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에 해당되는 글 73건

  1. 2016.11.10 화랑세기(花郞世紀 )

 

 

花郞世紀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桐山), 노(魯)의 태산(泰山)과 같다.

 

옛날 연(燕) 부인(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그 풍속이 점차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源花)라 하였다.

 

<지소只召>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모진(보도) - 지소(515- )(모진) - 삼모진(534-576, 24대 진흥대제 재위540-575)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魏花>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옛날에 선도는 신을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무리에 들어간 후 선도는 도의(道義)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위화魏花>랑은 <염신剡臣>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벽아碧我> 부인이다.

 

염신(벽아) - 위화(487- ) <1세 풍월주 540-543>

 

어머니가 총애를 받아 <비처毗處>왕의 마복자(摩腹子)가 되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마복칠성(摩腹七星)이다.

 

<아시阿時>공의 아버지는 <선모善牟>이고 어머니는 <보혜寶兮>이다.

<수지守知>공의 아버지는 <이흔伊欣>이고 어머니는 <준명俊明>이다.

<이등伊登>공의 아버지는 <숙흔叔欣>이고 어머니는 <홍수洪壽>이다.

<태종苔宗>공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고 어머니는 <보옥寶玉>공주이다.

<비량比梁>공의 아버지는 <비지比知>이고 어머니는 <묘양妙陽>이다.

<융취肜吹>공의 아버지는 <덕지德智>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肜>공주이다.

 

선모(보혜) - 아시(481- )

이흔(준명) - 수지(482- )

숙흔(홍수) - 이등(483- )

아지종(보옥) - 태종(484- )

비지(묘양) - 비량(488- )

덕지(융융) - 융취(490- )

 

혹은 말하기를 법흥대왕은 칠성의 우두머리이며

<위화魏花>랑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도로(연제) - 모진(480-540, 23대 법흥대제 재위 514-539)

 

그런데 칠성록(七星錄)과 보혜기(寶兮記)에는 모두 <이등伊登>공이 없고

<위화魏花>랑을 기재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공은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

 

<벽아碧我> 부인이 날이(捺已)에 있을 때 한 딸을 낳았는데

곧 <비처毗處>후인 <벽화碧花> 부인이다.

 

손동(벽아) - 벽화(485- )

 

<벽화碧花>부인이 입궁하자 공은 사제(私弟)로서 출입하여 비처왕의 총애를 받았다.

 

법흥대왕은 그 때 부군(副君) <지도로>의 아들로 국공(國公)의 지위에 있었는데

총애가 공만 못하였다.

 

<아시阿時>공이 이에 법흥대왕에게 권하여 공에게 하배(下拜)를 하게 하였다.

 

공이 그것을 <염신剡臣>공에게 말하였다.

 

<염신剡臣>공이 말하기를

 

" 국공이 너에게 하배를 하는 것은 너를 신하로 삼기 위한 것이다.

지금 왕은 늙었고 국공은 대망을 가지고 있다.

너는 그를 섬겨야 한다" 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찾아가 신하가 되어 섬기니 많은 것이 국공의 뜻에 맞았다.

 

법흥이 말하기를

 

" 나의 <등통鄧通>이다." 라고 하였다.

 

※ 등통(鄧通) : 중국 한나라 문제의 총애를 받던 신하

 

얼마 지나지 않아 <비처毗處>가 과연 붕 하였다.

 

지증대왕이 즉위하고 법흥을 태자로 삼았다.


공이 <벽화碧花>후에게 태자를 섬기도록 권하여 딸을 낳으니

바로 <삼엽三葉>궁주이다.

 

모진(벽화) - 삼엽(507- )

 

그 때 태자비인 <보도保道>부인은 곧 <비처毗處>의 딸인데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보도保道>의 아우 <오도吾道>는 <선혜善兮>후와 <묘심妙心>이 사통하여 낳았다.

 

비처(선혜) - 보도(485-528)

묘심(선혜) - 오도(487-539)

 

그러므로 매우 아름다워 태자{법흥}에게 총애를 받았다.

 

<오도吾道>는 <삼엽三葉>에게 아양을 떨어 공과 깊이 사귀고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이때 <삼엽三葉>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삼엽三葉>은 <벽화碧花>의 오기 인듯 

 

그리하여 <옥진玉珍>궁주를 낳았다.

 

위화(오도) - 옥진(505- )

 

태자가 알고 <오도吾道>를 <아시阿時>공에게 내리고

<벽화碧花>를 <비량比梁>공에게 내렸다.

 

이에 정비(正妃) <보도保道>부인을 좋아하고 공을 물리치고 멀리 하였다.

 

그러나 <보도保道>부인은 공이 덕이 있다고 여기고 지증대왕에게 청하여

공을 천주(天柱)에 봉하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연제延帝>태후 또한 공을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

 

<옥진玉珍>이 궁에 들어가 법흥왕의 잠자리 시중을 들자

곧 다시 처음과같이 공을 총애하게 되었다.

 

마침내 공은 이찬의 직위에 있게 되었다.

 

<옥진玉珍>이 법흥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자 <보도保道>를 비구니가 되게 하고

공을 신하로 삼았다.

 

그런 연유로 <지소只召>태후가 국정을 맡자 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공을 그 우두머리로 삼아 이름하여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

 

<지소只召>는 <보도保道>부인의 딸인데

<입종立宗>공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대왕이 <옥진玉珍>궁주를 사랑하여

진흥대왕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뜻이 없었기에 <지소只召>는 걱정이 되었다.

 

공이 이에 대의로서 <옥진玉珍>을 깨닫게 하여 <진흥眞興>을 태자로 삼게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사도思道>태후 또한 무사하였다.

 

공의 덕이 컸다.

 

공의 자손은 매우 많았다

 

장녀 <옥진玉珍> 궁주와 차녀 <금진金珍>부인은 곧 <오도吾道>부인이 낳았다.

 

위화(오도) - 옥진(505- )

                  금진(519- ) 

 

<옥진玉珍>은 처음에 <영실英失>공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법흥대왕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 <비대比臺>공을 낳았다.

 

모진(옥진) - 비대(522- )

 

대왕이 <비대比臺>공을 태자로 삼으려고 하자 공이 간하여 말하기를

 

" 신의 딸은 골품이 없고 또 <영실英失>과 함께 살았으니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법흥이 붕 하자 <지소只召>태후는 <비대比臺>공의 왕자의 지위를 낮추어

공사(公祀)를 받들게 하였다.

 

<비대比臺>공의 딸 <개원開元>궁주는 <동륜銅輪>태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비대(흠리) - 개원(548?- )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공의 아들 <이화二花>랑은 <준실俊室>부인이 낳았다.

 

위화(준실) - 이화(537-603)

 

<준실俊室>부인은 <수지守知>공의 누이이고 <자비慈悲>왕의 외손인데

아름다웠고 문장도 잘 하였다.

 

자비(파호) - 준명(462?-522)

이흔(준명) - 수지(482- )

                  준실(490?- )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공에게 시집을 가서 <이화二花>랑을 낳았는데

또한 모습이 아름답고 문장을 잘 하였다.

 

<지소只召>태후가 총애를 하여 늘 좌우에서 모시게 하였다.

 

태후의 딸 <숙명叔明>궁주가 좋아하여 도망가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원광圓光>조사(祖師)로 우리 동방의 대성인이다.

 

태종(지소) - 숙명(543?-603)(이화) - 원광(560?- )

                                                     보리(573- )     

 

<원광圓光>의 동생 <보리菩利>사문(沙門)은 곧 나의 증조이다.

 

보리(만룡) - 예원(607-673)(우야) - 오기(633- )(운명) - 대문

 

찬하여 말한다.

 

화랑의 시조이고 사문(沙門)의 아비이며

<청아靑我>의 손자이고 <벽아碧我>의 아들이다.

 

미해(청아) - 백흔(조리) - 염신(벽아) - 위화

 

생시에는 선(仙)이고 죽은 후에는 부처로서

원만하게 늘 존재하니 공덕이 모자람이 없도다.

  

 



(2세) <미진부未珍夫>공은 <아시阿時>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삼엽三葉>궁주이니 곧 법흥대왕의 딸이다.

 

아시(삼엽) - 미진부(525- ) <풍월주 544-547>

 

궁주는 꿈에 백학을 보고 공을 낳았다.

 

공은 모습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법흥대왕이 사랑하였다.

 

<비대比臺>공 등과 더불어 궁중에서 자랐다.

 

모진(옥진) - 비대(522- )

 

이때 법흥대왕은 <옥진玉珍>궁주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여

<비대比臺>공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지소只召>태후가 진골정통으로는 세우기 어렵다 하고

<삼엽三葉>과 <아시阿時>공이 태후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태후가 <삼엽三葉>과 공을 사랑하였다.

 

태후가 정치를 맡자 공을 폐신(嬖臣)으로 삼았다.

 

이 때 공의 나이가 16살로 능히 태후의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삼산三山>공의 딸 <준정俊貞>이 원화가 되었는데 많은 낭도를 두었다.

 

삼산(준답) - 준정(521- )

 

그 때 법흥대왕의 딸 <남모南毛>공주는 백제 <보과寶果> 공주의 소생으로

또한 뚸어난 미인이엇으며 공과 더불어 도탑게 좋아하였다.

 

모진(보과) - 남모(524- 540?)

                  모랑(526-555)(3세 풍월주 548-555)

 

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남모南毛>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은 <옥진玉珍>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英失>공을

용양군(龍陽君)으로 삼아 총애하여 높은 직위에 있게하고 원화를 파하도록 명하였다.

 

수지(보현) - 영실(498?- )

 

그런 연유로 <준정俊貞>은 <영실英失>공을 섬겨

<남모南毛>가 원화가 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태후는 비록 왕의 유언으로 <영실英失>을 계부(繼夫)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공에게 명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태후는 또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魏花>공의 낭도를 소속하게 하여 더하여 주었다.

 

<준정俊貞>이 투기하여 술로 유혹하여 <남모南毛>를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南毛>의 낭도들이 그것을 고발하였다.

 

이에 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하였다.

 

그 무리를 일러 풍월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다.

 

위화공이 풍월주가 되고 공이 부제(副弟)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남모南毛>를 잃은 이후 아내를 맞지 않았다.

 

공은 외손으로서 일찍이 법흥대왕을 모셨는데

궁중에서 후궁인 <묘도妙道>부인과 사통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영실(옥진) - 묘도(525- )

 

태후가 이를 알고 허락하였다.

 

공은 이에 <묘도妙道>에게 장가들어 <미실美室>낭주와 <미생美生>랑을 낳았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미생(550-609)

                     미화(553?- )

 

<미실美室>은 재색이 뛰어났는데 <진흥>과 <진평>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동륜(만호) - 백정(567-631, 26대 진평대제 재위 579-631)

 

<미생>랑 또한 화랑에 들어갔다.

 

공은 <지소只召>태후를 섬기며 충성을 다했는데 총애가 줄어들자

몸을 나라에 바치기를 원하여 낭도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과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미실美室>이 왕의 총애를 얻자 공은 작위가 각간으로 오르게 되었다.

 

부인인 <묘도妙道> 또한 궁주에 이르러 대원신통을 잇게 되었으니 아! 성대하다.

 

찬하여 말한다.

 

색(色)으로 섬기어 충성을 다했으며, 용맹으로 나라를 받들고 또한 그 공을 다 하였다.

 

부인 <묘도妙道>는 <위화>랑의 손녀인데 배필로 삼아 <미화美花>를 낳으니

하늘의 도(道)가 아득하고 오래도다.

 

위화(오도) - 옥진(영실) - 묘도


 

 

 

(3세) <모랑毛郞>은 <남모南毛>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서 백제에 들어가

<보과寶果>공주와 더불어 사통하였다.

 

후에 <보과寶果>가 도망을 하여 입궁하여 <남모南毛>와 <모량毛郞<을 낳았다.

 

모진(보과) - 모랑(526-555) <풍월주 548-555>

 

모두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진부未珍夫>가 화랑이 되자 <모랑>을 부제로 삼았다.

 

<모랑毛郞>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모랑毛郞>은 <지소>태후의 배다른 동생이다.

 

진흥대왕 9년{548} 태후가 명하여 3세 풍월주로 삼아

<남모南毛>의 혼백을 위로하였다.

 

<남모南毛>는 <준정>이 투기하여 540년에 물에 빠져 죽었다.

이로써 <지소>태후가 540년에 원화를 폐지하였다.

 

<위화>랑이 그의 딸 <준화俊花>를 <모랑>의 처로 하였으니

곧 <이화二花>랑의 누나였다.

 

위화(준실) - 준화(535- )

                  이화(537-603)

 

<모랑>은 딸 하나만 낳고 일찍 죽었다.

 

마침내 <이화二花>랑이 뒤를 이었다.

 

찬하여 말한다.

 

<동성東城>왕의 아름다움이요 <위화魏花>의 사위다.

 

대왕의 아들이고 태후의 사랑이다.

 

<모랑>은 백제 동성왕 <모대>의 외손자이고 법흥대제 <모진>의 아들이고

<지소>태후의 배다른 동생이다.

 


 

 

(4세) <이화二花>랑은 <위화>공의 아들이다.

 

위화(준실) - 이화(537- 603) <풍월주 556-561>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소 짓는 꽃과 같고, 음율과 문장을 잘 하였다.

 

12살에 능히 <모랑毛郞>공의 부제가 되었다.

 

<지소>태후가 몹씨 사랑하였다.

 

이때 <황화黃華>, <숙명淑明>, <송화松花> 공주가 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영실(지소) - 송화(539?- )

                  황화(541?- )

입종(지소) - 삼모진(534-576, 24대 진흥대제 재위 540-575)

태종(지소) - 숙명(543?-603)

 

공은 이에 <숙명淑明>공주와 정을 통 할 수 있었다.

 

그때 태후는 왕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하였는데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하여 매우 사랑하지는 않았다.

 

<숙명>공주 또한 그러하였다.

 

<숙명>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苔宗>공인데 그때 상상(上相)으로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림이 없었다.

 

삼모진(숙명) - 정숙貞肅

 

왕은 평소에 <사도思道> 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영실(옥진) - 사도(534- )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이에 이르러 <숙명淑明>후는 공과 더불어 정을 통함이 더욱 심하여졌고

여러번 왕에게 들켰다.

 

왕이 황후를 페하려 하자 태후가 울면서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왕이 <숙명淑明>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숙명淑明>은 스스로 임신하여

공과 더불어 도망하여 나갔다.

 

군신들이 태자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을 하였다.

 

이에 <동륜銅輪>공을 태자로 삼았다.

 

공은 비록 죄가 있으나 태후에게 사랑을 받았고

또한 도리어 <동륜銅輪>공에게는 하나의 행운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사도思道>황후가 왕에게 권하여 힘써 보호하여

태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마침내 <숙명淑明>에게 허락하여 부부가 되게 하였다.

 

이에 <원광圓光>과 <보리菩利>를 낳았으니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개국(開國) 5년{555} <모랑毛郞>공이 비사벌(比斯伐)을 순시하다가

병을 얻어 도중에 죽었다.

 

비사벌은 지금의 경남 창녕이다.

 

낭도들이 공을 받들기를 원하였다.

 

그때 공은 태후의 총애로 늘 궁중에 머물렀기에 사양하고자 하였다.

 

낭도들이 말하기를

 

" <위화>공의 아들이 앉지 않으면 누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에 명하여 오르게 하여 4세 풍월주로 삼고 군현을 순행케 하였다.

 

그때 태후가 바야흐로 <만호萬呼>낭주를 임신하였다.

 

진종(지소) - 만호(556- )

 

그런 연유로 그 출산을 기다려 떠났다.

 

<이화>가 4세 풍월주가 된 것은 556년이다.

동륜(만호) - 백정(567-631, 26대 진평왕 재위 579-631)

<만호>는 진평왕 <백정>의 어머니로 556년에 출생하였다.

 

<옥진玉珍>궁주의 동생은 <금진金珍>인데 또한 <위화>공의 딸이다.

 

위화(오도) - 옥진(505- )

                  금진(519- )

 

법흥대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다.

 

대왕이 죽자 문상(蚊上)에 물러나 살았다.

 

법흥대왕이 죽은 해는 540년이다.

 

<남모南毛>가 처음 해를 당하였을 때

낭도들이 원화로 받들고자 하였으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모진(보과) - 남모(524-540?)

 

법흥대제와 백제 동성왕의 딸인 <남모>가 <준정俊貞>의 유인에 빠져 죽은 해는

법흥대제가 죽은 540년경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소>태후는 원화를 폐지하였다.

 

 

<구리지仇利知>공과 몰래 정을 통하여 <토함兎含>공을 낳았는데

극히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비량(벽화) - 구리지(519- )(금진) - 토함(545?- )

                                                 사다함(547-564) 

                                                 새달(555?-603)

 

 

일찍 낭적(郞籍)에 소속되었는데 이 때 부제로 삼았다.

 

 

태후가 궁중으로 불러 보고 말하기를

 

 

" 이 아이는 <비랑比梁> 숙부 보다 못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벽화> 숙모보다 나으니.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할 만하다." 라고 하였다.

 

 

공 또한 <토함兎含>공을 심히 사랑하여 기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금진金珍>낭주가 고맙게 여겨 공을 축복하였다.

 

<토함兎含>에게는 동생 <사다함斯多含(547-564)>공이 있었는데

<묘량妙梁>의 풍모를 크게 가지고 있어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이때 <무관武官>랑이 있었는데 또한 인망이 있어 사도를 많이 거느렸다.

 

<사다함斯多含>공이 나이는 적으나 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청하여 서로 보고 크게 기뻐 말하기를

 

" 공자는 실로 옛날의 <신릉信陵>과 <맹상孟嘗>이니 섬기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니

 

※ 전국시대의 4公子 : 제의 <맹상孟嘗>君, 조의 <평원平原>君, 위의 <신릉信陵>君,

                              초의 <춘신春申>君을 말한다. 

                              

<사다함斯多含>이 대답하기를

 

" 제가 감히 어찌 거느리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래서 <무관武官>랑은 공에게 귀의하였다.

 

공은 이에 태후에게 아뢰기를

 

" <토함兎含>의 아우 <사다함斯多含>은 나이가 아직 장년에 이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낭도를 거느렸으니 자못 국선(國仙)이라고 이를 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에 궁중에 불러 음식을 내리며 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을 물으니

 

<사다함斯多含>이 말하기를

 

"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할 따름입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좋다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왕에게 말하여 귀당(貴幢)을 삼아 궁문을 관장케 하였다.

 

그 낭도 천 명도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 <비조比助>공의 아들 <문노文弩> 역시 호걸로 격검을 잘하였다.

 

비조(문화) - 문노(538-606)

 

공은 <사다함斯多含>으로 하여금 <문노文弩>에게 검을 배우게 하였다.

 

<문노文弩>가 말하기를

 

" 검은 곧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않으면 곧 어찌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호협을 좋아하니 비록 무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네가 그를 보호하라." 라고 하였다.

 

<문노文弩>가 이에 낭도 오백으로 따르니 그 위세가 <토함兎含>보다 컸다.

 

그 때 <동륜銅輪>공이 점차 장성하였는데 대왕이 보익하는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여

<토함兎含>으로 하여 보익하도록 하였다.

 

<토함兎含>이 말하기를

 

" 이것이 나의 임무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화랑의 지위를 그 아우에게 넘겨 주었다.

 

공은 이에 <사다함斯多含>을 부제로 삼았는데 그를 사랑함이 <토함兎含>과 같았다.

 

그때 사람들이 공이 인재를 얻었음을 축하하였다.

 

얼마 있어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다함斯多含>이 종군을 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공은 이에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주고 <토함兎含>공과 더불어

오로지 궁중에서 태자를 보양(輔養)하는데 힘썼다.

 

사다함이 풍월주가 된 해는 562년이다.

이때 <이화> 26세, <문노> 25세, <사다함> 16세이다. 

 

아! 성대하다.

 

공의 맑은 덕과 영화로운 이름은 만세에 끊이지 않을 것이다.

 

공은 <숙명淑明>공주와 더불어 영흥사(永興寺)에 나가 살며 불도에 전심하였다.

 

태후 또한 뒤따라 귀의하였고 <정숙貞肅>태자 또한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았다.


공의 아들 <원광圓光>법사는 <숙명淑明>공주 소생이다.

 

임신할 때 공주는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화가 공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자살을 하려 하였다.

 

갑자기 금불(金佛)이 와서 고하기를

 

" 나는 약사불(藥師佛)인데 공주의 배를 빌려 머물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공주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 배례하니

부처가 공주를 안고 엎드려져 마치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때 공 또한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고 궁중으로 침범하였는데

공주가 바로 누워 마치 품고 있는 것을 잃은 것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부처의 원력이다."라고 하였다.

 

기쁨을 나누고 <원광圓光>을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大聖如來)이다.

 

<숙명淑明>은 또 공의 두 딸을 낳았는데 <화명花明>과 <옥명玉明>이다.

 

이화(숙명) - 원광(560?- )

                  화명(564?- )

                  옥명(566?- )

                  보리(573- )

 

모두 진평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원광圓光>의 동생 <보리菩利>는 <정숙貞肅> 태자의 딸 <만룡萬龍>에게 장가들어

<예원禮元> 각간을 낳으니 나의 할아버지이다.

 

정숙(만호) - 만룡(579- )(보리) - 예원(607-673)(우야) - 오기(운명) - 대문

 

공은 또 <토함>공의 여동생 <새달塞達>에게 장가들어 서자 7명을 낳았는데

모두가 귀하게 되었다.

 

찬하여 말한다.

 

<이화二花>의 풍류는 계림(鷄林)의 청담(淸談)이라

귀족의 자손이 공주에게 장가들고 금불(金佛)이 와서 의지하니 약사여래라.

화랑의 가문이고 법사의 친족이니 위엄있는 공족(公族)이여, 만세에 무궁하리라.


 

 

 

(5세) <사다함斯多含>은 <구리지仇利知>의 아들이다.

 

비량(벽화) - 구리지(519-564?)(금진) - 사다함(547-564) <풍월주 562>

 

처음 <비량比梁>공이 <벽화碧花>후를 그리워하여 늘 후의 뒷간에 갔다.

 

법흥대왕이 <비량比梁>공을 사랑하여 금하지 않았다.

 

과연 후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런 연유로 <구리지仇利知>라 하였다.

 

<구리지仇利知>는 아름답기가 <벽화碧花>후와 같고 담력은 <비랑比梁>공과 같앗다.

 

자라서 낭도의 무사(武事)를 좋아하였다.

 

<금진金珍>낭주와 사통하여 <토함兎含>, <새달塞達>, <사다함斯多含>을 낳았다.

 

<새달塞達>은 <이화二花>공의 첩이다.


<사다함斯多含>은 12살에 <문노>를 따랐는데 격검에 능하였고

16살에 정병 5천을 거느리고 전단문(檀門)으로 달려 들어가 백기를 세웟다.

 

호조(선혜) - 비조부(문화) - 문노(538-606)

 

가야군을 대파하여 그 공으로 전(田)을 받았으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포로로한 생구는 모두 풀어 주어 양인으로 만들었다.

 

대왕이 <사다함斯多含>을 더욱 중하게 여겨 알천의 땅을 주었으나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불모지 수 백 경(頃)을 택하여 받으며 말하기를

 

" 이것이면 사람으로 하여금 족히 근면하게 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이화二花공>은 왕의 총애를 많이 받아 낭도에 싫증이 나서

공을 5세 풍월주로 하였다.

 

공의 포제(胞弟) <설원薛原>랑을 부제로 삼았는데 나이 13살이었다.

 

설성(금진) - 설원(549-606)

 

공의 신하인 <무관武官>랑 또한 공이 많았는데 미천하여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공이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공은 평소 <미진부未珍夫>공의 딸 <미실美室>을 사랑하였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사다함>과 <미실>은 나이가 같다.

 

<미실美室> 또한 공을 좋아 하였으나 태후의 명으로 <세종世宗>공에게 시집을 갔다.

 

태종(지소) - 세종(545?- )

 

이로써 끝내 장가들지 않고 죽었다.

 

<사다함>은 564년, 18살의 어린나이에 자결하였다.

 

낭도들이 <이화二花>공을 풍월주로 다시 세울 것을 청하니 <이화二花>공이 말하기를

 

" <세종世宗> 전군 같은 이는 없다." 라고 하니 <세종世宗>을 세워 풍월주로 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비량比梁>이 물려준 정기이고 <위화魏花>랑의 손자이라

적을 친 공이 높은데 스스로 불모지에 머물렀다.

푸른 새가 산중에 있어 송백(松栢)같이 푸르도다.

 

 



 

(6세) <세종世宗>은 <태종苔宗>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只召>태후이다.

 

진흥대왕과 더불어 어머니가 같다.

 

입종(지소) - 삼모진(534-576)

태종(지소) - 숙명(543?-603)

                  세종(545? - ) <풍월주 562-571>

 

<세종世宗>전군의 초명(初名)은 <의종義宗>이다.

 

단아한 아름다움과 멋진 풍채를 가졌다.

 

태후에게 효성스럽고 대왕에게 충성하였다.

 

대왕 또한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 나의 막내 아우다." 라고 하였다.

 

항상 곁에 있으며 대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조금도 금지하고 묶어두지 않아도 공의 타고난 바탕이 극히 좋아 잘못됨이 없엇다.

 

태후는 공경의 미녀들을 택하여 궁중에 모아두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美實>낭주를 가징 좋아 하였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태후가 크게 기뻐하며 <미실美實>로 하여금 그를 섬기도록 하였다.

 

섬긴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과 더불어 상통하였고 정의(情意)가 얽혀 깊어졌다.

 

그때 태후는 <숙명叔明>공주를 사랑하여

장차 진골정통을 잇고자 황후를 폐하려고 하였다.

 

<숙명>은 <태종>과 <지소>의 딸로 <세종>의 누나이다.

 

이같은 계책이 <사도思道>황후에게 누설되니

황후는 울면서 제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영실(옥진) - 사도(534- )

 

제는 본래 황후를 사랑했기 때문에

태후의 헐뜯음으 듣지 않고 황후를 더욱 사랑하였다.

 

이에 <미실美實>을 불러 꾸짖기를

" 너로 하여금 전군을 받들게 한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色事)로 전군의 마음을 어지렵혔으니

죄를 용서 할 수 없다."라 하고 출궁을 명하였다.

 

진흥대제의 황후 <사도>는 <묘도>의 동생으로 <미실>의 이모이다.

<미실>이 이모 <사도>에게 일러 바친 것이다.

 

<진종眞宗> 전군의 딸 <용명用明(545?- )>

<세종世宗> 전군의 정비(正妃)로 삼았다.

 

<미실美實>이 말하기를

 

" 일찍이 지아비를 맞는데는 마땅히 <사담함斯多含>과 같아야 한다.

무릇 부귀라는 것은 한때이다.

나는 한때 왕자와 전군을 모두 앞에서 배견하였으나 지금은 홀로 되었다."

 

이에 <사다함斯多含>공을 불러 위로하니 정분이 일어나 서로 기뻐하였다.

 

출정할 때에 이르러 풍랑가를 지어 보냈다.

 

이르기를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야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斯多含>은 이에 온갖 방법으로 위로하고 갔다.

 

전군이 듣고 몹씨 괴로워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상신할까 염려하여 <미실美實>을 다시 입궁시키자

전군은 기뻐 미친듯이 달려갔다.

