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內禮太后以祇摩帝女 久在帝位 誓于伐休帝 曰
“非吾子孫 不得立 玉帽太后 亦以天神正統”
遺命于沾解 曰 “唯內禮之孫 而爲吾統者 可以傳國宜爲眞骨正統” 沾解帝許之
時帝妃阿爾兮后 好色多私寵 而帝寵愛之 不禁其慾 末昕諫之 曰
“天后嗣子之出也 不可有私寵”
帝笑曰 “彼爲眞骨正統 雖非吾子何害乎”
末昕乃知 沾解之無 私有天下之意 乃爲述禮 曰
“吾子末仇 亦爲眞骨 可得天下 而今汝子 味鄒有聖德 仙心歸之 吾欲先立
而昌花林 可合神人之心”
述禮曰 “汝言甚合吾意 夢兆必應矣”
先是仇道世神 養疾於長萱之家 夢見金色大鳥 心奇之
時長萱妻述禮 亦夢金色大鳥 而告于長萱 曰
“必生貴子 可以相合” 長萱乃携述禮入寢 戰寒不能成房 乃大悟 曰
“吾有何功 而敢當此夢 此必仇道主公之兆也”
乃命述禮進而薦之 述禮羞慚 不肯自進 長萱乃負述禮 而强之仇道寢 仇道曰
“吾夢大吉 可借汝妻 一好”
長萱曰 “天也”
乃推述禮而退 仇道乃抱述禮 向暖日臥 遂成雲雨 而娠 多異祥 自是述禮爲仇道妻
生味鄒尼今 時仇道年已七十五 人多疑 爲長萱子
及長玉貌與仇道無異 玉帽太后寵愛之 曰
“吾父多子女 而無如此兒 花林之興 專在此兒”
命孫光爲仙嗣 敎以玄妙 無不通知 年至十七八 身長而體鴻 少言語重然諾 國人器之
玉帽常置在右 起居依之 曰
“非吾弟 則不便矣” 故助賁帝命爲太后私臣 太后崩多得其珍宝 而富甲于天下
而好施于仙徒貧民 於是人心大歸 沾解阿爾兮后 皆受玉帽有命尊之 爲師迎入宮中
設眞齋而消災 阿爾兮后深慕之 累託齋沐 而引入秘室 乞受眞身 遂相通氣援
心約爲夫婦 乃生昭明公主 命述禮養之 而密謂述禮 曰
“此乃味鄒女也 朕欲與味鄒共治天下 母與末昕議定大事可也”
末昕大喜 乃與良夫等上言 “消災生民 莫如捧聖人爲副君”
沾解帝心知 阿后之意 在味鄒欲 許之
助賁仙帝問之 責阿后無信 阿后乃以助賁女光元妻味鄒 曰
“吾非欲爲味鄒妻也 乃配汝女 而傳國也”
助賁知仙心已歸 而竟許爲副君 招阿后於仙宮 曰
“汝乃吾妻也 當與吾居 何與光元爭副君乎”
阿后不得已入仙宮 而娠助賁女光明 曰 “已娠汝子 雖私寵何害”
乃復入天宮 視政事 沾解帝垂手皆決於副君 乃以副君胞兄爲寵相 而備受禪之策
沾解帝知之 遂入海宅 將行禪讓 疾作而崩 副君避不卽位 而阿后强立之 乃登宝祚
처음에 <내례內禮(186-263)>태후가
<지마祇摩(131-191)>제의 딸로 오랫동안 제위(帝位)에 있었는데,
<벌휴伐休(189-256)>제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의 자손이 아니면 왕을 세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옥모玉帽(238-311)> 태후 역시 천신정통(天神正統)인 까닭에
<첨해沾解(274-324)>에게 유명을 남기어 말하기를
“비록 <내례>의 자손일지라도 나의 핏줄로 나라를 전하여야
마땅히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첨해>제가 허락하였다.
당시 <첨해沾解>제의 비(妃) <아이혜阿爾兮(286-362)>후가 호색(好色)하여
사적으로 총애를 함이 많음에도, 왕이 총애를 하여 그 욕정을 금하지 아니하였다.
<말흔末昕(278-350)>{구도의 아들}이 간(諫)하여 말하기를
“천후(天后){아이혜}는 사자(嗣子)의 출신이니,
사적으로 총애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저 사람도 진골정통이다.
비록 나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어찌 해로움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말흔>이 이에 <첨해>가 천하를 사사로이 계승할 뜻이 없음을 알고,
이에 <술례述禮(256-338)>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자식 <말구末仇(297-358)>{말흔과 술례의 아들} 역시 진골이므로
가히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너의 자식 <미추味鄒(292-362)>는 성덕(聖德)이 있어
선심(仙心)이 그에게 돌아갔으니,
나는 먼저 <미추>를 세워 화림(花林)을 창성하게 하면
신인(神人)의 뜻과 합치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술례>가 말하기를
“너의 말은 심히 나의 뜻과 부합한다. 꿈의 조짐이 응당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날에 <구도仇道(218-302)> 세신(世神)이
<장훤長萱>의 집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꿈속에서 금색대조(金色大鳥)를 보고, 마음속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장훤>의 처 <술례> 역시 꿈속에 금색대조를 보고,
<장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합궁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장훤>이 이에 <술례>를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추위와 싸우느라 방사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말하기를
“내가 무슨 공적이 있어 감히 이 꿈을 감당하겠는가.
이 꿈은 응당 <구도> 주공(主公)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술례>를 나아가게 하여 천거하였다.
<술례>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나아가지 않았다.
<장훤>이 이에 <술례>를 업어 <구도>의 침전으로 강제로 들어왔다.
<구도>가 말하기를
“나의 꿈이 크게 길하니, 너의 처를 빌림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장훤>이 말하기를
“하늘의 뜻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술례>를 밀어 넣고 물러났다.
<구도>가 이에 <술례>를 안고 따뜻한 햇볕이 있는 쪽에 누워 있다가,
드디어 운우(雲雨)를 이루어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기이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많았다.
이 때부터 <술례>는 <구도>의 처가 되어 <미추>니금을 낳았다.
이때 구도의 나이 이미 75세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장훤의 아들이라고 의심하였는데,
자라면서 옥모(玉貌)가 <구도>와 다름이 없었다.
<옥모>태후가 총애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많지만 이 아이와 같지 않다.
화림이 흥하는 것은 오로지 이 아이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손광孫光(250?-320)>에게 명하여 선도의 후계자로 삼고,
현묘(玄妙)함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십칠팔세에 이르자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컸으나, 말이 적고 말을 조심하고 그런 연후에 승낙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릇이라고 하였다.
<옥모>태후가 항상 곁에 두고 살면서 의지하여 말하기를
“나의 동생이 아니면 불편하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조분助賁(254-329)>제가 태후사신(太后私臣)으로 명하였다.
태후가 죽자 그 진귀한 보물을 많이 얻어 천하의 갑부(富甲)가 되었고,
선도(仙徒)의 빈민(貧民)에게 잘 베풀어,
당시 사람의 인심이 <미추>에게 크게 돌아가게 되었다.
<첨해>와 <아이혜>후 모두 <옥모>태후의 유명(遺命)을 존중하여,
사(師)로 삼아 궁중에 맞이하여 진재(眞齋)를 설치하고 재앙을 막았다.
<아이혜>후가 깊이 사모하여, 누차로 재목(齋沐)을 부탁하여,
비실(秘室)로 이끌어 들어오게 하여, 진신(眞身)을 주기를 구걸하였다.
드디어 상통(相通)하여 기운을 들어올리고,
부부(夫婦)가 되기를 마음으로 약속하여, 이에 <소명昭明(322- )>공주를 낳았다.
<술례>에게 기르도록 명하고, 은밀히 술례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미추>의 딸입니다.
짐은 <미추>와 더불어 천하를 함께 다스리기를 원하니,
어머니는 <말흔>과 대사(大事)를 의논하여 정함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흔이 크게 기뻐하며 <양부良夫(294-356)> 등과 상언(上言)하여 말하기를
“재앙을 막는 것은 백성을 살리는 일이며,
성인(聖人)을 받들어 부군으로 세움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첨해>제는 마음속으로 아후(阿后)의 뜻이 <미추>에게 있음을 알았지만
허락하고자 하였다.
<조분助賁> 선제(仙帝)가 그 소리를 듣고 아후(阿后)의 신뢰 없음을 책망하였다.
아후(阿后)가 이에 <조분>의 딸 <광원光元(310-392)>을
<미추>의 처로 삼으며 말하기를
“내가 <미추>의 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에 너의 딸을 배우자로 삼아 나라를 전하겠다.”라고 하였다.
<조분>은 선심(仙心)이 이미 <미추>에게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에는 부군(副君)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아후(阿后)를 선궁(仙宮)으로 불러 말하기를
“너는 곧 나의 처이다. 마땅히 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
어찌하여 <광원>과 부군을 다투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아후(阿后)가 부득이 선궁으로 들어가
<조분>의 딸 <광명光明(324-392)>을 임신하며 말하기를
“이미 너의 자식을 가졌다.
비록 사적으로 총애를 할지라도 어찌 해가 되겠느냐.”라고 하며,
이에 다시 천궁(天宮)으로 들어와 정사(政事)를 살폈다.
<첨해>제가 손을 떼고, 부군에게 모두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부군의 같은 어머니의 형 <훤술>을 총상(寵相)으로 삼고
선양을 받을 책략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장훤(술례) - 훤술
<첨해>제가 그 뜻을 알고 해택(海宅)에 이르러,
장차 선양(禪讓)을 행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병이나 죽었다.
부군이 피하여 즉위하지 않으려 하였는데,
아후(阿后)가 강제로 <미추>를 세워, 이에 왕위에 올랐다.
일광(알영) - 대노(구을) - 칠공(한나) - 지소례(모리) -지진내례(일성) - 아달라(자황) - 소비(공례) - 술례(구도) - 미추
일광(알영) - 대노(구을) - 칠공(한나) - 지소례(모리) -지진내례(석추) - 벌휴(내례) -
공례(소비) - 술례(구도) - 미추
풍신(대표) - 포공(포암) - 호공(아호) - 알지=세한(모우) - 아도(가시)
- 욱보=수류(호례) - 구도(술례) - 미추
미추의 외할아버지 소비는 아달라의 아들인 박씨이고
외할머니 공례는 벌휴의 딸인 석씨이다.
미추는 김일제의 후손인 알지(세한)의 5세손이다.
미추왕 원년 청조(靑鳥=乙酉) (A.D.325)
正月 大阿夫伊伐飡 冬皇稟主 以良夫爲大日大師 良夫者尼今之嬖臣也
정월 <대아부大阿夫>를 이벌찬으로 <동황冬皇>을 품주로 삼았다.
<양부良夫>를 대일대사로 삼았다.
<양부>란 사람은 니금(尼今)의 폐신(嬖臣)이다.
三月 龍見東池 尼今親祓
命元宮主生沾解帝女白海 尼今洗之
3월 용(龍)이 동쪽 연못에서 보였다.
니금(尼今)이 친히 푸닥거리를 하였다.
<명원命元>궁주가 <첨해沾解>제의 딸 <백해白海>를 낳았다.
니금(尼今)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四月 伊西國太子宝相來朝
初伊西君熊相娶甘文女金宝 生宝相 美而多才 熊相乃立金宝爲后
國人多反之 曰 “正見神不許”
金宝乃勤于奉神 其祠在 都外 熊相爲金宝 而移其祠于都中
國人又大騷 乃還其祠 金宝每以歲臘一七日 詣祠齋之
至是宝相年十八 金宝年三十八 幷詣于祠
金宝得疾危急 時伊西臣長眉謫在祠 傍有女甚美
宝相愛之 約爲夫婦 每夜往遊 不待其母
從臣諫之不聽 金宝不得已召其女于側 而與宝相和之
未幾金宝病役 熊相來救 亦見長眉女美
而愛之 遂納之 寵益高复 長眉官爲大相 以長眉妻鸚鵡爲夫人
長眉女繼金宝爲后 是爲白梗后
國人以白梗先通于宝相 而後媚于熊相 誹之 白梗乃謂太子 曰
“國君若知 吾汝事 必疑汝通我 不若朝于上國得仙道 而來則威望
自重可以致位伊時願與汝復爲夫婦而治國”
宝相曰 “吾年十八 汝年十六 父王四十五 次後十年吾與汝尙少
而父王老 吾以汝慰父王孝也”
遂入朝 請學仙 良夫稱其賢 賜爵級飡
4월 이서국(伊西國) 태자 <보상宝相>이 내조(來朝)하였다.
처음에 이서국의 왕 <웅상熊相>이 감문(甘文)의 여자 <금보金宝>에게 장가를 들어
<보상宝相>을 낳았고,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웅상>이 이에 <금보金宝>를 세워 후(后)로 삼고자 하였다.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정견신(正見神){가야신}이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금보金宝>가 이에 신(神){정견신}을 섬기기를 부지런히 하였는데,
그 사당은 도읍지 밖에 있어,
<웅상熊相>이 <금보金宝>를 위하여 그 사당을 도읍 안으로 옮겼다.
나라사람들이 또 크게 떠들어대니 이에 그 사당을 도읍 밖으로 되돌렸다.
<금보金宝>는 매해 섣달17일 사당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때에 <보상宝相>의 나이 18세, <금보金宝>의 나이 38세였는데 함께 사당에 왔다.
<금보金宝>가 병을 얻어 위급하였는데,
당시 이서국의 신하 <장미長眉>가 유배를 와서 사당 안에 있었고,
곁에 있는 딸이 심히 아름다웠다.
<보상宝相>이 그 딸을 사랑하여 부부가 되기를 약속하고
그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매일 밤 놀러갔다.
따르는 신하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금보金宝>가 부득이 그 여자를 불러 옆에 두고 <보상宝相>과 화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보>가 병으로 죽자, <웅상>이 구하러 와서,
또한 <장미>의 딸이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하여 거두어들임에 이르렀다.
총애가 점점 더하여지자 <장미>의 관직이 다시 대상(大相)이 되었고,
<장미>의 처 <앵무鸚鵡>가 부인(夫人)이 되었고,
<장미>의 딸이 <금보>를 이어 후(后)가 되었다.
이 분이 <백경白梗>후(后)가 되었다.
나라사람들이 <백경白梗>이 <보상>과 먼저 통한 후에 <웅상>에게 아첨하여
후(后)가 되었음을 헐뜯었다.
<백경白梗>이 이에 태자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국군(國君){웅상}이 만약에 너와 나의 일을 안다면,
반드시 너와 내가 통한 일을 의심하게 될 것이므로
상국(上國)의 조정에 찾아감만 못하며,
선도(仙道)를 얻어오면 위망(威望)이 있을 것이니
자중(自重)하면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다.
지난번 너와 내가 원하였던 것처럼 부부로 살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보상>이 말하기를
“나의 나이는 18세, 너의 나이는 16세, 부왕의 나이는 45세,
다음 10년 뒤의 너와 나는 아직 젊고 부왕(父王)은 늙게 된다.
내가 너로 하여금 부왕을 위로하게 함이 효(孝)이다.”라고 하였다.
입조(入朝)함에 이르러 학선(學仙)이 되기를 청하였다.
양부(良夫)가 그 현명함을 칭찬하여, 급찬(級飡)의 작위를 내렸다.
七月 金城西門火 延燒民戶百余
將及舟宣公宅 公奴房務? 大率諸奴滅火 甚疾
末仇獎其功 請屬羽林 許之
興潛伊伐飡 冬皇再爲稟主
時骨女有三夫之風 多者或七八夫十餘夫 以少爲無援
冬皇孫光女冬禮女也
自少爲尼今嬖妾 而好淫多夫洋洋自得 自以爲莫我當
大阿夫興潛之從兄也 通其從兄之妻 而亦爲寵相 時俗可知也
命權妻命元爲于老太子妻 時于老妻達禮與太師良夫通而娠故也
國俗王女無定夫 而若與太子相婚 而爲夫妻 則不得其夫之許 則不通男子義也
達禮慕良夫 而欲爲側夫 問於于老 曰 “吾已生汝子女 願得側夫 而養氣”
于老曰 “欲納何人乎”
達禮曰 “良夫尼今之寵臣也 仙門之至尊也 吾欲薦身 以得道”
于老曰 “汝父吾父皆尼今也 汝何思二骨乎” 不許之
達禮曰 “骨女皆有三夫 况王女乎”
遂潛通良夫 而與于老不親 于老怒 尼今乃以命元妻之 以慰之
7월 금성(金城) 서문(西門)에 불이 나서 백성의 집 100여 호가 불에 탔다.
장차 <주선舟宣>공(公)의 집에 이르려하자
공노(公奴) <방무房務>가 모든 노비를 이끌고 불을 껐지만 깊이 병이 들었다.
<말구末仇(297-358)>가 그 공을 권면하여 우림(羽林)군에 속하도록 청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였다.
<흥잠興潛>을 이벌찬으로, <동황冬皇>을 다시 품주로 삼았다.
당시 골녀(骨女)는 3명의 남편을 두는 유행이 있었는데,
많은 자는 칠팔 명 혹은 십여 명의 남편을 두었다.
이 때문에 젊은 사람에게는 맡기지 않았다.
<동황冬皇>은 <손광孫光>의 딸인 <동례冬禮(272-354)>의 딸이다.
젊었을 때부터 니금(尼今)의 총애를 받는 첩이었는데,
음란함을 좋아하고 남편이 많아서 양양(洋洋)하여 자득(自得)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당해낼 자가 없다고 하였다.
<대아부大阿夫>는 <흥잠>의 종형(從兄)인데,
<대아부>는 그 종형의 처와 통하여 역시 총상(寵相)이 되었다.
이 때의 풍속을 가히 알만하다.
권처(權妻) <명원命元(307-374)>을 <우로于老(277-331)>태자의 처로 삼았다.
당시 <우로于老>의 처 <달례達禮(303-371)>가
태사(太師) <양부良夫(294-356)>와 통하여 임신을 한 까닭이다.
나라의 풍속에 왕녀는 정한 남편이 없으나,
만약에 태자와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남편의 허락 없이 다은 남자와 통하지 않음이 법도였다.
달례가 <양부良夫>를 사모하여 측부(側夫){샛서방}로 삼고자 하여
<우로>에게 물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너의 자식을 낳았으니, 측부를 얻어 기운을 북돋고자 원한다.”라고 하였다.
<우로>가
“어떤 남자를 거두려 하느냐?”라고 물었다.
<달례>가 말하기를
“<양부>는 니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고, 선문(仙門)의 지존(至尊)이다.
나는 몸을 천거하여 도(道)를 얻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모두 니금(尼今)이다.
어찌하여 이골(二骨)을 생각하느냐?”라고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달례>가 말하기를
“골녀(骨女)는 모두 3명의 남편이 있는데, 하물며 왕녀(王女)로다.”라고 하며,
<양부>와 잠통(潛通)하기에 이르렀다.
<양부>는 <우로>와 친하지 않았으므로 <우로>가 화를 내었다.
니금(尼今)이 이에 <명원>을 시집보내어, <우로>를 위로하였다.
미추왕 원년
3월 대궐 동쪽 못에 용이 나타났다.
7월 금성 서문에 불이 났고, 인가 삼백여 호가 연이어 불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때 <조분> 72세, <술례>태후 70세, <아이혜> 40세, <미추>왕 34세, <광명> 2세,
<우로> 49세, <말흔> 48세, <말구> 29세, <걸숙> 36세?.
<아소례> 64세, <달례> 23세,<유례> 20세이다.
미추왕 2년(A.D.326) 화구(火狗=丙戌)
正月 良夫伊伐飡 達禮稟主兼知軍事
時于老與末昕主軍事 達禮久爲軍母 故亦以良夫分其軍權 欲樹花林之之計也
先時于老新娶命元 謁助賁仙今于海宅
仙今憙曰 “達禮命元皆吾女 沾解吾之異父弟 汝之異母兄也
以沾解之妻妻汝 甚合吾意 新今得矣”
于老曰 “達禮好淫 而命元不然 臣愛新而棄舊”
仙今笑曰 “老陽少陰 汝安得不惑乎 命元比達禮 溫柔娟艾 新今不自居而與汝
盖知吾意在汝也”
于老曰 “伐休正統 有父與我 而我國重母 外戚竊位 新今則漢之王莽也
妹后好淫 而寵愛之 臣居帝位 非祖宗法也 父今何不制妹 而正位乎”
助賁笑曰 “眞人自在 非人所爲西方 金故好殺伐 男子主政 東方木
故好生育 女子主政 女子仁而和 故好淫 而好淫者德之善也 殺伐者惡之大者也
故西土神仙已絶 惟東方有之 汝何爲殺伐聲 而害和氣乎
汝所以不得爲尼今者亦無和氣也 無和安得 育萬物乎
新今亦吾子 汝亦吾子 豈有差哉 汝宜養和氣”
因命與命元相抱 而舞 仙今自鼓 而使綃姬歌之 以解 于老之慍 綃宮人有
以其言告于阿爾兮后 故后謂尼今 曰 “吾兄有異志 不可掌兵”
尼今曰 “倉卒奪之 必生猜忌可緩”
緩圖之 至是 以達禮舊臣 皆屬良夫 于老之權大削 于老有慍意 尼今乃陽尊
于老爲元上太公 尼今五日 一問必拜 呼以叔父 奢其衣食居處
정월 <양부良夫>를 이벌찬으로, <달례達禮>를 품주 겸 지군사(知軍事)로 삼았다.
