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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5.15 화엄경

 

 

 

 

 

● 화엄경華嚴經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산스크리트 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현재의 형태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유통되다가

후에 화엄경으로 만들어졌는데,

필경 중앙아시아에서 4세기경 집대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각 장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것은 「십지품十地品」으로,

그 연대는 1~2세기경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이다. (두산백과 참조)

 

십지품」은 따로 십지경十地經ㆍ십주경十住經으로 독립된 경전으로 전하기도 한다.

 

● 화엄경의 수행체계

「십주十住품」, 「십행十行품」, 「십회향十回向품」, 「십지十地품」으로

각각은 본래 독립적인 경전이다.

 

이후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의 순서로 승급ㆍ승단 체계가 보편화 된다.

 

그러나 1주와 1행과 1회향과 1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각각을 동일한 단계로 보아야 옳다.

 

1. 10신信 (참나를 믿음)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서 기원함.

① 신심信心

② 염심念心

③ 정진심精進心

④ 정심定心

⑤ 혜심慧心

계심戒心

⑦ 회향심廻向心

⑧ 호법심護法心

⑨ 사심捨心

⑩ 원심願心

 

2. 10주住 (보살의 안주, 참나를 밝힌 공덕에 안주)

 

① 발심주發心住(바라밀을 닦아 자리이타를 이룰 것을 발심)

② 치지주治地住(수행의 토대를 닦음)

③ 수행주修行住(출세간의 지혜를 얻음)

④ 생귀주生貴住(출세간의 지혜에 근거하여 세간법을 닦음)

⑤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세간법에서 방편을 원만하게 함)

⑥ 정심주正心住(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둘이 아님을 깨닫고,

공성의 지혜로 마음을 바르게 함)

⑦ 불퇴주不退住(무생법인의 광명을 얻어 출세간과 세간에 집착이 없어짐)

⑧ 동진주童眞住(공성에 노력 없이 안주하며 자연스럽게 자리이타를 행함)

⑨ 법왕자주法王子住(세간법과 출세간법을 자유로이 설법하는, 법왕의 태자가 됨)
⑩ 관정주灌頂住(관정을 받고 여래의 지혜를 성취)

 

3. 10행行 (보살의 실천, 참나의 뜻대로 실천)

① 환희행歡喜行(환희에 가득 찬 실천, 보시)

② 요익행饒益行(중생을 넉넉히 이롭게 하는 실천, 지계)

③ 무위역행無違逆行(참나의 뜻을 어기지않는 실천, 인욕)

④ 무굴요행無屈橈行(굽히고 꺾임이 없는 실천, 정진)

무치란행無癡亂行(어리석고 어지러움이 없는 실천, 선정)

⑥ 선현행善現行(공성을 세간에 잘 나타내는 실천, 지혜)

⑦ 무착행無著行(집착이 없는 실천, 방편)

⑧ 난득행難得行(얻기 어려운 공성에의 노력 없는 안주를 얻는실천, 원願)

⑨ 선법행善法行(세간ㆍ출세간법을 자유자재로 설법하는 실천,역力)

⑩ 진실행眞實行(진여 그대로의 실천, 지智)

 

4. 10회향廻向 (보살의 회향, 모든 공덕을 공양함)

①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보시, 일체 중생을 구호하되 중생상을 떠나는 회향)

② 불괴회향不壞廻向(지계, 자리이타의견고한 토대를 갖춘 회향)

③ 등일체불회향等一切佛廻向

(인욕, 모든 선근을 공양하여 일체의 부처와 평등한 회향)

④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정진, 선한 힘이 일체처에 이르는 회향)

⑤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선정, 다함이 없는 공덕이 갖춘 회향)

⑥ 입일체평등선근회향入一切平等善根廻向(지혜, 일체의 평등한 선근에 들어간 회향) ⑦ 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

(방편, 일체의 중생을 자타일여로 평등하게 따르고 교화하는 회향)

⑧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원願, 진여의 형상을 한 회향)
⑨ 무박무착해탈회향無縛無著解脫廻向(역力, 얽매임과 집착이 없이 해탈하는 회향)

⑩ 입법계무량회향入法界無量廻向(지智, 법계에 들어감에 한량이 없는 회향)

 

* 불교의 3가지 회향廻向

 

① 실제회향(참나에게 모든 공덕을 공양함),

② 중생회향(일체 중생을 자신처럼 사랑하여 공덕을 중생에게 공양),

③ 보리회향(공덕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바침) - 최고의 영적 재태크!