 

태후는 부득이 다시 섬기도록 명하였다.

 

<미실美實>은 원비(元妃)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전군은 태후에게 명하여 <미실美實>을 전군 부인으로 삼고

<용명用明>은 차비(次妃)로 삼았다.

 

<용명用明>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 뜻을 비쳤다.

 

<미실美實>은 전군과 더불어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용명用明>을 내쫓았다.

 

<사다함斯多含>이 돌아 왔을 때

<미실美實>은 이미 궁중에 들어 가 전군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斯多含>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내용이 몹씨 구슬퍼 그때 사람들이 서로 암송하여 전하였다.

 

해(解)하여 이르기를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여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되리

전주(殿主)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죽음에 임하여 <이화二花>공이 감싸안고 슬퍼하며

 

"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계승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에 <사다함斯多含>이

 

" 신의 누이인 <미실美實>의 남편이 <모랑毛郞>공의 고사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이화二花>공이 태후에게 정하기를 청하니 태후가

 

" 나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다. 어찌 능히 될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미실美實>이 <세종世宗>에게 권하기를

 

" <사다함斯多含> 종형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 마디를 들어주지 않으면 장부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세종世宗>이 옳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하여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인하여 <설화薛花>랑을 부제로 삼았다.

 

천주사에서 <사다함斯多含>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 날 밤 과연 미실의 꿈에 <사다함斯多含>공이 품에 들어오며

 

"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너의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미실>이 <세종>공에게 아뢰니 <세종>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 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세종(미실) - 하종(564- )

 

<세종>은 금지옥엽의 귀한 왕족이었지만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을 이루었고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미실>이 실로 대궐에 거하며 이끌어 준 것이다.

 

그 때 <동륜>태자가 이미 장성하였다.

 

태후는 <동륜>태자를 <만호>공주와 짝지어 진골정통을 잇고자 하였다.

 

<사도>황후는 대원신통을 잇고자 하여 몰래 <미실>과 의논하여

 

" 나의 아들은 좋은 아이이니, 태자와 더불어 서로 친하여 아들을 갖게 되면

곧 너를 후로 삼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미실>이 크게 기뻐하고 태자와 상통하여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이를 알지 못하고

<미실>을 들어오게 하여 색공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미실>은 음사를 잘 하였기 때문에 총애가 날로 중하여져

황후궁 전주(殿主)에 발탁되었는데 그 지위가 황후와 같았다.

 

<미실>은 사람을 시켜 <세종>이 밖에서 공을 세우도록 설득하였다.

 

<세종>은 이에 출정할 것을 구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으로 하여금 머물러 있으며 세종의 일을 대신토록 하였다.

 

설성(금진) - 설원(549-606)

 

총애를 받고 방탕하여 <설원>랑과 그의 동생 <미생>과 정을 통했으나

대왕은 이를 알지 못 하였다.

 

<미실>은 <설원>랑과 의논하여

 

"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가졌는데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봄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세종>에게 알려 풍월주를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았으며 

<설원>랑과 <미생>을 봉사랑으로 삼고 <금진>을 화모로 삼았다.

 

이에 <세종>은 낭도를 모두 해산하고 돌아와서

 

" 새 원화는 나의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낭도들은 눈물을 흘리고 물러가지를 못 하였다.

 

가 명하여 <설원>과 <미생> 두 화랑이

낭도의 많은 무리를 통솔하여 조하토록 하였다.

 

대왕과 전주는 함께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나와 남도에서 조하를 받고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원화 제도는 폐한 지 29년 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원화는 진흥대제가 즉위한 540년에 지소태후가 폐지하였다. 

 

이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하였다.

 

대창 원년은 진흥대제 29년 568년이다.

 

이 날 밤 제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에서 합환을 하였다.

 

이때 미실 22세, 진흥대제 35세이다.

 

낭도와 유화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만중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의 물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제와 원화가 난간에 다달아 구경을 하였다.

 

낭도들이 각각 한 명의 유화를 이끌고서 손뼉치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는데

그 때마다 만세 소리가 진동하였다.

 

제의 기쁨이 매우 커서 월화와 함께 채전을 무리에게 던져 주며 말하기를

 

" 저들도 각기 자웅이고 나와 너도 또한 자웅이다." 라고 하였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파고들며 말하기를

 

" 비록 숙모{사도}의 존귀함이라도 이 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斯多含>의 영혼이 늘 <미실>의 가슴 안에 있으며

좋은 계책으로 도와 주는 때문이라고 하였다.

 

태자가 밖으로 나가 놀 때 유화 중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천거 하였다.

 

태자와 더불어 <미생>의 낭도가 날마다 황음한 짓을 일삼았다.

 

홍제(鴻濟) 원년(572) 3월 <동륜>태자가 큰 개에 물리는 일로 인하여 죽었다.

 

태자의 종인(從人)을 가려 보니 <미실>의 낭도에 속한 자가 많았다.

 

<미실>이 원화에서 물러나는 것을 승인하고 <세종>이 다시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이 이에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 내가 이미 원화를 물러났고 전주(殿主)가 그대와 함께 조용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니

그대는 어찌 다시 풍월주가 되려 하는지요?

빨리 <설원>랑에게 물려 주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세종>은 이에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여 주었다.

 

그 때 <금륜>태자 또한 <미실>을 좋아하여

<설원>, <미생> 등과 서로 사귀어 정을 맺고 방외우(方外友)가 되었다.

 

<미실>이 비록 이미 출궁하여 깨끗하게 살 것을 공언하였으나,

가만히 있지 않고 <금륜>태자와 더불어 후사(後事)를 약속하였다.

 

제(帝)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제하지 못하고 <미실>을 다시 불러 들여 의논하였다.

 

제(帝)가 죽고 <금륜>태자가 즉위 하였다.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금륜(552-582, 25대 진지대제 재위 576-578) 

 

인하여 <미실>을 받아 들였는데 세상의 여론으로 황후로 봉하지 못하였다.

 

진지왕은 또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을 심히 총애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낸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페하고 아들 <백정>공을 즉위시키니 이이가 진평대제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의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이때 미실 37세, 사도태후 46세, 진평대제 백정 13세이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비록 <미실>의 뜻에 따라 출장입상(出將入相)하였으나,

깨끗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들어 다시 서로 화합하였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스스로 그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한 소송도 그릇되게 판단하지 않았다.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찬하여 말한다.

 

태후의 사자(私子)이고 상국(相國)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청아하고 높은 표상은 화랑의 전형이다.

 

 

 

 

 

(7세) <설화薛花>랑은 처음 이름이 <설원薛原>랑이다.

 

<금진金珍>낭주의 사자(私子)이다.

 

그 아버지인 <설성薛成>은 낭도로서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仇利知>의 용양신(龍陽臣)이 되었다.

 

이에 낭주와 통하여 <설원>랑을 낳았다.

 

설성(금진) - 설원(549-606) <풍월주 572-578>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玉笛)을 잘 불었으나,

출신이 한미하여 낭도들이 받들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미실>이 임금의 총애로써 호령하여 낭도들을 예속시켰다.

 

낭도들은 감히 여러 말을 못하였다.

 

<미실>은 늘 진귀한 하사품을 보내 주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 너와 낭도를 잘 타일러 보겠다" 라고 하였다.

 

<설원>은 이에 몇 명을 얻어 심복으로 삼았다.

 

7세 풍월주가 됨에 이르러 <미생>을 부제로 삼고 아랫 사람에게 몸을 굽히고

재산을 풀어 주어 사람을 위로하니 낭도들이 모두 복종하였으나

아직 미흡함이 있었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에게 권하여

<모랑毛郞>공의 과처(寡妻)인 <준화俊華>낭주를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낭주는 그 때 나이가 38살이었고 과부로 산 지 18년이었다.

 

다시 화랑을 얻어 지아비로 삼아 마침내 아들 <설웅薛雄>을 낳았다.

 

 

이에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 위화랑공의 손자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불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위화(준실) - 준화(535- )

설원(준화) - 설웅(573?- )

<설웅>을 낳았을 때 <설원> 25세, <준화> 39세이다.

                                                                               

<설원>랑은 평소 <미실>과 더불어 사통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꺼리고 삼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설원>은 <미실>보다 2살 어리고 <세종>은 <미실>보다 2살 많다.

 

<준화>가 이를 알았으나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준화>의 딸 <준모俊毛>가 <미실>을 통하여

<통륜>태자와 사통하였다.

 

모랑(준화) - 준모(550?- )

 

이에 이르러 또 <금륜>태자에게 몸을 바치려고 하였다.

 

<설원>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 <동륜>태자를 섬긴 일을 성상(聖上)이 아는데

또 <금륜>태자에게 바친 것을 알면

반드시 우리 부처(夫妻)를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니

 

<준화>가 말하기를

 

" 낭군의 말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준모>에게 명하여 여승이 되게 하였으나 <준모>는 따르지 않았다.

 

<설원>랑이 꼬여 정을 통하였는데 1년 정도 지나 임신을 하였다.

 

<준화>가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갖는 것은 무슨 도리인가?"

라고 하였다.

 

<설원>랑은 이에 <미실>에게 구걸하였다.

 

<미실>은 <미생>에게 <준모>를 아내로 맞도록 하여 일이 평온하여 졌다.

 

<준모>는 곧 <미생>에게 가서 <미모美毛>라는 이름의

<설원>랑의 딸을 낳았는데 낭도들은 알지 못하였다. 

 

설원(준모) - 미모(575?- ) 

 

그 때 <문노>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직위를 얻지 못하여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

 

이 때에 낭도들이 마침내 나뉘었다.

 

<설원>랑의 파는 정통(正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의 파는 청의(淸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며 서로 상하를 다투니

<미실>이 걱정을 하여 <세종>에게 화합하도록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진흥대왕이 죽자 <미실>이 비록 새로운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지도知道>부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지도知道>의 아버지 <기오起烏>공은 <문노>와 종형제(從兄弟) 간이었다.

 

호조(선혜436-501) - 비조부(494- )(문화) - 문노(538-606)

홍기(선혜436-501) - 기오(499- )(홍도) - 지도(555?- ) 

기오와 문노는 종형제가 아니고 기오는 문노의 삼촌 뻘이다.

문노와 지도는 선혜의 손자와 손녀이다.

 

그러므로 본래 <지도>는 <문노>를 따랐다.

 

이에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으로 삼고 <비보>랑을 부제로 삼았다.

 

<문노>가 풍월주가 된 해는 579년 진평대제 원년이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다.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 하고 유람을 즐겼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문노>의 낭도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 하였고

<설원>랑의 낭도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다.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설원>의 낭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의 사람들은 <문노>의 낭도를 많이 따랐다.

 

서로 의(義)를 갈고 닦음을 주로 하였다. 

 

진지대왕은 <미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가 걱정을 하다가 이에 <미실>과 폐위 할 것을 의논하였다.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의 오빠이다.

 

영실(사도미) - 노리부(525- )

영실(옥진) - 사도(534- )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일으키려 할 때

<문노>의 낭도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 개의 낭도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 봉사화랑,

<미생>을 전방 봉사화랑으로 삼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이로써 <문노>의 낭도는 미천한 사람으로 고관에 발탁되는 사람이 많았다.

 

민간의 사람과 투항하고 귀순한 무리는 출세하는 문으로 삼았기에

<문노>를 신과 같이 받들었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문노>로써 선도의 스승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설원>랑의 낭도 중에 불평하는 자가 많았으나 <설원>이 말하기를

 

" 총주(寵主){미실}의 명을 거역힐 수 없다."라고 하므로 무릎을 굽혀 섬겼다.

 

이로써 <문노>의 낭도 또한 <설원>에게 기꺼이 복종하였다.

 

<미실>이 기뻐하며 그 직위를 <문노>에게 물려 주도록 하였다.

 

이에 <문노>가 말하기를

 

" 국선(國仙)은 풍월주(風月主)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한 그대는 나의 아우인데

어찌 스승으로 아우에게 받을 수 있는가?" 라고 하니

 

<문노>는 <설원>보다 11살 나이가 많다.

 

<설원>이 말하기를

 

" 국선이 비록 전 왕{진지}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의 정통은 아니다.

또 <세종>전군이 왕자의 귀함으로 오히려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으니

하물며 내가 사형{문노}을 받들어 섬긴 것은 <미실>의 명이 있었던 까닭인데

지금 <미실> 궁주가 다시 양위를 명하므로 감히 거역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 궁주가 이미 명령했는데 신 또한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뒤를 이었다.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前主)에게 하배(下拜)를 올리고 칭신을 한다.

 

양위하는 날 <미실>과 더불어 <세종>이 수레를 같이 타고 이르렀다.

 

<설원>랑이 옷을 갖추어 입고 인부(印簿)와 검장(劒仗)을 받들어

<미실>과 <세종>에게 바치고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으로 <세종>에게 절하고 물러났다.

 

이때 <세종>이 <미실>에게 묻기를

 

" <문노>는 <설원>에게 도맥(道脈)으로는 스승이고 통맥(統脈)은 아우인데

어느 자리에 앉아야 마땅한가?"

라고 하였다.

 

<미실>이 말하기를

 

" <설원>은 나의 총신(寵臣)이고 또 정통(正統)의 형입니다.

어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명하여 <미실>의 옆에 앉도록 하였다.

 

<문노>가 옷을 갖추어 입고 무릎으로 걸어 나아가서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에 <세종>에게 절하고, 다음에 <설원>에게 절하고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자질이 없다." 라고 하며 사양하였다.

 

<미실>이 이에 인부(印簿)를 주며 말하기를

 

" 네 형{설원}을 욕되게 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문노>가 인부(印簿)를 받았다.

 

<세종>이 이에 부서(簿書)를 주고 <설원>이 검장(劒仗)을 주었다.

 

옛날에는 반드시 공주 중 혼인하지 않은 자를 택하여 인부(印簿)를 전하였다.

 

이에 이르러 <미실>이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지법(三才之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그 이후 <문노>는 <설원>에게 하배를 하고 칭신을 하였다.

 

<미실>이 듣고 기뻐하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굽히게 한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니

 

<설원>이 절하여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 신의 머리카락 하나의 살갗 하나도 총주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건원(建元)14년(549)에 태어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죽었다.

 

그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말하기를

 

"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때 나이가 58세였다.

 

공은 5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었다.

 

정궁부인 <준화>낭주는 장자인 <설웅薛雄>, 차자인 <잉피仍皮>,

적녀인 <정금淨金>낭주를 낳고 죽었다.

 

설원(준화) - 설웅(573?- )

                  잉피(575?- )

                  정금(577?- )

 

미실궁주가 <개원開元>낭주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아들 <충죽忠竹>과 <선죽善竹>을 낳았고

딸 <개암開岩>과 <개천開川>, <선월善月>, <양월良月> 6명을 낳았다.

 

설원(개원) - 충죽

                  선죽

                  개

                  개천

                  선월

                  양월  

 

<미실>궁주가 낳은 <난야蘭若>는 진평대제를 모시어 <우야雨若>공주를 낳고 

<미실>궁주가 낳은 <보종宝宗>전군은 공의 소생으로 되었다.

 

설원(미실) - 난야(572?- )

                  보종(580- )

 

<우야雨若>공주는 곧 나의 조모이시다.

 

백정{진평대제}(난야) - 우야(예원) - 오기(운명) - 대문

 

<잉피仍皮>는 <원효元曉>의 할아버지이다.

 

잉피(?) - 담날(녹주) - 원효(617- )

 

설씨는 이 때에 크게 창성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미실>의 신하이고 선화(仙花)의 시작이다.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훌륭하도다! 깨끗한 이름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인 충성은 하늘의 복을 열었다.

 

미실(547-616?)의 자녀

 

미실(세종) - 하종(564- )

                  옥종(574?- )

미실(동륜) - 애송(566- )

미실(삼모진) - 반야(568?- )

                     수종(572?- )

미실(설원) - 난야(570?- )

                  보종(580- )

미실(금륜) - 후실(576?- )

                  비담(578?- )

미실(백정) - 보개(582?- )

                  보화(584?- )

미실(제문) - 보림(586?- )

                  애함(588?- ) 

 

<제문帝文>은 법흥대제 <모진>의 손자이다.

모진(백란) - 란공(유문) - 제문

 

 

 

 

 

 

(8세) <문노文弩>는 <비조부比助夫>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文華>공주이다.

 

혹은 <문화文華>공주는 야국 왕이 바친 여자라고 한다.

 

<호조好助>공기에는 북국왕녀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라고 말하였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비조부(문화) - 문노(538-606) <풍월주 579-582>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북으로 하였는데 <이뇌>를 북국 왕으로 삼고

<양화兩花>공주로 처를 삼았으며 <청명靑明>은 남국 왕으로 삼았다.

 

눌지(혜밀) - 청화(457-524)(찬명) - 청렵(476- ) <눌지의 외손녀>

                                                   찬실(479- ) <눌지의 외손자> 

눌지(혜밀) - 청화(457-524)(성명) - 청명(483- ) 남국왕 <눌지의 외손자>

청렵(성국) - 이뇌(494- ) 북국왕 <눌지의 증외손자>

 

얼마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인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 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컨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것이다.

 

찬실(野女) - 문화(500?- )

 

처음에 <호조>공의 첩이 되었는데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사통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 하였고 의기(義氣)를 좋아하엿다.

 

가야가 반기를 들자 <사다함>이 동행을 청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 중에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말하기를

 

" 나의 스승은 의인(義人)이다." 라고 하였다.

 

가야에 들어가서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주의를 주어 그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를 잇자 그 낭도가 그에게 속하였다.

 

앞서 <호조>공이 가야의 일을 잘하여 자주 사신으로 갔다.

 

<비조>공 역시 그 뒤를 이었는데 공을 세워

<청화靑華>공주의 딸 <청진靑珍>공주에게 장가 들었다.

 

호조(선혜) - 비조(494- )

모진(청화) - 청진(495- )

 

<청진>공주가 법흥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비조>공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권세가 일곱 총신과 더불어 막상막하였다.

 

<비조>공은 형세를 잘 엿보아 몰래 <영실>공을 따랐으며 신하로서 섬겼다.

 

수지(보현) - 영실(498?- )

 

건원 2년(537) 제가 장차 <영실>공을 부군으로 삼아 왕위를 넘겨 주려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비조>공을 병부령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총신 중에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아 일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비조>공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모진(보도) - 지소(515- )

 

<비조>공은 이에 <영실>공과 더불어 물러나 머무는 곳에서

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이화>공이 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 천자에게 아직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풍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입니다." 라고 하였다.

 

개국(開國) 4년(554) 공이 17세에 <무력武力>을 따라 백제를 쳤다.

 

구형(개화) - 무력(524- )

 

이때 백제는 위덕왕 원년이다.

 

공이 있었는데 보답을 받지 못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5년(555) 북한산에 나가 고구려를 쳤다.

 

이때 고구려는 양원대제 11년이다.

 

7년(557) 국원에 나가 북가야를 쳤다.

 

이때 북가야는 찬실의 아들 도설지(524- ) 33년이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부하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위로하여 말하기를

 

"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 주시오." 라고 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공이 이에 굽혀 섬겼다.

 

<세종>은 이에 진흥제에게 말씀을 드려 이르기를

 

"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데 여러번 공이 있었으나

어미로 인하여 영달하지 못하였으니 나라를 위하여 아까운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진흥제가 이에 급찬의 직위를 내렸는데 받지 않았다.

 

낭도 중에 <금천金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백운白雲>과 <제후際厚>를 위하여 사사로이 사람을 죽였다.

 

조정에서 벌주려고 하자 <세종>공이 이르기를

 

"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은 가하나 벌은 불가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작위를 주어 기렸다.

 

이로써 공의 낭도들이 많이 <세종>공에게 귀의하였다.

 

<사도>황후 역시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이끌어 자기 편을 삼았다.

 

<세종>공이 출정하자 북한산에 따라가 고구려병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미실>궁주가 불러서 봉사로 삼으려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진지가 즉위하자 <지도>황후가 일을 꾸미고 발탁하여

일길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세종이 <사도>의 밀조(密詔)를 받고 공과 의논하여 진지가 폐위됨에 이르러

공은 아찬으로 진급했고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직위를 얻게 되니

곧 8세 풍월주였다.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 처럼 하였으며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다.

 

통일 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때에  낭도의 부곡(部曲)을 두었다.

 

좌우봉사랑을 좌우대화랑으로 만들고 전방봉사랑을 전방대화랑으로 만들어서

각기 3부(部)의 낭도를 거느리게 하였다.

 

또 진골화랑, 귀방화랑, 별방화랑, 별문화랑을 두었고

12.3살의 빼어난 진골 및 대족(大族)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삼았다.

 

좌화랑 2인 우화랑 2인을 두었으며 각기 소화랑 3인 묘화랑 7인을 거느렸다.

 

좌삼부는 도의, 문사, 무사를 맡았고, 우삼부는 현묘, 악사, 예사를 맡았으며

전삼부는 유화, 제사, 공사(供事)를 맡았다.

 

이에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졌다.

 

3년간 재위하고 <비보>랑에게 전하였다.

 

공은 오랫 동안 아내를 맞지 않았다.

 

국선이 됨에 이르러 <윤궁允宮>낭주를 받들어 내원(內援)으로 삼았다.

 

윤궁은 황종공{거칠부}의 딸이다.

 

그 어미는 곧 미진부공의 친누이였으니 미실공주와는 종형제간이 되었다.

 

아시(삼엽) - 미진부(묘도) - 미실(547- 616?)

아시(삼엽) - 말보(황종) - 윤궁(548-606)

아시(삼엽) - 실보(비대) - 비보(549- ) 

 

함께 <동륜>태자를 섬겨 <윤실允實>공주를 낳았다.

 

동륜(윤궁) - 윤실(568?- )

 

과부로 5년을 살았다.

 

홍제(鴻濟) 5년(576) 10월 공이 <지도> 황후의 명으로 국선이 되고

<윤궁>을 받들어 선모(仙母)로 삼았다.

 

문노가 국선이 된 때는 41살인 진지대제 원년 576년이고

풍월주가 된 때는 44살인 진평대제 원년 579년이다.

 

이에 앞서 공이 <세종>공을 모시고 출정했다가 돌아왔다.

 

<세종>공은 공이 아내를 맞지 않는 것을 근심하였다.

 

<미실>이 말하기를

 

" 나의 동생인 <윤궁>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

라고 하였다.

 

<윤궁>이 듣고 말하기를

 

" 그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位品)을 논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 또한 듣고 기뻐하였다.

 

공의 부제 <비보>랑 또한 <윤궁>과 종형제였는데

공을 위하여 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하도록 힘써 <윤궁>에게 권하였다.

 

공이 장차 크게 기용되려 하자 <윤궁>의 뜻이 자못 기울었다.

 

공이 말하기를

 

" 우리 낭주가 아니면 선모는 없으니 내가 국선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라고 하니

 

<윤궁>이 말하기를

 

" 내가 군을 그리워한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 사람들이 나에게 국선이 영예롭다고 하나 나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

라고 하였다.

 

<윤궁>은 이에 공에게 몸을 허락해 3자와 3녀를 낳았다.

 

<대강大剛>, <충강充剛>, <금강金剛>이라 하였다.

 

윤궁은 밖으로는 비록 선모였으나 안으로는 실제 부인이 되어 공의 일을 힘써 도왔다.

 

공이 평소에 <미실>과 맞지 않았다.

 

이에 <윤궁>이 간하기를

 

" 군은 <세종>전군의 신하인데 <미실>공주를 반대함은 옳지 않습니다.

전군이 궁주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군이 나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군의 낭도가 만약 군을 옳다고 하고 나를 그르다고 하면 군은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선모는 궁주와 같이 잘못이 없으니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윤궁>은 이에 힘써 <미실>의 잘못을 감싸며 말하기를

 

" 사람이 모두 장단과 과실이 있는 것은 형세가 부득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이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어서 오직 강철같은 심장만을 법으로 삼고

처자의 즐거움이 없는 것은 세상과 통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군의 아들을 가졌는데 군이 한 마음으로 뜻을 굳게 지키고

권문에 거스른다면 이 뱃속의 아이는 장차 어떤 처지에있겠습니까?

아이의 좋은 아버지로서 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나는 의지와 기개로 선모를 받든는데 선모는 세상일로 나를 감싸는 것입니다.

자손은 사사로움입니다.

정이 사사로이 행해지게 되면 의리가 감추어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나의 선모가 신에게 허락한 뜻은 가히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낭도의 무리를 배신할지언정 선모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야 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윤궁>은 웃으며 말하기를

 

" 정(情)이 아니면 군과 내가 어찌 색사(色事)로써 서로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情)은 지(志)에서 나오니

세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정은 의가 되고 큰 사사로움은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무리에게 사사롭지 않으면 무리를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군은 어찌 일찍이 사사로움이 없겠습니까?

군과 더불어 동침한 밤에 나는 대철우(大鐵牛)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호랑이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그대의 영웅스러움으로서 어찌 좋은 씨앗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대중 또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남의 자식은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손상시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사사로움에서 나옵니다.

군과 더불어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情)의 순수함입니다.

무리들이 군에게 의지하는 것은 정(情)이 섞인 것입니다.

청컨대 내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어 나의 말을 들어 주시오" 라고 하였다.

 

공이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 선모는 진실로 성인입니다. 신은 어리석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공은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원>을 받아들여 주었다.

 

과연 <대강>을 낳았는데 후에 재상에 이르렀다.

 

<충강> 역시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금강>은 가장 귀하게 되어 백성과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금강은 태종 무열왕 2년(655) 정월에 이찬으로 상대등이 되었다.

금강을 이어 태종 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상대등은 군신회의인 대등회의의 의장으로 가장 높은 관직이다. 

 

<윤강允剛>, <현강玄剛>, <신강信剛>은 모두 귀한 집안에 시집가서

영화롭고 귀하게 되었다.

 

문노(윤궁) - 대강(578?- )

                  충강(580?- )

                  금강(582?-660)

                  윤강(584?- )

                  현강(586?- )

                  신강(588?- )

 

<윤궁>의 말이 과연 들어 맞았다.

 

공은 <대강>을 낳고 사사로운 정이 진실됨을 더욱 크게 느끼고

모든 일을 번번이 <윤궁>에 물어서 행하였다.

 

혹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 라고 하면

 

공은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 나도 지난날 전군이 궁주의 말을 따르는 것을 보고 흉을 보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렇게 되고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 또한 스스로 당하면 알 것이다."

라고 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이 진지왕을 페위하는데 참여한 공으로 선화(仙花)가 되기에 이르렀다.

 

모두 <윤궁>의 내조가 많았다.

 

관위가 이찬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으니 <윤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미실>이 과연 제(帝)에게 청하여 조서를 내려 <윤궁>을 공이 정처로 삼았다.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에 나아가 공과 <윤궁>의 혼인을 축하하였다.

 

<윤궁>이 말하기를

 

" 첩은 이제 같은 골의 남편을 얻었습니다.

어제 이전에 낭군은 첩의 신하였으므로 첩을 따르는 것이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서 마땅히 낭군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감히 다시 공과 다투지 않고 공의 명령을 힘써 따랐다.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며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에게 주었다.

 

공이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 낳게 하였다.

 

공은 풍월주로서 유화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집에 있으며 마음이 화락하고 조용한 모습이 마치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양위함에 이르러 공은 <윤궁>과 더불어 수레를 같이 타고

야외로 나가 노닐고 돌아왔다.

