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석산은 고조선의 역사를 알고 있다.

 

 

 

1. 머릿말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조각배가 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거친 파도가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듯 위태롭다.

 

나침반도 없이 상고사라는 넓고 깊은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상고사를 공부하다 보면 북극성과 같은 존재가 한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요동, 요서, 낙랑 등 우리들에게 익숙한 수많은 지명들이

역사영역의 변동에 따라 여러 차례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우리들의 항해는 방향을 잃고 방황하기 일쑤이다.

  

우리 상고사에 있어서 북극성 같은 존재가 바로 갈석산이다.

 

갈석산은 먼 옛날 하나라 우임금 시절에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우뚝 솟아

발해만을 항해하던 우리 선조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였듯이,

오늘날 상고사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우리들에게도

명확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갈석산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 갈석산 너머로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고, 낙랑군 수성현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갈석산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구구한 학설만 난무할 뿐 갈석산은 오리무중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상고사도 지금 안개속을 헤매고 있다.

 

이제 이 갈석산을 중심으로 우리의 상고사를 풀어가고자 한다.

 

 

2. 갈석산으로 보는 연나라 5군의 위치

 

 

(1) 연나라 강역의 변천사

  

우리 상고사에 있어서 전국시대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설치하였다는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연나라 5군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연5군의 위치를 파악함으로써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이전과

이후의 고조선 강역의 개략적인 범위를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위만조선의 강역을 파악할 수 있고,

위만조선의 붕괴 후 한사군의 설치와 그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신라고구려백제의 강역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연나라 5군의 위치를 통하여 우리 상고사의 큰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이 큰 그림을 바탕으로 상고사를 연구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변천도>

 

연 1 : BC 1,122 ~ BC 765 (낙양 지역)

연 2 : BC 765 ~ BC 527 (하북성 순덕부와 하간부)

연 3 : BC 527 ~ BC 414 (산서성 태원부)

연 4 : BC 414 ~ BC 282 (산서성 대동부)

연 5 : BC 281 ~ BC 222 (진개 동정 후 북경 지역)

연 6 : 한나라 시대 (산서성 태원부)

 

 

 

우리는 흔히 연나라 하면 북경지역을 떠올리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북경유역은 우리 상고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고조선의 범위가 난하까지만 가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800여 년 동안

연나라가 북경유역을 점유한 기간은 60년 미만에 불과하다.

 

즉 기원전 281년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연나라가 진시황에게 멸망당하는 기원전 222년경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주어도 60년을 넘지 못하는 짧은 세월이다.

 

그 나머지 수많은 세월 동안 북경유역은 변함없이 고조선의 중심 강역이었다.

 

앞으로 갈석산이 이를 웅변해줄 것이다.

  

연나라는 유사 이래로 중화족의 동북단에 위치하여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면서

흥망을 거듭하였는데 먼저 연나라 강역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연나라는 기원전 1,122년 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소공 석(奭)을 북연(北燕)에 봉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때의 연나라 위치는 하남성 낙양 서쪽의 섬(陝) 지역으로 파악된다.

 

『춘추좌전』과『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770년경

견융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도읍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자,

연나라는 낙양부근에서 차츰 황하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이로부터 연나라는 계속 고조선 세력과 충돌하면서 흥망성쇠를 반복하게 된다.

 

기원전 675년경에는 하북성 순덕부(邢, 한단邯鄲 부근)와 하간부까지 진출하였으나

고조선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북상하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 기원전 663년 제환공이 연나라와 더불어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까지 이르렀다는 『사기』 ‘제세가’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나라가 일시적으로는 하북성 중부 호타하 부근까지도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530년 연나라는 내부반란을 계기로

하북성에서 산서성 중부의 당唐(태원 남부)으로 이동하였고,

삼진三晋과 그 뒤를 이은 조나라의 강력한 북진정책에 밀려

연나라는 차츰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기원전 414년 태행산맥의 서쪽 산서성 중북부를 지배하던 백적 선우부鮮虞部가

연나라 등에 의하여 태행산맥 동쪽의 하북성으로 밀려난 후

중산국(中山國)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기』‘조세가’는 “BC 414년 중산국 무공(武公)이 초립(初立)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연나라가 산서성 중부의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414년경이다.

 

이때로부터 진시황에 의하여 연나라가 멸망하는 기원전 222년까지 대략 200년 간

연나라와 고조선은 산서성과 하북성의 북부지역 패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북경을 중심으로 한 하북성 북부지역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춘추전국시대 연나라가 북경지역을 점유했던 시기는

기원전 281년에서 기원전 222년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주어도 60년을 넘지 못한다.

 

그 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연나라는 위만조선과 흉노족에 의하여

산서성 중부의 만리장성 이남지역으로 밀려나게 된다.

  

본 글은 연나라가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출했던 기원전 414년 무렵부터

연나라가 멸망한 기원전 222년까지 약 200년 동안의 연나라 강역의 변화,

그 중에서도 특히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전후한 시기의

연나라 강역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2) 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 강역

  

연나라가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출한 기원전 414년경부터 기원전 281년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 연나라의 강역을 중화족의 사서들을 통해 살펴보자.

 

모두 약방의 감초처럼 갈석산이 등장한다.

 

이 갈석산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상고사의 영원한 방랑자가 되고 만다.

 

이 갈석산이 바로 중국의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①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

...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전국책』‘연책燕策’

 

② “연나라는 갈석산에 의해 막히고, 사곡에 의해 끊겼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싸였다...중략...(이것으로) 나라를 굳게 지킬 수 있으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

(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中略...邦國之固而山川社稷之寶也)”

『염철론』‘험고險固’

 

③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동쪽 부목(榑木) 땅에 이른다.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東,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時則訓’

 

 

      <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의 위치>

 

위의 ①은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BC361-BC333)에게 한 말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의 일이이므로

윗 구절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의

연나라 강역을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연나라의 남쪽에 녹타와 역수가 있고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 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하였고, 역수는 오늘날의 거마하이다.

