장군을 파견하여 3개월 동안 해성을 공격하였으나

탈환하지 못하였다.

 

병인 6(BC 115) 단제께서 친히 정예병 5000명을 이끌고

해성을 습격하여 대파하고, 그들을 살수(薩水)까지 추격하였다.

구려하(九黎河)동쪽이 모두 항복하였다.

 

살수(薩水)는 지금의 백하(白河)이다.

 

 

<좌원(坐原)에 목책을 설치하다>

 

정묘 7(BC 114) 좌원(坐原)에 목책을 설치하고,

남여(南閭)에 군대를 주둔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애종의 화(禍)와 법황(法皇)의 등극>

 

기사 9년(BC112) 애종의 화(禍)로 

고우루(高于屢) 단제{德皇(BC140-BC111)}가 죽고

경오년(BC111)에 법황을 단제로 세움.

 

 

<한사군 설치>

 

癸酉十三年 漢劉徹 寇平那 滅右渠 仍欲易 置四郡 盛以兵四侵

 

계유 법황4(BC 108) 한나라 유철(劉徹)이 평나(平那)를 침략하여

우거(위만의 손자)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지역에 사군을 설치하였다.

사군 병사들의 침략행위는 더욱더 심해졌다.

 

於是 高豆莫汗 倡義起兵 所至連破漢寇 遺民四應 以助戰 軍報大振

 

이에 고두막한(高豆莫汗){모수제(BC118-BC59)}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들을 연파하였다.

유민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도왔다.

고두막한의 군대는 크게 적을 무찔러 유민의 호응에 보답하였다.

 

 

甲午三十四年 十月 東明國 高豆莫汗 使人來告 曰 '我是天帝子 將欲都之 王其避之'

帝難之

是月 帝 憂患成疾以崩 皇弟 解夫婁立

 

갑오 34(BC 87) 10월 동명국 고두막한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장차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그곳을 비워 주시오."라고 하였다.

 

단제께서는 난처해 하였다.

이 달에 단제께서는 우환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황제(해우루)의 동생 해부루가 즉위하였다.

 

동명왕은 군사를 동원해 협박을 늦추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들은 더욱 난처해졌다.

 

이때 국상 아란불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통하(송화강)의 동쪽 가섭원에 땅이 있는데,

그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오니

그곳을 도읍지로 정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왕은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겼다.

 

이것이 가섭원{今 파림좌기} 부여다. 혹은 동부여라고도 한다.

 

법황의 재위기간은 35년이고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국한 때는 법황 18년 BC 94년이다.

 

 

 

<고두막(高豆莫) 단제{모수제(BC118-BC59)}의 등극>

 

5세 단군 고두막(일명 두막루)의 재위기간은 18년이다

을사년이 원년이다. 이 해는 법황 36년(BC 76년)이다.

 

단제의 사람 됨됨이(帝爲人)는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며(豪俊) 병사들을 잘 다루었다.

 

단제께서는 일찍이 북부여가 쇠퇴하고,

한나라 도적들이 번성(熾盛)하는 것을 보시고, 분연히 일어나 세상 구할 뜻을 세웠다.

 

혹자들은 (그가 고조선 47대 단군인)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