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AD523}<안장>5년,

 

 2월, <사마斯摩>가 漢城으로 가서 좌평<국우國友>와 달솔<사오沙烏> 등에게 명하여, 漢水 이북의 주와 군에 사는 15살 이상의 백성을 징발하여 쌍성(雙城)을 쌓았으며,

<사오沙烏>의 처 <백>씨를 맞아들여 처로 삼고는, 3월에 환도하였다.
 

5월, <사마斯摩>의 처 <연>씨가 <사오沙烏>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斯摩>를 독살하였다.

 

<사마斯摩>의 서자 <명농明穠>{聖王}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斯摩>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明穠>이 과연 아비를 죽인 것을 숨겼다.

 

이에 8월에 <고노高老>와 <복정卜正>에게 명을 내려 죄를 묻게 하여서,

漢水를 건너 쌍현(雙峴)을 무너뜨리고, <지충志忠>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하였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明穠>이 <연희燕喜>를 보내서, 명마와 미녀를 바쳤으며,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던 것을 사죄하기에, <명농明穠>에게 명하여 입조하라 하였다.

 

 

 

성(聖)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그가 언제 태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령왕의 첫 번째 태자 순타가 죽은 513년 즈음에 책봉된 것으로 보이며,

523년 5월에 무령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결단성이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

일본서기는 천도 지리에 통달하여 이름이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성왕이 꽤 판단력이 뛰어나고, 여러 면에 두루 능통했음을 알려준다.

   

523년 당시, 백제 주변을 둘러싼 국제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임나의 영유권 문제로 가야가 백제와 등을 지고 신라와 손을 잡으면서

백제, 왜, 가야 삼국의 혈맹 관계는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여전히 백제를 응징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신라는 그 같은 역할 관계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한편,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던 북위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위 왕 <탁발굉>은 한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한족과 선비족 간의 결혼을 장려하고

선비족의 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꾸는 등 한족화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때문에 선비의 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523년에 하북성 일대에서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산동성, 감숙성, 섬서성 등에서도 잇따라 대규모 군사 봉기가 일어나

국가의 기강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북위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남조의 양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해 세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성왕은 백제의 영토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를 눈치 챈 고구려 군은 성왕 즉위년(523년) 8월에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왔다.

 

이에 성왕은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예성강}에 이르렀을 때,

좌장 <지충>에게 기병 1만을 안겨 격퇴시켰다.

 

비록 고구려 군을 격퇴시키긴 했지만,

백제의 힘만으로 대국 고구려를 상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성왕은 먼저 524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양국의 우호 관계를 확인하고, 525년에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여 두 나라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또한 내부적으론 웅진성을 축성하는 등 도성의 방비책도 세웠다.

   

그 무렵, 백제에 임나의 4현을 빼앗긴 가야는 신라와의 관계를 다지고 있었다.

 

무령왕이 죽기 2개월 전인 523년 3월에

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고,

신라는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또 524년 9월에는 신라의 법흥왕이 남쪽 지역을 순시하자,

구형왕은 그를 찾아가 회견하면서 가야의 북쪽 땅을 신라에 내주고

그 대신 서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되자, 왜와 백제는 가야를 응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대치 상황에 있었으므로 왜를 움직여 가야를 치고자 하였는데,

왜국 조정은 이 문제로 내분 양상을 보였다.

 

근왕 세력은 백제를 도와 가야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축자국등 가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세력은 가야 공격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왜국은 내분을 일으켜, 급기야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축자국의 국조 <반정磐井>은 원래 가야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제가 장악한 임나 땅은 마땅히 가야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백제파가 주축이 된 근왕 세력은 근강모야(近江毛野)에게 병력 6만을 안겨

<반정磐井>을 압박하였고,

<반정磐井>은 자신을 옹호하던 주변 세력과 힘을 합쳐 모야의 군대를 저지했다.

   

결국, 근강모야(近江毛野)는 <반정磐井>에게 패배하여 퇴각하였고,

계체천황은 조정 대신들과 숙의하여 물부대련 <녹록화簏鹿火>로 하여금

다시 <반정磐井>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래서 528년 11월에 <반정磐井>과 <녹록화簏鹿火>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반정磐井>의 목이 달아났다.

