迎帝天后夢見大白馬 而生 帝聰明睿智 寬厚愛人
天文地理陰陽五行眞書元經弓馬諸術 莫不通解
且有經國大度 任賢 拔才 遂致中興大業盛矣至矣
帝身長七尺 隆準龍顔 有神勇 炤明天后 極愛之 曰 “吾弟當興吾邦矣”
命芬宗太子 共治天下 及智證帝 受禪芬宗 讓嗣于帝
四年冬 始監國 首擧伊宗之賢 托以軍事 問政於阿珍宗 國人莫不稱其聖
九年夏 始稱副君 命專大政 尋賜帝號不受
十四年三月 受禪 于九曜宮 尊父帝爲太上老帝智證天王
仙徒乃上帝號 于八白殿 上曰金天大帝法興眞王
受傳國璽寶 于迎帝天后 群臣山呼萬歲 聖齡三十四
帝曰 “惟我神邦 世尊坤聖 今我母后 天縱之聖 造國創山 以保朕躬
古有簾政帷詔 朕當大柄 先奉母帝 宜爾群臣體 朕之孝 事我二聖可也”
乃奉后 于玉坐 而上坤天大帝法興妙王之號 受傳國璋宝 于帝 群臣亦山呼萬歲
命大書郞好知阿飡 採二聖當國節目上之
翌年七月 老帝崩 天后迎帝 行祥 于凉宮 卽位 于眞宮
<영제迎帝>천후가 꿈에 큰 흰말을 보고서 제를 낳았는데
제는 총명하고 지혜롭고 관대하며 후덕하여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천문지리와 음양오행과 진서(眞書)와 원경(元經)과 활쏘기와 말타기 등
여러기술에서 통달하였다.
한편 나라를 큰 도량으로 경영하여 어진이를 임명하고 재주있는자를 선발하였다.
마침내 나라를 발전시켜 큰일을 이루었다.
임금은 키가 7척이고 훌륭하고 준수한 얼굴에 용맹이 있었으므로
소명(炤明)천후{후황}가 지극히 그를 사랑하여 말하였다.
"내 아우는 마땅히 우리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분종芬宗>태자에게 명하여 함께 천하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지증>제로부터 선위를 받았으며 <분종芬宗>은 제의 후사를 양보하였다.
지증제 4년 겨울 나라를 다스림에 <이종伊宗>이 뛰어나서 으뜸으로 천거하여
군사의 일을 맡겼고 <아진종阿珍宗>에게 정사를 물으니
나라사람들이 성인으로 부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9년 여름 처음으로 부군(副君)으로 칭하고 대정(大政)을 맡아 오로지 할 것을 명하고
제호(帝號)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14년 3월 구요궁(九曜宮)에서 선위를 받았으며
아버지를 높이어 태상노제(太上老帝) 지증천왕(智證天王)이라 하였다.
이에 선도(仙徒)가 팔백전(八白殿)에서 제호(帝號)를 올려
금천대제(金天大帝) 법흥진왕(法興眞王)이라 하였다.
<영제迎帝>천후에게서 나라의 옥새를 전해 받으니
여러 신하들이 산호만세를 불렀다. 제의 나이 34세였다.
제(帝)가 이르기를
"오직 우리 신국(神國)의 나라는 세세토록 곤성(坤聖)을 높이었다.
지금 나의 모후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 나라와 강산을 만들어 짐의 몸을 보존하였다.
옛날에도 수렴정치가 있었다.
짐이 대권을 잡음에 이르러 우선 어머니를 제(帝)로 받들고자 하니
너희 군신들은 마땅히 짐의 효성을 본받아 이성(二聖)을 섬겨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옥좌에서 천후를 받들고
곤천대제(坤天大帝) 법흥묘왕(法興妙王)의 호를 올렸으며
제(帝)에게서 나라의 장보(璋宝)를 전해 받으니 여러 신하들이 산호만세를 불렀고
대서(大書)랑 <호지好知> 아찬에게 명하여
이성(二聖)이 나라를 다스리는 절목들을 모아서 그것을 받들었다.
다음해 7월 노제(老帝)가 붕어하시니
<영제迎帝>천후가 양궁(凉宮)에서 의식을 행하고 진궁에서 즉위하였다.
법흥왕 원년(514) 청마(靑馬) 甲午
七月 帝詔 曰 “芬宗殿君 有太伯之仁 讓國于朕 當此肇政 不可不委 以專命之任”
乃以芬宗爲稟主 普仁爲祖主 哲夫爲護城將軍 阿時爲衿荷臣
7월, 제가 조칙으로 이르기를
" <분종芬宗> 전군(殿君)은 크나큰 인(仁)으로 짐에게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마땅히 정사를 돌봄에 마음대로 명할 수 있는 임무를 맡기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이에 <분종芬宗>을 품주로 <보인普仁>을 조주로
<철부哲夫>를 호성장군으로 <아시阿時>를 금하신(衿荷臣)으로 하였다.
八月 以碧花爲左皇后 保道爲右皇后
以三夫殿君爲太子 魏花郞爵大阿飡
8월, <벽화碧花>를 좌황후로 <보도保道>를 우황후로 하였다.
<삼부三夫> 전군(殿君)을 태자로 하고 <위화魏花>랑에게 대아찬의 작위를 내렸다.
九月 芬宗奏 曰 “臣質虛難 堪重任 臣妻亦以妊娠 不能行公 願解喉職"
乃以哲夫俊治代之
9월, <분종芬宗>이 아뢰어 말하기를
"신의 자질이 허세를 부리고 난잡하여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며
신의 처가 또한 임신 중이라 공무를 행할 수 없으니
원컨대 중요한 직책에서 풀어 주십시오."라 하였다.
이에 <철부哲夫>와 <준치俊治>가 대신하게 하였다.
十月 群臣以哲夫掌兵權 而專喉政非 古例論之 哲夫乃請免 以守知普賢代之
山帝生 沙綱女帝綱 沙綱沙忠子也
10월, 신하들이 <철부哲夫>가 병권을 관장하여
중요한 정치를 마음대로 함은 잘못된 것이다고 하며
옛 예를들어 그것을 논하자 <철부哲夫>가 이에 면해줄 것을 청하여
<수지守知>와 <보현普賢>이 대신하였다.
<산제山帝>가 <사강沙綱>의 딸 <제강帝綱>을 낳았다.
<사강沙綱>은 <사충沙忠>의 아들이다.
十一月 妙王與魏花 入海宮
11월, 묘왕과 <위화魏花>가 해궁으로 들어 갔다.
十二月 帝與二后 入海宮
賜上仙勳功之臣 溫裘壽酒
12월, 제와 두 후가 해궁으로 들어갔다.
상선(上仙)과 훈공이 있는 신하에게 따뜻한 갖옷과 장수를 기원하는 술을 내렸다.
이때 묘왕 <영제迎帝>{연제蓮帝} 52세, 금천대제 법흥왕 <모진> 35세,
<벽화>후 30세, <보도>후 30세, <위화> 28세, 태자 <삼부> 12세이다.
법흥왕 2년(515) 청양(靑羊) 乙未
正月 帝自海宮 歸眞宮 受朝 卽日還海宮
勿力妙紅稟祖主
角干河大卒 賜其妻宝沛 年穀
정월, 제가 해궁으로부터 진궁에 돌아와 조하를 받고 바로 그날 해궁으로 돌아갔다.
<물력勿力>과 <묘홍妙紅>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각간 <하대河大>가 죽어 그 처 <보패宝沛>에게 년곡을 내렸다.
三月 重修眞宮
保道后生只召公主 于九曜宮
命守知採古史博 議新制
妙元源花
3월, 진궁(眞宮)을 중수(重修)하였다.
<보도保道>후가 구요궁(九曜宮)에서 <지소只召>공주를 낳았다.
선혜(내숙) - 보도(모진) - 지소(515- )(모진) - 삼모진(534-576)
24대 진흥대제 재위 540-575
진골정통 <선헤>의 딸 <보도>와 <모진>의 딸인 <지소> 공주는
<모진>의 많은 딸 중 유일한 진골정통으로 진골정통의 宗이된다.
이 <지소>가 아버지 <모진>과 증하여 낳은 아들이 진흥대제 <삼모진>이다.
<삼모진(534-576)>은 <벽화>의 아들인 태자 <삼부(503- )>와
<옥진>의 아들인 태자 <비대(522- )>를 제치고 법흥왕 사후 제위에 오른다.
진흥대제 삼모진이 7살에 즉위하니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게 된다.
진흥대제 때 신라는 만주의 길림까지 진출하게 된다.
<수지守知>에게 명하여 고사(古史)를 모아서 널리 새로운 제도를 논의하였다.
<묘원妙元>을 원화(源花)로 하였다.
五月 賜仙院令息臣 爵阿飡 其子碧臣爲太子舍人
5월, 선원에 령을 내려 <식신息臣>에게 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그 아들 <벽신碧臣>을 태자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七月 行平立宮大祭 普賢主之
魏花玉蘭稟祖主
7월, 평립궁(平立宮)에서 대제를 지내고 <보현普賢>이 이를 주재하였다.
<위화魏花>와 <옥란玉蘭>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보현(482- )>은 법흥왕 <모진>의 친동생이다.
十月 平立宮樹王殿成 帝與妙王 禱老帝福 三日
10월, 평립궁(平立宮) 수왕전(樹王殿)이 완공되자
제와 묘왕이 노제(老帝)의 복을 3일간 빌었다.
十二月 角干比智卒 年七十四 國人惜其勳功 立祠 祀之
守知普賢稟祖主
始行五卯旬曆 于仙院
12월, 각간 <비지比智>가 죽었다. 나이 74세였다.
나라의 사람들이 그의 훈공을 안타까워하여 사당을 세우고 그를 제사지냈다.
<수지守知>와 <보현普賢>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선원에서 오묘순력(五卯旬曆)을 시행하엿다.
법흥왕 3년(516) 화원(火猿) 丙申
正月 帝與妙王 受朝 于南桃
帝親祀神宮 擧火 有黃龍 見于日井 太史薛德以爲吉祥 命中外仙巫 行福
芥明苩眞稟祖主 因普賢有疾故也
정월, 제와 묘왕이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제가 친히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불을 들자 황룡이 일정(日井)에서 보였다.
태사 <설덕薛德>이 상서로운 길조라 여기고
나라 안팎의 선무들에게 명하여 복을 빌게 하였다.
<개명芥明>과 <백진苩眞>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보현普賢>이 병이 났기 때문이다
二月十日 始行天壽慶宴 于別洞仙院 會仙女六十四人
行天開多良岐
以納水女桂花爲公主 賜衣 時桂花得鉗知寵 請爵故也
2월, 10일 별동선원에서 천수(天壽)를 경축하는 잔치를 여니
모인 선녀(仙女)가 64명이었다.
行天開多良岐
<납수納水>의 딸 <계화桂花>를 공주로 하여 옷을 내렸다.
이때 <계화桂花>가 <겸지鉗知>의 총애를 받아 작위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三月十六日 行妙王誕宴 于別洞仙院
3월, 16일 묘왕의 탄신일에 별동선원에서 잔치를 열었다.
四月 始置兵部令 哲夫沛淵爲之
4월, 처음으로 병부령을 설치하고 <철부哲夫>와 <패연沛淵>을 병부령으로 하였다.
五月 妙王入仙院 始行花郞祭 于赤兎
5월, 묘왕이 선원에 들어가 처음으로 적토(赤兎)에 화랑제를 지냈다.
六月 角干智世路薨 年六十五 以太公禮葬之 公以先帝之胞弟
久掌兵馬 累立大功 寬厚不矜 謙讓愛人
負戈之士 仰若考妃 莫不下淚沾襟
命賜公妃宝壽宮海梁宮咸氏宮 幷賜年穀奴婢
6월, 각간 <지세로智世路>가 죽었다. 나이 65세였다.
태공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공은 선제(先帝)의 포제(胞弟)이다.
오래도록 병마(兵馬)를 관장하고 여러번 큰 공을 세웠다.
관대하고 후덕하여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창을 짊어 진 병사들이 죽은 아내같이 믿고 우러르니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妃 <보수宝壽>궁, <해량海梁>궁, <함씨咸氏>궁에게
나란히 년곡과 노비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七月 以伊飡實竹爲角干 命執軍政 阿時吾道稟祖主
7월, 이찬 <실죽實竹>을 각간으로 하여 군정을 집정토록하고
<아시阿時>와 <오도吾道>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于別洞
眞丸生子隆公 或云魏花子 或云帝子
命上仙畏山 巡行國中 問民疾苦
8월, 별동에서 대가배를 행하였다.
<진환眞丸>이 아들 <융공隆公>을 낳았다.
혹은 <위화魏花>의 아들이라 하고 혹은 제(帝)의 아들이라고 한다.
상선(上仙) <외산畏山>에게 명하여 나라 안을 순행하여
백성들의 병과 고통을 묻도록 하였다.
九月 命芥明 按察州郡 與其治否 獎民篤農 有技術者 禁郡主村主之多畜民女者
剡花生 比梁子比亥 賜米
妙王與魏花 行月歌 于別洞
9월, <개명芥明>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이 잘 다스려지는지의 여부를 살피게 하고
백성들에게 농사를 열심히 지을 것을 권장하고 기술이 있는자들을 천거토록하고
郡主(군주)나 村主(촌주)가 백성들의 여식들을 많이 데리고 있는 것을 금지 하였다.
<염화剡花>가 <비량比梁>의 아들 <비해比亥>를 낳아 쌀을 내렸다.
묘왕과 <위화魏花>가 별동에서 월가를 행하였다.
十月 命宣登 行大場 于南郊 帝與妙王 幸之
10월, <선등宣登>에게 명하여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도록 하고
제와 묘왕이 그리로 행차 하였다.
十一月 扶余入貢 奏 句麗通梁 欲南下 帝命北路南路 備水陸防禦 賜征袍
以加耶公主紅腦爲權妻
11월, 부여가 조공을 바치며 아뢰기를
" 고구려가 양(梁)과 통교하여 남하코자 한다." 라고 하니
제가 북로와 남로에 명하여 수륙(水陸)으로 방어토록 하고 군복을 내렸다.
가야공주 <홍뇌紅腦>를 권처(權妻)로 하였다.
十二月 妙王與魏花 入海宮 行眞經大會 選州郡精通仙藥大書者 三十六人 爲仙臣
帝與二后 幸平立宮 以妹眞丸爲宮監 剡蘭爲法 賜花田 翁狗臣 爵奈麻
布萇妻蟾京卒 以智世路妻咸氏 妻蟾京私夫羊秀
12월, 묘왕과 <위화魏花>가 해궁으로 들어가 진경대회(眞經大會)를 열어
주군(州郡)에서 선약(仙藥)과 대서(大書)에 정통한 자 36인을 선발하여
선신(仙臣)으로 하였다.
제와 두 후가 평립궁(平立宮)에 행차하여
여동생 <진환眞丸>을 궁감(宮監)으로 <염란剡蘭>을 법(法)으로 하고
화전(花田)을 내렸으며
늙은 구신(狗臣)에게는 나마(奈麻)의 작위를 내렸다.
<포장布萇>의 처 <섬경蟾京>이 죽어 <지세로智世路>의 처 <함씨咸氏>를
<섬경蟾京>의 사부(私夫)인 <양수羊秀>의 처로 하였다.
법흥왕 4년(517) 백계(白鷄) 丁酉
正月 帝與二后 受朝 于眞宮 賜骨老上仙酒 仍行仙桃山 白鷄祭
以梭失妻立宗 行吉 于神宮 賜奴婢第宅
以眞晩妻三山 行吉 于伊同宮 帝與碧花后主之
野人逐契德 而立發治
將軍伊登戰敗 帝以七星弟赦之
登曰 “被圍力戰 船破入水 家臣淖威 負而潛水 得生
手下將卒 多爲魚腹 無面自生 欲自刎
淖威力止之 曰 ‘主君之身 乃陛下之身 豈敢私自毁之’ 臣始悟 乃檻至
待罪陛下 憐臣 而不滅乃軍忌也 許臣自盡 而戒之”
帝止之 曰 “汝善於馬 而不習於水 故汝不肯行 而朕送之 且彼船皆高大 我船老楫且小
而汝能善戰 汝豈罪 軍罰者 罰其不忠也 朕之汝忠 且朕股肱也 汝何敢自傷朕肱乎
汝母聞汝死 而不食 朕命入宮 賜食 可與之相見”
遂召洪壽 抱伊登 而入 加淖威爵奈麻
守知普賢稟祖主
정월, 제와 두 후가 진궁에서 조하를 받고 골노(骨老)와 상선(上仙)에게 술을 내리고
선도산에 행차하여 백계제(白鷄祭)를 지냈다.
<사실梭失>을 <입종立宗>의 처로 하여 신궁에서 길례를 행하고 노비와 집을 내렸다.
<진만眞晩>을 <삼산三山>의 처로 하여 이동궁(伊同宮)에서 길례를 행하였는데
제와 <벽화碧花>후가 주관하였다.
지도로(연제) - 입종(491-539)
모진(보현) - 사실(503-563)
<입종>은 법흥왕 <모진>의 동생이고 <사실>은 <모진>의 딸이다.
비처(벽화) - 삼산(501- )
지도로(연제) - 진만(502- )
<삼산>은 <벽화>의 아들이고 <진만>은 법흥왕 <모진>의 여동생이다.
야인(野人)이 <계덕契德>을 쫓아내고 <발치發治>를 세웠다.
장군 <이등伊登>이 전쟁에서 패하여
제가 칠성제(七星弟){마복칠성}를 사면하여 주었다.
<이등伊登>이 말하기를
“ 포위되어 힘써 싸웠으나 배가 파손되어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가신(家臣) <뇨위淖威>가 업고 잠수를 하여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수하 장졸들은 모두 물고기 밥이 되었으니
얼굴을 들고 살수 없어 목을 매어 죽고자 하였으나,
<뇨위淖威>가 힘써 멈추게 하며 말하기를
‘주군의 몸은 곧 폐하의 몸이니,
어찌 감히 사사로이 몸을 훼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여
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에 감옥 우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폐하에게 죄를 지었으니
신을 가련히 여기어 죽이지 않으면 군기를 기피하는 것입니다.
신에게 자진하도록 허락하여 경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자진함을 그치게 하며 말하기를
“너는 기병에 능숙하고,
물에서 싸우는 법을 배우지 않아 그런 연유로 가지 않으려 하였지만,
짐이 너를 그곳으로 보냈고, 또 그들의 선박이 모두 높고 크며,
우리의 전선들은 낡고 노는 작으니 네가 능히 선전했음에도 어찌 너의 죄가 되겠느냐.
군벌(軍罰)을 받을 자는 충성을 다하지 않는 자인데,
짐은 너의 충성함을 알고, 또 짐의 고굉(股肱)이다.
어찌 감히 스스로 짐의 팔뚝을 다치게 하려느냐?
너의 어머니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식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짐이 어머니를 입궁토록 하여 식사를 내릴 터이니 서로 얼굴을 봄이 가당하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홍수洪壽>를 불러 <이등伊登>을 안아 들어오도록 하였다.
<뇨위淖威>의 작위를 더하여 나마(奈麻)로 하였다.
<수지守知>와 <보현普賢>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숙흔(홍수) - 이등(483- )
이때 <사실> 15세, <입종> 27세, <진만> 16세, <삼산> 17세,
<계덕> 33세, <발치> 54세, <이등> 35세, <홍수> 53세이다.
二月 帝與碧花英失 行海宮 謁妙王
英失者 守知之者也 美而柔厚 帝愛之 以爲璽臣
起臥必枕籍之 如夫婦 恰如魏花時 宮中罔之 以亞魏
帝每與碧花宮合歡 引英失同床 宮恐帝後悔 以其妹雪花配英失
帝見 英失與雪花交好 遂愛雪花 而疎宮 宮恐失寵
乃媚英失 而交好 帝復愛宮
宮乃專英室 而命雪花 歸其夫乃車 雪花時已娠英失子
自以爲帝子 不欲出宮 怨后無情 而后終不復 召雪花 而獨薦而娠
帝摩腹 曰 “英失乎 朕乎”
后笑 曰 “英失雖助 豈及汝乎 乃汝子也”
帝笑 曰 “英失卽朕也 汝可娠 英失子也”
后乃曰 “英失子也”
帝大喜 乃召普賢 洗后
至是復欲 報喜于太后 而入海宮 普賢隨之
留海宮七日 帝與妙王 幸雲梯山 碧后普賢 皆與魏花私通
2월, 제(帝)와 <벽화碧花>, <영실英失>이 해궁에 행치하여 묘왕을 알현하였다.
<영실英失>은 <수지守知>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정이 두터워 제가 그를 사랑하여 새신(璽臣)으로 삼았다.
일어나고 누울 때 그를 반드시 베개로 삼으니 마치 부부같아
흡사 <위화魏花> 때와 같았다.
궁중에서 <영실英失>을 <위화魏花>에 버금가는 행신(婞臣)으로 거두었다.
제가 매번 <영실英失>을 데려 와 같은 침상에서 <벽화碧花>와 합환(合歡)하니
<벽화碧花>는 제가 후회할까 두려워하여
그 여동생 <설화雪花>를 <영실英失>의 배필로 하였다.
제가 <영실英失>과 <설화雪花>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설화雪花>를 사랑하고 <벽화碧花>를 소홀히하니
<벽화碧花>는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영실英失>에게 아첨하여 서로 좋아하니 제가 다시 <벽화碧花>를 사랑하였다,
이에 <벽화碧花>는 <영실英失>의 방을 독차지 하고 <설화雪花>에게 명하여
그 남편 <내거乃車>에게 돌아가도록 하니
<설화雪花>는 이때 이미 <영실英失>의 아들을 임신하였다.
제의 아들이라며 궁을 나가지 않으려고 <벽화碧花>의 무정함을 원망하니
<벽화碧花>는 끝내 불복하고 <설화雪花>를 불러 홀로 임신하였다고 하였다.
제가 배를 만지며 말하기를
" 영실의 아이인가? 짐의 아이인가?"라고 하니
벽화가 웃으며 말하기를
" <영실英失>이 비록 도왔으나 어찌 당신과 더불어 하겠습니까?
이에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였다.
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 <영실英失>은 바로 짐이다.
너는 <영실英失>의 아들을 임신함이 옳다." 라고 하니
이에 <벽화碧花>가 말하기를
" <영실英失>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크게 기뻐하며 <보현普賢>을 불러 <벽화碧花>를 씻어 주었다.
이제와서 다시 태후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고자 해궁으로 들어가니
<보현普賢>이 따라갔다.
해궁에 7일간 머무르다 제와 묘왕이 운제산(雲梯山)에 행차하니
<벽화碧花>와 <보현普賢> 모두 <위화魏花>와 사통하였다.
수지(보현) - 영실(498?- )
<영실>은 법흥왕 <모진>의 여동생 <보현>의 아들로 <사실>의 오빠이다.
이때 묘왕 <연제> 55세, 법흥왕 <모진> 38세, <벽화> 33세,
<수지> 36세, <보현> 36세, <영실> 20세? <위화> 31세, <설화> 28세?이다.
三月 俊室源花
宝兮宮主薨 伊飡善牟妻也 父習宝葛文王 母五壽宮主也 性好淫多智
帝在慕珍宮時 宝兮迎 而媚之 納其女 又自得帝寵
帝卽位 命爲權妻位 至二品 賜宮奴婢
宝兮恐 色衰而失寵 常服調 藥粉黛如少艾 常引美少年 擁臥 以鏡相照 曰 “誰姸乎”
少年曰 “宮主比臣 嬰柔甚姸”
宝兮喜 以爲色未衰 問於其子阿時 曰 “帝不忘我耶”
阿時笑 曰 “艾寵如林 尙未得盡寵如 汝老物何爲”
宝兮乃悲泣 成疾 善牟慰之 曰
“人生之樂有三 一曰靜觀物心 二曰修德行道 三曰富貴行樂 故色者 末之末也
吾妻何取其末 而自傷乎”
宝兮不聽 以竟臥不起 善牟抱而歌之 曰
“吁嗟獜兮 我知汝 而汝不知我 吁嗟牝乎 我知汝 而汝不知我”
帝聞之 曰 “宝兮朕之寵妾也” 可以后禮葬之 立其廟曰 宝兮
3월, <준실俊室>을 원화(源花)로 하였다.
<보혜宝兮(460-517)>궁주가 죽었다.
이찬 <선모善牟>의 처이다.
아버지는 <습보習宝>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오수五壽> 궁주이다.
성품은 음란함을 좋아하나 지혜가 많았다.
제가 모진궁에 있을 때 <보혜宝兮>가 마중나가 아첨하니 그녀를 받아들이고
또 스스로 제의 총애를 얻었다.
제가 즉위하여 권처로 명하니 직위가 이품에 이르고 노비를 하사받았다.
<보혜宝兮>는 미색이 쇠퇴하여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적당한 약을 복용하고 화장을 하여 마치 젊고 아름다움을 같이 하였다.
항상 미소년을 데리고 끼고 누워서 거울로 서로 비춰보며 말하기를
"누가 더 예쁘냐?"라고 하니
소년이 말하기를
"궁주는 신에 비교하면 아이처럼 매우 예쁘십니다."라고 하였다.
<보혜>는 기뻐하며 얼굴이 아직 쇠퇴하지 않았다고 여겨
그 아들 <아시阿時>에게 묻기를
‘제는 나를 잊지 않으셨겠지?’ 라고 하니
<아시阿時>가 웃으며 말하길
"젊을 때 총애는 숲과 같아서 오히려 총애를 다 받지 못하는데
어머니와 같은 늙은 몸을 어찌 총애 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보혜宝兮>가 이에 슬피 울었고 병을 얻었다.
<선모善牟>가 그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인생의 즐거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물심(物心)이 하나인 것을 고요히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덕을 닦고 도를 행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부귀로 즐거움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얼굴이라는 것은 말단 중의 말단이다.
내 부인이 어찌 그 말단을 취하여 스스로를 상심한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보혜宝兮>는 듣지 않고 끝내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선모善牟>가 껴안고 노래하여 말하기를
"우차린혜여!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우차빈호여!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라고 하였다.
제가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보혜宝兮>는 짐의 총애하는 첩이다."라고 하며
왕후의 예로써 장례를 치루었으며 사당을 세워 <보혜宝兮>묘라 하였다.
이때 <선모> 64세, <보혜> 58세, <아시> 37세이다.
四月 改設兵部制 以哲夫爲令 冬成爲郞
妙王與魏花 巡狩州郡仙院
4월, 병부의 제도를 바꾸어 설치하였으며
<철부哲夫>를 병부령(令)으로 하고 <동성冬成>을 병부랑(郞)으로 하였다.
묘왕과<위화>가 주군(州郡)의 선원(仙院)을 순찰하고 사냥을 하였다.
五月 紅腦宮新成 宴群臣 于宮 命紅腦與英失 對舞 時碧花后娠滿
故帝與英失 常宿 紅腦宮碧后 妬之 取英失 而舞
帝笑 而抱紅腦 舞之 碧后怒 批帝及腦 而泣
帝恐 后胎動 抱后 而入帳 慰之
群臣皆醉狂 歌于帳外 終夜不撤
5월, <홍뇌紅腦>궁이 새로 완공되어 여러신하들과 궁에서 잔치를 열고
<홍뇌紅腦>와 <영실英失>에게 마주보고 춤을 추게하였다.
이때 <벽화碧花>후는 임신하여 만삭이었다.
때문에 제와 <영실英失>이 항상 함께 <홍뇌紅腦>궁에서 잠을 잤으며
<벽화碧花>후가 그것을 투기하여 <영실英失>을 불러 춤을 추게 하였다.
제가 웃으며 <홍뇌紅腦>를 안고 그와 춤을 추었다.
<벽화碧花>후가 노하여 제와 <홍뇌紅腦>를 비난하며 울었다.
제가 <벽화碧花>후의 몸 속 아기가 떨어질까 두려워하여
<벽화碧花>후를 껴안고 휘장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위로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미치도록 술에 취해 있었고
휘장 바깥에서 노래를 부르니 밤이 새도록 잔치가 끝나지 않았다.
六月 天紅生 帝子天京
6월, <천홍天紅>이 제의 아들 <천경天京>을 낳았다.
七月 魏花吾道稟祖主
吾道生玉珍 而爲阿時妻
至是吾道願 以玉珍爲魏花女 帝知吾道欲復赴魏花 故有是命
碧花生女三菱 帝命英失洗之
帝與妙王 入海宮 英失烝 于妙王
7월, <위화魏花>와 <오도吾道>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오도吾道>가 <옥진玉珍(505- )>을 낳아 <아시阿時>의 처로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오도吾道>는 <옥진玉珍>을 <위화魏花>의 딸로 삼기를 원했다.
제가 <오도吾道>가 <위화魏花>에게 다시 매달리고자 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벽화碧花>가 딸 <삼릉三菱>을 낳아 제가 <영실英失>에게 아기를 씻도록 명하였다.
제와 묘왕이 해궁에 들어가니 <영실英失>은 묘왕에게 증(烝) 하였다.
八月 以沙龍爲南桃主
帝自海宮還 入保道宮 保道不受英失 而致 帝怒
至是妙王力勸 均寵兩后
帝乃先使英失 奉詔入之 保道不得已 乃與英失共浴 于神池 曰 “吾非不愛汝也”
恐帝後悔 而罪之也 英失曰 “臣豈敢望幸于陛下 惟帝强之 奈何”
保道曰 “朕與汝 好非私通也 汝可抱朕 入神殿 行歡 告于神明 而使宮中上下 見其公也”
英失乃抱后 入神殿 告之 而行雲 帝聞之 乃還 寵后如故
行大嘉俳 于南桃
8월 <사룡沙龍>을 남도(南桃)주(主)로 하였다.
제가 해궁에서 돌아와 <보도保道>궁으로 들어갔다.
<보도保道>가 <영실英失>을 받아드리지 않고 다스리니 제가 노여워하였다.
이때 이르러 묘왕이 힘써 권하여 두 명의 후(后)를 고루 총애하였다.
이에 제가 먼저 <영실英失>로 하여금 조서를 받들어 그곳에 들어가게 하니
<보도>는 부득이 <영실>과 함께 신지(神池)에서 목욕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제가 후회하여 벌을 줄까 두려워서이다." 라고 하니
<영실英失>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폐하에게 잠자리 들기를 바라겠습니까?
오직 제께서 강제로 명하시니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보도保道>가 말하기를
"짐과 너는 좋아하는 것이지 사통(私通)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짐을 안고 신전(神殿)에 들어가 즐거움을 행하는 것이 옳다.
신명(神明)에게 고하고 궁중 상하 신하를 보내어 공(公)을 보게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영실英失>이 후를 안고 신전(神殿)에 들어가 고하고
운우의 정을 나누니 제가 그것을 듣고 돌아와 전과같이 후를 총애하였다.
남도(南桃)에서 크게 가배를 행하였다.
