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당의 관계는 당나라의 초기 역사가 중요하므로

당나라의 초기 역사를 잘 알 수 있는 구당서 돌궐 전을 통하여

당나라 초기, 당나라의 위상을 알아보자.

 

 

 

<시필始畢>가한,<돌길咄吉>이라는 자는 <계민民>가한의 아들이다.

 

隋나라 대업 연간에 지위를 이어받았는데,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중국인이 도망간 자가 많았다.

 

그 종족이 강성하게 되어 동쪽으로 거란, 실위로부터

서쪽으로 토욕혼 고창과 같은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속해,

기마궁사(공현-控弦)가 100여 만이니,

북적(돌궐)의 강성함이 일찍이 이런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 사람들은 음산에 사는 돌궐을 높이 보고,

돌궐족은 중국(중하-中夏)을 가벼이 여기는 생각이 있었다.

 

돌궐의 가한은 옛날 흉노의 선우와 같았고,

그 처는 가하돈(可賀敦)이라고 불렀는데 옛날 알씨와 같았다.

 

그 아들과 동생을 특근(特勤)이라고 불렀고,

다른 부락(별부-別部)에서 병사를 부리는 사람을 설(設)이라고 하며,

그 최고위 관직(대관-大官)을 굴률철(屈律啜), 그 다음을 아파(阿波),

그 다음을 힐리발(頡利發),그 다음을 토둔(吐屯),

그 다음을 사근(俟斤)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그 관직을 대대로 세습하며 정해진 숫자가 없었으며,

아버지와 형이 죽으면 아들과 아우가 지위를 이어받았다.

 

고조가 태원에서 兵을 일으켰을 때(617년 5월)

대장군부의 사마 <유문정劉文靜>을 보내

<시필> 가한에게 폐백(幣帛)을 보내고 예를 갖추어 방문하여 구원을 이끌어내었다.

 

이에 <시필> 가한이 특근(아들, 동생) <강초리康稍利> 등을 보내 말 천 필을 보내고

강군(絳郡)에서 만나 또 2천 기병을 보내 군을 도와 경성을 평정하는데 따르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고조가 즉위할 때 앞뒤로 상을 준 것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시필> 가한은 그 공을 스스로 믿고 더욱 교만하여 매번 사자를 장안으로 보냈는데

그들 대부분이 교만 방자하였으나 고조는 중원이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으므로

매번 그들을 우대하여 용납하였다.

 

 

 

 

무덕 원년(618년)

 

<시필> 가한이 <골돌록骨咄祿> 특근을 당나라 조정에 보내니

고조는 태극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구부악을 연주하였으며

비단 베 명주 등을 차등있게 주었다.

 

 

 

 

무덕 2년(619년)

 

2월 <시필> 가한이 군대를 인솔하고 황하를 건너 하주(夏州)에 이르니,

도적 우두머리 <양사도梁師都>가 군대를 보내 만나

당나라 안으로 들어와 노략질하기로 모의하고,

마읍 도적 우두머리 <유무주劉武周>에게 5백여 기병을 주어

구주산에 들어가게 보내고, 또 추가로 병력을 크게 모아 태원을 침략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달에 <시필> 가한이 죽고

그 아들 <십발필什鉢苾>이 나이가 어려 지위 잇기를 감당할 수 없어,

니보설(泥步設)에 즉위케 하여 동편에 살게 하였는데

그 땅은 유주(幽州)의 북쪽에 있었으며,

그 동생 <사리불설俟利弗設>이 가한에 즉위하니 이가 바로 <처라處羅> 가한이다.

 

<처라> 가한이 지위를 잇고 또 수나라 <의성義成>공주를 처로 삼으며,

사자를 보내 조정에 들어와 초상을 알렸다.

 

고조가 죽음을 애도해 3일간 조회를 폐지하고

황제의 명령으로 백관들에게 객관에 가 그 사자에게 조문하게 하며

또 내사사인 <정덕정鄭德挺>을 보내 가서 <처라> 가한을 조문케 하고

부의물(초상집에 주는 물건) 비단 3만 단을 보냈다.

 

<처라> 가한은 이후에 빈번히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먼저 수양제의 소(蕭)황후와 제왕 <양간楊暕>의 아들 <양정도楊政道>가

<두건덕竇建德>에게 잡혀 있었는데,

무덕 3년(620년) 2월 <처라> 가한이 그들을 맞이하여

아소(牙所){<처라> 가한의 처소, 궁}에 오자 <양정도>를 隋왕에 즉위케 하였다.

 

수나라 말기 노정(虜庭){돌궐의 궁중}에 있었던 중국인은

모두 <양정도>에게 예속시키고, 수나라 정삭을 따르게 하며,

백관을 두어, 정양성(定襄城)에 살게 하였는데, 무리가 1만이었다.

 

이때는 태종이 번왕(藩王)으로 있었으므로

<유무주劉武周>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대를 태원에 이르게 하였는데

<처라> 가한이 그 아우 보리설(步利設)을 보내

2천 기병을 인솔하고 관군(태종의 군대)와 마주치게 하였다.

 

6월 <처라> 가한이 병주(州)에 이르니

총관 <이중문李仲文>이 나아가 맞이하고 노고를 위로하였는데,

3일간 머무르며 성안의 아름다운 부인들을 대부분 잡아갔음에도

<이중문>은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처라> 가한이 죽었는데 <의성>공주는 그의 아들 <오사설奧射設>이

추醜하고 약弱해서 가한으로 즉위시키지 못하고 폐하며

드디어 <처라>의 아우 <돌필咄苾>을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힐리頡利> 가한이다.

 

<힐리> 가한이라는 자는 <계민> 가한의 셋째 아들로

처음 막하돌설(莫賀咄設)이 되었을 때 아(궁정)를 오원(五原)의 북쪽에 두었다.

 

고조가 장안에 들어갔을 때 <설거薛舉>가 여전히 농우(隴右)를차지하고,

그의 장군 <종라宗羅>(후)를 보내 평량군(平涼郡)을 공격해 함락하면서,

북으로 <힐리> 가한과 연결하였다.

 

고조가 이를 걱정을 하여 광록경 <우문흠宇文歆>을 보내

금과 비단을 <힐리> 가한에게 뇌물로 주었다.

 

<우문흠>이 <힐리>를 설득하여 <설거>와 절교하게 하였다.

 

애초에 수나라 오원태수 <장장손張長遜>은 전란이 일어나자

그 소속 부락 오원성(五原城)을 가지고 돌궐에 예속하였다.

 

그래서 <우문흠>은 또 <힐리> 가한에게 <장장손>을 보내 입조케 하고,

오원 땅을 우리(당나라)에게 되돌리도록 설득하였다.

 

<힐리> 가한은 모두 이를 따랐고 이로 인하여

돌궐 병사와 <장장손>의 무리가 출발하여 모두 태종 군대가 있는 곳에 모였다.

 

 

 

 

무덕 3년(620년)

 

<힐리> 가한이 의성공주를 받아들여 처로 삼고

<시필> 가한의 아들 <십발필>을 <돌리突利> 가한으로 삼으며,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처라> 가한이 죽었음을 알리니 고조는 조정을 하루 파하였으며

 백관으로 하여금 객관으로 가서 그 사신을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힐리> 가한이 처음 지위를 이을 때

아버지와 형의 자산을 이어받아 병마가 강성하였으므로

세력을 믿고 중국을 침범하려는 뜻이 있었다.

