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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05 고국원제기

 

 

제의 휘는 <사유斯由>, 또는 <유劉>, 또는 <쇠釗>, 또는 <주유극朱留克>이다.

 

<미천왕>의 셋째 아들이다.

 

모친은 태후 <주周>씨인데, 태보 <선방>의 딸이다.

 

<선방>의 선대는 오(吳)의 사람으로, <동천>朝에 래조하였으며,

공주와 혼인하여 마산에서 여러 대를 선인(仙人)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였다.

 

<선방>은 <미천>朝의 공신으로, 딸을 후궁에 바치니 왕을 낳았던 것이다.

 

왕은 키가 크고 몸도 우람하였으며, 풍채는 수려하였고, 학문하기를 좋아하였다.

 

성품이 관후하여 백성을 아끼고 효와 우애로 돈목하였으며,

또한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였고 용병하기를 좋아하였다.

 

선왕의 뜻을 받아 알리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겼으며,

남정서벌(南征西伐)에 임하여서는 반드시 다른 이들보다 먼저 군진의 앞에 섰다가

끝내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죽었으니,

나라사람들이 이를 애통히 여기고 국강상왕 또는 작은 을불이라 불렀다.




고국원제 원년{AD331}신묘,

 

2월 갑인 일, 모친 <주周>씨를 태후로 올리고, <전腆>씨를 황후로,

<완>을 황태자로 삼았으며, 나라 안에는 대사령을 내렸다.  

 

7월 임술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이 해에 백제는 나라가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렸다.

 

이때 <周>태후 41세, <于腆>황후 26세?, 고국원제 <사유> 21세, 태자 <완完> 9세,

<해觧>씨 9세이다.

 

 

 

 

 


고국원제 2년{AD332}임진,

 

정월, <석륵>이 우리나라의 사신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고,

후하게 음식을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춘2월,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하고, 순시하며 백성들의 안위를 묻고,

늙거나 병든 이들에겐 먹을 것을 주었으며, 3월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7월, 태후가 항문에 종기가 나서 상이 입으로 빨아내어 치료해주었다.

 

 


고국원제 3년{AD333}계사,

 

봄, 대방 남부의 성 여섯을 쳐서 평정하였다.

정월, <모용외>가 죽고, 그 아들 <모용황(297-348)>이 섰는데,

나이는 37살이었다. 동생 <모용인>과는 불목하였다.

5월, 백제의 궁이 별똥에 맞았고, 불이 나서 민가까지 태웠다.

7월, 백제는 <진의真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고, 궁실을 수리하였다.

이 해에 後趙의 <석륵>이 60살에 죽고, 그의 아들 <석홍>이 뒤를 이었다.

 

 


고국원제 4년{AD334}갑오,

 

2월에 순시를 시작하여 동해에 이르렀다가 5월에 환도하였다.  

 

추8월에 평양성을 늘려짓고, 환도에 새 궁전을 지었다.

이 해 10월, 후조의 <석호>가 <석홍>을 죽이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석륵>의 피붙이를 모조리 척살하였다.

<모용황>이 이복형인 <모용한慕容翰>의 처를 빼앗자,

<모용한>은 <단>씨에게로 도망하였고,

<모용인>은 <모용황>의 죄를 들먹이며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어 청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황>은 대노하여

11월에 자신이 나서서 양평(襄平)을 쳐서 차지하였고,

요동의 큰 성씨 집안들을 극성으로 옮겼고,

<두군杜羣>을 요동의 상(相)으로 삼았다.

 

이에 <모용인>은 신창(新昌)을 습격하여 <왕우王寓>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동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고 환도는 지금의 조양이다.

 

 


고국원제 5년{AD335}을미,

 

춘정월, 나라의 북쪽에 새로운 성을 쌓았다.  

 

3월에 <을불>대왕을 미천에 장사하였다.  

 

추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9월, 우보 <을민乙閔>이 죽어, <면성免城>이 대신하였다.
 

이 해 9월에 <석호>가 업(鄴)에 도읍하였다.  

 

代의 왕 <탁발흘나>가 <탁발예괴>를 조(趙)의 땅으로 쫒아냈다.
 

10월 을미일 초하루에 백제에서는 일식이 있었다.

 

 

 


고국원제 6년{AD336}병신,

 

춘정월, 왕이 서천에 이르러서 <우린于璘>의 딸을 거두었다. 
 

<모용황>이 려(黎)에서 동쪽으로 얼음이 언 물을 건너서 행군하여

동생인 <모용인>을 습격하여 평곽(平郭)에서 잡아 죽였더니,

<동수佟壽>・<곽충郭充> 등이 <뉴벽紐碧>{평곽태수}에게로 도망하여 왔다.

 

기묘년{AD319}에 <최비崔毖>의 일이 있었던 이후

<모용외>는 <모용인>을 요(遼) 땅에 두어 이득을 꾀하려 하였으나,

필경에는 서로들 싸우고 죽여서 없앴으니,

이를 두고 날래고 사나운 고양이가 밤눈 어두웠던 격이라 함이다.

2월, 큰 별이 서북으로 흘렀다.

 

왕은 <모용황>이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상도尙道>를 동진(東晉)에 보내서

<모용황>이 동생을 죽이고 형수와 놀아난 죄를 송사하였으나,

진(晉) 사람은 <모용황>을 두려워하여 감히 죄를 논하지 않았다.  

 

하5월, 종실의 여인들에게 환도의 신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고국원제 7년{AD337}정유,

 

춘정월, 동부 대사자 <우덕于德>이 죽어, <방부方夫>가 대신하게 하였다.

<석호石虎>가 조(趙)의 천왕을 자칭하고, 장수 <이목李穆>을 보내서,

<탁발예괴>를 代로 거둬들여서 그의 왕 자리를 돌려주었다.

 

<모용황>은 연왕(燕王)을 자칭하였는바, 이것이 전연(前燕)이다.  

 

 

4월, <백제>에서는 서리가 내렸다.  

 

<모용황>은 <석호>와 화친하기로 했다.

 

하5월, 낙랑왕 <오맥남烏陌南>이 죽었다.

 

추7월, 우보 <선곽仙槨>의 딸 <주周>씨를 황후로 세우고 옥책을 내려주었다.

 

<선곽仙槨>은 낙랑왕 <선방仙方>의 아들이다.

 

 

 


고국원제 8년{AD338}무술,

 

정월, 태보 서천공(西川公) <우린于璘>이 76살에 죽었다.

 

<산상제>의 <우>태후 남동생으로,

<을>태후가 선제의 중흥공신이 되는 것을 뒤에서 지지하였으며,

사람됨이 충후{忠厚}하며 근실하고 큰일을 꿰뚫었으며,

자못 사람들의 신망이 있었다.  

 

국구 좌보 <주곽周槨>을 마산공(馬山公)에 봉하였다.

<모용황>이 <석호>와 함께 <단>씨를 쳤더니,

<단>씨는 <모용한>에게 <모용황>과 대적하게 하였고,

<모용한>은 자기의 군사를 이끌고 <모용황>에게 투항하고 죄를 청하였다.

 

이에 <모용황>은

 

“형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라 말하고는,

<모용한>의 계책을 써서 <단>씨를 깨고 <단>씨의 땅도 많이 빼앗았더니,

<석호>가 대노하여 <모용황>과 맞붙어 싸웠다.

 

이에 낙랑의 많은 현들이 돌아섰고,

낙랑 태수 <국팽鞠彭>은 극성(棘城)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석호>가 <조복曹伏>{渡遼將軍}을 우리에게 보내와서 싸움을 도와달라고 청하기에,

군량이 다하여 그럴 수 없다고 하였더니,

<조복曹伏>은 300척의 배를 동원하여 30만석의 군량을 점선(占蝉)으로 날라 오고

사신을 남소(南蘇)로 보내왔다.

 

왕도 어쩔 수 없어서 <뉴벽紐碧>과 <조문祖文>에게 3만병을 이끌고

안평(安平)으로 나가서 관망하고 움직이지는 말라고 하였다.

 

<석호>가 진격하여 극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심히 급해진 <모용황>은 <모용한>의 처를 돌려보내고 민심을 수습하였더니,

<모용한>과 <여근輿根> 등이 열흘 여를 힘껏 싸우고,

<현도 태수 <유패劉佩>도 용감히 싸워서, 趙군을 흩어지게 만들었더니,

 

<석호>는 우리의 군대가 오지 않음을 알고는 물러났다.

 

이에 <모용황>의 아들 <모용각>이 추격하여 3만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으며,

<모용한>과 <여근輿根> 등은 군대를 나누어서

반란하였던 성들을 복구하고 땅을 넓히면서 범성(凢城)에 이르렀다.