  

그러므로 ①의 기록을 통하여 연나라 남부는

대략 안문에서 갈석산(백석산)에 이르는 장성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②의 『염철론』은 전한 소제昭帝 6년(BC 81),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할 것인지 폐지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진 저명한 논쟁을

환관桓官이라는 사람이 정리하여 완성한 문헌이다.

 

연나라가 갈석산에 의하여 막히고 요수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또 ③의 『회남자』‘시칙훈時則訓’에서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라고 하였다.

 

갈석산(백석산)은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를 가르는 험준한 산맥으로

저 유명한 자형관(紫荊關)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다.

 

위의 ①, ②, ③의 기록들을 종합하고,

갈석산 주변의 지형들을 참조하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나라는 동남쪽은 갈석산(백석산)에 의하여 막히고,

동북쪽은 영정하에 의하여 둘러싸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연5군을 설치하였고,

대명일통지에서 보정부는 옛 지명이 상곡군이다고 하였다.

고조선 침략전 연나라의 강역이 절대로 조백신하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러므로 갈석산(백석산) 동쪽이 조선이고,

조백신하가 요수遼水이며 그 동쪽이 요동이다.

 

그리고 서쪽과 북쪽은 장성을 경계로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의 연나라 위치는 대략 위의 지도처럼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지도의 갈석산(백석산) 동쪽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였고, 낙랑군의 치소였던 왕검성이 위치하였다.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다.

 

만성현滿城縣 주변에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의 지명도 지금까지 버젓이 남아있다.

 

참고로 위 지도에 표기한 난하 부근의 갈석산은 역사왜곡을 위한 가짜 갈석산이다.

 

위의 ① 소진의 말에서 보는바와 같이

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의 남쪽에 갈석산이 있었는데,

만약 난하 부근의 갈석산이 진짜 갈석산이라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후 설치한 상곡군 등 연5군이

모두 난하 동쪽으로 가야만 하는 엉터리 결과가 되고 만다.

 

아마 상곡군을 난하 동쪽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본다.

 

 

(3)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연나라 강역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의 일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에 대한 기록은 단 몇 구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몇 구절이 우리 상고사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고조선의 강역이 한반도로 축소되기도 하고

중국 북경근처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단 몇 구절에 의하여 고조선의 강역이 수 천리씩 널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관련 기록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사기』의 ‘조선열전’과 ‘흉노열전’ 그리고『삼국지』‘위지 동이전’을 통해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①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胡에 볼모로 갔는데

胡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다.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

『사기』‘흉노열전’

 

② 조선왕 만(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今 潮河}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ㆍ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사기』‘조선열전’

 

③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 ①에서 보듯이 사마천은 『사기』‘흉노열전’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쳤다고 하였다.

 

그런데 ③의 『삼국지』‘위지 동이전’은 진개가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동호(東胡)와 조선이 같은가?

 

그리고 진개의 침략이 천여 리 인가?

 

혹은 2천여 리 인가? 많은 논란이 있다.

 

동호라는 명칭은 예맥, 조선, 진번, 부여, 오환, 선비 등

흉노족의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는 의미로 쓰였다.

 

동호 속에 조선도 자연히 포함된다.

 

그리고 진개의 고조선 침략 당시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있었다.

 

위의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글을 보더라도 역시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전후하여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기』의 ‘흉노열전’과 ‘조선열전’에서

진개가 침략한 동호는 바로 진번과 조선을 말한다.

 

진개가 동호 즉 진번과 조선을 천 여리 물리치고 장성을 쌓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연나라 장성 남쪽이 바로 진번과 조선이 있던 곳이다.

 

후일 이곳은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이 되며,

한나라의 낙랑군과 현토군이 설치된 지역이며,

고구려 초기의 중심 강역이 된다.

   

그런데 사마천은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천여 리라고 하였는데,

위략은 2천여 리라고 기록하여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위의 지도에서 갈석산(백석산)의 위치와 조선의 위치를 보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성을 중심으로 진개의 침략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동서간의 거리인 천 여리로 기록하였다.

 

반면 위략은 조백신하 남쪽의 조선지역 천 여리와

조백신하 동쪽 요동지역 천 여리를 합하여 2천 여리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연나라의 강역은

대략 난하 유역까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주류사학계는 진개가 1차로 동호를 천 여리 공략하여

난하까지 영토를 넓힌 후 2차로 고조선을 천여 리 공략하여

현재의 요동반도까지 영토을 넓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조선의 수도를 한반도 평양으로 보는데서 오는 무리수이다.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전후하여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동호와 조선을 별개로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설치한 연5군의 구체적인 위치는 어디일까?

 

 

 

         <중국지도집(1975년 작) 및 기주협우갈석도(남송, 1177년 작)>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지도인 남송시대(1177년 작)의 『기주협우갈석도』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기주협우갈석도』는 우리 상고사의 핵심인 갈석산을 중심으로 연5군의 위치 및

요수의 위치와 요택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옮겨놓은 것이 위의 지도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설치한 연장성은 위의 지도에서 붉은색 점선으로 표시하였으며 대략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지금의 계현(薊縣)까지이다.

 

연5군은 그 연장성 아래 위치하였다.

 

그리고 『기주협우갈석도』의 대요수大遼水가 난하일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고지도(청조일통지도 등)에 현재의 강물 흐름과 달리

난하의 하류가 조백신하와 연결되는 것도 보인다.

 

이 경우 소요수(小遼水)는 조백신하이고, 대요수(大遼水)는 난하가 된다.

  

그리고 위의 『기주협우갈석도』에서 갈석산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지도의 발해 가운데 갈석을 설명한 다음의 글을 보면

갈석산이 역수(오늘날의 거마하) 하류의 서쪽에 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역수탁수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

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또 『기주협우갈석도』에서 아래와 같이

어양군 옹노현(雍奴縣)에서 시작하는 늪지대를 설명한 구절이 있는데

이 늪지대가 고당전쟁에 나오는 저 유명한 요택(遼澤)이다.