九月 以順知爲天柱寺主 比完爲法
9월, <순지順知>를 천주사(天柱寺) 주(主)로 하고 <비완比完>을 법(法)으로 하였다.
十月 以妙元妻山宗 行吉 鮑祠
碧花后 以三菱百日 置酒迎帝及英失魏花吾道 而樂之
吾道曰 “吾女棠珍之初度 帝后亦可來我飮也”
帝許之 曰 “可設珍味”
吾道曰 “雖無珍味 唯有可品之梅 至期而會 雪深丈餘”
帝遂宿 於吾道宮 幸其女玉珍 自是玉珍寵高
10월, <묘원妙元>을 <산종山宗>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벽화碧花>후는 <삼릉三菱>의 백일에 술자리를 마련하여
제와 <영실英失>과 <위화魏花>와 <오도吾道>를 맞이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였다.
<오도吾道>가 말하기를
"내 딸 <당진棠珍>의 첫 돌에
제와 후께서는 저에게도 음식을 내주시는 것이 옳습니니다."라고 하니
제가 이를 허락하여 말하기를
"진미를 베풀만 하다" 하였다.
<오도吾道>가 말하기를
"비록 진미는 없고 오직 쓸만한 매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나려니 눈이 한길이나 깊어 졌습니다."
마침내 제가 <오도吾道>궁에 묵어 그 딸 <옥진玉珍>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니
이때부터 <옥진玉珍>을 총애함이 커졌다
이때 <옥진>은 13살이다.
선혜(묘심) - 오도(487-539)(아시) - 옥진(505- )(영실) - 묘도(525- )
사도(534- )
진골정통 <선혜>의 딸 <오도>를 <연제>가 딸로 삼아 대원신통을 잇게 하고
<옥진>과 <영실>이 낳은 <묘도(525- )>와 <사도(534- )>가 대원신통을 계승한다.
<묘도>의 딸이 <미실(547-616?)>이고
특히 <사도>는 진흥대제 <삼모진(534-576)>의 비가 되어 대원신통의 宗이 된다.
十一月 苩蓮生 魏花女苩華
伊飡善牟卒 有乃父之學 仙門惜之
11월, <백련苩蓮>이 <위화魏花>의 딸 <백화苩華>를 낳았다.
이찬 <선모善牟>가 죽었다.
내부지학(乃父之學)이 있어 선문(仙門)이 애석해 하였다.
<선모善牟(454-517)>는 신라 6仙家 47骨門의 하나인
<장이章伊(425-490)>의 아들이다.
十二月 帝與妙王 宿吾道宮
加魏花爵海飡 大設眞經會 於別洞 眞骨男女 皆赴之
12월, 제와 묘왕이 <오도吾道>궁에 묵었다.
<위화魏花>에게 해찬의 작위를 더하고 별동에서 진경회(眞經會)를 크게 개최하니
진골 남녀가 모두 진경회에 모였다.
법흥왕 5년(518) 황구(黃狗) 戊戌
正月 帝與妙王二后 受朝 眞宮
정월, 제와 묘왕, 두 후가 진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二月 命白宗 築株山城
2월, <백종白宗>에게 주산성(株山城)을 쌓도록 명하였다.
三月 以玉珍妻英失 帝與碧后 吉之 于鮑祠
發治遣使 入貢
發治逐契德 而妻誠華 至是生子發華
其嫡妻野王女妬之 欲害發治 故乃使誠華家臣 通使欲降 許之
3월, <옥진玉珍>을 <영실英失>의 처로 하여
제와 벽후가 주관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발치發治>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발치發治>가 <계덕契德>을 쫓아내고, <성화誠華>를 처로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아들 <발화發華>를 낳았다.
<발치發治>의 적처(嫡妻) 야왕녀(野王女)가 질투하여 <발치發治>를 해하려 하였다.
그런 연유로 <성화誠華>의 가신(家臣)을 보내어 항복하고자 하니 허락하였다.
四月 靑珍生 馬大女黃珍
4월, <청진靑珍>이 <마대馬大>의 딸 <황진黃珍>을 낳았다.
五月 保道后生女雪召
阿兮宮主薨 葬于仁陽墓
5월, <보도保道>후가 딸 <설소雪召>를 낳았다.
<아혜 阿兮(456-518)>궁주가 죽어 <인양仁陽>묘(墓)에 장례하였다.
<아혜>는 대가야 16대 여왕 <아리(431-491)>의 딸이다.
七月 行平立宮大祭 妙王與魏花 率仙臣三百六十人 引兩林女五十人
擧禱儀 宮監眞丸與笛手駃仁 歡于御帳 妙王賜七彩衣
山宗妙元稟祖主 魏花兵部令
7월, 묘왕과 <위화魏花>가 선신(仙臣) 360인과 양림의 선녀(仙女) 50인을 인솔하여
평립궁(平立宮)에서 대제를 지냈다.
궁감(宮監) <진환眞丸>과 묘수(笛手) <결인駃仁>이
도의(禱儀)를 들고 왕의 장막에서 환영하였다.
묘왕이 채의(彩衣) 7벌을 내렸다.
<산종山宗>과 <묘원妙元>을 품주와 조주로 하고 <위화魏花>를 병부령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于南桃
駃仁以其仙弟率眞爲花 于眞面宮
8월, 남도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결인駃仁>이 그 선제(仙弟) <솔진率眞>을 진면궁(眞面宮)에서 원화(源花)로 하였다.
九月 帝與玉珍 行月歌 于勝光仙院
封葛川宮樹王 行大祭
初長門公主 篤奉此神 多有靈驗 柳眞宮大監苩眞亦奉此 而有寵於帝得 至祖主
後數被幸 於莭宅 至是娠帝女 其女芥元 亦有寵于帝 勸帝封之
9월, 제와 <옥진玉珍>이 승광선원(勝光仙院)에서 월가를 행하였다.
갈천궁(葛川宮) 수왕(樹王)을 받들어 대제를 지냈다.
처음에 <장문長門>공주가 이 신(神)을 도탑게 받드니 많은 영험이 있어
<유진柳眞>궁 대감(大監) <백진苩眞> 역시 이 신을 받드니
제의 총애를 얻어 조주(祖主)에 아르렀다.
<장문(451-513)>공주는 금관가야 8대왕 <질지>의 딸이고
<유진(511- )은 <연제>와 <위화>의 딸이다.
<백진>은 <유진>의 유모이다.
그 후 수차례 절택(莭宅)에서 잠자리 시중을 드니 이제와서 제의 딸을 임신하였다.
그 딸 <개원芥元> 역시 제에게 총애가 있어 제에게 권하여 수왕(樹王)을 받들었다.
十月 毗處廢后善兮宮主薨 以后禮葬之
宮主之母 乃鳥生太后也 鳥生私通乃宿而生
宮主美以好淫 而妙心事 出宮
智證帝以其爲胞妹 力護之 監于神宮
帝在慕珍宮時 私通于主 而生子浮君 及卽位 封爲一品權妻 賜宮室奴婢
又以主女保道爲右皇后 寵隆 瓊林未嘗衰言
帝常欲 復其后位 而不肯 曰 “妾爲陛下寵妾足矣 豈可更歸於地下之帝乎”
至是玉珍寵高 以宮主爲祖 與帝累幸 于宮 以祀妙心 時宮主已六十 而如少艾
帝引而欲幸之則 曰 “妾已老矣 恐耗聖陽 願抱玉珍”
帝不聽 抱而入帳 與玉珍幷床 而幸之 莫如優劣 帝益奇之 主曰
“妾實妙心妻 得神術如此 玉珍已長 可以傳之 以娛陛下”
玉珍乃受其術 後數日 主置酒 迎帝及玉珍 大娛一夜至曉
帝見宮主抱帝 而鳴咽 帝問之則 曰 “妾與妙心 約會天上 不忍別陛下 而泣也”
帝曰 “妙心 安敢奪吾寵妾而去 汝在我懷中 則無恙矣”
宮主曰 “聖陽若在妾陰 則可也”
帝乃與主 復合良久 玉珍覺睡 引帝于己 帝欲拒之
而玉珍强引之 宮主氣息奄奄 不能言 帝乃固抱宮主 曰 “朕若離此 宮主危矣”
玉珍以爲帝欺己 强取聖陽 以納于己 宮主己逝矣
帝閟不得已乃與玉珍 交好 畢抱主 已無及矣 玉珍悔而叩地 帝曰 “命也”
乃使玉珍爲祭主 葬于妙心塚中 有光明 昇天塚中 有天樂聲 仙徒奇之
使執綱畵 妙心抱主昇天像 立廟祀之 欲奉浮君爲法 許之
帝以妙心有功於仙門 而不幸被禍 特授伊飡之位 祿其子妙山爲沙飡 使屬仙院
以妙山女妙田爲浮君妻 奉善兮廟 命中外 以明年正月十七日 行妙心大祭
10월, <비처毗處> 폐후(廢后) <선혜善兮>궁주가 죽어 후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궁주의 어머니는 <조생鳥生>태후이고 <조생鳥生>이 <내숙乃宿>과 사통하여 낳았다.
궁주는 아름다웠으나 음란함을 좋아하여 <묘심妙心>의 사건으로 궁에서 나왔다.
<지증智證>제가 그 포매(胞妹)를 위하여 힘써 그녀를 보호하여
신궁(神宮)에 수감되었다.
습보(조생) - 지도로(437-514)
내숙(조생) - 선혜(459-518)
제가 <모진慕珍>궁에 있었을 때 궁주와 사통하여
아들 <부군浮君>을 낳고 즉위하여 일품 권처(權妻)로 봉하여 궁실과 노비를 내렸다.
또 궁주의 딸 <보도保道>를 우황후로 하여 총애를 크게 내리니
일찌기 경림(瓊林)의 말이 쇠한 적이 없었다.
제가 항상 그 황후의 직위를 회복코자 하니 수긍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 첩은 폐하의 총첩(寵妾)으로 만족합니다.
어찌 다시 곤제(坤帝)로 돌아가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제와서 <옥진玉珍>의 총애가 커지니 궁주를 조(祖)로 하여
궁에서 누차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고 <묘심妙心>을 제사지내니
이때 이미 궁주의 나이 60세이나 마치 어린애 같았다.
제가 그녀를 데리고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고자하니 말하기를
" 첩은 이미 늙어 성상(聖上)의 양기를 상하게 할까 두려우니
<옥진玉珍>을 안기를 원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듣지 않고 안아서 장막으로 들어가
<옥진玉珍>과 나란히 침상에서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여
제가 달리 다루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였다.
<옥진>은 <오도>와 <아시>의 딸로 <선혜>의 외손녀이다.
궁주가 말하기를
" 첩은 실은 <묘심妙心>의 처로 이 같은 신술(神術)을 얻었습니다.
<옥진玉珍>이 이미 장성하여 이를 전하여 폐하를 즐겁게 하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옥진玉珍>이 그 신술(神術)을 받은 며칠 후에
제와 <옥진玉珍>을 맞이하는 술자리를 차려 놓고 하룻 밤이 꼬박 새도록 크게 즐겼다.
제가 궁주를 보니 제를 안고 목메여 울고 있어 제가 이를 물은 즉 말하기를
" 첩과 <묘심妙心>은 하늘이 맺어주었습니다.
각별한 폐하의 은총을 참지 못하여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가 말하기를
" <묘심妙心>이 감히 나의 총첩을 쉽게 뺏어 가려 하나
당신이 나의 마음 속에 있는 한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오." 라고 하니
궁주가 말하기를
" 성상(聖上)의 양기가 만약 첩의 음기에 있는 한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와 궁주가 다시 오래도록 합궁하니 좋았다.
<옥진玉珍>이 잠에서 깨어 제를 자기에게 끌어 당기자 제가 이를 거부코자 하니
<옥진玉珍>이 강제로 제를 끌어 당겼다.
궁주가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이 곧 끊어질 듯하니 제가 궁주를 꼭 안고 말하기를
" 짐이 만약 이렇게 헤어진다면 궁주는 위태로울 것이야."라고 하였다.
<옥진玉珍>은 제가 자기를 속인다고 여겨
성상(聖上)의 양기를 강제로 잡아 자기에게 넣었다.
궁주가 이미 서거하였다.
제가 부득이 그만두고 <옥진玉珍>과 함께 서로 좋아하며
안고 있는 궁주를 내려 놓으니 이미 소용이 없었다.
<옥진玉珍>이 후회하여 땅을 치며 통곡하니 제가 말하기를
" 운명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옥진玉珍>을 제주로 하여 <묘심妙心>의 무덤 속에 장사하니
광명이 비추더니 무덤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에서는 즐거운 소리가 나니
선도(仙徒)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집강執綱>을 시켜 묘심포주승천상(妙心抱主昇天像)을 그리도록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부군浮君>을 법(法)으로 받들고자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제가 선문(仙門)에 <묘심妙心>은 공이 있으나 불행하게도 화를 당하였다고 하며
특별히 <묘심妙心>에게 이찬의 직위를 주었다.
그 아들 <묘산妙山>에게 사찬의 작위를 내려 선원(仙院)에 속하게 하고
<묘산妙山>의 딸 <묘전妙田>을 <부군浮君>의 처로 하였다.
나라 안팎에 명하여 선혜묘(善兮廟)를 받들도록하고
이듬해 정월 17일에 <묘심妙心> 대제를 지냈다.
* 진공정통 <조생>의 딸 <선혜(459-518)>의 자녀(3남 6녀)
선혜(비처) - 심도(479-505)
보도(485-528)
개도(491- )
선혜(?) - 양두(482- )
선혜(묘심) - 오도(487-539)
선혜(호조) - 비조부(494-)
양화(504-561)
선혜(모진) - 부군(496- )
선혜(홍기) - 기오(499- )
十一月 妙王與魏花 入海宮
11월, 묘왕과 <위화魏花>가 해궁으로 들어갔다.
十二月 命建玉珍宮
玉珍以英失妻 入碧花宮 奪后寵 后妬之 玉珍乃 請別居故也
帝與玉珍 宿吾道宮 五日
祿妙心忠臣七人 賜爵及衣酒 其徒願奉玉珍爲君 許之
帝與吾道玉珍 入海宮 碧花怒私通斗花
12월, 옥진궁(玉珍宮)을 짓도록 명하였다.
<옥진玉珍>을 <영실英失>의 처로 하였는데 벽화궁에 들어가 후의 총애를 뺏으니
후가 이를 질투하여 <옥진玉珍>을 별거토록 청하였기 때문이다.
제와 <옥진玉珍>이 <오도吾道>궁에서 5일간 묵었다.
<묘심妙心>의 충신 7인에게 녹봉을 내리고 작위와 옷과 술을 내렸다.
그 무리들이 <옥진玉珍>을 군(君)으로 받들기를 원하니 허락하였다.
제와 <오도吾道> <옥진玉珍>이 해궁으로 들어가니
<벽화碧花>는 노하여 <두화斗花>와 사통하였다.
법흥왕 6년(519) 토시(土豕) 己亥
正月 帝與妙王玉珍 受朝 海宮
比梁剡花 稟祖主
行妙心大祭 玉珍主之
以玉珍爲珍殿主 授英失爵沙飡
妙王率仙徒七千人 上言于帝 曰
“龍頭花郞魏花玉耶爲朕陽君 理化兩林 三門爲國 元氣 而謙讓 雌伏上奉陛下
以潤朕躬 下率仙臣 德被萬民 不有嘉號 加之
妾以其妻不忍 自尊願削妾 秩與郞同品 無使夫婦異階 以安朕心”
帝曰 “母后之愛郞之心 不得不然 而國無二君之義 奈何”
妙王曰 “朕欲以眞后之號 加於仙夫 汝其許之”
帝曰 “魏花非徒 有功於母后 而已 亦爲玉珍之父 在椒親之位 母后之言 極合朕意”
乃命有司 刻玉印 築壇 奉妙王及魏花 于壇上 帝與玉珍 上妙王眞后之號 賜宴三門
정월, 제와 묘왕, <옥진玉珍>이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비량比梁>과 <염화剡花>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묘심妙心>대제를 지내고 <옥진玉珍>이 이를 주관하였다.
<옥진玉珍>을 진전(珍殿) 주(主)로 하고 <영실英失>에게 사찬의 작위를 주었다.
묘왕이 선도(仙徒) 7천명을 인솔하여 제에게 말을 올리기를
" 용두화랑(龍頭花郞) <위화魏花> 옥야(玉耶)는 짐의 양군(陽君)으로
이화양림(理化兩林)과 나라를 위한 삼문(三門)이 되었고
원래 기질이 겸양하여 스스로 굴복하여 폐하를 받들어 모시고
짐의 몸응 빛나게 하고 아래로는 선신(仙臣)을 인솔하여 만 백성에게 덕을 입혔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없어 이 이름을 더하였습니다.
첩이 그 처를 용납하지 못하여 스스로를 높이고 처를 깍아내리기를 원하였으나
질(秩)과 랑(郞)을 동품(同品)으로 하여 부부의 품계를 다르지 않게하니
짐의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하니
제가 말하기를
" 모후의 <위화>랑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니
어찌 나라에 두 군(君)의 의로움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묘왕이 말하기를
" 짐이 진후(眞后)의 이름에 선부(仙夫)를 더하고자 하니 이를 허락하시지요?"
라고 하니
제가 말하기를
" <위화魏花>는 이미 모후에게 공이 있으니 선도(仙徒)가 아닙니다.
또한 <옥진玉珍>의 아버지로 외척의 지위에 있으니
모후의 말씀은 지극히 짐의 의중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옥인(玉印)을 새기고
단을 쌓아 단상에서 묘왕과 <위화魏花>를 받들어 모시었다.
제와 <옥진玉珍>이 묘왕(妙王)과 진후(眞后)의 호(號)를 올리고
삼문(三門)에 잔치를 내렸다.
二月 比梁烝碧花后 有娠
吾道生 魏花女金珍
2월, <비량比梁>이 <벽화碧花>후를 증(烝)하여 임신하였다.
<오도吾道>가 <위화魏花>의 딸 <금진金珍>을 낳았다.
이때 <벽화> 35세, <비량> 32세, <오도> 33세, <위화> 33세이다.
三月 仙徒奉 玉珍爲源花 帝親行彩
眞丸生 駃仁女丸仁
桂花生 鉗知女桂娥 遣其兄脫水入貢 賜以衣馬
3월, 선도(仙徒)가 <옥진玉珍>을 원화(源花)로 받들었고
제가 친히 채전(彩典)으로 행차하였다.
<진환眞丸>이 <결인駃仁>의 딸 <환인丸仁>을 낳았다.
<계화桂花>가 <겸지鉗知>의 딸 <계아桂娥>를 낳아
그 언니 <탈수脫水>를 보내어 조공하니 옷과 말을 내렸다.
四月 加耶君聖明殂 遣馬大吊之
聖明弟異腦專國
剡花生 比梁子比相
芬宗髮長稟祖主
以立宗爲兵部令
4월, 가야군주 <성명聖明>이 죽어 <마대馬大>를 보내어 조의하였다.
<성명聖明>의 동생 <이뇌異腦>가 나라를 독단으로 다스렸다.
<염화剡花>가 <비량比梁>의 아들 <비상比相>을 낳았다.
<분종芬宗>과 <발장髮長>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입종立宗>을 병부령으로 하였다.
이때 금관의 여군주 <청렵> 44세, <이뇌> 26세이다.
五月 麗主羅雲殂 庶子興安立
以其母爲妻 以其弟宝延爲子
興安有膂力 能御人其族 皆畏之 爲備興安
乃使人請和 于北路 而貢馬 命以好言慰之
5월, 고구려 군주 <라운羅雲(462-519)>이 죽어
서자(庶子) <흥안興安(477-531) 23대 안장대제 재위 519-530>이 섰다.
그 어머니를 처로 하고
그 동생 <보연宝延(479-545) 24대 안원대제 재위 531-544>을 아들로 하였다.
<흥안興安>은 등골과 근육에 힘이 있어 능히 사람과 그 가족을 제어 할 수 있어
모두가 이를 두려워하여 <흥안興安>에 대비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귀한 말(馬)을 북로에 보내고 화평을 청하니
좋은 말로서 위로토록 명하였다.
七月 好知普賢稟祖主
加魏花爵匝判 帝與玉珍 宴妙王及魏花 于天宮 大享仙徒 于三院 七日
以朱珍爲兵部郞 實竹子也 有驍勇善騎射
從立宗巡視南路 遇風海上 能安舟楫
立宗乃薦爲郞 曰 “水陸之才 唯此人而已 可以大用” 許之
7월, <호지好知>와 <보현普賢>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위화魏花>에게 잡판의 작위를 더하고
제와 <옥진玉珍>이 천궁에서 묘왕과 <위화魏花>에게 잔치를 열고
7일간 삼원(三院)에서 선도(仙徒)들을 크게 대접하였다.
<주진朱珍>을 병부랑(兵部郞)으로 하였다.
<실죽實竹>의 아들이다.
굳세고 용맹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다.
<입종立宗>을 따라 남로를 순시하다가
해상에서 바람을 만나니 능히 배를 안전하게 하였다.
이에 <입종立宗>이 <주진朱珍>을 추천하며 말하기를
" 바다와 육상에 재주있는 사람이다.
오직 이 사람만을 크게 등용함이 옳다."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八月 行嘉俳 于別洞
帝與玉珍入剡光仙院 玉蘭與其子剡蘭 出舞獻壽
帝大醉 加爵剡蘭一級 駃仁率眞 緋衣靑馬 駃率以蘭臣 皆有寵於眞面故也
8월, 별동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제와 <옥진玉珍>이 염광선원(剡光仙院)에 들어 갔다.
<옥란玉蘭>과 그 아들 <염란剡蘭>이 나와서 춤을 추고 장수를 기원하였다.
제가 크게 취하여 <염란剡蘭>에게 일급의 작위를 더하고
<결인駃仁>과 <솔진率眞>에게 비의(緋衣)와 청마(靑馬)를 내리고
<결인駃仁>과 <솔진率眞>을 <옥란玉蘭>의 신하로 하였다.
모두가 진면궁(眞面宮)의 총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九月 命骨門四十七宅 給其年穀 祿其宗子 以保其門地 無墮其骨品世業
行大場 于南郊
行平立宮大祭 築碧我宮 於桃山下 名曰白阿宮
9월, 골문 마흔 일곱 집에 년곡을 보내도록 명하고 왕실 자녀에게 녹을 내리고
그 문중 땅을 보존토록하여 그 골품의 세업(世業)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남교(南郊)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평립궁(平立宮)에 행차하여 대제를 지내고
도산(桃山) 아래에 <벽아碧我>궁을 지어 이름을 백아궁(白阿宮)으로 불렀다.
* 신라 6선가(仙家)의 계보(골문 47 가문(家門)
1. <복공福公>의 후손으로
<팽공彭公>, <동공東公>, <마제摩帝>, <석효碩孝> 집안
일신(선도) - 복공
역공(불휘) - 팽공
월복(홍제) - 마제(90?-159)
공공(선효) - 석효
2. <아노阿盧>의 후손으로는 <월노月盧>, <상노尙盧>, <홍공虹公> 집안
일광(알영) - 아노
과노(삼달라) - 월노 <삼달라>는 <일성>과 <지진내례>의 딸이다.
강노(상씨) - 상노
치공(석홍) - 홍공
3. <봉모奉母>의 후손으로
<발량發良>, <백마白馬>, <순정順貞>, <마정馬貞>집안
일광(알영) - 봉모
봉모(산제) - 발량
백마(100?-160)
봉모(성제) - 순정
마정
<산제>는 <알영>의 딸이고 <성제>는 <월광>의 딸이다.
4, <대노大盧>의 후손 중 <일지日知>의 후손으로
<창영昌永>, <마지나馬知那>, <천공天公>, <마일馬日> 집안
일광(알영) - 대노
대노(아리) - 일지(85?-129)
일지(야비) - 창영(110?-176)
일지(한나) - 마지나(110?-179)
사을나
일지(아세) - 천공 <아세>는 차웅(남해왕)과 운제의 딸이다.
일지(사을나) - 마일
5. <대노大盧>의 후손으로 <허루許婁>, <우조羽烏>, <하루河婁> 집안
대노(구을) - 허루(80-155)
대노(?) - 우조
대노(자산) - 하루
6. 별도로 <산억山檍>, <신공辛公>, <마공馬公>, <한아汗兒>, <문지文支>,
<길공吉公>,<제거齊居>, <옥군玉君>, <명선明宣>, <굴공屈公>, <양산楊山>,
<대도大刀>, <백산白山>, <금산金山>, <우로于老>, <대수大樹>, <월호月瓠>,
<반산盤山>, <중해仲解>, <거숙車宿>, <호연好淵>, <장사長沙>, <모량牟梁>,
<장이章伊>, <실상實相>, <비태比太>, <내숙乃宿>, <아진종阿珍宗>, <보신宝信>집안
방아(산도) - 산억(135?-193)
거신(알영) - 신공(60?-138)
파사(미례) - 마공(146-191)
윤공(흘고) - 길공(110-170?)
고허(돌산) - 제거(70?- )
유리(금당) - 옥군
훤명(장생) - 명선
심공(구을) - 굴공(66-141)
장도(알씨) - 대도(? -124)
내해(홍모) - 우로(277-331)
적공(무산) - 대수(70?139)
호공(월씨) - 월호(90?-149)
내해(옥모) - 중해(280- )
?(홍아) - 거숙(439- )
심(보반) - 호연(397-466)
눌지(보미) - 모량(434-503)
<모량>은 태후 <연제>의 어머니이다.
보해(보미) - 장이(425-490)
호물(보반) - 실상(395-461)
실성(아로) - 비태(416-481)
습보(홍아) - 내숙(436-501)
습보(보량) - 아진종(451-511)
미해(보미) - 보신(421-485)
그 외 여러 집안은 진골(眞骨)은 궁(宮)이라 칭하고 선골(仙骨)은 종(宗)이라 하였다.
47집안을 혈통으로 하여 그 집안에 선원의 신하를 나누어 두어 받들게 하니
이를 택상(宅相)이라 한다.
<위화진경 중에서 발췌>
十月 伊登與淖威黑泥等 拔對山島 虜發治 復以契德 治於民 民皆大悅
海梁宮主 以疾薨 葬以后禮
10월, <이등伊登>과 <뇨위淖威>, <흑니黑泥> 등이 대산도(對山島)를 쳐서 빼앗았다.
대산도(對山島)는 고자국(지금의 고성)에 있는 섬이다.
<발치發治>를 사로잡고,
<계덕契德>에게 다시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니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해량海梁>궁주가 병으로 죽어 후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十一月 帝與玉珍 入海宮
命四十七宅 行祭 于桃山樹王
扶余獻明珠 于玉珍宮
11월, 제와 <옥진玉珍>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마흔 일곱 집에 명하여 도산(桃山) 수왕(樹王)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부여가 <옥진玉珍>궁에 명주(明珠)를 바쳤다.
十二月 碧花后生 比梁子仇梨知
設眞經齋 于別洞
靑明伐靑巤 命苔宗止之
12월, <벽확碧花>후가 <비량比梁>의 아들 <구리지仇梨知>를 낳았다.
별동선원에 진경재(眞經齋)를 설치 하였다.
<청명靑明>이 <청렵靑巤>을 토벌하니 <태종苔宗>에게 명하여 이를 중지토록 하였다.
이때 <태종> 이사부 36세이다
법흥왕 7년(520) 백서(白鼠) 庚子
正月 帝與玉珍 受朝 于海宮 妙王眞后 受朝 于別洞仙宮 公卿多不朝 曰
“魏氏父子 配于帝后 而君之骨法懈矣”
玉珍怒 曰 “陰陽之德一也 吾父配陽于母后 而吾配陰于汝 其功大矣 汝臣侮之 何也”
帝乃命 其不朝者 待罪于仙院 仙臣之主治者 乃專橫肆情 以示其威
阿時天紅稟祖主 阿時善媚 于玉珍 以帝之鴻胖 皆歸於玉珍之功 故玉珍喜 而拜之也
妙王採仙臣四十七人 爲四十七宅相 以主仙政 仙臣之跋扈 自此益甚
정월, 제와 <옥진玉珍>이 해궁에서 조하를 받고.
묘왕과 진후(眞后)가 별동선원에서 조하를 받으니
공경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신년 하례에 불참하여 말하기를
" <위화>와 <옥진>은 제와 후에게 배필인데
왕의 골(骨)과 법(法)이 느슨하다!" 라고 하니
<옥진玉珍>이 노하여 말하기를
" 음양(陰陽)의 덕은 하나이다.
내 아버지는 모후에게 양(陽)의 배필이고 나는 제에게 음(陰)의 배필이다.
그 공이 큰 데 너희 신하들이 어찌 이를 업신여기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제가 신년 하례에 불참한 자들에게 선원(仙院)에서 죄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선신(仙臣)을 다스리는 주요한 자들이 전횡을 마음대로하니 위엄을 보였다.
<아시阿時>와 <천홍天紅>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아시阿時>는 <옥진玉珍>에게 아첨을 잘 하여 제의 홍반(鴻胖)이 되니
모두가 <옥진玉珍>의 공으로 돌렸다.
<옥진玉珍>이 기뻐하여 그에게 벼슬을 내렸기 때문이다.
묘왕이 선신(仙臣) 47명을 뽑아 47택상(宅相)으로 하여 선정(仙政)을 주관토록하니
선신(仙臣)의 발호(跋扈)가 이때부터 점점 심하여졌다.
이때 묘왕 <연제> 58세, <위화> 34세, 법흥왕 <모진> 41세, <옥진> 16세.
<아시> 40세, <천홍> 32세이다.
二月 海梁宮主像成 命立廟 祀之 宮主以妙王之胞妹 事毗處智證 皆有寵
帝自兒時 與相得 及卽位一品權妻 賜宮室奴婢 而碧花后妬之
寵遂衰 乃削髮爲尼 常懷帝像 而起臥 帝憐之 送樂慰之 及薨 造像而悼之
帝自海宮還 入仙院 與妙王祭 合歡樹王 于別洞領
示新制律令 於三門 定六部人服色飾 三門理方 各守其制 無有相越
賜酺南桃 於是仙骨品階之 次百官朱紫之秩 燦然備具
群臣皆賀 曰 “三代以來 初有之勝事”
妙王以無品人執綱位仙門理方
上仙畏山諫之 曰 “仙骨一體 何可以無品人治之”
妙王曰 “執綱厚都之子也 勿沮其才 盖綱母嘗爲厚都婢妾 生一子腰綱
故以綱爲厚都子也”
綱明敏色美 能於仙圖 故得寵於后 后妹牟凌亦與綱通 生子牟黃 故益見寵隆
至是復命 執綱爲畏山之子
五日 一候 畏山曰
“臣已多子女 不能敎以法度 何敢何人爲子”
妙王曰 “貴人多子 汝勿辭之”
乃以神鹿雌雄錦冠紫袖 賜綱母 命爲畏山妾 而老無用 綱反通 于覽淵及覺淵 人皆笑之
妙王與魏花 幸宣登宅 賜宴碧我兄弟子女 時田檍妻菱花生子凌檍 于其宅 故也
2월, <해량海梁>궁주상(象)이 완성되어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게 명하였다.
