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태황후의 휘는 <유화柳花(BC74-BC24)>이니 성은 <>씨이다.

 

<>씨는 세세토록 곤연(鯤淵)의 장옥(長屋)을 지켜 와서 이로써 성()을 얻었더니,

장옥이란 것은 제사하는 못에 있는 집이다.

 

황조(皇祖)<옥문屋文(BC147-BC78)>대왕의 모후 <>씨가

못가에서 박사(얇은 비단)를 빨래하였다.

 

때는 한여름을 맞은지라 벗고 누워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큰 거위가 다가와서 교접하여 아들을 낳으니.

잔등이에 푸른 혹이 있고 큰 거위의 문양이어서 이에 <옥문屋文>이라 이름을 지었다.

 

성장하여서는 천제(德帝BC140-BC111)를 효성으로 섬기어

<남려南閭>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애종愛鍾>의 난리를 당하여서는 <화상禾相(BC120?-BC66)>과 더불어

<애종愛鍾>을 주살하고 <법제(BC138-BC77)>를 맞이하여 세워서

그 공으로 청하백(靑河伯)이 되고

명에 따라 구가(狗加)를 세습하니 선상(仙相)이 되었다.

 

<남려南閭>의 난은 BC128년 예맥의 군장 <남려南閭>가 한에 투항하여

한 무제가 지금의 천진일대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을 말하며

<애종愛鍾>의 난은 BC111년에 <애종愛鍾>이 반역하여 덕황을 시해한 난을 말한다.

 

<옥문屋文>의 딸 <옥완屋玩(BC133?-)><양천羊川(BC140?-BC79)>의 비가 되어

<양성羊聖(BC118-BC66)>을 낳고

<옥인屋因(BC118-BC59?><오산奧山(BC118?- )>의 비가 되어

<호인好人(BC94-BC24)>을 낳으니

모두 <수제漱帝(BC118-BC59)>의 후와 비이다.

 

<수제>는 초년에 환후가 많아서 단지 11비로 하였고,

<옥인>을 비로 하고 <양성>을 후로 하니, <옥인>은 제와 기갑을 같이 하였다.

 

제는 열 넷부터 <옥인>을 총애하여 30여년이 되니

궁중의 일들이 그 손에서 결정됨이 많았다.

 

누에 쳐서 천을 짜고 양털로 담요 만들기를 능히 잘 하여서

제의 곤룡포와 면류관이 그 손에서 나왔던 까닭에,

제께서 꽤나 중히 여기어 누님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옥인>이 늘 어찬을 정결히 하고 약과 차를 맡아서

옥체를 보호한 공이 막대하였던 까닭에,

그의 아들 <오천奧川(BC100?- )>이 맏이 공주 <해황解凰(BC100- )>과 혼인하여

봉함을 받고 순노후가 되었다.

 

순노의 땅이 광대하여 옥저와 동해가 모두 이에 속했다.

 

<옥문><옥인>의 아비로 공훈이 높고 중하여서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어 앉아서 천하를 지키다가

나이 70에 환후가 위독하여 자녀들에게 충성하라고 가르치고 죽었으니,

법제 34년 계묘(BC78)해이었다.

 

<수제>께서 즉위하여(BC76) 봉작을 더하여 청하대왕으로 삼고,

<옥인>의 어미 <>씨로 태비를 삼고,

<옥두진屋斗辰(BC92-BC45)>의 어미 <을란乙蘭>을 청하 왕비를 삼고

아들 <옥두진>을 구가(狗加) 청하백으로 봉하였다.

 

<옥두진>의 처 <호인>을 청하부인으로 봉하고 총애와 승은을 누차 더하여 주니,

<옥인>의 딸이었다.

 

오산(옥인) - 호인好人(BC94-BC24)(옥두진) - 유화(BC74-BC24)

 

화양지춘(정미,BC74)에 성모를 낳으니,

하늘에 오르지 못한 큰 어미요 <>의 어미이고 <>의 처이다.

 

<서왕모>의 미모와 <여왜>의 덕을 겸비하였더니,

아름답기 넉넉하며 늘씬하였으며 재주와 덕은 하늘이 이루어놓았음이고

여인의 도리는 저절로 닦였음이었다.

 

<양길>의 난리로 제께서 큰 배 한 척으로 청하에 이르니,

때에 성모가 꽃다운 16살에 달하였다.

 

제께서 천후로 봉하고 애지중지하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니 원앙새 암수와 같았다.

 

구름이 무겁고 비가 깊어서 꽃이 피고 꽃이 지고,

5룡이 옹위하며 곡학이 보좌하고

그 가운데 한 선제(仙帝)께서 기린 등에 봉황안장을 얹어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성모께서 연못가에 계시다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가서 맞이하였다.

 

선제께서 다가와 껴안으시고 못가의 벌판에서 합환하니.

온몸에 하늘향기 가득함에 황홀하여 신음하였다.

 

선제께서 용으로 변하시어서 한 거대한 용이 성모를 휘감아 교접하고

뿌연 물줄기가 헌걸차게 뿌려졌다.

 

성모께서 놀라 깨어나니, 한 자락 남가일몽이었다.