 

공은 본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윤궁>이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 첩이 듣건대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낭군은 술을 안 마시고 색을 절제하니 첩이 속으로는 부끄러워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를 할 것이며 술을 좋아하면 그대의 일이 많아 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윤궁>이 말하기를

 

" 장부는 마땅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어찌 한 여자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잠자리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저의 일을 대신하게 되니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지아비를 위하여 일이 많은 것은  처의 영광입니다.행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술을 조금씩 마시고 침첩 한 명을 두었으나 난잡한 적이 없었다.

 

젊어서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 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하렸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부부를 말 할때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 지아비를 택하는 데는 마땅히 문선화와 같아야 하고,

처를 얻는 데는 마땅히 윤낭주와 같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포석사에 화상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일하고 나서 공을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삼았다.

 

각간으로 추증하고 신궁의 선단(仙壇)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 23년(606)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가 69세였다.

 

낭주는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

 

찬하여 말한다.

 

가야의 외손이고 사기의 으뜸으로 선(仙)의 꽃이 되니 우리나라의 위엄을 떨쳤다.

 

  

 

 

 

(9세) <비보秘寶>는 기사년(549)생이고 임인년(582)에 화랑의 주가 되었다.

 

<비보>랑은 <비대比臺>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實寶>낭주인데 곧 <미진부未珍夫>공의 누이였다.

 

모진(옥진) - 비대(522- )(실보) - 비보(549- ) <풍월주 582-585>

아시(삼엽) - 미진부(525- )

                  실보(532?- )   

 

공은 <설원薛原>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함께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피리를 배웠으나 역시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문노>에게 나아가 검을 배우고,

마침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어 <문노>를 힘써 보좌하였다.

 

<문노>가 선화(仙花)가 되자 그 공으로 그의 부제(副弟)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9세 풍월주가 되는데 힘썼다.

 

낭도를 나누어 보내어 변방을 지키는 이들을 위로하였다.

 

<문노>공이 이에 양위를 명하였다.

 

공이 또한 3년간 재위하니 낭도들이 아까워 하였다.

 

때는 건복 2년(585) 춘정월이었다.

 

공은 <노리부弩里夫>공의 딸 <세진細珍>낭주를 아내로 맞아

아들 <세호細好>랑을 낳고 딸 <세미>와 <세신>을 낳았는데 병으로 죽었다.

 

비보(세진) - 세호(570?- )

                  세미(572?- )

                  세신(574?- )  

 

다시 진흥대왕의 딸 <덕명德明>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덕명>공주의 어머니는 곡 가야국 <월화月華>공주이다.

 

삼모진(월화) - 덕명(560?- )

 

세 아들과 다섯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붕부朋夫>, <보부宝夫>, <석부石夫>이고

딸은 <보주宝珠>, <진주眞珠>,<홍주紅珠>, <녹주綠珠>, <명주明珠>였고

서자는 <유오柳五>랑, <유매柳梅>, <가기賈奇>, <수동水同> 등인데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고 명성이 있었다.

 

비보(덕명) - 붕부(582?- )

                  보부

                  석부

                  보주

                  진

                  홍주

                  녹주

                  명주 

비보(유지) - 유오

                  유매

비보(가씨) - 가기

비보(호동) - 수동     

 

 

<유오>랑은 공의 첩 <유지柳枝>의 소생이다.

 

<유지>는 검술을 잘 하였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난도(亂徒)를 많이 모아 소요를 일으켰다.

 

조정에서 군사를 모아 잡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18세 나이에 그 굴을 찾아가 생포하였다.

 

아마 <유지>가 미모에다 뜻이 높아 공의 높은 풍모를 보고 스스로 항복하였을 것이다.

 

공은 그 사람들을 가련하게 여겨 모두 풀어 주었다. 

 

<유지>는 홀로 가지 않고 말하기를

 

" 다만 그대를 쫓아 죽기를 원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첩이 되었다.

 

<유오>랑은 어머니의 풍모를 갖추어 용모가 맑고 빼어났고

또한 18살의 나이에 지명법사(智明法師)를 따라 진(陳)에 들어가 불법을 구하고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후진 사문을 가르쳤으니 그 공 또한 크다.

 

처음에 공은 <동대冬臺>공의 아들 <대세大世>가 뛰어난 재주가 있으므로

전방대화랑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대세의 어머니는 곧 <실보>의 손아래 누이인 <골보>였으니

<대세>는 공의 종제가 되었다.

 

아시(삼엽) - 실보(비대) - 비보(549- )

아시(삼엽) - 골보(동대) - 대세(560?- )

 

사람들이 불평을 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양위함에 이르러 <미생>공에게 부탁하여 <대세>에게 전방대화랑을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미생>의 첩의 동생인 <제문諸文>랑이 그 자리를 원하여

<대세>가 유화를 탐했으며 술을 마시고 행동이 거칠었다는 것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대세>는 이에 노하여 곧 들에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세>와 <덕명>은 같은 나이로 몹시 그리워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공은 알면서 꾸짖지 않았다.

 

<대세>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마침내 <덕명>과 관계를 끊었다.

 

스스로 <모랑毛郞>과 <완적阮籍>에 비교하였고 술을 마시면 울었다.

 

※ 완적阮籍 :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죽림 칠현의 한 사람

                   사마의 종사중랑으로 술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유화들 중에 그를 사모하는 자가 많았다.

 

<대세>는 자기를 사모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았다.

 

공은 그 아픔을 알고 가엾게 여겨 좌방화랑으로 삼았다.

 

얼마 안되어 다시 우방화랑으로 삼아 장차 세상에 크게 쓰일 것임을 보여 주고

술에 빠짐을 절제토록 권하였다.

 

잠시 괜찮게 되는 것 같았다.

 

전방대화랑에 처음 발탁하고 나서 <대세>에 권한을 주지 않았다.

 

<대세>는 본디 <미생>공에게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에 술을 마시고는 <미생>이 탐욕스럽고 어리석어 가뭄을 불러 왔다고 욕하였다.

 

<미생>공은 이에 심복 낭도를 시켜 그 황란(荒亂)한 것을 공격하였다.

 

공은 곧 사문(沙門) <담수>로 하여 <대세>를 보살피게 하고

때때로 술을 보내어 위로 하였다.

 

<대세>는 이에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친우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 또한 공의 화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공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 하였다. 

 

공이 힘써 달래었지만 마침내 당파가 나뉘었다. 

 

공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며 상선(上仙)의 지위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문노>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 선도의 우두머리는 오직  두 사람인데 그대가 만약 물러나면

무사의 씩씩한 기운을 장려할 수 없다." 라고 하며 <제문>랑을 해직 하였다.

 

얼마 안되어 <미생>공 또한 어려운 것을 알고 풍월주에서 물러 났다.

 

<하종夏宗>공이 풍월주가 되자 선정(仙政)을 모두 <미실>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미실> 또한 파의(派議)를 염려하여 여러 상선(上仙)과 상화(上花)를 회합하여

열선각(列仙閣)을 짓고 대의(大議)를 통과시켜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파의(派議)가 비록 많았으나 또한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

 

공 또한 <미실>의 신하로 배반할 수 없었으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투었다.

 

<미실>이 <비보>랑공을 위로하기 위하여 공이 추천한 자를 많이 뽑았다.

 

<보리菩利>공, <서현舒玄>공, <용춘龍春>공 등은 모두 공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이화(숙명) - 보리(573- )

무력(아양) - 서현(576?- )

금륜(지도) - 용춘(578-647) 

 

공의 아들 <세호(細好>랑은 오랫동안 화랑으로 있었는데 뽑히지 않았다.

 

비보(세진) - 세호(570?- )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선로(仙路)는 나의 가물(家物)이 아니다.

단지 공을 세워 백세에 이르는 것이 옳고 아비로서 명위를 더럽히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였다.

 

공은 끝내 <세오>랑을 중요한 자리에 오르지 않게 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어렵게 여겼다.

 

건복 20년(603) 8월 고구려가 침범하여 왔다.

 

제가 친히 정벌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공과 <세호>랑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여 한수에서 맞아 크게 이겼다.

 

 

영양왕 14년(603),

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왔다.

그 때 북한산성의 신라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신라군의 함성과 호응하였다.

고승이 상대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가 공에게 보답코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신은 어리석고 겁이 많아 한 일이 없습니다.

곧 제의 힘으로 이룬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는 이에 <세호>랑을 발탁하여 아찬의 직위를 주고 대당(大幢)을 장악토록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오늘에야 비로소 나의 아들이다. 

또한 너의 어머니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라고 하였다.

 

대개 <세진(細珍>은 늘 공에게 검을 배워 <세호>랑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 처는 지아비의 일을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업을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노리부(세화) - 세진(550?- )

 

공은 죽을 때까지 검도를 버리지 않았다. 

 

문하에서 나온 무리 중에 출세한 사람이 많아 사방으로 나아가 다스렸는데

공은 늘 정사(政事)에 삼가할 것을 경계하였다.

 

공이 죽자 모인 자가 만여 명이 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다!

 

공의 별전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 많은데 거짓된 것이 많아 다 기록하지 않는다.

 

찬하여 말한다.

 

법흥의 손자이고 진흥의 사위다.

 

모대(옥진) - 비대(실보) - 비보(덕명)

덕명은 진흥대제 삼모진의 딸이다.

 

직위가 상선에 이르렀고 검도로 크게 떨쳤다.

 

무사의 기풍이 일어났고 백세의 스승이다.

 

 

 

 

 

(10세) <미생美生>은 경오년(550)생이고 을사(585)에 화랑의 주가 되었다.

 

<미생>랑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미생(550-609) <풍월주 585-588>

 

공의 손위 누이는 <미실>궁주라고 하는데 진흥대왕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공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여러번 불러 입궁하여 <동륜>태자, <금륜>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웠다.

 

구리지(금진) - 토함(545?- )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다.

 

<만덕萬德>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공주들이 많이 사사로이 관게를 가졌는데 제가 문초하려 한즉 후{미실}가 말하기를

 

" 이는 우리 집의 풍류나비입니다. 어찌 모름지기 문초를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는 또한 <미실>에세 빠져 있던 까닭에 마침내 문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을 못하였다.

 

<미실>이 공에게 명하여 <사다함>의 낭도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는데 말에 오를 수가 없었다.

 

<미진부>공이 쫓아 내려 하자 <미실>이 말하기를

 

" 어찌 나의 아우를 한번에 내칩니까?" 라고 하였다.

 

<사다함> 또한 부득이 받아들였다.

 

<문노>가 꾸짖어 말하기를

 

"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 아침에 일이 생긴다면 어디에 쓸 것인가?" 라고 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 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문노>가 다시 따지지 않았다.

 

공은 검도를 좋아 하지 않았다.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으므로 <사다함>이 곤란해 하였다.

 

<세종>공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그 직위를 전하여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문노>가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미실>이 <설원>랑을 총애하게 되자

공에게 그를 섬기도록 하였다.

 

그 까닭에 공은 부제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곧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공의 나이 이미 36살이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사다함>공이 열 여섯살에 풍월주가 되자 천하가 명예롭게 여겼는데

내가 열 세살에 전방화랑이 되자 천하가 더욱 명예롭게 여겨

나이 열 여섯살 이전에 반드시 풍월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서른 여섯살에 된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 내가 총애를 받을 때 네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에 대한 총애가 식으면

누가 <하종>을 위한 계책을 마련할까? 라고 하였다.

 

이에 <하종>을 부제로 삼았다.

 

그 때에 낭도간에는 아직도 쟁론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귀천에 거리끼지 않고 내외에서 인재를 뽑아 등용하여

력을 강하게 하려는 자들로 통합원류라 불렀다.

 

<임종林宗>, <대세大世>, <수일修日> 등이 중심이었는데

 대개 문노파 중 가장 정예들이었다.

 

대원신통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은 곧 <미실> 일파인데

<하종夏宗>, <구륜仇輪>공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두번째이다.

 

진골 정통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이니

곧 <문노> 일파로 <지소>태후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다.

 

가장 권력이 있으며 옛 규정을 지키는 자들이다.

 

<보리菩利>랑, <숙리부叔里夫> 등이 중심이었다.

 

노리부(숙진) - 숙리부

 

이것이 그 세번째이다.

 

그렇지만 <문노> 또한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하종>과 감히 다투지 않았다.

 

통합파는 <하종>이 재주가 없다고 하고 또한 <미생>공에게 불복하였으나

공은 이를 진압하지 못하였다.

 

또 한 파가 있어 <정숙貞肅>태자를 풍월주로 세우고

<원광圓光>을 부제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이는 <문노> 정파와 통합파 중에서 혼성된 자들로서 <이화二花>류라 하였다.

 

또 한 파는 <천주天柱>공을 풍월주로 세우고 <서현舒玄>랑을 부제로 삼으려 하였는데

곧 통합파 중 가야파이다.

 

삼모진(월화) - 천주 

 

공은 3년 동안 풍월주 직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였다.

 

이에 <하종>공에게 양위하고 물러나 천성을 길렀다.

 

공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랫사람의 마음을 몰랐다.

 

또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선문에 있어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공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모두 기억할 수 없었다.

 

<미생>기에 " 공의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다." 라고 하였다.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차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

 

공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공을 천간성(天奸星){하늘의 간사한 별}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시첩의 수가 수십명인데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

 

진(陳)나라 사신이 상국에도 또한 이와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상국의 사절이 되어 그 제도를 두루 수집하여 왔다.

 

공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의 종이 공의 옥배를 훔쳤다.

 

공이 막 처벌하려고 하자 종이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공의 어머니가 보고 공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노비는 수족과 같고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사대부에게 겸손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삼지 않고 말하기를

 

"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 라고 하였다.

 

도둑질은 이내 그쳤다.

 

공은 일찍이 <동륜>태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려 다녔다.

 

그 때 나마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다움이 있다고 공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태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를 맺었다.

 

태자가 죽고 나서 공은 첩으로 삼고자 하여 저택에 불러 들였다.

 

<당두>는 이에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 아이가 있는데 아참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미실>이 곧 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 보냈다.

 

여자는 공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다.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번 <당두>를 조주(祖主)에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들을 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여 공이 조부(調府)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 잡았다.

 

제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렸다.

 

공이 말하기를

 

"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는 이에 <당두>에게 대나마를 특별히 주고 조부의 우경(右卿)으로 삼았다.

 

그의 처는 공의 세 아들을 낳았다.

 

공은 모두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

 

그 때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오랫동안 조부에 있으면서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은 <당두>의 힘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너의 처와 더불어 천하와 국가를 위하여 인물을 번성케 하겠다." 라고 하였다.

 

대개 <당두>의 처가 아들을 잘 낳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당두>는 이내 틈을 타서 물러나

그 처로 하여금 공에게 사랑을 받고 아양을 떨게 하였다.

 

그의 처남 <만세萬世> 또한 공으로 인하여 발탁되었다.

 

공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당두>는 나의 <자방子房>이고 <만세>는 나의 <진평陳平>이다." 라고 하였다.

 

<자방>과 <진평>은 西漢 초기의 대신이다.

 

<만세>의 처제 또한 공의 첩이 되어 총애를 받았고 노래를 잘 하였다.

 

공의 아들인 <백생白生>공과 사통하였다.

 

공이 <백생>공에게 주려고 하자 <만세>가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간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그녀와 내 아이는 나이가 서로 같아서 다시 해로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라고 하며 마침내 주었다.

 

공은 아들이 많았는데 아들을 사랑하는 정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다.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격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대당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공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곧

 

"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라고 물었다.

 

공은 번번히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 주었다.

 

그러므로 여러 아들이 공을 사모하여 따랐다.

 

공은 매번 출근할 때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조부에 이르러

종일 그 아이들과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다.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건복 26년(609)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60이었다.

 

공의 아들 <백생白生>, <월생月生>, <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다.

 

미생(백화) - 백생

미생(월륜) - 월생

미생(반야) - 발생

 

<묘도>는 <사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부처와 같아서

공과 공의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목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영실(옥진) - 묘도(525- )

                  사도(534- )

<사도>는 진흥대제 <삼모진>의 후로 동륜태자와 금륜태자의 어머니이다.

 

한 번은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 우리 집은 대대로 색을 바치는 신하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이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는냐?"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和文>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 라고 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음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묘도>의 아버지 <영실>공은 법흥왕의 누이 <보현>공주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는 <수지>공이니 곧 <등흔>공의 손자가 된다.

 

찬하여 말한다.

 

<옥진>의 손자이고 대원신통이다.

 

아시(삼엽) - 미진부(묘도) - 미생

영실(옥진) - 묘도(미진부) - 미

 

아들이 백 명이고 낭도는 만 명이다.

 

풍족하고 부귀로운 아름다운 일생이다.

 

 

 

 

(11세) <하종夏宗>공은 갑신년(564)생이고 무신년(588)에 화랑이 되었다.

 

<하종>은 <세종>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다.

 

세종(미실) - 하종(564- ) <풍월주 588-591>

 

당초에 법흥제와 <영실>공이 내정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옥진>궁주가 졸리운 눈으로 헝크러진 머리를 하고 이르러 제의 손을 이끌며 말하기를

 

" 좋은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무슨 꿈인가?" 하고 물으니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웃으며

 

" 칠색은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다. 빈첩의 조짐이다.

네 지아비와 더불어 함께 하라." 라고 하였다.

 

<옥진>이 좋아하지 않으니 제가 말하기를

 

" 네 지아비와 나는 일체이다.

아들을 낳으면 곧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곧 빈으로 삼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옥진>이 이에 기뻐하며 마침내 <영실>과 장막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이루었다.

 

과연 딸을 낳으니 <옥진>은 제를 신통스럽다고 여겨 <묘도妙道>라 이름 하였다.

 

영실(옥진) - 묘도(525- )

                  노동(531- )

                  사도(534- ) 

 

<묘도>가 자라자 제가 약속한 대로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런데 작고 좁아 맞을 수 없었고 또 제가 양기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묘도>는 저녁이 되면 괴로워 하였다.

 

이에 제가 자주 사랑하지 않았다.

 

그 때 <미진부>공이 어머니 <삼엽>공주와 늘 궁중에 입시하여

<묘도>와 전(殿)을 사이에 두고 머물렀다.

 

<미진부>는 <묘도>와 동갑이다.

 

<묘도>는 <미진부>공을 사모하여 미진부공이 화랑을 지나는 것을 틈타

몰래 들여서 서로 상통하였다.

 

하루는 <옥진>궁주가 꿈에 칠색조가 자기의 가슴속에서 날아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 <묘도>의 침실에 가서 엿보았다.

 

그 때 <묘도>와 <미진부>공이 바야흐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중이었다.

 

<옥진>궁주는 이에 기뻐서 알려주며

 

" 너희 부부는 이제 귀녀(貴女)를 낳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과연 <미실美室>을 낳았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玉珍>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碧花>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영검함을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었다.

 

위화(오도) - 옥진(505- )

손동(벽아) - 벽화(485- )

묘심(선혜) - 오도(487-539)

 

옥진이 " 이 아이는 <오도吾道>를 부흥시킬만 하다."라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사도}의 잉첩이 되게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라고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 빈첩(嬪妾)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며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 이 아이는 족히 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라고 하였다.

 

<미실>은 궁중에 이르러 태후의 아들 전군을 교태로 섬겼다.

 

전군은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궁궐을 나가 집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개의치 않고 <사다함>과 사통을 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을 하였다.

 

태후는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용명用明>을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전군이 <미실>을 사모하여 병이 낫다.

 

태후는 부득이 <미실>을 불러들였다.

 

마침내 <하종>을 낳았는데 전군이 <미실>을 애지중지하여

다시는 <용명>을 사랑하지 않으므로 <용명>은 노하여 궁궐 밖으로 나갔다.

 

공이 출생한 지 얼마 안되어 <미실>은 <사도>의 명으로

태자{동륜}에게 색공을 하여 임신을 하였다.

 

제(帝){진흥대제 삼모진}를 사모하여 애태우는 <미실>의 모습이 더욱 더 애처로웠다.

 

제가 후(后){사도思道}에게 말하기를

 

" 너의 조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 라고 하였다.

 

후는 이에 <미실>을 3대{父子孫}를 모시는 자리로서 제에게 추천하였다.

 

제가 한 번 사랑하고 두 번 사랑하고는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다시 <용명>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실>에게 전주(殿主)의 이름을 내렸는데

<미실>을 총애함이 천하를 뒤집을 만 하였다.

 

제가 출입할 때 반드시 동행시켰다.

 

전주는 문장을 잘 지었다.

 

제가 조정에 나아가 업무를 볼 때 전주가 옆에서 모셨다.

 

문서를 보고 참결(參決)하여 그것이 옳은 지를 살펴 보았다.

 

조야(朝野)의 권세가 <옥진>궁으로 돌아갔다.

 

대원신통이 다시 성하게 일어났다.

 

태자의 딸이 태어나자 제는 알지 못하고 자기의 딸로 알고

<애송艾松>공주로 명하였다.

 

동륜(미실) - 애송(566- )

 

공은 <애송>의 오빠로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는데 사지(舍知)의 직위를 내렸다.

 

궁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애송>의 벗이 되었다.

 

공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우애가 지극히 도타워 공주가 울면 따라서 울었다.

 

제가 이로 인하여 총애하였다.

 

<반야般若>가 출생하자 공은 관위가 올라 대사(大舍)가 되었다.

 

삼모진(미실) - 반야(568?- )

 

<난야蘭若>가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나마가 되었다.

 

설원(미실) - 난야(570?- )

 

<수종壽宗>전군이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대나마가 되었다.

 

삼모진(미실) - 수종(572?- )

 

이에 앞서 제는 공주 등에게 공을 오빠로 부르게 하였으나 공은 위가 낮아

감히 오빠로 자청하지 않았다.

 

이 때에 <수종>전군이 처음 태어나자 제가 크게 좋아하여

공을 전군으로 봉하여 전주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였다.

 

전주는 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겉으로 겸양을 베풀었다.

 

그 때 <삼호三好>공이 내질(內秩)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따져 말하기를

 

" 사자(私子)가 전군이 되는 것도 참람한데 하물며 사자(私子)의 아들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그만두었다.

 

<미실>은 이에 <삼호>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 아재비는 나 때문에 내질을 관장하는데

나의 아이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라고 하니

 

<삼호>가 웃으며 말하기를

 

"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닙니다.

급히 차면 기울어지고 서서히 이루어지면 완전합니다.

비록 전군이 아니더라도 또한 부마가 될 수 있습니다. 

하필 제도를 넘어서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른 후에 가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미실>의 노여움이 여전히 풀어지지 않자 <삼호>는 내질을 사직하였다.

 

<미실>은 이에 <영실>공의 아들 <노동弩同>을 천거하여 내질을 관장케 하였다.

 

영실(옥진) - 노동(531- )

 

제가 공을 봉하려는 <미실>의 바램을 알고 공을 제의 가자(假子)로 삼아

전군의 품위를 주어 <미실>의 마음을 위로하니 <미실>은 마침내 기뻐하였다.

 

전군으로 봉하는 예를 <수종>전군의 탄생 77일에 행하였다.

 

제와 더불어 <미실>전주, <수종>전군 및 공이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에 이르러 예를 행하였다.

 

<미실>의 기쁨이 지극하여 제의 품 안에 엎드려지며 말하기를

 

" 하루에 두 전군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두 전군은 <수종>전군과 <하종>전군을 말한다.

 

제가 <미실>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 짐과 더불어 한 몸인데 어찌 두 전군뿐이겠는가?

왕자도 가히 너의 아들이 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날 밤 제는 잔치를 열어 친히 축하하고 태자 이하 왕자, 전군에게 명하여

<미실>에게 절하고 어머니라 부르도록 하였다.

 

태자는 미실과 더불어 사통한 바 있는 까닭에 억지로 절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멈추게 하며 말하기를

 

" 태자는 다른 전군과 같지 않은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이에 명하여 태자에게는 일배를 허락하였다.

 

다른 사람은 사배하고 일어났다.

 

제가 몹시 기뻐 취했고 <미실>도 역시 취하여 서로 이끌며 장막으로 들어가고

태자 이하가 만세를 외치고 물러갔다.

 

당시 <보명宝明>궁주가 태자의 연모를 받았으나 몸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구진(지소) - 보명(550?- )

 

태자는 이에 장사 수인과 더불어 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궁주가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음을 알고

감히 태자를 힘써 거부하지 않아 일이 성사되었다.

 

그 후 태자가 매일 밤마다 넘어 들어왔다.

 

이레째 밤에 태자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들어가다가 큰 개에게 물렸다.

 

궁주가 안고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동틀 무렵 죽었다.

 

삼모진{진흥대제}(사도) - 동륜(550?-572)

 

제가 태자의 종인(從人)들을 조사했는데 <미실>과 <미생>의 낭도들이 많았다.

 

<미실>의 추잡한 짓이 종인들의 입에서 많이 나왔다.

 

제가 비로소 의심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미실>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목놓아 울며 궁을 나갔다. 

 

공 또한 전군의 지위를 사퇴하였다.

 

<사도>황후가 간하여 말하기를

 

" 삼주(三柱)의 맹세가 있습니다.

어찌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로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려 합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이에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렸다.

 

곧 다시 <미실>을 생각하고 제가 친히 거동하였다.

 

<미실>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왕을 붙들고 사죄하니 제가 또한 받아들였다.

 

그 때 <세종>공이 지방으로부터 소환되었다.

 

제가 다시 <미실>을 전주로 삼고자 하였으나

<세종>공에게 믿음을 잃을까 염려하여 그만두었다.

 

<미실> 또한 <세종>공의 지성에 감격하고

공의 부자와 단란한 즐거움을 갖고자 해궁으로 피하여 가 살았다.

 

공은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세종>공은 이에 <미실>과 더불어 공의 장수(長壽)를 해신에게 빌었다.

 

그 때 <수종> 전군이 어렸기에 따라가서 해궁에 있었다.

 

제가 <수종>을 본다는 핑계로 여러 번 불렀으나

<미실>은 글을 올려 자기의 죄를 늘어놓고 거절하였다.

 

제가 이에 친히 해궁에 거동하여 서로 보고 <미실>은 눈물을 흘렸다.

 

<미실>이 감동하고 다시 마음이 움직여 제와 더불어 궁으로 돌아갔다.

 

그 때 <미실>은 세종공의 아들을 임신한 지 이미 수 개월이 되었으므로

해산을 하고 입궁하겠다고 청하였다.

 

제가 허락하지 않자 입궁하여 <옥종玉宗>을 낳고 제의 마복자로 삼았다.

 

세종(미실) - 옥종(574?- )

 

이로써 <미실>에 대한 총애가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

 

<미실>은 심복들을 다시 끌어모아 중요한 지위를 주었는데 제가 모두 허락하였다.

 

또 <세종>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살도록 하였다.

 

<미실>은 이에 <사도>황후와 함께 내정을 마음대로 하였고

<세종>, <설원>, <미생>은 외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제는 풍질(風疾)로 내외의 정사를 보지 못하고

오직 <사도>, <미실>, <보명>, <옥리玉理>, <월화月華>

다섯 궁주와 더불어 즐거움에 탐닉하였다.

 

정사(政事)는 모두 <사도>와 <미실>로부터 나왔다.

 

처음에 <사도>후와 더불어 <미실>은 삼생(三生){전생, 현생, 후생}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이르러 제가 자못 몸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미실>은 <세종>에게 <사도>의 사랑을 받도록 권하였다.

 

<세종>은 힘써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후와 사통하였다.

