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 <>황후의 휘는 <훤화萱花>이니, 성모의 여동생이다.

 

옥두진(호인) - 옥유화(BC74-BC24)

                    옥훤화(BC71-BC22)

                     옥위화(BC68- )

옥두진(도씨) - 옥지屋智(BC48- )

 

성모가 <추모>를 임신하니,

후의 나이 열 셋으로 역시 <수제>의 승은을 입었다.

 

<수제>께서 죽음을 앞두고 명하기를 <추모>의 처가 되라 하였다.

 

<추모>가 태어나니 <훤화>가 받아내어 일어나고 눕는 것과

먹고 자는 것을 같이 한 지 1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을해년{BC46} 2월에 <훤화><추모>를 시중하여

함께 잠자리에 들기를 여느 날 같이 하였는데,

<추모>가 한밤에 자다가 일어나사 <훤화>를 끌어안았다.

 

<훤화>는 마땅히 남자가 되었음이라 여기고서

운우하기를 시작하였더니, <훤화>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로부터 이윽고 원앙이 되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남하하던 시절에 먼저 갈사국 <가숙加菽(BC70?-BC26)>공의 처소로 왕림하여

상이 오기를 기다리니 <가숙>공은 후의 남편이었다.

 

<추모>가 물이 불어나서 건너기가 어렵기에 떼어놓고 가려 하였다.

 

<훤화>후가 물속으로 몸을 던져 희생이 되어 신에게 제사하려 하니,

큰 거북들이 떠올라서 일행이 건넜다.

 

모둔에 다다르자 <추모>께서 <중실仲室(BC55?- )>을 아끼고

<을전乙旃(BC74- )>에 승은을 내렸어도 <훤화>는 투기 한번 하지 않았다.

 

<중실><무골武骨>의 처이다.

 

<추모>에게 권하여 <>후를 거두고 졸본을 합쳤으니 그 공이 컸다.

 

<추모>께서 호색하여 근신들의 처와 통정함이 많았던 까닭에

다른 후들은 기뻐하지 않았으나,

후 홀로 그들을 환대하며 다른 이들을 용납하여 덕을 베푸니

<추모>께서 후를 최고로 사랑하였다.

 

또한 최다의 방사를 베풀었어도 총애를 믿고 방자한 적도 없었으며

항상 근신하고 자신을 지켰으며,

여인의 일에 능하였으니 <옥인><양성>의 덕이 있었다.

 

상께서는 항상 여러 후와 비 들에게 이르길

 

임금의 처가 된 이들은 응당 내 처 <>과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한 번도 후의 일로 얼굴을 붉힌 일이 없었고,

항상 부지런하고 온화함으로 서로를 대하며

입가에 웃음 짓길 잊어버리지 않으며 자녀들을 부드럽게 낳았다.

 

<(BC41-BC22)>태자<원양元陽(BC38- )>공주<고양高陽(BC35- )>공주

<(BC32- )>태자<(BC29- )>태자 등

모두가 어질었고 효도하였으며 우애가 좋아서 다른 이들과 공을 다투지 않았다.

 

기해년{BC22} 3월에 병이 들어 상의 무릎위에서 죽을 때,

 

상이 하고 싶은 말을 물어도,

 

후는 이르기를

 

폐하, 방사를 많이 하지 마시고, 잡녀들을 거둬들이지 마세요.

그러면 첩은 죽어서도 역시 안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눈물지으며 이르길

 

나를 사랑하심이 이러하였으니, 그대는 처이자 어머니이였소."라고 하였다.

 

죽은 후엔 방부액 등에 침지하여 놓고서 때때로 갈아 넣어주었다.

 

<추모>가 죽으니 유명으로 또한 <추모>의 재궁에 시신을 넣었는데,

안색은 생시와 같았다.

 

춘추 50이었고, 상을 섬기길 25년에 천후자리엔 19년을 있었으며,

딸 넷과 아들 셋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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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