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諱)는 <소고素古>이며, <구지仇知>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체격이 크고,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

 

어떤 일에 임하여 가벼이 결정하지 않았으며,

<고시古尸>와 <전씨田氏>가 감히 권세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것을 칭송하였다.


 

 

초고왕 원년(AD.226) 병오

 

7월 어머니 전씨(田氏)를 높이어 태후로 하였다.

 

이때 태후 <田씨> 30세, <고시古尸> 62세?, 초고왕 13세,

<勿씨>49세, <보고宝皐> 26세, <백고>와 <보고>의 아들 <소沼> 7세?이다.


 

 

 

초고왕 2년(AD.227)정미

 

8월 신라의 조비천성(助比川城)을 깨뜨리고 1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신라가 또 병사를 이끌고 우리의 한수(漢水)를 핍박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사로잡은 포로들을 돌려주었다.


 

 

 

초고왕 3년(AD.228) 무신

 

5월 대방왕 <공손공公孫恭>이

전왕(前王){공손강}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에게 양위를 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경사를 알렸다.

 

왕이 구궁(龜宮)으로 행차하여, <보고宝皐>부인에게 잔치를 열었다.

 

<보고宝皐>가 슬피 노래하였다.

 

왕이 가엽게 여기어 구궁에서 머무르며, 정을 통하였다.

 

이때부터 왕의 행차가 거듭하였다.


 

 

 

초고왕 4년(AD.229) 기유

 

4월 <보고宝皐>가 왕의 딸 <구씨龜氏>를 낳았다.

 

왕이 좌평 <사시沙市>의 딸을 거두고, 태후 <전씨> 또한 증(烝)하였다.

 

<사씨沙氏>는 태후의 비(婢){여종}다.

 

<전씨>가 왕이 <보고>를 사랑함을 투기하여,

스스로 <사씨>를 매개로 하여 끌어들여 자기에게 이르게 한 것이다.


 

 

 

초고왕 5년(AD.230) 경술

 

8월 <사씨沙氏>가 왕의 아들 <구수仇首(230-264)>를 낳았다.

 

 

9월 <사시沙市>를 상좌평(上佐平)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맡기고,

<오후烏候>를 우좌평(右佐平)으로 삼아 병사(兵事)를 맡기고,

<부륜富輪>을 좌좌평(左佐平)으로 삼아 비밀스러운 일을 맡겼다.

 

태공 <고시古尸>를 소웅도(小熊島)로 유배 보내고, 태후는 <팽선彭宣>가로 옮겼다.

 

 

10월 장수를 보내어 신라의 국경의 마을을 침략하여 관청의 창고를 약탈하였다.

 

 

12월 조의사인(皀衣舍人) <진가眞可>가 왕을 달래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영명(英明)한 자태로,

일찍이 <고시古尸>의 간악함을 깨뜨리고 부왕의 수치를 씻었으니 옳음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어머니를 원수로 대한 왕은 없으며,

만약 그 때 태후가 아니었다면, 폐하께서 어찌 왕위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앞으로 어떤 날 헤아릴 수 없는 날이 있어,

즉 태후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 함께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에 눈이 내리는 밤임에도 무릅쓰고 <팽선彭宣>가로 행차하여 태후와 함께 돌아왔다.


 

 

 

초고왕 6년(AD.231) 신해

 

2월 태후궁을 새로 지어 상궁(上宮)이라 불렀다.

 

대방인 <초모焦毛>등을 불러 서원(西院)에서 도장과 병장기를 주조하기에 이르렀다.



 

 

초고왕 7년(AD.232) 임자

 

4월 석부인(石夫人) <진씨眞氏>가 딸 <소내素嬭>를 낳았다.

 

혹은 태후가 낳았다고도 한다.

 

진씨궁을 세워 적유궁(赤柔宮)으로 하였다.


 

 

 

초고왕 10년(AD.235) 을유

 

1월 상궁(上宮){전씨}가 아들 <고이古爾(235-286)>를 낳아,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3월 태공 <고시古尸>를 내신원(內新院)에 옮겨 처음과 같이 받들어 모셨다.

 

왕의 여동생 <소리素利>, <소원素元>,

남동생 <소대素大>, <소인素仁> 등을 봉하였는데,

<소대素大>와 <소인素仁>은 곧 <고시古尸>의 소생이다.


 

 

 

초고왕 12년(AD.237) 정사

 

5월 대방왕(帶方王) <공손연公孫淵>이 나라이름을 연(燕)으로 고쳤다.

 

한병(漢兵){조조의 魏兵}을 대천하(大川河)에서 크게 물리쳤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사씨沙氏>가 왕의 딸 <구내仇嬭>를 낳았다.


 

 

 

 

초고왕 13년(AD.238)  무오

 

2월 상궁(上宮){전씨}가 딸 <고내古嬭>를 낳았다.

 

 

8월 위(魏)가 연(燕)을 크게 깨뜨렸다.

 

燕왕 <공선연公孫淵>과 태자 <공손수公孫修>가 살해를 당하였다.

