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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10 영락대제기

 

 

 

전하여오길 제의 휘는 <담덕談德>이다.

 

모친은 <연淵>씨로서 <천강天罡>상태후로 불렸으며,

천원공(天原公) <연림淵琳>의 딸이다.

 

꿈속에서 신록과 교호하여 제를 낳았다.

 

모습은 그윽하면서도 크고 듬직하였으며, 큰 무인의 기풍을 가졌었다.

 

<수림>이 나라를 물려준다고 명하였기에,

장자이었던 <강岡>은 양보하고 선종(仙宗)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군대의 일을 좋아하여 병서를 읽었으며,

정사에 간예하였더니 <연도淵鞱>가 범접하지 못하였다.




영락대제 원년{AD391}신묘,

 

6월 대행을 고국양에 장사하였다.

 

순장을 금하고 진귀한 보물도 부장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단지 연호(烟戶){守墓人}를 두고 비석{碑}만을 세워서 공덕을 기록하라 하였다.

 

<천강天罡>을 황태후로, <토산吐山>을 황후로 세우고,

<적積>태자를 태보로, <연억淵億>을 좌보로, <붕련朋連>을 우보로 삼았고,

<면형免衡>은 중외대부로 삼았는데, <연림淵琳>의 서자였으며,

그의 어미는 <면가免柯>의 딸로서, <면형免衡>을 <면가免柯>의 손자로 삼았다.

 

상이 동궁에 있을 때 여러 번 의롭게 직간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발탁되어 <연도淵鞱>를 대신하게 되었다. 


7월, <내밀奈宻>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며 부의하고는

두 딸을 바치면서 시첩으로 삼아주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상이 군신들에게 이르길

 

“지금 4해(四海)의 모든 나라들이 연호(年號)를 세우지 않은 곳이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는 지가 오래되었소.

3대 시절에 건원하던 예를 살펴서 응당 새 연호를 세워야 할 것이오.”라 일렀더니,

 

이 명을 따라서 <춘春>태자가 호를 지어 올리길,

영락(永楽)을 연호로, 평안(平安)을 휘호로 하자고 하였다.

 

상이 그리 하자고 하였다. 

 

상이 태후에게 아뢰길

 

“백제(伯帝){先帝 故國襄大帝의 형 小獸林大帝}의 딸 <평양平陽>은

짐을 섬김에 깔끔하고 정숙하였었으며, 지금 다시 딸을 낳았고,

여러 번 자신의 동생 <강岡>에게 일러서 짐에게 사위를 양보하게 하였습니다.

그 공이 적지 않으니, 역시 후로 삼으려합니다. 어떠신지요?”라 하니,

 

<천강>이 아뢰길

 

“천하의 일은 오로지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것인데,

어찌 노첩이 알겠습니까?”라 하였다.

 

상은 이에 <면형免衡>에게 명하여, <평양平陽>을 새 궁전으로 맞아들이도록 하여,

황후로 책봉하고 <토산吐山>의 경우와 하나같게 하였다.

 

<평양平陽>은 <수림제>의 원비인 <연燕>씨의 소생인데,

젊어서는 선약{仙藥} 일을 즐겨 하였고, 요조{窈窕}의 덕이 있었으며,

행실은 맑았고 정조를 지켜서,

나이가 2기{24살}가 넘도록 다른 이를 곁눈질 하지 않아 왔다.

 

상이 잠저시절에 <평양平陽>을 궁인으로 삼았더니,

승은을 입어 딸{가련}을 낳았었고, 이제 다시 딸을 낳고는 황후로 높아진 것이었다.

 

나이는 서른 셋 이었다.

 

후는 성덕이 있어서, 상은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꼭 의논하고 행하였다.  


 9월, 상이 태후와 두 후와 함께 졸본의 시조 사당을 찾아 사위하였음을 고하고,

종척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죄인들을 풀어주고,

사궁(四窮)들을 구휼하고 백성들에겐 재화를 나누어주었으며,

효행한 이들을 포상하였다.

 

 

10월에  서도로 돌아와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12월, <수림제>의 원비인 <연燕>씨를 <연燕>태후로 하고,

연공 및 궁실·거마·노비를 내려주어 태상후<해觧>씨와 하나같게 하였다.

 

<평양平陽>의 동생 <강岡>을 선왕(仙王)으로 삼고, 도장을 3일간 열어주었다. 

 

<연도淵鞱>에게는 책성(柵城)을 지키라 명하였다.

 

이때  <>태상후 69세, <燕>태후 52세, <淵琳> 63세, <천강>태후 37새,

영락대제 <담덕> 18세, <천을> 21세, <천성>{두양} 25세?, <평양>후 33세.

<토산>후 19세, <가연> 16세, <용덕> 15세, <붕련> 41세, <사구> 23세, <春> 32세,

 

<내물> 42세, <실성> 33세, <눌지> 3세,

 

<근구수>{응신} 72세?, <침류> 42세?, <진사> 40세?, <오호사자키>{인덕} 37세?,

<아신> 20세, <전지> 1세이다.

 

 

 

 


영락대제 2년{AD392}임진,

 

정월, <서구胥狗>를 보내 <내밀奈宻>의 딸을 맞이하게 하여,

<운모雲帽>와 <하모霞帽>를 좌·우소비로 삼고,

<보금宝金>은 비 들이 머무는 궁전의 대부로 삼았다.

 

<보금>은 <내밀>의 조카이었고, 키도 크고 유식하였다.

 

<보금>은 <내물<의 사촌 동생이다.

말흔(술례) - 말구(휴례) - 내물(350-402)

말흔(유모) - 대서지(예생) - 실성(359-417)

 

홀로 된 공주 <천성天星>을 처로 주었다.