 

<봉추封抽>․<송황宋晃>․<유홍游泓> 등은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때는 5월이었다.


추8월, 동황성(東黃城)에 명을 내려 역졸 5천인을 환도로 보내서

오룡궁(五龍宮)을 수리하게 하였고,

낙랑인 2천․대방인 1천 및 부여인 2천에게는 동황성(東黃城)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취불아불화毳芾阿佛和>를 시켜서 이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동황성은 평양의 남쪽에 있으며, 본래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는 가까이 있던 까닭에,

신라와 백제가 연이어 화친하면서도 이 곳을 가지려 하였다.

왕은 이곳을 밀도로 삼고, 튼튼히 하여서 남쪽에 대비할 요충으로 삼고자 하였다.)

동10월, 대풍이 들어서, 부로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우담于覃>을 서부 우대로 삼았다.
 

代 주 <탁발예괴>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趙{후조}에 인질로 있는 자신의 동생 <탁발십익건>을 불러들이며,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명하였다.

 

그의 동생인 <탁발굴견명>도 보위에 오르고자 하였더니,

대인(大人) <양개梁盖> 등이 그의 강하고 사나움이 싫어 죽여 버리고

아랫동생인 <탁발고>를 멀리 있는 <탁발십익건> 대신에 세우려 하였다.

 

<탁발고>는 그럴 수는 없다 하고는 스스로 趙의 땅 업으로 찾아가서

형인 <탁발십익건>을 대신하여 인질로 있겠다고 청하였다.

 

<석호>가 가상히 여기고 둘 다 보내주었다.  

 

11월, <탁발십익건>이 代의 주인이 되어서, 나라의 반을 나누어 <탁발고>에게 주고

백관을 두고 여러 가지의 정사를 간략히 하였더니, 백성들이 이를 좋게 여겼다.

 

남쪽은 음산(陰山), 북으로는 사막, 서쪽은 파락(破落)에 이르렀고,

동쪽에는 <모용>씨들이 있었다.

 

무리들은 수십만이었다.  

 

색두(索頭)의 흥기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고국원제 9년{AD339}기해,

 

정월, <모용황>이 대거 쳐들어오자,

신성(新城) 성주 왕자 <인仁>이 성을 버리고 물러났다.

 

<고희高喜>에게 서부의 병력을 끌고 가서 구하라 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5월, 왕의 동생 <민玟>을 신성으로 보내 <모용황>과 화친을 약속하고

 

평곽 태수 <오충烏忠> 등을 인질로 하게 하였다.

 

 

<모용황>이 <봉추封抽>와 <송황宋晃>을 내놓으라고 심히 급하게 굴어서,

이들을 도피하게 하였다.

왕자 <구부丘夫>가 태어났다.

 

모친은 <해觧>씨로 선인이었던 <해현觧玄>의 딸이었다.

 

가을 9월, <고수高穗>를 <모용황>에게 보내서

표피와 황금을 뇌물로 주고 <민玟>을 돌려달라고 청하였다.

 

겨울 10월, <방상方象>이 남소(南蘇)를 지켜냈고,

<우성牛成>이 신성(新城)을 지켜냈다.  

 

 

 

11월,< 민玟>이 <모용황>의 홀로된 여동생과 혼인하여 돌아왔는데,

<모용황>에게 왕녀 3인을 보내주길 청하였다.

 

<담기談奇>에게 명하여 왕의 딸 <두豆>씨와 <삭朔>씨 및

왕의 여동생 <절折>씨를 <모용황>에게 데려다 주게 하였다.  

 

<송황宋晃> 등을 무이속국(撫夷屬國)의 직을 주어 낙랑과 대방 땅으로 보냈다.


 

 

 

 

 

 


고국원제 10년{AD340}경자,

 

춘정월, 조서를 내리길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다.

 

 

<복희伏羲>씨 시절에 먹고 입었던 것은 경작하여야만 먹고 입는 시절과는 같지 않다.

 

그대들 높고 낮은 사람들 및 백성들과 일없이 놀고먹는 이들 모두는

땅을 일구고 누에치기에 열심히 하시오.”하였다.  

 

 

2월, 왕의 동생 <민玟>과 세자 <성珹>을 <모용황>에게 보내서

백양 3천두를 뇌물로 주었더니,

<모용황>이 <오충烏忠>과 <조문祖文>을 돌려보내주었다.  

 

 

가을 7월, 환도의 장안궁(長安宮)이 완성되어, <주周>태후의 행궁으로 삼았다.

 

<모용황>은 흑룡과 백룡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부비며 사귀다가

용산(龍山)에 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새로이 지은 궁의 이름을 화룡(和龍)이라 하였으며,

 

그 산 위에다가는 용삭불사(龍朔佛寺)를 세워서

 

공경들의 자제를 가르치는 관학(官學)으로 삼았다.

<석호>의 사신이 해(海)를 건너서 도착하였기에

 

환도의 새로 지은 궁전으로 맞아들여 함께 <모용황>을 토벌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9월, 사천원(蛇川原)에서 사냥하였다.

 

 

 

 

 


고국원제 11년{AD341}신축,

 

정월, <해발觧發>을 태후궁의 위두로 삼고 수졸(手卒) 300인을 내려주었다.
 

<모용황>은, 용(龍)을 본 이후에,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용산(龍山)의 남쪽에 성을 쌓고는 용성(龍城)이라 하였다.  

 

 

10월, <모용황>이 자기 아들 <모용각>을 시켜 우리의 평곽(平郭)을 빼앗았다.

 

아군은 성을 내어주기 싫어 호상 간에 교전하였으나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모용각>은 옛 관리들을 위무하여 오래도록 눌러 살게 하였다.

 

우리의 계책에 대비하게 한 것이었다.

 

 

 


고국원제 12년{AD342}임인,

 

봄 정월, <해觧>씨가 왕자 <이련伊連>을 낳았는데, 5색 구름의 서기가 있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해觧>씨를 소후로 봉하고,

<해현觧玄>에게는 산장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2월, <재봉再逢>에게 명하여 환도성의 지붕을 고쳐 잇게 하였다.

 

<람국藍國>에게 명하여 국내성을 쌓게 하였다.  

 

 

가을 8월,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대략, 서진하려는 뜻이었다.

 

<모용황>은 동진하고자 하였고, 상은 서진하고자 하였으니,

 이들의 세력은 충돌할 것이었고,

 

그리 되었다.


10월,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스스로 고구리를 먼저 평정한 이후에 우문(宇文)을 멸하고서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용한慕容翰>이 말하길

 

“고구리를 치는 데는 두 길이 있습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남쪽 길은 험하니, 저들은 필시 북쪽을 지킬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의당 남쪽으로 가시어 불의에 나아가시면

환도(丸都)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모용황>은 그렇겠다고 여기고는 <왕우王寓>에게 일만 여의 군병을 이끌고

북로로 나가서 대군을 끌고 온 듯이 하게 하였고,

자신은 강군 4만을 이끌고 남쪽 길로 들어왔다.

왕은, <모용황>의 대군이 북쪽에 있는 것으로 듣고,

동생 <무武>에게 정병 5만을 데리고 나아가서 막게 하였으며,

자신은 늙고 약한 군병으로 도읍을 지켜 남로 침입을 대비하였다.

 

 

11월에 적들이 느닷없이 사천(蛇川)니하(泥河)로 다가오더니,

대군이 꼬리를 물고 밀려왔다.

 

아단(阿旦)안평(安平)성 등이 모두 함락되었다.

 

우룡장군 <아불화阿佛和>가 힘을 다하여 황산(黃山)에서 싸우다 죽었다.

 

적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으니 지켜낼 수가 없었다.

 

상은 그때서야 적의 대군은 남쪽에 있으며, 저들의 술수에 빠졌음을 알았다.

 

상은 흩어진 군사를 모아서 평양(平壤)으로 가려하였다가,

적 <한수韓壽> 등이 그곳으로 매우 급하게 다가오기에,

산림 속으로 숨으려 하던 차에,

<해발觧發>이 군사를 이끌고 단웅곡(断熊谷)에 이르렀다.

 

이미 환도성이 함락되고 태후가 잡혔다는 소식에 통곡하였다.

 

이에 좌우의 사람들이 위로하며 아뢰길

 

“북쪽으로 간 군대가 <왕우王寓>를 깨고 우리를 구하러 오고 있으니,

적들은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느긋하게 계시면서 사직을 살피십시오.”라 하였다.

 

적들이 단웅곡(断熊谷)을 포위하자,

<우신于莘>이 계곡 속에 깔아놓았던 복병으로 이들을 깼다.

 

상은 <해발>등을 데리고 몰래 단령(断岺)을 넘어 평양(平壤)에 다다랐다.

