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당서 고조 본기에서 우리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 살펴봐야 할 사항이

구당서 무덕 7(624) 정월 조에 있는

『고려왕 고무를 요동군왕으로,백제왕 부여장을 대방군왕으로,

신라왕 김진평을 낙랑군왕으로 봉하였다.』라는 기사이다.

 

이것이 사실인가?

 

우선 신당서 고조 본기에는 이러한 기사가 없다.

 

같은 고조 본기인데 신당서 고조 본기에는 왜 없을까?

 

구당서 고조 본기의 기사가 사실인지 알아보자.

 

먼저 무슨무슨 군왕(郡王)으로 봉해진 경우가 어떤 게 있는지 살펴보자.

 

 

< 구당서 고조 본기 >

 

1) 619(무덕 2)

겨울 10월 기해일,유주총관 <나예>를 연군왕으로 봉하고,이씨 성을 주었다。

 

2) 620(무덕 3)

겨울 10월 경자일,회융의 도둑 우두머리 <고개도>가 사신을 보내 항복하므로,

울주총관을 제수하고,북평군왕에 봉하고,이씨 성을 주었다.

 

3) 621(무덕 4)

봄 정월 정묘일,<두건덕>의 행대 상서령 <호대은>이 대안진을 들어 투항하므로,

정양군왕에 봉하고,이씨 성을 주었다.

 

※ 참고

 

고개도(高開道) : 창주(滄州) 信陽人.

수나라 말기 하북지역에서 군사를 모집 北平 漁陽郡을 점령하고

漁陽에서 燕王을 자칭 함.

그 뒤 당조에 투항하여 蔚州總管 북평군왕에 봉해짐.

무덕 5년(622)에 다시 연왕을 칭하고 돌궐과 연합하여

<나예羅藝>가 관할하던 환주(洹州). 定州, 易州 등지를 침략하고 馬邑을 함락,

뒤에 부하장수에게 피살당하여 8년간에 걸친 연국은 멸망하였음.

 

 

<구당서 태종본기>

 

4) 635(정관 9)

5월 임자일,<이정>이 토욕혼을 서해 가에서 평정하고,그 왕 <모용복윤>을 잡았다.

그 아들 <모용순광>이 항복해서,서평군왕으로 책봉하여,그 나라로 돌려보냈다.

 

5) 12월 갑술일,토욕혼 서평군왕 <모용순광>이 그 부하에게 살해되어,

병부상서 <후군집>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안무하고,

<모용순광>의 아들 <낙갈발>을 하원군왕으로 책봉하여,

그로하여금 그 무리를 통솔하도록 하였다.

 

6) 639(정관 13)

가을 8월 경진일,우무후대장군、화주도독、회화군왕 <이사마>를 돌궐가한으로

세워,소속 부족을 거느리고 하북에 아(궁정)를 세우도록 하였다.

 

7) 643(정관 17)

6월 병자일, 동래군왕 <태>를 순양왕으로 옮겨 책봉하였다.

 

 

< 구당서 돌궐전 >

 

8) <돌리> 가한이 그 무리를 인솔하고 도망오니 태종이 심히 후하게 예우하여

여러번 황제의 음식을 주었다.

정관 4(630) <돌리> 가한에게 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북평군왕에 봉하며 식읍 7백호에 봉하고 그 휘하 병사들과 백성들을 순주와

배치한 뒤 부락을 거느리고 번(돌궐)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신당서 고조본기>

 

619(무덕 2)

10월 기해일,<나예>가 항복하였다.

 

 

< 신당서 태종본기 >

 

9) 629(정관 3)

11월 경신일,...(상략) 임성군왕 <도종>

 

 

646(정관 20)

6월 을해일,강하군왕 <도종>

 

 

위의 사항을 간단히 종합해보자.

 

1) 유주총관 <나예>를 연군왕에 책봉

2) <고개도>가 사신을 보내 항복하므로,울주총관을 제수하고,북평군왕에 책봉

3) <호대은>이 대안진을 들어 투항하므로,정양군왕에 책봉

4) 그 아들 <모용순광>이 항복해서,서평군왕에 책봉

5) 병부상서 <후군집>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안무하고,

<모용순광>의 아들 <낙갈발>을 하원군왕으로 책봉

6) 회화군왕 <이사마>를 돌궐가한으로 삼아

7) 동래군왕 <이태>를 순양왕으로 옮겨 책봉

8) <돌리> 가한이 그 무리를 인솔하고 도망오니...