당시 <우로于老>와 <말흔末昕>이 군사의 우두머리였고,
<달례>가 오랫동안 군모(軍母)로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또한 <양부>에게 그 군권(軍權)을 나누게 하여,
화림(花林)을 세우고자 하는 만약의 계책이었다.
이전에 <우로>가 <명원命元>에게 새로 장가를 들어,
해택(海宅)에 있는 <조분>선금(仙今)을 만나러갔다.
선금(仙今)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달례>와 <명원> 모두 나의 딸이다.
<첨해沾解>는 나의 다른 아버지의 동생이고, 너에게는 다른 어머니의 형이다.
<첨해>의 처를 너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나의 뜻에 심히 합치된다,
신금(新今){미추}이 깨달은 게로구나.”라고 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달례>는 음란함을 좋아하나 <명원>은 그러지 않습니다.
신(臣)은 새로운 여자를 사랑하여 옛 여자를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선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늙은 남자는 젊은 여자를 좋아하니, 네가 어찌 매혹되지 않았겠느냐?
명원은 달례에 비하여 온유(溫柔)하고 날씬하고 예쁜데
신금이 차지하지 않고 너에게 준 것이다.
아마도 나의 뜻이 너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벌휴(伐休)의 정통(正統)은 아버지{조분}와 나에게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머니를 중요시하여 외척(外戚)이 왕위를 훔쳤습니다.
신금은 한(漢)의 <왕망王莽>과 같습니다.
여동생인 후(后){아이혜}는 음란함을 좋아하여 <미추>를 총애하여,
신하가 제위에 있으므로 조종(祖宗)의 법(法)이 아닙니다.
부금(父今)은 어찌하여 누이동생을 제어하여 왕위를 바로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조분>이 웃으며 말하기를
“참된 사람은 인간되지 않은 소행에 자재(自在)한다.
서방(西方)은 금(金)인 까닭에 살벌(殺伐)함을 좋아하여 남자가 정치를 주관하고,
동방은 목(木)인 까닭에 생육(生育)을 좋아하고 여자가 정치를 주관한다.
여자는 어질고 화합하나 그런 까닭으로 음란함을 좋아한다.
음란함을 좋아하는 것은 덕(德)의 최고선이다.
살벌한 것은 악의 최상이다.
그런 연유로 서토(西土)에는 신선(神仙)이 이미 끊어지고,
동방에만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너는 어찌하여 살벌한 소리를 하여 화목한 기운을 깨뜨리려는 것이냐.
네가 니금이 되지 못한 까닭(所以) 역시 화목한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화목하지 아니하면 어찌하여 만물(萬物)이 생장할 수 있겠느냐.
신금 역시 나의 아들이고 너 역시 나의 아들이다.
어찌 차별이 있겠느냐. 너는 마땅히 화목한 기운을 길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명원>과 서로 안고 춤추도록 하고,
선금이 손수 북을 치고, 초희(綃姬)에게 노래 부르게 하여 풀도록 하였다.
<우로>가 성을 낸 곳에 초궁인(綃宮人)이 있어
그 말을 <아이혜阿爾兮>후에게 고(告)하였다.
그런 연유로 후(后)가 니금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오빠에게 다른 뜻이 있으니 병권을 맡기는 일은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첨해>가 갑자기 죽어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반드시 시기(猜忌)할 것이니 천천히 도모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달례>의 옛 신하들이 모두 <양부>에게 속하게 되어
<우로>의 권세가 크게 깎이게 되었다.
<우로>가 화를 내는 뜻이 있었으나,
니금이 양존(陽尊)하여 <우로>를 원상태공(元上太公)으로 삼았다.
니금이 5일에 한번씩 안부를 묻고, 오로지 굽히며 숙부(叔父)라고 불렀다.
그 옷과 먹을 것 사는 곳을 사치스럽게 하였다.
二月 尼今與阿爾兮后親祀祖廟 大赦天下 賜百官爵一級
追封先考仇道爲葛文王 尊母述禮爲太后 述禮夫末昕爲次上太公
賜酺群臣 阿后醉抱尼今而舞 曰 “好吾夫兮壯陽仙”
于老責后 曰 “汝以仙今之妻 雖愛側夫 仙今尙存 安敢對群臣 而稱夫乎”
后曰 “人皆知之 兄何妬乎”
于老曰 “味鄒末昕之子也 猶吾子汝 以爲夫 無恥乎”
后曰 “兄以吾女妻之 憙老陽少陰 吾以兄子夫之 喜老陰少陽 人生須行樂 耳何自苦乎”
仍命 命元曳于老 入舞列
2월 니금(尼今)과 <아이혜阿爾兮>후가 조상의 사당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죄인을 사면하고 백관들에게 작위를 1급씩을 올렸다.
선고(先考) <구도仇道>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여 봉(封)하고,
어머니 <술례述禮>를 높이어 태후로 하였다.
<술례>의 남편 <말흔末昕>을 차상태공(次上太公)으로 삼았다.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아후(阿后)가 취하여 니금을 안고 춤추며 말하기를
“나의 남편이 씩씩한 양선(陽仙,)이어 사랑스럽구나!”라고 하였다.
<우로于老>가 후(后)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선금(仙今)의 처이고, 비록 측부(側夫)를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선금이 아직 살아계시는데 어찌 감히 군신(群臣)들을 대하며 남편이라 칭하느냐?”
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오빠는 어찌 시새움을 합니까?”라고 하였다.
“<미추味鄒>는 <말흔末昕>의 아들이니,
나의 아들임이 마땅한데 너는 남편으로 삼았으니 부끄럽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기를
“오빠는 나의 딸을 처로 삼았는데,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나는 오빠의 자식을 남편으로 삼아,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만나 기쁩니다.
인생은 모름지기 즐거움을 행할 뿐이고, 어찌 스스로 괴로워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명원命元>에게 명하여 <우로>를 끌고 춤을 추는 대열로 들어가게 하였다.
미추왕 2년
정월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四月 宴花林 定樹王位次 以蘿井爲第一 壤井爲第二 花林爲第三 桃山及六部 序于其次
4월 화림(花林)에서 연회를 베풀고 수왕(樹王)의 위계와 차례를 정하였다.
나정(蘿井)은 제1, 양정(壤井)은 제2, 화림(花林)은 제3으로 하고,
도산(桃山)과 6부에 미치어 그 차례에 따라 서열을 정하였다.
七月 奈淡伊伐飡 羘尺稟主 羘尺者羘公女也 其母尺仁與尼今同年 命監事
羘尺年才十七 尼今愛其才色 而爲主
奈淡者奈音王寵孫也 爲人寬仁 無所執 而性好艾色 繼其父奈己爲右軍頭上
惟色是務 兵官之妻 無不淫之
時于老末昕奈淡爲頭上 而分掌兵權
末昕輒 以美色送之 以懷 奈淡尼今少時爲其兵官 以兄事之
故卽位 猶用舊禮 奈淡曰 “天子臨萬民御百官 不可無外視情 雖如故禮不可修 自盡臣道”
阿后曰 “誰謂奈淡無所執”
尼今曰 “奈兄厚於悅 已故愛臣 舊情而然也 可以此人揆百官矣”
后許之 尼今乃問於奈淡 曰 “兄爲寵相 誰可蒨乎” 柰淡笑曰 “爾可爲也”
盖尼今嘗爲其龍陽 故戱之也
尼今笑曰 “兄好艾 吾有可蒨” 遂以羘尺妻之
7월 <내담奈淡>을 이벌찬으로, <장척羘尺>을 품주로 삼았다.
<장척>은 <장공羘公>의 딸이다.
그 어머니 <척인尺仁>은 니금(尼今)과 나이가 같아,
<척인>에게 품주의 일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장척>은 이제 겨우 17세로 니금이 그 재색(才色)을 사랑하여 품주로 삼았다.
<내담>은 <내음奈音>왕의 총손(寵孫)으로, 사람의 됨됨이가 너그럽고 어질며,
집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본바탕이 남색을 좋아하였다.
그의 부친 <내기奈己>를 이어 우군두상이 되었다.
생각건대 여색을 업신여겼다고 인정된다.
병관(兵官)의 처는 음란하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우로于老>, <말흔末昕>, <내담奈淡>이 두상(頭上)으로 있으면서,
병권(兵權)을 나누어 맡았다.
<말흔>이 갑자기 미색(美色)을 보내어 품도록 하였다.
<내담>은 니금이 젊었을 때에 니금의 병관(兵官)이었는데, 니금이 형으로 섬겼다.
그러한 연유로 즉위하자 옛날의 관례대로 등용하였다.
<내담>이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만민(萬民)을 대하고 백관(百官)을 통솔함에는
바깥의 형편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이것이 옛날의 관례이나 손질함이 불가하니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신의 도리를 지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아후가 말하기를
“누가 <내담>이 다스리지 못한다고 말하느냐?”라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내형(奈兄){내담}은 기쁘게 함이 두텁습니다.
이미 옛날부터 사랑했던 신하였고 옛정 때문에 그러하였습니다.
가히 이 사람이 백관을 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后)가 허락하였다.
니금이 이에 <내담>에게 물어 말하기를
“형을 총상(寵相)으로 삼으면, 누가 천(蒨){품주}으로 가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담>이 말하기를
“너로 삼음이 가당하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니금이 일찍이 그 용양(龍陽)으로 삼았으니, 그런 까닭으로 희롱하였다.
니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형이 남색을 좋아하니, 내가 품주로 옳음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장척>을 <내담>에게 시집보내기에 이르렀다.
八月 行大嘉俳
宝凰大母薨 春秋百十歲 以太后禮葬之
初伐休后紫凰夢見大白鳥而抱之 阿達羅帝 召而幸之生大母 豊偉聰明好學不倦
帝命諸博士入 內訓之事多 聞一知十 猩公歎之曰 “聖人出矣”
盤花大母盡以其學授之 故多識古事 人稱知母十八爲阿達羅帝勸妻 寵傾後宮
常自退 而不與諸妃爭寵
紫凰曰 “人皆粉脂而媚 汝何素飾 而不媚乎”
大母曰 “不得已薦枕耳 豈爲媚乎” 亦不形於色 故帝不知其之 常命禱子
大母曰 “人言父女相合難子 禱之何益”
帝怒曰 “吾死可與伐休生子”
大母乃從容言 ‘父女不可相婚而生子 帝頻悟之’ 遂解當夕 月餘而帝沈悒不樂
召大母枕膝 而頻有痛吟 紫凰乃勸復受幸 帝大喜 成歡而娠 寵愛倍前
將立爲后 而大母力辭不受終 帝之世謝絶品秩 帝臨崩 遺命于伐休曰
“宝凰不爲 吾后 汝可后之”
大母聞之 欲自潔而殉之 紫凰知之 矯帝命携至伐休寢 强婚之
遂爲伐休帝權妻 而常自咎曰 “吾旣不能慰先今 不可媚新今”
伐休帝亦義之 不以嬪妾待之 尊之如內禮后 爲之立西宮 內禮在 東宮多私臣
大母所居冷然 不通外色 故大母望重帝 寵漸隆 內禮后乃生妬心 逼帝廢之
出居阿達羅陵門 亦自守如一 內禮聞之 以謁盤爲衛頭 而命强通之
謁盤見 大母不覺 望風下拜 不能犯之 內禮大怒 將流謁盤而罪之
謁盤乃泣告于大母 曰 “臣雖謫死荒之而有榮 但恐惡人再來主 不能保矣”
大母曰 “吾豈自貞累人 哉汝雖不犯而遠去 必有犯人 不如與汝相合 而早絶禍根”
遂與謁盤相通於是 內禮譖於伐休 曰 “汝以爲宝凰守一夫 而與謁盤縱淫”
伐休心之其非 而不能違 內禮乃奪權妻秩 伐休崩 又使謁休妻之
而使失其志 柰解心知 大母之賢 不敢違母后之旨
及內禮崩 至謁休宅 謝之復爲一品權妻 賜田宅奴婢 而戲 曰
“朕非好色 但欲得眞氣於母耳”
大母曰 “妾年已老 又爲賤骨之妻 不敢奉枕于天子也”
固辭不應 柰解帝乃慚而退 謁休責之曰
“臣妾有色供之義 汝何拒之甚乎”
大母曰 “吾性不好色 自今汝亦不可犯也”
大母身長八尺 垂手下膝 有絶人之力 謁休竟不能妻之 奈解帝益慕之 累幸于宅
或至夜深而不歸 戀念殆病 大母不得已受幸 曰 “宮中多美人 何愛老醜 如是乎”
奈解曰 “叔母之美 如天宮中少艾 何能及之哉”
大母歎曰 “天子無私女 妾安敢自守乎”
自是累被寵幸 生帝子女 而常以太后待之
大母曰 “嬪妾之禮自在 妾安敢當此”
謙恭自持 終帝之世 寵不衰焉 助賁仙今卽位 大母已七十六齡矣
尙玄髮而紅顔齒如編珠 見者莫不異之 玉帽太后之用事也 以大母爲援而當內禮諸女
故玉帽亦以大母爲仙姉 或稱母而尊之 鷄徒奉之爲神 朝廷重之
大母未嘗以私事干之 所爲之事 皆爲國護仙而已 阿達羅帝嘗以宝香賜之
他妃欲之 請以百布易之 大母許之 帝責之曰 “布易得 而香難求 何易之”
大母曰 “寒民無衣 布豈易得乎 香雖在彼 亦可以媚上 布若在我 可施寒民”
帝嘉之 加給百布 曰 “汝之媚我 以道不以香 此所謂宝香 不如人香者也”
平生所施 難訃 故士女如喪 其妣各立 其祠曰 ‘聖天祠’
8월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보황宝凰(217-326)> 대모(大母)가 110세로 죽어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처음에 <벌휴伐休(189-256)>의 후(后) <자황紫凰(190-266)>이
꿈속에서 커다란 흰 새를 보고 안았는데,
<아달라阿達羅(180-243)>제가 <자황>을 불러 행차하여 대모를 낳았다.
대모는 풍만하고 키가 크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책읽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아달라>제가 여러 박사(博士)들을 부르도록 하여
내훈(內訓)에 관한 많은 일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았다.
<성공猩公(184-252)>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나왔다.”라고 하였다.
<반화盤花(157-248)>대모가 그 학문을 모두 전수한 까닭으로
많은 고사(古事)를 알았다.
사람들이 지모(知母)라고 칭송하였다.
18살에 아달라제의 권처(權妻)가 되어,
총애는 후궁으로 기울어졌으나 항상 스스로 물러나
다른 여러 비(妃)들과 총애를 다투지 아니하였다.
<자황>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분지(粉脂)를 바르고 아첨을 하는데
너는 어찌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애교를 떨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부득이 천침(薦枕)할 뿐이고 어찌 아첨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또한 얼굴색을 드러내지 않은 연유로 왕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항상 자식을 임신하기를 빌도록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부녀가 상합(相合)하면 난자(難子){장해자}를 낳는다고 합니다.
자식을 비는 것이 어찌 유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벌휴>와 아들을 낳는 것은 가능한 일이냐?”라고 하였다.
대모가 이에 조용히 부녀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왕이 자못 깨달아서, 드디어 이날 저녁에 화를 풀었다.
한 달여를 왕이 근심에 빠져 즐거워하지 않았다.
대모를 불러 무릎을 베고, 몹시 괴로워서 끙끙 앓았다고 한다.
<자황>이 이에 다시 왕의 행차를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기쁨에 이르자 임신하여 총애가 전보다 배가 되었다.
장차 후(后)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대모가 있는 힘을 다하여 사양하고 끝까지 받지 아니하였다.
<아달라> 재위기간에는 품질(品秩)을 사절하였다.
<아달라>가 죽음에 임하여 <벌휴>에게 유명(遺命)을 남기며 말하기를
“<보황>을 나의 후(后)로 삼지 못하였으나, 너의 후(后)로 삼음은 가당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모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깨끗이 하고 따라 죽으려 하였다.
<자황>은 그것을 알고 왕명을 핑계되어 <벌휴伐休>의 침전에 끌고 가
강제로 혼인하게 하였다.
드디어 <벌휴>제의 권처가 되었는데, 항상 스스로의 허물을 말하기를
“나는 이미 선금(先今){아달라}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는데,
신금(新今){벌휴}에게 아첨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벌휴>제 또한 의로움이 있어,
빈첩(嬪妾)으로 대우하지 않고 <내례內禮>와 같이 존중하고,
후를 위하여 서궁(西宮)을 세웠다.
<내례>는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사신(私臣)이 많았고,
대모의 거처는 쓸쓸하고 외부의 남자와는 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대모는 망중(望重)이 있었으며, 왕이 총애가 점점 융성해졌다.
<내례>후가 이에 시새움하는 마음이 생겨 왕을 핍박하여 서궁을 폐하도록 하였다.
밖으로 <아달라>의 능문(陵門)에 나가 살면서도 또한 자수(自守)하기가 한결같았다.
<내례>가 그 소문을 듣고 <알반謁盤>을 위두(衛頭)로 삼아,
강제로 정을 통하도록 명하였다.
<알반謁盤>이 대모를 보고 망풍(望風)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아래에 이르렀으나 욕보이지는 못하였다.
<내례>가 크게 화를 내며 장차 <알반謁盤>을 유배를 보내어 벌주려 하였다.
<알반謁盤>이 이에 울면서 대모에게 고(告)하여 말하기를
“신이 귀양길 거친 땅에서 비록 죽게 되더라도 영광스러우나,
다만 악인(惡人)이 다시 門主에게 와서 지키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여러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정절을 지킬 수 있으며,
네가 비록 나를 범(犯)하지 않고 멀리 간다 하더라도
반드시 범인(犯人)이 있을 것이므로
너와 상합(相合)하여 일찍 화근(禍根)을 끊는 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알반謁盤>과 상통(相通)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례>는 <벌휴>에게 헐뜯어 말하기를
“너는 <보황>이 일부(一夫)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지만,
<알반謁盤>과 종음(縱淫)하였다.”라고 하였다.
<벌휴>는 마음속으로 그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스를 수 없었다.
<내례>가 이에 권처의 품계를 빼앗았다.
<벌휴>가 죽자 거듭하여 <알휴謁休>에게 시집보내어
일부(一夫)하려는 뜻을 상하게 하였다.
<내해奈解>가 마음속으로 대모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감히 모후(母后)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내례>가 죽음에 이르자 <알휴>댁에 이르러 사죄하고
다시 1품 권처로 삼고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를 내렸다.
희롱하며 말하기를
“짐(朕)은 호색(好色)하지 아니하다.
다만 대모의 진기(眞氣)를 얻고자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첩(妾)은 이미 늙었으며 또 천골(賤骨)의 처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천자(天子)를 잠자리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고사(固辭)하여 응하지 아니하였다.
<내해>제가 이에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알휴謁休>가 책망하며 말하기를
“신(臣)의 부인에게 색(色)이 있으니 받들어 모심이 의로움입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거부함이 심한가?”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나의 타고난 성품이 호색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너 역시 범(犯)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대모의 키는 8척이고, 손이 무릎까지 늘어졌고 절인지력(絶人之力)이 있었다.
<알휴謁休>가 결국 아내로 삼지 못했다.
<내해>제가 더욱 그리워하여 댁으로 누차로 행차하였고,
혹은 밤늦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병이 들어 위태하였다.
대모가 부득이 거동을 받아들이며 말하기를
“궁중에는 미인(美人)이 많은데 어찌하여 노추(老醜)를 사랑함이 이와 같은가?”
라고 하였다.
<내해>가 말하기를
“숙모(叔母)의 아름다움은 천궁(天宮)의 미녀와 같으니,
어찌 궁중의 미인들이 숙모의 미모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모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사녀(私女)를 둠이 없으니,
첩이 어찌 감히 스스로 정절을 지킬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누차로 왕의 총애를 입어,
왕의 자녀(子女)를 낳고 항상 태후(太后)의 예로 모시도록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빈첩의 예로 대우하여도 구속됨이 없는데,
첩에게 이런 대우를 함이 가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겸공(謙恭)하여 스스로를 끝까지 지켰다.
왕의 재위기간에는 총애가 쇠하지 않았다.
<조분助賁(254-329))>선금이 즉위하자 대모의 나이 이미 76세였다.
조분이 즉위한 해는 292년이다.
항상 검은 머리에 붉은 색 얼굴에 치아가 구슬을 엮어 놓은 것 같았고,
본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옥모玉帽(238-311)> 태후의 용사(用事)다.
대모에게 떠맡겨서 <내례>의 여러 딸들을 당해내었다.
그런 까닭에 <옥모> 역시 대모를 선자(仙姊)로 삼았고,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며 존중하였다.
계도(鷄徒)가 신(神)으로 모시고, 조정(朝廷)에서 중하게 생각하였다.
대모는 일찍이 사사로이 섬기는 일을 막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다같이 국호선(國護仙)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아달라>제가 일찍이 보향(宝香)을 주었는데,
다른 비(妃)가 보향을 갖고 싶어 베 100포와 바꾸자고 청하였다.
대모가 허락하였다.
왕이 꾸짖어 말하기를
“베(布)는 얻기 쉽지만 향수는 구하기 어렵다. 어찌하여 바꾸었느냐?”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한민(寒民)은 옷이 없지만 베를 얻기 어찌 쉽겠습니까?
향수가 비록 다른 비(妃)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왕(上)께 아첨할 것이며,
베가 만약 나에게 있다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아름답게 여기어 베 100포를 더하여 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아첨하는 것은 도(道)이지 향기가 아니다.