<천성天星>은 태상후 <해觧>씨의 소생이었다. 

 

 

3월, 토후(吐后({토산吐山}가 아들 <경鲸>을 낳고,

태후{천강}는 딸 <천룡天龍>을 낳았다.

 

나라의 토지신과 조종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에 가서 선제를 기리는 도장을 7일간 열었다.

 

두 후{평양과 토산)도 상을 따라갔었다. 

 

 

7월, 상이 4만병을 이끌고 친히 <진사辰斯>를 정벌하여,

석현(石峴)에서 <진가모>를 참하고,

네 길로 나누어서 그들의 성과 성채 12개를 빼앗았다.

 

 

9월 군대를 옮겨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3천 5백을 사로잡았고,

유민과 잡혀갔던 이들 만여 명도 데리고 돌아왔다.

 

백성들 모두가 머리에 수유가지를 꽂고 축하하였다.

 

이것이 9월 9일의 풍속으로 되었다. 

 

 

10월엔 또다시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일곱 길로 나누어서

관미성(関彌城)을 주야 20일을 쉼 없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험하며 해・수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진사辰斯>는 이 성은 함락되지 않으리라 여겨,

그의 처 <가리佳利>와 함께 구원(狗原)에서 사냥하면서

열흘 여를 우리가 물러나길 기다렸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놀라자빠져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가리佳利>가 <침류>의 아들 <신莘>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영락대제 3년{AD393}계사,

 

5월,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의 도장엘 갔다.

 

새고기가 올라온 것을 보고는 무슨 새인가 물었더니,

 

포곡(布穀)이라 답하기에, 물리라고 하였다.

 

 

<평양平陽>이

 

“태후께서 좋아하신다.”고 하였더니,

 

상은

 

“태후께만 드리시오.”라 하였다.

 

이에 태후가

 

“폐하께서 아니 드시는데 어찌 감히 첩이 먹겠습니까?”라 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사람들은 포곡(布穀)>을 먹지 않았다. 

 

 

 

7월 거란을 쳐서 천서(川西)를 빼앗았다. 

 

상은 두 후(后)에게 명하여, 친히 나라 안의 건장한 여인들을 가려 뽑아 병사로 삼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키게 하였다.

 

 

 

<평양平陽>후의 꿈에 부처가 오시어 동자를 내려 주며 이르길,

 

“이 아이가 무량수(無量壽)이니라.”고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평양平陽>과 도성 세 곳에 절을 짓게 명하였으며,

불도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이것이 九寺의 유래이다. 

 

 

 

8월, <아신阿莘>이 우리가 거란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의 나라 안이 비었을 것으로 여기고,

<진무真武>로 하여금 석현(石峴)과 관미(関彌)성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름부터 왜가 신라를 누차 침략하였다.

 

 

금성(金城)을 닷새 동안 포위하였다가 물러나니,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협공하여 모조리 죽였다.

 

 

이를 독산참왜(獨山斬倭)라 한다. 

 

 

탐라(耽羅)主 <월손月孫>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내물왕 38년(393년)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17년 수사(水蛇:계사393)

5월,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그 공효(功)없이 물러감을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크게 쳐부쉈다.

7월, 부여(扶余)가 수곡(水谷)에서 대패하였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아신왕 2년(393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영락대제 4년{AD394}갑오,

 

2월, <평양平陽>이 아들 <거련巨連>을 낳았다.

 

생김새가 심히 듬직하고, 목소리도 웅장하였으며,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앉을 수 있었다.

 

상이 말하길,

 

“이 애가 태조를 닮았구나.”라 하고는,

 

후에게 이르길

 

 

“그대가 선(仙)하기를 좋아하더니만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낳았소.

선{仙}이 불{佛}보다 못한 것이 아닌가 보오.”라 하였다.

 

선원(仙院)들을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7월, <진무真武>가 또 쳐들어왔다.

 

상이 기병 5천으로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맞싸워

거의 모두를 참살하였다.

 

남은 무리는 골짜기에 숨었다가 야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변방의 일곱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백성들의 노고가 심하였기에, 잠시 절과 선원을 짓는 공역을 쉬게 하였다.

 

 

<연도淵鞱>를 우보로 삼았다.

 

 

 

 


영락대제 5년{AD395}을미,

 

2월, 태후가 온탕에서 아들 <담총談聦>을 낳았다. 

 

상은 비리(卑離)가 점차 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친히 파산(叵山)·부산(冨山)·부산(負山)을 정벌하여 염수(鹽水)까지 이르면서,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소·말·양·돼지를 노획한 것이 만으로 셈이 되었다.

 

 

두 후 역시 말을 타고 상을 따랐다.

 

상은 <토吐>후는 임신 중이라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

 

 

돌아와서 딸을 낳았더니, 이름을 <삼산三山>이라 하였다. 

 

 

8월, <진무真武>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오니,

상이 기병 7천을 몰아 패수(浿水) 위쪽에서 8천여 급을 노획하였다. 

 

 

말갈이 신라의 실직(悉直)을 침입하였다. 

 

 

11월, <아신阿莘>은 패수(浿水)>에서의 수치를 씻으려고

 

7천병으로 한수(漢水)를 건너 청목령(靑木岺)에 이르렀다가,

큰 눈을 만나 많은 이가 얼어 죽으니,

 

군사를 돌려 한성(漢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영락대제 6년{AD396}병신,

 

3월, 상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대방(帶方)과 백제를 토벌하여, 10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동생을 인질로 잡아 돌아왔다. 

 

 

 

5월, 왜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미녀 5명을 바치고서 선록(仙籙)을 달라고 하였다. 