<모용황>은 고군분투하여 깊숙이 들어오긴 하였으나

주상을 잡지 못한 것이 심히 걱정되자,

왕제인 <민玟>과 <고희高喜> 및 <해현觧玄> 등을 평양으로 보내서

서로 만나자고 청하였다.

 

이에, 상은 그들 모두를 평양에 있게 하고는,

총선장군(緫船将軍) <면강免江>에게 명하여 수군 3만을 이끌고

강구(江口)를 차지하게 하였더니, 여러 차례 <모용황>의 군대를 깼다.

 

왕의 동생 <무武>의 대군이 역시 곧 도착하게 되었더니,

<모용황>은 화가 치밀어서 미천릉을 파헤쳤다.

 

애초에 상은 <주>태후가 만수를 누리신 연후에 미천릉에 합장하려고

미천릉의 큰 문을 봉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적들은 손쉽게 재궁(梓宮){제왕의 시신}을 탈취하였으며,

궁실을 불태우고 도성을 훼손하였으며,

남녀 백성 1만을 몰아가고, 모든 재물과 보물도 거두어 돌아갔다.

 

아군은 퇴로를 막으려 하였으나,

<모용황>이 <주周>태후의 조서로써 아군과 백성들의 저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상 또한 잡혀있는 모친인 태후와 여러 후 및 왕자들의 안위 때문에

감히 추격할 수도 없었다.

 

이리하여 적들은 아무 탈 없이 돌아갔다.

 

<모용황>이 <운雲>의 아비 <저부褚裒>를 아껴,

그 집안을 청산(靑山)으로 옮겨서 살게 하였다.

 

 

 


고국원제 13년{AD343}계묘,

 

봄 2월, 왕의 동생 <민玟>을 <모용황>에게 보내서 진이한 물건 천여 개를 주었더니,

<모용황>은 크게 기뻐하며 재궁{제왕의 시신}과 왕후들은 돌려보내고

<주>태후만은 인질로 잡았다.

 

상이 태후에게 효성스러웠음을 알았음이다.

 

가을 7월,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상불尙弗>을 동진(東晉)으로 보내

<모용황>의 무도함을 하소연하였다.  

 

 

 

겨울 11월, 눈이 5척이나 내렸다.

 

 

 

 

 


고국원제 14년{AD344}갑진,

 

봄 2월, 남소 태수 <조문祖文>이 죽어, <고희高喜>가 대신하였다.
 

<모용황>이 손수 우문국(宇文國)을 정벌하여

남라성(南羅城)主 <섭야간涉夜干>을 죽이고 승승 진격하여

그 도성인 자몽천을 빼앗았다.

 

 

<우문>의 주인 <일두귀逸頭皈>는 막북으로 죽기로 도망쳤으며,

 

<모용황>은 그곳의 가축과 산물 및 자화(資貨)를 거두었고,

그 부의 무리 5천여 락을 창려(昌黎)의 벽지 천 리로 옮겨놓았으며,

 

남라성(南羅城)을 위덕성(威德城)이라 하였다.
 

 

 

10월엔 백제의 <비류>가 재위 41년 만에 죽고,

 

<분서>왕의 장자 <계契>가 섰는데,

드높은 기품에 강직하며 용감하였고 기사에도 뛰어났었다.

 

 

 


고국원제 15년{AD345}을사,

 

봄 정월, 왕이 용강(龍江)에 거둥하여 용주희(龍珠戱)를 하여

 

평양의 부로들 71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4월, 백제의 <계契>가 시조 동명 묘를 찾아뵈었다.  

 

 

 

10월엔 <모용각>이 쳐들어오자,

남소(南蘇)의 소수(小守) <승융勝戎>이 연(燕)에 투항하고 나서

 

<모용각>과 함께 남소(南蘇)를 협공하여 빼앗았다.

 

 

이에 패자(沛者) <빈조賓兆>와 사마(司馬) <우매牛買>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고국원제 16년{AD346}병오,

 

정월, 금주령을 내렸다.  

 

9월, 백제의 <계契>가 죽어 <비류>의 둘째 아들 <근초고>가 뒤를 이었는데,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게 크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식견도 있었다.  

 

가락국의 <금물今勿>이 죽었다. 이가 덕왕(德王)이다.

 

 

아들 <이품伊品>이 뒤를 잇고는, 모친 <아지阿志>를 태후로 하고,

사농경 <극충克忠>의 딸을 비로 삼았다.

 

 

 


고국원제 17년{AD347}정미,

 

정월, 백제의 <근초고>가 단을 쌓아 천지에 제사하고,

 

<진정真淨>을 조정좌평으로 삼아 정무를 크게 바꾸었다.

 

<진정真淨>은 <초고肖古>의 처족으로 성품이 삐뚤어져 사납고 어질지 못하여,

정사에 있어서는 가혹하며 자잘하였고,

권세를 믿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서, 나라사람들이 괴로워하였다.

 

상이 이를 듣고 좌우에게 이르길

 

 

“<초고>가 감히 천자의 노릇을 하고 있고, <진정真淨>의 행실 또한 이러하니,

벌해야 되지 않겠소.”라 하였더니,

 

<상도尙道>가 아뢰길

 

“나라에는 세 가지 귀한 것이 있는 바,

그 하나는 신{神}이요, 그 둘은 임금{君}이며, 그 셋은 신하{臣}입니다.

 

 

백제는 비록 임금이 죽어서 새로운 이가 대신하고 있으나,

<초고>는 멀리 볼 줄 아는 식견이 있고 신{조상}도 숭상하며,

 

<진정真淨>은 인망을 얻지는 못하고 있으나 재간이 능하니,

준비 없이 갑자기 토벌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토벌하기를 그만두었다.

 

2월, 신성 태수 <우성牛成>이 죽어 <면강免江>이 대신하게 하였다.  

 

 

3월, 용산(龍山)에서 사슴제를 올렸다.

 

 

<해현觧玄>을 국부․태왕으로 올렸다.

 

<해현은 태후의 총애가 있었고,

그의 딸이 소후가 되어 태자를 낳고는 총애를 독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9월, 북산(北山)의 웅왕전(熊王殿)이 완성되었다.

 

사치스럽기가 지극하였다.

 

 

선인(仙人)들을 두고 운둔한 이들을 불러들였다.

<면강免江>의 떼거리인 패자 12인을 모조리 쓸어냈다.

 

<면강免江>은, 20년간이나 선군(船軍)을 주관하더니,

 

많은 조세를 거두어서 재산을 쌓았고,

 

청하(淸河)의 대가(大賈) <환리桓利>의 처를 빼앗았으며,

자신의 무리들을 12 패읍에 널리 펼쳐 심어놓고,

다른 사람들의 처를 빼앗는 것을 일로 삼았었다.

 

이에 총선장군 <마발馬發>이 주청하였기에 그들을 모조리 쓸어낸 것이었다.

 

11월, 태자 <무武>를 신성 태수로 삼고,

소수 2인과 장군 3인을 딸려주어 보좌케 하였다.

 

<부평芙平>을 우보로, <면강免江>은 환도 대가로 삼았다.

 

 

 

 

 


고국원제 18년{AD348}무신,

 

정월, 좌보 비류공(沸流公) <상도尙道>가 죽어, <상현尙玄>이 대신하게 하였다.

 

<상도尙道>는 신선에 빠져서 속세와 절연하고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었다.

 

<부승芙昇>이 항상 당세의 한 사람으로 추천하였었고,

 

이윽고 <해현觧玄>이 우보로 발탁하자,

 

딸을 <해현觧玄>에게 첩으로 주고 자신의 진보도 실어다 주었었다.

 

겉치레는 꾸밈없고 빈듯하였으나 안으로는 간교하여,

<해현觧玄>과 <부승芙昇>에게 붙어살더니, 한 벼슬 하였던 것이었다.

 

상도 또한 그를 융숭히 대접하여 태보의 예로 묻어주고,

그의 다섯 아들들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9월, <모용황>이 사냥을 나가 신을 만났다가 갑자기 죽었다.

 

아들 <모용준慕容雋>이 대신하여 섰다.

 

동생 <민玟>을 보내 문상하였더니, <민玟>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모용황>이 요수(遼隧)로 나가서 온천에서 목욕을 하다가

여러 마리의 짐승들이 보여서 그들을 쐈더니,

붉은 옷 입은 백마를 탄 사람이 ‘여기는 사냥터가 아니다!’라 하였다.

 

 

<모용황>은 그가 신이란 걸 모르고, 화를 내며

‘누군데 감히 내가 사냥하는 것을 말리느냐?’라 대꾸하고는,

 

말을 몰아 물을 건너 들어가 크게 사냥하던 중,

흰 토끼 한 마리에 이끌려서 돌투성이인 계곡에 들어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쳐서 죽었다 한다.”고 하였다.


