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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31 서천대제기

 

 

제의 초호는 약노대왕(藥盧大王)이고, 휘는 <약우若友>이며,

<중천제>의 둘째 아들이고, 모친은 <연椽>태후이다.

 

성품은 오직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영민하였고,

백성을 아끼며 뜻있는 사나이를 좋아하였기에,

나라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서천대제 원년{AD270}경인,

 

동10월, <연椽>태후와 졸본으로 가서 시조 사당을 배알하고 돌아왔다.

 

이때 朱后 <주남> 67세, 연태후 <연엽> 44세,

서천대제 <약우> 31세, 황후 <우오두> 28세, 태자 <치갈> 12세, <일우> 24세,

<옥모> 33세, <달가> 15세, 高后 29세, <돌고> 11세, 乙后 10세이다.


 

 

 

 

 

서천대제 2년{AD271}신묘,

 

 

춘정월, <우于>씨를 황후로 세웠다.

 

后는 서부대사자 <우수于漱>의 딸이다.

 

명랑하고 노래를 잘하였으며, 또한 효도하고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14살에 태자궁에 들어와서는 <연椽>태후를 잘 모셨으며,

지금에 와서 곤위에 올라 국정을 간예하게 되었다. 

 

 

추7월, 국상 <음우陰友>가 죽었다.

 

일찍이 상이 누가 경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를 <음우>에게 물었을 때,

 

<음우>가 답하였기를

 

"나라엔 삼보가 있으니 중대한 정사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고,

소위 국상(國相)이란 자리는 그들의 의견을 사이에서 조절하는 자리이옵니다.

 

신의 자식 <상루尙婁>가 신의 정사를 대신하여 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일을 맡아볼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라고 하였었다.

 

이윽고, 상이 <상루>에게 대신하라 하였다.

 

<상루>가 고사하고 출사하지 않으니,

군신들 모두 또한 <상루>만한 이가 없다고 여겨, 관복 입은 채로 도열하여 기다렸다. 

 

 

9월, <상루>가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어쩔 수 없어 상부(相府)에 등청하여 친히 일을 보았다. 

 

 

겨울12월, 지진이 있었는데,

경도의 많은 사람과 가축들이 상하였기에, 금주하라 명하였다. 

 

<주朱>후가 <분芬>태자를 낳았다.

 

 

 

서천대제 3년{AD272}임진,

 

춘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 농사와 양잠은 나라의 기본이다.

 

<추모>신황께서는 비둘기가 물어 온 보리를 친히 파종하시어

만세에 모범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짐도 직접 밭을 갈고 황후도 손수 양잠을 할 것이다."

하고는 관리에게 명하여 제반 기록을 근거하여 방법과 순서를 살피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곡물이 피해를 당하였고, 6월엔 가뭄이 심하였다.

 

<우>황후가 아뢰길

 

"우리 부처가 밭 갈고 뽕을 가꾸고 나서 제사를 올린 것이,

제사를 먼저 하지 않고 농사를 먼저 하여, 다른 해와는 달리 반대로 하였을 뿐인데,

그게 탈이란 말인가?"라 하니,

 

제가 이르길

 

"단지 정성이 부족하였음을 한할 뿐이지,

감히 그 허물을 원망하지는 못할 것이오."라 하였다. 

 

11월 <이록비伊鹿肥>가 입조하였기에, <운雲>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다.

 

 

 

 

 

서천대제 4년{AD273}계사,

 

추7월, 정유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였다.

 

 

 

 

 

서천대제 5년{AD274}갑오,

 

추8월, <유화>성모의 신묘에 제사하였다.

 

서진(西晉)이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에 5部를 두었다.

 

일설엔 범양·상곡·북평과 요서까지이었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토 등이라고 하였다.

 

이들 모두는 서진의 땅이 아니었고,

교위·태수·참군은 허설(虛設)한 것이었었으니, 우습지 아니한가.

 

 

 

 

 

서천대제 6년{AD275}을미,

 

춘2월, 상이 친히 원(園) 중에서 밭을 갈고,

<우>황후와 <연>태후는 궁중에서 친잠하였으며,

5부에는 전관(田官)을 나누어 보내서 농·축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추9월, 왕제 <일우逸友>가 거짓 조서를 보내

패자 <구인苟仁>을 불러들여 죽이려 하였는데,

상의 지친이라서 죽음을 면케 해주었다. 

 

<응록應鹿>의 차자인 <이록비伊鹿肥>가 색두(索頭)의 주인이 되었다.

 

 

 

 

 

 

서천대제 7년{AD276}병신,

 

여름 4월, 책성으로 가서 신성(新城)을 순시하고,

태후와 황후와 더불어 흰 사슴을 잡았는데,

제가 태후의 덕택이라 돌리니, 태후는 황후의 덕택이라 돌렸다.

 

 

8월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9월엔 신작(神雀)이 궁전에 몰려들었다. 