 

제가 붕하자 <사도>, <미실>, <세종>, <미생>은 비밀로 하였다.

 

입종(지소) - 삼모진{진흥대제}(534-576)

 

태자가 알지 못하였다.

 

<사도>가 먼저 <미실>로 하여금 태자와 사통하게 하고

다른 마음을 갖지 않기로 약속하고 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몸소 제위(帝位)에 있으며 신왕(新王)을 통제하고

<말보末寶>의 남편인 <황종荒宗>공을 상대등으로 삼아 중망(衆望)을 눌렀다.

 

물력(묘홍) - 황종{거칠부}(512- )

 

그 때 <황종>공의 딸 <윤궁允宮>이 <미실>의 심복이 되었고

<윤궁>의 아우 <윤옥允玉>은 <미생>의 첩이었고

<윤궁>의 남동생 <윤황允荒>은 <사도>의 딸 <월륜月輪>공주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황종>공을 추대한 것이다.

 

황종(말보) - 윤궁(548-606) <문노의 처>

                  윤황<사도의 사위>

                  윤옥<미생의 첩>

 

<거칠부>공은 나이가 많아

대등 <노리부弩里夫>, <노동弩同>공 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이 때 황종 거칠부는 65세이다.

 

그러므로 <미실>은 권세를 잃지 않았다.

 

공에게 급찬의 지위를 주었다.

 

공은 15살에 화랑에 들어가 역사를 <토함>공에게, 노래를 <이화>공에게,

검술을 <문노>에게, 춤을 <미생>공에게 배워 모두 그 정수(精髓)를 얻었다.

 

늘 선제의 총애를 생각하여 매번 생일과 기일이 되면 낭도들을 거느리고

릉침에 나아가 눈물을 흘렸는데 비록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그만 두지 않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잘 추천하였는데 정이 치우치지 않고 중망(衆望)이 있었다.

 

공의 어머니가 <미실>궁주였기 때문에 공 또한 대원신통이였다.

 

<문노>파가 불복하였기에 <미실>은 화합토록 하고자

<이화>공의 아들 <보리>공을 부제로 삼았다.

 

<보리>공의 어머니는 <숙명>공주였기 때문에 <보리>공은 진골정통이었다.

 

태종(지소) - 숙명(543?-603)

 

진골정통은 <지소>를 종(宗)으로 삼았고 대원신통은 <사도>를 종(宗)으로 삼았다.

 

진골정통의 조(祖)는 <옥모>로부터 출생하였고

대원신통의 조(祖)는 <보미>로부터 출생하였다.

 

옥모(골정) - 홍모(내해) - 아이혜(조분) - 광명(미추) - 내류(실성) - 아로(눌지) -

조생(내숙) - 선혜(비처) - 보도(모진) - 지소(515- )<진골정통의 宗>

 

보미(미해) -  항아

                   선혜(묘심) - 오도(위화) - 옥진(영실) - 사도(534- )<대원신통의 宗>

 

그렇지만 양 골이 서로 뒤섞이어 풍월주가 되는 사람은

각기 단지 그 당시의 정황에 따라서 나왔다.

 

바라는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비록 화합을 하나

안으로는 서로 반목하여 붕당이 더욱 심하여졌다.

 

공은 비록 젊었으나 이것을 깊이 경계하였다.

 

골고루 사랑하는데 힘을 다한 결과 일시적으로 상황이 나아졌으나

주형(主兄)과 부제(副弟)가 다른파인 까닭에

자연히 불화가 점차 드러나서 <보리>공을 끌어서 몰아 내려 하였다.

 

<보리>는 평소에 공에게 좋게 보였기에 마음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보리>가 울며 공의 인정에 호소하였다.

 

공은 이에 <이화>공을 찾아가 옳게 결정할 가르침을 청하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 선도는 본래 우주의 청원(淸元)의 기(氣)에서 나왔다.

시비로써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형 <모랑>공이 오직 그 전부를 얻었는데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나도 못나서 그 도를 다 듣지 못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권세와 지위로써 직위를 계승하였기에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끄러워 한다.

직위를 버리고 도를 구하여 참된 생이 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모진(보과) - 모랑(526-555)

 

공은 이에 풍월주의 직위를 그만두고 도에 전념코자 하였다.

 

낭도들은 <이화>공이 스스로 풍월주가 될 계략으로써 공을 혼란시켰다고 생각하였다.

 

<미실>궁주가 걱정하였다.

 

이에 <사도>태후의 조칙으로 낭도 대회를 열고 <이화>공과 <세종>공으로 하여금

연회를 베풀어 화합시키도록 하였고 불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여 진정시켰다.

 

이로써 가야파가 점차 다시 세력을 갖게 되어 <서현>랑을 전방화랑으로 삼았는데

이이 또한 대원신통이었다.

 

이것은 <이화>, <미실>, 가야 삼파가 단결한 것이다.

 

그 때 궁중에는 3태후가 있어 행정을 하였고

대왕은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어른들의 명을 받들어 따랐다.

 

3태후는 진흥대제 <삼모진>의 비인 태상태후 <사도(534- )>,

진지대제 <금륜>의 비로 용춘의 어머니인 태후 <지도(555?-)>,

<동륜>의 비로 진평대제 <백정>의 어머니인 태후<만호(556- )>를 말한다. 

 

그러므로 낭도 중 승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태후궁에 많이 붙었다.

 

태상태후인 <사도>법주(法主)는 <미실>궁주로서 법운(法雲)을 삼았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이 <미실>궁에서 많이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 <아양阿陽>공주가 곧 <서현>의 어머니였기에

가야파의 태양이 되어 <미실>의 세력을 나누었다.

 

삼모진(사도) - 아양(556?- )(무력) - 서현(576?- )

 

<만호>태후는 대왕{진평대제}의 어머니로 더욱 상의 총애가 있어서

진골정통의 수주(首主)가 되었다.

 

진종(지소) - 만호(556- )(동륜) - 백정(567-631)

 

<지도知道>태후가 태상과 <만호> 사이를 출입하며 <문노>정파를 도왔다.

 

그러므로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천거하여

<보리>공을 대신코자 하였는데 <만호>태후가 들어 주지 않았다.

 

금륜(지도) - 용춘(578-647)

 

<용춘>공이 비록 풍월주 직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낭도들이 많이 귀부하니 <서현>랑이 말하기를

 

" <용춘>공은 선군{진지대제}의 아들인데 내가 어찌 감히 상대가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낭도들을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 주었다.

 

이에 가야파가 또한 <용춘>공에게 돌아갔다.

 

역시 대원신통이었기에 미실파가 다투지 않았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 좋은 사람을 얻었다." 라고 하였다.

 

<보리>공 또한 <용춘>공을 사랑하여 다른 무리를 규합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진골과 대원의 논쟁이 이에 비로소 완화되었다.

 

<하종>공이 비록 모주(母主)에게 효성스러웠으나 형세를 살펴서 따랐으니

안으로는 그 논쟁에 찬성했으나 밖으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 때 <은륜>공주가 왕의 총애를 잃었다.

 

<은륜>은 태상태후의 막내딸이었다.

 

삼모진(사도) - 은륜(566?- )

 

태상이 대원신통을 걱정하여 공에게 명하여 받들도록 하여 <효종孝宗>공을 낳았다.

 

하종(은륜) - 효종(584?- )

                  하희(586?- )

                  월희(588?- )

 

이에 앞서 공은 <설원>공의 딸 <미모>낭주를 아내로 맞아 아들 <모종毛宗>을 낳았다.

 

하종(미모) - 모종(582?- )

                  유모(584?- )

                  영모(586?- )

 

<효종>의 누이는 <하희夏姬>와 <월희月姬>라 하였다.

 

<모종毛宗>의 누이는 <유모柔毛>와 <영모令毛>라 하였다.

 

공은 검소하고 색을 삼갔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여

<세종>의 풍모를 크게 지녔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공에게 복종하지 않던 사람도 있었으나 끝내는 귀부하였다.

 

3년간 재위하다가 <보리>공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 선대 풍월주들이 큰 성인이었는데도 오히려 3년간 재위하였는데

내가 어찌 감히 오래 머물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보리>공이 말하기를

 

" 주형(主兄)은 <미실> 원화의 아들인데

어찌 뭇 화랑들과 더불어 같은 예로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였다.

 

<보리>공이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보리>공은 곧 나의 증조부이시다.

 

증조는 일찍이 나의 아버지에게 <하종>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 지금 세상에 이 같은 효자, 충신은 없다." 라고 하였다. 

 

대개 <미실>궁주가 삼조(三朝)를 차례로 섬겼는데

형제가 핏줄이 달라 움직이면 어려움이 많았다.

 

<은륜>공주 또한 골을 믿고 방탕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세종>공이 <미실>을 대접하는 것처럼 하고 불문에 부쳤다.

 

<태양>공주는 <은륜>의 언니로 공과 더불어 가까이 살았는데

공을 유혹함이 심하였으나 공은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금륜(552-582)

                     구륜(554?- )

                     아양(556?- )<무력의 처>

                     백화(558?- ) 

                     월륜(560?- )

                     태양(563?- )

                     은륜(566?- )

동륜(사도) - 호륜(570?- )

화문(사도) - 통륜(572?- ) 

 

공의 청렴과 지킴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찬하여 말한다.

 

맑게 삼가고 덕을 닦아 훌륭한 명예를 지켰다.

 

<세종>의 아들이고 <미실>의 소생이다.

 

 

 

 

(12세) 풍월주 <보리菩利>는 계사년(573)생이고 신해(591)에 화랑주가 되었다.

 

<보리>공은 <이화>공의 차자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세종>공과 한 배의 맏누이이다.

 

이화(숙명) - 보리(573- ) <풍월주 591-595>

 

태종(지소) - 숙명(543?- )

                  세종(545?- )(미실) - 하종(564- )

 

공주가 꿈에 황색의 신록(神鹿)을 보고 공을 낳았다.

 

나면서부터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큰 뜻을 가졌다.

 

자람에 따라 맏형인 <원광>법사와 더불어 배움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다.

 

이화(숙명) - 원광(560?- )

               화명(564?- )

                  옥명(566?- )

                  보리(573- ) 

                 

<원광>이 일찍이 가르쳐 말하기를

 

" 나는 부처가 되고 너는 선(仙)이 되면 우리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하종>공의 문하에 나아가 그 낭도에 소속되었다.

 

공은 <하종>공보다 9살이 적었는데 감정과 생각이 서로 투합하여

같은 배에서 출생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공의 모친 <숙명>공주는 효성과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세종>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했고 <세종>공 또한 공주를 태후처럼 모셨다.

 

<미실>이 입궁하고 <세종>이 출정하자 공주가 <미실>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으나

<하종>공은 곧 공주의 조카인 까닭에 공주가 특별히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한 번은 말하기를

 

"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대개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어머니에게는 배우지 말라는 것을 풍자하여 가르친 것이다.

 

<하종>공은 속으로 명석한 까닭에 그 가르침을 스스로 알았으나

알아 듣지 못한 것처럼 한 것은

<미실>이 <아시>공과 <옥진>궁주를 호신(護神)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공이 처음에 <하종>공에게 속하였을 때 신궁에 따라 들어가서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에 절을 하는데

<옥진>에게 먼저 절하고 후에 제에게 절을 하였다.

 

공이 옳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 우리들이 오늘 귀한 것은 모두 선제가 내려준 것인데 어찌 그를 뒤로 합니까?"

라고 하니

 

<하종>공이 말하기를

 

" 선제 또한 말하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을 신으로 여긴다.' 라고 하였으며

<영실>공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제에게 절했다.

이것이 그 상(像)이다. 대개 <미실>이 가르친 바이다." 라고 하였다.

 

공이 부득이 따랐다.

 

그 다음에 <아시>공에게 절을 하고 다음에 <태종>공에게 절을 하였다.

 

공은 또한 그 순서에 의심을 가졌으나 따지지 않았다.

 

그 때가 건복 2년(585)으로 공의 나이 13살이었다.

 

<하종>공이 우방대화랑이 되었다.

 

<미생>공이 부러워 말하기를

 

" 너는 나보다 낫다." 라고 하였다.

 

공은 주형(主兄)에게 충성을 다하여 곁을 떠나거나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

 

<미실> 또한 칭찬하여 말하기를

 

" 공주에게 좋은 아들이 있으니 행운이 나보다 많다." 라고 하였다.

 

매번 궁중에서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공을 불러 말하기를

 

" 나의 사랑하는 조카야! 너의 형을 잘 도와라." 라고 하였다.

 

공주는 이에 오래된 감정이 조금 누그려들었다.

 

만년에는 서로 왕래하였으니 대개 공이 힘쓴 때문이다.

 

그 때 <만호>태후와 <숙명>공주는 힘써 진골정통을 도왔다.

 

<미실>이 두려워하여 <애함艾含>을 공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제문(미실) - 애함(573?- )

 

<만호>가 거절하고 그의 딸 <만룡>낭주를 공의 적처(嫡妻)로 삼았다.

 

공의 나이 겨우 13살이었고 <만룡>은 7살이었다.

 

정숙(만호) - 만룡(579- )

 

<이화>공이 <만룡>이 어리기 때문에 꺼리자 공주가 말하기를

 

" <사도> 또한 7살에 대제에게 시집갔는데 오히려 부부의 즐거움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꺼리는가?" 라고 하였다.

 

진흥대제 삼모진(534-576)은 7살의 나이에 즉위하여 사도를 황후로 하였다.

사도와 삼모진은 동갑이다.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이화>공은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만호>태후는 공의 포형인 <정숙>태자를 사랑하여 <만룡>을 낳았다.

 

삼모진(숙명) - 정숙(558?- )(만호) - 만룡(579- )

이화(숙명) - 보리(573- )

 

그런데 <미실>의 딸 <애함>을 공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만호>는 대원신통이 진골정통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특히 <만룡>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에 <만호>는 <만룡>을 불러 무릎에 않히고 묻기를

 

" 사도태후는 7살에 시집을 가서 제를 잘 모셨는데 너 또한 능히 할 수 있는냐?"

라고 하였다.

 

<만룡>이 말하기를

 

" 지아비가 누굽니까?" 하고 물었다.

 

공이라 대답하자 <만룡>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 나의 좋은 오빠입니다. 시집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후는 이에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고하고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공은 늘 태후궁에서 <만룡>을 업고 놀았다.

 

그러므로 길례가 끝나자 <만룡>이 공에게 업어 줄 것을 청하자

공이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태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 지난날 오빠 동생이 지금은 부부가 되었다. 처는 이와 같으면 안 된다." 라고 하니

 

<숙명>이 말하기를

 

" 부부이자 오빠 동생입니다.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마침내 공에게 처를 업고 태후를 뵈러 가도록 명하였다.

 

공과 더불어 낭주가 태후를 뵈러 업고 나아가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의 손위 누이 <화명>은 <호종>과 더불어 좋아하였다.

 

<미실>은 이미 공을 <만룡>에게 빼았겼다.

 

<화명>을 <하종>공의 적처로 삼으려 하였는데

<만호>가 들어주지 않고 모두 진골정통을 받아 들였다.

 

<미실>이 좋아하지 않으니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기를

 

" 비록 혼인을 하지 않았으나 조카가 숙모를 어머니로 삼고 주형이 포형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세월이 가면 어찌 또 혼인하는 날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보리>는 <하종>의 고종사촌 통생이다.

 

<미실>이 기뻐하고 마음을 풀며 말하기를

 

" 너는 진정으로 내 아들이다. 또 무슨 혼인을 하겠는냐?" 라고 하였다.

 

공은 양 통의 사이에서 이쪽 저쪽을 능히 화해시켰다.

 

<미실>은 이에 <하종>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도록 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풍월주가 되었으니 건복 8년(591) 정월이었다.

 

<서현>랑을 부제로 삼았다.

 

<서현>랑은 <아양>공주의 아들인데

영특하고 통달한 기풍이 있어 태상태후{사도}가 사랑하였다.

 

무력(아양) - 서현(573?- )

 

<하종>공에게 명하여 전방화랑을 삼았다.

 

건복 2년(585)에 공과 더불어 우방화랑이 되었다.

 

건복 5년(588)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을 부제로 삼고

<서현>랑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아 공에게 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이 <서현>랑을 부제로 삼고 <용춘>공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았다.

 

금륜(지도) - 용춘(578-647)

 

그 때 <만룡>의 언니 <만명>은 나이가 들었으나 혼인을 허락받지 못했는데

<서현>랑과 사통하였다.

 

숙흘종(만호) - 만명(573?- )

 

<만호>는 원래 <아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종(지소) - 만호(556- )(숙흘종) - 만명(573?- )

삼모진(사도) - 아양(556?- )(무력) - 서현(573?- )

 

그러므로 노하여 불허하고 공에게 명하여 <용춘>공을 <서현>랑에 대신하도록 하였다.

 

<서현> 또한 그 지위를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만명>의 정과 사랑은 더욱 굳어져 몰래 서로 도망하여 만났다.

 

<만호>는 이에 <만명>을 가두고 <서현>을 만노(萬弩)로 내치려 하였다.

 

<만명>은 탈출하여 함께 도망하였다.

 

태후는 더욱 노하여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공과 <만룡>이 힘써 태후의 노여움을 풀어 무사하게 되었다.

 

그 때 공의 누나인 <화명>과 <옥명>이 모두 진평대왕을 섬겨 사랑을 받았으므로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고자 하였다.

 

공은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 우리 집은 화랑을 세습하는 것으로 족하다.

다시 무엇 때문에 관리가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이 청렴결백하여 지조를 지켰으나

낭주는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집안 생활이 몹시 사치스러웠다.

 

이에 공이 낭주에게 일러 말하기를

 

" 내가 낭도의 우두머리로 어찌 홀로 부귀를 누리겠는가?

나의 아내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라고 하니

 

낭주가 말하기를

 

" 부부는 한 몸입니다. 낭군의 마음은 첩의 마음입니다.

어찌 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그 재물을 모두 나누어 주니 낭도들이 우러러보기를 부모같이 하였다.

 

무릇 근심과 재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는 함께 가서 위로하고 구호하여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 순행하며 다스리는 것에 비교하였다.

 

<만룡>낭주는 왕의 누이라는 귀한 신분으로 지어미의 도리를 다하였다.

 

공이 조금만 아파도 몸소 간호했으며

음식과 의복도 친히 조리하고 손질하여 올렸는데 반드시 공의 취향에 맞았다.

 

그러므로 공이 고맙게 여겨 다른 여자를 거느리지 않았고 금슬이 비할 바 없이 좋았다.

 

늦게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예원禮元>이라 하고 딸은 <보룡宝龍>이라 하였으니

곧 우리 문무왕후의 어머니이다.

 

보리(만룡) - 보룡(602?- )(선품) - 자의(법민) - 정명(645-692, 31대 신문왕)

                  예원(607-673)

 

서자는 <보태菩太>와 <보호菩好>이고 서녀는 <보단菩丹>과 <이단利丹>인데

모두 <만룡>낭주의 침비 <후단厚丹>이 낳았다.

 

보리(후단) - 보태(596?- )

                  보호(598?- )

                  보단(601-680)

                  이단(603- )

 

처음에 <비대>공의 딸 <후만>이 <설원>공과 사통하여 <후단>을 낳았다.

 

설원(후만) - 후단(575?- )

 

<만룡>이 출생하자 <후만>이 <비보>랑의 서매(庶妹)로 들어와 유모가 되었다.

 

이 까닭에 <후단>이 침비가 되었다.

 

혼인을 하고 나서 태후가 공은 다 자랐으나 처는 어리다는 것을 고려하여

침비에게 명하여 공을 모시도록 하였다.

 

공은 거절하고 동침하지 않았다.

 

낭주가 걱정하여 <후단>과 더불어 뜰에 단을 쌓고 낭주가 속히 자라기를 빌었다.

 

공은 건복 8년(591) 춘정월 15일에 풍월주의 지위에 나아갔다.

 

낭주는 아직 겨우 13살이었다.

 

공은 어리다고 하여 남도(南桃)의 예를 미루려 하였다.

 

이에 낭주가 말하기를

 

"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남도(南桃)의 예를 행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공이 기이하게 여긴즉 낭주가 말하기를

 

" 후비(厚婢)가 나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낭군이 그를 첩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비록 그 공을 칭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낭주는 제에게 청하였고 제는 공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 <후단>이 비록 침비이나 <비대>전군의 손녀이고 <설원>상선의 딸이다.

첩으로 삼을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후단>을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 적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서자가 먼저 나왔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라고 하니

 

낭주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 어찌 선후가 있습니까?

만약 제가 낳기를 원하면 곧 데려다 아들을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후단>이 이에 그 아들을 낭주에게 바쳤고 감히 잠자리 시중을 받지 못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낭주에게 아들이 생기도록 빌었다.

 

<예원>공을 낳자 <후단>의 자녀를 돌려 주도로 명하였다.

 

그 때 공주 등이 모두 신첩이 되어 정해진 지아비가 없는데

오지 공의 처첩은 유독 배반하지 않았다.

 

골인(骨人)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3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다가 부제 <용춘>공에게 전하여 주었다.

 

지위는 비록 상선(上仙)이었으나 몸은 불문에 바쳐 백씨(伯氏)를 도왔다.

 

<만룡>과 <후단> 모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공의 뜻을 받들었다.

 

<만룡>은 늘 같은 날 성불할 것을 기도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공의 말년의 일은 고승전에 나온다.

 

찬하여 말한다.

 

<보리> 사문은 <위화>랑공의 손자이고 덕은 <만룡>과 화합하고

은혜는 바다나 산과 같고 공은 불문에 높고 만세에 오직 우러러본다.

 

아버지는 <이화>랑인데 곧 <위화>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이화>공은 <모랑>공의 처남으로 함께 <지소>태후를 섬겨 사랑을 받았다.

 

<모랑>공이 죽자 <이화>공이 <모랑>을 이어 태후의 사신(私臣)이 되었다.

 

<숙명>공주는 그 때 황후의 지위로 <이화>공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골품을 초개처럼 내버리고 동혈의 벗이 되기로 약속하고 손을 잡고 출궁하여

종신토록 배반하지 않는 것이 마치 랑(狼)과 패(狽)가 서로 의지하는 것 같았다.

 

평자 중에는 비난하는 자도 있으나 가만히 생각하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눈이 맞아 출궁했을 때 제의 노여움이 혁혁하여 무거운 형벌이 앞에 있어

목숨이 털끝 같았으나 오히려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굴하지 않아

우리 신국의 대성인(大聖人) <원광>대법사를 낳았으니 진실로 하늘의 뜻이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13세) 풍월주 <용춘龍春>공은 무술년(578)생이고 병진년(596)에 낭주가 되었다.

 

<용춘>공은 <금륜>왕{진지대제}의 아들이다.

 

금륜(지도) - 용수(573?- )

                  용춘(578-647) <풍월주 596-603>

 

어머니는 <지도智道>태후인데 곧 <기오起烏>공의 딸이다.

 

<기오>공은 <선혜>황후의 사자(私子)로 <사도>태후의 포매

<흥도(興道> 낭주를 아내로 맞아 <지도>를 낳았다.

 

영실(옥진) - 사도(534- )

입종(옥진) - 흥도(537- )(기오) - 지도(555?- )(금륜) - 용춘(578-647)

선혜(홍기) - 기오(499- )

 

<지도>가 처음 <동륜>태자궁에 들어 갔을 때

태자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금륜>태자와 더불어 사통하였다.

 

<동륜>태자가 죽자 총애가 더욱 도타워졌다.

 

<금륜>태자가 즉위하자 황후가 되어 공을 낳았다.

 

공의 손위 누이인 <용명龍明>공주는 곧 진흥의 딸이다.

 

삼모진(지도) - 용명(571?- )

 

진평을 섬겨 총애가 있었다.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공의 형 <용수龍樹>전군은 혹은 <동륜>태자의 아들이라 하고

혹은 <금륜>태자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진실은 알 수 없다.

 

전군열기에 이르기를

 

공은 곧 <용수>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이 음란함에 빠졌기 때문에 폐위되어 유궁에 3년간 살다가 죽었다.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금륜(552-582)

 

공은 아직 어려 그 얼굴을 몰랐다.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사도}의 명으로 다시 신왕{진평대제}을 섬기자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엾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

 

자라자 곧 슬퍼하며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庶弟) <비형鼻荊>랑과 함께 낭도를 모았다.

 

그렇게 하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이 지위를 물려 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3세 풍월주가 되고 <호림虎林>공을 부제로 삼았다.

 

공은 곧 낭도의 구습(舊習)을 고쳤다.

 

한결같이 인재를 뽑는데 골품에 구애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 골품이란 것은 왕위와 신위를 구별하는 것이다.

낭도에 골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의 원칙이다.

어찌 피로써 다스리겠는가?" 라고 하였다.

 

무리들이 크게 화합하여 말하기를

 

" <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졌다." 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미생>공은 많은 폐첩(嬖妾)이 있었다.

 

9부 낭두들이 모두 첩을 통하여 청탁을 하였다.

 

그러므로 다투어 그 딸을 바치고 청탁을 하여 화랑과 맺어진 낭도들을 이름하여

신선골(新仙骨)이라 하였다.

 

<보리>공이 염려하여 3파를 섞어 등용하고 그 세력을 고르게 하였는데 이름하여

균등(均登)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공이 있는 자라도 만약 균등에 걸리면 진급을 시키지 않았다.

 

그 때 <대남보大男甫>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감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급인지풍(急人之風)이 있어 무리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그런데 선골(仙骨)의 품이 없고 또한 균등의 힘이 없었다.

 

어떤 이가 <대남보>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 그대의 딸이 아름다운데 어찌 신주(新主)에게 바치고 골품을 얻지 않는가?"

라고 하니

 

<대남보>가 말하기를

 

" 우리 무리는 천인인데 어찌 감히 여색으로 풍월주를 미혹할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공이 듣고 그 말을 기특하게 여겨 낭두별장을 불러 묻기를

 

" 대남보의 재능이 낭두가 될 만 한가?" 라고 하니

 

답하기를

 

" 될 만 합니다. 그러나 골품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묻기를

 

" <대남보>의 공은 어떠한가?" 라고 하니

 

답하기를

 

" 풍월주를 모신 같은 낭도로서 출정한 바 있는데 

대상(對上)이 아직도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 대상이 누구인가?" 하고 묻자

 

답하기를

 

" <조심보曺心甫>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또 묻기를

 

" <조심보>가 <대남보>보다 공이 큰가?" 라고 하니

 

답하기를

 

" <조심보>는 비록 공이 없으나 <대남보>의 대상입니다.

만약 <대남보>를 승진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조심보>를 승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3파 균등의 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재능이 없는 자를 재능이 있는 자의 대상으로 삼아

재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지 않는 것은 재능을 장차 썩이는 것이다.

골(骨)과 파(派)가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하고는 <대남보>를 세 번 승진시켜 낭두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불평하는 자들이 상선(上仙)을 찾아가 바로 잡으려하였다.

 

<문노>공이 말하기를

 

" 법이 점점 더 날로 새로워지고 우리들은 모두 늙었는데

어찌 신주(新主)를 괴롭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생>공 또한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습이 고쳐졌다.

 

<대남보>의 딸은 공을 위하여 스스로 정절을 지키고 유화(遊花)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공이 딱하게 여겨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안 되었다.