 

그러자 <반정磐井>의 아들 <갈자葛子>가 충성을 맹세하고

병력을 거둬들임으로써 왜의 내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신라와 가야 사이엔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523년에 구형왕에게 시집온 신라 이찬 <비조부>의 딸은

가야에 온 뒤에도 신라의 의복을 입고 지냈으며,

자신을 따라온 1백 명의 시종에게도 모두 신라 옷을 입도록 했다.

 

이 때문에 가야 조정은 여러 차례 그들에게 가야의 의복을 입을 것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분노한 가야 왕은

529년에 왕녀를 따라온 시종들을 모두 신라로 돌려 보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라의 법흥왕이 노발대발하며 왕녀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가야 측에서는 이미 부부 관계를 맺었고,

자식까지 있는데 어떻게 돌려줄 수 있느냐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야 왕이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자,

신라의 법흥왕은 곧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를 압박하고,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 등 세 성을 장악했다.

 

또 가야 북쪽 국경의 성 5개를 빼앗았다.

   

이 문제로 가야는 신라를 비난하며 백제와 왜에 왕족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백제는 장군 <윤귀>와 <마나갑배>, <마도> 등을 파견하였고,

왜는 <모야>를 파견하여 대책을 의논하였다.

 

가야, 왜, 백제의 대신들은 서로 협력하여 가야의 땅을 회복하기로 하고,

신라에 사람을 보내 그 내용을 전했다.

 

그러자 분노한 법흥왕은 이사부에게 병력 3천을 안겨

오히려 가야 남쪽 지역을 공략하여 유린해버렸다.

   

신라가 그렇듯 막무가내로 나왔지만, 왜와 백제는 별다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필수적이었고,

왜는 내정이 안정되지 못한 데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함부로 신라와 싸울 수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그해 10월에 고구려의 안장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백제의 북쪽 요새인 수곡성 혈성을 공격해 함락시켜버렸다.

 

성왕은 <연모>에게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내주어 막도록 했으나,

<연모>는 오곡 벌판에서 2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하고 말았다.

   

오곡 벌판의 패배 이후, 백제군은 계속해서 내몰렸고,

그 같은 전쟁은 약 3년간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제군은 점점 수세에 몰렸고,

결국 532년 7월에 백제군은 또 한 번의 대패로

한수 이북의 기지를 거의 상실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성왕 10년 7월 갑진에 별이 비 오듯 떨어졌다고만 쓰고 있다.

 

만약 이것이 실제 유성이 떨어진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면

신라 측 기록에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같은 해 신라본기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따라서 이 기록은 전쟁에서 <연모>의 군대가 패배함에 따라

숱한 장수들이 죽어간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당시 백제의 군대를 이끌었던 <연모>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없는 것으로 봐서, 이 때 <연모>도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성왕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538년에 도읍을 사비(충남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성왕이 ’남부여‘라는 국호를 취한 것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부여의 후예라는 점을 천명하고,

고구려가 차지한 부여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부여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옹골찬 의지의 표출이며,

노골적으로 북진정책을 천명한 것이다.

   

성왕은 그 첫 번째 조치로 540년에 장군 <연회>에게 병력을 안겨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연회>는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그러자 성왕은 고구려와 단독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한발 물러서서 외교 관계에 주력하였다.

   

541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학자와 화가, 기술자, 서적 등을 요청하여 받아들였다.

 

 

성왕이 이렇듯 고구려의 남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군대를 이끌고 가야에 와 있던 왜의 사신 <근강모야>는

자의적으로 구사모라(久斯牟羅)성을 차지해 버렸다.

 

이 때문에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도움을 청해 <모야>의 군대를 몰아내줄 것을 청했고, 결국 백제와 신라군이 연합하여 <모야>의 군대를 성안에 몰아넣고 공격을 가하였다.