이와 같이 이른바 보향(宝香)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향기와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평생을 베풀며 산 바가 있고 계산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런 연유로 사녀(士女)들이 죽은 어머니의 장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였다.
각자 사당을 세워 성천사(聖天祠)라 불렀다.
<보황>은 아달라, 벌휴, 내해, 조분, 첨해, 미추왕의 재위기간에 살다간 대모이다.
十月 尼今親行祖廟嘗祭及述禮宮安宅
千氏生上女般氏
10월 니금이 조상의 사당에 친히 행차하여 일찍 제사를 지내고,
<술례述禮>궁에 안택(安宅)을 행하였다.
<천씨千氏>가 왕의 딸 <반씨般氏>를 낳았다.
미추왕 3년(A.D.327) 적시(赤豕=丁亥)
正月 添白伊伐飡 發狗稟主 發狗于老女也 年十九
時人以爲帝好艾 主者非好艾色也 不使知政
添白所非王寵孫也 其父添公述禮太后胞兄也
以所非之子 宜系軍統 不喜武事 常闕宿衛
或入宿衛而暗入權井 偸淫骨女 故累貶失權 其母白介宝白太子女也
添白亦如其父 踈放不禁 故朝廷置之度外
至是以述禮太后命入爲相 發狗之母介狗 添白從兄介公之女也
添白與介狗相通 又以發狗爲妻 初發狗以添白爲舞父
伺見其母與添白 相通 而問其爲何舞 添白笑 以爲要舞 發狗願學 遂相通
介狗妬而出之 發狗遂歸于添白 遂奪其好 而竟作稟主 故人嘲以要舞稟主
정월 <칠백柒白>을 이벌찬으로, <발구發狗>를 품주로 삼았다.
<발구發狗>는 <우로于老>의 딸로 나이 19세였다.
당시 사람들은 왕이 아름답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니,
품주는 아름답고 예쁜 여자는 아니어야 하고, 정치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칠백柒白>은 소비왕(所非王){이음}의 총손(寵孫)으로
그의 아버지 <칠공柒公>은 <술례述禮> 태후의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소비所非>의 아들에게는 당연히 군의 통솔권이 이어졌으나,
무사(武事)에 관한 일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항상 궐에서 숙위(宿衛)하였다.
혹은 숙위하는 벼슬에 오르면 은밀히 권정(權井)으로 들어와
골녀(骨女)들을 남몰래 음란하였다.
그런 연유로 누차 권세를 깎이거나 잃었다.
그의 어머니 <백개白介>는 <보백宝白> 태자의 딸이다.
<칠백柒白> 역시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어도
너그럽게 놓아주고 금(禁)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연유로 조정(朝廷)에서는 내버려 두고 상대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술례>태후의 명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다.
<발구發狗>의 어머니 <개구介狗>는, <칠백>의 종형(從兄)인 <개공介公>의 딸이다.
<칠백柒白>과 <개구介狗>가 상통(相通)하고, 또 <발구發狗>를 처로 삼았다.
처음에 <발구發狗>는 <칠백柒白>을 무부(舞父)로 삼았다.
그 어머니와 <칠백>이 상통(相通)하는 것을 엿보고 그것이 무슨 춤이냐고 물었다.
<칠백>이 웃으며 요무(要舞)라고 하였다.
<발구發狗>가 배우기를 원하여 상통하게 되었다.
<개구介狗>가 시새움하여 나가버렸고, <발구發狗>가 <칠백>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드디어 그 정분을 빼앗고, 결국엔 품주가 되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이 조롱하여 말하기를 요무품주(要舞稟主)라 하였다.
二月 阿爾兮生尼今女 于海宅 尼今洗之 名白明 賜神衣
后謂尼今 曰 “吾夢望海神 而生此女 汝可親祀而來”
尼今東巡至望海祀 其神于古花田 宴父老仙人而歸
2월 <아이혜阿爾兮>가 니금(尼今)의 딸을 해택(海宅)에서 낳아
니금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백명白明>이라 이름 짓고 신의(神衣)를 내렸다.
후(后)가 니금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꿈에 망해신(望海神)을 보고 이 여자아이를 낳았으니,
네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와야 함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동쪽을 순행하여 망해사(望海祀)에 이르렀다.
그 신(神)은 옛 화전(花田)에 있었는데,
부로(父老)와 선인(仙人)들에게 잔치를 벌이고 돌아왔다.
三月 行黃山 問高年及貧乏子 賑恤之 與伊西君熊相 會于境上
加耶女君河理智生宣威女宣失 命車理入貢 進奏行在 命賜紫衣
3월 황산(黃山)으로 가서 나이가 많은 자와 가난하고 궁핍한자를 물어
그들을 구휼하고, 이서군(伊西君) <웅상熊相>과 국경에서 만났다.
가야(加耶)의 여왕 <하리지河理智>가 <선위宣威>의 딸 <선실宣失>을 낳았다.
<차리車理>에게 입공(入貢)을 하여,
가야 여왕에게 나아가 안부를 묻도록 하고, 자의(紫衣)를 내리도록 하였다.
미추왕 3년
2월 왕이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황산에 행차하여
노인 및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七月 大烏夫伊伐飡 謁興稟主 謁興介狗母謁狗女也 爲發狗叔母 而媚於發狗而繼主
大烏夫大阿夫之胞弟也 爲其兄兵官累有功 謹厚能政事 故人稱大兄弟
7월 <대오부大烏夫>를 이벌찬으로, <알흥謁興>을 품주로 삼았다.
<알흥謁興>은 <개구介狗>의 어머니, <알구謁狗>의 딸이다.
<발구發狗>가 숙모로 삼았다.
아양 부리기를 좋아하여 <발구發狗>를 이어 품주가 되었다.
<대오부大烏夫>는 <대아부大阿夫>의 포제(胞弟)다.
그 형을 위하여 병관으로 여러 차례 공이 있었다.
근후(謹厚)하여 능히 정사(政事)를 살필 수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대형제(大兄弟)라 칭송하였다.
九月 行大場 述禮太后末昕太公代尼今 當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술례述禮> 태후와 <말흔末昕>태공(太公)이
니금(尼今)을 대신하여 대장을 맡아서 행하였다.
十月 行月歌
爵蘿葍祠奴五漬爲舍 知五漬善沈菜 有寵於述禮太后 故封之
阿召禮宮主薨 年六十六 尼今哀之 葬以后禮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라복사(蘿葍祠)의 노비 <오지五漬>에게 사지(舍知)의 작위를 내렸다.
<오지五漬>는 심채(沈菜)를 잘 만들어 <술례述禮> 태후에게 총애를 있었으며,
그러한 연유로 봉한 것이다.
<아소례阿召禮> 궁주가 춘추 66세에 죽었다.
니금(尼今)이 슬퍼하며, 후(后)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미추왕 4년(A.D.328) 황서(黃鼠=戊子)
正月 小興伊伐飡 秀皇稟主 秀乃助賁仙今女也 小興者謁興之異母兄
而其母小潛大烏夫之叔母也 皆爲尼今之股肱者也
以權妻登世爲末仇妻 千氏爲日骨妻 以良夫妻達禮爲勸妻 以代千氏 千氏與日骨相通
以達禮娠良夫女 而入宮受幸 登世生末仇女 故也
정월 <소흥小興>을 이벌찬으로 <수황秀皇>을 품주로 삼았다.
<수황秀皇>은 <조분助賁>선금(仙今)의 딸이고,
<소흥小興>은 <알흥謁興>의 다른 어머니의 오빠이다.
그 어머니 <소잠小潛>은 <대오부大烏夫>의 숙모(叔母)다.
모두 니금(尼今)에게 괴굉(股肱)이다.
권처(權妻) <등세登世>를 <말구末仇>의 처로,
권처 <천씨千氏>를 <일골日骨>의 처로 삼았다.
<양부良夫>의 처 <달례達禮>를 권처로 삼아,
<천씨>를 대신하게 한 것은 <천씨>가 <일골>과 상통하였기 때문이다.
<달례>는 <양부>의 딸을 임신함에 따라서 입궁하여 행차를 받았다.
<등세>는 말구의 딸을 낳은 까닭이다.
三月 以沾解女茜弘爲權妻 代登世 年十六 美而聰敏 寵傾後宮 擬於羘尺
3월 <첨해沾解>의 딸 <천홍茜弘>을 권처(權妻)로 삼아,
<등세登世>를 대신하게 하였다.
나이 16세로 아름답고 총민(聰敏)하여
총애가 후궁(後宮)에까지 기울어졌는데 <장척羘尺>과 비교되었다.
五月 行花林祭
5월 화림제(花林祭)를 행하였다.
七月 雄權伊伐飡 碧弘稟主 碧弘茜弘之母也 有寵有沾解帝及尼今 無異權妻
7월 <웅권雄權>을 이벌찬으로 <벽홍碧弘>을 품주로 삼았다.
<벽홍>은 <천홍茜弘>의 어머니이다.
첨해제(沾解帝)와 니금(尼今)에게 총애가 있어 권처(權妻)와 다름이 없었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미추왕 5년(A.D.329) 토우(土牛=己丑)
正月 羊己伊伐飡 索宝稟主 索宝信宗女也
以醫術得寵於述禮太后 能以玉石代爲齒牙 且善陰宮 羊己能知五味 久掌天廚
정월 <양기羊己>를 이벌찬으로, <색보索宝>를 품주로 삼았다.
<색보索宝>는 <신종信宗>의 딸이다.
의술로 <술례述禮> 태후의 총애를 얻었으며,
능히 옥석(玉石)으로 치아를 대신하게 하고 또 음궁(陰宮)의 일을 잘하였다.
<양기羊己>는 오미(五味)에 능하여 오랫동안 궁중의 수라간의 일을 맡았다.
二月 助賁仙今崩 仙今好神仙不屑 屑作人事
居海宅桃山二十年 所與接引者 皆羽客 而已竟得道 而羽化
海老望見 尼今與寵妃綃姬 呼雙魚
駕之而升天 所植桃杖處 花開杖頭 故居 民奉爲杖山祠
葬衣帶金冠藥物等 曰月白陵
仙徒作歌而慕之 者千數 後來 帝文郞作詩讚之 曰
月白仙皇 何處去 雙魚不返 杖花飛
2월 조분선금(助賁仙今)이 죽었다.
선금(仙今)은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인사(人事)에 관하여 마음에 두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해택(海宅)과 도산(桃山)에서 20년을 살았으며,
가까이서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우객(羽客)이었을 뿐이다.
결국 도(道)를 얻어 우화(羽化)하였다.
해노(海老)가 멀리서 바라보고
니금(尼今)과 총비(寵妃) 초희(綃姬)를 쌍어(雙魚)라고 불렀다.
임금의 수레를 타고 승천(升天)한 곳에,
복숭아 지팡이를 심었는데 지팡이의 머리에서 꽃이 피었다.
그런 연유로 조분이 살았던 곳을 백성들이 받들어 장산사(杖山祠)로 삼았다.
의대(衣帶), 금관(金冠), 약물(藥物) 등을 껴묻고, 월백릉(月白陵)이라 불렀다.
선도(仙徒)들이 노래를 짓고, 추모하여 모인 자가 천여 명이었다.
훗날 <제문帝文>랑이 시를 지어 찬하기를
“월백선황(月白仙皇)은 어디로 갔느냐.
쌍어(雙魚)는 돌아오지 않고 지팡이엔 꽃만 날리네.”라고 하였다.
七月 冬門伊伐飡 螺月稟主 冬門者冬皇之胞兄也 螺月螺黃之女也
母美而無骨品 故久不爵之
尼今幸冬皇宅 見螺月有秋水之色 命薦枕 曰
“此女淸淨如玉 可以洗朕之肥濁” 遂入宮中 寵隆
7월 <동문冬門>을 이벌찬으로, <라월螺月>을 품주로 삼았다.
<동문冬門>은 <동황冬皇>의 포형(胞兄)이다.
<라월螺月>은 <라황螺黃>의 딸이다.
어머니는 아름다웠으나 골품(骨品)이 없으므로 오랫동안 작위가 없었다.
니금이 <동황冬皇>댁에 행차하여 <라월螺月>이 추수(秋水)의 색(色)이 있음을 보고
천침(薦枕)하기를 명하며 말하기를
“이 여자가 옥처럼 깨끗하고 맑으니,
가히 짐의 기름진 더러움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여 총애가 융성하게 되었다.
八月 夫余來侵 烽山城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 出擊破之
乃加直宣爵一吉飡 而賞其壯士 有差
命元生于老子訖解 賜米衣
山帽生木公子山公 千氏日骨子日千 命乳訖解
8월 부여(夫余)가 봉산성(烽山城)을 침입하여,
성주 <직선直宣>이 장사(壯士) 200명을 거느리고 출격(出擊)하여 깨뜨렸다.
이에 <직선直宣>의 작위를 더하여 일길찬(一吉飡)으로 삼고,
그 장사들에게 상을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미추왕 5년
8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출격하였다.
적들은 패주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九月 行大場
命元生于老子訖解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명원命元>이 <우로老子>의 아들 <흘해訖解>를 낳아 쌀과 옷을 내렸다.
우로(명원) - 흘해(329-392, 16대왕 재위 370-376)
<산모山帽>가 <목공木公>의 아들 <산공山公>을 낳았고,
<천씨千氏>가 <일골日骨>의 아들 <일천日千>을 낳아,
<흘해>에게 젖을 먹이도록 명하였다.
十一月 伊西國太子宝相與乞淑妃玄雲相通而生女玄宝 乞淑怒欲罪之
阿后笑而不許 曰 “汝在于我 彼焉得無私乎 聖人無妬 無毒腹兒”
時后已娠乞淑子 故不許乞淑作惡蘗 以禍腹子也
11월 이서(伊西)국 태자 <보상宝相>이
<걸숙乞淑>의 비(妃) <현운玄雲>과 상통하여 딸 <현보玄宝>를 낳았다.
<걸숙乞淑>이 노하여 벌주려하였다.
아후(阿后)가 웃으며 허락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너는 나에게 있는데, 저 사람들에게서 사사로이 얻을게 무엇이냐.
성인(聖人)은 시새움하지 아니하며 뱃속의 아이에게 독함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 후(后)는 이미 <걸숙乞淑>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까닭에 <걸숙乞淑>이 악의 그루터기를 키우지 않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로써 뱃속의 아기에게 재앙이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미추왕 6년(A.D.330) 백호(白虎=庚寅)
正月 板太伊伐飡 元虹稟主 板太母太旺宝白太子庶女也
板太同年 故太旺乳尼今 板太自幼爲尼今之臣 元虹本尼今寵妾 而後賜板太者也
元虹之胞兄江虹 亦以尼今寵居兵官重地
정월 <판태板太>를 이벌찬으로 <원홍元虹>을 품주로 삼았다.
<판태板太>의 어머니 <태왕太旺>은 <보백宝白> 태자의 서녀(庶女)다.
<판태板太>는 니금과 같은 해에 태어난 까닭에
<태왕太旺>이 니금(尼今)에게 젖을 먹였다.
<판태板太>는 어렸을 때부터 니금의 신하였으며,
<원홍元虹>은 본디 니금의 총첩(寵妾)인데, 후에 <판태板太>에게 하사되었다.
<원홍元虹>의 포형(胞兄) <강홍江虹> 또한
니금의 총애가 있는 병관(兵官)으로 중시되었다.
二月 行仇道王大祭及助賁帝周祭 螺月生帝女螺玉
2월 <구도仇道>왕의 대제(大祭)를 지내고, 조분제(助賁帝)의 1주기 제사를 지냈다.
<라월螺月>이 왕의 딸 <라옥螺玉>을 낳았다.
四月 行壤井祭
阿后生乞叔子基臨 尼今洗之 茜弘生帝子茜公
4월 양정제(壤井祭)를 지냈다.
아후(阿后)가 <걸숙乞叔>의 아들 <기림基臨>을 낳아, 니금(尼今)이 아기를 씻겼다.
<천홍茜弘>이 왕의 아들 <천공茜公>을 낳았다.
걸숙(아이혜) - 기림(330-372 15대왕 재위364-369)
七月 馬潛伊伐飡 謁興稟主 馬潛者大烏夫之從弟也 謁興通之而再蒨
江虹自北歸奏 曰 “大趙皇帝石勒四乳 而重瞳一夕御十二姬
乙弗以其女獻之 將謨燕 燕若制之 則南下先滅夫余 且及于我云”
尼今曰 “愛民而敬神 國自安矣 乙弗自違于燕 而取敗 豈易興乎”
7월 <마잠馬潛>을 이벌찬으로 <알흥謁興>을 품주로 삼았다.
<마잠馬潛>은 <대오부大烏夫>의 종제(從弟)다.
<알흥謁興>이 <마잠馬潛>과 통하여 다시 품주가 되었다.
<강홍江虹>이 북에서 돌아와 여쭈어 말하기를
“대조(大趙){後趙} 황제 <석륵(石勒)(274-333)>이 사유(四乳)와 중동(重瞳)이며,
하룻밤에 12명의 첩을 거느립니다.
<을불乙弗>이 그의 딸을 바치고, 장차 後趙와 연(燕)을 모의하여,
연(燕)이 만약 억제되면 곧 남하하여
부여(夫余)를 먼저 멸하고 또 우리를 멸하겠다고 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니금(尼今)이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고 신(神)을 존경하면 나라가 스스로 편안해질 것이오.
<을불乙弗> 스스로 연과 그르치므로 깨뜨림을 당할 것이다.
어찌 흥하기가 쉽겠는가?”라고 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加耶婿君宣威殂 以其庶弟守克 請爲繼夫 許之 守克孝道子也 其母奈解帝女也
許洗綃童女採藻兒婚嫁如常人 助賁帝遺命也
綃宮之法貞淨 故藻兒綃女多相思而赴水氷爲之碧 綃姬請許 至是始許
碧水乃淸男女 立綃姬祠而報恩 自是綃宮之女 或人宮中 或爲公卿之妾
8월 대가배(行大嘉)를 행하였다.
가야(加耶)왕의 남편 <선위宣威>가 죽어,
서제(庶弟) <수극守克>을 계부(繼夫)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수극守克>은 <효도孝道>의 아들로, 그 어머니는 내해제(奈解帝)의 딸이다.
깨끗한 초동녀(綃童女)와 조아(藻兒)를 골라
보통사람과 같이 혼인하기를 허락하였는데, 조분제(助賁帝)의 유명(遺命)때문이다.
초궁(綃宮)의 법은 정정(貞淨)하여,
그런 연유로 조아(藻兒)와 초녀(綃女)가 상사(相思)함이 많아,
수빙(水氷)으로 나아갔다.
깨끗한 초희(綃姬)가 혼인을 허락하기를 청하여, 이 때에 이르러 처음 허락한 것이다.
벽수(碧水)란 깨끗한 남녀를 말하고, 초희사(綃姬祠)를 세워 은혜에 보답하였다.
이 때부터 초궁(綃宮)의 여자들은 혹은 궁인이 되고, 공경(公卿)의 첩이 되었다.
미추왕 7년(A.D.331) 금토(金兎=辛卯)
正月 智權伊伐飡 孫忠稟主 智權雄權之胞弟也 孫忠碩忠女也 母孫蘭孫光胞妹也
尼今以孫光之仙嗣 尊奉孫氏乎孫蘭 以叔母 其子女皆以尼今爲兄弟 干求甚多 而未嘗拒
孫忠性溫 良精於繡花 常作袞冕 有功於錦房 而不與衆兄弟 干求要進 故尼今竊愛之 曰
“蘭兄弟中 唯汝無慾” 至是最先登相
정월 <지권智權>을 이벌찬으로 <손충孫忠>을 품주로 삼았다.
<지권智權>은 <웅권雄權>의 포제(胞弟)이고, <손충孫忠>은 <석충碩忠>의 딸이다.
<손충孫忠>의 어머니 <손란孫蘭>은 <손광孫光>의 포매(胞妹)다.
니금(尼今)이 <손광孫光>의 선도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손씨(孫氏)를 존중하여 받들기를 <손란孫蘭>이라 부르고 숙모(叔母)로 삼았다.
그 자녀들은 모두 니금의 형제로 삼았다.
간구(干求)함이 심히 많았는데, 일찍이 막지 아니하였다.
<손충孫忠>은 성품이 온순하고 착하며, 수화(繡花)함에 정밀하였다.
항상 곤면(袞冕)을 지어 금방(錦房)에 공이 있었다.
무리의 형제들처럼 청탁하여 요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니금이 남몰래 사랑하여 말하기를
“<손란孫蘭>의 형제 중에 오직 너만이 욕심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가장 먼저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二月 乙弗殂 子斯由立 是爲釗也
2월 <을불乙弗>이 죽어, 아들 <사유斯由>{고국원왕}가 섰다.
이분이 쇠(釗)다.