 

<대남보>가 말하기를

 

" 한 명의 여자로 인하여 어찌 공께서 걱정하실 수 있습니까?"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내가 너를 사사롭게 대한다고 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딸이 듣고 슬퍼하여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낭두 등이 이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공에게 절하고 말하기를

 

" 이같이 이르도록 만든 것은 신들의 잘못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마지 못하여 거두었다.

 

그 날로 <남보>를 해직하고 말하기를

 

" 부녀가 한 사람을 섬길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남보>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 나를 알아 주면 충분합니다.

어찌 모름지기 지위를 논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이를 듣고 곧 <남보>를 등용하여

공의 궁사지(宮舍知)로 임명하여 재용(財用)을 관장하게 하였다.

 

<남보>는 원래 부유하였는데 그 재물을 모두 기울여 공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결사대 백 명을 모아서 공을 호위하였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공이 하루는 종자들과 더불어 미복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래하여 부르기를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이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치고 가난해져

세 아들이 모두 베옷을 입었다네

 

라고 하였다.

 

종자들이 말하지 않았다.

 

<남보>의 집에 이르자 그 처와 세 아들이 삼을 쌓아 놓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고 있다가

공을 보자 그것을 숨겼다.

 

공은 이에 종자들이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종자들이 복종하여 말하기를

 

" 당두의 일곱 아들은 모두 영달하였는데 남보의 세 아들은 모두 천한 까닭에

거리에 이 노래가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오래동안 슬퍼하다가 말하기를

 

" 나의 잘못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그 장자 <학열郝熱>을 승부(乘府)에 천거하여 오지(烏知)를 주었고

다시 그 두 동생을 <호림>공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 <남보>는 나를 위하다가 가난해졌다.

나는 장차 지위를 물려 줄 것이다. 그대는 그들을 낭두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자 모두 등용하여 낭두로 삼았다.

 

<남보>는 그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세 아들은 모두 충절을 숭상하였다.

 

건복 20년(603) 공과 <비보>랑이 제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 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공의 형 <용수龍樹>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 주려 하였다.

 

이에 전군이 공에게 의견을 물으니 공이 답하기를

 

" 대왕의 춘추가 한창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됩니다."

라고 하였다.

 

전군은 이에 사양하였으나 <마야摩耶>황후가 들어 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天明>공주의 남편이다. 

 

지소(515- )(영실) - 황화(541?- )(복승) - 마야(567?- )(백정) - 천명(583?- )

 

이보다 앞서 공주는 마음 속으로 공을 사모하여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륜(만호) - 백정(마야) - 천화(581?- )

                                    천명(583?- )

                                    호명(585?- )

                                    덕만(587?- )

금륜(지도) - 용수(573?- )

                  용춘(578-647)

 

용수와 용춘은 천명과 덕만의 작은 집 삼촌이다.

 

황후가 <용수>로 생각하여 시집을 잘못 보냈던 것이다.

 

공주는 이에 공에게 말하기를

 

" 첩이 본래 그리워한 사람은 곧 그대입니다."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가정의 법도는 장자가 귀한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형과 같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주는 공을 더욱 사랑하여 제에게 공의 처지를 떠받쳐 주게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의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지위가 <용수>공과 같게 하였다.

 

<용수>공이 공주의 뜻을 알고 공주를 공에게 양보하려 하였으나

공이 힘써 사양하였다.

 

<마야>황후가 밤에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을 불러 공주와 함께 묵도록 하였다.

 

<용수>공 또한 늘 병을 칭하고 공에게 공주를 모시고

공주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스스로 게으르거나 방자한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대궐에서 더욱 신임을 받았다.

 

<호림>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자 조정에 들어 가 요직에 있었는데

대사(大舍)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들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로써 낭도로 등용돤 자들이 또한 공을 심히 존중하여 모두 목숨 바치기를 원하였다.

 

선덕(善德)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은 왕위를 이을 만 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마야> 황후가 죽은 해는 600년 경이다.

 

그러므로 대왕은 공을 마음에 두고 공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성으로 순종하였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을 하였다.

 

선덕은 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私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그 때 <승만僧滿>황후가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공의 형제를 미워하였다.

 

공은 이에 지방으로 나갔다.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승진하여 각간에 봉해졌다.

 

<용수>전군이 죽기 전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맡겼다.

 

그 아들은 곧 우리 태종황제이고 부인은 곧 <천명天明>공주이다.

 

용수(천명) - 춘추(603-661. 29대 태종 무열왕 재위 654-660)

 

처음에 <용수>공은 <천화天花>공주를 아내로 맞았는데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게되자 <천화>공주를 공에게 주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선덕공주를 모시게 되자 제가 <천화>공주를 <백룡白龍>공에게 내려 주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하자 공을 지아비로 삼았는데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 날 것을 청하였다.

 

선덕공주가 즉위한 해는 632년이다.

 

군신들이 이에 삼서(三婿)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欽飯>공과 <을제乙祭>공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공은 본디 <금륜>이 색에 빠져 폐위 된 것을 슬퍼하였고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政事)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기를 허락하였다.

 

공은 <천명>공주를 처로 삼고 태종{춘추}을 아들로 삼았다.

 

이에 앞서 왕명으로 <호명昊明>궁에 살며 딸 다섯을 낳았고 달리 적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태종을 아들로 삼은 것이다.

 

서자는 다섯인데 <용산龍山>과 <용석龍石>은 <대씨大氏>가 낳았다.

 

<용귀龍貴>는 <미생>공의 딸 <매생梅生>이 낳았다.

 

<용주龍珠>와 <용릉龍凌>은 비보랑공의 딸 <홍주紅珠>가 낳았다.

 

용춘(대철) - 용산

                  용석

                  용태(춘추) - 인태

용춘(매생) - 용

용춘(홍주) - 용주

                  용릉 

                  용보(춘추) - 거득

                                    마득

 

서녀는 18명이었다.

 

<용산>의 누이 <용태龍泰>는 태종을 섬겨 <인태仁泰> 각간을 낳았다.

 

<용주>의 누이 <용보龍寶>는 태종을 섬겨 <거득車得>과 <마득馬得> 양 공을 낳았다.

 

공은 청렴하고 담백하여 색을 멀리 하였는데 자손이 저절로 창성하였다.

 

사람들이 덕이 있는 사람은 창성한다고 말하였다.

 

나머지 자손을 다 기록하지 않지만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다.

 

공은 만년에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

 

<천명>, <호명> 양 궁과 더불어 산궁(山宮)에 술상을 차려놓고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

 

시첩 다섯이 온화한 모습으로 받들어 섬겼다.

 

태종은 효성을 극진히 하여 안락하게 모셨다.

 

태화 원년(647) 8월 세상을 떠나니 나이 70이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

 

아, 성대하다!

 

공의 성스러운 덕은 하늘과 같고 땅과 같아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이다.

 

찬하여 말한다.

 

갈문왕의 덕 일월과 아울러 밝고 삼한의 업이 힘입어 크게 이루어지도다.

 

 

 

  

 

(14세) <호림虎林>은 기해년(579)생이고 계해년(603)에 풍월주가 되었다.

 

<호림>공은 <복승福勝>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松花>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혹 말하기를 "공주의 사자(私子)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잘 알 수 없다" 하고

혹은 <비보>랑의 아들이라고 한다.

 

복승(송화) - 호림(579- ) <풍월주 603-612>

 

공은 용력이 많고 격검을 좋아하여 일찍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

 

검소하게 지냈으며 골품으로 뽐내지 않았다.

 

공의 누나 <마야>부인은 그 때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이 부제로 발탁하였다.

 

복승(황화) - 마야(567?-600?)

 

이에 이르러 공은 14세 풍월주가 되었으니 곧 진골정통이다.

 

공은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탈의지장(脫衣地藏)이라고 불렀다.

 

공은 낭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 선불(仙佛)은 하나의 도(道)다.

화랑 또한 불(佛)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미륵 선화(仙花)와 <보리> 사문 같은 분은 모두 우리들의 스승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곧 <보리>공에게 나아가 계를 받았다.

 

이로써 선불(仙佛)이 점차 서로 융화하였다.

 

공은 처음 <문노>공의 딸 <현강玄剛>낭주를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었다.

 

문노(윤궁) - 현강(586?-605?)

 

<하종>공의 딸 <유모柔毛>낭주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하종(미모) - 유모(584?- )

 

그 때 <미실>궁주의 나이가 많았는데 낭주를 매우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기를 원하였다.

 

605년경 미실의 나이는 59세이다.

 

 

공에게 명하여 천부관음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게 하였다.

 

이에 <선종善宗>랑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律家)의 대성인이 되었다.

 

호림(유모) - 선종(605?- )

 

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茂林)거사라 불렀다.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어 물었다.

 

<알천閼川>공, <임종林宗>공, <술종術宗>공, <염장廉長>공, <유신庾信>공,

<보종寶宗>공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놀았다.

 

숙흘종(보리) - 알천(580?- )

복승(황화) - 임종(570?- )

천주(지도) - 염장(586-648)

서현(만명) - 유신(595-673)

설원(미실) - 보종(580- )

복승(송화) - 호림(579- )

 

 

통일의 기초가 공 등으부터 비롯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찬하여 말한다.

 

태후의 손이고 진골 정통의 무리이다.

 

복되게 불선에 들어갔으니 공이 천추에 드리웠다.

 

 

 

 

(15세) <유신庾信>공은 <서현舒玄>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萬明>부인인데 곧 <만호萬呼>태후의 사녀(私女)이다.

 

서현(만명) - 유신(595-673)<풍월주 612-616>

 

아버지는 숙흘종인데 또한 입종 갈문왕의 아들이다.

 

입종(금진) - 숙흘종(536?- )

숙흘종(만호) - 만명(573?- )

 

처음 <만명>과 <서현>이 야합하여 임신하였는데

태후는 <서현>이 대원신통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만노(萬弩)로 도망하여 무릇 스무 달 만에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이 많았다.

 

진평대왕은 사매(私妹)가 괴로움을 받자 서현공을 만노(萬弩)에 봉하였다.

 

 

동륜(만호) - 백정{진평대왕}(567-631)

 

공은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

 

태후가 보고 싶어하여 돌아 올 것을 허락하여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 참으로 나의 손자다." 라고 하였다.

 

이로서 가야파가 마침내 받들었다.

 

<호림>공의 부제 <보종>공은 <미실>궁주의 막내 아들인데 아버지는 <설원>이었다.

 

설원(미실) - 보종(580- )

 

공이 중망(衆望)이 있다고 하여 그 지위를 양보하였다.

 

그 때 공의 나이가 15살 이었는데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

 

가야파의 낭도로서 승진하기를 탐하는 자가 말하기를

 

" 어른께서는 가야 정통으로 어찌 저를 사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 나는 곧 태후의 손자인데 네가 무슨 말을 하는가.

또한 대인은 사애(私愛)를 하지 않는다.

공이 있으면 비록 미천하여도 승진을 할 것이다.

어찌 공을 세우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낭도는 크게 부끄럽게 여기며 물러났다.

 

어떤 이가 고하기를 그 낭도가 장차 배반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 옳지 않으면서 붙는 것은 배반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지만 그 낭도가 승진을 탐하는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후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이로써 능히 각 도(徒)를 화합하였다.

 

공은 늘 낭도에게 이르기를

 

" 우리나라는 동해에 치우쳐 있어 삼한을 통일할 수 없다.

이것이 부끄럽다.

어찌 구차하게 골품과 낭도의 소속을 다투겠는가?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면 곧 나라에 외우(外憂)가 없을 것이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라고 하였다.

 

무리가 공에게 몸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공은 이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낭도를 뽑아서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고

고사(高士)들과 힘써 결속을 맺었으며 중악(中岳)에 들어가 노인에게  비결을 받았다.

 

신변에는 늘 신병(神兵)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겠다고 청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이때 유신 18세이다.

 

태후가 하종공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를 맞도록 명하여

<미실>궁주를 위로하려고 하였다.

 

이때 태후 <만호> 57세이고 미실궁주 66세이다.

 

<영모>는 <유모柔毛>의 동생이었다.

 

하종(미모) - 유모(584?- )

                  영모(590?- )

 

형제가 모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었다.

 

<유모>는 <호림>의 아내, <영모>는 <유신>의 아내이다.

 

그 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곧 건복(建福) 29년(612) 임신년이었다.

 

공이 풍월주의 위에 오르는 날 낭도들과 더불어 병장기를 만들고 궁마를 단련하였다.

 

<용춘>공이 이에 사신(私臣)으로 발탁하였다.

 

공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기로 맹세를 하고 따랐다.

 

<용수>공 또한 그 아들을 맡기니 공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우리 <용수>공의 아들은 삼한의 주인이다." 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공주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용춘>공은 왕의 남편이 되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한 해는 632년이다.

이때 유신 38세, 춘추 30세, 선덕여왕 덕만 50세, 용춘 55세이다. 

 

 

공이 <춘추>공에게 말하기를

 

"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 왕자나 전군(殿君)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춘추>공은  이에 공의 누이 <문희文姬>를 아내로 맞았고 공의 부제가 되었다.

 

서현(만명) - 유신(595-673)

                  흠순(599-680)

                  보희(601?- )

                  문희(603?- )

                  정희(605?- )

<춘추>가 <문희>를 아내로 맞이한 해는 625년경이다.

 

이보다 앞서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기 전에 공에게 양보를 하였다.

 

따라서 대원파가 불평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은 이에 풍월주의 위를 보종공에게 물려 주었다.

열국을 순행하여 뜻과 기개가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

 

공의 사업과 공덕은 모두 사책(史冊)에 있으므로 생략한다.

 

찬하여 말한다.

 

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하여 우리 동방의 질서를 바로잡아 통치하니 혁혁한 공명은

해와 달과 아울러 함께 할 것이다.

 

 

 

 

 

 

 

(16세) <보종宝宗>공은 또한 <미실美室>궁주의 사자(私子)이다.

 

홍제(鴻濟) 8년(579)에 <사도思道>태후가 친정(親政)을 하였다.

 

<미실>궁주가 새주(璽主)가 되어 정당(政堂)에서 문서를 보다가 낮에 꿈을 꾸었는데

백양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길 한 꿈임을 알고 급히 제(帝){진평대제}를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제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궁주의 기분에 따라 주지 못했다.

 

이에 금하(衿荷) <설원>랑에게 다시 들어가 모시도록 하여 공을 낳았다.

 

 

이때 미실 33세, 진평대제 백정 13세, 설원 31세이다.

 

 

공은 자라면서 모습이 <설원>랑과 같았으므로 <미실>궁주가 <설원>랑에게 내려주고

아들을 삼게 였다.

 

궁주는 공이 막내아들이 되기 때문에 매우 사랑하였다.

 

<하종>공 또한 공을 도탑게 사랑하였다.

 

공은 처음에는 제(帝)를 불러 아버지라고 하였다.

 

자라자 <설원>랑에게 돌아갔다.

 

제(帝)는 <보종>을 아들로 생각하여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설원(미실) - 보종(580- )<풍월주 617-621>

 

 

공의 성품은 청아하였고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었으며 온화함과 순량함은 마치 부녀자와 같았다.

 

사람들이 병들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마치 자기가 아픈 것 같았다.

 

새와 짐승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한 마리의 벌레나 한 포기의 풀도 해친 적이 없었다.

 

선과 악, 이와 해를 나누지 않았다.

 

늘 작은 청려(靑驪)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시가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진선공자(眞仙公子)라고 였다.

 

얼굴은 관옥과 같았고 손은 마치 하얀 새 싹과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호림>이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다.

 

 

<호림>은 <보종>보다 1살 많다.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궁주가 일찍이 그 바라는 바를 물었더니 공이 답하기를

 

" 어머니와 더불어 같이 죽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궁주가 웃으며

 

" 네가 색은 좋아하지 않고 나와 같이 죽기를 원하니 또한 무슨 뜻인가?" 라고 하였다.

 

공은

 

"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무도 어머니만 못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살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궁주가 다시

 

"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없는 까닭에 오로지 어미에게 정을 쏟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택하여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손자를 볼 것인가?"  하였다.

 

공이

 

" 무엇을 아름답다고 합니까?" 라고 하자

 

궁주가

 

" 너와 같은 사람이 아름답다.

얼굴은 옥과 같이 아름답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으며

눈은 아리땁게 빛나고 말에 정(情)의 뿌리가 있는 자이면 또한 가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 정의 뿌리는 갈래가 많고 아리땁게 빛나는 것은 속기 쉬우며

붉은 연지와 옥과 같은 아름다움은 몸을 지키는 보배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궁주는 이에 <윤궁允宮>의 딸 <현강玄剛>에게 공을 모시도록 하였으나

공은 접촉한 일이 없이 <호림>공을 불러 함께 살았다.

 

<호림>공은 이에 <현강>과 통하여 딸 <계림桂林>을 낳았다.

 

호림(현강) - 계림(603?- )

 

 

공은 이에 <현강>을 <호림>공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아내를 맞지 않았다.

 

 

궁주가 근심하여 종실의 여자들을 모아 말하기를

 

" 나의 아들과 친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주겠다." 라고 하였다.

 

 

종실의 여자들이 다투어 공을 재미있게 해 주려 하였으나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

 

 

<보명宝明>궁의 딸 <양명良明>공주가 꾀를 내어 공을 유혹하여 정을 통하였다.

 

 

백정(보명) - 양명(579?- )

 

 

공은 비로소 여색을 알게 되었다.

 

궁주가 크게 기뻐하며 <양명>에게 큰 상을 주었다.

 

<보라宝羅>와 <보량宝良> 두 딸을 낳고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보종(양명) - 보라(602?- )

                  보량(604- )   

 

 

공은 화랑이 되어 낭두를 아재비라 불렀고 한번도 그 칭호를 바꾸지 않았다.

 

 

<염장廉長>공을 부제로 삼았는데 오히려 형과 같이 섬겼다.

 

 

천주(지도) - 염장(586-648)

 

 

얼굴이 늘 어린아이와 같았다.

 

늘 콩죽을 먹고 고기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원의 여러 종류의 고목을 보고 물고기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그 사이를 거닐었다.

 

<유신>공을 엄한 아버지와 같이 두려워하였다.

 

 

<유신>은 <보종>보다 15살 어리다.

 

 

<유신>공이 웃으며

 

" 형이 어찌 아우를 두려워합니까?" 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 <유신>공은 바로 천상의 일월이고 나는 곧 인간의 작은 티끌입니다.

감히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드디어 풍월주의 위를 물려 주었다.

 

 

<유신>공이 낭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희들이 선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보종>형공을 따라야 하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면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미실>궁주가 일찍이 <유신>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 나의 아들은 어리석고 약하니 도와 주기를 바란다." 라고 하니

 

 

<유신>공이 말하기를

 

" 신이 실로 어리석습니다.

형은 비록 약하나 그 도는 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궁주가 죽자 공은 스스로 더불어 따르지 못한 것을 죄로 생각하여

문을 잠그고 홀로 거처하며 궁주가 쓴 수기(手記) 7백권을 베껴 집에 간직하였다.

 

또한 궁주의 초상을 그려서 걸고 아침 저녁으로 절하였다.

 

 

역대 상선들의 모임에서는 번번이 아랫자리에 앉아서 '예,예'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진기를 갚이 살펴서 어조와 화목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유신>공이 병이 나자 공이 몸소 치료하며

 

" 우리 공은 국가의 보배이니 나의 의술을 숨길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그가 편작의 학을 갖추었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유신>공이 칠성회를 열어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

 

 

공은

 

" 나는 물고기와 새의 벗으로 국사를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여러 공을 따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은 공의 한 마디를 중하게 여겨 묻지 않는 적이 없었으니

공의 덕 또한 크다.

 

 

찬하여 말한다.

 

어조(魚鳥)의 벗으로 천리(天理)를 달관하니 말 없이도 교화하고

도모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적송(赤松)의 아들은 오직 공뿐이다.

 

 

※ 참고

 

적송자(赤松子) : 중국 전설시대 선인의 이름.

                        신농때의 우사로서 후에 곤륜산에 입산하여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17세) <염장廉長>공은 건복(建福) 병오년(586)생이고

신사년(621)에 화랑주가 되었다.

 

태화(太和) 원년 무신년(648)에 죽었다. 나이가 63세였다.

 

<염장>공은 <천주天柱>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知道>태후이다.

 

그러므로 공은 <용춘>공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가 된다.

 

공은 풍채가 좋고 말을 잘 하였으며 무리를 다스리고

윗 사람을 잘 섬기는 재능이 있었다.

 

<지도>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용춘>공에게 맡겨 <호림>공에게 속하게 하였다.

 

금륜(지도) - 용춘(578-647)

천주(지도) - 염장(586-648)<풍월주 621-626>

 

그 때 공은 나이가 14살로 <보종>공보다 6살이 적었으나

준수하기는 대체로 비슷하였다.

 

공은 <보종>공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자원하여 그의 아우가 되었다.

 

<보종>은 형으로 처신하지 않고 오히려 공을 형처럼 섬겼다.

 

공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정은 마치 부부와 같았다.

 

<호림>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공이 부제가 되었고 공은 전방대화랑이 되었다.

 

그 때 나이 18살이었는데 용기와 힘이 있어 능히 무리를 복종시킬 수 있었다.

 

키가 이미 <보종>공보다 커서 <보종>공을 아이처럼 늘 업어 주었다.

 

<보종>공이 부제를 <유신>공에게 양위하자 <염장>공이 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종>공을 보호하려 하였다.

 

<호림>공이 곤란하게 여겼다.

 

<미실>궁주가 이에 <염장>공을 불러 달랬다.

 

<유신>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을 좌방대화랑으로 삼고

<염장>공을 부제로 삼고자 하였다.

 

공이 <보종>공을 힘써 밀어 부제가 되게 하고 스스로는 좌방대화랑이 되었다.

 

<보종>공은 일을 본 적이 없고 공이 모두 대행하였다.

 

<보종>은 내사(內事)에 욕심이 없었다.

 

<양명良明>과 혼인시켰는데 <양명>은 <염장>공과 혼거하여

아들 <장명長明>을 낳았다.

 

염장(양명) - 장명(608?- )

 

 

<하종>공의 딸 <하희夏姬>가 <보종>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와서 유혹하였다.

 

<보종>은

 

" 만약 우리 <염장>과 사랑을 하면 나 또한 더불어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희>는 이에 공에게 시집가서 <하장夏長>, <윤장閏長>, <춘장春長>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염장(하희) - 하장(615?- )

                  윤장(618?- )

                  춘장(620?- )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이 부제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였다.

 

그 때 나이가 31살 이었는데 중망을 널리 얻었다.

 

<보종>이 1년 안 되어 물려주려 하자 공은 웃으며

 

" 내가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고 있는데 어찌 반드시 물려주려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보종>은 이에 그만 두었다.

 

공은 부제로 6년 풍월주로 6년을 있었기에 11년간 실제로 낭정(郎政)을 주관하며

3파를 화합시키는데 힘쓰고 서로 교혼을 시켜 마침내 동화(同和)를 이루었다.

 

그러나 낭권의 큰 것은 모두 가야파에게 돌아가고 진골과 대원은 모두 그 안에서

소멸해 버렸으니 또한 운명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공의 외척과 처족들이 청탁을 하여

3파 낭두의 딸들을 모아 첩으로 삼기를 힘썼기 때문에 서자가 매우 많았다.

 

<보종>공의 집안일을 보아 주고 그 재물을 취하여 사용하였다.

 

<유신>공의 부제로서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柒宿>의 난을 다스리고 공으로 발탁되었다.

 

 

삼모진(미질) - 칠숙(565?-631)

 

 

※ 칠숙의 난

 

『삼국사기』 진평왕(眞平王) 53년 조에는 이찬(伊湌) 칠숙(柒宿)과

아찬(阿湌) 석품(石品)의 반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진평왕 53년(631)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란을 꾀하였는데,

왕이 이를 알아채어 칠숙을 잡아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으며,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자를 보고자 하여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돌아와 총산에 이르렀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어 나무꾼의 해어진 옷과 바꾸어 입고,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왔다가 잡혀 사형을 당한 사건이다.

같은 사건이『화랑세기』17세 풍월주 염장공(廉長公) 조에도 나와 있다.

염장공은 유신공의 부제(副弟)였는데,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받았다.

 

염장공은 선덕 공주(善德公主)에게 몰래 붙어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발탁되었다.

 

선덕이 왕으로 즉위하자,

염장공은 조부(調府)의 영(令)이 되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많은 치부를 하여,

그때 사람들이 염장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이라 하였다고 한다.

 

금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 홍수와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기록만 가지고는 칠숙 · 석품이 일으킨 반란의 원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진평왕이 칠숙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인 54년(632)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어났던 칠숙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선덕 공주가 깊이 관여하였거나 어쩌면 주도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와 『화랑세기』가 전하는 내용의 차이이기도 한데,

『삼국사기』에는 칠숙의 난을 진압한 이가 진평왕으로 나오고 있는데 반해,

『화랑세기』에는 선덕 공주가 칠숙의 난 진압에 관여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칠숙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평왕은 66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선덕 공주가 난의 진압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좀더 높다.

 

또한 당시 선덕 공주의 왕위 계승은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므로,

칠숙 등은 여왕의 즉위 또는 선덕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수 있다.

여하튼 그 때 풍월주이던 염장공은 상선(上仙)으로서 선덕 공주를 도왔고,

선덕 공주 또한 염장공 등을 거느리게 되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당시 풍월주들의 정치적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염장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선덕이 즉위하자 조부(調府)에 들어가 장관인 영(令)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선덕이 즉위하자 들어가 조부(調府)의  영(令)이되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하였다.

 

세상에서 공을 <미생>공과 비교한 바 있는데 <미생>은 극도로 사치를 하였으나

공은 검약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그 부유함이 <미생>공보다 훌륭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몸소 검소하여 부유하였고 <보종>공에게 충성스러웠고 칠성우와 교유하여

힘을 다하여 찬동하였다.

 

통일의 업적이 실로 공에게 힘입었다.

 

 

 

 

 

 

 

(18세) <춘추春秋>공은 우리 무열대왕이다.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 하였다.

 

커다란 뜻이 있었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

 

<유신>공이 위대한 인물로 여겨 받들어 군(君)으로 삼았으나

무열왕이 사양하여 부제가 되었다.

 

<유신>공이 퇴위하였으나 <보종>과 <염장> 양 공이 있었기에

<춘추>공은 양보하여 기다렸다.

 

이에 이르러 풍월주에 오르니 보령이 24살이었다.

 

<유신>공의 누이 <문희文姬>를 화군(花君)으로 삼아 장자 <법민法敏>을 낳았는데

곧 우리 문무제(文武帝)이다.

 

용수(천명) - 춘추(603-661)<풍월주 626-629>

춘추(문희) - 법민(626-681)

 

 

이에 앞서 <문희>의 언니 <보희宝姬>가 꿈에 서악에 올랐는데

큰 물이 경성에 가득한 것을 보고 불길하다고 생각하였다.

 

<문희>가 이 꿈을 비단 치마와 바꾸었다.

 

그 후 열흘 만에 <유신>이 공과 더불어 집 앞에서 축국을 하였는데

곧 정월 오기일(午忌日){정월 대보름}이었다.

 

<유신>은 일부러 공의 치마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었다.

 

들어가서 꿰매기를 청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시키고자 하였는데 병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문희>가 이에 나아가 바느질을 하여 드렸다.

 

<유신>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공이 이에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1년쯤 되자 임신을 하였다.

 

그 때 공의 정궁(正宮)부인인 <보량宝>궁주는 <보종>공의 딸이었다.