 

고조는 중원을 안정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아 밖을 도모할 수 없어서

매번 우대하여 용인하니 물자를 준 것이 셀 수가 없었고

<힐리> 가한의 언사가 거칠고 거만하며 자기가 청구한 물건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무덕 4년(621년)

 

4월 <힐리> 가한이 스스로 만여 기병을 이끌고

마읍(馬邑)의 도적 <원군장苑君璋>의 장병 6천 명과 더불어 함께

안문(雁門)을 공격하니 정양왕(定襄王) <이대은李大恩>이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이에 앞서 한양공(漢陽公) <이괴李瓌>、태상경(太常卿) <정원숙鄭元璹>、

좌효위대장군 <장손순덕長孫順德> 등이 각각 돌궐에 사신으로 갔는데

<힐리> 가한이 모두를 구속하고, 우리 역시 그의 사신을 전후로 여러 명 구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대은>이 좌절시키자,

이에 비로소 두려워하여 <장손순덕>을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고,

다시 화목과 우호관계를 청하며,

어교(魚膠) 수십 근을 바치면서,

두 나라가 이 어교처럼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고 훈계하였다.

 

고조가 기뻐하며 그 사자 특근 <열한熱寒>、<아사덕阿史德> 등을 석방하여

번(돌궐)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금과 비단을 주었다.

 

 

 

 

 

무덕 5년(622년) 봄,

 

<이대은>이 아뢰기를 돌궐이 기근이 들어 황폐해졌기 때문에

마읍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서로 <이대은>으로 하여금 전내소감 <독고성獨孤晟>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원군장苑君璋>을 토벌하도록 명하고 2달을 기한으로 마읍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독고성>이 후에 기일에 도착하지 못하니,

<이대은>이 홀로 진격할 수 없어, 신성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기다렸다.

 

<힐리> 가한이 수만 기병을 보내 <유흑달劉黑闥>과 군대를 합하고,

진격하여 <이대은>을 포위하니,

군이 패배하여, <이대은>은 진중에서 죽었으며,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6월 <유흑달>이 또 돌궐 만여 기병을 이끌고 들어와 하북을 노략질하자

<힐리> 가한이 다시 스스로 오만 기병을 인솔하고 남침하여 분주(汾州)에 이르러,

또 수천 기병을 보내 서쪽으로 영주(靈州), 원주(原州) 등에 들어오니,

조서로 <은隱>태자를 빈주도(豳州道)에서 나가고

태종을 포주도(蒲州道)에서 나가 토벌하게 하였다.

 

<힐리> 가한이 병주를 포위 공격하고

또 병사를 나누어 분주(汾州) 노주(潞州) 등에 들어가

남녀 5천여 명을 노략질 할 때 태종의 병사가 포주(蒲州)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변경을 나갔다.

 

 

 

 

무덕 7년(624년)

 

8월, <힐리>、<돌리> 두 가한이 거국적으로 침범하여 길이 원주(原州)로부터

당나라 군영 남쪽 위까지 이어지자 태종이 조서를 받고 북쪽을 토벌하였으며,

齊王 <이원길李元吉>은 그에 예속되었다.

 

애초, 관중에 장마 비가 내려 군량운송이 두절되자 태종이 자못 걱정하였는데

여러 장수들도 걱정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병사들을 빈주에 주둔시켰다.

 

<힐리>, <돌리>가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빈주성 서쪽에 도착하여

높은 곳에 올라 진을 치니 장수와 병사들이 크게 놀랐다.

 

태종이 이에 친히 기병 백 명을 거느리고 돌궐 진영에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알려 말하였다.

 

“당나라와 가한은 서로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하는데

어찌하여 약속을 위배하고 깊숙이 우리 땅을 침입하였소?

내가 진왕(秦王)이요. 왔으니 한번 결판내 봅시다.

가한이 만약 혼자 나온다면 나는 마땅히 가한과 둘이서만 싸울 것이고,

만약 군사를 총동원해 오고자 해도 나는 오직 백 명의 기병만으로 상대할 것이요.”

 

<힐리>가 헤아릴 수 없자 웃으면서 상대하지 않았다.

 

태종이 또 앞으로 나아가 기병에게 명령하여 <돌리> 가한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전에 나와 맹세하며 급한 어려움이 있을 때 서로 돕기로 하였는데,

네가 지금 장병과 함께 왔으니 어찌하여 서약했던 정이 없어졌는가?

또한 마땅히 빨리 나와서 한번 승부를 내보자.”

 

<돌리> 역시 상대하지 않았다.

 

태종이 앞으로 나아가 장차 개울물을 건너려할 때,

<힐리> 가한이 태종이 경무장으로 나오고, 또 서약했다는 정이라는 말을 듣고,

이에 남 몰래 <돌리> 가한을 시기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진왕은 개울물을 건너지 마시오, 나는 악의가 없소,

다시 왕과 함께 스스로 명확하게 결정하는 게 마땅한지 알아보려고 했을 뿐이오.”

 

이에 조금씩 물러나다가 각각 군대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태종이 <돌리> 가한에게 반간계를 쓰자

<돌리> 가한이 기뻐하며 투항할 마음을 갖게 되어,마침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 숙부와 조카의 내부 분열로,

<힐리> 가한이 싸우려고 하였으나 싸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돌리> 가한이 협필특근(夾畢特勤) <아사나사마阿史那思摩>를 보내

황제를 뵙고 화친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돌리> 가한은 스스로 태종에게 의지하려 하여서 형제 맺기를 원했다.

 

<아사나사마>가 처음 황제를 뵐 때 고조가 이끌어 어좌까지 올라오라고 했는데

머리를 조아리며 극구 사양하자 고조가 말하였다.

 

“<힐리> 가한이 성심으로 특근을 보내 조정에 배알하는데

지금 특근을 보니 <힐리> 가한을 보는 것과 같구나.”

 

극구 끌어당기니 와서 앉았으며,

얼마 후 <아사나사마>를 봉하여 화순왕(和順王)으로 삼았다.

 

 

 

 

무덕 8년(625년)

 

7월. <힐리> 가한이 병사 10여만을 모아 삭주(朔州)를 크게 약탈하고,

또 장군 <장근張瑾>을 태원에서 습격하니 <장근>의 모든 군사가 모두 죽었으며,

<장근>은 몸을 빼어 <이정李靖>에게 달아났다.

 

<이정>이 군사를 출동시켜 적을 막아 싸우니,

<힐리> 가한이 전진하지 못하고, 병주에 주둔하였다.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려고 장안을 떠났으며, 다음으로 포주에 도달하니,

<힐리> 가한이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으며 태종도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무덕 9년(626년)

 

7월 <힐리> 가한이 스스로 10여만 기병을 거느리고

무공현(武功縣)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서울(경사:장안)이 계엄에 들어갔다.

 

기묘일 고릉(高陵)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행군총관 좌무후대장군 <울지경덕尉遲敬德>이 경양(涇陽)에서 싸워 대파하였으며

사근 <아사덕오몰철阿史德烏沒啜>을 잡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계미일, <힐리> 가한이 그 심복 <집실사력執失思力>을 보내 입조케 하고

조정을 엿보면서 스스로 허장성세를 부리며 말하였다.

 

“두 가한이 병사 백만을 거느리고 지금 이미 이곳에 도착하였다.”