 

이 일대는 황하에 의해 떠내려 온 황토들이 수 백리 늪지대를 이루어

오늘날까지도 문안와(文安窪)의 너른 늪지대가 존재한다.

 

“기주 북쪽의 모든 물은 이곳에 모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이 범람하지 않을 때는 물웅덩이들이 나누어진다.

물이 불어 범람하면 하나가 되므로, 물이 이곳에 이르면 어느 강물인지 알 수 없다.

통합하여 구십구 물웅덩이라 한다.

(冀北諸水聚此入海 水若不漲時每澱猶有分域 至水盛時成漲爲一故 水經至此不能分別其爲何水총曰九十九澱)”

 

우리 상고사에 자주 등장하는

요수, 요택, 요동 등의 지명들은 모두 이곳에서 찾아야한다.

 

오늘날의 요하는 조선중기까지도 압록강으로 불린 곳이다.

 

 

3. 제비도 알고 있는 갈석산

 

우리에게 익숙한 판소리 흥부가는 제비의 노정路程에 빗대어 우리 민족의 일부가

중국 사천성 파촉 땅으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으로 노래하였다.

 

가야의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도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판소리 흥부가 중 제비가 박씨를 물고 중국 사천성 파촉 땅으로부터

경상도 함양과 전라도 운봉의 경계에 사는 흥부집으로 오는 노정을 노래한

‘제비노정기’의 일부를 살펴본다.

 

갈석산, 요동, 압록강 등의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흥보씨 제비가 보은표 박씨를 입에다 물고 만 리 조선을 나오넌디,

경치가 장히 좋든가 보더라.

 

흑운을 박차고, 백운 무릅씨고, 거중으 둥둥 높이 떠 두루 사면을 살펴보니,

서촉 지척이요, 동해 창망허구나.......중략....... 연조지간을 지내여,

장성을 지내여, 갈석산을 넘어 연경을 들어서서,

황극전에 올라 앉어 만호 장안을 구경하고 경양문 내달라, 장달문 지녀여,

동간을 들어가니 산 미륵이 백이로구나.

 

요동 칠백 리를 순숙히 지내여,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다달아,

영고탑통군정을 올라앉어....... 중략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이라.

 

운봉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 저 제비 거동을 봐라.

박씨를 입에다 가로 물고, 남대문 밖 썩 내달라 칠패팔패배다리지나

아야고개 얼른 넘어 월강, 승방을 지내였구나.

남타령 고개를 넘어, 두 쭉지 옆에 끼고 수루루루 펄펄.”

 

 

 

<제비노정 및 갈석산 부근 상세도>

 

 

<낱말풀이>

 

① 연조지간을 지내여 : 연조지간은 연나라와 조나라의 사이를 말한다.

이때는 한나라 이후로 연나라는 산서성 태원부근이며

조나라는 하북성 한단부근이다.

 

② 장성을 지내여 : 산서성 중부의 만리장성을 말한다. 평형관平型關을 지난다.

 

③ 갈석산을 넘어 연경을 들어서서 :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백석산의 자형관紫荊關을 넘어 연경(북경)으로 들어선다.

 

④ 요동 칠백 리 : 연경(북경)에서 산해관까지 거리가 700리 이다.

그러므로 요동 땅은 대흥안령산맥 동쪽으로 영정하 또는 조백신하로부터

난하 동쪽의 칠로도산까지 이다.

 

⑤ 압록강을 건너 :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遼河이다.

 

⑥ 의주를 다달아 영고탑통군정을 올라 앉어 : 의주는 현재의 요동반도이고,

영고탑은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에 있으며,

통군정은 현재의 압록강변에 있는 옛정자이다.

 

 

4. 맺는말

 

갈석산(백석산)은 고조선 역사의 산 증인이다.

 

갈석산(백석산)의 자형관을 넘어서면 조선과 요동이 나온다.

 

조선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왕검성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갈석산과 발해만, 남북으로는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요동은 북경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영정하와 칠로도산,

남북으로는 대흥안령산맥(또는 장성)과 발해만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 지역이 고조선의 핵심지역이며, 중화족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연5군이 설치되었고, 낙랑군과 초기 현토군 등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갈석산(백석산)을 알아야 상고사의 진실을 알 수 있다

 

 

 

- 고대 연(燕)나라의 역사(歷史)와 조선(朝鮮)과의 관계

 

고대 황하 북쪽에 있었다는 연(燕)나라 출신인 위만(衛滿)이 기씨조선(箕氏朝鮮)을

무너뜨리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세웠다.

 

우리 고대사에서 조선(朝鮮)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였던 연(燕)나라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연(燕)은 주(周)나라 왕족의 하나인 소공석(召公奭)이 봉해진 나라이기 때문에

중화(中華)족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연(燕)나라는 소공석(召公奭) 이후 중화(中華)족으로

동일한 지역과 종족을 유지 하였을까?

 


소공奭(석)은 周(왕실)와 동성이고 성이 姬氏(희씨)였다.

周(주)의 武王(무왕)이 紂王(주왕)를 멸하고 소공을 北燕(북연)에 봉했다.

<사기 소공세가>


周 武王(재위 BC 1122-BC1116)이 은(殷)나라를 정벌하고

소공奭(석)을 북연(北燕)에 봉함으로써 비로서 연(燕)나라가 역사에 등장한다.

 

북연(北燕)이라는 문구를 자세히 보면 북(北)이라는 것은 방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북쪽 다시말하면, 주(周)나라 왕도에서 북쪽이라고 볼 수 있겠다.

 

후세 사가(史家)들은 북연(北燕)이 존재함으로 남연(南燕)도 존재했다고 추측하지만 남연(南燕)에 대한 문헌 기록을 찾을수 없기에 그대로 해석 하자면 주(周)나라 왕도

북쪽 은(殷)나라 봉지에 봉했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연(燕)나라의 시조인 소공석(召公奭)은 주공(周公), 태공(太公)과 함께

주(周)나라를 일으킨 삼공(三公)의 하나다.

