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조선의 쇠락

 

 

2천년이 가깝도록 다스려오던 단국(檀國), 고조선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다.

 

고조선 43세 물리(勿理)천왕 36(BC426)

융안(隆安)의 엽호 <우화충于和冲>반란을 일으켜

단국의 마지막 천왕 <물리勿理> 단제는 해두(海頭)로 피난을 하고 죽는다.

 

다음해 백민성(白民城) 상장(上將) 욕살(褥薩) <구물丘勿>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고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하고 대부여(大夫餘)를 건국한다.

 

 

장당경(藏唐京)은 지금의 요녕성 개원(開原)이다.

 

본래는 개원(開元)이었는데 피휘하여 개원(開原)이 되었다.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꾸어 군권이 분립되니

고조선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진조선인 대부여의 도읍은 지금의 개원이고, 막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고

번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만성(滿城)이다.


중원이 전국시대에 접어들자 고조선의 거수국 장수들도 세력을 키워 반기를 든다.

 

 

 

여루 단제 32(BC365) <배도의 요서 침공>

 

()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을 육박하였는데,

이에 번조선이 상장(上將)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眞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역시 군대를 보내와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伏兵)을 숨겨두고 협공(夾攻)하여

()나라, ()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는

요서(遼西)의 모든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요서(遼西)는 지금의 조백신하 서쪽 북경지역이다.

 

운장(雲障)은 지금의 자형관 일대로 번조선의 요새(要塞)로서

상하 두 곳이 있어 상하운장(上下雲障)이라고 하였다.

 

오도하(五道河)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와 조백신하 사이에 있는 강이다.

 

 

여루 단제 33(BC364) <우문언(于文言)의 추격>

 

정사년(丁巳年)에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이를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여루 단제 47(BC350) <북막(北漠)과 합공으로 연()나라를 정벌하다>

 

신미년(辛未年)에 북막(北漠) 추장(酋長) <액니거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찾아와서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번조선의 소장(少將)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력 일만 명을 이끌고

합공(合攻)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쳐서 빼앗아 성읍(城邑)을 설치하였다.

 

 

상곡은 지금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울현(蔚縣) 일대이다.

 

태항산(太行山)의 서쪽으로 BC 1120년경에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

망명하여 정착한 수유국(須臾國)으로서 소위 서화(西華)라는 곳이다.

 

상곡은 동호와 번조선, 연나라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격전지이다.

 

 

 

여루 단제 54(BC 343) <()나라와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다>

 

무인년(戊寅年)에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

 

조양(造陽)은 지금의 장가구시 회래현(懷來縣)이다.

 

 

 

보을 단제 원년(BC341) <번조선왕 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당하다>

 

경진년(庚辰年) 12월 번조선왕(番朝鮮王) <해인解仁>

()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해인解仁>은 번조선의 제68대 왕이며, 일명 <산한山韓>이라고도 한다.

 

연나라가 자객을 보내어 번조선왕 <해인>을 시해하였는데

이에 번조선의 오가들이 번조선왕이 되기 위하여 다투어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인의 아들 <수한水韓>BC340년에 제69대 번조선왕이 되었다.

 

 

 

보을 단제 3(BC339) <연나라의 기습과 단군조선의 역습>

 

임오년(壬午年)에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하여 노략질을 하고 또 험독(險瀆)에도 들어오니,

수유 사람 <기후>가 자제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조선과 번조선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薊城)의 남쪽에서도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므로 공자(公子)를 인질(人質)로 삼았다.

 

 

<배도倍道>BC 365년에도 요서(遼西)지역을 함락시키고

운장(雲障)까지 기습한 사실이 있다.

 

BC 339년에 연()나라의 <배도倍道>가 다시

안촌홀(安寸忽)과 험독(險瀆)을 공격하여 들어왔는데,

안촌홀은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으로서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 중 하나인 탕지(湯池) 지역이다.

 

탕지 또는 안촌홀, 안시성은 당시 번조선(番朝鮮)의 북도(北都)로서

서압록인 난하(灤河)의 바로 서쪽으로 중류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험독(險瀆)은 당시 번조선(番朝鮮)의 동도(東都)로서

난하의 하구에 위치하였는데, 지금 산해관 인근으로

번한의 요중(遼中) 12성의 하나로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성이다.