궁주는 묘왕의 포매로 <비처毗處>와 <지증智證>을 섬기니 모두에게 총애가 있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서로 좋아하여서 즉위하여 일품 권처로 하고
궁실과 노비를 내리니 <벽화碧花>후가 이를 질투하였다.
마침내 총애가 쇠하니 삭발하여 비구니가 되어
항상 제의 상(像)을 품고 일어나고 누웠다.
제가 이를 가련히 여겨 늙어서 영화롭게 하기위하여 위로하였으나
죽으니 상(像)을 만들어 이를 애도하였다.
제가 해궁에서 돌아와 선원(仙院)으로 들어가
묘왕과 함께 별동선원에서 수왕(樹王)을 합환(合歡)하는 제사를 지냈다.
새로운 율령을 제정하여 삼문(三門)에 반포하고
6부(六部) 사람의 복색과 장식을 정하였다.
삼문(三門) 이방(理方) 각각이 그 제도를 지키니 서로 월권함이 없었다.
삼문(三門)은 선문(仙門)과 골문(骨門) 및 6부(部)를 말한다.
처음에 선(仙)과 골(骨)의 품계(品階)를 정하고
다음으로 백관의 관복을 붉은 옷과 자주옷으로 질서를 정하여 찬연히 구비하여
남도(南桃)에서 잔치를 열고 술을 내렸다.
신하들 모두가 경하하며 말하기를
" 삼대(三代)이래 처음있는 훌륭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삼대(三代)는 <자비>성왕, <소지>명왕, <지증>천왕을 말한다.
묘왕이 품계가 없는 사람 <집강執綱>의 직위를 선문이방(仙門理方)으로 하였다.
상선(上仙) <외산畏山>이 이를 간하여 말하기를
" 선(仙)과 골(骨)은 한 몸입니다.
어찌 품계가 없는 사람이 이를 다스림이 옳게습니까?"라고 하니
묘왕이 말하기를
" <집강執綱>은 <후도厚都>의 아들이다. 그 재능을 막지 못한다.
모두가 아직도 <집강執綱>의 어머니가 <후도厚都>의 비첩(婢妾)이라하나
한 아들 <요강腰綱>을 낳았다.
고로 <집강執綱>은 <후도厚都>의 아들이다." 라고 하였다.
<집강執綱>은 명민(明敏)하고 얼굴이 고와
능히 선(仙)을 도모할 수 있어 후의 총애를 얻었고
후의 여동생 <모릉牟凌> 역시 <집강執綱>과 사통하여
아들 <모황牟黃>을 낳아서 점점 총애가 커졌다.
이제와서 다시 <집강執綱>을 <외산畏山>의 아들로 명하였다.
5일간 <외산畏山>이 말하기를
" 신은 자녀가 많아 법과 도량으로 가르칠 수 없는데 어찌 감히 아들로 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묘왕이 말하기를
" 귀인은 자식이 많다. 너는 사양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이에 신록(神鹿) 암수와 비단모자와 자색 저고리를 <집강執綱>의 어머니에게 내리고
<외산畏山>의 처로 명하니 노모(老母)에게는 무용지물이라
<집강執綱>이 <람연覽淵>과 <각연覺淵>에게 돌려보내니
사람들 모두가 이를 웃었다.
묘왕과 <위화魏花>가 <선등宣登>의 집으로 행차하여
<벽아碧我>의 형제자녀에게 잔치를 열었다.
이때 <전억田檍>의 처 <릉화菱花>가 아들 <릉억凌檍>을 그 집에서 낳았기 때문이다.
<릉화>는 <위화>의 여동생이다.
三月 帝與玉珍宮 入桃山
造玉人十二 于別洞
以羊秀妻咸氏 妻白宗
骨門理方田檍與仙門理方執綱 六部理方畏須 巡行州郡 察驗新制
命匝判靑良 巡察南路 以其子宝良爲奉供理方 以從之
別洞大殿成 以玉珍爲主 號別宮大殿主 一如皇后
帝與玉珍 幸柳眞宮 宴妙王眞后 以苩眞子牛息爲柳眞宮家臣 命百世爲奴
3월, 제와 <옥진玉珍>궁이 도산(桃山)에 들어갔다.
별동선원에서 옥인(玉人) 12상(象)을 만들었다.
<양수羊秀>의 처 <함씨咸氏>를 <백종白宗>의 처로 하였다.
골문이방 <전억田檍>과 선문이방 <집강執綱>, 6부이방 <외수畏須>가
주군(州郡)을 순행하여 새로운 제도를 살펴보고 시험하였다.
잡판 <청량靑良>에게 명하여 남로를 순찰토록 하고
그 아들 <보량宝良>을 봉공이방(奉供理方)으로 하여 따르게 하였다.
별동선원 대전(大殿)이 완성되어 <옥진玉珍>을 주(主)로하고
별궁대전주(別宮大殿主)라 부르니 황후와 마찬가지이다.
제와 <옥진玉珍>이 <유진柳眞>궁에 행차하여 묘왕 진후(眞后)에게 잔치를 열고
<백진苩眞>의 아들 <우식牛息>을 <유진柳眞>궁 가신(家臣)으로 하여
오랜 세월 노비가 되도록 명하였다.
<연제>와 <위화>의 딸 <유진柳眞>은 이때 10살이다.
四月 眞晩公主生 帝子胡公 于皐王宮 帝與妙王 洗之
以宣登女宣花 妻厚帝殿君 行吉 于碧院花林神房
先是殿君娶陽花 棄之 繼娶克花 又棄之 故碧我不肯許宣花 于殿君
而宣花自奔于殿君 匿于民舍 乃盟于花林 而行吉
帝與妙王 自皐王宮 親幸 主吉 賜碧氏族爵 有次
帝幸繮山宅 行山兼祭 享仙徒 三日
山兼嘗言 玉珍之貴 故親臨之也
妙王眞后 率眞丸剡蘭宣登碧我等 幸捺己神山 行望祖大祭
4월, <진만眞晩>공주가 제의 아들 <호공胡公>을 고왕궁(皐王宮)에서 낳아
제와 묘왕이 아기를 씻었다.
<선등宣登>의 딸 <선화宣花>를 <후제厚帝> 전군(殿君)의 처로 하여
벽원(碧院) 화림(花林) 신방(神房)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에앞서 전군(殿君)이 <양화陽花>에게 장가들어 <양화陽花>를 버리고
이어서 <극화克花>에게 장가들어 또 <극화克花>를 버리니
<벽아碧我>가 전군(殿君)에게 <선화宣花>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선화宣花> 스스로 전군(殿君)에게 달려가 민가에 숨었다.
이에 화림(花林)에서 맹서하고 길례를 행하였다.
제와 묘왕이 고왕궁으(皐王宮)으로부터 친히 행차하여 길례를 주관하고
벽씨(碧氏) 가족에게 작위를 내리니 차등이 있었다.
제가 <강산繮山>의 집으로 행차하여 <산겸山兼>의 제사를 지내고
선도(仙徒)들을 3일간 대접하였다.
일찌기 <산겸山兼>이 <옥진玉珍>의 귀함을 말하여서 친히 왕림한 것이다.
묘왕과 진후(眞后)가 <진환眞丸>, <염란剡蘭>, <선등宣登>, <벽아碧我>등을 데리고
날기(捺己) 신산(神山)으로 가서 조상의 무덤을 찾아 뵙고 대제를 지냈다.
五月 帝與玉珍 幸尋公院 乃尋尋仙院也
行木我大祭 賜狗徒三十人仙品
立狗祠 于蚊川 祀木我妙心阿世善兮班君板久 命尋尋爲主 竹公爲法
馬大自加耶還
秦靑巤弑聖明之狀 帝欲罪之 阿時諫止之 曰
“彰惡不如褒善 况人宮中事 有不明 其實乎”
帝乃命末山 賜錦衣玉冠 于靑巤 巤大喜
5월, 제와 <옥진玉珍>이 심공원(尋公院)에 행차하니 심심선원(尋尋仙院)이다.
<목아木我> 대제를 지내고 구도(狗徒) 30인에게 선품(仙品)을 내렸다.
문천(蚊川)에 구사(狗祠)를 세우고
<목아木我>, <묘심妙心>, <아세阿世>, <선혜善兮>, <반군班君>, <판구板久>의
제사를 지냈다.
<심심尋尋>을 주(主)로 <죽공竹公>을 법(法)으로 명하였다.
<마대馬大>가 가야에서 돌아왔다.
<청렵靑巤>이 <성명聖明>의 상(狀)을 시해하여 제가 이를 죄주고자 하니
<아시阿時>가 이를 중지토록 간하며 말하기를
" 악을 밝히는 것은 선을 포상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물며 사람의 궁중 일은 분명치 않으니 실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제가 <말산末山>에게 명하여 바단 옷과 옥관(玉冠)을 <청렵靑巤>에게 내리니
<청렵靑巤>은 크게 기뻐하였다.
七月 帝與玉珍吾道 幸狗祠 浴寒泉 命進神瓜 于岩上 名曰溫腹 後人以爲溫瓜
田檍菱花稟祖主 加甲夫靑良爵伊飡 河檍匝判
妙王眞后 率仙臣奾子百人 幸捺己神山
大賞碧氏波氏族
于山中 七日 動仙徒軍士二千人 百二十日 所費甚多 宣登諫之 乃歸
7월, 제와 <옥진玉珍>, <오도吾道>가 구사(狗祠)에 행차하여 냉천에서 목욕하고
바위 위에 신과(神瓜)를 진상토록 명하여 신과(神瓜)의 이름을 온복(溫腹)이라고 하니
후세 사람들이 온과(溫瓜)라 하였다.
<전억田檍>과 <릉화菱花>를 품주와 조주로 하고
<갑부甲夫>와 <청량靑良>에게 이찬의 작위를 더하고 <하억河檍>을 잡판으로 하였다.
묘왕과 진후(眞后)가 선신(仙臣)과 선자(奾子) 100명을 인솔하여
날기 신산에 행차하였다.
벽씨(碧氏)와 파씨(波氏) 가족에게 큰 상을 내렸다.
7일간 산속에서 지내고 선도(仙徒)와 군사 2천명을 120일 동안 이동하니
비용이 심히 많이 들어 <선등宣登>이 이를 간하여 돌아왔다.
八月 行大嘉俳 于別洞 玉珍散花
幸角干伊宗第 賜宴伊宗妻白氏 乃剡臣胞妹
年七十一 皓髮如金顔色 如童子 時人稱 以麻姑
時骨女以荒淫爲風 白氏獨貞潔自守 國人寶之
妙王還 自神山 與眞后 齋于桃山
8월, 별동선원에서 대가배를 행하고 <옥진玉珍>이 꽃을 뿌렸다.
각간 <이종伊宗(454-524)>의 저택에 행차하여
<이종伊宗>의 처 <백씨白氏(450-524)>에게 잔치를 열었다.
<백씨白氏>는 염신(剡臣)의 포매(胞媒이다.
나이 71세로 흰머리에 금색의 얼굴색이 어린아이 같았다.
당시 사람들이 마고(麻姑)라고 칭하였다.
당시 골녀들은 황음(荒淫)함을 풍속으로 여겼는데
<백씨>는 홀로 정결(貞潔)함을 스스로 지키니 나라사람들이 보배로 여겼다.
묘왕이 신산(神山)에서 돌아와 진후(眞后)와 함께 도산(桃山)에서 재(齋)를 올렸다.
九月 妙王眞后 行大場 于捺己
帝命森欣 率羽林君二千 往迎之 燈火絡繹十里
9월, 묘왕과 진후가 날기에서 대장응 지냈다.
제가 <삼흔森欣>에게 명하여 우림군 2천을 이끌고 가서 이를 맞이하도록 하니
등화(燈火)가 10 리(里)에 끊이질 않았다.
十一月 行牟梁宮大祭 賜角干宝根 銀裝宝杖及錦几 宝根妻牟兮 紫金神衣及白大神馬
宝根牟梁宮季子 而妙王之兄也
年七十六 而每日朝起 拜宮像 督宮隸淨神域 不見一塵 夜與牟兮 誦眞經以壽 宮在天之靈
牟兮牟大胞妹也
從宝根四十年 如一日 盡孝于宮 骨仙敬之如神
帝與玉珍 入海宮
11월, <모량牟梁>궁에 행차하여 대제를 지내고
각간 <보근宝根>에게 은으로 장식한 보물스런 지팡이와
비단으로 장식한 상자를 내리고
<보근宝根>의 처 <모혜牟兮>에게는 자주색으로 금으로 치장한 신의(神衣)와
흰색의 큰 신마(神馬)를 내렸다.
<보근宝根>은 <모량牟梁>궁의 막내 아들로 묘왕의 오빠이다.
등흔(보미) - 보근(445-522)
등흔(모량) - 연제(463-525)
나이 76세로 매일 아침에 일어나 <모량牟梁>궁의 상(像)에 절하고
<모량牟梁>궁의 후예가 신역(神域)을 정결히 모시는 지를 감독하고
하나의 티끝도 보이지 않으면 밤을 세워 <모혜牟兮>와 진경을 암송하여 기도하니
<모량牟梁>궁은 하늘의 영계(靈界)에 있었다.
<모혜牟兮>는 <모대牟大>의 포매(胞妹)이다.
<보근宝根>을 따라 40년을 하루같이 <모량牟梁>궁에게 효도를 다하니
골선들이 <모혜牟兮>를 신과 같이 존경하였다.
제와 <옥진玉珍>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十二月 行伊同大祭
沙嵩殿君薨 春秋三十九 君毗處王子也
性淸雅好山水 禽鳥不肯 名華 質素 自居山莊萬然
喜與芬宗殿君 論神山 品古神仙 取三十六人 名曰仙品
仙徒讀之 以爲學仙之訣
妃厚蒂公主 或云好彘公主
君異母妹也 妙王生也
亦與君相適 每笑妙王之好色事 以布裙掃落葉 如村婦
與君相携遊山水間 佣瓢汲水 飡麥飯 而相對食之
人不知 其爲王子公主 芬宗相善 每謂人 曰 “汝等欲見天仙 可入沙兄莊也”
至是遊阿瑟羅 滯雪于途中 羽化于民間仙徒家 以太公禮葬之
妙王眞后 入桃山
12월, 이동(伊同) 대제를 지냈다.
<사숭沙嵩> 전군(殿君)이 죽었다. 나이 39세였다.
군은 <비처毗處>왕의 아들이다.
성품은 청아하고 산수를 좋아하여 새를 잡을려고도 하지 않으니
산장에 거주한이래 이름의 빛남과 바탕의 소박함이 만연하였다.
<분종芬宗> 전군(殿君)과 함께 신산(神山)을 논함을 기뻐하고
옛 신선(神仙)을 품하여 36인을 취하여 이름하기를 선품(仙品)이라 하였다.
선도(仙徒)들이 이를 읽고 선(仙)을 배우는 요결로 하였다.
비(妃)는 <후체厚蒂>공주이다. 혹은 <호체好彘>공주라고도 한다.
군(君)의 배다른 여동생으로 묘왕이 낳았다.
비처(사선) - 사숭(482-520)
비처(연제) - 후체(484- )
지도로(후체) - 호체(504- )
<후체厚蒂>공주 역시 군(君)과 함께 서로 자적하여
매번 묘왕의 호색한 사건을 미소를 지으며
낙엽을 쓸어 치마로 덮으니 마치 촌부와 같았다.
군(君)과 함께 서로 손잡고 산수(山水)를 유람하며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저녁밥으로 보리밥을 지어 마주보며 먹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왕자와 공주인지 알지 못하니
<분종芬宗>이 두 사람 다 착하여 매번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희들이 천선(天仙)을 만나려고 사형장(沙兄莊)으로 들어왔구나!"라고 하였다.
이제와서 아슬라(阿瑟羅)를 유람하다 도중에 눈을 만나 머물다가
민간의 선도(仙徒) 집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태공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묘왕과 진후(眞后)가 도산으로 들어갔다.
법흥왕 8년(521) 금우(金牛) 辛丑
正月 受朝 于海宮
肜吹慕竹稟祖主
伊飡靑良卒 其妻宝皮 奔于駃兒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융취肜吹>와 <모죽慕竹>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이찬 <청량靑良>이 죽어 그 처 <보피宝皮>가 <결아駃兒>에게 도망갔다.
二月 帝自海宮還
帝與雨花 告濃花 于神廟
先是雨花生 帝女濃花 玉珍妬之 不得洗 至是乃告
厚蒂與斗花 相通 羞見柯枝 枝作白鳥歌 而悲之
2월, 제가 해궁에서 돌아왔다.
제와 <우화雨花>가 신묘(神廟)에서 <농화濃花>를 낳았음을 고하였다.
이에앞서 <우화雨花>가 제의 딸 <농화濃花>를 낳으니 <옥진玉珍>이 이를 질투하여
아기를 씻지 못하여 이제와서 고하게 된 것이다.
<후체厚蒂>와 <두화斗花>가 상통하여 <가지柯枝>를 보는 것을 부끄러워하니
<가지柯枝>가 백조가(白鳥歌)를 지어 이를 슬퍼하였다.
三月 玉珍宮成
上仙畏山上化 魏花代之
畏山有淸德 國人敬之 而不能諫 妙王之密事 人多惜之
俊答生 三山女俊貞
3월, <옥진玉珍>궁이 완성되었다.
상선(上仙) <외산畏山>이 죽어 <위화魏花>가 이를 대신하였다.
<외산畏山>은 깨끗한 덕을 지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묘왕의 비밀스런 일을 간할 수 없어 사람들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준답俊答>이 <삼산三山>의 딸 <준정俊貞>을 낳았다.
四月七日 加耶君鉗知殂 遣森欣吊之
4월, 7일 가야군주 <겸지鉗知>가 죽어 <삼흔森欣>을 보내어 조의하였다.
五月 扶余大水 命宝隆往慰之
靑珍生 馬大女馬珍
5월, 부여에 홍수가 나서 <보융宝隆>이 가서 이를 위로토록 명하였다.
<청진靑珍>이 <마대馬大>의 딸 <마진馬珍>을 낳았다.
六月 遣守知馬大沙忠等 五十六人 于梁 採其風俗文武諸度 以來 幷換土物
命肜吹與將軍伊登 入加耶 立仇衡爲君 金官人欲謀 立仇衡庶叔故也
6월 <수지守知>, <마대馬大>, <사충沙忠> 등 56인을 양(梁)나라로 보내어
그 풍속과 문무(文武)제도를 알아내어 돌아오도록 하였다.
아울러 토산물을 바꾸어 오도록 하였다.
<융취肜吹>와 장군 <이등伊登>에게 명하여
가야에 들어가 <구형仇衡>을 군주로 세우도록 하니
금관 사람들은 <구형仇衡>의 서숙(庶叔)을 세우려고 모의하였다.
이때 北魏는 숙종 <원후元珝> 正光3년, 梁은 무제 <소연蕭衍> 普通2년,
고구려는 안장대제 <흥안興安> 安藏3년, 백제는 무령대왕 21년,
금관가야는 구형왕 원년, 대가야는 이뇌왕 원년, 왜는 계체왕 13년이다.
七月 靑巤傳其位 于異腦 而自稱老王 命阿山往 立異腦爲君 加爵 賜衣
玉珍使三智 襲紅腦宮 强通之 而發之 帝遂疎紅腦
桂花生 鉗知子世宗
7월, <청렵靑巤>이 그 왕위를 <이뇌異腦>에게 전하고
스스로 노왕(老王)이라고 칭하였다.
<아산阿山>에게 명하여 가서 <이뇌異腦>를 군주로 세우고
작위를 더하고 옷을 내리도록 하였다.
<옥진玉珍>이 <삼지三智>를 보내어 <홍뇌紅腦>궁을 기습하여
<홍뇌紅腦>를 간통하고 이를 고발하니 마침내 제가 <홍뇌紅腦>를 소홀히 하였다.
<계화桂花(501- )>가 <겸지鉗知>의 아들 <세종世宗>을 낳았다.
<계화桂花>는 금관가야 마지막왕 <구형仇衡(502- )>의 妃이다.
八月 大嘉俳 于南桃
以厚蒂妻斗花 賜沙嵩宅
斗花以魏花之庶弟 得妙王詔 娶厚蒂 盡有其才
畏須善知稟祖主
8월, 남도(南桃)에서 대가배를 행하였다.
<후체厚蒂>를 <두화斗花>의 처로 하고 <사숭沙嵩>의 집을 내렸다.
<두화斗花>는 <위화魏花>의 서제(庶弟)로
묘왕의 조칙을 받아 <후체厚蒂>에게 장가들어 그 재능을 다하였다.
<외수畏須>와 <선지善知>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九月 以桂花妻仇衡 伊登爲金官將軍
大革金官仙骨 金紫之秩 多用我人
帝幸三葉 于碧花宮 可其秩衣神馬
行月歌 于別洞
9월, <계화桂花>를 <구형仇衡>의 처로 하고 <이등伊登>을 금관장군으로 하였다.
금관의 선(仙)과 골(骨)을 크게 혁신하여 금관의 자주색 관복의 녹(祿)에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등용되었다.
제가 <벽화碧花>궁에서 <삼엽三葉>에게 행차하여
그 녹(祿)에 옷과 신마(神馬)를 더하였다.
별동선원에서 월가를 행하였다.
十月 行明活池大祭 命國中皆置白羊神母像
扶余大蝗 其民九百余家 率男女 流入我境 命苩興接之 使居國中空地
紅腦生 子腦君 命歸三智
宝玉公主薨 一品權妻禮葬之
宝玉以盖鹵女 事毗處智證及帝 皆有寵
有子苔宗 出將入相 爲國柱石 故帝親臨其葬 脫衣納壙 而送之
宣花生 厚帝子宣祭 帝與妙王 臨洗 賜米衣
10월, 명활지(明活池)에서 대제를 지내고 나라 안에 명하여
모두 백양신모상(白羊神母像)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부여에 황충의 피해가 크게 일어나
그 백성 9백여 가(家)가 남여를 인솔하여 우리의 국경으로 들어오니
<백흥苩興>에게 명하여 이를 맞이하여 나라 안 공지에 살도록 하였다.
<홍뇌紅腦>가 아들 <뇌군腦君>을 낳아 <삼지三智>를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보옥宝玉> 공주가 죽어 일품 권처의 예로 장례를 치루도록 하였다.
<보옥宝玉>은 <개로盖鹵>의 딸로
<비처毗處>와 <지증智證>과 제를 섬기어 모두에게 총애가 있었다.
아들 <태종苔宗>이 있어 나가서는 장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니 나라의 기둥이 되어서
제가 친히 그 장례에 왕림하여 옷을 벗어 무덤 구덩이에 넣어 그를 보내었다.
<태종> 이사부는 <보옥>과 <아진종>의 아들로 484년생이다.
<선화宣花>가 <후제厚帝>의 아들 <선제宣祭>를 낳아
제와 묘왕이 왕림하여 아기를 씻고 쌀과 옷을 내렸다.
十一月 命中外仙巫 禱玉珍宮子 于白羊神母 分遣奾子 于五岳大川 祭之
帝與玉珍 入海宮
行平立宮大祭
11월, 나라 안팎 선무에게 명하여 백양신모에게 <옥진>궁의 아들을 기도하도록 하고
선자(奾子)를 오악(五岳) 대천(大川)에 나누어 보내어 이를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제와 <옥진玉珍>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평립궁(平立宮)에서 대제를 지냈다.
十二月 置杵眞宮奴婢田宅 如柳眞宮 以羊秀爲杵珍宮看翁 加其爵祿
行沙嵩大祭 于南桃 以沙嵩女沙彘爲主 彘夫朱珍爲法
嵩妻厚蒂 方娠斗花子 入祭
次斗花負 而出之 曰 “雪寒如此 汝爲前夫 不愛新夫胎兒 非吾妻也”
朱珍怒 蹴斗花 而奪厚蒂復位 曰 “吾等無母 安可祭父”
妙王聞之 大怒曰 “斗花父也 朱珍子也 安敢蹴之”
命笞朱珍 于斗花前 祭場大亂
斗花遂抱厚蒂 而逃 人皆以厚蒂愛新夫 無復有舊時之望
12월, <저진杵眞>궁에 노비와 전택(田宅)을 두어 <유진柳眞>궁과 같게하고
<양수羊秀>를 <저진杵眞>궁 간옹(看翁)으로 하고 그 작위와 녹(祿)을 더하였다.
남도(南桃)에서 <사숭沙嵩> 대제를 지내고
<사숭沙嵩>의 딸 <사체沙彘>를 주(主)로 하고
<사체沙彘>의 남편 <주진朱珍>을 법(法)으로 하였다.
<사숭沙嵩>의 처 <후체厚蒂>가 이제 막 <두화斗花>의 아들을 임신하여 들어와
<사숭沙嵩>의 제사를 지냈다.
재사를 지낸 후 <두화斗花>가 <후체厚蒂>를 업고 나가며 말하기를
" 이같은 설한(雪寒)에 당신은 전 남편을 위하고
새 남편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으니 나의 처가 아니다." 라고 하니
<주진朱珍>이 노하여 <두화斗花>를 발로 차고
다시 <후체厚蒂>의 직위를 뺏으며 말하기를
" 우리들은 어머니가 없으니 편안히 아버지를 제사 지냄이 옳다."라고 하였다.
묘왕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 <두화斗花>는 아버지이고 <주진朱珍>은 아들이다. 어찌 감히 쉽게 발로 차는가?"
라고 하며
<두화斗花>의 면전에서 <주진朱珍>의 볼기를 치도록 명하니
제장(祭場)이 크게 혼란하였다.
마침내 <두화斗花>가 <후체厚蒂>를 안고 도주하니
사람들 모두가 <후체厚蒂>는 새 남편을 사랑하여
다시는 옛 시절의 바램이 없다." 라고 하였다.
이때 <후체>는 묘왕 연제의 딸로 38세이고, <두화>는 위화의 서제로 26세?이며
<주진>은 후체의 사위로 24세이다.
법흥왕 9년(522) 현호(玄虎) 壬寅
正月 受朝 于海宮
加魏花爵伊飡
時玉珍宮有娠 請加爵其父母故也 封吾道爲一品宮主
厚蒂生 斗花子蒂花 妙王臨洗 賜米衣及珮玩
玉珍命魏花俊室爲稟祖主
魏花乃與妙王 入海宮 受詔 玉珍謂魏花 曰 “在仙院則父貴 在政院則我貴 可受父拜”
花曰 “君臣無私親 陛下之言 實萬世之寶典也
臣當傳 于仙院 以爲仙宝 幸書之 于簡 以授臣” 玉珍大喜 許之
妙王與魏花 開眞經筵 禱玉珍宮子七日 妙王手自披衾供寢洗湯 事神如婢子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위화魏花>에게 이찬의 벼슬을 더하였다.
이때 <옥진玉珍>궁이 임신하여 그 부모의 작위를 더하여 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오도吾道>를 일품 궁주로 봉하였다.
<후체厚蒂>가 <두화斗花>의 아들 <체화蒂花>를 낳아
묘왕이 왕림하여 아기를 씻고 쌀과 옷 및 패완(珮玩)을 내렸다.
<옥진玉珍>이 <위화魏花>와 <준실俊室>을 품주와 조주로 명하였다.
이에 <위화魏花>와 묘왕이 해궁에 들어가 조칙을 받으니
<옥진玉珍>이 <위화魏花>에게 말하기를
" 아버지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선원(仙院)에있고,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정원(政院)에 있으니 아버지에게 벼슬을 내림이 옳다."
라고 하였다.
<위화魏花>가 말하기를
"군신(君臣)은 사사로이 친척이 아닙니다.
폐하의 말은 실로 만세의 보전(寶典)입니다.
신이 마땅히 선원(仙院)에 전하여 선보(仙宝)로서 이를 죽간에 행서(幸書)하여
신하들을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옥진玉珍>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 하였다.
모왕과 <위화魏花>가 진경연(眞經筵)을 열고
7일간 <옥진玉珍>궁이 아들을 낳기를 기도하였다.
묘왕이 손수 이불을 펴서 욕탕에 잠자리를 만드니 마치 신을 섬기는 노비같았다.
二月 行玄武祭 于玄牝祠
命雨花宮歸家 玉珍妬之 而廢也
2월, 현빈사(玄牝祠)에서 현무제(玄武祭)를 지냈다.
<옥진玉珍>이 질투하여 <우화雨花>궁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하니
우화궁(雨花宮)이 폐지되었다.
三月 以魏花女白蘭 妻玉宗 帝與妙王 主吉 于鮑祠 賜玉蘭玉魚金冠白大神馬
異腦以其妹紫腦 妻靑明 入吉 鮑祠
以雨花妻異腦 命比助夫 備車馬 送之 雨花泣 曰
“妾失寵 願自貞 而保濃兒 何如外臣乎”
上曰 “玉珍之命也 奈何”
雨花不得已上馬 天爲之雨 出城門 而宿
帝爲之與濃花 偕行境內 境盡而別 時人作歌 而哀之
伊飡鳥石卒 石善於軍事 寡欲律身 人稱其賢 命厚葬之
以三葉爲源花
鳥石妻太悅炳皇 各賜年穀五十石
3월, <위화魏花>의 딸 <백란白蘭>을 <옥종玉宗>의 처로 하여 제와 묘왕이 주관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고 옥란(玉蘭)과 옥어(玉魚)가 새겨진 금관(金冠)과
흰색의 큰 신마(神馬)를 내렸다.
<이뇌異腦>가 그 여동생 <자뇌紫腦>를 <청명靑明>의 처로 하여
들어와 포사에서 길례를 치루었다.
<우화雨花>를 <이뇌異腦>의 처로 하고 <비조부比助夫>에게 명하여
거마를 준비하여 보내니 <우화雨花>가 울면서 말하기를
" 첩이 총애를 잃어 스스로 정조를 지키고 <농화濃花> 아기를 보호코자 하는데
어찌 외국의 신하가 되라고 하십니까?" 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 <옥진玉珍>의 명이니 어찌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우화雨花>가 부득이 거마를 타고 나가니
하늘에서 비가 내려 성문을 나가 숙박하였다.
제는 <우화雨花>를 위하여 <농화濃花>와 함께 국경까지 동행하여
국경에 이르러 이별하니 이때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이를 슬퍼하였다.
이찬 <오석鳥石>이 죽었다.
<오석>은군사에 관한 일을 잘 하였고 욕심이 적어 자신을 단속하니
사람들이 현인이라 칭하였다.
후하게 장례토록 명하였다.
<삼엽三葉>을 원화(源花)로 하고
<오석鳥石>의 처 <태열太悅>과 <병황炳皇>에게 각각 년곡 50석을 내렸다.
이때 <위화> 36세, <백란> 16세, <옥종> 18세, <옥진> 18세,
<이뇌> 29세, <자뇌> 27세?, <청명> 30세, <우화> 20세?, <농화> 2세,
<오석> 65세, <태열> 58세, <병황> 47세, <삼엽> 16세이다.