 

주(周)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할 때

소공석(召公奭)은 주공(周公)을 도와 낙읍(洛邑) 또는 성주(成周)를 중심으로

섬동(陝東) 지역의 통치를 맡았다.

 

성왕(成王)이 장성하여 주공(周公)이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통치권을 성왕(成王)에게 물려주자 소공석(召公奭)도 물러나

봉지인 북연(北燕)에 부임한다.

 

그러나 소공석(召公奭)은 부임 이후의 행적이 없다.


소공이 여러 향촌과 도시를 순시 할 때에 팥배나무(甘棠樹)를 심어 높고

그 아래에서 송사(訟事)를 판결하고 정사를 처리하였다.

또한 후(侯)와 백(伯)같은 귀족에서부터 농사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적절하게 일을 맡김으로써 직무나 직업을 잃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하였다.

이런 덕치를 베푼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감당(甘棠)이라는 시를 지어

그의 공덕을 가송하였다.

<사기 연소공세가>

 

소공석(召公奭)이 정사를 처리 했다고 하는 감당(甘棠)은 고지도(古地圖)에

今 낙양 서쪽에 보면 섬(陝)이라는 지역 옆에 감당(甘棠)이라는 명칭이 있다.

물론 팥배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그 지역을 감당(甘棠)이라고 했을수도 있겠지만

소공석(召公奭)이 감당(甘棠)나무 아래서 정사를 처리 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소공석(召公奭)의 부임지역과 관련이 있는 지역일 것이다.


성왕이 임종시에 태자 쇠(釗)가 국사를 게을리 할 것을 걱정하여

소공(召公), 필공(畢公)에게 명하여 제후들을 통솔하게 하고

태자를 보위에 올리도록 하고 그를 도와 정사를 보살피게 하였다.

성왕이 죽은 다음 소공, 필공이 제후들을 이끌고

태자 쇠(釗)를 부축하여 선왕들을 모신 종묘에 배알시킨 다음

<고명(顧命)>이라는 글을 써서 대신들로 하여금

태자 쇠를 보좌하고 밝은 길로 이끌도록 했다.

태자 쇠가 주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강왕(康王)이다.

<사기 주본기>


주무왕(周武王)이 소공석(召公奭)을 북연(北燕)에 봉했다고 했고,

성왕(成王)이 통치권을 행사하자 연(燕)나라에 부임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사기 주본기>에 주성왕(周成王)이 소공석(召公奭)에게

강왕의 정사를 보필할 것을 고명 한 것으로 볼 때,

소공석(召公奭)은 봉지인 연(燕)지역의 통치보다는

주(周)나라 왕도에 남아 정사를 오로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초기 연(燕)나라는 통치체계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기 보다는

소공석(召公奭)의 식읍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소공석(召公奭)이 졸하고 그 이후의 연(燕)나라 행보는 기록에 보이질 않다가,

그 뒤 <사기 연소공세가>에 의하면 소공석(召公奭) 이후

9대에 이르러 연(燕) 혜후(재위 BC864-BC827)가 등장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 당시의 정세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평왕(재위 BC 770-BC 720)이 즉위했으나

주나라 도읍인 종주는 견융의 침입으로 모두 폐허가 되고

또한 견융이 부단히 침략해 왔음으로 이를 피하여 도읍을 락읍(駱邑)으로 옮겼다.

주나라는 평왕 때에 이르러 더욱 쇠락(衰落)하기 시작했으며

세력이 센 제후들은 세력이 약한 주위의 제후들을 공격하여 병합하기 시작하여

제(齊), 초(楚), 진(晉), 진(秦)등이 방백이 되어 주왕실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사기 주본기>


기원전 770년경 중요한 2가지 정세의 변화가 찾아오는데,

진(秦)이 제후(諸侯)의 반열에 올랐고 견융(犬戎)의 침공으로

주(周)나라는 도읍을 종주(宗周)에서 낙읍(洛邑)으로 옮긴 것이다.

 

주(周)나라 도읍이 낙읍(洛邑)으로 이동하면서

그 위치에 있던 초기 연(燕)의 봉지와 겹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燕)의 지배 세력은

낙양 북쪽 황하가에 위치한 온(溫) 땅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주변 제후(諸侯)들의 위치를 살펴 보면,

동주(周) 하남성 낙읍 주변, 연(燕) 낙양 정북쪽 온땅 주변,

위(衛) 온땅 동쪽 봉구 주변, 당진(唐晉) 산서성 곡옥 주변,

정(鄭) 낙양 정동쪽 형택 주변이다.


BC 718년 4월에 나라 사람들이 衛나라의 목 지방을 침입하여

동문의 사역에 보복하였다.

이때 衛나라 사람들은 燕나라 군대로 나라를 쳤다.

나라 태부 제족·원번·설가 등은 나라의 3군을 이끌고

燕나라 군대의 전방에 진을 치고,

공자·만백과 자원으로 하여금 몰래 군사들을 이끌고 그 후방에 진을 치게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은  나라 군대를 두려워하여 제인들은 염려도 하지 않았다.

6월에  나라의 두 공자가 제인들을 거느리고 나라 군대를 북제에서 패배시켰다.

<춘추좌전>


鄭나라가 동문의 사역에 대한 보복으로 衛나라의 목야(牧野) 지방을 침입 하였다.

동문의 사역이란 기원전 719년 衛나라 주우의 공격으로

鄭나라 도읍의 동문이 침탈 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鄭나라가 衛나라를 공격하자,

衛나라는 燕의 군대를 동원하여 鄭나라를 공격 하였다. 왜 일까?

 

하나는 燕나라는 衛나라의 간접 통치를 받고 있었을 경우이다.