 

부황(夫皇)이 뱃속에 계심이니 기쁘고 행복함을 이기지 못하고 꿈 얘기를 하였더니,

 

수제께서 이르시길

 

“60평생이 일거에 여기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구나."라고 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지사방에 절하고 또한 성모에게 절하며 이르길

 

부여 천년대업이 내 처의 뱃속에 있으니,

내 처는 삼가고 조심하여 뱃속의 성자를 기르시오."라고 하였다.

 

성모께서는 답하시길

 

첩 또한 금번의 방사가 결코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있사오니

태교를 잘 지켜서 폐하의 성자를 탄생하겠나이다."라고 하고

잠자리 하나 먹는 것 하나에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수제>께서 우연히 득병하여 저 흰 구름을 타고 제의 본향으로 돌아가시니

성모께서는 실성통곡인사불성하다가

복중의 성자를 위해 아픔을 참고 슬픔을 절제하며

애처로이 조신하시는 나날을 소요하였다.

 

이때, 동부여왕 <금와>가 자신의 처 <해영>를 잃어서

천하절색을 구하여 처를 삼고자 하였다.

 

양가(羊加) <오문烏文>이 상주하여 아뢰길

청하백 <옥두진>의 딸 <유화>가 침어낙안(沈魚落雁)할 미색이고,

<옥인><양성>의 바탕을 두루 갖추었더니,

천고의 일색이고 만대의 훌륭한 여인입니다.

복이 다하였던 천제 <수황>이 거두어서 천후로 삼았다가

기혈이 다하여서 서거하였으니, 그녀의 미모와 왕성함은 알아줄만 합니다.

폐하께서 이 여인을 얻으시어 짝으로 삼으시면

나라가 흥성하고 가문이 번창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금와>가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기쁨에 들떠서 이르길

 

하늘의 뜻이로다! 하늘의 뜻이야! 하늘이 이 후를 내게 내리심이니,

어찌 혼인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옥두진>을 우발수로 찾아가니.

<금와>의 어미 <을원><두진>의 어미 <을란>의 여동생이다.

 

<금와>가 어릴 적에 고운 마음으로 <옥두진>과 임금의 정분을 맺고

문경지우(서로의 목을 베어도 나무라지 않을 생사를 같이하는 벗)를 약속하였다.

 

<옥두진><금와>를 집으로 초치하여서 <호인>을 안겨주었다.

 

<해부루>가 동부여의 왕위에 오르니

<옥두진><금와>를 천거하여 <해부루>를 곁에서 모시는 신하로 하였다.

 

<해부루>의 딸 <해영>과 좋아하여 부부가 되었고,

<해부루>가 죽은 후에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씨가 정사를 주무르고 <금와>는 시위(尸位)로 있어서

<옥두진>과 서로 만날 기회가 없더니,

이제야 찾아와서 방문하니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때, 성모는 봄기운에 노곤함이 엄습하여 서안(書案)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는데,

부황(夫皇)이 곁으로 오셔서 어루만지며 위로하며 이르길

 

지금 내 처에게는 좋은 운세가 다가왔소. 아이를 잃지 말고 지켜내시오."

라고 하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더니,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문간 밖에서 사람들과 말들의 소리가 났다.

 

<금와>가 몸소 방문하였음을 듣고는

자애로운 어미 <호인>궁과 함께 <금와>왕을 나가서 알현하였다.

 

<금와>는 성모가 초승달 같은 눈썹과 백설 같은 살결에

옥 같은 얼굴임을 보더니만 멍하고도 황홀하여

다가와서 손으로 만져보면서 이르길

 

천후의 미모가 <서시>보다 더하구려!"라 하고는 끌어안고 입술을 드리웠다.

 

성모가 손님에게 빌면서

 

첩이 불행하여 천제의 상중에 있고 뱃속에는 성자를 잉태하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숙부께서는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절개 지킴을 용서하여 주세요."라고 하였다.

 

<옥두진>이 말하길

 

폐하께서 너를 위해 몸소 찾으신 것인데, 감히 정절을 지킴을 일컫느냐?

 

말없이 잠자리를 모셔서 북부여의 천후인 네가

동부여의 천후가 되면 역시 좋지 않겠느냐?

 

<>태후께서 2대의 후를 하셨음은 <수황>을 위한 계책이었고,

 

너의 어미가 천비가 된 것은 너를 위한 계책이니.

너는 성자를 임신하고서도 예쁘니 강한 이들의 도발을 면할 수 없다.

 

나의 폐하가 아니면 그 누가 너를 지켜주고 성자를 보호하여줄 수 있겠느냐?"

라고 하였다.

 

<호인>도 곁에서 찬동하고, 꿈속 조짐 또한 그러하였고

이 봄을 맞이하여 춘정을 그리워하는 혈기가 없지도 아니하였다.

 

멍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여서 헤아리기 힘들어하다가

끝내 <금와>에 품으로 쓰러졌다.

 

<금와>가 품어 안고 침상으로 올라서 마음껏 운우를 다하였더니,

성모도 춘흥에 못 이겨 미친 듯 취한 듯이 하였다.

