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제의 이름은 <상부相夫> 혹은 <삽시루歃矢婁>이다. 첫 호는 <치갈雉葛>태자인데 서천제의 큰아들이고 어머니는 <우수于漱>의 딸인 <우于>태후이다. 성품은 교만하며 변덕스러웠으고 色을 밝히고 시기를 잘하고 매우 잔인하였다. 그래서 서천제는 일찍이 나라를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죽어 <우于>후가 가짜조서를 만들어 재위에 올리고 안국군으로부터 병권을 빼앗아 자신의 형제들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나랏사람들이 탄식하며 한숨지었다. 봉상제 원년{AD292}임자, 3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안국군 <달가>는 본바탕이 다른 족속이었으며, 용렬한 성품에 감히 병권을 훔쳤으니, 위험스러웠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짐이 몸소 그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 집안을 몰수한다."라고 하였다. 애초에 <달가>의 신하였던 <선결>이 <치갈>을 제거하라고 권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지금에 이르니, 그 신하가 막바지에 다시금 신라로 피하여 나갈 것을 권하였는데, 이번에도 아니 들어주고, "나는 선제를 따라 죽고 싶었소."라 말하고는 천천히 사약을 바닥까지 들이마셨다. <문부門夫>를 태보로, <상루尙婁>를 좌보로, <연방椽方>을 우보로, <연안椽眼>씨를 황후로 삼았다. 안국군의 처인 <장張>씨는 간신 <원항猿項>에게 주었다. 이때 연태후 <연엽> 66세, 우태후 <우오두> 50세, 봉상제 <치갈> 34세, 황후 <연안>30세?, 高后 51세, <돌고> 33세, 乙后 32세, <을불> 15세, <옥모> 55세, <달가> 37세이다. 봉상제 2년{AD293}계축, 정월, 졸본에 갔다. 4월, 태후를 모시고 서천궁으로 이거하였다. 8월, <모용외>가 환성(桓城)으로부터 쳐들어와 노략하니, 상은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 싶어, 곡림(鵠林)으로 갔는데, <모용외>가 이를 알아채고는 쫓아왔다. 장수들이 신성의 우두머리인 <고노자高奴子>와 더불어 적을 맞아 싸워 크게 쳐부수었다(곡림대전). <고노자>는 아들은 본시 <고>씨 집안의 가신이었다. 이번의 공로로 대형의 작위를 받고 곡림의 땅도 하사받았다. 9월, 제의 동생인 <돌고>대왕과 <돌고>왕 태자를 죽였다. <을불>은 탈출하여 도망하였다. 곡림지전이 일어났을 때 <돌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싸워 공을 세웠기에, 군신들이 <돌고>의 작위를 올려주고 봉읍도 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원항>이 나서서 "<돌고>는 <달가>의 무리이니, 그 날개를 키워줌은 불가합니다. 이 기회에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조서로써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왔던 것은 제위를 찬탈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말로는 <모용외>를 토벌하겠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은밀히 반역을 기도하려 하였던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상이 "그렇다."라고 말하고는 사약을 내렸다. <원항>은 <돌고>의 모친인 <고>씨를 강제로 능욕하여 첩으로 만들었다. 봉상제 3년{AD294}갑인, 정월, 태후를 모시고 <우于>씨와 <연椽>씨에게 서천궁에서 연회를 열어주었다. 3월, 좌보 <상루>가 처의 동생인 남부대사자 <창조리>를 대주부 자리에 천거하여서 상부(相府)로 들어와 국상의 업무를 대리하도록 하였다. 