정관 4년(630년) <돌리> 가한에게 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북평군왕에 책봉

9) 임성군왕 <이도종> 또는 강하군왕 <이도종>이다.

 

9개 사항에서 군왕에 책봉된 이유를 살펴보면

 

<고개도>는 항복해서 북평군왕에,

<호대은>도 투항해서 정양군왕에,

<모용순광>도 항복해서 서평군왕에,

<낙갈발>도 항복한 군주의 아들이어서 하원군왕에

<이사마>도 돌궐이 멸망할 때 당나라에 생포된 사람이기 때문에 회화군왕에

{이사마는 본래 이름이 <아사나사마>로 돌궐의 가한과 같은 성씨로

돌궐 가한의 종친이다}

<돌리> 가한도 투항해서 북평군왕에 책봉된 것이고

<나예>도 신당서 무덕 2(619) 10월 기해일 조에

「나예가 항복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항복을 했기 때문에 연군왕에 책봉된 것이다.

 

그 다음, <이태>{당 태종의 넷째 아들}는 당나라의 종친이기 때문에 동래군왕에

<이도종> 역시 당나라의 종실이기 때문에 임성군왕 또는 강하군왕으로 책봉된 것이다.

 

※이도종(李道宗): 당고조 이연의 5촌 조카(사촌인 이소의 아들-종실:宗室)

 

따라서 군왕(郡王)에 책봉된 것은 두가지 경우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의 종친이나 종실인 경우가 아니면 전부 항복한 것이다.

 

이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을 군왕(郡王)에 책봉했다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당나라의 종친이거나 종실인가?

 

그러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때(무덕 7-624) 당에게 항복하였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임금을 군왕(郡王)으로 책봉하였다는 말은

거짓말 아닌가!

 

더구나 이때(무덕 7년,624) 고구려는 돌궐만큼 강성하였다.

 

그래서 당고조 <이연>의 시대를 지나 당태종때에도 북쪽의 강성한 돌궐을 멸망시키고,

서족의 토욕혼을 꺾고도 10년 동안이나 돌궐처럼

감히 고구려를 넘 보지도 못하였던 것이고 연개소문의 정변이 나서야

그것을 내분으로 생각하고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던 것 아닌가!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고구려왕을 요동군왕에 책봉하였다는 기사는 분명히 거짓말이다.

 

더구나 그때(무덕 7년, 624)는 당나라가 돌궐에 칭신납공하던 때 아닌가!

 

당나라가 힘이 없어  돌궐의 신하라고 칭하면서 공물을 바치던 때이다.

 

그런 주제에 돌궐만큼 강성한 고구려 임금을,

항복한 자들에게나 하는 군왕(郡王)에 책봉하였다는 기사가 말이 되는가?

 

그것은 턱도 없는 거짓말이다.

 

고구려 임금을 군왕(郡王)에 책봉하였다는 기사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래서 신당서 고조 본기에는 그런 기사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구당서 고조본기에 왜 그런 거짓말 기사가 있을까?

 

그것은 당태종이 고조실록을 뜯어 고쳤다는 사실과

진서 동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없는 사실을 참고하면 알수 있을 것이다.

 

진서 동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없다는 것이 왜 이것과 연관이 있는가?

 

우선 진서(晋書)는 사마의가 시조인 진()나라의 역사를 다룬 사서인데

()나라의 역사는 서진(西晋)과 동진(東晋)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런데도 진서 동이전에는 고구려가 없다.

 

왜 그럴까?

 

진서는 당태종 자신이 스스로 편찬에 직접 참여한 사서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없애겠다는 심보에서 사서에서 빼버린 것이다.

 

진서의 저작연대가 그것을 말해준다.

 

진서의 저작연대는 당태종 정관 18년(644)부터 정관 20년(646년) 사이이다.

 

바로 그때가 고구려를 침략한 때이다.

