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始皇26年(BC221) ... 秦已幷天下, 乃使蒙恬將三十萬衆北逐戎狄, 收河南.

(築長城) 因地形, 用制險塞, 起臨洮, 至遼東, 延袤萬餘里. ”

 - 史記「몽념열전」

 

秦제국은 이미 천하를 병합하였으므로 곧 몽념을 시켜 30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북쪽의 융적을 쫓고 하남을 회수하였다.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에 따르고 험한 요새를 이용하였는바

臨洮(임조)에서 시작하여 遼東에 이르렀는데 그 길이는 만여 리나 되었다.

 

진(秦)의 燕 침공(BC222)과 장성 축조에 시달리던 연의 많은 유민이

북부여와 진(辰)으로 유입되었다가 진(辰)이 한반도 남부로 건너오게 된다.

 

진시황이 북쪽 지방을 순무하면서 상군(上郡)을 지나서 도성으로 돌아왔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파견되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로 인하여 참위(讖緯)의 글월을 상주하였다.

 

거기에는 "秦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秦을 멸망시킨 사람은 胡亥인데, 秦始皇은 오히려 胡人이라고 여겼다.)

 

이에 진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군사 30만 명을 일으켜서

북쪽으로 胡人을 공격하게 하여 河南지역을 점령하였다.

 

秦나라의 명장으로 匈奴를 토벌하는 싸움에서 공을 세운 <몽염(?-BC210)>은

후에 秦 二世에 의해서 핍박을 받다가 자살하게 된다.

 

 

始皇33년(BC214)

 

병역이나 노역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 집이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노예가 된 사람,

장사하는 사람 등을 징발하여 육량(陸梁) 지역을 공격하여

계림(桂林), 상군(象郡), 남해(南海) 등의 군(郡)을 설치하고,

죄를 지어 유배된 사람들을 보내서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서북쪽의 흉노를 쫓아버렸다.

 

유중(楡中)으로부터 황하를 따라서 동쪽으로 음산(陰山)에 이르기까지

44개 현을 설치했고, 황하 연변에 성곽을 쌓아서 요새로 삼았다.

 

또 몽염으로 하여금 황하를 건너

고궐(高闕), 양산(陽産), 북가(北假)일대를 빼앗게 하였고,

요새를 쌓아서 융인(戎人)들을 몰아내게 하였다.

 

유배된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새로 설치한 현을 충실하게 하였다.

 

명을 내려서 제사를 금지시켰다. 혜성이 서쪽에서 나타났다.

 

 

 

만리장성은 전국시대에 조,연,진 세 나라가 쌓은 장성을 

진시황이 통일 후 연결해 지은 것이 시초이다.

 

하지만 이 장성은 진나라의 붕괴와 함께 한동안 역사의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한무제가 그 후에 한 번 더 대규모 공사를 해서 장성의 위치가 이전되었으며,

그 길이도 진나라 시절보다 길어진다.

 

그 이후 後漢代 까지는 잘 유지되어 왔지만

후한 말 이후 사회 혼란과 분열로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서서히 무너져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명나라 시대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완성되었다.

 

현재 부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의 장성을 말한다.

 

秦대와 明대 장성은 위치도 상당히 달라서 사실상 다른 장성(長城)이다.

 

현재에도 진-한 시대에 쌓은 장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진시황이 연결해서 지은 장성은

지금의 벽돌이 아닌 흙을 이용해 지은 토성의 형태였고

높이도 높지 않은데다가 지켜야 할 영역이 워낙 넓다보니 감시도 소흘해서

사람이나 말이 맘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곡괭이 등으로 성벽을 허문다음에 우르르 몰려가서

만리장성 아래를 개박살 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나라 다음 왕조인 한나라 시기만 봐도

한고조 유방부터 한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북방의 흉노에게 개 관광당하기에 바빴고,

삼국시대와 서진시대를 거쳐서는 북방이 전부 북방민족의 손에 넘어가기에 이른다.