四月 倭使至鶴浦 請與元上太公相見 不肯入朝
先是于老戱 謂倭使曰 “早晩虜爾王爲爨奴婢”
皆元上拂于尼今及阿后 視王后如奴婢 而輕侮之心
偶發於倭使 倭使歸報其王 王怒命斬其使 更以他使 來求見浦 吏知有凶計 而告勿見
于老曰 “吾以一國之太公 豈畏小虜”
遂單騎往之 倭責其侮辱 于老曰 “戱言也”
倭不信之 焚之而去 命舟師 迢之不得 命厚葬之 爵其幼子訖解
或曰 于老勇而善將兵 然高尤好自矜 不得衆心
故悒 悒有反志 尼今之臣與倭使相通 而密謀制之云 恐有內訌 而外伐也
尼今親吊太公而慰命元 曰 “太公之子 吾當子之 太公之妻 吾當妻之”
命元泣曰 “自春不雨 中外行禱 妾與太公 將禱于山 夢見大火 而疑之 豈有如此匃事乎”
尼今曰 “皆朕不德之致也”
乃會群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曰
“政刑失則 禱雨無益 今太公遭變 天久不雨 寡人與爾百官 當受其罰”
尼今遂自撻 阿后聞之 親臨止之 命末仇康檍日骨乞淑連音
出五道暗祭 理方得失 問民疾苦 時阿后與乞淑嬖臣好山浸淫
連音妻蘭石與后嬖裙白歡好如夫婦 良夫曰 “上好淫下 則天不雨”
尼今欲自責者使后欲反省 而反命乞淑連音等出外 而自便縱淫 識者歎之
4월 왜의 사신이 학포(鶴浦)에 이르러
원상태공(元上太公){우로}과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여
입조(入朝)하는 것을 수긍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우로于老>가 희롱하여, 왜의 사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조만간 너희 왕을 사로잡아 찬노비(爨奴婢)로 삼겠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원상(元上){우로}이 니금(尼今){미추}과 아후(阿后)를 멸시한 것으로,
왕후(王后){미추와 아이혜}를 노비와 같다고 본 것이니 경모(輕侮)하는 마음이 있었다.
뜻밖에 왜의 사신에게 전달되었고,
왜의 사신이 돌아가 그 왕에게 가서 보고하니,
왜왕이 노하여 명으로 그 사신을 베고,
다른 사신으로 바꾸어 포구에서 와서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관리(吏)가 흉계가 있음을 알고 만나지 말기를 고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나는 일국의 태공(太公)이다.
어찌 작은 오랑캐 따위를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결국엔 단기(單騎)로 가서, 왜(倭)가 그 모욕(侮辱)함을 꾸짖으니,
<우로>가 “농담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왜의 사신이 믿지 아니하여 불을 지르고 가버렸다.
주사(舟師)에게 추격하도록 하였으나 도달하지 못하였다.
<우로>를 후하게 장례를 지내도록 명하고,
<우로>의 어린 아들 <흘해訖解>에게 작위를 내렸다.
혹은 <우로>는 용감하고 장병(將兵)을 다룸에 뛰어난 연유로
걸핏하면 자긍(自矜)함이 더욱 높았다.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한 연유로 마음이 몹시 불쾌하여 반란하려는 뜻이 있었다.
니금의 신하와 왜의 사신이 서로 통하여 은밀히 제어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고,
내홍(內訌)을 염려하여 외세로 친 것이라 말한다.
니금이 태공의 상(喪)을 친히 조문하고 <명원命元>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태공의 아들은 마땅히 나의 아들이고, 태공의 처는 마땅히 나의 처이다.”라고 하였다.
<명원>이 울면서 말하기를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나라 안팎에서 기도하고,
첩과 태공이 또한 산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꿈에 큰 불이 나서 이를 의심하였습니다.
어찌 이와 같이 흉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모두 짐의 덕이 없음으로 부른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이게 하여
친히 정형(政刑)의 득실(得失)을 물어 말하기를
“정형(政刑)의 잘못이 있으면 비를 기도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지금 태공이 변란을 맞아 하늘에서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니,
과인(寡人)과 너희 백관(百官)들은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니금이 드디어 스스로 매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후가 그 소리를 듣고, 친히 임하여 매질을 그치도록 하였다.
<말구末仇>, <강억康檍>, <일골日骨>, <걸숙乞淑>, <연음連音>에게
5도를 암찰(暗察)하게 하여, 리방(理方)의 잘잘못과,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당시 <아후>와 <걸숙>의 폐신(嬖臣) <호산好山>이 음란함에 빠졌고,
<연음連音>의 처 <난석蘭石>과 후(后)의 사랑을 받는 <군백裙白>이
좋아하고 사랑하여 부부처럼 지냈다.
<양부良夫>가 말하기를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음란하기를 좋아하면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자책(自責)하고자 한 것은 후(后)로 하여금 반성(反省)하게 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걸숙乞淑>과 <연음連音>에게 밖으로 나가도록 명하여
자기 편안대로 음란함을 즐겼다.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탄식하였다.
미추왕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놓고 왕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으며,
또한 사신 다섯 명을 파견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의 아들인 <석우로>는 동생인 <아이혜>왕후에 의하여
왕위를 김씨인 <미추>에게 내어주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 한 것이다.
신라 여왕이 남왕의 권력을 초월하는 최정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七月 大萱伊伐飡 長禮稟主 長禮尼今之胞姉也 大萱長禮之從弟也 長禮愛之爲夫 不二夫
大萱亦勤厚不二色 時人稱之 大萱母學氏奈解女也
大萱之家世守文章 大萱之文爲當世之魁 凡祈禱褒功 吉匃之文 皆用大萱文
時有玉人 蚊足者善圖書 大萱愛之 皆令蚊足彫之 故得大萱文蚊足書
則世以爲寶 其文鄕文 而孫光稱之 曰 “吾所不及 眞吾父寵孫也”
皆孫光之父眞忠善此文故也 家居萬然 無意於朝廷 而尼今迎之 曰 “非吾兄 無以淸人慾”
長禮布裙蓬首 不行蒨 禮曰 “吾弟爲尼今 吾旣榮矣 何必行蒨乎”
尼今亦知其心 而不奪其節 大萱責之 曰 “君臣之禮 雖兄弟 不可廢”
長禮乃設蒨席及其當夕以其女勝華代入之 曰 “尼今好艾 何必我乎” 尼今笑而許之
7월 <대훤大萱>을 이벌찬으로 <장례長禮>를 품주로 삼았다.
<장례長禮>는 니금(尼今)의 포자(胞姊)다.
<대훤大萱>은 <장례長禮>의 종제(從弟)이다.
<장례長禮>가 <대훤大萱>을 사랑하여 남편으로 삼고 다른 남편을 두지 않았다.
<대훤大萱> 역시 부지런하고 온후하며 다른 여자를 두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대훤大萱>의 어머니 <학씨學氏>는 <내해奈解>의 딸이다.
<대훤大萱>의 집안은 세세대로 문장(文章)을 지켜왔는데,
<대훤大萱>의 글은 당세의 으뜸으로 삼았다.
무릇 기도하거나 공을 기리거나 길흉(吉凶)을 점치는 문장은
모두 <대훤大萱>의 글을 썼다.
당시 옥인(玉人)중에 <문족蚊足>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도서(圖書)에 능하여 <대훤大萱>이 그를 사랑하였다.
모두 <문족蚊足>으로 하여금 새기게 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대훤大萱>의 문장과 <문족蚊足>의 글씨를 얻으면
곧 세세대로 보물로 삼았는데 그 글은 향문(鄕文)으로 작성되었다.
<손광孫光>이 칭찬하며 말하기를
“나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 진짜 나의 아버지의 총손(寵孫)이로구나!”
라고 하였다.
<손광孫光>의 아버지 <진충眞忠>은 이런 문장에 능통하였던 까닭이다.
가정에서는 많이 그러하지만 조정(朝廷)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니금이 그들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나의 형이 아니면 인간의 욕심이 깨끗해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례長禮>가 치마를 벌리고 쑥대머리(蓬首)를 하며
천례(蒨禮){품주에 오르는 예식}를 행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나의 동생이 니금이고,
나는 이미 영화로운데 하필이면 품주가 되라고 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니금 또한 그 마음을 알고 그 절개를 잃지 않게 하였다.
<대훤大萱>이 그것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예절인데 비록 형제라고 할지라도 폐(廢)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였다.
<장례長禮>가 이에 품주의 자리(蒨席)에 앉고
그 날 밤의 일은 그녀의 딸 <승화勝華>에게 대신하여 들어가도록 하며 말하기를
“니금은 미녀를 좋아하는데, 하필 나인가!”라고 하였다.
니금이 웃으며 <승화勝華>로 대신 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九月 命宝相 歸伊西
9월 <보상宝相>에게 이서(伊西)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미추왕 8년(A.D.332) 흑룡(黑龍=壬辰)
正月 蘭忠伊伐飡 黃禮稟主 蘭忠孫忠胞兄也 黃禮儒禮之胞姉也
黃禮之父 孫億之嬖奴黃牛也 黃禮明敏善御人 得蒨主體
정월 <난충蘭忠>을 이벌찬으로, <황례黃禮>를 품주로 삼았다.
<난충蘭忠>은 <손충孫忠>의 포형(胞兄)이다.
<황례黃禮>는 <유례儒禮>의 포자(胞姊)다.
<황례黃禮>의 아버지는 <손억孫億>의 폐노(嬖奴) <황우黃牛>다.
<황례黃禮>는 명민(明敏)하며 사람을 거느림에 능하여 품주를 얻는 주체가 되었다.
三月 始置五關八停 以備防密
3월 처음으로 5관(關)과 8정(停)을 설치하여 은밀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七月 乞况伊伐飡 奈仁稟主 乞况乞淑之兄也 (奈仁누락)尼今之胞兄奈食太子之女也
自幼長於述禮太后 而太后寵 有力於中 索宝翊宗 皆其同胞也
勝華以奈仁之意爲翊宗之妻 至是有寵於尼今 出入政堂 如已居
人嘲之曰 “半蒨二主 亦一主也”
7월 <걸황乞况>을 이벌찬으로 <내인奈仁>을 품주로 삼았다.
<걸황乞况>은 <걸숙乞淑>의 형이고,
<내인奈仁>은 니금(尼今)의 같은 어머니의 형 <내식奈食> 태자의 딸이다.
어렸을 때부터 <술례述禮>태후에게 자랐기 때문에 태후의 총애가 있었고,
그 중에서 세력이 있었다.
<색보索宝>와 <익종翊宗>은 모두 <내인奈仁>의 같은 어머니의 형제이다.
<승화勝華>는 <내인奈仁>의 뜻으로 <익송翊宋>의 처가 되었는데,
이 때에 니금의 총애가 있어 정당(政堂)에 출입하여 그곳에 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조롱하며 말하기를
“반쪽짜리 품주가 2사람이지만, 품주는 또한 1사람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미추왕 9년(A.D.333) 수사(水巳=癸巳)
正月 孫宗伊伐飡 冬皇稟主 孫宗者孫忠之異父胞兄也 冬皇三蒨
阿后生好山子好臨 尼今洗之
置左右辨頭於理方 五道暗祭 使奏 ‘宜置辯頭 巡覈地方得失’ 故置之
伊西君熊相禪位于宝相 自爲仙君
정월 <손종孫宗>을 이벌찬으로 <동황冬皇>을 품주로 삼았다.
<손종孫宗>은 <손충孫忠>과 다른 아버지이고,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동황冬皇>은 세 번 품주가 되었다.
아후(阿后)가 <호산好山>의 아들 <호임好臨>을 낳았다. 니금(尼今)이 아기를 씻겼다.
리방(理方)에 좌우변두(左右辨頭)를 두었다.
오도암찰사(五道暗察使)가 돌아다니며 지방의 잘잘못을 밝히는
변두(辯頭)를 설치함이 마땅하다고 아뢰어, 그런 연유로 설치한 것이다.
이서군(伊西君) <웅상熊相>이 <보상宝相>에게 선위(禪位)를 하고
스스로 선군(仙君)이 되었다.
二月 斯由如卒本廟 三月 還 往還恤民
2월 사유(斯由){고국원왕}와 같이 졸본묘(卒本廟)에 갔다가 3월에 돌아왔다.
갔다가 돌아오며 백성을 구휼하였다.
<미추>가 고구려 졸본에 있는 배다른 누나인 <옥모> 성모사(聖母祠)에 갔던 것이다.
五月 上幸嘉凰宅 宴骨女
5월 왕이 <가황嘉凰>댁을 행차하여 골녀(骨女)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七月 召億伊伐飡 邊康稟主 召億孫光之孫 黃禮胞兄也 邊康邊骨女也
其母康安爲末昕公所嬖 邊康亦末昕公所愛 故尼今重之
7월 <소억召億>을 이벌찬으로 <변강邊康>을 품주로 삼았다.
<소억召億>은 손광(孫光)의 손자로, <황례黃禮>의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변강邊康>은 <변골邊骨>의 딸로 그 어머니 <강안康安>은
<말흔末昕>공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변강邊康> 역시 <말흔末昕>공이 사랑하는 바가 있어 니금(尼今)이 중히 여겼다.
미추왕 10년(A.D.334) 목마(木馬=甲午)
正月 乞淑伊伐飡 玄雲稟主
정월 <걸숙乞淑>을 이벌찬으로, <현운玄雲>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康登卒 其妻亥骨歸其妹薛骨夫貝宣 康登弟康同爭之
奪其子女奴婢 而强囚亥骨 而荒淫之 貝宣訴于理方 發其惡 流康同于伊西
2월 <강등康登>이 죽어 그의 처 <해골亥骨>이
여동생 <설골薛骨>의 남편 <패선貝宣>에게 재가하였다.
<강등康登>의 동생 <강동康同>이 <패선貝宣>과 다투었다.
<해골亥骨>의 자녀와 노비를 빼앗고,
<해골亥骨>을 강제로 가두어 황음(荒淫)을 하였다.
<패선貝宣>이 이방(理方)에 소청하여,
그 악행을 밝히어 <강동康同>을 이서(伊西)로 유배를 보냈다.
五月 行花林祭
5월 화림제(花林祭)를 행하였다.
六月 行流頭 于蚊川
6월 문천(蚊川)에서 유두(流頭)를 행하였다.
七月 乃欽伊伐飡 登陽稟主 登陽助賁女也 母冬禮也 乃欽乃白之子也
置螺人典 阿后好珍奇 多造俑物及宝案用螺花蝶甚多 乃說螺人典養其才
7월 <내흠乃欽>을 이벌찬으로 <등양登陽>을 품주로 삼았다.
<등양登陽>은 조분(助賁)의 딸이다.
어머니는 <동례冬禮>이다.
<내흠乃欽>은 <내백乃白>의 아들이다.
나인전(螺人典)을 설치하였다.
아후(阿后)가 진기(珍奇)한 것을 좋아하여,
용물(佣物)과 보안(宝案)을 만듦에
소라껍질로 만든 꽃과 나비문양을 사용함이 심히 많았다.
이에 라인전(螺人典)을 세워 그 재주를 가진 자를 길렀다.
八月 行嘉俳
星杞生帝子杞公
句麗增築平壤城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성기星杞>가 왕의 아들 <기공杞公>을 낳았다.
고구려가 평양성(平壤城)을 늘려 쌓았다.
고국원제4년{AD334}갑오,
2월에 순시를 시작하여 <동해>에 이르렀다가 5월에 환도하였다.
추8월에 <평양성>을 늘려짓고, <환도>에 새 궁전을 지었다.
<남당유고>
이때 증축한 평양성은 동천대제 20년(246년) 관구검의 난으로
247년 환도성(今 조양)에서 천도한 평양성(今 요양)으로
427년 장수대제가 평양성(今 노룡)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다.
미추왕 11년(A.D.335) 청양(靑羊=乙未)
正月 捺公伊伐飡 末禮稟主 末禮尼今之胞妹 太公末昕女也
句麗築國北新城
정월 <날공捺公>을 이벌찬으로 <말례末禮>를 품주로 삼았다.
<말례末禮>는 니금(尼今)의 포매(胞妹)이고, 태공 <말흔末昕>의 딸이다.
고구려가 나라의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二月 下令曰 “農爲民本 務在其時 勿以其時役 官工藝之價太高 不肯就農徒 尙浮虛
非好兆也” 害農防桑之事 一切除之 非官典則不敢私工
2월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농사는 백성의 근본으로 힘써 일하여야 할 때가 있으니,
그 시기에는 부역을 시키지 말 것이며,
관(官) 공예(工藝)의 대가가 매우 높아,
농사일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이 오히려 허망함에 들떠 있으니
좋지 않는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농사를 방해하거나 양잠을 막는 일은 일절 금지하였다.
관전(官典)이 아니면 사공(私工)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七月 旼達伊伐飡 淡洪稟主 淡洪以馬淡之女 善於治腫 出入宮中 有寵於阿后
諸王女多得其效 旼達継達之子 尼今寵臣也 美而善阿諛
入孫光門 事尼今及良夫 如女事夫 好淨潔 善造像刻 尼今像如其眞 置之座上 朝夕拜之
阿后命入其像于內 而驚其才 命刻后像 殆不及后 不悅曰 “汝何善像尼今 不善于朕乎”
旼達曰 “尼今與臣同門 熟知其像故也 若天后則龍眼至嚴 臣不敢仰視 故未詳其像故也”
阿后乃命 入居宮中 察其平生 凡三年而造尼今抱后像 妙入神手刻以玉石 后大悅
命爲相而不能於政 其妻淡洪盡決之 旼達拱手而己 其子洪達責之 曰
“使我爲相 猶勝於父” 旼達笑曰 “父子一身 汝何不代爲之乎”
又與洪達其鹿 淡洪 相戱 如弟兄娛 曰 “怡"
然自好 曰 “一草一木而 未嘗有根 末只是一氣相通 而已一家 如一草 何通而不流乎”
北鄙霜雹害穀草 句麗亦然
7월 <민달旼達>을 이벌찬으로 <담홍淡洪>을 품주로 삼았다.
<담홍淡洪>은 <마담馬淡>의 딸이고 종기를 치료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궁중에 출입하여 아후(阿后)에게 총애를 얻었다.
여러 왕녀들이 그 효험을 보았다.
<민달旼達>은 <계달継達>의 아들이고 니금(尼今)의 총애를 받는 신하다.
잘생기고 아유(阿誘)를 잘하였다.
<손광孫光>의 문하에 들어가
니금과 <양부良夫>를 섬기기를 여자가 남편으로 섬기듯 하였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형상을 조각하기를 잘하였다.
니금의 형상은 진짜 같았다.
형상을 좌상(座上)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절하였다.
아후의 명으로 궁 안으로 그 형상을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고 그 재주에 경탄하였다.
후(后)의 형상을 조각하도록 명하였는데, 거의 미치지 못하였다.
후(后)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너는 어찌 니금의 형상은 뛰어나지만, 짐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이냐?”라고 물었다.
<민달旼達>이 말하기를
“니금과 신(臣)은 동문(同門)이어서 그 모습을 숙지(熟知)한 까닭입니다.
천후(天后)의 경우에는 용안(龍顔)이 지엄(至嚴)하여
신이 두려워서 쳐다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이 자세하지 않는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아후가 이에 명으로 궁중으로 들어와 살게 하여 평소의 생활을 살피도록 하였다.
무릇 3년이 지나 니금이 후(后)를 안고 있는 상(像)을 조각하였는데,
정묘한 신수(神手)의 경지에 들어 옥석(玉石)에 새기었다.
후가 크게 기뻐하여 명으로 재상으로 삼았으나 정치에 능하지 못하였다.
그의 처 <담홍淡洪>이 정사를 모두 결정하고,
<민달旼達>은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아들 <홍달洪達>이 책망하여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재상에 되게 하면 아버지 보다 오히려 낫다.”라고 하였다.
<민달旼達>이 웃으며 말하기를
“부자(父子)는 한 몸인데 네가 어찌 대신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또 <홍달洪達>과 그 암사슴 <담홍淡洪>이 서로 희롱하여
제형(弟兄)과 같이 장난치며 말하기를
“기쁘고 좋도다.”라고 하고,
스스로 곧잘 말하기를
“일초일목(一草一木)이 일찍이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지러운 세상에 다만 이와 같이 일기(一氣)가 상통(相通)하였을 뿐인데,
한 가족이 한포기 풀과 같으니, 어떻게 알려야 유배를 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북쪽의 국경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과 풀을 해쳤다.
고구려 역시 그러하였다.
十一月 夫余入寇 敗還
11월 부여(夫余)가 들어와 노략질하고 패하여 물러났다.
미추왕 12년(A.D.336) 화원(火猿=丙申)
正月 江虹伊伐飡 遂臣稟主 遂臣者裙白之妹也 以阿后寵入宮爲寢婢 累加秩品 遂之蒨位
江虹者臼虹之子也 末昕之嬖臣也
정월 <강홍江虹>을 이벌찬으로, <수신遂臣>을 품주로 삼았다.
<수신遂臣>은 <군백裙白>의 여동생으로
아후(阿后)의 총애로 궁에 들어와 침비(寢婢)가 되었고,
누차로 질품(秩品)을 더하더니 드디어 천위(蒨位)에 이르렀다.
<강홍江虹>은 <구홍臼虹>의 아들이고, <말흔末昕>의 폐신(嬖臣)이다.
三月 分署五人職 布于兵官有差 弓人石人玉人屬金人 草人屬木人 皮人廚人屬火人
染人螺人屬水人 尾人磚人屬土人
遊花閑徒 山尺水尺海尺島尺亦皆署于兵官 序以級次 獎其工程
句麗遣其臣于莘于晉貢物 請伐燕 時有大星流其西北 故恐其侵入也
3월 분서(分署)하여 5인의 관직을 만들고, 병관(兵官)에 두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궁인(弓人), 석인(石人), 옥인(玉人)은 금인(金人)에 속하게 하고,
초인(草人)은 목인(木人)에 속하게 하고,
피인(皮人), 주인(廚人)은 화인(火人)에 속하게 하고,
염인(染人)과 라인(螺人)은 수인(水人)에 속하게 하고,
와인(瓦人)과 전인(磚人)은 토인(土人)에 속하게 하였다.