 

 

 

 


고국원제 19년{AD349}을유,

 

정월, <면강免江>을 동해 태수로 내보냈다.  

 

 

 

3월,< 송황宋晃>을 <모용준>에게 보냈더니,

<모용준>은 <송황宋晃>의 딸을 첩으로 삼고서 <송황宋晃>의 죄를 면해주고

중위(中尉)의 벼슬을 주었으며, 이름을 <송활宋活>로 바꿔주었다.  

 

4월, <석호>가 죽었다.

 

 

7월, 대릉원(大菱院)을 늘려지었다.

 

 

평산(平山) 사람들은 대릉(大菱)을 음신(隂神)으로 여기고

 

달사(獺祠)를 양신(陽神)으로 여겼다.

 

 

9월, 낙랑왕 <고희高喜>가 <유색구劉索句>와 <뉴작紐作> 등을 이끌고

<부헌芙軒>과 함께 대방을 쳐서 다섯 성을 빼앗았다.

 

 

<유색구劉索句>를 신지(新地)태수로, <휴절休折>을 점선(占蝉)태수로,

 

<감柑>을 채공사(採供使)로 삼았으며,

<남楠>은 후위장군(後衛将軍)으로 삼아 대방(帶方)을 지키게 하였다.

 

 

 

 

 


고국원제 20년{AD350}경술,

 

2월, 태보 <부승芙昇>이 80살에 죽어,

<상현尙玄>을 태보로,< 부평芙平>을 좌보로, <면가免柯>를 우보로,

<창번倉樊>을 부고령(府庫令)으로, <장웅長雄>을 남부우태로 삼았다.

 

5월, 태보 <상현尙玄>이 나이 65살에 죽었다.

 

<부평芙平>을 태보로, <면가免柯>를 좌보로, <창번倉樊>을 우보로,

<고수高穗>를 부고령으로 삼았다.

 

9월, 황상의 아우 <석錫>이, 연(燕)에서 돌아와, 진법훈련도를 바쳤다.

 

10월, 신지(新地)를 평나(平那)로 이름을 바꿨다.

 

 

 


고국원제  21년{AD351} 백시白豕(辛亥)

 

9월, <해觧>후가 <붕련朋連>태자를 낳았다.

 

난산이어서 임시로 조산을 두었더니 상례화 되었다.

 

 

 


고국원제 22년{AD352}임자,

 

2월, <해발觧發>이 정남대장군이 되어

<방식方式>․<우신于莘>․<동리佟利> 등을 이끌고 나가서 대방을 정벌하고

 

그 왕 <장보張保>를 사로잡았으며, <근초고>와 관미령(関彌岺)에서 싸워 대파하고

세 개의 성을 쌓았으며, 두 나라의 남녀 1만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7월, <해발觧發>을 진남대장군으로 <우신于莘>을 진서대장군으로 삼아

각기 8만군을 거느리게 하였고,

<용백龍白>을 진북대장군으로 삼아 3만군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서로들 간에 호응하도록 하였다.

 

12월, 좌보 <면가免柯>가 75살에 죽었다.

 

<면가免柯>는 청렴하고 조신하였으며, 공과 이득을 따지지 않았고,

아들 다섯에게는 사람들과 다투지 말도록 가르쳤다.

 

이에 사람들은 그를 현명하다고 칭송하고는 <면>씨 집안의 표상이라 일컬었다.

 

<창번倉樊>을 좌보로, <부헌芙軒>을 우보로, <장보張保>를 대방 태수로 삼았다.

 

 

 


고국원제 23년{AD353}계축,

 

정월, <청발靑發>을 연(燕)에 보내서 <모용준>의 등위를 축하하고

토산물을 바치고 대방 태수 일을 설명하였다.

 

 

<모용준>은 지난 해 11월 이래로 칭제를 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 대례를 치르고 곧 중원으로 들어갈 것이어,

 

 

우리와는 일을 두고 다투기를 피하고자 내내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면서 말하길

 

“동방의 일은 그대에게 맡기니 잘 처리하시오.

짐은 장차 그대를 나의 아들같이 여길 것이오.”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인 13살 먹은 <호인好仁>공주를 상의 처로 주었고,

상을 부마도위 현도군왕으로 봉하였다.

 

 

상은 서하(西河)로 나가서 공주를 맞이하여 온탕으로 들어갔으며,

공주에게 딸려 온 신하들에게는 용산 행궁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황상의 동생 <림琳>을 천원공(天原公)으로 삼았다.

 

3월, 자식을 여럿 낳은 여인들 32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6월, <창번倉樊>을 태보로, <부헌芙軒>을 좌보로, <주담周淡>을 우보로 삼았다.

 

9월, <해>후와 함께 사천(蛇川)에서 사슴제를 지냈다.

 

행궁에서 3일을 머무르며 사냥을 크게 하였고,

 

사냥한 짐승들은 삼보와 종친들에게 나누어 보내고는,

 

평천(平川)의 달사(獺祠)로 거둥하였다.

 

 

 

 

고국원제 24년{AD354}갑인,

 

2월, 낙랑왕 <부평芙平>이 죽어 <창번倉樊>이 대신하게 하고,

<부헌芙軒>을 태보로, <주담周淡>을 좌보로, <고수高穗>를 우보로,

<상능尙能>을 부고령으로 삼았다.

 

4월, 동해 태수 <면강免江>이 백색 산호와 자색 옥 및 신(蜃)을 바쳐왔다.

 

 

옥공(玉工)에게 명하여 보경(宝鏡)을 만들어 <해>후의 궁에 안치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자신의 동생 <모용군慕容軍>을 양양왕(襄陽王)으로,

 

<모용팽慕容彭>을 무창왕(武昌王)으로, <모용각慕容恪>을 태원왕(太原王)으로,

 

<모용평慕容評>을 상용왕(上庸王)으로, <모용패慕容覇>를 오왕(吳王)으로,

 

<모용우慕容友>를 범양왕(范陽王)으로, <모용려慕容厲>를 하비왕(下邳王)으로,

 

<모용의慕容宜>를 려강왕(廬江王)으로, <모용탁募容度>을 낙랑왕(楽浪王)으로,

<모용환慕容桓>을 의도왕(宜都王)으로, <모용체慕容逮>를 임하왕(臨賀王)으로,

 

<모용휘慕容徽>를 하간왕(河間王)으로, <모용용慕容龍>을 역양왕(歷陽王)으로,

 

<모용납慕容納>을 북해왕(北海王)으로, <모용수慕容秀>를 란능왕(蘭陵王)으로,

 

<모용악慕容嶽>을 안풍왕(安豊王)으로, <모용덕慕容德>을 <양공梁公>으로,

<모용묵慕容黙>을 시안공(始安公)으로 삼았다.

 

<모용루慕容僂>는 남강공(南康公)으로 삼았는데 나이 12살이었다.

 

 

<주周>태후가 낳은 <모용식慕容式>은 <모용납慕容納>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모용함慕容咸>은 락안왕(楽安王)으로, <모용량慕容亮>은 발해왕(勃海王)으로,

 

<모용온慕容溫>은 대방왕(帶方王)으로, <모용섭慕容涉>은 어양왕(漁陽王)으로,

<모용위慕容暐>는 중산왕(中山王)으로,

<모용양慕容陽>은 무사공(騖司空)으로 되었다.  

 

상서령(尙書令) <모용패慕容覇>는 기주(冀州)에서 신도(信都)로 옮겨와서

이름을 <모용결慕容缺>로 바꾸었다가 좋지 않다하여

다시 <모용수慕容垂>로 바꾸었는데,

현토 태수 <을일乙逸>을 보내서 제를 부마도위 양맥대왕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그때, <모용준慕容雋>은 계(薊)로 천도하였고,

<모용수慕容垂>는 대(臺)에 있으면서 <모용준>을 위해 인심을 수습하였다.

 

상 또한 <모용수慕容垂>와 <을일乙逸>을 환대하였다.

 

7월, <주담周淡>이 죽어, <상능尙能>을 좌보로, 황자 <진津>을 우보로 삼았다.

 

9월, 용산에서 사슴제를 올렸다.

 

 

사위(四衛)軍을 환도에서 사열하고는,

제 장수들에게 명하여 무재(武才)를 천거하게 하였고,

선발된 이들에게는 소당(小幢)의 직분을 주었으며,

좋은 칼을 만드는 장인 12명에게도 상을 내렸다.

 

 

 

 

 


고국원제 25년{AD355}을묘,

 

정월, <구부丘夫>태자를 정윤으로 삼고, 동궁 관인 45명을 딸려 주었다.