   

<근강모야>가 구사모라성을 장악한 것은

가야에 파견될 당시에 계체천황으로부터 받은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

 

계체천황은 가야의 혼란을 이용하여

백제와 신라와 마찬가지로 가야 땅 일부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협공을 가해오는 데다,

왜에 머물고 있던 가야의 사신이 <모야>의 행위를 따지고 들자,

계체천황은 <모야>에게 밀사를 보내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모야>는 사람을 보내

 

“명령을 이룬 후에 조정에 돌아가서 사죄하기를 기다려주십시오.”

라며 그냥 돌아갈 수 없다는 의지를 밝힌다.

   

그 후 나제 연합군과 <모야>의 대치는 한동안 이어지지만,

상황은 점점 <모야>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만약 <모야>가 나제 연합군에 생포된다면, 계체천황이 내린 밀명이 탄로 날 것이고,

그에 따른 백제와 신라의 비난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계체천황은 불안한 나머지 다시 <목협자木頰子>를 <모야>에게 보내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모야>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던 터라, 구사모라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하지만 대마도에 이르러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일본서기는 <모야>가 병들어 죽었다고 했지만,

정황으로 봐서 계체천황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보인다.}

   

<모야>에게 밀명까지 내리면서 가야 땅 일부를 차지하려 했던

계체천황의 모험적인 행동은 결국 이렇게 막을 내렸고,

설상가상으로 계체천황은 531년 2월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계체천황이 죽은 뒤에 왜국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으로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532년에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는

왕비 및 그의 세 아들 <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버렸다.

 

가야 땅 장악을 위한 계체천황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가야 장악을 도운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가야를 둘러싼 신라, 왜, 백제의 각축전이 이어지고 있을 때,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북위는 우문 선비 출신의 <우문태>와

韓人 출신의 <고환>이 권력을 양분하여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급기야 북위의 붕괴로 이어져,

국토가 양분되고 동서에 왕조가 양립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북위는 남경을 분기점으로 동위와 서위로 나뉘었다.

 

   

그 무렵, 신라에서는 540년 5월에 법흥왕이 사망함에 따라

진흥왕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의 섭정을 받기 시작했다.

 

성왕은 지소태후에게도 사신을 보내 화친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가야에 머물고 있던 왜국 객관{임나일본부}의 집사(대사 격의 외교 관리)와

가야의 집사를 불러 임나의 재건을 논의하였다.

 

성왕은 임나를 재건하고, 가야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가야, 왜, 신라, 백제의 연합군으로 고구려를 상대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임나의 왜국 객관은 신라와 내통하고 있었고,

신라 또한 임나의 재건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성왕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었다.

 

오히려 성왕의 임나 재건 의도가 신라에 전해짐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공조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결과만 낳았다.

 

또한 가야는 임나의 영유권 문제로 백제를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왕을 믿지 않았고, 왜국 조정도 백제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왕은 다시 가야와 왜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런 가운데 545년에 고구려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안원대제가 중병이 들자, 외척들 간에 왕위계승권을 놓고 한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의 싸움은 안원대제가 3월에 죽은 뒤에 더욱 본격화되어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고구려의 내전은 1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성왕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성왕은 왜, 가야, 신라 등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라는 물론이고, 왜와 가야도 좀처럼 호응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성왕의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말았는데,

후에 고구려가 그 소식을 듣고

548년 정월에 예족을 앞세워 백제의 한강 북쪽 성인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고구려의 급습에 놀란 성왕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신라의 섭정 보도태후는 장군 <주진>에게 병력 3천을 안겨 백제를 돕도록 했다.

 

덕분에 고구려 군은 패퇴하고, 독산성은 무사했다.

   

3년 뒤인 551년에 성왕은 자신이 직접 병력 수만 명을 이끌고 보복전에 나섰다.

 

신라와 가야의 연합군도 이 전쟁에 합세했는데,

성왕은 우선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을 쳐서 되찾고,

장군 <달기>에게 병력 1만을 안겨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에 밀려 오히려 금현성을 빼앗겼는데,

신라 장군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노려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고, 군사 1천을 머물게 하여 지키도록 했다.

 

이후 백제ㆍ신라ㆍ가야 연합군은 고구려의 뒤를 후리며 평양까지 말고 올라갔다.