四月 帝與玉珍 謁神宮 禱子
妙王眞后 大享仙徒 于南桃 試五才 捀其魁者 分置三院 授職序祿 有次
4월, 제와 옥진玉珍이 신궁을 알현하고 아들을 낳기를 기도하였다.
묘왕과 진후(眞后)가 남도(南桃)에서 선도(仙徒)들을 크게 접대하고
5가지 재능을 시험하여 그 뛰어난 자를 뽑아
산원에 나누어 배치하고 직위와 서열과 녹봉을 차별있게 주였다.
五月 俊明宮主薨 以后禮葬之 宮主毗妻王妹也 色美而善文章歌舞
爲妙王胞兄伊欣妻 生子守知好知 皆以文章名當世
帝自太子時 愛宮主 曰 “娶妻當如姑”
宮主乃 受幸于湯中 寵隆
卽位召 入宮中 封爲一品權妻 衣服飮食之政 皆委之 妙王諫之 曰
“吾兄惟愛此人 汝何奪之”
乃出宮歸家 出入仙院 事魏花 如神明 曰
“骨女有三夫 家夫君夫神夫是也 陽君吾神夫也 與其女俊室織錦 以作郞衣 未成而薨”
伊欣撫而歎之 曰 “吾妻之貞 尙如此 况他女乎” 乃如其言 分骨三夫
角干宝根薨 葬于牟梁陵
以王妹宝浪 妻伊欣
時妙王謂 淨林諸奾 曰 “朕兄老 而無妻 誰可爲之”
宝浪曰 “臣無才色 可以上供 願奉上老爲功” 妙王大喜 請吉
伊欣曰 “昨日喪妻 今日喪 兄悲懷難禁 何忍行吉乎”
妙王曰 “得新妻則 自可歡喜 何苦辭之”
乃强行吉 于仙院 歡聲動院 伊欣娶宝浪 而果喜 不欲歸家 乃命居凉宮
5월, <준명俊明(462?-522)>궁주가 죽어 후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궁주는 <비처毗妻>왕의 여동생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문장과 가무를 잘 하였다.
묘왕의 같은 어머니 오빠인 <이흔伊欣>의 처가 되어
아들 <수지守知>와 <호지好知>를 낳았다.
모두가 문장으로 그 시대에 명성을 날렸다.
제가 태자 시절부터 궁주를 사랑하여 말하기를
" 처에게 장가 들려면 마땅히 외숙모 같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궁주가 욕탕 안에서 잠자리 시중을 받으니 총애가 컸다.
즉위하여 불러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여 일품 권처로 봉하고
의복과 음식에 관한 모든 일을 위임하니 묘왕이 이를 간하여 말하기를
" 나의 시누이가 오직 이 사람을 사랑하니 너는 어떻게 그녀를 빼앗었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출궁하여 집으로 돌아가 선원(仙院)을 출입하여
<위화魏花>를 신명(神明)처럼 섬기며 말하기를
" 골녀에게는 세 남편이 있는데 가부(家夫), 군부(君夫), 신부(神夫)입니다.
양군(陽君)은 나의 신부(神夫)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딸 <준실俊室>과 함께 비단을 짜서
<위화魏花>랑의 옷을 만드니 다 만들기 전에 죽었다.
<이흔伊欣(461-526)>이 어루만지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 내 처의 정조가 오히려 이와 같으니 하물며 다른 여인들은 어떠하겠는가? 라 하였다.
이에 그 말과 같이 삼부(三夫)에게 분골하였다.
각간 <보근宝根(445-522)>이 죽어 모량릉(牟梁陵)에 장례하였다.
왕의 여동생 <보랑宝浪(505- )>을 <이흔伊欣>의 처로 하였다.
이 당시 묘왕이 정림(淨林)의 여러 선자에게 말하기를
" 짐의 오라비가 늙어 처가 없으니 누가 옳게는가?" 라고하니
<보랑宝浪>이 말하기를
" 신(臣)이 재색이 없으나 상노(上老)를 받들어 공을 이루기를 원하오니
신(臣)이 높이 받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묘왕이 크게 기뻐하며 길례를 청하니 <이흔伊欣>이 말하기를
" 어제는 처의 초상이고 오늘은 형의 초상으로 슬픔과 회의를 금하기 어려운데
어찌 길례를 치루겠습니까?"라고 하니
묘왕이 말하기를
" 새로 처를 얻는 것인 즉 스스로 좋아함이 옳습니다.
어찌 고사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선원에서 길례를 강행하니 선원에 환성이 진동하였다.
<이흔伊欣>이 <보랑宝浪>에게 장가들어 기뻐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니
양궁(凉宮)에 거주토록 명하였다.
이때 <이흔> 62세, <준명> 61세?, 묘왕 <연제> 60세, <수지> 41세, <호지> 37세,
<준실> 35세?, <위화> 36세, <보근> 78세, <보랑> 38세이다.
六月 帝與玉珍 幸碧院
以眞晩公主妻竹公 行吉 于鮑祠
梭失生 立宗子五宗
6월, 제와 <옥진玉珍>이 벽원(碧院)에 행차하였다.
<진만眞晩>공주를 <죽공竹公>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치루었다.
<사실梭失>이 <입종立宗>의 아들 <오종五宗>을 낳았다.
이때 <진만>공주 21세, <죽공> 18세이다.
七月 行宝梁宮大祭 苔玉主之
碧花生子三郞 帝洗之
賜扇枕 于仙院諸臣
7월, <보량宝梁>궁에서 대제를 지내었다.
<태옥苔玉>이 이를 주관하였다.
<벽화碧花>가 아들 <삼랑三郞>을 낳아 제가 아기를 씻었다.
선원(仙院)의 여러 신하에게 부채와 베개를 내렸다.
八月 行嘉俳 于別洞
帝幸玉宗宮 白蘭獻凉衣 受幸
自是累幸 恐玉珍宮妬之 微行露浥 御衣如畵 作露詞歌之
8월, 별동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제가 <옥종玉宗>궁에 행차하여 <백란白蘭>에게 양의(凉衣)를 내리고
잠자리 시중을 받았다.
이때부터 여러번 잠자리 시중을 받으니 <옥진玉珍>궁의 질투를 두려워하여
이슬을 맞으며 미행하여 어의(御衣)가 헤어져 로사가(露詞歌)를 지었다.
九月 玉珍生子比臺 賜酺中外 帝與英失 洗之 賜英失爵一吉飡 白馬緋衣
行大場 于南郊
9월, <옥진玉珍>이 아들 <비대比臺>를 낳아 나라 안팎에 잔치를 열어 술을 내리고
제와 <영실英失>이 아기를 씻고
<영실英失>에게 일길찬의 작위와 백마와 비의(緋衣)를 내렸다.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扶余大震 遣使問之
10월, 부여에 큰 지진이 일어나 사신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十一月 帝與玉珍 告比臺 于神宮 大宴骨仙 于南桃
賜魏花吾道 紫金神衣
11월, 제와 <옥진玉珍>이 신궁(神宮)에서 <비대比臺>를 낳았음을 고하고
남도(南桃)에서 골선에게 크게 잔치를 얼었다.
<위화魏花>와 <오도吾道>에게 자금신의(紫金神衣)를 내렸다.
十二月 帝與玉珍 入海宮
布覧剡花稟祖主
12월, 제와 <옥진玉珍>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포람布覧>과 <염화剡花>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10년(523) 현토(玄兎) 癸卯
正月 受朝 于海宮
三院行玄兎大祭 各地獻兎者百計 命作兎園 而畜之 置兎翁二人 掌其事
異腦雨花 入朝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삼원(三院)에서 현토(玄兎) 대제를 지냈다.
각 지방에서 토끼 백 마리를 바쳐 토원(兎園)이라고 이름을 지어 기르도록 하고
토옹(兎翁) 2명을 두어 그 일을 관장토록 하였다.
<이뇌異腦>와 <우화雨花>가 입조하였다.
二月 扶余築雙峴城
2월 부여가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쌍현성(雙峴城)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에 있는 성으로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한 성이다.
三月十六日 行妙王大誕 于三院 中外仙巫會者 萬數 大宴七日 賑民窮乏者
3월, 16일 삼원(三院)에서 묘왕의 환갑연을 열었다.
나라 안팎 선무(仙巫)들이 만명이 모여서 큰 잔치를 7일 동안 열고
가난한 백성을 진휼하였다.
五月 扶余斯摩薨 明襛立
5월 부여 <사마斯摩(461-523)>가 죽어 <명농明襛(500?-554>이 섰다.
六月 森欣陽花稟祖主
宝果公主逃 歸于我 命洪器迎之
以三葉妻阿時 行吉 鮑祠 先是三葉與阿時 密通 於重五之夜 至是帝許 主其吉
6월 <삼흔森欣>과 <양화陽花>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보과宝果(485-539)>공주가 도망와서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홍기洪器>에게 맞이하도록 명하였다.
<보과宝果>는 동성왕 <모대(466-501)>의 딸이다.
<삼엽三葉>을 <아시阿時>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치루었다.
이에앞서 <삼엽三葉>과 <아시阿時>가 단오날 밤에 밀통(密通)하여
이제와서 제가 허락하고 그 길례를 주관한 것이다.
이때 <삼엽> 17세, <아시> 43세이다.
七月 帝享宝果 于凉宮
宝浪生 伊欣子宝欣
守知等與梁使蕭明來 宴于三院
蕭明獻黃金像 于帝及妙王
眞晩生 竹公子䪞公
以阿時女柳珍妻三智 苔宗女伊雪妻三彘
以伊登女有德有太子宮權妻
盖碧花后欲謀玉珍 而交結重臣也
魏花乃 諫于帝 帝乃罷阿時 以魏花爲兵部令
7월, 제가 양궁(凉宮)에서 <보과宝果>를 접대하였다.
<보랑宝浪>이 <이흔伊欣>의 아들 <보흔宝欣>을 낳았다.
<수지守知> 등이 양(梁)의 사신 <소명蕭明>과 함께 돌아와서
삼원(三院)에서 잔치를 열었다.
<소명蕭明>이 제와 묘왕에게 황금상(黃金像)을 바쳤다.
<진만眞晩>이 <죽공竹公>의 아들 <잡공䪞公>을 낳았다.
<아시阿時>의 딸 <유진柳珍>을 <삼지三智>의 처로 하고
<태종苔宗>의 딸 <이설伊雪>을 <삼체三彘>의 처로 하였다.
<이등伊登>의 딸이 덕이 있어 태자궁 권처로 하였다.
<벽화碧花>후가 <옥진玉珍>을 모략코자 중신(重臣)들과 서로 결탁하였다.
이에 <위화魏花>가 제에게 간하여 제가 <아시阿時>를 파하고
<위화魏花>를 병부령으로 하였다.
八月 命宝果 行嘉俳
麗人大侵扶余 佐將志忠 退之
命乃車蓮興往 會斯摩葬
8월 <보과宝果>에게 명하여 가배를 행하였다.
고구려가 부여를 크게 침노하여 좌장군 <지충志忠>이 이를 물리쳤다.
<내거乃車>와 <연흥蓮興>이 가서 <사마斯摩>의 장례에 참여토록 명하였다.
九月 海時宮主卒
9월, <해시海時>궁주가 죽었다.
十月 肜肜公主薨
髮長姬生 玉宗子薦公 賜米衣
10월, <융융肜肜(470?-523)>공주가 죽었다.
<발장髮長>이 <옥종玉宗>의 아들 <천공薦公>을 낳아 쌀과 옷을 내렸다.
十一月 帝與玉珍 入海宮
11월, 제와 <옥진玉珍>이 해궁에 들어갔다.
十二月 苔宗肜山稟祖主
田檍大府令 畏南賓客令
12월, <태종苔宗>과 <융산肜山>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전억田檍>을 대부령(大府令)으로 <외남畏南>을 빈객령(賓客令)으로 하였다.
법흥왕 11년(524) 청룡(靑龍) 甲辰
正月 受朝 海宮
角干伊宗薨 翌日夫人白氏亦薨 葬以太公禮
伊宗南政北伐 勳功居一 而終身不矜 老歸南山之下 養魚爲樂
妙王深信其才 終始大任 聞喪而徹饍
梁使蕭明等 歸
斗花妻厚蒂與柯枝相通 奔枝不歸 帝不能禁止
白蘭生 帝子蘭公
以芬兒妻天林 以鼻蘭妻汕宗
妙王微疾 帝自海宮還
命守知等 採中外諸度 更正新制 以領示三門 命沙忠 草詔讀之
其詔 曰 “文章者 尊卑貴賤之表也
我祖宗 尙儉素 略制度
朕登大祚 國泰民安 奢侈日興 而國不疲 皆我祖宗有德也
乃命大書博士 采古汲古 以定百官公服 朱紫之秩 以爲制
宜爾臣民 無至僭濫犯法 極體朕心
王子殿君太公 國之章 皆從仙院之制
太大角干大角干上大等位 伊伐飡伊尸飡大登之位
皆用金紫衣銀魚大牙笏錦冠珠纓白馬檀車
匝飡波珍飡大阿飡上登之位
皆用銀紫衣銅魚圓頭牙笏緋冠同前
衿荷臣綠紫衣銅魚同前
四重阿飡至阿飡一等之位 緋衣銅於同前
一吉飡沙飡及飡二等之位
緋衣藍帶緋冠貝纓直頭牙笏靑馬楊車
九重大奈至大奈麻三等之爲 靑衣組纓鳥帽木笏同前
七重奈麻至奈麻四等之位 靑衣鳥帽素纓木雜車馬
大舍以下同前
赤位大舍組纓華冠
堂下大奈麻從四等之位
阿飡以上 帶寫從仙品 刀制從勳功
阿飡以下 隨等級 降帶寫衣紋 仙品者特用仙衣
升等有特別功勞 技能者亦用賜衣 一如上堂 赤位之例
阿飡以下 在令位加一等用之 阿飡以上 在令位者亦如之
典翁院翁之年久多績者 特用仙院之制不階
隨宜公卿之室 已經權妻者 皆用其品
不在瓊籍者 一從仙院之制
眞骨女子 降于仙臣者 在家從夫 入宮用品仙臣之得
配眞骨 待仙院之稟 請皆封其爵 乏骨品 以爲登龍之門
而殊遇骨女 若自私奔犯法 大違仙規者不用
此制若有大詔 仙稟特复 許吉如前
遊花 衣服一從仙規 民庶當從理方之制 無有越法 僭制可也”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각간 <이종伊宗>이 죽고 다음날 부인 <백씨白氏> 역시 죽어
태공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이종伊宗>은 남쪽을 다스리고 북쪽을 정벌한 공이 있으나 종신토록 자만하지않고
늙어서 남산아래 한 곳에 거주하며 고기를 기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묘왕이 그의 재능을 깊이 믿어 시종 대임(大任)을 맡겼고
초상이 났음을 듣고서 밥상을 거두엇다.
양(梁)의 사신 <소명蕭明> 등이 돌아갔다.
<두화斗花>의 처 <후체厚蒂>가 <가지柯枝>와 상통하여
<가지柯枝>에게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으니 제는 금지할 수 없었다.
<백란白蘭>이 제의 아들 <란공蘭公>을 낳았다.
<분아芬兒>를 <천림天林>의 처로 하고 <비란鼻蘭>을 <산종汕宗>의 처로 하였다.
묘왕이 작은 병이 나서 제가 해궁에서 돌아왔다.
<수지守知> 등에게 명하여 나라 안팎의 모든 제도를 채택하여
새로운 제도로 바꾸도록 하여 삼문(三門)에 반포하고
<사충沙忠>에게 명하여 민초들이 이를 읽도록 조칙을 내렸다.
그 조칙에서 이르기를
" 문(文)과 장(章)은 신분의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의 표시이다.
우리 나라는 검소힘을 숭상하여 법도를 제정하여 다스렸다.
짐이 등극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사치가 날로 심하나
나라가 병들지 않음은 모두 우리 조상의 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서(大書)와 박사(博士)에게 명하여 옛 제도를 따서
백관의 공복(公服)으로 정하니 붉은색의 옷과 자주색의 옷의 질서가 제도가 되었다.
宜爾臣民 無至僭濫犯法 極體朕心
마땅히 너희 신민(臣民)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법을 어김이 없어야 함이
몸을 나누는 짐의 마음이다.
왕자, 전군, 태공은 나라의 장(章)으로 모두가 선원(仙院)의 제도에 따른다.
태대각간, 대각간은 상대등의 직위로 이벌찬,이시찬은 대등의 직위로
모두 금자의(金紫衣), 은어(銀魚), 대아홀(大牙笏), 금관(錦冠),
주영(珠纓), 백마(白馬).단거(檀車)를 사용한다.
잡찬, 파진찬, 대아찬은 상등의 직위로
모두 은자의(銀紫衣), 동어(銅魚), 원두(圓頭), 아홀(牙笏), 비관(緋冠), 전과같다.
금하신(衿荷臣)은 록자의(綠紫衣), 동어(銅魚), 전과같다.
4중아찬에서 아찬까지는 1등의 직위로 비의(緋衣), 동어(銅魚), 전과같다.
일길찬, 사찬, 급찬은 2등의 직위로
비의(緋衣), 람대(藍帶), 비관(緋冠), 패영(貝纓), 직두(直頭),
아홀(牙笏), 청마(靑馬), 양거(楊車)를 사용한다.
9중대나에서 대나마까지는 3등의 직위로
청의(靑衣), 조영(組纓), 오모(鳥帽), 목홀(木笏), 전과같다.
7중나마에서 나마까지는 4등의 직위로
청의(靑衣), 오모(鳥帽), 소영(素纓), 목잡(木雜), 거마(車馬)를 사용한다.
대사 이하는 전과같다.
적위(赤位) 대사는 조영(組纓), 화관(華冠)을 사용한다.
당하 대나마는 종4등의 직위다
아찬 이상은 대사(帶寫)는 선품에 따르고 도제(刀制)는 훈공에 따른다.
아찬 이하는 등급에 따라 대사(帶寫)와 의문(衣紋)을 내리고
선품이 있는 자는 특별히 선의(仙衣)를 사용한다.
특별한 공로가 있는 자는 등급을 올리고 기능이 있는 자 역시 옷을 내려 사용하고
상당(上堂)과 같게 적위(赤位)의 반열로 한다.
아찬 이하는 령으로 직위를 1등을 더하여 사용하고
아찬 이상도 령으로 직위가 있는 자는 이와같다.
전옹(典翁), 원옹(院翁) 중에서 나이가 오래되고 실적이 많은 자는
특별히 선원(仙院)의 계급이 아닌 제도로 등용한다.
이미 권처가 된 자는 마땅히 공경의 내실에 따라 모두 그 품계를 사용한다.
경적(瓊籍)이 없는 자는 선원(仙院)의 제도 하나를 따른다.
진골의 여자가 선신(仙臣)에게 하가하여 남편을 따라 집에 있다가
궁에 들어오면 선신(仙臣)이 득한 품계를 사용한다.
진골의 배우자는 선원의 품주로 대우하고
모두가 그 작위를 봉할 것을 청하였으나 골품이 결핍하면 등용하게 한다
골녀를 만나 죽이고 만약 스스로 사사로이 도망하여 법을 어겨
선원의 규칙에 크게 위반한 자는 등용하지 아니한다.
만약 이 제도에 큰 조칙이 있어 특히 또 다시 선원의 품주가 죈 자는
여전히 길례를 치루도록 허락한다.
유화(遊花)의 의복은 선원의 규칙에 따른 하나로 한다.
서민(庶民)은 마땅히 이방(理方)의 제도를 따르고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법을 뛰어 넘는 것을 자제함이 옳다." 라고 하였다.
二月 以大書令守知兼掌仙院令天臺令
改定院臺之制 一新其規 新進博士
皆習梁書 考科用之
馬大賓客令 沙忠大書郞 畏南仙門大理方 苩盛賓客郞 各加爵一及
以髮長妻玉宗 行吉 于皐王宮 妙王主之
2월, 대서령(大書令) <수지守知>를 선원령과 천대령을 겸하여 관장토록 하고
선원(仙院)과 천대(天臺)의 제도를 개정하여
그 규칙을 새로 하나로 하여 박사에게 올렸다.
모두 양(梁)의 문서를 배우도록 하고 이를 시험보게 하였다.
<마대馬大>를 빈객령으로 <사충沙忠>을 대서랑으로 <외남畏南>을 선문대이방으로
<백성苩盛>을 빈객랑으로 하고 각각 일급의 작위를 더하였다.
<발장髮長>을 <옥종玉宗>의 처로 하여 고왕궁에서 묘왕이 주관하여 길례를 행하였다.
三月 雨花生子月光 遣使獻方物 於玉珍宮
起弓生 山宗子起宗
3월, <우화雨花>가 아들 <월광月光>을 낳아 사신을 보내어 옥진궁에 방물을 바쳤다.
<기궁起弓>이 <산종山宗>의 아들 <기종起宗>을 낳았다.
四月 非西護城將軍
4월, <비서非西>를 호성장군으로 하였다.
五月 以皐蘭妻眞宗
命斗花統京外軍
5얼, <고란皐蘭>을 <진종眞宗>의 처로 하였다.
<두화斗花>에게 경외군(京外軍)을 통솔토록 명하였다.
六月 乃車雪花稟祖主
芥紅生 蒠公子蘭公
6월, <내거乃車>와 <설화雪花>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개홍芥紅>이 <식공蒠公>의 아들 <란공蘭公>을 낳았다.
七月 靑明遣使 入貢 訴 異腦不守約納地 請與苔宗伐之 玉珍勸 帝不許
7월, <청명靑明>이 사신을 보내어 들어와 공물을 바치며
<이뇌異腦>가 땅을 바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고하며
<태종苔宗>과 함께 <이뇌異腦>를 칠 것을 청하였으나
<옥진玉珍>이 권하여 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八月 命紅腦 行嘉俳
宝果生 帝女南毛 帝洗之 曰 “汝以四十 生吾女 亦天命也 可不樂乎” 宝果感泣 抱帝 禱子
8월, <홍뇌紅腦>에게 가배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보과宝果>가 제의 딸 <남모南毛>를 낳아 제가 아기를 씻고 말하기를
" 너는 나이 40으로 나의 딸을 낳으니 이 역시 천명이니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니
<보과宝果>가 감읍하여 제를 안고 아들을 낳기를 기도하였다.
九月 以比臺公誕日 賜酺群臣
帝會靑巤 于境上 幸之 靑巤願爲權妻 而終身事帝 帝許之
分加耶爲南北 封靑明于北國 封異腦于南國
明華自扶余來
9월, <비대比臺>공의 생일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왕이 <청렵靑巤>을 국경에서 만나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
<청렵靑巤>은 권처(權妻)로 삼아주기를 원하며 종신토록 왕을 섬기고자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가야(加耶)를 남북으로 나누었다.
<청명靑明>을 북국(北國)왕으로, <이뇌異腦>를 남국(南國)왕으로 봉하였다.
<명화明華>가 부여에서 돌아왔다.
十月 妙元生 山宗子山育
桂花生 仇衡子武力
10월, <묘원妙元>이 <산종山宗>의 아들 <산육山育>을 낳았다.
<계화桂花>가 <구형仇衡>의 아들 <무력武力>을 낳았다.
이 <무력武力>이 <유신庾信(595-673)>의 할아버지이다.
十一月 靑華宮主薨
異腦來朝 請以月光爲太子 廢虎腦 許之 告月光 于神宮
玉珍請立 比臺爲太子 帝以三夫無罪 難之
玉珍曰 “三夫烝于碧花 已娠 何謂無罪”
帝曰 “朕棄碧花 非三夫之罪也”
玉珍乃批帝 而哭之 帝乃慰解之
歌仙柯枝卒 葬于沙嵩陵 以其女鹿氏爲祭主
帝與玉珍 入海宮
11월, <청화靑華>궁주가 죽었다.
<청화靑華(457-524)>는 신라 19대 눌지왕(387-458)과 가야녀 <혜밀>의 딸이고
대가야 18대 여왕 <청렵靑巤(476-524)>의 어머니이다.
<이뇌異腦>가 래조하여
<호뇌虎腦>를 폐하고 <월광月光>을 태자로 삼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신궁에서 <월광月光>을 낳았음을 고하였다.
도광(섬신) - 성국(442-506)
찬명(청화) - 청렵(476-524)
성국(청렵) - 이뇌(494- )
이뇌(청렵) - 호뇌(514- )
호조(선혜) - 양화(504-561)
이뇌(양화) - 월광(524- )
<호뇌虎腦(514- )>는 <이뇌>와 그 어머니 <청렵>이 증하여 낳은 아들이고
<월광月光(524- )>은 <이뇌>와 <선혜>의 딸인 <양화>가 낳은 아들이다.
이때 대가야 태자 <호뇌> 11살, <월광> 1살이다.
<옥진玉珍>이 <비대比臺>를 태자로 세울 것을 청하니
제가 <삼부三夫>에게 죄가 없어 이를 난처해 하였다.
<옥진玉珍>이 말하기를
" <삼부三夫>는 <벽화碧花>를 증하여 이미 임신을 하였는데
어찌 죄가 없다고 하십니까?" 라고 하니
제가 말하기를
" 짐이 <벽화碧花>를 버렸으니 <삼부三夫>의 죄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옥진玉珍>이 제를 비난하며 통곡하니 제가 이해하고 위로하였다.
모진(벽화) - 삼부(503- )
모진(옥진) - 비대(522- )
이때 태자 <삼부三夫> 22살, <비대比臺> 3살이다.
<옥진>이 대가야 태자 <호뇌>를 폐하고 갓 태어난 <월광>을 태자로 허락하자
태자 <삼부>가 어머니 <벽화>와 증한 사실을 고하며 태자 <삼부>를 페하고
자기의 아들 <비대>를 태자로 세울 것을 청한 것이다.
가선(歌仙) <가지柯枝(495-524)>가 죽어 그 딸 <록씨鹿氏>를 제주로 하여
<사숭沙嵩(482-520)>릉에 장례하였다.
제와 <옥진玉珍>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十二月 妙王行眞經會 于別洞
剡梁山帝稟祖主
12월, 묘왕이 별동에서 진경회(眞經會)를 열었다.
<염량剡梁>과 <산제山帝>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12년(525) 목사(木蛇) 乙巳
正月 受朝 于海宮
碧花生 三夫子三食
帝使伊雪讓之 曰 “非吾子也 可歸其父 而勿來”
碧花泣 曰 “此子豈他人乎 帝何若是其薄乎”
宮中皆憐之 爲之泣下 下者無數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벽화碧花>가 <삼부三夫>의 아들 <삼식三食>을 낳았다.
제가 <이설伊雪>을 보내어 이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 나의 아들이 아니다. 그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으니 오지 말라."라고 하니
<벽화碧花>가 울면서 말하기를
" 이 아들이 어찌 남입니까?
만약 제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야박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궁중의 모두가 이를 가련히 여겨 눈물을 흘리는 자가 무수히 많았다.
二月 帝自海宮還
廢三夫 以比臺爲太子 以立宗爲太子師 德吹爲太子兵官 命設太子衛軍
以伊登爲上州軍主 比梁爲加耶監軍
以玉珍爲天宮皇后 加魏花爵舒弗邯 行國公仙王事 統中外仙軍頭上
厚蒂生 柯枝子柯花 妙王命斗花洗之 賜米衣
命碧花后 出遊加耶神山
扶余使解融 來請宝果 不許
2월, 제가 해궁에서 돌아왔다.
<삼부三夫>를 폐하고 <비대比臺>를 태자로 하여 <입종立宗>을 태자의 사부로 하고
<덕취德吹>를 태자의 병관으로 하고 태자의 위군(衛軍)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이등伊登>을 상주(上州)군주(軍主)로 <비량比梁>을 가야 감군(監軍)으로 하였다.
<옥진玉珍>을 천궁황후로 하고 <위화魏花>에게 서불감 작위를 더하여
국공(國公)과 선왕(仙王)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
나라 안팎 선군두상(仙軍頭上)을 통솔토록 하였다.
<후체厚蒂>가 <가지柯枝>의 아들 <가화柯花>를 낳아
묘왕이 <두화斗花>에게 아기를 씻도록 명하고 쌀과 옷을 내렸다.
<벽화碧花>후에게 명하여 가야 신산(神山)에 유람토록 하였다.
부여가 <해융解融>을 보내어 <보과宝果>를 돌려보내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三月 三葉生 阿時子未珍夫
有白鶴來巢室 南人皆奇之
帝欲幸之 而恐玉珍后妬之 使人授衣
3월, <삼엽三葉>이 <아시阿時>의 아들 <미진부未珍夫>를 낳았다.
이 <미진부未珍夫(525- )>가 신라 2대 풍월주(544-547)로
<미실美室(547-616?)>의 아버지이다.
흰 닭이 둥우리에서 나오니 남쪽 사람들 모두가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제가 <삼엽>을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고자 하였으나
<옥진玉珍>후의 질투가 두려워 사람을 보내어 옷을 주었다.
五月 玉珍后生女妙道 乃英失女也 帝命英失洗之 后怒 使帝更洗之 帝不能辭
薛雲生 芬宗女雲文
5월, <옥진玉珍>후가 딸 <묘도妙道>를 낳으니 <영실英失>의 딸이다.
제가 <영실英失>에게 아기를 씻으라고 명하였다.
후가 노하여 제를 시켜 다시 아기를 씻도록 하니 제는 아무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묘도妙道>가 대원신통으로 <미실美室(547-616?)>의 어머니이다.
<설운薛雲>이 <분종芬宗>의 딸 <운문雲文>을 낳았다.
六月 芊覽堯花稟祖主
帝幸柳眞宮 宴妙王仙王
6월, <천람芊覽>과 <요화堯花>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제가 <유진柳眞>궁에 행차하여 묘왕과 선왕(仙王)에게 잔치를 열었다.
七月 妙王仙王 入捺己神山
沙道美生 英失子弩里夫
7월, 묘왕과 선왕이 날기 신산에 들어갔다.
<사도미沙道美>가 <영실英失>의 아들 <노리부弩里夫>를 낳았다.
八月 行嘉俳 勝心散花
8월, 가배를 행하고 <승심勝心>이 꽃을 뿌렸다.
九月 妙王崩 於捺己神山 春秋六十三 返葬于智證陵 行大祭 于平立宮 柳眞主之
帝幸 于剡光仙院 慰仙王魏花
‘汝與朕同體 勿以妙王朝天 自毁如此而其 我天下 以安 天宮太子可也’
魏花拜謝 願殉妙王 不許
命保道后出 爲仙王妃 以尊仙嚴
9월, 묘왕이 날기 신산에서 붕(崩) 하였다.
춘추 63세로 <지증智證>릉에 반장(返葬)하고
<유진柳眞>이 주관하여 평립궁에서 대제를 지냈다.