 

상이 말갈은 궁실을 고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이르길

 

"정사는 백성을 아끼기 위함이지 궁전이나 궁실을 돌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라 하고는 그 말을 글로 써서 <치갈}>태자에게 보이라 명하였다.

 

백성들의 부모가 된 자들도 응당 이렇게 하여야 할 것이다.

 

 

 

 

 

 

서천대제 8년{AD277}정유,

 

춘정월, 백성들이 굶주려서, 궁중에서도 금주하게 하였다. 

 

5월, 왜산에서 사냥하여 부로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가을철에 단궁(檀宮)이 완성되는데, 향나무와 옥석으로 치장되었다.

 

 

 

 

 

 

서천대제 9년{AD278}무술,

 

춘정월. 상이 후비들과 밤에 연회를 하는 중에 벽력같은 소리가 나더니만,

작은 개 같은 모습의 불빛이 <돌고>태자의 침전으로 날아들었다.

 

태사 <우선于先>이 아뢰길

 

"천랑성(天狼星)이 궁중으로 떨어졌으니,

반드시 귀한 아들이 생길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해 10월에 <을>씨 가 <을불乙弗>을 낳으니,

오색 구름이 궁실을 감싸고 향기가 있었다.

 

<을불>은 체구가 풍성하고 기이하고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4월, <연衍>공주를 <목술穆術>의 처로 주었는데,

<연衍>공주는 <우술于術>의 소생이었다.

 

 

 

 

 

 

서천대제 11년{AD280}경자,

 

겨울10월, 숙신이 쳐들어와서 변방의 백성을 해치니,

 

상이 군신들에게 말하길

 

"짐이 부덕하여 나라의 터전이 잘못된 습격을 받게 되었고,

능력이 모자라서 가까이 있는 이 적을 미리 겁주지도 못하고 떨게 하지도 못하였소.

장군 될 사람을 찾아야 하겠는데, 누가 적절하겠소?"라 하니,

 

군신들이 아뢰길

 

"동생이신 <달가達賈>의 지략과 용맹함이면 이 일에 합당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달가>에게 가서 무찌르라 하니,

<달가>가 갑작스레 엄격하여 그들의 단노성(檀盧城)을 쳐서 빼앗았다.

 

여자 장수 <조환祖環>이 전사하였는데, 서른 한 살이었다.

 

결국에는 숙신의 추장을 죽이고,

그곳에 있던 600여가를 부여의 남쪽인 오천(烏川)으로 옮겨 살게 하고,

항복한 부락 일곱 곳은 부용토록 하였다.

 

<달가>는 본래 <옥모>의 소생이어서 종실들이 대우하여 주지 않았었는데,

이때가 되어서 상이 등용하여 주니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 공로로 안국군(安國君>에 봉해지고 내외병마사를 맡게 되었으며,

양맥과 숙신의 모든 부락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싸움의 초에 <달가>가 양맥으로 갈 때 <돌고>를 데리고 갔는데 끝까지 함께 갔다.

 

상은 <돌고>가 떠나기 전에 <돌고>를 품안에 안았다가 보냈다.

 

<돌고>는 세 살 때에 벌써 커서 싸우게 되면

큰 승리를 거두겠다고 말 한 적이 있었던 까닭에,

첫 싸움에서 얻은 땅 알하를 을불읍으로 삼아서 <돌고>가 직접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옥모> 43세, <달가> 26세, <돌고> 21세, <을불> 3세이다. 

 

 

 

 

 

 

서천대제 12년{AD281}신축,

 

정월, <을>씨를 단림궁(檀林宮)주로, <을불>을 태자로 삼았다.

2월엔 조묘를 참배하였고,

 

9월엔 양산(楊山) 서쪽에서 크게 군사사열을 벌였다.

 

 

 

 

 

서천대제 13년{AD282}임인,

 

추9월, 졸본에서 동명제를 지냈다.

 

<장화張華(232-300)>가 사신을 보내 찾아와 입조하였다.

 

마한(馬韓)이 배반하여 <장화張華>에 붙었다.

 

추모경 70권을 새로이 꾸몄다.

 

 

280년 晉이 吳나라를 멸망시키자

한반도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晉과 통교한 것을 말한다.

 

 

 

 

 

서천대제 14년{AD283}계묘,

 

5월, <치갈>에게 양맥을 순시하라고 명하였다.

 

 

 

 

서천대제 15년{AD284}갑진,

 

2월, <방회方回>·<대발大發>이 <을불>의 스승이 되어 서천궁(西川宮)에 기거하였다.

 

 

 

 

서천대제 16년{AD285}기사,

 

춘정월, 관노(灌奴)의 우태인 <연길椽吉>이 큰 호랑이 자웅 한 쌍을 바쳐왔다.

 

궁내의 정원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먹이를 주고 가두어 기르게 하였다.