 

5. 10지地 (보살의 단계, 참나를 밝힌 단계ㆍ영성을 계발한 단계)

① 환희지歡喜地

② 이구지離垢地

③ 발광지發光地

④ 염혜지焰慧地

난승지難勝地

⑥ 현전지現前地

⑦ 원행지遠行地

⑧ 부동지不動地

⑨ 선혜지善彗地

⑩ 법운지法雲地

 

* 1지의 단계 : 1주의 머무름, 1행의 실천, 1회향의 회향을 갖춤.

 

따라서 본래 1주 보살은 1지 보살을 말한다.

 

초발심이 바로 견성이라는 것(初發心是便正覺)이 화엄도리.

 

* 10신(믿음, 信 / 10신 안에 또 신해행증信解行證이 있음)→ 10주(이해, 解)→
10행(실천, 行)→ 10회향(실천, 行)→ 10지(증득, 證)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

그러나 화엄경의 본의는 아님.

 

이 견해에 의해서 볼 때도

이미 1주에 지관쌍운止觀雙運(선정 바라밀과 반야 바라밀을 얻음)을 이루어

부분적 견성을 했다고 봄.

다만 법신을 부분적으로 봄. 온전한 견성은 1지 보살에서 가능).

 

대승시기신론도 이 견해를 주장함.

 

* 각 지地별로 ‘입入➛주住➛만滿’의 3시기를 거침.

 

주住ㆍ만滿의 시기는 대개 오랜 시기를 머문다. (성유식론成唯識論)

 

* 바둑의 승단체계와 비교

① 수졸守拙(6바라밀을 겨우 지킬 줄 앎)

② 약우若愚(아직 부족하지만 6바라밀을 나름대로 실천함)

③ 투력鬪力(6바라밀에 대한 이해가 확립되어 싸울 힘을 갖춤)

④ 소교小巧(6바라밀을 적용함에 기교를 부림)

⑤ 용지用智(6바라밀을 자명하게 이해하여 지혜를 쓸 줄 앎)

⑥ 통유通幽(6바라밀을적용함이 심오해짐)

⑦ 구체具體(상수上手, 6바라밀의 발현이 균형을 이루어 온전해짐)

⑧ 좌조坐照(준명인準名人, 6바라밀의 발현이 정밀해짐)

입신入神(명인名人, 6바라밀의 발현이 신령해짐)

 

● 대승기신론의 수행체계

3가지(발심)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신인信忍]
해행발심解行發心[순인順忍]
증발심證發心[법인法忍]

 

1. 신성취발심(1주住의 돈오, 정혜쌍운定慧雙運)

그런데 ‘믿음을 성취한 발심’(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떤 마음을 발한다는 것인가?

 

대략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3가지는 어떤 것을 말하는가?

 

① 첫째는 ‘직심直心’(곧은 마음)이니

‘진여법’을 바르게 알아차리기 때문이며(자리이타自利利他의 근본),

 

② ‘심심深心’(깊은 마음)이니

모든‘선한 행위’를 쌓아가기를 즐기기 때문이며(자리自利),

 

③ 셋째는 ‘대비심大悲心’(큰 자비의 마음)이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려 하기 때문이다(이타利他).

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說有三種 云何爲三 一者直心 正念眞如法故
二者深心 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

 

2. 초발심보살(1주住 보살,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성취

 

보살(초발심 보살)이 이러한 3가지 마음을 발하면 ‘법신’을 조금 볼 수 있다.

菩薩發是心故 則得少分見於法身

 

① 지止의 수행

만약 ‘지止’를 닦는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단정히 앉아, 생각을 바르게 하고,

‘호흡’에도 의지하지 않고, ‘형체ㆍ색깔’에도 의지하지 않고,

‘허공’에도 의지하지 않고, ‘지수화풍’에도 의지하지 않고,

‘보고 듣고 깨달아앎’(경험적인 앎)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모든 ‘형상’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내려놓고

또한 내려놓았다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한다.

 

일체의 ‘법’(사물)이 본래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본래무상本來無相),

순간순간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불생불멸不生不滅).

또한 먼저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분별하지 말 것이며,

뒤에 마음으로 (분별하지 않는다는) ‘마음’까지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마음이 이리저리 치달리거든 곧장 거두어들여

‘바른 알아차림’(正念)에 안주하게 해야 한다.