 

그 이후에도 요, 금, 원 등 숱하게 황하 이북을

북방민족에게 넘겨줬던 시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것의 효용성 자체에는 큰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도 많다.

 

사실 정말 방어의 목적만으로 만리장성을 지었다면 그만한 놀부 심보도 없는데

당장 해자를 비롯한 온갖 방호시설로 떡칠을 하는 본격적인 성도 함락되는 판에

달랑 성벽 한 겹으로 본격적인 군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유목과 농경을 나누는 경계선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화북과 몽골고원은 지형적으로 적절한 방어선이 부족한 편이며,

이 때문에 인위적인 경계선을 만들고 그것을 기준삼아서

유목과 농경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비록 만리장성을 돌파하기는 용이하였으나 대군이 통과할 길목은 한정되어있었고,

그 때문에 마치 강과 같은 방어능력을 보여준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조선이나 로마의 국경이 자주 뚤렸다고

강 방어선의 효과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동일한 것이다.

 

중국은 단지 그 역할을 할 자연적 지형이 부족해서

인위적이나마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명,청 교체기 당시 이미 청은 만리장성을 넘나들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경우 후방 고립의 문제 상 작전기간은 제한적이었고,

중국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항복하여

산해관의 통제권을 얻은 다음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길목을 통제하고 대규모 적의 침공을 막거나 지연시키는 역할로

만리장성은 그 가치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장성의 역할이 성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장성이 없었다면 화북은 유목민의 침공 및 약탈에 더 시달렸을 것임이 자명하다.

 

물론 완성은 진시황 때가 아니지만, 시초는 진시황으로 보는 게 맞다면

사마천이 이를 빼놓지 않고 진시황본기에 서술했을 것이 분명한데,

본기에 왜 적혀있지 않는 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각종 갈석산과 만리장성>

 

 

 

- 각종 장성들

 

 

<趙 長城(타원표시)>

 

우측 하북성 준화(遵化) 아래 붉은 원으로 표시한 요서(遙西)가 보인다.

그 왼쪽으로 보정시 동북에 자형관과 도마관이 있고,

대현에 안문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경의 동북쪽 밀운을 감싸고 도는 지금의 조백신하가 요수이고

안문관 위쪽이 유주(幽州)의 치소가 있던 계성(薊城)이 있었던 곳이다.

도마관, 자형관으로 연결된 장성이 연(燕)과 조선의 경계이다.

보정시 서남의 정주(定州)시가 수(隋)와 당(唐) 때의 탁군이다.

고수전쟁과 고당전쟁 시 최전방이 유주와 탁군이며

수 양제와 당 태종이 군사를 집결하여 출병한 곳이 바로 이 탁군이다.

수 양제 <양광>과 당 태종 <이세민>이 요녕성의 요동을 정벌하는데

수 천리 떨어진 탁군에서 출병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양광>과 <이세민>이 정신병환자인가?

 

 

<趙 長城>

 

 

산서성 대의 서북 안문관에서 서북쪽 내몽고 방면으로 뻗어 올라간다. 

 

 

 <趙 長城>

 

 

 <중국인 학자가 보는 융적지(九原, 云中, 定襄)와 秦漢 長城>

 

 

조장성의 동쪽 경계는 요하가 아니라 정양이다.

 

 

 

<秦 長城 東部>

 

 

 

<중국인들이 보는 秦 長城; 감숙성 민현에서 섬서성 동북 수덕까지

 

 

<遂城과 燕 南部長城>

 

 

수성이 진장성과 조장성을 연결한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수성에서 자아하까지의 장성은 언제 누가 쌓은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장성이다.

 

연 소왕이 제를 정벌한 후 흙으로 쌓은 장성일 것으로 추정한다.

 

 

 

<秦, 趙, 燕 長城>

 

 

조양(今 장가구시 회래)에서 양평(縣)까지의 장성은

진개 동정 후 쌓은 연(燕) 장성이며

縣에서 산해관까지의 장성은 명나라때 쌓은 명장성이다.

 

 

 

 

<齊長城>

 

 

제장성은 북방 동이족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가장 견고하게 쌍은 장성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