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諱)는 <구수仇首>이며, <초고肖古>왕의 장자로 신장이 7척이었다.

 

위의(威儀)가 훌륭하고 뛰어났으며, 정치를 행함에 어질고, 법을 집행함에 밝았다.


 

 

구수왕 원년 갑술(A.D.254)

 

3월 매비(妹妃) 소내(素嬭)를 후로 세웠다.

 

이때 전태후 <전씨> 58세, <보고> 54세, <여물> 46세, <초고> 41세,

구수왕 25세, 왕비 <소내> 23세, <구내> 18세, <고이> 20세, 태자 <사반> 5세이다.  


 

 

 

구수왕 2년 을해(A.D.255)

 

2월 활쏘기에 능한 장정을 골라 뽑아 신기감(新騎監)에 속하게 하였다.


 

 

 

구수왕 4년 정축(A.D.257)

 

7월 구궁(龜宮)태후 <보고宝皐(201-257)>부인이 죽었는데 춘추 57세였다.

 

후(后)는 <공손도公孫渡>왕의 막내로 경국지색의 아름다움과 문모지덕이 있었다.

 

<구지仇知>, <초고肖古> 두 임금을 섬겨 다섯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 때에 이르러 구원(狗原)에서 태왕(太王){초고}과 젖었다가

병을 얻어 공실(空室)에서 죽었다.


 

 

 

구수왕 6년 을묘(A.D.259)

 

7월 지진이 있었다. 신라의 변두리 마을을 침공하였다.


 

 

 

구수왕 7년 경진(A.D.260)

 

10월 백부 <여물餘勿>공이 죽었다.

 

태왕(太王){초고}의 형으로 태백(太伯)지덕으로 나라를 양보하고

한가하게 조용히 살았다.

 

사람의 장단점을 논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방사(方士)무리와 몰래 선도(仙道)를 구하였다.

 

태왕이 <여물>공을 스승으로 공경하였고,

<여물>공의 셋째 딸을 소후(小后)로 삼고 존경하여 말하기를

선구태상(仙舅太上)이라 불렀고, 나라사람들은 북원대왕(北院大王)이라 불렀다.


 

 

 

구수왕 8년 신사(A.D.261)

 

4월 나라사람들이 교역 외에 사적으로 통하여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물품의 대가로 여색(女色)을 매매하여

국정(國情)이 손해를 보게 되어 엄하게 수로(水路)를 막았다.


 

 

 

구수왕 9년 임오(A.D.262)

 

5월 태후 전씨(田氏)가 병이 들어, 나라안팎의 죄수(罪囚)들을 사면하였다.


 

 

구수왕 11년 갑신(A.D.264)

 

6월 왕이 죽어 태자 <사반沙伴>이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 정사를 담당할 수 없어,

태왕의 명으로 왕의 동생 <고이古爾>에게 왕위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태자를 도와 섭정함으로 인하여 이에 <소내素嬭>후에게 장가들게 하였는데

멀지 않아 태자가 죽어 드디어 대위(大位)를 정하게 되었다.

 

<구수仇首>왕은 총명(聰明)한 자태로 신위(神威)가 순수하여,

열심히 노력하여 정치를 하려 하였고, 화가 나면 식사를 잊어 버렸다.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정사를 처리하여,

결국 성스러운 몸을 망쳐 수명이 단지 35세에 끝이 나니,

나라 사람들이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고이>가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사반>을 내쫒고 왕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때 <고이>는 30세, <사반>은 15세이다.

<고이>는 <초고>의 아들이고, <사반>은 <초고>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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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