또 하나는 衛환공(재위 BC734-BC719)의 죽음과

환공을 죽인 주우가 주살되어 위(衛)나라 통치자의 부재이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燕나라 군대의 등장이고,

燕나라 군대와의 싸움 지역이 鄭나라와 근접한 지역인 목야(牧野)라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연(燕)나라 위치는 今 낙양 북쪽 온(溫) 지역 주변임이 확실하다.

 

또한 周나라 환왕(재위BC 719-BC 697)은 鄭나라에

소분생(蘇忿生)의 영지인 온(溫), 원(原), 맹(盟) 지역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곳은 원래 소공석(召公奭)의 봉지(封地)였다.

 

따라서 周나라가 소공석(召公奭)의 봉지(封地)를 鄭나라에 할양한 것은,

결국 燕을 衛나라에 정치적으로 통합 시킨것이된다.


BC 675년 자금,`축궤 등 6명이 난을 일으켜

일찌기 왕실에 원한을 품고 있던 대부 소씨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가을에 5명의 대부들은 자퇴를 받들고 혜왕(재위 BC 676- BC 652)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여 온(溫) 지방으로 도망가고

소씨는 자퇴를 받들고  衛나라로 도망갔다.

그래서  衛나라 군대와 燕나라 군대가 나라를 징벌하고 겨울에 자퇴를 세웠다

<춘추좌전>

 

 

衛 혜공 25년 (BC 675),

혜공이 나라가 검모를 받아들여 보호하고 있는데 불만을 품고

燕나라와 힘을 합쳐 나라를 공격했다.

周 惠王은 온(溫) 땅으로 달아났다.

衛와 燕은 혜왕(惠王)의 동생 왕자 퇴(頹)를 주왕으로 세웠다.

<사기 위세가> 


周나라 대부 소(蘇)씨를 중심으로

周 惠王의 동생인 왕자 퇴(頹)를 옹립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을때,

衛와 燕은 周나라를 징벌하고 왕자 퇴(頹)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동안 衛나라에 정치적으로 종속 되어었던 燕이

드디어 공(公)의 작위를 하사 받는다.

 

공(公)의 작위를 하사 받았다는 것은,

곧 그에 합당한 봉지(封地)를 주었다고 생각할 때

衛나라 지역중 현재 하북성 순덕부(邢)와 그 인근지역을

봉지(封地)로 하사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BC 664년 겨울에 나라 장공(재위 BC 693- BC 662)이 라 임금과 만난 것은

산융을 치는 일을 상담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산융이 연나라를 침략하여 괴롭히기 때문이었다.

<춘추좌전>

 

 

환공 23년 (BC 663년) 산융(山戎)이 燕나라를 침략하자

燕나라가 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환공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산융{산서성 태원부}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산서성 평양부}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燕 庄公은 귀환하는 환공을 나라 국경까지 따라와서 전송을 하였다.

 

환공이 연백(燕伯)에게 말했다.

 

“ 천자를 제외하고는 제후(諸侯)들은 손님을 국경 밖까지 나와 전송하는 것은

예에 벗어난 일입니다. 나는 燕나라에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 그 자리에 도랑을 파게 하고 그 도랑 이북의 땅은 모두 연나라에 주었다.

 

환공은 연백(燕伯)에게 옛날 소공(召公)의 치세를 이루어

周 왕실의 성왕과 강왕 때와 같이 납공(納貢)을 하도록 명했다.

제후들이 듣고 모두가 나라에 승복하였다.

<사기 제세가>


연(燕)이 순덕부(邢) 지역으로 옮기자 서북쪽 일대에 웅거하던 산융(山戎)들은

연(燕)나라를 침략하기 시작 하였다.

 

산융(山戎)들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제환공(齊桓公)은

BC 663년에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침략하자

위(衛), 노(魯)나라와 연합하여 군사를 이끌고 출정한다.

 

제환공(齊桓公)이 산융(山戎)의 일부를 격파하고,

고죽국(孤竹國)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다는 문헌 기록이 있지만,

사실은 산융(山戎)에게 대패한 것이다.

 

그 이유는 전쟁 이후 제(齊)나라는 순덕부(邢)의 유민들을

제(齊)나라의 이의(夷儀)로 옮겨 정착 시켰고,

또한 제(齊)나라 국경 근처 이북의 땅을 연(燕)에 주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齊 桓公은 燕나라에 今 하북성 기주(冀州)와 하간(河間) 일대 지역을 할양하며,

납공(納貢)을 하도록 명했는데,

이 시기부터 연(燕)은 제(齊)나라의 제후(諸侯)로써

산융(山戎)의 국경 지대에 배치된 용병(用兵)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연(燕)의 위치가 하북(河北)으로 고정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연(燕)나라로 성장한다.

 

 

BC 552년 장공(재위 BC 553-BC 548)이 경좌로 대부를 삼고

다시 공자 아의 무리들을 토벌하고 공자 매를 구독의 언덕에 감금하니,

공자 서는 魯나라로 도망오고 숙손환(叔孫還)은 燕나라로 도망갔다.

<춘추좌전>


제(齊)나라의 제후(諸侯)인 연(燕)나라는 BC 552년에

齊 莊公의 유혈 통치로 인해 공자(公子) 숙손환(叔孫還)과

제(齊)나라 대부 고지(高止)가 망명 함으로써, 지배세력간의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BC 539년에 연후(燕侯) 관(款)이 토착 대부(大夫)들을 제거하고

제(齊)나라에서 망명한 공자(公子)들을 등용하려 하자,

토착 대부(大夫)들은 거꾸로 이들을 죽인다.

 

이에 연후(燕侯) 관(款)은 제(齊)나라로 도망친다.

 

여기서 말하는 토착 대부(大夫)란

齊 桓公으로부터 이 지역을 할양받은 초기 세력들이다.

 

토착 대부(大夫)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齊)나라는 진(晉)나라로 가서 연(燕)나라 정벌을 요청한다.

