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명전에서 정무보는 대왕
<목신>에게 제나라 지도를 가져오라고 하는데
<미월>은 왕이 오라는데 어떻게 안오냐고 하자 대왕은 보통 여자들은
<미월>은 어차피 연기해봤자 대왕한테 다 들켜요~라고 맞받아치고
<미월>은 대왕이 원하시면 거짓말 하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한다.
대왕은 <미월>에게 여기서는 지아비이지만 문을 나가면 한 나라의 군주라며
근데 항상 궁에 살던 <미주>는 이쪽으로는 영 아닌..;;
<용예>는 <황헐>이 진나라에 조금 관심이 생겼다고 생각할듯..
<용예>는 <황헐>에게 인재가 모이는 것이니
<황헐>에게도 나중에 데리고 오겠다고한다.
유가 법가 병가 등등..
<목신>은 <황헐>에게 와서 당신이 누군데 감히 미팔자의 이름을 거론하냐고하자
서신의 내용을 보는데 <미주>의 어머니 위후가 죽었다고 한다.
위후의 충성심이 대단한 대모.
위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렸는데
경씨와 맹소씨는 소식을 듣고 와서 제를 지내고 갔는데위후도 아들래미 <미괴>를 그따고로 키웠으니 초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을까!
떠나기전 진나라 함양을 한번 보고 떠나는 <공손연>.
가짜 패로 성문까지는 통과했는데
자기는 <공손연> 아니라고 둘러대는데 <공손연> 맞잖아~
어제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같이 정사를 보더니
마침 태감까지 온다.
동패와 장의에 떠밀려서 가는 <공손연>.
공적으로 작위를 주는것도 그렇고..
<공손연>과 거래가 있었던 사람을 모조리 잡고 있다고한다.
태감이 조사를 명령하는데 재수없게 동패가 나왔어!
나중에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할까봐 두렵다고 하는데
- 춘신군 <황헐>은 누구인가?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 ~ BC238)>은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전국 사군자중 한 명으로 초나라 고열왕<재위 BC262-BC238>시절 때의 재상이었다.
초나라는 회왕→경양왕→고열왕
진나라는 혜문왕→도무왕→소양왕 순으로 이어진다.
드라마에서는 <황헐>이 시대상 맞지 않는다.
<황헐>은 <미월>과 동시대 사람이기는 한데
나이가 적어도 30살정도 미월보다 적을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춘신군이 제대로 활동할 당시가 진 소양왕<재위 BC306-BC250>당시였다.
춘신군은 고열왕의 아버지 경양왕<재위 BC298-BC263> 밑에서 일하다
진나라가 초를 공격하려 할 때 사자로 보내져
소양왕을 설득해 초와 진의 동맹을 결성하는 것에 일조했다.
대신 후에 초 고열왕이 될 태자와 함께 진에 볼모로 보내지게 되었다.
드라마에서는 <황헐>이 초 회왕<재위 BC328-BC299>과 초 경양왕 밑에서 일한다.
특히 경양왕이 되는 태자가 진나라 볼모로 오게되자 글친구로 같이 온다.
고열왕의 아버지 경양왕이 병에 걸리자, 진왕에게 귀국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춘신군은 태자를 마부로 위장시켜 초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진왕에게 사실을 고했다.
분노한 진 소양왕은 춘신군을 죽이려 하나,
신하들은 태자가 왕위에 오를것이고 황헐은 태자의 오른팔로 등용될테니
잘해주는게 낫다고 설득하여 무사히 살아서 초나라로 돌아간다.
경양왕 사후 고열왕이 즉위하자, 재상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 진에 맞서 다른 나라의 연합군을 이끌어 조나라를 구원하고,
노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약했다.
이후 합종군의 총지휘권을 맡고 진나라를 쳤으나,
함곡관에서 진의 군대에게 대패하였다.
정사에서는 함곡관 전투에서의 패배를 제외하면
진 소양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을 멈춘 후 반대로 동맹을 성사시키고,
볼모로 잡힌 태자를 몰래 도망시켰으며,
노나라를 정복하고 초나라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등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사기에 따르면 사군자 중 말년이 가장 비참하다.