 

‘바른 알아차림’이란 ‘오직 마음뿐!’으로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뒤에 다시 이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또한 자체의 형상이 없어서 순간순간 그 형상을 얻을 수가 없다.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 隨念皆除 亦遣諸想

以一切法 本來無相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不得隨心外念境界

後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攝來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唯心 無外境界 卽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만약 앉거나 일어나고 가고 오고 나아가고 멈추는, 행위를 하는 일체의 때에,

늘 ‘방편’(오직 마음뿐! 오직 모를 뿐! 정념에 안주하기)을 알아차리며
순차적으로 관찰하여, 오래도록 익혀 순수해지고 성숙해지면

그 ‘마음’이안주하게 된다.

 

(몰입 4단계, 정념正念에 안주하게 됨, 정사마타 즉 1선근분정近分定에 도달.

이때 진여가 선명히 드러나게 됨. 견성8급,

소승 수다원의 경지, 견성의 체험, 참나를 일별함.)

 

마음이 안주하게 되면 점차 매우 예리해져 순차적으로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게 된다.

 

(사마타를 바탕으로 일념집중 상태에서,

세간의 지혜와 출세간의 지혜를 얻는 4단계의 위빠사나를 겸하여 닦아가면서,

점차 단계를 밟아 견성1급에 이르게 됨.

[觀]정[止]일여, 지관쌍운의 경지에 이르게 됨.

언제 어디서나 참나를 늘 주시하는 삼매, 무념 즉 진여삼매, 본연삼매,

지관쌍운에 들어가게 됨.

소승의 아라한 경지, 선불교의 확철대오의 경지. 대승의 1주의 경지.

1주에서는 진여를 조금 보게 됨.)

 

그러면 번뇌를 깊이 항복받고 ‘믿는 마음’이 자라나서,

신속하게 후퇴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의혹ㆍ불신ㆍ비방ㆍ무거운 죄ㆍ업장ㆍ‘나’에 대한 오만함ㆍ나태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와같은 사람은 (진여삼매에) 들어갈 수 없다.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觀察 久習淳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唯除疑惑 不信誹謗 重罪業障 我慢懈怠 如是等人 所不能入

 

② 관觀의 수행

만약 사람이 오로지 ‘지止’만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나태한 마음이 일어나서,

여러 ‘선행’을 즐기지 않을 것이며(자리自利를 닦지 않음),

‘큰 자비’를 멀리 떠나게 될 것이다(이타利他를 닦지 않음).

 

이런 사정 때문에 ‘관觀’을 닦아야 한다.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이와 같이 원을 세웠기에,

일체의 때와 일체의 장소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온갖 선한 것을 실천하고 배워서 마음이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以起如是願故 於一切時一切處 所有衆善 隨己堪能 不捨修學 心無懈怠

 

앉아서 ‘지止’에 전념할 때는 제외하고는, 일체의 때에

 

① ‘응당 해야 하는 것’(응작應作)과

② ‘응당 해서 안 되는 것’(불응작不應作)을 마땅히 남김없이 관찰해야 한다.

 

가고 머무르며, 눕고 일어날 때 모두 응당 ‘지止ㆍ관觀’을 함께 행해야 한다.

 

이른바 비록 일체의 법(사물)의 본성은 생겨나지 않음을 알아차리더라도,

다시 ‘인연의 화합’과 ‘선악의 과보’가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비록 ‘인연’과 ‘선악의 업보’를 알아차리더라도,

또한 그 ‘본성’(일체 법의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唯除坐時專念於止 若餘一切 悉當觀察應作不應作 若行若住 若臥若起

皆應止觀俱行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 而復卽念因緣和合

善惡之業 苦樂等報 不失不壞 雖念因緣善惡業報 而亦卽念性不可得

 

3. 1주住 돈오 이후 점수(6바라밀의 닦음)의 필요성

‘진여법’의 ‘본체’와 ‘본성’은 텅 비고 청정하나,

한량이 없는 번뇌에 의해 오염되고 더렵혀져 있다.

 

만약 사람이 ‘진여’를 알아차리더라도,

‘방편’으로 훈습하고 닦지 않는다면 청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때가 한량이 없어 온갖법(오온五蘊,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걸쳐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을 닦아서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일체의 선행을 닦는다면

자연히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 따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眞如之法體性空淨 而有無量煩惱染垢 若人雖念眞如 不以方便種種熏修

亦無得淨 以垢無量遍一切法故 修一切善行以爲對治 若人修行一切善法

自然歸順眞如法故

 

4. 해행발심(돈오 이후의 점수, 1지地 이전)

이 보살(해행발심解行發心)이 처음 바르게 믿은 이래로(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첫 번째 아승지겁(무수겁無數劫)에 이르러 원만해지고자 하면,

‘진여법’에 대해 깊은 이해가 현전하며, 닦는 바가 형상을 떠나 있다.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 於第一阿僧祗劫將欲滿故 於眞如法中 深解現前 所修離相