 

번조선에는 도읍인 만성(滿城) 외에 5이 있었는데 이를 오덕지(五德地)라 하며,

동경(東京)은 험독(險瀆), 서경(西京)은 한성(汗城),

남경(南京)은 낭야성(琅耶城, 可汗城), 북경(北京)은 탕지(湯池),

중경(中京)은 개평(蓋平)이다.

 

개평을 안덕향(安德鄕)이라고도 하고 탕지를 구안덕향(舊安德鄕)이라고 한다.

 

계성(薊城)은 연나라의 도읍으로 지금의 산서성 흔주시 대현 인근이다.

 

이때 에서 보낸 인질이 문공(文公)의 아들 <진개秦開>이다.

 

 

 

보을 단제 19(BC323) <읍차(邑借) 기후(箕侯)가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다>

 

무술년(戊戌年) 정월에 번조선왕 <수한水韓>이 죽었는데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이에 <기후箕詡>가 명을 받아 번한성(番汗城)에 머물며

군령을 대행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는데,

이에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때 연()나라가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므로,

번한성에서 군령을 대행하던 읍차(邑借) <기후箕詡>

병력을 이끌고 험독성(險瀆城)에 입궁(入宮)하여

자칭하여 번조선왕(番朝鮮王)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允許)를 구하므로,

보을(普乙) 천왕은 이를 허락하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때 연나라는 막조선에 사신을 보내와 함께 <기후箕詡>를 치자고 하였으나

막조선 왕 <맹남孟男>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번조선의 읍차 <기후箕詡>가 명을 받고 군령을 대행하던 번한성(番汗城)

서쪽에 있던 번조선 5덕지(五德地)5() 중에서 서경(西京)에 해당하며,

번한 요중(遼中) 12성의 하나인 한성(汗城){북경지역}이다.

 

단군조선의 한성(汗城)은 고구려의 요서(遼西) 10성의 하나인 한성(韓城)이다.

 

고지도에 북경 북쪽에 고려성이 있는데 이 고려성이 고구려의 한성(韓城)인 것이다.

 

 

 

보을 단제 46(BC296) < 한개의 반란>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병사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이에 상장(上將) <고열가高列可>가 의병을 일으켜 <한개>를 격파하였다.

단제께서 환도하고 대사면을 내렸다.

 

고조선 시대 4차례의 반란 사건이 있었다.

 

1. 9<아술阿述> 단제 (BC1984) : 청해욕살 <우착于捉>의 난, 장춘으로 피난

2. 22<색불루索弗婁> 단제 (BC1250) : 장수 <신독(申督)>의 난, 영고탑으로 피난

3. 43<물리勿理> 단제 (BC426) : 융안(隆安) 엽호 <우화충于和冲>의 난,

    해두로 피난

    BC42544<구물丘勿> 단제가 즉위하여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꿈

4. 46<보을普乙> 단제(BC296) : 수유국 <한개韓介>의 난 : <고열가>단제 추대

 

 

 

 

- <진개> 동정(東征)전 연나라의 강역

 

 

연나라가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출한 기원전 414년경부터 기원전 281년까지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 연나라의 강역을 중화족의 사서들을 통해 살펴보자.

 

모두 약방의 감초처럼 갈석산이 등장한다.

 

이 갈석산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상고사의 영원한 방랑자가 되고 만다.

 

이 갈석산이 바로 중국의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낭아산(狼牙山)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전국책연책燕策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

 

...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

 

 

 

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中略...邦國之固而山川社稷之寶也

염철론험고險固

 

연나라는 갈석산에 의해 막히고, 사곡(邪谷)에 의해 끊겼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싸였다...중략...(이것으로) 나라를 굳게 지킬 수 있으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

 

 

 

東方之極, 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東,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時則訓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동쪽 부목(榑木) 땅에 이른다.

 

부목(榑木)은 산동성 봉래 앞바다 묘도군도인 사문도에 있는 지명이다.