고열왕이 후사가 없자 여러 여자를 소개시켜 주었으나
고열왕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이원>이라는 자의 누이동생과 검열삭제를해서 임신하게 한 뒤 왕에게 넘겼고,
당연히 그 아이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빈객 중 <주영>이라는 사람이
"<이원>은 권력을 노리고 있으니 제가 죽여버리겠습니다" 이라고 간언했으나
춘신군은
"내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별일 있겠냐?" 이라 답했고,
<주영>은 춘신군의 안목에 실망하며 <이원>의 보복이 두려워 춘신군 곁을 떠났다.
고열왕이 죽자 <이원>은 <주영>의 예언대로
미리 육성해둔 자객들로 춘신군의 목을 날려버리고 가족들을 몰살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원>의 누이동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왕이 되었다.
이것이 이화접목(移花接木)의 고사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춘신군(春申君)은 초(楚)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헐(歇), 성은 황씨(黃氏)이다.
두루 다니며 공부하여 박식했고,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을 섬겼다.
경양왕은 황헐의 언변 때문에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 전에) 진 소왕(昭王)은 <백기白起>에게 한(韓)나라, 위(魏)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화양에서 무찌르고 위나라의 장수 <망묘>를 사로잡았다.
한나라, 위나라는 굴복하고 진나라를 섬겼다.
이어 진 소왕은 <백기>에게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출병 전에 초나라의 사신 <황헐>이 마침 진나라에 이르러
진나라의 계책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이미 <백기>에게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군, 검중군을 취했고,
언영을 빼앗은 다음 동쪽 경릉에까지 이르렀다.
초 경양왕은 도읍을 동쪽 진현으로 옮겼다.
<황헐>은 초 회왕(懷王)이 진나라의 꼬임에 빠져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결국 속아서 진나라에 억류당했다가 죽는 것을 보았다.
경양왕은 회왕의 아들로 진나라는 그를 깔보았다.
미월전에서 76화,77화 내용을 보면 초 회왕이 진나라에 감금된다.
미월전에서는 <용예>와 소양왕 합작으로 회맹을 하기로 한 뒤에
무관에서 감금시켜버린다.
어찌되었든 초회왕의 말로가 참 비참한게 진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죽는다.
<황헐>은 진나라가 단번에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멸망시킬 것이 두려웠다.
이에 글을 올려 진 소양왕에게 다음과 같이 유세했다.
“천하에 진나라,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 듣자하니 대왕께서 초나라를 치려 하신다는데,
이는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약한 개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초나라와 잘 지내느니만 못합니다.
신이 그 이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은 사물이 끝에 이르면 되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여름과 겨울이 그것입니다.
또 너무 높으면 위태로워집니다.
바둑돌을 쌓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금 대국의 땅은 천하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에 이릅니다.
사람이 생긴 이래 이렇게 넓은 나라는 없었습니다.
선왕이신 문왕(文王), 장왕(莊王)으로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땅은 제(齊)나라와 접경하여 합종의 연맹을 끊고자 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 성교(盛橋)를 한나라에 보내 일을 맡게 하니,
성교는 그 땅을 진나라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왕께서 군대를 쓰지도 않고 위력을 보이지도 않고 백리의 땅을 얻으신 것이니
왕께서는 정말 능력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 또 군대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여 대량의 문을 막아버리고,
하내를 탈취하여 연(燕)나라, 산조(酸棗), 허(虛), 도(桃)를 점령한 다음
형(邢)나라까지 들어가셨습니다.
위나라의 군대는 구름처럼 흩어져서는 감히 구원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왕의 공이 참으로 크고 많습니다.
대왕께서는 군대를 쉬게 한 다음 2년 뒤 다시 출병하여
(위나라의) 포(蒲), 연(衍), 수(首), 원(垣)을 합병하고,
인(仁), 평구(平丘)로 나아가니 황(黃), 제양(濟陽)이 성을 닫고 나오지 못했고,
위나라는 굴복했습니다.
왕께서는 또 복(濮), 역(磿) 이북을 나누어 취하여 제나라와 진나라를 연결하고
초나라와 조나라의 척추를 끊어 버리니 천하가 여러 차례 연합했지만
감히 구하러 나서지 못했습니다.
왕의 위세 또한 극에 이르렀습니다.
왕께서 공적과 위세를 지키면서 공격하여 빼앗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어질고 의로운 마음을 더 길러 후환이 없게 하실 수 있다면
삼왕이나 오패도 왕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사람 많은 것과 병력 강한 것만 믿고
위나라를 허문 위세를 빌려서 힘으로 천하를 신하로 만들려 하신다면
신은 그에 따르는 후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경(詩經)』에 ‘없지는 않으나 끝이 좋은 경우는 드물다’라고 했고,
『역경(易經)』에는 ‘여우가 물을 건너지만 꼬리를 적시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하긴 쉽지만 끝까지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옛날 지씨(智氏)는 조나라를 치는 이익만 보고 유차(楡次)에서의 화를 못 보았고,
오나라는 제나라를 토벌하는 편리만 보고 간수(干隧)에서의 패배를 몰랐습니다.