 

<장량>과 <이세적>을 우두머리로 하여 16개의 총관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략한 때가 정관18(644)이고

당태종 자신이 직접 군대를 몰고 고구려에 침략한 때가 정관 19(645)이며

안시성에서 패하여 자기나라로 도망쳐 그들의 서울인 장안에 도착한 때가

정관 20(646)이다.

 

이렇게 고구려에게 호되게 당하자

책에다 분풀이를 한 것이 진서이고 글자로 장난 친 것이 진서이다.

 

힘으로는 안되니까 책으로 고구려를 없앤 것이다.

 

붓으로 고구려를 지운 것이다.

 

그러니 당고조 실록을 뜯어 고칠때 고구려가 마치 항복한 것처럼

군왕(郡王)에 책봉하였다고 거짓말 한 것쯤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태종 다음에 즉위한 당고종때에

고구려와 백제가 망했으므로 그러한 거짓을 고칠 필요가 없어졌고

그러한 상태의 실록들이 최종적으로 구당서를 제작했을 때 참고가 되어

구당서 고조본기에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구당서 고조본기에 어이없는 거짓말이 버젓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봐야 할 사항이 군()의 이름이다.

 

구당서 고조본기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왕 고무를 요동군왕으로, 백제왕 부여장을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신라왕 김진평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하였다.

 

그러면 고구려를 요동군, 백제를 대방군((帶方郡)이라고 한 것이고

신라를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구당서 고조 본기의 기록은

요동군, 낙랑군,  대방군의 문제를 풀어주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그 당시 백제는 오늘날의 충청남도와 전라도에 있었고, 신라는 경상도에 있었다.

 

그러면 오늘날의 충청남도와 전라도가 대방군인가?

 

오늘날의 경상도가 낙랑군인가?

 

아주 완전히 틀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당나라 사람들의 한반도 및 만주 지역에 대한 지리적 무식함이다.

 

한마디로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요동군이라고 하고 백제는 대방군,

신라는 낙랑군이라고 한 것은 어디서부터 유래 한 것일까?

 

역대 사서를 살펴보자.

 

 

< 史記, 漢書 >

 

조선열전이 있고, 고구려전, 백제전, 신라전은 없음.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백제전과 신라전은 없음

 

 

< 後漢書 동이전>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같음

 

 

<진서(晋書) 사이전(四夷傳中 동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없음(마한과 진한만 있음)

 

 

 

< 魏書 열전 >

 

 

고려 :  세조 때에 쇠()의 증손 련()이 처음으로 사신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방물을 마치면서 아울러 국휘(國諱)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명(詔命)으로 제계(帝系)의 이름 자()

          그 나라에 내려 주고, 원외산기시랑 이오(李敖)를 파견하여

          장()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배수(拜授)하였다.

 

          오()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곳을 방문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책성(),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은 예전의 부여에 이른다."

 

 

백제 :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리가 떨어져 있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신라전은 없음.

 

 

< 宋書 夷蠻열전 >

 

 

고구려 :  동이 고구려국은 현재 한대(漢代)의 요동군을 지배하고 있다.

             고구려왕 <고련>이 진() 안제(安帝) 의희 9(A.D.413)

             장사(長史)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쳤다.

 

             [안제(安帝)] <고련>을 사지절 도독영주 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고조가 왕위에 오른 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

              사지절 독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 영()은 함께 해외에 있으면서

              바른 도리를 지키어 멀리서 공물을 보내 오고 있소.

 

             이제 [()나라의] 개국(開國)을 알리어 기쁨을 나누어 가지려 하오.

 

 

백제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이라 한다.

 

          의희 12(A.D.416) 백제왕 여영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고조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으로 벼슬을 올려 주었다.

 

신라전은 없음

 

 

< 南齊書 동남이열전 >

 

 

고려 :  동이 고려국은 서쪽으로 위(魏) 오랑캐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송나라 말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2주((都督營·平二洲)) 제군사 거기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태조 건원 원년(A.D.479)에는 련(璉)의 장군 호(號)를

         표기대장군으로 올려 주었다.

