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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24 신대제기

 

 


제의 휘는 <백고伯固>이고, <태조>의 별자(別子)이다.

 

모친은 <상온尙溫>의 딸{<천화>}인 <상尙>태후이다.

 

의표는 영특하고 성품은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次大)>가 무도하여 백성과 신하들이 가까이 지내길 꺼려하였다.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맥부에 사자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산곡으로 숨었다.’

 

이에 <차대>가 <백고>를 의심하며,

 

<상>후에게

 

“<백고>가 누구 자식이오?”라 물었고,

 

후가 선제(仙帝)의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더니,

 

< 차대>가 화를 내며

 

“<백고>가 태어났을 때, 당신은 상황{<太祖>}의 총애를 받던 후였었는데,

어찌 <백고>가 <선제>의 자식이란 말을 하시오?”라고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니,< 상>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백고>는 상황이 위급하여졌다.

 

<상>후는,< 명림답부>에게는 연통하여 도움을 청하고,

<차대>에게는 독이 든 음식을 먹였으나, 독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

 

이에 <명림답부>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차대>를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였으며,

<차대>의 심복 장사들을 체포하기를 열흘이나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제(帝)를 창수궁(淌水宮)으로 맞아들여 서 즉위하게 되었다.


 

신대제 원년{AD165}을사,

 

11월, 우보 <어질>이 제에게 옥새를 바치며 아뢰길

 

“선군{차대제}께서는 불행하게 세상을 등지셨으며,

아들이 있으나 불초하여, 하늘과 사람들의 뜻이 폐하께 돌아왔습니다.

원하옵건대, 억조창생을 위하여 황제의 위에 오르십시오.”라 하였다.

 

이에 상은 부복하여 세 번을 사양한 후에 새보를 받고,

등단하여 백관과 만민의 만세를 받았다.

 

하늘의 해가 밝음을 되찾았다.  

 

<목도루>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송기松奇>를 태보로, <어질箊疾>을 좌보로, <상경尙庚>을 우보로 삼았다.

 

<명림답부(128-179)>는 엄표(淹淲)패자로 삼고, 제의 딸을 처로 삼아주었다.  

 

색두(索頭)의 <두산梪山>이 죽어, 아들 <두진梪真>이 섰기에,

<비裶>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다.  

 

태사 <미긍米肯>이 연호를 광국(光國)으로 바꾸자고 청을 하였더니,

 

상이 답하길

 

“덕이 제위를 칭할 만큼 되지 못하니,

오히려 하늘의 뜻을 등지고 백성의 뜻을 거스를까 걱정스럽소.

어찌 연호를 바꾸어 비웃음을 사겠소!”라 하였다.  

 

<두진梪真>이 자기의 나라를 세 부로 나누었다.

 

부여(扶餘)에서 오손(烏孫)까지였다고 한다.

 

 

이때 상후(尙后) <尙天花> 62세, 신대제 <伯固> 45세,

목후(穆后) <穆守禮> 29세,<男武> 11세, <發岐> 8세,

궁인 <주진아> 11세, <명림답부> 38세, <을파소> 27세이다.




 

신대제 2년{AD166}병오,

 

정월, 신해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차대>가 가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풀어주고,

겸하여 <차대>의 가족들도 풀어주었다.

 

<차대>의 아들 <추안芻安>이 찾아와 죄 주기를 청하니,

 

위로하며 이르길

 

“숙부는 어질지 못하여 죄 없는 이들을 함부로 죽였기에 하늘과 사람들이 노하였다.

너는 죄가 없으니 쓸데없이 도망하여 숨지 말거라.”라 하고는

 

구산뢰(狗山瀨)와 두루곡(豆婁谷) 두 곳을 식읍으로 주었으며,

양국군(讓國君)이라 불렀다.

 

<명림답부>에게는 군권을 총괄하게 하였고,

겸하여 <양맥梁貊>의 모든 정사도 맡아보게 하였다.

 

지위는 삼보(三輔)와 나란하였으나,

삼보(三輔)의 권한은 모조리 <명림답부>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국상(國相)제도가 시작되었고,

<명림답부>시절엔 보외태대가(輔外太大加)라 불렀고,

<을파소乙巴素(139-203)>시절엔 국상(國相)이라 불렀다.


 

신대제 3년{AD167}정미,

 

2월, <송기松奇>가 죽었다.

 

<어질箊疾>을 태보로,< 상경尙庚>을 좌보로, <백면白面>을 우보로,

<연합 淵合>을 대주부로 삼았다.  

 

유주(幽州)의 <공손역公孫域>이, 현도태수를 자칭하면서, 구리(丘利)에 쳐들어왔다.

