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중국을 처음 평정하여

한왕(韓王) <신信>을 대(代)로 옮겨 마읍(馬邑)에 도읍하게 했다.

 

 

흉노가 대거 공격해 마읍을 포위하자 <한신韓信>은 흉노에 항복했다.

 

 

흉노는 <한신>을 얻고는 이내 군사를 이끌고 구주(句注)산을 넘어

태원(太原)을 공격하여 진양(晉陽) 아래에 도착했다.

 

 

고제(高帝) 한 고조 <유방劉邦>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공격했다.

 

 

때마침 겨울이라 매우 춥고 눈비가 내려

병졸 중에 (동상으로) 손가락을 잃은 자가 열 중 둘, 셋에 이르렀다.

 

 

이에 <묵돌>은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하여 한나라 군대를 유인했다.

 

 

한나라 군대가 <묵돌>을 뒤쫓으며 공격하니,

<묵돌>은 정병(精兵)을 숨겨두고 여위고 약한 군사를 내보였다.

 

 

이에 한나라는 전군을 투입하여 보병이 많은 32만 군사로 북쪽으로 흉노를 뒤쫓았다.

 

 

고제(高帝)가 먼저 평성(平城)에 도착하고 보병들이 아직 다 당도하지 않았을 때,

 

<묵돌>이 정병 30여 만 기를 풀어

백등(白登)에서 고제(高帝)를 포위하여 7일이 지나니

한나라 군대는 안팎으로 서로 구원하거나 군량을 대지 못했다.

 

 

흉노 기병은 그 서쪽은 모두 흰색 말(白), 동쪽은 모두 푸른색 말(駹),

북쪽은 모두 검은색 말(驪), 남쪽은 모두 붉은색 말(騂馬)을 타고 있었다

 

 

이에 고제(高帝)가 사자를 시켜 은밀히 연지(閼氏)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자

 

연지가 <묵돌>에게 말했다,

 

 

“두 나라 임금이 서로 곤핍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어도 선우는 끝내 그곳에서 거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한나라 임금(漢主)은 신령하니 선우께서는 이 점을 살피십시오.”

 

 

<묵돌>은 <한신>의 장수 <왕황王黃>, <조리趙利>와 (합류하기로) 약속했으나

그 군대가 오래도록 오지 않자 그들이 한나라와 일을 꾸미는 것으로 의심했고

또한 연지의 말을 들어주어 이내 포위망의 한 쪽을 열어주었다.

 

 

이에 고황제(高皇帝)는 사졸들에게 모두 활을 바짝 당겨 잡고

활시위를 채워 밖으로 겨누게하여 포위가 풀린 쪽을 통해 곧바로 빠져나가

대군(大軍)과 합류하니, <묵돌>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한나라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으며,

<유경劉敬>을 사자로 보내 화친의 약속을 맺었다.

 

 

<진평陳平>은 대(代)에서 한왕 <신>을 공격하는데 종군했다.

 

 

평성에 도착해 흉노에 의해 포위되어 7일 동안 먹지 못했다.

 

 

고제(高帝)가 <진평>의 기이한 계책(奇計)을 써서

선우의 연지(閼氏)를 이해시키고 포위망을 열게 하였다.

 

 

고제가 빠져나온 뒤 그 계책을 비밀로 숨기니 세간에서 이를 들어서 알 수 없었다

 

 

이후 <한신韓信>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조리趙利>, <왕황王黃>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약속을 위배해 대(代), 안문(鴈門), 운중(雲中)을 침도(侵盜)했다.

 

 

얼마 후(居無幾何) <진희陳豨>가 모반하고는 <한신>과 공모해 대(代)를 공격했다.

(※ 고제기에 따르면 고조 10년, BC 197년 9월의 일)

 

 

한나라는 <번쾌>를 시켜 가서 공격하게 하고 대(代), 안문(鴈門), 운중군(雲中郡)의

현(縣)들을 다시 거두었으나 새(塞)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이무렵 한나라 장수들이 여러 차례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흉노에 항복하니

이 때문에 <묵돌>은 늘 대(代) 땅을 넘나들며 침도(侵盜)했다.

 

 

이에 고조(高祖)가 이를 근심하여 <유경劉敬>을 시켜

종실의 딸인 옹주(翁主)를 바쳐 선우의 연지로 삼게 하고,

매년 흉노에게 일정한 양의 서(絮-솜), 증(繒-비단), 술과 식물(食物-음식)를 바치며

형제(兄弟)가 되어 화친할 것을 약속하자 묵돌이 다소 (침범하는 것을) 멈추었다.

- <한서 흉노전>

 

 

 

 

<BC 200년 백등의 위치>

 

 

 

吾聞冒頓之方盛也控弦七十万 猶以爲未足 而常隱其精銳

見其老弱 劉季之侵平城也 将三十万以欲泥之 豈意冒頓已有百万之衆

選其精銳四十万 以圍季他皆攻滅漢兵 如虎搏兎

季膽寒 遣其妻以請和 遂遺觧袴之辱 於千載 <추모경>

 

            

내가 듣기엔 <모돈>(묵돌)은 그 기세가 한창일 때 강현(궁수)이 70만인데, 

오히려 부족하다하고 항상 그 정예를 숨겼다하오.

 

 

그들이 힘이 없다고 판단한 유계가 평성을 침범한 것이오.

 

 

30만을 이끌고 그들을 짓이겨 놓으려 하였으나, 

어찌 모돈이 이미 100만의 무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겠소.

 

 

그 중 정예 40만을 선발하여 유계를 다른 곳으로 포위해 놓고

나머지 모든 병사가 한나라 병사들을 쳐 없앴는데 마치 호랑이가 토끼를 잡듯 하였소.

 

 

유계는 간담이 서늘해져서 그의 처를 보내 화의를 청하였고,

마침내 바지를 벗어 내리는 치욕을 천년에 남겼소이다.

 

 

 

BC 200년 漢 고조 7년에 일어난 漢匈전쟁을 말한다.

 

이른바 유방의 평성지치(平城之恥), 백등산의 굴욕이다.

 

 

한서 흉노전에서는 점잖게 표현하여 <진평>이 기이한 계책을 써서

선우의 연지(閼氏)를 이해시키고 포위망을 열게 하여 유방이 빠져나온 뒤

그 계책을 비밀로 숨기니 세간에서 이를 들어서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비밀로 숨긴 그 계책이 무엇일까?

 

 

신하들이 왕의 호칭을 추모에서 대선우(大單于)로 바꾸라 하자, 

이에 대한 대답에서 추모가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힘이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예를 들면서

<유방>의 처 <여치呂稚>가 바지를 벗어 내리는 치욕을 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백등산에 포위되어 일주일을 굷었으니 무슨 짓인들 못 하였겠는가?

 

 

이 고생을 한 <유방>은 후손들에게 다시는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유언 때문일까?

 

 

漢 元帝는 <호한야>의 협박에 <왕소군王昭君>을 보내고 홀로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는 漢의 걸출한 영웅 무제가 나타나 漢匈전쟁은 다시 이어진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