제가 염광선원에 행차하여 선왕 <위화魏花>를 위로하며
" 너와 짐은 동체로 묘왕이 하늘로 올라감을 막지 못하여
스스로 이와같이 그 몸을 망쳐
나의 천하는 편안하니 천궁(天宮) 태자로 함이 옳다."라고 하니
<위화魏花>가 사례하며 묘왕을 따라 순사하기를 원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보도保道>후에게 명하여 나가서 선왕의 비가 되도록 하고 선엄(仙嚴)으로 높이었다.
* 연제(463-525)의 자녀(6남8녀)
연제(지도로) - 모진(480-540)
보현(482- )
보인(485?- )
입종(491-539)
진환(499- )
진만(502- )
연제(비처) - 후체(484- )
산종(487- )
산제(494- )
연제(모진) - 후제(497- )
옥종(505-528)
저진(514-531)
연제(위화) - 진종(508- )
유진(511- )
十月 行妙王大福 于三院
10월, 삼원(三院)에서 묘왕 대복(大福)을 지냈다.
十一月 行平立宮大祭 帝與天后太子 主之 仙王仙后 率仙徒五千人 祈禱七日
仙王上 妙王謚曰 智證天后迎帝妙王龍華大神帝 與天宮 奉像 行禮
竹公與尋公妻眞昭 私通 尋公愛竹公 願與其妻 不許
11월, 평립궁에서 제와 천후와 태자가 주관하여 대제를 지내고
선도(仙徒) 5천명을 인솔하여 7일간 기도하였다.
선왕이 묘왕의 시호를
지증천후(智證天后) 영제묘왕(迎帝妙王) 용화대신제(龍華大神帝)로 받들어 올리고
천궁(天宮)의 상(像)을 모시고 예(禮)를 지냈다.
<죽공竹公>과 <심공尋公>의 처 <진소眞昭>가 사통하였다.
<심공尋公>이 <죽공竹公>을 사랑하여 그 처로 주기를 원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十二月 帝與天宮太子 入海宮
阿時進七宝王轎 于天宮 以願爲犬馬之臣 許之
斗花厚蒂稟祖主
12월, 제와 천궁태자가 해궁으로 들어갔다.
<아시阿時>가 천궁(天宮)에 칠보옥교(七宝王轎)를 진상하고
견마지신(犬馬之臣)이 되기를 원하니 허락하였다.
<두화斗花>와 <후체厚蒂>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13년(526) 백마(白馬) 丙午
正月 受朝 于海宮
行白馬大祭 于神宮
阿時复爲兵部令 沙忠大書令 天林乘府令 蒠公理方令
森欣船府令 眞宗仙院令 車夫倉廩令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신궁에서 백마(白馬)대제를 지냈다.
<아시阿時>를 다시 병부령(兵部令)으로 <사충沙忠>을 대서령(大書令)으로
<천림天林>을 승부령(乘府令)으로 <식공蒠公>을 이방령(理方令)으로
<삼흔森欣>을 선부령(船府令)으로 <진종眞宗>을 <선원령仙院令>으로
<거부車夫>를 창름령(倉廩令)으로 하였다.
二月 宝果生 帝子毛郞 于海宮 帝洗之
異香滿室瑞光續 宮人皆異之
以竹公妻眞晩公主 改嫁于竹永 永竹公庶兄也
2월, <보과宝果>가 제의 아들 <모랑毛郞>을 해궁에서 낳아 제가 아기릏 씻었다.
기이한 향이 산실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빛이 계속 이어지니
궁인들 모두가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 <모랑毛郞(526-555)>이 신라 3대 풍월주(548-555)이다.
<죽공竹公>의 처 <진만眞晩>공주가 <죽영竹永>에게 개가(改嫁)하였다.
<죽영竹永>은 <죽공竹公>의 서형(庶兄)이다.
三月 紅心源花
髮長生 玉宗女峷姬
3월, <홍심紅心>을 원화(源花)로 하였다.
<발장髮長>이 <옥종玉宗>의 딸 <신희峷姬>를 낳았다.
四月 芬兒生 天林子天芬
角干宣登殿君薨 于碧院 葬以王禮 立廟曰白阿
春秋五十八 天姿慧通 淡於名利 以音律自好 未嘗叱一奴婢 靄然 常春風 世稱福公子
尋公分其地 爲竹公院 帝嘉其志 命匠作令 營其院
4월, <분아芬兒>가 <천림天林>의 아들 <천분天芬>을 낳았다.
각간 <선등宣登(469-526)> 전군(殿君)이 벽원(碧院)에서 죽어
왕의 예로 장례를 치루고 사당을 세워 백아(白阿)라고 하였다.
춘추 58세로 타고난 자태가 슬기롭고 명리에는 담담하여 음율을 스스로 좋아하였고
일찌기 단 한명의 노비를 질책한 적이 없으며 항상 춘풍에 아지랑이 같아
세상 사람들이 복(福)공자라고 불렀다.
<선등宣登(469-526)> 은 지증왕 <지도로>의 아들이고
<벽아碧我(469-526)>의 계부로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었다.
<심공尋公>이 그의 땅을 나누어 죽공원(竹公院)으로 하니
제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장작령(匠作令)으로 명하여 그 원을 운영토록 하였다.
五月 宝隆使扶余 責明襛不守臣職 且辨宝果明華出境之 故及流民納入事
碧我宮主欲見碧花后 訴于帝 乃使碧登 往加耶 迎碧花比梁 而星夜歸京
5월, <보융宝隆>을 부여에 보내어
<명농明襛>이 신하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함을 문책하였다.
또한 <보과宝果>와 <명화明華>가 국경을 넘어와서
유민(流民)으로 거두어들인 일을 분명히 하였다.
<벽아碧我>궁주가 <벽화碧花>후를 만나보고자 제에게 하소연하여
<벽등碧登>을 보내니 가야에 가서 <벽화碧花>와 <비량比梁>을 맞이하여
별이 빛나는 밤에 경도(京都)로 돌아왔다.
六月 以碧花妻比梁 行吉 于鮑祠
阿時三葉稟祖主 斗花兵部令
6월, <벽화碧花>를 <비량比梁>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치루었다.
<아시阿時>와 <삼엽三葉>을 품주와 조주로 <두화斗花>를 병부령으로 하였다.
이때 <벽화> 42세, <비량> 39세이다.
선모(보혜) - 아시(481- )
모진(벽화) - 삼엽(507- )
손등(벽아) - 벽화(485- )
염신(벽아) - 위화(487- )
결아(벽아) - 두화(496?-530)
<위화>와 <두화>는 <삼엽>의 외삼촌이다.
七月 帝與玉珍魏花 率仙徒 入捺己神山 行妙王神后大福 仍享仙巫五日
宝浪生 守知子浪知 伊欣年老 以其妻宝浪妻守知 而生也
後五日 伊欣卒 以角干禮葬之
7월, 제와 <옥진玉珍>과 <위화魏花>가 선도를 인솔하여 날기 신산에 들어가
묘왕 신후의 대복(大福)을 지내고 선무(仙巫)들을 5일간 접대하였다.
<보랑宝浪>이 <수지守知>의 아들 <랑지浪知>를 낳았다.
<이흔伊欣>이 늙어 그 처 <보랑宝浪>을 <수지守知>의 처로 하니 낳은 것이다.
5일 후 <이흔伊欣>이 죽어 각간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이흔伊欣(461-526)>은 <연제蓮帝(463-525)>의 오빠이다.
八月 帝在捺己
8월, 제가 날기(捺己)에 있었다.
九月 行妙王大祭 于捺己神宮
碧我宮主薨 帝自捺己還 以后 葬于白阿陵 加爵碧登爲阿飡 碧登妻肜花白神馬
保道后生 魏花子魏公 帝洗之
命大書令沙忠 製黃律 評聽
9월, 날기 신궁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다.
<벽아碧我>궁주가 죽어 제가 날기에서 돌아와 후를 백아릉(白阿陵)에 장례하고
<벽등碧登>에게 아찬의 작위를 더하고
<벽등碧登>의 처 <융화肜花>에게 백신마(白神馬)를 내렸다.
* <벽아碧我(469-526)>의 자녀(4남5녀)
벽아(손등) - 벽화(485- )
벽아(염신) - 위화(487- )
염화(489- )
릉화(491?- )
설화(494?- )
벽아(결아) - 두화(496?- )
벽아(선등) - 양화(498?- )
벽등(507- )
벽아(모진) - 요화(501?- )
<보도保道>후가 <위화魏花>의 아들 <위공魏公>을 낳아 제가 아기를 씻었다.
대서령 <사충沙忠>에게 명하여 황율(黃律)을 제작토록 하여 듣고 평하였다.
十月 扶余修熊津城 立沙井柵
燕氏生 苩盛子仙興
10월, 부여가 웅진성을 수리하고 사정책(沙井柵)을 세웠다.
<연씨燕氏>가 <백성苩盛>의 이들 <선흥仙興>을 낳았다.
十一月 守知兵部令 宝門兵部郞 斗花理方令
11월, <수지守知>를 병부령으로 <보문宝門>을 병부랑으로
<두화斗花>를 이방령으로 하였다.
十二月 無雪
魏花俊室稟祖主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위화魏花>와 <준실俊室>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14년(527) 화양(火羊) 丁未
正月 受朝 眞宮
勝心生 五宗子勝眞
眞晩生 竹永女筍姬
遷三夫 于加耶
宝果宮成
정월, 진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승심勝心>이 <오종五宗>의 아들 <승진勝眞>을 낳았다.
<진만眞晩>이 <죽영竹永>의 딸 <순희筍姬>를 낳았다.
<삼부三夫>가 가야에서 옮겨왔다.
<보과宝果>궁이 완성되었다.
二月 好梁宮主薨
2월, <호량好梁>궁주가 죽었다.
<호량好梁(440-527)>은 <미해>와 <보미>의 딸이다.
三月 桂花生 仇衡子武德
3월, <계화桂花>가 <구형仇衡>의 아들 <무덕武德>을 낳았다.
四月 嫁白蘭 于發山
帝召碧花 于夏宅 幸之
沙忠上書言 ‘仙門之廢瘼' 仙門大怒 請斬沙忠 帝不得已 命罷沙忠 職歸鄕里
4월, <백란白蘭>을 <발산發山>에게 시집 보냈다.
제가 <벽화碧花>를 하택(夏宅)에 불러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사충沙忠>이 올린 글에 '선문(仙門)의 폐막(廢瘼)'이라는 언급이 있어
선문(仙門)이 크게 노하여 <사충沙忠>을 참하도록 청하니
제가 부득이 <사충沙忠>을 파면하여 향리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五月 帝與玉珍 入捺己神山
5월, 제와 <옥진玉珍>이 날기 신산에 들어갔다.
六月 繡山覺淵稟祖主 駃兒仙院令 斗花匠作令 塞斗理方令
6월, <수산繡山>과 <각연覺淵>을 품주와 조주로
<결아駃兒>를 선원령으로 <두화斗花>를 장작령으로
<새두塞斗>를 이방령으로 하였다.
七月 金官入貢
7월, 금관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八月 行嘉俳 于別洞
8월, 별동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九月 行大場 于一善
帝自捺己還
行妙王大祭 于平立宮
9월, 일선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제가 날기에서 돌아왔다.
평립궁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다.
十月 行白羊祭 于明活山
三夫與誠華相通 契德怒 訴于監軍 相爭 帝命碧花 遣人責之 三夫不聽
10월, 명활산에서 백양제를 지냈다.
<삼부三夫>와 <성화誠華>가 상통하여 <계덕契德>이 노하여
감군(監軍)에게 서로의 다툼을 하소연하니
제가 <벽화碧花>에게 명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를 문책하였으나
<삼부三夫>가 듣지 않았다.
이때 <삼부> 25세, <성화> 39세, <계덕> 43세, <벽화> 43세이다.
十一月 以長沙宮爲碧花宮
命英失與天宮 入海宮
柳眞與覺德相通 願爲夫婦 請於仙王 帝怒 流覺德 於一善 冒雪而行
11월, 장사궁(長沙宮)을 벽화궁(碧花宮)으로 하였다.
<영실英失>과 천궁(天宮)에게 명하여 해궁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유진柳眞>과 <각덕覺德>이 상통하여 선왕(仙王)에게 청하여 부부가 되기를 원하니
제가 노하여 <각덕覺德>을 일선(一善)에 유배를 보내니 눈을 무릅쓰고 시행하였디.
이때 <유진>과 <각덕>은 동갑내기로 17세이다.
十二月 帝幸三蓮公主 于碧花宮
苔宗肜山稟祖主
12월, 제가 벽화궁에서 <삼연三蓮>공주에게 행차하였다.
<태종苔宗>과 <융산肜山>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15년(528) 황원(黃猿) 戊申
正月 受朝 眞宮
天宮生 帝女好道 于海宮 帝往洗之 仍幸日月池 訪引月奾子 于池院奾閣
帝與柳眞宮 還都 召覺德歸京 許爲夫婦 行吉 于皐王宮 帝與髮長 主之
정월, 진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천궁이 제의 딸 <호도好道>를 해궁에서 낳아 제가 가서 아기를 씻고
일월지(日月池)에 행차하여 월선자(月奾子)를 데리고
지원(池院) 선각(奾閣)을 방문하였다.
제와 <유진柳眞>궁이 경도(京都)로 돌아와 <각덕覺德>을 경도로 돌아오도록 불러
부부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제와 <발장髮長>이 주관하여
고왕궁(皐王宮)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二月 命擇骨門俊才十二人 荒宗年十七居文之甲 西力夫居武之甲 異次頓居仙之甲
皆授舍人職 賜衣馬奴子 以獎力學之風 于中外
2월 골문의 준재(俊才) 12명을 골라 뽑도록 명하니
<황종荒宗>은 나이 17세로 문(文)에서 으뜸이었고,
<서력부西力夫>는 무(武)에서 으뜸이었고,
<이차돈異次頓>은 선(仙)에서 으뜸이었다.
모두 사인(舍人)의 직을 주었다.
옷과 말과 사내 종을 내려 학문에 힘쓰는 풍속을 나라안팎에 권장하였다.
물력(묘홍) - 황종(512- ){거칠부}
철부(준치) - 서력부(510?- )
위화(식란) - 이차돈(507-528)
三月 帝迎天宮 于海宮 還告好道 于神宮 賜酺百官 于碧院花林
帝與天宮 留花林 五日
異次頓自云 與大日如來 講論眞經 天下萬國 當行西域佛法 帝命兩門議之
3월, 제가 해궁에서 천궁을 맞이하여 돌아와 신궁에서 <호도好道>를 낳았음을 고하고
벽원(碧院) 화림(花林)에서 백관에게 잔치를 열고 술을 내렸다.
제와 천궁이 5일간 화림(花林)에 머물렀다.
<이차돈異次頓>은 스스로 대일여래(大日如來)라 이르고 진경(眞經)을 강론하며
세상의 모든 나라는 마땅히 서역의 불법을 시행하여야 한다고 하니
제가 양문(兩門){선문과 골문}에 명하여 이를 논의토록 하였다.
四月 仙門効 異次頓異瑞 當斬 不許 命羽林軍解散 各院仙徒五千人
設眞經大會 于別洞 帝與天宮 親受眞言 于仙王
命中外大小人民 勿行異敎
舍人覺德素 與異次頓好合 內奉佛道 外拜樹王 柳眞責之 曰
“汝爲我夫 何不信 我父之道 而拜西方金像乎”
覺德曰 “當春花發 當秋木落時也 奈何”
柳眞曰 “松菊凌霜 義士持節 隨時遷變 安得爲骨門之宗柱乎”
覺德曰 “仙佛一也 非所以變也 大日火也 樹王木也 父子相傳也 主勿疑之”
柳眞乃 以其言 告于帝 帝召魏花 問之 魏花曰
“方今金氣大盛 西學遍滿中土 其潮早晩來矣 此輩皆聰兒也 特先聞耳 不必罪之”
帝乃釋之
4월, 선문(仙門)이 <이차돈異次頓>을 이단(異瑞)으로 여겨
마땅히 목을 베도록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우림군에 명하여 각 원(院)의 선도(仙徒) 5천명을 해산토록 하였다.
별동에서 진경대회(眞經大會)를 열고
제와 천궁이 친히 선왕(仙王)에게서 진언(眞言)을 받았다.
나라안팎 대소인민에게 명하여 이교(異敎)를 행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인(舍人) <각덕覺德>과 <이차돈異次頓>이 서로 잘 만나
안으로는 불도(佛道)를 받들고 밖으로는 수왕(樹王)을 숭배하니
<유진柳眞>이 이를 책망하며 말하기를
" 당신이 나의 남편이 되어 우리 아버지의 도를 믿지 않고
어찌 서방의 금상(金像)을 숭배하라 하십니까?"라고 하니
<각덕覺德>이 말하기를
" 봄에는 마땅히 꽃이 피고 가을에는 마땅히 낙엽이 지는 때인데 어찌 합니까?"
라고 하였다.
<유진柳眞>이 말하기를
" 소나무와 국화는 서리를 이겨내고 의로운 선비는 절개를 지키는데
수시로 바뀌니 어찌 골문의 기둥이 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각덕覺德>이 말하기를
" 선(仙)과 불(佛)은 하나이니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대일(大日)은 화(火)이고 수왕(樹王)은 목(木)으로 부자(父子)가 서로 전하는 것이니
공주님은 이를 의심치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유진柳眞>이 그 말을 제에게 고하니 제가 <위화魏花>를 불러 이를 물었다.
<위화魏花>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은 금기(金氣)가 크게 성하여 서학(西學)이 중토(中土)에 널리 가득차서
그 조류가 조만간 다가올 것이며 이 무리들 모두는 총명한 자들입니다.
특별히 먼저 귀담아 듣고 죄를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제가 그를 석방하였다.
六月 白蘭生 發山女發蘭
羽林仙軍作亂 圍花亭 請斬異次頓
甚急 帝憂之 以御衣弊異次頓 而叱亂軍
軍勢益急 異次頓自出 曰
“臣被陛下聖恩 得保 今日死 亦何恨 臣當殉佛 以立新敎
陛下以金神之年下降 乃西方彌勒化神也 臣雖死 而佛敎大興矣”
遂拜伏 而退亂軍 遂斷其頭 有白血如乳湧出丈餘
一軍皆驚 執釰者先斃 其餘皆昏仆
帝命覺德 收其尸葬之
金色滿其身 面目如生
帝乃詔令 仙徒右佛者 勿禁之 各隨其好 而修其眞 以成其遂
比助夫科花稟祖主 斗花兵部令
河沛妻靑好以其女納斗花
6월, <백란白蘭>이 <발산發山>의 딸 <발란發蘭>을 낳았다.
우림 선군(仙軍)이 위화정(圍花亭)에서 난을 일으켜
<이차돈異次頓>을 참하기를 청하였다.
심히 위급하니 제가 이를 우려하여 헤어진 어의(御衣)를 <이차돈異次頓>에게 입히고
난군(亂軍)을 꾸짖었다.
난군(亂軍)의 세가 점점 급해지니 <이차돈異次頓>이 스스로 나가 말하기를
" 신이 폐하의 성은을 입어 보호를 받았으니
오늘 죽음으로서 보답코자 하는데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부처로 순사하여 신교를 세우고자 합니다.
폐하께서는 금신(金神)의 해에 내려오셔서 서방 미륵의 신이 되었습니다.
만일 신이 죽으면 불교가 크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절하며 엎드려 난군을 물리치고 그 목을 자르게 하니
흰 피가 1장 넘게 뿜어져 나왔다.
일개 선군(仙軍) 모두가 놀라고 칼을 든 자가 먼저 넘어져 죽으니
나머지 모두는 혼비백산하였다.
제가 <각덕覺德>에게 명하여 그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토옥 하였다.
금빛 색이 그 몸에 가득하고 얼굴과 눈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에 제가 조칙으로 부처를 숭상하는 선도(仙徒)는 이를 금하지 말라라고 하며
각자는 그 좋아함에 따라 그 진(眞)을 수행토록하니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
<비조부比助夫>와 <과화科花>를 품주와 조주로 하고
<두화斗花>를 병부령으로 하였다.
<하패河沛>를 <청호靑好>의 처로 하고 그 딸을 <두화斗花>가 거두어 들이었다.
七月 行異次頓齋 于剡光仙院
帝命覺德 着梁使所獻袈裟
焚西域檀香 有異鳥來鳴
保道皇后崩 后以善兮女 有聖德 不妬不淫
唯以崇神奉仙爲樂 迎帝太后 常稱其善
太后崩 帝以仙門無后 命后爲仙王妃 后乃事魏花 如事帝 未嘗少懈
魏花曰 “君臣之義自在 何至如此”
后曰 “帝命也 非朕自爲也”
至是得暑疾 于蚊川 而歸甚重 帝親幸呼之 曰 “吾妻欲何往”
后乃抱帝 珠淚湧出 而崩 帝哀之切命 仙巫大壽 葬以天宮禮 納衣于壙
7월, 염광선원(剡光仙院)에서 <이차돈異次頓>의 재(齋)를 지냈다.
제가 <각덕覺德>에게 양(梁)의 사신이 도착하니
<이차돈異次頓>의 가사(袈裟)를 바치도록 하였다.
서역단(西域檀)에 분향하니 신비롭고 기이한 새가 날아와 울었다.
<보도保道> 황후가 붕(崩) 하였다.
후는 <선혜善兮>의 딸로서 성덕(聖德)이 있어 질투하지 않고 음란하지 않았다.
오로지 신을 숭상하고 선을 받드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니
<영제迎帝>태후는 항상 그 선함을 말하였다.
<영제迎帝> 태후가 붕하니 제가 선문(仙門)에 후가 없어
<보도保道> 후를 선왕의 비로 명하니
<보도保道>후는 <위화魏花>를 섬김이 마치 제를 섬기듯 하여
조금도 나태한 적이 없으니
<위화魏花>가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의리는 스스로 있는 것인데 어찌 이와같이 하십니까?" 라고 하니
후가 말하기를
" 제의 명이지 짐 스스로 그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이제와서 문천(蚊川)에서 더위로 병을 얻어 그 병이 심하여 돌아오니
제가 친히 행차하여 그를 부르며 말하기를
" 내 처가 어찌 가려고 하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후가 제를 안고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다 붕하니 제가 숨진 것을 애통해 하며
선무(仙巫)들에게 크게 기도하도록 하고 천궁(天宮)의 예로 장례를 치루고
무덤 속에 옷을 넣었다.
* 비처와 선혜의 딸 <보도保道(485-528)>의 자녀
지도로(보도) - 총공(504- )
모진(보도) - 지소(515- ) 진흥대제 <삼모진>의 어머니로 진골정통의 宗
설소(518- )
위화(보도) - 위공(526- )
八月 立保刀廟 行大祭
大嘉俳 于南桃 杵眞散花
8월, <보도保道>묘를 세우고 대제를 지냈다.
남도(南桃)에서 대가배를 행하고 <저진杵眞>이 꽃을 뿌렸다.
九月 大閱京路軍 于北川 開武庫 檢兵器 大修補繕 賞軍士 有勳功技術者七百人
命兵部令斗花 巡視各路軍
三葉生 阿時女末宝
9월, 북천에서 경로군(京路軍)을 크게 사열하였다.
무기고를 열어 병기를 검열하고 크게 수리하고 보충하여 수선하였다.
군사와 훈공이 있는 기술자 7백명에게 상을 주었다.
병부령 <두화斗花>에게 명하여 각 로군(路軍)을 순시토록하였다.
<삼엽三葉>이 <아시阿時>의 딸 <말보末宝>를 낳았다.
十月 宝果生 帝女雲毛 帝洗之 命置奴婢田宅 如南毛宮例 賜夫余從臣 爵祿有次
玉宗殿君薨 春秋二十五
上痛哀之 命玉人造其像 朝夕福之
玉宗上之布子 性極淸秀 不喜色事 事帝之孝
上有疾則不食 以侍寢 上亦寵愛之 賞賜甚厚 而皆不取
迎帝太后 嘗憂殿君 不近女色 募淨女 有得殿君寵者 賞以千金
皆爭姐 而殿君鄙之
獨白蘭不自飾 以布裙 灌水于花苗 殿君喜與之語 曰 “他女皆有狗臭 而汝獨無之”
太后曰 “何謂狗臭”
殿君曰 “如母好淫者 皆有狗臭”
太后大慚 不敢與魏花 弄於其前 使白蘭爲殿君婢 遂得一幸 太后大喜 乃吉之
及白蘭得帝幸 不復近之 帝悔而謝之 殿君曰 “臣性不喜色 非有嫉妬也”
帝命更捀他女 而拒之 太后憂之 詔於國中 “勿論仙骨無品 能得殿君寵者 重賞之”
殿君覺德相好 愛髮長姬如母 太后命髮長姬 通殿君 生子薦公
遂愛髮長 願爲妻 太后許之 親自行吉 曰 “髮長比汝年倍 猶可愛乎”
殿君曰 “魏花尙愛母后 况髮妻乎”
太后大笑 曰 “月下繩果 不虛矣”
髮長旣與 又薦其女蕙林爲副妻 殿君遂知色道 縱色過努 太后又憂之
命遊神山 而不欲 離於后及帝側 常從帝側 至是過色 遂薨 于髮長枕上 髮長哭 曰
“使吾夫 至此者 妾之過也 妾若不從 誰可從之”
魏花止之 曰 “汝不記天林嘉麥之事乎 我尙無恙如此 汝欲何往薦峷 在此可以慰也”
髮長乃作薄命歌 而哀之 曰 “我發長兮 我命薄有夫兩人兮 何所從世”
人以髮長者 爲命薄 而髮長獨 以髮長貴 遂復爲魏花妻
10월, <보과宝果>가 제의 딸 <운모雲毛>를 낳아 제가 아기를 씻었다.
노비와 전택(田宅)을 두고 <남모南毛>궁의 예와 같게 하도록 명하고
부여에서 따라온 신하에게 녹봉을 차별있게 내렸다.
<옥종玉宗> 전군이 죽었다. 나이 25세였다.
상이 이를 애통해 하며 옥인(玉人)에게 명하여 그 상(像)을 만들도록하고
조석으로 복을 빌도록 하였다.
<옥종玉宗>은 상의 포자(布子)로 성품은 극히 맑고 깨끗하여
색사(色事)를 좋아하지 않고 제를 효도로 섬기었다.
지도로(연제) - 모진(480-540)
모진(연제) - 옥종(505-528)
<옥종>은 <모진>이 어머니 연제를 증하여 낳아서 포자(布子)라고 하였다.
상이 병이 나니 <옥종>이 음식을 먹지 않고 시침을 하니
상 역시 그를 총애하여 상을 후하게 내렸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영제迎帝>태후가 전군이 여색을 가까히 하지 않으니
걱정하여 깨끗한 여인을 모집하여
전군의 총애를 얻은 자에게 천금의 상을 내렸다.
모두가 교태를 부리며 다투니 전군이 이를 촌스럽다고 하였다.
<백란白蘭> 혼자 스스로 꾸미지 않고 삼베 치마를 입고 꽃밭에 물을 주니
전군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다른 여인들 모두 개 냄새가 나나 너 혼자만이 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말하기를
" 무슨 개 냄새를 말하는가?" 라고 하니
전군이 말하기를
" 어머니처럼 음란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개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태후가 크게 부끄러워 하며 감히 <위화魏花>와 함께 그 앞에서 희롱하지 못하였다.
<백란白蘭>을 보내어 전군의 노비로 하여 마침내 한번 잠자리 시중을 들도록 하니
태후가 크게 기뻐하며 길례를 치루었다.
급기야 <백란白蘭>이 제의 잠자리 시중을 드니
다시는 <백란白蘭>을 가까이 하지 않아 제가 후회하며 사과하였다.
전군이 말하기를
" 신의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지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명하여 다시 다른 여인을 받도록 하니 이를 거절하였다.
태후가 이를 걱정하여 나라 안에 조서를 내리기를
" 선골과 품계에 상관없이 전군의 총애를 얻는 자에게 중히 상을 내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전군과 <각덕覺德>이 <발장髮長>을 어머니 처럼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니
태후가 <발장髮長>에게 명하여 전군과 통정케하여 아들 <천공薦公>을 낳아
마침내 <발장髮長>을 사랑하여 처로 삼기를 원하니
태후가 이를 허락하고 친히 길례를 행하며 말하기를
" <발장髮長>은 너의 나이의 두 갑절인데 오히려 사랑하는가?"라고 하였다.
전군이 말하기를
" <위화魏花>는 오히려 모후를 사랑하는데 하물며 <발장髮長> 처를 말하십니까?"
라고 하니
<위화>는 <연제>보다 24세 연하이고 <옥종>은 <발장>보다 25세 연하이다.
태후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 달 아래에 매달린 과일{남근(男根)}이 허실하지 않구나!" 라고 하였다.
<발장髮長>이 이미 처가 되어 <천기薦其>의 딸 <헤림蕙林>을 부처(副妻)로 하였다.
마침내 전군이 여색의 도를 알아 여색에 지나치게 빠지니
태후가 또 이를 걱정하여 신산을 유람토록 명하였다.
후와 제를 떠나지 않으려고 항상 제를 따르니 이제와서 여색을 지나치게 밝혀
마침내 <발장髮長>과의 잠자리에서 죽으니 <발장髮長>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 내 남편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첩의 잘못입니다.
첩이 만약 따르지 않으면 누가 이를 따르겠습니까?" 라고 하니
<위화魏花>가 이를 금지하며 말하기를
" 당신은 <천림天林>의 가맥지사(嘉麥之事)를 기억하지 못 하십니까?
나는 일찌기 아와같은 일에 근심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천신薦峷>에게 가려고 하십니까?
위로하여야 함이 옳은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발장髮長>이 박명가(薄命歌)를 지어 이를 슬퍼하며 말하기를
" 나 발장이여!, 나 박명한 두 남편이여!, 세상 어디에 따라갈거나."라고 하니
사람들이 <발장髮長>은 박명하다하나
<발장髮長>은 홀로 긴 머리를 풀고 귀하게 되어
마침내 다시 <위화魏花>의 처가 되었다고 하였다.
十一月 碧花生 帝女三月 帝洗之
命保道后女只召雪召 皆以碧花爲母
碧花婢河隻 時娠三彘子 碧花薦于帝 請爲摩腹子
11월, <벽화碧花>가 제의 딸 <삼월三月>을 낳아 제가 아기를 씻었다.
<보도保道>후의 딸 <지소只召>와 <설소雪召>에게 명하여
모두를 <벽화碧花>를 어머니로 하게 하였다.
<벽화碧花>의 노비 <하척河隻>이 이때 임신하여 <삼체三彘>의 아들을 낳아
<벽화碧花>가 제에게 천거하여 마복자(摩腹子)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때 <벽화> 44세, 벽화의 아들 <삼체> 19세, <지소> 14세, <설소> 11세이다.
* 벽화(485- )의 자녀(7남4녀)
벽화(비처) - 삼산(501- )
벽화(모진) - 삼부(503- )
삼엽(507- )
삼연(513- )
삼랑(522- )
삼월(528- )
벽화(지도로) - 삼지(505- )
삼체(510- )
벽화(영실) - 삼릉(517- )
벽화(비량) - 구리지(519-564?)