 

 

<운모雲帽>가 아들 <각언角彦>을 낳았다. 

 

4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섰다.

 

 

 

 

이때 왜는 응신왕{근구수}이 75세의 나이로 394년에 죽고

근구수의 아들 인덕왕{오호사자키(大雀)}397년에 즉위하니

공위(空位)의 기간이었다.



 

 

 


영락대제 7년{AD397}정유,

 

정월, 두눌원(杜訥原)에서 크게 사열하고, 날쌘 말과 용맹한 이를 귀하게 쳤더니,

귀하지 않는 자가 지나치게 많았다. 

 

 

<평양平[陽>이 아들 <두련斗連>을 낳았다. 

 

신라는 가뭄이 들고 황충이 일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아신阿莘>은 <전지腆支>를 왜에 볼모로 보냈고,

 

왜는 딸을 <전지腆支>에게 처로 주었다. 

 

<아신>은 태자 <전지>를 작은 할아버지인 <오호사자키>{인덕}의 즉위식에

축하 사절로 보낸 것이며, 이때 <전지>는 7살이었다. 

<오호사자키>는 딸 <팔수>를 <전지>와 짝 지워 준다.

 

 

7월,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에 갔다.

 

태상황 천원공(天原公) <연림淵淋>이 산궁에서 죽으니, 춘추 69세였다.

 

상황의 예로써 장사하였다. 

 

 

<해觧>태후가 북도(北都)의 온궁(溫宮)에서 살고자 청하니, 허락하였다.

 

 

 

 


영락대제 8년{AD398}무술,

 

3월, 태후가 딸 <희喜>를 낳았다.

 

<아신阿莘>이 <사두沙豆>를 좌장군으로 삼고, 쌍현성(﨎峴城)을 쌓았다. 

 

 

군사(軍師)를 북맥(北貃)으로 보내 막사국(莫斯國)과 가태국(加太國)을 초략하였더니,

남녀 300인이 소와 양으로 세공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8월, <아신>이 들어와 노략하며 한산(漢山)의 북책에 이르자,

별이 군영 안으로 떨어지며 벽력같은 소리를 내어,

 

이르길,

 

“네가 조상의 나라를 치면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 하였다.

 

 

<아신>은 크게 두려운 나머지 돌아가서 서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면서,

 

 

말하길

 

“함부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구나.

애오라지 지키기나 해야겠다.”라 하였다.

 

 

상은 이를 듣고 그를 비웃으며, 말하길

 

“안으로는 악행을 쌓으면서,

밖으로 의를 내거는 놈은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9월 <춘>태자가 고쳐 찬수한 유기(留記) 70권을 바치니,

상이 황금 100근을 하사하였다.

 

<춘>태자는 효성으로 <해>태후를 섬기면서,

 

자신의 비인 <천을天乙>과 함께 유기(留記)와 대경(代鏡)을 고쳐

 

파묻혀서 10여년을 보내며 개수한 것이었다.

 

나라 안의 악행과 악습을 없애고

조종 열위 분들께서 하신 여러 훌륭하신 말씀과 이루신 업적을 드높이는 일들은

 

가히 정경(政鏡)으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이때 나이 39살이었다.

 

위(魏)의 <탁발규>가 12월에 칭제하였으며,

 

원조 (遠祖)<탁발모>이하 27인을 모두 황제로 하였다.

 

6세조<탁발력>은 신원(神元)황제, 5세<탁발사>는 문(文)황제,

 

4세<탁발불정>은 사(思)황제, 5세<탁발록관>은 ■황제,

4세<탁발울률>은 ■■황제, 3세<탁발예괴>는 열(烈)황제,

 

<탁발십익건>은 소성(昭成)황제, 아비<탁발식>은 헌명(獻明)황제로 하였다.

 

 

 

 


영락대제 9년{AD399}기해,

 

5월, <토>후가 아들 <해蟹>를 낳았다. 

 

<운모雲帽>가 아들 <엽언葉彦>을 낳았다.

 

상이 <하모霞帽>에게 이르길

 

“당신 언니는 벌써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낳지를 못하는가?”라 하니,

 

 

<하모霞帽>가 아뢰길

 

“소첩이 총애를 많이 받고도 아직 낳지 못하는 것은

황령께서 살펴주시지 않으심입니다.

아무리 빌어보아도 조상신을 섬김만 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동명>신묘를 알현하였으면 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하모霞帽>를 데리고 용산에 가서 아들을 빌었으며,

 

평양(平壤)으로 돌아와서는 <옥모玉帽>상(像)을 배알하였다.

 

 

이때 왜가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였고,

 

<하모霞帽>는 병사를 내어 구해주시길 청하였다.

 

상이 <서구霞帽>에게 명하여 5천 기병을 내었더니,

<내밀奈宻>이 사신을 보내 왜가 이미 물러갔음을 고하고,

 

<운모雲帽>의 태자 생산을 경하하였다.

 

 

이에 상은 얼굴에 기쁨을 내비치며, 이르길

 

“본시 같은 뿌리로 태어났으며,

또다시 원앙의 인연을 맺은 이래로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낳았으니,

함께 남북의 땅을 다스리자.”라 하였다.

 

사신은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고 떠나갔다.

 

상은 이 두 비를 거둔 이래 은총을 더하여 주었고 <내밀>을 한 집안으로 여기어,

상을 내린 것이 매우 많았다.

 

 

후에 사람들이 임금께서 남기신 말씀을 글로 쓰고 아름답게 꾸며서

악부사(楽府詞)를 지었다.

 

<보금寶金>에 관한 일 또한 그 노래에 실려 있다. 