 

아름다웠으며 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古陀炤>를 낳아 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춘추(보량) - 고타소(623?- )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하였다.

 

<유신>은 이에 장작을 마당에 쌓아 놓고 막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하며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때 공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사실대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유신>공의 집으로 가서 구하였다.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보량>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이 되어 아들 <법민>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공은 이에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춘추(보희) - 지원

                  개지문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있다가 부제 <흠순欽純>공에게 물려 주었다.

 

<흠순>은 곧 <유신>공의 포제이다.

 

왕의 대업은 사책(史冊)에 있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찬하여 말한다.

 

세상을 구제한 왕이고 영걸한 임금이다.

 

한번 천하를 바로 잡으니 덕이 사방을 덮었다.

 

나아가면 태양과 같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다.

 

 

 

 

 

 

 

(19세) <흠순欽純>공은 <유신>의 동생이다.

 

처음에 <염장>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유신>공의 명으로 <춘추>공에게 양보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풍월주의 위에 올랐다.

 

서현(만명) - 유신(595-673)

 

                  흠순(599-680)<풍월주 629-632>

 

 

그 해에 공의 아버지 <서현>공과 형 <유신>이 낭비(娘臂)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공은 분명히 말하기를

 

" 나로 하여 이 같은 빈 그릇만 지키라고 하니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나도 또한 지금부터 나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개 그 때 사람들이 공 세우기를 좋아하고 선도를 탐구하지 않았는데

공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이로써 공의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낭정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에 머물렀다.

 

부제 <예원禮元>공이 낭정을 대행하였다.

 

공은 이에 <예원>공에게 물려주며

 

" 실제로 낭정을 행하는 사람이 풍월주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활달하였고 청탁에 구애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유신>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으나 공은 홀로 그러지 않고

 

" 어리석은 형이 어찌 두려운가?"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의 우애는 지극히 돈독하여 공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랑하였다.

 

 

공은 나이 18살에 전방화랑이 되어 상선(上仙)을 두루 배알하였다.

 

 

나의 <보리菩利> 할아버지를 찾았을 때 <예원>공의 서자(庶姉) <보단菩丹>낭주는

바야흐로 나이가 16살이었고 <예원>공은 9살이었다.

 

 

공은 <보리> 할아버지를 정자 위에서 배알하고 <보단>이 <예원>공을 데리고

정자 아래 연못가에 있었는데 그윽한 아름다움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은 곁눈으로 오랫동안 보다가 갔다.

 

수일 만에 와서 <보리> 할아버지를 만나 뵙고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보리 할아버지는 그를 장하게 여겨 말하기를

 

" 남자가 삼가야 할 것은 색이다.

네가 나의 딸을 사랑하되 다른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지 않는다면 줄 수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공이 맹세를 하였다.

 

<보리> 할아버지는 이에 <보단>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보단>은 <보리> 할아버지의 풍모가 있어 재능과 아름다움이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났고 미덕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공은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보단>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아름답고 용감하며 아버지를 닮아서

집에 돌아오면 단란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있었다.

 

공은 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 내가 능히 국가를 위하여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처가 뒤에서 도운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유신>공은 큰 일이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을 그냥 지나갔는데

공은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집에 이르러 낭주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 갔다.

 

공은 늘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지방에 많이 있었는데 낭주는 원망하지 않고

집에 있으며 기도드렸다.

 

집에 돌아오면 한집안 식구들이 떠들며 좋아하였다.

 

공은 젊어서 술을 즐겼다.

 

낭주가 친히 술을 빚어 다락 위에 두고 드렸다.

 

하루는 공이 술을 찾자 낭주가 다락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공이 이상하게 여겨 다락에 올라가니 큰 뱀이 술독에 들어가 취하여 있고

낭주는 놀라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에 낭주를 업고 내려왔다.

 

마침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보리> 할아버지가 듣고

 

" 처를 사랑함이 이와 같으면 곧 둘째 딸을 주어도 좋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낭주의 동생 <이단利丹>을 공에게 시집보내어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형제가 한 지아비를 섬긴 까닭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은 집에 있으면 오직 좋은 아버지가 되어 두 낭주 및 자녀들과 노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으니 그가 삼한의 대영걸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쟁에 임하면 초목이 모두 떨고 집안에서는 닭과 개가 모두 업신여긴다고 한 것은

공을  두고 한 말이다.

 

공은 재물에는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하였다.

 

<염장>공은 웃으며

 

"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데 내 아이를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여러 아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하였다.

 

<보단>은

 

" <염장>공 형은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니

그 딸을 맞으면 가풍을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니

 

공은

 

"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지요.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 곧 염형과 같았을 것입니다.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곧 집이 부유해져서

그대로 하여금 고생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니 호색탐재 또한 할 만하지 않소"

라고 하였다.

 

<보단>은 막을 수 없었다.

 

공 또한 심하게 책망하지 않았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염장>공의 딸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곧 <반굴盤屈>공이다.

 

흠슨(보단) - 반굴(영광) - 영윤

                  원수

                  원선(636- )

흠순(이단) - 원훈

 

 

부자(父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을 것이다.

 

넷째 아들 <원수元帥> 여섯째 아들 <원선元宣>은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는데

<보단>의 소생이다.

 

아홉째 아들 <원훈元訓> 또한 중시(中侍)였는데 곧 <이단>의 소생이다.

 

모두 공의 음덕이 이룬 것이다.

 

공은 여러차례 대전을 거쳤으나 패한 일이 없었고

사졸 사랑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삼보(三寶)의 하나로 삼았다.

 

문무제 20년(680) 2월 <보단>낭주와 함께 천계(天界)로 올라갔다.

 

나이가 82살이었는데 낭주는 2살이 적었다.

 

자손이 백을 헤아렸고 조문하는 사람이 만을 헤아렸다.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찬하여 말한다.

 

<유신>의 동생이고 <보리>의 사위다.

 

하늘을 뒤집는 큰 공은 좋은 짝을 얻는 데서 비롯되었다.

 

오직 공의 덕은 만세에 이르리라.

 

 

 

 

 

 

(20세) <예원禮元>공은 <보리>공의 아들이다.

 

<흠순>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염장>공이 풍월주가 되자 <흠순>공이 부제가 되어 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았다.

 

성품이 단아하고 따뜻하고 자상하였다.

 

보리(만룡) - 예원(608-673)<풍월주 632-634>

 

 

자신을 굽혀 다른 사람보다 낮추었고 도로써 자신을 다스렸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 과연 <이화二花>의 손자입니다." 라고 하였다.

 

 

위화(준실) - 이화(숙명) - 보리(만룡) - 예원

 

 

<흠순>공을 섬기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제처럼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흠순>공이 풍월주가 되자 부제로서 낭정을 대행하여 폐정을 많이 개혁하였다.

 

가야파의 옳지 않은 자들이 진골정통을 부흥하는 일이라하여 비방하였다.

 

공이 스스로 물러나려 하자 <흠순>공이 노하여 그 무리를 내쫒고 말하기를

 

" 부제는 곧 내 몸이다.

어찌 나와 조그마한 차별이라도 있겠는가.

또한 지금 천하가 한 집이 되었는데 어찌 진골과 가야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진골정통의 옛 낭두들을 대거 진출시켜 등용하였다.

 

가야파의 낭두들이 <염장>공에게 많이 모여 간절히 구원을 청하였다.

 

<염장>은 이에 <예원>공을 청하여 술을 내리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 듣건대 네가 나이가 어리나 낭정을 잘 한다고 하니 기쁨을 금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 때 가야파의 많은 낭두들이 당하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염장>공이 그들을 가리키며

 

" 이 무리들은 모두 내가 거느리는 바이다.

나를 믿고 너에게 불순하니 죄를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한다.

너는 심한 자를 매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 불순하는 자가 없으며 신 또한 처벌할 뜻이 없습니다.

단지 풍월주 형이 노하신 것은 말이 누차 귀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형의 노함이 조금 가라앉으면

곧 신은 마땅히 모두 제자리에 임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염장>공이 웃고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 진실로 나의 좋은 부제이다.

나는 이미 선종(仙宗)이 보통 풍월주들과 같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낭도들은 본래 너의 집안의 무리이니 어찌 파가 있겠느냐.

이 무리들이 모두 너의 종(奴)들이니 또한 걱정스럽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낭두들이 모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죽을 죄를 지었으니

부주(副主)를 위하여 목숨을 바차기를 원하였다.

 

공이

 

" 너희들은 죄가 없는데 쫒겨났다.

내가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각자 돌아가서 기다려라." 라고 하였다.

 

낭두들이 기뻐하며 물러났다.

 

<염장>공 또한 크게 기뻐하며 공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며

 

" 첩으로 삼을만한 어리석은 딸들이 있으니 네가 택해 보아라." 라고 하였다.

 

곧 서녀(庶女) 세 사람을 나아가 공에게 절하게 하였다.

 

 

공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 신의 어머니가 매우 엄하여 감히 스스로 택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염장>공이 칭찬하며

 

" 이 같은 아들이 있으니 어머니는 걱정할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곧 세 딸에게 명하여 손수 만든 옷을 공에게 바치고 애교를 부리게 하였다.

 

공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거두어 돌아왔다.

 

모두가 <염장>공의 첩인 가야파 낭두 딸들의 소생이다.

 

<염장>공은  17명의 첩이 있었다.

 

진골정통파가 5명, 대원신통파가 4명, 가야파가 8명이었다.

 

모두 낭두의 딸이었는데 서로 총애를 다투어 구걸하였다.

 

<예원>공이 여러 차례 <염장>공의 부름을 받고 당(堂)에서 배알을 하면

<염장>공은 첩을 품고 앉아서

 

"아무개는 실은 이 첩의 오빠이다.

너는 나를 위하여 그를 보호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장차 첩들 때문에 곤란하여 고생하다가 죽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본래 사사로움이 없는데 첩들이 그냥 두지않으니 어쩌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은 따뜻한 말로 사정을 아뢰어 올리고 물러났다.

 

<염장>공은 공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 첩에게 말하기를

 

" <예원>은 비록 어리나 의리가 있다.

너희들은 나를 강요하여 체면을 잃게 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첩들은 <예원>공이 어머니에게 효성스러운 것을 알고

값비싼 뇌물로 공의 어머니 <만룡>낭주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만룡> 또한 모두 어루만지고 순종케 하는데 마음을 씀이 실로 많았다.

 

<만룡>은 평소에 <미실>의 딸 <난야蘭若>궁주와 잘 지냈다.

 

그 딸 <우야雨若>공주는 진평제의 소생인데

<만룡>은 공에게 아내로 맞을 것을 명하였다.

 

공 또한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서로 화합한 것이

마치 아교나 옻으로 붙여 놓은 것 같아서 첩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장>공이 그 딸을 첩으로 삼아주기를 너무 절실히 원하였음으로

서로 사이가 나빠질까 염려하여 <만룡>이 취하기를 권하였고 <우야> 또한 권하였다.

 

공은 부득이 <염장>공의 딸 <찰기察己>를 첩으로 삼았다.

 

곧 가야낭두 <찰인察忍>의 딸 소생이다.

 

공의 부제 <선품善品>공 또한 <미실>궁주의 딸 <보화寶華>공주의 소생이다.

 

<보화>는 <난야>와 어머니가 같고 <우야>와는 아버지가 같다.

 

 

설원(미실) - 난야(570?- )

백정(미실) - 보화(582?- )

백정(난야) - 우야(608?- )

구륜(보화) - 선품(609-643)

 

 

그러므로 제(帝)가 <예원>공을 사랑함이 유달리 심하였다.

 

공은 선품보다 두 살이 많았다.

 

뜻과 취향이 서로 맞아 마침내 형제가 되었다.

 

은혜와 사랑함이 날로 두터워지자 문득 끌어들여 화제(花弟)로 삼고

거취를 같이 하였다.

 

<선품>은 대원신통파인 까닭에 낭도 중에 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정색을 하며 거절하였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그 때 가야파인 <진주眞珠>공이 오랫동안 좌방화랑으로 있었으나

풍월주가 되지 못하였는데 어떤 자가 그에게 물려 줄 것을 권하였다.

 

비보(덕명) - 진주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 <진주>는 나의 형이다.

어찌 형에게 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물러 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진주>는 이에 화랑을 물러나 병부에 들어갔다.

 

공과 <선품>은 더불어 낭정을 수행하였는데 3파를 균등하게 등용하여

중망을 크게 만족시켰다.

 

선도는 <보종>을 따르고 무도는 <유신>을 따랐다.

 

<예원>공은 풍월주에 3년간 있다가 <선품>공에게 물려주고 예부로 들어갔다가

조부로 옮겼다.

 

선덕대왕이 총애하여 내성사신으로 발탁하였다.

 

대왕이 죽자 물러나 양진(養眞)을 행하였다.

 

그 때 <춘추>공이 장차 당나라에 들어가려 할 때

문장 잘 하고 풍채 좋은 사람을 선발하려 하였다.

 

선화 3인, 승려 3인이 따라가기 때문에 그들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마땅한 사람을 선발 할 수 없었다.

 

<흠순>공이

 

" 우리 <예원>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라고 하니

<춘추>공이 크게 기뻐하며 선발하였다.

 

공이 한가롭게 있으려 하여 사양하니 <춘추>공이 말하기를

 

" 이 같은 유사시에 어찌 한가로이 살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따랐다.

 

조정에서는 당나라 사람들이 색을 좋아한다고 하여 유화 3인을 뽑아 꾸며 태우고

거짓으로 종실 여자라고 이르게 하였다.

 

공이

 

" 색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도가 아닌데 하물며 골품을 속이는가" 라고 하며

따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막으며

 

" 인명은 지극히 중한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때 <양도良圖> 또한 선화로서 같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다투어 말하기를

 

모종(양명) - 양도(610-670?)

 

" 형은 여자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공(主公)을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위험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 위험하면 함께 위험하고 편안하면 함께 편안하여야 한다.

어찌 사람을 죽여 삶을 꾀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바람이 고요하여졌다.

 

사람들은 해신(海神)이 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생각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공이 <원광圓光>의 조카로서

문장을 잘 한다고 존중하였다.

 

<유향柳享>이 신선(神仙)의 도에 대하여 물었다.

 

공은 <보종>이 그 도를 능히 얻었다고 답하였다.

 

또한 연서(燕書)에 대하여 물었느데 공이 암송하여 주었다. 

 

또 우리나라의 혼인하는 도에 대하여 물으니 공이 신의 뜻에 따른다고 답하였다.

 

어떠한 신이 시조냐고 묻자

 

" <일광日光>의 신이다." 라고 하였다.

 

 

<유향>이 묻기를

 

" <일광>과 금천(金天)씨가 같은가?" 라고 하였다.

 

 

대개 전에 왔던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금천씨를 조상으로 삼는다고 한 때문일 것이다.

 

 

공이 반문하기를

 

" 금천씨가 어떻게 신이 되겠는가?" 라고 하니 <유향>이 답을 할 수 없었다.

 

 

또 당나라 재상이 묻기를

 

" 너희 나라와 백제는 서로 혼인을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서로 다투는가?"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백제가 고구려에 쫒겨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우리 나라가 군대와 땅을 빌려 주어 보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에게 신하로서 의지하였는데 점차 안정이 되자

도리어 우리 땅을 하였다.

또한 가야는 본래 우리의 부용국이었고 지금은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백제가 그 서쪽 땅을 빼앗고 돌려 주지 않는다.

대개 탐욕스럽고 도가 없다.

그러므로 천병(天兵)을 얻어 토벌코자 한다." 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너의 나라에서 건원칭제(建元稱帝)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멀리 상고(上古)부터였다.

먼저 온 사신이 법흥왕부터 시작 되었다고 대답한 것은 문자 사용을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가야가 너희 나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너희 나라가 가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어느 것이 옳으냐?"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우리 나라는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에 섰고. 

가야는 한(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AD 42)에 섰으니 

누가 옳은지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신라는 삼한을 통일하자 신라건국년도를 1갑자 정도 끌어올렸다.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하면서 신라건국년도를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당나라의 재상이 옳다고 하였다.

 

돌아올 때 당나라 사람들이 유화가 말이 통하지 않고 풍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우나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유화도 함께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종자(從者)가 그들을 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어찌 버릴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도중에 적병이 있는 곳을 지날 때 <온군해溫君解>로 하여금

<기신紀信>의 계책을 쓰게 하여 벗어났다. 

 

 

※ 참고  <기신紀信>의 계책

 

<기신紀信>은 한(漢) 고조의 신하인데

고조가 하남성 영양(榮陽)에서 <항우>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기를 희생하여 그를 구해 낸 사람이다.

고조의 수레에 타고 초군(楚軍)을 속여 마침내 고조를 대신하여 죽었다.

 

 

공으로 작(爵)이 오르고 다시 품주가 되었다가 2년 후 예부의 영(令)으로 나갔다.

 

이어 이부(理府)의 영(令)이 되었다.

 

여러차례 요직에 있었으며 품이 이찬에 이르렀다.

 

문무제 13년(673) 집사부의 대등으로 있으며 관아에서 죽었다.

 

나이가 67살이었다.

 

제(帝)가 슬퍼하여 상대등의 예로써 장사지내 주었다.

 

오호! 성인은 진실로 수(壽)를 누리지 못하는구나.

 

공의 덕으로서도 상수(上壽)를 누리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공은 우리나라의 혼인의 도를 부끄럽게 여겨 신의 뜻에 따른다고 대답하고 돌아와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으나 관습이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웠다.

 

항상 걱정하였다.

 

자손들에게 다시는 나쁜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공의 아들 <오기吳起>공이 사촌 누이 <운명雲明>을 아내로 맞이 하였다.

 

보리(만룡) - 예언(우야) - 오기(633- )(운명) - 대문

보리(만룡) - 보룡(선품) - 운명

 

공이 노하여 보지 않았다.

 

<흠순>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선품>의 딸이니 네가 마땅히 자식으로 여겨야 하는데

도리어 노여워하니 무슨 일인가 산 자는 불안하고 죽은 자는 원망할 것이다.

네가 그것을 살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공은 부득이 허락하였다.

 

<운명>은 곧 <대문大問>의 어머니이다.

 

<대문>을 낳자 공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 하늘의 뜻이구나.

아니면 <선품>이 이 손자를 점지하려고 너희들을 사랑에 빠지도록 하였느냐."

라고 하였다.

 

마침내 다시는 혼도(婚道)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공의 딸 <온희溫喜>는 <춘장春長>공에게 시집갔고

<성희星喜>는 <원수元帥>공에게 시집갔으며

서녀는 <찰희察喜>, <찰연察燕>, <찰미察美>, <찰해察亥>이다.

서자인 <찰덕察德>, <찰원察元>은 모두 출세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선화(仙花)의 으뜸이요 문장이 뛰어났다.

 

청빈한 호덕(好德)은 나라를 위하여 다 바쳤네.

 

신선을 물으려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이며 성현을 물으려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인가.

 

 

 

 

 


(21세) <선품善品>공은 <구륜仇輪>공의 아들이다.

 

<예원>공을 따라 화랑도에 들어갔다.

 

용모가 절묘하고 언행이 매우 아름다웠다.

 

문장을 좋아하고 선불(仙佛)을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높은 골품의 인물이다.

 

<예원>공이 누이 <보룡寶龍>을 처로 삼게 하여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었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며 한결같이 <예원>공의 제도를 따랐다.

 

부제인 <양도良圖>공에게 풍월주를 전하여 주고

<예원>공을 따라 내성(內省)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 예부에 올랐다.

 

인평(仁平) 10년(643)에 왕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고 돌아와서 곧 죽었다.

 

나이가 35살이었다.

 

왕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작을  올렸다.

 

삼모진(사도) - 구륜(보화) - 선품(609-643)<풍월주 634-637>

 

후에 공의 딸 <자의慈義>가 문무제의 후(后)가 되자 파진찬으로 추증하였다.

 

선품(보룡) - 자의(630?- )

                  운명(634?- )

                  야명(636?-)

                  순원(640?- )     

 

공의 차녀 <운명雲明>은 <예원>공의 아들 <오기吳起>에게 시집갔다.

 

예원(우야) - 오기(633- )

 

3녀 <야명夜明> 또한 문무제를 섬겨 궁주가 되었다.

 

외아들인 <순원順元>은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처음 공이 죽고 <보룡>이 혼자 살았다.

 

그 때 문명태후가 <선원仙元>전군을 낳고 <보룡>에게 젖을 먹여 줄 것을 청하였다.

 

춘추(문희) - 선원(644?- )

 

문무제가 이로써 <보룡>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하였다.

 

644년경 법민 19세, 보룡 43세?이다.

 

<보룡>이 제(帝)에게 장녀를 허락하고 스스로 여승이 되었다.

 

장녀 자의 15세?이다.

 

제(帝)가 애석하게 여겼다.

 

문무가 태자가 되자 <보룡>의 딸 <자눌慈訥>을 비(妃)로 삼아

궁을 세워 자의(慈義)라 하고 <보룡>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감(監)이 되도록 하였다.

 

<순원>은 이로써 궁중에서 자랐으며 <선원仙元>과 <당원幢元> 전군과 더불어

같은 예로 작이 올라가니 영화와 행운이 지극하였다.

 

법민(보룡) - 당원(645?- )

 

사람들이 모두 일러 공의 음덕을 누린 것이라 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보화>의 아들이고 진흥대왕의 손자이다.

 

녹이 있으나 받지 않아 복이 자손에 미쳤다.

 

 

 

 

 

 

 

(22세) <양도良圖>공은 <모종毛宗>공의 아들이다.

 

<선품>공보다 한살이 적었다.

 

모종(양명) - 양도(610- )<풍월주 637-640>

 

 

처음 <염장>공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나이 겨우 12살에 상하의 예를 알았다.

 

<흠순>공 때에 이르러 <예원>공에게 속하도록 명하였다.

 

<선품>공이 풍월주가 되자 <예원>공의 명으로 부제가 되어 <선품>공을 섬겼는데

힘을 다하여 받들고 순종하였다.

 

풍울주가 되자 전횡이 많아 당시 사람 중에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공의 성품은 사람 섬기기를 잘 하고 일의 추이에 밝았다.

 

부처를 숭상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공명을 중히 여겼다.

 

문장을 잘 하였고 격검에 능하였다.

 

늘 강개하여 천하를 말하니 마치 한 세대의 영웅과 같았다.

 

상선들에게 몸을 굽혀 존경을 표할 때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재롱을 떠는 것 같아서 윗사람들의 기분을 다 맞추었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어머니 <양명良明>공주는 진평대제의 딸이다.

 

백정(보명) - 양명(579?- )

 

제(帝)는 공의 총명함을 사랑하여 늘 궁중에 불러들이고 내사(內賜)를 많이 하였다.

 

공은 스스로 가지지 않고 번번이 공주에게 바쳐 동기들과 고르게 나누었다.

 

<양명>공주는 처음에 <미실>궁주를 위하여 그의 아들 <보종>공에게 시집가서

딸 <보라宝羅>와 <보량宝良>을 낳았다.

 

보종(양명) - 보라(602?- )

                  보량(604?- )

염장(양명) - 장명(608?- )

모종(양명) - 양도(610- )    

 

<보종>공이 내사(內事)를 좋아하지 않아 부제인 <염장>공과 사통하여

아들 <장명長明>을 낳았다. 

 

그 때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하종夏宗>공의 아들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에다 재주가 있어 <보종>공이 자기처럼 사랑하였다.

 

세종(미실) - 하종(564- )(미모) - 모종(584?- )

설원(미실) - 보종(580- )

 

문장과 화법(畵法)을 가르쳤는데 공주 또한 더불어 같이 배웠다.

 

하루는 공주가 꿈에 난새의 상스러움을 얻고 길조라 여겨 <보종>공에게 말하고

<보종>공을 끌어당겼다.

 

<보종>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길조가 어찌 홀로 나에게만 있느냐" 하고는 반듯이 누워 자 버렸다.

 

그 때 <모종>공이 옆에서 묵화를 그리다가 갑자기 옷이 더럽혀졌다.

 

공주가 이에 이끌어 그 옷을 빨아 주었다.

 

마침내 더불어 사랑하여 공을 낳았다.

 

대개 <보종>공이 공주의 마음이 <모종>공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벼루를 발로 차서 사랑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모종>공은 공주보다 5살이 적었다.

 

공주는 지극히 사랑하여 제공(弟公)이라고 불렀다.

 

공이 태어나자 <보종>공은 <양도良圖>라 이름지으며 말하기를

 

" 그림은 제공(弟公)의 아들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주가 기뻐하며 그 이름을 허락하였다.

 

공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7살에 이름을 지은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대답할 것이 없어 숨겨서 말하기를

 

" 네가 그림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분발하여 힘써 그림을 그렸다.

 

진도(陳圖)를 잘 그렸는데 병장기가 매우 정밀하였다.

 

따라서 일을 하는 것도 몹시 치밀하였다.

 

마침내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공주는 <보종>공을 지아비로 하고, <염장>공과 <모종>공을 사신(私臣)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늘 <모종>공을 숙공(叔公)이라고 불렀다.

 

커서는 곧 친아버지인 것을 알고 더욱 존경하고 효를 다하였으며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효도하였다.

 

<모종>공이 말하기를

 

" 너는 실제로 나의 아들이지만 적(籍)은 선부(仙父)를 이었으니

사랑을 나누지 않는 것이 옳다." 라고 하였다.

 

대개 <보종>공이 공을 사자(嗣子)로 삼은 까닭이다.

 

공은 그러므로 형 <장명長明>을 뛰어넘어 먼저 낭계(郞階)에 발탁되었다.

 

공이 그 형을 걱정하여 양보하려고 하자 <염장>공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 집과 나라에는 모두 사자(嗣子)가 있으니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비록 형에게 우애롭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죄를 얻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명>에게 형으로 처신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장명>은 이에 몸을 굽혀 공을 섬겼다.

 

공은 한층 더 효도를 하고 우애를 다하였다.

 

<염장>공 섬기기를 또한 아버지에 대한 도리로 하였다.

 

처음에 <장명>의 손위 누이 <보량>이 진평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아

전군인 <보로寶路>를 낳았다.

 

백정(보량) - 보로(620?- )

 

<승만僧滿>后가 질투를 하여 물러나 살 것을 명하고

장차 종신(宗臣)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보량>은 평소에 공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원치 않았다.

 

공주가 이에 제(帝)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 만약 <보량>으로 하여금 <양도>를 배필로 맞게하면

곧 <보종>의 혈통을 이은 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帝)가 허락하였다.

 

<보종>공 또한 원하였다.

 

공은 본디 동기간에 서로 결합하는 풍습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았다.

 

<보량>이 그 때문에 병이 생겼다.

 

공주가 성을내어 책망을 하니

 

"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이족(夷族)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기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주는 이에 공을 감싸안으며 말하기를

 

" 참으로 내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에 <보량>을 처로 삼아 아들 <양효良孝>를 낳았다.

 

양도(보량) - 양효(630?- )

 

공은 <보량>을 처로 대우한 적이 없고 섬기기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보량>이 노하여 말하기를

 

" 너는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랑하지 않느냐?

너와 내가 같이 산 지 3년이며 이같이 아름답고 예쁜 아들을 낳아

부모가 매우 기뻐하고 내가 너를 잠시라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너는 한결같이 나를 누나로 섬기고 존경한다. 

내가 불상도 신상도 아닌데 공경은 무엇때문에 하느냐?