죽려지검(竹呂之劍)을 내려주어 부도한 자들을 즉참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서 <상루>의 손녀인 <초草>씨는 <을불>과 친하였었는데도, 후궁에 들어와서는 소후가 되었고, 상이 <상루>의 말을 믿었다. <상루>는 늙어 병이 들어 정무를 보기가 고달파서, <창조리>를 천거하여 자신의 일을 대신하게 하고는, 음란함을 즐기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초草>씨의 어미 <葉>씨는 <상루尙婁>의 아들인 <상보尙寶>의 처이다. <초草>씨가 입궁한 이래 역시 승은을 입어 이때에 이르러 아들 <진津>을 낳았기에, 상이 소후로 삼아서 <초草>씨의 다음 서열에 있게 하였더니, <창조리>가 부당함을 간하였다. 8월, <창조리>가 <원항>의 목을 베었다. <원항>이 <고>씨가 복종하지 않아 형을 가하고자 하였는데 <음>씨가 <원항>을 부추겨서 거짓왕명으로 우림의 군대를 부르기에 <창조리>가 <원항>을 즉참한 것이다. 9월, <상루尙婁(232-294)>가 나이 63세에 죽었다. 처음에 <상제尙齊>의 딸 <상선尙善>은 고릉후(高陵侯)의 처였는데, 공리(貢吏)인 <음우陰友>와 밀통하여 아들 <상루尙婁>를 낳았다. <상제>는 <상루>를 거두어들여 자신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상루>는 품성이 온화하고, 처신이 원만하고, 상의 뜻을 잘 알아 모셨으며, 공경들을 모심에 있어서도 조심하여, 사람들의 신망을 얻음에 득을 보면 보았지 별 어려움이 없었기에, <상>씨 가문의 남은 맥을 지켜냈다. <연방椽方>은 좌보가 되고, <창조리>가 국상이 되었다. <묘용외>가 도읍을 환성(桓城)에서 대극(大棘)으로 옮겼다. <모용외>는 <섭신>의 후예로 자몽의 구려성에서 흥기하여 <우문>씨들과 서로 다투다가 환성으로 남하하였는데,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금 대극으로 내려갔다. <모용외>의 모친 <을>씨가 <을두지>의 후손이었기에, <모용외>는 자신을 서몽대왕으로 칭하고 <동명>의 적손이라고 하였는데, 음지에서 자랐기에 그 마음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봉산제 4년{AD295}을유, 2월, 천하를 샅샅이 뒤져 <을불>을 찾았다. 상은 <을불>이 군대를 일으켜 곧 도성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런 명령을 내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봉상제 5년{AD296}병진, 8월, <모용외>가 서천에 들어와 노략하다가, 선황의 능묘를 뒤지고 싶었는데, 마침 그 능묘를 뒤진 자가 갑자기 죽고, 능묘 속에서는 풍류소리가 흘러나오니, <모용외>는 신기하게 여기어 무덤을 뒤지지 못하고는 물러갔다. 증모(蒸母)한 더러운 적도인 <모용외>가 성스러운 무덤 굴에 침입하려 하였기에 이러한 신기한 조짐이 있었던 것이리라. <창조리>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아 <모용외>를 대비케 하였다. 봉상제 6년{AD297}정사,
정월, 조서로써 “적의 자식 <을불>은 <모용외>적의 창귀(倀鬼)가 되어, 부모의 나라를 위험하게 하려 하니, 이를 사로잡아 오는 사람이 있으면 의당 대가로 봉하고 또한 만금의 상을 내릴 것이다.”라 하였으며, 또한 이르길 "궁전은 나라의 위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에 그 추한 <모용외>가 들어와 서천 신궁을 불태웠다. 이 궁전은 선황께서 태후를 모시고 오락하여 즐기시던 곳이었다. 다시금 고쳐서 선황의 영령께 돌려드리지 않을 수 없다.”라 하고는, 해당관리에게 명을 내려 그 절차를 빨리 하라고 하였다. <부포芙布>는 <부芙>씨의 남편이었다. 딸과 <부芙>씨가 귀하게 되자, 남부대사자를 지내고 있다가는, 지난해에 들어와서 지금껏 우보로 있다가, 독버섯을 먹고 죽게 된 것이다. 