 

 

 

위의 은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

연나라 문공(재위 BC361-BC333)에게 한 말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의 일이이므로

윗 구절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의

연나라 강역을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연나라의 남쪽에 녹타와 역수가 있고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 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하였고,

역수는 오늘날의 거마하이다.

 

그러므로 의 기록을 통하여 연나라 남부는

대략 산서성 흔주시 대현 안문관에서

갈석산(백석산)에 이르는 장성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염철론은 전한 소제(昭帝) 6(BC 81),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할 것인지 폐지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진 저명한 논쟁을

<환관桓官>이라는 사람이 정리하여 완성한 문헌이다.

 

연나라가 갈석산에 의하여 막히고 요수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회남자시칙훈時則訓에서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라고 하였다.

 

 

갈석산(낭아산)은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를 가르는 험준한 산맥으로

저 유명한 자형관(紫荊關)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다.

 

 

 

 

 

위의 , , 의 기록들을 종합하고,

갈석산 주변의 지형들을 참조하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나라는 동남쪽은 갈석산(낭아산)에 의하여 막히고,

동북쪽은 영정하에 의하여 둘러싸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연5군을 설치하였고,

대명일통지에서 보정부는 옛 지명이 상곡군이다고 하였다.

 

고조선 침략전 연나라의 강역이 절대로 조백신하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러므로 갈석산(백석산) 동쪽이 조선이고,

조백신하가 요수遼水이며 그 동쪽이 요동이다.

 

그리고 서쪽과 북쪽은 장성을 경계로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의 연나라 위치는 대략 위의 지도처럼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지도의 갈석산(백석산) 동쪽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였고,

낙랑군의 치소였던 왕검성이 위치하였다.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다.

 

만성현(滿城縣) 주변 수성진(遂城鎭)에 진시황이 <몽염>을 시켜 쌓았다는

장성이 시작된다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의 지명은 지금까지 버젓이 남아있다.

 

참고로 위 지도에 표기한 난하 부근의 갈석산은 역사왜곡을 위한 가짜 갈석산이다

 

위의 소진의 말에서 보는바와 같이

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의 남쪽에 갈석산이 있었는데,

만약 난하 부근의 갈석산이 진짜 갈석산이라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후 설치한 상곡군 등 연5군이

모두 난하 동쪽으로 가야만 하는 엉터리 결과가 되고 만다.

 

아마 상곡군을 난하 동쪽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본다.

 

 

 

- 진개의 동정(東征)후 연나라의 강역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의 일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에 대한 기록은 단 몇 구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몇 구절이 우리 상고사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고조선의 강역이 한반도로 축소되기도 하고

중국 북경근처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단 몇 구절에 의하여 고조선의 강역이 수 천리씩 널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관련 기록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사기조선열전흉노열전그리고삼국지위지 동이전을 통해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사기흉노열전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에 볼모로 갔는데

()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다.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遼東)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사기조선열전

 

조선왕 <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今 潮河}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에 복속시켰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삼국지위지 동이전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나라가 쇠약해지자,

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朝鮮)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만번한(滿番汗)은 번조선의 도읍인 만성과 서경인 번한성을 말한다.

 

 

에서 보듯이 사마천은 사기흉노열전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쳤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지위지 동이전<진개>가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동호(東胡)와 조선이 같은가?

 

그리고 <진개>의 침략이 천여 리 인가?

 

혹은 2천여 리 인가? 많은 논란이 있다.

 

동호라는 명칭은 예맥, 조선, 진번, 부여, 오환, 선비 등

흉노족의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는 의미로 쓰였다.

 

동호 속에 조선도 자연히 포함된다.

 

그리고 <진개>의 고조선 침략 당시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있었다.

 

위의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글을 보더라도 역시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전후하여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기흉노열전조선열전에서

<진개>가 침략한 동호는 바로 진번과 조선을 말한다.

 

<진개>가 동호 즉 진번과 조선을 천 여리 물리치고 장성을 쌓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연나라 장성 남쪽이 바로 진번과 조선이 있던 곳이다.

 

후일 이곳은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이 되며,

한나라의 낙랑군과 현토군이 설치된 지역이며,

고구려 초기의 중심 강역이 된다.