 

 

백제 :  [또한 백제왕에 대해서는]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복야(謁者僕射)를 겸한 손부(孫副)를 사신으로 보내어

          [모(牟)]대(大)를 책명(策命)으로 망조부(亡祖父) 모도(牟都)를 이어서

          백제왕으로 삼았다.

 

신라전은 없음.

 

< 梁書 동이열전 >

 

 

고구려 :  그의 아들 고운을 제(齊) 융창(隆昌) 연간(A.D.493)에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이주(都督營·平二洲) 정동대장군 낙랑공으로 삼았다.

 

             고조가 즉위하여 고운을 거기대장군으로 올려 주었다.

 

 

백제 :  백제(百濟)는 그 시초가 동이의 삼한국인데 하나는 마한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이요, 또 하나는 변한이었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국(國)이 있었고 마한은 54국(國)이 있었다.

 

           대국(大國)은 1만여가(萬餘家), 소국(小國)은 수천가(數千家)로서

           모두 10여만호가 되었는데, 백제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점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驪)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晋)나라 때에 이르러 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遼西)· 진평(晋平) 2군(郡)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제(齊) 영명(永明) 연간(A.D.483~493)에 태(太)에게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천감(天監) 원년(A.D.502)에 태(太)의 호(號)를 정동장군으로 올려 주었다.

 

신라 :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연(沿)해 있고,

          남북으로는 구려(句驪) · 백제와 접하고 있다.

 

          보통 2년(A.D. 521)에 성(姓)은 모(募), 이름은 태(秦)인

          [신라]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陳書>

 

 

동이전이 없음

 

< 北齊書 >

 

 

동이열전이 없음

 

 

문선제 본기 :  천보 원년(550) 9월 계축일, 산기상시、거기장군、영동이교위、

                    요동군 개국공、고려왕 ()성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로 삼고,왕과 공은 예전처럼 하였다.

 

 

무성제 본기 :  하청 4(565) 2월 갑인일,조서로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으로 삼았다.

 

 

후주 본기 :  무평 원년(570) 2월 계해일,백제왕 여창을 사지절、시중、

                 표기대장군、대방군공으로 삼고,왕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 周書열전 >

 

 

고려 :  고조(高祖)가 탕()을 상개부의동 대장군 요동군개국공 요동왕에 배수했다.

 

          그 지역은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지나니

          [동서(東西)] 2천리요, 남쪽은 백제와 인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남북(南北)] 천여리(千餘里)이다.

          국도(國都)는 평양성으로,

          그 성은 동서가 6리이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아 있다.

 

 

백제 :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이다. 도읍은 고마성(固麻城)이다.

 

 

신라전은 없음

 

 

< 隋書 동이열전 >

 

 

고려 :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리이다.

           국도(國都)는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都會地)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 일컫는다.

           신라와는 늘 서로 침공하고 약탈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고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에게 상개부의동삼사를 제수하는 한편,

           요동군공을 세습시키고 옷 한벌을 내려 주었다.

           ()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책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특별히 원()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제 :  개황 초(A.D.581~600)에 그 나라의 왕 여창이 사신을 보내어

          지방물건을 바치니, ()을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삼았다.

 

 

신라 :  고조는 진평(眞平)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 舊唐書 동이열전 >

 

 

고려 :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백제 :  일찍이 마한의 옛 땅으로서 경사(京師)에서 동으로 6,200리 밖에 있으며,

          대해(大海)의 북쪽,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려에 이른다.

 

 

신라 :  그 나라는 한대(漢代)의 낙랑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서쪽은 백제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고려와 인접하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 최초로 고구려 왕을 요동군과 연결시킨 나라는 북위였음을 알 수 있다.

 

2) 북제서는 북위가 고구려와 요동군을 연결시킨 것에 더하여, 백제와 대방군,

    신라와 낙랑군을 연결시켰다.(한반도 지리에 대한 무지의 결과 임)

 

3) 주서는 백제의 시조가 구태라고 하면서 구태가 대방군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면서

    백제와 대방군을 다시한번 연결시켰다.

 

4) 수서는 거기에다가 국도(國都)는 평양성이라는 말과 함께 고구려와 요동군,

    백제와 대방군, 신라와 낙랑군을 연이어 연결하였다.