 

태종이 일러 말하기를

 

“나와 돌궐은 얼굴을 맞대고 화친하였는데,

너희가 바로 배반을 하였으니 나는 실로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또 의로운 군대가 서울로 들어올 초기에 너희 부자가 모두 친히 우리를 따라와서

너희에게 옥과 비단을 준 것이 전후로 지극히 많은데,

어떤 까닭으로 갑자기 군대가 우리 서울근처의 현에 들어왔는가?

너희가 비록 돌궐이지만, 또한 모름지기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큰 은혜를 다 잊고 스스로 강성함을 자랑하는가.

내가 마땅히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

 

<집실사력>이 두려워하여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태종이 불허하고 문하성(門下省)에 잡아두었다.

 

태종과 시중 <고사렴高士廉>、중서령 <방현령房玄齡>、

장군 <주범치周範馳> 및 6명의 기병이

위수(渭水) 가에 행차하여 <힐리> 가한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말을 하였는데,

약속을 저버린 것을 책망하자 그 추장들이 크게 놀라,

모두 말에서 내려 죽 늘어서 함께 절하였다.

 

잠시 후 여러 군대들이 계속 도착하고,

<힐리> 가한이 당나라 군용이 성대함을 보았으며,

또 <집실사력>이 곧 구속되었음을 알고서 크게 두려워하였다.

 

태종 홀로 <힐리> 가한과 강 양쪽에서 말을 주고받자,

예하 여러 부대는 물러나 진을 쳤다.

 

<소우蕭瑀>가 태종이 적을 가볍게 여기자 말 앞에서 굳게 간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내가 생각하였던 것은 경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돌궐이 그 경내를 다 털어 바로 위수 가에 들어 온 것은

분명 우리 국가가 처음에 안으로 어지러움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짐 또한 새로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장차 감히 자신들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짐이 만약 문을 걸어 닫았다면, 오랑캐들은 반드시 크게 약탈할 것이니,

기세의 강하고 약함은 지금 한 번의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짐은 이런 까닭에 홀로 나온 것이며, 돌궐 군을 가벼운 것처럼 보이려고 한 것이고,

또 군대의 위용을 잘 갖추어 반드시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이 뜻밖으로 발생하여, 돌궐이 그 본래의 의도를 어그러뜨릴 수 있는데,

오랑캐들이 이미 깊이 침입하였으니, 이치상 마땅히 스스로 두려워 할 것이다.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고, 화친하면 반드시 튼튼할 것이니,

흉노(돌궐)를 제압하여 복종시키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 <힐리> 가한이 화친을 청하여, 조서로 허락하고, 황제는 그날 즉시 환궁하였다.

 

을유일, 또 성 서쪽에 행차하여,

백마를 잡아 <힐리> 가한과 함께 편교 위에서 동맹을 맺으니(위수지맹: 626년 7월)

<힐리> 가한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소우>가 나아가 말하였다.

 

“애초에 <힐리> 가한이 화친을 하려고 하지 않자,

계략을 세우는 신하나 맹장들이 대다수 전쟁을 청하였는데

폐하가 받아들이지 않아 신은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오랑캐가 스스로 물러났으니 그런 묘책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황상이 말하였다.

 

“내가 돌궐의 병사를 보니 비록 많으나 정돈되지 않았고,

군신들의 생각은 오직 재물의 이익만 본다.

가한이 홀로 위수 서쪽에 있었는데, 추장들은 모두 와서 나를 찾아뵈니

내가 그로 인하여 그 무리를 습격하면 그 기세는 썩은 나무를 꺾듯이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이미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이정李靖>에게 영을 내려

유주에 복병을 설치한 뒤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오랑캐가 만약 되돌아 달아난다면,

복병이 그 앞에서 막고, 대군이 그 후미를 뒤쫓아,

뒤집어 엎어버리기는 손바닥 뒤집기와 같았다.

내가 싸우지 않은 것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를 위하는 도리이고 안정에 힘써야하기 때문이며,

한번 오랑캐와 싸우면 사상자가 있기 때문이다.

또 오랑캐가 한번 패하면 혹 당연히 두려워하여

덕을 닦으면서도 우리에게 원한을 맺어, 근심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군사를 거두어 싸우지 않고 옥과 비단을 먹이면

탐욕스러운 오랑캐들의 오만방자함이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점점 파멸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장차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주어야한다’함은 이를 이르는 것이다.”

 

9월, <힐리> 가한이 말 3천 필, 양 만 마리를 바쳤으나 황상이 받지 않고,

조서로 <힐리>가 잡아간 중국 호구(호적)로 되어 있는 자를

다 돌아오게 하도록 명하였다.

 

 

 

 

정관 원년(627년),

 

음산 이북의 <설연타薛延陀>、<회흘迴紇>、<발야고拔也古> 등 여타 부족들이

모두 연달아 돌궐을 배반하여 돌궐의 욜곡설(欲谷設)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힐리> 가한이 <돌리> 가한을 보내 토벌하였으나 군사가 또 패하여,

<돌리> 가한이 경무장한 기병으로 달아나 돌아왔다.

 

<힐리> 가한이 분노하여, 10여 일을 구속하니

<돌리> 가한이 이로 인하여 원망하여 속으로 배신하고자 하였다.

 

그 나라에 큰 눈이 내려 평지에 수척이나 쌓이니

양과 말이 모두 죽고 사람들이 크게 굶주렸다.

 

이에 우리 군대가 그 틈을 타고 출전할까봐 두려워하여

병사를 이끌고 삭주에 들어와 여럿이 모여 사냥한다고 떠벌렸으나,

실은 우리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측근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적(夷狄)은 믿을 수 없으니 먼저 스스로 의심을 품고,

동맹을 맺은 다음에도 군사를 끌고,

홀연히 우리 강역의 경계를 넘어 옵니다.

그들의 편안함을 위해 여러 번 약속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토벌해야 합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필부의 한마디도 모름지기 신용을 지켜야 하는데

어찌 하물며 천하의 주인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어찌 친하다고 하여 그들과 화친을 하였는데

그의 재난을 이용해 위급함을 틈 타 그들을 없앨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자고 해도 짐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돌궐부락이 반란을 일으켜 다 없어지고,

모든 가축이 다 죽어도 짐은 끝까지 신의를 보일 것이니,

망령되게 토벌하지 않고, 그 무례를 기다렸다가 사로잡아 손에 넣을 뿐이다.”

 

 

 

 

정관 2년(628년)

 

<돌리> 가한이 사신을 보내 <힐리> 가한과 틈이 생겼다고 말하며,

<힐리> 가한을 칠 것을 주청하니,

조서로 <진무통秦武通>으로 하여금 병주의 군대로 상황에 따라 대응하라고 명하였다.

 

 

 

 

정관 3년(629년)

 

<설연타>가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서 가한을 칭하고,

사신을 보내와 지방물건을 바쳤다.

 

<힐리> 가한이 처음 신하를 칭하며 공주와 결혼해 사위의 예를 익힐 것을 청하였다.

 

<힐리> 가한이 매번 여러 호인(胡人)들에게 정사를 위임하여,

자신의 족속들과 서먹서먹하게 되자,

호인들은 탐관오리가 되고 성격이 대부분 변덕스러워,

법령이 날로 번잡해졌는데, 군대가 해마다 출동하자, 나라사람들이 근심하여,

여러 부락이 딴 마음을 품었다.