 

2월, <상능尙能>이 죽어 <진津>을 좌보로, <우담于覃>을 우보로 하였다.

 

3월, 경총부(瓊叢府)를 두어 종척과 외척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대약부(大薬府)를 두어 약과 음료 및 어선(御饍)의 일을 맡겼으며,

봉신부(奉神府)를 두어 어보와 제기를 관리하게 하였다.

 

왕의 아우 <인仁>을 경총대부로,< 송松>을 대약대부로, <석錫>을 봉신대부로 삼았다.

 

 

4월, <해현觧玄>의 딸 <연燕>씨를 동궁비로 삼았다.

 

9월, <민玟>을 연(燕)에 보내 태후를 돌려보내 달라 하였더니 <모용준>이 승낙하였다.

 

 

태후와 <민玟>은 연(燕)의 명산과 대원(大院)을 두루 돌아보고 12월에서야 돌아왔다.

 

<모용준>은 전중장군(殿中将軍) <도감刀龕>을 시켜 호송케 하였다.

 

상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낙랑군공으로 봉하고 현도대왕은 지난날과 같게 하였으며,

 

영화(永和)라는 연호를 쓰지 말 것이며 사사로이 왕을 봉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우리나라 역시 연호가 있는데, 어찌 영화(永和)를 쓰겠는가.

종척을 봉왕하는 것은 시조 때부터 해오던 것이어

하루아침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응당 그 큰 뜻은 천천히 따를 것이다.”라 하였다.

 

 

 

 


고국원제 26년{AD356}병진,

 

정월, <주周>태후가 조례를 받았다.

 

상과 <해觧>후가 좌우에 시립하였고,

태후는 연(燕)에서 격은 고역을 구구절절이 얘기를 하였더니,

군신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후가 <면성免城>을 좌보로, <주심周椹>을 우보로 삼았다.

 

11월, <단감段龕>이 연(燕)에 항복하였다.

 

 

연(燕)은 <모용진慕容塵>을 시켜서 광고(廣固)를 지켰다.

 

 

 

 

 


고국원제 27년{AD357}정사,

 

10월, <해발觧發>이 <근초고>를 쳐서 성 두 개를 취하였으며,

포로 200인을 바쳐왔다.  

 

 

12월, 연(燕)의 <모용준>은 업궁(鄴宮)으로 들어가더니만

 

다시금 동작대(銅雀臺)를 만들었다.

 

 

 

 

 


고국원제 28년{AD358}무오,

 

정월, <해발觧發>이 들어와서 남쪽을 정벌할 방략을 상주하며,

한산(漢山)평나(平那)에 곧바로 닿는 길목인 수곡(水谷)을 취하자고 청하였다.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려 설명해보이니 아주 명쾌한지라,

 

상은 크게 기뻐하며 <해발觧發>에게 준마와 보도를 내려주었다.

<양주陽疇> 등 축설군(蹴雪軍) 300인이

큰 고개를 넘어서 장새진(獐塞鎮)을 함락하였다.

 

 

2월, 대평왕(大平王)이 아들 <소이素已>를 보내 입조하였다.

 

<대평大平>최체(最彘) 동남에 있는 번갈(藩鞨)인데,

 

북갈(北鞨)과 싸워서 북쪽의 땅을 모조리 차지하고,

 

스스로 태평국(太平國)이라 칭하였으며, 계림{신라}> 및 백제와 통교하였다.

 

 

계림(鷄林)은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하였다.

 

 

상이 이를 토벌하고자,

<방식方式>에게는 2천기를 이끌고 최체(最彘)에서 출진하게 하고,

 

<람국藍國>에게는 3천기를 이끌고 황남(洸南)으로 출진하게 하였더니,

 

<대평大平>이 두려워하며 <소이素已>를 보내 입공한 것이었다.

 

 

<봉화烽火>를 처로 삼아주었다. 

 

여기에서의 계림과 백제는 대륙신라와 대륙백제를 말한다. 

 

 

6월, <해극觧克>이 수곡성(水谷城)을 쳐서 빼앗고 남녀 200인을 잡아서 돌아왔다.  

 

 

 

9월, 동해 태수 <부헌芙軒>이 방비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을 도리로써 교화하고,

길을 넓히고 농토를 일구었다.

 

많은 일을 끝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주일周日>이 그 일을 대신하였다.  

 

 

10월, 상이 천원공(天原公)의 궁전으로 가서 공의 비에게 승은을 입혔다.

 

 

<발發>의 딸이었다.

 

 

젊은 燕왕 <모용준>이 <모용수>의 처이자 <단말배>의 딸인 <단>씨를 죽였더니,

<모용수>는 <단>씨의 여동생으로....{이하 해독 불능}.

 

 

 

 

 


고국원제 29년{AD359}황양(黃羊)(己未),

 

정월, <주周>태후가 춘추 69세에 죽었다.

 

후는 총민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신선도를 좋아하였다.

 

큰 정사에 간예하였으나 큰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으며,

연(燕)에 있을 땐 <모용황>의 비위를 맞추었다.

 

 

 

5월, <해현觧玄>을 태보로, <진津>을 좌보로, <우형于衡>을 우보로 삼았다.  

 

 

9월, <해>후와 함께 남부를 순행하고 평산(平山)에서 사냥하여

 

달사의 신위에 제사하였다.

 

 

태자비 <연燕>씨가 <평양平陽>과 <강岡>을 낳았다.
 

 

10월, 백제가 미녀 5인 및 백마 한 쌍과 맑은 구슬 10과 및

 

대방에서 도망나온 이들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였다.

 

 

 

 

 


고국원제 30년{AD360}金神(庚申)

 

정월, 평산(平山) 행궁에서 조례를 받고, 백관들은 하루를 묵는데 양 세 마리를 치렀다.
 

 

<모용준>이 나이 42세에 죽자, 아들 <모용위慕容暐>가 나이 11살에 제위에 올랐다.

 

 

어미 <가족진可足陳>이 국정을 간여하였으며, <모용각>은 태재(太宰)가 되었다.

 

2월, <담기淡奇>를 연(燕)에 보내서 새로 즉위한 <모용위>를 축하하였다.  

 

 

 

9월, 태보 <진津>이 나이 67살에 죽어, <우담于覃>이 대신하게 하였고,

<선발仙發>을 좌보로 삼았다.  

 

 

11월,< 창번倉樊>을 태보로,

<우담于覃>을 좌보로, <해몽觧蒙>은 또다시 우보로 삼았다.

 

 

 


고국원제 31년{AD361}신유,

 

정월, <우신于莘>의 딸을 왕자 <이련伊連>의 처로 삼고, 새로운 궁전을 주었다.

 

 

<이련伊連>이 공경들의 처나 딸들과 통정하는 일이 많아서,

상이 경부(瓊部)에 명하여 그를 말리라고 하였으나

경총대부(瓊叢大夫) <인仁>이 유약하여 그를 말리지 못하였다.

 

<우신于莘>의 딸이 이때 <이련伊連>의 아들을 가지게 되었는데도

처로 삼아주지 않자, <우신于莘>은 딸을 불태워 죽이려 하였었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맞아들이게 하였던 것이었다.  

 

 

3월, <고성高成>이 북해(北海)를 정벌하여 천리의 영토를 늘리고,

무이(撫夷) 12인을 그 곳에 배치하였다.  

 

 

용산에서 사슴제를 올리고, 제수는 나누어서

 

왕사(王師) <소천蕭天>・<봉기奉箕>・<봉시封時>・<온타溫駝> 등에게 보냈다.  

 

 

 

5월, <해몽觧蒙>이 죽어, <산杣>을 우보로 삼았다.  

 

5부를 순시하며 농사・목축을 장려하고  치수를 권장하였다.  

 

 

 

11월, 백룡원(白龍院)의 양수(陽隧)가 완성되었다.

 

 

 

 

 


고국원제 32년{AD362}玄狗(壬戌),

 

3월, <해발觧發>이 동해공(東海公)이 되어서

<양주陽疇>․<선극仙克>․<방식方式> 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서 동쪽을 다스리려는 계책을 세웠다.  

 

 

9월, 평산에서 사슴제를 올리고, 제수를 나누어 <해觧>씨들에게 보냈으며,

상은 <해>후와 함께 물고기 천 마리를 방생하였다.  

 

 

10월, <창번倉樊>이 새로운 율령 20조를 상주하였다.

 

연(燕)의 제도를 많이 참조하였던 바,

 

병(兵)은 <우신于莘>이, 재(財)는 <우영于永>이, 민(民)은 <우담于覃>이,

형(刑)은 <담기談奇>가, 신(神)은 <창번倉樊>이 주관하였다.

 

명을 내려 율령소(律令所)와 율학소(律學所) 및 제주소(祭酒所)를 두게 하였다.