 

5) 구당서 고조 본기에 고구려와 요동군, 백제와 대방군, 신라와 낙랑군은

    또한번 연결시켰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부터 구당서 동이열전까지에서 또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중국 사람들의 한반도 지리에 대한 무지이다.

 

梁書 동이전은 신라에 대해서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고 했다.

(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 :양서 권54 열전 제48 제이(諸夷) 중 동이(東夷), 신라 조)

 

이와같이 고대 중국인들은 한반도 지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반도 지리에 완전히 무식하다는 또다른 증거를 보자.

 

구당서 동이열전을 보면.

「고구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가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야 신라가 있는가?

 

그야말로 아주 웃기는 얘기로 한반도의 지리에 대하여

아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백제가 있다는 말도 틀렸다.

 

그리고 백제의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이 있다고 하고

신라의 동쪽과 남쪽에는 큰 바다만 있다고 하니 이 설명대로라면

왜국(倭國)은 제주도에 있는 것이고

신라의 동쪽과 남쪽은 태평양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 역시 한반도의 지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하면,

魏書가 고구려 「남쪽으로는 소해(小海)」가 있다고 언급하고,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그 나라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리가 떨어져 있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하였다.」라고 언급하면서 부터이다.

 

그것을 구당서가 이어받은 것이다.

 

이러한 한반도에 대한 무지가

평양이 한나라 낙랑군이라는 거짓말을 낳은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평양이 한나라 낙랑군이라고 거짓말 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흉계 때문이다.

 

왜 그랬는가?

 

고구려 정벌을 신하와 백성 태자까지 전부 극력반대를 하니

고구려 정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꾸민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당태종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전부 먹어치우려고 한 것이다.

 

사전에 공작한 흉계이고 동북공정처럼 우선 먼저 말로 침략을 해놓은 것이다.

 

평양성을 언급한 것은 魏書가 처음이고, 그것을 周書가 이어받아 언급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隋書가 이어받고, 다시 舊唐書가 평양에 대한 언급 이어받았는데

갑자기 다른 사서에는 없는 평양이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도 또한번 당태종의 평양 침략 의도(고구려 침략 의도)를 엿볼수 있다.

 

참고로 梁書, 陳書, 北齊書, 周書, 隋書의 5개국 사서는 전부 당태종 때 만든 것이다.

 

또한 당나라 고조 실록은 당태종이 뜯어 고친 것이다.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해놓고 신라도 낙랑군이라고 하니

신라는 지금의 경상도인데 그러면 평양에 경상도가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한반도 지리에 대한 무식함과

고구려와 신라까지 침략하려는 당태종의 야욕에서 드러난 거짓말이지만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이쯤되면 정신병자라고 해야 할 판이다.

 

구당서 본기에 있는 고구려가 당태종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과

당태종이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은

이후 우리역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먼저, 고구려가 당태종을 이긴 것은

중국 동북방 민족들에게 고구려가 당태종보다도 더 강하다는 사실을 각인 시켰고

그 다음, 당태종이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거짓말 한 것은

이후에 사기가 사실처럼 둔갑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첫째,

고구려가 당태종을 이김으로써

몽골족의 원나라는 우리민족을 엄청난 민족으로 우대하여

아세아 및 동부 유럽에서 유일하게 멸망시키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그 다음에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해서도

자기들이 군사적으로 침략한 나라는 다 멸망시켰지만

조선은 유일하게 멸망시키지 않았다.

 

이것이 다 고구려가 당태종을 꺾은 결과이며 중국의 동북방민족들이

우리민족을 강대한 민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둘째,

당태종이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거짓말한 영향은

송나라에 이어 원나라에도 그대로 전해져

원사 지리지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송나라로부터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유학의 영향으로

고려의 유학자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대표적으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원나라 시대에는 만권당 출신의 유학자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풍조는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아방강역고,

해동역사(지리지 부록분, 한치윤의 조카 한진서가 씀) 등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것을 일제 식민사가들이 더욱 사실처럼 포장하고,

그 이후에 식민사관에 앞장 선 대한민국의 사학자들이 분별없이 받아들인 결과이다.

 

 

 

 

 

Posted by 띨빡