이 두 나라는 큰 공이 없는 것도 아닌데
눈앞의 이익에 몰두하다가 뒤이어 올 우환을 몰랐습니다.
오나라는 월나라를 믿고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에게 승리했지만
돌아오다가 삼저(三渚)의 물가에서 월나라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지씨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믿고 함께 조나라를 공격하여
진양성(晉陽城)을 포위해 승리를 눈앞에 두었는데
한나라와 위나라가 배반하여 지백요(智伯瑤)를 착대(鑿臺)에서 죽였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초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에만 불만을 갖고 계실 뿐,
초나라가 망하면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신이 왕을 위해 생각해본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경』에 ‘천 리 밖 멀리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초나라는 한 편이고, 이웃 나라(한나라, 위나라)가 적입니다.
『시경』에 ‘약은 토끼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힌다.
다른 사람에게 생각이 있지만 내가 한번 헤아리면 바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가 왕을 잘 대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믿고 계신데
이것이 바로 오나라의 월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은 적에게 겨를을 주어서는 안 되며 때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한나라와 위나라가 공손한 말로 근심을 없애려는 것이
실은 대국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닌가 걱정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에 오랫동안 덕을 베푼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한나라, 위나라의 부모형제들은
지금까지 계속 진나라에게 죽임을 당해온 지 10대에 이릅니다.
본국은 망하고 사직과 종묘는 허물어졌습니다.
배는 갈라져 내장은 끊어졌고, 목은 잘리어 얼굴이 문드러졌으며,
머리와 몸이 나뉘고, 해골은 풀밭과 연못에 널부러졌고,
머리통은 땅바닥에 엎어진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비와 아들, 노약자들은 손과 목을 묶인 채 줄줄이 포로가 되어 길을 메웁니다.
귀신들은 오갈 데 없고 제사도 받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가족은 흩어져 떠돌다
노복이나 첩이 되니 천하를 가득 채울 정도입니다.
그러니 한나라, 위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진나라의 사직에 근심거리가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 왕께서는 그들을 믿고 초나라를 공격하려 하시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신다면 어떻게 출병하시렵니까?
왕께서는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로부터 길을 빌리시렵니까?
출병 그날부터 왕께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는 왕께서 군대를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에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에게 길을 빌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수수(隨水)의 남안으로 진공해야 합니다.
수수의 남안은 큰 하천과 산 그리고 계곡으로 먹을 것이 나지 않는 땅이라
왕께서 차지하신다 해도 차지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왕께서 초나라를 허물었다는 명성은 얻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땅은 얻지 못한 꼴이 됩니다.
그리고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는 날에는
네 나라가 죄다 군대를 일으켜 왕에 대응할 것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얽히어서 떨어지지 않고 싸우면
그 틈에 위나라가 군대를 내어 유(留), 방여(方與), 질(銍), 호릉(湖陵), 탕(碭),
소(蕭), 상(相)을 공격하여 과거 송나라의 땅을 전부 차지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사수(泗水) 유역을 차지할 것이 뻔합니다.
이곳들은 모두 사통팔달의 평원에 기름진 땅인데
결국 저들이 독차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면 중국에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살찌게 하고
제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져서 진나라에 맞서기에 충분합니다.
거기에 제나라가 남쪽으로 사수를 경계로 삼고, 동으로 바다를 끼고,
북으로 황하를 의지하게 되면 아무런 걱정이 없으니
천하에 제나라와 위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게 됩니다.
제나라와 위나라가 지리적 이점을 얻으면 거짓으로 몸을 낮출 것이고,
그렇게 1년 정도가 흐르면 스스로 제왕을 칭하지는 못하더라도
왕께서 제왕이 되려는 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게 됩니다.
무릇 왕과 같이 넓은 땅, 많은 백성,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한 번의 일로 초나라와 원수가 지고
한나라, 위나라로 하여금 제왕의 호칭을 제나라에다 바치게 만든다면
이는 왕의 실책입니다.
신이 왕을 위해 생각해보니 초나라와 잘 지내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하나로 합쳐 한나라를 상대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손을 거둘 것입니다.