 

 

 

 

 


고국원제 33년{AD363}黑豕(癸亥),

 

3월, 경도의 인구가 조밀하여졌기에 헤아려서 여러 관청을 평양으로 옮겼다.  

 

 

4월, 좌보 <우담于覃>이 나이 71세에 죽어, <산杣>이 대신하게 하고,

<우영于永>을 우보로 삼았다.

 

전농경(典農卿)과 대장경(大匠卿)을 두었다.  

 

 

8월, 북해(北海)의 수맥(水貊) 사람들 300명이 입조하였기에,

 

작위와 옷을 내려주고, 경도(京都)의 여인으로 처를 삼아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다.  

 

 

 

9월, 상이 최체(最彘)로 순행하여 탕궁(湯宮)을 들렀다가 돌아왔다.  

 

 

 

10월, <산杣>을 동해공(東海公)으로,

<우영于永>을 좌보로, <해발觧發>을 우보로 삼았다.  

 

 

11월, 백룡원에 거둥하여 양수제(陽隧祭)를 올렸다.

 

동해에서 잡힌 거대한 물고기{고래} 30마리를 운반하였다.

 

길이는 모두 사오십 척에 체고는 모두 팔구 척이나 되었다.

 

해체하여 종척들과 대신들 및 3품 공경들에게 나누어 보냈다.

 

이후에도 그리하게 되었다.

 

 

 


고국원제 34년{AD364}靑鼠(甲子),

 

정월, 경도에 돌림병이 크게 돌아서,

상이 태자와 후비들을 데리고 용산으로 들어갔다.  

 

 

5월, <양주陽疇>가 나(那)와 파(巴)에 있는 두 갈족을 토벌하여 그 성을 빼앗고,

백제 인 남녀 100인을 잡아다 바쳤다.

 

 

그 두 갈족은 백제의 북쪽 변경에 살며 배반하고 뒤집기에 무상하여

토벌하여 없앤 것이었다.

 

 

 


고국원제 35년{AD365}靑牛(乙丑),

 

정월, <선극仙克>이 백제의 이진성(伊珍城)을 정벌하여 빼앗았다.  

 

 

4월, 태보 <창번>이 나이 71세에 죽었는데, 그는 <창조리>의 아들이며,

모친은 <음우>의 딸이었다.

 

 

행실이 바르고 엄격하여 법도가 있었으며, 남부를 다스림에 공적이 있었다.

 

딸을 <해발>의 처로 주었더니, <해현>과도 통하였었다.

 

이로 인하여 <창번>은 상부에 들어가서 본처를 버리고 <극란克蘭>을 처로 들였으며,

<우현于玄>의 처와도 은밀히 연을 맺었다.

 

연(燕)나라를 극복하더니만 국정을 도맡게 되었었다.

 

 

<창번>의 율령 20조가 세간에서 시행되었다.

 

이름 하여 용골령(龍骨令), 선품령(仙品令), 공형령(公兄令), 무품령(巫品令),

향도령(香徒令), 오호령(五豪令), 삼호령(三戶令), 공정령(工丁令), 군정령(軍丁令),

역도령(驛渡令), 노비령(奴婢令), 전택령(田宅令), 산장령(山庄令), 해포령(海浦令),

 

수렴령(収斂令), 장원령(場院令), 시원령(施院令), 세시령(歲時令), 산적령(産籍令),

평대령(評臺令)이 그것들이다.

 

 

 

 

 


고국원제 36년{AD366}火虎(丙寅), 

 

8월, <선극仙克>이 백제군을 복수(福水) 달령(達岺)에서 추격하고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는데, 당산(棠山) 대왕이 길을 막아 나섰다가,

 

 

<선극仙克>이

 

“필시 복병이 있을 것이오.”라 하니 물러났다.

 

적들이 과연 고개를 넘어오는지라, 복수천(福水川)에서 맞싸워 크게 이겼다.

 

2천명을 포로로 잡고, 적의 장수 <진벽真璧>과 <사리沙利>를 사로잡았으며,

노획한 병장기과 마필 또한 많았다.

 

 

 


고국원제 37년{AD367}火兎(丁卯),

 

8월, 노비8등례(奴婢八等例)를 정하였다.

 

 

매년 노비를 관리하는 사자(使者)가 공을 가늠하게 하였다.

 

일등 된 자는 풀어주어서 마음대로 안착할 곳을 정하게 한 연후에,

 

매년 감당할 공물을 정하여 주어, 공이 있으면 양인(良人)으로 환속시켰다.

 

 

산노비(産奴婢)(婢産之子)로서, 충직․선량하면서 재주 있는 자는 2등이나 3등이고,

평범한 자는 4등이며, 시원찮은 자는 6등이다.

 

 

부노비俘奴婢(戦俘)로서, 충직․선량한 자는 3등이나 4등이고, 평범한 자는 5등이며,

 

시원찮은 자는 6등이다.

 

 

형노비(刑奴婢)(犯罪被刑)로서, 충직․선량한 자로 연좌된 자는 4등 혹은 5등이고,

평범한 자는 6등이며, 시원찮은 자는 7등, 형살이 한 자는 8등이다.  

 

 

신원(神院)․궁원(宮苑)․공당(公堂)에서는 2․3등을 쓴다.

 

황자․황녀의 전택에는 3․4등을 쓴다.

 

공신의 사택에서는 5․6등을 쓴다.

 

공역에는 7․8등을 쓴다.

 

스스로 종군하고자 하는 자는 2․3․4등에 한하여 군대에 보충․편성한다.

 

계집종으로서, 예쁘고 가무에 능한 자, 상전을 모시거나 심부름에 능숙한 자,

허드렛일을 잘 하거나 부엌일에 능한 자들은 공적으로는 차를 따르며,

대신에 사적으로는 양인 집의 종으로 쓴다.  

 

사내종은, 병부경에 속하거나 상전을 모시는 자로서 대부경에 속한 자들은

모두 주부(主簿)가 있어 그를 따른다.  

 

<창번>의 <노비령>은 단지 <산노>․<부노>․<형노>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관노>는 담당 관리가 그를 살리고 죽이며,

<사노>는 그의 주인이 그를 살리고 죽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노비들도 공을 세워 등급이 내려가면 양민으로 될 수 있게 되었으니

천한 이들도 크게 기뻐하였다.

 

 

 

 

 


고국원제 38년{AD368}黃龍(戊辰),

 

3월, 천원공(天原公) <림琳>의 딸 <천강天罡>을 공주로 봉하여 동궁비로 삼으니,

졸본으로 가서 혼례를 올렸다.

 

혼례행렬이 성대하여 수리에 뻗쳤었다.  

 

 

 

4월, 상이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러 병부경 <방식方式>과 함께

 

정남군사들을 위무하며 이르길

 

“그대들이 오랫동안 국경에 주둔하며 창을 베개 삼아 잠을 잔 것은

필시 마음이 공을 세우는데 있었음이오.

 

공을 세운 것 같은데 보답 받지 못한 자는 나서서 얘기하시오.

 

그러면, 자신이 공을 세웠음을 스스로 말하는 이에겐 상을 줄 것이고,

그 장수에겐 따져 묻는 것도 생각해 보겠소.”라 하였더니,

 

전군이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가 성상께서 친히 원정에 함께하시어서 상과 벌을 명백히 가려주시길 바랐다.

 

 

상이 <양주陽疇>에게 이르길

 

 

“그대는 갈인들의 성을 격파할 당시에,

사졸들에게 미녀들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는데,

싸움에 이기고 나서는 미녀들을 나주어 주지 않았소.

그리하여 사졸들이 반심하게 되었다 하는데, 과연 그런 것이오?”라 하니,

 

 

<양주陽疇>가 답하여 아뢰길

 

“군사들은 용맹함을 숭상하는 것이 미덕입니다.

미녀에 미혹되면 군대는 어지러워지게 되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이 어찌 미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였겠습니까?

 

 

게다가 백제 사람들은 지키기도 잘 할 뿐만 아니라

관방엔 미녀들을 많이 데려다 놓지도 않았는데, 어찌 미녀들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참언이 있었나 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설사 참언이 있다 하여도 내가 어찌 그 말을 믿겠소.

지난번엔 공을 세웠는데,

이번엔 어찌하여 멀찌감치 있기만 하고 진격하지는 못하는 거요?”라 하니,

 

 

<양주陽疇>가 답하여 아뢰길

 

“깊은 산 속이어, 호랑이가 많고 기습하기도 불가하여, 지난번과는 형세가 다르옵니다.

게다가 이번엔 적진의 중요한 관문이 철옹성이어 서두르면 패하기도 쉬우니,

오래 끌어서 위세를 소멸시키며 안전을 꾀하는 계책입니다.