 

<화진禾晉>이 이를 격파하였다.

9월, <졸본>으로 가서 조상의 사당에 제사하고, 10월에 돌아왔다.


 

신대제 4년{AD168}무신,

 

5월, 백제 사람 <도미都彌>가 항복하여 왔기에 <산산蒜山>에 살게 하였다.  

 

목후(穆后)가 딸 <옥양玉陽>을 낳았다.

 

이때 백제는 개루왕 2년이다.


12월, <화백禾白>・<화진禾晉>・<고덕>・<목파穆巴> 등이 네 길로 나누어

유주(幽州>와 병주(幷州) 두 주를 정벌하고, 큰 성씨 12 집안을 몰아왔기에,

공경들과 서로 통혼하여 살게 하였으며,

즐사(櫛梭){두터운 천을 짜는 일}・박직(箔織);{얇은 비단 천을 짜는 일}・

금은{金銀){금과 은을 야금하는 일}에 종사하는 장인들은 서하(西河)에 살게 하였고,

모든 경적{經籍}・의약{医藥} 관련 관리였던 이들에게는 관직을 주었다.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는 산서성 일대이다.


 

<백면白面>에게 <동명>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선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이르길

 

“<추모>께서는 신이셨지 인간이 아니시었소.

 

일찍 일어나 부지런하시길 20여년을 하루같이 하시었소.

 

나를 따르는 무리들이여!

 

선원(仙院)과 정원(政院) 모두 하나같이 일찍 일어나 부지런 하여

자신을 극복한 연후에 성상{聖像}에 답하고

대경(代鏡) 그림 57권도 닦아 나갑시다.”라 하였다.


 

신대제 5년{AD169}기유,

 

2월, 유주(幽州) 적(賊) <교현喬玄>이 구려성(句麗城)에 쳐들어와 노략질하기에,

<화진禾晉>이 하산(河山)에서 그 군대를 쳐부쉈다.

4월에 서하(西河)에서 열병하고,

 

조서로 이르길

 

“군병은 나라의 근본을 지키는 힘이오.

짐도 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도적을 막을 것이오.

대소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는 이 뜻을 새기어야 할 것이오.”라 하였다.

한(漢)인 <경림耿臨>이 현도태수를 자칭하고, <교현喬玄>과 함께,

<구리丘利>의 땅에 쳐들어와 노략질하였다.

 

<화백禾白>이 이를 쳐서 물리치고 그들의 처자와 인장및 보인을 노획하였다.


 

신대제 6년{AD170}경신,

 

정월, <흘紇>씨를 궁인으로 삼고, <우회>를 사자(使者)로 삼았다.

 

<흘紇>씨는 통구왕(桶口王)의 비(妃)였으며, 나이는 50이었다.

3월, 병인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신대제 7년{AD171}신해,

 

5월, <어질>이 꿈에 <고복장>을 보고나서 병이 들어 곧 물가의 정자를 옮기려 하자,

<고복장>의 아들이 이를 죽였다.

 

조정은 이 일로 난감하였다.

 

책성(柵城)으로 떠나라고 명하였다.

<상경尙庚>을 태보로, <백면白面>을 좌보로, <목숭穆崇>을 우보로,

<양필陽弼>과 <고형高衡>을 좌・우 대평자로, <목천穆天>을 중궁 대사자로 삼았다.  

 


 

신대제 8년{AD172}임자,

 

정월, 목후(穆后)가 <진기晉岐>태자를 낳았다.  

 

9월,< 공손역>・<경림>・<교현> 등이, 색두(索頭)와 함께, 병력을 합하여 쳐들어와

구려성(句麗城)・개마성(盖馬城) 등을 궤멸시켰다.

 

<화진禾晉>은 구리(丘利)에서 물러나 하성(河城)을 지켰고,

<명림답부>는 남구(南口)로 가서 들판을 불태워 비우고 기다리니,

불과 한 달도 아니 되어 먹을 것이 떨어지니 물러갔다.

 

이를 두고,

 

“군량을 1,000여 리나 실어 날라야 할 형세라면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명림답부>가 굳센 기병 7천으로 몰아치고,

<화진> 또한 답지하여 함께 쳐서, 좌원(坐原)에서 이들을 대파하였더니,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이를 두고 좌원대첩(坐原大捷)이라 한다.

 

<명림답부>에게 좌원(坐原)의 땅을 주었고, 후에 질산(質山) 땅으로 바꿔주었다.  

 



 

신대제 9년{AD173}계축,

 

정월 5일에 궁인 <주朱>씨가 <연우延優(173-227)>태자를 낳았는데,

방 안이 향기로 가득하였었다.