 

 

 

7월, 신라에 황충이 일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에게 명하여 신라에 곡식을 날라다 주라고 하였다.

 

 

<아신>은 밖으로는 따르는 척하고 안으로는 어기면서

왜와 교혼하여 근심거리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왜 또한 천명을 알아 감히 위엄을 범하지는 못하고 성심으로 공물을 바쳤다.

 

이에 <아신>은 스스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병마를 대거 징발하게 되었더니,

 

많은 백성들이 식량을 가지고 신라로 귀부하였다.

 

 

상이 신라 백성들을 구휼하고자 국경으로 곡식을 운반하게 하였더니,

 

 

<내밀>이 고하여 아뢰길

 

“성상께서 지극히 걱정하여 주신 덕택에 하루 밤의 뇌우로 황충이 씻겨나갔고

곡식도 살아났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길

 

“그대의 나라도 마땅히 <동명>신을 섬겨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운모雲帽>를 <용덕勇德>의 처로 주었다.

 

이때 신라는 색공으로 고구려와 연합하고, 백제는 왜와 혈연으로 연합하였디.

 

 

 

 


영락대제 10년{AD400}경자,

 

2월, <모용성慕容盛>이 3만병으로 신성(新城)에 침입하였다.

 

 

선봉인 <모용희慕容熙>는 남소(南蘇)로 돌아서 들어왔다.

 

 

이에 상은 정예기병 8천으로 곡림(鵠林)에서 <모용희>를 쳐서 대파하였다.

 

 

이때 <담덕> 27세, <모용성> 28세, <모용희> 16세이다.

 

 

<붕련朋連>과 <용신龍臣>은 신성에서 큰 싸움을 벌였고,

 

하(河)의 위쪽까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이들을 목 베고 붙잡았다.

 

 

상은 거듭 장무(章武)의 서쪽을 쳐서 700여 리의 땅을 넓혔으며,

5천여 호를 옮겨 놓고 돌아왔다.

 

 

왜가 신라에 침입했다는 소식에,

 

<서구胥狗>와 <해성觧猩> 등을 보내 5만병을 끌고 가서 구원하여

왜를 물러나게 하였다.

 

 

임나(任那)·안라(安羅)·가락(加洛) 등 모두가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남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6월, 초하루 경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상은, 태후를 모시고 온탕에 가서,

농사짓는 노인 100명과 효자와 순손 37명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상이 태후께

 

“해가 빛을 잃어 비록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더라도,

임금이 마땅히 선행하며 잘못을 뉘우치면 하늘 역시 마음을 돌릴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직 근력이 좋으시니 백성들에게 잔을 돌려서 위로 좀 해주시지요.”

라 부탁하였고,

 

태후가

 

“설사 폐하의 하교가 없으셨더라도,

첩이 어찌 삼종(三從)의 도리를 모르겠소.”라 답하고,

 

소매를 걷고 술잔을 돌렸더니, 백성들 모두가 감동하여 눈물을 지었다. 

 

 

 

8월, 태후를 모시고 서천(西川)을 순시하며,

백성들과 여러 선원{仙院}들에 하교하고, 뛰어난 인재들에게 상을 내렸다.

 

 

5부에 명하여 각기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고,

 

 

조서로 이르길

 

“나라에 인재가 있음은 집에 용마루 대들보가 있음과 같은 것이오.

사람들이 어미를 귀히 여기고 나라가 인재를 귀히 여기면,

응당 나라엔 항상 인재가 모자라지 않을 것이고,

어미들은 항상 즐거워 할 것이오.”라 하였다. 

 

 

<평양平昜>이 <초련楚連>을 낳았다.

 

 

 

 

 

 


영락대제 11년{AD401}신축,

 

3월, 태후가 딸 <명明>을 낳았다. 

 

<내밀>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고하길

 

“신은 금년 이래 노병이 점차 깊어지고 있습니다.

조카 <보금>이 폐하의 슬하에서 오랫동안 있으면서,

공주와 혼인하여 손자{족손}를 낳았다 들었으나,

한 번도 보지를 못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은 늙어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저의 소생 자식들은 모두 어립니다.

응당 <보금>이 공주와 짝을 이루어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면

당연히 폐하의 자손이 영원토록 남방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보금>을 공주와 함께 보내주시길 엎드려 원하옵니다.

신은 공주와 손자{족손}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상은 이를 듣고 측은히 여기어, 말하길

 

“그러하겠다. 짐이 밝게 살피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였다.

 

 

상은 곧 공주를 불러 묻기를

 

“누님은 <보금>과 함께 이미 아들 셋을 낳았소.

부부라면 마땅히 그 나라로 따라 가야 할 것이오”라 하였더니,

 

 

<천성>이 아뢰길

 

“첩 또한 오랫동안 부왕을 뵙고 싶었습니다.

저희들을 보내 주시길 청하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관리에게 명하여, 수레 천 량을 잘 꾸며서 딸려 보내게 하고는,

 

 

이르길

 

“사사로이는 나의 누님이나, 도리를 따지면 부녀가 되오.

그대의 시아비를 잘 섬기고, 짐의 얼굴이 욕되게 하지 마시오.”라 하였더니,

 

<천성>이 네 번을 절하고 떠나갔다.

 

귀하게 치장한 아름다운 마차의 행렬이 100 리를 이었더니,

 

신라 사람들은 이들을 맞이하길 하늘같이 하였다.

 

<내밀>은 공주를 매우 어여삐 여기더니 병이 나아졌다.

 

이에 공주가 기뻐하여,

 

 

아뢰길

 

“첩이 좀 더 일찍 왔었더라면 부황의 병이 일찍 나으셨을 걸 그랬습니다.