 

그 결과,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도 6개의 군을 회복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

   

고구려가 이렇듯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맥없이 무너진 것은

돌궐의 갑작스런 침입으로 신성이 포위되고

도성이 위험에 처하는 어려운 상황이 초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군 고흘의 활약으로 돌궐군이 쫓겨 가자,

고구려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신라는 마음을 바꿔 고구려와 손을 잡고 되레 백제를 공격했다.

   

신라의 배반으로 백제는 당혹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그렇게 백제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시에 신라군은 한강 이북의 백제 땅을 차지하고,

한성까지 장악해버렸다.

 

궁지에 몰린 성왕은 자신의 딸을 신라에 시집보내는 굴욕적인 조치를 취하며

가까스로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렸다.

   

눈물을 머금고 사비성으로 돌아온 성왕은 복수를 다짐하였고,

왜에 파병을 요청하며 일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554년 5월에 왜의 수군이 도착하자,

성왕은 가야 군대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전쟁에서 성왕은 유명을 달리해야 했다.

 

선봉대를 이끌던 태자 창(위덕왕)을 위로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50명만 이끌고 밤길을 가던 그는 구천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습격을 당해 포로로 잡히고 말았고, 급기야 목이 달아나 그 머리는 신라 북청의 계단 아래 묻히고, 목 잘린 몸체만 백제에 보내졌다.

   

둘도 없는 책략가요, 희대의 영웅이요,

존경받던 군왕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비참하고 허무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554년 5월 3일, 왜의 점함 40척이 축자국을 출발하여 백제로 향했다.

 

승선 병력은 총 1천, 군마는 1백 필이었다.

 

성왕의 끈질긴 파병 요청이 마침내 왜의 조정을 움직인 것이다.

 

파병된 왜군 병력은 1천 명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백제ㆍ신라ㆍ고구려 삼국의 각축전에

왜가 국운을 걸고 뛰어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성왕이 처음으로 파병을 요청한 것은 541년이었다.

 

이 때의 명분은 임나를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왜는 쉽게 이에 응하지 않았다.

 

신라와 고구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왜는 은밀히 신라와 내통하며

가야 지역에 터전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왕은 줄기차게 특사를 보내

백제와 가야, 왜가 연합군을 현성하여 신라와 고구려에 대항해야만

임나를 재건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왜 조정을 설득했다.

 

당시 왜는 자유무역 도시인 임나가 분쟁지역으로 변함에 따라

한반도 및 중국 대륙과의 무력 거래가 거의 중단된 상태였고,

이에 따른 경제적 피해가 막대했다.

 

성왕은 그 점을 십분 이용하여 임나 재건을 외치며

왜군을 백제에 파병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성왕의 파병 요청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지속됐고, 그동안 국제 정세도 크게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신라의 성장이었다.

 

신라는 가야 땅의 절반 이상을 수중에 넣었고,

한강 유역은 물론이고 그 북방의 고구려 땅 중 10개의 군을 장악했다.

 

게다가 백제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와 뒷거래를 하며 백제를 압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가 의지할 곳은 역시 오랜 동맹국인 왜와 가야였다.

 

하지만 왜와 가야도 나름대로 내부 사정이 복잡했다.

 

가야는 신라파와 백제파가 갈려서 세력을 다투고 있었고,

왜 역시 백제의 임나 장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의 공조는 왜와 가야를 몹시 불안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공조로 백제가 무너지면,

가야는 필연적으로 신라에 병합될 수밖에 없었고,

왜 역시 외톨이 신세로 남아

고구려와 신라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 십상이었다.

 

때문에 백제의 위기는 곧 왜와 가야의 위기이기도 했다.

 

왜 조정이 늦게나마 성왕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백제와 가야, 왜의 혈맹 관계를 복원하지 않으면

중대한 위기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왜의 군대가 백제에 도착하자,

성왕은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해 출정식을 거행했다.

 

금지옥엽 같은 딸을 진흥왕의 소비로 내주면서까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터라,

성왕은 목숨을 걸고 일전을 치를 각오였다.

   

성왕의 첫 공격목표는 관산성(옥천)이었다.