왕께서 산동의 험준함을 통제하고 곡하(曲河)의 유리함을 차지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관내의 제후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하고 왕께서 10만 병력으로 (한나라의 도읍) 정(鄭)을 지키면
양씨(위)의 심장은 서늘해지고,
허(許)와 언릉(鄢陵)은 나오지 못하고 성을 지키게 될 것이니
상채(上蔡)와 소릉(召陵)으로 통하는 길은 왕래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위나라 역시 관내의 제후로 남게 되겠지요.
왕께서 오로지 초나라와 잘 지내시면 만승의 나라 두 군주가 관내후가 되고,
(진나라는) 제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어
제나라의 서쪽 땅은 손을 모으고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왕의 땅은 서해에서 동해에 이르러 천하를 통제하게 되니
연나라, 조나라는 제나라, 초나라와 연계하지 못하고,
제나라, 초나라는 연나라, 조나라와 연계하지 못합니다.
그런 다음 연나라, 조나라를 위협하여 곧장 제나라, 초나라를 흔들면
이 네 나라는 공격하지 않아도 굴복할 것입니다.”
소왕은
“좋습니다.”라 하고는 백기의 진격을 제지하는 한편 한나라와 위나라에 이를 알렸다.
또 사신을 초나라에 보내 후한 예물로 연맹하기로 약속했다.
<황헐>이 약속을 받고 초나라로 돌아오자
초나라는 황헐과 태자 <완完>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니
진나라는 그들을 머무르게 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초 경양왕이 병이 났으나 태자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초 태자와 진나라의 재상 <응후應侯>는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황헐>은 <응후>에게 유세하길
“상국께서는 정말 초 태자와 사이가 좋습니까?”라고 했다.
<응후>가 “그렇소.”라고 했다.
<황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초왕은 아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진나라는 그 태자를 돌려보내느니만 못합니다.
태자가 즉위하면 틀림없이 진나라를 더욱 귀중하게 섬길 것이고
상국에 대한 고마움은 무궁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끼리 더욱 가까워지면
만승의 나라의 군주 한 사람을 얻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진나라는 초나라의 태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냥 함양의 한 평민일 뿐입니다.
초나라가 다른 태자를 세우면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친한 나라를 잃고 만승의 나라와 화친을 끊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상국께서는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응후>가 이를 진왕에게 전했다.
진왕은
“초 태자의 사부를 먼저 보내 초왕의 병을 살피게 하고
돌아온 다음 다시 의논합시다.”라고 했다.
<황헐>은 초 태자에게 이런 계책을 일러주었다.
“진나라가 태자를 구류시키는 것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태자께서는 진나라를 이롭게 할 힘이 없고, 이 <황헐>은 그것이 몹시 걱정됩니다.
그리고 (초나라에는) 양문군(陽文君)의 두 아들이 있는데
왕께서 돌아가시면 태자는 국내에 안 계시니
양문군의 아들이 후계자로 옹립될 것이 분명하니
태자께서는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됩니다.
진나라에서 도망쳐서 사신들과 함께 나가느니만 못합니다.
신이 남아서 죽음으로 감당하겠습니다.”
이에 초 태자는 초나라로 가는 사신의 마부로 변복을 하고 관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황헐>은 숙소에 머무르며 병을 핑계로 사람 만나기를 사절했다.
태자가 이미 멀리 가서 진나라가 뒤쫓을 수 없게 되자 황헐은 자진해서 진 소왕에게
“태자께서는 이미 귀국길에 올라 멀리 가셨습니다.
<황헐>은 죽어 마땅하니 죽여주십시오.”라고 했다.
소왕이 크게 성을 내며 그의 자살을 받아들이려 했다.
<응후>가
“황헐은 신하된 몸으로서 자신의 몸으로 자기 군주를 섬겼습니다.
태자가 즉위하면 틀림없이 황헐을 기용할 터이니 죄를 묻지 않고 돌려보내서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진나라는 <황헐>을 돌려보냈다.
황헐이 초나라로 온 지 석 달,
초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完)이 즉위하니 이가 고열왕(考烈王)이다.
고열왕 원년에 왕은 <황헐>을 재상에 등용하고 춘신군(春申君)에 봉하여
회수 이북 땅 열 두 개의 현을 주었다.