 

당시 진(晉)나라는 중행목자(中行穆子)가 적(狄)족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북쪽으로 쫒아 내고 있었으며, 하북(河北)의 호타하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해 진(晉)나라는 연(燕)나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齊)나라 안영(晏嬰)이 연후(燕侯) 관(款)의 옹립을 반대하였고,

연(燕)나라 공략의 어려움으로 인해

BC 535년에 제(齊)나라는 연(燕)나라와 동맹을 맺었고,

연(燕)나라는 제(齊)나라에 공녀와 선군이 사용하던 기구를 바친다.

 

또한 BC 530년에 제(齊)나라는 연후(燕侯) 관(款)을 당(唐) 지방으로 보내,

결국은 두 지역의 연(燕)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연(燕)나라 북쪽에 선우(鮮虞)가 등장한다.

 

선우(鮮虞)는 진(晉)나라가 강성할 때, 쫒겨온 적(狄)족들의 별종이다.

 

이후 BC 489년에 진(晉)나라가 범씨(范氏)의 난을 계기로

선우(鮮虞)를 공격하게 되었고, 선우(鮮虞)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BC 453년에 이르러 진(晉)나라는 내분으로

위(魏), 조(趙), 한(韓) 삼진(三晉)이 되었는데,

<사기 조세가>에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병(幷)과 대(代)를 격파하고

호(胡)와 맥(貉)에 임하였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조(趙)씨들이 북악(北岳) 항산(恒山)까지 장악하게 되었고,

맥(貉)족들의 거주지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맥(貉)족이란 산융(山戎)들을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알수가 있다.

 

또한 연(燕)나라는 항산(恒山)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우(鮮虞)의 일부 세력은 산서성 중북부에서 하북성 석가장시 평산현으로이동하여  

BC 414년에 중산국(中山國)을 세우게 되고 燕은 산서성 大同으로 옮겨간다.

 

 

BC 408년에 위(魏)가 중산국(中山國){今 河北 平山}를 공격하여 차지하자

중산국(中山國)은 일시적으로 약화 되었고,

조(趙)씨들이 삼진(三晉)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로 접어들면서 중원의 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었다.

 

위(魏)에게 크게 패한 중산국(中山國)은 동쪽의 제(齊)나라와 동맹을 맺고,

세력 확장중인 조(趙)나라, 연(燕)나라 연합 세력과 치열한 공방을 벌인다.

 

BC 378년 조(趙)나라는 제(齊)나라 서쪽변을 공격하였고,

이에 제(齊)나라는 연(燕)나라를 공격하여 조(趙)나라와의 연대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趙)나라의 도움으로 연(燕)나라는 기사회생 하였다.

 

BC 356년 조(趙)나라는 제(齊), 연(燕)나라와 회동하여

중산국(中山國)에 대한 공격을 시도 하였으나, 제(齊)나라의 배신으로 크게 패하였다.

 

조(趙)나라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고당(高唐)을 빼앗았다.

 

고당(高唐)은 제(齊)나라가 연(燕)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전략 지역의 하나이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朝鮮),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이 있습니다.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으며

남쪽에는 호타(嘑沱)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

<사기 소진열전>

 

소진(蘇秦)의 말대로 연(燕)나라의 강역을 추정해보면

今 산서성 대(代)지역에서 하북성 하간(河間)부까지

사방 수천리의 강역을 가진 대국으로 볼수 있으나,

 

<전국책 제책(齊策)>에

“지난날 중산국은 나라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서 연나라와 조나라를 맞아

남쪽 장자(長子) 땅에서는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중산국은 겨우 천승(千乘)의 나라였는데, 두 만승(萬乘)의 나라를 이겼습니다.”

라는 기록으로 볼때

 

연(燕)나라는 중산국(中山國)과 제(齊)나라의 연합세력에게 크게 밀려

왕조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상황으로

같은 처지였던 조(趙)나라와의 연대에 목을 메는 지경이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연(燕)나라 동쪽에는 조선(朝鮮), 요동(遼東)이 있다.”라는 구절은

상당히 의미있는 말이다.


소진(蘇秦)이 인식하는 동쪽의 조선(朝鮮), 요동(遼東)이

현재의 동만주(東滿洲)의 요동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따라서 문헌기록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연(燕)나라 동쪽의 조선(朝鮮), 요동(遼東)이란

현재의 영정하(永定河)를 기준으로 동쪽 난하(灤河) 인근 지역으로 비정된다.

 

이후 BC 315년에 연(燕)나라에서 큰 사건이 벌어지는데,

상국 자지(子之)가 군주 자리에 오르고,

연(燕)왕 쾌는 거꾸로 자지(子之)의 신하가 되었다. 이른바 자지(子之)의 난 이다.

 

자지(子之)가 왕권을 차지한지 3년이 되는 BC 312년에

연소왕(燕昭王)과 신하들이 변란을 일으켰고,

이때 연(燕)왕 쾌와 자지(子之)가 죽는다.

 

연(燕)나라가 수개월간 혼란에 빠지자

중산국(中山國)은 연(燕)나라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차지 하였고,

제(齊)나라도 혼란한 틈을 노려 연(燕)나라 남쪽 지역을 장악한다.

 

연(燕)나라의 붕괴로 인하여 위기 의식을 느낀 趙 무령왕(재위 BC 325- BC 299)은

BC 306년에 백성들에게 호복(胡服)을 착용하라고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조(趙) 무령왕이 말하길

“동북쪽의 대(代)에서 상산(常山), 상당(上黨)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연(燕), 동호(東胡)와 접하고 있으나

그들을 막을 기병(騎兵)과 사수(射手)가 없습니다.”

라는 기록을 보면 조(趙) 무령왕은 연(燕)과 동호(東胡)를 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자지(子之)의 난 이후 연(燕)나라는 동호(東胡)와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친연관계에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호복(胡服)까지 착용시킨 조(趙) 무령왕의 노력은

BC 296년에 중산국(中山國)을 멸망 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당시 중산국(中山國)의 악의(樂毅)는 燕 昭王에게 구원을 청하지만 거절한다.