유화(遊花)와 한도(閑徒)인 산척(山尺), 수척(水尺), 해척(海尺), 도척(島尺)
역시 병관의 관청에 속하게 하였다.
직급과 차례로 순서를 정하여, 공정(工程)을 장려하였다.
고구려가 신하 <우신于莘>을 진(晉)으로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연(燕)을 치기를 청하였다.
당시 큰 별이 그 서북쪽으로 흘러 연(燕)의 침입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고국원왕 6년(A.D.336)
봄 3월 큰 별이 서북방으로 날아갔다.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국원제 6년{AD336}병신,
<모용황慕容皝>이 려(黎)에서 동쪽으로 얼음이 언 물을 건너서 행군하여
동생인 <모용인>을 습격하여 평곽(平郭)에서 잡아 죽였더니,
<동수佟壽>・<곽충郭充>등이 <뉴벽紐碧>{평곽 태수}에게로 도망하여 왔다.
기묘년{AD319}에 <최비崔毖>의 일이 있었던 이후
<모용외>는 <모용인>을 요(遼)>의 땅에 두어 이득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필경에는 서로들 싸우고 죽여서 없앴으니,
이를 두고 날래고 사나운 고양이가 밤눈 어두웠던 격이라 함이다.
2월, 큰 별이 서북으로 흘렀다.
왕은 <모용황>이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상도尙道>를 동진(東晉)에 보내서
<모용황>이 동생을 죽이고 형수와 놀아난 죄를 송사하였으나,
진(晉) 사람은 <모용황>을 두려워하여 감히 죄를 논하지 않았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七月 末仇伊伐飡 卵環稟主 末仇尼今之胞弟也 卵環宝卵之女也
宝卵以宝凰大母寵孫 得仙徒供物貲貨甚饒 唯以奢侈爲事人多誹之
而末昕公素嬖之 故特而恣意 其女又爲末仇寵妾 以至蒨
行火神祭
7월 <말구末仇>를 이벌찬으로 <난환卵環>을 품주로 삼았다.
<말구末仇>는 니금(尼今)의 포제(胞弟)다.
<난황卵環>은 <보란宝卵>의 딸이다.
<보란宝卵>은 <보황宝凰>대모의 총손(寵孫)으로
선도의 공물(供物)을 얻어 재물이 심히 넉넉하였다.
비록 그러하였더라도 사치를 일삼아,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말흔末昕>공이 본디 사랑하는 바가 있어
그런 연유로 <말흔末昕>을 믿고 마음대로 하였다.
그의 딸 또한 <말구末仇>의 총애를 받는 첩이어서 품주의 지위에 나아갔다.
화신(火神=丙申)제를 행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夫余遣沙鵲 請和
10월 부여(夫余)가 <사작沙鵲>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미추왕 13년(A.D.337) 주조(朱鳥=丁酉)
正月 白發伊伐飡 亥康稟主
정월 <백발白發>을 이벌찬으로 <해강亥康>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遣良夫白發如夫余
2월 <양부良夫>를 <백발白發>{근구수의 장인}과 함께 부여(夫余)로 보냈다.
四月 幸黃山
加耶守克入朝貢物
4월 황산(黃山)으로 행차하였다.
가야(加耶)의 <수극守克>이 입조하여 공물(貢物)을 바쳤다.
五月 伊西仙君熊相入朝
5월 이서(伊西)의 선군(仙君) <웅상熊相>이 입조하였다.
七月 于色伊伐飡 淡馬稟主 于色于老子也 淡馬者奈淡之姉淡乙女也
7월 <우색于色>을 이벌찬으로 <담마淡馬>를 품주로 삼았다.
<우색于色>은 <우로于老>의 아들이다.
<담마淡馬>는 <내담奈淡>의 누나 <담을淡乙>의 딸이다.
八月 行嘉俳
鷄徒奉乳帽大母爲鷄君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계도(鷄徒)가 <유모乳帽> 대모를 받들어 계군(鷄君)으로 삼았다.
九月 夫余悅福等來降 初比流母餘音爲素嬭所逐 隱于平村 與其村主私通生子優福
比流爲君 優福依餘音而位之內臣 頗多擅姿
時靑稽妻沙鷄爲比流小妻 而優福慕其色 而欲得爲妻 不得乃慓異志
且與比流諸子不和 乃據北漢山而叛 比流討之 累年相持 至時優福死
其子悅福等率其衆 而請歸于我 許之 以此復欠和
9월 부여(夫余)의 <열복悅福>등이 와서 항복하였다.
처음에 <비류比流>의 어머니 <여음餘音>이 <소내素嬭>에게 쫓겨나
평촌(平村)에 숨었다.
그곳의 촌주(村主)와 사통하여 아들 <우복優福>을 낳았다.
<비류>가 왕이 되자 <우복>이 <여음>에게 의지하여 지위가 내신좌평에 나아갔다.
자못 제멋대로 하는 바가 있었다.
이때 <청계靑稽>의 처 <사계沙鷄>가 <비류>의 작은 처가 되었는데,
<우복>이 그 색(色)을 흠모하여 처로 삼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이에 급하게 다른 뜻을 품었다.
또 <비류>의 여러 아들과 불화하여,
북한산(北漢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비류>가 토벌하였으나,
여러 해를 상지(相持)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우복>이 죽자,
그의 아들 <열복悅福> 등이 그 무리를 이끌고 우리에게 귀순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이것으로 다시 화친에 흠결이 생겼다.
비류왕 24년(327년)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미추왕 14년(A.D.338) 황구(黃狗=戊戌)
正月 連音伊伐飡 蘭石稟主 尙檍左部執書 日骨右部執書 蘭石孫忠之姉也
連音連白之子也 精於藥石 凡知草木禽石 者以萬計
自連忠連白 精於採藥論 性盡以圖形示之 人呼爲藥王 性又仁慈 好施先人後已
其妻蘭石與裙白相通而生子知 而不禁 其弟連歆怒謂音 曰 “嫂爲奴汚 兄何不言”
音徐言 “草木亦難 其所好 况人乎” 灌樂圃如常
정월 <연음連音>을 이벌찬으로, <난석蘭石>을 품주로 삼았다.
<상억尙檍>을 좌부집서로, <일골日骨>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난석蘭石>은 <손충孫忠>의 언니이다.
<연음連音>은 <연백連白>의 아들이고, 약석(藥石)에 정통하고,
풀․나무․짐승․돌의 대강을 아는 것을 만계(萬計)로 삼았다.
<연충連忠>과 <연백連白> 이래로 채약론(採藥論)에 정통하였고,
그리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도형(圖形)으로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약왕(藥王)이라 불렀다.
또 성품이 인자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이 먼저이고 자신은 나중이었다.
그의 처 <난석蘭石>이 <군백裙白>과 상통하여 자식을 낳은 것을 알았으나
위협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동생 <연흠連歆>이 화를 내며 <연음連音>에게 말하기를
“형수가 아랫사람과 더러워졌는데, 형은 어찌 말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연음連歆>이 조용히 말하기를
“초목(草木) 또한 서로 좋아함에 거리낌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로다!”라고 하며
약포(樂圃)에 물주기가 평소와 같았다.
二月 祀祖廟
2월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三月 封十二樹王
3월, 12 수왕(樹王)을 봉하였다.
四月 遣連白于伊西 治宝相病
4월 <연백連白>을 이서(伊西)로 보내어 <보상宝相>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다.
웅상(금보) - 보상(308- )
七月 (尙+彡)盧伊伐飡 棠氏稟主 木公左部 康權右部 (尙+彡)盧江盧子也 阿盧神君寵嗣也
棠氏其伯父尙尺女也 世以歌道相傳爲歌宗
7월 <상노尙盧>를 이벌찬, <당씨棠氏>를 품주로 삼았다.
<목공木公>을 좌부집서로 <강권康權>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상노尙盧>는 <강노江盧>의 아들이고,
<아노阿盧>신군(神君)의 총애하는 후사(寵嗣)이다.
아노(궁희) - 궁노(미례) - 우노(과씨) - 과노(삼달라) - 월노(석례) - 석노(강씨) -
강노(상씨) - 상노
<당씨棠氏>는 <상노尙盧>의 백부(伯父) <상척尙尺>의 딸이다.
세세대로 노래로 도(道)를 서로 전하여 가종(歌宗)이 되었다.
九月 行大場
述禮太后崩 春秋八十三歲 所非王利音女也 或云 奈音女 性明敏 長於承 御人
十六 人柰解帝後宮 生帝子奈食太子奈述宮主 下嫁于長萱公 生萱禮萱述長述長禮
薦于軍君而生尼今 又生助賁女湯禮 末昕子末仇末禮 長萱公卒 歸末昕公爲正妻
尼今卽位封爲太后 后頗預政事 盡用所朋 以報其功
又使末仇摠執軍事 以制骨門 遂成花林之中興大業
尼今泣曰 “非吾母 朕安得此位”
乃盡甚喪 建陵甚壯 以奈述爲祭主 分骨於五夫陵 又后多嬖臣 臨崩命皆殉之
尼今以爲非后平日之志 不許之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술례述禮> 태후가 죽었는데 춘추 83세였다.
<소비所非>왕 <이음利音>의 딸이다. 혹은 <내음奈音>의 딸이라고도 한다.
성품이 명민(明敏)하여 윗사람을 받들고 사람을 거느림에 으뜸이었다.
16살에 내해제(奈解帝)의 후궁이 되어 <내해>의 아들
<내식奈食>태자와 <내술奈述>궁주를 낳았다.
아랫사람 <장훤長萱>공(公)에게 시집가서
<훤례萱禮>, <훤술萱述>, <장술長述>, <장례長禮>를 낳았다.
군군(軍君){구도}에게 천거되어 니금(尼今)을 낳았다.
또 <조분助賁>의 딸 <탕례湯禮>를 낳았다.
<말흔末昕>의 자식 <말구末仇>와 <말례末禮>를 낳았으며,
<장훤>공이 죽자 <말흔>공에게 시집가서 <말흔>공의 정처(正妻)가 되었다.
니금이 즉위하자 봉하여 태후로 삼았다.
후(后)는 자못 정사에 관여하여, 벗을 모든 등용하여 그 공적에 보답하였다.
또 <말구>로 하여금 군사(軍事)를 총괄하도록 하고 이로써 골문(骨門)을 제압하여
드디어 화림(花林) 중흥(中興)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니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어머니가 아니면 짐이 어찌 제위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초상에 모든 힘을 다하여, 능(陵)을 세움에 심히 웅장하였으며,
<내술奈述>을 제주(祭主)로 하였다.
다섯 남편{내해, 장훤, 구도, 조분, 말흔}의 무덤에 분골(分骨)하였다.
후는 또 폐신(嬖臣)이 많았는데, 죽음에 임하며 모두 따라죽도록 명하였다.
니금이 평소의 후의 뜻이 아니라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 술례(256-338)의 자녀
술례(내해) - 내식(272?- )
내술(274?- )
술례(장훤) - 훤례(282?- )
훤술(284?- )
장술(286-378)
장례(288?- )
술례(구도) - 미추(292-362, 13대왕 재위 325-349)
술례(조분) - 탕례(295?- )
술례(말흔) - 말구(297-358)
말례(300?- )
十一月 尼今入海宅 擇新上綃姬 行月池祭 因阿后不豫 未行而還
11월 니금이 해택(海宅)으로 들어와 새로이 상초희(上綃姬)를 뽑아
월지제(月池祭)를 행하려 하였다.
아후(阿后)가 편안하지 못하여, 행하지 않고 돌아왔다.
미추왕 15년(A.D.339) 토시(土豕=己亥)
正月 康檍伊伐飡 宣帽稟主 乳帽女也 其父孫光子宣德也 康檍者連檍子也
정월 <강억康檍>을 이벌찬으로 <선모宣帽>를 품주로 삼았다.
<선모宣帽>는 <유모乳帽>의 딸이고,
그의 아버지는 <손광孫光>의 아들 <선덕宣德>이다.
<강억康檍>은 <연억連檍>의 아들이다.
二月 會群臣于南堂 議政事得失 宅師頭上千夫等奏 曰
“今南堂旣新 而皇居未遑 請以農暇改作宮室”
尼今曰 “朕以不德忝位 災蘗未息 何可勞民而自營居宅乎 神舍廟院
公舍頹落者 者爲先治之”
時物力漸富 工手且豐 故下民之居 亦多以尾葺粉壁 而帝儉如此
2월 군신(群臣)들이 남당(南堂)에 모여 정사(政事)의 잘잘못을 의논하였다.
택사두상(宅師頭上) <천부千夫> 등이 여쭈어 말하기를
“지금 남당(南堂)은 개선됨이 없고, 황거(皇居)가 한가할 날이 없으니,
농사가 한가로운 때에 궁실을 고쳐짓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짐이 부덕하여 이 자리가 황송할 따름이고,
재앙의 그루터기가 아직 쉼 쉬고 있으니,
어찌 백성을 수고스럽게 하여 스스로 살집을 짓는 것이 옳은 일이겠느냐?
신사(神舍)와 묘원(廟院)을 고치고 공사(公舍)의 무너져 떨어진 곳들을 고쳐라.
이것들이 먼저 수리하여야 할 곳이다.” 라고 하였다.
당시 물력(物力)이 점점 부유하게 되고 장인의 재주 또한 풍성하여
하민(下民)의 거처 또한 기와로 지붕을 잇고 분으로 벽을 칠하였다.
왕의 검소함이 이와 같았다.
미추왕 15년
2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고 여겨 이에 따르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七月 馬狗兩徒相鬪于北川 發兵禁之 馬徒玉帽太后徒 而狗徒仇道世神徒
故狗以馬爲女而戱之 馬以爲玉帽后也 仇道臣也 不敢辱之
况今阿后爲馬 而末昕爲狗 是大不敬也 狗徒信 狗治天下之說 而不屈
裙白以阿后命欲諭馬徒狗徒 狗徒以裙白爲淫馬 以泥水射之 馬徒怒遂相石戰多傷害
尙檍伊伐飡 德帽稟主 德帽宣德胞妹 尙檍棠氏胞兄也 尙檍之母 康檍之父連檍之妹也
故爲康檍從弟
7월 마도(馬徒)와 구도(狗徒)가 북천(北川)에서 서로 싸워, 병사를 일으켜 억제하였다.
마도(馬徒)는 <옥모玉帽>태후의 무리이고,
구도(狗徒)는 구도세신(仇道世神)의 무리다.
그런 연유로 구도(狗徒)는 마도(馬徒)를 딸이라며 희롱하였다.
마도(馬徒)는 옥모태후는 후(后)이고, 구도(狗徒)는 신하라고 감히 모욕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의 아후(阿后)는 마도(馬徒)이고,
<말흔末昕>은 구도(狗徒)인데 이것이 대불경(大不敬)하였다.
구도(狗徒)의 무리는
구도(狗徒)가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는 설을 믿었기에 굴하지 않았다.
<군백裙白>은 아후(阿后)의 명령으로 마도(馬徒)와 구도(狗徒)를 타이르고자 하였다.
구도(狗徒)가 <군백裙白>을 음마(淫馬)라고 하여 진흙탕 물을 쏘았는데,
마도(馬徒)가 화를 내어 드디어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게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이르렀다.
<상억尙檍>을 이벌찬으로 <덕모德帽>를 품주로 삼았다.
<덕모德帽>는 <선덕宣德>의 포매(胞妹)다.
<상억尙檍>은 <당씨棠氏>의 포형(胞兄)이다.
<상억尙檍>의 어머니 <檍氏>는 <강억康檍>의 아버지 <연억連檍>의 여동생이다.
그런 까닭에 <상억尙檍>은 <강억康檍>의 종제(從弟)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九月 燕皝伐麗新城 克之 斯由乞盟 乃還
幸命元宅 賜衣馬及奴婢 尼今傷于老之非命 厚遺其妻子 而恤之
9월 연(燕)의 모용황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쳐서 이겼다.
사유(斯由){고국원왕}가 동맹을 구걸하고 곧 돌아왔다.
고국원왕 9년(A.D.339)
연왕(燕王) 모용황이 침입하여 군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왕이 동맹을 구걸하고 곧 돌아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국원제 9년{AD339}기해,
정월, <모용황>이 대거 쳐들어오자,
신성(新城) 성주 왕자 <인仁>이 성을 버리고 물러났다.
<고희高喜>에게 서부의 병력을 끌고 가서 구하라 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하5월, 왕의 동생 <민玟>을 신성으로 보내 <모용황>과 화친을 약속하고
평곽(平郭) 태수 <오충烏忠> 등을 인질로 하게 하였다.
<모용황>이 <봉추封抽>와 <송황宋晃>을 내놓으라고 심히 급하게 굴어서,
이들을 도피하게 하였다.
왕자 <구부丘夫>가 태어났다.
모친은 <해觧>씨로 선인이었던 <현玄>의 딸이었다.
추9월, <고수高穗>를 <모용황>에게 보내서
표피와 황금을 뇌물로 주고 <민玟>을 돌려달라고 청하였다.
동10월, <방상方象>이 남소(南蘇)를 지켜냈고,
<우성牛成>이 신성(新城) 을 지켜냈다.
11월,<민玟>이 <모용황>의 홀로된 여동생과 혼인하여 돌아왔는데,
<모용황>에게 왕녀 3인을 보내주길 청하였다.
<담기談奇>에게 명하여 왕의 딸 <두豆>씨와 <삭朔>씨 및 왕의 여동생 <절折>씨를
<묘용황황>에게 데려다 주게 하였다.
<송황宋晃> 등에게 무이속국(撫夷屬國)의 직을 주어 낙랑과 대방 땅으로 보냈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명원命元>댁에 행차하여 옷과 말과 노비를 내렸다.
니금(尼今)은 <우로于老>의 비명(非命)을 아파하며,
그 남겨진 처자식을 후대하고 동정한 것이다.
十月 良夫率諸仙徒 行經祭于四街 先是孫光集經 而良夫傳其經 至是畢成故也
10월 <양부良夫>가 모든 선도(仙徒)를 거느리고 네거리에서 경제(經祭)를 행하였다.
앞서 <손광孫光>이 경전을 모았고,
<양부良夫>가 그 경전을 전수받아,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한 까닭이다.
진충(손씨) - 손광(250?-320)
서해(양기) - 양부(294-356)
미추16년(A.D.340) 백서(白鼠=庚子)
正月 日骨伊伐飡 千氏稟主 貝宣左部 碧環右部 日骨日白子也 千氏助賁女也
命骨女力蠶絲 勿荒奢
정월 <일골日骨>을 이벌찬으로 <천씨千氏>를 품주로 삼았다.
<패선貝宣>을 좌부집서로, <벽환碧環>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일골日骨>은 <일백日白>의 아들이고, <천씨千氏>는 <조분助賁>의 딸이다.
골녀(骨女)에게 잠사(蠶絲)에 힘쓰도록 명하고, 허황되게 사치하는 것을 금하였다.
일백(선골) - 일골(299-375)
조분(자희) - 천씨
三月 碧芝生儒禮子芝公
斯由以其弟玟朝于燕皝
3월 <벽지碧芝>가 <유례儒禮>의 아들 <지공芝公>을 낳았다.
유례(벽지) - 지공(340- )
<사유斯由>가 그의 동생 <민玟>을 연나라 모용황의 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고국원왕 10년(A.D.340)
왕이 세자를 보내어 연 나라 임금 모용황의 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제 10년{AD340}경자,
2월, 왕의 동생 <민玟>과 세자 <성珹>을 <모용황>에게 보내서
백양 3천두를 뇌물로 주었더니,
<모용황>이 <오충烏忠>과 <조문祖文>을 돌려보내주었다.
추7월, 환도(丸都)의 장안궁(長安宮)이 완성되어, <주周>태후의 행궁으로 삼았다.
<모용황>은 흑룡과 백룡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부비며 사귀다가
용산(龍山)에 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새로이 지은 궁의 이름을 화룡(和龍)이라 하였으며,
그 산 위에다가는 용삭불사(龍朔佛寺)를 세워서
공경들의 자제를 가르치는 관학으로 삼았다.
<석호石虎>의 사신이 해(海)를 건너서 도착하였기에
환도(丸都)의 새로 지은 궁전으로 맞아들여
함께 <모용황>을 토벌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장안궁은 환도(今 조양)에 세운 궁전이다.
七月 木公伊伐飡 山帽稟主 木公助賁子也 山帽宣帽胞妹也 木公好鶴 家有十二鶴舍 人以爲鶴太子 性廉雅 不喜世事 山帽與其嬖專政
7월 <목공木公>을 이벌찬으로 <산모山帽>를 품주로 삼았다.
<목공木公>은 <조분(助賁>의 아들이고, <산모山帽>는 <선모宣帽>의 포매(胞妹)다.
<목공木公>은 학을 좋아하여 집에 12개의 학의 둥우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학태자(鶴太子)라 하였다.
성품이 청렴하고 우아하여 세상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산모山帽>와 <산모山帽>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入海宅 行沾解祭
12월 해택(海宅)으로 들어와 <첨해沾解>의 제사를 지냈다.
미추왕 17년(A.D.341) 백우(白牛=辛丑)
正月 康權伊伐飡 山帽再主 康權康檍之異父弟也
정월 <강권康權>을 이벌찬으로 <산모山帽>를 다시 품주로 삼았다.
<강권康權>은 <강억康檍>의 다른 아버지의 동생이다.