그 뒤 15년에 <황헐>이 초왕에게
“회수 이북 땅은 제나라와 붙어 있어 급한 일이 발생하니
군으로 삼는 것이 편리합니다.”라 하고는
회수 북쪽 열 두 개의 현을 바치면서 강동을 봉지로 요청했다.
고열왕이 이를 허락했다.
춘신군은 이에 옛 오나라 도성 터에 성을 쌓고 자신의 도성으로 삼았다.
춘신군이 초 열 두 개의 재상으로 있을 당시
제 열 두 개의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조 열 두 개의에는 평원군(平原君)이,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어 다투어 낮은 자세로 인재를 모시고
빈객들을 초청하여 서로 싸우면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다.
춘신군이 초 열 두 개의의 재상이 된 지 4년에
진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여 만 군대를 격파했다.
5년에 (진나라는) 한단을 포위했다.
한단은 초나라에 위급함을 알렸고,
초나라는 춘신군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으나
진나라의 군대가 떠나고 없어 춘신군도 돌아왔다.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으로 있은 지 8년에
초나라를 위하여 북으로 노(魯)나라를 토벌하여 멸망시켰고,
순경(荀卿; 순자)을 난릉령(蘭陵令)에 임명했다.
이 무렵 초나라는 다시 강해졌다.
조나라의 평원군이 춘신군에게 사람을 보내자,
춘신군은 그들을 상급 관사에 머무르게 했다.
조나라의 사신들은 초나라에서 자신들을 과시하려고 머리에는 대모잠(玳瑁簪)을 꽂고 구슬과 옥 등으로 장식한 칼집을 차고 춘신군의 식객과 만나고자 했다.
춘신군의 식객은 3천이 넘었는데,
그 중 상급 식객들이 모두 구슬로 장식된 신발을 신고 조나라의 사신을 만났더니
조나라의 사신들은 크게 부끄러워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14년에
진나라의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하여 <여불위呂不韋>를 재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했다.
동주(東周)를 취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2년에
제후들은 진나라의 시도 때도 없는 공격이 걱정되어
바로 서로 합종하여 서쪽으로 진나라를 치기로 하고
초왕을 종약장으로 삼고 춘신군에게 일을 맡겼다.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가 군대를 내어 공격하자
제후의 군대들은 모두 패주했다.
초 고열왕은 춘신군을 나무랐고, 춘신군은 이로부터 (초왕과) 더 멀어졌다.
식객 중에 관진(觀津) 사람 <주영朱英>이라는 자가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초나라가 강했지만 군이 약하게 만들었다고 여기고 있으나
이 <주영>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선군 때 진나라는 20년 동안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겠습니까?
진나라가 면애(?隘)라는 요새를 넘어 초나라를 공격하기가 불편했고,
동주와 서주로부터 길을 빌릴 경우에도
한나라와 위나라를 등지고 초나라를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나라의 멸망이 아침저녁이라 허와 언릉조차 돌볼 겨를이 없으며,
땅을 떼어서 진나라에게 준다고도 합니다.
그럴 경우 진나라의 군대와 진(陳)나라는 불과 160 리 떨어진 상황이라
신이 보게 될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가 허구한 날 싸우는 것입니다.”
초나라는 이에 진(陳)나라를 떠나 수춘(壽春)으로 옮겼다.
그러자 진나라는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기고, 그곳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춘신군은 이로써 오(吳)에 봉해져 재상의 일을 보았다.
초 고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춘신군이 이를 걱정하여 아들을 잘 낳을 여자를 여러 명 구해 들여보냈으나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조나라 사람 <이원李園>이 자신의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
그녀를 초왕에게 들여보내려 했으나 왕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오래 총애를 받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이에 <이원>은 춘신군을 모시면서 사인(舍人)이 되었다.
한번은 귀가를 요청했다가 일부러 날짜를 놓쳤다.
돌아와 인사를 올리자 춘신군이 늦은 이유를 물었더니
“제왕이 사신을 보내와 나의 누이를 원해서 그 사신과 술을 마시느라 늦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춘신군은 “폐백이 들어왔소?”라고 묻자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춘신군이 “내가 만나 볼 수 있겠소.”라고 하자 “좋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이원>은 그 누이를 춘신군에게 들여보냈고, 이내 춘신군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자 <이원>은 바로 그 누이와 공모했다.
<이원>의 누이는 틈을 타서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초왕께서 군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형제라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지금 군께서 초나라의 재상을 20년 넘게 지내시고 있고, 왕께는 아들이 없습니다.