 

왕의 동생 <소沼>를 왕으로 세워 대방왕으로 삼고,

왕에게 구원을 청하여 군사 5천을 일으켜 나아가게 하였다.


 


 

초고왕 14년(AD.239) 기미

 

3월 대방인(帶方人) 3천명을 나라의 서쪽으로 이주시켰다.

 

 

7월 왕이 서쪽을 순행하여 패하구(浿河口)에 이르렀다.


 

 

 

초고왕 16년(AD.241) 신유

 

정월 <사씨沙氏>가 왕의 딸 <태내太嬭>를 낳았다.

 

대방인 <공손양公孫讓>에게 종실(宗室)의 위계를 다시금 정하도록 하여,

공경(公卿)의 예의(禮儀)에 버금가게 하였다.



 

 

초고왕 22년(AD.247) 정묘

 

5월 왕도의 우물이 말라, 백성들에게 하천을 준설하여 물을 취수하도록 명했다.


 

 

 

초고왕 23년(AD.248)  무진

 

2월 궁실을 중수(重修)하였다.

 

장군 <진격眞格> 등에게 명하여 신라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박(朴)씨인 아달라가 죽어 석(昔)씨인 벌휴가 섰다.

백제와 신라의 국경 분쟁은 탈해가 시작이니

아마도 백제는 박(朴)씨와는 골녀를 주고 받으며 가깝게 지내고

석(昔)씨와는 소원한 관계였을 것이다. 


 

초고왕 24년(AD.249) 기사

 

7월 신라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10월 물태후(勿太后){물씨}가 춘추 72세로 죽었다.

 

태후는 신라의 진골(眞骨)이며,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크며 자애로웠으며,

전태후(田太后)가 어머니로 섬겼다.

 

나라사람들이 태산처럼 중히 여겼다.


 

 

 

초고왕 25년(AD.250) 경오

 

8월 신라 원산성(圓山城)을 공격하여,

와산(蛙山)에서 결곡(鈌谷, 신라본기 缶谷) 대첩을 이루었다.

 

가야(加耶)가 사신을 보내어 명주(明珠)를 공물로 보냈다.


 

 

 

초고왕 26년(AD.251) 신미

 

2월 태공 <고시古尸>가 내신원(內新院)에서 죽었다.

 

왕의 동생 <소대素大>를 상을 맞이하러 보내어

한성(漢城) 서원(西院)으로 되돌려 장사 지냈다.

 

<고시>는 아름다운 풍채(風采)에 기묘한 계책을 좋아하여,

대사(大事)에 임하여 참지 못하는 성품이 있었는데,

왕이 <고시>의 뜻을 제어하는 바가 있었다.

 

오로지 주색(酒色)으로 스스로 즐거워하며 생애를 마쳤다.

 

죽음에 임하여 그 아들 <소대>에게 몸을 일으키라 명하고,

동쪽을 향하여 왕과 태후를 빌다가 절명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처음부터 숙부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외의(外議){세인의 평가}에 구애받아,

그를 봉한 것이니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대>가 말하기를

 

“아버지는 이미 스스로 형(兄)의 큰 은혜를 알고 스스로 죽고자 한 것이니,

여한(餘恨)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루터기 무리들이 어려서 근심함이 있어 신에게 부탁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엽호(獵戶) 800을 <소대>에게 내려 그 그루터기를 기르도록 하였다.




 

초고왕 27년(AD.252) 임신

 

9월 왕에게 병이 있어 태자 <구수仇首>에게 감국(監國)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나랏일에서 권태를 느끼어

날마다 방사(方士) 장정과 승려 무리와 신선에 대하여 담론(談論)하며

나라의 대정(大政)을 태자에게 맡겼다.

 

태자가 강명(剛明)하여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능히 살펴보니

그런 까닭에 상하가 상득(相得)하여 국태안민(國泰民安)하여

나라 안의 창고(倉廩)가 충실하게 되었다.

 

대방(帶方)사람들이 와서 보고 귀의하기를 원하는 자가 날마다 늘어갔다.


 

 

 

초고왕 28년(AD.253) 계유

 

3월 구원(狗原) 행궁(行宮)을 설치하였다.

 

가야(加耶) 여군 <미리신美理神>이 사신을 보내어 명주와 용주(龍舟)를 바치고

왕자로 남편을 삼고, 활과 화살, 창과 칼을 얻기를 청하여

왕이 큰 칼 7자루와 창 50개를 주어 보냈다.


 

 

 

초고왕 29년(AD.254) 갑술

 

정월 왕이 태자 <구수仇首>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스스로 산궁(山宮)과 구원(狗原)에서 거처하며 제사를 주재하였고,

태상신왕(太上神王)이라 불렀다.

 

태자가 남궁(南宮)에서 즉위하여 친히 내외병사(內外兵事)를 집정하고,

<사씨沙氏>, <백씨苩氏>, <진씨眞氏>, <해씨解氏>의 작위를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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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