 

5. 6바라밀(지관쌍운止觀雙運에 안주시 1주住, 1주 이후에 ‘바라밀’)

① ‘법성法性’(진여법의 본성)은 탐욕이 없음을 몸으로 삼음을 이해하였기에,

법성에 순응하여 ‘보시布施 바라밀’(단 바라밀)을 닦으며,

 

② ‘법성’은 오염되지 않아 5욕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이해하였기에,

법성에 순응하여 ‘지계持戒 바라밀’(시 바라밀)을 닦으며,

 

③ ‘법성’에 고뇌가 없어서 성냄과 번뇌를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법성에 순응하여 ‘인욕忍辱 바라밀’(찬제 바라밀)을 닦는다.

 

④ ‘법성’에 몸과 마음의 형상이 없어서 나태함을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법성에 순응하여 ‘정진精進 바라밀’(비리야 바라밀)을 닦으며,

 

⑤ ‘법성’이 항상 안정되어 있어서 어지럽지 않음을 몸으로 삼음을 이해하였기에,

법성에 순응하여 ‘선정禪定 바라밀’(선나 바라밀)을 닦으며,

 

⑥ ‘법성’이 광명함을 몸으로 삼아 어두움을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법성에 순응하여 ‘반야般若 바라밀’(반야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 6바라밀의 점검, 매사에 참나의 뜻인 6바라밀을 온전히 구현했는가?

(깨어있는 마음으로 에고를 내려놓고, 참나의 반응을 관찰하라.

내면에서 자명하고 뿌듯한 느낌이 일어날 때와 찜찜하고 불편한 느낌이 일어날 때,

6바라밀로 점검하여 보면,

참나가 늘 6바라밀로 굴러가고 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① 선정바라밀 (참나의 고요함)

 

평정심을 유지하는가?

② 보시바라밀 (참나의 욕심 없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익도 배려하였는가?

③ 지계바라밀 (참나의 청정함)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상대방에게 가했는가? 욕심의 유혹을 이겨냈나?

④ 인욕바라밀 (참나의 조화로움)

상대방의 입장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수용하였는가?

 

⑤ 정진바라밀 (참나의 성실함)

육바라밀을 실천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는가?

⑥ 지혜바라밀 (참나의 자명함)

나의 선택과 판단은 찜찜함이 없이 자명했는가?

(①~⑤ 방편바라밀, ⑥ 반야바라밀)

 

6. 증발심(1지地 ~ 10지地, 법신 보살, 반야방편쌍운般若方便雙運)

‘도를 증득하는 발심’(증발심證發心, 법신을 온전히 증득함)

즉 1지인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 구경지’(10지)에 이르기까지는

어떠한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주관, 에고)에 의지하여 ‘경계’(객관, 세계)를 설하는 것이니,

여기서 증득한 것은 경계가 없으며 오직 ‘진여의 지혜’(眞如智)일 뿐이니

‘법신’이라고 부른다.

證發心者 從淨心地 乃至菩薩究竟地 證何境界 所謂眞如

以依轉識說爲境界 而此證者無有境界 唯眞如智 名爲法身

 

 

● 대승불교의 성불관成佛觀

완전한 열반에 들어 3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초기불교의 성불관

(부파部波불교에서는 금강유정에 들어 진지盡知를 획득하면

완전한 열반을 얻는다고 봄)을 극복하고,

열반에 들어가지 않고 현상계에 머물면서 영원히 중생을 구제하는

궁극의 인간형을 제시하였다.

 

대승불교의 성불관에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는 기본적으로 부처님을 완전한 열반과

절대적인 전지ㆍ전능함을 갖춘 초월적 존재로 본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다만 구체적인 입장은 조금씩 다르다.

 

또한 이 2가지 전통은 한 경전에서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① 성불을 개체성의 소멸로 보는 입장

대승의 한 전통에서는 10지 보살들이 중생구제를 위해 성불을 거부한다.

부처님을 절대적 전지ㆍ전능의 존재로 보나,

그렇게 되려면 금강유정(금강삼매)에 들어가

개체성을 초월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여야 하니 성불을 거부함.

 

현상계 밖의 초월적 힘은 현상계 안의 중생의 업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없다.

 

초월적 힘이 존재해도 중생의 문제는 중생이 풀어야만 함.

 

따라서 중생을 도와주려면

중생성을 갖추고 현상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부처는 보살을 통해서 중생을 구제함. 