 

해마다 큰 눈이 내려 모든 가축이 대부분 죽고, 나라 안은 큰 굶주림에 들었으나

<힐리> 가한은 쓸 만큼 주지 않고, 다시 거듭 여러 부에서 세금을 걷어,

이런 이유로 부하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팎으로 대부분 반란을 일으켰다.

 

황상이 그들이 화친을 청하면서, 뒤에 다시 <양사도梁師都>를 돕자,

조서로 병부상서 <이정李靖>、대주도독 <장공근張公謹>은 정양도(定襄道)로나가고,

병주도독 <이적李勣>、우무위장군 <구행공丘行恭>은 통한도(通漢道)로 나가고,

좌무위대장군 <시소柴紹>는 금하도(金河道)로 나가고,

<위효절衞孝節>은 긍안도(恆安道)로 나가고,

<설만철薛萬徹>은 창무도(暢武道)로 나가되,

모두 <이정>의 통제를 받아 <힐리> 가한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12월, <돌리> 가한과 욱사설(郁射設)、음내특근(蔭奈特勤) 등이

모두 소속 부락을 거느리고 도망쳐왔다.

 

 

 

 

정관 4년(630년)

 

정월, <이정>이 진군하여 악양령(惡陽嶺)에 주둔했다가, 밤에 정양(定襄)을 습격하자,

<힐리> 가한이 놀라 소요를 일으켜서 아(궁정)를 적구(磧口)로 옮겼으며,

호인 추장 <강소밀康蘇密> 등이 마침내 수나라 <소蕭>后와 <양정도楊政道>를 데리고 투항하였다.

 

2월, <힐리> 가한이 계책이 막혀 철산(鐵山)에 숨었는데 , 병력이 아직 수만이었으나

심복 <집실사력執失思力>으로 하여금 내조케 하여 사죄하고 나라를 들어 항복하겠다고 청하였다.

 

태종이 홍려경(鴻臚卿) <당검唐儉>、장군 <안수인安修仁>을 보내

절을 가지고 가서 안심시키니,

<힐리> 가한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정>이 그 틈을 타서 습격하여 대파하고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힐리> 가한은 천리마를 타고,

홀로 사촌형제의 아들 <사발라沙鉢羅> 부락으로 달아났다.

 

3월 행군부총관 <장보상張寶相>이 무리를 거느리고

갑자기 <사발라> 군영에 도착해서,

<힐리> 가한을 생포하여 서울(경사: 장안)로 보냈다.

 

태종이 일러 말하였다.

 

“무릇 나에게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잊지 않지만,

나에게 악하게 한 자는 끝까지 기억하지 않는다.

너의 죄상을 논하자면 실로 작지 않으나

일찍이 위수에서 얼굴을 맞대고 맹약을 맺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아직 심한 범죄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참작하여 너를 문책하지 않을 뿐이다.”

 

이에 조서로 그의 가족을 돌려주고,

태복(太僕)(시)에 묵게 하며 지방관에게 주던 봉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힐리> 가한은 울적하고 바라던 일을 뜻대로 이루지 못하자

그 가족과 함께 혹은 마주보며 슬프게 노래하고 울었다.

 

황제가 <힐리> 가한이 야위어가는 것을 보고,

괵주(州)자사를 제수했는데 그 땅에는 사슴이 많아,

그 사냥을 마음대로 하게하여 여러 가지 본래의 습성을 잃지 않게 하였다.

 

<힐리> 가한이 사양하며 가기를 원치 않자,

마침내 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밭과 집을 주었다.

 

 

 

 

 

정관 5년(631년)

 

태종이 측근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하늘의 이치는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음탕한 자에게 화를 주는 것인데 일도 영향을 받는다.

옛날 <계민> 가한이 나라가 망하여 수나라로 도망해 왔는데

隋 문제는 곡식과 비단을 아끼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을 크게 일으키며

위(衞)를 만들어 안치해주자 비로소 <계민> 가한이 존립할 수 있었다.

이후 강성해지면 마땅히 자자손손 그 은덕에 보답하겠다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여야 했다.

그러나 겨우 <시필> 가한에 이르러 {<시필> 가한은 <계민> 가한의 아들임},

즉시 병력을 일으켜 隋 양제를 안문에서 포위해서 수나라가 장차 난에 이르게 하고

또 강성함을 믿고 깊이 침입하여

마침내 앞서 그 가족과 나라를 안전하게 세워 준 사람 자신과 자손

모두 <힐리> 가한 형제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힐리> 가한 역시 <계민> 가한의 아들임, 셋째 아들)

지금 <힐리> 가한이 파괴되어 멸망한 것은

어찌 배은망덕의 소치라고 아니할 수 있겠느냐!”

 

 

 

 

 

정관 8년(634년)

 

<힐리> 가한이 죽자, 조서로 그 나라사람으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고,

그 풍속의 예절에 따라 시체를 파수의 동쪽에서 불태웠다.

 

그에게 귀의왕(歸義王)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황(荒)이라고 하였다.

 

그의 옛 신하 호록달관(胡祿達官) <토욕혼사吐谷渾邪>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해 순사(殉死)하였다.

 

<토욕혼사>라는 자는 <힐리> 가한의 어머니, <파시婆施>씨의 가신이었으며,

<힐리> 가한이 처음 태어나자 <토욕혼사>에게 주어 키웠는데

이에 이르자 애통해하며 죽었다.

 

태종이 듣고 기이하게 여겨 중랑장을 추증하고

이에 <힐리> 가한 묘의 옆에 묻어주며 비문을 세워 기록하게 했다.

 

<돌리>가한, <십발필>이라는 자는 <시필>가한의 정통을 이어받은 아들이며,

<힐리> 가한의 조카이다.

 

수나라 대업 연간에 <돌리> 가한이 나이를 먹자,

<시필> 가한이 그 동쪽 아(牙:조정)의 병력을 거느리도록 보내고

니보설(泥步設)이라고 불렀다.

 

수나라 <회남淮南>공주가 북쪽으로 피난오자 마침내 처로 삼았다.

 

<힐리> 가한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돌리> 가한으로 삼으니

아(牙:조정)를 유주 북쪽에 설치했다.

 

<돌리> 가한은 동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해(奚)와 습(霫)등 수십 부족을 관할하였는데

세금을 걷는데 법도가 없어 여러 부족이 대다수 원망하였다.

 

정관 초기에 해(奚)와 습(霫) 등이 모두 와서 당나라에 귀부하니

<힐리>가한이 그 무리를 잃은데 분노하여,

북으로 설연타를 정벌하라고 보냈으나 또 군대를 잃어 마침내 매질을 하였다.

 

<돌리> 가한은 일찍이 무덕시기(618~626)부터, 깊이 스스로 태종과 맺고자 했고,

태종 역시 은의로 달래니 형제를 맺어,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뒤에 <힐리> 가한에게 정란(政亂)이 일어나자

급히 <돌리> 가한에게 병사를 징발하였으나

<돌리> 가한이 거절하고 주지 않자 이런 이유로 틈이 생겼다.

 

 

 

 

정관 3년(629년),

 

<돌리> 가한이 표를 올리고 입조할 것을 청하니 황상이 측근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전 시대에 나라를 다스린 자들을 보건데

마음을 써서 만백성을 걱정하면 나라의 수명이 오래 갔지만,

사람을 부려 자신을 받들게 하면 사직이 반드시 망하였다.