 

燕 昭王의 입장에서 원수의 나라인 中山國의 구원 요청을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조(趙)나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막(鄚)과 역(易) 땅을 연(燕)나라에 주었다.

 

이는 연(燕)나라를 조(趙)나라의 영향력하에 둠으로써

제(齊)나라와 동호(東胡)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한 사전 포석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동호(東胡)의 의미를 잠깐 살펴보면,

기원전 4세기에 임호(林胡), 누번(樓煩)을 호(胡)와 맥(貉)으로 구분 할때

호(胡)는 임호(林胡), 누번(樓煩)을 의미 하였다.

따라서 동호(東胡)는 맥(貉)과 조선(朝鮮)을 아우르는 통칭임을 알수가 있다.


“연(燕)나라에 현장(賢將) 진개(秦開)란 이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胡)가 그를 매우 신임했다.

되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東胡)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이란 이가

진개(秦開)의 손자다.

연(燕)나라 또한 장성(長城)을 쌓아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렀고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해

호(胡)를 막았다.”

<사기 흉노열전>


진개(秦開)의 동정 시기는 언제인가?

 

BC 229년에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이란 이가

진개(秦開)의 손자라 했으니,

거슬러 생각하면 대략 연소왕(燕昭王) 집권 시기와 부합한다.

 

그렇다면 燕 昭王(재위 BC312- BC 279) 집권 초기에

동호(東胡)를 공격할 수 있는 국력과 상황이 연출 되었던 것인가?

그럴수가 없었다.

 

자지(子之)의 난 이후 중산국(中山國)과 제(齊)나라의 공격으로

대부분 지역을 잃은 燕 昭王이 동호(東胡)를 공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또한 조(趙)나라가 BC 273년에

동호(東胡)에게 빼앗겼던 대(代) 땅을 다시 회복 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동호(東胡)가 조(趙) 무령왕에 의한 중산국(中山國) 공격 이후

BC 273년까지 대(代)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진개(秦開)의 공격으로 동호(東胡)가 천여리를 물러 났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기록이다.


정황상으로 보면 燕 昭王은 오히려 동호(東胡)와의 연대를 강화하였을 것이다.

 

<사기 자객열전>에

“연나라에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용사가 있었는데 나이가 13살 때

벌써 살인을 저질로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태자단은 진무양을 부사로 삼았다.

북쪽 변방의 오랑캐 땅에서 천박하게 살던 자라 아직 천자를 본 적이 없어

그 위엄에 놀라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기 기록으로 진무양(秦舞陽)은 연(燕)나라 북쪽변방 오랑캐

다시말하면 동호(東胡)의 땅에 살았다는 것이 확인이 된다.

 

<사기 흉노열전>에 이르길

“연(燕)나라에 현장(賢將) 진개(秦開)란 이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胡)가 그를 매우 신임했다.”라는 기록과 대조하면

진개(秦開)를 동호(東胡)에 볼모로 보낸 燕 昭王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가 있다.

 

그것은 동호(東胡)와의 연대 강화을 위한 연소왕(燕昭王)의 자구책 이었던 것이다.

 

진개(秦開)가 동호(東胡)를 공격 하였다는 <사기 흉노열전>은 잘못 와전된 것이다.

 

따라서 연(燕)나라가 설치 했다는 오군(五郡) 또한

그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는 결론이다.


BC 284년 중산국(中山國)이 멸망할때 연소왕(燕昭王)에게 의탁한 악의(樂毅)가

조(趙), 진(秦), 한(韓), 위(魏), 연(燕) 등의 오국 연합군을 이끌고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인 임치성(臨淄城)을 점령했다.

 

이후 조(趙), 연(燕) 두 나라는 제(齊)나라의 북.서쪽 일대를 장악 하게된다.

 

그러나 영원한 동맹은 없듯이 조(趙), 연(燕) 사이에 틈이 벌어지자

제(齊)나라 전단(田單)이 조(趙)나라 군대를 이끌고

연(燕)나라의 중양(中陽)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국력이 급상승한 연(燕)나라가 BC 249년에 드디어 조(趙)나라를 총 공격한다.

 

서쪽으로는 경진(卿秦)에게 대(代) 지역을 공격하도록 하고,

연왕(燕王)은 직접 남쪽의 호성(鄗城)을 공격하지만

조(趙)나라의 염파(廉頗)에게 대패한다.

 

이듬해 조(趙)나라 악승(樂乘)이 연(燕)나라 도성(都城)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연왕(燕王)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연(燕)나라는 조(趙)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BC 229년에 서쪽의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을 점령하자,

연(燕)나라는 태자 단을 진(秦)나라와의 동맹을 위해 볼모로 보낸다.


BC 227년 연(燕) 태자(太子) 단(丹)이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연(燕)나라에 돌아온  태자(太子) 단(丹)은

진시황(秦始皇)을 암살 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이에 격분한 진시황(秦始皇)은

BC 226년에 연(燕)나라를 공격하여 계성을 쳐서 함락시킨다.

 

연(燕)왕 희는 요동(遼東)으로 옮겨 거하며

태자(太子) 단(丹)을 참수하여 진(秦)나라에 바치지만,

BC 222년 진(秦)나라는 요동(遼東)을 함락시키고

연(燕)왕 희를 사로잡아 마침내 연(燕)나라는 멸망한다.

 

연(燕)왕 희가 도망간 요동(遼東) 지역은 어디인가?

 

<사기 흉노전>에

“묵특(冒頓)이 강대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모두 복종시켰다.

좌방(左方)의 왕(王)과 대장(大將)들은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상곡(上谷)과 맞닿아 있고, 그 동쪽으로 예맥ㆍ조선과 접해 있었다.”