왕이 돌아가시면 다른 형제가 즉위할 것이고,
초나라의 왕이 바뀌면 자신과 친했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길 것인데,
군께서 어떻게 오래도록 총애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군께서는 오랫동안 귀하신 몸으로 일을 주도해왔기 때문에
왕의 형제들의 불만을 많이 샀을 것입니다.
왕의 형제가 진짜 즉위하면 그 화가 군에게 미칠 것인데
무슨 수로 재상의 도장을 지니고 강동의 봉지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소첩만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첩이 군의 사랑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군의 지위로 신첩을 초왕께서 들여 보내주신다면
왕께서는 틀림없이 신첩을 아끼실 것이고,
신첩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낳게 되면 군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니
초나라를 전부 얻을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화를 당하는 것과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춘신군은 매우 맞는 말이라고 여겨 곧 <이원>의 누이를 관사로 내보낸 다음
초왕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
초왕이 불러서 그녀를 예뻐했고,
마침내 아들을 낳아 태자로 세우니 이원의 누이는 왕후가 되었다.
초왕은 또 <이원>을 중용했고, <이원>은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원>은 그 누이를 들여보내 왕후가 되고 아들이 태자가 되자
춘신군이 이 일을 발설하거나 더욱 교만해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몰래 결사대를 길러 춘신군을 죽여 입을 막으려 했다.
나라 사람들 중 이를 아는 사람이 많았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5년에 초 고열왕이 병이 났다.
<주영>은 춘신군에게
“세상에는 바라지 않던 복이 있을 수도 있고, 바라지 않는 화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바라지 않던 세상에 있고, 바라지 않는 군주를 섬기고 계신데
어찌 하여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춘신군이
“바라지 않던 복이란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군께서 초나라의 재상으로 20년 넘게 계셨는데
이름이 재상이지 실은 초왕이었습니다.
지금 초왕께서 병이 나서 죽을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럴 경우 군께서는 재상으로 어린 군주를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하실 터이니
이는 이윤(伊尹), 주공(周公)과 같습니다.
왕이 장성하여 정권을 돌려줄 때도 그렇게 하기 싫으면 남면하여 왕으로 칭하고
초나라를 가지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바라지 않던 복이란 것입니다.”
춘신군은
“그럼 바라지 않는 화란 무엇이오?”라고 했다.
<주영>이
“<이원>은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있지만 군의 맞수입니다.
군대는 없지만 결사대를 기른 지 오래입니다.
초왕께서 돌아가시면 <이원>은 틀림없이 먼저 들어가 권력을 차지하고
군을 죽여서 입을 막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바라지 않는 화란 것입니다.”라고 했다.
춘신군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란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주영>은
“군께서는 신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해주십시오.
초왕이 돌아가시면 <이원>은 틀림없이 먼저 궁궐로 들어올 것이니
신이 군을 위하여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생각지도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춘신군은
“그대는 그만 하시오.
<이원>은 약한 사람이고 내가 또 잘 해주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소.”라고 했다.
<주영>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바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17일 뒤에 초 고열왕이 죽었다.
<이원>이 과연 먼저 궁궐에 진입하여 결사대를 극문(棘門) 안에 매복시켰다.
춘신군이 극문을 들어서자 <이원>의 결사대는 춘신군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극문 밖으로 던졌다.
이어 사람을 시켜 춘신군의 집안을 모조리 없앴다.
그리고 <이원>의 누이는 처음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임신한 다음
왕궁에 들어가 낳은 아들이 즉위하니 이가 초 유왕(幽王)이다.
이해가 진시황(秦始皇) 즉위 9년이었는데,
<노애>가 또 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삼족이 몰살당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쫓겨났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초나라에 가서 춘신군의 옛 성을 보았는데 궁실이 호화로웠다.
당초 춘신군이 진 소왕에게 유세하고,
그 몸을 희생해가며 초 태자를 돌려보냈으니 얼마나 지혜로웠던가!
그 뒤 <이원>에게 통제 당했으니, 어리석구나.
속담에 ‘잘라야 할 때 자르지 못하면 도리어 그 환란을 당한다.’고 했다.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인가?”
미월전과는 시대는 맞지 않지만 인물의 됨됨이는 잘 묘사했다.
춘신군 <황헐>은 초나라에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다.
국익을 위해서 진나라에서 함께 볼모 생활까지 했을 정도니.
만약 춘신군 <황헐>이 없었다면 초나라는 경양왕을 끝으로 망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