늦게 온 것이 한이 됩니다.”라 하였더니,

 

<내밀> 역시 그렇게 여기어 공주가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상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하사한 의약·진미·관(冠) 모두가 줄을 이었으니, <옥모>시절의 배가 되었다.

 

 

이 해에 신라는 가물었었으나,

공주가 국경으로 들어서자 큰 비가 내리고 곡식들이 살아났었다.

 

 

신라의 세간에서는 이를 낭주우(娘主雨)라 불렀다. 

 

 

이 해 8월에 <모용성>이 적도에게 피살되었다. 스물아홉이었다.

 

 

혹자는 <정丁>태후가 자신이 아끼는 <모용희慕容煕>를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영락대제 12년{AD402}임인,

 

2월, <춘春>태자를 금성(金城)으로 보내 <내밀奈宻>을 조상하고,

<보금宝金>을 신라의 주인으로 <천성天星>을 <신라>의 비로 책봉하였다.

 

<천성天星>의 장녀 <효진曉辰>은 <내밀奈宻>의 친아들인 <눌지訥祇>의 처로 삼았다.

나이는 11살이었다. 

 

 

 

4월, <붕련>·<용신>·<서구> 등을 보내서 거란을 정벌하여

그 주인 <오귀烏貴>를 사로잡고, 구려성(句麗城)·대극성(大棘城) 등을 빼앗았다.

 

 

내친김에 <모용귀慕容皈>를 숙거(宿車)에서 치고, 그 선봉을 참하였다.

 

 

<단개귀段開皈>는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하였고,

<모용희慕容熙>도 도망하여 요수(遼隧)를 지켰다.

 

 

이리하여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상이 <해>태후를 모시고 란궁에서 3일간 큰 연회를 열었다.

 

 

<모용위慕容暐>의 딸과 <모용준慕容雋>의 딸 등에게 술을 따르게 하였더니,

<해>태후가, <모용황>에게 당하던 시절의 얘기를 하더니만,

 

 

상에게 아뢰길

 

“노첩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폐하의 영웅하심을 목도하였습니다.

이제 죽는다 한들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모용황>이는 교만・방자하고 호색하여 요절하였고,

 

<모용준>이와 <모용위>도 제 아비를 닮더니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의당 너그럽고 인자하시며 즐겨 덕을 베푸셔야 할 것이며,

 

<모慕>씨 여자들에게도 보복하지 마시고 아울러서

의당 색사에도 신중하셔야 할 것이며,

용맹함도 절제하시어 무력에만 빠지지도 마시고 글도 닦으시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세요.”라 하니,

 

 

상이 이르길

 

 

“나라의 땅을 넓게 여는 것이 동명(東明)의 뜻이었음에도

대무(大武)・태조(太祖)・미천(美川)께서도 이를 미처 이루지 못하셨었습니다.

허나, 짐이 이미 그 뜻대로 닦아 놓았으니,

너무 지나친 염려는 없으시길 바랍니다.”라 하였다.

 

 

두 후에게도 이르길

 

 

“아녀자들이 사람을 따름에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음인데,

물・불과 끓는 가마솥으로 뛰어들지언정 어찌 적들에게 욕을 당한단 말이오?

 

나는 늘 주(周)태후께서 <모용황>이의 비위를 맞추다가

 

자식{모용식慕容式}을 낳은 것이 부끄러웠었소.

그대 등은 만일에라도 그런 꼴을 당하게 되거든 자진하시오.”라 하고는,

 

보검을 두 후에게 건네주었다.

 

 

<해觧>태후도 이 소리를 듣더니만 무안함을 어쩌지 못하는 듯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5월, 태후와 함께 온탕에 있는 도장으로 가서 주기제(周紀祭)를 올렸다.

후 또한 따라 갔었다. 

 

6월, 또 고국원으로 가서 연(燕)을 멸하였음을 국원릉(國原陵)에 고하였으며,

 

또한 국양릉(國襄陵)에 주기제(周紀祭)를 올렸다.

 

상이 두 후와 종척들에게 이르길

 

“처가 남편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노비가 주인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도리가 바로 선 것이오.

 

그러나 처가 아들을 따르는 것은 구차한 것이고,

 

동명께서 따라죽는 것을 금하신 것 또한 구차한 것이었소.”라 하였더니,

 

 

두 후가 아뢰길

 

“첩들도 따라 죽길 원하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아무 말 없이 눈물 흘리며,

 

 

이르기를

 

 

“인생이란 대저 떠도는, 주기(周紀) 60년인, 한바탕의 꿈과 같은 것이거늘,

이 몸은 어찌하여 허둥대며 황망해 한단 말인가?!”라 하였다.

 

태후 또한 눈물지으며

 

“첩이 옳은 도리를 몰랐기에 명줄에 욕심을 내고 죽지 않았었으며,

부끄러움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참회하기에 이르기도 어려웠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그것은 선문의 유풍 때문이었지, 태후의 죄는 아닙니다.

 

색두(索頭)에서 자식이 서면 어미를 죽게 하는 것도 악습이고,

<여치呂雉>가 <쾌噲>와 통정하고

<모돈>에게 옷을 풀어헤친 것도 추한 일이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춘>태자가 아뢰길

 

“사람 됨됨이 차이는 털끝 하나 차이이서,

죽기도 어렵지만 살아있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아들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성인께서도 밝히셨습니다.”라 하였다.

 

 

그러자, 상은 <운모>와 <하모> 두 비에게

 

갈잎피리를 불고 춤을 추게 하고는 자리를 파하였다.

 

9월, 동명대제를 거행하였다.