너는 듣지 못했느냐, 백말의 공경은 한 되의 사랑만 못하다는 것을

부부 사이에 공경은 해서 무엇 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공이 웃고 <보량>을 감싸안으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 같은 굴에서 생사를 하는데 어찌 사랑을 하지 않을 까닭이 있습니까.

제가 듣기를 큰 사랑은 공경하기를 신과 같이 하고

작은 사랑은 희롱하기를 옥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큰 사랑으로 그대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그대를 큰 누나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보량>은 이에 스스로 부끄러워 사과하고 공을 섬기기를 임금과 같이 하며

감히 외설스런 일로 공 앞에서 희롱하지 않고 말하기를

 

" 나의 지아비는 천하에 훌륭한 사람이다.

여자가 되어 이러한 사람을 섬기다 죽으면 더 큰 영광이 없다." 라고 하였다.

 

비록 한겨울이나 한더위에도 반드시 몸소 음식을 조리하여 공의 입맛에 맞추었으며

조그만 아픔과 작은 병도 걱정하며 정성을 다했다.

 

늘 보도(寶刀)를 지니고 다니며 따라서 죽을 뜻을 품고 있었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스스로 아름다움이 쇠하였다고 생각하여

<능보能寶>를 뽑아 화주(花主)로 삼으려 하였다.

 

<능보>는 본디 <보량>의 침비였는데 승진하여 난방(暖房)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 나는 선부(仙父)의 사자(嗣子)로 혈통을 얻었는데 진골정통은 그대에게 있다.

그대가 화주가 아니면 내가 어찌 풍월주가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보량>은 이에 기쁘게 화주의 지위에 올라 공과 더불어 축하를 받았다.

 

그 때 공의 나이는 28살이었고 <보량>의 나이는 34살이었다.

 

공은 낭정을 <보량>에게 많이 맡겼으나 큰 일은 스스로 맡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화주가 집정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공이 실제로 큰 낭정을 결정하였다.

 

풍월주가 된 후 처음에 낭두 7급을 9급으로 하였다.

 

국초에 서민(庶民)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

 

13,4살에 동도(童徒)가 되었고 18,9살에 평도(平徒)가 되었으며

23,4살에 대도(大徒)가 되었는데 대도 중 입망자(入望者)는 망두(望頭)라고 하였다.

 

공과 재주있는 자를 천거하여 신두(臣頭)로 삼았다.

 

신두는 낭두가 될 수 없었고 오직 망두만이 낭두가 되었다.

 

대두가 30살이 되면 곧 병부에 속하거나 또 농공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長)이 되었다.

 

입망의 법에는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가 아니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낭두의 처들은 임신하면 곧 산 꿩을 예물로 하여 선문(仙門)에 들어가

탕비(湯婢)가 되었는데 몇 날 또는 몇 달 만에 잠자리 시중을 들게되면 물러났다.

 

물러날 때 그 남편은 재물을 들여 예를 갖추고 맞이하였다.

 

이름하여 사함(謝函)이다.

 

아들을 낳아 석 달이 되면 다시 돌아가는데 양과 돼지를 예물로 하였으며

세함(洗函)이라 하였고 몇 날이나 몇 달만에 잠자리 시중을 들게되면 물러났다.

 

그 남편은 또 사함을 하여 맞았다.

 

이로써 낭두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곧 그 재산이 기울게 되었다.

 

경박한 여자는 선문에서 놀고자 임신하였다고 거짓으로 칭하고 들어가

탕비가 되었는데 임신이 안 될까 염려하여 선문의 예졸(隸卒)들과 사통하거나

혹은 선종(仙種){화랑의 아이를 갖는 것}을 얻어 돌아가니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공이 비로소 입망의 법을 개혁해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하였다.

 

낭도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낭두에 낭두(郞頭), 대낭두(大郞頭), 낭두별장(郞頭別將),

상두(上頭), 대두(大頭), 도두(都頭)의 등급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공이 그 위에 대도두(大都頭), 대노두(大老頭)를 더하였다.

 

도두 이하는 각기 별장을 두어 그 벼슬길을 넓혔고 지위를 높였다.

 

낭두의 딸은 모두 선문에 들어갔는데 이름하여 봉화(奉花)라 하였다.

 

위로부터 잠자리 시중을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투어 청례(靑禮)를 하기 위하여 아양을 떨었다.

 

잠자리 시중을 받은 자는 봉로화(奉露花)라 하였고

아들을 낳은 자는 봉옥화(奉玉花)라 하였다.

 

 

옥로(玉露)가 아니면 낭두에 새로 오른 자들이 처로 삼지 않았다.

 

대개 처로 인하여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봉화는 청례를 하지 못하면 선문에서 늙어 예졸들에게 떨어졌다.

 

공은 이에 청례와 옥로의 폐단을 금하였다.

 

서민의 딸들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속하여 유화(遊花)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공이 또한 그 폐단을 바로 잡으니 향리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선문의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자들 중에는 전횡한다고 생각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염장>공이 이를 걱정하여 공에게 지나치게 빨리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공이 직간하여

 

" <미생>공은 마복자가 수 십인이었는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부주(父主)께서는 마복자가 백 인이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염장>공이 웃으며

 

" 저들이 좋아 요구하였으니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물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

순리대로 하면 되고 서두르면 물이 샌다." 라고 하였다.

 

그 때 도두 <세기世己>의 처 <도리道里>는 어려서부터 아리땁다는 명성이 있었다.

 

<염장>공의 두 아들을 낳고서 <세기>의 처가 되었다.

 

<세기>보다 12살이 많았다.

 

<세기>를 노복과 같이 보아서 그 뜻에 맞지 않으면 <세기>를 매질하였는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세기>에게는 첩이 셋 있었는데 첩이 아들을 낳으면 <도리>가 질투를 하고

철기(鐵器)로 <세기>를 난타하여 <세기>는 일어나서 낭무(郞務)를 볼 수 없었다.

 

공이 노하여 <도리>를 잡아다 막 볼기를 치려 하는데 <도리>가 말하기를

 

"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曉長>과 <유장劉長>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법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노하여

 

" 너의 죄는 곤장 3대에 해당하나 너의 말 때문에 곤장 3대를 더한다."라고 하고

그 치마를 내리고 묶었다.

 

<보량>이 간하여 말하기를

 

" 염부(廉父)가 알면 마음이 상할까 염려됩니다.

우리들이 어찌 지위로써 사람을 다스리고 도리어 불효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이 사람을 다스리지 않으면 많은 사람을 징계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이에 <세기>를 불러 꾸짖기를

 

" 사람의 지아비가 되어 처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너의 죄는 파면해야 마땅하다.

너의 처를 곤장치려 하였는데 화주(花主)가 중지시켰으니

마땅히 너를 파면함으로써 너의 처를 징계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도리>는 <세기>가 파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 첩이 볼기를 맞을 것이니 지아비를 파면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부부의 의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만약 네가 <세기>를 나와 같이 섬기고 방자한 행동을 않는다면

당연히 볼기맞는 것을 면하고 너의 지아비를 보호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도리>가 이로써 그 지아비에게 굴복하여 방자함이 변하여 순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첩들에게 강새암을 하지 않았다.

 

그 밖에 다른 낭두의 처들도 모두 선(仙)을 믿고 지아비에게 방자할 수 없게 되었다.

 

낭두들이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 신주(新主)의 덕화가 안방까지 깊이 미쳤다." 라고 하고

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공은 실제로는 색을 좋아하여 낭두의 처들이 공의 아들을 많이 낳았으며

폐신 <찰의察儀>가 위로 <보량>을 범하는데도 금하지 않았다.

 

낭두들이 사사로운 정으로 많이 일어나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낭정(郞政)의 일이 전횡에서 많이 나왔다.

 

상선(上仙)들이 운상(雲上)에서 의논을 하고 3파가 막하(幕下)에서 다투었다.

 

공은 이에 <보량>에게

 

" 무리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파리를 쫓고 풀을 뽑는 것과 같다.

오래지 않아 통제함이 없어 질 것인데 어찌 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에 <보량>이 웃으며

 

" 낭군은 무리를 다스리는 데는 능하나 스스로는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 또한 웃으며

 

" 누가 나의 처를 강새암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나는 낭정에서 물러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부제인 <군관軍官>에게 물려주며 말하기를

 

" 너는 능히 정중하여 자제력이 나보다 뛰어나다." 라고 하였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면서 오래 된 폐단을 개혁한 것이 많으니

어찌 공이 없다 하겠는가.

 

공의 사랑하고 미워함은 심히 치우쳐

마음 속에 성이 나면 종신토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아랫 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공이 풍월주에 오를 때 <문충文忠>과 <선제善祭>등이 모두 부제의 지위를 다투었는데

공이 홀로 <염장>공의 아들 <윤장閏長>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윤장>의 누이 <춘화春花>가 공의 애첩이었으므로 <윤장>은 나이가 어리고

경박하여 총애를 믿고 법을 어기기를 여러 번 하였다.

 

<염장>공이 명하여 부제를 그만두게 하였다.

 

<문충文忠>, <선제善祭>, <천진天眞>, <하장夏長> 등이 다시 부제 자리를 다투었다.

 

공이 홀로 <군관>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여러 상선(上仙)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명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 <보현>궁의 사손(嗣孫)이 부제가 되지 못한다면 곧 누가 될 수 있습니까?" 라고 하고

 

곧 그 첩인 <천운天雲>을 <군관>의 처로 삼아서 뜻을 공고히 하였다.

 

처음에 공과 더불어 <군관>의 누이 <명란明蘭>이 사통하였는데

공이 이미 <보량>을 아내로 맞이하였기에 <명란>이 <장명長明>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장명長明>이 공만 못하여 그 어머니 <석명昔明>을 원망하였다. 

 

<석명昔明>은 곧 <양명良明>의 이부형(異父兄)이었다.

 

<군관>은 이에 <장명>을 설득하고 <명란>을 공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공은 이에 <군관>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겨 발탁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여 말하기를

 

" 남의 부인을 첩으로 삼고 중매한 자를 발탁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관>이 침착하고 중후하고 커다란 지략을 가지고 있어

위아래를 다스릴 수 있었으니 공의 현명함이 어찌 <명란>에게 구애를 받았겠는가.

 

이로써 <군관>은 공을 받들기를 하늘과 같이 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서로 도왔다.

 

<군관>은 용기가 있어 전쟁을 잘 하였기에

공의 훈업 또한 <군관>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일찍이 당나라에 사신을 가다가 도중에 점쟁이를 만나 점을 친즉 말하기를

 

" 두 공은 모두 장상(將相)의 운을 가졌습니다.

단 비명에 죽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웃으며

 

" 대장부가 말가죽으로 송장을 싸야지 아녀자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당연하다." 라고 하였다.

 

공은 과연 당나라의 옥에서 죽었다.

 

<군관>은 점이 신통하게 맞는 것을 보고 소심해져서 조심하다가

마침내 <흠돌欽突>의 난에 연루되어 명을 받고 자살하였다.

 

아! 성하고 쇠하고 막히고 통달하고가 문득 또한 운명이구나!

 

공은 일곱 명의 아들과 ?명의 딸이 있었으며 서자녀는 각기 10여 명이 있었다.

 

<군관> 또한 공의 누이 2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 18인을 두었는데

<흠돌>의 옥사에 많이 연루되었다.

 

공의 처 <보량>은 공이 전사한 것으로 잘못 듣고 칼로써 자결하였다.

 

공의 세 아들과 두 딸은 절의 노비가 되었다.

 

대개 공의 가풍을 알 수 있다.

 

 

찬하여 말한다.

 

미실의 후예이고 진평의 손자이다.

 

나라를 위한 간성(干城)이 되어 공은 하늘과 땅을 덮었다.

 

어려움에 임하여 몸을 던졌고 만리에서 만리에서 혼을 불러 장사지냈다.

 

대인은 기림이 없으니 천지와 더불어 남으리로다.

 

 

※ 흠돌의 난

 

 

1. 흠돌의 난 전모

 

681년, 신라 문무제 21년,

문무제가 나이 들어 병상에 눕자 자의황후는 급히 북원으로 사람을 보내

오기(吳起) 장군을 불렀다.

 

빨리 서라벌로 들어와 호성장군(護城將軍)의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호성장군은 ‘서울을 지키는 장군’ 즉 수도방위사령관 정도 되는 직책이다.

 

오기 장군은 자의황후 동생인 운명부인의 남편이자 외사촌 동생으로,

황후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라벌의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흠돌 일파가

무슨 행동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당시의 호성장군이던 진공은 흠돌과 같은 패였으므로

오기 장군에게 인수인계를 하지 않았다.

 

“주상이 병으로 누웠고, 상대등이 확인한 문서가 없는데

이 중요한 직책을 어찌 말만 듣고 가볍게 넘겨주겠습니까?”

 

정식 임명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기 장군도 황후의 지시만 듣고 왔으므로 주춤하였다.

 

 그 사이 문무제가 죽었다(崩).

 

흠돌 등은 서라벌 외곽 군대를 불러들여 난을 일으키려 획책하였다.

 

흠돌, 진공, 흥원 일파가 모의한 작전은,

 

“주상께서 돌아가시기 전, 인명 왕자를 차기 왕으로 지명하셨다!

상대등 군관과 각간 진복이 문무제의 밀조를 받았다!”

라고 선포하여 민심을 잡은 후, 새로운 왕을 세우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것이었다.

 

이때 이미 정비인 자의황후가 낳은 정명태자가 엄연히 있었지만,

흠돌은 야명궁주가 낳은 인명 전군을 옹립하여 이를 번복시키려 하였다.

 

<화랑세기>는 흠돌 자신이 왕이 되려고 획책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던 문제가 생겼다.

 

급박한 순간에 비밀이 새어나간 것이다.

 

흠돌 측에 있던 오기 장군의 심복인 낭두가 이 모의를 알아채고

오기 장군에게 뛰어와 알렸다.

 

오기 장군은 즉시 순지·개원·당원·원수·용원 등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급히 자기들의 사병을 거느리고 월궁으로 들어가

시위삼도의 대감(大監:책임자)을 모두 파면하고 궁을 점령해 버렸다.

 

오기 장군이 선수를 친 것이다.

   

 

* 순지 : 순원. 자의황후의 동생. 훗날 신라 정계를 휘어잡는다.

* 개원 : 개원 전군. 문명태후의 아들. 훗날 효소왕 대 상대등 역임

* 당원 : 당원 전군. 보룡궁주의 아들. 훗날 효소왕 대 중시 역임

* 원수 :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 장군의 아들.

 

이때 흠돌 일파는 야명궁과 상대등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야명궁에 인명 왕자가 있었기 때문이고

상대등 군관에게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등 군관은 이들을 도와주지 않고 미적거렸다.

 

오기 장군이 월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흠돌은 재빨리 군사를 돌려 월궁을 포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성 안팎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직 승자가 권력을 잡고 자기 위주로 역사를 쓸 것이다.

 

이때 흠돌이 고대하던 각간 진복이 나타났다.

 

진복은 흠돌의 일당 진공의 형이기도 하다.

 

그런데 진복의 행동은 전혀 딴판이었다.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나타나 월성을 에워싼 군사들의 포위를 깨고

궁안으로 들어왔다.

 

진복이 성안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지방의 병력이 크게 일어나 이쪽으로 오고 있다.

너희들은 적들에게 속았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흠돌 측 군사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흠돌의 말대로라면 상대등 군관과 각간 진복이 인명 왕자를 모시고

자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상대등 군관은 아무런 말도 없이 꿈쩍도 않고,

각간 진복은 오히려 자기들을 공격하지 않는가!

 

진복이 또 외쳤다.

 

“왕을 따를 자는 오른쪽에, 적들을 따를 자는 왼쪽으로 서라!”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병사들이 우루루 오른쪽으로 몰려선 것이었다.

 

흠돌 일파는 일이 틀려진 것을 알고 포위를 풀고 물려가려 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기 장군이 군사를 몰아쳐 대파하였다.

 

흠돌과 진공, 흥원은 도망쳤는데 오히려 자기편 군사들에게 잡혀 왔다.

 

세 명의 반란 주모자들은 처형당하였고,

얼마 후 상대등 군관도 반란 공모죄로 자살을 명받았다.

 

화랑 풍월주 출신들이 5명이나 연루되고 수많은 화랑, 낭도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자의황후는 화랑도의 폐지를 명하였다.

 

그후 오래된 풍속을 없앨 순 없다는 주위의 여론에 따라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만 허락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정명태자가 즉위하였다(신문왕).

 

 

2. 흠돌의 난 실패 결정적 이유

 

‘흠돌의 난’의 클라이막스는 단연 마지막 장면이다.

 

흠돌을 따랐던 군사들이 진복의 한마디에 등을 돌리고

급기야 도망치는 흠돌 등을 잡아, 오기 장군 측에 바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일으키는 반란이면

끝까지 자기의 주군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게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인데,

결국 흠돌이 속임수로 군사들을 이끌었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

 

그리고 반란 주모자들이 얼마나 엉성하게 모의를 획책했는지도 곳곳에 보인다.

 

아마 각간 진복과 상대등 군관에게는 평소에 잘 예우하며 충성을 다하였는 것 같다.

 

또 ‘정명 태자보단 인명 왕자가 훨씬 인망이 좋지 않습니까?’ 등으로

묵시적 동의만 얻은 걸 가지고 마치 거사를 하면

자신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것으로 착각하였지 않나 싶다.

 

반란이란 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는 건지 이들은 몰랐던 것 같다.

 

 

3. 흠돌과 자의황후의 악연

 

<화랑세기>에 의하면,

흠돌이 난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으로 자의황후와의 관계를 꼽는다.

 

흠돌과 자의황후는 어떤 사이였을까?

 

자의는 21세 풍월주였던 선품공의 부인이었던 보룡궁주의 딸이다.

 

매우 아름답고 정숙하였다.

 

흠돌이 자의를 첩으로 삼으려 했으나 보룡이 거절했다.

 

흠돌은 앙심을 품었다.

 

자의의 어머니 보룡은 남편 선품공이 일찍 죽자 과부가 되었는데

미모가 여전히 절색이었다.

 

문무제가 태자가 되기 전(법민 왕자 시절) 보룡을 좋아하자,

보룡은 장녀인 자의를 법민 왕자에게 바치고 자신은 여승이 되었다.

 

법민 왕자가 매우 애석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법민 왕자는 곧 자의의 아름다움에 빠져 사랑하였으며

태자가 되자 바로 태자비로 삼아 궁을 짓고(자의궁)

보룡을 입궁시켜 감(監)의 일을 맡겼다(보룡궁).

 

보룡에게는 자의, 운명, 야명 딸 셋과 순원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둘째 운명은 오기공에게 시집보내고 셋째 야명은 법민 태자의 후비로 들였다.

 

(외아들 순원은 나중 신라를 휘어잡는 정치 9단으로 자란다)

 

흠돌은 자의와 그 어머니 보룡을 미워하였다.

 

자의가 태자비가 되자 온갖 험담을 하고 다녔으며

보룡이 그 와중에 아이를 낳자(당원 전군) 더러운 여자라고 떠들었다. 

 

당원은 훗날 효소왕 때 중시(中侍)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흠돌이 감히 태자비와 선왕의 총애를 입은 궁주를 험담하고 다닐 수 있었던 건

그가 김유신 장군의 사위로써 문명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하무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점점 자의황후에 대한 문무제의 사랑이 깊어가자,

흠돌은 어리석은 계책을 쓰기 시작했다.

 

문무제의 어머니인 문명태후(태종무열왕비)를 찾아가

태자비를 폐하고 김유신의 3녀인 신광을 태자비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가

문무제가 반대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보룡궁을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고

자기 딸을 보룡의 아들인 순원에게 첩으로 들이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하였다.

 

보룡 가족들에게 잘 보이려 자의의 제부인 오기공에게 풍월주 자리를 물려주었다.

 

오기공은 풍월주가 되었다가 자기는 허수아비이고

모든 낭정을 흠돌 일파가 좌지우지하는 걸 알고 사임하였다.

 

마지막으로 흠돌은 자의의 여동생인 야명에게 접근하여

그녀가 낳은 인명 전군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여 야명이 부득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흠돌의 행태에 대해 자의황후는 속만 앓고 있었다.

 

그가 차지한 서라벌에서의 위세가 너무 커 감히 손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태후가 죽고 문무제가 죽었을 때

그녀가 취한 행동을 보면 얼마나 흠돌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는가 알 수 있다.

 

흠돌은 자신이 충분히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쓸데없이 ‘황후’를 미워하고 해코지를 하려고 하였다.

 

어리석은 자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4. 소명궁과 흠돌의 딸

 

흠돌과 자의황후의 악연 중 또 하나는

자의황후의 아들인 정명태자(훗날의 신문왕)의 비에 대한 문제였다.

 

내외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흠돌은

자신의 딸을 정명태자의 비로 들여앉히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정명태자에겐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김흠운이란 장군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흠돌의 형이다.

 

김흠운은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는데

둘째 딸이 자의왕후의 첫째 아들인 소명 왕자의 아내가 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명 왕자가 일찍 죽어버렸다.

 

흠운의 딸은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고

소명 왕자를 위해 제주(祭主)가 되기를 원했다. 청상과부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의황후는 이 여인에게 소명궁을 지어주고 와서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둘째 왕자인 정명 왕자와 자주 소명궁을 찾아와 위로하며 놀았다.

 

그 사이 정명 왕자와 소명궁이 정이 들고, 이공전군까지 낳았다.

 

* 왕이나 왕자가 정비가 아닌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전군(殿君)이라고 한다.

 

만약 왕비가 낳았는데 왕자가 아닌 전군이라고 칭하면

왕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아니란 뜻이다.

 

그후에 원수와 다름없는 흠돌의 딸이 비로 들어왔으니

흠돌의 딸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흠돌의 딸은 정비였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이 역시 흠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자의황후가 있는 한 흠돌의 후손 중에서 왕통을 보긴 어림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흠돌은 마음을 너그럽게 쓴 적이 없고 항상 욕심을 부렸으며,

더 많이 갖기 위해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을 줄 알았더라면 분명 자제를 하였을 것이다.

 

(흠돌의 난 이후 흠돌의 딸은 폐비가 되고 소명궁은 정식 왕비가 된다.

곧 신목황후이다. 이공 전군은 이공 태자가 되고 왕위에 오른다.[효소왕])

 

 

 

 

 

 

 

 

(23세) <군관軍官>공은 <동란冬蘭>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석명昔明>공주이니 진지제의 딸이다.

 

<양도>공보다 세살이 적었다.

 

금륜(보명) - 석명(576?- )(동란) - 군관(613- )<풍월주 640-643>

백정(보명) - 양명(579?- )(모종) - 양도(610- )<풍월주 637-640>

 

인품이 넉넉하고 후덕한 것이 <지소>태후의 전형(典型)이 있었다.

 

15살에 활을 잘 쏘았고 힘이 세서 당할 자가 없었다.

 

병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릇이 크다고 하였다.

 

<석명>이 말하기를

 

" 내가 해마(海馬)의 꿈을 꾸고 이 아이를 낳았다.

반드시 우리 집의 천리구(千里駒)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양도>공을 따라 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석명>이 일찍이 진평의 후궁으로 있을 때 <양명>과 더불어 함께 살며

삼생의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아들을 낳으면 함께 아들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석명>이 <양명>에게

 

" 우리 자매의 마음을 이 아들이 꿰뚫었다."라고 하고는

 

공에게 명하여 <양도>공과 더불어 삼생 형제가 될 것을 약속하게 하였다.

 

<양도>공이 지위가 오르면 반드시 공을 자기가 있던 자리에 이끌어 앉혔다.

 

그 때 <윤장閏長> 또한 <양도>공의 사랑하는 아우로서 공과 나란히 경쟁하였는데

공은 스스로 그 세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일마다 <윤장>에게 양보하였다.

 

<윤장>은 공과 같은 나이인데 한 달이 빨랐으므로 공은 형으로 섬겼다.

 

염장(하희) - 윤장(613- )

 

<윤장>은 색을 좋아하였고 재물을 탐하였으며

종녀(宗女)나 유화와 간음을 많이 하였는데 여자의 사사로운 말을 듣고

죄없는 사람에게 허물을 씌웠다.

 

소문이 궁중에 퍼졌다.

 

<염장>공이 그것 때문에 대죄(待罪)하였다.

 

<양도>공이 이에 공을 이끌어 부제로 삼고

<보량>과 더불어 앙정을 함께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보량>은 <양도>의 누나이다.

 

공은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고 한결같이 <양도>공의 마음 쓰는 법을 따랐다.

 

그 때 <양도>공의 폐신 <찰의察儀>가 미모로 아양을 잘 떨어 <보량>과 내통하고

전횡을 많이 하였다.

 

공이 검을 뽑아 참하려 하자 <찰의>가 낭하로 달려 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보량>이 말하기를

 

" 이 피라미를 죽이면 누(累)가 우리 부부에게 미칠까 걱정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찰의>는 감히 다시 낭정에 대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공의 성품은 주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사생활을 엿볼 수 없었다.

 

<보량>이 늘

 

" <군관>은 진정으로 우리 부부의 신하다." 라고 하였다.

 

선덕제가 일찍이 궁정의 연회에서 조용히 <보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 듣건대 너의 폐아(嬖兒)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이 과연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보량>이 대답하여

 

" 신이 듣건대 천자는 신하의 내사(內事)를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폐하가 굳이 물으신다면 신첩에게 한 명의 사신이 있으니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른 날 <군관>을 데리고 뵈었다.

 

대개 제(帝)의 뜻이 <찰의>에게 있었는데 <군관>을 뵈게 한 것이다.

 

제(帝)가 <군관>에게

 

"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무슨 재주가 있는냐?" 하고 물으니

 

<군관>이 답하기를

 

" 신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단지 마음 속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帝)가

 

" 네 마음 속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는가?" 라고 하자

 

<군관>이 말하기를

 

" 신은 <보량> 부처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고

<보량> 부처는 폐하를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

소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帝)가 그 착함을 칭찬하며 음식을 내리고 <보량>을 보며 말하기를

 

" 네가 데리고 있는 한 아이가 나의 열 아이보다 낫다.

잘 기르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처음에 <염장>공의 누이 <천장天長>낭주는 <수품水品>공에게 시집가서

딸 <천운天雲>을 낳았는데 <천운>은 경국지색이 있었다.

 

수품(천장) - 천운(614?- )

                  천광(616?- ) 

 

<천운>의 동생 <천광天光> 또한 얼굴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양도>공의 폐신이 되었다.

 

<양도>공이 마음으로 <천운>을 좋아하여 <천장>낭주에게 몸소 청하여 첩으로 삼고

사랑하여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보량>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공이 이에 처첩의 도로써 간하니 <양도>공은 <천운>을 공의 처로 삼도록 하였다.

 

공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천광> 또한  공에게 소속되었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양도>공이 <천광>을 부제로 삼으라고 명했다.

 

이에 공이

 

" 처의 동생을 이끌어 주었다는 여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하니

 

<양도>공이 말하기를

 

" 네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명령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부득이 <천광>을 부제로 삼고는 <천운>에게 말하기를

 

" 너는 화주가 되었고 너의 동생은 부제가 되었으니

낭도들이 반드시 내가 사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천운>이 웃으며

 

" 낭군 또한 주군의 첩의 동생이 아닙니까?

우리의 살갗 한 점, 머리털 한 오라기도 주군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주군의 명을 어길 수 있습니까?

낭군은 단지 조심하여 명을 받들면 됩니다.