벽화(삼부) - 삼식(525- )
十二月 帝與天宮 入海宮
世淵田春稟祖主
12월, 제와 천궁(天宮)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세연世淵>과 <전춘田春>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16년(529) 황계(黃鷄) 己酉
正月 受朝 海宮
蕙林生 玉宗子梓宗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혜림蕙林>이 <옥종玉宗>의 아들 <재종梓宗>을 낳았다.
二月 柳眞生 覺德女柳文 夢見紫鶴入懷 備成八文 故覺德請 以文名之 許之
2월, <유진柳眞>이 <각덕覺德>의 딸 <유문柳文>을 낳았다.
꿈에 자주색 학이 들어와 비성팔문(備成八文)을 품는 것을 보고
<각덕覺德>이 문(文)으로 이름을 청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三月 帝自海宮還不豫 覺德奏 于天宮 曰 “崇在殺生 呵禁之”
乃詔曰 “殺生非古敎 自今非大祭大政 則勿妄殺牛馬鷄犬 以副祖宗盛意 雖仙骨勿犯”
3월, 제가 해궁에서 돌아와 몸이 불편하니 <각덕覺德>이 천궁에서 상주하여 아뢰기를
" 살생을 받드는데 있으니 이를 못하도록 꾸짖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칙으로 이르기를
" 살생은 옛 가르침이 아니니 지금부터 대제(大祭)와 대정(大政)이 아니면
함부로 가축을 잡지 말것이며 조종(祖宗)의 두터운 정으로 다스리고자 하니
비록 선골(仙骨)이라도 범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四月 流斗花 于阿瑟羅 斗花以魏花之庶弟也 其父仙徒駃兒也
父母俱微 始生無男根 如女兒
及長粉黛 入女群而宿 夜必引根 出淫同宿女甚多
後鬚毛生 斗花乃不能自欺 告于太后 太后奇之 命脫衣 驗之
果有男根湧出女陰中 后愛之 寵賜甚多
其性柔如婦女 亦善姐于帝 帝亦愛之 特超其爵 如一骨 又以帝妹妻之 乃沙嵩寡妻厚蒂也
旣娶厚蒂 盖放恣 無思憚 多淫骨女
時公卿之出 鎭于外者 其妻有色 供之職
故不能帶去 獨留京中
厚蒂女沙彘 乃朱珍之妻也
朱珍有降 於斗花 命出北路 而斗花誘沙彘 淫之生子
而及爲兵部令 在外將士之妻 多招于花林 而淫之
或取其家寶 約召其夫歸京 而不履之者甚多 而皆畏王后及魏花 而不敢訴于理方
及巡各路 視軍壯士之 素懷不平者 欲行刺 于途中
而逮捕者有之 而斗花恃威專權 多受將士賄賂 如有妻女之美者
命皆薦枕 醜聲載路
三年山將軍白宗之妻咸氏 乃俊登殿君之女也
斗花至三年山 無可稱之女 及咸氏奉酒 斗花醉 抱入枕 曰 “姑雖老矣 可消一夜”
咸氏拒之 曰 “吾今當朔 不能受人”
斗花不聽 强淫之 而疚作 白宗怒 曰
“我乃骨門將種也 豈爲駃兒子所侮” 拔釰欲斬之
斗花大劫 呼救諸長
乃力之白宗 斗花乘問逃歸
白宗乃具報 于軍主伊登 伊登乃訴于帝
帝大怒 欲誅之 厚蒂諫 曰 “妾聞夫 雖不肖 妻必從夫 臣夫至此 妾之罪也 願爲代死”
帝乃泣 謂魏花 曰 “汝弟罪重 奈吾妹何”
魏花曰 “臣已知其爲人 故曾諫其勿用者 累矣 今至此罪 雖在彼用之者 陛下也
陛下宜自責 于諸路將士 而流于邊地可也”
帝嘉其意 謂厚蒂 曰 “汝欲從之 可定其地”
厚蒂曰 “阿瑟羅神山 吉公之所樂也 妾與前夫一遊 至今不忘 願與斗花結茅 神山而終年”
帝乃許之 命西力夫 備車馬 送之
帝幸河隻宅 三彘子河彘 賜米衣奴婢
4월, <두화斗花>를 아슬라(阿瑟羅)에 유배하였다.
<두화斗花>는 <위화魏花>의 서제(庶弟)이고 그 아버지는 선도(仙徒) <결아駃兒>이다.
부모는 다 미천하고 처음에 남근(男根)이 없는 아이를 낳으니 마치 딸 아이 같았다.
장성하여 화장을 하고 여자들이 모인 곳에
들어가서는 잠을 자며 밤이면 반드시 남근을 꺼집어 내고
나와서는 같이 자는 여자들과 음란함이 심히 많았다.
후에 수염이 나니 <두화斗花>는 스스로 속일 수 없어 태후에게 고하니
태후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옷을 벗도록 명하여 이를 시험하였다.
과연 남근이 있어 음부 안에 사정을 하니
후가 이를 사랑하여 총애를 내림이 아주 많았다.
그 성품이 부녀같이 부드러워 제에게 교태를 부리니 제 역시 이를 사랑하여
특별히 뛰어넘어 그 작위를 일골(一骨)과 같이하고 제의 여동생을 처로 하니
<사숭沙嵩>의 과부 <후체厚蒂>이다.
이윽고 <후체厚蒂>에게 장가들어 방자하고 꺼리낌없이 많은 골녀들과 음란하였다.
이 당시 공경(公卿)이 나가서 바깥 사람들을 진압하니
그 처가 색이 있으면 그 직(職)에 보냈다.
그런 연유로 나가서 체류할 수 없는 자는 홀로 경중(京中)에 머물렀다.
<후체厚蒂>의 딸 <사체沙彘>는 <주진朱珍>의 처이다.
<주진朱珍>이 <두화斗花>에게 굴복하여 북로로 나가도록 명하니
<두화斗花>가 <사체沙彘>를 유혹하여 간음하여 아들을 낳았다.
급기야 병부령이 되니 경외(京外) 장사(將士)의 처가 있었고
많은 사람을 화림(花林)에 불러 이를 음란하였다.
혹은 그 남편을 귀경토록 약속하여 그 가보(家寶)를 취하였고
불이행하였던 자들이 아주 많았으나
모두 왕후와 <위화魏花>를 두려워하여 감히 이방(理方)에 하소연하지 못하였다.
급기야 각 로(路)를 순찰하여 군의 장군과 병사를 순시하니
불평을 품은 자가 도중에 칼로 베려고 하였다.
이를 체포한 자가 있어 <두화斗花>가 전권을 믿고 위엄으로
장군과 병사에게 뇌물을 많이 주고 처녀들 중에서 아름다운 자도 이와같이 하였다.
모두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도록 명하니 추악한 소리가 로(路)에 쌓였다.
삼년산 장군 <백종白宗>의 처 <함씨咸氏>는 <준등俊登> 전군의 딸이다.
<두화斗花>가 삼년산에 이르러 그녀를 부르지 못하였다.
이에 <함씨咸氏>가 술을 올리니 <두화斗花>가 취하여 들어와 안으며
베갯말로 말하기를
" 비록 늙었으나 하룻 밤을 지내는 것이 옳다."라고 하니
<함씨咸氏>가 이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 나는 지금 아이를 낳을 달이라 받아 들일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두화斗花>가 듣지않고 간음하여 병이 생기니 <백종白宗>이 노하여 말하기를
" 나도 골문의 장수 집안인데 어찌 <결아駃兒> 아들 소행의 모독이 이와 같은가."
라고 하며
칼을 꺼집어 내어 그 목를 베려고 하니 <두화斗花>가 크게 겁에 질려
여러 어른들에게 구원을 호소하였다.
이에 <백종白宗>이 힘을 쓰니 <두화斗花>가 말을 타고 도주하여 돌아가
<백종白宗>이 군주(軍主) <이등伊登>에게 문서로 보고하였다.
이에 <이등伊登>이 제에게 소(訴)를 올려 제가 크게 노하여 주살코자 하니
<후체厚蒂>가 간하여 말하기를
" 첩이 남편에게 들으니 비록 불초(不肖)하나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하니
신(臣)의 남편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첩의 죄입니다.
원하옵건데 대신 죽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제가 울면서 <위화魏花>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 동생의 죄가 중하나 내 여동생을 어찌 할꼬." 라고 하니
<위화魏花>가 말하기를
" 신은 이미 그 사람됨을 알고 있어 등용하지 말도록 누차 간하였습니다.
이제와서 이와 같은 죄를 지으니 비록 등용한 사람이 폐하라 할지라도
폐하께서는 제로(諸路) 장사(將士)에게 스스로 자책하여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그 의중을 알고 좋아하며 <후체厚蒂>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는 그를 따르고자 하니 그 곳으로 정함이 옳을 것이다." 라고 하니
<후체厚蒂>가 말하기를
" 아슬라 신산은 <길공吉公>이 즐거움으로 삼은 곳입니다.
첩과 전 남편이 한 번 유람하여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화斗花>와 함께 띠집을 지어 신산(神山)에서 죽기를 원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제가 이를 허락하고 <서력부西力夫>에게 명하여
거마를 준비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제가 <하척河隻>의 집으로 행차하여
<삼체三彘>의 아들 <하체河彘>에게 쌀과 옷과 노비를 내렸다.
五月 贊失遣使入朝
5월, <찬실贊失>이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다.
六月 帝幸只召 于長沙宅
華珍生 英失女英華
覺德柳眞稟祖主
6월, 제가 <장사長沙>의 집에서 <지소只召>에게 행차하였다.
<화진華珍>이 <영실英失>의 딸 <영화英華>를 낳았다.
<각덕覺德>과 <유진柳眞>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七月 行妙王大祭 于皐王宮 帝與杵眞 行之
是日大暑 杵眞不肯 盡七重神衣 獻一花 而入浴 更衣
帝爲洗之扇之 曰 “此吾新妙王也 凡十二浴 而日暮 蟬聲滿于宮樹”
杵眞謂帝 曰 “彼蟬亦知祭母 而鳴乎”
帝曰 “地上之物 皆朕有蟬 安得不鳴乎”
杵眞曰 “可爵蟬舍知”
帝許之 是爲舍知蟬
是夜帝幸杵眞宮 封爲三品權妻 賜紫金神衣 白大神馬二雙
7월, 고왕궁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는데 제와 <저진杵眞>이 이를 행하였다.
이날 몹씨 더워 <저진杵眞>이 기꺼이 일곱겹 신의(神衣)를 입고
곷 한송이를 헌화하려고 하지 않아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제가 몸을 씻어주고 부채를 부쳐주며 말하기를
" 이 아이가 나의 새로운 묘왕이다.
무릇 열 두번을 목욕하니 날이 저물어 매미 우는 소리가 궁의 나무에 가득하구나."
라고 하니
<저진杵眞>이 제에게 일러 말하기를
" 저 매미도 어머니 제사를 알고 우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말하기를
" 땅 위의 사물 모두 짐의 소유인 매미인데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느냐? " 라고 하니
<저진杵眞>이 말하기를
" 매미에게 사지(舍知)의 작위를 내림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니 이를 사지선(舍知蟬)이라 하고
이날 밤 제가 <저진杵眞>궁에 잠자리 시중을 들도록하여 삼품(三品)의 권처로 봉하고
자금신의(紫金神衣)와 백대신마(白大神馬) 두 쌍을 내렸다.
八月 复以碧花爲地宮皇后 杵眞爲人宮皇后
行大嘉俳 于別洞 肜竹散花
帝與人宮 謁平立宮 誓于樹王
夜宿于廟宮 賜廟臣 衣酒有次
夜半 人宮謂帝 曰 “我見母在此 汝亦能見之乎”
帝曰 “朕不得見 請使我見之”
人宮笑 而指明月 “彼卽母顔也”
帝嘉其言 曰 “吾妻能通眞經言 眞天仙也” 遂作月母枕
8월, 다시 <벽화碧花>를 지궁황후로 <저진杵眞>을 인궁황후로 하였다.
별동에서 대가배를 행하고 <융죽肜竹>이 꽃을 뿌렸다.
제와 인궁이 평립궁을 알현하고 수왕(樹王)에게 맹서하였다.
밤에 묘궁에서 자고 묘신(廟臣)들에게 옷과 술을 차별있게 내렸다.
깊은 밤에 인궁이 제에게 이르기를
" 제가 어머니가 여기 있음을 보았는데 당신도 역시 볼 수 있었는지요?" 라고 하니
제가 말하기를
" 짐은 볼 수 없으니 내가 어머니를 보기를 청하노라."라고 하였다.
인궁이 웃으며 명월(明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 저것이 바로 어머니의 얼굴입니다."라고 하였다.
제가 그말을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 내 처는 진경(眞經)의 말에 능통하니 진실로 천선(天仙)이다." 라고 하며
마침내 월모침(月母枕)을 지었다.
<저진杵眞514-531)>은 <모진>과 <연제>가 증하여 낳은 딸이다.
九月 行大場 于南郊 帝與三后 臨之 賜父老酒食 命場主田檍 賞其善稼者十人
命修蘿畐祠 送艾像 祭之 人宮自大場還 夜夢蘿畐神 故有是命也
天忽寒 宮女皆有凍色 木葉亂飛
帝與天宮抱臥 窓外慘色 曰 “吾將士當寒 吾妻可有征衣備之”
天宮曰 “妻有所裁在庫 可取而送之 但有可愁 奈何”
帝曰 “有何愁天宮”
天宮曰 “斗花厚蒂 叔父叔母也 他人尙可送衣 叔可凍乎”
帝曰 “彼有罪 奈何”
天宮笑 曰 “好色人之常情也 以此爲罪 孰不爲罪乎 天寒如此 不愛其妹者 非人情也”
帝乃動之 及召吹碧 往召斗花夫妻 還
9월,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제와 3후가 그 곳에 왕림하여 부로(父老)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고
대장주(大場主) <전억田檍>에게 명하여 농사를 잘 지은 자 10명에게 상을 주었다.
라복사(蘿畐祠)를 수리하여 애상(艾像)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인궁이 대장에서 돌아와 밤에 라복신(蘿畐神) 꿈을 꾸어 이 명을 내린 것이다.
날씨가 갑자기 차서 궁녀들 모두가 얼굴이 얼고 낙엽이 흩날렸다.
제와 천궁이 포옹하여 누워 창밖을 보니 참혹한 기색이 있어 말하기를
" 우리 장군과 사병이 추울테니 우리 처들은 군복을 준비하는 것이 옳다." 라고 하니
천궁이 말하기를
" 처가 재고를 쌍아 두었으니 이를 보냄이 옳을 것입니다만
수심이 있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말하기를
" 천궁에게 무슨 수심이 있는가?" 라고 하니
천궁이 웃으며 말하기를
" 호색함은 인지상정이라 이것이 죄라면 누구라도 죄인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날씨가 이와같이 차가우니 그 여동생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정이 없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제가 거동하여 <취벽吹碧>을 불러,
가서 <두화斗花> 부부를 돌아 오도록 하였다.
十月 扶余佐平燕謨等 與句麗戰 大敗 命苩盛 往問之 賜穀二百石 牛馬各百匹
以玉宗寡妻蕙林 妻妙公 行吉 于鮑祠 魏花髮長主之 賜奴婢田宅 如例
妙公與蕙林 比隣情好 蕙林旣寡 相通往來
玉宗奴 恐竊家宝 焚花聲言之 蕙林羞慚 欲自殺 妙公曰 “寧其自殺 不如逃亡”
乃負蕙林 逃于民舍 帝命咸宗獲之 而許爲夫婦 以仙臣牛留爲薦公家臣 守其宅
10월, 부여 좌평 <연모燕謨> 등이 고구려와 전쟁을 하여 대패하엿다.
<백성苩盛>에게 명하여 가서 위문토록 하고 곡식 2백석과 우마 각 백 필을 내렸다.
<옥종玉宗>의 과부 <혜림蕙林>을 <묘공妙公>의 처로 하여
<위화魏花>와 <발장髮長>이 주관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치루고
노비와 전택(田宅)을 관례대로 내렸다.
<묘공妙公>과 <혜림蕙林>은 이웃으로 정이 깊어
<헤림蕙林>이 이윽고 과부가 되니 상통하여 왕래하였다.
옥종의 노비가 가보(家宝)를 도둑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꽃을 불사르며 자기의 입장을 표명하니
<혜림蕙林>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자살코자 하니
<묘공妙公>이 말하기를
" 자살로 헤어지는 것은 도망가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혜림蕙林>을 업고 민가로 도망하니
제가 <함종咸宗>에게 명하여 이들을 잡아 부부로 허락하고
선신(仙臣) <우류牛留>를 <천공薦公>의 가신(家臣)으로 하여
그 집을 지키도록 하였다.
十一月 帝與天宮人宮 入海宮
行平立宮大祭 普賢主之
11월, 제와 천궁과 인궁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평립궁에서 <보현普賢>이 주관하여 대제를 지냈다.
十二月 無雪
本彼部弧人 畜財妻老
其兄久在邊地 而歸 無妻有女而美 兄謂弧人 曰 “汝有財 何不換新妻 以老自甘”
弧人曰 “是本吾師之妻也 師以其術敎我 而付其妻財 我若棄之 孰取此老”
兄曰 “我年老 與汝妻可合 我女可爲汝妻 則生子 可繼”
弧人大喜 與妻議之 妻曰 “以我之老 歸于汝兄 則足矣” 乃相換之 未幾弧人疾作
女與少徒通 弧人發之 欲還其老妻 而歸女
女乃與少徒紱 弧人爲病死 而葬之 以少徒爲夫 其老妻疑之 曰
“此財本我有 今與少徒 作夫婦 不可與之”
乃爭 于理方 理方採之 得其情 將置二人死 兄謂其妻 曰
“汝今我妻 以財殺吾女 非人情也 弧乃吾弟 則汝我明其寃 則誰復究之乎”
老妻不得已從其夫 乃以其財 獻于理方 而二人免死
理方有寃家 告其密事 于理方令阿時 三葉曰 “明之則三人死 棄之則一人死 汝何聽之”
阿時曰 “理方納其財 可以免之”
理方曰 “理屈則可誅臣 理眞則財 何入於公乎”
阿時欲 直奏而決之 異次頓母息蘭 乃告覺德 曰
“理方我女印蘭之夫朱梁也 治少徒無可殺之狀 弧人病 已在危之時 欲擊其妻
故少徒制其手 而止之 則弧人憤 懣而自死也
故理方赦之 而其財無可守之 人故將欲爲佛田 而保之
阿時欲 以其威奪之 不經稟主 而決之也”
覺德乃與柳眞 入內 則阿時與三葉 待于帳外 而帝未起也
柳眞手摩 阿時禿頭 曰 “此禿頸滿 曲討欲殺何人 而早來待乎”
阿時不悅 曰 “臣之妻亦公主也 公主何慢臣若此”
柳眞曰 “非慢其人也 乃慢其匈討也”
乃直入帳中 帝抱人宮而臥 人宮睡眼曚曨 曰 “兄何早來”
柳眞欲爲妹后禱子而來 人宮曰 “禱子有何道”
柳眞曰 “莫如活人 理方之設 非欲殺人 專在活人爲主
勿以一人傷 數人况貪其財 陷三人于死乎”
人宮曰 “何謂也”
柳眞乃 言阿時之謀 人宮曰 “理方令非矣 朕當活其三人”
乃勸帝 罷阿時理方令 命放少徒及女 歸之 复以斗花爲理方令
人宮請 以柳眞繼爲祖主 許之
柳珍豪俠 與人宮歡好 往往聯床受幸 故人宮使之 而不更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본피부(本彼部) 호인(弧人)이 재물을 모아 늙은 부인과 살고 있었다.
그 형은 오래도록 변방에 있다가 돌아오니 처는 없고
여자가 있어 아름다우니 형이 호인(弧人)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는 재물이 있는데 어찌 새 부인으로 바꾸지 않고 늙은 부인으로 만족하는가?
라고 하였다.
호인(弧人)이 말하기를
" 이 사람은 본래 나의 스승의 처입니다.
스승이 그 꾀를 나에게 가르쳐 주어 처가 재물을 모았는데
내가 만약 그녀를 버리면 누가 이 늙은 처를 데리고 가겠습니까?" 라고 하니
형이 말하기를
" 나는 늙어 너의 처와 하나기 되어 너의 처를 나의 여자로하여
아들을 낳아 집안을 이음이 옳다." 라고 하였다.
호인(弧人)이 크게 기뻐하며 처와 함께 이를 의논하니 처가 말하기를
" 내가 늙어 당신의 형에게 돌아가는 것인즉 족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를 서로 바꾸고 얼마되지 않아 호인(弧人)이 병이 났다.
딸과 소도(少徒)가 통정하니 호인(弧人)이 이를 고발하여
그 늙은 부인을 돌아오게 하려고 여자에게 돌아갔다.
이에 딸과 소도(少徒)는 끈으로 호인(弧人)을 죽이고 병으로 죽은 것으로 하여
이를 장례하고 소도(少徒)를 남편으로 하니 그 늙은 처는 이를 의심하여 말하기를
" 이 재물은 본래 나의 소유인데 지금은 소도(少徒)에게 주니
부부로 만들어 재물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방(理方)에서 다투니 이방(理方)이 이를 가려내어 그 사정을 알고는
장차 두 사람을 죽이고자 가두니 형이 그 처에게 일러 말하기를
" 당신은 지금 나의 처인데 재물로 인하여 우리 딸을 죽이는 것은 인정이 아니다.
호인(弧人)은 나의 동생인데 당신이 나에게 그 원통함을 밝힌 즉
누가 다시 궁구하겠는가?"
늙은 처는 부득이 그 남편을 따라 그 재믈을 이방(理方)에 바치니
두 사람은 죽음을 면하였다.
이방(理方)이 원통한 집이 있어 그 비밀스런 사건을
이방령(理方令) <아시阿時>에게 고하니 <삼엽三葉>이 말하기를
" 밝히면 세 명이 죽고, 포기하면 한 명이 죽는데
당신은 어찌 그것을 들으려 하십니까?" 라고 하니
<아시阿時>가 말하기를
" 이방(理方)이 그 재물을 받아들여 죽음을 면하게 하는 것이 옳다." 라고 하였다.
이방(理方)이 말하기를
"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신하를 주살하는 것이고 도리에 맞는 것은 재물이니
어찌 공적(公的)으로 받아 들이겠습니까?" 라고 하니
<아시阿時>가 이를 해결코자 직접 상주하니
<이차돈異次頓>의 어머니 <식란息蘭>이 <각덕覺德>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 이방(理方)은 나의 딸 <인란印蘭>의 남편 <주량朱梁>입니다.
소도(少徒)를 다스려 죽이라는 소장(訴狀)은 억지 입니다.
호인(弧人)은 병으로 이미 위급한 때에 그 처를 때리고자 하였으니
소도(少徒)가 그 손을 막아 이를 중지한 즉
호인(弧人)은 분이 가득차서 스스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이방(理方)이 이를 사면하여 그 재믈을 지키려는 것은 억지입니다.
사람은 바야흐로 장차 부처가 되고자 재물을 보전하는데
<아시阿時>는 그 위세로 재물을 빼앗고자 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디.
이에 <각덕覺德>과 <유진柳眞>이 안으로 들어오니
<아시阿時>와 <삼엽三葉>은 휘장 밖에서 기다리고 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유진柳眞>이 <아시阿時>의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 이 대머리는 목까지 가득차서 죽이고자 비뚤게 다스리니
누가 일찍 와서 기다리겠는가?" 라고 하니
<아시阿時>가 기쁘지 않아 말하기를
" 신의 처도 공주인데 공주님은 어찌 신을 이렇게 모멸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유진柳眞>이 말하기를
" 모멸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흉한 다스림을 모멸하는 것이다."
이에 휘장 안으로 바로 들어가니 제가 인궁을 안고 누워있고
인궁이 잠에 취한 눈으로 몽롱하여 말하기를
" 언니는 어찌 일찍 오셨나요?" 라고 하였다.
<유진柳眞>이 동생 후의 아들을 기도하고자 왔다라고 하였다.
인궁이 말하기를
" 아들을 기도하는 것에는 무슨 도(道)가 있습니까?" 라고 하니
<유진柳眞>이 말하기를
" 사람을 살리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방(理方)의 설치는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있습니다.
한 사람도 다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여러 사람이 그 재물을 탐하여
세 사람을 죽음에 빠뜨려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인궁이 맗하기를
" 옳은 말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유진柳眞>이 <아시阿時>의 모략을 언급하니 인궁이 말하기를
" 이방령은 옳지 않다.
짐이 마땅히 세 사람을 살릴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제에게 권하여 <아시阿時> 이방령(理方令)을 파하고
<사도少徒>와 딸을 방면하여 돌아가도록 하고
다시 <두화斗花>를 이방령(理方令)으로 하였다.
인궁이 <유진柳眞>을 계속하여 조주로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유진柳眞>은 호탕하고 의협심이 있어 인궁과 함께 사이가 좋아
왕왕 잇닿은 침상에서 잠자리 시중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인궁은 이 침상을 바꾸지 않았다.
법흥왕 17년(530) 금구(金狗) 庚戌
正月 受朝 海宮
元臣妻妙蘭有疾 命藥師嘏義 持藥治之 曰 “愈則可加以爵祿 汝子女飮藥 療理無傷朕心”
梭失生 立宗女五明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원신元臣>의 처 <묘란妙蘭>이 병이 나서 약사(藥師) <하의嘏義>에게 명하여
약을 가지고 이를 치료토록 명하고 말하기를
" 병이 나으면 녹봉을 더할 것이니 너의 자녀에게 약을 먹여 보아
상함이 없이 치료코자 하는 것이 짐의 마음이다." 라고 하였다.
<사실梭失>이 <입종立宗>의 딸 <오명五明>을 낳았다.
二月 詔曰 “仙臣之僭越者 不可不治 凡我臣民三門一體 無有所 私無至相犯”
理方令斗花卒 繡山代之
禁人民之奔 入牛馬庄
2월, 조칙으로 이르기를
" 선신(仙臣)으로 주제넘은 자는 고치는 것이 불가하니
무릇 나의 신하와 백성은 삼문(三門)이 일체가 되어 맡은 바에 상관없이
사사로이 서로 범하지 못하게 하라." 라고 하였다.
이방령 <두화斗花>가 죽어 <수산繡山>이 이를 대신하였다.
백성들이 함부로 우마장(牛馬庄)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다.
三月 肜竹源花
以只召妻立宗
3월, <융죽肜竹>을 원화(源花)로 하였다.
<지소只召>를 <입종立宗>의 처로 하였다.
이때 <지소> 16세, <입종> 40세이다.
<지소>는 법흥왕 <모진>의 딸이고 <입종>은 <모진>의 동생이다.
四月 扶余使芍明來 獻方物
人宮有震 命中外行禱
科花生 比助夫子比科
4월, 부여가 <작명芍明>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인궁이 임신하여 나라안팎에 기도를 올렸다.
<과화科花>가 <비조부比助夫>의 아들 <비과比科>를 낳았다.
六月 立宗只召稟祖主
試三院奾子三百人 分送各院
6월, <입종立宗>과 <지소只召>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삼원(三院)의 선자(奾子) 3백명을 시험하여 각 원에 나누어 보냈다.
七月 行妙王大祭 于南桃
尋尋宮主薨 以眞昭公主爲狗祠主
7월, 남도(南桃)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다.
<심심尋尋>궁주가 죽어 <진소眞昭>공주를 구사주(狗祠主)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于碧院
阿時兵部令
荒宗自麗地還 告北鄙密事 命加其級
8월, 벽원(碧院)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아시阿時>를 병부령으로 하였다.
<황종荒宗>이 고구려 땅에서 돌아와 북쪽 변방의 비밀스런 일을 고하여
그 직급을 더하도록 명하였다.
九月 召沙忠爲大書令 荒宗大書郞 薛優暉兵部郞 吹碧太子兵官 皆加爵品
命英失出 居其家
以杵眞爲天宮 玉珍爲地宮 碧花爲人宮
眞晩生 妙人女篁氏 妙人者 妙山子也
竹永愛之 如夫婦
使通于其妻生 竹永喜之
遊妙人及妙人母田門 行洗宴
田門亦與竹永私通 時娠竹永子 脹滿 起舞如蛙立
竹永笑 曰 “汝生吾子 當名曰蛙” 是爲蛙永
厚蒂與理方舍知芝登 相通而娠 請爲夫 許之 加爵芝登
9월, <사충沙忠>을 불러 대서령으로 <황종荒宗>을 대서랑으로
<설우휘薛優暉>를 병부랑으로 <취벽吹碧>을 태자병관으로 하고
모두 작위와 품계를 더하였다.
<영실英失>을 내 보내어 그 집에서 거주토록 하였다.
<저진杵眞>을 천궁으로 <옥진玉珍>을 지궁으로 <벽화碧花>를 인궁으로 하였다.
<진만眞晩>이 <묘인妙人>의 딸 <황씨篁氏>를 낳았다.
<묘인妙人>은 <묘산妙山>의 아들이다.
<죽영竹永>이 그를 사랑하니 마치 부부같았다.
그 처에게 사통토록 시켜 낳으니 <죽영竹永>이 이를 기뻐하였다.
<묘인妙人>과 <묘인妙人>의 어머니 <전문田門>이 유람하다 가서
아기를 씻고 잔치를 열었다.
<전문田門> 역시 <죽영竹永>과 사통하여 이때 <죽영竹永>의 아들을 임신하여
배가 불러 일어나 춤을 추니 마치 개구리가 일어선 것 같았다.
<죽영竹永>이 웃으며 말하기를
" 당신이 우리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이름을 와(蛙)로 하여야 것이다"라고 하며
개구리 수영을 하였다.
<후체厚蒂>와 이방(理方) 사지(舍知) <지등芝登>이 서로 통정하여 임신하여
남편으로 삼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지등芝登>의 작위를 더하였다.
十月 蒠公妻芥紅與仙臣優利 相通 蒠公怒 擊優利 投於池中 芥紅負而逃之
以元臣女元蘭 妻蒠公 行吉 于剡光仙院 賜元蘭白神馬紫神衣
帝與髮長 行玉宗大祭 以其墓爲哀公寺
10월, <식공蒠公>의 처 <개홍芥紅>과 선신(仙臣) <우리優利>가 상통하여
<식공蒠公>이 노하여 <우리優利>를 쳐서 못 속으로 던지니
<개홍芥紅>이 이를 업고 도주하였다.
<원신元臣>의 딸 <원란元蘭>을 <식공蒠公>의 처로 하여 염광선원에서 길례를 행하고 <원란元蘭>에게 흰색 신마와 자주색 신의를 내렸다.
제와 <발장髮長>이 <옥종玉宗> 대제를 지내고 그 묘를 애공사(哀公寺)로 하였다.