지금 돌궐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망한 것은

진실로 그 군주가 군주 노릇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리> 가한으로 하여금 진정 입조를 원하게 이른 것도

만약 곤궁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이적(夷狄)이 약하면 변경에 걱정이 없게 되므로,

역시 심히 위로가 되지만 그 망하는 것을 보면 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도 미치지 못할까 우려되고

또 너희에게 화란이 생길까 두렵기 때문이다.

짐이 지금 보아도 멀리 볼 수 없고 들어도 멀리 들을 수 없어

오직 공들의 충의와 원조에 의지하고자 하니

게으르게 굴지 말고 다투어 논의를 하도록 하라”

 

<돌리> 가한이 얼마 있지 않아 <힐리> 가한에게 공격을 받아

사신을 보내 와서 군사를 구걸하자

태종이 측근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과 <돌리> 가한이 형제를 맺어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두여회杜如晦>가 나아가 말하였다.

“이적(夷狄)은 신용이 없음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나라가 비록 약속을 지킨다 해도 저들은 반드시 배신할 것입니다.

이는 어려움을 이용해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어려움을 이용해 취하고 망하면 업신여기는 방법입니다.”

 

태종은 그렇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군 <주범周範>을 태원에 주둔케 함으로써 나아가 취하게 하자,

<돌리> 가한이 그 무리를 인솔하고 도망오니

태종이 심히 후하게 예우하여 여러 번 황제의 음식을 주었다.

 

 

정관 4년(630년)

<돌리> 가한에게 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북평군왕(北平郡王)에 봉하며 식읍 7백호에 봉하고

그 휘하 병사들과 백성들을 순주(順州)와 우주(祐州) 등에 배치한 뒤

부락을 거느리고 번(돌궐)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옛날 너의 할아버지 <계민> 가한이 병마를 잃고 홀로 수나라에 투신하였는데,

수나라에서는 <계민> 가한을 굳건히 세워,

마침내 강성하게 되었는데는 수나라의 은혜를 입고도

일찍이 그 덕에 보답한 적이 없었다.

너의 아비 <시필> 가한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수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고,

너 이후로부터는 중국을 침범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하늘은 실로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벌을 내리기 때문에 재난과 이변이 크게 일어나

너희 백성들이 흩어지고 어지럽게 되어 거의 죽은 것이다.

일이 이미 터져 곤궁하게 된 이후에 와서야 투항하니

내가 너를 가한으로 세워줄 수 없는 것은 바로 <계민> 가한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법을 바꾸어 중국을 오래 안정되게하고

너희 종족도 영원히 한결같게 만들기 위해 너에게 도독을 제수한다.

마땅히 우리나라의 법에 의거해 관할하는 부락을 바로잡을 것이고

망령되게 침략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만약 어긴다면 마땅히 중죄를 받을 것이다.”

 

정관 5년(631년) 입조하라고 부르자 병주에 이르러 도중에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 29세였다.

 

태종이 애도하고 조서로 중서시랑 <잠문본岑文本>으로 하여금

그 비문을 쓰도록 하며 아들 <하라골賀邏鶻>에게 지위를 잇도록 명하였다.

<구당서 권194 돌궐傳>

 

 

 

 

 

 

돌궐은 중국 북방의 오래되고 두드러진 민족이다.

 

일찌기 남북조시대에 돌궐족은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여

수십만에 이르는 군대를 건립한다.

 

수나라초기, 돌궐족은 내분과 투쟁으로 통치 집단이 동, 서의 양부로 나뉜다.

 

서돌궐은 알타이 산 서쪽에 위치하고,

동돌궐은 흥안령 서쪽에서 알타이 산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다.

 

그중 동돌궐은 얼마 후 수나라군대에 채배하고, 서돌궐도 내란으로 쇠락하게 된다.

 

수나라말기 천하가 혼란할 때,

동서 두 돌궐부락은 신속히 통일하고 새롭게 힘을 내서, 세력이 신속히 확장된다.

 

한때 막북에 할거하며 서역을 지배하고,

심지어 중원지역에도 심각한 위협을 주는 강대한 군사역량으로 된다.

 

이와 동시에, 수나라말기 농민의 난이 점차 전국대부분의 지역으로 확대된다.

 

수양제 대업7년(611년)부터 전국각지에서 反隋 의거군이 100개 이상 들고일어난다.

 

참가한 인원수만도 수백만에 이르렀다.

그중 실력이 가장 강한 반란군은 3갈래이다.

 

하나는 하남의 <이밀>, 적양의 와강군(瓦崗軍)이고,

둘째는 하북의 <두건덕竇建德> 군이며,

셋째는 강회지구의 <두복위杜伏威> 군이다.

 

반란군은 7년의 혈전을 거치면서 수양제 대업13년(617년)에 이르러,

수나라정권의 붕괴는 이미 기정사실화된다.

 

각 반란군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대업13년 칠월, 계속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이연>, <이세민>부자는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진양(지금의 산서성 태원)에서

3만의 군대를 이끌고 거병한다.

 

그들은 농민군의 수중에서 승리의 과실을 빼앗고자하였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연>, <이세민> 부자가 거병할 때,

돌궐군대가 진양을 습격하여 노략질을 한 후 돌아갔다.

 

돌궐의 습격은 <이연>, <이세민> 부자로 하여금 돌궐이 두려운 역량일 뿐 아니라,

그들이 천하를 다투는데 후고지우(後顧之憂)가 된다는 것을 의식했다.

 

만일 돌궐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자신이 새로 만든 세력은 끝장날 것이었다.

 

돌궐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연>, <이세민>부자는 심복인 <유문정劉文靜>과 상의한 후,

당공(唐公, 당시는 아직 수나라에서 받은 작위인 당공이었음) <이연>이

친히 돌궐의 <시필始畢> 可汗에게 글을 써서

"칭신납공"(신하로 칭하며 공물을 바치겠다)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유문정>은 많은 선물을 가지고 돌궐로 가서 협상한다.

 

<유문정>이 돌궐에 도착했을 때, <시필> 가한이 묻는다.

 

"당공(이연)이 거사를 했던데, 이제 무슨 일로 왔는가?"

 

<유문정>이 대답한다.

 

"황제가 적자를 폐하고 후주에게 물려주어 화란이 발생했다.

당공은 국가의 인척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가 없다.

그래서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될 자를 쫓아내고자 한다. 

원컨대 칸의 병마와 함께 경사로 치고 들어가서 사람과 땅은 당공이 가지고,

재물과 금은보화는 돌궐이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시필> 가한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대장 <강초리康鞘利>에게 2천 기병을 딸려

<유문정>을 따라 태원으로 가게 한다.

 

그리고 좋은 말 천 필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표시한다.

 

<유문정>이 이번에 돌궐에 사신을 간 것은

<이연>, <이세민> 부자의 의도를 받들어 간 것이다.

 

돌궐 <시필> 가한의 재물을 탐하는 약점을 이용하여,

경사 장안을 함락시킨 후 재물과 금은보화를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이것은 <시필> 가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 당나라 때 역사학자 <두우杜佑>가 그의<통전>에도 기록했다.

 

"돌궐이 다시 더욱 강성해 졌다...대당은 태원에서 의거를 일으킨다.

<유문정>은 그 나라에게 부탁하여 지원을 받고자 했다."