 

 

왜・신라・진(秦)・연(燕)・진(晉)>・맥・백제・가야의 여덟 나라 여인들이

춤사위를 올리고 곡을 불어 바쳤다.

 

나라가 있어온 이래 처음으로 있었던 성대한 의식이었다.

 

 

상이 왜의 사자에게 이르길

 

 

“너희 나라는 멀리 물 가운데 떨어져있으면서도 성심으로 조공하길

백년이 지났음에도 한 점 변함이 없었으니, 충성스럽다 할 것이다.

오늘 춤사위를 밟는 것으로 보아, 너희나라의 풍속을 알 만하다.

돌아가거든 너희 왕에게 일러서, 후궁에 딸을 바치고,

아들을 보내와서 학문하게 하며, 영원한 신민이 되어,

너희나라에 두루두루 짐의 가르침이 미치게 하라.

뿐만 아니라, <보금>은 짐의 고굉지신의 나라이고, 그의 처가 짐의 딸이거늘,

너희의 왕은 <아신>과 더불어 혼인하고 <보금>을 도모하려 하였다.

결단코 불가함이다.

이날 이후로는 <보금>과 화친하고 서로 혼인함이 좋겠다.”라 하였다.

 

 

왜는 <미해美海>를 사위로 삼고 화친하였다.

 

 

<미해美海>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영락대제 13년{AD403}계묘,

 

정월, <보금>이 <미품美品>을 보내 입조하여 왔다.

 

<작鵲>태자의 후예로, 자신을 낮추어 예의를 차릴 줄 알고 식견에 뛰어났으며,

일찍이 <보금>을 따라 들어왔었기에 우리의 예절에 익숙하여 있었다.

 

지금에 와서 <보금>이 각간의 자리를 주고 군사와 정사의 일을 맡겼다 하였다. 

 

 

3월, 왜主가 아들인 <맥수麥穗>를 보내서 딸을 호송하여 후궁에 바치며,

 

아뢰길

 

 

“신 <인덕仁德>은 먼 해상에서 태양과 함께 있으며

아직 황상의 교화에 젖지 않았더니, 오래도록 마음속엔 모자람이 있었습니다.

 

언뜻 듣자오니, 황제 폐하께서는 성덕은 3황을 능가하고

 

공은 5제를 넘어서셨기에 5부와 8맥(貊)이 자식들을 보내와 첩을 살고 있으며,

남쪽 땅을 복속하시고 삼한(三韓) 땅을 아우르셨으며

서쪽으로는 두 진{秦,晋}의 땅을 억누르고 계신다 하오신데,

신에게 명하시길 딸을 바치고 신의 땅에서 영원토록 주인노릇 하라고 하시면서

대대로 친하게 지내자 하셨다니,

신은 두렵기도 하지만 기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규(溈)의 법도를 따라 감히 두 딸을 바치오니,

예의를 차려서 애교를 떨지 못하여도, 실은 부끄러워하는 섬의 습속 탓이오니,

버리지 않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그 누가 이 글을 지었느냐 물었더니,

 

 

사신이 아뢰길

 

“<맥군貊君>과 <문장文藏>이 글을 지었으며,

모두가 우리 사람들이 그 밑에 들어가 스승으로 삼은 자이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연도淵鞱>에게

 

“왜가 우리에게서 배운지 50년에 불과한데도 그 이룸이 이러하거늘,

우리나라는 글을 익힌 지 300년이 되었는데도 거꾸로 이와 같지 못하잖소.”

라 말하였더니,

 

<연도淵鞱>가 아뢰길

 

“문(文)을 중히 여기면 무(武)가 무너지고, 무(武)를 중히 여기면 문(文)이 쇠하여지니,

이 둘 모두 잘되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유(幽)와 기(冀) 땅에 가서 보았더니,

漢인들은 글을 깨우친 자가 백에 하나도 되질 않아 금수의 행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백년대계를 위하여서는 허술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연도淵鞱>는 <천강天罡>의 오빠로서 <평산平山>공주를 짝하였다.

 

선제 즉위 8년에 궁중의 재상이 되어 웃전 모시는 일을 도맡았었고, 큰 잘못은 없었다.

 

상은 그가 그 일을 맡은 지가 오래되었음에 <면형免衡>이 대신하게 하고

외방으로 내보내 책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우보로 올렸더니,

태후와 함께 큰 정사에 간여하였는데 일하는 것이 부지런하고 착실하였다.

 

이에 상이 기뻐하여 이르길

 

“경은 척족이면서도 마음 씀씀이 백성들에게 교만하지 않고

정사에 있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으니,

짐에게는 충성스런 신하로서 20여년을 하루같이 한 것이오.

설사 <장자방>의 수는 없다 할지라도 <통筩>이 되기엔 충분하오.

누구의 공적인들 기뻐할 일 아니겠소!” 라 하였다.

 

그의 처 <평산平山> 역시 상이 어여삐 여겼음에도,

상이 뛰어나게 노력하시는 기풍에 눌려서,

감히 자행하지 않고 맑고 깔끔하게 본분을 지켰더니,

두 후와 함께 곤덕(坤德)이 있다고 국인들이 칭송하였다. 

 

 

7월, <아신阿莘>이 <보금>의 나라를 침입하기에,

상이 군병을 파하라고 명하였더니, 능히 교전하지 못하고 멎었다.

 

 

 

 


영락대제 14년{AD404}갑진,

 

정월, <해>태후가 북도에서 죽어 국원릉에 장사하였다. 춘추 82세였다. 

 

 

5월, 용성{後燕}이 반란하여 <붕련>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더니,

<모용희>가 죽기로 버티어 빼앗지는 못하였다. 