十一月 帝與天宮地宮 入海宮
行眞經會 于別洞
11월, 체와 천궁과 지궁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별동에서 진경회(眞經會)를 열었다.
十二月 東海人獻大鯨 于天宮 二丈五尺
宮曰 “大物有靈 可以祭之” 命羊秀行鯨祭 于海上
以枕婢蘭弓爲梅妻
眞宗皐蘭稟祖主
12월, 동해 사람이 천궁에 큰 고래를 바쳤는데 길이가 2장 5척이었다.
천궁이 말하기를
" 큰 고래는 령(靈)이 있으니 제사를 지냄이 옳다." 라고 하며
<양수羊秀>에게 명하여 해상에서 경제(鯨祭)를 지내도록 하였다.
침비 <란궁蘭弓>을 <매梅>의 처로 하였다.
<진종眞宗>과 <고란皐蘭>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18년(531) 백해(白亥) 辛亥
正月 受朝 海宮
古自國君順都殿君薨 葬以王禮 以發山爲君 順都妻發胡 妻仙臣狗雲
天宮生 帝女杵宮 難産 帝甚悶之 抱天宮 而泣 天宮曰 “生子猶可 生女如此 無以對汝”
帝曰 “子女非吾願 惟願汝無傷 何言子乎” 命仙巫禱天宮疾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고자국군(古自國君) <순도順都> 전군이 죽어 왕의 예로 장례를 치루고
<발산發山>을 군(君)으로
<순도順都>의 처 <발호發胡>를 선신(仙臣) <구운狗雲>의 처로 하였다.
천궁이 제의 딸 <저궁杵宮>을 난산하여 제가 심히 이를 염려하여 천궁을 안고 우니
천궁이 말하기를
" 오히려 아들을 낳는 것이 옳은데 이같이 딸을 낳아 당신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라고 하니
제가 말하기를
" 내가 원하는 것은 아들과 딸이 아니라 오직 너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데
어찌 아들을 말하는가?" 라고 하며
선무(仙巫)에게 명하여 천궁의 병이 낫도록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二月 天宮崩 于海宮 帝通愛之 不食涕泣 群臣美不仰哭 山川爲之悲
宮以布女 得帝寵最高 玉珍后疎 而怨宮 或云 咀之而崩
春秋才十八 葬于平立宮妙王陵
2월, 천궁이 해궁에서 죽었다.
제가 천궁을 몹씨 사랑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울기만 하고 신하들은 통곡을 하니
산천 초목이 슬퍼하였다.
궁은 제의 포녀(布女)로 제의 총애를 최고로 받아 <옥진玉珍>후를 소홀하게 되니
천궁을 원망하여 죽었다하고 혹은 저주로 죽었다고 하였다.
나이 겨우 18세로 평립궁 묘왕릉에 장례하였다.
모진(연제) - 저진(514-531)
<저진>은 <모진>이 어머니 <연제>를 증하여 낳아서 포녀(布女)라고 하였다.
三月 地宮生子弩同 命英失洗之 地宮泣 謂英失 曰
“我者爲汝妻則 無今日之悲 帝何奪之 而今反凍乎”
英失曰 “天宮崩矣 寵後來 勿悲而自美則 加以悅帝”
帝自天宮崩 後逼衰 縱酒大醉荒色 柳眞宮 諫止之 曰
“妹天雖去 我尙在此 汝不愛我 何乃自悲如此”
帝曰 “汝雖色美 不如杵后之心美 朕所以痛也”
遂與皐蘭蘭弓只召等 荒蕩失神 至于不豫 命中外仙巫禳之
大豊大師田檍 請修堤防設職 許之
以棠珍妻启公
3월, 지궁이 아들 <노동弩同>을 낳아 <영실英失>에게 명하여 아기를 씻도록 하니
지궁이 울면서 <영실英失>에게 말하기를
" 내가 너의 처인 즉 오늘의 슬픔이 없는데
제는 어찌 아기를 빼앗아 지금 되돌리려 하는가?" 라고 하니
<영실英失>이 말하기를
" 천궁이 죽어 훗날 총애가 올 것이니 슬퍼하지 말고 스스로 아름답게 하면
제를 기쁘게 하는 것이 더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는 천궁이 죽은 이래 술과 황음으로 몹씨 쇠약해 지니
<유진柳眞>궁이 이를 금지토록 하며 말하기를
" 비록 동생은 하늘로 갔으나 저는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어찌 스스로 슬퍼함이 이와 같습니까?" 라고 하니
제가 말하기를
" 비록 너가 얼굴이 아름다우나 저후(杵后)의 마음의 아름다움만 못한 바
짐이 마음 아파한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고란皐蘭>, <란궁蘭弓>, <지소只召> 등과 함께 황음과 방탕으로 실신하여
죽음 직전에 이르니 나라안팎 선무(仙巫)들에게 명하여 기도토록 하였다.
대풍대사(大豊大師) <전억田檍>이 제방시설을 수리하도록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당진棠珍>을 <계공启公>의 처로 하였다.
四月 帝與碧花后 幸南桃 召仙骨諸老 自責失政亂色 命各言 急務以匡國政
群臣乃請 伊飡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山宗兵部令 守知執書令 阿時大調令
苔宗理方令 肜吹宮門令 白宗檢軍使 比梁船府令
立杵眞廟 行大祭
4월, 제와 <벽화碧花>후가 남도(南桃)에 행차하여 선골(仙骨) 노인들을 불러
실정(失政)과 황음을 자책하며 국정의 위급한 업무를 바르게 하도록
각 자에게 말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으로 하여 나라 일을 모두 맡도록 하고
<산종山宗>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수지守知>를 집서령(執書令)으로
<아시阿時>를 대조령(大調令)으로 <태종苔宗>을 이방령(理方令)으로
<융취肜吹>를 궁문령(宮門令)으로 <백종白宗>을 검군사(檢軍使)로
<비량比梁>을 선부령(船府令)으로 하였다.
<저진杵眞>의 사당을 세우고 대제를 지냈다.
五月 麗君興安病殂 寵弟宝延立
初宝延之母與興安私通 而擁立興安 故興安以宝延爲太子
至是宝延母色衰 而興安得高峻女寵之 欲廢宝延 宝延乃私通于高峻女 曰
“吾少兄老 何不立我"
高峻女許 乃立宝延 而幽興安 遂殂云
5월, 고구려 군주 <흥안興安>이 병으로 죽어 총애하는 동생 <보연宝延>이 섰다.
처음에 <보연宝延>의 어머니가 <흥안興安>과 사통하여 <흥안興安>을 옹립하였다.
그런 연유로 <흥안興安>은 <보연宝延>을 태자로 하였다.
이제와서 <보연宝延>의 어머니의 색이 쇠하니
<흥안興安>은 <고준高峻>의 딸을 받아들여 총애하여
<보연宝延>을 폐하고자 하니 <보연宝延>이 <고준高峻>의 딸과 사통하여 말하기를
" 나의 작은 형은 늙었는데 어찌 나를 세우지 않는가?" 라고 하니
<고준高峻>의 딸이 허락하여 <보연宝延>을 세우고 <흥안興安>을 유폐하여
마침내 죽었다고 하였다.
이때 안장대제 <흥안> 55세, 안원대제 <보연> 53세이다.
六月 帝幸柳眞宮 欲歸 柳珍宮挽而留之 覺德不悅 曰 “汝欲爲天宮 而姐于帝乎”
柳眞宮曰 “汝乃吾臣 安敢妬吾供色”
乃告于帝 曰 “覺德妬汝 乃流於一善”
以乃雪爲柳珍宮私臣 時柳眞宮已與乃雪相通 倦于覺德 故譛之也
立宗只召稟祖主
6월, 제가 <유진>궁에 행차하여 돌아가고자 하니 <유진>궁이 만류하여 머무르게 하니
<각덕覺德>이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 당신은 천궁이 되고자 제에게 교태를 부립니까?" 라고 하니
<유진>궁이 말하기를
" 당신과 나는 신하인데 어찌 감히 나의 색공을 질투하십니까?" 라고 하며
제에게 고하니 말하기를
" <각덕覺德>이 너를 질투하니 일선(一善)으로 유배를 보내고자 한다." 라고 하며
<내설乃雪>을 <유진>궁 사신(私臣)으로 하였다.
이때 <유진>궁은 이미 <내설乃雪>과 상통하여
<각덕覺德>에게 권태를 느끼고 있어 참소를 한 것이다.
<입종立宗>과 <지소只召>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七月 行妙王大祭 于別洞
7월, 별동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다.
八月 桂花仇衡入朝
大書令沙忠卒 忠沙洗公主家奴加兒 烝于公主而生也
自幼聰明好學 博識爲當世第一 薛布次之
守知好知等 皆從而學之 以骨微 常守知家臣
而守知不以臣待之 呼以阿兄 力薦其才于帝 擢爲大書令 密章多出 于其門
五使夫余 而二使于梁 與守知 更新制度 大有功焉
性嗜酒好色 不自有室 好公卿之妻私通
荒宗母妙紅 最與之好 生忠女紅心 色美善歌 仙徒奉爲源花 曰
“生女當如紅心花 生子當如沙忠郞”
忠面如白玉倩笑令言潔身如洗 所居無一塵 至是入捺己神山 刻妙王像 而歸得疾 卒于途
自云妙王召爲主 傳 帝惜其才 命以阿飡禮葬之 年五十五
好知大書令 乃宗大書郞
8월, <계화桂花>와 <구형仇衡>이 입조하였디.
대서령(大書令) <사충沙忠>이 죽었다.
<사충沙忠>은 <사선沙洗> 공주의 가노(家奴) <가아加兒>가 공주를 증하여 낳았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한 것은 당시 제일이고
<설포薛布>가 그 다음이었다.
<수지守知>와 <호지好知>등 모두가 그의 학문을 따랐으나 골품이 미천하여
항상 수지<守知>의 가신(家臣)으로 있었으나
<수지守知>는 가신(家臣)으로 대우하지 않고 아형(阿兄)으로 부르며
제에게 그 재능을 힘써 천거하여 대서령으로 뽑히니
비빌스런 상주서(上奏書)가 그 문(門)에서 많이 나왔다.
부여에 보낸 5명의 사신과 양(梁)에 보낸 2명의 사신이 <수지守知>와 함께
새로운 제도를 갱신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성품은 술을 좋아하고 호색하여 스스로 내실에 있지않고
공경의 처를 좋아하여 사통하였다.
<황종荒宗>의 어머니 <묘홍妙紅>과 최고로 좋아하여
<사충沙忠>의 딸 <홍심紅心>을 낳으니
얼굴이 아름답고 향가를 잘하여 선도들이 원화로 받들며 말하기를
" 딸을 낳으면 마땅히 <홍심紅心> 원화와 같아야하며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사충沙忠>랑과 같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사충沙忠>의 얼굴은 백옥같고, 웃음은 예쁘고, 말은 영롱하고,
막 씻은 듯 몸을 청결히 하여 하나의 티끌도 없이 살아오다
이제와서 날기 신산에 들어가 묘왕상을 조각하여 돌아오다 병을 얻어 도중에 죽었다.
스스로 말하여 묘왕이 불렀다고 하니 제가 그 재능을 애석해 하며
아찬의 예로 장사토록하니 나이 55세였다.
<호지好知>를 대서령으로 <내종乃宗>을 대서랑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于南郊
肜竹生 乃宗子乃竹
9월,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융죽肜竹>이 <내종乃宗>의 아들 <내죽乃竹>을 낳았다.
十月 伊登兵部令
金官金元等 作亂 討平之
10월, <이등伊登>을 병부령으로 하였다.
금관의 <금원金元> 등이 난을 일으켜 이를 평정하였다.
十一月 帝與地宮 入海宮
11월, 제와 지궁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十二月 英失沙道美稟祖主
12월, <영실英失>과 <사도미沙道美>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19년(532) 수서(水鼠) 壬子
正月 受朝 于海宮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三月 仇衡請 以國獻 許之
授位上等 以其國爲食邑 祿其三子 皆有差 賜奴婢田宅
3월, <구형仇衡>이 나라를 바치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다.
상등(上等)의 직위를 내리고 그 나라를 식읍으로 하였다.
그 세 아들에게는 녹봉을 차등있게 내리고 노비와 논밭과 저택을 내렸다.
五月 柳眞宮 生乃雪子柳仍
九枝栴檀生 于白欣墓 仙徒等 請行大祭 許之 魏花俊室 主之
5월, <유진柳眞>궁이 <내설乃雪>의 아들 <유잉柳仍>을 낳았다.
<백흔白欣>묘에 가지가 아홉 개 달린 단향목이 자라니
선도(仙徒) 등이 대제를 지내고자 청하여 이를 허락하고
<위화魏花>와 <준실俊室>이 이를 주관토록 하였다.
六月 汕宗鼻蘭稟祖主
召覺德歸京 爲僧都
6월, <산종汕宗>과 <비란鼻蘭>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각덕覺德>을 불러 경도(京都)로 돌아오게 하여 승도(僧都)로 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于別洞 苩華散花
行沙忠大祭 于捺己 立廟祀之
帝幸只召宮 宴骨女殿君
8월, 별동에서 대가배를 행하고 <백화苩華>가 꽃을 뿌렸다.
날기에서 <사충沙忠> 대제를 지내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디.
제가 <지소只召>궁에 행차하여 골녀(骨女)와 전군(殿君)에게 잔치를 열었다.
十月 英失兵部令
魏花以白羽毛 造白羊神母像 安于胡蝶車 地宮使人偸之 奉于帝枕
忽然胡蝶飛騰 不知去處 宮中皆奇之
四索不得 翌日魏花獻之 曰 “胡蝶自還 當以奉進爲地宮禱子神”
帝命玉人造黃金臺 飾以十二玉階藏之
10월, <영실英失>을 병부령으로 하였다.
<위화魏花>가 흰 깃털로 백양신모상(白羊神母像)을 만들어
호접거(胡蝶車)에 안치하니 지궁이 사람을 보내어 남몰래 가져와
제의 이부자리와 베개에 받들어 모셨다.
홀연히 호랑나비가 날아 오르더니 그 간 곳을 알 수 없어
궁중의 모두가 기이하게 여겼다.
사방을 찾아도 잡을 수 없드니 다음 날 <위화魏花>가 이를 바치며 말하기를
" 호랑나비가 스스로 돌아오니
마땅히 지궁의 아들 낳기를 기도하는 신(神)으로 모시어 올리고자 합니다." 라고 하니
제가 옥인(玉人)에게 명하여 황금으로 대(臺)를 만들고
열두 계단을 옥(玉)으로 장식하여 이를 보관하였다.
十一月 行伊同宮大祭
仙王妃厚惠公主薨 春秋三十六
公主行伊同大祭得疾 而謂魏花 “夢見母后 召我 奈郞君何”
魏花曰 “公主之貴極矣 先我昇天 不亦好乎”
厚惠乃喜 而薨 後五日 群臣爭言 魏花仙王之僭
還上王號 而公主已薨 故猶用妃號
人以爲公主 見機而先行 魏花之寵 自始少衰 仙徒多難 佛徒漸殖
11월, 이동궁(伊同宮)에서 대제를 지냈다.
선왕(仙王)비(妃) <후혜厚惠>공주가 죽었다.
나이 36세였다.
공주가 이동(伊同) 대제를 지내고 병을 얻어 <위화魏花>에게 이르기를
" 꿈에 모후를 만나니 나를 부르니 낭군(郞君)은 어찌 할꼬?" 라고 하니
<위화魏花>가 말하기를
" 공주님은 지극히 귀한 몸이니 내가 먼저 하늘로 올라감이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후혜厚惠>가 기뻐하며 죽었다.
5일 후 신하들이 <위화魏花> 선왕(仙王)의 참람됨을 말 다툼하였다.
상이 돌아와 왕으로 호칭하고 공주는 이미 죽어 오히려 비(妃)로 부르게 하였다
사람들이 공주로 부르며 앞서 기회를 엿보니
<위화魏花>의 총애는 처음부터 작고 쇠약하여
선도(仙徒)들은 어려웅이 많았고 불도(佛徒)들은 점점 번성하였다.
十二月 薛布大書令
帝與只召宮 行佛法會
碧登紅心稟祖主
12월, <설포薛布>를 대서령(大書令)으로 하였다.
제와 <지소只召>궁이 불법회(佛法會)를 행하였다.
<벽등碧登>과 <홍심紅心>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20년(533) 흑우(黑牛) 癸丑
正月 受朝 眞宮
沙道美生 英失女沙夫美
정월, 진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사도미沙道美>가 <영실英失>의 딸 <사부미沙夫美>를 낳았다.
三月 奉佛像 于天柱寺 命福宗爲法
大角干厚都殿君薨 春秋六十六
君美畵人物 性寬仁 恕人妻女 皆私通家奴 而若不知
不喜奢侈 常以布衣穿履 而行 人不知爲殿君
負大囊于肩 見人窮困則開囊施恤 故時稱大囊殿君
多婢妻子 數十人 率遊於野外爲樂
帝嘉其才德 賞賜甚多 而皆施於人 曰 “食常貧晏 然無憂”
3월, 천주사(天柱寺)에 불상을 받들어 모시고
<복종福宗>에게 명하여 법(法)으로 하였다.
대각간 <후도厚都> 전군(殿君)이 죽었다.
나이 66세였다.
군은 아름답고 인물화를 잘 그렸고 성품은 관대하고 인자하여 처와 딸들을 용서하니
모두들 가노(家奴)와 사통하여도 알지를 못하였다.
사치를 좋아하지 않고 항상 삼베 옷을 입고 구멍난 신을 신고 다녀
사람들은 전군(殿君)임을 알지 못하였다.
어깨에 큰 자루를 둘러매고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자루를 열어 구휼하니
이 당시 사람들이 대낭전군(大囊殿君)이라 불렀다.
비녀와 처자가 많아 수십 명이었다.
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유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제가 그 재능과 덕을 가상히 여겨 많은 상을 내리니
모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하기를
" 항상 가난하게 먹으니 근심이 없다." 라고 하였다.
六月 行異次頓大祭
立宗只召稟祖主
宮人三菱與隆公 相通 命吉 于鮑祠 賜宅奴婢
6월, <이차돈異次頓> 대제를 지냈다.
<입종立宗>과 <지소只召>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궁인 <삼릉三菱>과 <융공隆公>이 상통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고
사택과 노비를 내렸다.
七月 行妙王大祭 于捺己神宮
以雪召妻仇珍 行吉 鮑祠
雪召與仇珍 野合于吾道宮樹王之下 帝欲罪之 地宮力止之 而許吉
7월, 날기 신궁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다.
<설소雪召>를 <구진仇珍>의 처로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설소雪召>와 <구진仇珍>은 <오도吾道>궁 수왕(樹王) 아래에서 야합하여
제가 이를 벌주고자 하니 지궁이 힘써 이를 막아 길례를 허락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于南桃
牛徒行吉公大祭
8월, 남도(南桃)에서 대가배를 행하였다.
우도(牛徒)가 <길공吉公> 대제를 지냈다.
九月 穀大登 皆得三年之豊 歡聲載野
命倉師增修田倉 以備貯穀 命大豊大師乃車 巡視六部大場
帝親行 大場于閼川 賞農師田師登 百五人
9월, 곡식이 크게 여물어 삼년 동안 풍년이 들어 모두가 들에 모여 환성을 지르니
창사(倉師)에게 명하여 전창(田倉)을 증축하고 수리토록 명하고
양곡을 예비로 저장토록 하고 대풍대사 <내거乃車>에게 명하여
6부 대장(大場)을 순시토록 하였다.
제가 친히 행차하여 알천(閼川)에서 대장(大場)을 행하고
농사(農師) 전사(田師) 등 105명에게 상을 주었다.
十月 行月歌 于剡光仙院
10월, 염광선원(剡光仙院)에서 월가를 행하였다.
十二月 乃宗肜竹稟祖主
剡光院主玉蘭公主薨 帝痛哀之 葬以后禮
公主毗處帝女 或曰 蘭陵夢呑赤玉 家巫占之 曰 “必貴 可以禱子”
乃與家奴厚連 夜欲而禱 厚連見 蘭陵出浴 忽發火心 强抱而淫之 遂生公主云
厚連爲公主奴 常謂公主 曰 “主乃臣之女也 不可役臣”
主乃厚待 厚連呼以翁父 不名
性精敏 色美 善於衣食之政 能姐上撫下歷 事三帝 皆有寵 位至一品權妻
春秋五十六 而柔如嬰兒 依蝶有姐術宜 男帝常歎之 曰 “玉妻眞丹仙也”
以皐蘭爲剡主
行靑牛祭 于別洞
三菱設火 戲迎帝及魏花碧花 享之
12월, <내종乃宗>과 <융죽肜竹>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염광원주(剡光院主) <옥란玉蘭(478-533)>공주가 죽었다.
제가 이를 애통해하며 후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공주는 <비처毗處>제의 딸이다.
혹은 말하기를 <란릉蘭陵>이 적옥(赤玉)을 삼키는 꿈을 꾸어
가무(家巫)에게 점을 치니 말하기를
" 반드시 귀한 꿈이니 아들을 비는 것이 옳다." 라고 하니
이에 가노(家奴) <후연厚連>과 함께 밤에 기도코자하였다.
<후연厚連>이 <란릉蘭陵>이 목욕을 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홀연히 화심(火心)이 생겨
강제로 포옹하여 그녀를 음란하여 마침내 공주를 낳았다고 한다.
<후연厚連>은 공주의 노비로 항상 공주에게 일러 말하기를
" 공주는 신(臣)의 딸이니 신(臣)을 부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가 후하게 대우하여 <후연厚連>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옹부(翁父)로 불렀다.
성품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얼굴이 아름답고 옷과 음식을 잘 다스려
위로는 교태를 부리고 아래로는 어루만져 세 제(帝)를 섬기니
모두에게 총애가 있어 직위가 일품 권처에 이르렀다.
나이 56세였으나 마치 어린아이 처럼 부드러워 나비처럼 교태를 부리니
남제(男帝)는 항상 이를 탄식하며 말하기를
" 옥처(玉妻)는 진실로 단선(丹仙)이다." 라고 하였다.
<고란皐蘭>을 염광원주(剡光院主)로 하였다.
별동에서 청우제(靑牛祭)를 지냈다.
<삼릉三菱>이 등화를 차비하여
<제帝>와 <위화魏花>와 <벽화碧花>에게 바치니 이를 봉헌하였다.
법흥왕 21년(534) 청호(靑虎) 甲寅
正月 受朝 眞宮
地宮生 英失女思道 英失洗之
정월, 진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지궁{옥진}이 <영실英失>의 딸 <사도思道>를 낳아 <영실英失>이 아기를 씻었다.
이 <사도思道>가 진흥대제 <삼모진>의 비이며 대원신통의 宗이다.
二月 上大等哲夫卒 年七十 烏含子也 母沙梁美海王女也
哲夫有大度 善兵事 能任賢使 能出將入相 皆有治勣 衆望歸焉 摠持國事
凡三年余 而告退 旋卒 以角干禮葬 加其子西力夫爵一級
白宗代哲夫 總持國事
帝行三菱家 增其奴婢田宅 自是累幸宿之
2월, 상대등 <철부哲夫>가 죽었다.
나이 70세로 <오함烏含>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량沙梁>으로 <미해美海>왕의 딸이다.
<철부哲夫>는 큰 도량이 있고 사병의 일을 잘 하였으며
임무를 맏아 현명하게 처리하니 나가서는 장군이고 들어와서는 재상으로
모두에 치적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돌아와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기를 바랐다.
무릇 3년여를 퇴직코자 고하고 돌고돌아 죽으니 각간의 예로 장례를 치루고
그 아들 <서력부西力夫>에게 일급의 작위를 더하였다.
<백종白宗>이 <철부哲夫>를 대신하고 나라 일을 총괄하여 다스렸다.
제가 <삼릉三菱>의 집으로 행차하여 노비와 논밭과 저택을 더 내렸다.
이로부터 누차 행차하여 잠을 잤다.
三月 金珍源花
3월, <금진金珍>을 원화(源花)로 하였다.
四月 只召生子彡慕珍 帝洗之
先是帝摩只召腹 曰 “是誰子”
只召對 以帝子
至是誕之 貌如帝 帝大喜 曰 “此眞吾子也”
乃名彡慕珍 以古慕珍宮與之
或曰 立宗公夢見蒼龍上天 而合于只召 而誕也
誕日瑞氣滿室 而香空中 有天樂聲
只召心自負 曰 “眞骨正統 其在此兒”
後果爲中興大帝
三葉生 阿時女骨宝
4월, <지소只召>가 아들 <삼모진彡慕珍>을 낳아 제가 아기를 씻었다.
이에 앞서 제가 <지소只召>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 이는 누구의 자식인가?" 라고 하니
<지소只召>가 제의 자식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제와서 아기가 태어나니 모습이 제를 닮아 제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이 애가 진실로 내 아들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름을 <삼모진彡慕珍>으로 하고 옛 <모진慕珍>궁을 주었다.
혹은 말하기를 <입종立宗>공이 꿈에 푸른 용이 하늘을 오르는 것을 보고
<지소只召>와 합궁하여 태어 났다고 하였다.
태어난 날 산실에 서기가 가득차고 공중에서는 향기가 나고
하늘에는 즐거운 소리가 있었다.
<지소只召>가 마음 속으로 자부를 가지고 말하기를
" 진골정통(眞骨正統)이 바로 이 아기에게 있다." 라고 하였다.
후에 과연 증흥대제(中興大帝)가 되었다.
<삼엽三葉>이 <아시阿時>의 딸 <골보骨宝>를 낳았다.
六月 眞宗皐蘭稟祖主
6월, <진종眞宗>과 <고란皐蘭>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七月 行妙王大祭 于別洞
苩華生 帝子苩宗
7월, 별동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다.
<백화苩華>가 제의 아들 <백종苩宗>을 낳았다.
八月 行嘉俳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十月 肜竹生 帝女珍竹
10월, <융죽肜竹>이 제의 딸 <진죽珍竹>을 낳았다.
十一月 帝幸天柱寺 拜佛像 設齋
帝夢見 金神自西方來 授金尺于帝 曰 “當栽東方云”
故帝以爲佛獲 而篤信之 命覺德等 講經設法 于六部
隆公妻三菱生 子菱公 自云帝子 請帝洗之 許之
11월, 제가 천주사(天柱寺)에 행차하여 불상에게 예배를 드리고 재(齋)를 베풀었다.
제가 꿈에 금신(金神)이 서방에서 와서 제에게 금척(金尺)을 주고 말하기를
" 마땅히 동방을 재단하라." 라고 하였다.
그런 연유로 제가 불도를 얻어 도탑게 믿도록 하고 <각덕覺德> 등에게 명하여
6부에 법(法)을 설하고 경(經)을 강론토록 하였다.
<융공隆公>의 처 <삼릉三菱>이 아들 <릉공菱公>을 낳고
스스로 말하기를 제의 아들이라고 하며 제에게 아기를 씻도록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十二月 覺德苩華稟祖主
帝與柳珍 入海宮
12월, <각덕覺德>과 <백화苩華>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제와 <유진柳珍>이 해궁에 들어갔다.
법흥왕 22년(535) 청토(靑兎) 乙卯
正月 受朝 于海宮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二月 伐天鏡林 創興輪寺
俊室生 魏花女俊華
地宮幸天柱寺 拜佛
2월, 천경림(天鏡林)을 벌목하여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하였다.
<준실俊室>이 <위화魏花>의 딸 <준화俊華>를 낳았다.
지궁이 천주사(天柱寺)에 행차하여 불상에 예배하였다.
四月 柳眞生 乃雪女柳雪
4월, <유진柳眞>이 <내설乃雪>의 딸 <유설柳雪>을 낳았다.
六月 英失只召稟祖主
6월, <영실英失>과 <지소只召>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七月 行妙王大祭 于別洞
大書令薛布卒 年五十八
布性淸介 好讀書 家貧如洗
與沙忠素善 忠長一年 事之如兄
忠爲守知家臣 薦布于好知爲其家臣
諫好知與其嫂善賢相通 普賢怒 欲笞之 布曰
“爲君而死 亦可 况笞乎 臣雖死於杖下 勿使吾君 有藉嫂之名”
好知曰 “此奴愚直 雖笞無益”
乃赦之 放之于野 布又貧如初 忠以其祿分之
閉門讀書二十年 學高當世 四方學者皆就其門
年三十而未娶 沙忠有庶女與之 曰 “可作爲炊婢”
忠同居一年 未常近女恥之 欲去 忠命爲婚 生女二人
而先布死 布更不娶 以淸貧自守 帝聞其名 擢爲大書令
使擴沙忠之業 功未成而卒 世人惜之
父賓薛乃古韓飡羊薛之孫 卽孫光之後裔也 守修文章爲家業
母布萇庶女也 野合而生 布母適芥氏家
布幼長于芥家 初名芥布 及長還姓薛
訪其父于狼山下 得其書 發憤力學 遂爲文宗
或曰 布少事園君 有寵 故終身不娶云
7월, 별동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다.
대서령(大書令) <설포薛布>가 죽었다.
나이 58세였다.
성품은 고고하고 강직하였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씻은듯이 가난하였다.
<사충沙忠>과 함께 소박하게 잘 지냈으며
<사충沙忠>의 나이가 한 살 많아 형과 같이 섬기었다.
<사충沙忠>이 <수지守知>의 가신이 되어
<설포薛布>를 <호지好知>에게 그 가신으로 천거하였다.
<호지好知>에게 <설포薛布>가 그 형수 <선현善賢>과 상통함을 간하니
<보현普賢>이 노하여 볼기를 치려고 하자
<설포薛布>가 말하기를
" 군(君)을 위하여 죽는 것도 옳은데 하물며 볼기를 치려고 하십니까?
비록 신(臣)이 매질로 죽어도 내 군(君)을 섬김을 막지 못하니
형수의 이름을 호적에 남길 뿐입니다." 라고 하니
<호지好知>가 말하기를
" 이 가노(家奴)는 우직하여 비록 볼기를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를 사면하여 교외로 내쫓으니
<설포薛布>는 또 처음처럼 가난하게 되어 <사충沙忠>이 그 녹봉을 나누어 주었다.
폐문하여 20년간 책을 읽으니 학문이 당대의 최고가 되어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자 모두가 그 문으로 나아갔다.
나이 30세에도 장가들지 않으니
<사충沙忠>에게 서녀(庶女)가 있어 그에게 주며 말하기를
" 부엌데기 노비로 삼을 만 하다."라고 하였다.
<설포薛布>와 1년을 같이 살아도 잠깐도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으니
이를 부끄럽겨 여겨 갈려고 하니 <사충沙忠>이 명하여 혼인하여 딸 2명을 낳았다.
<설포薛布>가 죽기에 앞서 <설포薛布>가 다시 장가들지 않고
청빈하게 살며 스스로 지키니 제가 그 이름을 듣고 대서령으로 뽑아
<사충沙忠>이 하는 일을 확산토록 하였으나 공을 이루기도 전에 죽어
세상 사람들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아버지 <빈설賓薛>은 옛 한찬(韓飡) <양설羊薛>의 손자로
<손광孫光>의 후예로서 문장을 닦아 가업(家業)을 지켰다.