 

돌궐이라는 관문을 넘기 위하여 돌궐에 칭신납공하며 지원을 이끌어 내고,

자신이 천하를 쟁탈하는 것이 돌궐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를 해소시켰다.

 

이것은 막 천하를 다투기 시작한 이씨 집단에게 아주 가치있는 일이었다.

 

<이연>의 세력이 커지면서, 돌궐인의 욕심도 갈수록 커졌다.

 

<시필> 가한은 자주 각종 핑계를 대어 <이연>에게 재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고조가 즉위할 때까지, 전후로 상사(賞賜)한 것이 수를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시필>은 스스로 공이 있다고 자만하여 갈수록 교만해졌다.

 

매번 사신이 장안으로 올 때면 방약무인이었다.

 

고조는 중원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매번 이를 넉넉하게 용납했다.(優容)

 

여기서 '상사(賞賜)'라는 말은 미묘하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재물을 '진공'이라 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을 '상사'라고 한다.

 

<이연>이 신하이고, 돌궐의 <시필> 가한은 군주이다.

 

비록 당서에는 거꾸로 적었지만,

<이연>이 <시필> 가한에게 칭신납공했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다.

 

‘우용(優容)’은 실제로 실력이 돌궐에 미치지 못하므로

부득이 상대방의 탐욕을 만족시켜 준 것이다.

 

돌궐의 각종 무리한 요구에도 감히 대항하지 못한 것이다.

 

<시필> 가한이 사망한 후, 애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연>은, '애도를 표하기 위하여 조회를 3일간 폐하고,

문무백관을 불러 모아 사신이 있는 곳에서 조문을 했다.‘

 

이것은 중국고대에 國君이 사망했을 때 거행하는 융중한 의식이다.

 

<이연>, <이세민> 부자는 당나라의 실력이 아직 돌궐에 비하여 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집단과의 천하를 놓고 다투는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돌궐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노기를 억누르고,

돌궐의 신임 <처라處羅> 가한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 한 것이다.

 

<처라> 가한이 죽은 후, <이연>, <이세민>부자는 여전히 '신하의 예'로 조문하고,

여전히 백관으로 하여금 사신이 있는 곳에서 조문을 하게 했다.

 

당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후,

돌궐인은 이전처럼 각 할거자들의 수중에서 재물을 약탈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국력이 아직 강대해지기 전에

매년 내지로 들어가 교란하고 인구와 재물을 약탈한다.

 

돌궐의 <힐리> 가한은 일찌기 15만을 이끌고

병주(지금의 산서성 전부와 하북, 내몽고일부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남녀 5000여구를 약탈한다.

 

그리고 일찌기 기병 10만을 이끌고 삭주를 약탈하고, 태원을 습격한 바 있다.

 

더더구나 626년 <이세민>이 막 즉위했을 때는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장안성 바깥의 위수 편교의 북쪽까지 밀고 들어온다.

 

장안성과의 거리가 겨우 40리였다.

 

장안은 진동한다.

 

당태종은 어쩔 수 없이 의병지계를 써서,

친히 신하와 장병을 이끌고 위수로 가서 <힐리>와 대화한다.

 

<힐리>는 당나라군대의 진용이 위엄있는 것을 보고,

또한 당태종이 금은재물을 주는 것을 보고 결맹을 앶고 병력을 퇴각시킨다.

 

이것이 '위수지맹'이다.

 

<이세민>이 즉위한 후, 현명한 사람을 기용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자리에 앉혔다.

 

널리 언로를 열고, 건의를 받아들였으며 경제발전을 중시했고,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정관3년(629년)에 이르러서야 당나라는 돌궐에 대한 '칭신납공'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이때 당나라군대의 전투능력은 크게 제고되었고, 병력이 많아졌다.

 

이와 반대로, 돌궐의 실력은 점차 하락하여, 한때의 속국들이 속속 반기를 든다.

 

돌궐의 상층 통치자들 중에도 분열이 일어나, 형세가 당나라에 유리하게 바뀐다.

 

617년에서 629년까지,

12년 동안, 웅재대략의 <이세민>은 수시로 돌궐문제해결을 생각했다.

 

그리고 항상 돌궐문제에 이를 갈았다.

 

시기. 그는 시기를 기다렸다.

 

정관3년(629년) 이세민은 당금의 형세를 분석하고 군사적 준비를 충분히 마친 후,

돌궐문제를 철저히 해결할 시기가 이미 성숙되었다고 보고, 돌궐에 출병한다.

 

이로써 12년간 드리워졌던 그림자를 지워버리려 한 것이다.

 

대당제국이 돌궐에 '칭신납공'했다는 불명예의 역사를 철저히 고쳐 쓰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정>에게 명하여 돌궐을 공격하게 한다.

 

돌궐 군을 대패시키고, <힐리> 가한을 생포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제 <이세민>은 돌궐에 대한 신복의 역사를 끝낸 것이다.

 

<이세민>은 중국 역사상아주 업적이 뛰어난 황제이다.

 

그는 사람을 잘 썼을 뿐 아니라, 건의를 잘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정관지치'의 번영국면을 만들어내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

 

동시에 그는 전국을 통일하고 적시에 돌궐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대국관과

12년 동안 오랑캐나라에 칭신납공하는 인내력이 있었다.

 

이는 모두 후세인들이 본받고 배워야할 점이다.

 

 

 

<이연>이 돌궐에게 칭신납공하겠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해 보자.

 

구당서 고조 본기나 신당서 고조 본기에는 없다.

(중국 사서는 그런 것을 기록할리가 없다-춘추필법)

 

자치통감 수기8 공제 의녕 원년(617), 6월 기묘일 조를 보면

『<유문정>이 <이연>에게 돌궐과 서로 관계를 맺고

그들의 병사와 말을 밑천으로 하여 군사 세력을 늘리도록 권고하였다.

<이연>이 그 말을 좆아서 스스로 계문을 썼는데

비사후례로 <시필>가한에게 보내어 말하였다.

(원문: (劉文靜勸李淵與突厥相結,資其士馬以益兵勢。淵從之,自

卑辭厚禮,遺始畢可汗云)』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 계문()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글이고,

그것을 스스로 썼다고 하며

비사후례(卑辭厚禮)란 비굴한 언사와 후한 예물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칭신납공(稱臣納貢: 신하임을 자처하고 공물을 바침)했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 한 것이다.

(자치통감 역시 지독한 춘추필법으로 쓴 것이어서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음)

 

그렇지만 그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으니 보다 확실한 증거를 찾아보자.

 

신당서 돌궐전 629년 기사에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년에 국가가 처음 평정되었을 때,태상황이 백성들 때문에,

돌궐을 받들면서,거짓으로 신하를 칭하였는데,

짐은 늘 마음이 아프고 골치가 아파,

천하의 수치심을 한 번에 쓸어버리겠다고 생각하였다.

(원문: 帝謂臣曰:「往國家初定,太上皇以百姓故,奉突厥,詭而臣之,

朕常痛心病首,思一刷恥於天下」』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당고조 <이연>이 돌궐에게 신하를 칭하였다는 말이 확실하게 나온다.

(위에서 황제는 당태종이며, 태상황은 당고조 이연임.)

 

따라서 당고조 <이연>이 돌궐에게 칭신하였다(신하를 칭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납공(納貢:공물을 바쳤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구당서 돌궐전 등에 많이 나온다.