 

이윽고 열 촛불을 밝히는 혼례를 거행하고

백 수레의 폐백을 바쳐서 33야를 동침하였더니,

()을 따지면 부황(夫皇)이요, 따져보면 숙부이었다.

 

왕은 세른 세 살로 장년이오, 후는 열일곱 묘령이니

산과 같은 사랑과 바다 같은 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금와>왕이 마침내 책성에다 새 궁을 쌓아서 성모의 궁전을 삼고,

<옥두진>을 상()으로 삼고 <호인>을 비로 삼았다.

 

청하 땅 사람들 모두가 책성으로 귀의하여,

일약에 동부여의 고관대작이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4, 성모가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추모>를 낳았다.

 

햇빛이 다가와 비추어서 자리를 옮기면 따라와서 비추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금와>왕이 <추모>의 사내다운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이르길

 

처를 얻고 아들을 얻었으니 이것이 소위 꿩 먹고 알을 먹은 것이로다."라 하고는

 

명을 내려 <추모>를 태자로 삼아 <금와>왕의 여덟 째 아들 자리를 주니,

<>씨의 일곱 아들 <대소> 등이 동생처럼 아꼈다.

 

후는 <추모>를 낳더니만 일심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면서,

<추모>때문에라도 <금와>왕에게 아양 떨 의향이 없던 적이 역시 많았다.

 

<금와>왕은 후를 사랑하였지만 또한 <호인>을 사랑하기도 하여서,

<호인>이 먼저 수태하여 딸을 낳으니 이 이가 바로 <>황후이다.

 

병인년(BC55)에 후 또한 <금와>왕의 아들 <해불>을 낳고

기사년(BC52)에 딸 <해화>를 낳으니 후에 <대소>의 처가 되었으며,

임신년(BC49)<해주>를 낳고

을해년(BC46)<해백>과 무인년(BC43)<해소>를 또 낳았다.

 

<해백><해소>의 용모가 <추모>를 많이 닮았던 까닭에

<대소> 등이 참언하기를

<상해>가 그 어미를 치붙어서 <해백><해소>를 낳은 것이니

자기들의 동생들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금와>왕이 웃으면서 연유를 묻지 않으니 다툼은 없었던 것이 되었다.

 

신사년(BC40)<>공주를 낳았더니

심히 아름다워서 후가 항상 공주를 훈계하며 이르길

 

너는 자라서 필히 <상해>의 처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병신년(BC25)에 찾아와서 경후가 되었으며 총애를 믿고 방자하였어도,

(추모)께서는 불문에 붙였다.

 

갑신년(BC37)<해웅>과 정해년(BC34)<해필>

경인년(BC31)<해중>과 계사년(BC28)<해빈> 등을 낳았다.

 

거의 모두가 용모가 미려하고 놀기와 기예를 좋아하였으나,

오로지 <해소> 한 사람만이 <추모>의 기풍이 파다하였다.

 

성모가 이에 <금와>왕의 아들을 낳기를 바라지 않아,

설사 합방하여도 꽃을 피우지 않았다.

 

정유년{BC24}, 5월에 <금와>왕의 병 수발을 들면서

<대소>의 처 <해화>와 밤을 새우며 잠을 자지 않았는데

<금와>왕이 한밤중에 <해화>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침상으로 올랐다.

 

후께서 피하여 장막 밖으로 나오니 <대소>가 핍박하고 치붙어서

불의에 욕을 당하여 분하고 노여워서 병이 되었다.

 

한 달 여가 지나 임신하셨음을 알고 부끄러움으로 괴로워 하다가

77일 칠석날 밤에 견우녀{직녀성}>를 바라보며 한탄하더니

복어 알을 드시고 죽으니, 춘추 쉰하나였다.

 

안색은 살아있는 듯하고 손에는 <수제>의 조각상을 쥐고 있었다.

 

<금와>왕이 애통해하며 열흘을 먹지 않고

<해화>를 품에 안고 누워서 슬프게 눈물지으며 날을 지새웠다.

 

<해주> 등이 <>공을 부려서 뱃속의 아이를 끄집어내고

유골을 나누고자 하니 <해소>가 따르지 않았다.

 

<금와왕>

 

거수 어미의 유골인데, 어찌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느냐?!

 

동부여에서는 수장을 많이 하지만,

성모는 오로지 살 거죽과 뼈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태워서 재로 하여서,

모든 자녀들에게 나눠주어라."고 하였다.

 

성모의 릉은 하나는 서계산에 있고 하나는 용산의 남령에 있으며,

살갗은 사당의 신주로 되었다.

 

<추모>의 꿈에 성모께서 누차 나타나서

 

나는 네 몸 속에 머물고 싶구나."라고 하였다.

 

상께서 살갗을 취하여 옷을 만들고, <오방奧芳>부인을 사당지기로 삼았다.

 

성모의 유골을 옥함에 넣어 두었다가 <추모>가 죽으니 유명을 따라서

성모의 유골을 꺼내서 <추모>의 재궁 속에 넣었으며,

성모의 살갗으로 <추모>사당의 신주로 삼았다.

 

지금 사람들은 어미를 위하여 살갗이 된 이가 이 사람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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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