상이 <부芙>씨 모녀를 끔찍이도 아꼈었기에, 태공의 예로 장사하여 주었다. <창조리>가 간하여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 봉상제 7년{AD298}무오, 정월, <우평于平>이 태보로, <창조리>가 좌보로, <우자于刺>가 우보로, <상보尙寶>는 좌위장군이 되었다. 10월에 교위에게 사로잡혀 함거에 실려 경도로 보내졌다. 그때, 나라 안은 서리와 우박으로 곡물이 죽어, 사람들이 굶주렸고, 이로 인하여 원성이 길에 가득하였다. 궁실의 공역을 매우 급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반옥령의 청옥을 서천으로 날랐는데, 한 사람이 옥판 두 개를 짊어진 것이 줄줄이 길게 뻗쳤었고, 길바닥에 엎어져 죽은 사람 역시 많았으며, 옥판을 옮기다 깨뜨려서 죄를 받은 사람도 하루에 백여 명이나 되었다. 서로가 뭉쳐서 도둑이 되어 관원들을 겁박하였으나, 군관들도 이를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을불>을 실은 함거가 주장(酒醬)에 이르니, 거리를 메운 도둑들이 함거를 깨고 <을불>을 풀어주었다. 이에 상이 대노하여 <방부方夫>와 <우풍于豊> 등에게 도둑들을 잡아들이고 <을불>을 찾아내라고 명하였으나, <방부>와 <우풍>은 모두 관망할 뿐 힘써 노력하지는 않았다.
아들 <분서>가 섰는데, 총명하고 슬기롭고 특출하게 빼어낫다고 한다. 11월, <을불>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수색하였다.
봉상제 8년{AD299}기미, 정월, <우협于夾>이 태보, <우자于刺>가 좌보, <우탁于卓>이 우보가 되었다. <분서>가 동명 사당을 배알하였다. 3월, <우협>이 죽어, <우자>가 태보를 맡고, <창조리>가 좌보를 맡았다. 9월, <모용외>가 봉산(烽山)>에서 곡을 하였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그때, 상은 <초草>씨와 더불어 봉산(烽山>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태사 <연봉椽逢>이 "객성이 달을 범하면 외적이 내통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후와 비 들 중에 있을 것입니다."라 아뢰었더니, <초>씨가 화가 나서 말하길 "<연봉>이 우리 부처를 이간하고자 이렇게 방자한 망언을 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연봉>은 해원에 유배되었다. 이때, 서부대사자 <우린于璘> 또한 "<방부>가 <을불>을 편들어 반역하였다."고 주청하고 싶었으나, 길에서 <연봉>이 귀양 가는 것을 보고는 다가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연봉>이 "주상이 여색에 빠져서 정국이 혼란스럽게 되었고, 충신들도 의구심을 내비치며, 가담하고 있지는 않지만, 관망하다가 정변이 나면 내응하려 하고 있다."라고 말하니, <우린>도 고발하지 않고는 돌아가 버렸다. 12월, 뇌성이 울리고 지진이 일었다. <우>태후가 두려워 하니, <상도>가 "하늘과 땅이 뇌성을 내는 것은 사람들이 방귀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오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라 하였다.
봉상제 9년{AD300}경신, 정월, 지진이 일었다. 추8월, 국내의 15살 이상인 남녀들이 서천 신궁 부역에 끌려가서 걸식하며 떠돌았다. <창조리>가 이런 사정을 간하였더니, 상이 말하기를 "경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 싶다 이거요?"라 하였다. <창조리>는 어쩔 수 없어, 군신들과 더불어 <을불>을 맞아들여 제위에 세우고는, 상을 폐하여 가두었다. 상은 죄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두 아들 역시 따라 죽었다. 봉산(烽山) 언덕에 묻어주었다.
5월, 우보 <부포芙布>가 죽었다.
9월, <을불>이 최체로부터 점선에 이르러서 대방 및 5부와 회맹하려다가,
<책계>가 대방·한맥(漢貊)>·5부를 공격하다가 복병을 만나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