 

상이 크게 기뻐하며 마산궁(馬山宮)비(妃)로 봉하여 주고,

그녀의 부친 <주로朱輅>를 채공사로 삼았다.

 

<주로朱輅>는 <주문朱文>의 별자(別子)였다.  

 

해소(??) - 왕문(고야) - 호화(재사) - 궁(상천화) - 백고(주진아) - 연우
해소(??) - 왕문(고야)주문(??) - 주로(주번) - 주진아(백고) - 연우 
 

 

신대제 10년{AD174}갑인,

 

정월, <상경尙庚>이 병들어 물러나니,

<백면白面>을 태보로,< 목숭穆崇>을 좌보로, <양필陽弼>을 우보로,

<미긍米肯>을 대평자로 삼았다.

 

<미긍米肯>은 한(漢)인인데, 천문을 달통하고,

사기(史記)에 밝았으며, 율령에 정통하였다.

 

상이 홀로 된 공주를 처로 삼아주고는 그의 능력을 크게 썼다.

 

겸양 근검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  

 

평부(評府)・핵부(劾府)・공부(供府)・채부(採府)・빈부(賓府)・노부(奴府)・

왕자사병부(王子私兵府)를 두었다.

 

모두 대가(大加)들이 수령을 맡고,

대평(大評)・대핵(大劾)・대공(大供)・대채(大採)・대빈(大賓)・대노(大奴)・

장군(将軍) 등이 차석이 되어, 그 부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일 또한 <미긍米肯>이 아뢴 것이었다.


 

신대제 11년{AD175}을묘,

 

3월, 상이, <현玄>태자는 선하기는 하였으나 선(仙)하기를 좋아하기에,

<남무男武>태자를 동궁으로 삼으려 하였더니,

 

<남무>는

 

“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는

 

주(州)와 읍(邑)을 두루두루 살피며 제나(提那)에 이르러서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으며,

<현玄>태자가 찾아가서 알아듣도록 하였더니, 돌아왔다.  

 

<발기發岐>가 <호천虎川>에게 장가를 들었다.  

 

<주朱>씨가 딸 <형夐>을 낳았다.


 

신대제 12년{AD176}병진,

 

삼월, <남무男武>를 정윤으로 삼고,

후의 오라비 <목천穆天>을 동궁대부로, <우소于素>를 동궁 조의로 삼았다.  

 

<백면白面>이 나이 80으로 죽었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가지런하였으며, 비단 폭에 그리기를 잘 하였다.

 

<상>태후의 외가 식구로,

벼슬살이를 60년이나 하면서도, 허튼 일은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하면서도,

 

“덕이 몸에 널리 배어있지 않고,

그릇이 나라를 담아내지 못하여 재상감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목숭穆崇>이 태보, <양필陽弼>이 좌보, <고형高衡>이 우보가 되었다.  

 



 

신대제 14년{AD178}무오,

 

3월, 동궁 조의 <우소于素>의 딸을 동궁비로 삼았다.

 

<우소于素>에게는 작위를 더하여 주어서 제나(提那)패자로 삼았다.  

 

10월, 병자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이르길

 

“짐이 부덕하여 보위를 더럽히고 있소.

위로는 모친께 효를 다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자애롭지 못하였소.

일찍이, 우리 <동명선황>께서는 하루에 백 가지의 좋은 일을 하시고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셨소.

짐은 하루에 한 가지의 선행을 하고자 하여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소!”라 하였다.

 

좌우가 송연해 하였다.

 

이날, 태보 <목숭穆崇>이 죽어, <양필陽弼>이 대신하게 되었고,

<고형高衡>이 좌보가, <목천穆天>이 우보가 되었다.


 

신대제 15년{AD179}기미,

 

9월, 양맥공(梁貊公)이며 섭정이었던 <명림답부>가 나이 52살에 갑자기 죽어,

양맥대왕․부마도위의 예를 갖추어서 질산원에 장사하였다.

 

담력 있고 권도의 지략이 있어서, 도모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었다.

 

사람들이 하늘처럼 여겼다.

 

<상>태후의 총애를 받아, 국정을 15년이나 도맡아 보았는데,

도성 안팎 모두가 흡족해 하였다.

12월, 상이 서도(西都)의 란궁(鸞宮)에서 춘추 59세로 죽어,

고국곡(故國谷)에 장사했다.

 

상은,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한(漢)인들의 경적(經籍)을 즐겨 들었고,

스승을 두어 강의하게 하였으며, 성인의 다스림을 펼치고 싶어 하였으나,

정사를 <상>태후와 <명림답부>에게 위임하였던 까닭에,

뜻과 같이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서글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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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