 

그런데 사마천은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천여 리라고 하였는데,

위략은 2천여 리라고 기록하여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위의 지도에서 갈석산(백석산)의 위치와 조선의 위치를 보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성을 중심으로 <진개>의 침략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동서간의 거리인 천 여리로 기록하였다.

 

반면 위략은 조백신하 남쪽의 조선지역 천 여리와

조백신하 동쪽 요동지역 천 여리를 합하여 2천 여리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연나라의 강역은

대략 난하 유역까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주류사학계는 진개가 1차로 동호를 천 여리 공략하여

난하까지 영토를 넓힌 후 2차로 고조선을 천여 리 공략하여

현재의 요동반도까지 영토을 넓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조선의 수도를 한반도 평양으로 보는데서 오는 무리수이다.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전후하여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동호와 조선을 별개로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진개> 동정 후 상곡, 어양, 우북평, 요동, 요서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니

5은 신설된 으로 본래는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5을 한반도 북부까지 고무줄 늘이듯이 늘여놓고

그들이 계속하여 다스렸다고 믿고 싶어 하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는 상곡과 어양은 하북성 북경 인근에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우리 식민 강단사학자도 장단을 맞추고 평양 낙랑성을 주장하면서도

고조선이 본래 있었던 하북성 북경인근의 고조선 강역은 인정하지 않으니

그들의 뇌 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그러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설치한 5의 구체적인 위치는 어디일까?

 

 

 

- 5의 위치

 

 

 

 

  <중국지도집(1975년 작) 및 기주협우갈석도(남송, 1177년 작)>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지도인 남송시대(1177년 작)기주협우갈석도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는 그 지도의 이름에서 말하듯이

갈석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기주에 이르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지도의 박스 안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 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

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역수탁수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산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남송 효종 순희4(1177)에 제작된 이 지도는

황하의 유입구가 하북성 보정시와 창주시 사이로 되어있고 5을 나타내고 있어

진개 동정 후에서 서한시대까지의 황하의 흐름과 기주의 위치를 그린 지도이다.

 

기주협우갈석도는 우리 상고사의 핵심인 갈석산을 중심으로 연5군의 위치 및

요수의 위치와 요택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옮겨놓은 것이 위의 지도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설치한 연장성은

위의 지도에서 붉은색 점선으로 표시하였으며

대략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지금의 계현(薊縣)까지이다.

 

5군은 그 연장성 아래 위치하였다.

 

그리고 기주협우갈석도의 대요수가 조하이고 소요수가 백하이다.

이 두 강이 만나는 곳이 밀운이다.

 

그리고 위의 기주협우갈석도에서 갈석산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기주협우갈석도에서 아래와 같이

어양군 옹노현(雍奴縣)에서 시작하는 늪지대를 설명한 구절이 있는데

이 늪지대가 고당전쟁에 나오는 저 유명한 요택(遼澤)이다.

 

冀北諸水聚此入海 水若不漲時每澱猶有分域 至水盛時成漲爲一故

水經至此不能分別其爲何水總曰九十九澱

 

기주 북쪽의 모든 물은 이곳에 모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이 범람하지 않을 때는 물웅덩이들이 나누어진다.

 

물이 불어 범람하면 하나가 되므로, 물이 이곳에 이르면 어느 강물인지 알 수 없다.

 

통합하여 구십구 물웅덩이라 한다.

 

 

이 일대는 황하에 의해 떠내려 온 황토들이 수 백리 늪지대를 이루어

오늘날까지도 문안와(文安窪)의 너른 늪지대가 존재한다.

 

우리 상고사에 자주 등장하는

요수, 요택, 요서, 요동 등의 지명들은 모두 이곳에서 찾아야한다.

 

기주협우갈석도를 보면

 

상곡은 지금의 장가구시 울현 인근이고, 어양은 북경과 울현 사이이고,

우북평은 지금의 탁주 인근이고, 요서는 북경 인근이고, 요동은 천안시 계현 인근이다.

 

그리고 <모용황>이 천도한 영주의 치소인 유성은 패주인데

아직 삼각주가 형성되지 않아 발해의 바다 속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요하는 조선중기까지도 압록강으로 불린 곳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