 

구당서 돌궐전에

1)(시필 가한에게) 고조가 즉위할 때 앞뒤로 상여한 것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원문:及高祖即位,前後賞賜,不可勝紀)

(상여(賞賜)란 쉽게 말해서 물건을 주었다는 말임)

 

2) 『고조가 장안에 들어갔을 때 <설거>가 여전히 농우를 차지하고,

그의 장군 종라()를 보내 평량군을 공격해 함락하면서,

북으로 힐리(가한)과 연결하였다.

고조가 (이를)걱정을 하여 광록경 우문흠을 보내

금과 비단을 힐리(가한)에게 뇌물로 주었다.

<우문흠>이 <힐리>를 설득하여 <설거.와 절교하게 하였다.

애초에 수나라 오원태수 <장장손>은 전란이 일어나자

그 소속 부락 오원성으로써 돌궐에 예속하였다.

(그래서) (우문)흠은 또 <힐리> 가한에게 <장장손>을 보내 입조케 하고,

오원 땅을 우리(당나라)에게 되돌리도록 설득하였다.

힐리(가한)는 모두 (이를)따랐고 이로 인하여

돌궐 병사와 ()장손의 무리가 출발하여 모두 태종 군대가 있는 곳에 모였다.

(원문:高祖入長安,薛猶據隴右,遣其將宗羅攻陷平涼郡,北與頡利連結。高祖患之,遣光祿卿宇文歆齎金帛以賂頡利。歆說之,令交於薛。初,隋五原太守張長遜因亂以其所部五原城隸於突厥。歆又說頡利遣長遜入朝,以五原地歸于我。頡利並從之,

因發突厥兵及長遜之眾,並會於太宗軍所)

 

3) 『고조는 중원을 안정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아 밖을 도모할 수 없어서

매번 우대하여 용인하니 물자를 준 것이 셀 수가 없었고 힐리(가한)의 언사가 거칠고 거만하며 (자기가) 청구한 (물건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원문: 高祖以中原初定,不遑外略,每優容之,賜與不可勝計,頡利言辭悖傲,

求請無厭)

 

4) 『태종이 일러 말하기를「...(생). 또 의로운 군대가 서울로 들어올 초기에

너희 부자가 모두 친히 우리를 따라와서 너희에게 옥과 비단을 준 것이

전후로 지극히 많은데,

어떤 까닭으로 갑자기 군대가 우리 서울근처의 현에 들어왔는가?

(원문: 太宗謂之曰:「...又義軍入京之初,爾父子並親從我,賜汝玉帛,

前後極多,何故輒將兵入我畿縣?)

 

이 정도면 납공(納貢:공물을 바쳤다)했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당고조 이연이 돌궐에게 칭신납공(稱臣納貢)했다(신하를 자처하고 공물을 바쳤다)는 말은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칭신납공 관계는 이연이 장안을 점령한때(617)부터

이연이 당나라 황제로 즉위했던 시기 내내 이어지고

(무덕 원년에서 무덕 9, 618~626)

이세민이 당태종에 즉위했을 때도 계속 되어 정관 2(628)까지

12년간 지속 되었다.

 

그러한 칭신납공 관계가 꾾어진 것은 돌궐이 내분을 일으켜 스스로 무너짐에 따라

당태종이 돌궐을 멸망시키면서 칭신납공 관계가 끊어진 것이었다.(정관4-630)

 

이렇듯 돌궐과 당나라는 돌궐이 종주국, 당나라가 종속국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은 당고조 이연이 자처 한 것이지 돌궐이 강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힘이 약한 이연이 장안을 점령하기 위해

돌궐의 군사력을 빌리면서 일어난 일이고

돌궐의 백만 대병과 이연의 3만 군사에서 보듯이

비교할 수 없는 군사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우리가 중국 사서를 보는 이유는 우리 역사를 알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구당서 돌궐전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

돌궐의 멸망과정이다.

 

바로 우리역사, 고구려의 역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구당서 돌궐전을 보면 돌궐의 멸망과정은 다음과 같다.

 

626(무덕 9)6월 당태종이 형과 동생을 쳐 죽이고 아버지를 감금해서 정권을 잡자,

다음 달인 7월에 돌궐의 <힐리>가한이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 가까이까지 쳐들어 온다.

 

이렇게 위급해지니 장안에 계엄령이 내려진다.

 

이때 당태종은 막대한 양의 옥과 비단을 바치고 그 위기를 벗어난다.

 

이것이 이른바 위수에 있는 편교 위에서 맺은 '위수지맹'이다.

(편교는 위수에 있는 다리임)

 

억울하지만 힘이 약하니 강도들에게 값비싼 보물을 엄청나게 바치고

자기 권력과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태종이 집권할 때까지 두려워할 만큼 강성했던 돌궐이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가?

 

운명은 이상하게 흘러 <힐리>가한은 <돌리>가한으로 하여금

동쪽지역을 관할하게 하였었는데 <돌리>가한이 세금을 제멋대로 거두어들여,

위수지맹 1년 뒤인 627, 음산 이북의 설연타、회흘、발야고 등

여타 부족들이 모두 연달아 배반하여 돌궐의 욜곡설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이에 <힐리> 가한이 <돌리> 가한을 보내 토벌하였으나

<돌리> 가한의 군사가 또 패하여,

<돌리> 가한이 경무장한 말을 타고 달아나 돌아왔다.

 

이에 <힐리> 가한이 분노하여,

<돌리. 가한을 10여일 가두고 매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돌리> 가한이 원망하여 속으로 배신하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돌궐은 본격적인 틈이 생겨 내분에 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일이 안 될려고 그랬는지

그해에 돌궐에 큰 눈이 내려 양과 말이 모두 죽고 사람들이 크게 굶주렸다.

 

그런데도 <힐리> 가한은 다시 거듭 여러 부족에게서 세금을 걷고,

이런 이유로 부하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팎으로 대부분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되어 <힐리>가한이 쇠약해져,<돌리> 가한에게 병력을 급히 구하였으나,

<돌리>가한이 따르지 않자,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였다. 결정적인 내분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되니,

그 다음 해인 628, <돌리>가한이 <힐리>가한의 공격을 당했다고 하면서,

당나라에 구원을 요구한다.

 

나아가 <힐리> 가한을 쳐달라고 부탁한다.

 

내분사태가 외세를 불러들이는 사태로 번진 것이다.

 

이때 당태종은 <진무통>으로 하여금 병주의 군대로 상황에 따라 응접하라고 명한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또 그 다음 해인 629년 돌궐진영에서 본격적인 이탈자가 생겨난다.

 

<돌리> 가한이 서신을 보내 당에 입조할 것을 청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

<돌리> 가한이 <힐리> 가한에게 또 공격을 받아 군사를 달라고 간청한다.

 

사태가 긴박해졌다.

 

그러던 차에 8월 설연타가 스스로 가한을 칭하고, 사신을 보내와 지방물건을 바친다.

 

당에 붙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내분사태가 벌어지고 이탈자가 생긴 것을 보고나자

그때서야 당태종은 군대를 동원한다.

 

그만큼 당태종은 돌궐을 두려워한 것이다.

 

6298월 정해일,

<이정>을 정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돌궐을 정벌하게 한다.

 

이때 마읍의 돌궐을 치라고 명했는데,<힐리> 가한이 달아나고,

9명의 돌궐 하급관리가 무리를 들어 항복하였으며,

발야고, 복골, 동라 () 여러 부족과 습(), ()의 우두머리가

다 당나라에 내조한다.

