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沸流)

남당유고/백제 2016. 8. 16. 06:31

 

 

<우태優台>왕의 장자다.

 

사람됨이 순하고 인자하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있었다.

 

 

 

 

원년(BC18) 계묘

 

 

정월 <비류沸流>가 동쪽으로 가다가

남으로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溫祚>는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과 서남으로 가다가 패하(浿河)를 건넜다.

 

또한 미추홀(彌鄒忽)에서 모여서,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

 

 

5월 동명묘(東明廟)를 세웠다.

 

 

7<유리類利><송화松花>를 후()로 하였다.

 

<아이阿爾>가 시새움하여 태후와 미추홀로 도망하여 돌아오고자 하였다.

 

 

<을음乙音>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소인은 어려움을 참지 않습니다.

 

 큰 계책은 후()의 도리로써 부왕(夫王)의 뜻을 순종하여 따름과 같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을음>이라는 사람은 <우태優台>의 어머니 을씨(乙氏)

 

사부(私夫)와 통하여 태어난 사람이다.

 

침중(沈重)하며 식견(識見)이 있었다.

 

을송(??) - 을류(BC96-BC41)

금와(을류) - 우태(BC68?-BC41)

연타발(을류) - 소서노(BC66-BC6)

을족(을류) - 을음(BC57? -23)

 

 

일찍이 소서노에게 <주몽朱蒙>을 맞이하여 남편으로 삼으라고 간언하였고,

<유리>를 받아들이도록 간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도(古都, 졸본)에 머무르며, 태후를 위로하였다.

 

 

 

2(BC17) 갑진

 

3월 태후와 <을음乙音>이 미추홀로 돌아왔다.

 

이해 정월에 왕이 말갈이 북쪽 경계에 있고,

 

(말갈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므로,

 

병장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으고, 막아 지킬 계책을 연구하였다.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을음>이 아니면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을음>을 불러 우보(右輔)로 삼았다.

 

태후 역시 이 기회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 기세에 거듭하여 구신(舊臣)들 중에 도망하여 온자가 육지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을음>에게 나라의 안팎의 병마사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소서노, 비류, 온조가 함께 남하한 것으로 되어있다.

 

 

왕이 여동생 <감아甘兒>를 왕의 동생 <온조溫祚>에게 시집보냈다.

 

감아는 <주몽朱蒙>왕의 딸이다.

 

말을 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유리><감아>와 통()하고자 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아이阿爾>후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속이는 것을 보았으나,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너는 마땅히 태후를 따라서 같은 어머니의 오빠에게 귀의(歸依)하여야 한다.”

라고 하였다.

 

<감아> 또한 마음속으로 <유리>가 의롭지 않고 속임이 많음을 더러워하였다.

 

태후를 따라서 미추홀로 돌아왔다.

 

이때에 이르러 <온조>와 더불어 동명수(東明樹) 아래에서 혼인을 하였다.

 

군신들에게 큰 잔치를 벌였다.

 

태후가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고,

왕과 황후에게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그 노래의 가사는

 

나의 어머니를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나는 나의 동생을 매우 사랑하여,

 나의 여동생을 품도록 하였다.

 

우리의 자손들에게 즐거움이 무궁무진하기를 바라니,

후인들아, 효도와 우애를 논하려거든 반드시 이 노래를 교훈으로 삼아라.”고 하였다.

 

 

 

 

 

3(BC16) 을사

 

5<감아甘兒><다루多婁>를 낳았다.

 

당시 왕후 벽라(碧蘿)는 딸 셋을 낳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태후가 <다루>를 취()하여 왕자로, 벽라의 딸 와씨(蛙氏)를 처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입하여 왕이 <온조>에게 말갈을 격퇴하도록 명하였다.

 

<감아> 역시 갑옷을 입고 <온조>를 따라갔다.

 

굳센 병사를 골라 출병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부딪쳤으나 적을 크게 깨뜨렸다.

 

적들 중에 살아 돌아간 자는 열 명중 한둘이었다.

 

 

왕이 이에 <온조><감아>에게 상을 내리며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나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나라의 쌍 보배로다!”라고 하였다.

 

태후궁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이때 <소서노> 51세, <비류> 32세, <온조> 29세, <감아> 23세, <다루> 1세이다.

 

 

11<유리類利>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태후에게 바치며 환도하기를 청하였다.

 

태후가 말하기를

 

듣자하니 너의 왕이 <송화松花>의 상을 당했다고 하더니

 이번엔 <화희><치희>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나의 딸의 마음을 다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호색한이니 나는 (너희 왕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선왕(先王, 주몽)은 비교할 것이 없는 영웅으로,

오로지 나만을 좋아하여 다른 여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너희 왕은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은 몹시 두려워하며 돌아갔다.

 

 

 

 

4(BC15) 병오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병이 들었다.

 

왕과 후가 부락(部落)을 돌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구휼했다.

 

 

8월 사신을 낙랑(樂浪)으로 보내어 사이좋게 지냈다.