연억(강씨) - 강억
죽권(강씨) - 강권
四月 暴風拔木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七月 貝宣伊伐飡 薛骨稟主 貝宣宣帽之異母弟也 薛骨薛忠女也 與日骨同母而異父
燕以慕容恪鎭平郭
7월 <패선貝宣>을 이벌찬으로 <설골薛骨>을 품주로 삼았다.
<패선貝宣>은 <선모宣帽>의 다른 어머니의 동생이다.
<설골薛骨>은 <설충薛忠>의 딸인데,
<일골日骨>과는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르다.
선덕(유모) - 선모
선덕(패패) - 패선
설충(선골) - 설골
일백(선골) - 일골
연(燕)이 <모용각慕容恪>으로 하여금 평곽(平郭)에 진(鎭)을 치게 하였다.
고국원제 11년{AD341}신축,
<모용황>은, 용을 본 이후에,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용산(龍山)의 남쪽에 성을 쌓고는 용성(龍城)이라 하였다.
10월, <모용황>이 자기 아들 <모용각>을 시켜, 우리의 평곽(平郭)을 빼앗았다.
아군은 성을 내어주기 싫어 호상 간에 교전하였으나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모용각>은 옛 관리들을 위무하여 오래도록 눌러 살게 하였다.
우리의 계책에 대비하게 한 것이었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十月 夫余來圍槐谷城 命海飡正源領兵 拒之 賊聞之佯退 以誘之 正源不追
加耶女君河理智殂 女宣失継立 仍以守克爲夫
10월 부여(夫余)의 군사가 와서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였다.
해찬(海飡) <정원正源>으로 하여금 병사를 통솔하도록 하여 막도록 하였다.
적들이 그 소식을 듣고 물러나는 체하며 우리 병사들을 유혹하였다.
<정원正源>이 추격하지 않았다.
가야(加耶)의 여자 임금 <하리지河理智>가 죽었다,
딸 <선실宣失>이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거듭 <수극守克>을 남편으로 삼았다.
미추왕 17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파진찬 정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왕 18년(A.D.342) 수호(水虎=壬寅)
正月 淡老伊伐飡 軟凰稟主 淡老遤老子也 與于色妻淡馬爲胞兄弟 軟凰沾解女也
정월 <담노淡老>를 이벌찬으로 <연황軟凰>을 품주로 삼았다.
<담노淡老>는 <휭노遤老>의 아들로,
<우색于色>의 처 <담마淡馬>와 같은 어머니의 오누이다.
<연황軟凰>은 <첨해沾解>의 딸이다.
휭노(담을) - 담노
?(담을) - 담마
첨해(수황) - 연황(302-378)
二月 命儒禮太子 巡視州郡
句麗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2월 <유례儒禮> 태자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도록 하였다.
고구려가 환도성의 지붕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고국원왕 12년(A.D.342)
2월 환도성의 지붕을 수리하고, 동시에 국내성을 쌓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국원제 12년{AD342}임인,
2월, <재봉再逢>에게 명하여 환도성(丸都城)의 지붕을 고쳐 잇게 하였다.
<람국藍國>에게 명하여 국내성(國內城)을 쌓게 하였다.
추8월,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하였다.
대략, 서진하려는 뜻이었다.
<모용황>은 동진하고자 하였고, 상은 서진하고자 하였으니,
이들의 세력은 충돌할 것이었고, 그리 되었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342년 고구려는 요양(평양성)에서 조양(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조양에 환도성과 국내성이 있었다.
七月 公宣伊伐飡 安宣稟主 安宣安骨女也 年二十 以帝寵爲主
與發狗羘尺等 呼作艾林
公宣公羊子也 奈解帝孫也 爲人淸雅有仙風
7월 <공선公宣>을 이벌찬으로 <안선安宣>을 품주로 삼았다.
<안선安宣>은 <안골安骨>의 딸인데, 나이 20세로 왕의 총애로 품주가 되었다.
<발구發狗>, <장척羘尺>등과 더불어 미녀 집단이라고 부른다.
<공선公宣>은 <공양公羊>의 아들이며, <내해奈解>제의 손자다.
사람의 됨됨이가 청아(淸雅)하며 선인과 같은 풍채가 있었다.
안골(양선) - 안선(323- )
우로(개구) - 발구(309- )
장공(척인) - 장척(310-422)
내해(?) - 공양(선례) - 공선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燕大破斯由 執其母妻去
10월 연(燕)이 <사유斯由>를 크게 깨뜨리고,
<사유斯由>의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데리고 갔다.
고구려의 조양에 있는 환도성과 국내성이 연의 침공으로 불타자
고구려는 요양에 동황성을 짓고 343년 임시 도읍으로 하였다가
345년에 환도성과 국내성을 수리하여 다시 조양으로 천도하였다가
427년 장수왕 때 평양성(今 노룡)으로 천도하여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하였다.
미추왕 19년(A.D.343) 흑토(黑兎=癸卯)
正月 千夫伊伐飡 虎舟稟主 千夫夫良子也 虎舟舟宣女也
정월 <천부千夫>를 이벌찬으로 <호주虎舟>를 품주로 삼았다.
<천부千夫>는 <부량夫良>의 아들이고 <호주>는 <주선舟宣>의 딸이다.
四月 旱 錄囚
4월 가물었다. 죄수들중 억울함이 있는지 조사하였다.
七月 碧環伊伐飡 狒氏稟主 碧環碧隆之子 與末仇妾卵環同母 爲末昕公寵臣
狒氏亦無品女 而得末昕公寵 尼今重之 竟入蒨
7월 <벽환碧環>을 이벌찬으로 <비씨狒氏>를 품주로 삼았다.
<벽환>은 <벽융碧隆>의 아들이다.
<말구末仇>의 첩 <난환卵環>과 동모(同母)이고,
<말흔末昕>공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비씨狒氏>{吳에서 건너온 사람} 역시 골품이 없는 여자였는데,
<말흔>공의 총애를 얻어 니금(尼今)이 중히 여겨, 결국 드디어 품주의 반열에 올랐다.
十一月 設眞齋 于海宅
11월 해택(海宅)에 진재(眞齋)를 설치하였다.
미추왕 20년(A.D.344) 청룡(靑龍=甲辰)
正月 謁秀伊伐飡 淡山稟主 弘權兵官伊飡 良質一吉飡 光謙沙飡
光謙年少 而詳文故 擢爲執事卽 謁秀謁白之子 淡山淡馬胞妹也
정월 <알수謁秀>를 이벌찬으로 <담산淡山>을 품주로 삼았다.
<홍권弘權>을 병관이찬, <양질良質>을 일길찬, <광겸光謙>을 사찬으로 삼았다.
<광겸光謙>은 나이가 어리나,
상문(詳文){관청명}이 발탁한 연유로 집사랑(執事郞)으로 삼았다.
<알수謁秀>는 <알백謁白>의 아들이고, <담산淡山>은 <담마淡馬>의 포매(胞妹)다.
二月 謁祖廟
2월 조상의 사당을 알현하였다.
三月 行靑龍祭
3월 청룡제(靑龍祭)를 행하였다.
七月 虎宣伊伐飡 白欽稟主 虎宣虎舟胞兄 白欽乃欽胞妹也
7월 <호선虎宣>을 이벌찬으로 <백흠白欽>을 품주로 삼았다.
<호선虎宣>은 <호주虎舟>의 포형(胞兄)이다.
<백흠白欽>은 <내흠乃欽>의 포매(胞妹)다.
九月 大閱楊山西
夫余比流殂 汾西子契立
9월 양산(楊山)의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미추왕 20년 정월 홍권을 이찬, 양질을 일길찬, 광겸을 사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9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부여(夫余)의 <비류比流>가 죽어 <분서汾西>의 아들 <계契>가 섰다.
비류왕 41년(A.D.344)
10월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十月 角干眞斗卒 年七十三 眞斗與其妻雲氏修仙史五十編 骨史三十編 吏史二十編
性重厚篤學 久掌版籍
10월 각간 <진두眞斗>가 죽었는데 춘추 73세였다.
길남(자황190-266) - 길음(우두) - 길두(성광) - 광두(진씨) - 진두(272-344)
<진두眞斗>와 그의 처 <운씨雲氏>는
선사(仙史) 50편, 골사(骨史) 30편, 리사(吏史) 20편을 고쳐 지었다.
성품이 중후(重厚)하고 학문에 충실하였는데, 오랫동안 판적(版籍)을 담당하였다.
미추왕 21년(A.D.345) 목사(木蛇=乙巳)
正月 汗昌伊伐飡 玄宝稟主 玄宝宝相女也 汗昌汗黃子也
玄宝年十七 有寵於汗黃而得末昕公寵亦 入蒨位
以儒禮太子爲副君 初阿召禮呑星而生 儒禮端麗而有藝 助賁帝命阿后養之
及長能通孝經 盡心事后 后欲嬖之而不肯
乃詐稱玉門有瘡 命進油藥而通之 仍爲嬖臣寵加恩深 遂之副君
정월 <한창汗昌>을 이벌찬으로 <현보玄宝>를 품주로 삼았다.
<현보玄宝>는 <보상宝相>의 딸이다. <한창汗昌>은 <한황汗黃>의 아들이다.
<현보玄宝>의 나이 17세로 <한황汗黃>에게 총애가 있었고,
<말흔末昕>공에게 또한 총애를 얻어 품주의 지위에 올랐다.
<유례儒禮>태자를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처음에 <아소례阿召禮>가 별을 삼키고 태자를 낳았다.
<유례>는 행실이 단정하고 겉모양이 아름다우며 배움이 있었다.
조분제(助賁帝)가 아후(阿后)에게 기르도록 명하였는데,
장성함에 이르자 효경(孝經)에 능통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후(后)를 섬겼다.
후(后)가 <유례>를 사랑하고자 하였으나 <유례>가 옳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옥문(玉門)에 부스럼이 났다고 사칭(詐稱)하여
가까이 와서 유약(油藥)을 바르라 하여 통(通)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폐신(嬖臣)이 되고, 총애가 더하여 사랑함이 깊어지더니,
부군(副君)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때 <아이혜> 60세, <미추> 54세, <유례> 40세이다.
<미추>의 아들이 있었지만 <아이혜>와 <미추>사이에는 아들이 없어
<유례>가 <아이혜>의 폐신이되어 부군이 되고
<아이혜>여왕의 명으로 김씨에서 다시 석씨로 왕위가 계승된다.
七月 雲斗伊伐飡 乳仙稟主 雲斗眞斗子也 乳仙乳帽女也 雲斗與副君同師 尼今及米諳
副君愛之如弟 故嘗從副君作私臣 忠誠如一日
阿后欲以儒禮爲副君 儒禮謂雲斗 曰 “辛矣 不順母后則非孝 順之必失米諳之禮”
雲斗乃告於米諳 曰
“我國有夷風世傳 今儒禮太子得后寵 將立爲副君 而恐師責之而不敢”
米諳曰 “太子先帝寵子也 守吾禮 敎可以化民 一后兩世中 國亦有之 豈爲累乎”
雲斗以告于后及副君 后大喜 亦使米諳 告于尼今 而遂決策立
故以雲斗爲相 而米諳爲副君太師 諳吳人也
7월 <운두雲斗>를 이벌찬으로 <유선乳仙>을 품주로 삼았다.
<운두雲斗>는 <진두眞斗>의 아들이다. <유선乳仙>은 <유모乳帽>의 딸이다.
<운두雲斗>와 부군(副君){유례}은 같은 스승을 모셨다.
니금(尼今)과 <미암米諳>이 부군(副君)을 사랑하여 동생처럼 대하였다.
미회(유씨) - 미암(277-348)
그런 연유로 <운두雲斗>는 일찍이 부군을 따라다니며 사신(私臣)이라 하였다.
충성스러움이 한결 같았다.
아후(阿后)가 <유례>를 부군으로 삼고자 하자, <유례>가 <운두>에게 말하기를
“괴롭도다. 모후(母后){아이혜}를 따르지 않으면 효가 아니요,
어머니를 따르면 <미암>에 대한 예의를 잃게 된다.”라고 하였다.
<운두>가 이에 <미암>에게 알리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동이(夷)의 풍속이 세세대로 전하여 지고 있어,
지금 <유례>태자가 후의 총애를 얻어 장차 부군으로 즉위하고자 하나,
스승의 책망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미암>이 말하기를
“태자는 선제(先帝){조분}의 총애를 받은 아들이다.
나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한다면 백성을 교화함이 옳다.
한 명의 후와 두 임금의 치세 중에 나라에 또한 그러한 일이 있었으나,
어찌 또 그런 일이 누차로 일어나는가!”라고 하였다.
<운두>가 이에 후와 부군에게 알리어 말하니,
후가 크게 기뻐하며 또한 <미암>으로 하여금 니금에게 고하게 하여,
드디어 부군으로 세울 책략을 결정하였다.
이런 연유로 <운두>를 재상으로, <미암>을 부군태사(副君太師)로 삼았다.
<미암>은 오나라 사람이다.
八月 行嘉俳
賜米諳 年穀三百石 布五十匹 加奴婢十口 給庄圃田宅 獵戶如王子例
初鳳凰三年 孫光隨諳父會入吳 修道六年而歸
時會有二妾 諳母劉氏年少而美 孫光窃慕之 他妾妬之 誣以爲與光相通
光不能辯 會遂以劉氏與光 曰 “吾何愛一女 負朋友哉”
時諳生才二歲 劉氏生光一女 而與光歸我 諳年二十五 思母東來 爲光養子
而心非我俗事 多唾罵 而良夫等皆師奉之 諳內奸外正 以禮敎多責骨門
故人多苦之 供饋甚多 故得致財貨 骨女出入者 諳多私引淫之 而生子女
理方不得問及老 專以阿媚權門爲事 縱橫其說 故識子非之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미암米諳>에게 해마다 곡식 300석과 베 50필을 내리고 노비 10명을 더하여 내려,
장원과 포전(圃田)과 저택(宅)과 엽호(獵戶)를 거느리기가 왕자의 예와 같았다.
옛날 봉황(鳳凰) 3년{AD.274, 오나라 연호}
<손광孫光>이 <미암>의 아버지 <미회米會>를 따라 吳로 들어가 6년 동안
수도(修道)를 하고 돌아왔는데, 당시 <미회>에게는 2명의 첩이 있었는데,
<미암>의 어머니 <유씨劉氏>는 나이가 젊고 아름다웠다.
<손광>이 <유씨>를 몰래 흠모하였는데,
다른 첩이 시새움하여 <손광>과 상통(相通)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손광>이 변명하지 못하자, <미회>가 마침내 <유씨>를 <손광>에게 주며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 한 여자만 사랑하겠는가. 친구(朋友)에게 짐을 지웠구나.”라고 하였다.
당시 <미암>이 태어나서 두 살이었는데,
<유씨>가 <손광>의 딸 하나를 낳고 <손광>과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미암>이 25세가 되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동(東){신라}으로 오니
<손광>이 양자(養子)로 삼았다.
마음속으로는 우리의 속세의 일을 그르다며 침을 뱉고 욕함이 많았다.
<양부良夫> 등이 모두 스승으로 모시니,
안에서는 잘못이 있으나 밖에서는 바른 척하며,
예교(禮敎)로 골문(骨門)을 꾸짖음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이 <미암>을 따르기를 애쓰며,
공궤(供饋)함이 많아서 재화(財貨)를 얻음에 이르렀다.
출입하는 골녀들을 <미암>이 사적으로 끌고 가 음란하여 자녀를 낳았다.
이방(理方)이 선노(仙老)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오로지 아미(阿媚)하여 권문(權門)을 섬기니, 종횡(縱橫)하여 그 설(說)을 전파하였다.
그런 연유로 식자(識子)들은 그릇되었다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燕慕容恪攻麗南蘇 拔之
10월 연나라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의 남소(南蘇)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고국원왕 15년(A.D.345)
10월 연(燕)왕 모용황이 모용각으로 하여금 침공하여 남소를 함락시키고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제 15년{AD345}을사,
10월엔 <모용각>이 쳐들어오자,
남소(南蘇)의 소수(小守) <승융勝戎>이 연(燕)에 투항하고 나서
<모용각>과 함께 남소(南蘇)를 협공하여 빼앗았다.
이에 패자(沛者) <빈조賓兆>와 사마(司馬)<우매牛買>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미추왕 22년(A.D.346) 화마(火馬=丙午)
正月 長宣伊伐飡 三元稟主 長宣孫光孫也 其母尼今胞姉長述也
三元阿后女也 其父裙白也
時三元有寵於副君 亦善媚於阿后 故累入阿后寢與副君聯枕 而后益愛之
良夫等請奉阿后爲神后 乃上神號神冕 而賜酺百官 三日 賜后子女爵一級
정월 <장선長宣>을 이벌찬으로 <삼원三元>을 품주로 삼았다.
<장선長宣>은 <손광孫光>의 손자로,
그 어머니는 니금(尼今)의 포자(胞姊) <장술長述>이다.
손광(동선) - 손선(장술) - 장선
장훤(술례) - 장술(286-378)(손선) - 장선(310?- )
구도(술례) - 미추(292-362)
<삼원三元>은 아후(阿后)의 딸이고, 그 아버지는 <군백裙白>이다.
군백(아이혜) - 삼원(316- )
당시 <삼원三元>이 부군(副君)에게 총애가 있었고 또한 아후에게 아첨을 잘하니,
이런 연유로 수차례 아후의 침전으로 들어와 부군과 연이어 동침하니
아후의 사랑이 점점 더하였다.
<양부良夫(294-356)> 등이 아후(阿后)를 받들기를 청하여 신후(神后)로 삼았다.
이에 상신(上神)을 신면(神冕)이라 불렀다.
백관(百官)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베풀고, 후의 자녀들에게 1급의 작위를 내렸다.
三月 尼今與光明后率訖解基臨等 幸阿瑟羅神山 爲神后求福也
3월 니금(尼今)과 광명후(光明后)가 <흘해訖解>와 <기림基臨> 등을 거느리고
아슬라신산(阿瑟羅神山)으로 행차하여 신후(神后)를 위하여 복(福)을 구하였다.
이때 미추왕 55세, 광명후 33세, 신후 아이혜 61세, 부군 유례 41세,
<흘해訖解>는 <우로>와 <명원>의 아들로 18세이고,
<기림基臨>은 <아이혜>와 <걸숙>의 아들로 17세이다.
七月 尼今還都 㮇烏伊伐飡 捺介稟主 㮇烏碩烏子也 捺介捺公布女也 副君所善也
7월 니금(尼今)이 도읍으로 돌아왔다.
<칠오㮇烏>를 이벌찬으로 <날개捺介>를 품주로 삼았다.
<칠오㮇烏>는 <석오碩烏>의 아들이다. <날개捺介>는 <날공捺公>의 포녀(布女)다.
부군(副君)이 아끼는 바가 있었다.
八月 行神后大福 設大嘉俳 神后謂副君 曰
“方今天下多亂國 而我邦頼祖宗神靈 晏然無事 宜加自省無失 民望何爲老躬如此濫貴”
副君 曰 “尼今奉之 百姓子來莫大之慶 安不得如此哉”
加耶君宣失生守克子慕訶
8월 신후(神后)의 대복(大福)을 행하기 위해 대가배(大嘉俳)를 베풀었다.
신후가 부군(副君)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방금(方今)의 천하에는 어지러운 나라가 많은데,
아방(我邦)은 조종(祖宗) 신령의 힘입음 바가 있어, 안연(晏然)하고 무사하다.
마땅히 스스로를 더 살피고, 백성들의 바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어찌하여 늙은이가 스스로 이와 같이 넘치게 숭상되는 것을 바라겠느냐?”라고 하였다.
부군(副君)이 말하기를
“니금(尼今)이 신후의 대복(大福)을 받들어,
백성의 아들들이 온 것은 크나큰 경사입니다.
어찌 이와 같이 얻지 못함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가야(加耶)의 임금 <선실宣失>이 <수극守克>의 아들 <모가慕訶>를 낳았다.
수극(선실) - 모가(346-403, 대가야 12대왕 재위 377-403)
九月 夫余入寇
9월 부여(夫余)가 침범하였다.
十月朔 夫余進圍槐谷城 命良質率精騎出擊大破之 虜其師沙文
夫余以悅福之來降 生募 侵邊 無信朝廷 欲退其衆 而尼今以爲不可拒來 而受之
夫余君契暴殂 比流二子近肖古宝果生也 宝果立之 軆皃奇偉有遠識
10월1일 부여(夫余)가 나아가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였다.
<양질良質>에게 정기(精騎)를 이끌고 출격(出擊)하도록 하여 크게 깨뜨리고,
부여의 장수 <사문沙文>을 사로잡았다.
부여가 <열복悅福>이 우리에게 와서 항복하였을 때
살아있던 자를 부르기 위해 변방을 침입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열복> 등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물러나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니금(尼今)이 오는 것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기에 그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부여(夫余)의 임금 <계契(295?-346)>가 갑자기 죽었다.
<비류比流>의 둘째아들 <근초고近肖古(295-375)>는 <보과宝果>의 아들인데,
<보과>가 그를 세웠다.
체격과 용모가 기위(奇偉)하고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
미추왕 23년(A.D.347) 화양(火羊=丁未)
正月 秀興伊伐飡 白欽稟主 秀興小興子也 謁秀同母弟也 皆助賁帝外孫也
白欽之堂姪也 白欽以尼今寵 再蒨
정월 <수흥秀興>을 이벌찬으로 <백흠白欽>을 품주로 삼았다.
<수흥秀興>은 <소흥小興>의 아들이고, <알수謁秀>의 같은 어머니의 동생이다.