 

화엄경 특히 「십지품」에서는 부처님을 절대적으로 전지ㆍ전능한 존재로 보면서도,

10지 보살을 궁극적 목표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이는 결국 ‘여래’를 ‘비로자나불’로서 ‘우주의 대법신’이자 ‘우리의 법신’,

즉 전지ㆍ전능의 ‘불성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모든 여래들은
결국 전지ㆍ전능한 비로자나불의 여러 작용과 모습일 뿐이다.

화엄경에서 여래는 타종교의 현상계 너머의 비인격적 초월적 존재

(비인격신, 힌두교의 브라만, 기독교의 성부ㆍ성령,

유교의 무극○ㆍ태극⊙ㆍ황극⊕)와 같다.

 

왜냐하면 절대적 전지ㆍ전능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체성(중생성)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금강유정에 들어가(11지) 완전한 열반에 도달해야만(12지)

절대적 전지ㆍ전능을 얻게 되는데, 그러려면 개체성을 온전히 초월하게 된다.

 

그래서 화엄경은 색구경천의 주재자로서,

상대적 전지ㆍ전능을 얻어 중생을 구제하는 ‘10지 보살’을,

사실상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 경우에도 중생성을 버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여래를 최대한 구현한 것이다.

 

완벽한 여래의 분신은 아니다.

 

(화엄경에서 10지 보살은 2가지로 설명되니,

① ‘중생성’을 강조하여 중생성을 갖춘 여래로 설명되는 경우와(십지경),

② ‘여래성’을 강조하여 여래의 완벽한 분신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있음.

후자는 역시 개체로 보면 안 되고 비로자나불의 작용으로 보아야 함.

비로자나불의 여러 작용이 10지 보살로 설명되기도 함)

그러나 ‘중생성’을 잃어버리지 않기에 ‘보살’이다.

 

또한 중생성이 있기에 영원히 닦아가야 한다. 가장 합리적인 입장이다.

 

성불을 거부하고 현상계에 영원히 머물며 중생을 구제하는

상대적 전지ㆍ전능을 갖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이 전통을 대표한다.

(성불을 거부하는 입장)

 

 

* 화엄경

(해탈월 보살이 물었다.)

불자여, 만약 보살의 신통경계가 이와 같다면, 처의 신통력은 어떠합니까?

 

금강장 보살이 말하였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한 사람이 있어 4방의 천하에서 한 덩어리의 흙을 취하여 말하기를

 

‘끝이 없는 세계의 큰 땅이 많은가? 이 한 덩어리의 흙이 많은가?’라고 하였다.

내가 그대의 질문을 보면 이와 같을 뿐이다.

 

여래의 지혜는 끝이 없고 동등한 이가 없다.

 

어떻게 보살과 더불어 비교할 수 있겠는가?

佛子 若菩薩神通境界如是 佛神通力 其復云何 金剛藏言 佛子 譬如有人

四天下 取一塊土 而作是言 爲無邊世界大地土多 爲此土多

我觀汝問 亦復如是 如來智慧 無邊無等 云何而與菩薩比量 (십지품)

 

* 화엄경

만약 내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최고의 해탈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가 먼저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나의 본원本願(본래의 서원)을 어기는 것이니 마땅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먼저 최고의 깨달음과 완전한 열반을 얻게 하고, 그런 뒤에 성불成佛할 것이다.

(중생은 끝이 없기에 사실상 성불 거부, 성불을 중생구제의 장애로 생각)

若我不令一切衆生 住無上解脫道 而我先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則違我本願 是所不應 是故要當 先令一切衆生 得無上菩提 無餘涅槃 然後成佛

(십행품)

 

② 성불을 개체성의 유지로 보는 입장

또 다른 대승의 한 전통에서는

전지ㆍ전능의 부처님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10지 보살도 결국 금강유정金剛喩定(11지)에 들어 무명을 깨뜨리고

완전한 열반을 얻어서 성불(12지)해야, 절대적인 전지ㆍ전능을 갖춘

여래(힌두교의 신과 같은 존재)에 도달한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법신불로는 ‘비로자나불’(힌두교의 비인격신인 브라만에 해당함,

무명無明ㆍ마야를 초월한 신)을 강조하며,

현상계(색구경천)에 머물며 중생을 구제하는 보신불로는

‘아미타불’(힌두교의 인격신인 이슈와라에 해당함,

무명無明ㆍ마야 속에 존재하는 신, 브라마ㆍ비슈누ㆍ쉬바)을 강조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절대적으로 전지ㆍ전능한 부처도

현상계에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자유자재로 중생구제를 할 수 있으니,

10지 보살이 성불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다.