한 개라도 골문이 열리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파죽입니다.”라 하였다.

 

 

 

상도 그것이 좋겠다고 여기고는 무산(撫山)에서 도성으로 돌아왔다.  

 

 

 

9월, 사천(蛇川)에서 사슴제를 지내고, 제수를 모든 황자들에게 나누어 보냈다.  

 

 

 

11월, 백룡원으로 거둥하여 양수제를 지냈다.

 

 

동궁비 <천강天罡>을 두룡(頭龍)으로 삼았다.

 

 

자룡(雌龍){암용}의 망풍(亡風)이 예서 비롯되었다.

 

 

 

 


고국원제 39년{AD369}土蛇(己巳),

 

정월, 백제가 이진성(伊珍城)을 되빼앗아 갔고, 우리의 군사들도 많이 상하였다.

 

최체(最彘) 태수 <우눌于訥>이 상장으로서

<선극仙克>보다 못하여 실기하여 패하였다.

 

이에 상이 노하여 <우눌于訥>을 불러들이고 <람풍藍豊>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백제는 승승하면서, 고개에서 군사를 수를 늘려서,

수곡성(水谷城)을 탈취할 참이었다.

 

백제의 장수 <막고해莫古觧>는 용병을 잘하고 사졸들의 마음도 얻고 있었는데,

아군은 힘씀에 틈이있고 싸울 뜻도 없었었다.  

 

 

2월,< 해>후가 아들 <서구胥狗>를 낳았다.

 

생김새가 웅장하고 우두머리 감으로 듬직해 보였더니,

우림과 백관들에게 사흘간 술을 내려주었다.  

 

 

5월, 백제가 진격하여 수곡성을 깨뜨렸다.

 

 

당시 백제군은 분기탱천하였었다.

 

 

자신들의 태자 <대구수大仇首>가 선봉이 되어 진영을 이끌었으니,

 

사졸들 모두는 죽기로 싸우길 원하면서, 말하길

 

 

“태자께서 상시 이러하시거늘 우리들은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들 하였었다.


상이 이 소문을 듣고는 친히 싸움에 나서기로 결심하고는,

 

태보 <우신于莘>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사위군(四衛軍) 2만을 추가로 발동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대암산(大岩山)을 거점으로 삼고, 치양(雉壤)으로 나아가서 진영을 차리고,

북한산(北漢山)을 포위하였더니, 적들은 대적하지 못하고는 성을 비우고 물러갔다.

 

이에 아군은 승승하여 멀리 있는 이진천(伊珍川)에 이르렀다.

 

여름이어서 날씨는 무덥고 산 속엔 등에․뱀․호랑이․범 들이 많았으며,

양군 모두에 돌림병이 돌았기에,

할 수 없이 산 밑에 진을 치고는 초략하며 대치하고 가을이 되길 기다렸다.  

 

 

8월, <해>후가 동궁을 데리고 졸본으로 가서 <서구胥狗>의 복을 빌었다.

<천강天罡> 역시 그들을 따랐었다.  

 

 

9월, 적들이 해로로 군사를 보충하고는 치양(雉壤)을 습격하였다.

 

이때 아군은 크게 피로하여 죽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데다가 호랑이 피해도 많았다.

 

이에 상은 날래고 건장한 이들을 가려 뽑아서 호랑이를 산으로 쫒아냈다.

 

적군은 아군이 지친 것을 알아차리고는 새로 온 정예군으로 갑자기 쳐서나오니,

우리 군은 크게 무너졌다.

 

상은 단기로 무산(撫山)으로 피해 들어갔다.

 

날씨까지 비가 그치지 않으니 갑자기 겨울같이 추워졌고 많은 사졸들이 상하였다.

 

이에 상은 좌우를 돌아보며

 

“짐이 태보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렇게 패하게 되었소.”라 이르고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돌리라 명하였다.  

 

 

10월, 낙랑공 <주영周榮>이 치양(雉壤)에서 종군하였다가 병이 들어 죽으니,

상은 그의 충성에 감사하며 후하게 묻어주었다.

 

그의 처 <현능玄能>은 아직 젊어서 점선(秥蝉)태수에게 개가하도록 하였다.

 

<강오충杠烏忠>을 태보로, <우신于莘>을  대방공으로 삼았다.  

 

 

11월, <모용수>가 처 <단>씨와 아들을 데리고 <부견>에게로 도망해 들어갔다.  

 

 

12월, <부견>이 燕의 낙양을 정벌하였다.

 

 

 

 

 


고국원제 40년{AD370}경오,

 

 

정월, 연(燕)의 사신 <을육乙育>이 와서 군사 내어주길 청하였더니,

상은 치양(雉壤)에서 패한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미안하다고 하였다.

 

 

청목궁(靑木宮)에서 <을육乙育>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고

<천강天罡>에게 술을 따라주게 하였더니, <을육>은 크게 놀라 엎드려 절하며

 

 

“신이 <천강天罡>을 뵌 지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뵙게 되었고, 폐하의 보배가 되어 계심을 뵙니다.”라 아뢰니,

 

상은 크게 기뻐하며 이르길

 

“짐에게 보배라 할 만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귀한 것 셋을 말한다면,

 

첫째로는 내 처 <해觧>后이고,

 

둘째로는 내 여동생 <해觧>妃{天原公妃)>이고,

 

셋째로는 내 며느리 <천天>妃{천강}가 되겠소.”라 하더니만,

 

 

<해觧>后와 <천원天原>妃를 불러서 <을육>에게 술을 내리게 하였다.

 

모두가 절세미색인지라, <을육>은 크게 놀라 절찬하였다.

 

<을육>은 어미가 본래 우리나라 사람이었기에,

우리를 상국으로 여기고 귀순할 뜻이 있어,

 

연(燕)이 오래 가지 않을 조짐이 있음을 몰래 알려왔다.

 

이에 상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 서쪽의 방비를 새롭게 하였다.

 

 

상이 해후 및 여동생과 며느리를 3보로 칭할 정도였으니,

다른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음이고, 그 정사의 실상은 이로써 충분히 알만한 것이다.

 

대저 인간의 복 가운데 부부만한 것이 없다고들 하는데,

 

상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자신의 인간된 도리도

역시 지극히 아름다웠음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민을 다스리고 사이{四夷}를 손에 넣은 이었으니,

당연히 훌륭한 장수와 현명한 재상을 보배로 여겼을 것이지,

어찌 잠자리의 쾌락에 안주하였겠는가.  

 

<상량尙椋>을 비고령으로 삼아서 궁내에 있는 귀한 것들의 관리를 주관하게 하였다.

 

<왕맹王猛>이 <모용수>의 용도(佣刀)를 빼앗고 낙양에 이르렀다.


2월, <창번>율령 20조를 다듬었다.  

 

 

 

3월, 용산에서 사슴제를 올리고 말린 고기를 삼보들에게 나누어 보냈다.

 

 

태보 <오충烏忠>이 자기의 동산에서 국부인 <해현觧玄>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4월,< 황산黃山>공주를 외상(畏相)으로 삼아서 용골령(龍骨令)을 시행하게 하였다.  

 

<모용수>의  아들 <모용령慕容令>이 위덕성(威德城)을 취하였다가

자신의 수하에게 죽었다.  

 

 

7월, 계유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8월, 백양궁(白陽宮)이 완성되었다.

 

<절익에게 명하여 궁이 오래 가길 빌게  하였다.  

 

 

 

10월, 상이 후를 데리고 마산으로 거둥하여 백성들의 동맹(東盟)>제를 살펴보았다. 

 

 

진(秦)의 <왕맹王猛>이 로원(潞原)에서 <모용평慕容平>을 대파하니,

 

11월엔 <부견苻堅>이 <업鄴>으로 들어갔고,

 

연(燕)의 <모용위>는 고양(高陽)으로 도망 나가다가

秦軍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보내졌다.

 

 

 

<모용평>이 업에서 도망하여 우리에게로 왔더니,

 

상은 <남楠>․<민玟>․<람국藍國>에게 명하여 군사를 끌고나가

평곽(平郭)과 안평(安平)을 취하게 하였고,

<방식方式>․<성백星白>․<우철于徹>에게는 현토와 남소를 빼앗아서 지키게 하였다.

 

상이 <모용평>의 불충하였던 죄를 조목조목 따지고서,

 

“그대는 무슨 면목으로 나를 찾아 왔는가?”라 물었더니,

 

<모용평>이

 

“나는 대왕과 함께 힘을 합쳐서 燕나라를 일으키고 싶소.”라 답하였고,

 

이에 상이 노하여 질책하며

 

“하늘도 그대의 악행에 넌더리가 났는데, 그대는 감히 또다시 큰소릴 하시오!”