 

뜻밖에 이런 식으로 성과가 나자 당태종은 본격적으로 군대를 투입한다.

 

62911월 병주도독 <이세적>,<이정>,좌무위대장군 <시소>,

영주대도독 임성왕 <이도종>,유주도독 <위효절>,영주도독 <설만숙> 등

모두 6총관,군사 10여만을 동원하여 돌궐을 친다.

 

이렇게 되니, 그해(629) 12,

<돌리>가한과 욱사설、음내특근 등이

모두 소속 부락을 거느리고 당나라로 도망쳐 온다.

 

다시 그 다음 해인 6301,

<이정>이 진군하여 악양령에 주둔했다가,밤에 정양을 습격하자,

<힐리> 가한이 놀라 아장(궁정)을 적구에 옮겼다.

 

6302,

<힐리>가한이 철산에 숨었는데 병력이 아직 수만이었으나

<집실사력>으로 하여금 내조케 하여 항복하겠다고 청한다.

 

이때 당태종은 홍려경 <당검> 및 장군 <안수인>을 보내

황제의 증표()를 가지고 가서 안심시키니, <힐리>가한이 조금 안정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정>이 그 틈을 타서 습격하여 <힐리> 가한을 대파한다.

 

안심시킨 뒤 뒤통수를 후려 친 것이다.

 

<힐리>가한은 천리마를 타고, 홀로 사촌형제의 아들 <사발라> 부락으로 달아난다.

 

6303

행군부총관 <장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갑자기 <사발라> 군영에 도착해서,

<힐리> 가한을 생포하여 당나라 서울인 장안으로 보낸다.

 

이렇게 하여 그렇게 강성했던 돌궐은 멸망하였다.

 

한마디로 돌궐은 내분으로 망한 것이다.

강성한 돌궐이 내분만 없었으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움직임을 보면.

강성한 나라에 대해서는 내분이 일어나야 침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전까지는 언감 생신 꼼짝도 못하다가

상대방이 내분을 일으켜 힘이 없어진 것을 보고서야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꼼짝 못하다가 상대방이 스스로 쓰러진 뒤에 때리는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힘이 있으면 비굴한 자세로 막대한 양의 보물과 물품을 계속 바쳐

종놈 노릇을 하다가 상대방이 스스로 넘어지면

그 위에 올라타 뺨을 때리고 칼을 꽂는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본성이다.

 

돌궐처럼 평소에는 두려워서 꼼짝 못하다가 내분이 일어나자

당태종이 군대를 동원해 침략한 나라가 또 하나 있다.

 

바로 고구려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고구려의 강성함이다.

 

고구려도 돌궐과 마찬가지로 당태종이 평소에는 감히 찝쩍거리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연개소문의 정변 사태가 벌어지자 이를 내분으로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한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태종이 607년 북쪽의 강성대국 돌궐을 무너뜨리고

서쪽으로 강성한 토욕혼을 635년에 꺾어 속국으로 만든 뒤에도

하나 남은 동쪽의 강성대국 고구려를 약 10년 동안 감히 찝쩍거리지를 못하다가

돌궐 멸망 후 12년 뒤인 642년 연개소문에 의한 고구려 정변이 일어나자,

그것을 고구려 내분으로 생각하고 다시 2년 뒤인 64411월에 고구려 침략을 한다.

 

이렇듯 고구려도 돌궐과 마찬가지로 강성하였다.

 

고구려도 돌궐처럼 강성하여

당태종이 평소에는 감히 찝쩍거릴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도 돌궐처럼 내분이 일어나자

당태종은 고구려를 돌궐처럼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당태종 스스로 직접 군대를 끌고 고구려를 침략한다.

 

이른바 친정(親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돌궐보다 더 강성하여 당태종은 요동성 쪽에서 맴돌다가

안시성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고 비참하게 쫒겨난다.

 

쫒겨나는 길에는 그 혹독한 요동벌판의 눈보라를 맨살로 맞아가며

황제라는 자가 일반 병사와 똑같이 힘든 일을 하면서 비참한 몰골로 겨우 빠져 나갔다.

 

이렇듯이 고구려는 당태종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돌궐보다도

훨씬 더 강성하였던 것이다.(돌궐은 패했으나 고구려는 승리하였음)

 

정작 고구려가 망한 것은 돌궐과 마찬가지로 내분 때문이었다.

 

당태종이 죽고 당 고종때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과 그 동생 남건· 남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뒤이어 결국 남생이 쫒겨나 남생의 아들 헌성이 당에 들어가

구원을 요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내분이 외세를 불러온 돌궐의 경우와 완전히 똑같아 진 것이다.

 

이래서 고구려가 망한 것이지

내분이 없었다면 당나라는 절대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분이 있기 전 당나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침략이

다 실패하였음이 이를 증명한다.

 

당태종이 <돌리> 가한을 일찍이 당고조 이연 때부터

은의로 달래어(恩義撫之) 형제 및 동맹을 맺는다.

 

여기서은의로 달랬다(恩義撫之)’는 말은 금은보화와 비단 같은 진귀한 물건을 주어

상대방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중국인들의 전매특허 관습용어이다.

 

한마디로 금품을 주어 구워삶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상대방을 매수하는 수작은 중국인들의 전매특허이다)

 

이때 돌궐에는 힐리 가한과 돌리 가한, 두 명의 가한(황제)이 있었는데

한쪽을 매수해서 이간질을 시키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놓고 당태종은 백주 대낮에 전쟁터에서 대놓고

<힐리> 가한과 <돌리> 가한을 이간질 시킨다.

 

624(무덕 7) 8, <힐리>、<돌리> 두 가한이 거국적으로 당나라를 침범하니

당태종이 북쪽 빈주에 가서 이를 막았는데

이때 장안 지방에 장마가 내려 군량 수송이 두절 되어 당태종 군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때 <힐리> 가한과 <돌리>가한이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빈주성 서쪽에 도착하여 높은 곳에 올라 진을 치니 장수와 병사들이 크게 놀란다.

 

 

여기서 구당서 돌궐전은 아주 대놓고

『태종이 <돌리> 가한에게 반간계를 썼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돌리> 가한이 기뻐하며 투항할 마음을 갖게 되어, 마침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숙부와 조카의 내부 분열로,

<힐리> 가한이 싸우려고 하였으나 싸울수 없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고 있다.

 

또한 <돌리> 가한이당나라에 투항 했을 때 당태종이

『내가 너를 가한으로 세워줄 수 없는 것은 바로 계민 가한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법을 바꾸어 중국을 오래 안정되게 하고

너희 종족도 영원히 한결같게 만들기 위해 너에게 도독을 제수한다.

라고 말한 점을 보면

 

당태종은 이전에도 그런 예가 있으니 <돌리> 가한이 내분을 일으키면

어떠한 경우에도 <돌리> 가한을

돌궐의 유일한 가한으로 세워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틀림없다.

 

즉 이간질은 경제적 혜택과 권력 보장 두가지 방향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기들의 야욕이 채워지고 상대방의 힘이 꺾여지자

바로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야비한 사기꾼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이 금품으로 상대방을 매수하여 이간질을 시키고 서로 싸우게 만들어

둘 다 상처를 깊게 입게 하여 쓰러지게 만든 다음

상대방의 빰을 때리고 칼을 꽂는 것이 중국인들의 수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것의 본 모습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