(성불을 해야 중생구제에서 자유자재하다는 입장)

 

그러나 부처를 무명을 깨뜨리고 완전한 열반에 들어갔다고 볼 경우,

현상계 안에 개체적 모습으로 머물면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개념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석가모니도 완전한 열반은 3계에서의 소멸로 보았다.

결국 색구경천의 주재자는 개체성을 유지하는 한,

대승불교의 절대적으로 전지ㆍ전능한 ‘부처’보다는

중생성을 지닌 여래의 분신인 ‘보살’로 보아야 합리적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이 극락정토의 교주라면

그는 화엄경의 10지보살(여래를 담은 중생)로 보아야 타당하다.

 

개체성을 유지하는 한 절대적으로 전지ㆍ전능한 부처로 보기는 힘들다.

(힌두교의 인격신도 마찬가지 이유로 모순에 빠지게 됨.

신이 독자적 개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모순된 논리.

전 세계의 모든 신화가 동일한 모순을 지님.

개체성으로 묘사되더라도 단일적 우주적 힘의 여러 작용으로 보아야 함)

 

그렇지 않다면 이미 성불까지 한 관세음보살이 성불을 거부하고

10지 보살에 머물 이유가 없다.

 

론 그 내면의 ‘여래성’을 강조하여 얼마든지 부처로 부를 수도 있다.

화엄경의 입장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

화엄경에 등장하는 모든 여래는 온 우주의 대법신(비인격신, 해인삼매)을 의미하며,

10지 보살이야말로 여래의 인격적 모습(보신ㆍ화신, 화엄삼매)이며,

인격을 갖추었기에 중생성을갖추고 있으며,

현상계의 특성 상 이원성과 인과법칙의 적용을 받으며,

단히 진보하여 한 없이 여래에 다가가는 존재이다.

 

* 힌두교의 전통

힌두교는 요가수드라에서 보이듯이, 전지ㆍ전능함을 얻더라도,

최후의 삼매를 통해,

참나만 홀로 빛나는 상태로 들어가야 진정한 해탈이라고 주장함.

 

이러한 입장은 '바가바드기타'에서도 동일하다.

 

초기불교는 힌두교와 비슷한 해탈론을 지니나

(현상계의 초월, 힌두교의 해탈의 경지),

대승불교에 이르게 되면 궁극의 경지에 이르면

오히려 절대적 전지ㆍ전능함을얻게 된다고 주장함

(현상계의 긍정, 힌두교의 신의 경지).

 

* 보살菩薩(보리살타)

‘보리살타’는 ‘보리’(菩提)와 ‘살타’(薩埵)의 합성어.

 

‘보리’(Bodhi)는 ‘도道’나 ‘지혜’, ‘깨달음’이며, ‘살타’(Sattva)는 ‘중생衆生’을 의미한다.

 

즉 ‘깨닫고자 하는 중생’, ‘깨달은 중생’을 의미.

① 보살은 ‘반야’의 지혜로 일체의 번뇌를 영원히 버리며,
‘방편’의 지혜로 일체의 유정을 버리지 않는다. (허공고경虛空庫經)

② 보살은 ‘반야’와 ‘방편’을 닦아서, ‘행위’는 윤회 속에 머물되

‘마음’은 열반 속에 머물게 된다.

(법집경法集經은 보살은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바라밀에 부합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강조)

③ 보살의 길은 ‘반야’와 ‘방편’을 두루 갖추어 ‘무주열반’을 얻는 것이니,
‘반야’의 힘에 의해서 윤회에 떨어지지 않으며,

‘방편’의 힘에 의해서 열반에 떨어지지 않는다. (수습차제修習次第)

④ 윤회를 싫어하고 미워함은 보살의 마업이다. (허공고경)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는 사실을

냉정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불교’라는 입장에서 서로를 하나로 묶으려고만 하면 서로 갈등만 더욱 커질 것이다.

 

서로에 대한 감정적 비난만 난무하게 될 것이다.

 

* 소승불교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일체의 업을 초월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5온의 부정, 윤회하는 인생의 게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

 

대승불교의 목표는 영원토록 현상계에 머물면서 선업을 짓는 존재가 되는 것

(5온의 긍정, ① 인생의 게임에서 만렙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거나,

② 게임의 관리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함).

 

* 대승불교에서 절대적 전지ㆍ전능자인 ‘법신불’ 비로자나불은

게임의 관리자에 해당함.

 

그렇다면 개체성을 갖춘 ‘보신불’인 아미타불은 관리자인가? 만렙인가?