 

관산성은 소백산맥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백제의 도성인 사비까지 한나절이면 당도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 곳에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백제에겐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의 기병이 언제 기습 공격을 감행해올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관산의 신라 병력은 성왕의 눈알을 노리는 창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성왕은 노도와 같이 군대를 내몰라 관산성을 압박했다.

 

휘하 병력은 왜와 가야, 백제군으로 된 연맹군이었다.

   

성왕의 군대가 몰려오자, 신라에서는 <우덕>과 <탐지>가 맞서왔다.

 

그러나 그들은 성왕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뒷걸음을 쳤다.

 

그렇듯 상황이 신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한강 유역에 머물고 있던 아찬 <김무력>이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또한 삼년산군{보은}의 비장 <도도>까지 가세했다.

   

한주의 군대를 이끌고 달려온 <김무력>은 가야 왕 구형의 막내아들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끌고 있던 군대의 상당수는 가야 병력이었고,

그것은 백제 연맹군에 가담하고 있던 가야 군대를 몹시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었다.

 

가야 군대의 그런 혼란은 성왕의 지휘 체계를 약화시키는 역활을 했고,

그것은 결국 백제 연맹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무력>은 태자 창이 이끌고 있던 백제군의 선봉을 두들겼다.

 

그 소식을 듣고 성왕은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것도 어두운 밤길을 단지 50명의 호위병만 이끌고.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성왕이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라 삼년산군의 장수 <도도>가

성왕과 그 호위병들을 급습한 것이다.

 

성왕을 호위하고 있던 병력은 비록 일당백의 근위병들이었지만,

50명으로 수천 명의 군대를 당해낼 수는 없었고,

결국 성왕은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성왕을 붙잡은 <도도>는 노비 출신의 장수로서 공을 세워 신분이 상승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 성왕의 목을 얻고자 하였고,

바야흐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성왕을 사로잡은 그는 일단 왕에 대한 예를 갖추며 큰절을 두 번 하고, 이렇게 말했다.

   

“대왕의 머리를 베도록 해주소서.”

   

그러자 성왕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대꾸했다.

  

 “왕의 머리를 종의 손에 맡길 수 없다.”

   

하지만 <도도>는 물러서지 않고 성왕을 힐난했다.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고 해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

   

성왕은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낼 때,

신라와 화친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던 모양이다.

 

<도도>가 성왕더러 맹세를 어겼다고 한 것은

바로 화친의 맹약을 깨고 관산성을 공격한 것을 말함이었다.

   

그 소리에 성왕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차고 있던 자신의 칼을 내주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쏟아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목을 내밀고 말했다.

   

“짐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자, 내 목을 베라.”

   

<도도>는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곧 칼을 휘둘러 성왕의 목을 쳤다.

 

그리고 성왕의 목 잘린 시신을 서라벌에 보냈다.

 

성왕의 시신을 접수한 신라 조정은 그의 두개골을 수습하여

도당이 있는 북청의 계단 밑에 묻고, 나머지 뼈는 백제에 보냈다.

   

성왕이 참수됐다는 소식은 이내 백제군에게 전해졌고,

그로 인해 백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신라군은 달아나는 백제군의 뒤를 후려 약 3만의 병력을 몰살시켰고,

태자 <창>도 포위되어 생포될 처지에 놓였다.

 

그때 궁술에 능한 축자 국조가 신라군의 선봉에 선 장수를 활로 쏘아 넘어뜨려

활로를 뚫었고, 덕분에 태자 <창>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의 패배는 백제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성왕의 죽음으로 가야와 왜, 백제를 하나로 묶어 이끌 수 있는

영도자를 잃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다음으론 3만의 정예병을 잃은 탓에

향후에는 방어전 일변도로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로는 가까스로 형성된 백제, 왜, 가야 연맹군이

첫 싸움에서 완전히 대패하는 바람에 연맹에 대한 회의감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태자 <창>은 개인적으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고,

장수로서는 패전의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 자책감을 이기지 못해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도 하였다.

 

다행히 신하들의 강한 만류로 그는 출가를 포기했지만,

성왕이 죽은 후 3년 동안 그는 왕위를 비워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