 

 

이때, 왜가 대방에 쳐들어왔기에

 

<붕련>에게 군사를 움직여 왜선(倭船)을 공격하게 하였더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들은 해적 무리들이었으며, <인덕>이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인덕>은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고,

 

상은 <서구>를 왜의 땅으로 보내어 그 진상을 알아보게 하였다. 

 

<천성>이 사람을 보내어 아뢰기를,

이 해의 2월에 <보금>의 조상 사당을 배알하였으며,

<동명>의 단상을 만들었고 <중천제>와 <옥모>의 상도 만들어 궁중에 두고는

<보금>과 함께 조석으로 참배하여 성상을 위해 빌고 있다고 하였다. 

 

 

태후가 딸 <길吉>을 낳았다.

 

 

 

 


영락대제 15년{AD405}을사,

 

정월, <모용희>가 자신의 처와 함께

장무성(章武城)으로 쳐들어왔다가 대패하여 물러갔다.

 

<모용희>는 바탕이 무모하고 사나웠으며 아리따운 여인에게 빠지더니,

어리석은 <모용성>을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올랐으며, 폭력만을 행사하였더니,

그의 무리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2월, <탁발규>가 사신을 보내서 낙타를 바치고,

자신은 <을두지>의 외예라 하면서,

<동명{東明}>이 이루려 하셨던 바를 함께 이루자고 청하였다. 

 

 

 

4월, <보금>이 왜구 3백을 독산{獨山}에서 목을 베었는데,

 

이들은 지난해 쳐들어왔던 왜의 잔적이었다.

 

 

왜의 땅은 큰 섬이 많고 서로가 다른 무리들이어서

<인덕>의 교화가 전부에 미치지는 못하였음에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7월, <서구>가 왜에서 돌아와서 왜의 풍습과 산천 및 물길에 대하여 아뢰었다. 

 

 

이 해 9월, <아신>이 죽자,

비밀에 붙여 발상하지 않고 왜에 있던 <전지>를 맞아들였다.

 

<아신>의 막내 동생 <설례>가 중형인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올랐었고,

 

<전지>는 왜에서 따라온 지키는 이들과 함께 섬으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해충> 등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들여 보위에 세운 것이었다.

 

<전지>의 처 <팔수>는, <인덕>의 딸이고,

<서구>의 첩과는 같은 어미를 두었는데, 섬 중에서 자식을 낳았더니,

 

그 이가 <구이신久爾辛>이다.

 

 

 

 


영락대제 16년{AD406}병오, 정월, ■■가 태어났다. 

 

12월, <모용희>가 거란을 친히 치려 형북(陘北)에 이르렀다가,

 

군병을 몰래 움직여서 돌아 들어와 목저성(木底城)을 쳤으나, 크게 패하고 물러갔다. 

 

 

<호련胡連>을 <용덕勇德>태자비로 삼았다.


 

 

 

영락대제 17년{AD407}정미,

 

정월, 신축일 초하루, 연(燕)이 대사면(大赦免)을 하고, 년호를 건시(建始)로 바꿨다. 

 

 

2월, 궁실을 늘려지었다. 

 

<붕련>과 <해성>에게 명하여 5만병을 이끌고나가 <모용희>를 정벌하게 하였더니,

 

장무(章武)의 서쪽에서 싸웠다.

 

 

모조리 죽여서 쓸어내고, 개갑(鎧甲){갑옷} 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군자{전쟁용 소모품} 및 기계{무기류}는 그 수를 셀 수도 없었다.

 

사구(沙溝) 등 여섯 성을 빼앗았다. 

 

 

 

4월, <모용희>의 처 <부苻>씨가 죽었다. 

 

 

7월, <모용운>이 <모용희>를 죽인 후 왕이 되었으며,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풍발>과 <고운>은 <모용희>를 죽이고 나서 찾아와 용서를 빌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영락대제 18년{AD408}무신,

 

3월, <고운>이 찾아와 공물을 바쳤다.

 

<고운>은 <고루>의 후손이었다.

 

미모로 인하여 <모용보>와 <모용희>의 처 <부苻>씨에게 총애를 받았었다.

 

<부苻>씨가 죽자 <모용희>가 해치려들었더니,

<모용운>은 <풍발>과 함께 <모용희>를 죽이고,

신하되기를 청하며 찾아와 의탁하였었다.

 

상은 그가 <동명>의 서류이었던 까닭에 우대하여 주었었다. 

 

 

<전지>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여신餘信>을 상좌평으로 삼고 군정을 위임하였다. 

 

왜가 신라의 대마도(對馬島)를 침범하였다. 

 

 

<호련胡連>이 <용덕勇德>의 아들 <호경胡景>을 낳았다.

혹자는 <장수제長壽帝>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영락대제 19년{AD409}기유,

 

4월, <거련巨連>을 동궁태자로 삼고,

장자<경鲸>에게는 선왕(仙王)이 되라고 명하였다. 

 

 

7월, 나라의 동쪽에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 백성들을 옮겨 둔을 치고 살게 하였다.

 

 

8월엔 남쪽을 순시하고 그 성들의 백성들을 살폈다. 

 

 

 

10월, 위(魏)에서는 <탁발규>의 아들 <탁발소>가 아비인 <탁발규>를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섰다가, 적형인 <탁발사>에게 토벌당해 죽었다.

 

 

<탁발규>는 애초에 어미의 여동생인 <하란賀蘭>의 미모를 보더니만

연통하고 싶어 하자,

 

그 어미는

 

“유부녀와 놀아나면 변고가 생기는데, 어찌 할 테냐?”라 하였더니,

 

<탁발규>가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그녀를 거두어서 <탁발소>를 낳았더니,

<탁발소>가 흉악한 이리같이 무도하더니 필경엔 <탁발규>를 죽인 것이었다.