 

대승경전에 보면 이 둘을 혼재하여 설명하나,

개체성을 갖고 있다면 초월적 관리자가 아니라, 만렙에 도달한 이로 보아야만 한다.

또한 비로자나불은 불성 자체이지 수행을 통해 도달한 존재가 아니다.

 

엄경에서 비로자나불을 수행을 통해 도달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불성 자체를 개체화시키고 제약한 것이라 모순이다.

 

우주엔 무시無始이래로 본래 법신이 존재해야 하므로.

또한 성불하여 비로자나불과 동등해진다는 것은 결국 개체성의 소멸일 뿐이며,

우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래 비로자나불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우주에는 중생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직접 손을 써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화엄경의 본지이다.

 

비로자나불이 있기에 우주법계는 본래 청정하며(해인삼매),
현상계 안에 머물면서 중생과 함께 호흡하는 보살이 있기에

비로자나불은 현상계 안에서 보살의 에고를 통해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화엄삼매).

 

*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넘어서 ‘보살도’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보살도’의 핵심은 ‘열반’과 ‘윤회’(5온)를 둘로 보지 않고,

늘 열반(여래)에 머물며(반야바라밀),

늘 생사를 떠나지 않으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방편바라밀, 나머지 5바라밀, 열반의 지혜ㆍ능력ㆍ자비)

 

궁극의 이상은 영원히 현상계에 머물면서 끝없이 5온을 청정하게 닦아가며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다.

 

* 해심밀경解深密經

여래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들어가지 않은 것도 아니다.

왜인가?

 

여래의 ‘법신’은 구경에 이르러 청정하나, 여래의 ‘화신’은 늘 나타나기 때문이다.

(보신報身은 1주 보살 이상이 명상하는 중에 나타나며, 화신化身은 범부에게 나타남,

완전한 열반에 든 뒤에도 개체성이 유지된다는 모순)

 

非入大涅槃 非不入大涅槃 何以故 如來法身 究竟淨故 如來化身 常示現故

 

* 능가경楞伽經

 

달마가 가장 강조하며 혜가에게 위촉한 경전(능가종)

① 어찌하여 욕계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지 않고,

무슨 이유로 색구경천에서 때를 벗고 보리를 얻는가?

云何於欲界 不成等正覺 何故色究竟 離染得菩提

② 여환삼매를 얻고(8지), 10지를 넘어서서 ‘심왕心王’을 볼 때,

생각과 식별을 모두 멀리 떠나게 된다.

 

이때 마음이 전의轉依되면(대원경지大圓鏡智) 상주하여,

연화궁(색구경천)에 있으면서 환幻의 경계를 일으킨다

(보신과 화신, 색구경천에 머무는 보신은

완전한 열반 이후 ‘개체성의 유지’라는 모순을 일으킴).

 

이미 저 궁에 머물면, 자유자재로 공용이 없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니,

무수한 색깔을 지닌 마니주와 같다.

(여래가 되어야 중생구제에 탁월해짐,

무명을 깨뜨리고 전지ㆍ전능해지면 개체성이 소멸됨.

색구경천에머문다는 것 모순)

得如幻三昧 超過於十地 觀見心王時 想識皆遠離 爾時心轉依 是則爲常住 
在於蓮花宮 幻境之所起 旣住彼宮已 自在無功用 利益諸衆生 如衆色摩尼

③ 이와 같이 일체법을 관찰하여 

‘심의식心意識’과 ‘5법자성’(명名ㆍ상相ㆍ분별分別ㆍ정지正智ㆍ진여眞如)을 떠남을,

보살마하살의 ‘법무아지法無我智’라고 이른다.

 

이러한 지혜를 얻으면 ‘경계’가 없음을 아니,

여러 경지(地)의 형상을 깨닫고 곧 1지에 들어간다.

 

마음에 환희가 생겨나고, 차례대로 점차 나아가,

선혜지(9지)와 법운지(10지)에 이르러 모든 행위가 다 갖추어지게 된다.

 

이 10지에 머물면 왕과 같은 여러 보배로 장엄한 큰 보배 연꽃이 홀연히 나타난다.

 

그 연꽃 위에 연꽃 모양의 보배 궁전(연화궁蓮花宮)이 있으니,

보살이 가서 ‘환성법문幻性法門’(만법은 자성의 환영)의 성취를 닦으며,

그 위에 앉는다.