어머니 <포장布萇>은 서녀(庶女)로 야합하여 낳았다.
<설포薛布>의 어머니는 개씨(芥氏) 집안의 적손이다.
<설포薛布>는 어릴 때 개씨(芥氏) 집에서 자라 처음에는 <개포芥布>라고 부르다가
장성하여 성을 설(薛)로 바꾸었다.
랑산(狼山) 아래에서 그 아버지를 방문하여 책을 얻어
분발하여 힘써 배워 마침내 학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설포薛布>가 어릴 적에 <원군園君>을 섬기어 총애가 있어
종신토록 장가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설포> 58세, <사충> 531년에 55세로 사망, <수지> 54세, <호지> 50세
<보현> 54세, <선현> 52세?이다.
八月 行大嘉俳 于別洞 俊貞散花
好知大書令 崔越爲郞
8월, 별동에서 대가배를 행하고 <준정俊貞>이 꽃을 뿌렸다.
<호지好知>를 대서령으로 <최월崔越>을 대서랑으로 하였다.
九月 立沙忠薛布廟 于城西 名曰讀院 捀骨子弟 好大書命入讀院 修之
朱珍三年山主 宝門比列城主
9월, 성의 서쪽에 <사충沙忠>과 <설포薛布>의 사당을 세워 독원(讀院)으로 이름하고
대서(大書)를 좋아하는 골의 자제를 뽑아 독원(讀院)에 들어가 배우도록 하였다.
<주진朱珍>을 삼년산주(三年山主)로하고
<보문宝門>을 비열성주(比列城主)로 하였다.
十月 荒宗骨門理方
歌仙崔琓卒
10월, <황종荒宗>을 골문이방으로 하였다.
가선(歌仙) <최완崔琓>이 죽었다.
十二月 福宗沙道美稟祖主
雪召生 仇珍女欽里
帝與地宮只召 入海宮
12월, <복종福宗>과 <사도미沙道美>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설소雪召>가 <구진仇珍>의 딸 <흠리欽里>를 낳았다.
제와 지궁과 <지소只召>가 해궁으로 들어갔다.
법흥왕 23년(536) 적룡(赤龍) 丙辰
正月 受朝 海宮
命宅師創永興寺
以爲讀院子弟 別院 禱 地宮及只召宮柳眞宮福業
命苔宗肜吹比助夫等 爲三路將軍 以餮舟楫收 伐野國 守知諫之 不聽
群臣上帝號曰 神國金天大帝 始改元曰 建元 元年
大赦國中 賜八十以上衣酒 加耶福優 爵馬有次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영흥사(永興寺)를 창건토록 하였다.
독원(讀院)의 자제들이 별원(別院)에서
지궁 및 <지소只召>궁과 <유진柳眞>궁의 복업을 빌도록 하였다.
<태종苔宗>, <융취彤吹>, <비조부比助夫> 등을 삼로(三路)장군으로 명하고
배를 수습하여 야국(野國)을 정벌코자 하니 <수지守知>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신하들이 제의 칭호를 높이어 신국금천대제(神國金天大帝)라 하고
처음으로 연호를 고쳐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다.
나라 안에 대사면을 하고 80세 이상 자에게 옷과 술을 내리고
가야는 복업으로 대우하여 작위와 말을 차별있게 내렸다.
二月 上不豫 命中外仙巫祓之
以阿肜爲太子比臺妃 行吉 海宮
2월, 상의 몸이 편치 않아 나라안팎 선무(仙巫)에게 푸닥거리를 하도록 명하였다.
<아융阿肜>을 태자 <비대比臺>의 비(妃)로 하여 해궁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때 태자 <비대> 15세이다.
<아융>은 <태종> 이사부와 <융산>의 딸이다.
三月 伊飡車性薨 尹生之弟也 善倉廩 富國用 其妻宋仁 賜年穀
3월, 이찬 <거성車性>이 죽었다.
<윤생尹生>의 동생이다.
창고와 곳간을 잘 다스려 나라가 부강하도록 사용하게 하니
그 처 <송인宋仁>에게 년곡을 내렸다.
四月 朱蒦殿君薨
帝幸碧院 親酌出征諸將 賜甲馬
4월, <주호朱蒦(469-536)> 전군(殿君)이 죽었다.
제가 벽원(碧院)으로 행차하여 출정하는 장수들에게 친히 술을 따르고
갑옷과 말을 내렸다.
五月 阿飡芥明卒 明精敏善吏 學能治民 上愛其才 重用之 命厚葬之 祿其子女
5월, 아찬 <개명芥明>이 죽었다.
<개명芥明>은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관리를 잘 다스리고 학문으로 백성을 다스려
상이 그 재능을 사랑하여 중히 등용하였다.
후하게 장레를 치루도록 명하고 그 자녀에게 녹봉을 주었다.
六月 天林芬兒稟祖主
太子多病 又好佛事 無意於政事 帝亦倦於政事 乃以立宗殿君行副君事
6월, <천림天林>과 <분아芬兒>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태자는 병이 많고 또 불사(佛事)를 좋아하여 정사(政事)에는 뜻이 없었으며
제 역시 정사(政事)에 권태를 느껴 <입종立宗> 전군을 부군(副君)으로 하여
정사(政事)를 맡게 하였다.
七月 永興寺成 地宮人宮享仙徒
梭失公主薨
蘭公出奔 從母白蘭
7월, 영흥사(永興寺)가 완공되어 지궁과 인궁이 선도(仙徒)들을 접대하였다.
<사실梭失(503-536)>공주가 죽었다.
<란공蘭公>이 도망하여 어머니 <백란白蘭>을 따라갔다.
八月 行嘉俳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九月 俊室與魏花 禱于花林 行大祭
苩華生 帝女苩明
9월, <준실俊室>과 <위화魏花>가 화림(花林)에서 기도를 올리고 대제를 지냈다.
<백화苩華>가 제의 딸 <백명苩明>을 낳았다.
十一月 波珍飡苩興卒
帝不豫 入桃山 祓之
11월, 파진찬 <백흥苩興>이 죽었다.
제가 몸이 편치않아 도산(桃山)에 들어가 푸닥거리를 하였다.
법흥왕 24년(537) 적사(赤蛇) 丁巳
正月 副君與太子 受朝 眞宮
比助夫兵部令
정월, 부군과 태자가 진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비조부比助夫>를 병부령으로 하였다.
二月 俊室生子二花 于皐王宮
夢見玄武上殿而孕 仙臣五十七人 私賀獻禮
2월, <준실俊室>이 고왕궁(皐王宮)에서 아들 <이화二花>를 낳았다.
위화(준실) - 이화(537-603)
이 <이화二花>가 신라 4대 풍월주(556-561)이다.
꿈에 현무가 대궐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선신(仙臣) 57명이 사사로이 하례를 올렸다.
三月 俊貞爲源花
帝與只召 入海宮
3월, <준정俊貞>을 원화(源花)로 하였다.
제와 <지소只召>가 해궁으로 들어갔다.
五月 地宮生 副君女興道
只召生 帝女勸珍 于海宮
5월, 지궁이 부군의 딸 <흥도興道>를 낳았다.
<지소只召>가 제의 딸 <권진勸珍>을 해궁에서 낳았다.
六月 仇珍雪召稟祖主
上大等白宗卒 蟾萇代之
6월, <구진仇珍>과 <설소雪召>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상대등 <백종白宗>이 죽어 <섬장蟾萇>이 대신하였다.
七月 地宮與太子 浴于永興寺池
太子諫 宮荒淫 宮曰 “朕以汝爲太子 欲行樂耳 豈謂反我 若此遂有隙 以此”
太子累請讓 出爲僧 群臣諫止之
行妙王大祭
7월, 지궁과 태자가 영흥사(永興寺) 못에서 목욕을 하였다.
태자가 지궁의 황음함을 간하니
지궁이 말하기를
" 짐이 너를 태자로 하여 즐기고자 하는데
어찌 나를 반대하여 이같이 틈이 생기게 하느냐? 라고 하였다.
태자가 누차 사양을 청하며 나가서 승려가 되고자 하니
신하들이 이를 중지토록 간하였다.
묘왕 대제를 지냈다.
이때 태자 <비대>는 지궁 <옥진>의 아들로 16세이고 <옥진>은 33세이다.
九月 行大場 于南郊
9월,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一月 韓飡畏須卒
禱太子疾 于三山
11월, 한찬(韓飡) <외수畏須>가 죽었다.
태자가 병이나서 삼산(三山)에서 기도하였다.
十二月 帝與地宮柳眞 入海宮
英失只召稟祖主
12월, 제와 지궁과 <유진柳眞>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영실英失>과 <지소只召>를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25년(538) 황마(黃馬) 戊午
正月 受朝 海宮
阿尸良盡平 苔宗都督之
先是公卿之出鎭于外者 其妻以骨女 爲四節留京 故多取鄕女 其弊甚多
至是許携家 出鎭無奪鄕女
정월, 해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아시랑(阿尸良)을 모두 평정하여 <태종苔宗>을 그 도독(都督)으로 하였다.
이에 앞서 공경이 경외(京外)의 자들을 진압코자 나가서
그 처가 골녀가 되어 사계절 경도(京都)에 머무니
시골의 여자를 취함이 많아 그 페단이 아주 많았다.
이제와서 가족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허락하니
진압하러 나가도 시골의 여자를 빼앗는 것이 없어졌다.
三月 明襛南遷所夫里
3월, <명농明襛>이 남쪽 소부리(所夫里)로 천도하였다.
四月 金珍生 立宗子肅訖宗
4월, <금진金珍>이 <입종立宗>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을 낳았다.
숙흘종(만호) - 만명(서현) - 유신(595-673)
이 <숙흘종>이 <유신>의 외할아버지이다.
五月 文華生 比助夫子文弩
遣覺德世春等七人 入梁
5월, <문화文華>가 <비조부比助夫>의 아들 <문노文弩>를 낳았다.
호조(선혜) - 비조부(484- )
찬실(야왕녀) - 문화(500?- )
비조부(문화) - 문노(538-606)
이 <문노文弩>가 신라 8대 풍월주(579-582)이다.
<문노>의 아버지 <비조부>는 신라 진골정통 <선혜>의 아들이고
어머니 <문화>는 대가야 왕족 <찬실>과 왜 왕녀의 딸이다.
<각덕覺德>과 <세춘世春> 등 7명이 양(梁)에 들어갔다.
六月 眞宗皐蘭稟祖主
白蘭與蘭公 入朝
6월, <진종眞宗>과 <고란皐蘭>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백란白蘭>과 <란공蘭公>이 입조하였다.
七月 行妙王大祭 于皐王宮
阿肜生 太子子后稷
7월, 고왕궁(皐王宮)에서 묘왕 대제를 지냈다.
<아융阿肜>이 태자의 아들 <후직后稷>을 낳았다.
八月 行嘉俳 于別洞 南毛散花
索娥宮主薨 牟大女也 習棠妻俊朔 通而生之
長爲剡臣副妻 得毗處寵 生女索明 將封后 及碧花入 寵衰 帝在太子時 與阿時累幸之
卽位封宮主 命爲沙輪妻 輪棄之 捨身仙院 多引仙臣及骨門艾子 自荒度日 而薨
8월, 별동에서 가배를 행하고 <남모南毛>가 꽃을 뿌렸다.
<색아索娥>궁주가 죽었다.
<모대牟大>의 딸이다.
<습당習棠>의 처 <준삭俊朔>이 통정하여 낳았다.
오래 동안 <염신剡臣>의 부처(副妻)가 되었다가
<비처毗處>의 총애를 얻어 딸 <색명索明>을 낳아 장차 후로 봉하고자 하였으나
<벽화碧花>가 들어와 총애가 쇠하여
제의 태자 시절에 <아시阿時>와 함께 누차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즉위하여 궁주로 봉하고 <사륜沙輪>의 처로 명하니
<사륜沙輪>이 그녀를 버려서 선원(仙院)에 몸을 맡겼다.
많은 선신(仙臣)과 골문의 어린 자들을 데리고 스스로 황음하며 지내다 죽었다.
九月 行大場 于南郊 命癸中殿君與其妻叔唇主之 賞農師五人 田師三人
9월,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계중癸中> 전군(殿君)과 그 처 <숙진叔唇>이 이를 주관토록하고
농사(農師)5명과 전사(田師) 3명에게 상을 주었다.
十月 上大等蟾萇卒 將軍思明代之 賜思明妻藥斗白大馬金紫神衣
10월, 상대등 <섬잠蟾萇>이 죽어 장군 <사명思明>이 이를 대신하게 하고
<사명思明>의 처 <약두藥斗>에게 백대마(白大馬)와 금자신의(金紫神衣)를 내렸다.
十一月 行平立宮大祭
元通公主薨
元通初爲智世路妻 侍毗妻帝 有寵進宮主
帝在太子時 亦幸之 亦有寵於智帝 置宮奴婢 于楊山
其子元實 有膂力能擊虎 從帝巡國中諸城 按其虛實 擢爲羽林將軍 平金元之亂
公主亦有功 加賜年穀
入加耶 置宮室 至是薨 返葬于智世路陵
春秋六十五 身長七尺 毛髮如漆
11월, 평립궁에서 대제를 지냈다.
<원통元通>공주가 죽었다.
<원통元通>은 처음에 <지세로智世路>의 처가 되었다가
<비처毗妻>제를 시중들다 총애가 있어 궁주로 나아갔다.
제가 태자 시절에 역시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니
역시 <지증>제에게도 총애가 있어 양산(楊山)에 궁의 노비를 두었다.
그 아들 <원실元實>은 남을 위협하는 힘이 있고 능히 호랑이를 물리 칠 수 있어
제가 나라 안 여러 성을 순시 할 때 따라가 그 허실을 알고 저지하니
우림장군으로 뽑혀 <금원金元>의 난을 평정하였다.
공주 역시 공이 있어 년곡을 더하여 내렸다.
가야에 들어가서 궁실을 두고 이제와서 죽으니
<지세로智世路>의 릉에 반장(反葬)하였다.
나이 65세로 신장은 칠척이고 모발은 칠흙 같았다.
十二月 启公棠珍稟祖主
12월, <계공启公>과 <당진棠珍>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법흥왕 26년(539) 황양(黃羊) 己未
正月 受朝 眞宮
정월 진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二月 吾道宮主薨 以后禮葬之
吾道以妙心女 生地宮 得帝寵 置宮室 于碧院之西南
其出入起居 一如后禮 政事多出于其門
是時地宮寵少衰 而帝尙畏 地宮之怒 以后禮崇之
帝與地宮 觀行其祭 而立廟
2월, <오도吾道> 궁주가 죽어 후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오도吾道>는 <묘심妙心>의 딸로서 지궁{옥진}을 낳고 제의 총애를 얻어
벽원(碧院)의 서남 쪽에 궁실을 두고 그곳에서 출입과 기거하며
후의 예와 같게 하니 정사(政事)가 그 문에서 많이 나왔다.
이때에 이르러 지궁의 총애가 조금 쇠약해졌으나
상이 오히려 지궁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후의 예로 존중하였다.
제와 지궁이 그 제사 지냄을 살펴보고 사당을 세웠다.
묘심(선혜) - 오도(487-539)
아시(오도) - 옥진(505- )
四月 副君與地宮金珍 入海宮
時帝倦于地宮 命副君出遊 帝與只召英失 遊永興寺事佛
4월, 부군과 지궁, <금진金珍>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이때 제는 지궁에게 권태를 느껴 부군에게 명하여 나가서 유람토록 하고
제와 <지소只召>, <영실英失>은 영흥사(永興寺)에 유람하여 부처를 섬기었다.
五月 帝不豫
5월, 제가 몸이 편치 않았다.
六月 副君立宗薨 于海宮
帝疾尙未全療 帝召阿時守知等 與思明
立只召爲天宮皇后 行副君事 以彡慕珍爲太子
地宮聞之 自海宮還 責帝負約 帝怒廢地宮 出碧院
只召后與碧花后力諫 不聽
玉珍乃泣 而出 天大雨
英失俊貞稟祖主
苔宗兵部令
6월, 부군 <입종立宗>이 해궁에서 죽었다.
제는 오히려 병을 완전히 치료하지 않아
<아시阿時>와 <수지守知> 등을 <사명思明>과 함께 불렀다.
<지소只召>를 천궁 황후로 세우고 부군의 일을 하도록 하고
<삼모진彡慕珍>을 태자로 하였다.
지궁이 이를 듣고 해궁에서 돌아와 약속을 어긴 것을 책망하니
제가 노하여 지궁을 폐하여 벽원(碧院)으로 가도록 하였다.
<비대>태자를 폐하고 <삼모진>을 태자로 세운 것을 말한다.
이때 <비대> 18세, <삼모진> 6세이다.
<지소只召>후와 <벽화碧花>후가 힘써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옥진玉珍>이 눈물을 흘리며 나가니 하늘에서는 큰 비가 내렸다.
<영실英失>과 <준정俊貞>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태종苔宗>을 병부령으로 하였다.
이때 법흥왕 <모진> 60세, 부군 <입종> 49세,
<아시> 59세, <수지> 58세, <사명> 61세, 천궁 <지소> 25세, 태자 <삼모진> 6세,
지궁 <옥진> 35세, 인궁 <벽화> 55세, <영실> 42세? <준정> 19세, <태종> 56세이다.
七月 宝果宮主薨
主曰 “帝不豫 侍側不懈”
盡以繼夜 禱以身代 竟染帝疾 瀉痢而薨 帝痛哀之 曰 “吾妻雖多 無如汝也”
主曰 “願世世爲夫婦 以盡未盡之情”
帝許之 脫衣換之 曰 “朕當從汝”
主莞■而崩 乃以天宮禮葬之
帝幸三菱家 見菱公 皃類于隆公 命爲隆公子
7월, <보과宝果>궁주가 죽었다.
궁주가 말하기를
" 제가 몸이 편치 않으니 시중을 게을리 하여서는 아니된다." 라고 하며
밤을 세워 계속 기도하다 마침내 제의 병이 전염되어 설사로 죽으니
제가 이를 애통해 하며 말하기를
" 비록 나의 처가 많으나 당신 같은 이는 없다." 라고 하였다.
궁주가 말하기를
" 세세토록 부부가 되기를 원하여 정을 다하고자 하나 아직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제가 이를 허락하고 옷을 벗어 바꾸며 말하기를
" 짐은 마땅히 당신을 따를 것이다." 라고 하였다.
궁주가 빙그레 웃으며 붕하니 천궁의 예로 장례토록 하였다.
제가 <삼릉三菱>의 집으로 행차하여 <릉공菱公>을 살펴보니
얼굴 모습이 <융공隆公>을 닮아 <융공隆公>의 아들로 명하였다.
八月 帝行南桃 賜酺群臣
復以玉珍爲地宮
以思道宮爲太子妃 行吉 神宮 帝與天宮主之
太子六歲 以能抱妃而舞 帝大喜 曰 “眞吾子也”
行大嘉俳 思道宮散花
8월, 제가 남도(南桃)에 행차하여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다시 <옥진玉珍>을 지궁으로 하였다.
<사도思道>궁을 태자비로 하여 제와 천궁이 주관하여 신궁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태자는 6살로 능히 비를 안고 춤을 추니 제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진정 나의 아들이다." 라고 하였다.
대가배를 행하고 <사도思道>궁이 꽃을 뿌렸다.
<사도>는 <영실>과 <옥진>의 딸로서 태자 <삼모진>과 동갑이다.
九月 帝與只召 行大場 于閼川
上大等思明卒
帝命阿時守知爲左右執事令 其和而行之 大政皆決于只召天宮
9월, 제와 <지소只召>가 알천(閼川)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상대등 <사명思明>이 죽었다.
제가 <아시阿時>와 <수지守知>를 좌우집사령으로 명하여 화회(和會)로 행하도록 하니
대정(大政)이 모두 <지소只召>천궁에서 결정되었다.
十月 命天宮稱帝 受朝
行三代席 于平立宮
10월, 천궁을 제(帝)로 칭하도록 명하고 조하를 받았다.
평립궁에서 삼대(三代)가 자리를 하였다.
十二月 天宮與阿時守知苔宗眞宗英失 會盟于神宮
命太子及妃 賜酒五臣
帝與天宮醉舞
英失玉珍稟祖主
俊貞生 英失女俊英
12월, 천궁과 <아시阿時>, <수지守知>, <태종苔宗>, <진종眞宗>, <영실英失>이
신궁(神宮)에 모여 맹서를 하고
태자와 태자비에게 명하여 다섯 신하에게 술을 내리도록 하였다.
제와 천궁이 취하여 춤을 추었다.
<영실英失>과 <옥진玉珍>을 품주와 조주로 하였다.
<준정俊貞>이 <영실英失>의 딸 <준영俊英>을 낳았다.
법흥왕 27년(540) 금신(金神) 庚申
正月 帝與天宮太子及妃 受朝 南桃 賜酒仙骨上老 行金神祭 于眞宮
帝讓位於天宮 群臣上金天太上之號于帝 眞天大帝之號于天宮
以英失玉珍爲左右璽主
정월, 제와 천궁, 태자와 태자비가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고
선골(仙骨) 상노(上老)에게 술을 내리고 진궁에서 금신제(金神祭)를 지냈다.
제가 천궁에게 양위하니 군신들이 제에게 금천태상(金天太上)의 호를 올리고
천궁에게는 진천대제(眞天大帝)의 호를 올렸다.
<영실英失>과 <옥진玉珍>을 좌우 새주(璽主)로 하였다.
二月十日 天宮率群臣 獻天壽慶宴 于太上 命太子及妃起舞
加前太子比臺三夫芬宗爵祿 賜骨門四十七宅轎馬
玉珍生 立宗女楚道
2월, 10일 천궁이 신하들을 데리고 태상(太上)에게 천수(天壽)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고 태자와 태자비에게 일어나 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전(前) 태자 <비대比臺>와 <삼부三夫>, <분종芬宗>에게 작위와 녹봉을 더하고
골문 마흔 일곱 집에 교마(轎馬)를 내렸다.
<옥진玉珍>이 <입종立宗>의 딸 <초도楚道>를 낳았다.
三月 太上幸平立宮 封樹王
肜竹生 眞宗女祐竹
3월, 태상(太上)이 평립궁에 행차하여 수왕(樹王)을 받들어 모셨다.
<융죽肜竹>이 <진종眞宗>의 딸 <우죽祐竹>을 낳았다.
四月 匝判布覧卒
加柳眞宮 年穀百石
4월, 잡판 <포람布覧>이 죽었다.
<유진柳眞>궁에게 년곡 백석을 더 하였다.
五月 命元實治首露王陵
太上行捺己神宮 拜妙王像 鳴咽下龍淚
魏花進酒 慰之 曰 “人生一夢 不必惱也” 乃名像殿曰 夢堂
5월, <원보元實>에게 명하여 수로왕릉(首露王陵)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태상(太上)이 날기 신궁에 행차하여 묘왕상(妙王像)에 절하고 울며 눈물을 흘리니
<위화魏花>가 술을 올리며 말하기를
" 인생은 일장춘몽이니 괴로워 하지 마십시요." 라고 하였다.
이에 상전(像殿)을 몽당(夢堂)이라고 이름하였다.
六月 命天林荒宗 更正女帝袞冕及帝夫神衣 仙臣勸妻 不階之服色
帝與天宮 遊竹公院
6월, <천림天林>과 <황종荒宗>에게 명하여
여제(女帝)의 곤룡포와 면류관 및 여제(女帝)의 남편 신의(神衣)를 바꾸도록 하고
선신(仙臣)과 권처(權妻)는 계급이 없는 복색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제와 천궁이 죽공원(竹公院)에 유람하였다.
七月 太上復與天宮遊蚊川 食瓜
夢尋尋夫人 跨黑牛 而來掠帝 而帝拂之 落地大呼 天宮驚抱之 有呻吟 良久得疾
還宮而崩 春秋六十一
群臣號泣 願以身代
上臨崩 會七星腹臣 而遺詔 曰
“朕子雖多 眞骨正統莫如太子 朕女雖多 大元神統莫如太子妃
爾等奉此神統正胤 如朕在時 若有反異者共伐之
天宮大帝 以英失玉珍爲左右璽臣 如朕在此可也"
天宮垂淚承詔 帝崩 群臣曰 “太子雖幼 不可曠位 可卽大位天宮”
乃抱太子 踐祚行祥 群臣山呼萬歲
大赦天下 瑞氣發於神宮
7월, 태상(太上)이 다시 천궁과 문천(蚊川)을 유람하며 참외를 먹었다.
꿈에 <심심尋尋>부인이 검은 소를 걸터앉아 타고 와서 제를 태우려고 하니
이를 밀치다 땅에 크게 떨어져 천궁이 놀라서 안으니 신음하며 오래동안 병이 들었다.
궁으로 돌아와 붕하니 춘추 61세였다.
신하들이 목놓아 울며 대신 죽기를 원하였다.
상이 죽음에 임하여 칠성복신(七星腹臣)을 모아놓고 유조(遺詔)로 이르기를
" 짐의 아들이 비록 많으나 진골정통(眞骨正統)은 태자로 하는 것만 못하고
딸이 비록 많으나 대원신통(大元神統)은 태자비로 하는 것만 못하니
너희들은 이 신통(神統)과 정윤(正胤)을 받들어 모시어 짐의 때와 같도록 하라.
만약 반역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토벌하라.
천궁을 대제(大帝)로 <영실英失>과 <옥진玉珍>을 좌우 새신(璽臣)으로 하여
짐이 있을 때와 같이 하라" 라고 하였다.
천궁이 눈물을 흘리며 조칙을 받드니 신하들이 말하기를
" 태자가 비록 어리나 보위를 비울 수 없으니 천궁이 대위(大位)에 즉위함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태자를 안고 즉위하니 신하들이 산호만세를 불렀다.
천하에 대 사면령을 내리니 신궁(神宮)에 서기가 어리었다.
九月三日 葬帝 于保道陵 立廟曰法興 行大祭 命雪召仇珍主之
命魏花率仙徒五千 福之
伊飡尹生卒 年七十七 車宿之子也
勤儉自守與其家臣 率奴婢 耕織種穡
置田園 于芼兮 得年穀數千石 分給骨門貧寒者
當時言富稱尹生 多婢妾生子數十人 皆稱尹氏家
有白楡樹王奉之致財 故亦稱白氏楡氏孫曾不知其數
其妻摩只牟大女也
得法帝寵 位至三品權妻 而亦以布裙能助尹生殖貨 帝以年穀加之 則辭之 曰
“妾能自足 願賜他妾”
帝嘉之 加于癸中
摩只長子尹只 尹生出 而次子癸中 帝出也
帝命癸中爲尹生子
故尹只讓其嫡于癸中 癸中謙讓互却
帝嘉其交愛 命癸中女紫中爲尹只子尹通妻 傳其嫡
摩只有五子三女
皆仁而友愛 讓財 其妻妾亦和 連墻而居 不叱一狗
尹生與馬只角巾鳩杖 遊宿五子之家
不騎承 不重味萬然如 野老村嫗
尹生之妹車生 爲乃好妻 亦置莊于一善 畜五牸
其富亦如尹生 歲獻牛馬 于神宮仙院
時人稱之 曰米兄牛妹
天宮聞喪 親幸芼兮 臨其葬 賜摩只神衣白馬
仍行大場 于芼兮 中外仙徒之會者千數
命立尹生廟曰楡祠
9월, 3일 보도릉(保道陵)에 제를 장례하고
사당을 세워 법흥(法興)이라 하고 대제를 지냈다.
<설소雪召>와 <구진仇珍>에게 명하여 이를 주관토록 하였다.
<위화魏花>에게 명하여 선도 5천명을 인솔하여 복을 빌도록 하였다.
이찬 <윤생尹生>이 죽었다.
나이 77세로 <거숙車宿>의 아들이다.
근면하고 검소하였으며 그 가신(家臣)과 함께 스스로를 지키고
노비를 데리고 밭을 갈고 베를 짜며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지었다.
모혜(芼兮)에 전원을 가지고 있어 년곡 수천석을 얻어
골문의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의 말에 부자는 <윤생尹生>을 칭하고
많은 비첩이 낳은 자식이 수십명으로 모두 윤씨가(尹氏家)로 칭하였다.
백씨(白氏)와 유씨(楡氏)의 수왕(樹王)이 있어 이를 모시어 재물을 모아
백씨와 유씨의 자손이 모이니 그 수를 알지 못하였다.
그 처 <마지摩只>는 <모대牟大>의 딸이다.
<마지摩只>는 법(法)을 득하여 제가 총애하여 삼품 권처의 직위에 이르니
역시 소박한 옷차림으로 <윤생尹生>의 재화를 증식하는데 도우니
제가 년곡을 더하였으나 이를 사양하며 말하기를
" 첩은 능히 자족하니 다른 첩에게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계중癸中>에게 더하여 내렸다.
<마지摩只>의 장자 <윤지尹只>는 <윤생尹生>의 아들이고
차자 <계중癸中>은 제의 아들이다.
제가 <계중癸中>에게 명하여 <윤생尹生>의 아들로 하였다.
그런 연유로 <윤지尹只>는 그 적자(嫡子)를 <계중癸中>에게 양보하니
<계중癸中> 또한 겸손히 양보하여 서로 양보하였다.
제가 그 서로 사랑함을 가상히여겨 <계중癸中>의 딸 <자중紫中>을
<윤지尹只>의 아들 <윤통尹通>의 처로 하여 그 적자(嫡子)를 전하게 하였다.
<마지摩只>는 다섯 아들과 세 딸이 있었다.
모두 인자하고 우애가 있어 재물을 양보하고
그 처첩 역시 화목하여 담벼락을 이어 거주하니 한 마리의 개도 꾸짖지 않았다.
<윤생尹生>과 <마지摩只>가 베로 만든 모자를 쓰고
비둘기 모양이 새겨진 지팡이를 짚고 다섯 아들의 집에서 자며 유람을 하였다.
不騎承 不重味萬然如 野老村嫗
말을 타지 않고 맛있는 음식도 먹지 않으니 시골 노인과 시골 할미 같았다
<윤생尹生>의 여동생 <거생車生>도 좋은 처가 되어
일선(一善)에 장원을 가지고 암소 5마리를 길렀다.
그 부유함 역시 <윤생尹生>과 같아 매년 신궁과 선원에 소와 말을 바쳤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칭하여 말하기를 쌀 오빠에 소 여동생이라고 하였다.
천궁이 초상을 듣고 친히 모혜(芼兮)에 행차하여 그 장례에 왕림하여
<마지摩只>에게 신의(神衣)와 백마(白馬)를 내렸다.
인하여 모혜(芼兮)에서 대장을 행하니 나라안팎 선도들이 모인 수가 천명이었다.
<윤생尹生>의 사당을 세워 유사(楡祠)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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