그리고 <천광>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면 옳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 그대의 말이 옳다." 라고 하였다.

 

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재위하며 오로지 명 받드는 것을 주로 하여

한결같이 <양도>공의 구정(舊政)을 따랐으며

낭두를 쫓아내고 승진시킬 때 조그만 변화도 없이 부드럽게 지나갔다.

 

그런데 <양도>공의 낭정은 모두 <보량>에게서 나왔다.

 

<천운>이 비록 화주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빈 그릇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불평하는 낭도들이 노래를 지어 비방하기를

 

<보량>의 문 안에는 사람이 구름같고

<천운>의 집 위에는 흰 구름이 지나간다.

 

라고 하였다.

 

<천광>이 매번 <보량>이 사사로움을 행하고 낭두들이 불평하는 실상을 말하면

곧 <천운>이 꾸짖어

 

" 네가 감히 은혜로운 주군의 흠을 말하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천광>은

 

" 그 은혜를 갚고자 하기 때문에 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군관>공이 천천히 위로하여 말하기를

 

" 네 누나의 견해와 나의 견해가 같다.

머지않아 네가 풍월주가 되면 네 마음대로 하겠지만 

지금은 우리 부부의 흠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천광>은 감히 한 가지 일도 말하지 않았다.

 

공은 장엄하고 정중하며 큰 뜻이 있어 조그만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진노하면 천둥 번개가 이는 것 같았으나

마음은 실로 부드럽고 온후하여 부인을 감읍하게 할 수 있었다.

 

부부가 대단히 화목하여 역대의 풍월주들이 모두 낭두의 처와 딸들을 거느렸으나

공은 홀로 한 번도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지 않았다.

 

그 때 사람들이 노래하여 이르기를

 

천운은 높고 높아 인간의 비가 되기 어렵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공과 양공(良公)이 모두 선덕제를 입시(入侍)하여

작위를 뛰어넘어 받았기 때문에 식자들이 그것을 잘못으로 여겼다.

 

 

찬하여 말한다.

 

<보현>공주의 후손이고 금륜왕의 손자이다.

 

보현(482- )(모진) - 사실(입종) - 오종(비란) - 오란(동종) - 동란(석명) - 군관

금륜(보명) - 석명(동란) - 군관

 

<양도>공에게 한결같이 의지하였고 생사도 같은 근본이다.

 

빛나는 공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원통함을 머금었다.

 

오호! 푸른 하늘이여, 이 무슨 업의 뿌리인가.

 

 

 

 

 

 

 

(24세) <천광天光>공은 <수품水品>공의 아들이다.

 

수품(천장) - 천광(616- )<풍월주 643-647>

                  천봉(620?- )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

 

말은 친절하고 거동은 단아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협기가 있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자신의 뜻을 과감하게 실행하여 상선(上仙)으로 인하여 동요하지 않았다.

 

공은 나이 14살에 <흠순>공이 풍월주로 있을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양도>공이 보고 좋아하여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으며

그 아래에 소속되어 폐신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양도>공이 여러 번 공의 집에 와서 잤다.

 

공의 어머니 <천장>낭주는 곧 <염장>공의 누이로서 공의 누나 <천운>과 더불어

<양도>공을 맞이하여 밤을 새워 이야기하며 즐겼는데

날이 밝아 오는 것도 알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천운>은 마침내 <양도>공에게 시집을 갔다.

 

<양도>공은 <천장>의 은혜를 갚고자 <군관>공에게 공을 부제로 삼도록 명하여

공이 부제가 되었다.

 

<양도>공이 공에게 <춘화春花>의 누이 <윤화尹華>와 결혼하라고 명하여

공은 그녀를 아내로 삼았고 이에 이르러 <윤화尹華>는 화주가 되었다.

 

처음에 <윤장閏長>의 아우 <하장夏長>이 공과 더불어 부제가 되려고 경쟁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 때 이르러서야 <양도>공이 공에게 명하여

<하장夏長>의 아우 <춘장春長>을 부제로 삼았다.

 

<춘장春長>은 곧 <윤화尹華>의 오빠이다.

 

<윤화>의 어머니 <하희夏姬>는 곧 <하종夏宗>공의 딸이다.

 

그 어머니 <은륜銀輪>공주는 <사도思道>태후의 딸이어서 많은 사재(私財)가 있었다.

 

<윤화>가 그것을 얻어 공에게 시집을 갔기에

곤란한 사람을 도우는데 쓰기에 넉넉하였다.

 

<염장>공 이후 낭정이 가야파에게 많이 돌아갔으므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는

출세하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개탄하여 발탁하여 주었다.

 

<양도>공과 <군관>공 때에 낭두들은 <염장>공의 마복자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공이 그들을 많이 물리치며 말하기를

 

" 낭두는 낭정에 중요한 자들이다.

어찌 내 옹(翁)만이 홀로 중하고 낭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라고 하였다.

 

쫓겨난 자들이 모두 <염장>공을 찾아가 공의 허물을 말하니

 

<염장>공이 웃으며

 

" 너희들이 새 풍월주를 따르지 않는데 나 또한 어쩌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때 가야파의 우두머리 <찰인察忍>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아직 대노두로 있었고 처첩과 자녀가 백을 헤아렸으며

출입하고 거동하는 것이 완전히 상선(上仙)과 같았다.

 

그 아들인 <찰두察斗>와 <찰석察石>이 모두 도두가 되었는데

<찰두察斗>는 계해년(603) 생이고 <찰석察石>은 을축년(605) 생이다.

 

각기 첩이 수십 인이었다.

 

낭두들이 그 아들과 사위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대도두 <당보唐甫> 또한 <찰인>의 사위였으며

그 막내아들 <찰의察儀>가 <양도>공의 폐아(嬖兒)가 된 것 등,

그 권세를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찰인>의 처 <옥두리玉斗里>는 절색으로 역대의 상선을 섬긴 까닭에

높은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공은 본디 <찰인>을 미워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먼저 <찰인>을 파면시키고

진골정통의 구두(舊頭) <만덕萬德>을 대도두로 삼고 <당보>도 대노두가 되었다.

 

<당보>는 곧 <당두唐斗>의 아들로 대원신통파였다.

 

그러므로 가야파가 크게 놀라 다투어 상선에게 가서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은 우뚝 서서 들어 주지 않고 규칙을 새로이 정하였다.

 

대노두는 60살까지로, 대도두는 55살까지로, 도두는 50살까지로,

대두와 상두는 45살까지로, 낭두와 대낭두는 40살까지로 한정하였다.

 

별장(別將)은 각기 그 지위에 따르게 하였다.

 

사람은 3파를 고루 써서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였고

망두(望頭)는 재주와 그릇의 바탕에 의거하고 마복자를 논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신진의 문을 크게 열었다.

 

이로 인심이 크게 흡족하였다.

 

그 때 국사(國事)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하여 병부에 보충하였다.

 

공이 5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의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모반을 하였다.

 

<유신>공이 신주(新主){천관공}을 받들어 전쟁을 독려하였다.

 

그 때 경사(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하여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였다.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이 되었다.

 

<비담>의 난은 647년 선덕여왕 16년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난으로

선덕여왕의 진덕여왕 왕위계승을 빌미로 일으킨 난이다.

 

금륜(미실) - 비담(578?-647)

동륜(만호) - 백정(567-631)(마야) - 천명(583?- )(용수) - 춘추(603-661)

                                                   덕만(587?-647)

                  국반(571- )(월명) - 승만(590?-654)

 

승만은 덕만의 사촌 여동생이고 춘추는 덕만의 조카이다.

 

이때 비담 70세?, 선덕여왕 덕만 61세?, 진덕여왕 승만 58세?,

김유신 53세, 무열왕 김춘추 45세이다.

 

 

곧 풍월주의 지위를 부제인 <춘장>에게 전하여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며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중흥 28장수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공의 성품은 외유내강하고 사리를 분명히 살폈으며 사민(士民)을 사랑하고

구휼하여 옷을 벗어 주기도 하였다.

 

술은 즐겼으나 많이 마시지 않았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방사(房事)에 어지럽지 않았다.

 

<윤화>낭주가 자녀 7명을 낳았다.

 

공은 첩이 5명이었다.

 

<진수眞凁>는 <진복眞福>공의 누이이다.

 

<효월孝月>은 <효종孝宗>공의 딸이다.

 

<경화京華>는 <윤화尹華>의 동생이다.

 

<찰언察言>은 <찰의察儀>의 누이이다.

 

<만수萬水>는 <만덕萬德>의 딸이다.

 

각기 자녀가 있어 일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찰인>은 비록 그 지위를 잃었지만 딸을 공에게 바쳤고

공이 지극히 사심이 없는 것을 알았기에

감히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않고 그 자손을 타일러 말하기를

 

" 신주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영웅이다.

우리들이 어찌 일시의 잃음을 가지고 원망을 마음에 두겠는가.

기쁜 것은 이 훌륭한 선(仙)을 얻었으니 우리 외손을 낳아서 기르면

나의 집안이 또한 번창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3파가 화합하고 좋아하여 서로 혼인하고 모두 공의 덕을 칭송하였으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하여 말한다.

 

대원신통에서 나왔고 가야파에 들어갔다.

 

세 화랑을 도왔고 국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직 공의 맑은 덕은 만세에 바야흐로 빛날 것이다.

 

 

 

 

 

 

(25세) <춘장春長>공은 <염장廉長>공의 셋째 아들이다.

 

염장(하희) - 춘장(620?- )<풍월주 647-652>

 

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고 덕을 좋아하였으며 윗사람을 받드는데 지성으로 하고

자기의 뜻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천광>공의 누이 <천봉天鳳>낭주를 아내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

 

닝정은 한결같이 <천광>의 명에 의가하여 행하였고 <천광>공의 명에 의거하여

<찰두察斗>를 대도두, <만덕萬德>을 대노두로 삼았으므로

가야파의 세력이 점차 다시 창성하게 되었다.

 

부제 <진공眞功>은 <천광>공의 애첩 <진수眞凁>의 아우이다.

 

사린(호명) - 진수(620?- )

                  진공(622- )

 

공은 낭정을 <진공>과 <찰두>에게 맡기고

매일 낭주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낭주가 말하기를

 

" 내 오빠가 풍월주로 있을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바빴는데

낭군이 풍월주가 되고는 낮에도 일이 없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 바쁘다면 자체가 바쁜것이고 한가하다면 자체가 한가한 것이지

어찌 추호의 가감이 있겠소"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집에서는 근검으로 자제를 훈계하였다.

 

늘 낭주와 더불어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몰래 서울과 시골로 다니며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을 구휼하였다.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

 

풍월주로 6년간 있다가 <진공眞功>에게 물려주고 창부(倉部)에 발탁되어 들어갔다.

 

곧 집사부(執事部)로 옮겼는데 그 일이 맞았으므로 

여러 번 하여 중시(中侍)가 되었다.

 

공은 늘 스스로 겸손히 말하기를

 

" 나 같은 사람을 가히 일러 행운아라 한다.

한 가지 재능도 없이 부형과 상선들의 음덕에 의지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공적을 스스로 내세운 적이 없었다.

 

기상이 <천주>공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천장>이 늘 <천봉>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의 지아비는 아형(阿兄)을 닮지 않고 나와 몹시 닮았다.

너는 너의 아버지를 닮았고 너의 부부는 도리어 나의 부부와 흡사하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이 대개 빈 말이 아니었다.

 

공은 일찍이 <보종>공의 청결함을 사모하여 덕을 세우는 표준으로 삼고

틈이 생기면 반드시 화주와 같이 몸소 그 사당에 나아가 절하며 기도하고 돌아왔다.

 

<보량>을 섬기기를 어머니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여

청하는 것은 들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보량>은 이에 그 딸 <양시良時>를 공에게 주어 첩으로 삼았고

다른 잡스런 여자는 없었다. 

 

공의 행실은 선문의 사표(師表)가 될만하다.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하여 말한다.

 

<천주>의 후예로 이 같은 성인이 있다.

 

천주(지도) - 염장(하희) - 춘장

 

마음가짐이 깨끗하고 어질었다.

 

내조가 짝이 되어 아름답고 복록이 날로 새롭다.

 

 

 

 

 

 

 

(26세) <진공眞功>은 <사린思隣>공의 아들이다.

 

처음 <미실>궁주가 진흥대제를 섬겨 <반야般若>공주를 낳았다.

 

<천관>공은 <반야>공주의 적손이다.

 

또 <수종壽宗>전군을 낳았는데 후에 <사진思眞>으로 고쳤다.

 

그 아들이 곧 <사린思隣>이다.

 

그러므로 <진공>과 <천광>공은 제종 형제가 된다.

 

삼모진(미실) - 반야(568?- )(구륜) - 수품(천장) - 천광

 

삼모진(미실) - 수종(572?- )(호린) - 사린(호명) - 진공(622- )<풍월주 652-656>

 

<반야>가 일찍이 <수종>에게

 

" 어머니는 자녀가 많은데 같은 아버지의 형제는 오직 너와 나뿐이다." 라고 말하고

대대로 서로 저버리지 않기를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수품>공 또한 <사린> 사랑하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제처럼 하였다.

 

<사린>의 어머니 <호린好隣>은 곧 <호림虎林>공의 누님이다.

 

복승(송화) - 호린(576?- )

                  호림(579- )

 

<사린>은 처음에 <임종林宗>공의 대사(大舍)가 되었는데

<임종>공의 첩 <호명好明>과 득통하여 딸 <진수眞凁>를 낳았다.

 

<임종>공이 곧 <호명>을 <사린>의 처로 삼게 하여 <진공>을 낳았다.

 

<진공>은 문장에 능하였고 풍채가 있었고 기묘한 꾀를 좋아하였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였으며

또한 굳세고 용맹스러워 무리를 다스리기에 족했다. 

 

그러나 색을 좋아하였고 마음이 탐욕스러웠고 사사로운 비밀을 많이 행하여

인망을 얻지는 못했다.

 

<찰두>와 결탁하여 <찰두>의 딸 셋을 첩으로 삼았다.

 

또한 <찰두> 아들 <승昇>의 처 <대씨代氏>를 첩으로 삼았다.

 

찰(察)과 대(代) 양쪽의 처와 딸 중 아름다운 자들은 모두 색공 장부에 올랐다.

 

이에 앞서 <진공>과 <달복達福>공의 아들 <흠돌欽突>이 사이가 좋았다.

 

<흠돌>의 누이인 <흠신欽信>이 <보로寶路>전군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는데

아름다웠다.

 

<진공>과 <흠돌>이 꾀를 써서 <흠신>의 두 딸과 정을 통했으나

<흠신>과 <보로>전군은 알지 못했다.

 

<흠신>의 어머니 <정희政姬>는 곧 <유신>공의 누이인데

<진공>의 무례함에 노하여 <유신>공에게 고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흠돌>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찰의>에게 귀중한 뇌물을 주고

<보량>을 설득하게 하였다.

 

<보량>은 이에 알아듣고 <정희>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 폭로하면 단지 내 자녀가 상처를 입지만 감추면 곧 물방울처럼 없어질 것입니다.

어찌 생각을 깊이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정희>가 곧 멈추었다.

 

이 때부터 <진공>은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다.

 

양명(호륜) - 호명(사린) - 진공(622- )

양명(보종) - 보량(백정) - 보로(620?- )

서현(만명) - 정희(달복) - 흠돌(627-681)

                                    흠신(630?- )

 

<찰의>는 <보량>의 폐신이고 <보량>은 <진공>의 고모이다.

 

<흠신>은 또 <진공>이 출중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하여

<보로>를 버리고 <진공>에게 가려고 하였다.

 

<진공>은 이에 사람을 시켜 <보로>를 설득하기를

 

" <흠신>은 병이 있으니 버리고 좋은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다.

 

<보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유신>의 삼녀 <작광酌光>을 맞이하여 처로 삼았다.

 

<진공>은 이에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았다.

 

<흠돌>은 마음이 험악하고 간사한 꾀가 많아 사람들이 모두 꺼렸다.

 

그 때 가야파가 크게 성하여 찰씨(察氏) 일문에서 낭정을 모두 장악하였다.

 

<찰의>는 도두별장인데 대도두로 행세하였다.

 

<흠돌>은 <찰의>와 죽음을 같이할 친구가 될 것을 허락하고

<보량>과 득통을 하고 진덕제를 알현하였다.

 

제(帝)는 그의 작(爵)을 올려주고 총애하였다.

 

이에 앞서 <흠돌>은 <자의慈儀>의 아름다움을 듣고 <보룡寶龍>이 홀로됐음을

업신여겨 <자의>를 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보룡>이 막았다.

 

얼마 안 있어 <보룡>이 <당원幢元>전군을 낳았다.

 

선품(보룡) - 자의(630?- )

                  순원(633?- )

                  야명(636?- )

법민(보룡) - 당원(647?- )

 

<흠돌>은 사람을 시켜 <보룡>의 추함을 떠들게 하여 위협하였다.

 

대개 <보룡>에게 왕의 총애가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의>가 태자비가 되자 <흠돌>은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의>가 덕이 없다고 험담을 하여 궁지로 몰았다.

 

그 때 <흠돌>은 문명황후의 조카였다.

 

그러므로 권세가 내외를 압도하였다.

 

<자의>궁은 마음을 졸이며 조심하였다.

 

<흠돌>이 문명후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 <자의>가 후일 후(后)가 되어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정통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므로 가야파는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광信光>을 일찍 태자비로 삼아 우리 집안을 편안하게 함만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신광>은 <유신>공의 딸로 태자의 첩이 된 사람이다.

 

 

 

 

 

 

 

(27세) <흠돌欽突>은 정해년(627) 생이고 병진년(656)에 화랑이 되었다.

 

달복(정희) - 흠돌(627- )<풍월주 656-661>

 

<신광信光>의 언니 <진광晋光>은 곧 <흠돌>의 처였다.

 

유신(영모) - 진광

                  신광

 

그러므로 <유신>공의 공을 핑계대서 말하였으나

마음 속으로는 그 무리를 굳세게 하려 하였다.

 

문명후는 거의 기울었으나 태자가 받아들이지 않아 <흠돌>의 계책은 마침내 깨어졌다.

 

<진공>은 풍월주의 지위에 5년간 있다가 <흠돌>에게 물려주었다.

 

그 때 태손 <소명昭明>전군이 이미 태어났고

무열제는 <자의>의 현숙함을 매우 사랑하였다.

 

법민(자의) - 소명{정명, 신문왕}(645-692)

 

<흠돌>은 감히 다시는 그 계책을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보룡>궁에 정성을 바치고 그 딸을 <순원順元>의 첩으로 들일 것을 청하였다.

 

<보룡>궁은 속임수를 두려워하여 좋은 말로 거절하였다.

 

<흠돌>은 다시 사람을 시켜 <야명夜明>궁과 나의 아버지 <오기吳起>공에게

정성을 바치고 전에 저지른 악행을 덮으려 하였다.

 

그 때에 <야명> 또한 <인명仁明>전군을 낳았는데

준수하고 용봉(龍鳳)의 자태가 있었다.

 

법민(야명) - 인명

 

태자가 매우 사랑하니 <흠돌>이 스스로 말하여 <인명>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야명>이 부득이 받아 들였다.

 

그 때 <순원>공이 <흠돌>에게 속아 비밀히 <흠돌>의 딸과 사통하였다.

 

그리하여 <흠돌>을 위하여 <야명>을 설득한 것이다.

 

무열제가 죽고 문무제가 즉위하자 <자의>를 황후로 삼았다.

 

<흠돌>의 악함을 알았으나 문명태후에게 효도하였으므로

한 마디 말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흠돌>은 <호원好元>공의 아들 <흥원興元>을 부제로 삼았다.

 

애초에 <태양太陽>공주가 진평대제를 섬겨 <태원太元>과 <호원好元>을 낳았는데

제(帝)를 닮지 않았다.

 

공주는 어려서 <금륜>태자를 섬겼는데 사신(私臣)을 좋아하였다.

 

제(帝)를 섬길 때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양 군(君)은 통(統)을 얻지 못하였다.

 

<흥원>은 제통(帝統)이 자기에게 있다고 혼자 생각하여 조정을 원망하고

누이를 <흠돌>의 첩으로 삼아 결탁하였다.

 

<흠돌>은 <야명>궁에 정성을 바치게 되자 선위(仙位)를

나의 아버지 <오기>공에게 전하고자 <흥원>을 계책으로 꾀어 양보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낭정이 무너졌기에 받지 않으려 하였다.

 

진골정통파의 낭두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피를 흘리며 따져 말하기를

 

" 공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신(臣) 등이 장차 자멸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자의>황후 또한 나아갈 것을 권하여 마침내 풍월주의 지위를 받았다.

 

<흠돌>은 풍월주로 7년간 있었다.

 

 

 

 

 

 

 

(28세) <오기吳起>는 계사년(633) 생이고 임술년(662)에 화랑이 되었다.

 

예원(우야) - 오기(633- )<풍월주 662-664>

 

아버지가 비로소 풍월주의 위에 나아갔는데 실제 28세 풍월주다.

 

이 때 낭정이 이미 어지러워졌기에 급작스럽게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진공>,<흠돌>, <흥원> 등이 모두 낭도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위에서 낭정을 전횡하였다.

 

아버지는 바로잡을 수 없음을 알고 3년간 재위하고

부제 <원선元宣>공에게 물려주었다.

 

 

 

 

 

 

 

 

(29세) <원선元宣>은 병신년(636) 생이고 갑자년(664)에 화랑이 되었다.

 

흠선(보단) - 원선(636- )<풍월주 664-667>

 

<원선>공 또한 4년간 재위하고 역시 <군관>공의 적자 <천관天官>에게 물려 주었다.

 

 

 

 

 

 

 

(30세) <천관天官>은 기해년(639) 생이고 정묘년(667)에 화랑이 되었다.

 

군관(천운) - 천관(639- )<풍월주 667-674>

 

<천관>의 처는 곧 <흠돌>의 딸이다.

 

그리하여 낭정이 다시 <흠돌>의 무리들에게 돌아갔다.

 

<천관>은 8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었다.

 

 

 

 

 

(31세) <흠언欽言>은 을사년(645) 생이고 갑술년(674)에 화랑이 되었다.

 

<흠돌>의 아들 <흠언>이 대신하였다.

 

대개 그 첩 <언원言元>의 소생이기 때문이다.

 

흠돌(언원) - 흠언(645- )<풍월주 674-678>

 

<흠언>은 <흥원>의 조카로 <흥원>의 딸을 화주로 삼았다.

 

<흠원>은 5년간 풍월주로 있었다.

 

 

 

 

 

 

 

 

(32세) <신공信功>은 기유년(649) 생이고 무인년(678)에 화랑이 되었다.

 

진공(흥신) - 신공(649- )<풍월주 678-681>

 

<진공>의 아들 <신공>이 대를 이었는데 <신공>은 <흠돌>의 조카로서

또한 <흥원>의 딸을 화주로 삼았다.

 

수년 내에 낭정은 한결같이 삼간(三奸)의 손으로 들어갔다.

 

<흠돌>은 아첨으로 문명태후를 섬겼다.

 

이에 그의 딸이 <유신>공의 외손이므로 태자에게 바쳤다.

 

태자의 모후(母后){자의}는 <흠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소명昭明>태자는 무열제의 명으로

<흠운欽運>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흠운>의 딸은 스스로 <소명>제주(祭主)가 되기를 원하였으며

<자의>후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것이 <소명昭明>궁이다.

 

태자와 더불어 모후가 자주 소명궁으로 거동하였다.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理恭>전군을 낳았다.

 

달복(보개) - 흥운(배금) - 신목(정명) - 이공{효소왕}

 

후(后)가 이에 소명궁에게 명하여 동궁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善明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총애함이 <흠돌>의 딸보다 컸다.

 

<흠돌>의 딸이 투기를 하였다.

 

문명태후가 죽자 <흠돌> 등이 스스로 그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두렵고 불안하였다.

 

게다가 <흠돌>의 딸이 총애를 잃었다.

 

<흠돌> 등이 이에 모반을 하였다.

 

<야명>궁을 핑계로 삼아 <인명仁明>을 옹립하였으나

실제로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것이다.

 

문무제의 병이 크게 악화되자 나의 아버지 <오기>공이 북원(北原)으로부터 들어와

호성장군이 되었는데 실제로는 <자의>황후의 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때 <진공>이 호성장군으로서 인부(印符)를 내어 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 주상(主上)이 병으로 누웠고 상대등이 문서를 내리지 않는데 어찌 중요한 직을

가벼이 넘겨 주겠는가?"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대개 적들의 모의가 이미 치밀했기 때문이다.

 

제(帝)가 죽었으나 비밀에 부쳐 발설하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비밀리에

경외(京外)의 군대를 입성시켜 <흠돌>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야명궁과 <군관>공의 집을 포위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오기>공의 심복인 낭두가 모의를 공에게 발설하였다.

 

그 때 시위삼도(侍衛三徒)는 적 편에 많이 서 있었다.

 

<오기>공이 이에 <순지順知>, <개원愷元>, <당원幢元>, <원수元帥>, <용원龍元>공 등과 더불어 비밀히 사병(私兵)을 불러 들어가 호위하고

삼도의 대감을 모두 파면하여 다스렸다.

 

서불한(舒弗邯) <진복眞福>공이 수병(手兵)을 이끌고 포위를 깨고 들어와 말하기를

 

" 경외(京外)의 병력이 크게 이르렀다.

너희들은 적신(賊臣)에게 미혹되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때 <흠돌> 등이 그 무리를 속여 말하기를

 

" 상대등 <군관>과 각간 <진복>이 제(帝)의 밀조(密詔)를 받아

<인명人明>을 즉위시켰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관>이 움직이지 않았고 <진복>은 포위를 깨뜨렸으므로

무리들이 의심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에 큰 소리로 왕에게 충성할 자는 오른쪽,

적을 따를 자는 왼쪽으로 서라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무리 중에 오른쪽으로 간 자들이 많았다.

 

<흠돌> 등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포위를 풀고 물러가려 하였다.

 

<오기>공 등이 병사를 풀어 대파하였다.

 

경외의 병력이 또 이르렀다.

 

적은 이에 삼간(三奸)을 사로잡아 바쳤다.

 

반란이 비로소 평정되었고 삼도 중에는 이로써 죽임을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흠돌>의 난은 681년에 일어났다.

 

<자의>태후가 화랑을 폐지하라고 <오기>공으로 하여금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속하게 하고 직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의 낭정은 옛날 그대로 스스로 남아 있었다.

 

실직(悉直)이 가장 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 풍속이 다시 서울에 점점 퍼졌다.

 

중신들이 모두 오래 된 풍속을 갑자기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태후가 이에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화랑의 풍속은 그리하여 크게 변하였다.

 

 

 

발문(跋文)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찍이 향음(鄕音)으로 화랑 세보(世譜)를 저술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초 자식이 공무의 여가에 낭정의 큰 일과 파맥의 정사(正邪)를 모아

아버지의 계고(稽古)의 뜻을 이었다.

 

혹 선사(仙史)에 하나라도 보탬이 있을까?

 

 

 

 

'남당유고 > 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장돈장(上章敦牂)(2)  (0) 2016.11.22
상장돈장(上章敦牂)(1)  (0) 2016.11.10
위화진경(魏華眞經)(1)  (0) 2016.11.01
금천대제 법흥(法興)진왕기  (0) 2016.10.17
지증(智證)대제기  (0) 2016.10.11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