 

함께 간 보살(佛子, 부처의 분신)들이 앞뒤로 둘러싸고,

일체 불국토에 계시는 여래들이 모두 그 손을 펴서,

전륜왕자의 관정하는 법처럼 그 정수리에 물을 부어주면,

불자의 경지를 뛰어넘어 ‘스스로 증득한 법’(自證法)을 얻어서

‘여래의 자유자재한 법신’(如來自在法身, 노력 없이 온 우주에 보신과 화신을

나툴 수 있는 과위의 전지ㆍ전능한 법신, 힌두교의 신의 경지)을 성취한다.

如是觀察一切諸法 離心意意識五法自性 是名菩薩摩訶薩

法無我智 得此智已知無境界 了諸地相卽入初地 心生歡喜次第漸進

乃至善慧及以法雲 諸有所 作皆悉已辦 住是地已 有大寶蓮花王衆寶莊嚴

於其花上有寶宮殿狀如蓮花 菩薩往修幻性法門之所成就

而坐其上 同行佛子前後圍繞 一切佛刹所有如來皆
舒其手 如轉輪王子灌頂之法而灌其頂 超佛子地獲自證法 成就如來自在法身

④ ‘법운지法雲地’(10지)에 이르러 관정灌頂을 받고 불지에 들어가니,

10가지 다함이 없는 서원으로 중생을 성취시키고자

갖가지 모습을 나타내어 쉼이 없으며,

늘 스스로 알아차리는 경계의 삼매의 뛰어난 즐거움에 안주한다.

(여래가 되어야 중생구제에 자유자재해진다! ↔ 화엄경의 입장)

應至法雲地而受灌頂 入於佛地十無盡願成就衆生 種種應現無有休息

而恒安住自覺境界三昧勝樂

⑤ 응당 이것이 ‘성문승의 종성’임을 알라.

 

그들은 자신의 승乘의 견해에서만 증득하였을 뿐이다.

 

이는 5지ㆍ6지 보살이 ‘번뇌의 결박’을 끊었으나 ‘번뇌의 습기’를 끊지는 못한 것이다.

 

‘불가사의한 생사’(변역생사變易生死↔ 분단생사分段生死)에 머물며

바로 사자후로 말하기를

 

“나는 이미 태어남을 다하였으며, 청정한 행위(梵行)는 이미 확립되었다.

해야 할 것은 이미 다 갖추어져서 다시는 뒤의 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

(석가모니의 오도송, 아라한의 오도송)라고 한다.

知此是聲聞乘種性 彼於自乘見所證已 於五六地斷煩惱結 不斷煩惱習

住不思議死 正師子吼言 我生已盡梵行已立 所作已辦不受後有 修習人無我

乃至生於得涅槃覺

⑥ 여래세존은 ‘관자재觀自在’하시니,

외도의 법을 떠나서 스스로 증득하신 성스러운 지혜(自證聖智)의 경계를 설하시며,

모든 응하여 변화함과 응하여 지으신 일을 떠나서

여래의 선정(如來定)에 머물며 삼매의 즐거움에 들어가신다.

 

그래서 ‘위대한 관觀을 행하시는 스승’(大觀行師)이라고 부르며,
또한 ‘위대한 슬퍼하고 근심해주시는 분’(大哀愍者)이라고 이른다.

如來世尊於觀自在 離外道法 能說自證聖智境界 超諸應化所應作事

住如來定入三昧樂 是故說名大觀行師 亦復名爲大哀愍者

(초기불교는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하강하여 ‘욕계’에서 부처가 되고

‘열반’에 들었다고 보았으나, 능가경은 ‘색계’ 중 ‘색구경천’의 연화궁에서

10지 보살이 ‘궁극의 부처’를 이룬다고 보았으며,

열반에 들지 않고 ‘의성신’을 통해 온 우주에 자유자재로 ‘화신’을 나툰다고 보았다.

 

힌두교의 인격신인 이슈와라[自在神]에 상응하는 신격화된 경지.

전지ㆍ전능한 자재신의 경지.

(관자재보살) 능가경은 석가모니가 이룬 경지를 5지ㆍ6지를 넘어서 7지를 이루어

‘의성신’을 이루고 색계’에 나아가는 것으로 보고,

그 너머에궁극의 부처의 경지를 설정하였다.

능가경의 주장은 ‘초기불교의 석가모니’도 ‘의성신’을 이루어

색계로 나아가 욕계로 다시 오지 않는 경지로 보았으며,

열반에 안주한 ‘아라한들’은 잠시 ‘삼매’에 취해 있는 상태일 뿐,

실제로 윤회를 초월한 경지가 아니라고 보았다.

 

결국 ‘색계’에서 더 정진하여

전지ㆍ전능한 경지인 ‘궁극의 부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윤회ㆍ5온은 본래 청정하니

애초에 윤회ㆍ5온을 초월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