라 하고는 그를 참하라 명하였더니,

 

 

<모용평>은 신하와 첩이 되어서라도 상을 섬기겠다고 애걸하였다.

 

 

이에 좌보 <인仁>이

 

“우리 쪽에서 요동을 취하는 것은 <모용평>을 죽이지 않고 결박하여

 

진(秦)으로 보내서 화친을 이룸만 같지 못합니다.”라 하였더니,

 

<모용평>은 <부견>에게 보내졌다.

 

 

 

 

 


고국원제 41년{AD371}신미,

 

정월, <우신于莘>을 정서장군으로 삼고 10만군을 이끌게 하여

연(燕)을 치는 계책으로 삼았다.

 

<송松>을 대방공으로, <인仁>을 태보로,< 감柑>을 좌보로, <민 玟>을 우보로,

<무武>를 묘왕(廟王)으로, <용백龍白>을 남소 태수로, <람국藍國>을 신성 태수로,

<중실효仲室孝>를 평곽 태수로,< 고장창高長創>을 안평 태수로,

<주일周日>을 현도 태수로, <우격牛鬲>을 빈강(濱江)태수로,

<재봉再逢>을 대부경(大府卿)으로, <담활談活>을 북부 대사자로 삼았다. 

 

 

2월,<천강天罡>이 딸 <천을天乙>을 낳았다.  

 

 

3월, <해줄觧茁>을 평산 태수로,<방식方式>을 낙랑 태수로 삼았다.  

 

代의 장수 <장손長孫>이 代왕 <탁발십익건>을 시해하려 하자,

세자 <탁발식>이 이를 막았다.

 

<상협傷脇>이 <취근就斤>을 보내어 <장손長孫>을 죽였다.

 

<탁발식> 또한 병들어 죽었다.

 

<탁발식>의 처 <하균賀菌>이 유복자 <잠규涔圭>를 낳았는데,

이가 바로 <탁발{력}규>이다.

 

5월, 상이 순행하여 신성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고 돌아왔다.  

<토욕혼>주 <벽해辟奚>가 <부견>에게 말을 바쳤다.

 

사람됨이 학문을 좋아하고 어질고 후하였다. ....{이하 난독}...  

 

 

9월, 사천에서 사슴제를 지내고 말린 고기를 나누어 3원(三院)으로 보냈다.  

 

진(晉)의 <사마혁>이 폐상(嬖相) <룡계호龍計好>․<주령보朱靈宝> 등을

궁내에서 시중들게 하였었더니,

침소를 거드는 미녀 <전田>씨 및 <맹孟>씨가 사내 아이 셋을 낳았고,

나라사람들이 그 말을 퍼뜨렸더니,

장수 <건저建儲>와 <환온桓溫>이 <사마혁>을 폐하고 <사마욱>을 세웠다.


10월, 백제가 우리가 군대를 움직여서 서쪽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허를 노려 공격해왔다.

 

이때, 상은 연(燕)을 쳐서 지난날을 설욕하고자 한 것이었다.

 

낙랑 또한 대거 쳐들어와서, <양주 陽疇>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대구수大仇首>가 <북한성北漢城>을 공격해 오자,

우리군대가 한수(漢水)에 복병을 깔았다가 이를 크게 깰 무렵에,

<대초고大肖古> 또한 손수 3만 정병을 끌고 와서 아들을 도우니,

<대구수大仇首> 군사들은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우리의 군대는 서쪽을 정벌할 생각으로 요동에 집결되어 있었고,

<낙랑>과 <초고> 및 <구수>를 나머지의 군대로 나누어 막아야 했기에

우리의 병력의 수가 딸렸다.

 

이에 상이 친히 4위의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진전에 서서 장수 병사들을 독려하였더니 상하가 잘 따랐다.

 

이리되어 한성(漢城)의 서산(西山)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상이 흐르는 화살 두 대를 맞았다.

 

하나는 어깨에 다른 하나는 가슴에 맞았다.

 

힘껏 화살을 뽑아내고 다시금 출진하려 하였더니, 좌우들이 죽기로 말렸다.

 

<해명觧明>은, 상의 상처가 심함을 알았으나 이를 숨기고는,

군사를 불러들여서 진지를 굳게 지키게 하였으며,

<선극仙克>과 <람풍藍豊>을 시켜서 힘껏 싸우게 하였다.

 

<해명觧明>은 응당 성상을 철저히 옹호하여 고상령(高相岺)으로 물러났으나,

극심한 고통 끝에 죽었다.

 

죽음을 앞두고는 <해>후와 <천강>을 부르심이 입에서 끊이질 않았었다.

 

좌우가 모두 눈물 흘리며 아랫사람들에겐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고,

말을 몰아 왕천(王川)으로 가서 급히 국부인 <해현觧玄>에게 알렸다.

 

이에 <해현>과 <해>후가 달려 나와서 상을 도성으로 모시고 들어가 발상하였다.

 

동궁 <구부丘夫>가 천룡궁(天龍宮)에서 즉위하였다.

 

<해>후를 태후로, 국부{해현}를 조왕(祖王)으로, <이련伊連>을 태제(太弟)로 하였다.

 

새로이 선 황상이 원수를 갚고자 친히 정벌하려 하였더니,

조왕(祖王)과 태후가 서쪽의 일이 중요함을 들어 힘껏 말렸다.


대행은 어질고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에게도 공손・검약하였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무예를 닦으면서도 농사를 장려하였다.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전쟁에 나서면 반드시 친히 앞자리에 섰으니

흠뻑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었다.

 

안으로는 후와 태자 등을 아낌에 정성이 극진하였더니 화목함이 항상 충만하였다.

 

음주가 잦지 않았고, 손으로는 노름이나 쓸모없는 것에 손대지 않았다.

 

사냥과 유희는 사슴제사나 동굴제사 등의 일이 있을 때만 하였고,

하늘을 우러름에 부지런하였다.

 

정사를 살핌에는 종척・공경들과 협의하였으며,

때때로 당신의 처자를 찾아 위로하기를 여느 사람을 대하듯이 하였더니,

종실의 여인들은 상을 하늘같이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무{仙巫}와 잡기{雜技}를 좋아하지 않았고 유학하는 인사를 등용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책을 읽게 하여 예의를 알고

천한 것과 거짓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였다.

 

황상은 동생들이 많았어도 모두를 현명하게 가르쳤는데,

항상 <유총劉聰>과 <석호石虎>의 행실을 경계하게 하고,

골육상쟁을 악행 중에 가장 큰 것으로 하였으며,

황상의 모든 동생들과 한 자리에 모이는 때이면

여느 집안사람들처럼 나란히 누워 함께 즐겼더니,

아끼는 마음이 얼굴마다 흘러넘쳤다.

 

짐짓 황상의 모든 동생들은 황상을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받들었으며,

황상은 동생들이 얻고자 청하는 바 있으면 거의 모두를 흔쾌히 들어주었다.

 

늘 삼대경을 읽어 정사의 거울로 삼았고, 고국원의 산천을 아끼었다.

 

수릉(壽陵)을 쌓는 것이 백성들에게 폐해가 됨을 생각하여 그만두게 하였었기에,

지금 대행의 시신을 빈궁에 안치하고 고국원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

 

태후가 옥관과 금곽을 쓰고 싶어 하고, 조왕(祖王) 또한 찬동하는지라,

산호와 상아 및 귀한 조가비를 구하고 있었다.

 

대행께서는 논밭 사이에 살고 있는 유학들을 조용히 찾아가

종일토록 도리{道}를 토론하실 때는 먹기조차 잊었었고,

먹고 싶은 생각이 있어 말할 땐 가려서 마땅한 것으로 간략하게 하셨더니

 

오늘에 와서 <송호宋浩>・<손긍孫肯> 등 유생들이 글을 올려

 

“옥관을 쓰면 대행의 검덕에 누가 될 것이오니 그만 두시라.”고 아뢰었다.

 

대행께서는 아름다운 덕행으로 집안을 교화하셨기에,

<해>후와 <천강>또한 부지런히 음교를 따라서 아녀자의 덕을 지킬 수 있었고,

대행의 치세 내내 하루도 해이됨이 없었다.

 

대행이 돌아가시자 태후께서는 시초엔 자행{恣行}하였었으나,

세간의 말이 두려워서 늘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지켰고,

대행께서 부지런히 선행하던 나날을 사모하여

다시금 두려운 듯 스스로 지키는 바도 많았다.  

 

다음해인 임신년 2월 25일에, 고국원에 장사하였다.

 

끝내 옥관과 금곽이 사용되었다. 춘추 61세이었다.

 

제는 후궁이 700사람이었으며 황자는 258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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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