모두 조분제(助賁帝)의 외손이고, <백흠白欽>의 당질(堂姪)이다.
<백흠白欽>은 니금(尼今)의 총애로 다시 품주가 되었다.
조분(가황) - 수황(알백) - 알수
수황(소흥) - 수흥
二月 尼今與光明后基臨太子西巡諸郡 恤父老 擧才藝有行者
夫余以眞淨爲朝廷佐平 淨以王后親戚 狼戾不仁 臨事苛細 特勢自用 國人疾之
尼今謂基臨太子 曰
“爲國之道 莫如愛民 愛民之道 莫如寬仁 今西土背天違神 自相戮食 唯吾邦敬事天神
上下安樂太平 彼宝果之子 雖祭天地神祇 以狼戾殘民 豈有神休哉 汝宜戒之”
2월 니금(尼今)이 광명후(光明后)와 <기림基臨>태자와 함께
서쪽의 여러 군(郡)을 돌아 부로(父老)를 구휼하고
재주와 기예가 있고 행실이 바른 자를 천거하였다.
부여(夫余)가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진정眞淨>은 왕후의 친척으로 낭려(狼戾)하고 너그럽지 않아,
어떤 일에 임함에 성질이 까다롭고 속이 좁았으며,
세력을 믿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나라사람들이 우려하였다.
니금(尼今)이 <기림基臨>태자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위국(爲國)의 도(道)는 백성을 사랑함과 같음이 없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道)는 관인(寬仁)만 못하다.
지금 서토(西土)는 하늘을 등지고 신의 뜻에 어긋나 있는데,
스스로 서로 잡아먹고 있다.
오직 우리나라만이 천신(天神)을 공경히 섬기므로
위아래가 편안하고 즐거우며 태평하다.
저기 <보과宝果>의 아들이 비록 하늘의 신령과 대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이리처럼 욕심이 많고 도리에 어긋나며 백성들이 가난하고 외로우니,
어찌 신령이 쉴 수가 있겠느냐. 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근초고왕 2년(A.D.347)
정월에 천지신에게 제사지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四月 三元生副君子未斯品
4월 <삼원三元>이 부군(副君)의 아들 <미사품未斯品>을 낳았다.
유례(삼원) - 미사품(347-411)
七月 大皇伊伐飡 陽欽稟主 大皇大阿夫子也 其母冬皇副君從姉也 陽欽白欽之兄女也
其母登陽亦副君之姉也 白欽陽欽皆美色 得寵於尼今及副君
時三元産子 而陽欽當夕得蒨
尼今還都 副君迎于郊外 奏政 尼今笑曰 “朕已老矣 乃汝天下 何必煩聞”
副君感泣 謂陽欽 曰 “吾恐父今怒 汝擅位 今始安心矣”
7월 <대황大皇>을 이벌찬으로 <양흠陽欽>을 품주로 삼았다.
<대황大皇>은 <대아부大阿夫>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 <동황冬皇>은 부군(副君)의 사촌 누나이다.
내음(아례) - 아소례(262-327)(조분) - 유례(306-367)
손광(아례) - 동례(272-354)(황문) - 동황(300?- )
동례(조분) - 등양(304?- )
<양흠陽欽>은 <백흠白欽>의 오빠{내흠}의 딸이다.
내흠(등양) - 양흠
그 어머니 <등양登陽> 또한 부군의 누나이다.
<백흠白欽>과 <양흠陽欽> 모두 미색(美色)이어서,
니금(尼今)과 부군(副君)에게 총애를 얻었다.
이때에 <삼원三元>이 아들을 낳아서
<양흠陽欽>이 저녁 일을 맡게 되어 품주의 지위에 올랐다.
니금(尼今)이 도읍으로 돌아와 부군(副君)이 교외(郊外)에서 맞아들였다.
정사에 대하여 아뢰니, 니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짐은 이미 늙었다.
곧 너의 천하인데 하필이면 번잡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부군이 감읍(感泣)하여 <양흠陽欽>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부금(父今)이 너를 마음대로 세움을 걱정하였는데,
이제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十月 委政於副君
10월 부군(副君)에게 정사를 맡겼다.
미추왕 23년
2월 왕이 서쪽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대릉(죽장릉이라고도 한다)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왕은 신후 아이혜의 명으로 부군 <유례>에게
미추왕 25년(349년)에 선위하여 도산으로 들어가
13년 후인 유례왕 13년(362년)에 죽었다.
十一月 尼今與神后入海宅 祭日月池 禱副君福七日 十二月 神后還都
11월 니금(尼今)과 신후(神后)가 해택(海宅)으로 들어가
일월지(日月池)에 제사를 지냈다.
부군(副君)의 복을 7일 동안 빌었다.
12월 신후가 도읍으로 돌아왔다.
미추왕 24년(A.D.348) 토신(土神=戊申)
正月 副君謁祖廟告政 與阿爾兮神后受朝 賜酺
副君以紺長爲伊伐飡 䄪黃爲稟主 紺長納長子也 䄪黃孫宗之從侄女也
副君寵愛之 常命視饍 至是不告于尼今 而命蒨假位
정월 부군(副君)이 조상의 사당을 찾아뵙고 정사에 관하여 고하였다.
아이혜(阿爾兮) 신후(神后)와 조회를 받고, 연회를 베풀었다.
부군(副君)이 <감장紺長>을 이벌찬으로 <초황䄪黃>을 품주로 삼았다.
<감장紺長>은 <납장納長>의 아들이고, <초황>은 <손종孫宗>의 종질녀(從侄女)이다.
부군의 총애를 입어 일찍이 반찬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이때에 니금(尼今)에게 고하지 아니하여 품주를 가위(假位)로 하였다.
二月 副君與䄪黃謁尼今于海宅 告政 帝執副君手而戒之
“朕以外戚忝位二十余年 無政可稱 汝年已長 可以嗣我 補善非獨 朕喜亦足 以慰汝母也
汝宜體天生物母地包載 無失祖宗遺敎 彼燕皝之類
雖暴一時兄弟相殘 寇人害命 不可久也 安足道乎 神仙之道 縱情而無怒 (镸+斗)慾而無
貧者共和 而不專己也 汝其知之”
副君曰 “親則父也 恩則君也 道則師也 情則主也 敢不佣之”
遂書于襟 尼今乃命光明后酙酒而樂之 副君亦大醉遂耽枕 而起謝罪
尼今乃命罷䄪黃 以弘權爲伊伐飡 三姬稟主 年才十四 故命其母三元監事 三姬之父
小捺者捺公之布子 而美溫柔 善狐媚如婦女 故尼今嘗嬖之 尼今生腫於肛甚痛
小捺吮而治之無痛 尼今曰 “糞門人所汚之 汝爲我吮之 功難報也”
小捺曰 “臣於陛下恩則君皇 情則夫皇 可以嘗糞割股 何以此爲功乎
恐陛下非愛臣而踈之 因淚下如泣”
尼今益愛之 神后有陰下瘡 尼今命小捺吮之 出入后寢得烝於后
三元亦有股瘇 不肯針之 后令小捺 往來于吳人張弈 得新方不針而破之 亦吮而治之
小捺自思欲得天寵 則先可知醫 乃以張燮爲師 迎置其宅 盡得張機方
且出入白門 醉酌古方 后益信之 王子女多得其效 三元自吮腫之後 亦與小捺相通
情甚密 遂生三姬 時三元權妻 外奸法當罪之 而尼今赦而不治 仍命爲小捺妻
長宣弘權皆以小捺龍夫 交通三元 登保年少於小捺 而氣骨甚凌 有食牛之志
嘗見小捺搦搦 在池亭中觀魚 拔釗打其魚而取之 曰 “吾見舍人之美 要以此獻”
小捺曰 “吾愛其生 君何殺之”
不肯受 登保怒 曰 “我乃王孫 汝是末骨 何敢無禮 吾旣犯法殺魚 汝若告之
則當受凡責於園上典矣 不若殺汝而投池”
乃以釗按之 小捺大驚而媚曰 “臣豈告犯者歟願 王孫釋怒 何媚?媽?憐”
登保笑而獲釗 曰 “吾豈殺汝者乎 故戱之耳 吾好武而汝好文 文武不相合則不加成大事
文雌而武雄 吾可作汝夫”
遂抱入亭中而淫之 小捺服其雄俠 媚事長兄弘兄 年雖高而不及郎君 盡以宮中之事告之
時三元與小捺相慕而畏法成病 遂議于登保 登保王孫通權妻則笞 末骨通之則杖流邊方 ‘吾當爲汝受笞 汝可通之 而以吾代之 則無罪也’
小捺乃與三元相通 曰 “若有娠 則登保代受罪矣”
國法王女通王孫 則以免權妻 而下嫁他臣 故欲使登保受罪 而己欲娶之
時尼今常在神后寢 權妻多曠夕 三元非當夕之月而娠 權井欲罪之
時小捺之捺公新相 尼今之妹末禮 蒨稟 而事在前蒨登陽之時
而發於新蒨 故登陽妊保之叔母 不肯罪登保 勸保勿欺聖明 曰 “汝乃武人 必不作奸”
登保乃告以實 曰 “臣實使之臣 當受罪以免 小捺尼今義之”
命賞登保 而勿問小捺 曰 “吮肛之功 可以許一女”
命吉于鮑祠 三元出宮 登保最先通之 長宣洪權次第通之
小捺妊保年少 而伏己 內懷慙心 厚於弘權長宣 三元反妊保年少 而氣壯 厚於登保
至是三元多生登保子 還踈於小捺 弘權累言 三元之不公 三元若之
遂使其女三姬學舞於弘權 而潛相通之 弘權以此不言 弘權之妹茜弘有寵於尼今
故弘權久掌羽林 時隨駕海宅 故三姬恕?而至 托言上茶于尼今 尼今見其美 而幸之
知非淨女 問其所私 三姬不欺 曰 “舞父授之 腰舞而已非 有所通也”
尼今笑曰 “發狗艾也”
代物黃蒨之 或云 物黃以末骨之女 與光明聯枕大失骨禮 三姬時在帝寢見之 而責物黃
故尼今義之 曰 “物黃年徒長耳” 乃免而代之云
2월 부군(副君)이 <초황䄪黃>과 더불어 해택(海宅)에서 니금(尼今)을 알현하고
정사를 고하였다.
왕이 부군의 손을 잡고 경계하여 말하기를
“짐은 외척(外戚)임에도 황송하게 20여년을 재위에 있었다.
정(政)이 없었다고 가히 말할 수 있다.
네가 이미 장성하였으니 나의 후사로 삼음이 옳도다.
잘된 것은 개선하고 독단하지 않는다면, 짐은 기쁘고 또한 만족하다.
이로써 너의 어머니{아이혜를 말함}를 안심시킬 수 있다.
너의 몸은 하늘에서 생겨난 것이 마땅하나,
만물의 어머니 땅을 감싸 안음이 조종(祖宗)의 유교(遺敎)이니 그르침이 없어야 한다.
저기 연(燕)나라 모용황의 무리들은
비록 일시적이나 사나워서 형제들을 서로 죽이고 다른 사람을 노략질하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니 오래가지 않을 것이므로, 어찌 족할 도리이겠느냐?
신선의 도(道)는 마음대로 음란하더라도 화내지 아니하고,
사(肆)한 욕심을 내지 않으며, 가난한자들과 화합하며, 홀로 오로지하지 않음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니금은 어버이의 친함이 있고, 임금의 은혜가 있으며, 스승의 도(道)가 있으며,
주(主)의 정(情)이니, 감히 명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옷깃에 글씨를 새기기에 이르렀다.
니금이 이에 광명(光明)후에게 술을 따르고 노래하게하였다.
부군 또한 크게 취하여 나란히 잠들었고, 일어나 잘못을 빌었다.
니금이 이에 <초황䄪黃>을 파면하도록 하였다.
이에 <홍권弘權>을 이벌찬으로,
<삼희三姬(335- )>를 품주로 삼았는데 나이 14세였다.
그런 연유로 <삼희紺長>의 어머니 <삼원三元>에게 품주의 일을 살피도록 하였다.
<삼희三姬>의 아버지 <소날小捺>이라는 사람은 <날공捺公>의 포자(布子)인데,
예쁘장하고 유순한데 부녀(婦女)처럼 여우같이 아첨하기를 잘하였는데,
그런 까닭으로 니금이 일찍이 총애하였다.
니금이 항문에 종기가 생기어 심하게 아팠는데,
<소날小捺>이 빨아서 치료하니 아프지 않았다.
니금이 말하기를
“똥구멍은 사람들이 더럽다고 하는 곳인데
너는 나의 항문을 빨았으니 그 공에 보답하기 어렵구나!”하고 하였다.
<소날>이 말하기를
“신에게 폐하는 임금(君皇)의 은덕이요, 남편(夫皇)의 정(情)이니 똥을 맛보고
허벅지의 살을 도려냄이 가당한데, 어찌 이런 것을 공이라 말하십니까.
다만 폐하께서 신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멀리하여
그로인하여 울어서 눈물을 흘림을 두려워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소날>을 더욱 사랑하게 되어,
신후(神后)의 음부 아래에 종기가 나자, 니금이 소날에게 종기를 빨도록 하였다.
후(后)의 침전에 출입하여 후와 증(烝)하였다.
<삼원> 역시 허벅지가 통통 부었으나 침(針)을 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후가 <소날>에게 명령하여 오(吳)나라 사람 <장혁張弈>에게 왕래하며
침을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여 병을 낳게 하였다.
역시 빠는 방법으로 치료하였다.
<소날>은 스스로 천총(天寵)을 얻기 위해 먼저 의술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에 <장혁>을 스승으로 삼고 그 집으로 맞아들여
<장혁>의 기교와 방법을 완전히 터득하였다.
또 백문(白門)을 출입하며 고방(古方)에 몰두하여 가리어 선택하였다.
후의 신뢰가 점점 더하여, 왕자와 왕녀 중에 그 효험을 얻은 자가 많았다.
<삼원>은 종기를 빤 뒤로 또한 <소날>과 상통(相通)하여 정분이 심히 가까워졌고,
<삼희>를 낳기에 이르렀다.
당시 <삼원>은 권처로,
외부의 남자와 간통하면 의당 벌을 주어야 하나 니금이 사면하고 다스리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소날>의 처로 삼도록 하였다.
<장선長宣>과 <홍권弘權>은 모두 <소날>의 용부(龍夫)인데
<삼원>과 만나며 통(通)하였다.
<등보登保>의 나이는 <소날>보다 어리지만
기골(氣骨)이 장대하여 소를 삼킬 듯한 기상이 있었다.
날공(날희) - 소날(310?- )
중해(등세) - 등보(317-380)
일찍이 <소날>이 연못의 정자에서 조용히 물고기를 쳐다보고 있는데,
칼을 뽑아 들고 그 물고기를 쳐서 잡으며 말하기를
“나는 사인(舍人)의 아름다움을 보고 이것을 바치고 얻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소날>이 말하기를
“나는 살아있는 물고기를 좋아하는데,
군(君)께서는 어찌하여 죽였습니까.”라고 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등보>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나는 왕손(王孫)이고, 너는 말골(末骨)인데 어찌 감히 무례한 것이냐!
나는 이미 법을 어기고 물고기를 죽였으니,
네가 만약 물고기를 죽인 것을 고(告)한다면
곧 나는 마땅히 관계대로 원상전(園上典)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니
너를 죽여 연못에 던짐과 같지 않다.”라고 하며 칼을 어루만졌다.
<소날>이 크게 놀라며 아양 부리며 말하기를
“신이 어찌 죄를 지은 것을 고하고 편안함을 바라겠습니까.
왕손께서는 화를 푸십시오.”라고 하며
아미(阿媚)하여 상긋 웃으며 어여삐 보였다.
<등보>가 웃으며 칼을 <소날>에게 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너를 죽이겠느냐. 그것은 장난이었을 뿐이다.
나는 무(武)를 좋아하고, 너는 문(文)을 좋아하니,
문무(文武)가 서로 만나지 않으면 가히 큰일을 이룰 수 없다.
문은 암컷이요 무는 수컷이다.
내가 너의 남편이 됨이 옳도다.”라고 하며
<소날>을 안고 정자의 중앙으로 들어가 <소날>을 음탕하기에 이르렀다.
<소날>의 복장은 남자처럼 호방하였으나,
장형(長兄){장선}과 홍형(弘兄){홍권}을 아첨하여 섬겼다.
나이가 <등보>보다 비록 많으나 낭군(郎君)에 이르지 못하고,
궁중의 일을 모두 고하였다.
당시 <삼원>과 <소날>이 서로 흠모하였으나 법을 두려워하여 병이 되었고,
<등보>에게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등보>는 왕손으로 권처와 통하면 태형(笞刑)을 받고,
말골이 권처와 통하면 장형(杖刑)을 받고 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되어있었다.
<등보>가 말하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태형을 받을 터이니 너는 <삼원>과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를 대신한다면 너는 죄가 없어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소날>이 이에 <삼원>과 상통(相通)하며 말하기를
“만약 임신을 하게 되면 <등보>가 대신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법에는 왕녀가 왕손과 통하게 되면,
권처를 면하게 되어 신분이 낮은 다른 신하에게 시집가게 되어있었다.
그런 연유로 <등보>로 하여금 벌을 받게 하고,
자신이 <삼원>에게 장가들고자 한 것이다.
당시 니금은 항상 신후의 침소에 있어, 권처들이 많은 밤을 헛되이 보냈다.
<삼원>이 담당하지 않은 달에 임신을 하게 되어,
권정(權井)에서 <삼원>을 벌주려 하였다.
이 때에 <소날>의 아버지 <날공>이 새로이 재상이 되고
니금의 여동생 <말례末禮>가 품주가 되었다.
말흔(술례) - 말례(300?- )
전 품주 <등양登陽>의 시기에 일어났던 사건을 새로운 품주가 품(稟)하니,
<등양>은 <등보>의 숙모이기 때문에 <등보>에게 벌주려하는 것을 수긍하지 않으며,
<등보>에게 성명(聖明)을 기망하지 말라고 부추기며 말하기를
“너는 곧 무인(武人)이니 반드시 간사함을 몰라야한다.”라고 하였다.
<등보>는 이에 사실을 고하여 말하기를
“신이 실제로 시킨 일이며,
신이 마땅히 벌을 받겠으니 <소날>은 벌을 면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니금이 그것을 의롭다하여,
<등보>에게 상을 내리고 <소날>에게 죄를 묻지 않으라 하며 말하기를
“항문을 빤 공이 있으니, 한 명의 여자를 허락하겠노라.”라고 하며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도록 하였다.
<삼원>이 출궁하자 <등보>가 가장 먼저 <삼원>과 통하고,
<장선>과 <홍권>이 다음차례로 통하였다.
<소날>은 <등보>가 나이가 어리나
자신이 굽힌 것 때문에 안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품어,
<홍권>과 <장선>에게는 대함이 후하였다.
<삼원>은 반대로 <등보>의 나이가 젊어 기운이 씩씩하므로 <등보>에게 후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삼원>이 <등보>의 자식을 많이 낳고,
돌아왔으나 <소날>을 멀리하였다.
<홍권>이 누차로 <삼원>이 공평하지 못함을 말하였다.
<삼원>이 그것을 고민하여
그녀의 딸 <삼희>로 하여금 <홍권>에게 춤을 배우라고 하여, 몰래 상통(相通)하였다.
<홍권>이 이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홍권>의 여동생 <천홍茜弘>은 니금에게 총애가 있어,
그런 연유로 <홍권>이 우림(羽林)군을 오랫동안 맡고 있었다.
당시 어가를 따라 해택에 가게 되어
그런 연유로 <삼희>는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따라 이르게 되었는데,
윗전에 부탁하여 니금에게 차를 올리게 되었다.
니금이 그 미색을 보고 행차하여 처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는데,
<삼희>가 속이지 않고 말하기를
“무부(舞父){홍권}에게 주었습니다.
요무(腰舞)일 뿐이지 통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발구發狗>의 미모로다.”라고 하였다.
<물황>을 대신하여 품주로 삼았다.
혹은 <물황>은 말골(末骨)의 딸로써
광명과 나란히 누워 잔 것은 골례(骨禮)로 보아서는 큰 실수였다.
<삼희>가 이때 왕의 침전에서 보고 <물황>을 꾸짖었는데,
그런 연유로 니금이 의롭다 하여 말하기를
“<물황>의 나이는 헛되이 많을 뿐이다.”라고 하며
이에 <물황>을 면직하고 <삼희>를 대신하게 하였다고 한다.