 

<탁발건>과 <탁발규> 모두는 첩의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아무리 영특하면 무엇 하겠는가.

 

 

상이 동궁에게 이르길

 

“<탁발식>과 <탁발소> 모두가 어미를 치붙고 아비를 죽였다.

경계하지 않아도 되겠느냐?”라 하였다.

 

이 달에 <풍발>이 <고운>을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섰더니,

 

 

상은 또 동궁에게 이르길

 

“<고운>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사람을 섬기다가 귀하여 졌으며,

필경엔 자신의 주인을 죽였고, 또한 미모를 사랑하다가 <풍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사람들의 임금 된 자는 남색과 어여쁜 암컷들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어여쁜 암컷들은 수컷을 죽이는 흉기이고,

남색은 자손이 끊기게 하는 적이다.”라 하였다. 

 

 

태후가 딸 <충忠>을 낳았다.

 

 


영락대제 20년{AD410}경술,

 

정월, <풍발> 정벌을 의논하던 중인데,

동부여가 반란하였기에 그 보답으로 여성(餘城)을 토벌하고

 

그 왕 <은보처恩普処>를 붙잡아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64성 1,400여 촌락의 우두머리 모두를 다른 이들로 갈아치웠다.

 

이 일로 <풍발>을 치는 것은 그만두게 되었다. 

<천룡天龍>을 동궁상비로 <삼산三山>을 동궁차비로 삼아주고,

상이 세 명의 후와 함께 동궁과 두 명의 동궁비를 대접하여 흥이 높아지매,

 

동궁을 달래어 이르길

 

“네가 이 두 여인을 아끼고 이외의 다른 여인들을 탐하지 않는다면,

가히 나를 능가할 것이다.

허나, 나처럼 호색하면, <고운>과 <탁발규>의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 하자,

 

 

태후가 아뢰길

 

“조종이 있어온 이래에 처를 둘만 두신 주상이 계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고운>과 <탁발규>를 들어서 경계하려 하십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은 크게 진노하여 국그릇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이르길

 

“예쁜 암컷들은 사내를 죽이는 흉기란 말입니다.”라 하니,

 

태후는 당상에서 내려가 죄를 청하였고,

두 동궁비와 동궁이 슬퍼하며 애원하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진노가 가라앉았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상은 자주 크게 진노하였다. 

 

 

<내밀>의 아들 <보해宝海>가 래조하였다.

 

<마연馬連>을 그에게 처로 주었다.

 

 



영락대제 21년{AD411}신해,

 

정월, <풍발>이 사신을 보내와서 아뢰길

 

“신은 앞서서 신하였던 <고운>이 남긴 조서에 따라 보위를 이었고,

 

<고운>의 딸을 처로 삼았으며, 세세토록 조상나라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삼가 저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챙겨 바치며 성의를 표합니다.”라 하였다.

 

상은 사신을 참하고 죄를 물으려 하였으나,

<연도>와 <붕련>이 간하여 말려서 그만두었다. 

 

 

 

5월, 상이 세 명의 후와 함께 온탕 도장으로 가서 여름을 지내고 란궁으로 돌아왔다. 

 

 

<보금>이 <보해>를 돌려보내주기를 청하자, <마련馬連>을 따라가게 하였다. 

 

 

<마련馬連>이 <보준宝俊>을 낳았고, <토>후가 <감산甘山>을 낳았다. 

 

동궁봉례 <부운芙雲>이 아들 <황晃>을 낳았다. <연긍淵兢>의 처였다. 

 

 

7월, <풍발>이 딸 <락랑樂浪>을 유연(柔然)의 <곡률斛律>에게 처로 주었다.

 

 

 

 


영락대제 22년{AD412}임자,

 

3월, <풍발>이 딸을 후궁에 바치면서

 

장무(章武)와 숙거(宿車) 땅을 떼어주길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6월, <걸복국인乞伏國仁>의 아들 <구부究府>가 <건귀乾皈>를 죽이자,

<건귀乾皈>의 아들 <치반熾磐>은 하남왕(河南王)을 자칭했다. 

 

 

 

7월, <마련馬連>이 글을 올려 돌아오고 싶다고 청하기에

<보해>에게 함께 들어오게 하였고, <천성天星>의 옛 궁에서 살게 하였다.

 

 

 

 


영락대제 23년{AD413}계축,

 

2월, 태후가 딸 <호태瑚太>를 낳았다.

 

이때 보산 59세였는데도 젊은 며느리처럼 늘 예쁜 옷을 입었으며 순산하였다.

 

사람들이 <상尙>태후의 후신이라고 여겼다. 

 

 

8월, <보금>이 <천성>과 함께 랑산(狼山)에서 <동명>신상을 배알하였더니,

색색인 구름이 휘둘러 일어나고 저절로 누각이 만들어졌으며

향내도 자욱하여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선사를 보내 달라고 하였으며 도장도 열고 싶어 하기에,

 

상이 <경鯨>태자에게 명하여 가보게 하였다.

 

<보금>은 평양대교를 만들어 황은에 답하였다.

 

 

 

 


영락대제 24년{AD414}갑인,

 

5월,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에 갔다.

 

 

6월엔 국양릉을 찾아뵙고 비류의 온탕궁에서 머물다가,

병이 들자 두 후와 동궁 및 두 동궁 비를 불러서 전위하였다.

 

동궁이,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어서, 북도의 주유궁(朱留宮)에서 즉위하였다.

 

 

7월에 상이 주유궁에서 춘추 39세에 죽었다.

 

<평양平陽>후도 따라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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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