 

<주朱>후가 춘추 82세에 죽었는데,

제를 섬겼고 법도를 지키고 뜻을 지킴이 매우 강하였다.

 

후는 정말 거울 속에 보이는 사람 그대로였다.

비리왕 <의려>가 <모용외>에게 패하고는 자살하였고,

그 권속들은 <돌고>에게로 도망하여 오니, 양을 나누어 주고 안주시키도록 명하였다.

때에 <모용강慕容剛>이 피살되니,

<모용섭귀>의 아들인 <모용외>가 이어 받아서 그 무리를 이끌게 되었다.

 

<모용외>가 <모용강>의 어미를 처로 들였다.

 

3월에 대방을 치니 백제 사람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백제로 돌려 공격하여 백제의 성 두 개를 빼앗았다.

부마인 <목술穆術>이 황자 사병들의 병폐를 들어,

그 사병을 파하자고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서천대제 17년{AD286}병오,

 

정월, <우선于先>이 <을불>의 스승이 되어 <효경>을 가르쳤다.

 

<을불>은 나이 아홉 살에 말 타고 활쏘기(騎射)를 잘하게 되었다.

 

하루는 상께 청하여 아뢰길

 

"무를 숭상하는 무리들은 예(禮)를 모릅니다.

반드시 <일우逸友>에게 예와 효를 공부하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라 하였는데,

그리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백제는 우리에게 대항하고 신라를 서방질하여, 딸을 인질로 보내고, 화친하였다.

 

고이왕 23년(AD286) 병오

2월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이 구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대방을 구하도록 명하였다.

고구려가 우리를 원망하여 장차 변방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위례성과 아단성과 사성을 수선하고 지붕을 이어 대비하였다.

<남당유고 백제왕기>

 

 

2월, 아우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들 둘은 모두 불륜의 자식이었고, 교만하고 방자하기가 습관이 되어 있기에,

상이 여러 번 이를 질책하였으나,

깨우치지는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들의 무리들과 년 중 오고가면서 반역을 모의하였고,

칭병하고는 온천으로 가서 질펀하게 놀아나고,

말을 함부로 뱉어내더니만 갑자기 반역하였다.

 

이런 까닭에 거짓으로 그에게 재상의 자리를 준다고 하여 불러들여 붙잡았고,

그 무리들은 주살하였다.  

 

11월, 백제의 <고이>가 죽어, 그의 아들 <책계>가 섰다.

 

<책계>는 키가 크고 몸집이 좋았으며, 의지와 기개가 있으며 용맹스럽고 뛰어났다.

 

<위례성>·<아차성>·<사천성>으로 우리를 대비하였다.

 

<책계>의 처는 대방왕의 딸이어서, 대방을 편들고 우리에게 대항하였던 것이었다.

 

 

 

 

 

서천대제 18년{AD287}정미,

 

정월, <돌고>를 양맥 교위로 삼았다.

 

비리의 <의라>가 晉의 <가침>과 함께 <모용외>를 정벌하여 <손정孫丁>을 참하고

옛 땅을 회복하고는 <돌고>에게 달려와서 도움을 청하였더니,

<돌고>는 양맥의 군사를 보내서 <의라>를 돕게 하였다. 

 

 

 

 

서천대제 19년{AD288}무신,

 

4월, 책성에 행차하여 신성의 옛 목책에 영을 설치하였다.

 

책성이 퇴락하였기 때문이었다. 

 

해곡(海谷)의 태수가 와서 고래눈알을 바쳤는데, 밤에는 빛이 났다. 

 

 

8월, 동쪽으로 수렵을 나가서 흰 사슴을 사로잡았다. 

 

 

9월, 지진이 있었다. 

 

 

11월, <신성>에서 돌아왔다.

 

 

 

 

 

서천대제 20년{AD289}기유,

 

정월, 비리의 <의라>가 입조하였다. 

 

 

9월, 서천에 행차하여 농사를 살피고,

부로{父老}들에게는 술을 나누어 주었다.

 

 

 

 

서천대제 21년{AD290}경술,

 

정월, <우于>후와 함께 서천궁 온탕에 들었다. 

 

5월, 마한의 일곱 나라가 찾아와서 귀부하였다.

 

 

 

 

서천대제 22년{AD291}신해,

 

정월, 가야와 마한 등 열 두 나라가 찾아와 입조하였다. 

 

5월, 상이 안국군의 집을 찾아갔더니,

안국군은 비와 함께 농사짓고 살고 있었는데, 집은 진창 가운데 있었다.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안국군은 <치갈>은 어리석고 둔하니 계위를 시켜서는 안 된다고 누차 청하였고,

상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우>후가 어찌할지를 몰라서 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락에서는 <마품>이 죽어 아들 <금물>이 섰다.

 

 

 

 

서천대제 23년{AD292}임자,

 

 2월, 상이 서천궁에서 갑자기 죽었다.

 

춘추 53세였고, 서천릉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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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