라고 했듯이 상곡(上谷), 다시말하면 북악(北岳) 항산(恒山)을 기준으로

그 동쪽에 예맥(濊貊).조선(朝鮮)이 접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연(燕) 태자(太子) 단(丹)이 진(秦)에 쫓겨 도망간 요동(遼東)은

결코 지금의 요동이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사기 흉노전의 진개의 동정을 사실로 인정 하더라도

결코 지금의 요동에 요동군을 설치하여

연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관리하였다고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고 <내몽골자치구의 변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서부 내몽골 지역,

특히 하투(河套) 지역은 남쪽의 농경 민족이었던 한족과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유목민족이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역이다.

 

내몽골의 동부는 사실상 만주의 일부로 간주되고 이곳의 역사는

한족과 유목민의 교차라기보다는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활동해온 역사이다.

주(周)나라 동안 중부와 서부 내몽골 (하투 지역과 그 주변)에는

누번(樓煩), 임호(林胡), 적(狄) 같은 유목민족들이 거주했다.

 

내몽골의 동부지역에는 동호(東胡)가 살았다.

 

전국시대에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 BC325 - 299 재위)이

내몽골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무령왕은 현재 허베이 성에 있는 적(狄)의 중산국(中山國)을 격파했다.

 

이후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찌른 후 현재의 호흐호트 지역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3군을 설치했다.

 

조 무령왕은 장성을 하투 지역을 가로질러 쌓았다.

 

이후 진시황은 화북과 장강 일대를 아우르는 첫 번째 통일 중국 제국을 세우면서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게한다.

 

또한 새로 장성을 쌓으면서 주(周)의 장성을 편입한다.

 

진시황은 구원(九原)과 운중(云中)의 두 군을 내몽고 지역에 설치하고

3만호를 이주시켜 통치를 영구화하려 하지만 진이 몰락한 후 이런 노력은 중단된다.

 

전한 시대동안 무제가 위청(衛靑)을 보내 하투 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다.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하투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동안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골 동부지역은 선비가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에게 굴복한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후한 시대(25-220)에는 흉노가 한에 굴복하여 하투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주해 온 한족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서진 시대에 하투의 흉노의 대추장 유연(劉淵)이

한(漢)왕조(후에 조(趙)로 개칭. 石씨가 세운 조와 구분하기 위해 전조(前趙)라고 함)를

이 지역에 열면서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된다.

수와 당 시대는 중국이 다시 통일 되어 있었고,

황제들은 이전의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하투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한족들을 정착시켜 나갔으나 당의 몰락과 함께 이러한 시도는 다시 중단된다.

 

그동안 내몽골의 동쪽에서 힘을 키워오던 거란은 이 틈을 타 요나라를 세우고

내몽골 일대를 장악하지만 후에 여진족에 멸망하고 서쪽으로 이동해 서요를 세운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워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했다.

1206년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들을 통합했다.

 

1227년에는 서하를, 1234년에는 금을 점령했다.

 

그의 후손들은 1279년에 중국을 정복하고 원을 세웠다.

 

원은 1368년 한족이 명을 세우면서 다시 몽골 고원으로 되돌아왔고,

명은 현재 자리에 만리장성을 세웠다.

 

만리장성은 내몽고의 남쪽 경계와 대체로 일치한다.

17세기에는 만주족이 몽골족을 복속시키고 1644년 명을 정복한 후 청을 세운다.

 

만주족의 청조는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 등으로 나누어

지역별로 다른 방법을 통해 통치한다.

 

일반 몽골인들은 자신의 맹 바깥으로 여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반면 알탄 칸(1507-1582) 때부터 거주하기 시작하던 한족 농민들이

19세기 후반부터 대량으로 유입된다.

 

만주족의 중국화와 러시아의 위협 때문에,

청 정부는 한족 농민들로 하여금 몽골과 만주로 이주하도록 장려하게 되고,

이 정책은 이후의 정부들에 의해서도 계승된다.

 

이 지역에 건설된 철도는 한족의 이주를 촉진하였다.

 

토지는 몽골의 왕자들이 매각하거나, 한족 농민들에게 임대되거나

혹은 아예 유목민들의 땅을 빼앗아 한족 농민들에게 주는 방법으로 제공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 중화민국 시기 동안

외몽고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독립할 수 있었지만,

내몽골은 중국의 한 지역으로 재편된다.

 

러허 성, 차하얼 성, 쑤이위안 성 등이 신설되었고,

훌룬부이르는 헤이룽장 성 안에 머물게 했다.

 

중화민국에서 발행되는 몇몇 지도는 아직도 이 행정구역을 따르고 있다.

만주는 1931년부터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훌룬부이르나 지림 맹은 만주국의 판도에 들어있었다.

 

1933년부터는 러허 성도 만주국에 속하게 된다.

 

이 지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만주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37년에는 중화민국과 일본이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몽골의 유력자였던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는 1936년 5월 12일에

만주국에 편입되지 않은 쑤이위안 성과 차하르 성에

몽골군정부(후에 몽강연합자치정부로 개칭, 이하 몽강국)를 수립했다.

 

이 나라는 만주국과 일본만 승인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내몽골은 일본의 괴뢰정부가 되었다.

 

수도는 허베이 성의 장베이에 설치되었고,

그 통치력은 서쪽으로 호흐호트까지 미쳤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을 공격한 작전인 8월 폭풍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몽강국은 소련과 외몽고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만주지역을 접수하게 되고

1947년에는 소련의 국가 정책에 따라 내몽골 자치구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오직 훌룬부이르 지역만 차지하였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고,

중국 본토에 대한 지배를 확립함에 따라 내몽골 자치구는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몽골족 인구는 이 지역에 속하게 되었고,

현재의 길쭉한 모양의 내몽골 자치구가 생기게 되었다.

 

1969년 문화혁명 당시 내몽골 자치구의 많은 부분이

이웃하고 있는 성들에게 분할편입된 적이 있었으나 1979년에 복귀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