유레왕 2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2월 이찬 홍권을 서불한에 임명하고 중요한 정무를 맡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三月 詳文太師米諳卒 以其子浹爲詳文太師 諳以孫光義子 事孫光及其母至孝
骨門請學則必先授孝經 曰 “人之所 以爲人 唯孝在焉”
時捺公汗昌等 皆烝母而生子 諳皆面責之 曰 “人而烝母生子 何異於犬羊乎”
國俗反以烝母爲孝 而生子則賞大布 諳極言 其非于尼今 請罪之以法 尼今頗動之
而神后不許之 曰 “母老而只有子 愛不可奪之”
諳問於其母 曰 “母亦有報 子之心乎”
其母曰 “多情之人 雖老而尙有血 故必與子私也 此邦之習已久 汝欲改之 恐拂人心”
諳乃止之 尼今嘗問於諳 曰 “朕於中原可比何主”
諳曰 “大度如光武 謹嚴如王莽 好色如齊桓 好仁如漢文 擧賢如漢武 中原亦無
可當之主 但惜 不以己子爲統 雖王天下 不能興其家 恐非英雄之所爲也”
時諳與星杞密通 而欲扶杞公故也
尼今笑曰 “先帝不傳于子 而傳于朕 朕所以傳于先帝之子義也 卿何以邪道敎導乎”
諳知不可動 翻然謝之曰 “堯舜之君也 臣特試之也”
捺公曰 “米諳奸人也 暗通于星杞而弄天子 亂大法 可以諫之”
尼今笑曰 “汝憤烝母之責乎 養賢易色 聖人之言 朕何愛一宮女 害上國之賢哉
汝勿公言 而使吳人失志也”
時中原多亂 張弈孫九米武等繼諳 而至朝廷 皆以重祿養之 置吳人田 諳主之
吳人以諳爲君 諳又使其徒 採其國美女 而來獻于骨門 如環氏狒氏 皆以諳所畜之
淫女得蒨聖躬 時朝廷置五花典 掌外夷美色
西花者夫余貢女也
北花者句麗末曷之女也
南花者加耶金冠月奈之女也
吳花者吳女也
倭花者倭女也
用於宴嚮歌舞之 時五花無定夫 故骨門輪淫之 所出未詳屬誰 諳粗知經句而文章不洽
其臣有呂玄者善文 故常敎諳 以解之 玄居鄕族 貴於諳 諳父嘗臣事於玄家
及亂諳往誘東來 玄母謂玄 曰 “諳商旅之子 異鄕遠去 勢難如意 可以止之”
玄不聽 率其妻子 而來意 以當得太師 及至京都 不使出遊骨門 以爲己臣
其妻女 皆爲諳所汚 玄乃謂其母 曰 “恨不聽母言”
母曰 “旣已至此運也 不可再誤 勉從順命 而待時圖之可也”
諳又以玄母爲妾 而生子 待玄如子 玄嘗泣謂大萱 曰
“吾本貴骨 而諳乃賤人 故諳不識文章 待吾敎之 而講于骨門也”
大萱播其設 諳怒而私答玄 張弈諫之 曰
“吾等避亂於夷狄之國 當以模範示之 不宜相殘若是”
諳怒 曰 “吾父吾君 皆出此國 汝敢以夷狄呼之乎 不敬之甚也 罪可斬矣”
訴于理方 理方以爲不可言語罪之 又奏於尼今 尼今曰
“吾國若開則 雖云夷狄而聖人也 未開則 雖云聖人而夷狄也”
竟不罪之 諳不平 以爲不信 以辭太師之職 朝廷再三勉之
而後乃止 諳好猪肉甘酒 身肥豊不能快步 尼今每至其宅 先使其妻女進香湯
而濯足 後出拜之 於足下 奉足良久而歎 曰 “聖人之足奉之 榮矣”
其妻孫光之女 良夫之妹也 故仙門敬之 生子浹淪汾三人
皆爲祥文師 骨女之私生 諳子者亦多 卒年七十二 以伊飡禮葬之
3월 상문태사(詳文太師) <미암米諳>이 죽어, 그의 아들 <협浹>을 상문태사로 삼았다.
<미암>은 <손광孫光>의 의붓아들로 <손광>과 그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골문이 배움을 청하면 반드시 먼저 효경(孝經)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에 있어 됨됨이란 다만 효(孝)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날공捺公>과 <한창汗昌> 등은 모두 그의 어머니를 증(烝)하여 자식을 낳아서,
<미암>이 면전에서 그들을 꾸짖어 말하기를
“사람이 어머니를 증(烝)하여 자식을 낳는 것은 어찌 개와 양과 다름이 있겠느냐?”
라고 하였다.
나라의 풍속은 반대로 증모(烝母)함은 효이고, 자식을 낳는 것은 상을 주어 널리 폈다.
<미암>이 증모의 그릇됨을 니금에게 극언(極言)하여 법으로 죄를 묻도록 청하였다.
니금의 마음이 자못 움직였으나, 신후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어머니가 늙으면 다만 아들이 있을 뿐인데 사랑함을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미암>이 그 어머니에게 물어 말하기를
“어머니 역시 아들과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다정(多情)한 사람은 비록 늙었다 하더라도 아직 월경(血)이 있으니,
그런 연유로 가벼이 아들과 사통함이 있을 것이다.
이 나라의 관습은 이미 오래되어,
네가 그것을 고치려 하면 인심을 거스를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미암>이 이에 간언함을 그쳤다.
니금이 일찍이 <미암>에게 물어 말하기를
“짐은 중원(中原)의 어느 왕과 비교되느냐?”라고 하였다.
<미암>이 말하기를
“대도(大度)는 광무(光武)와 같고, 근엄(謹嚴)함은 왕망(王莽)과 같고,
호색(好色)함은 제환(齊桓)과 같고, 호인(好仁)은 한문(漢文){전한 문제}과 같고,
거현(擧賢)하는 것은 한무(漢武){전한 무제}와 같습니다.
중원에도 또한 비교할 만한 임금이 없습니다.
다만 애석한 것은 자신의 아들로 대통을 삼지 않고,
이어가지 아니함이 애석할 따름입니다.
비록 왕의 천하라 할지라도 집안을 일으키지 못하니,
영웅이 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을 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미암>이 <성기星杞>와 은밀히 통하여
<기공杞公>{미추와 성기의 아들 334년생}을 세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니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선제(先帝)는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고, 짐에게 전하였다.
짐이 선제(先帝)의 아들에게 왕위를 전함이 의(義)인데,
경(卿)은 어찌하여 사도(邪道)로 가르치고 지도하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미암>이 니금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고,
도리어 그러하였음을 사죄하여 말하기를
“요순(堯舜)의 임금이십니다. 신이 다만 시험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날공>이 말하기를
“<미암>은 간사스러운 사람입니다.
<미암>이 <성기>와 통하여 천자를 우롱하고 대법(大法)을 어지럽혔으니,
벌을 내림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미암>이 증모(烝母)함을 꾸짖은 것에 분개한 것이냐?
어질고 현명한 이는 역색(易色)하라 함이 성인의 말씀이다.
짐이 어찌 한 명의 궁녀만을 사랑하고, 상국(上國){오나라}의 현인을 해쳐야 하느냐?
너는 공언(公言)을 하지마라.
너의 말은 오(吳)나라 사람을 실지(失志)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당시 중원(中原)은 어지러움이 많아서,
<장혁張弈>, <손구孫九>, <미무米武> 등이 <미암>을 따라 왔는데
조정에서는 모두 무거운 녹봉을 주어 양성하였다.
오인전(吳人田)을 두어 <미암>을 주(主)로 삼았는데,
오나라 사람들은 미암을 군(君)으로 삼았다.
<미암>은 또 그 무리에게 하여금
그 나라의 미녀를 골라 골문(骨門)에 바치도록 하였다.
<환씨環氏>와 <비씨狒氏>와 같은 사람은 모두 <미암>이 데리고 있던 사람으로
음녀(淫女)로써 품주의 성궁(聖躬)이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오화전(五花典)을 두어, 바깥 오랑캐의 미색에 관한 일을 맡겼다.
서화(西花)라는 것은 부여(夫余)의 공녀(貢女)이고,
북화(北花)라는 것은 고구려와 말갈(末曷)의 여자이고,
남화(南花)라는 것은 가야(加耶), 금관(金冠), 월내(月奈)의 여자이고,
오화(吳花)라는 것은 오나라의 여자이고,
왜화(倭花)라는 것은 왜나라 여자다.
잔치에서 가무를 대접하게 하는데 쓰였는데,
당시 오화(五花)에겐 정하진 남편이 없어서 그런 연유로 골문이 돌아가며 음란하여,
오화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었다.
<미암>은 경전의 글귀를 대강 알고 문장(文章)이 미흡하였다.
그 신하 중에 <여현呂玄>이라는 자가 문장에 박학하여
그런 연유로 항상 해석하여 가르쳐주었다.
<여현>은 오나라에서는 향족(鄕族)으로 살며, 미암보다 귀한 신분이었다.
<미암>의 아버지가 일찍이 <여현>의 집안을 신하로써 섬겼다.
난(亂)이 오나라 지방에 미치자 <미암>이 가서 동(東){신라}으로 오라고 유혹하였다.
<여현>의 어머니가 <여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미암>은 상여(商旅)의 아들이고,
이역의 마을로 멀리 가게 되면 권세가 마음처럼 되기 어려우니 그만 두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여현>이 듣지 않고 그의 처자를 거느리고 와서
태사(太師)를 맡아 담당할 욕심이 있었다.
<여현>이 경도(京都)에 도달함에 이르자 골문(骨門)으로 다니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신하로 삼아 <여현>의 처와 자식을 모두 <미암>이 더럽혔다.
<여현>이 이에 그 어머니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여현>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미 이와 같은 운수에 도달하였으나, 재삼 그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
운명에 순종하여 힘쓰고, 때를 기다려 도모함이 옳은 일이다.”라고 하였다.
<미암>은 또 <여현>의 어머니를 첩으로 삼아 자식을 낳고
<여현>을 자식으로 대우하였다.
<여현>이 일찍이 <대훤大萱>에게 울면서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본시 귀골(貴骨)이고 <미암>은 천한 사람인데,
그런 연유로 <미암>은 문장을 알지 못하고
나를 모셔다가 배워서 골문에 강연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훤>이 그 설을 퍼트리자, <미암>이 화가 나서 <여현>을 사사로이 매질하였다.
<장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적(夷狄)의 나라에 난을 피난하여 왔으니, 모범을 보여야 함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상잔(相殘)함은 아름답지 않다.”라고 하였다.
<미암>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손광}와 나의 임금{미추}은 모두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
네가 감히 이적(夷狄)이라 부르는 것은 불경함이 지나친 것이니
가히 참수하는 벌을 줄만하다.”라고 하였다.
<미암>이 리방(理方)에게 소청하였으나,
리방이 말한 것으로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고,
또 니금에게 여쭈니
“우리의 나라가 만약 깨우치면 비록 이적이라 불린다 하더라도 성인이 될 수 있고,
깨우치지 않는다면 비록 성인이라 불린다 하더라도 이적이다.”라고 하였다.
끝내 죄를 주지 않으니, <미암>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 하여 불평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사의 직책을 사양하였는데,
조정에서 두세 번 권면하니, 후에 곧 그쳤다.
<미암>은 돼지고기와 감주(甘酒)를 좋아하여
몸이 뚱뚱하였고 시원스럽게 걸음을 걷지 못하였다.
니금이 매번 그 댁에 이르면 먼저 그의 처와 딸로 하여금
향을 달인 물을 들고 다가가 니금의 발을 씻기게 하고,
<미암>이 후에 밖으로 나와 니금의 다리 아래에서 엎드려 절하였다.
꽤 오랫동안 다리를 받들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성인의 다리를 받들어 영광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처는 <손광>의 딸로 <양부良夫>의 여동생이다.
그런 연유로 선문(仙門)이 그녀를 공경하였고,
<협浹>, <륜淪>, <분汾> 3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상문사(祥文師)가 되었다.
골녀(骨女)와 사통하여 낳은 <미암>의 자식 또한 역시 많았다.
죽은 해에 72세였고, 이찬의 예로 장사지냈다.
七月 孫述伊伐飡 米鱗稟主 米諳女也 其母呂玄妻也 諳通而生鱗
美而善歌舞 故得寵於尼今也 孫述長宣之胞弟也
7월 <손술孫述>을 이벌찬으로 <미린米鱗>을 품주로 삼았다.
<미린米鱗>은 <미암米諳>의 딸이다.
그의 어머니는 <여현呂玄>의 처로, <미암米諳>이 통하여 <미린米鱗>을 낳았다.
<미린米鱗>은 아름답고 가무(歌舞)에 능하여 니금(尼今)의 총애를 받았다.
<손술孫述>은 <장선長宣>의 포제(胞弟)다.
九月 燕皝死 其子雋立 皝母段單于女也 夢見大蠟燭十圍火光焰天而娠
廆以爲當得英子 及生果賢於諸子 代廆而立 拓之數千里
至是出獵 見神于河 而射免 馬倒而死 或云 皝殺其二弟 發心疾 落馬而死
9월 연나라 <모용황(297-348)>이 죽어,
그의 아들 <모용준慕容雋(319-360)>이 섰다.
<모용황>의 어머니는 단(段) 선우(單于)의 딸이다.
꿈에 큰 납촉(蠟燭) 10개가 하늘에서 빛나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다.
<모용외(269-333)>는 마땅히 영특한 아들을 얻을 것이라 여겼는데
태어남에 이르자 결과적으로 여러 아들보다 현명하였고,
<모용외>를 대신하여 왕으로 서서, 수천 여리의 땅을 넓혔다.
이 때에 이르러 하(河)에서 신(神)을 보고 싫어하여 벗어나고자 하였는데,
말이 넘어져 죽었다.
혹은 모용황이 둘째 동생을 죽이고 마음에 병이 나서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十月 以呂玄爲詳文師 呂玄久爲米諳所藏 至是其妻丁氏亦得尼今寵 遂以玄爲師
夫余入貢請和 許之
10월 <여현呂玄>을 상문사(詳文師)로 삼았다.
<여현>은 오랫동안 <미암米諳>에 의해 가려져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처 <정씨丁氏>가 니금(尼今)의 총애를 얻어
드디어 <여현>을 상문사(詳文師)로 삼았다.
부여(夫余)가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화친을 청하여 허락하였다.
미추왕 25년(A.D.349) 황계(黃鷄=己酉)
正月 烏興伊伐飡 陽欽再主 烏興大烏夫之子也
夫余入貢請婚 許之
정월 <오흥烏興>을 이벌찬으로, <양흠陽欽>을 다시 품주로 삼았다.
<오흥烏興>은 <대오부大烏夫>의 아들이다.
부여(夫余)가 공물을 바치고 혼인을 청하여 허락하였다.
三月 旱 尼今自責于朝廟 曰
“奢侈興歟 陰陽塞歟 百姓勞歟 臣下怨歟 武不作歟 文不興歟”
乃滅饍 副君累請加饍不許 副君乃奏於神后而勸饍 神后乃責尼今 曰 “大夫何窘小夫乎”
皆尼今不食 則副君亦效 而不食故也 后性好奢侈 宮中多玉假山珍皿
席以虎皮 服雉頭裘 八宝金冠 眞珠胡扇 又營花鳥之藝 碁草投囊?之技
與諸廢遊戱耽樂 尼今躬行儉素 潛心政事 故副君在其間兩難之
后以爲 ‘國家太平 皆朕之福 縱有少旱 不必自責
何至滅食而窘 此老妻乎 吾死則汝 必不殉於我 而使我孤行天路矣’
后頗不樂 是時京都 人物甚繁 戶至十二萬九千 黃屋大宮三十 金入大宅九十 小宅五百余
京外大宅亦百余 皆有奴婢庄園 百工興物貨豊 而尼今尙畜積 而不肯用后 累欲皆宮室
而尼今以爲不急 而停之 故后私命宅師修補而秘之 副君曰
“尼今知之 恐以爲臣與后共謀 而不告私行 臣將何得安心乎”
后乃止其役 至時尼今自責 故后自愧于心 而怒之也 尼今曰
“吾欲禪汝者久矣 可以今日禪之”
遂以重宝傳之而出居桃山 副君泣辭不已 隨至桃山 尼今命弘權擇日
依助賁古事 行禪位禮于桃山 尼今稱仙今 副君稱新今 新今乃與神后幷騎白大馬
謁祖廟 而受百官賀于南堂 新今謂百官 曰
“朕蒙神后仙今之恩 而受禪 而軍國大事 朕不能自決 皆稟於仙今 而決之”
夫余太子 謹須入朝 以白發女 阿尒妻之 行吉 鮑祠
3월 가물었다.
니금(尼今)이 조정에서 자책하여 말하기를
“사치(奢侈)는 일어나고, 음양(陰陽)은 막히고, 백성은 고생함이 많고,
신하는 원망함이 많으며, 군의 사기는 일어나지 아니하고, 문(文)이 흥미를 잃었다.”
라고 하며 이에 반찬을 먹지 아니하였다.
부군이 여러 차례 반찬을 들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부군(副君)이 이에 신후에게 반찬을 권하도록 여쭈었다.
신후가 이에 니금을 꾸짖어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속이 좁은 소인배처럼 행동하느냐?”라고 하였다.
아마도 니금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
곧 부군에게 효과가 나타나 식사를 하지 않는 까닭이다.
후(后)가 사치를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궁중에서 옥(玉)을 사용함이 많고,
가산(假山)을 쌓고, 진귀한 그릇을 사용하였으며, 호피(虎皮)를 깔고,
꿩의 머리털로 곤룡포를 지어 입으며, 8가지 보석으로 금관(金冠)을 만들고,
진주(眞珠)와 산호(珊胡)로 부채를 만들고,
또 화조(花鳥)의 재주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기초(碁草)를 낭(囊)에 던지는 기술을 보이며
여러 폐인(嬖人)과 유희(遊戱)하거나 탐락(耽樂)하였다.
니금은 몸소 검소함을 행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정사(政事)를 행하였다.
그런 연유로 부군이 둘 사이에서 어려워하였다.
후(后)는
'국가의 태평은 모두 나(朕)의 복이며,
비록 적은 가뭄이 있을지라도 자책하는 것은 불요하며,
어찌 식사까지 줄이며 궁색하게 구는 것인가?
이 늙은 아내 때문이로구나!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나를 따라 죽지 않을 것이니,
나로 하여금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외롭게 할 것이다'
라며 후는 자못 즐거워하지 않았다.
당시 경도(京都)에는 인력과 물자가 심히 번성하였다.
호(戶)가 129,000여 호에 이르고, 황옥대궁(黃屋大宮)이 30개,
금입대택(金入大宅)이 90개, 금입소택이 500여개,
경도의 밖에는 금입대택이 100여개 있었다.
모두 노비와 장원(庄園)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공(百工)이 일어나고, 물화(物貨)가 풍성하였다.
니금이 항상 축적(畜積)하고 사용함을 들어주지 않았다.
후가 여러 차례 궁실을 고치고자 하였으나, 니금이 급하지 아니하다 하여 만류하였다.
그런 연유로 사사로이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수보(修補)함을 비밀리 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니금이 궁실을 수리함을 알면,
아마도 신(臣)과 후(后)가 공모하였다 생각할 것이고,
니금에게 고하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행하였으니
신이 장차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후가 이에 부역을 그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니금이 자책한 까닭은
후가 스스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는 것이나 오히려 노하게 한 것이다.
니금이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선위(禪位)를 하고자함이 이미 오래이니,
오늘 너에게 선위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끝내 새보(璽寶)를 <유례>에게 전하고 궁을 나가서 도산(桃山)에 있었고,
부군은 울면서 사양할 뿐이었다.
곧바로 도산에 이르러 니금이 <홍권弘權>에게 명하여 택일(擇日)하게 하였다.
조분(助賁)의 고사(古事)를 따라서, 도산에서 선위의 례(禮)를 행하였다.
니금은 선금(仙今)이라 칭하고, 부군은 신금(新今)이라 칭하였다.
신금이 이에 신후(神后)와 백대마(白大馬)를 함께 타고 조상의 사당을 알현하고,
남당(南堂)에서 백관(百官)의 축하를 받았다.
신금이 백관들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은 어리석으나 신후와 선금의 은덕으로 선위를 받았다.
군국대사(軍國大事)는 짐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니
모두 선금에게 품(稟)하여 결정하겠다.”라고 하였다.
부여(夫余)의 태자 <근수謹須>{근구수왕}가 입조하여
<백발白發>의 딸 <아이阿尒>{침류왕의 모친}를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七月 石宗伊伐飡 勝華稟主 石宗翊宗子也 蘭石生也 勝華有寵於尼今
故新今欲爲仙今而蒨之 仙今自是優遊 國中山川 察民疾苦 擧賢養才 史在仙志
儒禮尼今十三年殉崩于新林 仍花宮爲大陵 廟曰明堂 仙今身長八尺
鴻偉有德 家家奉像祀之 新今助賁子也 阿召禮后夜禱樹王呑星光
而受幸而娠 生而有聖德 仙今愛之 妻以長女宣秋 尋爲嗣 遂傳大位
7월 <석종石宗>을 이벌찬으로 <승화勝華>를 품주로 삼았다.
<석종石宗>은 <익종翊宗>의 아들이고 <난석蘭石>의 소생이다.
<승화勝華>는 니금(尼今){미추}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그런 연유로 신금(新今)이 선금(仙今)을 위로하고자 하여 품주로 삼았다.
선금은 이 때부터 우유(優遊)하며 나라 안의 산천을 유람하고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피며,
현명한자를 천거하고, 재주 있는 문필가를 양성하였다.
선지(仙志)에는 유례니금 13년(AD.362) 신림(新林)에서 <아이혜>를 따라 죽었고,
이에 화궁(花宮)을 대릉(大陵)으로 하고, 사당(廟)을 명당(明堂)이라 이름 하였다.
선금의 신장(身長)은 8척이고, 크고 위대한 덕이 있어
집집마다 상(像)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신금은 <조분助賁>의 아들이고,
<아소례阿召禮>후가 밤에 수왕(樹王)에게 기도하면서 별빛을 삼켰는데,
<조분>의 행차를 받아 임신하여 태어났다.
성덕(聖德)이 있었으며,
선금이 사랑하여 장녀 <선추宣秋>를 시집보냈고 후계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끝내 대위(大位)를 전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大赦天下
8월 대가배(大嘉俳)를 행하고, 천하의 죄인을 사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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