 

낙랑은 진한(辰韓)이다.

 

우리의 동남쪽 경계에 있으면서 함께 말갈을 막았는데,

마한(馬韓)을 섬겼던 연유에서다.

 

 

 

 

 

5(BC14) 정미

 

4월 왕의 동생 <온조>를 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당시 마한 정부는 쇠락하여 말갈, 낙랑, 가야가 점점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왕으로 하여금 말갈과 낙랑을 제어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북 100리의 땅을 허락하였다.

 

또 철을 캐내어 병과(兵戈, 무기)를 주조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온조가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돌며 어루만지다가 신록(神鹿)을 잡았다.

 

 

11월 마한(馬韓)이 사신을 보내어, 왕녀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하여 사양하였다.

 

마한의 임금과 신하들은 탐락(耽樂)하여 국민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낙랑과 가야가 해년마다 미녀를 바치며 그 봉해진 경계를 침입하였다.

 

강역이 날마다 줄어들었는데, 나라를 다스리려는 뜻이 없었다.

 

감아가 아들 <마루馬婁>를 낳았다.

 

 

 

 

6(BC13) 무신

 

왕후 <벽라碧蘿>가 죽었다. 왕이 애통해 하였다.

 

군신들이 새로운 후()를 받아들이기를 청하였다.

 

 

왕이 참지 못하여 말하기를

 

부부사이에는 마땅히 따르는 도리가 있으나, 비록 따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잔인하게도 뜨거움이 채 식지 않았는데,

재취(再娶)하라고 말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태후가 듣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내가 비류에게 죄가 있음이로다.”라고 하였다.

 

 

온조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머니가 재혼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형이 재혼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상줄 만한 선()중의 선(최고선)입니다.

 

아마도 형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침이 있어 (때가) 아닐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벽라>는 행인국의 왕녀로써 경국지색의 아름다움이 있고

태임지덕(太妊之德, 太任은 주() 나라 왕계(王季)의 비()이며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姙)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효도하고 우애 있고 연애(戀愛)함이 능하여,

<비류>로 하여금 마음으로 화목하게 사귀도록 하였다.

 

큰 어려움을 당하여 미혹당하지 않았으며,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친히 (음식을) 먹이는 일을 집정하였고,

이로써 장사(將士)들을 위로하였는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 잠잘 때까지 피로(疲勞)하였다.

 

아마도 참고 견디어 마침내 병을 얻어 죽었다.

 

그런 연유로 군신의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아파하지 않음이 없었다.

 

춘추 34세였다.

 

딸 셋이 있었는데 모두 절세미인이었다.

 

마한왕이 수차례 사신을 보내어 딸을 얻기를 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온조의 아들 <다루>를 아들로 삼아 나라를 전하고자 하였다.

 

 

죽기에 직면하여 (벽라가) 왕에게 힘써 말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만약 아이들(兒輩, 후계)의 문제에 관한 국정이라면 온조에게 맡기고,

집안일(內事)에 관한 온갖 일은 여자의 순서()에 따라 맡기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당시 왕의 장녀 <총희葱姬>가 이미 나이 16세로,

능히 후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3월 왕과 <총희葱姬>가 더불어 북쪽의 군읍(郡邑)을 살피며,

수졸(戍卒)들을 위로하였다.

 

<감아甘兒>에게 (궁으로) 들어와 여자의 일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8(BC11)년 경술

 

 

2월 말갈병 3천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10일 동안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식량이 다하여 돌아가기를 기다려,

날랜 군사를 선별하여 대부현(大斧峴)까지 추격하였다.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500여명이었다.

 

 

7월에 마수성(馬首城)과 병산책(甁山柵)을 세워, 낙랑과 우호를 잃었다.

 

 

 

 

 

10(BC9) 임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神鹿)을 사로잡아 마한에 보냈다.

 

 

10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여 왕이 병사 200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 상류에서 막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장수가 되어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하니, 적이 이에 물러갔다.

 

 

 

 

 

11(BC8) 계축

 

4월 낙랑이 말갈을 부추겨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명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의 두 책()을 세워 낙랑이 침입하는 길을 막았다.

 

 

 

 

 

13(BC6) 을묘

 

2월 늙은 할멈(, 소서노)이 남자(, 장수)가 되자,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이 동명수왕(東明樹王) 아래에서 제사()를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후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춘추 61세였다.

 

나라사람들이 소서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후는 연타발(延陁勃)대왕의 셋째 딸로 키가 크고 아름다웠다.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형세가 있어 수차례 난인(卵人, 영웅)들을 길렀다.

 

 

우태(優台)왕과 더불어 졸본(卒本國)을 다스려 인심을 얻었으며,

또 주몽(朱蒙)왕과 고구려국을 다스리며 또한 나라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며,

유리(類利)가 배반함에 이르러 다투지 않고 나라를 맡겼다.

 

또 두 아들과 남쪽으로 건너와 백제국을 다스렸다.

 

태후는 3(졸본, 고구려, 백제)의 백성들에게 모두 신처럼 존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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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